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머리말 ― ‘비껴섬’과 ‘몸담음’의 차이?
Ⅱ. 현실 극복의 동일한 詩的 인식과 두 가지 표출 방식
Ⅲ. 金春洙 詩의 경우
Ⅲ-1. 묘사주의와 절제의 기법/기호생산의 텍스트
Ⅲ-2. 歷史인식에서 개인적 자아로/존재차원의 非人間化의 시
Ⅳ. 金洙暎 詩의 경우
Ⅳ-1. 자기 陳述의 발화/해독하는 텍스트
Ⅳ-2. 자아발견에서 역사적 삶의 詩로/인간주의 실천으로서의 反詩
Ⅴ 맺는말―하나를 지향하는 兩極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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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어문학회
학술지명 이화어문논집
ISSN 1229-7224
권 12
호
출판일 1992.
동일한 詩約 인식의 두 가지 표출방식
(金春洙와 金洙暎의 詩)
이은정*
8-596-9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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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 ‘비껴섬’과 ‘몸담음’의 차이?
Ⅰ-1.
두 시인을 비교하고 연관지으며 함께 생각해 보는 일은 흥미롭다. 또한 한 시인이 어느 시인과 짝을 이루어 언급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의미가 산출되고 가리운 부분돌이 밝혀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비교 언급은 때로 대조적인 양상을 도출해내는 무의미한 작업으로 끝나기 쉽다. 그러므로 두 시인을 함께 생각해 보는 데에는 어떤 필연적인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동시대의 시인이라는 이유나, 원가 비슷하다거나 혹은 전혀 다르다는 언급에서 그치는 인상비평 등은 이러한 연구의 정당한 근거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Ⅰ-2.
金春洙와 金洙暎 시인을 떠올리면 비교해 연구해보려는 욕구가 자극된다. 사실 이 시인들에 대해서는 여느 시인들에 비해 보다 큰주목이 있어 왔으며 대조하여 언급한 것 역시 꽤 이루어진 실정이다. 그러나 이 두 시인을 연구자 자신의 고정관념의 척도로 삼으려는 많은 이들에 의해, 그리고 여러가지 개념의 혼돈과 이들 사이에 놓인 얽힌 실타래를 풀어보지도 않은 一見에 의해, 이 두시인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심연이 자리잡은 듯하다.
동시대에 詩作을 한 이 시인들 <金春洙(‘22- )는 ‘46년부터, 金洙暎(‘21-‘68)은 ‘45년부터>은 당시 시단과 문단의 분위기나 지금까지 행사되어온 그들의 영향력과 문학사적 의미 등에 의해 자주 짝지어 언급되어 왔으며,1) 또한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시인들로 꼽히고 있다. 사실 金春洙의 경우 단선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시세계를 지닌 것이며, 金洙暎 또한 그의 시가 사회적인 문맥에서만 이해되면서 金洙暎 神話를 이룬 후 일어나기 시작한 수용자들 의견의 불일치 등이 그들을 더욱더 중심시인으로 위치지운 듯하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들을 함께 언급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논지를 선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한 언급의 대부분은 두 시인이 극단적이며 대립적인 입장에 서있는 시인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혹자는 ‘극과 극은 통한다’는 의미있을 것 같은 일별을 던지는 것에서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은 시인들이 택한 소재에 의해서만 가름되거나 수용자의 고정반응에 의한 때문일 수 있으며, 하나의 작품이나 한 시인은 문학작품 외적인 요건―컨텍스트, 독자의 기대지평……등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되곤 하기 때문에 실제 시의 검토 없이는 그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역사와 현실의 질곡이라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비껴섬―純粹’와 ‘몸담음―參與’로2) 이름지워져 편가름된 金春洙와 金洙暎의 시들. 이미 순수니 참여니 하는 양분에 대해 화해와 지양을 약속한 이즈음, 그 둘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고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있으며 두 가지 표현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임을 밝혀 나가야 할때라고 생각한다.
Ⅰ-3.
본 고찰은 몇가지 의문점과 기대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시인이 어떠한 현실적 소재에 대해 관심을 갖는가 갖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현실을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시적 인식의 방식으로 그것을 상이하게 표출하는 해석방식―즉, 시적 기법이나 형상화 방식―에 이런 연구의 촛점이 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 따라서 소재나 내용의 차이만을 드러내면서 그들의 다름을 재확인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보다는 실제 시적 진술의 규명을 통해 이런 것들이 밝혀져야 하리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두 시인을 함께 생각해 보는데 대한 근거를 살피기 위해 연구의 영역을 좁혀 보았다. 주로 언급되는 시적 소재로 삼는 것과 시의 내용에 관한 문제보다는, 두 시인이 어떤 기법이나 표현양상으로 각기 자신이 주제삼는 것에 어떻게 달리 기여하는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는 그들의 시가 갖는 저마다의 장치를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각 시인이 지닌 시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번 드러나게 해줄 것이다. 단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이 두 시인들에 관한 숱한 언급에 대해 동일한 지향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동일한 지향이 낳은 상이한 표출방식은 왜 그러한지 하는 것들을 규명해 보려는 검증작업이 될 것이다.
Ⅱ. 현실 극복의 동일한 詩的 인식과 두 가지 표출 방식
이 연구를 구체화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그 촛점이 대조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흔히 대립적 위치에 있다고 알려진 이 두 시인들에 있어서 그것이 표출되는 방식의 다름을 밝히되, 공통점 혹은 동일한 인식과 출발을 전제로 하고자 한다.3)
이들은 시대적 상황에 의해 이루어진 자신의 인식을 詩로 표출하는 점, 즉 현실을 극복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詩로 표현하고 있음은 같으나, 스스로의 인식을 형성하여 시로 표현하는 양식은 기법, 장르에 대한 인식, 다른 방식으로의 초월 등에 의해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같았으나 현실에 대한 대응방식으로서의 표현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평형있게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이 두시인에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며,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한 지적이 순수, 참여의 이분법적 사고를 무효화시키는데 한 근거가 될 수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두 시인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사실 그간 이분된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어느 한 편의 논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양편을 가르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모더니즘이 실험의 단계를 넘어서 다양한 양식으로 정착한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 동일 부류로 묶여지는 등시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극단적이라고 알려진 이 두 시인 사이에 동일한 인식이 놓여 있으리라는 직감은 몇몇 글에 배태되어온 셈이나 자세히 언급되지 않은 실정이라 하겠다.
金春洙의 많은 시들이 현실의 문제들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해서, 그는 현실이며 역사에는 방관적이고 형이상학, 예술지상주의에만 관심을 두는 시인으로 분류 취급되어 왔다. 시인 스스로도 실제로 자신의 입장이 이러하다고 여러 글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흔히 얘기되는 대로 문학은 어떤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뿐더러, 그의 시를 지속적으로 읽은 독자들은 그의 시에 대한 전상과 후상의 결합, 그리고 텍스트 상호관계(inter-textuality)4)에 의해, 그의 시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 역사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비추어 보이고 있음을 읽게 된다. 그가 시에서는 역사며 현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공표하고5) 실제 시에서 이를 노출하지 않음은, 오히려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의미를 억압하거나 감추고 있는 표출방식이 될 수 있다.
金春洙의 경우 거칠게나마 요약적으로 이야기해 보면, 이와 같은 문제들을 자신의 의식 안에서 긍정, 부정으로 거친 후 스스로 침묵을 만든 것이라 보여진다. 자신의 경험에 의해 역사에서 惡의 의지만을 보고 역사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시인은, 현실이니 역사니 하는 것을 손닿을 수 없는 문제라고 파악하게 된 후 ‘만든 침묵’의 시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무관심이나 등돌림과는 다른방식이라 보인다. 즉, 이것은 역사의식의 결핍이니 비인간화를 꿈꾸는 절대 경지의 귀족시니 하는 질타 섞인 논의들 속에서도 그가 택한 현실극복 방법으로서의 문학이며, 시대와 참의 고통을 예술적으로 수용하고 의미의 대결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대응방식으로 취한 그의 방법론적 인식인 것이다.
‘處容’, ‘李仲燮’, ‘예수’라는 일련의 소재변용과 그의 시에 되풀이 되는 의식의 울림, 그리고 그의 시들이 최근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볼 때, 누구보다 역사와 그 체험의 끈에서 헤어나지 못했음을 읽게 된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의식을 기반으로 시인이 개척하게 된 묘사 위주와 기호생산의 텍스트라는 표현 기법을 먼저 살펴본 후, 그의 시와 시론에 나타난 인식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것이 다음의 과제이다.
金春洙가 역사를 인식하면서 오히려 개인적 자아에게 물입하게되고 對自的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데 비해, 金洙暎은 동류의 체험에 의해 ‘나’에서 벗어나면서 보다 對他的인 것과 공유하는 삶에 관심을 갖게 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즉, 개인의 문제를 숙고하는 과정에서 시를 출발하였으나 개인의 힘을 넘어서는 많은 문제들에 부딪히면서 시인은 시가 갖는 실천적 기능에 비중을 두게 되었다. 시대 상황이며 삶의 현실적 문제들에 부딪히고, 그 자신과 우리에게 둘러진 한정된 자유를 인식하게 되면서 그는 대사회적, 대타적 발언의 시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金春洙가 발화를 감추고 내면화하려는 데에 비해 金洙暎은 자신의 시적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려는 전달의 논리에 기법의 목적을 둔다. ‘나’의 실존적 문제와 소시민의 소박한 애환을 그리는 데에서 나아가 역사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인식하면서 후에 대표작으로 꼽히는 일련의 시편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이상이 ‘우리’의 평범한 생활속에서 사랑으로 실현되는 것을 그리는 것으로 되돌아 오는 과정에서 그치게 된 것이 그의 시의 전반적인 흐름이라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러한 金洙暎 시의 진술양식은 시인과 대상과의 거리가 대개 가까운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즉, 金洙暎은 현상에 대한 선악이나 긍정 부정의 소용돌이 이전, 아니면 그 안의 의식에서 詩作한 경우의 것들이라 보여진다. 그러므로 자기의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드러내는 그의 시는, 대상을 추상성보다는 구체성, 직접성으로 표현하며 현생활을 반성하고 詩생활을 꿈꾸는 그의 생각들의 노정을 그대로 나타내게 된다. 또한 자신의 시를 스스로 해독하면서 펼쳐보이는 전달의 장치들을 자주 사용하여, 시를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로 보는 인식보다는 의미의 기능도 아울러 중시하면서 ‘우리’가 공유하는 삶으로 푸는 시의 면모를 열어보이게 된다. 문학이란 자신의 인식 테두리 안에서 그것을 달리 표출하는 방식이므로 당대 시인들이 같은 것을 지향할지라도 자신의 것으로 삼는 방식과 인식에 따라 그것들은 나뉘게 된다. 이들 시인들의 경우,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자각은 동일하나 인식과 표출사이의 방법이 달랐던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허무며 절망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그를 극복하고자 한 것은 같았으나,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고 그에 대응하고자 한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金春洙가 지향하는 방식이 "비상"에 가깝다면 金洙暎의 것은 "뿌리내리기"이다. ‘바람’, 하늘을 비추이는 ‘바다’, ‘새’, 神化된 존재 등의 시적 소재를 통해 날아오르기로 현실을 넘어서려는 시인과, 인간 삶과 동떨어진 것에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며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외치면서 그에 뿌리를 내리려는 시인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첨예한 현실인식에 대한 관심의 여부 혹은 유무와 같은 직선적인 문제가 출점이 될 수는 없으며, 그것을 바라보고 시 안에서, 그리고 시를 통해 해결해 내는 방식의 차이를 살펴보아야 할것이다.
Ⅲ. 金春洙 詩의 경우
이 章에서는 우선 金春洙 시의 주된 몇몇 표현 양상들을 묘사, 절제, 거리감추기, 기호생산으로 그 특징들을 한정해 살펴본 다음, 그러한 방식을 낳는 한편 그러한 특징에 이르게 된 그의 정신과 인식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러한 기법들이 시에 대한 그의 인식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밝혀 볼 수 있을 것이다.
Ⅲ-1. 묘사주의와 절제의 기법/기호생산의 텍스트
金春洙의 시적 담화의 특징은 우선 묘사주의6)의 기법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시적 대상을 기존의 인식에 따라 관념어로써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학적 판단 중지의 상태에서 새로운 개안으로 대상 그 자체를 한편의 그림처럼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시에세 낯익은 언어와 관념 등 연어의 모방적 성격이 아니라 사물이나 자연, 그리고 내면풍경을 낮설은 대상의 조직으로 제시한다. 이 표사라는 방식은 시인이 택한 소재에 의해 결정된 적절한 기법인 동시에 시를 통해 시인이 지향하는 바를 예견해 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시인은 자신의 이러한 주된 기법을 ‘서술적 이미지’7)라 칭하고 있는데 이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는 ‘비유적 이미지’와 대립되는 것으로, 묘사의 순수한 의미에 보다 근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시인에 의해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택된 시어들은 선입견이나 어떤 관념을 배제하려 한 것이며 비일상적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보다 객관적인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 즉, 그의 시들은 그시를 읽는 독자에게 많은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는 청중이 필요한 ‘전달’이라는 양식에 비해 청중이 불필요한 ‘표현’의 면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 끝없는 재독을 요구하기는 하나 오히려 독자를 구속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운 독서와 새로운 구체화를 가능케 한다.
눈이 山茶花를 적시고 있다.
山茶花는
漁缸 속의 금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山茶花의
명주실같은 肋骨이
수없이 드러나 있다.
????????????????????????????????????????????????<幼年時(3)> 일부
鉛筆香 허리까지
땅거미가 와 있다.
바람이 어디른가 떠나고 있다.
골목 위 하늘 한 켠
낮달 하나가 사그라지고 있다.
???????????????????????????????????????????????<봄이 와서> 전문
하늘 수박 가을 바람 고추잠자리,
돌담에 속색이던 경상도 화개 사투리,
身熱이 나고 오늘 방은 별 하나가
연둣빛 化石이 되고 있다.
?????????????????????????????????????????????????????????<고뿔> 전문
임의로 취해본 이러한 시들에서 연속적인 의미의 진행이나 순차적인 전개같은 것은 읽을 수 없으며,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문화적으로 고정된 관념을 배제하고 시인의 자유연상에 따라 표현하고자 한 사물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볼때 시인은 대상을 다른 인접성 있는 것으로 얘기하는 통합적 원리보다는 유사한 것으로 되풀이해 묘사하는, 시의 일반적인 계합적 원리의 언술양식에 출점을 둔다. 무시간성이나 현재시제의 사용도 묘사의 특징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화자의 포착이 어려운 점 역시 객체지향에 가까운 묘사의 방식을 효과적으로 만들고 있다.
시인의 중요한 詩的 대상인 ‘바다’의 몇몇 예를 통해 그의 독특한 묘사방법을 살펴볼 수 있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기어
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바다,
????????????????????????????????????????????????<부두에서> 일부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었다.
????????????????????????????????????????????????<처용단장 Ⅰ-1> 일부
가장 슬기로운 바람은
느릅나무 그늘에서 숨을 돌리고,
죽음을 죽이는
바다는
高血壓의 코피를 흘린다.
????????????????????????????????????????????????<금송아지> 일부
그의 시적 소재 가운데 깊이 천착해 볼만한 대상인 ‘바다’의 몇몇 예들을 살피보아도 새로운 의미를 남는 묘사를 기법화하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물화된 바다, 그를 통한 관념이나 생각의 표출보다는 새로운 배경으로 가져다 놓은 바다, 그리고 자연으로서의 바다를 해체하고 내면풍경으로 재구성한 바다로 나타난다. 시인은 이러한 자신의 시들에 대해 ‘왜곡된 자연’8)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면풍경을 자연으로 치환하고 있음과 그 속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시적 체험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묘사주의로서의 기법은 특징지어진다고 하겠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의 묘사는 흔히 생각되듯 말의 장식적인 덧붙임 즉, 수사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한 평자의 지적대로 "장식적 추악한 육체를 너무 많이 가진 묘사중심주의의 우리 시에서는 보기 드문 비묘사적 시"9)라고 한 점은 그러므로 용어 사용에 대한 차이는 있지만 이 논의의 맥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그의 시에 있어서 묘사와 아울러 절제가 거의 기법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지나치게 절제된 묘사는 마치 시인이 즐겨쓰는 표현 ― 살은 없이 뼈만 남은(명주실 같은 늑골이 수없이 드러나 있다 <유년시(3)>, 드러난 빛속의 드러난 뼛속으로 / 살을 버리고 뼈를 깎는다 <겨울꽃>, 내 늑골과 늑골 사이 / 홈을 파고<처용단장 Ⅰ-1>) ―처럼 쓰여지며, 훈김이 배제된 인간의 목소리로 남게 된다.
詩가 대체로 주체에 몰입하거나 객체를 극대화하게 마련이라면 金春沫의 詩는 주체 혹은 객체만 강조하는 것이 아닌 비교적 평형을 이룬 詩로 평해져 왔다. 이 점은 불필요한 수사를 배제하고 절제를 기법으로 삼는 시인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양식은 시인과 대상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나타내주는 것들로 대상에 뛰어들거나 몰입하기보다는 그것을 관조하려는 성격에 기인한다.
이는 金洙暎의 詩가 수다와 요설로 특징지어지는 것과 비교된다. 즉,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詩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새로운 시적 묘사로 감추어 언어 안에 담는 듯한 그의 詩는, 대상에 대한 시인의 생각과 의미를 전개하기 보다는 어떤 정경이나 다른 객관적 상관물로 표현되어 의미를 생산하는 기호로서, 그리고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불확정성의 기호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詩는 ‘대상’에 대한 것이어서 그 詩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보를 확인하고 그에 공감하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호를 생산하는 텍스트가 되어 독자가 새롭게 해독하기를 기다리는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
耳目口鼻
耳 目 口 鼻
울고 있는 듯
或은 울음을 그친 듯
넙치눈이. 넙치눈이,
모처럼 바다 하나가
三萬年 저쪽으로 가고 있다.
가고 있다.
????????????????????????????????????????????????<봄안개> 전문
璧이 걸어온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 온다.
머리가 없는 人形이 걸어온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
노오뜰담 寺院의 회랑의 璧에 걸린 청동시계가
밤 한 시를 친다.
어딘가, 늪의 바닥에서 거무리가 운다.
그 눈물 위에 떨어져 쌓이는
?고 ?은 꽃잎,
????????????????????????????????????????????????<鑒이> 전문
이와 같이 金春洙의 시 텍스트는 그 자체가 의미나 정보를 겹으로 감춘 하나의 기호로, 시인이 그 안에 감춘 의미를 독자가 풀어내야 하는 시적 장치가 내장된 양식이다. 여기서 시인은 의미전달 자체를 부정한다고 표병하고 있으나 이는 산문적 의미로 환언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일 뿐 현상을 기호화하여 오히려 다양한 의미가 산출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법이라 생각된다. 또한 그의 詩가 지니는 은폐나 면장의 의미, 그리고 다양한 시적 화자(處容, 이중섭등)의 역할이 이러한 특징을 강조한다.
金春洙의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의 기법은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언어행위에 대한 불신과 고민, 그의 詩에 자주 나타나는 命名行爲의 시들은 존재의 본질을 직절하게 드러내려는 그의 노력의 표명들이며 (일련의 <꽃>에 관한 詩들), 언어를 하나의 사물로 보아 그것을 통해 말하려고 하지 않고 모든 지시물을 문화적습관이나 공상적 실체로 만드는 언어의 성격에 유의하고자 한다. 그는 언어도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들에게 말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金春沫는 이와 같이 대상을 노래한다든지 인간의 참정을 형상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또다른 질문을 던지는 하나의 물음으로 시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기법은 의미를 쉽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 묘사방식과 새로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또다른 코드의 기호로 텍스트를 이루고 있다. 시를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로 인식하면서 부단한 변신과 실험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텍스트를 보다 새로운 기호로 늘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의 詩는 추상적인 기호가 되기에 이른다. 이미지의 불연속성, ‘바다’를 보편성 없는 개인적인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 비논리적인 돌연한 결합, 그리고 시적 주체의 은폐나 몰개성화 이후에 이른 익명성과 고립성은 그의 작품들을 비인간화의 詩, 10) 인간이 빠져버린 詩라 일컫게 하고 있다.
초기 그의 작품들이 의미파악이 용이했던 데 비해, 점차 절대시, 난해시, 무의미시로 일컬어지는 문맥조차 통하지 않는 詩들이 병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詩에서 그가 독자들을 향해 늘 노리는 것은 인간적인 감정이나 삶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이나 시공간의 특수한 결합으로 환기되는 비인간적이며, 삶과는 무관한 그 어떤 정서이다. 이렇게 관념 표출도 대상 재현도 아니며 공유되지 않은 혼자만의 체험을 시적 주체조차 소멸된 독특한 담화로 표현하고, 인격적인 것은 모두 와해시켜버린 그의 詩는, 정신적인 유희라는 이름으로 절대적인 심상이나 자유연상으로 표출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들이 헌실적인 문제들과 거리가 있는 것이라해서 金春洙는 현실적 소재에는 무관심하고 순수예술을 고수하는 시인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金春洙의 경우, 앞에서 잠깐 밝힌 대로 이러한 문제들을 자신의 의식 안에서 거친 후11) 에 역사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스스로 침묵을 만든 것이라 보여진다. 따라서 여기에 이르게 된 생각의 路呈, 그리고 침묵을 곧 비껴섬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로 남는다.
Ⅲ-2. 歷史인식에서 개인적 자아로/존재차원의 非人間化의 시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그것을 비판하게 된다. 그것은 산문으로 족하고 산문이라야 냉철하게 논리적으로 설득력을 지닌 내용이 될 수가 있다. (중략) 그러나 시는 다르다. 산문에서 나는 때로 道德的이 되지만 시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傍觀이나 無關心의 자세가 된다. 그렇게 될 수 밖에는 없다."
<고통에 대한 콤플렉스>
그 자신은 실제 "순수시도 참여시도 우리에게는 다 필요하다12)"고 어느 글에서 밝히고 있는데, 시인은 어떤 의미를 덮씌우는 대상을 필요로 하는 언어가 아닌 오히려 그러한 삶에서 오는 긴장의 의미를 모두 배제해 버리는 언어로의 詩를 현실극복의 방법으로 삼고자 한것임을 알 수 있다. 내적 갈등이 표출되는 방법을 크게 풍자와 해탈로 나눌 수 있다면, 이상과 같은 점에서 볼 때 金春洙의 경우는 후자의 방법으로 발현되었다고 보인다. 金春洙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處容’을 일관되게 시적 소재로 택하는 것도 실상 시인의 이러한 시의식과 개인적 체험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대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역사나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심리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그는 處容의 인고주의적 해학에서 빌어왔다고 밝힌 점도 해탈의 맥락이라 볼 수 있다.
金春沫가 절대경지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詩들에 이르고 몰입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 기인한다. 詩作 처음부터 역사나 현실을 외면한 채 개인적 서정과 정신적 유희에 빠진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개인의 모습으로 역사적 체험을 겪은13) 때문인 것이다. 사회와 맞부딪혀 그 모순과 부조리를 인식할 때 그 내부로 뛰어드는 방법과 그 부딪힘으로 인해 개인으로 위축되는 경우가 있을 때, 그것은 인식에 대응하는 방법의 차이이지 역사나현실에 대한 관심 유무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는 일제의 수난, 6 · 25, 좌우 이데올로기 등 역사라는 이름으로 인해 겪은 개인적 고통과 수난에 의해 역사의 의지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역사가 가진 惡의 의지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 때문에 개인의 문제같은 것은 희생될 수 있다면 그런 역사를 부정하고 싶다는 역사 허무주의의 의식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어떤 정신이나 힘에 빠지고 싶은 생각에서 그의 詩는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문제가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한 점과 도피로 그 방법을 삼은 것은 물론 한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의 모든 의식과 시세계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14)이며, 그것에 대한 압박과 짓눌린 정신의 분출구를 찾으려는,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서 구제받고 싶은 생각들이 숨어있음을 읽어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詩作 과정의 전개에 있어서 金春洙 詩의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이라 꼽힐 수 있는 것은 물론 無意味詩와 無意味詩論이다. 이는 우리의 시적 전통에 새로운 시의 경지를 보여준 것으로 그 영향과 가치가 평가되고 있다. 끊임없는 탐색과 숱한 변용을 실험하면서 경험과 변용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추상화되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요약적으로 입증하는 듯 "한때 김수영에게서 무진 압박을 느낀 일이 있었다"15)고 얘기한 金春洙 시인이 그 줄다리기에서 도달한 곳은 그러한 긴장이 아예 끊어진 묘사절대주의, 그리고 의미 이전에 있는 언어와 소리의 울림, 언어의 지시성을 떠난 순수한 상해의 지향이었다. 그는 자신의 無意味詩가 지향하는 바를 잭슨 플록의 그림, 혹은 樂譜와 같은 것이라 표현하기도 했는데, 인간 삶을 직접 어루만지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일상적인 것 즉 인간화된 예술이 아니라, 삶이나 일상의 의미에서는 ‘무의미’한, 그러면서 다른 방법으로 그것들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으로 시를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서 존재차원의 시의 경지인 非人間化의 詩를 꿈꾸는 가운데 그의 詩는 <處容>, <李仲燮>, <打令調>, <예수> 등으로 이어지는 人間化의 소재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사고는 오르테가의 『非人間化의 藝術』에 나타난 생각과 매우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오르테가에 의하면 진정한 예술은 ‘非人間的’16)인 예술이다. 여기서의 비인간화의 의미는 어떤 평가가 개입된 의미는 아니며, 예술을 절대경지에 놓으려는 의식이다. 작품 안에서 인간의 운명이나 체험되는 양상에 대해 즐거워하고 서러워하는 감상은 진정한 미적 쾌락과는 별개의 것이므로 무엇을 객관적으로 순수하게 그려내는 예술은 비인간적17)이라고 할수 있다는 것이다. 金春洙의 무의미시, 가공의 시는 이런 면에서 오르테가의 생각과 상당히 가깜다고 할 수 있다.
도토리 나무 어깨가 떨리고 있다.
正史北狄傳
도토리는 陰出山脈 이쪽
萬里長城 이쪽
始皇帝 발등에도 우수수 우수수
떨어 지고 있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뭐가 그리 이상하냐,
푸줏간 식칼은 뒤로 휘고
가도 가도 하늘은 黃砂빛이다.
달이 뜨면 밤에는 늑대가 운다.
????????????????????????????????????????????????????????????????????????<匈奴> 전문
南天과 南天 사이 여름이 와서
붕어가 알을 깐다.
南天은 막 지고
내년 봄까지
눈이 아마 두 번은 내릴거야 내릴거야
????????????????????????????????????????????????????????????????????????<南天> 전문
이러한 詩들을 볼 때 그의 詩에서 어떤 인간적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독특한 사물로의 환치, 시공간의 비연속적인 결합, 낮선 대상들끼리의 공존,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비일상적인 분위기의 환기가 있다. 삶이나 현실에서 오는 긴장을 아예 끊는 것, 그리고 詩를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오히려 그러한 집착을 잊는 공간의 찾는 수단으로 시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모든 일체의 것을 포괄하는 대상에 대해 어떤 의미를 덮씌우는 언어를 피하기 위한 노력 끝에 소산한 것인 무의미 시라 할 때, 현실이며 역사에 대한 의식이 깊어질수록, 시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의식의 遊戱, 자동기술로 이루어지는 언어의 조직인 무의미시로 집약되게 된다. 시인은 언어의 의미차원에서 존재차원으로 들어갈 때에 "현실을 떠나는 찢어지는 아픔"18)을 겪는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방법이 물론 용이한 일은 아닐 것이며,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비겁함은 느껴지지 않는 일종의 도피를 보게 된다. 또한 여러 글에서 시인의 이러한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시인도 자신의 시가 가는 방향에 대해 늘 辯을 덧붙여 주장과 변명을 꾀한 것 같다.
이러한 인식이 순차적으로 드러나는 金春沫의 대표작으로 연작시<處容斷章>을 꼽을 수 있다. 시 <處容>에서 출발하여 근 20년 이상에 걸쳐 <處容斷章> 1부에서 4부까지 쓰여졌는데, 각부의 몇몇 시구를 예로 들어 그러한 인식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人間들 속에서
人間들에 밝히며
잠을 깬다.
숲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處容> 일부
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때의 어리디 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새끼 무수리가 처음의 깃을 치고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바다는 많이 자라서
허리까지 가슴까지 내 살을 적시고
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하였다.
????????????????????????????????????????????????????????????????????????<處容斷章 제Ⅰ부-8> 일부
시인이 역사내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까지 겪은 이니시에이션 과정을 ‘處容’에서 발견하면서 그에 대해 마치 동경과도 같은 이미지를 그린 <處容>을 출발점으로 하여, <1부>에서는 자신의 유년기를 주로 그리는데, 시인과 詩에 대한 어떤 선지식이 없이는 사실상 그 의미가 읽혀지기는 쉽지 않다.19) 여기에서는 시인의 유년시절과 處容의 바다밑에서의 인식이 중첩되어 독특한 풍경과 정경으로 묘사되어 나타난다.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마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處容斷韋 제2부-5>
나의 面紀 1943년은
손목에 쇠고랑을 차인 채
해가 지자
關釜聯絡船에 태워졌다.
나를 삼킨 玄海灘,
釜山水上署에서는 나는
넋이나마 목을 놓아 울었건만
세상은
개도 나를 모른다고 했다.
????????????????????????????????????????????????????????????????????????<處容斷韋 제3부-10>
ㅎ ㅏ ㄴ ㅡ ㄹ ㅅ ㅜ ㅂ ㅏ ㄱ 은 한여름이다ㅂ ㅏ ㅂ ㅗ ㅑ
,
올리브 열매는 내년 가을 ㅣ ㄷ ㅏ ㅂ ㅏ ㅂ ㅗ ㅑ
,
ㅜ ㅉ ㅣ ㅅ ㅏ ㄹ ㄲ ㅗ ㅂ ㅏ ㅂ ㅗ ㅑ
ㅣ 바보야,
역사가 ㅕ ㄱ ㅅ ㅏ ㄱ ㅏ 하면서
ㅣ ㅂ ㅏ ㅂ ㅗ ㅑ
????????????????????????????????????????????????????????????????????????<處容斷韋 제3부-39>일부
네 꿈을 훔쳐보지 못하고, 나는
무정부주의자도 되지 못하고
모난 괄호
거기서는 그런대로 제법
소리도 질러보고
부러지지 않는
달팽이뿔도 세워보고,
歷史는 나를 비켜가라,
아니
맷돌처럼 단숨에
나를 으깨고 간다.
????????????????????????????????????????????????????????????????????????<處容斷韋 제4부-18>일부
<2부>는 역사적 체험과 현존하는 삶의 갈등에서 도피하려는 주술적 리듬과 정신적 유희, 그리고 적극적인 의미배제로서 무의미 시의 극단적인 실험이 나타나는 詩이다. 또한 수년 후 쓰이게 된 <3부>는 자신의 역사적인 체험을 무의식으로 억누르던 것이 의식과 싸우면서 그 두 가지가 마치 수면 위로 오르내리는 것처럼 표출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완결을 본 마지막 <4부>는 역사에 대한 관념이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음을 결국은 부정할 수 없다는 고백과 같은 결론을 드러내는 詩이다.
시인은 역사나 현실의 체험에서 오는 고통을 떠나 그것에서부터 정신이 놓여나와 유희할 수 있는 것으로 詩를 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정신적 과정의 단계를 이해하지 않거나 그의 일부 시에 편중할때, 그리고 그의 많은 詩에 숨어있는 억압의 심리를 발견하려 하지 않을 때, 그는 흔히 현실의 문제에서 비껴서 있는 시인으로 치부되는 것 같다. 그가 취한 현실극복의 방법으로서의 문학, 의미의 대결로 해결될 수 없는 현실에의 대응방식. 그러나 시인이 문제의 출발점이자 인식하는 과정의 첫 단계로 삼은 것에 너무 몰입함으로써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져 나온 점에서 그에 대한 비판 소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 같다.
Ⅳ. 金洙暎 詩의 경우
본 장에서는 자기 陳述, 전달, 드러내기, 해독하는 텍스트로 金洙暎 시의 표현양상을 한정해 살펴본 후, 이러한 양식으로 시를 이루게 된 정신과 인식의 바탕을 밝혀보고자 한다.
Ⅳ-1. 자기 陳述의 발화/해독하는 텍스트
金洙映의 시들은 자기 陳述性이 강하다. 이러한 그의 발화양식은 우선 시인 자신이 여러 유형의 시적 화자 가운데 현상적 화자로 자주 나타나는 점에서 드러나는데, 몇몇 편을 제외하고는 거개의 시에 ‘나’가 현상적 화자로 나타난다. 후에 화자가 ‘나’에서 ‘우리’로 확대되는 점은 그의 의식의 지향성을 일면 보여주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달나라의 장난> 일부
나는 지금 일본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너무 자연스러운 전향을 한데 놀라면서
이 이유를 생각하려 하지만
그 이유는 시가 안된다.
????????????????????????????????????????????????????????????????????????<전향기> 일부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 웃는다
????????????????????????????????????????????????????????????????????????<生活> 일부
이상의 예들과 같이 나를 현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의 詩가 묘사나 관조보다는 陳述을 그 주된 표현양상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적 소재 또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찾고 있는데, 여기서의 ‘나’늘 시적 화자(speaking subject)인 동시에 시적 대상(the subject of speak)이며, 그의 시정신이 ‘폭로적인 자기분석’20) 에서 출발하고 있음 또한 보여준다.
이러한 진술은 金春洙의 감추기의 묘사에 대비되는 드러내어 이야기하는 기법을 의미하며, 사전적 의미의 ‘자세하게 말하기’21)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런 인술은 유사성에 기초한 은유적 구조와 아울러 인점성에 기초하는 통합적인 원리에 보다 기대게 되며, 따라서 무엇을 묘사하는 것과 달리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의 전개일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그의 꽃은 꽃 자체의 실존적인 면으로 그려지기 보다 "꽃이―피다"의 방식으로 얘기 된다. (<꽃>, <꽃(二)>)
이러한 자기 진술의 발화는 여러가지 특징을 동반하게 된다.
①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孔子의 生活難>
나는 내 가슴에/또 하나의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웃음>
기침을 하자/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 <채소밭가에서>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못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꽃잎(二)>
이 인찰지와 이 봉투지로는 편지는 못 쓰겠소/― 나는/조금도 미안하지 않소 <美濃印札紙>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그리하야 凝結한 물이 떨어진다/바위를 문다 <아메리카 타임지>
하루에 한번색 찾아오는/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陶醉의 피안>
② 그래도 그것은/돌아가신 그날의 푸른 눈은 아니요 <아버지의 寫眞>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달나라의 장난>
너는 늬가 먹고 사는 물의 것도 아니며/나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九羅重花>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惡漢이 아니다/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하……그림자가 없다>
그의 이야기가 絶望인 것이 아니라/그의 모습이 絶望인 것이 아니라/그가 돈을 가지고 갔다는 것이 아니라/그가 범죄자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黃昏>
③ 밑씻개로 하자/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 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그 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우선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야 고만 죽여라 고만 죽여/나는 오늘 아침에 서약한 게 있다니까 남편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니까/정말 어제의 네 남편이 아니라니까 <거미잡이>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같다/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사이에/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자꾸자꾸 소인이 돼간다/俗돼간다 俗돼간다/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강가에서>
방 두간과 마루 한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러운 妻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구름의 파수병>
④ 그것은 혹시 한 자루의 부채/―그러나 그것은 보일락 말락 나의 視野에서
멀어져가는 것―마음을 쉰다는 것이 남에게도 나에게도/속임을 받은 일이라는 것을/(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 /쉬어야 하는 설움이여 <휴식>
하루살이는 지금 나의 일을 방해한다/―나는 확실히 하루살이에게 졌다고 생각한다―하루살이의 狂舞여 <하루살이>
여기에 있는 것은 중용이 아니라/踏步다 죽은 平和다 번뇌다 무위다 (단「中庸이 아니라) 다음에 「反動이다」라는 말은 지워져 있다/끝으로「모두 適當히 假面을 쓰고 있다」라는 한 줄도 빼어놓기로 한다) <中庸에 대하여>
①의 예에서 보듯 서술형 어미와 청유형 어미를 주로 사용하는 한편 유의미하지 않은
접속어와 조사를 자주 사용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렇게 평이한 산문적인 서술을 하는 것과 같은 서술형 어미의 사용과, 독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시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능을 하는 청유형 어미의 사용, 그리고 시에서는 긴요치 않은 조사나 불필요한 접속어의 사용은 비교적 긴장이 적은 산문이나 구어체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시적 장르의 비순수성을 이용하면서도 말의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배열을 깨뜨리는 시적 견제가 병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詩에서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② 는 시인이 부정어를 많이 사용하는 점을 보여준다. 이늘 기존의 것에 굴하지 않는
否定의 정신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동시에, 詩 안에서는 의미의 가정을 막는 한편 다른 의미의 여지를 열어주는 것으로 쓰여진다. 다시 말해서 ‘―이 아니다’라는 어법은 어떤 점에 대해 시인은 예기치 않으나 독자가 가정할 수도 있을 의미를 막아주기도 하며, 한편 무엇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것일 수 있는가하는 상상의 여지를 줄 수 있는 어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③ 서는 자신의 감정적이고 직설적인 노출을 거르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다. 기존의
시적인 범주 안에서 말을 절제하거나 아끼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진술하거나 토로하는 자발성(spontaneity)의 특징을 갖는다. 이 점은 金洙暎 시에 있어서 정직성, 솔직함, 벌거벗음 등으로 가장 자주 지적되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그의 시적주제의 하나인 동시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표현양식이다.
④ 는 부연이나 ( ), 혹은 ― ― (dash)로써 설명을 계속 추가하면서 자신의 詩作 과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독자가 자신의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독서행위를 자꾸 지연시키고 있는 점이다. 독자는 詩를 읽는 과정에서 불확정성의 의미와 생산된 기호를 스스로 구체화해 나가는 한편, 시인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자주 접하며 그가 보여주는 해독하는 텍스트의 특성을 따라 읽게 된다.
그외에 강조나 주술의 의미로 반복을 다양한 양식으로 실험한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늘 그의 시가 갖는 내적 구조의 짜임을 잘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金洙暎의 반복은 의식의 지향성을 심화하는 도구22)인 동시에, 불연속적인 사상의 반복이 뒤에 오는 의미를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또한 전설을 전제로 독자를 의식하는 그의 기법 중의 하나이다.
이상 열거한 모든 특징들은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전달하려는 의지의 것들인 동시에 청중 즉 독자를 강하게 의식하는 ‘전달’의 논리에 크게 기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詩는 해독하는 텍스트의 성격을 내포한다고볼 수 있다. 金洙暎의 詩는, 깎아지른 듯 이루어진 묘사와는 달리 언어의 경제와 절제의 면에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 것으로, 오히려 많이 말하는 요설, 수다에 가까우며 金春洙의 ‘감추기’의 기법에 비해 ‘드러내기’로 특징지어진다. 이런 점에서 金洙暎의 詩는 혼잣말보다는 ‘말건넴’의 詩라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여러詩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시인의 내면을 거리낌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이며, 그의 문학의 주된 특징이라 보여지는 정직함, 벌거벗은 진실에 밀착된 시적 표현 방식이다.
金沫暎은 대상을 추상성보다는 구체성, 직접성으로 표현하며, 현생활을 반성하고 詩생활을 꿈꾸는 생각의 노정을 그대로 옮긴다. 또한 詩 중간에 일인칭 화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나 모습을 자주 직접 드러내면서 자신이 해독하여 보여주는 정보들을 독자들이 이해하고 그의 심리를 잘 받아들이고 있는지 고려하는 장치들을 자주 사용한다.
이러한 진술 양식은 대개 시인과 대상과의 심적 거리가 비교적 밀접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즉, 金洙暎은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관조적이고 미적인 거리를 고수하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점이 그가 시적 배열이나 언어조직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언어조직의 시적 성격을 고의로 파괴한 듯한 특징들과 통사구문의 잦은 파괴는 그의 호흡 가쁨과 감정의 충일, 그리고 정신의 속도가 이루어낸 하나의 양식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대상과의 때로 지나치게 밀착된 거리, 그리고 시적절제가 부족하다는 점은 일부 비판이 되기도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것은 단점이라기보다 기법의 하나인 것이다.23)
이상에서 살펴본 해독하는 텍스트라 부를 수 있는 그의 詩의 성격은 두 가지로 나누어 정리된다. 기법상으로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전달하려는 논리에 기반을 둔 여러가지 특징들로 나타난 것이면서, 내용상으로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 정신의 굴곡이 심하게 드러나며 더우기 4·19 같은 사회적 사건의 휘몰음에서 쓰여진 몇몇 詩들에는 상황에 따른 시인의 인식과 생각이 직접적으로 펼쳐져 그에 대한 것을 거의 해독해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詩들로 남아있다는 점이다.24)
그러므로 그의 시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엿보기’ 행위의 독서로 대상을 새로운 기호로 발견하게 하면서 의미를 찾도록 하는 것보다는, 텍스트 자체에서 이미 많이 보여주면서 공감을 얻게끔하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따라서 시적 변용이니 시상의 추상화니 하는 것에 비해, 풍자나 야유와 탄식이 직접 드러나는 시와 자신의 감정으로 관념이나 의식을 설명해 보여주는 텍스트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언어는 절대적이고 묘사적이기보다 상대적이고 비유적으로 자주 쓰인다. 그의 시어는 어취 자체의 의미를 겹싸서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찾게 하는 미결정항이라기보다 의미의 직접성을 드러내면서 다양하게 수용될 수 있는 것에 충실한데, 이점은 그의 시가 시어의 법속화와 일상어의 시어화로 평해지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여기서 金洙暎의 詩가 갖는 진술과 해독의 성격을 받쳐주는 한편 독자로서 친화력을 느끼게 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金春洙 詩의 어조가 비정적이며 소수의 독자만을 위한 듯 다소 오만하게 느껴지는데 비해, 金洙暎의 詩에서는 그의 폭포와도 같은 곧고 꿋꿋한 시정신들이 다소 어눌한 태도를 입고 있는 것으로 자주 나타나면서 한층 친화력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현실에 대해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삼고 있음과 함께, 그의 詩를 면밀히 읽어보면 ‘소년’(여편에의 방에 와서)과 같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늘 어떤 가리개 뒤에 숨어 목소리를 높이는 그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 드러나는 ‘바로 보지 못함’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그는 가리개의 도구로서 ‘영사판, 병품, 유리창, 벽, 그림자, 바늘구녕, 사진’ 등을 자주 지니고 나타난다.
透明의 代名詞같은 너의 몸을
지금 나는 은폐물같이 생각하고
기대고 앉아서
안도의 탄식을 짓는다
유리창이여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일부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병풍> 일부
고통의 영사판 뒤에 서서
어룽대며 변하여가는 찬란한 현실을 잡으려고
나는 어떠한 몸짓을 하여야 하는가
????????????????????????????????????????????????????????????????????????<映寫板> 일부
돌아가신 아버지의 寫眞에는
眼鏡이 걸려있고
내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現責처럼
……
그의 얼굴을 숨어보는 것이요
????????????????????????????????????????????????????????????????????????<아버지의 寫眞> 일부
이런 점들은 내용면에 기여한다기보다 그의 詩에서 친화력이나 기법을 돕는 것들로 기능하고 있다. 물론 이 점과 아울러 그의 詩가 해독하는 텍스트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 그리고 산문적인 진술을 많이 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의 시가 곧 쉽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일상적인 담화와 같이 쉽게만 쓰여졌다면 그의 시는 형식추구와 시적 기법이 없다는 의미가 될 것이며, 실제로 그의 몇몇 시들은 아직 난해시의 영역에 남아있다. 그는 오히려 모더니즘의 특징을 통해 개척한 경지로써 전통적인 시형식과 늘 결별한 새로운 기법과 형식을 적극적으로 추구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그의 문학에 나타나는 자기 陳述의 발화와 해독하는 텍스트라는 표현양상들은 <反詩論> 등의 시론에서 펼친 인식들을 보다 잘 드러나게 해주는 실천들이다. ‘참여시의 총수’와 ‘모더니즘의 실천자’라는 다를 각도의 이름으로 불린 시인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개척한 시형식을 찬사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시는 후기시에 이를수록 현실과 역사의 문제, 그리고 ‘나’보다는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로서의 ‘우리’의 문제로 시야가 벋어나갔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자신의 의식 안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인식으로 삼아 예술적 실천으로 펴나간 과정을 살피보고자 한다. 시의 정신과 형식 양쪽 모두에서 새로움을 편 그의 문학적 저항이 金春洙의 해탈에 비해 풍자의 정신에 가까와지게 되는 과정 또한 밝혀질 것이다.
Ⅳ-2. 자아발견에서 역사적 삶의 詩로/인간주의 실천으로서의 反詩
"진정한 문학의 본질은 결코 閑時에만 받아들일 수 있는 애완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개혁적인 시기에 처해 있을수록 그 가치가 더 한층 발효되는 것이다. " <讀者의 不信任>
"시인다운 시인은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의 운명에 적극관심을 가진, 이 시대의 지성을 갖춘, 시정신의 새로운 육성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金流暎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 나와 가족을 넘어선 공동체적 집단에 대한 애정의 정신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모더니즘의 실험, 게인적 실존의 문계와 사변적인 것에 치우친 생각들이 주로 나타난다. 그러나 ‘나’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의 문제로 급회전하는 관심을 가지면서 이른바 참여 시인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4·19 이후라 보인다.
金洙暎은 그 당시에도 참여시인의 호칭을 받았으나 순수시와 참여시라는 이분보다는 ‘작품이 되는 단계’25)와 예술성과 현실성이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작품을 역설해 왔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金洙暎 시인에 대한 열기가 정신의 각성, 도덕적 열정 등에서 일어난 것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즉, 그가 물론 고도의 시적 능력을 무시한 것도 아니었고 그에 대한 혜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분명 그에게는 詩를 존재의 차원에서 인식하기 보다는 의미의 차원에 두려는 의식이 선행했음을 시에서 읽게 된다. 형식의 새로움 또한 많이 읽어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정신이 그것에 결합할 때 그의 시가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눈>, <四一九詩>, <거대한 뿌리>, <이 韓國文學史>, <폭포>, <푸른 하늘을>, <풀> 등의 대표작품이 그 예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金洙暎은 ‘나’의 문학에서 나아가 "민족이나 인류의 이념을 앞장서서 지향하는 것이 문학"26)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고 있음이 그의 시론에서도 발견된다. 개인의 실존적 문제에 몰두해있던 金洙暎의 의식은 현실사회의 모순에 부딪혀 나의 아성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동일성을 회복하고 현실의 물결로 뛰어드는 詩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자유’는 정치적 자유나 언론의 자유뿐 아니라 모든 개인적인 자유가 실현되는 것이며, 이러한 현실의 타개에서 자유를 ‘우리’의 것으로 돌릴 때 문학의 참다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人類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美大陸에서 石油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
배울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暝想이 아닐거다
????????????????????????????????????????????????????????????????????????<사랑의 變奉曲> 일부
위의 시는 대표작 <풀>과 함께 시인이 지향하는 자유와 사랑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시화된 작품27)으로, 점차 金洙暎의 핵심 詩로 주목받고 있는 詩이다. 문학을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사랑의 보편적인 본질이 우리에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詩의 완성도를 염두에 두는 한편 민중이라는 다수 독자의 호흡을 감당하려는 의지를 버리지 많았던 그의 詩에는 목소리만 높거나 불가해한 작품들이 일부 눈에 띄나, 점차 시적 완성도와 함께 의미의 전달이 중요하게 되는 작품에 이르게 되고, 피치를 올리던 그의 음성도 단단하고 고요하게 응축된다. 한편 金春洙의 무의미시에 대해서 그는 "모든 시의 미학은 무의미의 미학"이라고 주장하지만 金春洙의 무의미가 의미를 먼저 포기하고 들어가는 것이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무의미는 "의미를 껴안고 들어가서 그 의미를 구제함으로써 무의미에 도달하는 것"28)으로 의미가 실현되어 그 의미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詩에서의 일차적인 의미전달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의 詩가 산문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도 의미를 중시하는 그의 인식을 드러낸다. 주된 기법인 enjambement(걸쳐쓰기)로 의미의 연쇄를 피하는 것이나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29)고 하는 자신의 입장 표현이 없더라도 그의 詩와 언어는 자신의 인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와 지시의 차원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詩에서 느껴지는 친화력이나 치열한 절규같은 것도 이러한 담화양식이 보다 효과적으로 그 호흡을 감당할 수 있었던 때문이라 여겨진다.
처용의 비젼으로 가능한 수용하고 인내하려 하는 金春洙의 시정신이 해탈에 이른다면, 金洙暎의 이러한 문학적 저항은 풍자에 가깝다.
나는 하필이면
왜 이 시를
잠이 와
잠이 와
잠이 와 죽겠는데
왜 지금 쓰려나
이 순간에 쓰려나
시 같은 것
시같은 것
안 쓰려고 그러나
더구나
<四一九>시같은 것
안 쓰려고 그러나
????????????????????????????????????????????????????????????????????????<四一九詩> 일부
설파제를 먹어도 설사가 막히지 않는다
하룻동안 겨우 막히다가 다시 뒤가 들먹들먹한다
꾸루룩거리는 배에 늘 푸른 색도 흰 색도 적이다
(중략)
배가 모조리 설사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성도 윤리도 약이
되지 않는 머리가 불을 토한다.
????????????????????????????????????????????????????????????????????????<설사의 알리바이> 일부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
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놓은
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
미제 자기스텐드가 울린다
(중략)
바닥이 없는 집이 되고 있다 소리만
남은 집이 되고 있다 모서리만 남은
돌음길만 남은 난삽한 집으로
기꺼이 기꺼이 변해가고 있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일부
위의 시들은 그의 인식이 풍자로 견제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四一九詩>에서는 독자가 바라는 벅찬 호흡의 詩라는 요구와 4·19이후 침체된 상황을 소생시킬 수 힘이 불가능한 것을 깨달은 것가운데 생긴 시인의 갈등이, 잠을 참아야 하는 괴로움과 四一九詩를 써야 하는 괴로움으로 우회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설사의 알리바이>는 규제로 묶여있던 사상과 詩의 언어가 마치 참을 수 없는 설사처럼 터져나오는 상황의 표현이며,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는 시인이 처해 있는 상황, 혹은 우리나라의 상황이 얽히고 설켜 제대로 되어나가지 않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은 시들에서 살펴볼 때 ‘풍자’라는 보다 적극적인 시인의 정신은 현실에 대해 뛰어들고자 하나 막상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학과 병행되어 나타나는 그의 내적 갈등이며 비극적 세계관의 표출이다. 理想의 적극성과 현실의 소극성의 갈등, 따라서 그의 풍자는 신명이나 여유보다는 냉소, 자학과 결합되게 된다. 그러므로 金春洙가 ‘處容’, ‘李仲燮’, ‘예수’ 등의 신화된 인물에서 자신의 이름과 동일성을 찾으려고 하는 데 비해, 金洙暎은 거대한 현실과 사회에 대항하는 위축된 자신의 모습을 ‘거미’, ‘하루살이’, ‘풍뎅이’로 변용하여 표현하게 된다.
"오늘날의 시가 가장 골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人間(휴머니즘)의 회복이다."30) 결곡한 정신이며 시인된 양심을 떠날 수 없었던 그는 인간적인 것을 떠나서 존재하는 詩는 자신의 염두에 조차 둘 수 없었으며, 인간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그의 휴머니즘의 시정신은 사랑, 양심, 진실, 설움, 역사 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그리고 詩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며 이러한 시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기법을 추구한 것들이 反詩論으로 요약된다.
金沫暎의 詩는 소시민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민중시로서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 일부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시인이었지만 모더니티에 경도되기보다 탈도회적인 것을 꾸준히 지향하고 전통적인 것과의 조화를 시도하였으며, 아내와 자식, 일상생활사, 사회 현실과 역사 등 타인과 삶을 공유하는 문제들을 詩로 끌어올리고 공존의식을 회복하려 하는 등, 시를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푸는 그의 詩는, 기존의 詩가 이루어온 ‘詩的’인 것을 깨고 새롭게 갖추어야 한다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反詩論과 함께 60년대 이후 큰 영향력을 행사한 시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Ⅴ 맺는말―하나를 지향하는 兩極의 방식
金春洙와 金洙暎은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서로를 의식하였으며 두 시인 모두 모더니즘에서 출발한 강력한 시론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입장이나 인식을 설명하고 주장하면서도, 또한 서로를 인정하고 있음을 그들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31) 문학이란 자신의 인식테두리 안에서 그것을 달리 표출하는 방식이므로 당대 시인들이 같은 것을 지향할지라도 자신의 것으로 삼는 방식과 인식에 따라 나뉘게 된다. 이들 시인의 경우, 왜 詩를 쓰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자각은 동일하나 인식과 표출의 방법이 달랐던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문학과 역사적 삶의 연속선상에서 그 갈등을 시로 표출하려는 점은 같았으나, 그를 극복하거나 그에 대응하고자 한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역사 자체에 대한 상이한 해석방식 ― 金春洙는 개인적 체험에 의해 역사에서 惡의 의지만을 보았고, 金洙暎은 정치적, 개인적인 자유와 불가분한 역사로 인식하는 ― 과 역사관, 따라서 해결하고자 한 방법이 달랐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현실의 문제를 소재로 삼았는가 아닌가 하는 점에만 출점을 둔 선이해와 일부 기존 인식에 의지해 그들을 읽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詩 자체에 대한 그들의 인식의 차이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시와 산문의 차이라는 장르상의 문제 앞에서, 金春洙는 시와 산문을 뚜랫이 이분하면서 "시는 대상이 없이 구속의 굴레를 벗어나 만나는 현기증나는 자유를 다스리는 것 <意味와無意味>"이라는 존채차원에서 인식하였으며, 金洙暎은 "시는 우리의 생활현실(언어의 서술)을 새롭게(언어의 작용) 담아야 하는 것 <生活現實과 詩>"이라고 밝히면서 의미차원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점은 언어의 기능 중에서도 金春洙의 시는 시적 기능의 극한에, 金洙暎은 능동적 기능에 많이 기대고 있음으로 보인다.
형식을 추구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金春洙는 삶을 삶 그대로 그리지 않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비인간화의 예술, 절대경지의 예술로 나아간 반면, 金洙暎은 보다 실물이나 삶과 같이 그려내는 것으로 생각하여 인간의 예술로 나아가게 된 점도 구별된다. 金春洙 시에 나타나는 비상과 상승, 金洙暎 詩의 뿌리내리기, 하강이라는 이미지의 기조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구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들에서 그들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을지언정, 이제껏 이루어진 ‘비껴섬―純粹’와 ‘몸담음―參與’의 차이로 그들을 비교 언급한 것은 오히려 많은 점을 놓치게 한다고 보인다. 이점은 歷史와 詩의 관계가 비단 이 두 시인뿐 아니라 모든 시인에게 해당될 수 있는 방법적 인식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두 시인은 이후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후계시인에 의해서도 그 거리가 멀게 인식되었으며, 시인 역시 자신들의 詩的 인식으로 삼은 출발점에서 멀리 나오면서 점차 詩의 방향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손닿지 않는 역사를 회의하며 자신의 역사적 체험을 추상화하고 억누르면서 그로부터 해탈하여 유희정신의 경지에서 詩作을 하게 된 시인과,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저항하면서 번민하던 시인 정신의 귀결점은, 동일한 문제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를 극복하려는 의미에서 같은 것을 지향했던 두 가지 방식을 兩極으로 보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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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논의에서는 잘 알려진 ‘순수 · 참여’라는 표현을 적절한 우리말로 바꾸어 달리 표현해 보았다.
3 김혜순의 논문은 대조점을 밝히려는 것이었지만, 이 논의와 통하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수한 상이점이 있으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존계를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욕구에 있으며, 그것의 끊임없는 천착에 있다."
4 한 문학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반향하거나 그것과 끊을 수 없이 연결되는 다양한 방식을 의미한다.
5 김춘수(1980), "고통에 대한 콤플렉스" 『김춘수전집(1) 詩』 (서울, 문장), pp. 353-355.
6 여기서 묘사는 대상에 대한 장식적인 수사나 채현이 아니라 사물을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말한다.
김준오(1982)는 『시론』에서 "묘사이건 서술이건 이는 제재에 따라 좌우되는 문체"라고 말하고 있다. (서울, 삼지원), p. 69.
7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하였다.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의 수단이 될 뿐이다. (중략) 그것은 일종의 묘사절대주의의 경지가 된다" 김춘수(1982), 『김춘수전집(2) 시론』 (서울, 문장) pp. 386-396
8 김춘수(1991), "장편연작시 <처용단장> 시말서", 『처용단장』 (서울, 미학사), p. 138.
김준오(1982), p. 338
9 김윤식(1984), p. 50.
10 이 용어는 뒤에서 오르테가의 글을 인용하면서 설명할 것이다.
11 김현(1980)은 김춘수의 무의미시를 ‘순진함의 시’라고 부르고 싶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순수함의 가장 큰 정치적 의미 중의 하나는 가짜 이름의 압력, 일상성 관습성이 사물에 부여한 가짜 이름의 무게를 직관적으로 제거하는 데에 있다." 『문학과 유토피아』(서울, 문학과 지성사) p. 174
12 김현승(1968)에서 재인용
13 김춘수(1982), "처용, 그 끝없는 변용" p. 573
이 글 외에도 여러 글에서 시인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밝히고 있다.
14 김춘수(1982), "현실에 대한, 역사에 대한, 문명에 대한 관심이 한쪽에 있으면서 그것을 초월하려는 도피적 자세가 또 한쪽에 있다. 이것들이 또한 내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킨다." p. 462.
15 김춘수(1976), p. 351, p. 389.
16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956), 박상규(역), 『비인간화의 예술』 (서울, 미진사) p. 66
김준오(1991), p.44.에서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17 오르테가(1956), p. 60
18 김춘수(1982), p. 355.
19 시 <처용단장>을 산문으로 풀어쓴 자전적 소설 <처용>이 있다. 『김춘수 전집(3) 수필』
20 유종호(1982), "시의 자유와 관습의 굴레", 『김수영의 문학』 (서울, 민음사), p. 252.
21 『한국어대사전』(1976), (서울, 현문사)
22 이경희(1989), 『시적 언술에 나타난 한국 현대시의 병렬법 연구』, 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p. 116
23 황동규(1983)는 이러한 김수영의 특징을 ‘화장술’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때까지 김수영의 시는 대체로 비조직적으로 산만하다는 중평을 들어왔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김수영이 면밀하고 조직적인 시인임을 밝히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도는 산만하고 즉흥적으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김수영의 화장술이 아닌가라는 의문도 내포하고 있다."
"양심과 자유, 그리고 사랑", 『김수영의 문학』 (서울, 민음사) p. 17.
24 이경수(1977)는 이를 "야단스러운 정보로 일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에 있어서의 정보의 효용과 한계", <세계의 문학> ‘77, 봄호
25 김수영(1981),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김수영전집(2) 산문』 (서울, 민음사) p. 243
26 김수영(1981), "독자의 불신임" p. 120.
27 졸고(1990), "김수영 시의 수용양상 연구" <연구논집-제18집> 이대 대학원에서 분석
28 김수영(1981), pp. 244-245.
29 김수영(1981), p. 251.
30 김수영(1981), "생활현실과 시" p. 196.
31 김춘수(1976), "국내시인으로 나에게 압력을 준 시인이 있다. 故김수영씨다. 그는 만만치 않은 일을 벌이고 있었다. 소심한 기교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그런 대담한 시인이다. 김씨의 하는 일을 보고 있자니 내가 하고 있는 실험이라고 할까 연습이라고 할까 하는 것이 점점 어색해지고 무의미해지는것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한동안 붓을 던지고 생각했다." p. 351.
김춘수(1991) 『시의 위상』 (서울, 동지사) "내 입장에서 작고 시인들을 대상으로 베스트 7을 뽑는다면…… 김수영 …… 이 된다." p. 257.
"그(김수영)의 시에는 자유롭고 활달한 시점이 있고 스타일에도 탄력이 있다." p. 144
김수영(1981), "우리 시단이 해야 할 일은 작품다운 작품을 하나라도 더많이 내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춘수의 부르주아적인 것도 좋고 …… p. 192.
"김춘수의 <가을>은 종래의 관념의 세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객관을 추구하려는 눈에 뜨이는 작품이었다." p. 211
"……이것을 김춘수 같은 사람은 <역설>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리지만 그는 현대에 있어서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 p.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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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이은정*
이화여대 국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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