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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읽기의 본질과 절차에 관한 고찰

온울에 2008. 6. 7. 22:58

수 읽기의 본질과 절차에 관한 고찰 - 정수현 9단

1. 들어가는 말

인간이 창안한 여러 가지 경기 중에서 아마도 바둑만큼 사고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경기는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경기자의 사고력을 어느 정도 요하게 되어 있지만, 바둑은 거의 전적으로 대국자의 사고력에 의존하며 고도로 정교한 사고를 요한다는 면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은 외형적으로 두 대국자가 흑과 백의 바둑돌을 한점씩 교대로 바둑판 위에 놓는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러한 동작은 대국자의 생각을 반상에 전달한다는 매개적인 목적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바둑에서 중요한 것은 반상에 구현되는 대국자의 수(手)에 대한 아이디어이다. 이런 면에서 바둑은 흔히 '두뇌스포츠'나 '사고의 예술'이라고 불리어 진다. 대국자의 수에 대한 생각은 통상 '수읽기'라고 하는 절차를 통해서 형성된다. 수읽기란 상대방이 둔 수의 의미를 해석하고 자신의 대응방법을 찾아 장차 일어날 변화를 머리 속으로 추리하는 것으로서, 바둑을 두는 데 있어 거의 필수불가결한 기술이다.

수읽기를 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두는 바둑은 수의 기능을 대국자가 올바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바둑이라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갖는 기력(棋力)은 단적으로 말해서 수읽기를 얼마나 정확하고 깊이 있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바둑에는 포석, 정석, 행마 등 많은 기술적 지식이 있고 이것이 바둑을 두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지식은 수읽기라는 방법적인 기술이 없이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무리 훌륭한 바둑이론과 수법을 알고 있다 해도 수읽기를 올바로 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 지식을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수읽기는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며, 대국자가 갖고 있는 기술력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수읽기가 바둑에서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수읽기의 이론에 관해서는 정립된 것이 없으며, 심지어 수읽기의 개념이나 본질에 관해서도 거의 언급된 바가 없다.

일반적으로 사활에 관한 많은 책들은 수읽기의 능력을 배양시켜 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런 서적 중 사활과 수읽기와의 관계나 수읽기의 의의등에 대하여 쓴 책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수읽기의 이론에 관한 언급은 에세이나 다른 강의의 일부분으로 설명된 '수읽기의 매카니즘'에 관한 2, 3개의 소론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바둑기술의 정화인 수읽기의 이론적 연구가 미흡한 이유는 수를 찾는 과정보다도 수가 나타내는 결과를 중시하는 바둑연구방법, 즉 바둑수의 현상에 대한 설명적 지식에 치중하여 그러한 현상의 탐색에 관한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에는 무관심한 습관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은 바둑의 가장 핵심적인 기술이면서도 소홀하게 취급되어 온 수읽기의 개념과 본질 및 그 절차를 점검해 보려는 시도이다.  

2. 수읽기의 개념

수읽기란 문자 그대로 하면 '수의 변화를 읽는 것'을 뜻한다. '읽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눈으로 글자를 살펴가며 글을 보는 것이나 소리를 내어 글을 보는 것을 가리키는데(국어대사전, 1992), 여기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상대방의 의중을 꿰뚫어 본다'라는 뜻이 생겨났고, 이것이 바둑과 장기에 도입되어 '수를 읽는다'는 의미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사전에는 '읽다'라는 뜻 중 '바둑, 장기에서 수를 생각하거나 상대방의 수를 헤아려 알다'라는 의미가 수록되어 있다.(엣센스 국어사전,1998).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면, 수읽기는 '상대방이 둔 수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대응수단을 찾아 장차 벌어질 변화를 추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수의 의미분석, 대응수단 발견, 변화가능성의 예측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들어 있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의 예측'이다.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이 어떤 수를 두었을 때, 그 수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이해해야 하며, 그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둘 것인가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상식이다.

이 두 가지는 바둑수를 다루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기법으로, 중급이하의 바둑에서는 사실  이 두 가지 기법만 가지고도 대다수의 바둑수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수준 높은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자신의 응수에 대한 상대방의 대응방법 및 그로부터 파생되는 변화를 미리 예측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응수를 포함한 장차의 변화를 미리 생각하지 않고 바둑을 두게 되면, 앞에 둔 수와 뒤에 두는 수들간의 연관된 목적을 수행하기 어려우며, 그로 인해 자연히 좋은 내용의 바둑을 둘 수 없게 된다. 전문적인 의미의 수읽기는 이와 같은 변화의 추리를 가리킨다.

3. 수읽기의 절차

일반적으로 수읽기는 일정한 단계를 밟아 진행된다. 그 과정은 '상대방 수의 의미분석→자신의 태도 결정→가능성 있는 방안의 선정→변화의 추리→도출된 결과의 선악 판단→착수의 선택' 순으로 이루어진다. 실제적인 장면을 예로 들어 수읽기의 절차를 살펴본다.

1) 상대방 수의 의미 분석
 수읽기는 상대방이 어떤 수를 두었을 때 그 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1도> 이런 상황에서 백1로 젖혀 왔다고 하자. 이에 대해 흑의 적절한 응수를 읽으려면 우선 백1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개 수의 의미는 명약관화한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전체상황과 연관된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해석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1도> <2도>

언뜻 보기에 백1은 귀를 파괴하려는 것이지만, 실은 광대한 좌반부 백진을 키우려는 술수를 내포하고 있다. 즉, 백1은 귀의 파괴를 획책하는 듯하면서 실은 하변의 백진을 크게 키우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2) 자신의 태도 결정
상대방의 의도를 깨달았다면 다음 단계는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의도를 가능하면 분쇄하는 것이 바둑수의 생리이므로, 상대가 의도하는 것에 역행하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일반적 태도이다.

문제의 장면에서 흑의 태도는 백이 귀의 준동과 관련하여 하변의 백진을 능률적으로 확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3) 가능성 있는 방안의 선정
자신의 목표가 결정되었으면 그 목표를 수행할 수 있는 방안을 선정하는 것이 순서이다. 어떤 경우 그 방안은 하나일 때가 있으나, 대개는 두세 가지 방안이 있는 경우가 많다.

<2도> 이 그림에서 흑이 취할 수 있는 방안은 A로 끊는 수, B로 모는 수, C로 뻗는 수의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를 제외한 다른 수는 이 모양에서 생각할 수 없다.

4) 변화의 추리
설정된 방안 중 어느 것이 적절한 지를 알기 위하여 그로부터 파생되는 변화를 추리하여야 한다. 이것이 수읽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작업이다.

이 단계에서는 선택 가능한 몇 가지 방안 중 어느 것으로부터 접근하느냐와 수가 나아가는 길을 의미있게 유추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어느 수로부터 추리를 시작하느냐는 기력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수들은 갖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가장 가능성이 큰 수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하수들은 바둑 수에 대한 지식이 짧기 때문에 어떤 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 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3도> 이 모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는 흑2에 끊는 수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백3으로 나가는 수와  a로 모는 두 가지 수를 생각할 수 있다. 백3이라면 흑4에 잡고 백5에는 흑6으로 귀를 취하는 진행이 예상된다.

<3도> <4도>

<4도> 이것은 흑2의 단수에 백3으로 단수하여 귀를 버리고 다음 백5로 붙여 9까지 선수로 세력을 쌓는 진행이다. 기력이 낮은 사람들은 백5로 a나 6에 두어 살리는 수를 생각할 가능성이 있으나, 고수들은 백5로 두어서 버리는 방법이 현명함을 안다. 대국자의 축적된 지식이 수가 나아가는 길을 선택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5도> 흑2로 모는 수도 있다. 이것은 a에 백돌이 있을 경우, 백2에 빠지는 수가 듣는 것을 피하려는 용의주도한 수로서, 상당한 실력이 없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수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는 a에 백돌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이나. 일단 수읽기의 대상으로 고려할 필요는 있다. 백 한점 잇는 수를 보며 백3에 붙여 올 가능성이 있고, 흑4라면 백5로 뻗은 다음 7로 크게 살아버린다. 흑8, 백9까지의 진행이 예상된다.

<5도> <6도>

<6도> 세 번째 방안인 흑2에 뻗는 수. 이것은 백으로부터 단수 당하는 것을 피하려는 수인데 대신 백a, 흑b, 백c의 귀살이를 남긴다. 백도 당장 사는 것은 시기상조이므로 귀살이 맛을 남기고 백3에 한칸 뛰어 지킨다. 흑은 선수를 잡아 상변의 벌림으로 전환하는 진행이 된다.

이상으로 이 모양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 변화를 추리해 보았는데, 상황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포함될 수도 있다. 그 많은 변화를 두 다 읽기는 힘든 일이므로 될 수 있다면 가능한 수의 경로를 탐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5) 도출된 결과의 선악판단
추리에 의해 몇 가지 예상되는 그림이 도출되었으면 그것들을 비교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일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몇 가지 예상도 중 어느 것이 문제의 상황에 가장 알맞는가를 판정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전문가의 수읽기에서는 이러한 선악판단이 수의변화 추리보다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마추어 중급자의 바둑에서는 예상도의 도출 자체가 힘든 일이기 때문에 선악판단의 중요성에까지 관심이 미치지 않는다.

위의 그림(앞글의 참고도) 중에서 3도는 백이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5도는 실리의 손실이 너무 크다는 점에서 1차적으로 제외된다. 결국 4도와 6도 중에서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를 선택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4도는 귀의 실리를 크게 차지한 반면 백에게 막강한 외세를 허용하고, 6도는 백의 세력팽창을 견제한 반면 귀살이가 남아 실리면에서는 부실하다. 어느 그림을 택해야 할 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으며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선악판단의 기준은 주변상황에 어느 쪽이 더 어울리는가를 고려하는 것이다. 위의 상황에서는 좌반부 백진의 위용이 전국을 압도할 기세이므로, 실리상으로는 손해지만, 백의 세력을 견제하는 6도가 가장 적절한 선택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6) 착수의 선택
수의 추리와 선악판단을 통하여 최적의 수가 어느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면 최종적으로 그 수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겠으나, 실제상면에서는 다른 변수가 개입하여 색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대마를 잡으러 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혹시 예상치 못했던 묘수로 인해 실패할 것을 우려하여 안전한 차선책을 택한다거나, 형세의 유불리에 따라 안전책이나 다소 모험스런 작전을 택한다거나, 상대방의 기풍이나 취약점을 고려하여 최선과는 다른 수를 택하는 등 이다.

수읽기는 논리적 유추에 의해 최선의 수를 선택하려는 노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과 기백이 살아 숨쉬는 승부의 현장에서는 수 자체의 최선이 아닌 다른 차원의 최선을 택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상으로 수읽기가 이루어지는 절차를 살펴보았는데, 이 과정은 각 단계마다 비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상대방의 수의 의미 분석과 자신의 태도 결정은 거의 직관적으로 이루어지며, 가능성 있는 방안의 선정에서부터 도출된 결과의 선악판단까지의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게 된다.

4. 가능성 있는 수의 경로

수읽기를 논함에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수가 어떤 경로로 진행되는가에 관한 것이다. 수읽기의 핵심은 수가 나아가는 길을 추적하는 것이므로 수의 경로에 대한 사전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바둑팬들은 수읽기를 상대방이 둔 수를 보고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 가를 이해하며, 그에 대해 나는 어떻게 응수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러면 상대방이 어떻게 응수할 것인가를 추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지만 수읽기란 수가 나아가는 길을 추적하는 것이며, 이것을 길게하는 사람이 고수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팬들이 갖고 있는 수읽기에 대한 관념은'단선적인 경로 추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바둑수는 하나의 길로 나아가며 수읽기를 잘하려면 그 길을 멀리 읽으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아마추어들이 일반적으로 프로에게 많이 던지는 "프로기사는 수를 잘 봅니까?"라는 질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프로기사들은 답변을 명쾌하게 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수읽기가 외길로 나아가는 단순한 경로의 추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1도> 좌하귀에 흑1로 다가오자 백2로 받고 흑3에 둔 장면에서 수가 나아가는 길을 알아보자. 여기서 백이 둘 수 있는 수는 a의 지킴, b의 협공, c의 붙임의 세 가지가 있다.

편의상 손빼는 수나 아주 독특한 수는 제외하고 비교적 흔하게 두어지는 이 세 가지 수의 경로를 살펴본다.

<1도> <2도>

<2도> 백1로 둘 경우 흑2로 받아 매우 단순한 형태로 마무리된다. 흑2로는 a에 벌리는 수도 있으나, 이 상황에서는 b의 접근이 좋아지므로 부적절한 수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주어진 상황에 비추어 부적절한 수를 걸러내는 것이 경로의 추적에 도움이 된다. 되는 수, 안 되는 수를 모두 검토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수를 탐색하는 데 혼란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

<3도> 백1로 협공하면 상식적으로 예상되는 진행이 백9까지의 정석 수순이다. 수의 추적에서 정석이나 형태에 대한 지식은 불필요한 수를 걸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수순 중 백3으로는 그냥 5에 붙이는 수를 생각할 수 있고, 흑4로는 a에 찝는 수가 있으며, 흑6으로는 그냥 8에 잇는 수가 있다. 이처럼 수순에서 한수씩 변화할 경우 비슷한 형태인 '이형(異形)'이 생겨난다.

<3도> <4도>

<4도> 백1에 붙일 경우, 수의 경로는 다소 복잡해진다. 흑2에서 백11까지가 하나의 정석인데, 이밖에도 흑2로 a에 젖히는 수, 흑4로 3·三에 두는 수 등 다양한 변화가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이 장면에서 수가 나아가는 경로를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5도> 이 그림은 각 수로부터 파생되는 변화의 흐름을 표시해 주고 있는데, 수순이 많이 진행될수록 점점 가짓수가 많아지는 특징이 있다.

수의 진행경로에 관한 이 그림을 '가능성 있는 수들의 나무(possible moves' tree)'라고 정의하고 이것을 PMT라는 영문 이니셜로 표현하기로 한다.수읽기란 본질적으로 이와같은 PMT의 경로를 추리에 의해 추적하는 것이다. 이것을 검색하는데 있어서 채택될 가능성이 많은 수와 가능성이 적은 수를 취사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때로는 가능성이 없는 수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가능성 있는 수와의 구별이 안될 경우 수읽기는 대단히 혼란스런 작업이 되고 만다. 이것을 여름철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휴가를 가는 방법에 비유해 본다. 원칙적으로 보면, 먼저 부산으로 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고려한 후, 그 중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타당한 방법을 고를 것이다. 가는 방법으로는 보행, 말, 자전거, 승용차, 기차, 글라이더, 비행기 등의 7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이 방법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은 시간상으로나 실용적 측면에서 낭비가 되므로 누구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걸러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도보여행, 말 타고 가기, 자전거 타고 가기, 행글라이더를 이용한 방법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가능성 있는 수단의 범주에서 제외할 것이다.

나머지 승용차, 기차, 비행기를 이용한 세 가지 현실적인 방법 중에서 자신의 형편에 맞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기차를 타더라도 새마을호를 탈  것인지 무궁화호를 탈 것인지의 하위선택을 해야 하며,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리는 경우 어떻게 목표지점에 이를 것인가의 방법의 하위의 선택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예에서 선택 가능성이 희박한 수단을 제외시키는 것이 필요하며, 선택 가능한 몇 가지 수단에서도 그 아랫단계의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가능성 있는 수단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의 경로는 이것과 유사한 성격을 띤다.

5. 문제해결의 과정
최종적으로 바둑수에 관한 문제는 전문가인 프로기사에 의해 설명되어져 왔기 때문에 다른 관점으로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근래에 인공지능이나 사회과학 분야에서 바둑을 소재로 한 연구가 점차 활발해지고 있는데, 바둑의 여러 가지 주제를 다른 분야와 접목시켜 연구할 때 바둑문화의 질이 한층 더 풍요로워지리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수읽기를 인간사고의 심리학인 인지심리학(認知心理學)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지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환경과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가, 그러한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여 각종의 생활에서의 과제들을 수행해 내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심리학의 한 분야인데, 이 중의 한 부분인 '문제해결'이 바둑의 수읽기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 주제가 된다.

문제해결이란, 장래 취업분야를 결정한다든지, 바둑에서 승리를 해야한다든지, 학교에서 집까지 가장 빠른 길로 가야 한다든지 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목표(goal)를 지향하는 일련의 인지적 처리, 또는 조작(operation)들을 말한다(이정모).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존 앤더슨에 의하면, 문제해결이란 목표달성을 지향하는 행동으로서, 문제공간을 검색하여 문제의 초기 상태를 목표가 달성되는 목표상태로 변화시키는 활동이다(1985). 바둑에서 수를 읽는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하여 승리로 이끌려는 목표를 지향하여 그 목표상태에 이르는 길을 검색하는 것이다.

문제해결의 방식에는 발견법, 연산법, 수단목표분석, 역행풀기 등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바둑에서 쓰이는 방식은 '유추에 의한 문제해결 방식'이다. 문제해결 공간에서의 가능성 있는 수의 변화를 유추에 의해 검색하고, 거기서 도출된 몇 가지 방안들을 비교하여 목표상태에 이르는 데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에서는 바둑을 문제해결의 좋은 연구 소재로 언급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에 관하여 구체적인 연구가 수행된 적은 없다. 바둑과 유사한 분야인 체스에서는 대조적으로 상당히 많은 심리학적 연구가 행해져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들면, 전문가는 문제를 생각할 때 신속히 기본적인 원리로 가는 반면, 초보자는 피상적이지만 지각적으로 두드러진 속성과 관련하여 문제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체스의 대가는 수읽기를 할 때 가장 가능성 있는 수단의 경로를 신속히 탐색하나, 실력이 낮은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짧은 지식을 바탕으로 수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근래에 필자가 행한 사활문제의 실험에서도 이와 유사한 결과가 나왔다. 전문기사는 문제의 장면에서 출현할 수 있는 모든 수의 변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수로부터 접근하여 신속하게 해답에 이르며, 아마추어 중급자는 전문기사들은 전혀 고려치 않는 수(두집내기에 관한 수)로부터 시작하여 해답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수읽기의 과정을 인지심리학의 정보처리적 접근에 의해 분석하는 것은 매우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직면한 상황에서 문제를 어떻게 표상하고 학습된 지식을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적용하는가 등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가 행해진다면, 바둑이 인간의 지능에 어떤 작용을 하고 바둑지도가 어린이의 두뇌개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6. 맺는 말
바둑에서 수읽기는 번거롭고 어려운 작업이면서도 한편으로 재미있고 유익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수를 읽는 과정에는 앞에서 살펴본 어려운 문제가 필연적으로 수반되지만, 진정한 의미의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며, 수읽기의 기술을 터득할 경우 바둑수를 사유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활동이 된다.

지금까지 수읽기에 대한 이론이 미흡한 것은 바둑팬의 취미생활이나 기력 향상의 측면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글은 수읽기에 관해 전문가나 팬들의 관심을 일깨우는데 일조를 하는 것으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수읽기에 관한 연구는 단순히 바둑수의 변화현상의 설명이 아닌, 수를 탐색하는 과정에 관한 절차적 지식이 탐구되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인지심리학과 같은 연관된 다른 분야와의 접목이 필요하다고 본다.

<끝>  http://www.postech.ac.kr/~dondon/badook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