발행자명 강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지명 인문과학논집
권 9
호 1
출판일 2000.
사회비판과 서정성
김승윤
강남대 교수
2-319-0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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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가 본래 노래 곡조에 붙인 노랫말이었다고 할 때, 시의 이해에 있어 그 음상(音相) 혹은 음악성의 향수는 막중한 중요성을 갖는다. 이 음악성이란 말에 우리는 운율, 리듬, 호음조(好音調), 말놀이 등이 자아내는 효과 일체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브래디(Brady)는 음악이야말로 서정시의 토대이며, 〈간결성, 극적 구조, 개인적인 토로, 압운의 규칙성 등이 서정시의 토대 속에 고유하게 내재해있는 특징〉(5)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정시가 전통적으로 찬양의 주제와 비정치적 주제를 표현해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서정성을 사회비판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서정시의 전통적 성격에 비춰볼 때, 큰 효험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1930년대라는 집 없고 길 막힌 시대의 고뇌에 충실하려 했던 오든(W. H. Auden)의 〈사회시〉 혹은 〈정치시〉에 거듭 나타나는 서정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서정성이 오든의 〈사회시〉의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이유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자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
오든은 1930년대의 영국 시단에 등장해서 청신한 이디엄과 리듬 그리고 정치적 주제로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시인이다. 그러나 정치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이 그가 빼어난 서정시인이기도 하다는 그의 일면을 가려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든이 정치시인이라는 점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도, 그의 정치의식은 정치적인 명분에의 직접적인 공감보다는 풍부한 삶에 대한 갈구의 연장선상에서 얻어지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오든의 시는 소리와 뜻, 음률성과 의미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살이를 노래한다. 그는 리듬을 위시한 기초적 음악성의 확보에도 세심히 배려했고, 판에 박힌 증오 유발적인 상투어구도 절제한 편이었다. 오든의 시 가운데는 음률적 효과가 높은 음악성 지향의 명편들이 수두룩하다. 오든 시의 서정성에 대한 본 연구를 통해서 통속적 상상력이 마련한 고정된 오든 상을 조금은 수정시킬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시의 음악에 대한 엘리엇(Eliot)의 말에서 오든의 시의 서정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겠다.
… 시는 우리가 사용하고 듣는 일상어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 … 시의 음악은 시의 의미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시가 산문의 리듬으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을 전달하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끼리 주고 받는 말의 형식일 수밖에 없다. 시를 노래로 부를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노래하기는 또한 말하기이기 때문이다. … 시의 음악은 당대의 일상어 속에 잠재해있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시인이 살고 있는 곳의 일상어 속에 잠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Eliot, 29-31)
엘리엇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적절한 시어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필자는 엘리엇의 견해를 오든의 견해와 비교해서 오든의 시어에 대한 기본 원리를 밝히려 한다. 시어에 대한 오든의 기본 원리는 엘리엇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인은 진실을 말하길 원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길 원한다. 그가 말하는 진실이 어떤 류의 것이고, 그가 어떤 종류의 친구를 가지고 있는 가는 한편으로는 전반적인 사회상황에 달려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영위하는 삶의 종류에 좌우된다. 시인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 그가 자신의 주변에서 보는 것들이 그의 청중의 경우와 마찬가지이고 그리고 그 청중이 대단히 일반적인 청중일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유별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언어는 정직한 언어가 될 것이고, 일상어에 가까워질 것이다.(The English Auden. 363)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오든은 일상어로부터 지나치게 벗어나지 않은 시어를 원한다. 그러나 오든은 또한 그의 사회에 관계된 시, 독자들을 소외시키지 않는 시, 엘리트주의를 조성하지 않는 시에 관심이 있으며, 특정의 선택된 집단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엘리엇의 언어는 대부분 단순하다. 그러나 난해한 이미지와 개념들을 의도적으로 병치시키고, 박식한 이들 말고는 알 수 없는 인유를 내장하고 있는 글쓰기 스타일 때문에 그는 비평가들로부터 힐난을 받기도 했다. 1930년대의 오든의 초기시 또한 난해하여서 독자들을 〈닭 쫓던 개 격〉으로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진술되어 있는 그의 의도는 특정한 혹은 선택된 청중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이같이 말하는 것은 오든의 시의 난해성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든 스스로 대규모의 청중들과 의사를 소통하고 그들에게 특별한 전언을 전달하는데 관심이 있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오든의 최대 관심사는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줄, 일종의 양심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그 점에 대해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호가트(R. Hoggart)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든은 〈시인이 오늘날 할 수 있는 전부는 경고하는 것이다〉라는 오웬의 말에 찬성을 표했다. 그는 〈경고〉라는 말을 상당히 폭넓게 이해한다. 그의 부단한 논평과 분석과 평가는 긴박감, 위기의식, 책임감에 의해, 그리고 사회개선의 열망에 의해 고취된다… 이같은 마음가짐을 가진 자는 결코 예술을 그 자체로 목표로 여길 것 같지 않다.(97)
이와 같이 기술된 시인이라면, 그는 가장 넓은 의미의 〈전달〉에 관심이 있는 시인이고, 사회에서 선택된 특정의 소수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거창한 사회적 진술을 제시하기보다는 독자들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인이다. 엘리엇과 비교해볼 때, 오든은 개인적인 의식을 통해서 공적인 변화를 꾀한다. 필자가 오든의 1930년대의 초기시에서의 서정성의 활용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이와 같은 오든이 가진 엘리엇과 다른 차별성을 염두에 두면서부터다.
옥스포드대학 시학교수 취임연설인 「창작, 인식, 판단」("Making, Knowing and Judging")이란 글에서 오든은 음악과 시와의 관계를 매우 전문적인 용어를 동원해서 인정한다.
가령 나는 알고 있다. 당장, 정확히 무어라 말할 순 없지만, 음악을 들음으로써, 시를 짓는 법에 대해 상당히 많이 배웠고, 토운과 템포와 리듬의 변화를 통해서 다양성과 대조를 얻는 법을 배웠다.(The Dyer's Hand. 51-52)
이와 같은 진술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오든의 작시법이 음악에 의해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래서 우리는 오든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바처럼, 그의 작품의 도처에서 주도면밀한 형식과 서정적 어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압운, 보격, 스탠쟈 형식과 같은 것들은 노예와 같다. 그들의 주인이 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공명정대하고 그들의 존경을 받을 만큼 한결같다면, 결과는 행복한 집안이다. 그가 너무 독재적일 때 그들은 주의를 준다. 그가 권위를 결하고 있으면 그들은 단정하지 못하고, 버릇없고 술 취하고 부정직해진다. (The Dyer's Hand. 22)
정형의 작시법 기교를 잘 다루는 것이 시에 대해 미칠 수 있는 효과에 대한 오든의 각별한 인식과 서정적 경향은 그의 에세이들 속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생각들을 시 자체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며, 그가 실제로 성취하는 결과인 것이다.
오든의 많은 작품들에는 공적인 세계와 사적인 세계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하디(B. Hardy)는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30년대의 정치시, 비정치시에서 사적인 고통과 광증, 그리고 사회적인 고통과 광증 사이에 관계가 이뤄질 뿐 만 아니라 기쁨과 욕망, 사랑, 탐닉의 사적 감정과 사회적 감정 사이에도 관계가 이뤄진다. (95)
이와 같은 일반적인 진술은 서정적인 작품을 포함해서 오든의 시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인간상황을 사회적 상황에 관련시키려는 시도이다. 오든은 자신이 요구하는 사회적 변화가 개인적인 변화에서 시작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도할 때, 그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오든의 사치 속에 존재하는 임박한 위협과 위험감은 또한 이와 같은 관심에 관련되어 있다. 무너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사회에 대해서 오든은 흔히 사회적 변화의 필요성을 표현하고, 이 변화는 격렬한 흑은 심지어 혁명적인 수단에 의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표현한다.
영국의 재생이 혼란과 파국을 통해 와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와같은 생각은 때로 혼란과 파국이 강조되기도 하고, 때로는 재생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1930년대 예술의 토대였다.(The Thirties, 8)
그래서, 오든과 다른 많은 젊은 작가들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막중한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보았고, 개인은 훨씬 더 넓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요소들을 염두에 둘 때(오든의 그의 청중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망,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 사이의 경계를 줄이고 싶은 마음, 사회에서의 임박한 위기감 등) 우리는 엘리엇의 서정성과 오든의 서정성 사이의 한 중요한 차이점에 다다르게 된다. 엘리엇은 과거의 문학으로부터 서정성을 빌어온다. 그런 다음, 그것을 그가 느끼기에 그의 사회가 결하고 있는 것을 명확히 예증하기 위해, 현재의 사회 속에서 서정성으로 통하는 것과 그것을 통합시킨다. 오든은 엘리엇보다 대략 10년 뒤에 자신의 사회에 대해 말하기 위해 엘리엇과는 다른 서정적 접근법을 이용한다. 시몬스(J. Symons)의 설명대로, 1930년대의 많은 시인들은 그들 시대에 존재하는 새로운 혁명적인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세련된 감수성에 충격을 주려 시도했다.〉(11-12) 멘델슨(E. Mendelson)은 그와 같은 시도의 하나로 30년대 시인들이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기 위해 현재에 접근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고 지적한다. 삶이 통일되어 있고, 확실한 위계가 있는 잃어버린 환상 속의 에덴을 되찾으려 하는 것은 오든과 같은 사회적 시인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였을 것이다.(W. H. Auden : Selected Poems, 머리말, ix) 오든은 자신의 서정시에서 엘리엇의 경우처럼, 과거와 현재의 통합, 무시간과 유시간의 통합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개인의 변화가 보다 중요한 공적인 변화를 야기할거란 기대를 가지고, 당대의 사회적 삶을 당대의 개인적 삶과 관련 시키려 한다. 사회적 영역과 개인적 영역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트(G. T. Wright)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오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당장의 개인적 상황으로부터 보다 일반적인 상황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개인적인 상황을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이르기 위한 한 방법으로 사용한다.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무수한 개개 항목들 속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원리와 일반적인 진실과 패턴을 분별해낸다.(71)
오든의 통일성에 대한 탐색은 그의 현재에 확고하게 뿌리를 박고 있다. 엘리엇과는 달리 그 과거란 그의 세계의 현재 상태를 더 이상 개선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낡은사회체제는 실패작이었고, 영국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파멸만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문학에서든, 삶에서든, 과거는 오든과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더 이상 어떤 실용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 오든이 그와 같은 혁명적이고, 흔히 급진적인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정성을 선택한 것은 다소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으로 서정성하면, 부드럽거나 음악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서정시의 주제는 즐겁고, 찬미조였다. 따라서 서정시는 혁명적이며, 급진적인 정치적인 의견을 기술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 같아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같은 류의 시가 가지는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유려한 특질은 1930년대의 사회적 불안 가운데서 오든이 그렇게도 얻으려고 애쓰는 사회와 개인의 건강과 일치를 환기시킬 수 있는 놀랍게도 효과적인 형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든의 초기시 가운데 한 편인 「방랑자」 ("The Wanderer")는 오든이 사용하는 기본적인 시의 개념과 기교를 예시해주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이 시의 첫행 "Doom is dark and deeper than any sea- dingle"(운명은 어둡고, 어떤 바다 골짜기보다 더 깊다)에서부터 오든의 시에 미친 앵글로색슨 시의 영향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묵중한 리듬과 박자, 두드러진 두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첫 행의 묵중한 리듬은 불길하거나 숙명적인 어조를 확립해 주어서, 이 시의 나머지 다른 부분들에 대한 분위기를 결정해준다. 이 시 전체에 걸쳐서 각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엄숙한 분위기를 증가시키며, 이 시에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한 목소리를 더욱 더 부가해준다. 이 시에 나타나는 각운은 'trees,' 'sea,' 'home,' 'welcome,' 그리고 'stain,' 'certain'의 경우처럼 대단히 미약하다. 그러나 오든은 유사한 구조를 가진 어구들을 쓰고, 두운과 모음운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각운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형식에 대한 제어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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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햇빛을 바라는 꽃들이 나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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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며, 숲의 나무들을 지나간다.
마르지 않는 바다를 건너, 낯선 사람들에게 낯선이 되어...
돌을 찾아 다니는, 편안하지 않은 한 마리 새로서 간다.
?* * *
적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그를 구하라,
모퉁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호랑이로부터 그를 구하라;
그의 집을 보호하라.
손꼽아 기다리는, 그의 근심에 싸인 집을
벼락으로부터 보호하라,
얼룩처럼 번지는 점진적인 폐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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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spring, day-wishing flowers appe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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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 place-keepers, through forest trees,
A stranger to strangers over untried sea,...
A bird stone-haunting, an unquiet bird.
?* * *
Save him from hostile capture,
From sudden tiger's leap at corner;
Protect his house,
His anxious house where days are counted
From thunderbolt protect,
From gradual ruin spreading like a stain…(Collected Poems.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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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 시의 원문 부분에서 볼 수 있는, 반복과 유사한 소리와 구조들은 전략적으로 마련된 몇 개의 중간휴지(caesura)와 함께, 시행들이 지나치게 산문처럼 되는 것을 막아주고, 지나치게 탈서정적이 되는 것을 막아줌으로써, 형식을 유지한다. 이와 같은 기교는 또한 이 시의 첫 행에서 확립된 묵중한 박자의 울림에 의존하여, 리듬을 유지하는 한편으로, 이 시 전체의 부드러운 흐름을 지탱해준다.
『웅변가들』(The Orotors)의 「에필로그」("Epilogue")란 시의 종결부에서 유사한 효과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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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당신을 찾고 있소」-- 청취자가 공포에게 말했다.
그가 그들을 거기 두고 떠날 때, 그가 그들을 거기 두고 떠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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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re looking for you' -- said hearer to horror,
As he left them there, as he left them there.(Collected Poems.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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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행에서 "As he left them there"의 되풀이는 「방랑자」에서 "Doom is dark"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종류의 불길한 리듬으로 이 시를 끝맺게 해준다. 물론 되풀이가 소재의 밀도에는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음률적 효과는 고조시킨다. 그것은 거의 불길한 예감의 메아리처럼 들리며, 〈그들〉이 당신을 찾고 있으며, 〈그대 뒤에서 빠른 속도로 그 인물이 부드럽게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는 홀로 남아서 이 임박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방랑자」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든은 또한 자신의 사회 속에서 느끼는 절박한 위험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서정시체의 리듬을 솜씨있게 다룬다. 이 시에서 리듬은 대부분의 중세시의 불완전 행들 속에 고유하게 들어있는, 묵중하고 규칙적인 리듬에 거의 가깝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서 운명의 묵중한 느낌을 한층 고양시킨다. 위의 두 시의 경우에서 우리는 오든이 한 인물 혹은 한 목소리의 단일한 혹은 개인적인 경험을 취하여, 그 경험을 그의 시의 울타리 안에서 하나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다시 「방랑자」로 돌아와서, 제2연에서는 모음운과 두운이 두드러지게 증가되었고, 그 결과로 서정적 어조의 변화가 생기게 된다 14행부터 20행까지 f, w, s, m, n과 같은 음소를 오든이 빈번히 되풀이하는 것은, 그 구절에 평온한 음질을 부여해주며, 물론 이 시 전체를 서정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14행부터 20행 사이에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유려한 소리는 이 시의 다른 두 연에서 보다도 더 두드러진다. 부드럽고 상냥한 소리를 강화함으로써, 방랑자의 기쁨을 독자에게 실감나게 전해 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방랑자의 아내와 집에 대한 회상을 기술하기 위한 의도로 마련된 모음운과 치찰음 소리는 그 방랑자가 자신의 몽상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즐거운 그리고 꿈과 같은 느낌을 실제로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기교는 이 구절을 다른 구절과는 다른 구성, 내용, 어조에 의해서 이 시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반대로,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둘째 연은 이 시에서 또한 〈적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그를 구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되는 제3연에서 뒤따르는 불안과 에너지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시의 제3연은 또 하나의 어조의 변화, 즉 오든의 시대에 대단히 널리 퍼졌던 임박한 위험에 대한 의식을 전달해준다. 중간휴지의 사용이 눈에 띠게 줄어들었고, 대부분의 시행 속에 구두점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 시행들로 하여금 빠른 속도의 흐름을 갖게 하고, 거의 〈구의 걸치기〉의 수준에 가깝다. 이와 같은 기교는 시행의 속도가 증가됨에 따라 자연적으로 긴박감을 만들어낸다. 마지막 2행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시행의 속도를 다시금 늦추게 하는 중간휴지를 보게 된다. 이것은 또한 리듬의 변화와 함께, 이 시에서 하나의 변화가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준다. 파셀(P. Fussell)은 〈의미심장한 중간휴지의 위치〉는 〈교묘한 운율적인 장치〉로 사용될 수 있으며, 리듬과 보격에 있어서의 변화가 결과적으로 생길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리듬의 뜻밖의 반전은 …흔히 발견이나 계몽과 같은 갑작스런 변화를 암시한다. 혹은 새로운 사고의 방향, 새로운 토운의 목소리, 혹은 시적 연설의 변화 혹은 강화를 의미한다.(23, 25)
파셀의 지적대로 종결부에서의 갑작스런 리듬의 변화는, 토운의 변화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고의 방향을 나타내준다. 방랑자가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생각, 그리고 보다 낙관적인 어조로 전달되는 새로운 날과 새로운 삶에 대한 함축을 나타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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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수를 확실한 수로 고치고,
기쁨을, 그가 돌아오는 날을 가져 오라,
다가서는 새벽으로 행복한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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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ting number from vague to certain,
Bring joy, bring day of his returning,
Lucky with day approaching, with leaning dawn.
(Collected Peoms.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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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해서 말하면, 필요한 변형이 일어난 후에 있게 될, 그의 사회에서의 새로운 날과 다른 종류의 삶에 대한 오든의 기대가 이 종결부에 적극 반영되어 있다. 〈적의 포로로 붙잡힘〉과 〈갑작스런 호랑이의 뛰쳐나옴〉은 오든이 자신의 세계에서 느끼는 임박한 파멸과 위험의식을 뜻하는 것이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아마도 일어날거라는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쇠퇴해 가는 사회의 재생을 위해, 차례차례 일어나야 하는 불가피한 혼란과 파국은, 그의 세계를 변하게 할 것이고, 그러므로 방랑자는 「에필로그」란 시에서 〈뒤틀린 나무 숲 속의 환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이 시에서 오든이 서정성을 교묘하게 잘 다룸으로써, 집을 떠나 탐색여행에 나서는 방랑자, 외로운 남자의 전통적인 이야기를 철저히 추방해버린다. 자신의 집과 가족들, 그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그 고독한 남자라는 인물은 하시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모호하지만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는 세력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그의 집과 낡은 삶의 방식은 꿈처럼 되고, 그의 상황의 변화에 대한 기대는 미래에 다른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기대 속에 있을 뿐이다. 비록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게 될 것인가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든이 이 시에서 드러내는 이와 같은 두드러진 주제들은 그의 사회의 현실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위협은 점증하는 파시즘의 위협을 의미할 수 있고, 오든과 그의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생각하는 구 사회질서의 불가피한 몰락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또한 그의 작품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오든 시의 또 다른 특징을 예시해주기도 한다. 오든은 자신의 사회비판의 시에서 거듭 서정성을 활용한다. 그러나 그는 거의 일관되게 그가 시에서 확립하는 서정성을 붕괴시키고, 그가 창조해낸 유려한 리듬과 음악적인 어조를 산산이 부수어 버린다. 이 시에서 오든이 낱말과 운율을 잘 통어해서 마무르는 능력은 매우 부드럽고 듣기 좋은 것으로부터 묵중하고 불길한 그리고 빠르고 불안한 리듬에 이르는 서정적인 리듬을 창조해내고, 이 모든 것들은 이 시의 무드와 토운을 향상시켜주고, 차례로 그것은 그의 사회에 존재하는 정서를 반영한다. 오든은 그 외로운 방랑자의 경험을 변화시켜서, 그의 시대의 사회적 경험을 포괄할 수 있게 하고, 전통적인 서정시를 통해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관련시키고, 그러나 2연에서 3연에 이르기까지, 심하게 삐걱거리는 어조의 급작스런 변화는 이 시의 주제에 대한 어떤 단순한 해석도 훼손시킨다. 시인으로서 오든이 가지는 힘의 대부분은 운율법에 대한 통달에 있는 것이다. 리듬과 스탠쟈와 어조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이른바, 〈노예들〉에 대해 주인 노릇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시인이라면, 자신의 서정성이 그렇게 일관되게 떨어져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한 시의 서정적 어조에 있어 분명한 변화나 붕괴가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분열을 가지고, 특정한 효과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오든의 의식적인 의도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앞에서 읽은 오든의 시는 하나의 새로운 사회체제를 일으키기 위한 특별한 행동노선의 필요성에 대한 오든의 믿음으로 읽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든의 서정성의 변화하는 어조들은 그런 산뜻한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든의 입장은 훨씬 더 복잡하고 불안정한 것이다. 삶의 복잡성과 현실의 중층성과 인간의 다양성의 인지를 시인하는 오든의 표정을 엿볼 수 있다.
시집 『보라, 길손이여』(Look, Stranger!, 1936)의 표제시 「보라, 길손이여」("Look, Stranger!")란 시는 「방랑자」와 유사한 시적 패턴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서정성의 형식에 있어 좀더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7행으로 된 3개의 연에서 토운과 리듬이 시종 한결같다. 이 시에서 독자에게 주제의 변화나 무드의 변화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주로 시행들에 내장되어 있는 내용이다. 사실, 「보라, 길손이여」 에서 리듬과 모음운이 면밀하게 정리ㆍ배열되어서 너무도 선율적이고 유려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되는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깨닫지 못한다. 그 점에 대해 「글쓰기」("Writing")란 글에서 다음의 오든의 말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은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사람들이 내게 날씨에 관해 얘기를 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이 딴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낀다. 상징주의자의 시적 이상에 가까운 유일한 종류의 말은 정중한 티 테이블에서의 대화이다. 그 대화에서 주고받는 평범한 사실들의 의미는 거의 전적으로 목소리의 억양에 좌우된다.(The dyer's Hand. 26)
오든의 추론을 뒤집어 말하면, 억양이 평범한 주제로부터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 시의 실제 내용은 「보라, 길손이여」에서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조가 시 전체에 걸쳐서 한결같이 평온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관된 어조와 함께, 오든의 시에서 형식은 전체적인 의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의 구실을 한다. 제1연에서부터 우리는 능란한 기교가로서의 오든의 면모를 쉽게 감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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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길손이여, 이제 약동하는 햇빛이
그대를 즐겁게 하며 비치는 이 섬에서,
여기 지그시 밟고 서서,
침묵하라,
귓속으로
일렁이는 바닷소리가
강물처럼 흘러 들어오도록…(김종길.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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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 stranger, at this island now
The leaping light for your delight discovers,
Stand stable here
And silent be,
That through the channels of the ear
May wander like a river
The swaying sound of the sea…(Collected Poems. 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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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든이 두운과 모음운과 각운을 빈번히 쓰는 것은, 이 시에, 서정적인 특징을 부여해 준다. 주도면밀하게 짜여진 형식 뿐만 아니라, 각운 패턴은 정형의 패턴은 아니지만, 세 개의 연에 걸쳐 줄곧 유지된다. (abcdcbd) 우리가 시를 읽어나갈 때, 마치 대양에서의 바닷물의 흐름처럼, 시행들이 유려한 흐름을 갖는 방식으로, 각운이 이 시를 한데 결합시킨다. 다양한 시행의 길이 또한 물결이 치는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한다. 짧은 시행과 긴 시행을 번갈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좌우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두운은 "leaping light," "Stand stable here/And silent be," "Swaying sound of the sea," "Far off like floating seeds the shops"에서와 같이 치찰음이거나 평온한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부드럽게 흐르는 대양의 파도소리를 흉내내고 강화시키는 것이다.
제1연에서의 평온한 소리에 젖어 있다가 제2연의 한복판에 있는 "pluck"과 "knock"라는 매우 딱딱한 두운을 발견하게 되면, 어느 정도 놀라게 된다. 여기서 다시 오든은 이 시의 이미 확립된 어조에 하나의 파열을 도입한다. 그가 이미 창조해낸 전체적인 인상과 미묘하게 틀어지는 이와 같은 거의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불일치는 맨 먼저 다음에 이어지는 시행들에서의 다가오는 변화에 우리의 주의를 두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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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흙 벼랑이 바다로 떨어지고, 그 높은 언저리가
당겼다간 부딪치는 조수를
버티어서고,
조약돌이, 빨아들이는 물결을 따라
앞을 다투며, 갈매기가 잠시
그 깎아 세운 모서리에 앉는 데에서.(김종길.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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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halk wall falls to the foam, and its tall ledges
Oppose the pluck
And knock of the tide,
And the shingle scrambles after the sucking surf,
and the gull lodges
A moment on its sheer side.(Collected Poems.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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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백악의 암벽을 조수의 〈당김과 부딪침〉과 대조시키면서, 조수로 표상되는 어떤 힘에 대한 저항이 나타난다. "sucking"이라는 단어 속에 일부러 행간 휴지를 넣은 것은 시행들의 느린 속도를 느리게 하고, 이 단어를 이 시의 나머지 부분이 갖고 있는 제약받지 않은 유려한 방식으로 발음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이와 같은 기교는 어색하지만 강조된 효과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 시행의 속도에 있어서의 변화는 해안으로부터 서서히 밀려가는 빨아들이는 조수의 움직임과 대비를 이룬다.
이 시의 평온하고 음악적인 소리는 위 인용 대목의 내용이 독자들에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스며들 수 있게 해준다. 〈빨아들이는 물결〉은 몰래 접근해오는 어떤 미지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 같다. 백악의 절벽의 반대되는 입장이란 걸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존재는 아니고, 해안의 자갈돌에 대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휩쓸어갈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서를 보충하기 위해서, 다른 두 연과 마찬가지로 서정적인 마지막 연은 그 형식에 의해 제시되는 이같은 평화와 평안이 단지 덧없는 혹은 일시적인 것으로 드러나며, 구름이 내래이터에 대해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 속에서만 움직인다. 이 시의 부드러운 서정성에서 뿐 만 아니라, 바다의 이미지들 속에서 환기된 평화는 실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멘델슨은 이 시를 두고 말하길, 〈하나의 인식이론과 그 윤리적 결과들〉(339)을 예시해주는 시라 한다. 이 시 전반에 걸쳐서, 내래이터의 비젼과 사고과정이 바다의 움직임을 흉내내고 있다. 화자가 보는 구름은 항구의 거울 같은 물 속에 비친 그림자들이고, 물속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인 하나의 기억이다. 멘델슨은 계속해서 주장한다. 이 섬에서 〈소리와 이미지는 기억 속에서 움직이고, 그러나 아무런 다른 효과도 가져오지 못한다.〉(339) 그저 지켜만 보고, 어떤 결정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하며, 이 때에, 수수방관하고 앉아서 사건들이 제멋대로 일어나게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수동적인 자세는 오든이 요구하는 사회적, 개인적 변화를 가져 올 행동루트가 아닌 것이다.
이 시가 내장하고 있는 부드럽고 따듯한 서정성은 〈긴급한 자발적인 용무가 있어〉세계로 항해해 나가는 적극적인 배들과는 달리,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실제적인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하나의 기억에 불과하거나,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불과한 그런 평화와 평온감을 확립 시켜준다. 「보라, 길손이여」가 가진 서정성은 오든이 자신의 사회에서 쓸모 없고, 아마도 위험하기조차 한 것으로 제시하는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든과 동시대 시인이었던 맥니스가 오든에게 말하는 바처럼, 〈어느 한 쪽으로 편을 드는 것은 고약한 취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심미가의 무관심보다는 더 활기있는 습관이다.〉(11) 레플로글도 이에 재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든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철학적 전제는, 인간은 환경을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인간의 행동의 가치는 그 행동의 결과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물리적 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자기 밖의 외계를 지배하는 법을 배움으로써만, 인간은 자유로와 질 수 있고, 그 외부세계를 지배하고 변화시킴으로써만 그는 또한 그 치계의 거주자들의 성품을 변화 시킬 수 있다. (136)
이와 같은 종류의 개인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기에, 오든이 이 시에서 묘사하는, 수동적인 인식을 당면한 사회적 상황에 대해 전혀 무익하고 심지어 위험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든이 표명한 행동에의 요구에 대한 레플로글의 견해가 옳은 것이면서, 한편으로, 이 시에서 기술되는 수동적인 태도를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라고 쉽게 일축해버릴 수도 없다. 이 같은 종류의 인식은 또한 불가피하게 유혹적인 성격을 가지며, 즉, 사회적 혁명을 위해 싸우는 것 보다, 바닷가에서 배를 지켜보는 것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오든의 확신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노골적인 갈등은 진기한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또한 그것은 그의 서정성의 빈번한 붕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시의 중간 부분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작은 불일치는 이 시 전체가 지닌 안정 뿐 만 아니라, 이 시의 부드러운 이완된 어조를 흔들어놓는다. 여기에서 서정성은 오든이 그의 장소와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는 개인의 행위를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그는 한 개인의 행위가 어떻게 훨씬 더 큰 사회적 차원에서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어떻게 사회적 삶과 개인적 삶이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기술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빈번한 분열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주창하는 행동의 코스가 오든이 우리들에게 믿게 할 수 있을 만큼 단순치 않다는 사실을 지적해주는 것 같다.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한데 결합시키는 것은 처음에 보이는 것만큼, 부드러운 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해주는 것 같다.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 사이의 엄한 경계를 흐리게 하기 위한 오든의 탐색을 계속 더 추적해가다 보면, 우리는 개인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는 그의 서정시들이 불가피하게 이와 똑같은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오든에게 개인적인 사랑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인간이 우리들에게 결코 단순한 행복을 허용해주지 않는,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이중적 견해를 갖고 있다고 오든은 생각한다. 호가트는 이 점에 대해서 〈행동하고, 그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는〉(105) 이중인격의 비애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와 같은 정서가 『보라, 길손이여』에 실려있는 「오월은 경쾌한 동작으로」("May with its light behaving")라는 음악적인 시에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 시는 봄철에 느끼는 정서인 경쾌함, 재생, 사랑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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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경쾌한 동작으로,
혈관, 눈, 팔다리를 움직이게 한다.
슬픔에 잠긴 외톨이들은
기꺼이 기운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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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with its light behaving
Stirs vessel, eye and limb,
The singular and sad
Are willing to recover.(Collected Poemas.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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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든은 곧 이 단순한 개념을, 우리의 의식이, 어린이들의 순진무구함과 동물들의 무감각에 주어지는 맹목적인 사랑의 즐김을 우리에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시인과 대비 시킨다. 성숙한 어른으로서 우리는 우리에게 사랑을 위해 사랑하는 단순한 즐거움 혹은 우리의 존재상태를 단순히 즐기는 그런 즐거움을 허용해주지 않는 인식의 위험한 사과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 시의 종결부에서 오든의 믿음은 강렬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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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와 노루를 조바심나게 하고,
금발의 미인을 흑인 곁에 눕게 하는 사랑이
우리의 피를 강력히 몰아간다.
악과 선 앞에서
애무하고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부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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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love that makes impatient
Tortoise and roe, that lays
The blonde beside the dark,
Urges upon our blood,
Before the evil and the good
How insufficient is
Touch, endearment, look.(Collected. Poems.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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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회 속에 있는 오든에게 불충분한 것이 된다. 〈애무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자신을 충분히 실현시킬 수 없으며, 또한 그의 관심사인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오든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그와 같은 개인적인 사랑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사랑을 제시할 뿐이다. 그가 좀 더 뒤에 가서 「1937년 스페인」("Spain 1937")에서 밝힌 바처럼, 그의 사회는 〈내일 낭만적인 사랑의 재발견〉이 가능할 테지만, 〈그러나 오늘은 투쟁〉해야 하는 사회이다. 앞으로 언제인가 개인적인 사랑을 완전히 즐기고, 그에 몰두할 만한 시간이 있을 거라고 오든은 주장한다. 그러나 보다 긴급한 사회적 문제들이 당장 인류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사회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함께 결속할 때이다. 그러나 오든이 올바른 행위라고 주장하는 바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이고, 사회적으로 무용하다고 기술하는 사랑은 또한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매혹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안락하고 호사스러운 개인적인 사랑으로의 도피는 특히 불안한 사회의 소란과 공포 속에서, 그들이 아무리 강력하게 보다 큰 사회적 사랑을 갈망하는데 이의를 제기할지라도, 부인할 수 없이 개인에게는 매혹적인 것이다. 호가트의 〈이중인격〉의 개념을 확대시켜보자면, 오든은 자신의 시에서 특정의 행동양식을 주장하고, 그런 다음 의식적이든 아니든, 바로 그와 같은 행동 혹은 확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다.
『보라, 길손이여』에 실려있는 또 한편의 시 「사랑하는 이여, 밤은 갔지만」("Dear, though the night is gone")에서 오든은 1930년대에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 사이의 관계를 실증하기 위해, 이전 시와는 좀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의 흔들리는 사회적 확신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 특정한 시 한편에 내장되어 있는 서정성은 오든이 자신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똑같은 효과를 반영하기 위한 시도로, 제시하고 싶어하는 안개 자욱한 어조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도움이 된다. 제1연은 매우 부드럽고 진정시키는 어조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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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여, 밤은 지나갔으나
아직도 꿈은 마음 속에 낭아 있구려
우리는 한 방에 들어갔었지
기차 정거장처럼 으슥하고 높은 곳
어둑한 곳, 사람이 붐빈 곳에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훨씬 구석에 있는
그 하나를 얻었었지.(범대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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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though the night is gone,
Its dream still haunts to- day,
That brought us to a room
Cavernous, lofty as
A railway terminus,
And crowded in that gloom
Were beds, and we in one
In a far comer lay.(Collected Poems.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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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어인 "Dear" 는 금방, 이 시의 대부분에 충만하게 스며들어 있는, 개인적이고 친근한 분위기를 확립해준다. 이 첫 연에는 2개의 〈중간휴지〉가 1, 4, 7 행에 각각 혼재해 있어서, 일상어의 억양을 부여해주고 있으며, 그런데 이것은 사회적 시인으로서의 오든에게 중요한 것이다. 파셀은 그와 같은 중간휴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중간휴지는 흔히 구두점으로 표시되며, 악절과 악절 사이의 쉼표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대단히 엄격한 보격에 구어의 변칙의 박자를 부여해 주는 장치로 사용되기도 한다.(23, 25)
제1행에서 "Dear" 바로 뒤에 나오는 중간휴지는, 바로 그 단어를 강조해주는 것이며, 그러므로, 개인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2개의 중간휴지는 해당 구절에 격의없는 친밀한 대화의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전략적으로 마련해놓은 중간휴지들은 이 시에 일상어의 억양을 부여해주며, 또한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서정적인 소리를 유지해준다.
마지막 연은 이 시에 새로운 어조를 도입한다. 〈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죄책감의 벌레〉로 시작되는, 마지막 연은 배신의 두려움, 혹은 심지어, 다가오고 있는, 우리를 제물로 만드는 힘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코머에 의해서 만들어진, "submisive"의 시각적 청각적 소외는 이 시의 종결부에 화자의 패배와 열등감의 무게를 실어준다. 이 서정시에서, 특히, 마지막 연에서 오든이 사용하는 모호한 용어들은 이 시에 스며들어 있는 안개 자욱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죄책감의 벌레〉와 〈사악한 의심〉과 같은 용어들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만 분명해진다. 즉, 독자인 우리는 이 오든의 특수한 어구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이와 같은 용어들의 함축적 의미를 에워싸고 있는, 아련한 정서일 뿐이다. 이 경우에 있어 그것은 침침함, 공포, 배반과 같은 것들이다. 내래이터의 개인적인 고통의 경험은 1930년대 오든의 사회에 존재하는 공포와 의심의 반영일 것이다. 이 시가 지닌 부드러운 서정성은 이 시의 내용이 가진 친밀한 어조와 짝을 이루어 서로를 돋보이게 하며, 이 작품이 지닌 듣기 좋은 호음조를 고양시킨다. 동시에 그 서정성은 정확하게 이 시에 또한 존재하고 있는 공포와 불안을 기술해 준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함께 오든으로 하여금 마지막 연에서의 내래이터의 희망이 꺾인, 슬픈 말들 속으로 교묘하게 빠져들어 갈 수 있게 해주고,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보다 폭넓은 보다 일반적인 삶의 조망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시에 있어서, 확대해서 말하면, 사회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그리고 파괴력을 잠재하고 있는 것 속으로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가가 또한 분명해진다.
이와 비슷한 분위기가 「그대의 잠자는 머리를 눕히시오, 내 사랑하는 이여」("Lay your sleeping head, my love")에서 조성된다. 「사랑하는 이여, 밤은 갔지만」의 경우처럼, 이 작품을 여는 도입부의 리듬은 조용하고, 평온하고, 나중에 붙여진 제목인 〈자장가〉에 각별히 어울린다. 첫 연은 내래이터의 자신의 애인에 대한 강렬한 사랑과 이 사랑의 밤을 외부세계로부터 캡슐에 싸서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를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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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이 틀 때까지 내 품안에
누워있으려무나, 살아있는 육신의 여인아,
죽음을 면할 수 없고, 죄많은 존재이지만,
그러나 내겐 너무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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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in my arms till break of day
Let the living creature lie,
Mortal, guilty, but to me
The entirely beautiful.(Collected Poems.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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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순간은 내래이터 자신이 깨닫고 있는 바와 같이 본래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혼란과 위험으로부터 절연되어 있다. 〈유행을 쫓는 미친 자들〉이 〈그들의 현학적인 지루한 외침〉을 치치는 것으로 오든이 기술하는 세계이고, 〈모든 공포의 카드들이 예언하는 대로, 대가가 치러질〉그런 세계에서, 이 시에서 창조되고, 서정성에 의해 강화되는, 그 연인들의 만남의 고양이 이 시에 나오는 〈아이〉처럼, 덧없이 된다. 호가트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경험은 … 사회환경에 관련되어 있다 … 그래서, 이 시가 사랑의 밤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밤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혼란으로부터 낚아챈 것이라는 시인의 의식에 의해서 위험해진다.(30-31)
한 번 더 오든은 사회와 개인적인 삶, 혹은 이 경우에 있어, 개인적인 사랑 사이의 유사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사실, 호가트의 설명을 좀더 확대 부연시켜보면, 오든이 문맥 속에서 그리고 서정성을 통해서 창조해내는 아름다움은 처음에 보이는 것만큼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오든은 그의 작품의 즐거운 면들을, 그들이 불안하고 무질서한 사회 속에서 창조된 것이라는 그 자신의 자각에 의해서 위험한 것으로 만든다. 이 시에서의 캡슐 속에 넣어진 밤처럼, 서정성이 가진 호소력은 또한 그 자체로 세상의 보다 거친 현실로부터 단절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그만큼 그들의 위협적인 존재에 의해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존재하는 제3연에서 우리는 경고를 받게 되고, 그 후에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감흥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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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밤엔
속삭임 하나, 생각 하나,
키쓰 하나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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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t from this night
Not a whisper, not a thought,
Not a kiss nor look be lost.(Collected Poems.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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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행에서 평행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not"이란 단어의 위치는, 이 시의 어조를 예언적인 경고로부터 다시 서정적 리듬의 온화한 소리로 변화시킨다. (단어와 어구의 반복을 통해서) 오든은 〈이 인간의 유한한 세상이 충분하다고 느끼기〉를 바라는 마지막 소망으로 개인적인 사랑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을 확증해주는 한편의 건설적인 시편으로 보일 시를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오든은 다시금 개인적 사랑을 부인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적인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호가트의 말대로, 여기서 개인적인 경험은 사회상황에 관련되어 있다. 사랑은 개인적인 것이 우선권을 갖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사회를 개선시키는데 효과를 발할 수 있는 보다 비 개인적인 사회적 사랑에 특권을 주는 쪽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든의 서정성이 꾸미는 아름다움은 개인적인 관계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 사회에 직면할 때, 더욱 더 상처를 받기 쉬운 것으로 보인다. 오든이 개인적인 아름다움과 사랑을 상처받기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는 그의 서정성 속에 불안정한 균형을 만들어놓는다. 오든은 자신의 시에서 구축한 서정성을 또한 체계적으로 파괴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셈이다. 상당량의 그의 시가 내장하고 있는 음악적 특성은 어떤 한 특정 시편에서 매우 오랫동안 변동없이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든은 자기자신의 서정성을 손상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에 대해 결코 만족하지 않는 것 같다.
오든은 흔히 자신의 시에서 그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떠맡아야 되는 몇가지 행위의 노선들이 있다는 사실을 공언한다. 그러나 너무도 흔히 그는 곧이 곧대로의 편협한 틀림없는 사회적 안을 가진 시인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가령, 우리가 그의 많은 시에서 발견하는 개인적인 인간적 사랑에 대한 오든의 개념은 전혀 직접적인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오든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회적 혁명에 있어, 이와 같은 사랑은 전혀 아무런 실제적인 가치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바처럼, 이와 같은 똑같은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매우 유혹적이다. 오든의 시에서 상당히 빈번히 나타나는 이와 같은 종류의 예는 그의 동시대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오든이 흔히 자신의 시에서 창조하는 문제들과 경험들의 자연스런 확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적인 선을 위해 우리가 해야하는 것과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에 굴복하는 것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문제들이다. 또한 이것은 머리와 가슴 사이의 갈등 속에서 결정을 내리는 문제이다. 그것은 오든의 「밖에 잔디 침대에 누우니」("Out on the lawn I lie in bed")에서 묘사된 똑같은 시나리오이다. 이 시에서 정원에서의 편안한 삶은 적극적인 사회혁명가의 보다 거친 삶보다도 더 매력적이다. 오든이 우리들로 하여금 믿게하고 싶어하는 바와는 반대로 사회개혁과 광범위한 사회변화에로 이르는 길은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고, 따르기에 단순하지도 않다. 오든은 공적인 변화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러나 공적인 변화를 위한 산뜻하게 마련된 안이나 디자인을 언제나 복잡하게 하는 것은 개인이며, 인간적 요소이다. 대중에게 현재에 집중하도록 가르치고, 그들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하고 내일이면 그들은 보다 더 사소한 즐거움들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은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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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오늘은 투쟁.
오늘은 죽음의 기회가 꾸준히 증가하고,
절대 필요한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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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t to- day the struggle.
To-day the deliberate increase in the chances of death,
The conscious acceptance of guilt in the necessary murder.
(The English Auden.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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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든이 기술하고 권고하는 위와 같은 종류의 행동루트는 이론상으로는 유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시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바처럼 개인은 결코 어떤 단순한 직접적인 행동노선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이와 같은 분명히 진술된 주장과 의도가 아무리 타당하고, 혹은 심지어 고상할지라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대중에게 조르고 간청하게 될 것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유혹적인 카리스마와 사랑이 될 것이다. 그 독재자들의 열정적인 약속들은 인간의 욕망에 어필하기 때문이다. 중상류계층의 편한 삶이 정치적, 혹은 사회적 행동주의자의 삶보다 더 매력적인 거와 마찬가지로.
오든이 자신의 시에서 표현하는 확신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대부분의 복잡한 문제들은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행동하고 나서 그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는 호가트의 〈이중인격〉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가령, 사랑이나 우정이 제공해주는 단순한 기쁨을 그에게 결코 허용해주지 않는 오든의 이중적인 관계관은 또한 그의 시에서 겉으로 보기에 그릇된 서정성의 사용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불안한 사회에서의 개인적인 사랑의 가치 혹은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게 만드는, 그와 똑같은 이중성은 또한 그의 서정성의 통일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사랑에 대해 상류계층의 삶에 대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오든은 사회개혁을 위해서 그들이 비실용적이며 무가치함을 보게 된다. 반면,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갖는 매력과 유혹성은 어떤 행동노선을 택해야 하는가에 관한 그리고, 이와 같은 삶의 양상들이 적어도 탐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불확실성 혹은 변동성을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오든은 서정성의 사용과 불안하고 운이 다한 사회구조 속에서 그와 같은 형식을 일관되게 사용하는 것의 타당성 사이에서 동요한다.
우리가 그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든은 일관되게 그의 시행들 속에서 부드럽게 흐르는 음악적인 리듬과 소리를 창조한다. 그런데 그것은 똑같은 시 안에서 각기 정도는 다르게 이 같은 구조들을 체계적으로 해체하거나 파괴하기 위해서만이다. 행동하고 그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고 혹은 글을 쓰고, 그 글의 실제 형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그가 창조하는 응집력 있는 구조를 흔들어 놓거나 파괴하는 것과 같은 극단에까지 이르게 된다. 물론 의식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오든이 그와 같은 겉으로 보기에 잘못된 기교를 사용하는 이유를 분명히 산출해내기란 어렵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특히 한가지 사실에 주의를 모은다. 오든은 그의 시의 형식적인, 기교적인 양상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통제를 잘함으로써, 분명한 형식의 일탈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의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든이 〈리듬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이해하고 지각하는 한가지 방법〉(서우석. 11)이라는 사실을 감득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든의 시의 서정성에 있어 일어나는 현상은 그 서정성이 만들어내는 즐거운 효과 혹은 심지어 유혹적인 청각적 효과들이 사회변화, 사회혁명 혹은 사회비판을 표현하는 시에 적합한가의 문제를 지적해주는 것 같다. 이것이 이같은 유형의 시에서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만, 오든의 실제적인 이의 제기는 그 자체로, 그의 많은 시들에서 나타나는 사회개혁 설교자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그것이 처음에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엄격한 시야협착증과 확신을 갖고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리켜주는 것이다. 소망하는 바람직한 길은 오든이 좋아하는 것만큼 혹은 우리에게 믿게 하는 것만큼 직선적이고 편협한 것이 아니다. 그의 주제가 서정시의 전통적인 성격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끊임없이 서정적 구조를 만들고 파괴하는 것은 그 자신의 딜레마를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오든은 불안정한 서정적 구조를 통해서 1930년대의 전형적인 불확실성과 불안을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오든의 시에서의 서정성은 죠지왕조시대의 시인들의 정적인 서정성과는 대비되는, 역동적 서정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정적 비젼은 인간 사회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Bate. 341-42)라는 워즈워드 (W. Wordsworth)의 선언이 오든의 서정시에 구현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대의 고뇌에 충실하려 했던 오든의 시적 성취는 단단한 것이다. 서정시 전통에 충실하면서 아울러 193G년대라는 집 없고 길 막힌 자기시대에 충실했다는 점에 오든의 각별한 진정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랜 훈련과 기율과 조탁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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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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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김승윤
강남대 국제학부 영어영문전공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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