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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과학 기술 시대의 가치 선택

온울에 2008. 5. 6. 22:25

목 차

1 기계문명에 대한 항의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2.오늘날에는 세계를 제 1, 2, 3 세계 등으로 표현하는 그 본래의
3. 경제성장에 의한 근대화에 따르는 사회구조의 불화는 공동체의
4.다음 세기는 생활세계의 기계화를 더욱 더 심화시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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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중앙대학교 부설 중앙철학연구소 
학술지명 철학탐구 
권 11 
호 1 
출판일 1999.  




과학 기술 시대의 가치 선택


차인석
서울대 철학과
2-210-9901-04
pp.6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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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계문명에 대한 항의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기계문명에 대한 항의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서방에서는 18세기말 급속히 진전한 생산력의 발달과 함께, 이를 가능케 했던 과학과 기술의 힘이 미치는 영향을 염려하는 사상의 흐름이 크게 일어났었다. 물질의 측면에서 인간에 대해 설명하려 했던 시도에 대한 회의에서 뿐만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 현상을 감각주의적 분석으로 환원시키려던 경향에 대한 반기도 일어났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외쳐졌던 자유의 이념이 물질 개념에서 도출될 수 없다고 여겼던 젊은 피히테가 관념론으로 인간의 고귀함을 설명하려 했던 노력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몰고 온 변화에 대한 반항이었던 것이다.

금세기에 들어와서 점차로 압도해 가는 물질문명에 대해 저항했던 사상가들은 생물학적 인간관에 대해, 이념 추구를 본질로 하는 인간론과, 의식 안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인간관을 각기 철학적 인간학과 현상학, 그리고 실존주의에서 제시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세계대전 같은 재앙의 재발을 막아보려고 했다. 지난 60년대는, 풍요로운 물질 생활이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킴으로써 진정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할 수 없는 삶을 영위케 만들어 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하는 젊은 세대를 등장케 했는데, 이들은 현대의 병리가 과학과 기술을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삼는 사유양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함으로써 현존 질서의 전면 거부에 나서기도 했다.

그 동안 한국사회는 산업화에 의한 사회변동에 대해서 반성이 없지는 아니했으나 고도성장에 따르는 부의 배분을 둘러싼 사회계층간의 이해 갈등으로 인해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이 그 틀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지금의 여건은 삶의 안녕을 창출하는 생산력뿐만이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과 인간과의 관계를 깊이 반성해야 함을 강요한다.

후설은 생활세계와 자연과학의 세계를 나누고 현대 문명이 전자의 중요함을 망각케 한다고 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진행하는 주위세계가 실지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의미 기반이 됨에도 과학적 사고에 의해서 이것이 수학이라는 이념적 베일로 가려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비판은 그 당시에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증기차로 대륙을 횡단하며 증기선으로 대양을 건너고 야포로 전쟁을 하던 기계문명이 이 철학자를 놀라게 했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트기 여행이 다반사가 되고 달 관광 여행이 눈앞에 가까워지고 통신술의 발달로 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 생활세계와 과학세계의 구분은 별다른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후설의 생활세계는 이제 더 이상 과학 이전의 세계가 아니라 과학 안에 있으며, 그것이 과연 과학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문제로 남는다. 관념론의 창시자인 피히테와 셸링, 그리고 헤겔은 자연과 역사를 정신의 개념으로 설명했지만 과학과 기술의 전진을 멈추지 못했으며, 밀의 통합과학론에 반하여 학문을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으로 양분하여 인간 역사를 다른 방법으로 구축하려 했던 딜타이와 리케르트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과학주의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데올로기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의 우위성에 대한 뿌리깊은 신념은 좀처럼 흔들리기 어려워져만 간다. 그 까닭은 단순하다. 우리의 생활 세계가 과학과 기술 안에 있기 때문이다.

후설이 인식의 근원을 파헤치면서 캐어 놓은 것이 선험적 주관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과학을 초월한 절대적 그 무엇이 아니다. 인간은 이미 주어진 사회와 역사 안에서 태어나고, 주어진 언어를 통해서 밖의 세계와 관계하며, 주어진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그의 세계 경험은 주어진 언어를 통한 경험이다. 후설이 내걸었던 "무전제"의 인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도구사용으로 규정된다. 도구 자체가 전제조건이며, 그것은 인식주관, 행동주체의 의식과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과학기술내 존재"라는 사실성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실성을 그대로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인간 자신과의 연관에서 반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2.오늘날에는 세계를 제 1, 2, 3 세계 등으로 표현하는 그 본래의
오늘날에는 세계를 제 1, 2, 3 세계 등으로 표현하는 그 본래의 의미가 없어진 셈이다. 경제가 국가경제에서 국제경제로 바뀌었으며, 통신기술의 발달은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 안으로 끌어들였다. 더욱이 신흥공업국가들의 국제 무역으로의 진출은 종래의 동과 서라는 문화적 특수성을 넘어서는 초개별 문화로의 움직임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신흥공업국가들은 선진 공업사회가 성취한 풍요와 안녕을 짧은 시일에 이룩하기 위한 고도성장 경제를 밀고 나감으로써 그들 사회가 허용하는 모든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합리적으로 동원한다.

한국사회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사회는 최근의 신흥 공업국들에 비해 앞서 경제 성장을 도모해 왔으며, 현재의 발전 단계가 중진국으로까지 불린다. 지난 30년간에 우리 사회가 쌓아 올린 업적은 실로 눈부시다. 시장경제가 비록 관의 주도하에 추진되어 왔지만, 선진 과학과 기술의 도입으로 물질적 안정 수준에 도달했으며, 이제는 이 사회를 살찌게 해 준 생산력이 야기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을 심도있게 고려할 계기가 도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는 경제성장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그 과정은 과학과 기술의 혁신화로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적지 않다. 사회 토대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는 생산력은 합리성의 원리에 따라 가동되고 있으나 사회의 상부구조가 장기간의 권위주의 정치로 인하여 생산력의 합리성 원리에 일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경제는 근대화되어 가고 있지만 정치와 사회의 의식은 이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 내에서 토대와 상부구조간의 괴리가 좁지 않다는 것이다. 90년대에 와서 문민시대가 도래했으나, 이 간격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상부구조가 토대의 변화에 상응하기에는 그것이 안고 있는 보수 성향이 너무나도 강하다. 그 원인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관 주도의 근대화가 사회의 자율성을 길러줄 수 있는 여유를 남겨 놓지 아니했기 때문이며, 또한 고도성장이란 근대화의 목표는 개체성을 인정치 않는 동원 체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문민시대에서 언로는 자유로워졌다고 하지만 매스미디어는 지난 30년간의 권위주의 체제를 닮아 그 윤리성이 절망적이라고 하겠다. 그 횡포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이다. 언론의 자유는 매스미디어로 하여금 군부세력이 남겨 놓은 공백을 메우면서 그들의 습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셈이다. 시장경제가 길러 놓은 감각주의 문화가 도덕 기준을 쾌와 불쾌에서 찾게 하는 마당에 매스미디어는 이를 조장하고 또 조종하면서 인간 관리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둔갑해 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최상의 이기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TV임은 틀림없다. 이것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침저녁으로 국내외 뉴스를 신속하게 전해주는, 우리의 밖의 세계에 대한 가장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며 우리의 인식 주관의 일부이며 삶의 양식의 조건이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 경험의 기본 범주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식 주체라는 자각이 뚜렷하게 형성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개체성을 자각하기 이전에, 이 전자 매체는 그들의 의식에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입력시키고 그것을 자의로 조종하면서 사람들이 자기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선택할 가치마저 결정해 주기에 이르렀다.

과학기술의 진보로 달성한 고도성장의 생산력은 전통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는 기호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생활의 안정에 요구되는 가치들을 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창출해내는 다양한 기호는 욕구 수준을 상승시키며, 기복제화의 무속신앙에 젖은 대중은 물질적 가치들의 획득에 급급할 뿐이다. 자본주의 물신숭배가 민간신앙에 스며든 셈이다. 이들 양자간에는 친화력이 작용한다. 과학과 기술은 이전에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케 하고 이전에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실현시켜 준다. 그것들은 잡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3. 경제성장에 의한 근대화에 따르는 사회구조의 불화는 공동체의
경제성장에 의한 근대화에 따르는 사회구조의 불화는 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하고, 사람들 간에 개체 의식을 형성시킨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개체 의식이 자아 의식으로 발전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경우는 다르다. 전통사회에서 시민사회를 거치지 않고 조직사회로 이행하여 사람들을 가족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 이끌고 갔다. 그들의 개체 의식은 사회성을 결여한 채 형성해 가는 것이다. 이리하여 건전한 자본주의의 발전에 요구되는 개체 의식이 아닌 자기중심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자아 의식이 처음에는 계몽사상가들의 관념이었겠지만 사회이론에서 그것이 갖는 의의는 크다. 근세부터 과학기술의 진보는 사람들의 자아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풍요를 제공하면서 인간의 자유 신장의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은 생활 안정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되기는 하였지만 자아실현의 계기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것들은 권위주의 정치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극도로 합리화되고 기계화된, 생산력을 동원한 고도 생산의 관리를 사회의 전면 관리로 성공시킬 수 있었기에 참 개체성이 싹틀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아"는 데카르트 이래 철학자들이 즐겨 써 왔던 개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과 결부된 "개체"도 16,7세기에 형성된 관념이다. 이 두 낱말은 서방의 사회사와 사상사를 설명하는 관건 개념이라고 하지만, 현대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거의 필수적이라고 할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서방사회의 이해에만 한정시켜 원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 형성에 이미 보편적 효력을 갖는다고 하겠다.

서방에서 개체성의 원리가 계속해서 지탱되어 온 것은 아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생산구조의 기계화와 합리화는 개체성이 근거하고 있는 경제 기반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거대 기업의 출현은 군소 경쟁자들을 시장으로부터 추방하면서 이들이 자유로운 경제 주체로 남을 기회를 박탈하고 말았다. 한국 사회에서는 관 주도형의 경제발전이 자유로운 경제 주체로의 성장을 가로막은 셈이다. 이 사회에는 개체성의 원리가 발휘될 기회마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문민정부는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한다고 하지만 자아 의식이 미숙한 사회에서의 자유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영역에서 방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현실이기도 하다.

과학시대에 관념론의 입장에서 자아를 논한다는 것은 어리석을 것이다. 물론 피히테, 헤겔, 바우어, 그리고 후설과 사르트르 등이 정의했던 자아 개념이 그 나름대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물학과 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삐아제가 자아 형성에 가한 개체 발생론적 설명은 광범위한 동의를 얻고 있다. 인간의 심리 발달은 타고난 생물학적 요소와 그가 태어난 주위 환경간의 상호작용에서부터 비롯되고 또한 사회 문화적 여건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그의 자아형성론의 주 요지가 된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후자를 우선시키는 유교문화권에 놓인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개체 의식이 형성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30년간의 경제 성장이 유교 윤리에 기인했다는 학설은 엄격한 권위주의적 관리로 근대화를 추진한 군사정권의 이른바 개발 독재를 놓고 나온 이론이다. 통속화된 유교 윤리는 자아나 개체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명령과 복종만 있을 뿐이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바로 이 지배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4.다음 세기는 생활세계의 기계화를 더욱 더 심화시킬
다음 세기는 생활세계의 기계화를 더욱 더 심화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소비 패턴은 더욱더 다양화해 갈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파괴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될 것이다. 과학은 더욱더 혁명적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그러면 인간과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도구를 사용하고 생산물을 소비하며, 생태계의 율동을 무너뜨리는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 지구를 살리고 스스로를 구제할 것인가? 아마도 과학시대의 윤리적 가치는 이 물음과 더불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고양을 위해서 만들어 낸 것들이며, 이것들은 그가 세계 내에 존재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이것들은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가리킨다. 이들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성을 초월한다. 과학과 기술은 세계 안에서의 그의 존재를 확정해준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의 무화의 가능성이 된다는 것은 현대의 위기를 의미한다. 이 위기는 인간이 자초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그것들의 발전 방향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전개 방향은, 이를 창출한 인간 사회가 선택해야 할 가치에 대한 사회성원들의 상호주관적 합의에 크게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업화의 심화는 지식인들 사이에 탈 근대화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근대화와 탈 근대화는 동시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탈 과학기술화라는 역류는 있을 수 없다. 앞으로의 사회가 안게 되는 많은 난제들은 과학기술을 매개로 풀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근대화는 부단히 지속하기 마련이다.

한편으로 탈 근대화가 근래에 와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 해방이라는 계몽의 이상이 성취될 수 없다는 데서 나온 사조이다. 과학의 이성이 더 이상 인류의 발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회의가 일부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지적 유희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역기능을 나타낼 수도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전통성을 벗어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앞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아직도 자아 의식과 개체성이 성숙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근대성의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무정부로 이끌어 갈 위험이 높다.

이 사회의 문제는 근대화가 아니라 잘못된 근대화일 것이다. 나치즘과 스탈린주의가 근대성의 궁극적 실패를 예고했다는 주장은 인류가 지구에서 탈출할 수 없는 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못된다. 과학이 인간 해방을 위해 이용되지도 않으며 진리보다는 자본에 의해서 고도 생산성의 제고를 위해 응용된다는 사실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이 있다고 인정되더라도 종국에 가서는 과학의 힘을 빌려야만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용인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무엇보다도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이론 형성에 합의를 보아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의 비판도,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그 나름대로의 기여로 간주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군림하게 된 매스미디어가 참과 거짓, 이성과 수사, 본질과 가상간의 구분을 흐리게 했기 때문에 현존 질서를 통한 인간 해방이 어렵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은 물론 수긍되고 남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도 보편적 가치의 긍정에서만 비롯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모두의 평등은 보편성을 지닌 이념들이며 이것들이 과학과 기술의 도움을 얻어 인간사회의 주축이 되도록 시민들의 참여 정치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렇게 요청만 한다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의 자기의식화가 우선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놓인 상황에 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각성은 학교와 사회 교육을 통해서 촉구될 수밖에 없다. 참여로의 그들의 결의가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을 알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