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체계와 의미.

[ㅍ] 문화의 구조와 인식작업-에코

온울에 2008. 5. 6. 23:04

목 차

I. 迷路로서의 문학
II. 문화의 기호학적 탐구
III. 문화의 논리를 찾아서
IV. 열린 텍스트의 표본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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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지명 社會科學과 政策硏究 
권 13 
호 2 
출판일 1991.  




문화의 구조적 인식작업
(움베르토 에코의 경우)


The Structural Conception of Culture
(In the Case of Umberto Eco)


손병우
(Sohn, Byung Woo)
서울대신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259-9103-06
pp.16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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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迷路로서의 문학
현상으로서의 문화에 관심을 갖고있던 사람이 전문적인 연구자로 성장하면서 자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그 대상인 문화를 하나의 연구대상으로 정립시지고자 하는 것은 나르시즘적인 욕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화 자체에 대한 개념화 작업은 이러한 요구에서 비롯되었을 터인데, 이런 메타언어적 작업은 늘 개념의 출발점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체계화 작업의 형태를 띠게 마련이다.

문화 개념의 기원은 대부분의 문화연구자들의 기억 속에서 확인하기 쉬운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드스블롬(Goudsblom)은 "문화는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개념이며, 그 기원도 의미 파악에 비해서 확인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하면서, 개념의 기원을 정리하고 있다. 1) 월리암스(Williams)는 문화 개념을 18세기 근대적 관념 속에서 태동된 것으로 보는데, 고드스블롬도 17,18세기 영어, 불어 및 독일어에서 사용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때 사용된 문화 개념은 '인간에 의한 인간성의 교화 2), 즉 인간을 보다 숭고한 생활형태로 인도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때 문화는 하나의 이상 형태, 곧 인물주의적 이상으로 개념화 된다. 인간은 생활의 영역에서, 그리고 예술, 철학, 종교, 윤리의 영역에서 이 理想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까닭에 문화 개념은 이런 영역 자체를 일컫는데에 국한되기도 한다. 또, 정치, 경제, 공학 같은 것도 문명의 한 형태로서 여겨지지만, 이들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보다는 수단으로서 파악된다는 점에서 문화와 다르다.

인문주의적 관념은 문화의 개념화의 출발로서 의의가 있지만 문화를 객관적인 연구대상으로 설정하는 시도는 그 이후 19세기에 이루어진다. 인문주의적 관념이 갖는 한계는 그것이 문화를 가치 개입적인 시각으로 정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문화개념을 통해 사회의 위계와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인문주의적인 관념에 기반한 문화개념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엘리트주의적인 문화개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치 판단의 개입을 극소화하여 문화의 개념을 재정립하려는 시도는 인류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문화로부터 진보의 개념을 삭제시키는 것이 된다. 그들은 문화를 하나의 이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경험적 연구에 적합한 '사회적 사실'이나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생활의 모든 활동 범위를 포괄하는 것으로 문화를 개념화한 클렘의 정의, 일반적인 문명의 형태, 다시 말해서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서 문화를 이해하는 타일러 (E.B. Tylor)의 정의 3) 들을 거쳐 인류학 분야에서의 문화에 대한 정의는 대개퍼스(R. Firth)의 것으로 정리된다.

"만약에……사회가 특정한 생활 방식을 가진 유기적인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문화는 바로 생활 방식 그 자체가 될 것이다.'' (Firth, 1951:27; Goudsblom 1988 : 97에서 재인용)

이와같은 인류학적 입장에서의 해석에 따라 문화는 생활의 모든 활동 범위를 포괄하게 되었다. 특히 이 정의는 세 가지 차원에서 문화를 조망하는 시각과 연결될 수 있다. 첫째, 문화를 일반적인 인간의 원리로서, 모든 민간 사회에 나타나는 하나의 일반 현상으로 보는 수준, 둘째, 특정한 사회는 특정한 문화를 갖고 있다는 사회의 생활양식의 수준, 세째, 문화를 사회구성원의 산물이면서 개인의 생활양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보는 관점 등이다. 이것은 문화를 고찰하는 관점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문화를 분절하는 현단계의 인식수준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 그 자체에 대한 이해에 앞서, 문화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다양한 시도들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데 이런 구분법이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또, 이런 구분을 시도한다는 것은 문화의 연구가 총체적인 수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정 영역에 국한시켜 연구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특정 영역이란 예술분야 같은 소재적 차원에서의 영역이 아니라, 그 소재가 무엇이건간에 거기에 접근하는 시각의 영역, 방법론의 영역을 말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의 세 가지 구분이 상호 보완적인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 한, 문화에 대한 정의는 특정한 정의를 내리는 연구영역 혹은 관점이나 방법론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받아들여져야지,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정의로 잘못 이해되어서도, 또 전반적인 정의를 강요해서도 안 될 것이다.

최근 문화에 대한 관심은 특정한 사회의 생활양식으로 문화를 보는 두번째 시각에 개인과의 관계를 보는 세번째 관점이 중요하게 덧붙여지는 양상을 띤다.

문화종속(또는 민족문화), 계급문화, 계층문화(또는 하위문화) 대항문화 등을 최근 문화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로 들 수 있을텐데, 이 주제들은 다른 사회 또는 집단과 구별되는 특정 사회와 집단이 보여주는 생활방식의 독특함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독특한 생활방식이 그 사회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함께 다룬다.

매스 미디어를 대표적인 수단으로하여 지배국가의 문화에 의해 종속국가의 고유문화가 대체됨을 비판하는 문화종속론의 경우 국가 혹은 민족 단위로 문화의 경계선을 긋고 있다.

계급문화를 논의하는 맥락은 이데올로기론의 측면에서 계급지배의 한 기구로서의 문화물, 문화형태들에 대한 비판이라는 한 줄기와, 노동을 하기 때문에 노동계급의 삶속에 유지되고 있는 일과 놀이의 통일성에서 지배 문화가 안고있는 부정성과 부패함을 극복하는 가능성과 전망을 찾으려고 하는 또 한 줄기가 있다. 이것도 역시 계급의 경계선을 따라 문화의 경계가 지어지고 있다.

하위문화의 경우, 대표적으로 상정되는 것이 청소년 문화인데, 그들이 득특하게 구성하는 생활 방식이 그들을 감싸안고 있는 사회 전체의 그것으로 부터 일탈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주목하고,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 즉 대항적 성격으로 논의의 폭을 확대시키고 있다. 하위문화의 경계선 또한 이렇게 뚜렷하게 확인된다.

문화 연구의 최근 주제들에서 실정되고 있는 그 경계선이란 문화의 동일성과 차별성의 경계선이다. 그 경계선 안쪽의 구성원들은 문화적 동일성으로 가정되고, 경계선 바깥 쪽의 사회와는 차별적인 의미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경계선 안쪽에서 이룩된 문화적 동일성이란 그 구성원 개개인에게 미치는 문화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것은 물론 인문주의적 이상과는 다른 의미이지만, 문화에 대한 최초의 정의에서 보였던 교화, 경작의 논리구조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 개념으로부터 개인과의 관련성을 중요시하는 세번째 관점으로의 중심이동이 이루어짐에 따라, 문화의 구조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심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의 구조성에 대한 인식이 있고서야 비로소 문화주의적 오류에 빠지지 않고 문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올바로 이해 할 수 있다. 개인은 문화라는 총체를 구성하는 요소이면서, 그들 개인들이 맺는 상관관계가 문화의 구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특성은 그 구조의 성격인 것이고, 개인에게 미치는 문화의 영향은 구조적 인과율에 따를 것이다. 문화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인식은 분명 문화를 보는 관점의 발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를 보는 인과론의 잘못에서 문화주의적 오류를 빚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4)

이제 이 글의 의도를 밝힐 자리에 이른 것 같다. 문화라는 용어는 그것의 기원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논의의 전개를 정리하는 작업이 꽤 정착되었다고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 자체의 개념 정의가 모호한 채로 남아있는 사정은 결국 '문화는 多談論的(multi-discursive)'이라는 타협점을 받아들이게 한다. (박명진 편저, 1989:116) 다시 말해서 문화의 의미를 고정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것의 담론적 맥락을 규정하는 작업을 우선적 과제로 설정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의 다담론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문화를 사전적으로 정의하는 어려움에서 찾아진 타협점이거나, 도피처라고만 볼 수 없다. 그것은 문화의 사전적인 정의가 오히려 불합리한 것임을 주장하고, 에코가 말하는 백과사전적 정의를 시도하는 출발점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5) 다시 말해서 '문화'의 樹形圖를 구성하는 가지들이 곧 그것의 담론적 맥락들이고, 그 담론적 맥락들은 철저한 자기 한계의 인식을 요구받는다. 이것은 문화의 본질, 혹은 실체를 찾아나서는 작업이 아니라, 문화의 논리를 찾아가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땅속줄기의 특성에 대한 에코의 서술은 문화에 접근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지침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 길지만 인용해 본다.

"‥‥‥‥아무도 전체 땅속줄기에 대해 전체적으로 기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땅속줄기가 다차원적으로 복잡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의 구조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모든 매듭이 다른 모든 매듭과 연결될 수 있는 구조에서는 또한 모순적 추론들의 가능성도 있다. 즉,…‥<p이면 q이다>와 <p이면 q가 아니다>가 동시에 진이 되게하는 것도 포함된다;전체적으로 기술될 수 없는 구조는 <국부적>기술들의 잠재적 함이라고 기술될 수 밖에 없다 ;외부가 없는 구조에서는, 기술하는 사람은 그것을 내부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즉, 그것의 어느 매듭에서든 그 누구도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에 대한 전체적 시각을 가질 수는 없고, 다만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한 국부적 시각을 가질 뿐이다‥‥‥ 땅속줄기에서는 맹목이 보는 유일한 방법이고, 사고란 <더듬어 나아감>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가 흥미를 가지는 미로의 유형이다(Eco, 1978:133-134).

에코는 자신의 작업을 기호학이라는 테두리로 묶고, 그 속에서 문화의 논리를 찾따나서는 수많은 개념들을 미로처럼 엮어놓는다. 그 미로는 땅속줄기 (rhizome)처럼 뻗어있다. 이 글은 그 출발점으로 에코의 기호학 이론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II. 문화의 기호학적 탐구
에코는 <문화의 논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Eco, 1975)을 "기호" 개념에 대한 숙고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문화연구를 기호 개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그의 방식은 자못 흥미로운데, 그 까닭은 하위개념들로 채워져야할 양자사이의 간격이 그리 좁지만은 않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여기에는 어떤 대상을 탐구하는 그의 자세가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자세는 자신의 탐구의 한계 또는 경계선을 명확히 전제한 뒤, 그 경계선의 안쪽 공간을, 마치 미로를 만들듯이, 수많은 관련 개념들로 조밀하게 채워 넣는 것이다. 그런 서술 방식, 곧 사고를 전개시키는 방식은 <기호학 이론>과 같은 방대한 지식들을 정리하고 있는 저서의 체제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짧은 글 <문화의 논리를 찾아서>에서도 그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기호사용을 통해서 사회활동을 한다''(Eco, 1975:11)라는 괴 단정적인 문장으로 글을 시작함으로써 에코는 인간의 사회활동의 여러 국면들 가운데에서 기호사용을 논의의 중심에 둘 것임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기호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는 문화의 논리에 대한 탐구 문제에 이르기까지 논의를 전개시킨다.

인간이 사회 활동을 하는데 사용한다고 그가 말하는 기호는 무엇인가? 이때 기호는 언어 뿐만 아니라, 몸짓, 이미지, 소리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일 것이다. 거기에는 무엇인가를 지칭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도구로서 인위적인 기호 뿐만 아니라, 불을 지칭하는 연기와 같은 자연 기호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기호는 무엇인가? 에코는 퍼스가 내린 정의를 받아들인다. 퍼스의 정의는 이렇다.

"기호는 어띤 것의 어떤 국면과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 대신해 주는 어떤 것이다. " 6)

퍼스의 정의를 에코는 좀더 자세한 설명으로 보충하고 있다.

''기호는 그러므로 부재 (absent)하는 것을 대신하는, 심지어 존재 (exist)하지 않는 것, 혹은 적어도 내가 그 기호를 사용하는 순간에 어디에도 현재(present)하지 않는 것을 대신하는 어떤 것(그것이 자연대상이든, 인위대상이든)이다. "(Eco, 1975:12)

퍼스의 기호학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기호(sign), 해석체 (interpretant), 대상(object)이라는 세 개의 요소들이 만드는 삼각형으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퍼스의 기호학에서 기호는 해석체와의 관계 속에서 조명될 수도 있고, 대상 관계 속에서 조명될 수도 있다.

기호가 해석체와의 관계 속에서 조명된다는 것은 앞서 내린 기호의 정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문제이다. 기호는 부재하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현재하지 않는 것을 대신한다는 정의는 기호가 그것에 상응하는 대상을 보여주면서 설명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그렇기 때문에 기호는 거짓말을 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기호는 또 다른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설명되고, 그것은 또 다른 기호를 사용해서, 또 그것은 다른 것을 사용하는 무한한 소급과정 속에서 설명된다. 이와같은 무한한 기초현상 과정 (the process of unlimited semiosis)이 퍼스의 해석체 이론이다. 퍼스의 해석체 이론을 따라 생각하면, 기호는 다른 기호들의 맥락에서 조명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상 문화 전체의 맥락 속에서 조명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기호차이 문화의 논리를 찾아나서는 하나의 연구분야일 수 있는 근거가 처음 제시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기호는 대상 즉, 그것이 지시하는 사물과 맺는 관계 속에서도 조명된다. 퍼스가 제안한 기호의 유형학 즉, 도상(icons), 지표(indices), 상징(symbols)의 구분은 바로 기호가 자신이 언급하는 대상과 놀이하는 다양한 관계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렇게 퍼스가 제안한 구분들은 아주 중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기호학의 논의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또한 그것의 부족한 점도 확인되고 있다. 에코에 따르면, 기호에 대한 퍼스의 이와같은 정의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대신하는 '어떤 것'이나 대신 되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 라, '대신함'이라는 기능(the function of standing for)이다. 즉, 기호들이란 사실상 관계이기 때문에, 기호를 마치 실체 (entity)인 것 처럼 보이게 하는 기호 유형학(typology of signs)은 성 립될 수 없다. 더욱이 기호-대상의 관계에 대한 관심, 즉 기호가 어떤 것을 언급하는 행위(act of referring to)에 주목하는 기호 사용 이론으로는 기호-기능 7) 을 규정하기에 불충분하다. 기호-기능을 규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다른 것을 대신하게 하기 위하여 사회 혹은 문화에 의해 가정 되는 상관관계를 규정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해석체 이론은 문화의 논리를 찾아나서는 기호학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된다. 그런데 퍼스의 추종자들은 그의 해석체 이론에는 무관심한 채, 기호-대상관계의 국면에만 관심을 쏟아왔다고 한다. 그런 탓에 기호학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출발하고 있는 연장선상에서 대부분의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소쉬르의 주제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상정하는데에서 출발한다. 상관관계라는 착상은 이미 퍼스의 '대신함' 개념에서 제시되었던 바 있는데, 소쉬르에게서 특히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소쉬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를 자의적인 것으로 보고,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사회적으로 수립된 약호임을 주장한다.

또, 소쉬르는 언어가 체계 혹은 구조 즉, 상호대립의 조직망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자료(entity)들은 다른 자료들의 현재 혹은 부재에 의해 자기의 값을 얻는다.

소쉬르의 기호학적 통찰의 중요함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와 체계 개념이 구두 언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기호체계들에서도 역시 적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 데 있다. 즉, 기호체계들의 큰 체계로서 문화적 삶 전체를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의 기호학 연구들이 소쉬르의 유명한 구절 8) 을 인용하면서 출발하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 연유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에코는 소쉬르의 기의 (Signifie) 개념이 9) 엄밀하게 정의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즉, 심리학과 플라톤의 관념론 사이 어디쯤인가에 위치하는 느낌을 갖게된다고 한다. (Eco, 1975:14)10) 이 문제를 풀기위해 에코는 기의에 대해서도 구조적 敎義가 형성되기를 기다려야 했다고 하는데, 구조의미론의 발전에 바탕하여 예름슬레우가 이런 방향으로 길을 열었고, 그에 따라 소쉬르로부터 비롯된 기의 개념이 퍼스의 해석체 이론과 만날 가능성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에름슬래우가 발전시킨 것은 '기표의 내용(content)'에 관한 연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문화의 전반적인 조직에 관한 연구를 가능재하는 이론을 뜻할 수 있다. '기의'에서 '기표의 내용'으로의 이행은 예름슬레우의 개념인 '표현 국면(expression plane)'과 '내용 국면(Content plane)'의 구분에 닿아있다. 기호학적인 관계는 어떤 주어진 물질적 연속체가 추상적인 대립체계에 의해서 적절한 단위들로 분할될 때 존재하게 된다. 이 단위들이 표현 국면을 구성하고, 이것은 또 약호에 의해서 내용 국면의 단위들과 상관관계를 맺는다. 이 내용 국면은 표현 국면에서와는 또 다른 대립체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미론적 단위들이다.

기호는 그러므로 상관관계 즉, 두 개의 기능단위-표현과 내용-를 묶는 함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호의 지시물에 대한 에코의 논의에서 더욱 보완된다(Eco, 1985:76-78) .

흔히 기호의 지시물이 무엇인가를 정립하려는 시도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표현에 대응하는 대상물의 성격에 대한 생각들이 그런 시도이다. 가령 구어적 표현으로서 /개/가 대신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네 집의 특정 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지시물의 법칙을 염두에 둘 사항들은 여기에서 존재하는 모든 개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감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대상물이 아닌, 집합이고 類이고 논리적 실체이다. 이처럼 기호의 지시물이 무엇인가를 정 립시키려는 시도들은 지시물을 추상적인 실채로서, 더 나아가 단지 문화적인 관습이 되어버리는 그런 공상적인 실체로서 정의하게 된다.

그런데 공범 주어 적 (syncategrematic)인 용어 들 ― /에 게 / /의 / /불구하고/와 같은 용어들―은 지시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처럼 지시물로서 의미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의미의 논의에 있어서 실재 대상에 대응할 수 없는 기호―운반체의 존재에 의해서 난관을 맞게 된다. 이 지점에서 에코는 지시물과의 타협으로부터 기저의미 (denotation) 11) 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말의 뜻이란 무엇인가? 에코는 기호학적 견지에서, 즉 약호에 의해 기호―운반체의 체계에 상응하게 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문화적 단위로 본다. 문화에 있어서의 단위란 "문화적으로 정의되고 실체로서 구별되는 어떤 것, 여기에는 사람, 장소, 물건, 느낌, 일의 상태, 관상, 희망, 사상"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단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언어를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하게 한다. 에코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가령 누군가가/그리스도에게는 두 본질이 있어서, 그것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인데, 이것이 한 사람안에 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논리학자나 과학자는 기호―운반체의 이 연쇄가 외연(extension)도 아니고 지시물도 갖지 않은 것이므로 의미를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가짜언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언명을 옹호하거나 반대하기 위하여 수세기 동안 싸워왔는가를 섣명하지 못한다. 에코는 이런 표현이 그 문명 안에 있는 문화적 단위로서 존재하는 간결한 내용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그것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부가의미적 (connotative)인 발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기호는, 그것이 대상이나 상태를 지시하는데 사용되는 방식과는 별개로, 다양한 문화가 세계에 대한 지각을 조직하는 단위들의 체계를 지시한다. "(Eco, 1975:15)

에코의 이 구절은 앞서 정리한 퍼스의 구분법을 상기해 보건대, 기호―대상관계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기호―기능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세계를 지각할 때 어떤 단위들의 체계에 의존하고, 그 단위들의 체계를 문화라고 부르는데, 이때 기호-해석체 관계의 작용 즉, 기호―기능은 그 문화를 지시 (refer to)한다는 것이다.

"텍스트 유형학, 수사학과 이데올로기 연구, 텍스트 생산 연구, 신화, 사회구조, 대상들의 체계, 심지어 경제 관계 등을 기호체계로 이해하는 방법 등, 이 모든 것들은 문화구조(한 사회가 자신이 지각하고, 분석하고, 변형시키는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가 기호구조임을, 그러므로 다른 것을 대신할 수 있는 단위들의 체계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기만 하면 성취될 수 있다. "(Eco, 1975:15)

이렇게 퍼스와 소쉬르를 통해 볼 때 기호 개념과 기호-기능 개념의 합병이 함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 기능단위들은 여러가지 다른 상관관계들 안으로 펀입될 수 있다. 상관관계의 이와같은 유동성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언어 유형들의 의미론적인 풍부함이라든가, 약호들의 창조, 수정, 중복등을 설명할 수 있다.

이처럼 기호―기능 개념이 '기호' 범주 및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대한 느슨한 관점을 위기에 처하게 한다는 것이 분명해 진 것 같다. 즉, 모든 문화 실체는 복수의 상관관계들의 집합으로 펀입되어 다양한 내용들의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는, 어떤 상관관계에서는 표현으로 기능하는 단위가 다른 상관관계에서는 내용이 될 수도 있다(그 역도 마찬가지)는 점에서 볼 때, 표현과 내용은 상호 배제적인 기호학의 대상이라는 엄밀성을 갖지 않는다. 표현과 내용은 어떤 대상이나 사건도 일반 의미관계 안에서 추정할 수 있는 상관적 기능이다.

에코가 발제하고 있는 기호―기능 개념은 문화에 대한 사전적 정의의 펀집증으로부터 벗어나 구체적인 문화 형태 분석에 추상성을 부여하려는 요구에서 고안(재발견)된 첫번째 도구이다. 이 기호-기능 개념을 통해서 문화와 개인 사이의 관계 맺음, 상관관계, 구조화를 명료화시키는 작업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III. 문화의 논리를 찾아서
에코는 모든 문화가 의사소통(communication)이며 의미작용(signification)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연구의 영역을 설정한다. 이런 유형의 연구에서 두 개의 가설이 비교된다. 그 두 개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① 문화 전체는 하나의 기호적 현상으로 연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② 문화의 모든 면은 기호적 활동의 내용으로 연구될 수 있다.

두번째 것이 비교적 온건한 펀이라면, 첫번째 것은 상당히 급진적인 요구이다. 이 급진적 가설은 다음과 같이 구체화 된다.

"문화 전체는 의미작용의 체계에 기초한 의사소통적 현상으로서 연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

이것은 문화가 이 방법에 의해서 연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방법으로 연구함으로써만 그 근본적인 장치가 명료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가설에서 문화 전체를 기호학적으로 되돌린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물질적 생활 전체를 순수한 지적인 사건으로 환원사킴을 뜻하자는 않는다. 문화 전체를 기호학 분야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문화가 오로지 의사소통과 의미작용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만일 문화가 기호학의 관점에서 관찰된다면 더 철저하게 이해될 수 있으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온건한 가정을 하자면, 문화의 개개의 변모가 의미론적 단위가 된다고 말하는 것일 테지만,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화 체계의 단위로 이해되는 의미의 체계가 구조(의미론적 장)로 조직된다고 할 때 기호학의 수준에서 문화 현상 전체를 다루는 방법이 존재함을 뜻하게 된다. 문화에서는 보통 실체 12) 가―가령 원시인의 돌, 현대 사회의 자동차 같은 것들이―기호학적 현상이 되는데, 다시 말해서 이 실체들은 의미작용의 형태로서 (그것이 하나의 기능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의사소통의 내용으로서 (획득된 기능이 상징 수단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된다는 의미에서) 기호가 된다.

이렇게 에코는 비교적 온건한 가설에 서는듯이 논의를 시작하고 있지만, 결국 급진적 가설에 동조하고 있음을 밝힌다.

"의미작용의 법칙들은 문화의 법칙들이다. 그런 이유로 문화는 의사소통적 교환의 끊임없는 과정을 허용한다. 단지 그것이 의미작용의 체계로서 존속하는 한 그러하다. 문화는 기호학적 측면애서 남김없이 연구될 수 있다. "(Eco, 1985:31-37)

에코는 기호학적 측면에서 문화를 연구하는 작업의 출발로서 일반 기호학이론을 정립하는 동시에 다양한 양식의 실체들을 분석한다. 13) 그리고 그런 분석들은 다시 일반 이론을 정리하는 백과사전 속으로 자기의 가지를 찾아들어간다. 의미작용의 법칙을 문화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는 한, 문화는 텍스트로서 분석될 수 있고, 이때 분석도구로 사용되는 약호이론은 독자의 개입을 전제한다. 이렇게 에코의 기호학 이론에서는 문화의 구조성에 대한 인식속에서 문화와 개인의 상관성을 밝히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분석의 순서는 이른 정립의 역순으로 의사소통의 자료들을 통해 의미작용의 체계를 확립할 수도 있고, 약호이론에 따라 문화의 실체들을 분석할 수도 있다. 즉, 그것은 기호의 기능단위들―표현과 내용―이 편입되는 상관관계들의 다양성과 유동성에서 생기는 약호들의 창조, 수정, 중복등에 대한 분석이 된다.

기호의 기능단위들이 펀입되는 상관관계들의 다양성과 유동성은 텍스트의 열림과 닫힘에 대한 인식으로 연결된다. 열린 텍스트와 닫힌 텍스트 개념은 독자의 역할과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는데, 텍스트와 독자는 송신자와 더불어 의사소통 모델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정보이론(information theory)에서 제안한 표준적인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송신자(Sender)-전언(Message)-수용자(Receiver)의 간단한 도식을 띤다. 정보이론의 관심은 정보의 신속하고, 정확한 전달에 있기 때문에, 이 모델은 의사소통 참여항들 사이의 상호작용적인 측면에 대한 기술을 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이 모델에서 전언은 송신자와 수용자 양측이 공통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약호에 따라 해독(decode)될 것이다. 그런데 이때 (1) 다양한 약호와 부차약호(subcode)의 존재, (2) 하나의 전언이 발신되는 사회, 문화적인 다양성, (3) 전제와 추론을 만듦에 있어서, 수용자에 의해 발휘되는 발의 (initiative)의 정도등으로 인하여, 하나의 전언은 여러가지 가능한 의미들이 채워질 수 있는 텅 빈 형식이 된다.

그러므로 흔히 전언이라고 부르는 것은 텍스트로 달리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즉, 여러 다른 약호들에 의존하고, 여러 다른 의미작용 수준에서 작응하는 여러 다른 전언들의 조직망이라는 의미에서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14) 그래서 에코는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여전히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이기는 해도 다음과 같이 교정하고있다.


<표 1>에서 보듯이, 에코가 교정한 의사소통 모델도 그 골격은 정보이론자들의 모델과 기본 발상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 모델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송신자와 수신자가 기반하고 있는 약호에 대한 인식과, 텍스트가 놓이게 되는 맥 락과 환경 요인에 대한 인식이 첨가된 것이 에코가 의사소통 모델에 관심을 갖게된 동기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이다. 송신자는 텍스트의 저자로서의 지위보다는 그가 속해있는 문화 전반의 의미체계를 재생산하는 자로서의 지위로 규정되고, 수신자는 송신자와 별개의 약호에 기반하고 있는 까닭에 약호화된 텍스트와 내용으로 해석된 텍스트 사이에는 차이가 생길 수 있음이 고려되고 있으며, 특히 표현으로서의 텍스트는 그것의 물질적 항구성을 전제하는 전언 개념과 달리 텍스트가 위치하게 되는 맥락과 환경에 따라 수신자와의 교섭과정에서 여러가지 다양한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점등이 이 모델에서 에코가 새롭게 제기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하나의 텍스트는 저자가 의도한 것과 다른 약호의 배경에서 빈번하게 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어떤 텍스트도 어떤 '일탈적인' 해독(aberrant decoding)의 가능성에도 열려있다.

에코는 이렇게 "가능한 모든 해석에 무한하게 열려있는 텍스트를 닫힌 텍스트로 부르자"고 제안한다(Eco, 1979:8).

어떤 저자들은 독자들의 다양한 약호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평균적인 독자들을 마음에 담고 글을 쓴다. 수퍼맨 만화나 007소설 같은 것들이 이 범주에 드는데, 이것들은 미리 파놓은 통로로 독자들을 끌어들여 특정 지점과 시점에 특정효과를 유발시키려 주의 깊게 고안된다. 이런 이야기들에서 에피소드들의 각단계는 뒤이은 진행으로 충족되는 기대를 독자에게 유발시키려 든다. 유동성을 의도하지 않는 그 이야기들은 마치 고정된 계획에 따라 구조화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계획은 빈번하게 실패로 돌아간다. 대중소설로서 이런 텍스트들은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셈이다. 즉, 평균독자를 가정한다. 하지만 그들이 상정하는 평균독자와 비교할때, 선호하고 지향하는 전통과 전제를 달리하는 독자들에게는 동일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결과가 믿기 어려을 정도로 달라질 수 았다. 이 텍스트들의 해석은 이렇게 관점 종속적이다. 그래서 이 텍스트들은 적어도 이데올로기 수준에서는 예측불허의 해석을 일으킬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다양한 방식의 해독들은 서로에 대해서 독립적이다. 그러므로 수퍼맨이나 007에 대한 에코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해독도 여러가지 가능한 해독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처럼 평균독자를 상정하고 일정하게 정해진 방향으로 의미의 발생을 의도하지만, 그런 저자의 의도를 벗어나서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무한하게 일탈해독의 가능성에 열려있는 텍스트를 '닫힌 텍스트'라고 부른다.

닫힌 텍스트에서와 같은 상황―관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읽히고, 그 각각의 해석들은 상호 독립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를 배반할 수 있는 등의 상황―이 '열린 텍스트'에서는 발생할 수 없다. 열린 텍스트의 분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미로같은 구조이다. 독자는 자기가 바라는대로 텍스트를 사용할 수 없고, 단지 텍스트가 그렇게 원하는대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열린 텍스트는, 비록 그것이 '열려있다'고는 해도, 아무 해석이나 다 허용하지는 않는다. 열린 텍스트는 자기의 구조적 전략의 한 구성요소로서의 표본 독자(model reader)에 대한 구체적인 윤곽을 갖는다. 가령 007소설이나 수퍼맨 만화의 독자는 그것의 저자가 마음에 둔 그런 종류의 사람들 뿐만이 아님은 앞에서 말한 대로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유리시즈> 같은 작품의 경우에는 '유리시즈에 맞는 독자'의 프로필이 그 텍스트 자체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석과정이란 텍스트 그 자체로서의 텍스트로부터 독립된 경험적 사건이 아니고, 텍스트의 발생과정상의 구조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적합한 독자 즉, 당연히 해야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을 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표본독자에게 유리시즈 그 자체로서의 유리시즈란 성 립될 수 없다. 그것은 기껏해 야 또 하나의 다른 텍스트가 될 뿐이다. 부적합한 독자와 대가 되는 개념으로서 에코는 이상적인 독자를 내세운다. 이상적인 독자는 수많은 이슈들의 미로를 다루듯이 텍스트를 다루려는 열망을 갖고 있으면서, 여기에 필요한 여러 약호들을 마스터한 사람이다. 이상적인 독자는 텍스트의 어휘적, 구문론적 조직에 의해 엄밀하게 규정된다. 그러므로 텍스트는 바로 자신의 표본독자를 생산한다. 이것이 텍스트의 전략이다. 잘 조직된 텍스트는 한펀으로는 그 텍스트 바깥에서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유형을 전제하고, 다른 한펀에서는 다만 텍스트 형성의 수단에 의해 그런 능력을 구축하도록 작용을 한다.

저자와 독자는 결국 텍스트의 전략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를 주장하려고 한다면 단지 문체적인 개인방언이나, 문장의 주어, 또는 상황평가의 주체로 표현될 뿐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송신자의 유령을 불러내게 되면 그것에 대응해서 수용자 유령도 전제될 따름이다. 문장속에 드러나 있거나 잠재해있는 인칭대명사는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실제의 독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역시 텍스트 전략으로서 의미론적 상관관계들을 확립시키고 표본독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일 뿐이다. 가령 어느 철학자의 철학적 문장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에서 특정 철차자는 다만 그의 문체일 뿐이고, 그의 표본 독자는 그 문체를 재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에코는 저자라는 용어 대신에 표본 독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Eco, 1979:introduction).

IV. 열린 텍스트의 표본독자
지금까지 문화의 논리를 찾아나서는 작업의 시작으로서 에코의 기호학 이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기호개념과 기호-기능 개념을 중심으로 그가 얘기하는 텍스트 개념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에코의 텍스트 개념을 보면서 몇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이런 의문은 기호학자로서의 에코의 개념화가 후기구조주의의 지평에서의 바르뜨의 여러 개념들이나 해체주의에서의 개념들애 견주어 볼 때 떠오르는 것들이다.

먼저, 에코의 텍스트 개념에서는 저자의 의도성이 여전히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인다. 닫힌 텍스트의 경우, 물론 많은 경우 실패로 돌아가지만, 저자는 특정한 통로로 독자의 욕망을 유도하려고 글쓰기의 전술을 수립한다. 또, 열린 텍스트의 경우에도 텍스트의 어휘적, 구문론적 조직에 의해 이상적인 독자가 엄격하게 규정된다고 하는 데에서 볼 수 있듯이, 독자라고해서 누구나 의미를 정착시키는 수권자의 자격을 동등하게 얻는 젓은 아니다. 바르뜨의 경우, 다중적인 텍스트가 촛점을 갖게되는 유일한 장소로서 독자는 의미의 권위로서 저자의 죽음을 댓가로 탄생하고 있다(Barthes, 1977:148). 그와 비교할때 에코의 저자는 여전히 일정한 역할을 부여받는 존재로 남아 있다. 이와같은 그의 태도가 저자와 독자를 유령의 지위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표본독자라는 일종의 문화공간을 수립하는 그의 또다른 태도와 어떻게 조화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은 에코의 기호학을 정리할 때 중요하게 제기되는 과제이다.

둘째, 에코는 전략적 의미에서 경계 수립을 즐긴다. 이런 경향은 현실에 존재하는 학문 분야, 현상, 사물의 모습들을 긍정하고, 포용하는 그의 자세를 말해주는 것이지, 결코 그가 본질주의자라거나, 행태주의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간의, 현상간의, 연구 분야간의 경계설정은 사물에 대한 이해의 명료함과 편의를 위한 그것의 전술적 유용성에도 불구파고 지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해체주의의 경향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해체주의의 입장에서 볼메, 에코의 경계설정 작업은 텍스트를 억제하는 외적 제약으로 여겨질 것이다(Leitch, 1988:168-171).

세째, 이러한 경계의 문제와 관련해서, 에코는 해석과정에 개입하는 문맥(context)과 환경 (circumstances) 요인의 영향을 중시한다. '문맥'은 기븐적으로 하나의 텍스트와 고것을 둘러싼 환경을 상정하며, 이 실체 사이에 어띤 차이가 존재함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경계를 정할 수가 있다. 텍스트에는 태두리가 쳐지고, 경계선이 그어진다. 결국 문맥은 텍스트를 제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해체주의에서 문맥은 반복성 개념을 통해, 그리고 그것의 확장으로서 텍스트상호성 (intertextuality)에 관한 이론화 속에서 전복된다(Leitch, 1988:154; 220-223). 물론 에코 역시 텍스트상호성을 해석과정의 상위단계에 배치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의 기호학이론에서 문맥은 아주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의미발생에 대한 억압을 그는 어떤 수준에서 인정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은 의문점들은 에코에 다가가는 초기 단계에서는 그의 이론이 구조주의의 전반적인 발전 수준에 비해 후진한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내리게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텍스트의 산종(dissemination)에 멀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에코의 합리적인 자세는 일단 안도감을 준다는 점에서 수준차이로서가 아닌 근본입장 차이의 분위기를 짙게 느끼게 된다.

열린 텍스트와 닫힌 텍스트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특히 구조주의의 논의속에서의 뜻을 헨드릭스 (W.O. Hendricks)는 삐아제 (J. Piaget)를 인용하여 정리하고 있다. 삐아제에 의하면 닫힌 텍스트란 "상호간에 안정되고 고착된 관련을 맺고 있는 요소들의 집합으로서 그 체계 '안'의 요소들과 '바깥'의 요소들 사이의 경계가 명료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열린 텍스트는 생물체의 경우에서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데 바깥 세계와의 상호교섭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을 말한다(Piaget, 1970:13-14; 1973:16; Hendricks,1981 :362에서 재인용) . 그러 므로 텍 스트는 내 재 적 폐 쇄 성 (intrinsically closed) 본래 적 개 방성 (inherent open)을 갖는다고 이 해 될 수 있다(Hendricks, 1981 :363). 이런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에코는 텍스트의 내재적 폐쇄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텍스트 해석상황에 촛점을 맞출때 그런 폐쇄성 개념은 논의를 위해 별로 효용을 갖지 못한다. 에코가 닫힌 텍스트를 이야기한 것도 열린 텍스트 개념으로 다가가기 위한 절차로서였다. 그가 말하는 닫힌텍스트란 어떤 종류의 복종하는 협력을 유발시키고자 의도한 텍스트인데,최종 분석에 있어서 이 텍스트는 화용론적 활동에 무한정 열려있다. 그래서 에코는 일탈적 전제 혹은 일탈 상황을 중시하는데, 이런 것들이 결국 텍스트의 비결정 상황(state of indeterminacy)을 산출시킨다. 이런 비결정성을 에코는 열린 텍스트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열린 덱스트는 자신의 미로같은 구조의 발생 전략으로서 표본독자를 폐쇄적으로 투사시킨다. 이 표본독자는 실제 경험적 존재가 아니라 텍스트안에 아로새겨진 존재로서 이상적인 해석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코의 열린 텍스트 개념도 앞서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열린 텍스트와는 뜻을 달리한다. 즉, 앞서 생명체에 비유된 열린 텍스트 개념이 구조적으로는 완결되어 있으나 밖으로부터의 보급이 없이는 구조적 평형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에코가 말하는 열린 텍스트란 구조적 평형성은 영속적으로 유지하되 늘 미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에코는 '미완의 구조적 활력 (incomplete structural vitality)' (Eco,1979:63)이라 표현한다. 그것의 완성은 마치 악보가 연주자에 의해 완성되 듯 표본독자에 의해 수행된다. 비록 아직은 미완의 것이기는 해도 구조적 활력을 보이고 있는 에코의 열린 텍스트와 표본 독자 개념은 그렇기 때문에 수정같은 텍스트와 범접할 수 없는 의미의 원천으로서의 저자라는 한쪽 극단과 해석의 무정부주의라는 다른 쪽 극단의 두가지 오류 모두를 피해가는 중요한 시도의 출발로 볼 수 있다. 열린 텍스트의 표본독자가 바로 이 글에서 찾고자 하는 문화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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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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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s, Raymond 1977 Marxism and Literature. Oxford( 이일환 역, 「이념과 문학」 , 서울 : 문 학과 지성사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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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고드스블롬의 문장을 역으로, "문화는 그 기원을 확인하는 것에 비해서 그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고 바꾸게 되면, 문화에 대한 개념 정립의 어려움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2) 문화(Culture)의 뜻풀이를 그것의 기원으로부터 찾는 작업들은 라틴어의 colere에서 그 어원을 찾고 있고, 관리하다(tend), 경작하다(cultivate)는 뜻이 확산된 것으로 본다. 이런 바탕에서 문화는 비유적으로 정신의 교화(cultura animi)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데, 고드스블롬은 이런 뜻풀이를 인문주의의 이상에 바탕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한다. 윌리암스가 얘기하는 근대적 관념으로서의 문화 개념은 인간적 사회 질서를 이해하고 세우려는 인간능력을 강조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Johan Goudsblom, Nihilism and Culture(Oxford, 1980), 천형균 譯, 니힐리즘과 문화, 문학과 지성사, 1988, p.89.
(3) "문화는 인간과 자연의 교호 작용의 산물이며, 그 결과로서 얻어진 인간 상호간의 접촉의 산물이다." Gustav Klemm, Allgemeine Culturwissenschaft, II, 1855, 고드스블롬, 앞의 책, p.94에서 재인용. "문화란……지식, 신념, 예술, 법, 관습을 포함하는 복합개념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 획득한 어떤 능력과 습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Sir Edward Burnett Tylor, The Origin of Culture, 1871, 같은 책 p.95에서 재인용.
(4) 문화주의적 오류(culturalistic fallacy)란 문화를 완전히 독립적인 요소로 끌어올림으로써 一元主義的 결정론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논자로 비어칸트를 들 수 있다. 비어칸트는 문화를 '집단의 행동지침', '주어진 강제력(given, compelling force)'으로 본다. Alfred Vierkandt, Die Stetigkeit im Kulturwandel. Eine soziologische Studie, Leipzig 1908, 고드스블롬, 앞의 책, p.106 참조. 고드스블롬은 비어칸트의 입장을 그와같은 문화주의적 오류라고 비판하면서, 그 오류의 반박 근거로서 천재의 역할이나 사소한 환경 변화의 결과로 일어나는 우연적인 사건의 존재를 들고 있다(p.107). 그러나 문화주의의 오류는 그런 우연적인 개인의 일탈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평범한 개인들의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문화구성력을 밝히지 못한다는 데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결국 고드스블롬의 비판도 인과론의 시각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던 까닭에 일원주의적 결정론을 온전하게 극복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5) 에코가 비교하는 사전(dictionary)과 백과사전(encyclopedia)은 U. Eco, Semiotics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 1984, Indiana Univ. Press, 서우석, 전지호 옮김, 기호학과 언어철학, 청하, 1987, 제 2 장 참조.
(6) "A sign...is something which stands to somebody for something in some respect or capacity." Collected Papers of Charles Sanders Peirce, ed. Charles Hartshorne and Paul Weis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 Press, 1960, vol. II, p.135.
(7) 에코는 기호의 기능을 기호―기능(sign-function)으로 표기함으로써 그것에 하나의 개념의 지위를 부여한다. U. Eco, 서우석, 전지호 옮김, 기호학과 언어철학, 청하, 1987, 서문참조.
(8)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기호들의 체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글쓰기, 점자, 상징적 의식, 예절, 군사 신호등과 비교될 수 있다. 다만 언어는 이들 체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일 뿐이다. 사회안에서의 기호들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그것은 사회 심리학의 한 부분이 되고, 따라서 일반 심리학의 한 부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이것을 기호학이라고 부를까 한다. 기호학은 기호가 무엇으로 성립되고, 어떤 법칙에 지배되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언어학은 그 일반 기호학의 한 부분일 뿐이다 ; 기호학이 발견하게 될 법칙들이 언어학에도 적용될 것이다. 그래서 언어학은 거대한 인간적 사실들 안에서 잘 정의된 영역을 차지할 것이다." Ferdinand de Saussure, trans. by Wade Baskin,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McGraw-Hill, 1966, p. 16. 위의 구절에서 특히 기호학이 사회안에서의 기호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이라는 서술과 기호학이 기호의 성립과 기호를 지배하는 법칙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규정이 훗날 문화연구에 기호학이 도입될 것을 예견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9) 소쉬르의 기호 개념은 그것을 기표와 기의의 구성물로 봄으로써 기호를 지시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점에서 공시언어학의 길을 연 중대한 인식의 발전으로 평가된다. 기표는 인간이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기호의 물리적 형식이고, 기의는 기호가 지시하는 것에 대한 사용자의 정신적 개념이다.
(10) 에코의 이와같은 불만은 바르뜨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바르뜨는 소쉬르가 제안한 기의의 본질을 '어떤 사물'이 아니고 그 '사물'의 정신적 표상이라고 정리한다. "소쉬르 자신도 그와같은 기의의 정신적 본질을 개념으로 부르고 있다. 황소라는 낱말의 기의는 동물 황소가 아니고, 그것의 정신적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심리학주의의 인상을 준다"고 지적하면서, 바르뜨는 스토아 학파의 분류를 유용하게 도입한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정신의 표상(the mental representation)'과 '실재 사물(the real thing)' 그리고 '말로 나타낼 수 있음(the utterable)'을 구분한다. 이 가운데 기의는 의식성의 행동도 아니고, 실재 사물도 아닌, 의미화 과정 안에서만, 즉 준―동어반복적인 방식으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으로서 '말로 나타낼 수 있음'의 의미에 가깝다고 본다. 그래서 결국 기의에 대한 정의는 순전히 기능적인 규정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바르뜨는 적는다. R. Barthes(1964), trans. by Lavers & C. Smith, Elements of semiology, Hill & Wang, New York, 1967, pp.42-43 참조.
(11) denotation과 connotation의 譯語들은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들어보아도 外延과 內包(천기석, 김두환), 外示의미와 함축의미(박명진), 기저의미와 부가의미(서우석)등 그 펼침에 난맥상을 보인다. 외연과 내포는 논리학에서 이미 extention, intention의 역어로 자리를 잡고 있는 터이므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외연과 기저의미 사이의 차이, 내포와 부가의미 사이의 차이에 관해서는 U.Eco, 기호학이론, p.99에 설명되어 있다). 외시의미와 함축의미의 경우 그것이 Publizit?t를 公示로 변역하는 것을 참고로 할 때, 행위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의미'부분의 비중이 적어지는 점에서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기저의미와 부가의미는 뜻을 앞세워 가공해낸 造語로서 마치 한자의 구성 원리인 六書가운데 會意의 절차를 거친 것 같다는 무리함을 느끼지만, 현재로서는 비교적 무난한 역어로 여겨진다. Greimas & Courtes, 천기석, 김두한 譯, 기호학 용어사전, 민성사, 1988. 박명진 編, 비판커뮤니케이션과 문화이론, 나남, 1989. U.Eco, 서우석 譯, 기호학이론, 문학과 지성사, 1985.
(12) 문화학(culturology)과 문화과학(cultural science)을 구분할 때, 문화학은 인간의 경험과 행동에 미치는 문화 양식의 영향과 관련된 분야로 정의되고, 문화과학은 문화의 양식을 연구하는 분야로 정의된다. 문화과학의 연구가 주로 서적, 회화, 도구 등과 같은 문화 형태의 연구에 촛점을 둔다면, 문화학적 접근 방법은 인간의 행동과 경험의 독특한 양상들을 문화의 영향과 관련시켜 설명하려는 데 목적을 둔다. 에코가 말하는 문화에서의 실체를 문화과학의 연구대상인 문화 형태, 문화 양식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에코의 경우는 문화를 연구하는 분야의 그런 구분 보다는 양쪽의 연구 특성의 유기적인 결합을 전제로하고 논의를 진행시킨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J. Goudsblom, 앞의 책, pp. 119-122 참조.
(13) 이론적 작업은, A Theory of Semiotics(1976; 기호학 이론), The Role of the Reader(1979), Semiotics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1984; 기호학과 언어철학)등을 들 수 있겠고, 실체에 대한 분석은, "Strategies of Lying", "Casablanca, or the Cliches Are Having a Ball", "How Culture Conditions the Colours We See", in Marshall Blonsky ed., On Signs, Basil Blackwell, 1985등과 "Critique of the Image" in Victor Burgin ed., Thinking Photography, MacMillan, 1982 그리고 The Bond Affair, MacDonald, 1966등을 들 수 있다.
(14) 전언이 흔히 그것의 물리적 자질을 중심으로 인식되는 개념이라면, 텍스트는 해독 상황을 함께 고려하는 개념이다. 즉, 전언이 그것의 변하지 않는 외형적 실재를 강조하는 데 그친다면, 텍스트는 자신의 항구적인 존재성을 언제나 유보시키고, 해독자의 약호, 문화적 배경등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음을 인식하는 개념이다. 에코식으로 표현해서, 전언이 스스로를 텅 빈 형식으로 인식할 때, 그것은 텍스트의 지위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