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 바둑을 보급함에 있어서의 제 문제
명지대 겸임 교수,
프로 기사, 남치형
서론
서양인들에게 바둑이 보급된 지도 벌써 40여 년이 흘렀다. 아직 많은 한국인들에게 바둑을 두는 서양인을 보는 것은 신기한 일이며, 그들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은 상태지만, 이미 상당한 수의 서양인들이 단순히 바둑을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인들 못지 않게 즐기고 있다.
서양에서의 바둑은 매우 서서히 그 세력을 넓혀 왔다. 바둑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로 결성되었던 바둑 클럽은 이제 각 나라의 바둑 협회가 되었고, 나라마다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적게는 수만에서 많게는 수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바둑을 접해 본 경험이 있으며, 그 중 약 10% 정도는 실제로 바둑을 두면서 즐기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각 국의 바둑 협회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바둑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를 위해 지난 40년 남짓 동안 꾸준히 해외 바둑 보급에 힘써 왔던 일본과 최근 10여 년 간 막대한 지원을 해 온 대만의 응창기 재단과 마찬가지의, 혹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한국 바둑계에 기대하고 있다.
사실 서양에의 바둑 보급과 관련하여서 그동안 우리나라의 노력은 일본이나 대만에 비해 매우 미흡했었다. 그러나 한국이 세계 바둑을 이끌어 나가는 나라가 되기에 충분할 만큼 바둑을 두는 사람의 숫자나 바둑 실력에 있어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한 지금, 전 세계 바둑계에 대한 기여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위 선양을 위해서도 서양에 바둑을 보급하는 일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 일을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서양에 바둑을 보급하는 일에 앞서,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이 우리보다 먼저 이 일을 시작했던 다른 나라들의 과거의 노력들을 바탕으로 그 위에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사실과, 그들의 노력이 거둔 결실이 생각만큼 화려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에, 기존의 서양 바둑계가 갖는 특성들과 그들의 요구 사항,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이루어져 왔던 기존의 바둑 보급 방식의 장점과 단점을 검토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할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검토를 통해 우리가 서양에 바둑을 보급할 때 취해야 할 태도와 방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돌리고 그것에 근거하여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서양인들은 바둑을 보급하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에게 먼저 “서양에 바둑을 보급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보급 방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면 아래와 같다.
- 프로 기사들의 방문, 프로 기전의 해외 유치
- 전 세계 바둑 룰의 통일
- 학생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보급
- 아마추어 바둑 대회의 개최
- 프로가 없는 다른 나라의 고수들이 참가할 수 있는 오픈 대회 개최
- 올림픽 종목으로서의 인증
- 체스에서와 같은 전 세계 규모의 랭킹
- 그 나라의 대중 매체의 흥미를 끌 수 있는 큰 규모의 이벤트
- 바둑을 소개하는 TV용 다큐멘터리, 혹은 영화
이 중 프로 기전의 해외 유치는 이미 바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둑을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그 나라의 대중 매체의 흥미를 유발하여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에게 바둑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또한 상금 규모가 큰 아마추어 대회나, 아마추어가 참가할 수 있는 오픈 대회도 대중 매체가 관심을 가
질 만한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대중의 관심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대중의 관심은 곧 스폰서를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둑 보급을 위해 계획하고 있는 많은 이벤트들, 혹은 그들의 바둑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많은 방안들이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이로 인해 바둑 보급이나 실력 증진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게 됨으로 해서 다시 스폰서를 얻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안들이 중시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현재 그들은 많은 활동에 있어서 동양 3국, 특히 일본과 한국의 도움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한국과 일본의 도움에만 의존해서도 안 되며, 한국과 일본으로서도 점점 부담스러워질 이러한 상황의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즉, 서양 바둑계의 자생력을 길러 주고 그들 스스로 스폰서를 찾고 행사를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도와주는 일은 결국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바둑 규칙의 통일은 직접적으로 바둑이라는 게임의 존재를 알리는 수단의 측면뿐 아니라, 바둑 보급을 위한 다른 방법들을 보다 용이하게 하는 준비 단계로서도 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바둑 규칙을 크게 나누면 중국식과 일본ㆍ한국식으로 나뉘어 지는데, 이런 차이가 바둑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대규모의 바둑 이벤트가 생겼을 때 자신들의 룰을 적용하기 위한 각 국의 분쟁이 일어날 소지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재정적인 지원은 물론이고 바둑 용품들에까지도 신경을 써 온 응창기 재단의 노력으로 많은 나라에서 중국식 계가법을 선호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바둑을 올림픽 종목의 하나로 넣고 싶어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바둑이 올림픽 종목의 하나로서 자리 매김한다면 앞서 언급한 많은 일들이 훨씬 수월하게 가능해 질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단 각 국의 협회는 정부로부터 바둑 교육과 선수 육성을 위한 지원금을 받을 수 있으며,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기에도 훨씬 수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시되고 부연 설명되어진 바와 같이, 위의 방법들은 대개 바둑을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 편중되어 있다는 특징들을 가진다. 물론 바둑을 소개하는 것은 바둑 보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일상에서 쉽게 바둑을 접할 수 있는 우리와는 달리 바둑이란 생소한 게임을 알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서양인들에게는 분명 비 일상적인 경험일 것이다. 따라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바둑 보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규모가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 매우 작은 서양 바둑계에, 일정 기간 동안은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물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둑 보급에 있어 바둑의 존재를 알리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바둑이 무엇인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바둑에 매력을 느끼고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둑 보급의 성과는 일단 바둑을 소개받은 사람들이 바둑을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인들이 바둑을 좋아하도록 만들기 위한 방법은 다음에 이어질 “어떤 점이 바둑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서양인들은 바둑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가
What is Attractive in Baduk to the Westerner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서양인들이 바둑을 좋아하게 되는 동기가 바둑이라는 동양의 문화가 그들에게 이국적인 신비감을 주기 때문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왜 바둑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이러한 막연한 생각만을 가져서는 우리 스스로 능동적으로 그들이 바둑을 좋아하게끔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이 말하는 동양의 신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밝히는 것은 따라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Each game is completely different. The regular sequences, such as Jungsuk has a limited length compared with the entire game. So theory and remembering sequences have a limited impact on an actual game. This is a major advantage compared with Chess where opening theory has a huge impact on the games you play. - John F. A. Schouten
(각각의 게임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규칙적인 수순, 예를 들어 정석과 같은 것은 전체 대국에 비하면 극히 제한된 길이만을 가질 뿐이다. 따라서 이론이나 수순의 암기는 실제 게임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포석 단계의 이론 이 실전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체스와 비교하여 바둑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 이다.)
There is no restriction to where you can play on the board. You can have a creative mind and think of your own strategies. - Jonathan Wang
(바둑 판 어디에 두어야 하는 지에 관한 어떠한 규정도 (바둑에는) 없다. 이 덕분에 우리는 창조적인 생각과 자신만의 전략을 구상할 수 있게 된다.)
역사적으로나, 확률적으로 바둑에서 서로 똑 같은 두 판이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361개의 자리에 흑백의 돌이 완전히 동일한 자리에 놓이는 두 개의 대국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령 그 두어진 자리가 똑같다 하더라도 돌이 놓여진 순서까지 똑같을 확률은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나의 돌이 놓여지는 자리와 그 순서에 제한이 없이 자유롭다는 것은 바둑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모든 바둑이 서로 달라지는 이유는, 사실 특정 국면에서 “최선의 한 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한 국면에서 두어지는 어떤 하나의 수는 필연적으로 그 전에 두어진 수, 그리고 앞으로 놓여질 수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바둑에서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좋은’ 수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돌은 흑백을 막론하고 다른 모든 돌들과 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하나의 수는 그 국면에서 둘 수 있는 유일한 수가 아니라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여러 가지의 수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수가 지닌 가치는 언제나 잠재적일 수밖에 없으며, 어떤 한 수에 대한 평가는 궁극적으로 그 잠재성이 실현되었는가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한 판이 거의 끝나 갈 무렵에 이르러서야 특정 국면에서의 수가 옳았는지 아닌지를 가려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둑에서 어느 상황에나 적용되는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정석과 포석 이론 등은 주변 상황이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출된 것이기에 개별 상황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격언들도 특정 상황 하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
변수가 무궁무진하여 이론화하기가 쉽지 않다는 바둑의 이러한 특징은 지금까지 이루어져 왔던 바둑 교육의 현장에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선생은, 그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 지라도 학생에게 바둑에 관한 일반적인 진리를 말해 줄 수 없다. 그는 학생에게 정석과 기보를 외우고, 사활 문제로 수 읽기 실력을 기르라고 조언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익혀진 기술들을 실전에서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할 지를 한 마디로 해 주지 못한다. 그는 오직, 학생이 둔 개개의 바둑을 보면서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른 설명을 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은 그러한 스승의 가르침과 수많은 바둑을 통한 경험으로 얻어진 그 나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바둑을 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It(Baduk) nicely combines intuitive thinking with a precise calculation. - Ales Cieply
(바둑은 직관적 사고와 정확한 계산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Baduk is) a mixture of intuition and calculation. - Harry van der Krogt
((바둑은) 직관과 계산의 혼합)
The Process of playing Baduk is more like painting a masterpiece than just routine calulation. The part of the unconscious is great during analyzing of the game position. - Alexei Lazarev
(바둑을 두는 행위는 기계적인 계산보다는 예술 작품을 그려내는 것에 더 가깝다. 형세를 분석함에 있어 무의식 영역의 작용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바둑은 여타의 게임들과는 달리 단순히 정확한 계산 능력만 가지고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컴퓨터와 관련되어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몇 년 전 IBM의 딥-블루가 체스 챔피언을 꺾은 예에서 보여지듯, 오직 빠르고 정확한 수 읽기만을 요구하는 체스와 같은 게임에서 이미 컴퓨터는 인간을 앞서고 있다. 하지만 바둑에서 컴퓨터는 고작 10급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바둑이 게임의 일종이라고 여겨지면서도 이처럼 컴퓨터의 도전에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만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연구들이 목적하는 대로 컴퓨터의 계산 처리 속도를 증가시키면 사람을 이기는 컴퓨터가 탄생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대로 바둑의 한 수 한 수는 각각 그 이전에 두어진 수와 앞으로 두어질 수와 연관 관계 하에 있다. 따라서 현재의 한 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이미 이루어진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필요하다. 즉, 특정 국면에서의 형세 판단과 앞으로 진행될 수들에 대한 정확한 수 읽기가 바탕이 된 선택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직관과 상상력 등이 필수적인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직관이나 상상력은 주어진 변수가 지나치게 많아서 대략적인 판단 밖에는 할 수 없을 때와 변수가 거의 제한되어 충분히 모든 상황을 계산할 수 있을 때보다는 그 둘의 중간 지점에서 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 지금까지 발전된 바둑 이론들이 중반전에 관한 것이 거의 없고 대신 포석과 끝내기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고 하겠다.
바둑판 위의 빈 자리는 단순히 ‘아직 돌이 놓이지 않은 자리’가 아니다. 그 빈 자리는 등가의 가치를 지니는 여러 자리 중의 하나, 그래서 돌이 놓이면 그 가치를 다 하는 그런 빈 자리가 아닌 것이다. 그 자리는 언제, 어떤 돌이 놓이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고, 혹 놓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가치를 갖게도 되는 그러한 잠재성을 지닌 자리이다. 모든 빈자리는 각각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자리이며, 그것이 갖는 가능성은 예측할 수가 없다는 사실은 바둑이 계산만을 통해서는 결코 풀어낼 수 없는 게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You have to guess the best move in the given situation. Because, though it is theoretically not a game of chance, you cannot read out all. This is what you do all your life. Of all games I know Baduk is the most life like game. -Peter Zandveld
((바둑에서는) 항상 주어진 상황에서의 최선의 수를 찾는 방법밖에 없다. 비록 바둑 은 운에 좌우되는 게임은 아니지만, 모든 변수를 다 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 동안 내내 하는 일이다. 내가 아는 모든 게임 중 에서 바둑은 인생과 가장 흡사한 게임이다.)
서양인들이 바둑에서 느끼는 동양적 신비감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길게 부연 설명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들이 자신들의 대답의 이유로 든 간략한 설명은 이미 우리가 막연히 생각했던 동양의 신비가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들은 바둑의 특징으로, 똑 같은 판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 특정 상황에 있어서의 전후 사정에 따라 최선의 선택이 달라지며, 그렇게 선택된 수도 결국은 바둑이 끝난 후에야 판단 가능해 진다는 점, 이론화시키기가 힘들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이제까지 계산과 집중력 등만을 요구하는 게임들에 익숙해 진 서양인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둑의 이러한 매력이 그들로 하여금, 바둑은 직관과 치밀한 계산의 조합이라든가. 바둑을 두는 것은 예술 행위와 같다, 혹은 바둑은 인생과 같다 등의 말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서양에 바둑을 보급하려 할 때 위와 같은 바둑의 특징들이 지금보다 훨씬 강조되어지고 잘 드러나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요소는 실제에 있어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바둑을 표현할 때 그들이 사용하는 직관, 예술, 인생들의 단어들에서 짐작되듯이 바둑은 타인에게서 배우는 것보다 스스로가 배워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 줄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상은 바둑을 배우는 사람에게 쉽게 좌절을 안겨 줄 가능성이 있으며, 가르치는 사람을 안이하게 만들 수도 있다. 즉, 서양인들이 바둑에서 느끼는 매력은 바둑을 보급함에 있어 자칫 장해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은 서양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바둑이 막연히 좋다고 느끼지만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아예 배울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 혹은 급수가 올라가고 바둑 실력을 키우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바둑 공부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바둑의 매력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처음부터 바둑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둑이 도전해 볼 만한 것임을 알리고, 더 이상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극과 동기를 부여하는 일은 모든 경우의 보급에 해당되는 보편적인 과제이다.
배우기 어려운 바둑을 꾸준히 둘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지금까지 많이 사용된 것은 “바둑을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현재 많은 나라에서 초보자들에게 바둑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9줄바둑, 13줄바둑 등은 이처럼 바둑을 하향 평준화하면서 생겨난 신종들이다. 바둑판과 돌을 이용한 각종 놀이들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신문 관전기나 바둑 TV의 해설 수준이 5급에서 10급 정도의 수준의 사람들에게 맞춰지는 점도 이러한 하향 평준화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스포츠나 게임 등과는 달리, 바둑은 어느 정도 기본적인 지식이 있지 않으면 바둑 경기를 관전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경기의 결과가 중시되는 것도 하향 평준화의 일종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하향 평준화는 사람들에게 바둑의 존재를 알리거나 바둑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바둑 고유의 특성들을 희석화시키는 부작용도 가져왔다. 9줄바둑의 예를 보면, 9줄바둑은 바둑의 간단한 규칙을 알려주고 바둑이라는 게임에 친근해 지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 자칫 9줄바둑에서 사용되는 간단한 테크닉과 전략이 바둑의 전부라는 생각을 심어 주어 바둑이 갖는 변화의 무궁무진함이나 창조적 생각의 가능성 등을 느끼는 것을 방해할 위험이 있다. 또한 9줄바둑에 익숙해지는 경우 부분적 테크닉 이상의 넓은 시야를 갖는 것에 실패해 19줄바둑에서의 직관이나 혹은 상상력을 익히는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바둑이 올림픽 종목이 되면, 9줄이나 13줄바둑을 사용해 올림픽 종목을 다양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이러한 9줄바둑을 도입한 하향 평준화의 폐해의 하나라 생각된다. 이들은 9줄이나 13줄바둑을 19줄바둑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큰 오해이다. 또한 경기의 결과가 중요해지고 그 중간 과정이 경시됨으로 인하여 일류급의 바둑 기술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도 바둑을 쉬운 것이라고 말하며 보급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이다.
이렇듯 애초에 서양인들로 하여금 바둑을 쉽게 배우고 즐기도록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바둑을 쉬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은 결국 바둑의 존재를 알리는 것에 여러 수단 중 하나의 역할을 충분히 한 반면, 바둑이 가진 어려움이 주는 매력, 즉 단순한 계산만으로는 바둑을 잘 둘 수 없다거나 몇 가지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 등이 지닌 신비함들은 오히려 퇴색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쉬운 바둑”의 추세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결어
지난 몇 년 간 나는 몇몇 유럽 나라들과 미국을 방문하면서 서양인들로부터 바둑 수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당황한 적이 상당히 많았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당황한 이유가 주로 그 질문이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당연하여 의심의 여지도 없는 것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대개 내가 프로 기사가 되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궁금증을 가져 보지 못한 것들이어서 질문을 받는 순간 어떤 식으로 그 수를 설명해야 할 지가 막연한 것들이었다. 그 수들은 나에게는 마치 직관처럼 주어졌었고 물론 그 수에 대한 설명을 부탁 받았을 때의 막막함은 매우 컸다.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동서양의 교육 방식, 혹은 지식 전달 방식에 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한국에서 바둑을 배우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설령 궁금한 사항이 생겨도 그것을 질문하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경우 물어서 답을 얻어내는 것보다는 스스로 깨닫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이다. 가르치는 쪽도 마찬가지여서, 상대방의 수준이 충분히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에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그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기보다는 아예 설명 자체를 훗날로 미루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의 장점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가는 과정에서 습득한 자신만의 학습 방식, 혹은 훈련 방식, 다시 말해 노하우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고, 반대로 그 단점은 이렇게 얻어진 자신만의 노하우는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음식의 조리 방법이 계량화되지 않아 제대로 된 맛을 내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한 것처럼, 제대로 된 바둑을 두기까지 많을 노력이 요구되며, 그것은 잘 전달되고 축적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서양인들은 자신의 궁금증을 매우 잘 표현한다. 이것은 그들이 우리와는 달리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남에게 알리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인 측면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차이는, 그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언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데 있다. 이것은 그들 사고의 큰 장점으로서 그들 문화를 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게다가 서양인들이 직관의 영역이나 말로써 전달되지 않는 부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부분들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관심을 보이는 것은 동양인들보다는 서양인들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정도라는 것은 앞의 설문에서도 이미 드러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바둑에 있어서 서양인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물론 바둑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은 서양의 나라에서 바둑을 보급함에 있어 바둑의 존재만이라도 알리는 일은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미 설명한 대로 단순히 새로운 사람들에게 바둑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바둑 보급이라 할 수 없다. 비록 그 숫자는 적을 지라도 바둑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로 인해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길러 내는 것은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동안 서양에의 바둑 보급은 줄곧 바둑 인구의 양적 확대만을 목표로 이루어져 왔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둑을 서양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바둑은 그 어려움에서 나오는 묘미를 포기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바둑의 진정한 맛을 모르는 사람들의 양적 확대는 결코 이상적인 바둑 보급의 목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 가야 할 바둑 보급의 방식은 바둑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과 더불어, 숫자적인 측면에서는 미흡할지라도 바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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