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놀이에 대한 다양한 정의
멀리는 서구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17세기의 교육자 코메니우스로 부터 19세기 룻소, 페스탈로찌, 프뢰벨, 삐아제 등에 이르기 까지 ‘유기체의 심신활동으로 간주되는 놀이’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 위해 노력했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었다. 이런 정의는 때로는 교육적 필요에 의해서 또는 인간의 행동이나 심리를 이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놀이를 정의하지 못했다. 이는 ‘사람이란’이란 정의를 내리기 위해 인간이 그토록 오랫동안 탐구했고 고민했는데도 아직까지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놀이가 갖는 다양한 특징과 의미를 간단하게 정의하기 쉽지 않다.
지금까지 주장되었던 놀이에 대한 다양한 학설에는 ‘놀이가 생겨난 원인을 주로 추구한 것’과 ‘놀이의 존재 목적을 중시하여 설명한 것’이 있다. 또한 Hurlock에 의해 스스로가 놀이 활동에 참여하여 즐거움을 얻는 적극적인 놀이와 타인의 놀이를 방관하거나 TV시청이나 독서 등의 정적인 활동에 만족을 얻는 소극적인 놀이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런 제반 이론은 놀이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위하여 도움이 되므로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1) 잉여 에너지설
놀이가 생겨난 원인에 초점을 맞춘 대표적인 이론이다. 고등동물에 있어서 의식주와 외부의 적으로부터의 안전한 상태에 놓이는 데 필요한 목적지향적 활동(작업)에너지 말고 남는 에너지가 있고 이를 발산하는 것이 놀이라는 주장이다. 즉 ‘놀이는 남는 에너지의 목적없는 소비’라는 말로 요약되는 데 이는 놀이를 설명하는 데 오래전 부터 일정부분 그 타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예를 들어 사자의 새끼들이 잘 먹은 다음 뛰고 달리고 재미있게 노는 것이나 인간들이 배부르게 먹은 다음에 신나게 노는 것이나 모두 에너지가 남아 돌아가기에 그 에너지를 소비하기 위한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현재까지 놀이를 설명하는 데 부분적으로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놀이터의 놀이기구인데 현재 우리나라 학교의 운동장에나 놀이터에 설치되어 있는 미끄럼틀, 능목, 철봉, 모래사장, 구름사다리 등의 구조물이 모두 인간에게 남는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 즉 잉여에너지설에 의거한 놀이구조물인 셈이다.
그러나 질병을 앓은 어린이가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데 놀이를 하는 것을 잉여에너지설로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보면 이 이론은 모든 놀이를 설명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 생활 준비설
놀이가 생겨난 원인에 초점을 맞춘 이론으로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다가올 생활을 준비하기 위한 행위를 하는 데 이것이 바로 놀이라는 설명이다. 즉 고양이가 쥐를 잡기 위해 공을 가지고 놀듯이 인간이 어려서 도리도리나 잼잼을 하는 것은 목과 손을 발달시키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자발적으로 행해지며 이런 행위를 통해 즐거움을 준다고 주장한다.
고등동물이나 인간의 어린시기의 다양한 놀이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해지는가에 관심을 갖고 관찰한 결과 그것이 다가올 생활을 준비하기 위한 행위라는 결론을 추출해 낸 것이다.
대표적으로 달리거나 물건을 던지는 것이나 인형놀이 등은 그가 성인이 된 후에 하게 될 좀 더 성숙한 행동을 위한 준비의 한 형태로 이는 인간의 놀이가 학습(지능발달)과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이론으로 주목할만하다.
3) 반복설
왜 어린아이들은 높은 곳에 기어올라가기를 좋아 하고 물놀이를 좋아할까? 또한 숨바꼭질이나 뒷쫒기 놀이는 모든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이론이다. 즉 인간은 종족이 지나온 문화발전 단계에 대응하여 자기의 선조들의 활동을 되풀이하고 종족의 역사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위의 예중에 나무에 기어오르는 일이나 헤엄치기 등은 동물시대에 알맞는 행태의 반복이고 숨바꼭질이나 뒤쫒기는 야만시대에 속하는 행태의 현재형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유아놀이 중에 모든 아이들이 즐거워 하는 놀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지고 뒤쫒고 숨고 찾는 놀이는 세계 모든 어린아이들이 좋아 하고 이는 다양한 형태의 놀이로 발전하였는 데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로써 타당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유아 놀이에서 기본 골격을 설정하는 데 ‘만지는 행위’, ‘도망치고 뒤 쫒는 행위’, ‘숨고 찾는 행위’ 등을 기본으로 하는 놀이가 많아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만약 유아 놀이에서 위의 전형들을 이용하여 다양한 놀이를 만들어 적용한다면 쉽고 재미있게 아이들을 놀이의 세계로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생활 준비설은 미래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고 반복설은 과거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음이 차이가 난다.
4) 정화설
놀이의 존재 목적이나 가치를 중시하여 설명한 심리학적 이론이다. 즉 인간의 일상생활에 필요가 없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로운 것들을 발산하여 조금이라도 해로운 것을 덜게 하는 데 놀이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동생이 태어남으로써 자기가 독차지했던 부모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여긴 큰 아이가 인형놀이를 하면서 인형을 동생이라 여기고 때려주는 행위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일상생활의 앙금을 풀어내는 자연스러운 행위이고 아이들이 치고 때리는 놀이를 통해 싸우고자 하는 욕구가 정화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이론은 놀이치료라는 심리학의 치료방법에 원조가 되는 이론으로 아이들의 놀이행태가 갖는 의미를 관찰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놀이를 자세히 관찰한다면 놀이하는 과정 속에 이런 요소가 구석구석 숨어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억압되어 있어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욕구들의 상징적인 발산으로 이는 보상적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5) 휴양설
놀이의 존재 목적이나 가치를 관찰하면서 나온 이론이다. 즉 인간이 육체적이나 신체적으로 피로하였을 때 수면으로서 쉬는 것이 아니라 그 피곤을 일으킨 것과는 다른 어떤 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피곤을 덜게한다는 것이다.
즉 강제성을 띤 일에서 벗어나 그 활동에 몰두함으로써 만족을 얻고 즐거워 하는 동시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과정이 있을 때 인간은 다가올 목적지향적 작업의 에너지를 충족하는 데 용이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활동은 자유스럽고 임의적이며 자기 발전적인 활동으로 노동과 놀이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데 가장 적절한 이론이다.
실제 소련의 과학자에 의한 실험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인간은 가장 빨리 일이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원시적인 상태에서 이런 과학적인 근거로 놀이를 행하지는 않았겠지만 본능적으로 제반 압박으로 부터 되도록 빨리 벗어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위로 놀이를 했을 것이다. 이런 놀이는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 졌고 이는 모든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호이징하의 놀이는 문화에 선행한다는 이론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힘든 일을 한 후 자연스레 놀이판이 벌어진 것은 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6) 자기표현본능설
피아제로 대표되는 지능발달이론에 근거한 놀이이론으로 놀이의 가치의 역할을 중시하고 있다. 즉 놀이는 동화(외부 자극을 기존 셰마에 맞추어 수용하는 일)과정과 조절(기존 셰마에 외부자극을 수용하여 자체 변화하는 것)과정으로 기존해 있는 환경에의 적응체계를 환경세계에 표출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놀이는 어린이의 지적발달에 있어서 필요한 본질적인 활동으로 현재 지식구조를 연습하고 확장하는 기능을 제공한다고 한다.
놀이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생각한 것을 수용하고 어떤 것은 수용해 내지 못하고 적응하면서 점차 지적발달이 이루어진다는 이러한 이론은 놀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이론으로 놀이가 심리학과 교육학에서 중요성을 인정받는 계기로 작용한다.
7) 태도로써의 놀이
놀이는 어떤 목적이나 가치보다 인간이나 동물의 전체 행동범위가 체계적으로 탐구될 때 설명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인간은 스스로 놀이를 선택하고 사물이나 재료나 생각을 다루는 인습에서 벗어난 어는 정도의 일탈성을 가지며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어떤 행위가 되풀이 되는 데 이것이 바로 놀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행태를 포괄적이고 총체적으로 관찰한 결과 놀이는 일상생활에서 목적없이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행위로 파악되며 이는 인간의 보편적 행위로써 놀이를 인간의 일상적인 행위가 아닌 또 다른 행위(태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웃음은 놀이의 한 요소로 놀이의 정황을 알려주는 것이며 또한 장난치고 싶어하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내적, 정의적 체계에 생겨지는 요구는 생리적 기본요구로 부터 일상생활의 여러가지 요구, 더욱이 문화적 요구에 이르기까지 여러모양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요구는 정의체계에 있어서 긴장으로 작용하고 그 긴장은 운동계통에 의한 요구달성의 동작으로 발산된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계통의 요구(놀이)는 정의체계의 긴장을 해소시켜 내적으로 균형상태가 이루어 지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이러한 긴장과 균형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활동이 그 사회적 환경과 개인이 지니는 사회적 요구로 인하여 여러가지 놀이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결국 놀이의 이론은 단지 심리학적 입장에 국한하여 추구될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입장에서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능적인 경향으로서만이 아니고 문화적 변용에 따라서도 놀이의 방법상의 차이가 생기게 되고 욕구나 동기 여하에 따라서도 놀이 활동이 달리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위의 제 이론은 놀이를 폭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놀이현상을 단정적으로 정의함은 무리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2. 놀이의 특징
인간의 행위 중에 어른들의 경우에는 일과 놀이의 구분이 어느정도 명확하게 나타나는 데 어린이의 경우 일과 놀이가 생활에 혼재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놀이인가, 일인가를 구분 짓기란 참으로 어렵다. 예를 들어 산가지나 칠교판을 가지고 여러가지 형태를 만들었는 데 이 형태가 수학의 도형을 학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이를 놀이라 할 것인지 공부라고 할 것인가? 만약 놀이나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면 어떤 기준에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산가지 칠교도가 있어 특별한 이유없이 시간이 남아 서로 재미있게 이런 모양 저런 형태를 만들어 보았다면 이를 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5학년 산수책에서와 같이 도형을 학습시킬 목적으로 칠교판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형태를 만들게 시켰다면 비록 칠교도를 이용하였지만 이는 놀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 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놀이인가 아닌가를 구분짓는다는 것은 어느정도 무리가 따르겠지만 놀이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놀이’와 ‘일(공부)’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는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 놀이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시작되고 중지된다. 따라서 어떤 강제에 의해 행해진다면 이는 놀이라 할 수 없다. 이러한 특징은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관찰하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자”, “할래”에 대해 “그래”, “싫어”라고 스스로 결정할 때 놀이는 시작되고 또한 중지된다. 놀이의 모든 결정이 놀이 구성원에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다. 그러나 놀이가 진행되고 있을 경우에는 상황이 약간 다르다. 놀이에는 개개인이 무시할 수 없는 고유의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놀이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힘들다고 놀이를 그만두지는 못한다.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그 아이는 다음의 놀이에 끼워주지 않음으로써 고립되게 되는데 이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기에 대부분 그런 경우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때 하고 싶지 않다고 느꼈는데 계속하고 있다고 치면 놀이의 자발성이 훼손된 것은 아니다. 또한 놀이구성원들의 집단적인 결정에 의해 중지되는 데 이때도 개인의 자발성이 무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놀이의 본질적인 특징은 자발성과는 거리가 있다.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는 경우를 보자. 한 아이가 “고무줄 놀이하자”고 제안한다. 주위에 있는 아이들 중에 하고 싶은 아이는 참여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아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자는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놀이는 시작된다. 이때 억지로 함께 하자고 해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다. 똑같은 노래를 되풀이 하고 단순한 동작을 매번 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신바람이 나는 까닭은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놀이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나 성실의 주체가 개인에게 있다. 잘 노는 아이에게 보여지는 것은 다른 일에도 책임감과 능동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잘노는 아이가 모든 일을 잘한다”라는 말이 성립하게 된다.
이때 놀이방법을 모르거나 규칙을 몰라 일정한 지도를 받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놀이하는 방법을 지켜보고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여겨지면 참여하는 것이 놀이가 전수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과정을 거치는 놀이의 대부분이 사행성을 조장하거나 상업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릇된 놀이가 많다. 이는 오늘날 행해지는 놀이가 그릇된 문화상황에서 만들어 졌거나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나 학부모 등에 의해 건강한 놀이를 지도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놀이방법을 설명하고 놀이규칙을 일러주어 해보는 것은 일단 놀이라 볼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교육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을 받아 아이들이 또는 지도자와 함께 자발적으로 하자고 해서 놀아진다면 이는 놀이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이 놀이인가 일인가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행위가 자발성에 의해 행해지는 가를 살펴보는 일이 우선이다.
둘째 놀이는 일상적인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놀이는 실제의 삶을 벗어나서 아주 자유스러운 일시적인 활동의 영역에서 행해진다. 흔히 ‘놀이의 세계’라고 표현되는 데 그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일상과 다른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놀이 세계에 통하는 규율이 있고 일상의 공간이 아닌 놀이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이는 정신세계 뿐 아니라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의미에서도 일상적인 영역과 구분되어 진다.
아이들이 공기놀이하는 광경을 보자. 세아이가 공기를 하고 있다. 한아이가 혼자 말로 ‘16살에 꺽기 16살에 꺽기……’를 되뇌이고 있다. 다음 자기 차례가 되면 꺽기부터 할 심산이다. 16살 꺽기를 중얼거리며 다른 사람이 죽는가를 살피는 동안 그 아이는 숙제할 걱정, 학원갈 걱정, 밥먹을 생각 등 일상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즉 공기놀이의 세계에 가 있는 셈이다.
흔히 놀이판이라고 이야기하는 ‘판’의 의미는 고유의 시간과 영역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일과 놀이는 서로 다른 ‘판’에서 행해짐으로써 각각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새로운 세계에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경험을 확대하기 위한 본능적인 모습이다. 또한 현실에 대한 나름대로의 미숙한 인식이 새로운 세계에로의 몰입을 쉽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인들의 경우 판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현실에 익숙해져 다른 세계에고 접근이 쉽지 않다. 그래서 좀더 자극적이고 특정한 매개를 이용하여아 판에 몰입하게 된다. 특정한 매개의 대표적인 것이 돈이고 이의 대표적인 예가 고스톱이다. 판에 몰입하게 만드는 데 돈이 매개함으로써 어른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또한 성인들의 경우에는 만들어 놓은 판에 들어가는 것으로써 현실에서 놀이의 세계에로의 접근을 쉽게 한다. 당구장이나 스포츠 등에의 몰입이 이를 반증한다.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놀이판은 일단 현실과는 다른 세계에서 이루어 진다. 다만 아이들의 경우 쉽게 놀이판에 몰두하고 성인들의 경우에는 좀 다르지만 놀이의 특징으로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세째 모든 놀이는 고유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그 규칙들은 놀이세계에서만 통하는 규칙이다. 이러한 규칙은 놀이하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놀이가 진행되다가 놀이의 규칙을 무시한다면 그 순간 놀이의 세계는 무너진다. 규칙에 의해 진행될 때 이기고 지고의 승패가 달려있고 경쟁을 유발시키게 된다. 이런 규칙은 놀이에 몰두하게 하고 여기에서 생긴 긴장감이 놀이를 지속시키는 힘이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놀이의 규칙이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다. 모든 이의 합의에 의해 종종 새롭게 바뀌거나 무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합의된 규칙은 모두에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놀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래놀이인 고누두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자. 나무 그늘 아래에서 두 아이가 땅에 호박고누 (꼰, 꼰질이)를 그려놓고 놀고 있다. 서로 말을 세개씩 가지고 하는 데 네개를 가지고 하는 아이는 없다. 왜냐하면 모두 그 놀이의 규칙을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집에서 한번 나간 말은 되돌아 올 수 없고 상대방의 길을 막으면 승패가 결정됨으로 이를 어기지 않는다. 이때 한 아이가 자기 집으로 되돌아 온다면 그 아이는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고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툼이 생기게 될 것이고 놀이는 중지될 것이다.
고누 뿐 아니라 모든 놀이에는 고유의 형식과 내용이 있다. 즉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술래잡기’, ‘진놀이’ 등은 각각의 놀이방법, 놀이재료, 놀이규칙 등이 있어 하나의 ‘놀이’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런 놀이는 그 사회의 문화창조물(무형문화)로써 계승되고 발전되며 소멸되기도 한다. 새로운 놀이가 만들어지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져 그 규칙을 수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하나하나의 놀이가 일정한 규칙으로 정착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각 지방의 문화적 특성과 자연환경의 차이로 인해 놀이규칙은 다양해지고 또한 이웃에게 파급되면서 변화를 거듭한다. 똑같은 ‘다리셈놀이’의 놀이노래와 방법이 전국적으로 일정하게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놀이규칙의 다양함과 구성원들의 차이에 의함이다. 이는 놀이 하나하나가 각각의 규칙을 가지고 독립된 영역을 이루며 지역적으로 행해지고 완성되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이유에서 놀이를 하나의 문화형태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3. 놀이에 대한 새로운 정의
교육학 대사전에 유희(놀이)를 찾아보면 ‘놀이란 특별한 목적이나 생존 자체에는 직접 관계가 없을지라도 그것 자체로서 흥미가 있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활동의 총칭이다’라고 정의 되어 있다. 이런 정의는 교육학 사전 외에도 일반적인 사전의 정의이다.
이를 자세히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놀이는 놀이 자체가 최상의 목적이다.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서나 공부에 도움을 얻기 위해 놀이를 한다면 이는 벌써 놀이가 아니라 체육이요 학습이다. 고무줄 놀이를 보면 그 어떤 결과물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고무줄 놀이 자체가 목적인 셈이다. 또한 고무줄 놀이를 하면 살고 하지 못하면 죽는것이 아니다.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렇다면 안먹고 안자는 것과 같이 생존에 직접 관계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도 없이 생존에도 관계되지 않는 놀이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정의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놀이관 즉 ‘놀이는 시간낭비’, ‘쓸데없는 짓’, ‘아이들의 소일거리’ 등을 뒷받침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수긍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학교나 교육에서 놀이를 배재하는 근거로 작용하였고 일을 강제하는 현 우리나라 상황에 이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가끔 육교에 큰 글씨로 붙여 놓은 ‘노는 기쁨 하루 만족 일한 보람 평생만족(한국노동교육원)’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위의 정의가 다음과 같은 면에서 문제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놀이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가?’와 ‘생존 자체에 관계가 없는가?’라는 점에서의 문제이다.
낱낱의 놀이는 위의 고무줄 놀이의 예처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생존에도 직접 관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놀이를 덩어리로 생각해서 인간(특히 아이들)의 하루 생활 중에 놀이 또는 그가 살아가는 동안에 행하는 많은 놀이를 상정해 보자.
인간은 어린시기에는 스스로를 훈련하기 위해 놀이를 하고 또한 자라면서 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개인적인 요구와의 괴리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는 놀이를 필요로 한 원인이고 그밖에 다양한 요구들이 놀이를 하게 한다. 인간에게 연령이나 성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놀고자 하는 것은 나름대로 그런 제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일종의 본능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놀이를 모두 없애버린다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놀이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위와 같은 욕구를 해소할 목적을 가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놀이는 인간이 건강하게 살아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행해지는 것이다. 다만 낱낱의 놀이가 행해질 때 놀이를 보는 사람들의 그릇된 시각과 놀이의 목적이 내면적이고 본능적인 형태를 띠기에 ‘목적없는 행위’로 생각될 뿐이다.
놀이는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해 왔다. 개별적인 놀이와 사회적인 놀이가 공존해가면서 개개인에게는 지적, 육체적 발달과 휴식 그리고 안정을 제공하였다. 또한 사회에서는 사회생활에서 생긴 제반 갈등을 해소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래서 서양의 교육학자는 “놀이는 무목적이거나 무방향적인 활동이 아니다. 놀이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안락감을 느끼기 위한 행동의 시도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세계를 혁신하고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제 사전적인 정의가 갖는 한계와 잘못은 시정되어야 한다. 아울러 놀이에 대한 그릇된 사회적인 인식도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인식에서 놀이에 대한 새롭고 올바른 정의를 내리려고 한다.
“놀이란 외형적으로 목적이나 생존에 관계없이 행해지는 것같지만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행해지며 개인적인 차이와 문화적인 차이로 다양한 형태를 띠며 자발성과 일탈성을 특징으로 하고 즐거움과 기쁨을 수반하는 인간행동의 총칭이다.”
위와 같은 정의는 어쩌면 놀이라는 코끼리의 한 부분 만을 정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의 내려지고 인식하고 있던 ‘놀이’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따라서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놀이의 중요성이나 가치가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한 첫발로써 의미가 있다.
4. 놀이와 레크리에이션(게임에 국한)과의 관계
레크리에이션(이하 ‘레크’라고 함)과 관계된 여러 책에서 공통적으로 내리고 있는 정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레크는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정력소비인 노동의 반대적 생활로써 즐거움을 동반하고 정력을 재창조하는 행동양식이다.” 좀더 세부적으로 정의하면 “그것이 개인에 의한 것이든 집단에 의한 것이든 여가에서 행해지는 활동이며 그 활동 그 자체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동기가 주어진 자유롭고도 즐거운 활동을 의미한다. 레크는 놀이, 게임, 스포츠, 경기, 휴식, 오락, 예술, 취미, 부업을 포함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와같이 레크는 굉장히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식의 이해보다 레크를 편협하게 기타를 치고 포크덴싱이나 하는 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레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레크의 기원과 역할을 간단하게 설명해본다.
레크는 1900년대 미국의 루터 헤이슬리 큐릭(Luther Hasley Gulick)박사가 주창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사회조건은 자본주의가 한창 무르익던 무렵이였다. 노동이 끊임없이 강제되는 상황에서 ‘인간은 일만하는 동물인가’라는 생각이 들게되었고 이는 곧 놀이의 가치를 생각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일과 놀이가 상호 보완적일 때만이 인류생활의 완성이 있고 인류는 생존을 유지하고 행복을 마련한다는 사상으로 나아갔다. 최초로 놀이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사회사상으로 발전하였는데 인류역사상 참으로 획기적인 사상의 변화이다.
그러다가 구체적인 계기는 어린이들이 길거리에서 놀다가 사고를 당하는 일이 빈번해져 사회문제가 되면서 부터이다. 기존에 생각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사고이라고 생각하다가 놀이 공간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주장이 사회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사상의 흐름으로 폭넓은 지지를 획득하였고 결국에는 학교 건물 마다 운동장을 설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라는 결과로 남게 되었다. 이런 운동은 곧 레크를 사회운동으로 발전시켰고 당시 사회조건과 맞물리면서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레크의 발달은 인류가 건강한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운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레크가 게임으로 인식되면서 몇가지 놀이와 차이점을 갖게 되엇다. 다음은 레크(게임)과 놀이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레크에서는 지도자가 있어 전체 판을 진행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서는 진행자가 있어야 하고 진행자에 따라 판이 결정된다. 즉 지도자가 재미있고 새로운 것을 많이 하면 즐겁고 그렇지 않으면 시시하고 재미없게 느껴진다. 지도자를 제외한 사람은 수동적으로 지도자를 따라하면 되는 양상을 보여 판의 주인이 지도자이다. 따라서 자발성보다 지도성이 강조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지도되는 것을 따라 하면 된다. 따라서 지도자의 지도성이 강조되어 지도자의 언어, 상황판단, 차림새까지 교육받은 전문 지도자가 생겨난다. 나머지는 지도자의 요구에 따라 행하는 수동적인 형태가 된다. 재미있게 놀다가도 지도자가 사회를 보느라고 중단시키면 그 분위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보통 TV에서 많이 행해지는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이 레크이다.
또한 레크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 요구하기에 지도자는 이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개개인의 자발성보다 지도성이 강조되기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한번 써먹은 것은 2~3회 써먹으면 대상들이 싫증을 내기에 새로운 것을 배워와야 할 필요를 느낀다. 따라서 처음에는 레크지도자가 되었다가도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 데 이는 레크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리고 레크는 즐겁게 해주기 위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지도자의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다. 보통 지도자들은 대상이 어린이인지, 어른인지, 장소가 어디이고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놀이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위의 레크와 구분된다. 위에서 제기한 놀이의 특징과 대별되는 몇가지를 살펴보자.
놀이는 행하는 사람이 주인이다. 놀이지도자는 놀이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으로써 역할이 중요하지 판을 이끌 책임은 없는 것이다. 나머지는 노는 사람이 주인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즉 노는 사람이 주인이다. 만약 놀기 싫으면 그만 노는 것도 행하는 사람의 결정에 따른다. 철저히 놀이의 주인은 행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스스로 판단해서 행하기에 여러번 되풀이해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창의성과 자발성은 열린 상황을 연출한다. 즉 놀이의 형식이나 심지어 규칙도 변화시킬 수 있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여러가지 좋은 요소들이 잘 결합해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져 있기에 여러번 해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놀이를 하면서 점차 놀이기술의 향상으로 더 하고 다음에 또 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가 어제 했는데도 오늘도 재미있게 하는 것은 놀이기술의 향상과 놀이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레크가 기여한 점은 참으로 지대하다. 사회사상으로 여가의 의미가 정착되었고 놀이의 중요성도 보편적으로 인정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상황에서 놀이의 소멸과 그 자리를 메꾸는 형식으로의 레크(게임 지도)는 분명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다.
옛날에 놀이판이 벌어지면 누구나 어깨춤을 덩실추며 나와 판의 주인이 되던 우리의 놀이문화와는 일정부분 거리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레크를 부정하거나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레크가 갖는 필요성과 놀이가 갖는 중요성을 결합하여 올바른 놀이문화, 우리 실정에 맞는 놀이문화의 창출이 시급함을 이야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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