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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칸트 해석(하이데거)

온울에 2008. 5. 7. 10:23

목 차

1.들어가는 말
2.인식의 요소와 통일
1)인식 일반 : 직관과 사유
2)순수직관인 시간과 사유(개념과 범주)
3)인식의 통일: 근원적 종합
3.범주의 선험적 연역
1)범주연역의 규정, 과제와 목표
2)선험적 연역의 두 길
(1)통각에서 시작하는 길
(2)아래로부터, 즉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길
4.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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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새한철학회 
학술지명 철학논총JOURNAL OF THE NEW KOREAN PHILOSOPHICAL ASSOCIATION 
ISSN 1226-9379 
권 26 
호 1 
출판일 2001. 10. 30.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범주연역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을 중심으로)


박필배
(Park, Pil-Bae)
성균관대 ( Sungkyunkwan Univ. )
1-066-0104-04

국문요약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인상의 수용성과 개념의 자발성이라는 두 근원적인 뿌리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직관과 개념은 한 대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인 조건들이다. 그러나 이 두 조건은 하나의 연역을 필요로 한다. 순수오성개념의 연역을 통해 칸트는 감성 내지는 모든 경험대상에 대한 오성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고 결국에 범주의 객관적 타다성을 증명하고자 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형이상학의 정초로 해석한 하이데거는 이 범주의 연역을 그의 존재론 정초를 위한 다섯 단계중의 한 단계로 간주하고 있다. 범주의 연역은 세 번째 단계로서 존재론적 종합의 본질통일의 내적인 가능성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해석은 칸트의 본래적인 소질이나 그 소질의 정식화를 유지하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주저 『존재와 시간』(1927)의 물음 설정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영문요약
Heideggers Deutung von der transzendentalen Kategorien Deduktion i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Nach Kant entspringt unsere Erkenntnis aus der Rezeptivit?t der Eindr?cke und der spontaneity?t der Begriffe. Also sind anschauung und Begriff die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die Erkenntnis eines Gegenstandes m?glich ist. Sie bed?rfen aber einer Deduktion. Durch die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will Kant das Verh?ltnis zur Sinnlichkeit bzw. Zu allen Gegenst?nden der Erfahrung, mithin die objective G?ltigkeit der Kategorien begreiflich machen.

Heidegger, der die ‘Kritik der reinen Vemunft’ als eine Begr?ndung der meta-physik ausgelegt hat, h?lt diesel Deduktion der Kategorien f?r ein Stadium von f?nf Stadien der Grundlegung der Ontologie. Also bedeutet bei Heidegger die Deduktion der Kategorien als drittes Stadium die innere M7ouml;glichkeit der Wesenseinheit der ontologischen Synthesis. Seine Auslegung folgt zwar der inneren Bewegung der kantischen Grudlegung, aber sie h?lt sich nicht an die kantische eigene Dispo-sition und deren Formulierung. Seine Auslegung liegt haupts?chlich in der Fragestellung von ‘Sein und Zeit’(1927).


한글키워드
범주 연역. 통일과 종합. 순수 직관. 자발적 수용성. 의존성
영문키워드
Kategorien-Deduktion. Einheit und Synthesis. Reine Anschauung. Spontane Rezeptivit?t. Angewiesen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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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어가는 말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인상의 수용성과 개념의 자발성이라는 두 근원적인 뿌리에서 시작된다.1) 따라서 직관과 개념은 한 대상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인 조건들이다. 그런데 이 두 조건이 선천적으로, 즉 경험에 무관하게 규정되어 있다면 이 두 조건은 하나의 연역(Deduktion /Rechtfertigung : 정당성)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칸트는 순수직관 형식인 시간과 공간의 연역을 선험적 감성론에서, 순수오성개념의 연역을 선험적 논리학, 특히 개념의 분석론에서 수행하고 있다. 순수오성개념의 연역을 통해 칸트는 감성 내지 모든 경험대사에 대한 오성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고 결국엔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을 증명하고자 한다.

하이데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형이상학의 정초로 해석한 그는 이 범주의 연역을 그의 존재론 정초를 위한 다섯 단계중의 한 단계로 간주하고 있다. 즉 그에 있어서 범주의 연역은 세 번째 단계로서 “존재론적 종합의 본질통일의 내적인 가능성(die innere M?glichkeit der Wesenseinheit der ontologischen Synthesis)”을 의미하고 있다2).

한 체계의 전체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계라는 말의 의미가 보여주듯이 모든 단계는 개별적으로 논구되고 그 상호간의 연관성 속에서 언급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본 논고는 범주 연역의 이전 단계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논구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 이전 단계들, 즉 순수인식의 본질 요소들과 본질통일은 세 번째 단계인 범주연역의 이해를 위해서 필연적인 단계이며 필연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2.인식의 요소와 통일
하이데거가 칸트의 범주연역을 ‘존재론적 종합의 본질통일의 내적인 가능성’으로 해석한 근거를 상세하게 논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하이데거가 자신의 저술인 『칸트책』에서 논구한 형이상학의 정초를 위한 모든 단계를 제시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이러한 단계들을 통해서만 하이데거의 주된 문제인 다음과 같은 물음은 대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의 현존은 존재자를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현존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한 존재자에 의존해야만 하는 데, 어떻게 유한한 본질이 본래의 존재자를 초월할 수 있을까?” (『칸트책)42) 또는 “유한한 본질 자체는 존재자에 내 맡겨져 있어 결국 그 존재자의 수용에 의존해 있는데, 어떻게 그 유한한 본질이 모든 수용에 앞서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을까?” (『칸트책38)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내지 존재론의 정초를 위한 과정을 다음의 다섯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1. 순수 인식의 본질 요소들 2. 순수 인식의 본질 통일 3. 존재론적 종합의 본질 통일의 내적인 가능성 4. 존재론적 종합의 내적 가능성의 근거 5. 존재론적 인식의 완전한 본질 규정 (『칸트책』39f). 이에 따라 범주연역의 단계를 논구함에 앞서 인식 일반에 대한 규정 내지는 인식의 요소와 통일을 언급하는 것은 필요하다.

1)인식 일반 : 직관과 사유
칸트에 따르자면 우리의 인식은 인상의 수용성과 개념의 자발성이라는 두 능력을 지닌다. 그러나 수용성과 자발성이라는 두 능력은 “아마도 하나의 공통적인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뿌리”(A15/B29)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두 능력의 기능들을 교환할 수는 없다: “오성은 아무 것도 직관할 수 없고, 감성은 어떠한 것도 사유할 수 없고, 감성은 어떠한 것도 사유할 수 없다”(A51/B75). 따라서 한 대상의 인식을 위해서는 그 대상 개념을 감성적(sinnlich)으로 만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대상 직관을 오성적(verst?ndlich)으로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칸트의 다음 문구를 매우 특별하게 다루고 있다: “인식이 대상에 직접 관계하고 또 모든 사고가 그 수단으로서 구하고 있는 것은 직관이다”(A19/B33). 하이데거에 따르자면 인식(Erkennen)은 “원초적으로 직관”(『칸트책)21)이다; “인식은 그 본질상 원초적이다. 그러나 사유는 본질을 구축하는 질서로 바로 이 본질에 필연적으로 귀속하나 부차적인 의미만을 지닌다”((『칸트책)21f.주). 하이데거는 모든 사유는 직관을 위한 직무만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유는 직관과 같이 나란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적인 구조에 따라 직관이 원초적으로 끊임없이 향하는 것에 봉사한다(비교『칸트책)22). 그러나 하이데거는 직관에 대한 사유의 본질적인 연관성 때문에 직관과 사유 사이에 확실한 “내적인 유사성”(같은 곳)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데거 자신이 말하듯이 인식은 원초적으로 직관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선 단지 직관이 곧 바로 인식은 아닌 것이다. 유한한 직관인 우리의 직관이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규정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사유의 능력인 오성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칸트가 직관과 사유 사이에는 상호 교환적이며 게다가 완전히 동일한 비중을 차지하는 연관성이 존립하며, 그 결과 인식은 “사유하는 직관”(denkendes Anschauen)일 뿐 아니라 “직관하는 사유”(an-schauendes Denken)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칸트책』23). 그에 반해 하이데거는 직관은 인식을 위해 본질적이며 직관과 사유 사이의 모든 연관에 있어서 본질적이 중요성을 지닌다고 강조한다. 칸트는 “감성과 오성의 두 성질 사이에는 우열이 없다”(A51/B75)라고 언급하는데 반해, 하이데거는 유한한 인식의 본질을 무엇보다도 직관 속에서 파악하고 이에 따라 사유는 단지 직무만을 지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유를 직관 위에서 그 구조에 합당하게 정립하려는 점에서 하나의 순서가 주된 표상으로 드러나 있다고 주장한다(비교 (『칸트책)35).

2)순수직관인 시간과 사유(개념과 범주)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감성론ㅇ에서 칸트는 공간과 시간을 수수 직관 형식으로 논구한다. 그러나 시간은 모든 현상 일반의 선천적인 형식적 조건 인데 반해, 공간은 “모든 외적인 직관의 순수 형식, 즉 선천적인 조건으로서 단지 외적인 현상들에만 한정되어있는”(A34/B50) 것으로 논구된다.

이러한 논제와 함께 하이데거는 공간에 대한 시간의 우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즉 “보편적인 순수 직관(universale reine Anschauung)인 시간은 순수 인식의 지배적이며 주도적인 요소” (『칸트책』49)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순수 직관으로서 공간과 시간이 나란히 주관에 속한다 해도, 시간은 공간에 비해 더 근원적으로 주관에 내재해있다라는 논의를 통해 순수 직관인 시간의 보편성을 고려한다. 게다가 시간은 자기 촉발(Selbstaffektion)로서 “순수 공간을 드러내는 모습, 즉 공간의 명백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칸트책』200)이 기도하다. 그에 따라 시간이 순수한 자기 촉발로 이해되지 않을 경우, 순수 공간은 그의 가장 내적인 본질 속에서 파악되지 못할 것이며, 단순히 “지금 계열의 순수한 연속”(같은 곳)으로 파악될 뿐이다3).

칸트의 논구에 따르자면 주어진 대사이 개념을 통해서 생각되어지고, 이 개념이 직관을 위해 있는 한에서만 그 직관은 한 대상의 인식일 수 있다. 오성은 사유의 능력이며, 이러한 사유는 개념을 통한 인식이다: 생각되어진 것은 항상 개념을 통해서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이 판단 속에 적용되었을 경우에만 가능한 것으로, 결국 오성도 판단을 위한 능력으로 규정된다. 그에 따라 오성의 개념은 판단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유의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순수 오성 개념이라고 불리어지는 “판단 속에서 통일의 기능”(A69/B94)은 한 판단의 논리적 형식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선험적 내용(transzendentalen Inhalt)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과 함께 순수 오성 개념은 선천적으로 그러나 직관 일반에 있어서 잡다의 종합적 통일을 매개로 하여 대상에로 나아간다고 논구하고 있다(비교 A79/B105).

그러나 순수 오성 개념인 범주와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범주의 근원지인 칸트적인 판단표는 오성의 본질에서 전개되지 않았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칸트가 판단표의 비판을 고려하여 결정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그르쳤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순수 오성 개념은 판단표에서 유출된 것도 아니고, 결코 이 판단표로부터 유출될 수 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비교『칸트책』55f). 이와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이제 범주의 본질을 순수 사유와 순수 직관의 관계 속에서 논구한다. 그에 따르면 직관에 대한 직무를 표현하는 순수 사유는 임의적 또는 추후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순수 직관에의 의존성”(Angewiesenheit auf reine An-schauung) (『칸트책』57)에 속한다. 따라서 그는 개념(Notion)인 순수 개념만으로는 순수 인식의 두 번째 요소인 순수 사유의 본질과 기본적인 특성을 드러낼 수 없다고 본다. 결국 그에게 있어 범주는 단지 순수 인식의 두 번째 요소의 “파편”(같은 곳)일 뿐이다. 순수 오성이 순수 직관에 연관되어 있는 곳에서만 범주인 순수 오성 개념의 근원은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다: “유한한 인식의 순수 요소들(순수 사유와 순수 직관)을 격리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그러한 격리의 불가능성은 더욱 더 강렬해지고 직관에 대한 순수 사유의 의존성은 더욱 더 강제된다(같은 곳).”

3)인식의 통일: 근원적 종합
인식의 두 요소, 즉 순수 사유와 순수 직관을 고립적으로 고찰하려고 할 경우, 범주의 본질뿐만 아니라 순수 인식의 통일 문제도 결코 완전하게 파악되어질 수는 없다. 이것은 분명 하이데거의 견해이나 칸트의 입장이기도하다. 칸트 자신도 이미 언급했듯이, 하나의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의 행위, 즉 상이한 표상들을 서로 서로 덧붙이고, 그러한 표상의 잡다를 하나의 인식 속에서 파악하는 종합(Synthesis)을 필요로 한다: “잡다의 종합에 이르러서 비로소 인식을 산출하게 된다(…). 인식의 요소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어떤 내용에로 결합하는 것이랴말로 종합이 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의 최초 기원을 규정하려고 하면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 종합이다”(A77f./B103). 그러나 이러한 종합은 칸트의 경우 “우리 사유의 자발성”(A77/B102)에 속하는 것이고, 개념을 이끌어 내는 이러한 종합은 오성에 속하는 기능인 것이다.

그에 반해 하이데거는 순수 사유의 두 요소의 특성을 이 두 요소의통일과 연관하여 달리 논구하고 있다. 순수 사유의 두 요소, 즉 사유와 직관의 통일은 두 요소보다 더 늦은 것이 아니라, 더 앞서서 이 두 요소 속에 놓여져 있어야만 하고 이 두 요소를 위해 근거지워져 있어야만 한다(비교(『칸트책』58). 이 두 요소의 통ㅇ일은 두 요소의 충돌의 추후적인 결과가ㅏ 아니라, ‘두 요소를 결합하는 것’(das beide Elemente Einigende), 즉 종합(Synthesis)이 이 두 요소를 그 요소의 공속과 통일에서 기인하게 한다(비교 (『칸트책』36). 이러한 통일은 근원적인 통일로 요소들을 결합하며, 바로 이 결합(Einigung)에서 요소 그 자체가 기인하는 것이며, 이러한 결합을 통해 요소들은 그 통일성에서 보전되는 것이다(비교 (『칸트책』58).

칸트에 의하면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본질적인 부분이 필요하다: “순수 직과의 잡다”; “구상력을 통한 잡다의 종합”; “순수 종합에 통일을 부여하는 개념”(A78f./B104). 이러한 인식을 고려하여 하이데거는 종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종합은 직관에도 사유에도 속하지 않고, 이 두 요소를 매개하면서 동시에 이 둘과 유사성을 지닌다. 다라서 이러한 종합은 그의 고유한 근본 특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종합, 즉 순수한 구상력을, 칸트가 순수 이성비판의 제1판에서만 언급한 바 있는, “인간 영혼의 기본 능력”(A124)임을 강조하고, 이 능력인 구상력을 통해 인식의 본질을 구축함에 있어서 종합의 구조를 드러내는 모든 것이 얻어진다고 역설한다(비교 (『칸트책』63).

한 걸음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그의 저술 『칸트책』에서 종합을 세 종류로 설명한다: “진리적 (veritative) 종합; 술어적 (pr?dikative) 종합; 진술적(apophan-tische) 종합” (『칸트책』29). 진리적 종합은 사유와 직관의 통일에 관련되며, 표상 결합, 즉 종합의 합법칙성은 그것을 평가하는 존재자 자신ㅇ으로부터 이끌려진다(비교(『칸트책』15). 그러나 술어적 종합은 하나의 판단, 즉 개념 통일의 표사ㅏㅇ으로 명명되며, 진술적 종합은 주어와 술어의 종합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설명에 따르자면, 술어적 종합과 진술적 종합은 유한한 인식 속에 필연적으로 함께 결합되어져 있으나, 진리적 종합만이 이 유한한 인식의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결국 근원적인 종합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이 근원적인 종합에 덧붙여 순수 직관은 이미 그 자체 속에서 “직관하면서 결합하는 어떤 것”(so etwas wie ein anschauendes Einigen) (『칸트책』60)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제1판에서 직관의 잡다와 관련하여 “개관(작용)”(Synopsis)(A94anm. /A97)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개관 작용은 감관을 통한 잡다의 수용을 의미하며, 결국 감관에 덧붙여지는 것이며 종합에 대응하는 것으로 결코 종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하이데거는 이 개관 작용을 직관 속에서의 한 종합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근원적인 종합을 논구함에 있어서, 이미 그 자체로 종합 구조에서 드러나 있는 것을 결합하는 종합, 즉 순수 개관과 순수 술어적 종합의 종합이라는 문제가 중요시된다(비교 (『칸트책』60f). 선천적으로 주어진 잡다에 관계하는 순수 종합은 순수 직관에서의 개관 작용의 결합에 따른다. 그러나 이 종합이 표상하는 결합으로 처음부터 종합에 귀속하는 통일을 그 자체로, 즉 보편적으로 표상한다는 것도 순수 종합에 속한다: 그래서 순수 종합은 순수 직관에서 순전히 개관 작용에 따라 행하고, 동시에 순수 사유에서 순전히 반성적으로 이루어진다(비교 (『칸트책』63). 따라서 “구조적 중간” (비교 (『칸트책』64)인 구상력의 순수 종합에서 직관의 종합인 순수 개관 작용과 판단에 있어서 순수 종합은 함께 마주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논구에 따른다면 이제 범주의 본질은 존재론적 인식의 본질 통일인 종합의 문제를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데, 여기서 그는 종합에 대한 범주의 의존성, 더 나아가 직관에 대한 의존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점에서 단지 칸트적인 범주 연역의 의미와 과제를 바라보고 있다.

3.범주의 선험적 연역
“현상들의 총체”(A114)인 자연은 오성의 법칙 부여 아래에 놓여지고, 다시말해 오성은 형식적인 의미에 있어서 오성의 법칙 부여를 통해 자연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 결국 오성없이는 그 어디에서도 자연을 찾아 볼 수 없다라는 주장은, 칸트 자신이 말하듯이 코페르니쿠스적인 사유의 전환으로 그 시대의 철학적 상황에 비추어 보면 하나의 혁명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의 증명, 즉 정당성을 필요로 하며, 여기서 칸트는 순수 오성 개념, 즉 범주의 연역을 이끌어 내고 있다. 범주의 연역을 논구하기에 앞서 칸트 범주 연역의 규정, 과제와 목표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을 제시하고, 끝으로 하이데거 자신이 칸트의 범주 연역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논구하고자 한다.

1)범주연역의 규정, 과제와 목표
연역(Deduktion)이라는 용어를 칸트는 정당성에 대한 물음의 증명(quid juris)으로 이해하고 있다(비교 A84/B116). 따라서 『순수이성비판』 내에서 연역은 판단 속에서 주어지는 오성 개념에 연관된 사태 사용의 정당성 내지는 정당한 요구(Rechtfertigung; Rechtanspruch)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사용의 정당성에 대한 증명은 어떻게 대상에 대한 선천적인 관련이 가능한가라는 설명에 기인한다. 칸트의 경우 그러한 설명은 선험적 연역으로, 결국 범주의 선험적 연역은 “어떻게 개념이 선천적으로 대상에 관련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A85/B117)을 의미한다.

칸트에 따르자면 범주는 순수 오성 개념으로 모든 경험적인 것에 무관하게 단순히 오성 능력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 드러나는 개념이다(비교 A65/B90). 따라서 칸트의 경우, 오성의 모든 행위는 판단에로 환원될 수 있고, 게다가 이 판단에서 통일의 기능이 모든 순수 오성 개념을 발견하기 위한 실마리이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 범주의 규정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순수 오성 개념은 직관을 통해서 한 대상이 주어지는 그런 직관 잡다의 형식적 통일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순수 오성 개념은 선천적으로 직관 일반의 대상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공간과 시간 개념의 선험적 연역이 비교적 쉽게 논구되어 질 수 있는 반면에, 범주의 선험적 연역의 어려움을 피력하고 있다. 감성의 순수 직관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매개로 하여 한 대상이 우리에게 현상할 수 있고, 이러한 순수 직관이 “현상인 대상의 가능성을 위한 선천적인 조건”(A89/B122)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현상들은 오성의 범주에 결코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아 보이는데, 현상들은 오성의 기능없이도 단지 직관에서 주어질 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비교 A89/B122). 이러한 어려움은 범주의 선험적 연역의 근본 물음으로 “어떻게 사유의 주관적인 조건이 객관적인 타당성을 지니게 되는가”(A89/B122)에 대한 대답에 관계한다. 결국 범주 연역의 과제는 이러한 물음과 해결과 더불어 설정된 것이다: 범주 연역의 과제는 범주는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선천적으로 경험의 대상에 연관되어있다라는 사실에서 존립하고, 이 과제의 해결은 범주의 개관적 타당성의 제시 내지는 증명을 의미한다.

범주 연역의 과제와 목표에 연관하여 범주 연역의 두 측면이 구별될 수 있다: 주관적 연역의 측면과 객관적 연역의 측면.4) 범주의 객관적 연역에서는 순수 오성의 대상들, 즉 이 오성의 개념이 대상에 연관될 수 있고 그와 함께 객관적인 타당성을 지닌다라는 증명이 문제시된다. 따라서 범주의 객관적 연역은 경험은 범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것을 통해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을 제시한다. 즉 객관적 연역에서 범주는 경험 가능성의 선천적인 조건으로 드러난다(비교 A93f./B126). 그에 반해 주관적 연역에서는 순수 오성 자신이 자기 자신에 기인하는 오성의 가능성과 인식력에 따라 고려되어진다. 그에 따라 오성은 경험의 가능성을 위해 선천적인 토대를 드러내는 주관적인 근원의 빛 속에 놓여있게 된다(비교 A97). 따라서 주관적인 연역은 어떻게 사유하는 능력이 그 자체로 가능한가, 다시 말하면 어떻게 경험은 범주를 통해서만 가능한가를 증명하는 과제를 지닌다5).

이제 칸트적인 범주 연역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 내지는 비판으로 나가보자: 하이데거 자신은 칸트의 범주 연역을 어떻게 규정했으며, 그 과제와 목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나? 하이데거는 우선 왜 선험적 연역이 정당서의 물음 형식을 취하는가? 그리고 그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고, 정당성 물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는 정당성(quid juris)의 물음을 범주 연역의 수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단지 소개의 입장에서만 어쩔 수 없이 이끌었고(비교『칸트책』85), 결국 범주 연역의 올바른 의미는 범주 연역의 정당성의 서술을 통해서는 주어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범주의 연역은 정당성의 물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범주의 “고유한 문제 성향”(eigentliche Problem-tendenz) (『칸트책』69)에서 설명되어져야만 한다. 여기서 그는 연역의 근본 의도를 순수 종합의 구조 전체의 “분석적인 해명” (『칸트책』76)에서 파악하고 있다. 범주 연역 자체는 범주의 본질을 명확하게 밝히는데서 결정적으로 주어진다. 즉 범주는 순수 종합에 의존해있고, 이와 함께 순수 직관에 의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칸트의 경우 단지 정당성의 물음으로 정식화되었던 범주 연역의 과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된다. 단순한 개념 내지는 관념(Notionen)이 아니라, 순수 구상력을 통해서 본질적으로 시간에 연관된 순수 개념인 범주만이 바로 초월(Transzendenz)을 명백히 드러낸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범주 연역의 근본 의도를 “유한한 이성의 초월” (『칸트책』70)을 해명하는데서 보고 있다.

하이데거가 범주 연역을 연관시키고 있는 초월에는 존재자의 유한성이 문제시된다. 앞에서 이미 보여졌듯이, 우리의 인식은 유한한 인식으로 우선적으로 수용하는 직관이나, 그러나 또한 비 수용적인 어떠한 것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처음에 설정했던 물음이 다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유한한 인간의 현존이 본래적인 존재자를 초월할 수 있을까? 결국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형이상학으로 간주한 하이데거는 이러한 형이상학의 정초 문제를 초월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면 초월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경우 존재자는 대립자(Gegenstehendes)로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의 직관은 수용하는 직관으로 자립적이지도 못하고 규정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존재자에는 “대립해 있음 (Entgegenstehen)” (『칸트책』72)의 가능성이 본래부터 그리고 항상 주어져 있어야한다는 필연성이 성립한다. 따라서 유한한 본질인 우리는 또한 이러한 대립해 있음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초월을 존재자에 대한 모든 유한한 태도를 특징짓는 “어떤 것으로부터 대립해 있게 함” 내지는 “순수한 대응을 처음으로 형성하는 어떤 것에 대한 공급” (『칸트책』72)으로 간주한다. 오로지 이러한 초월에서 수용하는 인식인 우리의 인식은 완성될 수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초월, 즉 ‘어떤 것으로부터 대립해 있게 함’을 오성의 근원 개념(Urbegriff) 내지는 근원 행위(urhandlung)라고 특징짓고 있다. 이에 따라 순수 오성은 초월의 능력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하이데거는 초월은 유한성에 관계한다라는 이유로 순수 직관에 대한 순수 오성의 의존성을 강조한다.

범주 연역을 고려하여 하이데거도 연역의 두 측면, 즉 주관적인 연역과 객관적인 연역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연역의 객관적인 측면에는 가능한 객관의 객관성의 분석이 놓여있는 반면, 주관적인 측면에서는 초월하는 주관 자체의 주관성에 대한 물음이 놓여있다(비교『칸트책』165). 그러나 선험적 연역은 그 자체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객관적이며 동시에 주관적인데, 선험적 연역은 초월의 드러냄(폭로)으로 “유한한 주관성을 위한 본질적인 객관성 일반의 제공” (『칸트책』166)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는 객관적 연역에만 범주 연역의 주된 목적을 설정했고 정당한 형식을 부여했으며, 그 결과 객관적 연역과 주관적 연역 사이의 내적인 연관 관계를 오인했다.6) 게다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주관적 연역을 주관의 주관성의 본질을 선험적으로 드러내는 과제로 이끌지 않았기 때문에, 주관의 주관성 문제는 여전히 인간학적 내지는 심리학적으로만 머물러 있지, 선험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본다(비교『칸트책』167)

2)선험적 연역의 두 길
칸트는 범주 연역의 첫 번째 단락(A84/B116 ? A95/B129)에서 범주 연역의 소개를 다루고, 둘째 단락(A95/ - A114)과 셋째 단락(A115 ? A128)에서 본격적으로 범주 연역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각 단락은 다른 방식에서 논구되는데, 즉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둘째 단락은 분류되어진(abgesondert) 그리고 준비적인(vorbereitend) 서술이긴 하나 연역의 증명 목표를 정초해 내고 있다. 그에 대해, 셋째 단락에서는 체계적인(systematisch) 그리고 연관 관계 속에 놓여진 연역이 서술되고, 결국 여기서 연역은 완전하게 통찰될 수 있다. 그러나 연역의 체계적인 표상을 나타내는 세 번째 단락에서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서술방식이 발견된다: “순수 통각에서”(a116) 시작하는 서술과 “아래로부터, 즉 경험에서”(A119)시작하는 서술. 하이데거의 범주 연역에 대한 해석은 바로 여기에 놓여있다. 그에 다르면 범주 연역의 근본 의도는 초월의 해명이다라는 그이 주장과 함께 칸트 범주 연역의 이 세 번째 단락이 초월의 의미를 명확히 드러낸다7).

(1)통각에서 시작하는 길
통각(Apperzeption)에서 시작하는 길에서 하이데거는 구상력의 순수 종합을 직관과 오성의 매개자 (Mittlerin)로 제시하기 위해 “오성의 구조로부터” (『칸트책』78) 이 순수 오성이 순수 종합에, 결국엔 순수 직관에 의존해 있음을 명확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오성이 인식의 통일을 위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라고 묻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오성 내지는 통각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 하이데거가 범주 연역의 해석을 제1판에 한정하듯이 제1판에 따른 칸트의 입장 ?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직관의 모든 사실(Daten)에 선행하는 의식의 통일없이 우리의 인식은 가능하지 않고, 이 의식의 통일에 연관해서만 대상의 모든 표상은 가능하다(비교 A107). 이 순수 근원적이며 변하지 않는 의식이 “선험적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eption)(A107)이다. 이 통각의 선험적 통일은 법칙에 따른 모든 경험적 표상들의 연관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관을 가능하게 하는 통각의 통일은 우리가 “기능의 동일성”(Identit?t der Funktion)(A108)을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만 가능한데, 이 기능의 동일성을 통해서 통각의 통일은 잡다를 종합적으로 결합한다. 따라서 자기 동일성이라는 근원적이며 필연적으로 통일하는 의식이기도 하다(비교 A108). 이 규칙의 통일이 모든 잡다를 규정하므로 이 잡다는 통각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아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 규칙은 바로 표상들의 잡다를 고려한 통각의 통일이며, 이러한 규칙의 능력은 곧 오성이다. 오성은 자연을 위해 법칙을 부여하고, 다시 말하면 오성없이는 그 어디에도 자연은 없고, 결국 규칙에 따른 현상들의 잡다를 종합적으로 통일하려는 것도 가능하지 못하다(비교 A126f). 자연은 단지 통각의 통일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순수 오성은 범주에서 모든 현상을 근원적으로 통일하는 법칙이며, 그리고 그를 통해 경험을 범주의 형식에 따라 우선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한다(비교 A128).

이러한 이해 속에서 구상력(Einbildungskraft)은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가? 우선적으로 구상력은 종합의 기능(Funktion der Synthesis)이다. 구상력은 한편으로 감성(Sinnlichkeit)에 속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성에도 속한다. 게다가 이 구상력은 “인간 영혼의 기본 능력”(A124)이기도 하다. 감관(Sinne)은 우리에게 인상(Eindr?cke)을 제공하나 이 인상을 합성하지는 못하고, 결국 대상들의 모습(Bilder)을 구성하지 못한다. 대상들의 모습을 구성하기 위해선 인상의 수용성 이외에 이러한 인상을 조합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구상력이 직관의 잡다를 하나의 모습으로 이끌어 낸다”(A120). 그러나 재 생산적 구상력(reproductive Einblidungskraft)이 연상 법칙에 따라 표상들을 결합하고, 이에 따라 표상 결합의 주관적이며 경험적인 근거인데 반해(비교 A121), 생산적 구상력(productive Einbildungskraft)은 오성의 규칙에 따라, 범주에 적합하게 표상들을 결합한다(비교 A123). 그러나 여기서 이미 구상력의 종합은 감성에 대한 오성의 영향을 의미한다. 결국 생산적 구상력은 표상들을 연상하게 하는 객관적 근거, 즉 통각의 통일이라는 원칙에서 나타나는 “친화성(Affinit?t)(A122)을 필연적으로 이끌어 낸다. 따라서 칸트가 경험은 단지 구상력의 선험적 기능을 매개로 해서만 가능하다고 언급한 것은 놀라운 사실인데, 그의 변함없는 주된 입장은 순수통각의 고정 불변하는 자아가 우리의 모든 표상의 상관자(Korrelatum)를 드러내고, 모든 의식은 모든 것을 파악하는 순수 통각에 속한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 구상력은 그 기능을 “지성적”(intellektuell)(A124)으로 만들기 위해 통각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은 구상력의 종합 그 자체는 항상 감각적(sinnlich) 임을 나타내는 것인데, 구상력의 종합은 잡다가 직관에서 현상하는 한에서만 이 잡다를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가 하이데거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이데거 자신이 항상 강조하듯이 오성의 가장 내적인 본질은 직관에의 의존성이다. 오성의 의존성이 “오성의 오성다움”(das Verstandseein des Verstandes)(『칸트책』148)이며, 이 오성의 오성다움은 순수 구상력의 순수한 종합에 놓여있다. 하이데거는 구상력을 본래적인 이중적 의미(eigentliche Doppelsinne)에서 형성(Bilden)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직관하는 능력(Verm?gen anzuschauen)으로 구상력은 형상 창출의 의미에서 형성적(bildend)이며, 또 한편 직관할 수 있는 것의 현존에 의존해 있지 않은 능력(ein auf Anwesenheit des Anschaubaren nicht angewiesenes Verm?gen)으로 구상력은 스스로 완성된다, 즉 구상력은 형성을 창출해 낸다. 이 형성하는 힘은 “수용적 (hinnehmend; rezeptives)인 형성이며, 동시에 창출하는, 즉 자발적”(schaffend; spontanes) (『칸트책』129)인 형성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구상력은 자발성과 수용성이라는 두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 순수 직관은 그 자신의 순수성 때문에 자발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순수 자발적 수용성인 순수 직관은 자신의 본질을 선험적 구성력에서 지닌다. (비교 『칸트책』141ff). 따라서 선험적 구상력은 “수용적 자발성”(rezeptive Spontaneit?t) (『칸트책』155)을 의미한다.게다가 하이데거는 순수 사유의 유한성과 순수 직관에 대한 의존성을 근거로 하여 “오성의 수용성”(Rezeptivit?t des Verstandes)( 『칸트책』153)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와는 무관한 하이데거 자신에게만 고유한 근본 능력인가? 칸트적인 의미로 본다면 구상력은 인식을 위한 근본적인 힘(Grudkraft)이긴 하나,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비교 A15/B29).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선험적 구상력은 순수 직관과 순수 사유 사이에 있는 한 능력이 아니라, 두 요소의 근원적인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능력이다. 따라서 순수 구상력은 근본 능력으로 인식의 두 요소, 즉 순수 직관과 순수 사유 어디에로도 환원될 수 없다.

비록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제1판에서 인식을 위한 요소로 세 개의 근원, 즉 감관, 구상력, 통각을 단지 두 번 언급하고 있지만(비교 A94/A115), 칸트의 주된 입장은 우리의 인식은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 근원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식의 통일을 위한 세 계기(drei Momente)로 순수 직관(시간), 구상력(의 종합), 순수 통각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칸트가 구상력을 “영혼의 필수적인 기능”(unentbehrliche Funktion der Seele)(A78)과 “인간 영혼의 근본 능력”(ein Grundverm?gen der menschlichen Seele)(A124)으로 표현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칸트의 경우 이러한 구상력의 능력은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근원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선험적 구상력을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 줄기의 뿌리(Wurzel)로 간주한다. 따라서 선험적 구상력은 근원적으로 결합하는(urspr?nglich einigend) 것이다. 즉, 고유한 능력으로서 선험적 구상력은 이러한 구상력을 위해 본질 구조적인 연관을 지니는 두 줄기, 즉 감성과 오성의 통일을 형성한다. 결국 근원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순수 구상력에서 결합하는 것은(das Einigende) 결합되어 질 요소들(zu eini-gende Elemente)에 본래적으로 자라고 있지 않을 수 없다(비교『칸트책』140). 이 근원적인 통일의 형성은 결합(ein Einigen)으로 완성되며, 이 결합의 구조 전체를 위해선 통일의 선취(Vorhabe)가 요구된다.

(2)아래로부터, 즉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길
아래로부터, 즉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길에서 하이데거는 구상력의 순수 종합이 바로 직관과 오성의매개자(Mittlerin)임을 명백히 드러내고자 한다(비교『칸트책』82). 그는 칸트가 범주 연역에서 시간에 대한 순수 구상력의 필연적인 본질 연관성을 상세하고 ㅁ여확하게 논구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칸트는 시간을 임의적인 장소(ein beliebiges Feld)로 간주하고, 구상력은 자신을 증명할 목적으로 이 장소에 우연히 한 번 들러 보는 것쯤으로 파악한다(비교 『칸트책』175). 그에 따라 칸트는 시간을 순수한 지금계기(reine Jetztfolge)로 설정했으나, 이 시간 개념을 결코 시간의 근원성에서 파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있어서 선험적 구상력은 곧 “근원적인 시간”(urspr?ngliche Zeit) (『칸트책』187)을 의미하는데, 선험적 구상력의 근원적인 결합은 그 자체로 시간 연관된(in sich zeitbezogene) 결합이며, 바로 이 결합이 시간을 우선적으로 형성시키기 때무이다(비교『칸트책』175).

이제 선험적인 구상력은 근원적으로 결합하는 중간일 뿐만 아니라,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 줄기의 뿌리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강조한다: “선험적 구상력을 두 줄기의 뿌리로 해석하는 일은 자연히 이 뿌리의 뿌리박힘(Verwurzelung), 즉 근원적 시간에로 환원됨을 의미한다”(『칸트책』196). 그는 순수 종합의 양상들(Modi), 즉 순수 각지(reine Apprehension), 순수 재생산(reine Reproduktion) 순수 재인식(reine Rekognition)을 시간의 양상들, 즉 현재(Gegenwart), 현재성(Gewesenheit), 미래(Zukunft)에 따라 논구한다(비교『칸트책』179ff). 순수 종합의 세 양상은 그 자체 근원적으로 일치하며 시간 형성적이며, 시간 자체의 시간화(Zeitigung)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순수 종합의 세 양상은 시간 양상들을 결합하는 시간 속에서(in der dreifach-einigen Zeit) 근원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순수 인식 요소들의 근원적인 결합 가능성도 이 순수 종합의 세 양상에 놓여있다. 시가의 세 양상, 즉 현재, 현재성, 미래등을 근원적으로 결합하는 형성이 결합(Einigung)을 가능하게 하고, 이 결합의 통일(Einheit)에서 초월이 형성된다(비교『칸트책』196). 결국 근원적인 시간인 선험적인 구상력은 그 자체 본질적으로 자발적 수용성이며 동시에 수용적 자발성인 것이다. 이러한 통일에 있어서만 자발적 수용성인 순수 감성과 수용적 자발성인 순수 통각은 서로 공속할 수 있다.

자발성과 수용성의 두 이질적인 특성을 지니는 하이데거적인 시간의 의미를 더 명백히 하기 위해 시간과 자기임(selbstheit)의 관계에 대한 논구가 필요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는 그의 범주 연역에서 시간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이 시간의 통각과의 관계를 논하지 않았고, 결속(Verbindung) 내지는 종합(Syn-thesis_은 오성의자발성에 속하기 때문에 시간이 속해 있는 감성 자체에는 어떠한 결속성(Verbundenheit)도 가능하지 않다라는 사실만을 지적했다. 칸트가 시간과 공간을 수용성의 조건으로 논구하고 사유 내지는 통각을 자발성의조건으로 논구했을 때, 어떻게 순수 사유가 시간 특성을 지닐 수 있을까?8) 실재로 칸트는 범주 연역을 고려하여 시간을 순수 직관 형식으로서 단지 감관의 촉발 내에서만, 다시 말하면 수용성의 조건으로만 설명한다. 따라서 시간 자체는 결코 자기 활동성에 관련된 종합이라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비교 A77/B102).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모든 대상 표상은 필연적으로 시간에 의해 촉발되고, 게다가 시간은 스스로 촉발된다: “시간은 그 본질상 순수한 자기 자신의 촉발이다”(『칸트책』189). 모든 촉발은 이미 현존하는 존재자의 자기 통보(das Sich-melden)이며, 시간은 순수 직관으로 이 직관 속에서 형성된 직관되어진 것(das in ihr gebildeten Angeschauten)과 함께, 게다가 경험의 도움없이, 자기 자신에 관계하기 때문에, 시간은 순수 자기 촉발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순수 자기 촉발인 시간은 유한한 주관의 본질에 속하는 자기 자신에 관련된 어떤 것(so etwas wie Sich-selbst-angehen)의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에 “주관성의 본질 구조”(die Wesensstruktur der Subjektivit?t)(『칸트책』189)를 형성한다. 대립해 있게 함 자체(das Gegenstehenlassen als solches)를 순수하게 촉발한다는 것은 “어떤 것으로부터 순수하게 대립해 있게 함”(das reine Gegenstehenlassen von …), 즉 순수 통각에 “어떤 대립적인 것”(so etwas wie ein Gegen-es) (『칸트책』189f.)을 이끌어 대는 것을 의미한다.결국 시간은 통각의 내적인 가능성에 속하고, 자기(das Selbst)가 자기 의식과 같은 어떤 것(so etwas wie Selbst-bewuβtsein) 일 수 있는 정도로 유한한 자기성(endliche Selbstheit)을 근원적으로 형성한다. 시간은 자기성 자체의 본질 속에서 형성되어야 하며, 이와 함께 이 자기성을 우선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시간은 유한한 자기 자체의 “선험적인 근원 구조”(transzeendentale Urstruktur) (『칸트책』191)를 부여한다. 하이데거는 시간과 통각은 더 이상 결합할 수 없이 그리고 이질적으로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며, 칸트도 이 둘을 , 비록 그가 이 둘 자체를 명확하게 보지는 못했더라도, 그것의 근원적인 같음(urspr?ngliche Seelbigkeit) 속에서 함께 이끌어 내고 있다고 언급한다. (비교『칸트책』191f.): 근원적인 시간인 자아(das Ich)가 어떤 것으로부터 대립해 있게 함(das Gegenstehenlassen von …), 즉 초월을 형성한다.

4.맺는 말
왜 칸트는 제1판에 따른 오성 개념, 즉 범주 연역의 논구를 제2판에서는 완전히 새롭게 시도했는가? 이데 대한 근거로 그는 제2판 서문(Vorrede)에서 범주 연역의 애매성(Dunkelheit)을 벗어나기 위해 개량을 시도했다라고 말한다(비교 B ⅩⅩⅩⅤⅢ).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칸트의 변화된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제2판의 범주 연역이 일종의 개량을 의미하는가? 인간 영혼의 근본 능력이 선험적 구상력이 삭제되고, 이 구상력의 기능이 단순한 자발성인 오성에 위임된다면, 순수 감성과 순수 사유를 그의 통일성을 고려하여 파악하려는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기본 입장으로, 칸트는 제2판의 범주 연역에서 구상력의 주된 역할을 오성으로 환원해 버렸고 결국 순수 감성과 순수 직관인 시간의 의미를 그르치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비판한다. 그 때문에 하이데거는 원칙적으로 제2판보다는 제1판을 선호하고 우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칸트의 경우에 있어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에서도 개량은 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제2판뿐만 아니라 제1판에선 이러한 관계를 매개해주는 구상력의 역할을 부각 시킴으로 해서 사유의 기능인 범주가 애매하게 남아있던 반면, 제2판에서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선험적 자기의식(Apperzeption)의 통일성에 의해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이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직관, 즉 시간에 대한 범주의 의존성을 근거로 오성은 범주 연역에서 ? 제1판에서 뿐만 아니라 제2판에서도 ? 그의 우위를 포기했고, 오성의 본질은 시간에 연관된 선험적 구상력의 순수 종합 속에 놓여있다고 역설한다: “순수 구상력을 순수 사유의 기능에서 논구하는 모든 설명은 순수 구상력의 특별한 본질을 오인하는 것이다” (『칸트책』197).

하이데거 자신이 말하듯이 그의 칸트 해석은 칸트적인 정초라는 내적인 동요에 따른다(비교『칸트책』4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이 해석은 칸트의 본래적인 소질이나 그 소질의 정식화를 유지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의 해석은 오히려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1927)의 물음 설정 위에 놓여있다: 『순수이성비판』의 해석은 『존재와 시간』의 두 번째 부분의 완성과의 연관 속에서 피어났다” (『칸트책』XⅥ). 결국 하이데거는 칸트가 이미 말했던 것, 즉 칸트 철학이 드러냈던 본질적인 아니라, 단지 칸트가 말하고자 했었던 것, 다시 말하면 칸트 철학을 자신의 입장에서 재 설정함으로 해서 칸트의 논의, 더 정확하게는 『순수이성비판』의 결정적인 내용을 드러내려고 한다(비교『칸트책』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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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Hrsg. von Schmidt. Hamburg 1971 [A: erste Originalausgabe (1781); B: zweite Originalausgabe (1787)].
M. Heidegger; Kant und das Problem der Metaphysik. 5. Auflage. Frankfurt a. M. 1991.
M. Heidegger; Die Grundprobleme der Ph?nomenologie. In:Gesamtausgabe Bd. 24. Frankfurt a. M. 1975.
M. Heidegger; Ph?nomenologische Interpretation vo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In: Gesamtausgabe Bd. 25. Frankfurt a. M. 1977.
M. Baum; Deduktion und Beweis in Kants Transzendentalphilosophie. Untersuchungen zur 'Kritik der reinen Vernunft'. K?nigstein/Ts. 1986.
W. Carl;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 Kategorien in der ersten Auflage der 'Kritik der reinen Vernunft'. Ein Kommentar. Frankfurt a. M. 1992.
D. Dahlstrom; Heidegger's Kantian Turn: Notes to his commentary on the 'Kritik der reinen Vernunft'. In: Review of Metaphysics 1991.
D. Henrich; ?ber die Einheit der Subjektivit?t. In: Philosophische Rundschau. Bd. 3(1955).
D. K?hler; Martin Heidegger. Die Schematisierung des Seinssinnes als Thematik des dritten Abschnitts von 'Sein und Zeit'. Bonn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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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비교 『순수이성비판』 A50/B74
2)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40쪽.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Kant und das Problem der Metaphysik)를 칸트책(Kantbuch)이라고 언급하고있다(제4판 서문 참조). 따라서 이하 본 논고에서는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를 『칸트책』이라고 언급하고 인용은 Friedlich-Wilhelm von Herrmann에 의해 편집된 제5판(1991)에 따른다.
3) 여기선 단지 순수 인식의 한 요소인 시간의 공간에 대한 우위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초월(Transzendenz)의 본질을 드러내는 자기촉발(Selbstaffektion)로서 시간의 논구는 본고의 후반부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4) 비교 M. Baum; Deduktion und Veweis in Kants Transzendentaphilosophie. Unter-suchungen zur “Kritik der reinen Vernunft”. K?nigstein/Ts. 1986 (S. 71f.) 그리고 W. Carl;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 Kategorien in der ersten Auflage der “Dritik der reinen Vernunft” Ein Kormmentar. Frankfurt a. M. 1992(S. 46ff.)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주관적인 연역과 객관적인 연역의 구별이 칸트 『순수이성비판』의 범주 연역, 즉 ‘개념 분석의 두 번째 장’(A84/B116 ? A130/B169)의 사유 과정에 적용될 것인가는 문제로 남아있다. 이에 대한 비교로 다음을 참조: W. Carl;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 kategorien in der ersten Auflage der “Kritik der reinen Vernunft”. Ein kommentar. Frankfurt a. M. 1992 (S. 47ff.)
6) 비교 M. Heidegger; Ph?nomenologische Interpretation vo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Gesamtausgabe Bd. 25 Frankfurt a. M. 1977 (S. 331)
7) 하이데거는 칸트의 범주 연역을 『순수이성비판』의 제1판91781)에 한정해서 해석하고 있다. 그에 대한 근거는 선험적 구상력이 유한한 순수 이성인 인간의 본질 파악을 위해 근원적인데, 칸트는 제2판 (17870에서 선험적 구상력의 근원성(Urspr?nglichkeit)을 밀어내고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비교『칸트책) 160f).
8) 칸트의 시간 특성을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범주 연역 이후에 논구되는 도식론(Sche-matismus)의 논구는 필수적이다. 여기서 선험적 시간 규정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따라서 칸트가 선험적 연역을 논구하는 장에서 시간의 명백한 설명을 도외시 한 이유는, 소식론에서 시간의 중식적인 기능을 설정했기 때문이라고 하이데거는 간주한다. 그러나 칸트가 도식론에서 시간을 중심적인 위치에 설정한 것이 곧 범주 연역에서 드러난 시간 특성의 변화를 의미하는지는 문제로 삼는다. 하이데거 식의 일방적인 시간 논구가 아니라, 칸트 자신이 이해한 시간과 이 시간이 주된 역할을 하는 도식론 자체에 대한 논의는 칸트적인 시간개념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위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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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박필배
(Park, Pil-Bae)
성균관대
관심분야 : 칸트 철학. 형이상학. 인식론 (Kants Philosophie. Metaphysik. Erkenntnistheor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