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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무의 자리지기

온울에 2008. 5. 7. 10:26

목 차

1.'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2."형이상학적 물음"이란?
3."무(無)란 무엇인가?"
4.무(無)의 자리지기인 인간 현존재
5.형이상학과 무
6.현존재와 무
7.우리의 "형이상학적"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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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들 
학술지명 현대철학 강좌 
권 2 
호 1 
출판일 1999.  




인간은 무(無)의 자리지기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설)


이기상
한국 외국어대학교
2-529-9901-03
pp.6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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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이 물음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만큼이나 그 역사가 길고 논란도 많다. 형이상학의 역사는 그 물음에 대 한 대답 모색의 역사였으며 또한 그에 대한 논란의 역사이기도 했다. 형 이상학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논의의 장은 형이상학에 대한 자기이해 의 다양한 방식과 형태의 전시장을 방불하게 한다. 최고의 학문,제일 철학으로서 신학파 동일시되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모든 학문의 기초 학문으로서 만학의 여왕으로서 추앙받던 시대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회의의 시대,비판의 시대메서는 학문으로서의 지위마저 의심받고 자연 (현실)에서 추방되어 초자연, 논리, 심리, 정신, 영혼, 원칙, 삶, 역사, 문화 등에서 새로운 생존의 터전을 찾으려고 발버등쳐야 했다. 기술과 과학 의 시대에 들어서서 형이상학은 의미있는 언표의 영역을 벗어난,언어 의 규칙을 멋대로 어긴 잘못된 언어놀이의 산물로 간주되어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해소되어야 할 허구의 물음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현 대에서 형이상학은 해체되어 말끔이 쓸어 버려야 할,시대에 뒤떨어진 계몽의 마지막 대상이 되어버린 듯 싶다. 현실을 "넘어선" 것은 어떠한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철두철미 현실적인 인간들에게,경험을 "넘어선" 것은 아무것도 인정하지 믓하는 과학만능주의의 인식태도에,확인되고 통제될 수 있는 구체적인 존재자를 "넘어서는" 것은 어떠한 것에도 관 심쓰기를 꺼려하는 실용적 경제적인 생활방식에 "형이상학"은,현대인 이 한시 바삐 "넘어서야 할"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달라진 시대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절박하게 "형이상학은 무엇인가?"라고 물음을 던질 것을 요구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을 잘못 이해해 왔으며 이제라도 우리의 잘 못된 이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그는 단적 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형이상학은 강단 철학의 한 분과도 아니요 임의 적인 착상의 한 영역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인간)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 사건이다. 그것은 (인간)현존재 자체이다. " 하이데거는 그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러한 획기적인 새로운 이해를 1929년 7월 4일 프라 이부르크 대학교 대강당에서 행한 그이 교수 취임 강연에서 발표하여 학문세계에 충격을 던진다.

모교이기도 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교수로 취임하게 된 것은 하 이데거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가 일생동안 프라이부르크를 떠나지 않고 그 대학교를 고집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이데거는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부교수로 초빙되어 그곳에서 -다시 프라이부르 크로 초빙되어 가기까지-처음으로 교수로서의 생활을 하던 5년을 제 외하고는 계속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머물러 있었다. 고향을 노래하고 대지를 찬양하며 들길과 숲길을 좋아하는 그는,그에게 최적의 철학함 의 근본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프라이부르크를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 았던 것이다.

이렇듯 그의 생애의 최고의 행사이기도 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의 교수취임 강연에 그가 여러 가지로 특별한 의미를 두었던 것은 충분 히 상상할 수 있다. 그는 그 강연 원고에 자기 사상의 핵심을 담으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그 강연을 준비하였는지는 같은 해에 개설한 그 강의의 강의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1929년 겨울학기에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세계-유한성 -고독"이라는 제목 의 강의를 가졌는데,이 강의는 그 내용면에서 볼 때 명강의 중의 명강 의였다고 한다. 전집(제29/30권)으로 출간된 지금 우리는 그 강의가 풍 겼던 파토스를 글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어쨌거나 강연집 <<형이상학은 무엇인가?>>는 이렇게 1929년 빛을 보 게 된다. 하이데거가 이 강연집을 얼마나 아끼고 소중히 여겼는가는 그 가 이 강연집에 보여준 애정어린 관심에서도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1943년 제4판을 내면서 "보탬말"을 추가하여,항간에 떠도는 이 강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철학이 "무(無)의 철학" 또는 "허무주의"니,비겁자와 겁많은 자를 위한 "불안의 철학"이니,논리를 무시하는 "순전한 감정의 철학"이니 하 며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그로 서는 아주 드문 "반응"을 보인다. 그러한 소극적인 대응으로도 부족하다 싶어 그는 1949년 제5판을 낼 때에 강연의 분량에 해당되는 내용의 "머리말"을 추가한다. 이 머리말을 통해 그는 독자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와 사상적 내지는 역사적 배경을 제공한다. 이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형태의 소책자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 사유의 길을 글의 발생연도를 따라 좇아가면서 읽기를 원하는 독자라면,먼저 본문을 읽고 그 다음 "보탬말"을,그리고 나서 "머리말"을 읽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의도를 따르기를 바란다면 -이러한 발생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책의 구성을 따라가면서 하이데거의 사유와 대화를 나누어도 괜 찮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형이상학을 떠나서 생각될 수 없을 정도로 형이 상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그 관계 방식의 폭도 역시 형이상학의 비판,형이상학의 복원,형이상학의 극복 변형 등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 며 넓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끊임없이 형이상학과 더불어 형이상학을 거슬러서,새로운 형이상학의 이해를 마련하기 위해 형이상학과 벌이는 싸움의 연속이다.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의 말년에 이르기까 지 여기 이 책의 핵심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하이데거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75년에 이 책의 제11판을 발간 하고 그 판본 하나를 그의 제자인 막스 뮐러(Max M?ller)에게 보내면 서 써넣은 글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거기에 "새로운 것은 없다.그렇지만 새롭게 사유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형이상학이 강단 철학의 한 분과가 아니라 인간 현존재에서 일어나 는 근본 사건이라고 외친 그의 주장은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발언이었 기에 그 당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과학과 기술이 제시하 는 위대한 발전과 번영이라는 약속에 혼을 빼앗긴 그 시대의 지성인들 에게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에 대한 주장 역시 또 하나의 다른 "형이상학적" 언표에 불과했다. 시대의 분위기 자체가 워낙 형이상학에 대해 부정 적이어서 아무도 "형이상학적" 언표에 관심을 두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성 중심,과학 중심의 사유방식이 몰고온 전 지구적인 폐해를 목 도하고 있는 현재,상황은 달라졌다. 이제는 이성 중심의 서구적 철학이 해에서 벗어나, 범지구적인 문화 형태와 사유 양식을 포괄할 수 있는 보 편적 철학에 대한 모색의 필요성을 많은 지성인들이 절감하고 있는 실 정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이해는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고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느 때 어디에서나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이라는 "형이상학적 사건"이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우 리는 이제 더 이상 오로지 서구적 이성과 합리의 척도 아래 포착하여 "철학"이라는 전시품으로 제시하며 그것으로써 문화적 우월성이라도 입 증하려는 듯 우쭐해해서는 안 된다. 이성 중심의 서양의 "형이상학적 사건" 에 의해 각인된 현대가 지구상 곳곳에서 "탈"이 나서 이성의 "탈"을 벗어던지고 진보와 정복으로 일관된 현대성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외 치는 "탈현대"의 와중에서 대안적 사유 형태를 찾기 위해서도 다른 형태 의 "형이상학적 근본 사건"에 대한조사 연구가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하이데거의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를 뒤좇아가 보자.

2."형이상학적 물음"이란?
우리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고 직접 물음 던지기를 좋아하며 빨리 대답하기를 촉구한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는 눈치이면 "형이상학" 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이 마치 우리 수변에 흔히 널려 있는 '자동차'에 대한 물음처럼 그렇게 묻고 대답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형 이상학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그렇게 간단히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음 자체가 이미 대답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 듯이 그렇게 물음으로써 우리는 이미 '형이상학' 자체를 여타의 다른 존재자와 똑같이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식의 성급한 존재자적인 접근을 자제하고 "형이상학으로 하여 금 올바르게 스스로를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59)1)주자는 것이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태도의 귀결이다. 그러기 위해서 "한" 형이상 학적 물음을 택해서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건네오고 있는 형이상학의 자 기 소개에 귀를 기울여 보자는 것이 하이데거의 제안이다.

"형이상학적 물음"의 특징으로,그것이 그 물음 안에 형이상학 전체 의 물음을 포괄하고 있다는 포괄성과, 물음을 던지고 있는 그 사람 자체 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적중성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형이상 학적 물음은 전체로서 물어져야 하며 묻고 있는 현존재의 본질적 상황에 서부터 물어져야 한다"(61).하나의 적합한 형이상학적 물음을 선별하기 위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우리 현존재의 본질적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그 당시의 하이데거나 지금 여기서의 우리에게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본질적 상황은 한마디로 "학문"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학문을 하 기 위해 대학에 몸담고 있거나 학문을 위해 우리의 정열을 불사르고 있 으니 우리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음은 "학문적 현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존 재자 그 자체의 탐구를 위해서 존재자와 관계를 맺는다. 그의 이러한 존 재자와의 관계 맺음은 동떨어진 고립된 관계 맺음이 아니라 그의 세계 관련 내에서의 한 연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내 -존재로서의 그가 그 안에 놓여 있는 그의 세계 관련이 그로 하여금 존재자 자체를 탐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학문의 이러한 특수한 세계 관련을 이끌고 있 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염려 속에 자기존재 가능을 기획 투사하면 서 학문을 수행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태도이다. 여러 존재자 중의 한 존재자인 인간이 학문을 수행함으로써 존재자 전체에로 침입하여 존재 자를 파헤쳐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렇듯 학문을 하는 우리의 학문적 현존재는 '세계 관련,태도,침입' 에 의해 각인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의 학문적 현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세계 관련이 향하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그 밖의 아무 것도 아 니다.
모든 태도를 이끌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침입에 있어 탐구의 논쟁이 다루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그것을 넘어선 아무 것도 아니다(65).

우리는 흔히 학문하는 우리의 자세를 이렇게 강조하고는 한다. 즉 "탐구되어야 할 것은 오로지 존재자일 뿐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존 재자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유일하게 존재자일 뿐 그것을 넘어 선 아무것도 아니다"(65)라고.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번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한다. 존재자 그 자 체를 위하여 존재자를 탐구해야 한다는 학문 정신을 강조하는 이 자리 에 등장하고 있는 무(無,아무것도 아니다)는 순전한 우연의 결과인가? 아니면 그와 같은 자연스러운 말함 자체에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던 어 떤 '사건'이 자신을 알려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무는 어떻게 된 일이냐?"고.이 물음이 바로 우리 현존재의 본질적 상황에서 전개되어 나오고 있는 "한" 형이 상학적 물음인 셈이다.

3."무(無)란 무엇인가?"
무에 대해 물음이 된다고 하므로 즉시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무란 무엇이냐?"고.그러나 이렇게 물음으로써 우리는 무를 이러저러하게 존 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또 무가 이런저런 것"이다" (ist)라고 대답함으로써 무에 존재를 "서술"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 러나 이것은 통상적인 무에 대한 인식에 상반되는 태도이다. 따라서 무 에 대한 물음뿐 아니라 그 대답도 다같이 자체 모순인 셈이다.

일상의 상식을 넘어서 지성에게 이 물음을 넘긴다면 지성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유는 본질적으로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사유일 수밖에 없는데,무에 대한 사유란 그 자신의 본질에도 위배된다고.지성은 무 (無)란 존재하는 것 일체에 대한 부정으로서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지성은 무를 없는(아닌) 어떤 것, 따라서 부정(否定)된 어떤 것이라는 상위의 규정 아래에 놓는다. 그런데 상위 개념인 부정은 인간의 특수한 지성 활동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다 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아님이 있기에,다시 말해 부정이 있기에 무가 있다는 말인가?"(71)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무가 있기에 부정과 아님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에 대한 물음 제기도 대답도 자체 모순이라고는 하였지만 어쨌거 나 지금 우리는 여기서 무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다. 어쨌든간에 무에 대한 물음과 논의가 수행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물음과 논의는 그것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은 채우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다시 말해 어떻 게든지 무(無)가 물어질 수 있다면 이 무는 어떤 형태로든지 먼저 우리 에게 주어져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무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무에 대한 물음은 무의 소여성(所與性 =주어져 있음)을 전제한다. 무로써 무엇이 이야기되든지 간에 "어쨌든 우리는 무를 알고 있다"(73). 실지로 무는 우리의 일상적 대화 속을 누비고 다닌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무에 대한 정의까지도 갖고 있다. 즉 "무는 존재하는 것 일체의 완전한 부정이다"(75).무에 대한 이러한 일상적인 이해가 무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무를 "존재하는 것 일체의 완전한 부정"이라고 했는데,이 정의가 맞 는다면 존재하는 것 일체는 부정될 수 있기 위해서 우선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존재자 전체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일생을 학문에 매달려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존재 자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 아닌가.

그렇다. 지성적으로 존재자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렇지만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존재하는 것 전체 안에 놓여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존재하는 것 전체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밝혀져 있 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 존재자 또는 저 존재자에 매달려 급급하게 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우리는 존재하는 것 전체를 하나 의 단일성 안에 붙잡고 있다. 우리가 존재자에 몰두해 정신을 팔고 있을 때에,우리의 관심을 온통 존재자에 쏟고 있을 때에,불현듯 우리는 반 갑지 않은 "손님"을 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갑작스레 모든 일 이 다 귀찮고 성가시게 되는 "권태"의 내습과 더불어 일어난다. 우리의 현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지리함"에서는 단순히 이 일 또는 저 일,이 책 또는 저 영화가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누구에게 모든 것이 귀찮은" 것이다. "깊은 권태는 현존재의 심연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안개처럼 이리저리 몰아치면서,모든 사물들과 인간들을,그리고 그것들 과 함께 그 자신까지도 모두 기묘한 무관심 속으로 휘몰어 넣는다"(77). 이때 이렇게 본래적인 지리함이 존재자를 그 전체에 있어 드러내 보이 는 것이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존재자 전체를 대면하게 되는 곳은 지성이 아니 라 이러저러한 "기분"에 빠져 있는 "처해 있음"이다. 기분의 이러한 처 해 있음은 그때마다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자 전체를 드러낼 뿐 아니라,이러한 드러냄은 동시에 단순한 우연적인 발생이 아닌 우리 현-존재의 근본 사건이다. 그런데 기분은 그와 같이 우리를 전체로서의 존재자 앞으로 끌고가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찾고 있는 무를 우리에 게서 감추어 버린다.

우리를 무 앞으로 데려다 줄 그런 기분 상태가 있는가? 있다. 그것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 속에서 일어난다. 이때 우리는 불안을 특정한 대상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는 구별해야 한다. 불 안 속에서는 "무엇인가가 누구에게 섬뜩하다." 우리는 꼭 집어서 누구에 게 무엇이 섬뜩한지를 말할 수 없다. 그저 전체가 그 누구에게 전반적으 로 그런 것이다. 모든 사물들이,모든 일이,우리 자신까지도 될 대로 되 라는 무관심 속에 빠져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일체의 것이 무의미 속으로 빠져 나가면서 그것들이 우리를 향하여 돌아선다. 불안 속에서 우리를 엄습해 오는 것 은 바로 이러한 존재자 전체의 뒷전으로 빠짐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의 심연 속으로 빠져버린 순간 붙잡고 의지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거기 에 남아 있어 우리를 덮쳐 오는 것이란 단지 "아무것도 없다"는 그것뿐 이다.다시 말해 불안이 엄습해 오는 순간 불안은 우리에게 무를 드러내 보여 준다.

"불안이 무를 드러낸다"(83).불안은 우리의 발받침대를 무너뜨려 우 리로 하여금 공중에 떠 있게 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 자신도 존재자의 한가운데에서 함께 우리의 손아귀를 미끄러져 빠져 나간다는 사실이 일 어나며 이 점이 바로 불안의 독특한 점이다. 불안에서는 무엇인가가 근 본적으로 '너에게' 또는 '나에게' 섬뜩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 그 러한 것이다. 붙잡고 의지할 것이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는 이 허공에 둥실 떠있음이 모든 것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가운데 오직 순수한 현-존재(거기에 있음)만이 그 자리에 있을 따름이다

불안이 무를 드러낸다는 것을 우리는 불안이 물러갔을 때 확인할 수 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질문에 우리는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투명한 눈길로 "아냐 아무것도 아니었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그것 때문에 불안해 한 바로 그것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 었다. 무 자체가 그 자체로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과 더불어 우리는 현존재라는 사건에 도달하 였다. 그 현존재 안에서 무는 드러날 수 있고 거기에서부터 무는 물어져 야 한다"(85).무는 어떻게 된 일이냐고.

4.무(無)의 자리지기인 인간 현존재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정의하고 있는데,우리는 이제 그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의 인간은 '그들' 의 논리에 따라 대중 속에서 집안 같은 평온함을 느끼며 유행따라 이 존재자,저 존재자로 몰려다니며 연실 '바쁘다'를 외치고 다닌다. 인 간에게 고유한 존재 이해의 사건에 주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존재 이해의 장(자리)임을,즉 "현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좇아다니며 매달렸던 존재자,우리에게 평온함 을 안겨 주었던 '그들(대중)'의 품이 그 자명성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 할 때,그래서 나자신까지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의 심 연 속으로 꺼져 들어가 친숙했던 그 모든 것이 낯설어(섬뜩해)질 때,우 리는 우리 자신을 더 이상 '그들'의 문법에 따르는 이성적 동물이 아닌, 받침대를 잃고 허공을 떠다니는 순전한 현-존재(거기에 있음)로 경험 하게 된다. 우리에게 우리의 "현존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바로 무를 드러내 보여주는 불안이다.

근본 기분인 불안 속에서 무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때 무는 존재자로 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며 대상으로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불 안 속에서 무를 "존재자 전체와 함께" 대하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불안 속에서는 존재자 전체가 의미를 잃고 무의미의 심연 속으 로 가라앉고 만다. 바로 거기에서 무가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 이다. 즉 무는 무의미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전체로서의 존재자와 함 께,그리고 이 존재자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존재자 전체가 불안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도 아니고 무 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자 전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불안은 근 본적 처해있음으로서 본질상 어떤 것을 부정하는 두드러진 발언 행위와 는 거리가 멀다. 부정을 갖고 무를 파악하려고 든다면 우리는 항상 한 발 늦게 도착하게 될 것이다. 무를 그러한 개념적 파악 이전에 이미 불 안이라는 근본 기분 속에서 마주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안에서 ∼로부터 물러서 피한다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로부터 물러서 피함이 바로 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무는 어 떤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지 않는다. 무는 본질적으로 거부적이다. 무는 미끄러져 빠져 나가는 존재자 전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면서 가리 키는데,이것이 바로 무의 본질인 무화(無化,Nichtung)이다. 우리는 이 무의 무화를 존재자를 없애버림이나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 다. 무화는 인간 측에서의 임의의 행동이 아니다. 무는 스스로를 무화시 킨다. 무화 작용은 미끄러져 빠져 나가는 존재자 전체를 거부하고 가리 키면서 그 존재자 전체를 지금까지는 숨겨져 있던 아주 낯선 형태 안에 서 단적인 타자로 드러낸다.

이렇듯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늘 상대해왔던 존재자 전체의 일상적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그렇게 무를 마주한 뒤 그 존재자 전체를 그전과는 다른 전적인 타자로 경험하게 된다. 존재자 전 체가 이제 비로소 '그들(세인)'의 독재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존재자 그 자 체의 근원적인 열려 있음"(89)이라고 칭한다. 불안이라는 무의 밝은 밤 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자가 존재하고 무가 아니라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근원적으로 무화하는 무의 본질이 현-존재를 이제 비로소 처음 으로 존재자 그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오직 무가 근원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근거 위에서만 인간 현존재가 존재자에 접근할 수 있으며 존재자에 관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 현존재가 본질상 존재자와 관계할 수 있고 관계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이 현존재가 각기 나름대로 이미 근원적으로 드러나 있는 무 안에 머물 러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현-존재란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89). 인간은 존재하면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자와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존재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인간은 각기 나름대 로 어떻게든지 이미 그가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존재자의 존재를 이해하 고 있다. 물론 이때의 존재 이해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개념적 이론적 파악이 아닌 이론 이전의(서술 이전의)존재이해이다. 이런 존재 이해에 근거해서 인간 현존재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물 내지는 도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현존재가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으면서 각기 나름대로 이미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존재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 재가 그 자신의 본질 근거상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있기에,다시 말해 초월해 있기에,달리 말해 애초부터 앞서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기 에 존재자와 관계하고 자기 자신과도 관계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의 근원적인 드러남이 없이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함도,자유도 없다"(91).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귀결되어 나오는 결론은 이렇다.

무는 대상도 존재자도 아니다. 무는 존재자의 곁에 달라붙어 있는 어 떤 것도 아니다. 무는 인간 현존재에게 비로소 존재자가 그 자체로 드러 날 수 있게 해주는 바 그것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무를 존재자에 대한 대립 개념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무는 근원적으로 존재자의 본질 자체에 속해 있다. "존재자의 존재에서 무의 무화 작용이 일어난다"(91). 존재자에로 향했던 시각을 존재자의 존재에로 전환시켜 놓는 것이 바로 존재자 전체를 무의미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게 하면서 이 미 끄러져 빠져 나가는 존재자 전체를 가리키는 무의 무화 작용인 것이다.

인간 현존재는 애초부터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존재 자와 관계할 수 있으면서도 대개는 이 가능 조건에는 관심을 쏟지 않고 일상적인 배려 속에서 존재자에만 몰두하고 있다. 우리는 불안의 섬뜩 함 속에 있기보다는 '그들(세인)'의 포근함 속에 안주하기를 바란다. 그 래서 우리는 근원적인 불안이 피어오르는 여지가 보일 것 같으면 즉시 일 찾아,친구 찾아 나서 일상의 혼잡스러움과 잡담 속에서 불안이 드러 내 보이려는 무로부터 도망가려 애쓴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더욱더 존재자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존재자 자 체가 미끄러져 빠져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그래서 더욱더 무에서 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그런데 비록 모호하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무 로부터의 이탈(돌아섬)이 어느 정도까지는 무의 가장 고유한 의미에 부 합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이 무로부터의 도망이,즉 무화 작용을 하는 무가 우리에게 존재자를 가리키며 존재자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자에 빠져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무의 무화 작용 은 부단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우리들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의 드러남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부정(否定, Vemeinung)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겠는가?근원적으로 고찰해 볼 때 이 부정이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을 부정하기 위해 자기 안에서 "아님"을 끄집어 내어 주어진 것에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부정은 오직 그것에 어 떤 부정될 수 있는 것이 먼저 주어져 있을 때에만 부정할 수 있을 따름 이다. 부정될 수 있는 것과 부정되어야 할 것이 부정적인 것(아님의 성 격을 가진 것)으로 고찰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유가 이미 앞서 "아님" 을 보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무가 부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 라,도리어 부정이 무의 무화 작용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아님"에 근거 를 두고 있는 것이다. 부정은 단지 무화하는 관계맺음의 무화 작용에 근 거를 두고 있는 행동 관계의 한 방식일 뿐이다. 비록 "논리학"이 부정을 선호하여 그것이 우리의 사유를 속속들이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 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무화하는 행동 관계가 아니며 주도 적인 무화하는 행동 관계는 더더구나 아니다. "사유하는 부정의 단순한 사태에 상응함보다 저항의 완강함과 증오의 날카로움이 한결더 바닥이 깊다. 거절의 아픔과 금지의 냉혹함이 한층더 책임이 크다. 결핍의 쓰디 씀이 한결더 견디기 어렵다"(95).

이와 같은 다른 무화하는 행동 관계의 가능성들을 우리는 단순히 부 정의 유형으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아니다"와 부정 속 에 말하여질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무화하는 행동 관계가 현존 재를 속속들이 삼투하고 있음을 어둠에 쌓여 있는 무의 개방성이 입증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무를 근원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오직 불안뿐 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불안은 대개 억눌려져 있어 나타나지 않는다. "불안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단지 잠자고 있을 뿐이다. 불안의 숨소리 는 끊임없이 현존재 전체를 파르르 떨게 하고 있다"(97).

근원적인 불안은 현존재 안에서 어느 순간에라도 고개를 디밀 수 있 다. 불안은 언제나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아주 드물게만 뛰어들 어 우리를 동요 속으로 헤집어 놓는다. 바로 이 감추어져 있는 불안 때 문에 현존재가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게 되며 이것이 인간을 "무의 자리지기"(99)가 되게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결심과 의지로써 우 리 자신을 무 앞으로 데려갈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 는 불안이 깨어나도록 하기 위해 불안에의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감추어져 있는 불안에 근거해서 현존재는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며 무의 자리지기가 된다. 무의 자리지기가 되면서 현존재는 존재자 전체 를 넘어선다. 즉 초월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형이상학"이라는 이 름은 그리스어 "메타 타 피지카(μεΤ? Τ? φυδικ?)"에서 유래하는데, 이 "메타"가 나중에 존재자 그 자체를 "넘어서" 그 밖으로 나가는 물음 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형이상학이란,존재자를 그 자체 그리고 그 전체에 있어 파악할 수 있게끔 다시 소급해 잡기 위해 존재자를 넘 어서는 것이다. 무에 대한 물음에서 이처럼 존재자를 그 자체 그 전체에 있어 넘어서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로써 그 울음이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물음임이 입증된 셈이다.

5.형이상학과 무
무에 대한 물음이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는,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물음임이 드러나기는 했지만,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물 음이 우리가 이 강연 서두에서 밝힌 그런 의미에서도 형이상학적인 물 음인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형이상학적 물음에 다음 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을 부여하였다. 첫째,모든 형이상학적 물음은 각 기 나름대로 형이상학 전체를 포괄한다. 둘째,모든 개개의 형이상학적 물음에서는 그때마다 묻고 있는 현존재가 물음 안으로 함께 끌려 들어 온다. 먼저 첫번째 특징부터 검토해 보자.즉 무에 대한 물음이 어느 정 도로 형이상학 전체를 속속들이 장악하고 포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전통 형이상학의 무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무가 형이상학과 어떤 관계 에 있는지 고찰해 보자.

형이상학은 예로부터 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로부터 무가 생긴다(ex nihilo nihil fit)." 이 명제는 무 자체를 합당하게 문제 삼고는 있지 않지만,무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에서부터 존재자에 대 한 주도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고대의 형이상학은 무를 비존재자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의미로,다시 말해 형태를 갖추지 않은 재료의 의 미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재료는 자신을 형태가 있는 존재자 로,그래서 어떤 보임새(외양,에이도스 ειδοs)를 내보이고 있는 존재자 로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스스로를 형성하는 형성체가 존재하며 그것은 그 자체 스스로를 형상(形狀,모습)안에서 내보이고 있다"(101). 이렇듯 고대 형이상학의 무에 대한 논의에는 존재자에 대한 견해와 이해가 함축되어 있다. 물론 고대 형이상학은 무 자체에 대해서 와 같이 그러한 존재 해석의 근원이 어디에 있으며 그 권리와 한계는 무엇인지를 전혀 논의하고 있지 않다.

중세의 형이상학은 "무로부터 무가 생긴다"는 명제를 부정하며 "무에서부터의 창조 - 피조물(ex nihilo fit - ens creatum)"을 주장하는 데, 여기에서는 물론 무가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제 무는 본래적인 존재자,최고의 존재자(summumens),창조되지 않은 존재자인 신에 대 한 대립 개념이 된다. 다시 한 번 여기에서도 우리는 무에 대한 해석이 존재자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를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 세의 형이상학에서도 존재와 무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은 제기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상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가 본래적인 존재자의 대립 개념이라는 사실,즉 그것의 부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무가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될 때,이런 대립 관계는 좀더 뚜렷한 규정을 받게 될테고 그와 더불어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본래적인 형이상학적 물음이 제기될 것이다. 그 렇게 될 때 무는 존재자에 대한 막연한 대립자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 라,스스로가 존재자의 존재에 속하여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다음의 헤겔의 주장에저 읽을 수 있다. "순수한 존재는 순수한 무와 동일한 것이다"(<<대논리학>> 제1권, WW Ⅲ,78). 이 명제를 우리는 이렇게 알아들어야 한다. 즉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한다고.존 재 자체가 그 본질상 유한한데, 이것은 존재가 스스로를 무 속으로 들어 서 머물러 있는 현존재의 초월 속에서만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 형이상학 전체를 포괄하는 물음이라면, 무에 대한 물음도 형이상학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종류의 물음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그렇게 볼 때 "무로부터 무가 생긴다"는 고대 형 이상학의 명제도 존재 문제 자체를 적중시키는 하나의 다른 의미를 갖 게 된다. 즉 "무에서부터 모든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생긴다(ex nihilo omne ens qua ens fit)" 는 명제가 그것이다. 현존재의 무 속에서 비로소 존재자 전체가 그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 따라,다시 말해 유한한 방식으 로 자국 자신에 이른다(104/5).

6.현존재와 무
이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두번째 형이상학적 물음의 특징인 현 존재의 적중성이다. 즉 어느 정도로 무에 대한 물음이 묻고 있는 현존재 자신을 그 물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체험하고 있는 우리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학문 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고 특징지었다. 그런데 그와 같이 규정된 현존재 가 무에 대한 물음에 직면하게 되면,그 물음에 의해 우리 현존재가 의 문스러운 것이 될 것은 당연하다.

학문적 현존재는 뛰어난 방식으로 존재자 자체와 관계하고 있으며 존재자 자체를 위해 존재자와 관계한다는 거기에 자신의 특출함을 갖고 있다. 그렇듯 우쭐하는 폼으로 학문은 무에는 관심이 없음을 천명하며 무를 포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밝혀 보였듯이 그러한 학 문적 현존재란 애초부터 무 속에 들어서 머물러 있는 바로 그 사실 때 문에 가능하다. 다시 말해 학문적 현존재는 무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 비 로소 그가 무엇인 바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무가 드러나고 있 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학문은 존재자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은 형이상학으로부터 실존하고 있을 때에만 자신 의 본질적인 과제를 언제나 새롭게 획득할 수 있다"(105).

오로지 현존재의 밑바탕에서 무가 드러나고 있는 바로 그 까닭에,존 재자가 아주 낯설게 우리를 엄습해 올 수 있다. 오직 존재자의 낯설음이 우리를 압박해 올 때에만,존재자는 경이를 불러일으키며 놀라움의 대 상이 된다. 그러한 놀라움 속에서 "왜"라는 물음이 튀어 나온다. "왜"가 가능하기 때문에만,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이유에 대해,근거에 대해 물을 수 있고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물을 수 있고 근거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만,우리에게 탐구자의 운명이,즉 학자의 소명이 주어진 것이다.

"무에 대한 물음은 우리 -묻고 있는 존재자-자신을 물음 속에 몰 아 넣는다. 따라서 그 물음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물음이다"(107).

이제 하이데거의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최종 결론에 귀 를 기울일 차례이다. 그것은 다음의 말 속에 담겨 있다.

"인간 현존재는 그것이 무 속으로 들어서 머물고 있을 때에만 존재 자와 관계할 수 있다. 존재자를 넘어서는 사건이 현존재의 본질 속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바로 이 넘어섬이 형이상학 자체이다. 바로 여기에 형 이상학이 '인간의 자연 본성'에 속한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형이상학은 강단 철학의 한 분과도 아니요 임의적인 착상의 한 영역도 아니다. 형이 상학은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 사건이다. 그것은 현존재 자체 이다. 형이상학의 진리가 이러한 심연의 밑바탕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진리는 언제나 가장 깊은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장 가까 운 이웃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학문의 엄밀함도 형이상학의 신 중함에 미칠 수는 없다. 철학은 결코 학문이라는 이념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다"(107).

철학은 인간 현존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바로 이 "형이상학"이라 는 근본 사건을 궤도에 올려 놓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형이상학 안에 서 자기 자신에 도달하며 자신의 명확한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철학은 인간 현존재가 자신의 전체 존재 가능성 안으로 자신의 실존에 맞닿게 뛰어들 때에만 일어난다. 이러한 뛰어듦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첫째,존재자 전체를 위한 여지를 마련할 것,그 다음 무 속으로 자신을 해방시킬 것,다시 말해 누구나 갖고 있는 우상, 누구나 으레 그리로 슬그머니 숨어버리기 잘 하는 그런 우상들로부터 해방될 것,그리고 마지막으로 무 속에 등등 떠다님이 자신의 존재를 포 함해 존재자 전체를 들까불어 놓아 형이상학의 근본 물음에로 돌아오게 할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 자체가 강요하는 형이상학의 근본 물 음을 던지게 될 것이다. "도대체 왜 존재자가 있고 무(無)는 없는가?" (109).

어디에서나 존재자가 우위를 차지하고 모든 그때그때의 "존재하다" (ist)를 자기 것으로 요구하고 주장하는 데 반해 존재자가 아닌 것은,그 래서 그런 식으로 이해된 무 즉 존재 자체로서 잊혀진 채 남아 있는 것 은 어디서 오는가?존재와는 본래 아무 상관도 없고(nichts)무는 본래 본질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디서 오는가(55참조)?이런 물음을 던지게 될 때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의 역사를 반성하게 되고 그 역사가 오로지 존재자(존재하는 것)의 주위만을 맴돌고 모든 존재하지 않는 것,즉 무(無)는 배제해 버린 무에 대한 탄압의 역사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7.우리의 "형이상학적" 과제
종래의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규정하려고 노력해 왔다.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규정하고 있는 존재도 존재자성에서 찾았다. '존재'란 존재자가 있으며 없지 않다는 사실을 일컫는다. '존재'는 이 '있음의 사실'을 무에 대한 봉기의 단호함이라 부른다."2) 이렇게 존재하 는 존재자에만 매달리는 사유를 하이데거는 표상하는 사유라고 칭한다. 형이상학의 표상하는 사유는 자신의 사유가 서 있는 근거는 망각하고 있다. 그것이 곧 무의 자리지기인 우리 현존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형 이상학적 사건이다.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의 사유 단초를 극복함으로써 그 위에 형 이상학이 서 있으면서도 망각해 버린 그 근거를 되찾아오려고 시도한 다. 이 근거는 무근거적인 '때문에(Weil)'로,그리고 그로써 존속하는 시원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이 시원적인 것에서부터 사유는 자신의 본 질에 부응하며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원의 시원성이 망각되 고 파묻혀 버렸기 때문에,하나의 '다른 시원'이 그것을 다시 파헤쳐 드 러내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한다. 하이데거는 '다른 시원'에서 서양 역사의 망각된,결코 본래적으로 시원이 되어본 적이 없는 '시원적인 것' 을 되찾아 오려고 한다.

'다른 시원'을 예비하려는 하이데거에게 형이상학이 아닌 다른 형태 의 자연과의 관계맺음이 존재에 이르는 중요한 길로서 부각되는 것은 어쩌면 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시인,예술가들의 원초적 인 존재 경험에 유의하면서 그들에게 건네진 존재의 말 건넴과 그들의 응답을 주의깊게 사유한다. 그로써 전 지구의 황폐화를 재촉하고 있는 서구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의 지배에 쐐기를 박아 구제의 가능성을 모색 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에 다른 문화권에서의 '형이상학적 근본 사건'이,다시 말해 서구와는 다른 형태의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의 사건'이 어떤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이데거가 그의 말년에 보인 노자 내지는 불교에 대한 관심을 이런 의미 로 이해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분과로서의 형이상학은 종말을 고하건 다시 생기를 되찾아 부활을 하건 상관없다.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지구상의 어디에서건 인간이 실 존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항상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이라는 형이상학적 근본 사건은 일어나고 있다. 지구 전체가 하나의 공동생활 권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현대에 있어 존재자 전체의 지배권을 둘러싼 형이상학적 싸움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과학 기술 문명의 지배를 관 장하고 있는 서구 형이상학의 사유방식의 한계가 지구 곳곳에서 표출되 고 있는 지금 동양적인 '형이상학적 근본사건'에 대한 탐구를 통해 동 양적인 자연에 대한 대응을 구명해 보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것 이 아마도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우리에게 도전적 으로 부과하고 있는 사유의 과제일 것이다.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가 오로지 존재하는 것에만 매달린 존재자 중 심의 역사이며 '무에 대한 탄압 내지는 봉기의 역사'였다면,그래서 '무의 자리지기'로서의 인간의 형이상학적 임무를 소홀히 한 역사였다면,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무의 반란'이 시작되었고 그에 대처하기 위해 지 금까지의 존재자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 나선 것이 사실이라면,서양의 지성인들은 더더욱이 다른 문화권에서의 '형이상학적 사건'에 눈을 돌려야 한다. 동양의 불교 전통과 노장 사상 이 일찍부터 무의 자리지기로서의 인간의 본분에 역점을 두어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우리는 우리 동양의 사상적 전통 안에 존속되어온 다른 단초의 '존재 진리의 사건'에 귀를 기울여 세기말적인 자연 파괴 에 새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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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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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르틴 하이데거 , 현상학의 근본 문제들 , 이기상 옮김, 문예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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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기상 ,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 문예출판사 1992.
10. 이기상 (편저),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 , 서광사 1992.
11. 오토 페겔러 , 하이데거 사유의 길 , 이기상 / 이말숙 옮김, 문예출판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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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이클 겔븐 , 존재와 시간 입문서 , 김성룡 옮김, 시간과 공간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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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Martin Heidegger, Was ist Metaphysik?, Frankfurt a.M. 1969. 번역본: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5. 괄호 안의 쪽수는 번역본의 쪽수임.
2) Martin Heidegger, Nietzsche,2. Band,Pfullingen 1961,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