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현사실적 삶의 형식지시적 해석학적 현상학
2.현존재의 형식지시적 해석학
3.1929-30년 겨울학기에서 형식적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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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지명 인문학 연구
권 2
호 1
출판일 1997.
하이데거에 있어서 형식지시적 해석학
(1919년과 1929/30년 사이에 현상학의 새로운 전향)
김인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2-397-9701-02
pp.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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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 지시(formale Anzeige)는 하이데거의 초기 푸라이부륵대학 강의들, 마부륵 대학 강의들 그리고 그의 미완성으로 머무른 첫번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에서 주도적인 방법적 근본의 도를 나타낸다. 우리는 하이데거에 있어서 형식적 지시와 현사실성의 해석학, 즉 해석학적-실존론적 존재들은 이것들의 단초의 발생에서부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형식적 지시는 마침내 존재와 시간에서 절정에 이르는 해석학적 존재론의 완성에로 통합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불과 수년전까지만 해도 이 형식적 지시라는 하이데거의 방법적 근본기획은 표준적인 하이데거-해석자들의 해석에 있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초에 들어서서 독일보쿰대학교의 학자들, 즉 오토 페겔러, 프리드요프 로디, 프리드리히 호게만, 크리스토프 야메, 게오르그 임달 등이 헤겔 아르키브의 골로키움에서 이 형식적 지시문제의 근원적인 중심성에 대하여 생동하는 관심을 가지고서 조심스럽게 논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의 논의에 있어서 결정적인 자극을 주고 생동성을 불어 넣어준 학자는 미국인 교수 테오도레 키질이었다. 그는 보쿰대학교에서 행한 초기 하이데거에 관한 세미나, 헤겔 아르키브에서의 강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발생사를 다룬 획기적인 저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기원(1993)에서 형식적 지시의 문제 제기외 전개를 하는 데에 있어서 원칙적인 연구방향을 설정하는데 계발적 시야를 열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 대한 형식적 지시의 커다란 의미에 직면하여 비단 이 형식적 지시를 여태까지의 연구들이 해 온 것처럼 단초적 방식으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적어도 초기 하이데거의 사유의 장이라는 보다 커다란 연관속에서 이 기획이 차지하는 위치를 밝혀 낼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는 1919년부터 1923년 사이에 자기 고유의 철학적 논리, 언어표현의 방식을 발전시키려고 애썼다. 전통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반대는 그의 창의적 현상학적 철학의 배아기(1916-1922)에서부터 무엇보다도 인간 현존재의 현사실성(존재), 이론적인 대상이 될 수 없는 선이론적 혹은 비이론적으로 살아지고 경험된 삶 자체라는 현사실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불충분하다는 점을 향해 있다. 선이론적이고, 나적이고 역사적ㆍ시간적인 현사실성은 물적인 대상이 아니어서 이론적 개념들로는 표현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론적인 언어의 표현에 편파적으로 치우쳐 있는 전래된 학적 논리에 반하여, 현사실성의 근원적 생기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선이론적인, 즉 형식지시적 개념들을 발전시킨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초기 푸라이브룩대학 사유의 발전의 종점을 이루는 1923년 여름하기 강의에서 현사실적 삶과 함께 가면서도 구별되는 개념형성의 이론을 전개하고자 하는 의도로 처음에는 이 강의의 제목이 논리학이라고 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푸리아브룩대학 정교수들 중 한 사람이 똑같은 제목으로 강의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강의 첫 시간에 무엇보다도 강의의 주제를 보다 더 결정적으로 나타내 주는 -- "현사실성의 해석학"이라는 다른 제목을 도입한다. 바로 이 제목이야말로 하이데거의 역설적인 요구를 잘 나타내 준다. 즉, 이 제목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영향권내에 속해 있는 언어표현방식으로는 개시할 수 없는 현사실성이라는 대상을 언어적 표현에 의해 이해시킬 수 있는 철학적 논리를 정초하자는 -- 기존의 입장으로 봐서는 도전적이고도, 불가능하게 보이는 -- 청년 하이데거의 창의적 사유의 노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이데거는 이같은 현사실성의 해석학의 기획을 후에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의 분석 혹은 기초존재론이라는 형태로 더욱 성숙하게 발전시킨다.
철학적 논리를 발전시키려는 하이데거의 노고는 그의 초기의 고유한 철학의 근본 특성 및 의도를 생생하고도 결정적으로 나타낸, 그래서 현재 우리의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1921년 8월과 1927년 8월에 당시 하이데거의 교수자격과정 제자인 칼뢰비트에게 보낸 두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본래적인 철학적 관심사는 단지 특별한 존재들이나 실존적인 철학함을 발전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사실성에 적합한 철학함의 논리를 획득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4) 우리가 1919년 전후 보충하기부터 1929~1930년 겨울학기까지의 초기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을 각인시키고 있는 현사실적 삶의 해석학적 현상학, 현존재의 해석학 그리고 도식주의를 고찰해 보면, 이같은 새로운 철학함의 논리란 바로 형식적 지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본 논문은 이같이 주제들의 다원성 속에서 방법적 통일로서 "형식적 지시"가 초기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밝혀 보고자 한다. 이같은 연관에서 궁극적으로는 하이데거는 1919년 전후 보충학기이래 그 안에서 새로운 철학의 논리가 발견되고 거기로부터 현상학이 새롭게 정초될 수 있는 소위 형식지시적 해석학을 어떻게 기획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1. 현사실적 삶의 형식지시적 해석학적 현상학
하이데거는 형식지시적 해석학을 1919년 2월에서 4월 사이의 전후 보충하기에 행한 철학의 이념과 세계관문제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비록 "형식적 지시"나 형식지시적 해석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지라도 처음으로 숙고하였다. 하이데거는 이 강의의 마지막 시간에 선이론적 근원학문으로서의 현상학의 건립이라는 주제전개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즉 하이데거는 이 시간에 현상학을 해석학적인 것으로서 변형시키면서 이 해석학적인 것의 방법론적인 중심문제를 숙고한다. 그는 해석학적인 방법원리인 형식적 지시의 근본특징들, 즉 형식적 지시에 의해 개시되어야 할 현상학적 사상(Sache), 이 사상에 접근하는 데에 있어서 현상학의 근본원리, 형식적 지시에 상응하는 개념형성 등에 관해 고찰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현사실적 삶의 현상학을 전개하는 강의들과 서평 등에서 이 문제의 원칙적인 시야속에서 삶의 근원적 현상을 지시하고 표현하기 위해 애쓴다.
1) 하이데거는 1919년 전후 보충학기 강의에서 "선세계적 삶의 어떤 것(das vorweltliche Levens - Etwas)"1) 혹은 "근원적인 어떤 것(Ur-Etwas)"이라는, 이어지는 겨울학기에는 삶의 근원영역이라고 표현되는2), 근원학문인 현상학적 철학의 본래적 사상(Sache)을 획득한다. 그는 우선 삶의 보편적-일반화의 고양되는 객관적 이론화의 과정에서 어떻게 점차 탈삶화되는가를 보여준다, 교탁은 갈색이다. 갈색은 색채다. 색채는 감각적이다. 감각적 소여는 물리적ㆍ생리적 과정의 결과다. 물리적ㆍ생리적 과정이란 에테르진동의 파장이다. 이 파장은 단순한 물리적 법칙이다. 이 법칙은 물리적 요소들의 법칙이다. 이 요소들은 "어떤 것 일반"이다. 이렇게 일반화하는 이론화과정의 최고봉으로서 전혀 공허하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어떤 것이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세계를 상실한, 세계에 소원한 것"이며 "사람이 살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한다.3) 하이데거는 이같이 단계마다 나타나는 이론화와는 다른, 탈삶화과정이 그때 그때마다의 특정한 단계에 연관되지 않은 형식화(Formalisierung)가 있음을 보여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어떤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형식적인 어떤 것은 "체험가능한 것 일반"이다. 4) 이같이 체험가능한 것 일반으로서의 어떤 것은 이론화내지 대상화 과정의 모든 단계에 나타날 수 있다. 즉, 교탁, 갈색, 색채, 감각적 소여, 에테르 진동의 파장, 물리적 법칙이라는 각 객관화의 단계에 대해 "그것은 어떤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같이 "체험가능한 것 일반"인 어떤 것에는 객관화의 이론적 단계들에서 나타나는 것만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즉 비이론적인 미적, 윤리적, 종교적 생활세계의 체험들에서 나타나는 것까지 포함되고 있다. 이리하여 그 근원적인 "삶의 어떤 것"이 객관적인 것이 절대 아니며, 극단적으로 포괄이고 보편적이며 형식적인 "삶 일반의 근본계기"임이 드러난다. 체험 가능한 것 일반으로서의 어떤 것은 차별화되지 않은 삶의 영역이다. 이것은 아직 세계화되었거나 객관적이 아닌 선세계적 선이론적 "삶의 어떤 것"(Lebens-Etwas)이다. 근원적인 어떤 것은 "아직-아님"의 비규정성의 영역이다. 이 선세계적 선이론적인 삶의 어떤 것은 "탈삶화라는 긴장완화나 체험가능한 것을 이론적으로 고착시키고 냉각시키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5) 이 근원적인 어떤 것은 물론 자기안에 이론적인 해침의 경향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하이데거가 이같이 삶의 수행의 자기를 드러내고 은폐하는 운동(진리운동)을 형식적으로 지시하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연관에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체험가능한 것인 선이론적인 어떤 것과 인식가능한 이론적인 어떤 것을 구별할 때에 -- 비록 하이데거가 명시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 에밀 라스크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라스크는 철학의 논리학에서 단지 직접적인 반성적ㆍ이론적인 아닌 방법에 의해서만 접근될 수 있는 논리적인 껍데기를 입지 않은 선대상적인 어떤 것에 관해 언급한다. 바로 이것은 하이데거가 선이론적이고, 선세계적인 어떤 것이라고 부를 것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같은 선세계적인 삶의 무엇은 세계에 적합한 성격, 세계화되는 경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여러 체험세계들에로의 규정과 차별화의 경향을 갖고 있다. 즉 강력한 "삶의 약동력"에 충만한 "..에로(Auf/zu)", "특정한 세계안에로"의 운동성을 갖고 있다.6) 청년 하이데거는 "그것이 세계화한다"(es weltet)는 당시 철학 신세대들을 열광시켰던 마법적 표현으로 이같이 "..에로 산다"는 지향적 삶의 충만되고 가장 강력한 역동성과 율동성을 나타낸다. 이같이 선세계적인, 근원적 어떤 것은 "삶의 최고도의 잠재성의 지표"이다. 하이데거는 이 운동하는 근원적인 어떤 것을 "동기부여된 경향 혹은 향하는 동기(motivierte Tendenz bzw. tendierende Motivation)에서의 삶"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7) 그는 후에 존재와 시간에서 바로 이같은 인간적 삶의 근본특성을 피투된 기획이라는 인간적 현존재의 통일적인 근본구조로서 주제화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어느 정도로 딜타이의 영향권내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데거는 딜타이와 마찬가지로 동기와 경향에서의 삶, 역사적 삶과 함께 가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신의 강의 수고에 적어 넣었지는 않았지만, 이 강의 마지막 시간에 동기와 경향이라는 운동적 계기에 의해 각인된 삶의 "내적인 역사성"에 관해 구두로 언급했던 것이다. 동기와 경향의 지향적 관계는 바로 삶의 자기-자신의 가짐, 역사적인 고유한 수행이다. 이 삶이라는 단적으로 구체적인 현사실은 나의 삶이다. 8) 이 현사실은 결코 factum brutum이 아니라, 자기에게 근원적으로 고유하게 속해있는 의미 및 내적인 규정 및 표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철학함의 논리, 언어표현방식에 의해 개시될 수 있는 현사실성이다. 이 선이론적이고 선세계적인 삶의 어떤 것, 역사적이고 나적인 삶 일반의 운동성은 과학들의 이론화하는 수행들의 근원이다. 이같이 근원적이고, 형식적인 삶이 바로 선이론적 근원학문의 현상학의 사상이다.
2) 그런데 이와같이 선 혹은 비 이론적이고, 객관화될 수 없는 근원적인 사상(Ur-Sache)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이같은 방법적인 중심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하이데거는 1919년 전후 보충학기에 훗설의 현상학에 대한 나토르프의 항의를 숙고한다. 나토르프가 그의 저서 일반심리학에서 제기한 항의는 무엇보다도 생동적으로 흐르는 체험영역들의 기술적 반성의 직관적 접근방식에 향해 있다.
훗설에 있어서 현상학적 방법은 단연 반성의 작용들(Akten)안에서 움직인다. 반성에 있어서 얻어진 체험영역은 기술가능하게 된다. 나토르트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반성적인 시각에서 체험된 체험의 생동적인 흐름을 정지시키고 체험을 보여준 체험으로, 즉 객체, 대상 일반으로 만든다. 다시 말하면 반성에서 이론적 태도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체험들이 반성에서는 더 이상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탈-체험화된다.9) 이것은 훗설의 현상학에 대한 나토르프의 첫번째 반대이다. 하이데거는 이같은 나토르프의 회의적 비판을 받아들인다. 즉, 훗설식의 반성은 체험들의 직접적인 파악의 방법이 아니라는 견해에 동의한다. 그런데, 나토르프가 체험들의 직접적 파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하이데거는 이것을 잘못됐다고 여긴다. 1919년 전후보충학기 강의의 결론에서 하이데거는 훗설, 딜타이, 베르그송의 단초들을 자기식으로 변형시킨 현상학적 철학의 직관론을 편다. "체험은 자기자신을 동반하는 체험", 즉 "이해하는, 해석학적 직관"만이 운동적인 삶, 현사실, 즉 "선세계적이고 세계적인 삶의 무엇(Lebens-Etwas)"의 직접적인 파악에 적합하다.10) 하이데거는 1919년 전후보충학기강의에서 훗설이 이념들 제 일권에서 정립한, 현상들 자체를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의 원리를 자신의 근원학문으로서의 현상학의 근본원리로 받아들인다. 물론 하이데거는 직관이 객체직관이 아니라, 객체의 성격을 갖지 않는 삶의 직관이라는 생각을 도입함으로써, 훗설의 원리를 변형시킨다. 훗설은 이념들 제 일권에서 현상학적 철학을 명중성 혹은 직관의 원리 위에 건립한다: "「직관」에서 자신의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부여하는 것으로... 단적으로 승인될 수 있다. " 이것은 "어떠한 이론도 우리를 현혹시킬 수 없는" "원리들 중의 원리"이다.11)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같은 훗설의 현상학의 근본원리가 이론적 성격을 갖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이같은 해석에 의해 원본적으로 자기를 부여하는 직관은 더이상 근원-자아의 선험적으로 순화된 의식안에서 모든 소여된 것의 의미구성적인 증시를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상학적 근본원리는 선이론적인 "참된 삶 일반의 근원지향, 체험과 삶의 근원태도, 절대적인, 체험 자체와 동일한 삶의 공감"을 뜻한다.12) 현상학은 근원학문으로서 근원적인, 즉 이론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직접적인 체험영역을 연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근본원리에 현상학의 창시자 훗설 보다도 더 근원적이고, 철저하게 근거하고자 한다. 하이데거에게는 의식에 "소여됨"(Gegeben)이라는 전제는 이미 이론적 꾸밈, 즉 이론적인 해침의 표징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물지각의 모델에 정향된 훗설의 직관원리로부터 얼마나 먼 거리를 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직관원리는 하이데거에 있어선 물들의 이론적 인식의 필증적 확실성의 원리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수행에 있어서 삶의 증시의 원리이다. 하이데거는 딜타이와 마찬가지로 삶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삶이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처럼 삶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 운동하는 삶의 근본계기, 근원적인 어떤 것을 이론에 의해 매개하지 않는 직접적인, 직관적 파악은 어떻게 가능하게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이같은 근본물음의 답을 얻기 위해서 하이데거가 1919년 전후보충학기 강의에서 제시한 비이론적인 "형식화"이론을 섬세하게 분석해 보아야만 한다. 하이데거가 "형식화"의 개념을 문제해결의 길잡이로 삼는 데에 있어선 훗설이 이념들 제 일권?에서 제시한 "형식화"(Formalisieung)와 "일반화"(Generalisierung)의 구별이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이데거는 1920-21년 겨울학기 강의 종교 현상학 입문에서 형식적 지시와 의미와 특성을 아주 상세하게 고찰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훗설이 보편화(Allgemeinerung)의 두 가지 형태인 형식화(Formalisierung)와 일반화(Generalisierung)를 구분한 점에 근거하면서, 이것들과 자신의 형식적 지시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른가를 밝힌다. 일반화는 예를 들면, 이 옷의 붉음으로부터 붉음으로서의 색깔로 그리고 색깔로서의 감성적 특성들 일반에로 고양됨을 의미한다. 이와 반하여 형식화는 논리적이고 범주적인 형식적인 것에로 보편화하는 소급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붉음, 색깔, 감성적 특성, 체험, 본질, 유 등의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화의 방법은 하나의 시상내용을 가지고 있는 대상을 다른 사상내용을 가지고 있는 영역에 단계적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 대상을 보편화한다. 그에 반하여 형식화는 어떤 것을 -- 일반화처럼 다른 사상내용을 포함한 대상영역에 편입시키는 것이 아니라-순수한 사상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태도연관 자체의 연관의미에 부속시킴으로서 보편화한다. 어떤 것은 형식적-보편적으로 대상이라고 규정된다. 여기에서 "대상일반"이라는 것은 사상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론적인 대상을 정립하는 주관의 태도연관의 "어떤것에로"(Worauf)를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같은 보편적인 형식적인 것의 근원을 이론적 태도의 관계 의미에서 본다. 그러나 형식적 지시에 있어서 형식적인 것의 근원을 이론적 태도의 관계의미에서 본다. 그러나 형식적 지시에 있어서 형식적인 것은 사상내용을 포함한 단계질서의 최고봉으로서의 일반적-보편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순수한 태도연관의 형식적ㆍ보편적인 것도 아니라 형식적 지시는 바로 모든 이론적 태도연관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훗설의 "형식화" 개념의 부정적인 측면의 이면에는 문제해결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면도 아울러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1919년 전후보충학기 강의수고에는 적어 넣지 않았지만, 브레히트 등의 당시 강의의 수강생들이 강의의 내용을 적어 놓은 노트에서는 발견될 수 있는 강의시간에 칠판에다 쓴 도식을 통하여 이론적인 "형식 대상적 형식화"가 "선이론적-선세계적인 근원적인 어떤 것"에 의하여 "동기지워졌다(Motiviert)"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 우리는 하이데거의 의도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바 -- 형식화의 보편성은 삶의 근원적인 어떤 것을 객관적으로 일반화하지 않고 이것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형식화로부터 도출된 범주들의 무차별성은 사상을 유와 종이라는 세계의 계층질서에 의해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만든다. 물론, 이 훗설의 형식화는 이같이 객관적 일반화보다는 근원적인 어떤 것을 개시하는 데에 더 적합할지라도, 다시 말하면 근원적인 삶 일반의 계기 속에서 동기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의 근원에 충분히 가깝지 않다. 왜냐하면 형식-대상적인 어떤 것은 여전히 대상과 마주보고 있는 주체의 이론적 태도에 의해 표상된 탈삶화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 우리는 이 어려운 방법론적 문제에 연관하여, 비록 하이데거는 이 전후 보충강의에서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이 그의 근본의도를 드러낼 수 있는 바 -- 훗설과 달리, 훗설보다 더 현상적으로 "사상자체에로"의 길, 즉 이론적 태도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운동적인 삶 자체로의 길을 가고 있다. 즉, 하이데거는 훗설식의 "대상", "대상성 일반"이라는 표현 대신에 "삶의 어떤 것", "근원적인 어떤 것(Ur-Etwas)"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형식화된 선이론적 삶 일반의 운동적 계기를 나타내려고 한다. 현상적 직관은 바로 이같은 형식화의 방식으로 선이론적 삶의 운동성 자체를 원본적으로 주려고 한다. 이같은 보편적인 무차별적인, 형식적인 근원적인 삶의 어떤 것은 다양한 형식지시적인, 도시적인 표현방식들("Auf/zu", "Zu Etwas hin", "es weltet")에 의하여 풍부한 규정에 도달하여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여기에서 딜타이와 함께 해석학의 개념형성의 다원주의의 길을 간다. 물론 하이데거는 딜타이의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서의 해석학 개념으로부터 거리를 취하고서 근원학문으로서의 해석학적 현상을 정립하고자 한다.
3) 어떻게 이같이 나적이고, 운동적인 선세계적이고 근원적인 어떤 것을 이론적으로 해치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가? 언어의 곤궁에 직면하여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이론적 개념형성을 극복하는 독창적인 선이론적 표현방식을 발전시키려고 애쓴다. 일단 하이데거는 훗설 현상학에 대한 나토르프의 비난을 논의의 실마리로 삼는다. 나토르프의 비난은 언어적인 표현방식에 향해 있다. 즉, 훗설식의 현상학적 기술은 모든 설명 (Erklarung)으로부터 거리를 취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론적이라는 것이다. 원본적인 근원영역을 기술하려고 하면 개념들이 필요하다. 이 개념들은 바로 보편성의 논리적 도구이다. 따라서 기술이란 어떤 것을 보편성으로 바꾸는 것이다. 모든 언어표현은 일반화하는 것이다. 13) 이 일반화는 간접적이다. 그래서 체험들의 직접적 파악 및 기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모든 언어표현은 매개하며 탈삶화시킨다는 나토르프의 견해에 반하여 선이론적인 삶의 어떤 것, 근원적인 어떤 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의 제안을 내놓는다. 인식가능한 형식적ㆍ논리적이고 대상적이며 객관적인 어떤 것은 이론화의 탈삶화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개념(Begriff)이다. 이 개념으로는 삶일반의 근본운동성, "즉자 대작적 삶"의 생동성은 파괴된다. 근원적인 어떤 것은 결코 자신이 관계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즉 일반화하는 (generalisierend) 언어에 의해선 개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근원적인 어떤 석은 어떤 사물(Ding), 존재자가 아니라, "자신을 점유하며", "세계화하는" 운동적 발현, 존재관계, 자체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삶은 이념적인 무엇내용, 내용의미로부터 보여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삶은 대상화된 것, 탈삶화된 것, 더 이상 삶이 아닌 사물이 되기 때문이다. 삶은 특유한 수행방식을 가지고 있다. 삶의 자기 자신과의 신뢰성의 획득과 상실이라는 수행을 하이데거는 삶의 "내적 역사성"이라 부른다. 하이데거는 이 내적인 역사성을 1919-20년 겨울학기 강의에서 "수행의미"라고 부른다. 이것은 직관적으로는 볼 수 있고 기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인 바, 바로 이같은 삶의 역사성을 함께 수행하는 내적인 이해가 바로 형식적 지시이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봄의 태도에 정향된 훗설식의 본질현상학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변형시킨다. 형식지식적 해석학으로서의 현상학은 바로 이 "수행의미"에 관계한다. 형식적 지시의 목표와 필연성은 근원적인 -- 어떤것에로의 직관적 접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이 근원적인 운동적인 어떤 것에 적합한 표현방식을 발전시키는 데에 있다. 하이데거는 이 표현방식을 "후미-파악"(Ruck-griff)과 "선-파악"(Vor-griff)이라고 부른다14) 형식적 지시란 바로 삶의 동기(Motivation)의 후미 --파악이며 이것의 경향의 선-파악이다. 하이데거는 모든 언어표현은 일반화하는 것, 객관화하는 것이며 유적 일반성의 이론적인 표현이라는 나토르프의 견해에 반대한다. 하이데거는 "모든 언어표현이 이론적이거나 객관적인 의사표현일 필요는 없으며, 근원적으로 체험하는 즉, 선세계적이고 세계에 적합한 무엇일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15)
형식적 지시는 바로 주관과 객관의 구별을 알지 못하는, 대상적인 형식화나 개관화시킬 수 없는 근원적인 삶의 어떤 것의 동기지워진 향함, 향하는 동기의 운동성을 이것이 있는 그대로, 자기를 나타내는 그대로, 현상학적으로 직접적으로 개시한다. 즉 하이데거는 근원적인 어떤 것의 무차별적 잠재성을 "아직-아님"(Noch- Nicht)이라고 형식지시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 근원적인 어떤 것의 차별화될 수 있는 역동성을 "…에로"(Auf/zu), "어떤 것에로" (zu Etwas hin), "세계안에로"(in ein Welt hinein)라는 표현들로써 형식지시적으로 특징짓는다. 하이데거는 1923년 여름학기강의에서는 이같은 역동성으로서 인간적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성격(현사실성)을 형식지시적으로 "머무름"(Verweilen), "그때마다"(Jeweiligkeit), "거기 곁에"(Dabei)그리고 "종사된 존재"(Beschaftigtsein)라고 부른다. 형식적 지시는 바로 이같은 방식으로 체험가능한 것(Erlebbaren)의 선행적인 가능성 차원을 연다. 하이데거는 1919년 전후 보충학기 이후부터는 이같은 표현방식을 더이상 후미-파악이나 선-파악 등으로 구별하지 않고서 선-파악(Vorgriff)이라고 통일시켜서 부른다.
하이데거는 1919-20년 겨울학기 강의 현상학의 근본문제들에서 처음으로 "형식적 지시"라는 술어를 사용한다. 그는 이 강의에서 객관개념들과 대립하는 "해석학적 개념들", "단지 형식적 특성", 즉 "형식적 지시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삶, 체험, 나, 나를, 자체"와 같은 개념들에 관해 말한다.16) 이로써 우리는 하이데거가 근원적 어떤 것이라는 구체적 내용을 차별을 가지지 않은 잠세적인 근원을 가리키는 일체의 표현방식들을 "형식적 지시"라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데거는 1920년 여름학기 강의에서 이같은 형식적 지시를 삶의 "근원이해"라고 부른다.17)
4) 하이에거는 1920-21년 겨울학기 강의 종교 현상학 입문에서 형식적 지시의 의미와 특성을 아주 상세하게 고찰하였다. 이 강의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특정한 종교적 경험 -- 이를테면 원시 기독교적 시간성 및 역사성의 경험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현사실적 삶의 경험에로 형식화될 수 있는가를 논구하였다는 데에 있다. 이같은 연관에서 형식적 지시가 역사적인 것의 근본의미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 본질적인 방법으로서 강의의 중심에 부각된다. 하이데거는 현사실적-역사적 삶의 현상은 이론적인 보편화에서 개시되는 보편화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하이데거는 이 강의에서 "역사적"이라는 것을 형식지시적으로 정의한다: "시간적으로 생성하는 것과 생성된 것으로서 과거화된 것은 역사적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정의는 객관적인 역사적 세계를 역사적 구조성격에 따라 규정한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것 자체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를 마치 밑그림처럼 그린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는 이같은 연관을 "시간적인 것"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명료화한다. 우리는 형식지시적 정의에서 어떤 시간에 관해 말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형식지시적 정의는 시간의 보편적-형식적 규정도 아니다. 시간의 의미의 형식지시적 해명은 단지 현사실적 삶의 경험을 애해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다. 현사실적 삶의 경험 안에서 시간적인 것, 생성, 경과 등이 수행되는 바, 바로 이 현사실적 삶의 경험은 선이론적, 선세계적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생활 세계경험과 구별되는 삶 일반의 운동적인 근본계기이다.
하이데거는 현사실적 삶의 경험에 에워싸인 근원적 시간성의 구조를 개시하는 형식지시적 해명이야말로 순전한 철학적 사유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구체적인 내용을 개시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철학은 구체적인 종교적 결단에 관여하지 않은 채 삶의 종교적 차원을 다만 형식적으로 지시할 뿐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이해의 특유성은 다만 종교성의 선이해를 획득하는 데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형식적 지시는 단지 순전한 종교적 삶, 구체적으로 종교적 내용을 지닌 삶에서 요구되는 최종적 이해와 관계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이같이 형식적으로 지시하는 철학적 사유를 "방법적 무신론"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이데거는 1919년과 1921년 사이에 쓴 야스퍼스의 세계관들의 심리학의 서평에서 확고한 방법론적 의도를 가지고서 형식적 지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모든 철학함은 "주목하게 함"의 방법에 머물러야 한다. "실존"은 형식적 지시의 예이다. "실존"이라는 개념은 형식지시적으로 사상영역이 아닌, 개관화될 수 없는 "역사적인 것"에서 자신의 근본의미를 발견하는 "나는 존재한다"의 현상을 가리킨다. 이래서 형식적 지시는 이러저러하게 무비판하게 받아들여지는 실존개념파악으로부터 거리를 취하게 된다.
2.현존재의 형식지시적 해석학
하이데거는 1921-22 겨울학기에 행한 강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현상학적 해석들에서 철학을 "현상학적 존재론"으로 규정한다. 이 현상학적 존재론의 과제는 현사실성, 현사실적 삶(현존재)의 존재의미를 해석학적 방법에 의해 개시하는 데에 있다. 하이데거는 이 강의에서 삶의 현사실성을 현상학적으로, 즉 이것이 자신을 나타내는 그대로 해석하는 데에, 후에 존재와 시간에서 "실존주들"로서 주제화되는 형식적으로 지시하는 "삶의 근본범주들"을 사용한다.18) 하이데거는 이 강의에서 형식적으로 지시하는 철학적 정의에 대한 상세한 반성을 통하여, 우리가 존재와 시간의 실존론적인 개념형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도움을 준다. 1921-22년 겨울학기 강의에 따르면 철학적 정의의 원칙적 대상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삶의 구체적 존재의미다.19) 하지만 철학적 정의는 개념파악되어야 할 대상을 완전하고 본래적인 파악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시할 뿐이다. 철학적 정의는 대상을 완전하 구체성에서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그것은 내용적으로는 비어있다. 즉, 형식적이다. 하이데거는 이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초적인 이해는 존재의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20), 다만 "지시된, 비어있는 형식"으로서의 삶의 존재에 대한 언급일 따름이다.21) 철학적 정의는 이같이 제한된 기능과 아울러 보다 적극적인 기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철학적 정의는 올바로 지시하는 것으로서 바로 본래적인, 완전한 대상-가짐에 대한 단초와 의미방향을 준다. 이 형식적으로 지시하는 철학적 정의는 구체적인, 그때마다의 이해의 수행을 "비본래적으로 지시된 것을 남김없이 맛보고 실현하라는, 즉 지시를 따르라"는 결정적인 과제 앞에 세운다.22) 다시 말하면, 단초적인 정의가 발생하는 상황은 대상의 완전한 가짐에로 향하는 운동에 대한 결정적인 출발상황인 것이다.23)
여기에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훗설을 위시한 일체의 전통적인 형식개념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개념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적 지시의 형식적인 것은 결코 형상적인 것이 아니다. 즉, 형식적 지시의 형식적인 것은 자기를 끊임없이 견지하는, 구체화의 다양한 변경에 의하여 시야에 포착되는 물적이고 이념적인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훗설에 있어서 형상적인 것은 일반화되는 보편화의 이념과 연관되어 있다. 형상적 본질은 유와 동일시된다. 이에 대하여 형식적 지시의 형식적인 것은 내용이 없는, 그때마다의 내용적인 구체화에로 향하는 언제나 이미 선소여되어 있는 단초방향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 형식적인 것을 순수히 공허한, "현존재가 현사실적으로 자신을 기투시키는 가능성 일반이 바로 거리로부터 길어내어 지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24)
이같은 훗설과의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이데거가 형식적 지시를 기획하는 데에 있어서 훗설에게 힘입고 있는 점이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즉 형식적 지시의 형식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견해는 바로 훗설 안에 놓여 있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꾸미는 선천주의"(Konstrucktiven Apriorismus)에 반하여 현상학적 경험주의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한 경향의 철저화로서 이해해야만 한다.25) 훗설에 있어서 형식성은 형상적 절차에 의하여 그때마다의 사상영역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훗설의 현상학은 그때마다의 사상영역의 선천적인 소여성방식을 해명하려고 한다. 형식적 지시의 형식성에 관한 하이데거의 견해는, 이 형식성이 자신의 구체적 내용으로부터 단절된 채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형식의 형식성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구체적 내용에 기능적으로 관계해 있는 형식의 형식성인 한 -- 훗설의 경향의 철저화임을 알 수 있다.26) 형식적 지시의 형식적인 것의 이같은 근본 특징은 1921-22년 강의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나타나 있다: "「형식적」이라는 것은 지시된 것을 근원적으로 실현하는 시간화되는 수행의 단초성격을 가진다."27)
형식지시적 해석학의 목표와 필연성은 삶 자체의 근본기구, 즉 자기를 이해하는 삶의 수행의 근본운동인 감추면서 드러나는 진리의 이중운동으로부터 생겨난다. 하이데거는 1921-22년 겨울학기 강의에서 선험적 의식-삶의 명석 판명한 perceptio라는 훗설의 원리에 대립하는 삶의 "흐릿성"에 관해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같은 삶의 근본특성을 삶이 어떻게 세계에 마음쓰면서 관련하며 어둠에 머무르게 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퇴락"이라는 형식지시적 운동범주로 표현한다.28)
하이데거는 삶이 끊임없이 자기를 은폐하면서 "자기에 대립하여" 수행하는 이같은 운동성을 1921-22년에는 "Reluzenz"라고 그리고 후에 존재와 시간에서는 "Verfallen"이라고 특징지운다. 바로 이같은 Reluzenz, Verfallen 등의 규정은 형식지시적이다. 왜냐하면 이 표현방식들은 현사실적 삶의 구체적-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타내는 게 없으며, '삶의 존재의미'의 선파악적인 범주적 해석만을 구체적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단지 "전망의 방향"만을 주기 때문이다.29) 철학은 이같은 삶의 자기 은폐하는 운동을 형식적으로 지시함으로써, 이같은 삶의 끊임없는 퇴락 앞에서 삶의 비은폐성(참된 것)을 지키려고 한다. 이러한 철학은 삶의 자기 오해에 대한 삶 자신의 반대운동이다. 이런 한 철학은 해석학적이다. 왜냐하면 해석학은 근원적으로는 고유한 삶의 오해를 방지하는 데에 기여하기 때문이다.30)
하이데거는 1927년에 발표된 존재와 시간에서 형식적 지시를 기초존재론으로서 전개한다. 그런데 그는 이 자신의 첫번째 주저에서 형식적 지시의 의미와 방법적 기능을 상세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이 저서에서 자신이 이 저서의 9절에서 개진한 현존재의 근본규정들이 형식지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할 뿐이다.31) 비록 하이데거가 이같이 존재와 시간에서 형식적 지시에 관해 극히 제한된 언급을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초기 푸라이부륵 강의들에서 형식적 지시의 기획이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되돌아 볼 때에, 형식적 지시야말로 기초존재론의 방법적 근본특성임에도 추호도 의심의 여지를 둘 수 없다. 존재와 시간에서 상세하게 전개된 기초존재론의 형식지시적 성격은 현존재분석의 구조적인 근본개념들의 기능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존주들(Existenzialien)은 현존재에 적합한 존재자의 존재수행의 구조들, 즉 "누구" 규정들이다. 이 실존주들은 현존재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자의 범주들, 즉 사물적인 것의 "무엇"-규정들과는 원칙적으로 구별된다.32) 범주문제에 관한 하이데거의 견해는 대상들을 단지 사물적인 것으로부터 표상하게 하고, 따라서 물적인 범주들을 의식에 적용시키는 전통적 논리학에게서 비판적으로 거리를 취하는 그의 입장과의 연관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인간적인 현존재의 구조들은 물-범주들의 도움으로는 원칙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 즉, 이것들은 무엇내용, 다시 말하면 "경험적 사실들"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다. 이것들은 단지 형식적으로 지시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은 필연적으로 형식지시적 특성을 갖는다.
하이데거는 1927년에는 튀빙엔에서, 1928년에는 마부륵에서 행한 현상학과 신학이라는 강연에서 -- 우리는 이 강연의 원칙적인 근본방향이 존재와 시간의 시계 내에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바 -- 철학(현상학)과 신학의 관계라는 문제의 관점하에서 실존주들의 형식지시적 기능을 해명하였다. 하이데거는 우선 철학과 신학을 두 가지의 세계관들(지식과 신앙)이라고 여기면서 서로 대립시키고 이들의 긴장을 학문적인 논증이 아니라 세계관적인 신념에 의해 결정짓는 것을 비난한다.33) 그는 두 가지의 학문들로서의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에 주력한다. 학문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철학과 신학의 절대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신학은 실증적인 존재자적 학문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기독성, 즉 존재자적인 어떤 것은 다루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철학은 존재론적인, 즉 존재자의 존재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이제 실증학문인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긴요한 관심사이다. 철학은 신학의 실증성, 기독성의 정초와 개시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같은 기독성이라는 실증성을 개시하는 것은 신학의 관심사이다. 신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기독성이라는 근본개념적인 해석에 종사한다. 존재론적인 학문인 철학은 기독성의 형식적인 가능근거인, 인간적인 존재자의 선기독적인 존재틀을 분석하는 데에 근본적인 관심사를 두고 있는 바, 바로 이같은 학문적 수행에 의하여 기독성의 개념적 해석에 기여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점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범례를 제시한다. 내용적이고 구체적인 기독교의 "죄들"(Sunde)이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존론적-존재론적인 "죄책(Schuld)" 개념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비성의 근본존재(Grundsein einer Nichtigkeit)"를 의미하는 죄책이라는 실존주는 신학적인 이해수행에 신앙개념인 "죄들"의 구체적인 해석에 대한 함께 지도하는, 규정적인 단초방향을 준다. 바로 이런 한 죄책개념은 형식지시적이다.34) 이같은 연관에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책(Schuld)은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실존규정이다. 이같은 현존재의 근본들이 더 근원적으로 그리고 더 적합하게 파악될수록, 그것은 죄들(Sunde)의 신학적인 해명을 위한 실마리로서 더 분명하게 기능할 수 있다."35)
하이데거는 1923-24년 겨울학기부터 1928년까지 마브륵대학 원외정교수로 활동하면서 신약성서 신학자 루돌프 볼트만과 인간적으로 우정을 나누며 학문적 교류를 한다. 우리는 이제 하이데거의 형식적 지시라는 철학적, 존재론적 방법이 불트만의 신약성서의 실존론적 해석에 -- 비록 볼트만 자신은 형식적 지시라는 명칭에 주목하지 못하였을지라도-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형식적 지시의 토대 위에서만 그같은 실존론적 해석의 정립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었다. 불트만에게는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선험적 분석이 신앙의 호소를 신앙의 구체적 내용과는 독립적으로 실존의 근본운동내부에서 실존론적으로 해석가능하게 만드는 중립적인 인간학적 근본기구를 기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학적 사고에 접목이 되는 것은 존재와 시간의 바로 이같은 형식지시적-중립적인 인간현존재의 분석이다.
3.1929-30년 겨울학기에서 형식적 지시
하이데거는 1929-30년 겨울학기에 행한 강의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세계-유한성-고독에서 형식적 지시의 의미를 마지막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다.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모든 철학적 존재론적 개념들은 형식지시적이며, 바로 그런 한 철학적 파악의 올바른 길을 줄 수 있다고 확정적으로 언명한다.36)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같은 사실은 현존재와 그 자신의 죽음의 본래적이고 비본래적인 관계라는 범례에서 특히 명백하게 드러난다. 인간과 죽음의 관계가 삶이 사라지는 자연스런 그 무엇 -- 이것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비본래성의 양태에 속해있는 바 -- 이라고 파악된다면, 이 관계는 돌, 식물, 동물처럼 사물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37) 바로 이같은 통속적 파악에 있어서는 죽음에 대한 본래적 관계가 "현실적 행위의 순간"인 실존하는 결단성에서 시간화한다는 사실이, 거리로부터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전체적인 자기성에서 인간의 자기이해가, 즉 인간의 "거기-존재-할 수 있음"이 열린다는 사실이 간과된다.38) 이와 관련해서 죽음, 결단성, 실존 등은 사물적인 것의 속성을 나타내는 개념들이 아니라, 비본래적인, 통속적인 삶의 태도를 "거기-존재"(Da-Sein)의 본래적인 철학적 근본태도에로 전환하도록 요구하면서 -- 지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개념들임이 드러난다. 이 개념들은 구체적인 삶의 세계경험에로의 전환을 유발시키지 않고서, 이해하는 수행자에게 통속적인 파악들을 지양하고서 자기 안에 있는 거기-존재로 전환하도록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이 개념들은 결국 지시된 거기-존재를 그의 내용과 함께 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것들은 형식지시적이다.39)
물론 철학적인(존재론적인!) 개념들의 "지시적인 기능을 고려하지 않고서" 단지 이것들의 내용적인 측면만을 취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다. 이렇게 되면 이 개념들은 지반을 상실한 물음설정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하이데거는 경고한다. 하이데거는 형시지시적 개념들에 대한 오해를 인간적인 자유를 사물적인 것의 인과성의 범주의 범례에서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유의 인과성과 자연인과성을 구별한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과성을 추구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사람들이 이른바 자유롭다는 인간적 존재자의 존재틀의 형식적 지시에 대한 물음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칸트는 변증법적 가상을 들쳐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 하이데거에 따르면 -- 속깊이 놓여있는 형이상학적 가상의 희생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이데거는 철학적인 개념들의 형식지시적 성격이 어떻게 간과되고 오해될 수 있는가를 무의 개념의 예를 통해서 다시 한번 보여준다. 1929-30년은 이미 존재와 시간에 대한 서평이 발표되고,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존재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던 시기이다. 하이데거는 무의 개념이 사물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이 허무주의라는 비난은 자신의 본래적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해 왜곡시킨 것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한다. 통속적인 이해는 무와 현존재를 서로 별개의 두 가지의 존재자로 파악한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이 사물적인 무안에 사물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순수한 허무주의이며 모든 문화의 적이다"라고 말한다.41) 그런데 하이데거는 자기가 주장하는 무에 대한 현존재의 자기관계는 "하나의 다른 사물적인 것(무: 필자삽입)에 관련하는 현존재의 사물적인 속성이 아니라, 거기에 거기-존재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할 수 있음을 시간화하느냐에 대한 근거이다"라고 말한다.42) 존재자에 대한 모든 인간적인 관계는 이해하는 현존재가 무, 즉 비-존재자(존재)에 자기를 관계시킬 때에야 가능한 바, 하이데거는 자기의 무의 개념은 바로 이 가능성의 차원, 존재론적 차원을 개시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형식적 지시가 하이데거 철학 -- 적어도 초기철학 -- 의 개념형성에 있어서 어느 정도로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이에 대한 답변은 1929-30년 겨울학기 강의 안에 결정적으로 주어져 있다: "모든 철학적 개념들은 -- 하이데거는 말한다. -- 형식지시적이다."
하이데거는 근원적으로는 미간행된 존재와 시간의 제 일부의 삼편에서 형식지시적 해석학을 전개시키려고 계획하였었다. 이 삼편의 주도적 주제는 존재의미의 원리들인 시간의 본래적이고, 비본래적인 시간화의 형식지시적 도식들이다. 우리는 형식적 지시의 완성과 이같은 존재의미의 도식화는 아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삼편에서 하이데거는 어떻게 존재의 의미가 시간에 의해 실존론적인 존재, 사물존재, 도구존재라는 범례적인 의미들로 분절되는가를 보여주려고 했었다. 실존으로서 현존재는 시간의 차원에로 탈존한다. 시간의 탈존적인 차원들이 도식들에 의해 파악된다. 도식들의 형식지시적인, 잠세적인 기능은 바로 이 도식들이 본래적인 내용의미를 파악하게 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다만 존재의미의 그때마다의 구체화의 단초방향을 구체적인 이해수행에게 형식지시적으로 앞서서 준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 예를 들면 -- 망치가 손에 닿는(Zu-handener) 도구라는 해석학적 "로서"의 형식지시적 도식에 따라서 파악되거나 순수한 이론의 탐구에 대한 손에 닿지 않는(vor-handener) 대상이라는 표상(Vor-stellen)의 "로서"의 형식지시적 도식에 따라서 파악된다.
형식지시적 개념들은 형이상학적인 표상하는 사유에서처럼 존재자를 파악하는 보편적인 형식이 아니다. 이것들은 다만 존재의 발현을 지시할 뿐이다.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삶, 체험, 나, 나를, 자체, 동기, 경향, 수행, 현사실성, 염려, 죽음, 실존, 결의성, 무, 자유 등의 개념들은 존재의 발현을 형식적으로 지시하는 개념들이다. 이 개념들은 철학함의 수행에서 지시된 의미방향을 따라가고 함께 수행하면서 현존재를 그의 존재에 있어서 발현시키게 하라는 과제 앞에 세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1929년에 철학함은 -- 바로 이점에 형식적 지시에 본래적 기능이 놓여있는 바 -- 현존재(Da-Sein)의 발현시킴이라고 말한다. 이 형식적지시라는 기획은 초기 하이데거의 근본의도를 존재자적-실존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야를 교정시켜줄 수 있다. 형식적 지시는 존재자가 아닌,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묻는 존재론자로서의 하이데거가 언어의 곤궁속에서 애초부터 존재의 발현을 다양하게 지시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얼마나 분투 노력했던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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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GA 56/57, 115.
2) Vgl. GA 58, 28.
3) GA 56/57, 112, 교탁의 예에 관해서는, ebd., 113.
4) Vgl. Drei Briefe Martin Heideggers an Karl Lowith. In: Zur philosophischen Aktualitt Heideggers. Bd. 2, hrsg. von D. Papenfuss und O. P?ggeler, Frankfurt am Main 1990, 27-38; O. P?ggeler, Einleitung, in: Zur philosophischen Aktualit?t Heideggers, Bd. 2, a.a. O., 17-18.
5) Ebd., 115.
6) Ebd., 115.
7) Ebd., 115.
8) Ebd., 117.
9) Ebd., 56/57, 68.
10) Ebd., 118.
11) Vgl. ebd., 117.
12) Ebd., 109.
13) Ebd., 110.
14) Vgl. GA 56/57, 101.
15) Vgl. GA 56/57, 116.
16) Ebd., 117.
17) GA 58, 248.
18) GA 59, 12.
19) Vgl. GA 61, 84-130.
20) Vgl. ebd., 60-61.
21) Ebd., 34.
22) Ebd., 61.
23) Ebd., 33.
24) GA 61, 34.
25) GA 2, 506.
26) Vgl. ebd., 67, Anm.
27) GA 61, 33.
28) Vgl. GA 61, 100-108.
29) Vgl. ebd., 131.
30) Ebd., 141.
31) Vgl. Ch. Jamme, Heideggers fr?he Begr?ndung der Hermeneutik, in Dilthey- Jahrbuch 1986/87, 79 f.
32) Siehe GA 2, 153 und 55-66.
33) Vgl. GA 2, 44f.
34) Vgl. GA 9, 47.
35) Vgl. GA 2, 371-383, 406 Anm. 1.
36) GA 9, 64.
37) Vgl. GA 29/30, 425.
38) Vgl. ebd., 427.
39) Vgl. ebd., 426.
40) Vgl. ebd., 428f.
41) Vgl. ebd., 429.
42) Ebd., 433.
43) Ebd.,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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