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세 세계론의 등장배경
2.세 세계론의 의미와 기본논점
3.세 세계론의 解明
3ㆍ1.세 세계의 독립성에 관한 논증
3ㆍ1ㆍ1.세계2와 경험의 可能根據
3ㆍ1ㆍ2.세계3과 객관적 지식
3ㆍ2.세 세계의 실재성에 관한 논증
3ㆍ2ㆍ1.中樞神經系의 출현과 의식
3ㆍ2ㆍ2.自我와 언어
4.세계3과 객관성의 두가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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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인제대학교
학술지명 仁濟論叢
권 7
호 2
출판일 1991. 12. 31.
포퍼에 있어서 客觀的 지식의 可能根據(Ⅱ)
曺湧鉉
인제대 조교수
4-127-9102-03
영문요약
A Study on Foundations of Karl Popper's 「Objective Knowledge」(II)
This paper is also related with the problems discussed in The former paper. Though in The former paper, we approached with the semantic method to cope with epistemological relativism, Popper's approaching method is different from this. Through expositions of foundations of objective knowledge, he tried to cope with these problems. It is so called "theory of three worlds". According to him, the World is composed of three sub-world. world 1 is what is called the world of physics. World 2 is what is called the world of mind including not only human mind but also the minds of animals. World 3 is the world of the products of the human mind including scientific theories and so on. The objective knowledges rest on world 3. they have in themselves "independence" (or autonomy) and "reality" , which are different from the subjective dispositions of human minds(world 2). But in this paper, I concluded as follows, Popper's arguement was not sufficient to cope with epistemologcal relativism. It is nothing but necessary conditions to guarantee the foundations of the objective knowledge. Therefore we must add to this World 3 theory the sufficient conditions. they are the semantic arguements already discussed in The former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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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脚註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붙인다.
a) 포퍼의 저서들중 본 논문에서 많이 인용되는 아래 저서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약호를 사용한다.
1. L.Sc.D =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2. C & R=Conjectures and Refutations
3.O.K = Objective Knowledge
4. I.A = Intellectual Autobiography
5. R.C = Replies to My Critics
6. S & B= The Self and it's Brain
7. R & S= 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8. O.U = The Open Universe
b) 기타의 저서 또는 논문에 대해서는 저자의 이름과 발표년도만을 밝히고 그외의 사항은 참고문헌에 상세히 부기한다.
1.세 세계론의 등장배경
앞 논문에서의 논의의 핵심은 기초언명과 지각경험간의 대응이 규약이고 그 대응의 타당성은 기초언명을 함축한 그 이론에 의거하므로 이론과 이론간의 비교는 불가능하다는 것, 즉 기초연명의 공약불가능성이었다. 이것을 파피뉴(D.Papineau)는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관찰언명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경험주의에 대한 가장 심각한 비판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의 본래의 희망은 그러한 언명이 지각경험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 그러한 특권적 지위를 보장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지각경험과 결부되어 있는 그러한 언명도 그 자체 이제 거의 정확성이 보장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찰문장을 지각경험과 올바르게 결합시켰는지에 대해서 항상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단어를 경험과 결부시키는 방식은 항상 이론에 의거한 평가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1).
그러나 우리는 앞 논문에서 기초언명과 지각경험의 대응이 규약임에도 불구하고 규약의 우월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이론의 비험들이 생겨난다면 그 규약을 바꾸어 야할 이유가 있고 상충을 통합시킬 수 있는 이론이 있다면 지각경험과 기초언명간의 새로운 구약에 의한 기초언명은 실재를 더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포퍼는 상대주의와 비합리주의에 대항해서 이러한 노선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지식의 객관성을 존재론적 실재성과 독립성에서 연역하는 방식을 통해서 주관주의, 상대주의, 비합리주의를 발전적으로 해소시켜 버리고자 하는 대담한 시도를 하는데 이것의 그의 「세 세계론」 (Theory of Three Worlds)이다. 필자는 지식체계의 실재성과 독립성에 대한 그의 논증은 지식의 본성에 대한 아주 새롭고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식체계의 실재성과 독립성을 인정한다고해서 주관주의, 상대주의, 비합리주의가 바로 해소되지는 않는다2). 이 세계3이론을 앞 논문의 논의와 결부시킴으로써 비로소 그것을 해소시킬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세 세계론에 관한 포퍼의 논의를 검토해보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4장에서 다시 이 문제를 재론하기로 한다.
2.세 세계론의 의미와 기본논점
포퍼는 세 세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세계는 적어도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 세개의 하위세계들(sub-worlds)로 구성되어 있다. ; 또는 내가 말한 것처럼 세 세계가 있다. 첫째는 물리적 또는 물리적 상태의 세계이다. ; 둘째는 정신적 또는 정신적 상태의 세계이다. 그리고 세째는 可知的 존재(intelligibles)의 세계 또는 객관적 의미에서 관념(idesa)의 세계이다. 그것은 가능한 思惟對嶽의 세계 즉 이론들 그자체, 그들의 논리적 관계, 논증들 그자체, 문제상황들 그자체의 세계이다.
이 多元論的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중의 하나는 이 세 세계들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세 세계는 앞의 두 세계가 상호작용하고, 뒤의 두 세계가 상호작용하도록 그렇게 관련되어져 있다. 그래서 세계2 즉 주관적 또는 개인적 경험의 세계는 다른 두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세계1과 세계3은 직접 상호작용하지 않고 다만 세계2의 매개를 통해서만 상호작용한다3).
이 인용문은 세 세계론의 규명을 위한 두가지 측면을 시사하고 있다. 첫째는 세 세계의 독립성 또는 自律性(autonomy)에 관한 논증인데 이것은 세 세계의 靜態的 분석이라고 볼수 있다. 이 분석을 통해서 세 세계가 상호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존재범주라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이것이 입증되지 않는한 唯物論(여타 세계의 세계1에로의 환원) 觀念論(여타 세계의 세계2에로의 환원) 또는 데카르트(R.Descartes)의 心身二元論(세계1과 세계2만을 인정, 세계3의 세계2에로의 환원)과 구분이 호모해져서 각 관점을 적당히 꿰메워 놓은 진부한 다원론이란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한다더라도 아직도 불충분한데 다원론에 본질적으로 수반하는 상호작용의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상호작용에 관한 논증을 動態的 분석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세 세계의 實在性에 관한 논증이다.
다음 인용문은 포퍼가 실재성을 상호작용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체로 구성된 세계1의 실재성 혹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건전한 상식이다. 버클리에 대한 존슨박사의 유명한 반박이 보여주듯이 바위와 같은 물체는 그것을 우리가 찰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당신이 바위를 아주 세게 찬다면 바위로 부터 되차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란데(A.Lande)를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실재를 규정지을 것을 제안한다. 즉 만일 어떠한 것에 작용을 가할 수 있고 또 그것으로 반작용이 주어진다면 오직 그때만 그것은 존재하거나 또는 실재한다. 이것을 약간 더 일반적으로 표현한다면 어떠한 것이 세계1의 구성원들 즉 단단한 물체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면 오직 그때 그것은 존재하거나 또는 실재한다4).
그러나 세 세계들의 독립성과 실재성(상호작용성)을 엄밀히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전자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후자가 손상을 입을 것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독립성과 자율성을 전제하지 않은 상호작용성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포퍼는 이 둘을 구분시킨 체계적 논증을 진행시키고 있지 않은데 본고에서는 체계화에 따른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이 들을 분리시켜 논함으로서 포퍼의 논지를 좀더 분명히 하고자한다5).
3.세 세계론의 解明
3ㆍ1.세 세계의 독립성에 관한 논증
3ㆍ1ㆍ1.세계2와 경험의 可能根據
세계1의 독립성과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은 건전한 상식이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논증할 수는 없지만 포퍼의 세 세계의 해명의 기본전제이다. 그러므로 세계2의 독립성(자율성)은 그것이 세계1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데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3의 독립성에 대한 논증은 이것이 세계2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다음절에서 다룬다.) 세계2의 독립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세계1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이 전통적으로 환원주의적 또는 기계론적 唯物論(materialism)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유물론의 성립불가능성에 대한 논증이 세계2의 독립성을 보여주는 논증이다. 포퍼는 급진적 유물론을 다음 세가지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첫째, 의식의 존재를 부정함에 의해서 이러한 세계관은 우주론을 단순화시키지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흥미있는 수수께끼를 해결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생략함으로서 그 단순성에 도달하고 있다. 둘째 이 원리를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이라는 측면에서 채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과학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셋째 이 견해는 僞이며 실험에 의해서 반박되고 있다. 첫째, 둘째 논점은 별 설득력이 없지만 셋째 논점은 중요한데 정신 즉 세계2의 독립성의 사례로서 다음 그림을 검토하고 있다.
이 그림은 인디언의 옆얼굴로 보이기도하고 또 어떻게 보면 등을 보이고 있는 에스키모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코, 입, 뺨 그리고 눈으로 시선을 옮겨가면서 인디언의 얼굴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장화로부터 시작해서 에스키모의 모습을 구성해낼 수 있다. 이것은 정신의 능동적이고 자발적 과정의 개입을 보여주는데 그것 없이는 경험적 지각 자체가 불가능하다6).
그러나 이와 유사한 그림이 비트겐슈타인(L.Wittgenstein), 핸슨 등에 의해서 관찰의 이론부하성을 보여주는 예증으로서 많이 다루어졌다7). 관찰의 이론부하성은 포퍼적 용어로 말한다면 세계3의 세계2에의 작용이다. 따라서 세계2의 독립성을 보여주는 예증으로서는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이 포퍼의 취지를 살리면서 세계2의 독립성을 밝힐 수 있는 다른 논증을 찾아 보고자 한다.
포퍼에 있어서 지각경험은 세계2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다. 지각경험의 존재에 대해서 유물론자도 부정하지 않는다. 포퍼와 유물론자간의 차이는 후자가 지각경험은 전적으로 물질적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는데 대해서 포퍼는 그렇게 환원시킬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이 그것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각경험의 가능근거의 문제에서 포퍼와 유물론자의 근본적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
유물론자 또는 일부 物理主義者(physicalist)들이 보듯이 지각경험이 세계1의 한 부대현상(ephiphenomena)이라면 그것은 원리적으로 세계1에서 도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물자 또는 물리주의자들에 의하면 물질에 작용하는 법칙은 因果法則이며 이 기계적 법칙은 귀납(induction)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러므로 귀납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세계2의 독립성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지각경험이 귀납적 절차를 통해서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은 지각경험의 가능근거가 물질적인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앞 논문에서 다룬 귀납의 부당성에 대한 포퍼의 논증을 세계2의 독립성에 대한 논증으로 전용함으로써 앞서 소개한 포퍼의 불충분한 논증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포퍼의 귀납의 문제를 이러한 맥락에서 재검토해보자.
포퍼는 귀납에 관한 흄(D.Hume)의 문제를 논리적 문제와 심리적 문제로 구분하고 있다. 논리적 문제란 "우리가 경험한 (반복적) 제 사례들로부터 아직 경험하지 아니한 다른 사례 (결론)를 추론하는 것을 우리는 정당화 할 수 있는가?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흄의 답은 부정적이다.
귀납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흄의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례들은 우리가 이미 경험한 그러한 사례들과 유사하다"는 견해를 입증할 수 있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논증이란 있을 수 없다고 흄은 주장한다. 결국 "대상들간의 빈번한, 恒常的인 결합을 우리가 관찰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을 초월한 대상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요컨대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귀납을 정당화시키려는 시도는 불가피하게 無限退行에 빠져들게 된다8).
여기서 심리적 문제가 성립하는데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건전한 상식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제 사례들이 그들이 경험한 것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는 것일까?는 것이다. 흄은 이것을 「습관」때문이라고 본다. 즉 우리는 반복에 의해서 또 觀念聯合의 메카니즘에 의해서 조건지워져 있기 때문이다9).
포퍼는 이 심리적 문제에 대한 흄의 답을 「類似에 기초한 反復의 개념」으로 정식화한다10). 즉 처음에 사물a에 사물b가 수반하는 것을 관찰하고, 그후 사물a와 유사한 것에 사물b와 유사한 것이 반복해서 관찰된 다음에는 우리는 사물a와 유사한 것이 주어지면 습관적으로 사물b와 유사한 것의 출현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포퍼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흄이론의 중심개념은 類似性(similarity혹은 resemblace)에 기초한 반복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무비판적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한방울, 한방울의 물이 돌에 구멍을 뚫는 것이나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처럼 의심할 수 없는 동일한 사건의 계기가 서서히 그 사건자체를 우리의 의식속에 각인시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러나 흄의 이론과 같은 심리학 이론에서는 우리들에 대한 유사성(similarity-for-us)에 기초한 우리들에 대한 반복(repetition-for-us)만이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마치 그들이 똑같은 것처럼 생각해서 반응해야만 한다. 영리한 강아지에 의해서 보여지는 행동방식과 반응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그 강아지가 두번째 상황을 첫 번째 상황의 반복으로서 인식하고 해석하고 있다는 것, 즉 그 상황의 중요 요소인 싫은 냄새를 맡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기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함으로써 합당한 설명을 줄 수 있다. 이 상황은 그들에 대한 반복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행한 사건에 대한 그것의 유사성을 예기함으로써 그것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견상 심리학적 비판으로 보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간단한 논증으로 요약시킬 수 있는 순수히 논리적인 기초를 가지고 있다. 흄이 생각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반복은 문자 그대로의 반복이 아니다. 즉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사례는 동일성의 사례가 아니고 유사성 의 사례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관점에서 볼 때만이 반복이다. (나에게 반복으로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거미에게는 그것을 줄 수 없다. )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보아 어떤 반복이 있기이전에 예상, 예기, 가정, 관심의 관점이 선행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관점은 결코 반복의 결과일 수 없다11).
즉 사례들의 반복이라는 것은 그 사례들간의 유사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런데 절대적 유사성(동일성) 같은 것은 존재한다더라도 아주 드물거나 사소한 것-예컨대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이며, 아주 흔하며 그러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유사성은 어떤 관점에서 유사한 상대적 유사성이다. 포퍼는 상대성을 아래와 같은 그림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우리는 도형의 어떤 것들은 斜線이 있다는 점에서 또 어떤 것들은 없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 어떤 것들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고 또 어떤 것들은 크기에 있어서 유사하다‥‥‥.
이러한 그림들은 사물들이 여러 相異한 관점에서 유사할 수 있으며 한 관점으로부터 유사한 어떤 사물도 다른 관점으로부터는 유사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유사성 그것과 함께 반복은 어떤 관점을 전제로 한다. 즉 유사성 또는 관점이 우리의 주의를 끌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이고, 다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다른 유사성 또는 반복이 우리의 주의를 끌게 된다. 만일 유사성과 반복이 관점, 관심, 기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면 그것들은 시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반복에 선행한다12).
어떤 형태의 반복이 있기 이전에 항상 관점 - 기대, 예상, 가정 또는 관심의 체계와 같은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관점은 단순히 반복의 결과일 수 없으며 이것은 흄의 심리적 문제에 대한 답이 잘못임을 보여준다. (물론 그 관점은 그 이전의 반복의 결과라고 볼 수 있으나 이럴 경우 무한퇴행에 빠진다.) 포퍼는 흄의 이론을 뒤집을 것을 제안하며 그렇게 되었을 경우 그것은 바로 시행과 착오배제의 방법 또는 추측과 반박의 방법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는 이 흄의 이론을 뒤집을 것을 제안한다. 반복의 결과로서 규칙성을 예상하는 우리의 성향을 설명하는 대신에 규칙성을 예상하고 그것을 찾을려고 하는 우리의 성향의 결과로서 우리들에 대한 반복을 설명 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서 나는 순수한 논리적 고찰에 의해서 귀납에 관한 심리적 이론을 다음과 같이 대체시키게 되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규칙성의 인상을 주거나 부과하는 반복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우리는 능동적으로 세계에 규칙성을 부과하려고 한다. 우리는 세계속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려고 하며 그것을 우리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칙에 의해서 해석할려고 한다. 전제를 기다리지 않고 우리는 결론으로 비약한다. 만일 후의 관찰이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면 이것들은 폐기되어져야 하는 수도 있다. 이것이 시행과 착오배제-추측과 반박-의 이론이다. 이것은 세계에 해석을 강요하는 우리의 시도가 왜 유사성의 관찰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가 하는 것을 이해가능하게 해 준다. 이러한 절차(추측과 반박)에는 논리적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과학의 영역에도 적용되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과학적 이론들은 관찰의 단순한 요약이 아니고 그것들은 발명된 것, 즉 대담하게 제시된 추측이라는 것이다13).
그러므로 포퍼에 있어서 규칙성발견의 기대는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즉, 경험의 가능근거이다14). 이 것을 거꾸로 말한다면 귀납적 절차로는 우리는 아무 것도 경험할 수 없다. 포퍼는 이것을 보여주기위해 귀납기계(inductive machine)를 한번 상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어떤 단순화되어진 세계에 이 기계가 놓여진다면 이 기계는 반복을 통해서 그 세계에서 성 립하고 있는 繼起法則을 배우고 심지어 그것을 定式化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기계가 만들어진다면 나의 귀납에 대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만일 기계가 귀납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인간이 그와 같은것을 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설득력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잘못이다. 귀납기계를 만드는데 있어서 기계의 설계자인 우리는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사물이 유사한것 혹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세계」에서 어떤 종류의 「법칙」을 그 기계가 「발견」하기를 기대하는가 등을 아 프리오리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그 세계내에서 무엇이 의미가 있고, 무엇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를 결정하는 「準據틀」을 그 기계속에 집어넣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 기계는 「生來的」인 선택원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유사성의 문제는 그 기계를 위해서 세계」를 해석해주는 제작자의 역할을 전제한다15).
그런데 이 규칙성발견의 기대는 경험의 가능전제이므로 결코 경험에서 도출될 수 없으며 경험에 의해서 설명되어 질 수 없다. 이것은 아 프리오리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칸트의 인과율과 비교하고 있다.
(이것은)칸트가 인간정신의 한 소질이며 아 프리오리하게 타당하다고 믿은 因果律과 밀접하게 대응하고 있다. 여기서 칸트는 심리적으로 아 프리오리한 사유방식 혹은 반응방식과 아 프리오리한 신념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조잡한 잘못을 그가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규칙성을 발견하고자하는 기대는 심리적으로 아 프리오리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아 프리오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유사성 의 인식에 선행하는 것이며 또 모든 관찰은 이 유사성의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대는 논리적으로 아 프리오리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가 아 프리오리하게 타당한 것은 아니다. 즉 그 기대는 틀릴 수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환경과 비교해 볼 때 규칙성을 전혀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뒤죽박죽인 그러한 환경을 우리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16).
이 논증을 앞서 인디언-에스키모 사례와 비교한다면 그 그림을 인디언으로 보느냐 에스키모로 보느냐 하는 것은 그 관찰자의 관점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 관점 역시 아직 경험적인 것이며 그것이 세계1과정을 통해서 얻어질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포퍼의 사례가 세계2의 독립성의 논증으로서 불충분하다고 말할 이유이다. 그러나 관점의 관점…을 계속해서 소급해 가면 더 이상 경험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관점이 나온다. 그것은 그 그림에서 구체적인 인디언이나 에스키모 또는 그 어떤것을 보도록 하는 관점이 아니라 그것에서 유의미한 그 무엇을 찾고자하는 선천적 경향 즉 「보는 것」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관점이다. 이것은 인과성의 결과가 아니라 인과성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므로 세계1로 환원시킬 수 없다.
3ㆍ1ㆍ2.세계3과 객관적 지식
우리는 세계2의 가능근거가 규칙성 발견의 기대이며 이것은 세계1로 환원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경험은 단지 행위 또는 인지할려고 하는 주간적 性向일 뿐이므로 그 자체가 세계3 즉 객관적 지식의 성립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셋세계론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세계2의 「주관적 지식」 (subjective knowledge)에서 세계3의 「객관적 지식」 (objective knowledge)을 분리하고 나아가 이 객관적 지식은 주관적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자체 독립성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일상적 용법 속에는 지식의 두가지 의미가 혼용되고 있다. 다음 예를 보자.
1) 당신이 나를 약올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있다」. 그러나 나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2) 나는 페르마(Ferma)의 최종정리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증명될 것으로 믿는다.
3)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지식의 항목을 찾아보면 지식은 「앎의 어떤 상태」로 정의되어 있다17).
이것은 주관적 지식의 용례인데 주관적 의미에서의 지식 또는 사유는 정신이나 의식의 상태, 또는 행위할려하거나 반응할려는 성향이다18). 여기에 대해 객관적 지식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1)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지식의 항목을 찾아보면 지식은 「학문의 분야 ;과학 ; 學藝」로 정의되어 있다.
2) 수학적 「지식」의 현재의 상태에서 볼 때 페르마의 최종정리는 아마 결정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3) 나는 이 논문이 「지식」에 대한 독창적이고 중요한 기여임을 확신한다19).
이처럼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 또는 사유는 문제, 이론, 논증과 같은 사유의 객관적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객관적 세계3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도 문제, 추측, 이론, 논증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통상 모든 이러한 실재들은 본질적으로는 주관적인 심적상태 또는 행위성향의 기호적, 언어적 표현이라고 말한다. 주관주의자들이 이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이유는 책은 독자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때문이다. 즉 그것이 이해되어질 때만 책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검은 점이 찍혀 있는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포퍼는 이것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책은 누군가에 의해서 쓰여진 것일 필요조차도 없다. 예컨대 代數表는 컴퓨터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도 있고 또 그것을 실은 일련의 책들은 컴퓨터에 의해서 인쇄될 수도 있다. 그것은 도서관에 들어가겠지만 사용하기에는 너무 번잡스러워서 이용되지 않은채 수년이 흘러갈 수도 있다. 심지어는 그속에 실린 많은 수치들은 인류가 이 지상에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들의 하나 하나는 내가 「객관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
이 예는 너무 作爲的인 것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거의 모든 책이 이와같다. 책은 眞이든 僞든, 有用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객관적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누군가가 그것을 읽었는지 또는 그 내용을 이해했는지는 상당한 부분 우연적이다. 책을 읽고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설사 그렇지 않다더라도 항상 많은 오해와 잘못된 해석이 있을 것이다. 백지 위에 있는 검은 반점을 책 또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실제 아주 드물 수 밖에 없는 올바른 이해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추상적인 어떤 것이다. 어떤 사물을 책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이해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잠재성, 올바르게 이해되고 해석되거나 또는 잘못 이해되고 해석될 그것의 성향적 성격이다. 어떤 잠재성 또는 성향은 현실화되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을 좀더 분명히 하기위해서 인류가 절멸한 후 새로이 문명화된 우리의 후계자가 몇권의 책 또는 도서관의 장서들을 발견했다고 상상해 보자. 이 책은 그들에게 解讀되어질 수 있을 것이고 그 속에는 전에는 결코 읽히어진 적이 없는 대수표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 어떤 사물을 책으로 변화시키는데는 그것이 사유하는 동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든가 실제로 읽혀지거나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해독되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책이 객관적 지식의 세계3에 속하기 위하여 책은-원리적으로 또는 가능적으로-누군가에 의해서 파악되어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20).
그러므로 객관적 의미에의 지식은 어떤 사람이 안다고 주장하는 것과 전혀 독립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어떤 사람의 신념 또는 동의하거나, 주장하거나, 행위할려고 하는 성향으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래서 포퍼는 세계2와 세계3의 구분을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은 인식하는 자가 없는 인식이다. :그것은 인식주체없는 지식이다21).
이렇게해서 객관적 지식은 주관적 지식과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것이 설득력있는 논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성격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으로 불충분하며 세계2로 환원될 수 없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한 포퍼의 논의를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는 세계3의 자율성(autonomy)으로부터의 논증이고, 둘째는 세계3의 規範的 성격(normative character)으로 부터의 논증이다22).
물론 아마도 이론들은 인간사유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일정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다. 그것들은 지금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생각되지 않았던 객관적 귀결을 가지며 존재하지 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식물이나 동물이 발견되었다는 의미와 동일한 의미에서 발견되어진다. 세계3은 그 기원에 있어서는 人工的 산물이지만 일단 그러한 이론이 존재하게 되면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가진다. 그것들은 이전에 될 수 없었던 귀결을 산출하며 그들은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23).
그 대표적인 예로서 算數체系의 발전을 들 수 있다.
나는 自然數의 계열은 인간의 構成物이라는 브루어(L.Brouwer)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계열을 창조했지만 그것은 이번에는 자신의 자율적인 문제를 창조해 낸다. 홀수와 짝수의 구분은 우리들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았다 ; 그것은 우리들의 창조물의 의도하지 않은 피할수 없는 귀결이다. 물론 素數도 유사하게 의도되지 아니한 자율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다 ;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 우리가 발견해야할 많은 사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골드바하(C.Goldbach)의 추측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간접적으로는 우리의 창조에 관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직접적으로는 우리의 창조물로부터 스스로 출현해 나온 것으로서 우리들에 의해서 통제되거나 영향을 받지 아니하는 문제 및 사실들과 관련되 어 있다 : 그것들은 확고한 사실들이며 그것들의 진리는 통상발견하기 어렵다.
이 사례는 세계3은 우리들에 의해서 창조되였지만 거의 자율적이라고 말했을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예증해준다24).
포퍼는 다른곳에서 셋세계론을 유물론과 관념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3의 대상은 정신속에 있는 관념(즉 세계2)도 아니고 언어적 행위에로의 우리 대뇌의 성향(세계1)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의 어떠한 것도 세계3 대상의 추상적 성격과 특히 그들간에 존재하는 논리적 관계를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한 예로서 럿셀(B.Russell)이 보낸 편지로해서 프레게(G.Frege)가 자신의 저서 「Grundgeset」속에 들어있는 자기모순을 알아내었을 때 이미 그것은 쓰여져 있었고, 부분적으로 인쇄되어져 있었다. 이 자기모순은 객관적으로 수년동안 거기에 있었다. 프레게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즉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없었다. 럿셀만이 프레게의 원고가 완성되었을 때 그 모순을 알아차렸다. 프레게의 이 이론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은 누구에 의해서도 지적당하지 않은 채 또 누구의 대뇌상태가 "이 원고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프레게에게 설득시킴도 없이 수년동안 지속되어 왔다.
요컨대 세계3대상, 그것의 성격 및 관계는 세계2대상으로 환원할 수 없다. 그것은 대뇌상태로도 성향으로도 환원할 수 없다25).
둘째 세계3이 세계2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논거는 세계3이 갖는 규범적 성격 즉 추론에 있어서 妥당性(validity)의 개념이다. 일찌기 할데인(B.S.Haldane)은 논리학의 법칙(규범법칙)은 물리학의 법칙(사실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26)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그는 다음말로 자신의 견해를 요약했다.
만일 유물론이 眞이라면 그것이 眞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나의 견해가 나의 대뇌속에 일어나고 있는 화학적 과정의 결과라면 나의 견해는 논리학의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고 화학법칙에 의해서 규정되어진다27).
요컨대 모든 사고는 물리화학적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모든 사고는 물리화학적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논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주장도 물리화학적 법칙에 의한 것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데인에 의하면 유물론 또는 사실과 규범의 일원론은 자기 논박적이다.
그러나 컴퓨터는 물리학법칙에 따르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학법칙에 따르지 않는가? 이것은 논리학법칙을 물리학법칙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실증적 증거가 아닌가? 이 반론이 성립한다면 규범의 사실에로의 환원이 가능하며 세계3의 독립성에 대한 중요한 논거가 파괴될 것이다. 포퍼는 유물론자와 자신의 가상적인 대화속에서 이것을 재논박하고 있다. (이하 대화에서 P는 포퍼, M은 유물론자 또는 사실과 규범의 일원론자의 약칭이다.)
그는 우선 자신과 유물론자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P : 나는 할데인의 논증에 대한 당신의 반박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즉 컴퓨터는 할데인의 논증에 대한 반박사례이다. 그러나 물리적 원리에 따라서 작동하지만 동시에 논리적 원리 에 따라 작동하는 컴퓨터는 우리-인간정신-에 의해서 고안되어진 것이다. 이것이 왜 컴퓨터가 논리학법칙에 따라서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컴퓨터와 논리학은 세계3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에 속한다.
M :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단지 논리학이나 수학에 관한 책, 컴퓨터 등 물리적인 세계3의 존재만을 인정한다. 당신의 세계3은 사실 세계1의 부분이다.… 그들은 인간두뇌의 산물이다. 그러나 반면 우리의 두뇌는 실제로 고안되어진 것이 아니고 대부분 자연선택의 산물이다. 두뇌는 자연환경에 적합하도록 선택되어졌다. 추론을 위한 성향적 능력은 적응의 결과이다. 추리는 일종의 언어적 행위이고 행위하고 말하고자하는 성향적 능력이다. 자연 선택과는 별도로 행위의 성공과 실패를 통한 적극적 조건화와 소극적 조건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습도 그러한데 그것은 선생을 통해 우리에게 가하는-마치 컴퓨터프로그래머가 컴퓨터에 가하는 것처럼-조건화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합리적으로 또는 지적으로 말하고, 행위하고, 추리하도록 조건지워져 있다28).
논리가 일종의 성향이라면 논리적 추리의 결과에 대해서 더이상 타당성과 부당성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두뇌나 컴퓨터가 실수를 한다는 것 즉 부당한 추리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이것은 논리가 성향의 일종인 것임을 반박하는 것이다. 그래서 포퍼는 세계3의 출현은 부분적으로 자연선택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지만 타당한 추리와 그것의 적용은 세계3에 속하는 것이어서 이러한 방식으로는 모두 설명되어질 수 없다고 한다29). 그러나 타당성, 부당성의 기준은 그 생존에의 적합성 즉 유용성에서 본다면 여전히 논리는 세계1, 또는 2에 속하는 성향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M : 그러나 나는 생리적 성향(더 정확히는 성향적 상태)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 왜 일정한 틀에 따라서 행위할려는 습성으로서의 성향이 당신이 논리적 타당성의 기준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것으로 진화, 발전했다고 보아서는 안되는가 ? 나의 중요한 요점은 그러한 성향이 생존경쟁에서 유용하다는 것이다30).
결국 실용주의적 진리론으로 환원되는데 이것은 「기준」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나 같다. 왜냐하면 어떤 조건에서의 유용성은 다른 조건에서 유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실적 용법이 기준을 확립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사실과 기준간의 구분은 없다31)." 그 경우 그 기준은 더이상 기준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기준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사실로 환원되지 아니하는 세계3의 고유한 대상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포퍼는 세계3이론을 전개하기 이전부터 사실과 규범의 엄밀한 이원론자였다32). 그는 기준은 사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지만 즉 규범의 출현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역사적, 경제적, 정치학적, 인류학적 사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지만 이러한 설명이 할 수 있는 전부는 그렇고 그러한 기준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 자체를 사실로 환원시킬 수 없는데 그럴 경우 그것은 더 이상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타당성, 규범(논리적 법칙이든 도덕적 법칙이든), 기준과 같은 것은 세계2나 세계1로 환원할 수 없는 세계3의 독자적 영역에 뿌리박고 있다.
3ㆍ2.세 세계의 실재성에 관한 논증
앞서 보았듯이 포퍼는 "만일 어떤 것에 작용을 가할 수 있고 그것으로 부터 반작용이 주어질 수 있다면 오직 그때만 그것이 실재한다33)."고 「실재」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세 세계의 실재성에 관한 논증을 결국 세 세계의 상호작용성에 관한 논증이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입수가능한 가장 좋은 논증이 진화론적 논증이다. 진화론은 어떻게 물질적 기초(세계1)에서 생명과 의식(세계2)이 출현했으며 그 의식에서 제3의 존재인 지식(세계3)이 출현했는가를 보여준다. 얼핏보면 진화론은 포퍼의 세 세계의 환원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독립성에 관한 논증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포퍼는 시간상으로는 물질적 기초가 의식을 출현시키고 (세계1의 세계2에의 작용)의식이 지식(세계2의 세계3에의 작용)을 출현시켰지만 일단 출현한 다음에는 그것이 그 내재적 원리에 따라 자립하며 따라서 生成의 원초적 단초로 환원시킬 수 없는 「새로움」 (novelty)을 갖는다고 본다. 더 나아가 이것은 거꾸로 자신을 생성시킨 그 단초에 逆作用하여 그것을 변화시킨다. 포퍼는 이것을 기계론적이고 환원론적인 진화론과 구분하여 「創발的 進化論」 (emergent evolu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 창발적 진화의 과정은 세 세계가 생성되고, 자립화하며, 그것을 통해서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세 세계와 실재성에 대한 가장 설득력있는 논거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 창발적 진화가 함축하는 바는 존재의 끊임없는 새로운 생성인데 이것은 이 우주의 「開放性」 (openness)을 그 전제에 깔고있다.
3ㆍ2ㆍ1.中樞神經系의 출현과 의식
세계1에 해당하는 생명현상 자체에서 의식은 어떻게 출현했는가? 포퍼는 모든 생명체속에 의식이 그 발전의 정도의 차이를 가지면서 심어져 있다는 汎心理主義(panpsychism)를 거부한다34). 의식의 출현은 물질적 기초에서 생명이 출현한 만큼 생명현상에서 진화되어 나온 창발적 현상이다. 그것은 생물학 일반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근원적 새로움이다.
多細胞생물은 두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세포단위의 생명체들이 단순히 群集을 이루고 있을 뿐 그들간의 統合과 分化가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서 대표적인 예가 섬게(seaurchin)와 같은 種이다. 섬게는 다세포수준의 생명체이지만 중추신경계의 결여로해서 환경에 대해서 잠재적으로 가능한 행위방식들 중의 어떤 것을 통제하고, 다른 어떤 대안적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특정환경(예컨대 다른 생명체를 포식해서 에너지를 흡수하는 새로운 생태학적 환경)에서는 단순한 군집의 상태보다는 그 군집을 전체차원에서 분화시키고 통합시키는 것이 생존에 훨씬 유리하며 이것이 중추신경계의 성립을 가져왔다. 이 중추신경계하에서 통합된 다세포수준의 생명체는 외적으로는 독립성을 내적으로는 통합성을 가지는 것으로서 세포수준을 넘어서서 개체(individuals) 수준에로의 진화의 길을 열었다. 이것이 다세포생물의 두번째 형태이다35).
이 중추신경계의 원형적 기능은 생물학적으로 환경에 적합한 양상에 대한 시간, 공간적 定位(location)이며 이것이 신체의 조종과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 공간적 정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特續性을 산출하는 기억」 (continuity-producing memory)이 필요하다. (이것은 신경회로의 相互反響(reverberation)의 일종으로서 추측되어 진다36).
그러나 이것을 지속성을 산출하는 기억이 생명체의 시간, 공간적 정위를 낳고 그것이 생명체의 조종과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는 일방적 인과관계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상호 피드백적 과정으로 이해해야한다. 지속성을 산출하는 기억과 시간, 공간적 정위는 생물학적으로 보아 중추신경계가 산출한 우연한 부산물들이며 개별단위로서는 생명체의 조종과 통제에 아무런 유용한 기능도 할 수 없다. 결정적 전환은 그 두 기능의 결합에 있으며 그 결합을 통해서 비로서 개체가 출현한 것이다. 동시에 또한 지속성을 산출하는 기억과 시간, 공간적 정위가 산출한 개체는 조종과 통제를 가능하게 하지만 역으로 보다 원활한 조종과 통제는 외적으로 보다 독립되고 내적으로 보다 통합된 한 레벨 높은 수준의 개체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을 포퍼는 원형적 형태의 「의식」(consciousness)이라고 본다. 이것을 간략히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포퍼는 그래서 의식의 원형적 형태는 개체적 유기체의 자기통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여기서 그는 동물도 의식을 가졌다고 추측한다. 그는 "생물학적 개체 없이는 정신과 의식은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고37)" "보통 우리가 자아의 통일 또는 의식적 경험의 통일로서 기술하는 것은 생물학적 개체화가 낳은 귀결이라는 것은 아주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38)"고 말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 自我(또는 自己意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개성(individuality), 自我의 통일 또는 유일무이 성(uniqueness) 또는 인격의 동일성을 의식의 존재, 생명의 존재 그리고 개체화된 유기체의 존재이상으로 더 신비한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완전한 의식의 출현(즉 자아의 출현)은‥‥‥ 실제로 가장 중요한 기적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개체화(individuation)와 개성의 오랜 진화의 과정, 중추신경계의 진화와 개체의 유일무이성(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유전적인 유일무이서어에 기인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경험의 유일무이성에 기인한다)에서 본다면 의식과 지성 그리고 자아의 통일이 개체화된 유기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39).
그래서 자아도 유기체의 시간, 공간적 정위에서 그 생물학적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자아에 관한 의식은 자신의 신체의 定位에 대한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정위(예컨대 실신했다가 깨어나면서 "여기가 어디인가? "(where am I)라고 묻는 질문)의 중요성은 그러한 정위없이는 일관성있게 행위할 수 없다는데 있다. 우리가 시간, 공간속의 어디에 있는지 알려고 하는 것은 自己正體性(self-identity)의 일부이다. 즉 우리는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과거와 그리고 바로 앞의 미래에 자신을 관련시키려 하고 공간속에 자신을 定向시키려고 한다40).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1 (중추신경계)에서 세계2 (의식)가 어떻게 생성되는가에 대한 포퍼의 논의를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 의식은 중추신경계에 피드백되면서 중추신경계 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런데 이것은 다시 세계3에 의한 의식의 명료화에 의하므로 의식에서 자아가 어떻게 출현하는가를 검토해봄으로써 논의될 수 있다. 절을 바꾸어 검토해 본다.
3ㆍ2ㆍ2.自我와 언어
포퍼는 「의식」과 인간정신에 특징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것의 고도로 조직화된 상태를 구분하는데 그는 후자를 「완전한 자기의식」 (full consciousness of self) 또는 「自我」(self)라고 부른다. 그는 동물은 의식을 갖지만 자아는 갖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의식과 자아(자기의식)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자는 전적으로 세계2대상이지만 후자는 세계2대상과 세계3대상 특히 언어와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포퍼에게서 자아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규명은 세계2와 세계3의 상호작용의 전형적 범례이며 또한 세계2와 세계3의 실재성의 논거가 될 수 있다고 하겠다.
이 논의는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의식(세계2)이 어떻게 언어(세계3)를 출현시켰는가 하는 문제와 또 하나는 그렇게 출현한 언어가 어떻게 의식을 가지의식 즉 자아로 변화시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첫째 문제부터 검토해보자. 이것은 결국 언어의 기원에 관한 문제인데 포퍼는 네 단계의 언어의 기능을 밝히고 하위레벨의 두 단계가 상위레벨의 두 단계를 산출했음을 밝히고 있다.
기능
(4) 論증기능 (argumentative function)
타당성/부당성 (validity/invalidity)
(3) 記述기능 (discriptive function)
眞/僞(truth/falsity)
(2) 傳達기능 (signal (unction)
효율성/비효율성(efficiency/inefficiency)
(1) 表理기능 (expressive function)
표현성/비표현성(revealing/not revealing)
각 기능에 대해 포퍼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부가하고 있다41).
(1) 표현기능은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이다. 온도계나 신호등과 같은 간단한 기구조차도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나 도구뿐만 아니라 동물(그리고 가끔은 식물)도 그들의 내적상태를 행위를 통해 표현한다. 인간 역시 그렇다.
(2) 전달기능(빌러(Bu¨hler)는 이것을 解발機能(release function)이라고 부른다)은 표현기능을 전제로 하며 그러므로 (1)보다 더 고차적 레벨이다. 온도계는 날씨가 춥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신호등은 신호를 방출하는 기구이다. 동물 특히 새는 경고신호를 발하며 식물조차 (예컨대 곤충에게) 그것을 보낸다. 우리의 자기표현(언어적인 것이든 아니든)이 동물 또는 인간의 반응을 유발할 때 우리는 그것이 신호(signal)로서 받아들여 졌다고 말할 수 있다.
(3) 언어의 기술기능은 상술한 두개의 하위 기능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을 특징지우는 것은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서 眞 또는 僞일 수 있는 언명을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眞과 爲의 도입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술기능을 상위단계와 하위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爲인 기술은 동물(예컨대 꿀벌)의 추상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상위단계이다)
(4) 논증기능은 세가지 하위기능에 타당성과 부당성의 값을 가진 논증을 부가함으로 얻어진다.
포퍼는 언어의 기능으로서 (1)만을 인정하는 것을 「급진적 물리주의」 (radical physicalism), (1)(2)만을 인정하는 것을 「급진적 행동주의」 (radical behaviourism)라 규정하고 그것만으로 인간언어의 기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급진적 물리주의자와 급진적 행동주의자가 인간언어의 분석을 다룰 때 언어의 (1)과 (2)의 기능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물리주의자는 언어 현상의 물리적 설명-인과적 설명-을 제시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것은 언어를 話者의 상태의 표현으로서 해석하는 것과 동일하며 그러므로 그들은 언어의 첫째 기능만을 주장한다. 반면 행동주의자는 언어의 사회적 양상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여기서 언어는 다른 사람의 행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요즈음 유행하는 말을 빌리면 「코뮤니케이션」으로서 화자들이 상대방의 「언어행위」(verbal behaviour)에 상호 반응하는 방식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언어를 표현과 전달기능으로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의 귀결은 파멸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가 단지 표현과 전달기능만을 가지는 것으로 본다면 동물의 언어와 구별되는 인간언어에 특징적인 모든 것 즉 眞 또는 僞인 언명을 만드는 능력, 타당한 또는 부당한 논증을 행하는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물리주의자는 선전문귀, 언어적 협박과 합리적 논증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42).
포퍼의 언어의 4가지 기능을 인정할 경우 우리는 (1)과 (2)가 세계2(그리고 세계1)에, (3)과 (4)가 세계3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는 세계2와 세계3이 중첩되고 있는 중요한 영역이다. 이것은 포퍼의 여러 글에서 확인된다.
언어는 그것의 사용이 선천적이면서 신체외적인 유일한 기관이다43).
인간의 언어는 세 세계에 모두 속한다. 그것이 물리적 행위나 물리적 기초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세계1에, 주관적 심리적 상태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세계2에, 정보(내용)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3에 속한다. 이론, 명제(proposition) 또는 언명은 가장 중요한 세계3의 언어적 실재(third-world linguistic entities)이다.
우리가 "나는 파피루스에 쓰여진 어떤 것을 보았다."고 말할 경우 우리는 세계1에 속하는 언어적 실재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나는 그 강연에서 전달되는 진지성과 확신에 큰 감명을 받았다. "고 말할 경우 우리는 세계2에 속하는 언어적 실재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제임스는 오늘 존이 어제 말한 것과 꼭 반대되는 말을 했다"고 말하거나 플라톤의 철학이나 量子이론에 관해서 말할 경우 우리는 어떤 객관적 含意, 어떤 객관적인 논리적 내용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말해지거나 쓰여진 것으로부터 옮겨지고 있는 정보 또는 메시지의 세계3적 의미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44).
이제 포퍼가 세계2와 세계3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먼저 언어의 기능(1)(2)에서 (3)(4)가 어떻게 생성되어 나오는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포퍼의 저술속에는 여기에 대한 아무런 논의도 찾아볼 수 없다. 포퍼의 이 침묵은 어쩌면 당연한데 이것은 언어학과 인류학의 좀더 많은 성과를 기다려서만 해명될 수 있는 문제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사변적 억측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45).
그러나 본고에서는 세 세계론을 체계화된 형식으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고 포퍼가 시사한 맥락에서 포퍼의 논의를 보완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결국 세계3으로서의 인간언어가 세계2로서의 동물언어에서 어떻게 출현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추측이 될 것이다46).
우선 챤 둑 타오(Tran Duc Thao)의 「言語와 意識의 起源」(Recherches sur L' Origine du Langage at de la Conscience) 이라는 인상깊은 저서에서 시작하고자하는데 그의 특이한 점은 그의 저서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언어와 의식의 기원 둘다를 동시에 문제시하고 있으며 그에게 있어서 둘은 분리할 수 없는 동일한 현상의 두측면이다.
챤은 브렌타노(F.Brentano)와 훗서얼(E.Husserl)의 관점을 수용해서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대상)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으로부터 의식의 본질을 대상에의 志向性(intentionality)으로 보고 있다. 의식이라고 하는 본원적 구조에 대해서 인간행위의 측면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것이 챤에 의하면 指示行爲인데 그는 여기서 언어의 원초적 형태를 찾고 있다.
우리는 보통 대상을 지시하는 몸짓(gesture)이라고 하면 대상을 똑바로 가리키는 직선형의 지시를 생각하지만 챤에 의하면 他者의 주의를 어떤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아치형의 몸짓이 系統발生的으로 그것에 선행한다. 이것을 우리는 아동의 경우에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나 언어습득이후는 급속히 직선형지시로 바뀐다. 이 아치형지시는 前意識的 단계에서 意識的 단계에로의 과도기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고릴라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경우 사육사의 손을 잡고 그 손을 음식 앞에로 유도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표현한다. 이것은 아치형의 몸짓과 흡사한 것으로서 차이가 있다면 고릴라의 경우는 상대방의 신체를 직접 잡아서 대상으로 유도하는 것인데 대해서 아치형도 직선형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에 대해 「거리를 둔」 유도라고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47).
그러나 접촉을 통한 유도와 아치형 유도간에는 형태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적 차이가 있다. 전자에는 의식이 개입되어 있지 않지만 후자에는 의식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대상에의 지향성이며 이것은 지각에 있어서 외부세계의 존재를 전제한다48). 물론 동물은 외적대상을 잘 지각하지만 동물에 있어서 대상의 外在性은 그 자신의 감각운동조직으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대상은 그에게 있어서는 그가 실제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접촉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된다.
동물은 외적 대상을 잘 지각한다더라도 그것을 그 객관적 外在性에 있어써, 「外部로서」 지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意識的인」 지각으로서 인간지각의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특징은 外的 對象을 「外的인 것으로서」 그 객관적 外在性으로 직시한다는 것이다49).
챤에 의하면 이 지시행위는 언어의 원초적 형태이다. 고릴라의 신체접촉에 의한 유도는 단지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기 위한 淸動的인 외침의 몸짓에 의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외양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지시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반면 지시행위는 자신과 분리 된 외부세계로 향하는 것이며(그러므로 정동적 표현일 수 없다.) 여기에는 원초적 형태의 記述機能이 들어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記述은 대상자체가 아니고 대상에 대한 表象(representations)으로해서 가능한데 이 표상은 지각의 주체가 지각의 대상과 분리됨으로써 가능하다50). 그런데 지시행위는 그 둘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챤은 언어의 본질을 記述的 기능에서 보고 있으며 그것의 원형을 지시행위에서 찾고 있다. 이것을 포퍼의 논의속에 도입한다면 접촉에 의한 유도라는 표현기능(세계2)에서 거리를 둔 유도로서 아치형지시, 직선형지시, 그리고 음성언어에 이르는 記述的 기능(세계3)에로의 이행이다. 그러므로 표현기능에 의식이 개입함으로써 지시기능에로의 이행이 발생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논의로서는 아직 불충분한데 언어의 가장 고차적 기능인 논증기능을 설명해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서 3 ㆍ 1 ㆍ 2에서 검토되었듯이 논증기능은 세계3의 고유한 특성으로서 세계2로 환원시킬 수 없는 규범적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 언어의 본질적 성격을 규범성에서 보고 그것의 생성을 동물언어의 전달기능에서 찾고자하는 미드(G.H.Mead)의 견해는 그 불충분성을 보완한다.
미드의 견해는 언어의 전달기능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서 챤의 견해와는 대조적이다. 챤은 사실 마르크스주의의 의식발생론-간단히 말한다면 인간의식은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를 매개로 하는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스스로를 주체로서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견해-을 「指示」의 관점을 중심으로하는 논의에 의해서 언어기원론에 적용해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챤에게 있어서 인간의식은 인간과 자연간의 관련속에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이것에 반해 미드는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 즉 제 개체들의 상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식의 발생과 언어의 기원을 보고자 한다51).
미드는 동물개체들 상호간의 행동에 대한 반응가운데서 서서히 스스로의 情動을 통제해갈 수 있도록 되어 직접적행동으로부터 행동의 간접화에로 다시 말해서 행동, 몸짓의 「記호化에로 전진해가는 과정에서 의식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욕구충족을 둘러싼 여러가지 관계를 기초로한 개체들간의 사회적 교섭과 그 속에서의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상호적 몸짓을 발달시켰으며 이것이 전달기능으로서의 언어의 원형이다.
우리는 지시기능이 표상의식과 결부되어 있는데 대해서 이것은 규범의식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표상의식에 의한 記述기능은 규범의식과 결부됨으로서 비로소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3대상인 언어에 의한 대상의 지시는 지시의 직접적인 몸짓과는 달리 어떤 단어에 의해서 어떤 대상을 지시할 것인가에 대한 전달자와 피전달자(코뮤니케이션집단)간의 약속을 필요로 하며 그 약속이 준수되는 한에서 記述기능은 제 본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52).
포퍼가 언어의 최고기능으로서 보고 있는 논증기능은 그자체 사실로 환원시킬 수 없는 규범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논증기능은 전달기능에 규범의식의 매개를 통해서 생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記述기능은 표현기능에 표상의식이 매개 됨으로써 생성되었다고 보았는데 이제 이것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표상의식과 규범의식의 二重媒介를 통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Ⅱ〉
이렇게 해서 생성된 언어의 記述機能과 논증기능은 세계3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것의 중요성을 포퍼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신체외적이 記述言語-도구처럼 신체외부에 발달시킨 언어-가 없었더라면 비판적 논의를 위한 어떠한 대상도 존재할 수 없다. 記述言語(더나아가 文字化된 언어)의 발전과 함께 언어적인 세계3이 출현한다. 문제들과 합리적인 비판의 기준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방식 즉 단지 세계3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2) 우리가 소유한 인간성과 이성은 바로 이러한 언어의 고차적 기능의 발전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추리력은 비판적 논증의 힘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둘째논점은 표현과 전달의 기능에 촛점을 맞춘 인간의 언어에 관한 이론의 不毛性을 보여준다‥‥‥ 자기를 표현할려고하는 경향을 가진 인간유기체는 그전의 구조에 있어서 언어의 두 고차적 기능의 출현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53).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2로서의 언어(표현기능, 전달기능)와 그것에 대응하는 의식(표상의식, 규범의식)에서 세계3으로서의 언어가 어떻게 출현했는가를 검토해 왔다. 이제 이렇게 출현한 언어가 다시 역으로 세계2에 작용함으로써 어떻게 의식을 가지의식(full consciousness of self), 즉 自我로 변화시키는가를 검토해 보겠다.
포퍼는 인간의 자기의식의 의식일반과의 중요한 차잇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자기의식은 순전히 생물학적 측면의 고찰의 한계 밖에 있다… 나는 동물이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그들도 고통을 느낀다는 것 그리고 개의 경우 주인이 돌아 왔을때 큰 기쁨의 감정을 가진다는 것 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인간만이 그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유기체는 각자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만이 이 프로그램 자체를 의식할 수 있으며 그것을 비판하고 수정할 수 있다.
대부분의 유기체는 그들의 환경을 탐색하고 그렇게 하는데 따르는 위험을 무릅쓰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위험을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 그들은 자기보존의 본능을 가지지만 그들은 죽음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 진리탐구를 위해서 의식적으로 죽음을 감수하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고등동물은 개체마다 어떤 개성을 갖고 있다.… 어떤 개는 용감하고, 상냥하며, 충직하지만 또 어떤 개는 사악하고 잔인하다. 그러나 더 좋은 인간이 될려고 노력할 수 있는 존재 즉 그의 공포와 나태와 이기심을 극복하고 자기통제에 성공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외에는 없다54).
요컨대 자기의식은 자기이면서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자기의식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포퍼는 의식에 언어(세계3)가 개재함에 의해서라고 한다.
단순히 주체이고, 행위의 중심일뿐 아니라 우리자신의 비판적 사유와 비판적 논의의 대상이 겠끔 하는 기초는 인간의 언어이다. 이것은 언어의 사회적 성격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할 수 있으며 그들이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말할 때 그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가능하다.
자아로서의 우리의 특성-인간성, 합리성-은 언어와 기타 타인들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볼때 언어의 사회적 성격은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자아로서, 인간적 존재로서 우리는 모두 세계3의 산물이며 거꾸로 이 세계3은 무수히 많은 인간정신들의 산물이다.
나는 세계3을 인간정신의 산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인간정신은 반대로 이 생산물들에 대해서 반응한다. 거기에는 피드백이 작용하고 있다. 예컨대 화가나 기술자의 정신은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대상에 의해서 큰 영향을 받는다. 또한 그는 타인들-동시대인들 뿐만 아니라 前시대인들도 포함해서-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다른 정신의 산물이고 또한 우리자신의 정신의 산물인 이상 우리자신은 세계3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55).
요컨대 자아는 세계3이론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그것 없이는 자아는 성립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적 주관적 지식(즉 자기의식)은…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이론에 의존한다. 예컨대 우리의 직접적 자기의식 또는 자아에 관한 지식은 우리가 수면상태에 있거나 또는 무의식상태에 있을 때 신체와 그것의 持續的 존재에 관한 세계3이론에 크게 의존한다. 또 이것은 시간(그것의 單線性)에 관한 우리의 이론, 명료성에서 여러 단계가 있는 과거의 경험에 관한 기억의 再生에 관한 우리의 이론에 의존한다… 그래서 나는 자기의식은 이러한 이론들(세계3)에 의존한다고 본다56).
그는 또 다른 곳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의식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자기관찰에 의한 것이 아니며 자아가 됨에 의해서, 우리자신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킴에 의해서이다‥‥‥.
자아가 되기위해서는 많은 것을 습득해야만 한다. 특히 자신을 과거(적어도 「어제))로 연장시키고 미래(적어도 「내일))로 확장시키는 시간감각을 배워야만 한다57). 어떤 초보적인 시간, 공간의 지각에 있어서도 이론적 지향없이는 자아는 없다 그러므로 자아는 부분적으로 환경에 대한 능동적 탐구의 결과이고 낮과 밤의 순환에 기초한 시간의 주기성에 대한 파악의 결과이다58).
지금까지 우리는 포퍼의 세 세계론을 해명하는데 치중해 왔다. 그런데 3ㆍ1ㆍ1과 3ㆍ2ㆍ1, 3ㆍ2ㆍ2의 논의를 종합시켜 볼때 객관적 경험의 가능근거를 찾고있는 칸트의 「先驗的 演繹」(tranzendentale deduktion)과 그 형태상 상당한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3ㆍ1ㆍ1에서 지각경험이 세계1에서 직접 도출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귀납의 성립여부에 의존하는데 그러나 귀납으로서는 경험을 산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논증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규칙성발견의 기대이며 따라서 이것은 세계1에 속하지 않는다. 이 규칙성발견의 담지자가 세계2이며 이것이 바로 의식이다.
그러나 뚜렷한 차잇점도 있다. 칸트의 「先驗的 統覺」(transzendentale Apperzeption)으로서의 자아는 순수자아인데 대해서 포퍼의 자아는 세계3(특히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경험적 자아였다. 포퍼 스스로 이 차이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순수한」이라는 철학적 용어는 칸트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경험에 선행하는」 또는 「경험에 제약되지 아니하는」과 같은 의미를 시사한다. 그러므로 「순수자아」라는 용어는 내가 보기에는 잘못된 다음과 같은 이론과 결부되어 있다. 즉 자아(ego)는 경험에 선행하는 것으로서 모든 경험은 처음부터 데카르트적 또는 칸트적인 "나는 생각한다"(또는 아마 "나는 생각하고 있다" 또는 칸트적 의미에서 純粹統覺)에 수반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에 반대해서 나는 자아가 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선척적 성향의 결과이며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경험 특히 사회적 경험의 결과라고 생각한다59).
여기에 대해서 페르난데스는 칸트의 입장에서 포퍼가 자아가 경험적인 것임을 고수할 경우 자기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선험적 자아 없이 다음과 같은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포퍼는 비경험적 자아가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필수적이라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경험적이고 아 포스테리오리 한 자아 즉 경험으로부터의 학습을 통해 얻어진 자아만이 그의 논의속에 가능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경험으로부터 학습하는 중요한 조건으로서의 자아를 고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식하고, 제작하고, 재구성하고, 파악하는 것은-자아에 관한 이론과 구분되는-바로 이 자아이기 때문이다. 앞서 본것처럼 이것은 세계, 적어도 타인의 존재에 관한 선천적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시간적 과정으로부터 시작해서 그후 인간과 사물을 구분하게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된다고 포퍼는 생각하고 있다. 이 과정은 세계3이론에 의존하고 동시에 기억의 지속적 산출에 의거한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적 주관적 지식은 세계3 즉 (적어도 가능적으로는)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이론에 의존한다. 예컨대, 우리의 직접적 자기의식 또는 자아에 관한 지식은 우리가 수면상태에 있거나 또는 무의식상태에 있을 때 신체와 그것의 持續約 존재에 관한 세계3 이론에 크게 의존한다"(O.K, p.74)그러나 우리가 自我가 되지 않고서 그러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일 자아가 없다면 시간, 공간에 관한 세계3이론을 파악할 수 있는가? 세계3이론을 파악하는 것을 중요한 기능으로서 하는 우주에 있어서 유일한 순수한 활동성의 원천은 「자아」가 아닌가? 세계3이론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미 自我이어야하지 않겠는가 ? … 자아는 자기의식적이지 않고 어떤 것을 파악할 수 있는가? 자신이 자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떤 공간틀속에 어떤 장소를 점하고 있다는 것, 시간은 단선적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가 ?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은 바로 그 자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도 그 인식이 가능한가?60)0
페르난데스는 더 나아가 포퍼는 자기모순으로 해서 선험적 자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게될 경우 포퍼의 견해는 칸트의 견해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만일 우리가 자아이기 위해서 세계3이론을 파악해야만 하고 세계3이론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자아일 수 없다면 어느 것이 선행해야 하느냐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답은 자기의식적 자아는 세계3이론에 항상 先行한다는 것이다. 자아, 이론, 자아, …로 연결되는 계열의 끝에 우리는 더 원시적 종류의 자기의식적 자아 또는 그것의 생물학적 대응물을 발견한다. 결국 이것은 칸트의 선험적 자아에 유사한 것을 인정하는데 이른다. 경험의 객관성에 있어서 자기의식의 역할에 관한 포퍼의 견해는 결국 칸트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입증된다61).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 페르난데스의 비판은 포퍼적 논의를 칸트적 시각에서 본데서 온 오해라고 생각된다. 즉 칸트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포퍼에 있어서 두가지 관점-첫째는 포퍼는 일관되게 의식과 자기의식(자아)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 둘째는 두 종류의 실재가 상호피드백작용을 통해서 새로운 실재를 출현시킨다는 창발적 진화론의 관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포퍼의 논의는 페르난데스가 보듯이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구명 하기위해서 이 관점에서 3ㆍ1ㆍ1과 3ㆍ2ㆍ2의 논의를 요약해보자.
3ㆍ1ㆍ1은 일종의 칸트류의 선험적 연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결과 세계2존재로서의 의식이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임을 밝혔다. 그런데 3ㆍ2ㆍ2에서 다시 이 의식은 진화론적으로 보아 유기체가 개체화해가는 과정에서 생성된 일종의 통합기능임을 보았다. 즉 모든 유기체는-그것이 단세포이든 다세포개체이든 -일종의 예측적 성향을 가지는데 이 성향은 단위의 단일성 즉 통일성을 요구한다. 단세포수준에서는 그 자체 단일단위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으나 다세포수준에서는 그 자체 복합물이므로 통함을 통해 단일단위로 묶는 것이 요구된다. 이것이 진화론상으로 중추신경계를 가진 다세포복합체로서의 개체를 출현시켰으며 이 중추신경계는 지속적으로 기억을 재생하고 시간, 공간적으로 「자기」를 定位하는 기능을 통해 복합적 多를 단일적 -로 통합시킨다62). 그러므로 의식이 통합기능임을 고려할 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지속성을 산출하는 기억과 시간-공간적 정위는 의식의 가능근거이지 않을 수 없다. 또 예측적 성향 즉 규칙성 발견의 기대는 3ㆍ1ㆍ1에서 보았듯이 경험의 가능근거였다. 이 예측적 성향은 다세포복합체의 경우 그 통합을 통해서 가능하므로 그 통합기능으로서의 의식이 바로 경험의 가능근거이다.
요컨대 지속성을 산출하는 기억과 시간-공간적 정위는 의식의 가능근거이고, 의식은 경험의 가능근거이다. 이것이 함축하는바는 지속성을 산출하는 기억과 시간-공간적 정위, 그리고 의식은 그 자체 경험적인 것일 수 없으며 오히려 경험을 규정해 주는 아 프리오리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3 ㆍ 1 ㆍ 1과 3 ㆍ 2 ㆍ 2는 합쳐서 경험의 가능근거에 대한 포퍼류의 선험적 연역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페르난데스의 비판을 검토해볼 때 칸트의 先驗的 統覺 즉 「자아」 (lch)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은 포퍼의 「의식」인가, 「자아」인가? 칸트의 「자아」가 갖는 근본적 기능이 경험의 가능근거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것에 비유될 수 있는 포퍼의 개념은 「자아」가 아니고 「의식」이다. 둘다 경험에 대한 선험적 연역이라는 점에서는 부합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포퍼의 연역은 칸트의 연역을 꺼꾸로 뒤짚어 놓은 것과 흡사하다.
예컨대 포퍼의 경우 지속성을 산출하는 기억은 의식의 가능근거이다. 그러나 여기에 해당하는 칸트의 세가지 종합63)(直觀에 있어서 覺知의 종합, 構想力에 있어서 再生의 종합, 槪念에 있어서 再認의 종합)은 의식의 통일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으로서 의식이 오히려 그러한 종합의 가능근거이다. 그런데 포퍼에 있어서 의식은 동일성의 의식 즉 자기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체화 단일화하고자 하는 경향 또는 潛性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지속성을 산출하는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성을 산출하는 기억이 진화론적 과정에서 유리한 변이로서 출현하며 그것의 결과로 나타난 한 상태가 바로 의식인 것이다. 이 것은 다세포개체의 수준에서 나타난 창발적 현상(emergent appearance)으로서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섬게는 경험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서 학습할 수 없다. 포퍼가 자아의 중요한 본질을 의식의 동일성이라고 본 점에서는 칸트와 일치한다. 그러나 의식의 동일성은 경험의 가능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경험의 결과 특히 세계3(언어, 자아에 관한 이론, 기타 여러 지식들)이 의식에 작용한 逆피드백의 결과이다64).
포퍼적 관점에서 본다면 칸트의 선험적 자아는 진화론상 유기체의 개체화에서 연원하는 자기통합시스템의 발전과 그것에서 나온 세계3 그리고 다시 그것이 주체속으로 역피드백되면서 나온 경험적 자아를 헤겔이 칸트를 비판한 용어를 빌린다면 「轉覆된」(perverted) 형태로 신비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自我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지식의 증대와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해가며 이것은 통합과 통제능력에 비례한다. 중추신경계가 통합과 통제기능을 통해 의식을 출현시고 그것이 「自已」65)를 확장시켜 왔듯이 (보다 진화된 고등유기체의 출현이 그것이 다.) 세계3(문화)은 자기의식(자아)을 출현시키고 그 자기의식은 세계3의 성장과 더불어 확장되어 왔다. 세계3을 통해서 자신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대한 통합과 통제능력의 확장에 따라 역사적으로 우리는 개인적 의식, 사회의 의식 그리고 우주적 의식으로 확장되어가는 自我를 본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표Ⅰ, 표Ⅱ에 덧붙여서 전체를 종합한 도식을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표 Ⅲ〉 세 세계의 상호작용
4.세계3과 객관성의 두가지 의미
포퍼는 세계3이론에 관한 논문들을 묶어서 「객관적 지식」(Objective Knowledge, 1972)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그런데 여기서의 「객관성」의 개념과 L.Sc.D등에서 볼 수 있는 초기의 間主權性으로서의 「객관성」의 개념간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카아(B.Carr)는 포퍼철학에 등장하는 두가지 의미의 객관성(objectivity)을 구분한다. 즉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은 한편으로는 그러한 지식은 어떤 특정개인과는 독립되어 있으며 그것은 개인의 신념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지식은 모든 개인과는 독립적인 것이고 인식주체의 정신 밖에 있는 실체하는 의미이다66).
전자는 객관성을 間主權性과 동일시한다.
「객관적」, 「주관적」이라는 용어에 대한 나의 용어법은 칸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객관적」이라는 낱말을 과학적 지식은 어떤 사람의 변덕에 관계없이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즉 그것이 어떤 누군가에 의해서도 검사되어질 수 있고 이해되어질 수 있다면 그 정당화는 객관적이다. 만일 어떤 것이 이성을 소유한 누구에게라도 타당하다면 그것의 논거는 객관적이고 충분하다67).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객관성을 과학적 개인의 無私公正性에서 보는 주관주의입장을 비판하고 오히려 그것은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또는 공적성격의 결과라고 한다.
과학적 객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과학자개인의 무사공정성의 산물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인 즉 공적인 성격의 산물이다 과학자개인의 무사공정성은 설사 그것이 있다하더라도 과학적 객관성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과학적 객관성은 사회적으로 즉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객관성이다68)."
이것을 카아는 다른 또 하나의 객관성과 구분하기 위해서 「간주관적인 객관성」(inter-subjective objectivity)이라고 부른다69). 그런데 이 간주관성은 어떤 이론이 객관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인식주체의 사유과정을 떠나서 외부로 제시되어야 할 뿐 아니라 비판의 기준까지 제시되어야할 것을 요구한다. 공약가능한 기준이 없다고 한다면 실제로 어떤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간주관적일 수 없다. 앞서 논문에서 검토한 관찰의 이론 부하성은 바로 공약가능한 기준으로서 지각경험을 거부함으로써 간주관성으로서의 객관성을 부인하고 있다. 우리는 앞의 논문에서 지각경험(관찰)의 이론독립성을 재확립함으로써 이론비판의 기준을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간주관적인 객관성을 재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퍼가 사용하는 또 다른 객관성의 의미가 있다. 카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내가 지금 지적하고 싶은 것은 포퍼는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용어를 주관적인 恩惟主체(thought-vehicle)와는 독립적인 사유내용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다. 이것은 객관적 지식의 세계3과 관련된 포퍼의 실재론이며 이것은 포퍼가 그의 형이상학을 지식의 전통적인 「주관주의적 구성」에 대한 수정으로 제시했을 때 전면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이 반주관주의 객관성은 분명히 간주관적인, 합리적인 객관성과는 다르다70)0.
카아는 이것을 간주관적 객관성과 구분하기 위해서 「실在論的 客觀性」(realist objectivity)이라 부른다71).
이런 맥락에서 크리게(J.Kriege)도 "어떤 신념의 外化(externality)72) 또는 그것의 公的 表現은 그 신념의 객관성에 대한 충분조건이라고 포퍼는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73)고 말하고 있다. 포퍼의 다음 귀절은 그것을 입증해준다.
주관적 지식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될 때만 비판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할 때 객관적으로 된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적거나 인쇄한다면 더욱 더 객관적이다74).
이것은 간주관성으로서의 객관성과 다르다. 왜냐하면 이제 상호이해가능한 것을 객관성의 조건으로서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을 책으로 변화시키는데는 이것이 사유하는 동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거나 실제로 읽혀지거나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75).
그러나 우리의 정신에서 독립된 실재라는 것만으로 곧 그것이 비판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비판가능성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人種差別理論에 부여할 수 있는 과학적 위치는 무엇일까? 간주관적 객관성에 입각한다면 이것은 주관적 신념의 표현일 뿐 과학적 이론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실재론적 객관성에 입각한다면 다른 여타 세계3대상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신봉하는 사회적 집단이 있기나 전통의 한 부분이거나 심지어는 그것이 큰 목소리로 말해지고 쓰여지고 인쇄된다면 그것은 객관적이다. 한 공동체내에 인종적 열등성에 관한 이론이 평등성에 관한 이론과 공존한다면 둘다 객관적 이론으로 보아야하고, 인종의 평등성에 관한 이론이 검열에 의해서 발표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인종적 열등성에 관한 이론이 널리 선전되고 인쇄되고 배포된다면 후자가 상대적으로 더 객관적인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실재론적 객관성에 따른다면 인종편견이론이나 또는 널리 수용되고 있는 이론들을 주관적이고, 편향적이며,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公的으로 표현되어지는 모든 이론은 자동적으로 객관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76). 그러므로 정신과 독립된 외적 실재라는 것만으로는 그것의 비판가능적, 합리적 이론선택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그것들을 검사에 부칠 수 있는 간주관적 객관성은 여전히 요구된다. 그러므로 인식주체없는 인식론을 구성함으로써 과학의 합리성을 확보하고자하는 포퍼의 방법은 오히려 비합리적 주관주의의 길을 열어놓는 꼴이 되고 만다.
실제 블루어(D.Bloor)는 포퍼의 세계3이론에서 이러한 결론을 끄집어 내고 있다.
지식의 객관성은 사회적 집단의 일련의 널리 수용되고 있는 신념들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지식이 개인을 초월해서 그를 구속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준다. 이것이 왜 지식이 안정적이며 지속적이며 그리고 인식자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그리고 왜 지식이 세계3을 자신의 본성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명해준다77).
포퍼의 세계3이론을 정합성있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객관성의 개념과 독립성(자율성), 실재성의 개념을 분리하여야 한다고 본다. 우선 과학적 지식은 그것이 정신 밖에 독립된 실재라는 것만으로는 객관적이라 볼 수 없다. 실재론적 객관성은 객관적이기 위한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간주관적 객관성을 가질 때 비로서 객관적이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객관성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앞서의 비판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물론 간주관성 자체가 과연 가능한가를 두고 공약불가능성의 입장에서 비판이 가해지고 있으므로 수정된 견해가 객관성의 조건으로 만족스럽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필자는 포퍼가 세계3이론으로서 제시한 실재론적 객관성으로는 객관성과 합리성을 확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포퍼의 맥락하에서 간주관적 객관성을 개선함으로써 상대주의, 비합리주의에 대한 합리성의 옹호를 시도해 보았다. 이것이 앞 논문에서의 논의였는데 이것이 포퍼의 객관적 지식론에 대한 하나의 좋은 보완이되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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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Papineau (1979), p.28
2) Kriege (1978), p.326
3) O.K, pp.154~155
4) O. U, p.116: S & B, p.10 13 참조.
5) Kriege (1978), p.320
6) S & B p.65
7) Hanson(1965), p.13
8) C & R, p.42
9) O.K, p.4
10) C & R, p.44
11) C & R, pp.44~45
12) L. Sc. D, pp.421~422
13) C & R, p.45
14) S & B, p.133
15) C & R, p.48
16) C & R, pp.47~48
17) O.K, p.110
18) O.K, p.108
19) O.K, p.110
20) O.K, pp.115~116
21) O.K, p.108
22) 자율성에 관한 논증에 대해서는 O.K, p.118 ; O.K, p.160; S & B, pp39~40 참조
23) S & B, p.40
24) O.K, p.118
25) S & B, pp.56~57
26) 할데인의 논증은 포퍼의 용어를 빌린다면 세계3을 세계1로 환원할 수 없다는 논증인데 이것은 세계2로 환원할 수 없다는 논증으로 그대로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논증은 넓은 의미에서 규범(세계3)은 사실(세계1, 세계2)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7) Haldane, J, B, S (1937) The Inequality of Man (Harmondsworth, Penquin Books), p.157; S & B, p.75에서 재인용.
28) S & B, p.76
29) Ibid.
30) S & B, p.78
31) S & B. p.37
32) Popper (1945), vol.1, pp.57~58
33) O. U. p.116
34) S & B, p.71
35) S & B, p,127
36) S & B, p.131
37) S & B, p.113
38) S & B, p.114
39) S & B, p.129
40) S & B, p.128
41) S & B, pp.58~59 ; O.K pp.235~238 참조.
42) S & B, p.59
43) I. A, p.151
44) O.K, p.157
45) 言語의 기원에 관해서 다음 책들을 참고할 것. Lennenberg (1970), Hull (1974), Tran Duc Thao (1973), 尾關周二 (1983)
46) 이하의 논의는 尾關周二 (1983)의 논의를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47) Tran Duc Thao (1973), p.5
48) 이것을 포퍼의 인식론과 관련시켜 보면 의식은 내적 통합성으로서 개체에 의해서 비로소 달성된다. 그런데 챤이 말하는 외부세계의 존재는 바로 이것이 투영된 거울의 反面이다. 즉 외부와 내부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내적 통합없이는 외적구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챤은 이것을 인간에게만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그러나 자기와 외부세계의 완전한 분리가 자아(자기의식)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포퍼의 견해에서 볼 대 이 챤의 의식은 포퍼의 자기의식과 동일하다.
49) Tran Duc Thao (1973), p.6
50) 이러한 관점에서 카시러는 표상이 개재하고 있지 않는 「信號」(sign)와 표상이 개재하고 있는 「記號」(symbol)를 구분하고 후자의 특징을 意識과의 관련성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Cassirer (1955), pp.93∼105 참조)
51) 尾關周二 (1983), pp.74~75
52) Mead (1934), pp.54∼55
53) O.K, pp.120∼ 121
54) S & B, p.144
55) S & B, pp.144~145
56) O.K, p.74
57) 이것과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大腦生理學과 관련하여 흥미있는 사실이 있다. 두뇌의 新皮質은 전엽, 정수리엽, 관자놀이엽, 후두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전두엽은 直立步行 및 시간의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런데 전두엽절제수술을 받는 환자는 「자신에 대한 持續的 느낌」을 잃는 것으로 관찰되고 있다. 그것은 나의 생활과 환경을 어느 정도 조절하는 특성적인 個體라는 느낌, 나의 「나의 것」, 개 체로서의 個性을 잃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自我와 시간의식간의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는 경험적인 임상적 사례이다. (사강 (1978, 1981), p.109)
58) S & B, pp.109~110
59) S & B, p.113
60) Fernandes (1985), pp.200~201
61) Fernandes (1985), p.202
62) 그런데 여기서 페르난데스의 논점은 자기를 定位시키기 위해서는 자기임을 알아야 하며 따라서 자기의 先驗性을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自我의 경험성을 주장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추신경계에 의한 통합, 통제가능한 영역이 「자기」라는데 지나지 않는다.
63) 칸트(1781, 1972), A.98~A.103
64) O.K, p.74
65) 이것은 동일성의 의식으로서의 자아와 구분하기 위해서 가져온 용어이다. 이것은 통제가능 영역외의 함축은 갖지 않는다. 물론 자아도 이러한 특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상이다.
66) Carr (1977), p.216
67) L. Sc. D, p.44
68) Popper (1945), vol.2, p.220
69) Carr (1977), p.217
70) Ibid
71) Carr (1977), p.220
72) 이 포퍼의 실재론적 객관성은 독일 관념론의 「外化」 (Enta¨uβerung)의 개념과 흡사하다.
73) Kriege (1978), p.326
74) O.K, p.25
75) O.K, p.116 ; 그는 덧붙여서 "그것이 解續될 가능성에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즉 그것은 현실적으로 이해되어질 필요는 없으며 누군가에 의해서 이해될 가능성이 있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이 이해가능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국 그것이 해독된 후에야 그것이 해독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을 事後約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해독될 때까지는 그것은 객관적일 수 없고 이것은 앞서의 인용문과 모순된다.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해독가능성을 객관성의 조건으로 두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그것이 이해가능하든 아니든 외부적으로 표현되면 객관적이다.
76) Kriege (1978), p.326
77) Bloor (1974),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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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曺湧鉉
인제대 인문사회과학대조교수
관심분야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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