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장막에 가린 폭력의 오페라
Ⅱ.Macbeth의 불안인가, 16세기 영국 사회의 불안인가
Ⅲ.공포와 폭력에 취한 극, Macbeth
Ⅳ.마녀들의 오페라-성, 언어, 폭력의 무대에서
1.세 마녀와 Lady Macbeth의 사중창
2.기호체계의 혼란
3.선과 악, 죄의식, 공포
Ⅴ.신화의 어둠을 걷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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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연세대학교 대학원
학술지명 연세학술논집
권 27
호 1
출판일 1998. 2. 20.
폭력의 대위법
(-Macbeth 시론(試論))
이종도1)
연세대 석사 2학기
4-223-98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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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내 삶의 유익한 열정은 공포였다.
? ? ? ? ? ? ? ? ? ? ? ? -토마스 홉스 (1588-1679)
Ⅰ.장막에 가린 폭력의 오페라
Verdi의 오페라 Macbeth2)를 듣는다. 음산하면서도 처연한 서곡은 불길한 파국의 그림자를 언뜻언뜻 비친다. 작곡가 Verdi는 원작자에 대한 남다른 공감과 존경을 보였다고 알려진다. 과연 Verdi는 어떤 면에서 원작자와 작품에 공명을 했던 것일까. 지휘자 Abbado의 지휘봉은 거침없이 Macbeth의 최후까지 호쾌하게 치닫는다. 박력 넘치는 Macbeth3)의 줄거리와 대사들은 희대의 오페라 작곡가 뿐 아니라 숱한 이들로 하여금 아낌을 받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좋은 시는 기호내용보다도 기호표현의 에너지로 홀로 서면서 우리의 주의력을 당긴다는4) 점을 상기한다면, 한 편의 훌륭한 시극으로서도 즐겨 외고 싶은 시적 대사를 풍부히 내장하고 있다는 점은 이 극의 큰 매력이다. 우리는 Macbeth를 읽으며 언제나 파국과 재앙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취약성을 상기하게 된다5). 이 극은 기표와 기의 모두 성공적으로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깊이와 폭, 주제와 구성에 있어서 이만큼 삶의 진정성에 육박하는 작품도 사실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이 극의 보편적 가치와 정전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하는 일을 굳이 우리가 떠맡아야 할 이유는 없다.
Macbeth를 다룬 논문이 최근에 거의 나오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6). 기존의 비평사가 Shakespeare에 기울인 남다른 주목은 물론이거니와. 극의 구조가 매우 잘 짜여 있고 심상 또한 극의 주제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체적인 통일성을 보여주는 극이어서7), 달리 흠잡을 데가 없다는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문화유물론이나 신 역사주의 등 최근 비평 사조의 구미를 돋을 만한 것이 없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기존의 비평사에서도 Macbeth를 넘어서려는 또는 독특한 시각으로 전유하려는 노력은 찾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다. 가령 이 작품의 주제를 악(惡)으로 삼는 경우, 기존의 선과 악의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여 분석하는 경향이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적 세계인 신국(神國)과 마키아벨리적 야망 추구8)”의 이분법적 구도로 극을 파악하거나, 기독교적 세계관을 투사하는 비평은 Macbeth 비평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존의 비평사는 Shakespeare집필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우의적 해석으로 이 작품을 보거나. 극중 인물들을 당대의 인물에 끼워 맞추거나 중세의 기독교적 도덕 극으로 탈바꿈을 시키거나, Malowe의 Doctor Faustus와 동일 선상에 올려놓아 작품을 파악하는 비평들이 득세함을 알려주고 있다9). 성서에 나오는 폭군들과 Macbeth를 연결하고, 그리스도 탄생 시의 세 목동이나 동방박사들을 Witches와 연결하는 따위의 분석 방법 밑에는 선과 악, 남과 여의 이분법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근/백인을 선으로 놓고 주변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을 악으로 제쳐놓는 이러한 발상법은 비단 Macbeth의 비평사만을 구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텍스트 해석의 장구한 전통은 텍스트를 훼손시키고 자신만의 정전의 신화를 만든다.
저자와 평자, 그리고 독자가 만나서 불화(不和)하고 때로는 화간(和姦)하는 비평의 공간은 늘 새로운 긴장과 충격을 요구한다. 텍스트를 이겨낼 만한 독창적인 눈과 힘은, 텍스트를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쓴다 텍스트를 감싸고 있는 두터운 정전의 신화를 뚫고, 다시 텍스트를 쓰는 일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요청되는 독해일 것이다.
Ⅱ.Macbeth의 불안인가, 16세기 영국 사회의 불안인가
당대의 사회적 상황이 기계적으로 작품에 반영된다고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당대의 정치적 역학 관계와 시대적 흐름, 당대를 구성하는 총체적 삶의 결을 추적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존의 텍스트 비평이 읽은 곳에서 멈추지 않고 텍스트를 다시 쓰는 전유적 독해의 가능성은 이러한 힘겨운 추적과 재구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 글에서 우리는 Macbeth가 절대주의 이념의 비호 아래 훈련된 폭력과 그에 대한 불안을 다루고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우선 당대의 정서적 분위기를 파악하기로 한다.
16세기는 영국 사회의 계급구조에 커다란 변동이 있던 시기였다10). 급격하게 도시들이 팽창하였고 중산층이 대두했으며, 무역과 경제가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Barbu의 표현대로 16세기의 영국은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격정으로 펄펄 끓는 가마솥이었다. 현격한 사회 구조 조정과 맞물려 사람들의 내면도 이에 못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들린 시대, 모든 것이 들끓는 불안한 시대, 안정된 가치의 세계가 결여된 시대였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본능이나 열정을 행동의 유일한 지침으로 여겼다11). 사람들의 정신은 무정부상태에 가까웠다. 세계는 확장되었으나 넓어진 세계를 받아들일 합리적ㆍ비판적 정신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그들은 일원적인 세계로부터는 떠나 있었으나 다원적 세계를 맞이할 차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16세기 영국 사회는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할 시간을 얻지 못했고 사회 구성원들의 퍼스낼리티는 통합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다.
Shakespeare 극중의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Shakespeare가 형상화한 인물들의 내면에는 극단적인 여러 성향이 공존한다. Barbu는 Macbeth를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다. Macbeth는 “도덕적인 겁장이이지만, 싸움터에서는 사자와 같이 용맹스럽다12)”. Barbu는 전체적 사회에서 개인주의적 사회로의 이행기에 비극이 출현한다고 본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16세기의 영국, 17세기의 프랑스가 바로 그러하다. 비극의 심리적 패턴은 공황의 시대라는 동일한 심리ㆍ역사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전통적 생활양식에서 벗어났지만, 새로이 바꿔 사회에 걸맞는 인간관계의 규범은 아직 정립하지 못하였다. 중세시대의 영국인들이 선과 악 천사와 악마 구원과 타락 의 극단에 있었다면, 중세가 해체되는 시기의 영국인들은 확장되고 팽창되는 세계 앞에서, 이전의 인식틀로는 담아 낼 수 없는 다양한 가치들 앞에서 혼란스러워 했다.
16세기는 봉건제에서 절대주의로 이행하는 정치체제의 변화기였다. 봉건제 하에서의 권력이 교회와 영주들과 지역들에 분산된 양태로 나타난다면, 그래서 국왕의 권력이 명목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면 절대주의 하에서의 권력은 중앙/국왕에 집중된 것이었다. Perry Anderson이 지적하는 대로13) 절대주의란 본질적으로 다시 포장된 봉건적 지배 제도로 농민 대중을 전통적 사회의 지위에 묶어 두려는 기도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절대주의 체제는 자체의 구조적 모순을 폭력과 선전으로 타개하려 하였다. Macbeth는 절대주의 이념의 비호 아래 제도화ㆍ체제화 되어가는 폭력의 이행 과정과 이를 둘러싼 불안을 다루고 있다. Duncan은 1막 4장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 Macbeth에 기대어 자신의 권력을 의존할 뜻을 비춘다. 중세 권력을 엄호하는 창과 칼에 기대고자 하는 그의 뜻은 그러나 다분히 위험과 불안을 자청하는 것이었다. 절대왕정 하에서 합법성과 현실권력 사이의 분열은 언제나 악화될 소지가 있었다14).
정치구조의 변동과 더불어 사회ㆍ경제ㆍ문화적으로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들 사이의 대립이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서 진행되었다. 삶의 틀을 짓는 신념과 믿음의 체계가 흔들릴 때 개인은 자신의 힘으로 삶의 의미를 탐색하고 삶의 방식을 선택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서 세계의 질서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질서를 재편할 수도 있다는 인식은 여기에서 나을 수 있다. Macbeth의 시역(弑逆)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의 선택은 당시의 관객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15).
Ⅲ.공포와 폭력에 취한 극, Macbeth
Macbeth는 폭력과 죽음, 권력, 불안이 일대 다로, 대위법적으로 대응되고 교직되는 극의 구조를 지닌다. Macbeth 간의 악보를 음산하게 울리는 폭력의 유도동기(leitmotiv)는, Malcolm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요란한 나팔 소리가 들리기까지, 합법적 폭력과 비합법적 폭력16), 남성과 여성, 이성과 광기, 고움과 더러움, 시대의 불안과 개인의 불안이 부딪히며 일으키는 파열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Macbeth는 수직적 중세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권력의 새로운 재편을 꾀하고자 한다. Macbeth의 Duncan왕 살해는 한 인간의 살해를 넘어서 일상적 세계의 질서와 가치체계에 대한 전복을 뜻하는 것이었다17). 용맹으로 얻은 자신의 안정된 지위를 버릴 만큼 그의 야망은 강렬한 것이다. Macbeth는 합법적 폭력과 비합법적 폭력 사이를 진자 운동한다. Macbeth는 제도적 권력을 위해 복무하는 합법적 폭력의 제 공자에서, 권력을 분열시키는 불순한 폭도로 변신한다. Sinfield가 지적하듯이, 근대 국가 형성의 주춧돌은 합법적 폭력의 독점에 달려 있다. 폭력이 성공리에 독점되면 시민들은 제도 내의 폭력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제도권 바깥의 폭력과 구별하기 시작한다. Macbeth는 제도권의 단과 밖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의 경계와 전략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18). Malcolm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행위는 Macbeth의 살인 행위에 직접적 동기를 부여하였다19). 르네상스 시대의 권력을 둘러싼 불안과 공포는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불안과 공포의 손아귀로부터 쉽게 빠져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Duncan은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성급하게 모든 것을 묶어 두려 하였으나,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Macbeth는 그러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다. 객관적 세계와의 불화는 그를 좌절시키고, Macbeth의 권력욕은 촘촘히 짜인 위계와 질서의 그물코에 붙잡히게 된다. 폭력에 대한 폭력의 대치로 권력이 이동하는 문법은 같지만, Malcolm과 Macduff의 폭력은 미래지향적 가치를 내걸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한다. Macbeth의 목을 자르는 Macduff의 칼은 절대왕정의 반석 위에서 뽑은 신검이며 이 체제를 떠받쳐줄, 새로이 대두한 중산층의 정치경제학이다. Macduff들의 정치체제는 봉건적 이상을 대신하는 부르주아적 합리주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적 합리주의에 근거하는 사회경제 체제는20) Macbeth의 폭력에 기초한 전제적 통치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봉건주의와 절대 왕정의 틈바구니에서 권력투쟁은 심한 파열음을 내고 있다. 누가 과연 Scone의 반석 위에서 떳떳이 권력을 이양 받을 수 있는가?
폭력은 혼돈의 시대, 불화하는 대립항들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유도동기이다. 봉건시대의 폭력은 보다 정교하고 집중된 절대 왕정의 형태로 바뀌어 권력 정지(整地) 작업을 돕는다. 장자 Malcolm에게 권력을 순탄하게 이양하려는 Duncan에게서 Macbeth의 무력은 어떤 무엇보다 든든한 발판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체제를 지킬 폭력이 자신에게로 돌아올 줄 Duncan은 상상할 수 없었다. 가시적이고 즉물적 인 제도적 폭력의 효과는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간다. 폭력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 강화와, 지배 세력의 피지배 착취의 공고화, 체제 기구(교회 등의 권력 집단)에 대한 국가의 단일한 합법적 권력 행사를 가능케 하는 전가의 보도이다. 당대의 불안은 그를 폭력으로 취하게 하였고 Macbeth는 폭력에 취해서 끝내 자신을 가누지 못하고 무너진다.
1막 7장에서 Macbeth는 암살을 결심하면서 “시간의 여울에서 내세를 걸고 모험을 하리라” 는 다짐을 한다. Macbeth는 불길하고도 신비스런 예언에만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결단하고 자신을 투기(投機)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투기란 무엇인가? 남자다움, 그리고 용맹이라는 허위의 신념에 대한 투기이다. 아니 자신의 운명을 잠시 밝히는 듯하다가 사라진 주술의 희미한 불빛이 전부이다.
But here, upon this bank and shoal of time,
We'd jump the life to come. -But in these cases,
We still have judgement here ; that we but teach
Bloody instructions, which, being taught, return
To plague th' inventor : this even-handed Justice
Commends th' ingredience of our poison'd chalice
To our own lips. (1.7.6-12)
자신의 행위가 빚어낼 응보를 그는 예감한다. 그의 내면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것은 정의와 죄의식이 아니라 야망이다.
? ? ? ? ? ? ? ? ? ? ? ? ? ? ? ? ? - I have no spur
To prick the sides of my intent, but only
Vaulting ambition, which o' erleaps itself
And falls on th' other- (1.7.25-28)
그는 운명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운명과 대결하고 맞대거리하는 일은 바로 사내다움에 다름 아니다. 그가 지탱하고 있는 봉건제와 가부장제의 폭력은 사내다움이라는 미덕과 맞닿아 있다. 운명과 맞서는 데 있어서 살인이라는 수단조차도 그는 마다하지 않는다. 홀홀 단신으로 시대의 불안과 권력의 위계를 뚫고 나가려는 그의 시도 앞에는 그러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던 Lady Macbeth가 죽고, 버남 숲이 던시네인으로 다가오는 긴박한 상황이 닥치자 Macbeth는 생의 황혼을, 르네상스 시대의 노을을 바라보며 쓸쓸한 독백을 읊조린다. 그의 독백은 리어왕이 4막 6장에서 토해내는 대사와 퍽 닮았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Creeps in this pretty pace from day to day,
To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 ;
And all our yesterdays have lighted fools
The way to dusty death.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and fury,
Signyfying nothing. (5.5.19-28)
폭풍우가 몰아치는 광야에서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고통스런 삶을 뒤돌아보는 King Lear의 고통스런 눈빛과 Macbeth의 절망스런 표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When we are born, we cry that we are come
To this great stage of fools. (King Lear 4.6.186-7)
죽음 앞에서 Macbeth는 자신과 인생을 성찰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 성찰은 매우 비극적이며 허무적인 관조의 빛깔까지 띠고 있다. “recorded time”이란 Macbeth의 육체에 쓰여진 역사이며 검은 페이지이다. “인생이란 걷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독백은 운명론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Macbeth의 생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폭력에 물든 야망의 예고된 운명이며, 가부장제의 불안과 균열을 알리는 징후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은 자신의 흔들리는 그림자에서 한발자욱도 벗어날 길이 없다.
Ⅳ.마녀들의 오페라-성, 언어, 폭력의 무대에서
Macbeth의 앞에 어른거리는 숙명의 그림자는 권력의 신기루이기도하다. 그것은 그의 욕망을 흔들어 깨워 칠흑같은 수렁으로 이끈다. 혼돈스런 시대의 흐름은 그를 권력욕으로 몰아넣고, 신기루는 그에게 최면을 걸어 폭력으로 내몬다. 극의 갈등은 Macbeth의 내면과 바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Macbeth의 내면적 갈등은 끝없는 권력욕과 안정 욕구 사이의 갈등이다. Macbeth는 그러나 피에 젖은 발을 감히 욕망 쪽으로 내딛는다 그가 걷게 될 길은 피에 젖은 권력의 가도이다. Macbeth는 스코틀랜드 왕가가 굳히려는 장자상속권에 의한 통치 질서를 뒤엎고 왕위를 찬탈하지만 새로운 전통과 질서를 창조하기에는 힘과 지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현실 사회를 자신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경륜과 용기와 배짱이 없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두려움과 절망 뿐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공포는 끊임없이 권력을 ‘감시와 처벌’로 지탱시키려 하지 않겠는가? 공포는 폭력을 수태시킨다.
The mind I sway by, and the heart I bear.
Shall never sa9 with doubt, nor shake with fear (5.3.9-10)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을 때조차, 그는 겁에 질려 있다. ‘공초를 포식한(5.5.17)’, 그래서 공포의 맛을 잊어버린 그는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인생이 시들어 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I have liv'd long enough : my way of life
Is fall'n into the sere, the yellow leaf : (5.3.22-23)
“Hang those that talk of fear”(5.3.36) 겁에 질린 소리를 하는 자들을 목매라는 헛소리는 오히려 그에게 돌아가야 한다. Macbeth의 내면에서 용틀임하는 불길하고도 불온한 욕망과, 현실이 Macbeth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타협하지 못한다. 당대의 불안과, 현실과 Macbeth 사이의 긴장은 극 전편을 팽팽히 조율한다. Macbeth와 Lady Macbeth는 운명의 주술에 맞추어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려 도전하지만. 완강한 권력의 문법은 그들을 좌절시킨다. 그들의 욕망을 부추긴 마녀들의 주술은 인간 내면의 어둡고 추악한 욕망을 연주한다. 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악보에 쓰인 그대로이다. 시대의 불안과 권력의 새로운 재편에 감히 한 자루 칼로 뛰어들었던 그들의 최후는 파멸로 끝을 맺는다.
1.세 마녀와 Lady Macbeth의 사중창
전통적인 해석은 Lady Macbeth를 마녀나 악의 화신으로 정죄하고 무대 바깥으로 쫓아 내었다. “Macbeth보다 상상력이 모자르며 관객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21)” 그녀는 무대의 어두운 뒤편으로, 텍스트의 이면으로 물러난 지 오래이다. 악녀, 또는 마녀로 Lady Macbeth를 규정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Shakespeare를 서구/백인/기독교 중심적 정전의 반열에 올려놓고 Shakespeare 텍스트에 보편과 진리의 입김을 불어넣으려는 이들의 목소리는, 주저없이 Lady Macbeth를 마녀재판에 소환한다.
Lady Macbeth에게서 우리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볼 수 있디 Eagleton은 Shakespeare의 악한들이 그러하듯이 Lady Macbeth 또한 부르주아 개인주의자라고 본다22). 아이의 머리를 깰 수 있을 정도의 잔인함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Euripides의 Medea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그녀는 자신의 여성다움을 앗아가 달라고 빈다(“Unsex me”, 1.5.41). 여자다움을 없애 달라는 그녀의 탄원에서 우리는 여성의 주체가 분열하는 소리를 엿듣게 된다. 그녀의 몸은 정수리, 발끝, 피, 동정 따위로 사분오열되어있다23). 역사와 정치의 공공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여성들은 여성성을 기각해야만 했다. Lady Macbeth가 아이조차 내리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여성의 정치적 참여와 실천이 어려웠다는 뜻일 수도 있다. Lady Macbeth는 남성성의 가치와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의 가치에 이중으로 눌린 여성이다. 정치적 실천을 시도하다가 미칠 수밖에 없었던 여성, 그가 Lady Macbeth이다. Lady Macbeth는 남성성을 인본주의와 동일시하는 가부장제의 희생자이며, 당대의 억압적 사회에서는 여성으로서 살 수 없었던 인물이다24).
Lady Maebeth가 르네상스 시대의 좁고 가파른 여성의 위치를 보여준다면 Witches는 르네상스 시대의 남성성/여성성의 혼란스러운 체계를 비웃고 마음껏 비상한다. 수염 달린 여성, 그들의 수수께끼 같은 성(性)은 확정할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불안과 위기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고안된 ‘남자다움’의 정 반대편에서 Witches는 남성들에게, 아니 조작된 허위의 남성성에 조롱과 야유를 보낸다. 그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롭게 수직적 질서를 이루는 세계를 무너뜨린다. 남성 못지 않은 권력욕을 성취하려는 Lady Macbeth와, “남성이 기대하는 곳에 머물진 않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통해, 금이 가기 시작한 가부장제의 위태로움을 우리는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Witches가 이 극의 무의식이자 주인공이라는 Eagleton의 통찰은 어느 면에서는 옳다. Witches는 전도된 내면, 모순된 인간성, 부조리한 당대의 이념을 비웃고 떠돌아다닌다. Witches는 르네상스 말기를 범람하던 부조리의 육화라 볼 수 있다.
Roman Polanski가 1971년에 감독한 Macbeth에서 Witches는 종교와 왕정을 압도하고 있다25). 인간의 제도와 권력이 불안하고 깨어지기 쉬운 것인 반면, Witches의 권력은 영속적이다. 그들의 마성(魔性)은 스코틀랜드의 심장을 관통하여 모든 형태의 권력을 대체한다. 수염을 기르고, 불온한 정보를 알고 있으며,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알 수 없는 여성들인 Witches는 가부장제의 좁은 시야로는 결코 잡히지 않는 존재이다. 가부장제에 기초한 문화ㆍ역사적 의미망 속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Witches를 보면서 가부장적 남성성은 불안의 표정을 감출 수 없다. 지상의 권력/가부장제적 공간일 Macbeth는 날아간 Witches의 방향을 알지 못한다. Lady Macbeth와 Witches는 여성다움의 경계선 위에 있다26). Witches는 Macbeth의 내면에 갇혀 있는 야망에 찬 생각들을 풀어 놓음으로써 “계급 사회의 질서에 대한 숭배가 위선적이며 기만적”임을 보여준다27).
Belsey는 여성성이 거세된 광기의 여인, Lady Macbeth의 빈 자리를 주목한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불길하게 반복되는 남성성과 함께 반역자 Macbeth의 머리를 들고 등장하는 Macduff의 남성성이다. Macbeth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여성들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고 홀려 분열된 가부장제의 균열의 틈을 보여준다. 단일하고 좁은 문화ㆍ역사적 순간 속에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Witches에 의해서 금이 가기 시작한 가부장적 남성성은 그 흥한 모습을 드러낸다. 지상의 권력/가부장제의 공간인 Macbeth는 Witches의 의미를 붙잡지 못한다. Macbeth는 여성을 모성애로 한정시키고, 남성에게는 인간의 모든 의미를 허용할 것을 약속하는 가부장제의 불안을 보여준다28). 르네상스 가부장제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와 연결되어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한다. 마침내 남성의 공간은 확장하고 팽창하여 여성을 위한 공간을 잠식하고 인간의 공간을 독점한다. 오직 Witches만이, 확정되지 않은 성을 지닌 그녀들만이 침묵과 종속의 차이/구별의 문화 안에서 번성할 수 있다. “남자란 무엇인가(What is a man')?”라는 질문은 Hamlet이 던졌지만(4.4.33) 단호하게 그 대답을 주기 위하여 애를 쓰는 극은 바로 Macbeth이다. 남성이라면 …, 남성은 … 으로 이어지는 정의, 재정의는 여성을 아주 미세한 가정의 구석으로 내몰고 그 곳만을 허용한다. 역사의 공전 영역으로 틈입하기 위해서는 Lady Macbeth처럼 아이와 가정과 여성성을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Macbeth는 단일한 남성의 육체가 아니라 시대의 모순과 불안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혼성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Macbeth의 내면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Lady Macbeth와 Witches의 것이기도 하다. Freud는 「정신분석 작업에서 드러난 몇 가지 성격 유형」이라는 글에서 Ludwig Jewels의 견해를 소개하며 Macbeth와 Lady Macbeth의 내면을 분석하고 있다29).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단검의 환영을 본 사람은 Macbeth이지만 정작 정신착란에 빠진 이는 Lady Macbeth이다. Macbeth는 더 이상 잠들지 못하리라는 환청을 듣는다. 그러나 잠들지 못하고 몽유하는 이는 Lady Macbeth이다. 피에 젖은 손을 넵튠의 바닷물로도 씻을 수 없다고 한탄한 이는 Macbeth였고, 조금의 물만 있어도 범행의 흔적을 씻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Lady Macbeth였다. 그러나 Lady Macbeth는 반시간의 반을 씻어도(5.1.27-29) 손에 묻은 피자욱을 떨쳐 낼 수 없으며, 아라비아의 향수로도 그 냄새를 가시게 할 수 없다(5.1.47-49). 대범했던 그녀는 후회와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지만 Macbeth는 시간이 흐를수록 도전적으로 되어 간다. 그들은 둘이되 하나이고 하나이되 둘이어서 누가 누구인지 가늠을 하기 어렵다. “마치 심리적으로 하나인 개체가 통합되지 못하고 두 부분으로 남아 있는 듯이, 그리고 하나의 원형에서 파생된 두 모형처럼” Lady Macbeth는 마녀들의 예언을 직접 듣기라도 한 듯, Macbeth의 거사를 부추기고 Macbeth의 사나이다움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키려 애를 쓴다. 그는 다름 아닌 Macbeth의 심층 의식이고 그가 사로잡힌 ‘남성다움’에 대한 강박관념이다. 그녀에게 사내만 낳으라는 Macbeth의 말은(1.7.73) 남자답게 굴어야만 한다는 자기 다짐이기도하다30).
Three Witches는 Macbeth와 Lady Macbeth가 걷게 될 파멸의 길을 비추고 있다. Witches는 셋이자 하나로, 공기처럼 세계를 부유하며 지상의 견고한 정체성을 뒤흔드는 존재이다. 불가해한 그들의 노래는 어지러운 시대상을 음산하게 노래한다. Witches의 예언은 욕망의 책과 같은 Macbeth의 내면을 읽은 것에 다름 아니다. Hegel은 Witches의 예언이 맥베스의 감춰진 욕구라고 해석한다31). Witches는 Lady Macbeth와 함께 늪같은 Macbeth의 내면을 이루고 있다. 가부장제가 내장하고 있는 곤혹스런 모순은 혼성의 공간인 Macbeth의 육체를 통해 드러난다. Macbeth의 욕망의 공간에서 Lady Macbeth를 위한 공간은 없다. Macbeth부부의 공유 지역은 폭력적인 남성성에 의해 Macbeth에게만 독점된다. 그러나 세마녀와 Lady Macbeth의 사중창은 무대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다.
2.기호체계의 혼란
Macbeth와 Banquo가 Witches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1막 3장) 당대의 언어의 혼란을 보여주며 동시에 이 극 내부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혼돈을 예감케 한다. Macbeth와 Banquo가 던진 질문들은 Witches에게 결국 대답을 듣지 못하며, 해결되지 못한 질문들은 관객과 독자의 뇌리에 남게 된다. Banquo와 Macbeth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는 있지만 서로 다른 관심사에 골몰하고 있다. Macbeth가 Witches의 예언 속으로 들어가 있다면, Banquo는 Witches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Macbeth는 Witches가 던지는 예언의 동기가 무엇일지에 대해 한 점의 의혹도 표하지 않으며,수상쩍은 모양새에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숨기고 Witches로부터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둘러대기와 말 에둘러가기 따위는 그가 스스로를 속이거나 남을 속여야 하는 기로에 서 있음을 알려준다32).
Eagleton은 Macbeth를 다시 읽으면서 기호의 안정성에 주목한 바 있다. 사회 질서의 구성에 기호의 안정성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Shakespeare의 글쓰기는 자신의 보수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현란한 재담과 비유, 말장난 등으로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게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많은 부분은 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데 바쳐진다고 Eagleton은 설명한다33).
Macbeth에서는 Shakespeare의 여느 극과 달리 하층 신분과 상위 신분이 스타일 상으로 뒤섞여 있는데34), 이름을 얻지 못한 자객마저 시를 읊고 있다(3막 3장). 모두가 시인이고 가객이다. Witches의 주술적인 수수께끼 시구들은 또 어떤가? 극중 언어의 혼란은 혼돈의 시대에 잘 어울리는 것이다. Macbeth의 불안과 공포, 두려움은 그로 하여금 절망의 시를 짓게 한다. 그러나 시인이 되기엔 그의 내면은 심하게 분열되어 있다. 통합될 길 없는 부서진 신경과 뇌수를 지니고 시를 만들 수는 없다. 독백 장면엔서 보이는 빼어난 절창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살인을 대가로 얻은 노래이다. 절창을 부른 후 전령을 보자마자 그의 혀는 너무도 경박하게 돌아간다.
…
Signifying nothing.
Enter a Messenger
Theu com'st to use thy tongue, thy story quickly. (5.5.27-29)
무엇보다 이 극의 언어적 혼란의 정점은 Witches가 쓰는 수수께끼같은 말에 있다. Witches는 기의와 기표의 체계를 앞장서서 얼크러뜨리고 어느 곳에도 정박하지 못하게 한다.
3.선과 악, 죄의식, 공포
Macbeth는 이율배반의 세계이며 모순의 세계이다. “더러운 건 아름답고 아름다운 건 더럽다(Fair is foul, and foul is fair)”(1.1.11). 그러나, 더러움과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실체는 무엇인가? 모순어법에 실려 Shakespeare특유의 모호성과 양가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극은 악(惡)과 공포 그리고 불안에 대한 탐구이다. 또한 인간에 내재하는 위반과 반역에 대한 고찰이며, 공포와 전율에 떠는 인간의 초상화이다 근대인의 인식 문턱까지 다다른 등장 인물들의 지치고 피에 젖은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황혼을 맞은 당대의 징후를 읽을 수 있다. Macbeth가 부둥켜안고 있는 깊은 죄의식은 원죄에 대한 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라진, 언급조차 한 번 안되는 신의 그림자는 Macbeth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고 있다. 신이 사라진 무대, 신이 버릴 세계에서 Macbeth는 방황하고 절망한다. 공포에 감히 맞서 보지만 그는 허장성세만을 보여줄 뿐이다. Kott가 주목한 바처럼 그는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하여 살인을 하고, 살인했다는 두려움에 또 살인을 저지른다35). 모든 사람들이 피에 감염된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무정부적인 시간에 다만 확실한 것은 육체이고 피이며 폭력을 통한 권력의 약속이다. 과도하게 흘러 넘치는 피가 마침내 멎고 낮의 질서로 복귀할 것을 권유받으면서 극은 끝난다. 와해 직전까지 가는 인간을 Shakespeare는 피의 이미지로 보여준다36).
Barbu는 모든 것이 불투명해진 르네상스 시대에 유일한 지침은 본능이나 열정이었다고 설명한다37). 기실 거의 모든 등장 인물들은 넘실대고 부글대며 끓어오르는 시대의 열기에 후를 달아올라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불안은 인간의 내면에 모순/공포/악/부조리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불안과 마주서야 했던 인간 군상들은 어떤 선택을 하필 어떤 길을 걷게 되는가? 근대인의 실존과는 달리, Macbeth의 실존은 신비와 주술에 기대는 실존이며 피와 폭력과 공포에 감염된 실존이다 근대인의 실존이 합리성에 기대고 있다면 Macbeth의 실존은 주술적인 환영 속에 자리잡고 있다. Macbeth는 더구나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인 탓에 공포를 느끼는 데 있어서 남다른 예민한 감수성을 보인다38). Witches의 예언을 듣자마자 단박에 그의 머리는 살인의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말을 탄 채 Banquo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피에 젖은 왕좌에 가 있다. Macbeth가 보여주는 과감한 실천과 투기(投企)에서 실존적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실천과 행위는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기존의 비평은, Macbeth가 악으로 빠져 들면서도 선과 도덕에 대한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Macbeth는 한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삶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표현한다39). 그렇게 볼 때, 인간의 보편적 진실로서의 악과 비극적 본질을 이 작품에서 캐낼 수 있다. 그렇다면, Macbeth는 윤리적 규범을 위반한 한 인간이 위반에서 야기된 죄 의식으로부터 존재적 원죄의식에 시달림으로써 자신의 존재적 정당성마저 부정하게 되는 자기파멸 또는 내면적 자기소외의 비극이다40). Macbeth는 죄의식에 끝까지 저항을 시도하며 결국 Macbeth의 비극적 인식은 어떠한 가치에 대해서도 양도될 수 없는 자기 존재의 존엄성 곧 인간의 존엄성이자 자기 생명에의 충실성에 대한 인식이 된다41).
기독교/백인 중심적인 견고한 선악관은, 끊임없이 유동하고 미끄러지는 선악의 테두리를 처음부터 무시하고 원형질의 선악관을 가지고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Macbeth의 복잡한 내면은 현대인의 정신구조와 많이 닮았다. 그는 단순하고 고정된 역할에서 벗어난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한다. 왜 그는 보다 합리적이고 주도면밀하지 못한가? 왜 그에겐 냉정하고 현실적인 마키아벨리적 악당의 면모가 없는가? 일단 자신을 투기한 뒤라면 왜 계속 뒤를 돌아보는가? 우리는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기 직전 고꾸라진 Macbeth, 돌연 신이 사라진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신이 남긴 죄 의식으로 스스로를 옭아 죄는 Macbeth를 본다. 그에게는 자신이 저지른 위반을 변호하려는 노력이 보이질 않는다. 위반을 합리화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권력을 재편하려는 의지와 노력 모두가 그에게는 부족하다42). 불길한 전조와 근거 없는 조짐에만 매달리는 그에게서 근대적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43)? 우리가 Macbeth의 이름을 기억하는 연유는, Macbeth가 인간의 보편적 진실을 연기하기 때문이 아니다. Macbeth의 심리적 층위는 당대의 불안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Macbeth는 야망을 좇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사실 쫓기고 있다. 폭력과 광기 전율과 공포, 죄의식에 사로잡혀 그는 폭력과 살인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를 내몰고 있는 것은 불균형하게 접합된 지층들 사이의 긴장이다. 봉건제에서 절대 왕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권력은 어떻게 폭력을 제도 내로 수렴하는가?
남성과 여성이, 환영과 현실이, 낮과 밤이 뒤섞여 있는 공간에는 뚜렷한 차이와 구별이 없다. 혼돈의 지상에 보이는 것은 환영뿐이다. 권력이 제도 바깥의 폭력을 제도 안의 폭력으로 수렴하는 과정은 이러한 환영 속에서 어슴푸레 드러난다. Macbeth가 본 단검의 환영, Witches의 환영, Banquo의 환영은 현실의 지평 위에 피어오르는 신기루이다. Macbeth는 현실을 투시하지 못하고 신기루 속에서 헤매고 있다. 공포를 포식한 그가 이제 할 일은 한 없는 어두움과 무(nothingness)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은 죽음의 공간이다.
Ⅴ.신화의 어둠을 걷어내기
Macbeth는 르네상스 시대의 불안과 부조리가 수태시킨 드라마이다. 여기엔 당대의 혼돈스런 난국을 폭력으로 돌파하려는 불길한 욕망의 흐름이 있다. Macbeth는 이항대립적인 가치들의 상호침투와 교직의 공간이며, 이 공간을 관통하는 선율은 폭력에 취한 선율이다. 여기에서 울려 퍼지는 폭력의 전주곡과 코다는 그악스럽게 우리의 귓가를 어지럽힌다. Macbeth가 강박적으로 느끼는 시간에 대한 공포는44) 공포로부터 달아나려는 폭력으로 가시화된다. “기록된 시간”의 끝을 향하여 달려가는 시침을 막기 위하여 그는 폭력을 휘두른다. Macduff와 Malcolm의 승리는 Cawdor와 Macdonwald에 대한 Macbeth의 승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45). 불안하고 균열된 권력의 이동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Macbeth의 선택과 패배를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적 조건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인간의 위대함이, 세계와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 하면서도 거기에 항거하는 데 있다고 본다46). 보수적/자유주의적 독해는 텍스트를 둘러싼 권력과 권력 관계에 눈을 가리고 극이 내장한 체제와 폭력 뿐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현실성을 외면한다. 비극이 요구하는 행위를 통하여 Macbeth는 자신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삶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다는 투의 자유주의적 시각은 빈약한 역사 사회적 상상력으로 텍스트를 그저 정당화시키는 수준에서 머문다. Macbeth가 야망을 품고 마침내 파멸하기까지는 어떠한 대안도 없었으며, 그것은 인간 조건 안에서 불가피했다는 식의 해석에서 멈춘다. 또한 정치적 분석과 행위의 가능성으로부터 퇴각하여 체제와 정치를 문제 삼지 않고 묻어 둔다. Alan Sinfield는 전통적인 형식주의자들을 5막에 등장하는 Scottish전의에 빗대어 야유하고 있다. 전의와 형식주의자들은 체제의 한가운데 문제가 있음을 알지만, 대안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이러한 태도를 비준하며, 인간의 불가피한 패배에 대한 설명으로 ‘인간 조건’ 따위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인간 조건의 한계와 싸우는 위대한 비극의 영웅들의 경험을 통해, 우주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확인하는 형식주의자들의 비평 속에서 Alan Sinfield는 오히려 우스꽝스러움과 허위를 감지한다47).
개인의 실존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당대의 불안과, 소멸하는 이전의 가치와 경계들은 폭력을 수태하는 자궁이 되었다. 피에 젖은 채 끝없는 살인의 업보를 뒤집어쓰고 시대를 거스르는 폭력의 시인 Macbeth를, 여성의 공간을 침탈하고 수립된 가부장제의 균열을, 폭력의 순환에 빠진 남성성의 폭력적인 세계를 우리는 지켜보았다. 우리는 Macbeth의 왕위 찬탈을 보면서 분개하기보다는 은근한 공감을 보낸다. 수직적인 질서를 흩뜨리는 Macbeth에게 우리는 소리 없는 공감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죄의식에 시달리고, 불투명한 미래가 주는 불안에 괴로워한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그와 닮았다. 그러나 그 닮음은 4백여년 동안 불균형하고 불규칙하게 글인 지충의 접합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과 Maobeth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뚜렷이 존재한다. 신화의 전략은 그러나 상거한 시간의 격차와, 성(性)과 전통의 차이와 삶과 사회와 문화의 이질적 층위를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내면을 보편이라는 허울 아래 형성하고자 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Macbeth 읽기는 그러므로, 서구 백인 중심의 문학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비극적 인식을 뚫고 시작하여야 한다. 두 배의 폭약을 장전하여 정전의 신화에 두 배로 타격을 가하고 또 가하는 ‘As cannons overcharg'd with double cracks. Doubly redoubled strokes upon the mythology of canon’(1.2.37-39와 대목을 바꾸어서) 폭력적인 독해가 오히려 텍스트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관습적 상상력과 가정(假定)에 거스르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텍스트의 결을 거스르는 읽기는 비단 이 자리에서만 요청되어야 할 방법론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두터운 정전의 백색 신화는 작품을 가리고서 우리에게 신기루를 가리킨다. Macbeth는 그 자리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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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추천인: 임철규 교수(영어영문학과)
2) Verdi, Macbeth (Milano: ⓟ Polydor International GmbH, 1976).
3) 텍스트로는 Kenneth Muir가 편집한 The Arden Shakespeare (London & NY: Methuen, 1984)를 택하였고 번역서로는 최종철이 번역한 『맥베스』 (민음사, 1993)를 참고하였다. 이하 본문 인용 행수는 아라비아 숫자로만 줄여서 표기한다. 예를 들어 3막 4장 21행의 경우, 3.4.21로 표기한다.
4) 유종호, 『시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1995), 37면.
5) 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1989), 285면.
6) 일례로, Shakespeare Quarterly에서는 최근 10년간 Macbeth를 거의 취급하지 않았다.
7) 김인표, 「Macbeth」에서의 주인공에 대한 공감(sympathy)연구」, 한국셰익스피어학회 편, 『The Shakespeare Review』 24호 (서울: 1994), 115면.
8) 김동호, 「Machiavelli와 Macbeth-Equivocation을 중심으로」, 한국셰익스피어학회 편, 『The Shakespeare Review』 26호 (서울: 1995), 24면.
9) 기존의 비평들을 비판하며 Felperin은 Elisabeth 시대의 역사극 가운데 Macbeth를 자리매김한다. Howard Felperin, “A Painted Devil: Macbeth,” Harold Bloom (ed.), William Shakespeare's Mocbeth(NY & Philadelphia: Chelsea House Publishers, 1987), pp. 91-111.
10) 16세기 영국의 심성사(心性史)는 다음을 참고하였다. Zevedei Barbu(임철규 옮김), 「역사심리학」 (서울: 한길사, 1993), 197-282면.
11) 위의 책, 209면.
12) 위의 책, 231면.
13) Perry Anderson, Lineages of the absolute state (London: New Left Books, 1974), p. 18.
14) Alan Sinfield “Macbeth: History, Ideology and Intellectuals,” Ivo Kamps (ed.), Materialist Shakespeare (London & NY: Verso, 1995), p. 94.
15) 이덕수, 『비극적 갈등 양식과 세익스피어 비극』 (서울: 형설출판사, 1991) 383면.
16) Alan Sinfield, Ibid., p. 93.
17) 이덕수, 앞의 책, 347면.
18) Catherine Belsey, “A Future for Materialist Feminist Criticism?,” Valerie Wayne (ed), The Matter of Difference (Cornell U. P., 1991), pp. 257-270.
19) Macbeth는 Duncan왕의 가장 가까운 연장의 인척이므로 사실상의 왕위 계승자이다. 그러나 Duncan은 자신의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다. Hegel은 그 일이 Macbeth가 범죄를 저지르게 된 첫 동기가 된다고 설명한다. G. W. F. Hegel(두행숙 옮김), 『헤겔 미학I』 (서울: 나남출판사, 1996), 296면.
20) 이덕수, 앞의 책, 378-382면.
21) 김인표, 앞의 글, 123면.
22) Lady Macbeth는 여성의 권력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세 마녀에 가깝지만, 남성 중심의 체제를 지배력과 활기에서 능가하려는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이다. Tarry Eagleton(김창호 옮김), 「세익스피어 다시 읽기」 (서울: 민음사, 1996), 17면.
23) Catherine Belsey, The Subject of Tragedy (London: Routledge, 1985), p. 47.
24) Catherine Belsey, “A Future for Materialist Feminist Criticism?,” Valerie Wayne (ed.), The Matter of Difference (Cornell U. P., 1991), pp.264-265.
25) E. Perlman, “Macbeth on film: Politics,” Stanley Wells (ed.), Shakespeare Survey 39 (Cambridge U. P., 1991), p.70. 이 글은, Roman Polanski, Macbeth (GB: Playboy Productions/Caliban Films, 1971와 더불어 Kurosawa Akira와 Orson Welles가 각각 영화화한 Macbeth를 함께 놓고 정치적 함의를 다루고 있다.
26) Catherine Belsey, The Subject of Tragedy (London: Routledge, 1985), p. 183.
27) Terry Eagleton 앞의 책, 9-20면. Eagleton은 그들이 던지는 수수께끼같은 말들로 사회 구조의 전복을 예감한다. 그는 양성적이고 불완전한 마녀들이 사회의 안정성을 뒤흔든다고 보았다.
28) Catherine Belsey, “A Future for Materialist Feminist Critcism?,” Valerie Wayne (ed.), The Matter of Difference (Cornell U. P., 1991), pp. 260-261.
29) Sigmund Freud(김길웅 옮김), 『프로이트 문학예술 이론』 (서울: 민음사, 1996), 448-449면.
30) 그의 강박관념은 모두에게 감염된 것이다. 자객이 Macbeth에게 바치는 충성의 다짐은(“We are men”, 3.1.90) 스코틀랜드 남성들의 합창이다.
31) “… 인간은 불안정하게 그러한 환영들의 마술이나 속임수, 폭력에 눌리고 마는 것으로 묘사된다… Macbeth에서 마녀들은 Macbeth에게 그의 운명을 미리 지정하는 외부적인 위력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마녀들이 예언하는 것은 Macbeth자신의 내면 깊숙이 간직된 소원으로, 이것이 마치 외부적으로 그에게 다가와 알려지는 것처럼 표현한 것일 뿐”. G. W. F. Hegel, 앞의 책, 330면.
32) 최도섭, 「Macbeth」의 대화에 관한 화용론적 고찰」, 한양대학교 세익스피어연구회 편, 『The Hanyang Shakespeare』 3호 (1995), 25-40면.
33) Eagleton, Ibid., p. 10.
34) Shakespeare 가 시극으로 남긴 10만 5천 8백행 가운데 74퍼센트가 운문이며 나머지가 산문이다. Shakespeare 극 가운데 엄격한 고전적 스타일이 무너지고는 있지만, 하층 신분은 산문으로 얘기하며 상위 신분은 운문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시대적 흐름에 전혀 비켜서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 385면.
35) Jan Kott, Shakespeare our Contemporary (NY: The Norton Library, 1966), pp. 85-97.
36) Arthur Sewell, “Tragedy and the ‘Kingdom of Ends’,” Dean, Leonard Fellows (ed.), Shakespeare Modern Essays in Criticism (NY: Oxford U. P., 1967), pp. 295-316.
37) Zedevei Barbu 앞의 책, 209면.
38) 김인표, 앞의 글, 122면.
39) 성원근, 「Macbeth의 비극적 인식」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26면.
40) 위의 글, 23면.
41) 위의 글, 67면.
42) 움직인 버남 숲은 실상 위장한 병사들이다. Macduff 또한 절개하기는 했으나 여인의 배에서 나왔다. 예언은 신기할 것도 없는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Macbeth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에 의해 상황을 타개하려 하기보다는 점술과 토템, 미신에 의지한다.
43) Felperin은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Macbeth를 근대적 인간으로 본다. Howard Felperin, Ibid, p. 109.
44) Harold Bloom, “Introduction”, Ibid., pp. 1-4.
45) Howard Felperin, Ibid., p. 105.
46) 이덕수, 앞의책, 381면.
47) Alan Sinfield, Ibid., pp. 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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