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자명 연세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학술지명 원우론집
권 24
호 1
출판일 1996. 8. 26.
비트겐슈타인의 과학주의 비판
우환식
연세대학교 박사3학기
4-222-96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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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언어에 대한 철학적 관심은 프레게와 럿셀 등의 철학자들이 기호논리학을 발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이상언어를 구축하고자 한 데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경험론적 입장에서 이를 수용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이론을 기초로 통합과학을 완성시킴으로써 과학적 세계관을 세우고 기존의 철학적 활동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후의 형식언어 및 통합과학의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일상언어학파의 철학자들은 다소 다른 방향에서 언어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시도한다. 언어에 의미와 그 가능성에 대한 검토는 기존의 철학과 철학적 문제의 성격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를 요구하였으며, 이와 같은 언어에 대한 반성은 현대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이러한 방향전환의 주도자로 생각하고 있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철학적 관심 역시 프레게나 럿셀, 논리실증주의자, 일상언어학파와의 연관 하에서 이해해 왔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필자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으며, 타당하다면 어떤 점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나 타당한지는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이 이처럼 이해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1).
그러면 철학을 하는 데서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두었던 것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 단정적인 답을 내리기란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는 경구적이고 역설적인 표현들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것조차도 단편적이고 암시적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는 데는 많은 작업이 요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그의 저술에서 나타난 몇 가지 특징점, 즉 철학에 대한 그의 태도와 과학에 대한 입장, 그리고 언어의 의미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살피고, 이를 통해 이로부터 간접적으로 그가 의도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특징을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로, 그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자신의 철학함에서 견지하고 있는 일관된 태도는 일상적으로 그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견해와는 달리 반과학적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의 철학함의 목표가 기존의 철학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거나, 기존의 철학적 이론을 포섭하는 보다 포괄적인 철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목적은 기존의 철학과 다른 입장에서 전통적인 철학에서 다루어진 문제의 성격을 구명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현대에 지배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른 인간 삶과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던져주고자 했으며, 바로 이 문제가 비트겐슈타인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 필자는 먼저 과학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견해를 견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서 그 자신이 전기에서 취했던 입장과 다른 많은 철학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본질주의적 태도 또는 과학적 태도,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되는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와 해결에 대해 그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살피고자 한다. 또한 그가 자신의 철학에서 진정으로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 어떤 것이었는가, 더 나아가 이러한 논의에서 보여지는 비트겐슈타인의 진정한 의도가 어떤 것인가를 살피고자 한다.
2.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일상적으로 그의 저작 『논리철학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2)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를 중심으로 전ㆍ후기로 나뉘며, 이 저작들을 통해 그는 언어, 세계, 논리, 윤리, 미학 등의 다양하고도 광범위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을 이해하는 것은 그 자신이 이미 쓰고 있듯이 그다지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는 『논리철학논고』의 서문과 1930년 『철학적 소견』 Philosophical Remarks의 서문, 그리고 1948년경 『철학적 탐구』의 서문을 위한 예비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책은 아마도 이 속에 표현된 생각들 - 또는 적어도 그와 비슷한 생각들 - 을 그 자신이 이미 해본 사람에게만 이해될 것이다. - 그러므로 이 책은 교과서가 아니다. - 만약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이 책의 목적은 달성될 것이다.
이 책은 이 책이 쓰여지게 된 정신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다. 내가 믿기로는 이 정신은 유럽과 아메리카 문명의 큰 흐름을 이루는 정신과는 다른 것이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은 신의 영광을 위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 그 말은 올바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3).
별로 달갑지 않기는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세상에 공개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내가 흔쾌히 생각하고 싶어할 그런 사람들 수중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바라거니와, 이 책이 철학적 저널리스트들로부터 금방 완전히 잊혀지기를, 그래서 아마도 좀더 나은 종류의 독자들에 의해서 간직되기를4).
위에서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글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한 사람에게만 의미있을 것임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그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 그리고 자신이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와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다소 역설적인 태도는 그가 우리의 시대정신을 과학주의 내지 과학적 정신의 지배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정신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 그가 서있다는 데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1. 앞서 지적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저작을 통해 언어, 세계, 논리, 윤리 등등 여러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그의 저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논의가 언어의 의미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많은 철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에서 그가 언어의 의미에 대한 이론을 탐색하고 있다고 본다. 즉 전기에서는 언어그림이론(picture theory of meaning)을, 그리고 후기에서는 언어사용이론(use theory of meaning)을 구축하려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에 관한 것이든 세계에 관한 것이든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새로운 이론을 세우려 했다고 하기에는 많은 난점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었으며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을 쓴 럿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씨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관여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부호법을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 그는 논리적으로 완전한 언어가 충족시켜야 할 조건에 관여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씨는 논리적으로 완전한 언어의 조건들에 관여하고 있다5).
논리실증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슐릭(M. Schlick)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논리철학논고』는 과학적 세계 개념을 일으켰고 모든 경험론이 기초하는 근본적인 진리를 구성하고 있다6).
대부분의 논리실증주의자들과 그를 연구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위의 예문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논리적으로 완전한 이상언어를 구축하고자 했으며, 경험에 기초한 의미이론을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즉 일상적인 언어의 사용에서의 문법적 형식에 의한 오용이나 곡해를 피하기 위해 논리적 기재를 이용한 일종의 논리적으로 완전한 이상언어를 구축하고, 언어의 의미가 경험에 있다는 검증이론을 그가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이상언어를 구축하거나 의미이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해석과는 다른 견해를 드러내는 구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의 일상언어의 모든 명제들은 사실상, 있는 그대로,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다7).
…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가 그것들을 통해 넘어서 올라갔을 때, 결국 종국에 가서는 그것이 비의미적(nonsensical)임을 인지한다8).
여기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일상언어에 대해서 럿셀이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취한 태도와는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논리철학논고』에서 시도한 모든 작업이 과학적ㆍ이상적 언어이론을 제시하고자 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절들을 볼 때, 우리는 논리실증주의자나 럿셀의 해석이 과연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를 옳게 파악한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오히려 앞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그는 여러 글을 통해 자신이 이미 자신의 철학이 오해되고 그럴 것에 대해 상당히 우려하고 있음을 볼 때9), 이러한 접근은 설득력이 없다.
2.2. 금세기 초 프레게와 럿셀 등이 이룩한 기호논리학에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는 경험주의의 입장에서 검증가능성을 기초로 한 논리적 분석방법을 통해 모든 학문을 체계적으로 통합하려 시도했다. 또한 이러한 통합과학을 완성시킴으로써 과학적 세계관을 세우려고 한 것이 그들의 활동의 주된 목표이자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10). 이들에게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의미에 대한 고찰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즉 언어의 의미가 세계와 그림그리는 관계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언어가 세계를 그리는 것은 그 양자간의 동일한 논리적 형식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과학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결국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견지하는 과학에 대한 낙관적 태도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취하는 과학주의적 태도와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그들의 태도와 상당한 거리를 보여준다. 특히 그는 통합과학(unified science)을 이룩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논리실증주의와 달리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과학적 물음이 대답되었을 때에도 우리의 문제가 여전히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라고 느낀다11).
정말로 해결되어야 할 것은 자연과학의 문제가 아니다12).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참된 명제들의 총체가 전(全) 자연과학(또는 자연과학들의 총체)이다13)"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참된 명제란 존립하는 사태, 즉 사실과 연관된 것이다. 사실을 다루는 것은 과학의 문제이며,사실을 다루는 이설(doctrine)의 체계는 이론 내지 설명의 체계가 된다. 다시 말해 과학을 구성하는 명제는 사실과의 연관을 맺고 있으며, 결국 앞의 논의와 연관해 볼 때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사실은 그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의 문제는 나에게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14).
나에게 있어 이론은 의미가 없다. 이론은 나에게 아무것도 제공해주지 않는다15).
사실에 관한 문제, 즉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그가 말하는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사실과 이에 대한 이론(과학적 이론), 다시 말해 과학적 문제와 그 해결이다16). 그러나 그러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에게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음을 위의 인용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면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2.2.1.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을 다루는 자연과학의 본성 혹은 기본적인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과학적으로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그가 제시하는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현대의 모든 세계관은 소위 자연법칙이라는 것이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라는 망상에 근거해 있다17).
인과적 연관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18).
위의 논의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은 기본적으로 인과율에 기초한다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인과적 연관은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달리 하나의 믿음 내지 신념에 불과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과법칙은 그에 따르면 법칙이 아니며, 이 인과법칙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우리에게 아무런 필연성도 없다. 이러한 입장을 아래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인과법칙은 법칙이 아니라, 법칙의 형식이다.
소위 귀납의 법칙은 어떤 경우에도 논리적 법칙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백히 의미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선천적인 법칙일 수도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과학이 근거하고 있는 인과율은 선천적인 법칙도 따라서 필연적인 법칙도 아닌 하나의 법칙의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세계 속의 사실들을 통일된 형식으로 바라보는 '그물' (mesh)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9).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기술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명제들을 단일한 계획에 따라 구성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이며, 그러한 기획 자체의 참됨은 보증될 수 없다는 입장20)이다. 그러나 과학의 법칙이 지니는 이러한 성격에 대해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마치 과학이 근거하는 법칙, 인과율이나 역학의 법칙 등을 참되다고 전제하고, 그에 의해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태도는 그가 보기에 과학적 낙관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 자체의 참됨이 보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학적 세계관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과학주의적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이 신과 운명을 범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거기에 멈춰섰던 것처럼, 자연법칙을 범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거기에 멈춰 선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 둘 다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그러나 새로운 체계는 모든 것이 설명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하는 반면, 옛날 사람들은 분명한 종점을 인지하고 있는 한에 있어, 옛날 사람들이 보다 더 분명하다21).
여기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에 근거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과학주의적 낙관주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비트겐슈타인은 과학 또는 과학정신을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에 기초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나 태도로 파악하고 있다. 위의 글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설명의 체계로서 자연과학을 '말할 수 있는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에까지 확장해 적용하는 데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신념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우리의 삶이나 운명에 대해서도 과학적 이론화 작업이 가능하다는, 즉 우리의 삶 자체도 하나의 과학적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이와 같은 과학적 태도, 즉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모두를 대상화하고 이론화할 수 있다고 보는 태도는 단지 과학자들에게만 견지되는 태도가 아니라 기존의 철학 역시 이러한 태도를 충실히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아울러 기존의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인식론 등등의 철학이론 역시 이러한 과학적 태도로부터 비롯된 비의미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다22).
2.2.2. 과학적 태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적 입장은 비단 전기의 저작뿐만 아니라 그의 『논리철학논고』 이후의 전 작업에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후기철학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는 『청갈색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면전에서 과학의 방법을 보며, 과학이 하는 방식으로 묻고 대답하려는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을 받는다. 이러한 성향은 형이상학의 진정한 원천이며, 철학자를 완전한 암흑 속으로 이끌어 간다23).
우리가 이러한 탐구를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일반성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성에 대한 갈망은 특별한 철학적 혼동과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경향의 결과이다....
그러한 경향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일반 용어에 귀속시키는 모든 실재들에서 공통된 어떤 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
일반성을 우리가 갈망하는 데는 다른 원천이 있다. 즉 우리가 과학적 방법에 대해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 현상을 극소수의 원초적인 자연법칙으로 환원시키는 방법이다. 그리고 수학에서는 다른 주제들을 일반화를 통해 통합하는 방법을 뜻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 또는 어떤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 나의 작업일 수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철학은 진정으로 '순전히 기술적'이다24).
위의 글에서 보여지듯이 그의 반과학주의적 태도는 후기의 길목에서도 여전히 견지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과학적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전기에서 그가 과학정신의 특징으로 본 것은 인과율에 의한 이론화 작업이 중심된 것이다. 위의 글에서 우리는 그가 과학의 주요한 성격으로 환원적 성격과 일반성에 대한 추구를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기의 입장이 좀더 심화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결국 그의 요지는 과학적 정신에 본질적인 것은 환원될 수 없는 주어진 것 또는 인간 삶의 원본적 국면들을 소수의 일반화된 가설과 원칙을 통해 환원시키고 일반화시켜 설명하려는 것이며, 이것은 그가 후기의 철학에서 끊임없이 비판하고자 하는 설명적 태도에 대한 비판과 맥을 잇는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견지되고 있다. 1940년경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적 태도에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인과적 고찰이 빠지기 쉬운 유혹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이끈다는 점이다 "물론 -- 그것은 그렇게 일어나야만 했다. "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그리고 다른 수많은 방식으로 일어났을 수 있다25).
과학자는 얼마나 이상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 - : "우리는 그것을 아직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 알게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다26)!"
위의 인용에서 보여지듯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적 발견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태도를 문제삼는다. 특히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과학적 태도의 특징이라고 간주했던 인과율에 의한 설명의 가능성과 과학적 발견을 통한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낙관하는 태도에 대해 문제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과율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서 일반적 설명을 시도하는 과학적 태도는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삶 자체가 인과적인 계열을 좇아감으로써 근거지워지고 설명될 수 있다고 보는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원인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를 통해 우리의 삶과 세계가 정형화될 수 있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석될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를 비트겐슈타인은 비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2.3. 앞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반과학주의적 태도가 그의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 이와 같이 전기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견지되어 온 반과학적 태도를 우리는 그가 생전에 출간하기로 결심한 두 번째의 저서인 『철학적 탐구』에서 과학이 지니는 일반성에 대한 추구와 설명의 욕구에 대해 논의하는 데서 보다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철학적 작업이 새로운 이론이나 설명체계를 세우는 과학적 작업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의 고찰들이 과학적 고찰들이어서는 안된다고 한 것은 옳았다. …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이론도 세워서는 안된다. 우리의 고찰 속에는 어떤 가설적인 것도 있어서는 안된다. 모든 설명은 사라지고, 오직 기술만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한다27).
결국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철학이 새로운 이론이나 설명체계를 세움으로써 세계나 삶을 설명하기보다는 기존의 철학과는 다른 형태의 철학적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모든 것을 인과적 계열로 환원시키고 일반화시켜 설명하려는 태도를 과학의 주요한 성격으로 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가 끊임없이 환원될 수 없는 주어진 것 또는 인간 삶의 원본적 국면들에 대한 고집하고 있음을 볼 때,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새로운 하나의 이론을 제시한다는 것은 인간 삶의 본연적 측면에 대한 또다른 하나의 일반화의 작업을 수행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그가 자신의 후기 저작인 『철학적 탐구』에서 행하고 있는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이다. 이는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의 본성을 일반성의 추구와 연관된 이론 내지 설명체계로 파악한 것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3. 비트겐슈타인의 본질주의 비판은 그 자신의 전기이론에서의 의미의 가능근거가 세계와 그림그리는 관계에 있다고 보는 데 대한 비판과 함께 시작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전기철학에서 다루고자 했던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먼저 『논리철학논고』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3.1. 『논리철학논고』에서 다루어지는 많은 부분은 언어의 의미가능성에 대한 논의이다. 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는 프레게와 럿셀의 영향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레게와 럿셀은 우리가 일상언어를 사용하는 데서 언어의 오용이나 왜곡이 일어난다고 보고, 학적 엄밀성을 위해 의미의 확정성(determinateness)과 명제의 양극성(bipolarity)을 기초로 한 이상언어를 구축하고자 한다28). 비록 비트겐슈타인이 이상언어를 구축하려고 시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전기저작의 여러 곳에서 그 역시 명제의 양극성과 의미의 확정성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9). 즉 명제의 의미(sense), 그리고 이름의 뜻(meaning)은 확정적이어야 하며, 의미있는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어야 한다는 것이다30). 그리고 이러한 양극성과 확정성으로부터 그는 언어의 의미가 세계를 그리는 데서 가능하다는 것31)과 그림의 관계는 언어와 세계의 형식적 동일성, 즉 논리적 형식을 공유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고찰을 한다. 따라서 그의 논의에 따르면, 모든 명제는 적어도 사이비명제(pseudo-proposition)가 아니라면 확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언어와 세계의 관계는 언어의 의미론적 단위체인 요소명제가 세계의 존재론적 단위체인 사태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음으로써, 즉 요소명제가 세계의 사태를 그림으로써 가능하다. 결국 언어와 세계는 그림그리는 관계에 있다. 그림그리는 관계가 가능한 것은 그 양자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고, 언어의 논리적 단순체인 이름과 세계의 논리적 단순자인 대상이 대응관계(이름부르는 관계: naming relation)에 있음으로써 그러하다.
3.2.
3 2.1.『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의 단위체인 요소명제는 독립적이며, 이러한 요소명제가 세계를 그리는 것은 언어와 세계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함으로써 가능하고, 요소명제와 명제들간의 관계는 진리함수적이라고 보고 있다32). 그러나 이와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는 1929년 색에 대한 진술을 검토하는 데서 바뀐다. 그는 "논리적 형식에 대한 몇 가지 논의(Some remarks on Logical Form)33)"에서 색상에 대한 진술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전기철학에서 견지되었던 요소명제의 독립성과 선험적인 언어 형식을 포기하게 된다. 이제 그는 좀더 다양한 언어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게임'의 개념을 도입하고 언어를 전기의 세계와의 일대일의 관계가 아닌 언어사용자의 다양한 게임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좀더 구체화된다.
3.2.2.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저작인 『철학적 탐구』의 많은 부분은 언어와 연관된 전기의 입장에 대한 비판34)이며, 특히 언어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단지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전기의 언어관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는 전 서양철학의 기저를 이루는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35).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제시되는 언어 또는 세계의 궁극적 단순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사물들을 명명한다. …" - … 마치 우리가 "사물들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불리는 것이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듯이.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문장들을 가지고서 대단히 다양한 것들을 행한다.… 그것들은 매우 다양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물!
비켜!
아야!
도와주세요!
좋다!
아니!
당신은 아직도 이 낱말들을 '대상들의 이름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가36)?
위의 글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논리철학논고』에서 나타나는 절대적 의미의 세계 및 언어의 궁극적 단순자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름이 항상 그 자체로서가 아닌 명제의존적이라는 전기의 입장은 이제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가능하더라도 모든 언어적 활동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으로 바뀐다. 즉 한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단어인지 문장인지는 그 단어 자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쓰여지는 상황 즉 문맥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상과 일대일의 대응관계에 있는 언어의 궁극적 단순자인 이름 역시 그것이 단순존재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복합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그 말이 사용되는 문맥 즉 상황에 달려있다는 것이다37). 결국 이러한 입장은 전기의 언어이론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단순자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언어와 세계의 궁극적 단순자 사이의 지칭관계(reference relation)를 거부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름과 대상과의 관계를 지칭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언어의 본질적 기능을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언어의 다양성을 간과한 데서 비롯한 편협한 견해라고 비판한다. 그는 언어의 기능을 도구와 게임의 비교를 통해 설명한다38).
어떤 하나의 도구상자에 있는 도구들을 생각해 보라. 거기에는 망치, 집게, 톱, 나사, 아교단지, 아교, 못과 나사들이 있다. - 이들 대상들의 기능이 다양한 것처럼 낱말들의 기능들도 다양하다 (그리고 그 양 경우에 유사함이 있다.)
물론 우리를 혼동시키는 것은 우리가 문서나 인쇄물에서 낱말들을 접하게 될 때, 그것들의 외양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사용은 우리에게 아주 명백하게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철학을 할 때는 특히 그렇다39).
언어 내지 그 구성요소인 단어는 각 상황에서 쓰여지는 도구만큼이나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 알맞게 쓰여지는 것이 그것의 역할이자 의미라는 것이다. 언어는 전기에서처럼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사의 일부로서 인간행위와 밀접히 결부되어 쓰여지며40) 이러한 쓰임은 그 쓰임이 이루어지는 행위체계적 문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데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에 있다고 한다.
'의미'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많은 경우 - 비록 모든 경우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 에 있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사용이다41).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행위를 언어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게임으로 보고, 이에 대한 표현으로서 언어게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42). 언어는 게임과 같이 행위자, 즉 인간이 주체가 되어 어떠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서 수많은 상황 속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43). 언어의 역할 역시 『논리철학논고』에서처럼 단순히 세계를 그리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 적이거나 임의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로서 공적 성격을 지닌다44). 다시 말해 놀이에 규칙이 있듯이, 언어게임에 있어서 언어의 사용 역시 규칙, 즉 문법을 따른다는 것이다45). 그러나 이 문법은 전기철학에서와 달리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며46), 삶의 문맥 속에서 언어사용자에 의해 변경되기도 하고 또한 변경이 가능하다고 한다47). 그리고 이 규칙은 언어 내적인 것만이 아닌 사회적 문화적인 언어 외적인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48).
이러한 언어게임에 대한 논의 중 또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그가 언어게임이라는 행위를 공통되게 가리키는 속성, 즉 그것의 본질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게임이라고 부르는 것들 모두에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언어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로서 이 모든 언어게임에 공통된 것을 언어게임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언어게임들이 공통된 속성 내지 본질이 없으면서도 같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 언어게임들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관계 때문에 언어적 행위(언어게임) 모두를 언어라고 부르게 된다고 한다49). 다시 말해 언어게임이라고 부르는 모든 활동에 공통된 속성이 결국 '언어'라는 말에 대응되는 프레게적인 기호적 정의(Merkmal Definition)에 해당하는 대상이 있어 언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50), 다양한 언어활동 간에 서로 겹치고 엇갈린, 복잡하게 연관된 유사성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51). 일군의 사람들이 가족임을 아는 것이 그들간의 어떤 필연적 요소 때문이 아니라 그들간의 유사성을 통해 가능한 것처럼, (언어)게임 역시 가족유사성을 통해 그것이 언어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52). 따라서 게임이라는 개념이 그 본질 내지 그 본질적 대상이 없기에 그 개념의 정확한 한계가 없고,그 기호적 정의가 없기에 따라서 그 외연성의 견고하고 엄밀한 제한은 없게 된다.
이와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는 모든 가능한 언어가 공통적인 본질적 대상 내지 형식을 가짐으로써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이것은 전기의 언어 관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논리적 계산 내지 분석의 개념의 포기로 이어진다53). 그리고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낱말이 가족유사성과 연관해 언어의 본질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후기철학을 세우는 데 중요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본질주의는 플라톤 이후 프레게와 럿셀에까지 이어져 오는 것으로, 특히 프레게나 럿셀,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서 그것은 언어의 고정적이고 확정적인 기능과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형식의 고정성, 그리고 의미의 가능근거로서의 표현의 지시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러한 언어적 가능근거 내지 지시체로서의 대상은 그들의 견해에서 학의 대상으로 간주됨으로써 그것은 학의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이 본질주의적 태도라고 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주요한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언어의 의미가능성을 보증해주는 것으로서의 본질주의적 언어관, 세계관이며, 이것은 과학주의적 사유양식이 함유하고 있는 대상화이 가능성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3.3. 후기철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수행하는 본질주의에 대한 검토는 전통적인 철학적 논의에 대한 재검토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철학이 존재 일반이나 가치 일반을 대상적으로 다루는 설명체계로 이루어져 있거나, 인간정신(자아를 포함하여)을 근거로 한 학문적 기초를 수립하려는 체계로 이루어져 왔다고 볼 경우,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이러한 철학적 작업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살피는 작업인 동시에, 이와 같이 기존의 철학에서 문제로 등장했던 것들이 더 이상 문제로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려 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지적된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는 독립적인 논의로 보기보다는 그의 전철학적 작업과 연관시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자신이 『철학적 탐구』에 기록하고 있듯이, 그는 자신의 『철학적 탐구』가 『논리철학논고』와의 연관 하에서 읽혀지기를 원했다54).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이 전기철학과 다른 맥락에 서있다고 보는 것은 언어의 의미가능성에 국한해서 볼 때만 그렇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부문에 대해서는 그렇게 간단히 논의될 수 있지 않다. 오히려 철학에 대한 그의 견해는 전ㆍ후기에 그다지 큰 차이를 드러나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철학적 오류가 '말할 수 없는 것', 즉 언어적 대상이 아닌 것을 마치 '말할 수 있는 것', 즉 일종의 과학적 대상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말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철학적 탐구』에서 보여지는 철학에 대한 견해 역시 전기의 통찰을 확충 심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기존의 전통적 철학이 수정과 같은 순수성에 대한 편견55)과 문법적 환상에 사로 잡혀버림으로써56) 우리의 언어형식에 대한 오해로부터57) 발생한다고 한다. 또한 그가 『논리철학논고』에서 자신의 저작이 딛고 올라서게끔 해줄 사다리의 역할을 할 것58)이라는 점과 『철학적 탐구』에서 자신의 작업이 설명의 체계가 아닌 기술에 불과하며, 자신의 저술이 언어에 대한 조망을 제공할 것59)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결국 그의 철학적 입장과 태도의 일관성을 보여준다.
4.
4.1. 앞서 보았듯이, 전ㆍ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 내지 그 오류는 역시 전기와 마찬가지로 언어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특히 이러한 오류의 중요한 부분을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적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의 모든 세계관은 소위 자연법칙이라는 것이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라는 망상에 근거해 있다60).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면전에서 과학의 방법을 보며, 과학이 하는 방식으로 묻고 대답하려는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을 받는다. 이러한 성향은 형이상학의 진정한 원천이며, 철학자를 완전한 암흑 속으로 이끌어 간다61).
앞서 보았듯이 과학의 중요한 요소로 우리는 설명과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법칙을 생각할 수 있으며, 이것은 구체적 사실을 소수의 일반적 법칙으로의 환원시켜 보려는, 다시 말해 일반성의 추구와 연관된다62). 특히 비트겐슈타인이 비판하는 것 중의 하나는 과학적 고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과율에 기초한 자연법칙에 대한 과신이며, 이러한 방식의 고찰을 통해 세계와 세계 속의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 삶을 획일화하고 정형화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인과적 고찰과 일반화의 경향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과적 고찰이 빠지기 쉬운 유혹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이끈다는 점이다. "물론 -- 그것은 그렇게 일어나야만 했다. "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그리고 다른 수많은 방식으로 일어났을 수 있다63).
…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사유에는 어떤 하나의 사유도식이 밑에 놓여 있는 듯이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더 원시적인 어떤 하나의 사유방식으로부터 우리의 사유방식에로 번역하고 있듯이64).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전ㆍ후기 철학에서 공통적으로 과학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일반성에 대한 추구와 인과적 정당화, 환원적 정형화라는 성격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그의 전ㆍ후기 철학은 별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전기의 철학에서 고려하고 있는 일반성은 언어의 본성에 대한 오해로부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데서, 다시 말해 자연과학의 문제가 아닌 것을 자연과학의 문제로서 간주하여 마치 자연과학의 대상처럼 다루는 데서 발생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후기의 철학 역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을 하나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경향으로부터 비롯되는 데서 그 환원적 성격을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65).
우리는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적 정신, 즉 일반화의 추구와 환원주의적 성향, 정당화의 욕구 등을 비판하는 데서 그가 환원될 수 없는 또는 환원되어서는 안될 무엇인가를 전제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아래의 글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이 다룰 수 없는 것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말해서 오래된 견해 - 가령 (위대한) 서양철학자들의 견해 - 에 따르면 두 가지 종류의 문제가 과학적인 정신 속에 존재한다. 본질적인, 위대한, 보편적인 문제들과 비본질적인, 말하자면 우연적인 문제들. 그에 반해 우리의 견해는, 과학적인 정신 속에는 위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66).
예컨대 다음과 같이 믿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시대는 인류종말의 시작이며, 위대한 진보의 이념은 진리의 궁극적 인식이라는 관념과 마찬가지로 기만이며, 과학적 인식에는 훌륭하거나 바람직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인류는 함정에 빠진다고67).
앞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실의 문제, 즉 과학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의 문제는, 그리고 그에 대한 이론의 영역은 자신에게 별 의미가 없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음을 보았다68). 특히 위의 인용에서 그가 과학적 정신이 하나의 시대정신, 즉 진보의 이념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과학이 추구하는 것 중의 하나는 인과적 정당화의 추구이다. 과학적 설명 내지 이론이 담지하고 있는 요소 중의 하나는 예측 및 조작의 가능성과 연관되어 있음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과학적 정신 속에 담지되어 있는 것 중에 목적 내지 결과 지향적 행위 양식을 들 수 있고, 이는 그가 비판하고 있는 진보의 이념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진보의 이념, 목적 지향적 행위가 가지는 성격은 과학 정신의 다른 면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2. 앞 절에서 보았듯이,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 따르면 과학적 정신 속에는 위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없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에게서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적 문제들은 내가 흥미를 느끼도록 만들 수는 있으나, 실제로 매혹시킬 수는 결코 없다. 오직 개념적이고 미학적인 문제들만이 나를 매혹시킬 수 있다. 근본적으로 과학적 문제들의 해결은 나에게는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저 다른 문제들은 그렇지 않다69).
위의 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과학이 삶의 진정한 문제들을 빠뜨리고 표층적인 문제만을 다룬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과학적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 즉 미학적이고 개념적70) 문제였으며, 이것은 그의 철학에서 계속해서 견지되고 있는 태도이다. 특히 미학의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에게 문자그대로의 미학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삶의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 볼 때71), 그에게 중요한 '저 다른 문제'는 삶의 문제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비트겐슈타인이 심층적인 문제,즉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 어떤가에 대해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필자의 견해로는 그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는 바로 삶의 문제, 즉 윤리의 문제이다. 「윤리에 대한 강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리학은 가치있는 것, 또는 진실로 중요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또는 다른 말로 해서 삶의 의미를, 또는 삶을 살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을 또는 삶의 바른 길을 탐구하는 것이다72).
우리는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졌던 문제가 '윤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문제는 결코 과학의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삶의 문제는 과학적으로, 즉 표층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삶의 문제들은 표면에서는 해결될 수 없고, 오직 심층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표면적 차원에서는 그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73).
윤리, 즉 삶의 문제를 과학의 영역에 속한 일종의 대상으로 다루는 것은, 그에 따르면 오도된 양식의 삶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과학적 사고방식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그것에 대해 답하는 데서 설명을 구하려 하는 데서 비롯한다는 것이다74). 다시 말해 우리 시대의 질병으로까지 여겨지는 과학적 사유 방식은 오도된 삶의 양식으로부터, 우리 삶에 대한 올바른 조망을 얻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4.3.
4.3.1. 그러면 그의 생각한 진정한 삶은 어떤 것인가? 그는 자신의 초기 저작인 『노트북, 1914-1916』에서 이에 대한 몇가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한 삶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 삶으로서, 그는 행복한 삶을 세계와 일치하는 삶(사는 것 이외의 어떤 목적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삶)75), 현재 속에 사는 삶76), 두려움이나 희망이 없는 삶77), 세계의 쾌적함을 단념하는 삶78), 세계를 미학적으로 관조하는 삶79)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위에서 말하는 진정한 삶의 방식에서 특징적인 것이 행위와 그 결과를 벗어나 행위 그 자체를 위해 수행되는 삶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말대로 올바른 논리적 관점에 섰을 때, 즉 영원의 상하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수행되는 삶이다80).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윤리는 선악의 담지자로서의 의지하는 주체와 연관되어 있다81)1. 그가 말하는 의지는 세계에 대한 태도82)로서, 이러한 의지의 변화는 전혀 다른 세계를 초래할83)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그가 말하는 선한 삶이란 일상적인 과학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1929년 발표한 "윤리에 대한 강연"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이 강연에서 그는 '세계를 기적으로 보는 방식'과 '세계를 과학적으로 보는 방식'을 구분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보는 것이란 세계의 사실을 설명적 대상으로 보는 것, 즉 인과적 계열이란 관점을 가지고 보는 것을 의미하며, 기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인과적 계열을 벗어나 본다는 것을 뜻한다84).
결국 그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방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기존의 과학적인 사고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조망일 것이다. 그는 1938년에 행했던 『미학에 대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J. Jeans가 쓴 책의) 『신비한 우주』라는 제목은 과학과 과학자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세를 내포하고 있다. …
우리의 과제는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나의 과제 역시 그러하다. 한 걸음 나아가 나의 과제는 사람들이 그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사고상식을 변화시키는 문제이다85).
앞에서의 인용문과 마찬가지로 위의 인용에서 우리는 그의 철학함의 목표를 헤아려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철학에서 추구한 것은 새로운 삶의, 사유의 방식이다. 이것은 그의 철학에서 계속해서 견지되어 온 것으로서 과학적인 사유의 양식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가 추구하는 방식의 사유양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이 직접적으로 답을 제시하는 글은 찾기 쉽지 않지만, 우리는 그가 암시적으로나마 보여주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이 인생에서 발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그 문제성이 있는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다. … 삶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당신의 삶이 삶의 형식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그 형식에 들어맞게 되면, 그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라진다86).
삶이 견디기 어렵게 될 때, 우리는 상황의 변혁을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인 변혁, 즉 자기 태도의 변혁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결심하기는 어렵다. 내가 믿기에 기독교는 여러 가지 말 가운데서도 모든 훌륭한 가르침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을 특별히 하고 있다. 우리는 삶을 바꾸어야 한다. (또는 삶의 방향을.) … 지혜는 열정이 없다. 이레 반해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믿음은 열정이다87).
위의 글에서 우리는 그가 삶의 새로운 양식이 외적 변화가 아닌 내적인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듯이 삶의 형식에 맞는 삶, 상황의 변화가 아닌 태도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론이나 설명체계를 통해, 다시 말해 과학적인 사유의 양식으로는 불가능한 새로운 것이다.
4.3.2. 우리는 앞서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의 특성으로서 정당화에 대한 추구를 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럴 경우 새로운 삶의 양식이란 정당화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고 정당화 불가능한 것에 대해 우리가 전적으로 새로운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 과학적 대상이 될 수 없는 세계의 근거로서의 논리와 윤리, 그리고 후기철학에서의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즉 주어진 것으로서의 '삶의 형식'88)"에 대한 정당화 불가능성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가 말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의 논리 또는 신비로운 것, 삶의 형식에 정당화 작업이란 과학적 사유방식에 사로잡혀 외적인 정당화의 추구와 연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당화 작업에 대해 반박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삶은 내가 많은 것들을 (더이상의 요구없이) 만족하여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다89).
우리가 "왜"라는 물음을 억제할 때, 비로소 우리는 중요한 사실들은 종종 알아채게 된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리의 탐구들 속에서 우리를 어떤 하나의 대답에로 이르게 한다90).
그러나 근거지움, 즉 증거의 정당화는 끝에 이르게 된다: - 그 끝은 그러나 우리에게 어떤 명제들이 직접 참이라고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보는 일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언어놀이의 근저에 놓여있는 우리의 행동이다91).
4.3.3. 계속해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이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사유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것은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기존의 과학적 삶의 방식과 다른 방식이라고 말하는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저작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의 방식을 진정한 삶의 방식으로 고려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앞서 보았듯이 전기의 철학에서 그는 말하는 '선한 사람의 삶은 현재 속에 사는 삶, 세계의 쾌적함을 단념하는 삶, 세계와 일치하는 삶(사는 것 이외의 어떤 목적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삶) 등이다. 현재 속에 산다는 것은 미래적 관점으로부터 삶을 수행하지 않는 삶, 다시 말해 삶 이외의 어떤 외재적 목적(결과에 따른 보상이나 처벌 - 어떤 형태의 것이든)에 의해 지배되는 삶이 아닌 삶 그 자체를 위해 수행하는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사는 것 이외의 어떤 목적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세계의 쾌적함을 단념할 수 있는 삶이란 것도 행위가 어떤 미래의 사실에 변화를 끼쳐 자신에게 돌아올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삶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 역시 삶 자체의 정당화가 삶 그 자체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그가 말하는 영원의 상하에서, 올바른 논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삶일 것이다92).
또다른 하나의 단서는 그가 원시적인 삶이나 종교적인 삶에 대해 말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논리철학논고』에서 그는 세계나 삶에 대한 옛날 사람들과 현대인의 태도를 비교하면서, 옛날 사람들이 오늘날의 사람들과 달리 신과 운명을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노트북, 1912-1914』과 『윤리에 대한 강연』에서 과학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에 대조적으로 세계를 기적으로 보는 것93)을 말하는 것과의 연관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노트북, 1912-1914』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특히 "모든 사물들이 있는 상태가 신이다"94)라는 식의 표현을 살펴볼 때, 그가 세계나 세계 속의 사실들을 신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과학적인 사유 방식과는 다른 사유 양식으로 고려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또다른 단초를 우리는 "종교적 믿음에 대한 강연"95)이나 "프레이져 『황금가지』에 대한 글"96)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레이져는 『황금가지』에서 원시인들의 제례행위 및 주술행위에 대해 일종의 진화론적 기준에 맞추어,모든 제례행위와 주술 행위가 어떤 목적을 의도하는 것으로 보고, 그 행위의 원시성과 야만성을 분석한다97). 그에 따르면 주술은 몇 가지 측면에서 과학을 선도했다고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정통적인 과학의 노선을 벗어난 사생아라고 한다98).
이런 식으로 프레이져가 주술과 종교를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인류의 주술과 종교적 관점에 대한 프레이져의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러한 견해가 틀린 것으로 보이도록 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계속해서 신을 언급할 때 그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만일 그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전혀 다른 견해를 표현하는 불교의 성자 - 아니면 다른 누구든 -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들중 어느 누구도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론을 제시하려고 할 경우가 아닌 한.
... 프레이져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럴 듯하게 한 것뿐이다.
한 행위 - 예를 들어 사제의 왕을 죽이는 행위 - 를 설명하고자 하는 생각이 바로 내가 보기에는 잘못된 것이다99).
역사적 설명,
그리고 설명은 여기에서 결코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100).
여기에서도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전혀 다른 삶의 형태, 즉 종교적 형태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그것에 대해 과학적으로, 즉 설명과 이론의 대상으로 고려하는 프레이져의 태도를 편협하고 조야한 것으로 보고 있다101). 특히 프레이져가 이들의 주술적, 종교적 행위가 어떤 결과를 꾀하고자 하는 행위라고 보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의 행위가 어떤 것도 꾀하지 않는 행위라고 주장한다102). 그에 따르면, 제례적 행위의 특징은 오히려 행위의 결과적 측면이 아니라 행위 자체의 측면에 강조점이 두어져 있는 것이다. 그는 프레이져가 유사성의 원리라는 연합의 원리를 잘못 사용하여 도달한 것의 한 예로 드는 인형을 태우는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운 사람의 인형을 만들어 태우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에 입을 맞추는 것. 이것은 분명히 그것이 그 그림이 제시하는 대상에 어떤 특정한 결과를 일으킬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만족을 목적으로 하며, 그것을 얻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어떤 것도 목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식으로 행위를 하고 만족감을 얻는다103).
앞의 논의에 따를 경우 프레이져는 주술과 제례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수행하는 특별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앞의 논의에서 보여지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제례의식에서의 행위에서는 행위 자체와 결과가 분리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제례 의식의 독특함은 프레이져가 말하는 것과 달리, 어떤 외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제례행위의 독특함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104). 아울러 제례적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를 이해하는 데 예측이나 조작은 중요한 점이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다105).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 다시 말해 외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적으로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에 목적적 성격에 깃들어 있는 행위로서의 제례행위이다. 이것은 실용성이나 효용에 기준을 맞추어 행위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파악이다. 이러한 논의를 살펴볼 때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프레이져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수단-목적으로, 욕구-만족의 범주로 파악하는 것에 대해 전혀 다른 행위양태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06). 특히 그는 인간을 일종의 의례적 동물(ceremonial animal)로까지 간주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107).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은 진보하는 반면, 주술은 그 자체 내에 어떤 발전의 경향도 담고 있지 않다108)고 말하는 데서, 우리는 그가 과학이 어떤 목적 지향적인 행위인 반면 주술, 혹은 그가 말하는 종교적 행위는 특정결과를 꾀하는 행위가 아닌,자기목적적 행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109).
이러한 관점은 「종교적 믿음에 대한 강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강연에서 그는 종교적 문제에 있어 사람들간의 견해 차이는 비교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입장에 속하는 것110)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종교적 삶에서 보여지는 삶의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의 지침으로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고 해보자. 그가 어떤 일을 할 때든, 최후의 심판을 그는 염두에 둘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가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지 여부를 알 수 있겠는가?
그에게 믿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가 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신이 흔들릴 수 없는 신념이라고 할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추론이나 일상적인 근거에 대해 호소함으로써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생활에서 규제함에 의해 보여질 것이다111).
앞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이 종교적 믿음이나 이로부터 비롯되는 행위의 독특성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종교적 믿음에 대해 근거의 제시, 즉 일종의 정당화가 허용되지 않고, 또한 그와 무관한 것이라고 본다112). 즉 종교에서는 가설이나 귀납적 확률, 또는 귀납적 증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합리성(reasonability)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13).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전ㆍ후기철학의 형이상학적 입장이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가 자신의 전ㆍ후기철학에서 일관되게 종교적인 삶의 양식을 과학적 삶의 양식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했다고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히 그가 말하는 종교적 삶은 반과학주의적인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가 종교적 삶의 양식에서 말하는 행동양태나 전기의 철학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는 선한 사람의 삶에서 보여지는 사유 내지 행위의 양식은 자기목적적이고 자기수행적이라는 측면에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다음의 글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종교적인 삶의 양식과 연관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처한 경우는 다음과 비슷한 거라고 말하였다: 자기가 남에게 관찰당하고 있다는 생각없이 아주 단순한 그 어떤 일상적인 행위들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을 본다는 것보다 더 주목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시인이 무대 위에서 상연 또는 발표되도록 할 수 있을 그 어떤 것보다도 삶 자체가 더 놀랍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을 매일매일 보고 있고, 삶은 우리에게 조금도 감명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그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 엥겔만이 그의 글들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놀라운 것으로 발견할 때, 그는 그의 삶을 신의 예술 작품으로서 본다. 그리고 이러한 것으로서, 각각의 삶과 모든 것은 분명 고찰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보기에는, 세계를 영원의 상하에서 본다는 데는 예술가의 작업 외에도 또다른 것이 있다. 내가 믿기로는 그것은 사유의 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세계 위로 날아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있게 한다 -- 세계를 위에서, 날면서, 바라보면서114).
위의 글이 비록 그의 전기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그가 말하는 새로운 삶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삶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기에서 그가 윤리적 가치의 근거를 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에 둔다는 점과 세계를 기적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점과 연관해 과학주의적인 태도와는 전혀 다른 삶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이상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작업과 그 철학함의 관심과 목적을 살펴보았다. 앞서 본 것처럼 과학주의적 사유 방식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며, 이러한 태도로부터 그가 고려하고 있는 삶의 방식은 기존의 서양문화를 지배하던 경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가 말하듯이 그의 철학함은 그가 속한 문화권에서는 좀처럼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진단하기에 진보와 효율성의 이념에 사로잡힌 서구유럽의 문명으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삶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시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말대로 진정으로 중요한 우리의 삶의 문제는 설명과 이론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될 '저 다른 문제'였으며, 이것은 과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의 양식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양식의 삶을 필자는 종교적인 삶의 양식과 연관해서 그 단초를 찾아보았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철학의 문제란 세계나 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이론이나 설명, 또는 새로운 사실이나 법칙의 발견하는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였다. 결국 그의 철학함의 주요한 목적은 우리에게 현재를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과학적 삶의 양식과 다른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양식을 추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대의 병은 인간의 삶의 양식의 변경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으며, 철학적 문제들의 병이 치유될 수 있는 것도 개인이 발명한 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변화된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115).
철학의 어려움은 과학적인 지적 어려움이 아니라, 태도의 변화에 있다. 극복되어야 할 것은 의지의 어려움(the resistance)이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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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L.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by G. E. M. Anscombe (Oxford: Basil Blackwell, 1967, 3rd ed.), preface 참조. Philosophical Investigations는 이하 PI로 약칭함.
2) L.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논리철학논고』, 박영식 · 최세만 역 (서울 : 박영사, 1985).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는 이하 TLP로 약칭 함.
3) L. Wittgenstein, Philosophical Remarks, ed. by R. Rhees and trans, by R. Hargreaves and R. White(Chicago: The Univ. Chicago Pr., 1975), preface: L.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문화와 가치』, 이영철 옮김 (서울 : 천지, 1990), 24쪽. Philosophical Remarks는 이하 PR로 Culture and Value는 이하 CV로 약기 함.
4) CV. p. 133.
5) TLP. introduction by B. Russell, p. 301.
6) M. Schlick, 'Preface to Friedrich Waismann ; Logik, Sprache, Philosophie, Philosophical Papers, ed. by H. L. Mulder et al. (Dordrecht: P. Reidel Pu. Com., 1979), vol II, p. 136.
7) TLP. 5.5563.
8) TLP. 6.54.
9) G. H. von Wright, op. cit., p. 15.
이러한 우려는 몇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는 자신의 전기철학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논리철학논고』를 논리적으로 완전한 이상언어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이 의도하는 바가 경험주의의 전통에 선 의미론 즉 그림으로서의 의미에 기초를 둔 검증이론을 제시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셋째로, 이러한 의미론을 기초로 자신이 소박한 의미에서의 반형이상학적ㆍ반윤리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 등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였던 폰 리히트는 다음과 같이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쓴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자기 자신의 영향을 강력히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향 속에서 대체로 왜곡과 오해, 또는 매혹적인 용어들을 공허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철학에서 언어에 대한 관심을 중요하게 만든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에 속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이런 관심을 가지게끔 된 사람들 중 오직 소수만이 그가 그런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동기를 공유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시대로부터 너무나 두드러지게 거리를 둔 한가지 측면은 그를 따른다고 공언한 사람들조차도 실제로는 그와 동일한 정신적 노력에 종사하고 있지 않다는 그의 느낌이다." (G. H. von Wright, "Wittgenstein in Relation to his Times", in Wittgenstein and his Time (Oxford : Blackwell 1982), pp.108 f.
10) J. Joergensen, The Development of Logical Empiricism, 『논리경험주의: 그 시작과 발전과정』, 한상기 옮김(서울: 서광사, 1994), 15쪽 이하 참조.
11) L. Wittgenstein, Notebooks 1914-1916 (N. Y. :Harper & Row), 25. 5. 15. TLP. 6.52 참조.
Notebooks 1914-1916은 이하 NB으로 약기함.
12) TLP. 6.4312.
13) TLP. 4.11. 여기에서의 과학은 세계와의 그림그리는 관계에 있는 명제들로 이루어진 체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4) F. Waismann (conversation recorded) Wittgenstein and Vienna Circle (Oxford : Basil Blackwell, 1979), p. 118.
Wittgenstein and Vienna Circle 는 이하 WWC로 약기함.
15) WWK. p. 116.
16) TLP. 4.113, 4.116 참조.
17) TLP. 6.371, NB. 6. 5. 16. 참조.
18) TLP. 5.1361, NB. 15. 10. 16.(인과적 연관은 하등의 연관도 아니다. ) 참조.
19) TLP. 6.341, 6.342 참조.
20) TLP. 6.343, 6.3431, 6.3432.
21) TLP. 6.372.
22) TLP. 6.53, 4.003 참조.
23) L. Wittgenstein, The Blue and Brown Books (London: Harper & Row,1958), p.18.
The Blue and Brown Books는 이하 BB로 약기함.
24) BB. pp. 17 ff.
25) CV. p. 81.
26) CV. p. 88.
27) PI. # 109.
28) G. Frege, "Introduction to Logic", Posthumous Writing. pp. 191-195, "Function and Concept", Translations from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Gottlob Frege, p.32; B. Russell,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 pp. 179, 194, 201, Principia Mathematica, pp.135, 194, etc. 프레게와 럿셀의 Begriffsschrift와 Principia Mathematica의 구도 자체가 이러한 명제의미의 양극성과 뜻의 확정성을 기초로 한 이상언어를 구축하려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29) TLP. preface, 3.23, 3.24, NB. 17. 6. 15. 18. 6. 15, pp. 93-97 참조.
30) 여기에서의 '의미'는 독일어의 'Sinn'을 번역한 말이며, '뜻'은 'Bedeutung'을 번역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뜻이란 대상과의 직접적인 지시적(referential) 연관성을 의미하며, 의미는 명제에 연관된 것으로, 이것은 프레게의 Sinn과 Bedeutung을 나름대로 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고,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프레게의 문맥원리(context principle)를 수용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1) TLP. 2.0211, 2.0212: R. M. White, "Can whether one proposition makes sense depend on the truth of another?(Tractatus 2.0211-2)", Understanding Wittgenstein (London : Macmillan Pr.,1974), pp.14 ff.
32) TLP. 2.18, 4.04 참조
33) L. Wittgenstein, "Some remarks on Logical Form" in Philosophical Occasions 1912-151, ed. by J. C. Kalgge & A. Nordmann (Cambridge: Hackett Pu. Co., 1993) pp. 33 ff.
34) 비트겐슈타인의 전후기 사상의 전환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마다 다소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전기이론에 핵심적인 이름과 대상의 관계와 그 단순성, 의미확정성, 그리고 진리함수론에 대한 포기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35) PI. ## 46, 67, 69 참조.
36) PI. # 27.
37) PI. # 46-49.
38) 여기에서의 도구나 게임이라는 용어는 단지 언어의 해명을 위한 모델로서 도입하는 것이며, 결코 어떤 본질적인 속성을 지칭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대해 핀치는 『논고』에서의 그림으로서의 언어는 도구상자로서의 언어로 대치되고, 또한 절대적으로 단순한 논리적 그림의 관념은 단순한 언어게임이라는 모델의 관념으로 대치되었다고 본다. H. L. Finch, Wittgenstein - The Later Philosophy (N.J. : Humanities Pr., 1977), 21쪽 참조.
39) PI. # 11, # 12 참조.
40) PI. # 25.
41) PI. # # 23, 43.
42) 할렛은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서 언어는 일상적인 게임에서의 규칙과 마찬가지로 확정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율적이고(autonomous),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추론의 결과물도 아니며, 삶의 형식과의 연관성, 규칙성, 변경가능성(variability)을 들고 있다. 이와같은 규칙성은 정당화가 불가능하며, 언어의 가능근거라는 점에서는 전기의 논리적 형식과 유사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Hallet, 같은 책, 68-73쪽 참조.
43) PI. # 23 참조.
44) PI. ## 242이하.
45) PI. # # 198, 201, 202 참조.
46) PI. # 68.
47) PI. ## 83-84.
48) PI. # # 7, 198, 201-205 참조.
49) PI. # 65 참조.
50) PI. # 49.
51) PI. # 66.
52) PI. # 67.
53) P. M. S. Hacker. Insight and Illusion (N. Y : Oxford Univ. pr., 1986), reversed ed. p. 147 참조.
54) PI. preface.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철학적 탐구』가 『논리철학논고』와 같이 출간되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N. Malcome, Wittgenstein: A Minor 참조.
55) PI. # 108.
56) PI. # 79.
57) PI. # 111.
58) TLP. 6.54, preface 참조.
59) PI. # 109 preface참조.
60) TLP. 6.371, NB. 6. 5. 16. 참조.
61) BB. p. 18.
62) BB. p. 17 참조.
63) CV. p. 81
64) PI. # 597.
65) PI. ## 593, 598 참조
66) L.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ed. by G. H. von Wright, 『문화와 가치』, 이영철 옮김 (서울: 천지, 1990), 32쪽.
67) CV. p. 147.
68) NB. 25. 5. 15, TLP 6.52, 6.4312, WWK. pp. 116, 118 참조.
69) CV. p. 157.
70) 여기에서의 '개념적'이라는 표현 역시 그가 다른 곳에서 '경험적' 인 것과 대조적으로 '개념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고려할 때, 비과학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미루어 볼 수 있다.
71) TLP. 6.421, NB. 21, 10. 17, CV pp. 21-22 참조.
72) L. Wittgenstein, 'A Lecture on Ethics',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74, No. 1,1965, p.5. 'A Lecture of Ethics'는 이하 LE로 약칭함.
73) CV. p. 147.
74) A. Kenny, Legacy of Wittgenstein (Oxford: Basil Blackwell 1984) p. 43.
75) NB. 6. 7. 16.
76) NB. 8. 7. 16.
77) NB. 14. 7. 16.
78) NB. 7. 10. 16.
79) NB. 7. 10. 16.
80) NB. 7. 10. 16, TLP. 4.1213, 6.54 참조.
81) NB. 2. 8. 16.
82) NB. 4. 11, 16.
83) TLP. 6.43.
84) LE. pp. 8ff.
85) L. Wittgenstein, "Lectures on Aesthetics", in Lectures & Conversations on Aesthetics, Psychology and Religious Belief, ed. by C. Barrett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 p. 27-28. ( ) 안은 필자의 삽입임.
86) CV. p. 62.
87) CV. p. 110.
88) PI. p. 226.
89) L. Wittgenstein, On Certainty,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옮김(서울 : 서광사, 1997), # 344.
90) PI. # 471.
91) OC. # 204.
92) NB. 7. 10. 16.
93) NB. 20. 10. 16. TLP. 6.44, 6.45, LE. pp. 9 f 참조.
94) NB. 1. 8. 16.
95) L. Wittgenstein, "Lectures on Religious Belief", Lectures & Conversations on Aesthetics, Psychology and Religious Belief, ed. by C. Barrett (Univ. of California Pr.). "Lectures on Religious Belief'는 이하 LRB로 약기함.
96) L. Wittgenstein, "Remarks on Frazer's Golden Bough", in Philosophical Occasions, 1912-1951, ed. by J. C. Klagge & A. Nordmann. "Remarks on Frazer's Golden Bough"는 이하 RFGB로 약기함.
97) J. G. Frazer, The Golden Bough. A Study in Magic and Religion, 『황금가지』, 장병길 역 (서울: 삼성출판사, 1993).
98) 『황금가지 Ⅰ』, 89쪽.
99) RFGB, p. 119.
100) RFGB. p. 121.
101) RFGB. p. 125.
102) S. J. Tambiah, Magic, science, religion, and the scope of rationality (Cambridge : Cambridge Univ. Pr., 1991), pp. 55-63 참조.
103) RFGB. p. 123.
104) P. Johnston, Wittgenstein and Moral Philosophy (London. Routledge,1989). p.28.
105) 같은 책, p. 31.
106) 같은 책, p. 29.
107) RFGB. p. 129.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거의 인간이 의례(儀禮: ceremonial)적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108) RFGB. p. 141.
109) '자기목적적 행위'라는 표현은 최세만 교수의 표현을 빌어온 것이다. 최세만, 「비트겐슈타인의 과학비판」, 『언어철학연구 I - 비트겐슈타인과 언어』 (서울: 현암사, 1995). 162쪽 참조.
110) LRB. p.53. 종교적 믿음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이 논의하고 있는 것이 신현적(神顯約) 의미의 신인지 아니면 성현적(聖顯的) 의미의 신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실제로 그가 신을 믿었는지에 대해 간단히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필자의 견해로는 비트겐슈타인이 인격적 신을 중시한 것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에게서 신의 개념은 그것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짙은 것으로 보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의 종교에 대한 논의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드루리와의 논의에서 자신이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종교적인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밝히는 점을 볼 때, 설득력이 더한다고 생각한다[M.O 'C. Drury, 'Some Notes on Conversations', Ludwig Wittgenstein : Personal Recollections (Oxford: Basil Blackwell, 1981), p.94]. 또한 아래의 글에서도 그러한 입장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상태가 신이다. (NB. 1. 8. 16.)
신의 본질은 그 존재를 보증한다. - 즉 엄밀히 말하면, 여기에서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CV. 161)
111) LRB. p. 54.
112) LRB. p. 56.
113) LRB. p. 58.
114) CV. p. 22.
115) L. Wittgenstein, Remarks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ed. by G. H. von Wright (Cambridge: MIT pr., 1967), p. 132
116) L. Wittgenstein, 'Big Typescript' in Philosophical Occasion, 1912-1951, ed. by J. C. Klagge & A. Nordmann. #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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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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