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체계와 의미.

[ㅍ] 지식의 중층구조

온울에 2008. 5. 6. 22:34

목 차

Ⅰ.서론
Ⅱ.철학적 경험과 실제적 경험
Ⅲ.기법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
Ⅳ.결론: 지식의 중층구조와 그 교육적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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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교육과학연구소 
학술지명 교육과학연구Journal of Educational Studies 
권 31 
호 3 
출판일 2000. 12. 31.  




지식의 중층구조(重層構造):
(오우크쇼트의 교육이론을 중심으로)


차미란
서울대학교 강사
2-193-0003-02

국문요약
철학적 경험과 실제적 경험의 대비로 요약될 수 있는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주장, 그리고 기법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의 대비에 근거를 둔 그이 정치철학적 주장은 각각 지식의 성격과 지식의 획득이라는 상이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과 정치철학은 세계 또는 마음의 중층구조,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속하는 사실의 세계, 한 개인이 실지로 소유하고 있는 경험적 마음의 이면에 또는 그 '위'에 그것의 기준과 원천인 구체적 총체로서의 세계 또는 마음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경험과 지식의 논리적 근거로서의 '實在'와 마음과 활동의 묵시적 기반으로서의 '實際'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설명은 바로 그와 같은 중층구조의 아이디어에 입각한 것이며, 그 양자는 결국 지식의 중층구조를 무시간적 차원과 시작적 차원, 또는 고정된 시점과 시간 계열이라는 상이한 측면에서 드러내어 준다. 오우크쇼트의 관점에서 보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론적 지식'은 실재의 추구와 관련하여 특별한 의의를 가지며, 학교교육과 관련하여 '실제적 지식'이 가지는 의의는 오로지 지식의 획득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은 교육내용으로서의 지식의 성격과 지식의 내면화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영문요약
The Twofold Structure of Knowledge in Oakeshott′s Theory
The difference between philosophical experience and practical experience and the contrast between practical knowledge and technical knowledge are the kernels of Oakeshott′s theory of philosophy and philosophy respectively. Oakeshott′s metaphysical and epistemological explanations of philosophy and his opinions on the significance of practical knowledge in human activities give answers to two distinct questions ? ′What is the nature of knowledge?′ and ′How is it possible to acquire knowledge?′. However, the answers to those two questions given by Oakeshott have a common point in accepting the idea of the twofold structure of ′mind′ or ′world′consisting of the unmanifested standard on the upper side and the phenomenal manifestations on the lower side. Oakeshott′s theories of philosophy and politics can be regarded as representing two different aspects of that twofold sequence. The contrast of the so called ′theoretical knowledge′ and ′practical knowledge′ can be rightly understood only in the light of the idea of the twofold structure of knowledge in this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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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서론
오우크쇼트의 사상은 세계와 마음을 구체적으로,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일관된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의 궁극적 의의는 교육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데에 있다. 오우크쇼트의 사상을 이루는 모든 중요한 개념과 이론적 설명은 다른 어떤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 이전에 교육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결국, 총체로서의 삶 그 자체를 여실하게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노력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오우크쇼트의 사상을 이루는 두 축, 즉 지식의 근거와 성격에 관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주장, 그리고 인간 활동의 원천과 목적에 관한 정치철학적 주장은 교육이론의 관점에 의하여 해석될 때 비로서 올바르게 이해된다고 말할 수 있다1).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과 정치철학을 일관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계와 마음을 모두 ‘重層構造’로 파악한다는 데에 있다. 경험의 궁극적 근거로서의 ‘實在’와 활동의 묵시적 기반으로서의 ‘實際’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철학적 설명은 한 마디로 말하여, 세계와 마음은 표현 이전의 기준으로서의 ‘基準’(실재와 실제)과 표현 이후의 ‘樣相’(학문과 전통)이라는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오우크쇼트의 교육이론에서 교육은 표현 이후의 양상을 통하여 표현 이전의 기준을 실현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오우크쇼트의 철학에서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 그 자체와 그것의 추상으로서의 경험의 양상 사이의 구분, 그리고 구체적 활동 또는 구체적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실제적 지식과 그것의 추상으로서의 기법적 지식 사이의 구분은 바로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방안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하에서 고찰하게 될 바와 같이, 구체적 경험과 그 양상의 차이와 관련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주장, 그리고 기법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의 대비에 근거를 둔 그의 정치철학적 주장은 각각 ‘지식의 성격’과 ‘지식의 획득’이라는 상이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나타내고 있다. 오우크쇼트의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 사이의 단절, 즉 그의 형이상학과 정치철학에서 구체적 총체의 의미가 전연 상이하게 규정되고, 이론적 지식의 의의에 관한 양자의 설명이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하다. 그러나 그 각각의 대답은 세계 또는 마음의 중층구조,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속하는 사실의 세계, 한 개인이 실지로 소유하고 있는 경험적 마음의 이면에 또는 그 ‘위’에 그것의 기준과 원천인 구체적 총체로서의 세계 또는 마음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공통되며, 그 양자는 결국 지식의 중층구조를 상이한 측면에서 드러내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하의 2절에서는 경험과 그 양상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 이론에서 지식의 성격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하는 것을 ‘철학적 경험’과 ‘실제적 경험’의 대비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3절에서는 오우크쇼트의 정치철학에서 합리주의의 정체와 그 오류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논거로 사용되고 있는 ‘기법적(技法的) 지식’과 ‘실제적(實際的) 지식’의 대비는 어떤 것이며, 그 대비에 의하여 드러나는 지식의 획득과 마음의 형성에 관한 올바른 설명은 무엇인가를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지식의 중층구조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이론이 가지는 의의를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의 성격과 그 획득 과정과 관련하여 모색하여 본다.

Ⅱ.철학적 경험과 실제적 경험
오우크쇼트의 「經驗과 그 樣相」이 다루는 표면상의 주제는 철학의 이념이다. 그러나 철학의 이념에 관한 그 책의 논의는 인간의 경험이 의미를 가지기 위한 궁극적 근거는 무엇이며, 그 근거에 비추어 파악되는 지식의 성격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대비, 즉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 그 자체와 그것의 추상으로서의 경험의 양상 사이의 대비는 이 문제에 대한 오우크쇼트의 해명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그 책에서 오우크쇼트가 말하는 ‘경험’은 이른바 외부 세계 또는 객관적 실재와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주관적 경험이나 마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이면서 또한 마음이기도 한 것, 즉 세계와 마음을 포괄하는 구체적 총체를 뜻하며, 과학적 경험, 역사적 경험 등은 그와 같은 총체로서의 경험을 특정한 개념체계에 의하여 드러내는 추상적 경험 또는 ‘양상화된’ 경험으로 규정된다. 오우크쇼트의 용어로 ‘經驗’의 樣相’은 학교의 교과를 이루는 여러 분야의 지식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총체로서의 경험과 그 양상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설명은 교과로서의 지식의 성격에 관한 이론적 설명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과학, 역사, 실제 등의 여러 경험의 양상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철학적 분석과 비판은 그와 같은 양상으로 추상되기 이전의 구체적 총체를 그려내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그 분석에 의하여 파악되는 총체는 한 고정된 시점에서 파악되는 총체이다. 오우크쇼트가 말하는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 또는 그것과 동의어로서의 ‘實在’는 모든 개별적 사물과 현상을 남김없이 담고 있는 총체로서의 세계, 인간이 가지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총체로서의 마음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시간 계열에 지배되는 역사적 과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경험과 그 양상」에서의 형이상학적 설명이 구체적 총제의 ‘無時間的 次元’을 드러낸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이다. 총체로서의 ‘實在’와 그것의 양상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적 주장은 지식의 궁극적 근거에 관한 인식론적 설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론적 지식 또는 학문적 지식은 실재의 추구와 관련하여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점은 오우크쇼트가 말하는 ‘철학적 경험’과 ‘실제적 경험’의 대비에 의하여 가장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

오우크쇼트의 「경험과 그 양상」에서 논의되는 ‘철학’은 통상적 의미의 철학, 즉 과학이나 역사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독립된 학문 분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그것과는 구분되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철학을 지칭한다. 그 책의 정의에 의하면, 철학은 ‘전제하는 가정도 유보하는 단서도 없는, 일체의 억류나 양상화도 없는 경험’(Oakeshott, 1933:2), 또는 ‘아무런 단서도 억류도 없는, 부수적이고 부분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의한 방해와 혼란을 당하지 않는, 철두철미 비판적인 경험’(Oakeshott, 1933: 3)이다. 이와는 달리, 역사적 경험, 과학적 경험, 실제적 경험, 또는 간단히 역사, 과학, 실제 등은 특정한 전제와 가정에 의하여 억류된 경험, 즉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이 특정한 양상을 드러난 ‘경험의 양상’이다. 각각의 양상은 오로지 그것에만 해당되는 특정한 가정과 개념에 의하여 서로 구분되며, 양상으로 드러나는 경험은 경험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정과 개념에 의하여 추상된 또는 ‘樣相化된’ 경험을 드러낸다. 다시 말하여, 그와 같은 경험의 양상은 구체적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추상 또는 ‘초상적 경험’이다.

경험이 그 자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특정한 가정과 개념에 의하여 포착되는 것만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경험이 그 자체의 성격을 완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특정한 지점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역사, 과학, 실제 등을 지칭하는 경험의 ‘양상’, 경험의 ‘추상’, 경험의 ‘억류’ 등의 표현은 모두,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 그 자체와의 대비, 그리고 그 대비에 의하여 드러나는 불 완전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아무런 단서도 억류도 없는, 부수적이고 부분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의한 방해와 혼란을 당하지 않는 경험’, 즉 경험의 양상에 수반되는 제약과 불완전성에서 벗어나 있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과학, 역사, 실제 등의 경험의 양상과 구분된다. 그렇다면 과연 철학의 어떤 점이 철학으로 하여금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이 가지는 특징을 갖추도록 해 주는가?

아무런 단서도 억류도 없다든가, 부수적이고 부분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의한 방해와 혼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이 가지는 특징이라면, 이와는 달리, 철학은 ‘철두철미 비판적인 경험’이라는 규정은 어째서 철학이 그와 같은 특징을 가지게 되는가에 관한 대답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여, 철학적 경험이라는 것은 ‘철두철미한 비판’에 의하여 ‘아무런 단서도 억류도 없는, 부수적이고 부분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의한 방해와 혼란을 당하지 않게 된 경험’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철학이 역사, 과학 등의 경험의 양상과 다른 점은 경험의 양상이 아닌 구체적 경험 그 자체라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경험의 양상이면서 또한 양상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조영태, 1998: 109). 요컨대, 만약 ‘철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적 활동이 역사, 고학 등과는 다리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은 ‘철두철미한 비판’이라는 철학의 정신에 충실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철학이 하는 철두철미한 비판이라는 것은 경험의 양상에 논리적 가정으로 들어 있는 경험의 개념적 준거를 추론해내고 그 추론된 준거에 비추어 경험의 양상이 가지는 제약과 불 완전성을 드러내는 일, 바로 그것이다. 이 일은 곧 경험이 스스로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는 점에서 철학이 하는 비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의식적 비판, 즉 ‘자기비판’이다(Oakeshott, 1993: 82).

「경험과 그 양상」에서 경험의 양상으로 제시되어 있는 역사, 과학 등이 학교교육의 내용을 이루는 학문적 지식에 해당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책에서의 ‘경험의 양상’이 교육내용으로서의 여러 학문적 교과와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가 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경험과 그 양상」에서 경험의 양상의 대표적 사례로 제시되어 있는 것 중에서 ‘실제적 경험’ 또는 간단히 ‘실제’라는 용어로 불리는 것은 역사, 과학 등과는 달리 학문적 교과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피터즈와 허스트가 7가지 ‘지식의 형식’(또는 ‘지식과 경험의 제양식’)에 포함시키고 있는 ‘도덕적 판단’과 ‘종교적 주장’은 오우크쇼트가 말하는 경험의 양상 중에서 ‘실제적 경험’에 상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경우에, ‘실제적 경험’이라는 양상은 지식 또는 학문과 전연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분화된 개념구조’의 한 표현으로서 지식 또는 학문의 한 분야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오우크쇼트가 말하는 ‘실제적 경험’은 과학, 역사 등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가정과 법주에 의하여 세계를 파악하는 하나의 ‘관념의 세계’라는 점에서 분화된 개념구조의 표현 또는 지식의 양식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 역사 등과 마찬가지로 학문 또는 ‘이론적 지식’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는 보기 어렵다.

「경험과 그 양상」에 의하면, 실제적 경험은 구체적 총체로서의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의지의 상하’(sub specie voluntatis)에서 파악된 세계를 드러내는 추상적 세계 또는 추상적 경험으로서, 모종의 당위적 가치나 목적에 입각하여 사태의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인간 행위는 이 실제적 경험의 범주에 해당한다. (Oakeshott, 1993: 258). 그러나 실제적 경험은 비록 추상적 경험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그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삶의 주된 분위기’((Oakeshott, 1993: 248)를 이룬다. 오우크쇼트가 말하는 ‘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이와 같은 실제적 경험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실제로부터의 탈피(또는 ‘자유’)에 있다. 그리하여 철학의 목적이 추상적 경험의 제약에서 해방된 구체적 경험의 추구에 있다면, 이를 위해서는 다른 어떤 추상적 경험보다도 바로 실제적 경험 또는 실제적 삶이라는 추상적 경험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Oakeshott, 1993: 355).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 역사 등 일체의 학문은 실제적 삶의 영위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성격을 가진다. 이 점에서 실제적 경험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철학의 정신은 과학, 역사 등 모든 학문이 학문으로서 갖추어야 할 성격을 규정하며, 이론적 지식 또는 학문적 지식이 실재의 추구와 관련하여 가지는 특별한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론적 지식이 추구하는 실재는 어떤 성격의 것인가?

물론,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 또는 ‘實在’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역사, 과학 등의 경험의 양상의 경우와는 달리, ‘그것의 성격은 이런 이런 것이다’라는 식으로 적극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 그 규정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은 부정되거나 사상되며 이것은 곧 구체적 총체로서의 실재를 부분적으로,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 그 자체는 언어적 설명 또는 개념적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2). 이것이 바로 구체적 총체로서의 실재는 그 양상과 수준 또는 차원을 달리 한다는 말이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의미이다. 그리하여 실재와 그 양상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발언은 그 표면에 나타나 있는 언어적 설명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의미에 비추어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지적해야 할 것은 「경험과 그 양상」에서 오우크쇼트가 말하는 구체적 총체로서의 實在는 경험의 양상과 별도로 존재하는 실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양상 이면에 붙박여 있는 논리적 기준이라는 점이다. 그의 형이상학에서 實在의 개념은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과는 무관한 초월적 세계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논리적 가정이 무엇인가를 밝혀 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이 점에서 구체적 경험으로서의 ‘철학’은 과학, 역사 등과 병렬적 위치에서 하나의 독립된 지식의 분야로 교수되거나 학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여러 교과의 공부 이면에 가정되어 있는 소극적 기준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이런 뜻에서의 교육의 기준, 즉 지식과 경험의 논리적 기준으로서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교과를 이루는 여러 분야의 학문적 지식이 가지는 가치, 그런 지식을 탐구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일로서의 교육이 가지는 의미를 인정하지 않거나, 설령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와 가치의 근거를 엉뚱한데서 찾는다는 것을 뜻한다.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설명이 지식의 성격과 가치를 가장 궁극적인 수준에서 정당화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이다.

위의 고찰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 이론은 총체로서의 실재와 그 양상이라는 두 개의상이한 수준 사이의 차이와 관련에 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설명의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하여 ‘重層構造’의 아이디어로 요약될 수 있다. 세계와 마음, 또는 그 양자를 포괄하는 것으로서의 ‘경험’은 사실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념상으로는 구분되는 두 개의 층(重層)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 중층구조의 위층(‘實在’)은 그 아래층(‘樣相’)이 따라야 할 기준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중층구조의 아이디어는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 이론이 가지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서, 중층구조의 위층을 이루는 실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따라야 할 논리적 기준, 즉 세계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고 경험을 획득하는 우리의 교육적 노력이 의미를 가지기 위한 궁극적 근거를 나타낸다.

Ⅲ.기법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
오우크쇼트의 정치철학은 합리주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라는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우크쇼트의 정치철학 이론을 대표하는 「정치에서의 합리주의」에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도덕, 예술, 교육 등에서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그의 비판적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지식과 마음의 진정한 원천과 기반은 엄밀한 기법이나 보편적 이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법이나 이념으로 추상되기 이전의 활동 그 자체, 즉 구체적 총체로서의 ‘實際’에 있기 때문이다. 오우크쇼트의 정치철학 이론에서 ‘실제적 지식’의 개념은 바로 이런 뜻에서의 ‘실제’를 지식의 획득과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여 준다. 여기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지식은 고정된 한 시점에서 파악되는 지식이 아니라 시간 계열을 따라 획득되고 표현되는 지식이며, 인간의 지식과 마음과 활동의 궁극적 기반으로서의 실제는 ‘시간적 차원’에서 파악되는 총체를 나타낸다.

오우크쇼트에 의하면 근대 합리주의의 기저에는 지식에 관한 특정한 이론이 가정되어 있으며, 그 이론은 이른바 ‘기법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의 구분에 의하여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Oakeshott, 1962: 7-13). 기법적 지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규칙, 원리, 지침, 격률 등 ‘명제’의 형태로 엄밀하게 명문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데에 있으며, 이 점에서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책에 적어 넣을 수 있는 지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자동차 운전의 기법, 요리의 기법, 과학적 탐구의 기법 등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는 달리, 실제적 지식은 엄밀한 명문화가 불가능한 지식, 오직 사용되는 과정을 통하여 그 존재가 드러나는 지식,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실제’를 통하여 전형적으로 표현되는 지식을 가리킨다. 그 지식이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것은 명문화된 규칙이나 원리의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을 수행하는 관례적 또는 전통적 방식의 획득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 점에서 그것은 ‘전통적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오우크쇼트에 의하면, 합리주의에 가정되어 있는 지식의 이론은 그 두 가지 지식 중에서 실제적 지식은 지식이 아니며, 기법적 지식이 아닌 지식은 없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기법적 지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이 지식의 이론은 기법적 지식이 나타내는 표면상의 확실성과 객관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기법적 지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엄밀한 명문화가 가능하다는 것에 있으며, 바로 이점으로 말미암아 기법적 지식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지식, 객관적 증거에 의하여 입증 가능한 엄밀한 지식, 그 자체로서 독자적 지위를 갖춘 완전무결한 지식이라는 인상을 준다. 반면에, 실제적 지식의 특징은 그런 종류의 엄밀한 명문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으며, 바로 이 점 때문에 실제적 지식은 엄밀하지 못한 지식,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지식, 객관적 증거보다는 주관적 의견이나 취향에 좌우되는 불완전한 지식이라는 인상을 준다. 지식의 기준을 확실성과 객관성에 두는 한, 실제적 지식은 확실한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개연적 가능성에 관한 ‘의견’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지식의 확실성을 최상의 원리로 삼는 관점에서 볼 때 실제적 지식은 결코 ‘지식’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것으로서, 오히려 ‘이성’에 입각한 객관적 판단과 확실한 행동에 방해가 될 뿐이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합리주의자의 절대적 확신은 기법적 지식의 확실성과 객관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베이콘과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분명히 시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합리주의적 지식의 이론에서 기법적 지식은 확실성과 객관성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지식으로 간주되며,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의 획득은 전적으로 기법적 지식에 의존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마음이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은, 순전한 무지의 상태, 즉 텅 빈 백지와 같은 마음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확실하고 완전무결한 지식을 채워 넣는 과정이며, 기법적 지식(예컨대 과학적 활동에서 ‘탐구의 기법’에 해당하는 것)은 그 지식 획득의 과정에서 마음이 의식적으로 따라야 할 유일한 안내자라는 것이다. 요컨대, 그 지식의 이론에 의하면 기법적 지식은 확실성과 객관성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지식으로서, 일체의 올바른 판단과 합리적 행동을 이끌어내는 진정한 원천이다. 합리주의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지식과 마음과 활동을 지배하는 ‘이성’의 권위는 ‘기법(技法)’의 권위, 즉 인간의 마음으로 하여금 과거의 습관이나 전통에 의하여 주어지는 불확실한 의견에 방해받지 않고 철두철미 확실성을 따르도록 하는 기법적 지식의 권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우크쇼트가 보기에 합리주의적 지식의 이론은 보편적 이념이나 원리, 일반적 규칙과 지침 등의 기법적 지식은 온전한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한 부분 또는 한 측면에 불과하다는 점을 도외시한다. 지식의 획득 과정을 전적으로 기법적 지식에 의존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 또한, 기법적 지식은 결코 구체적 인간 활동에서 작용하는 지식의 완전한 원천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 예컨대 과학적 탐구의 수행과 같은 구체적 인간 활동이 의식적으로 체계화된 탐구기법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며, 심지여 그러한 기법이 제시되어 있는 경우에도 그것에 관한 지식이 탐구의 사태에서 지식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그 기법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그것을 의식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그 기법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그것을 의식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그 기법을 ‘묵시적으로, 자연적으로,인위적인 노력없이’따르기 때문이다(Oakeshott, 1962: 12). 기법적 지식을 묵시적으로, 자연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지식, 그것이 바로 실제적 지식이다. 기법적 지식이 구체적 인간 활동에서 지식으로 발휘되는 것은 그것을 묵시적으로, 자연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기반으로서의 실제적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기법적 지식을 그 자체로서 독자적 지위를 갖춘 완전무결한 지식, 확실성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지식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인간의 마음과 활동의 원천으로 삼는 것은 ‘그 지식이 발휘되는 데에 필요한 기초, 그 지식을 성립시키는 전제를 잊어버리는 오류’(Oakeshott, 1962: 12)를 저지른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경기의 규칙과 같이, 그 자체로서 완전무결한 기법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식이 마음에 심어지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들어있는 지식이 자양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며, 어떤 지식이든 텅 빈 백지와 같은 마음에 심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기법적 지식을 획득하는 것은, 다른 모든 지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순전한 무지를 새로운 지식으로 채워넣는 일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보다 나은 것으로 가다듬는 일이다. 기법적 지식의 획득뿐만 아니라, 기법적 지식이 활동의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이미 실제적 지식이라는 묵시적 기반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며, 실제적 지식과 결합되지 않는 기법적 지식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책에 적혀 있는 죽은 지식’에 불과하다.

근대 합리주의의 가장 큰 매력은 그것이 지식과 교육의 의미를 실제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도구적 사고방식’을 이른바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미화하였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합리주의가 저지른 가장 심각한 오류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도구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사물의 성격과 사태의 의미를 ‘수단-목적 관계’에 입각하여 파악하는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지식과 교육의 의미를 ‘유용성’이나 ‘실용성’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곧 지식이나 교육의 가치를 실제적 목적의 달성에서 찾는다는 것, 또는 지식이나 교육을 실제적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과연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인 지식과 교육에 관한 도구적 사고방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근대 합리주의에서 ‘이성’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이며, 합리주의가 지식과 마음의 원천으로 떠받드는 ‘기법적 지식’의 정확한 성격은 무엇인지를 알아봄으로써 확인될 수 있다.

기법적 지식의 특징과 매력은 단순히 ‘엄밀한 명문화가 가능한 지식’이라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명문화가 ‘수단-목적 관계’의 관점에 입각하여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이 점에서 기법적 지식의 성격을 오로지 ‘명제의 형태로 명문화하는 것이 가능한 지식’ 또는 ‘책에 적어 넣을 수 있는 지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技法’이라는 말 자체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기법적 지식에서 관심은 모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따라야 할 절차나 규칙, 지침 등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그 관심에 부합되는 것만이 책의 내용으로 명문화될 뿐, 그 관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도외시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학 교과서에 적혀 있는 기하학 원리의 경우, 그것은 이론적 지식의 한 표현으로서, 명제의 형태로 명문화되어 있고 책에 적혀 있는 지식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것이 곧 ‘기법적 지식’에 해당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볼 때, ‘기법적 지식’이 추상적 지식인 이유는 단지 그것이 명제의 형태로 추상화된 지식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지식을 실제적 적용 가능성 또는 유용성이라는 지극히 피상적인 관점에서 추상해낸 추상적 지식이라는 데에 있다. 그것은 세계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이론적 지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기법적 지식의 관점에서 이론적 지식의 성격과 가치는 오로지 활동의 목적이나 수단에 관한 처방, 즉 실제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파악될 뿐이다. 다시 말하여, 기법적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은 오로지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동의 절차나 지침을 처방해 주는가의 관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될 뿐, 그 내용이 세계에 관한 어떤 이론적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예컨대 수학 교과서에 적혀 있는 기하학 원리를, 그것의 실제적 유용성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일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기법적 지식도 ‘지식’인 만큼 거기에도 세계의 모습에 관한 모종의 이해가 들어 있지만, 그 이해에 의하여 파악되는 세계는 ‘실제적 유용성’이라는 지극히 편파적인 관점에 의하여 추상된 세계이며, 그런 지식은 그것을 아무리 많이 획득하고 열심히 추구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관점과 태도를 갖추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결국, ‘기법적 지식’의 핵심적 의미는 바로 수단-목적 관계에 있으며, 기법적 지식을 지식의 표준으로 삼는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지식의 의미를 수단-목적 관계에 의하여 파악할 때에 비로소 성립한다. 베이콘과 데카르트의 방법론으로 대표되는 합리주의적 지식이론에서 탐구의 기법을 적용하는 데에 필요한 유일의 능력으로 간주되는 ‘이성’의 능력이라는 것 또한 그 핵심은 ‘수단-목적 관계’에 있다. 오우크쇼트에 의하면, 근대 합리주의에서 이른바 ‘순수한 이성’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그 실상에 있어서는 ‘도구적 이성’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 도구적 이성이라는 것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수단이 되는 것을 찾아내는 일종의 계산 능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 합리주의에 대한 오우크쇼트의 비판은 정치를 비롯한 실제적 활동의 분야에서의 폐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그 비판이 가지는 결코 실제적 활동의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오우크쇼트의 정치철학은 인간의 마음과 지식과 활동을 구체적으로 또 총체적으로 드러내어 준다는 데에 그 가장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근대 합리주의의 성격과 결함이 기법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의 구분에 의하여 드러난다면 합리주의와 대비되는 올바른 관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 또한 그 구분에 의하여 드러난다. 다시 말하여, 기법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의 구분과 그 관련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설명은 구체적 인간 활동의 맥락에서 그 활동의 기반이 되는 것, 즉 ‘인간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을 올바르게 파악함으로써 인간의 지식과 마음과 활동을 구체적으로 또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그 진정한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이런 뜻에서의 지식은 고정된 시점에서 파악되는 지식이 아니라 시간 계열을 따라 일어나는 특정한 활동의 맥락 속에서 표현되고 획득되는 지식을 가리킨다는 점이다3). 인간의 지식과 마음과 활동의 궁극적 기반으로서의 실제는 ‘시간적 차원’에서 파악되는 총체를 나타내며, ‘실제적 지식’의 개념은 바로 이런 뜻에서의 ‘실제’를 지식의 획득과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여 준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기법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은 동일한 평면 또는 동일한 수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상이한 평면 또는 상이한 수준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구체적 활동 속에서 그 두 가지 지식은 병렬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표면과 이면’ 또는 ‘표층과 심층’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기법적 지식’이라는 것이 명제, 지침, 원리 등의 형태로 활동의 표면 또는 표층에 드러나 있는 지식에 해당한다면, ‘실제적 지식은 그것의 이면 도는 심층에서 활동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지식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인간 활동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지식을 구체적으로,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층에 드러나 있는 지식과 심층에 감추어져 있는 지식의 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실제적 지식은 구체적 활동의 사태에서 기법적 지식이 지식으로 발휘되기 위한 기초 또는 원천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중요성을 가진다. 그러나 실제적 지식은 기법적 지식과는 달리 표층에 드러나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것의 존재와 의의가 도외시될 가능성이 있다. 근대 합리주의 는 바로 그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난 경우이다.

이와 같이 ‘실제적 지식’은 활동의 심층에서 그 원천으로 작용하는 지식, 구체적 활동의 사태에서 ‘기법적 지식’이 발휘되도록 하는 마음의 묵시적 기반이 된다면, 이런 뜻에서의 ‘실제적 지식’은 곧 행위자의 몸과 마음에 녹아들어 있어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그런 지식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의 실제적 지식은 지식을 잘 배운 상태를 뜻하는 용어로서의 지식의 ‘내면화’라든가 ‘體得’의 상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인간 활동의 어떤 분야에 속하는 어떤 내용의 지식이든 그것을 잘 배운 상태, 즉 몸과 마음에 내면화되고 체득된 지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잇다. 다시 말하여, 기법적 지식과 대비되는 실제적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이 지시하는 경험적 사례의 수준에서는 반드시 특정한 내용을 가진 지식, 특정한 인간활동의 전통에 관한 지식을 가리키지만, ‘실제적 지식’이라는 개념 그 자체는 지식의 특정한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의 지식이든 그것을 전수하고 획득하는 올바른 방식과 그것을 온전하게 획득한 상태를 지칭한다. 이 점에서 ‘실제적 지식’이라는 개념 그 자체는 지식의 특정한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의 지식이든 그것을 전수하고 획득하는 올바른 방식과 그것을 온전하게 획득한 상태를 지칭한다. 이 점에서 ‘실제적 지식’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지식의 획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적 지식’은 문자에 의한 표현과 기계적 암기에 의해서는 획득될 수 없으며, 오로지 그것을 끊임없이 실행하고 있는 사람과의 계속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적 지식을 획득하는 방식이 나타내는 가시적 특징을 기술한 것이기는 해도, 그런 방식을 통하여 실제적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 즉 지식의 내면화 문제에 과한 근본적 설명은 될 수 없다. 실제적 지식은 기법적 지식과 달리 언어나 문자로 ‘표현되기 이전’의 지식을 가리킨다는 것은 이 문제를 해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표현 이전’ 수준에서의 인간 활동, 또는 ‘활동의 형식’은 아무런 내용도 형체도 가지고 있지 않은 , 막연한 가능성 또는 에너지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는 인간 활동의 여러 상이한 양식 중에서 어떤 양식에 속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해당되지 않는다. 마음의 가장 심층부에 있는 ‘실제적 지식’이라는 것은 특정한 인간 활동의 양식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바로 이 ‘활동의 형식’에 응축되어 있는 지식으로서, 이 심층의 ‘실제적 지식’에서 ‘실제’라는 것은 인간 활동의 한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활동의 형식’, 즉 일체의 구분과 차이가 적용되지 않는 구체적 총체로서의 활동 그 자체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적 지식이 구체적 활동의 맥락에서 활동의 ‘원천’으로 작용한다는 오우크쇼트의 주장은, 그 궁극적인 수준에서는, 이와 같이 가장 근원적인 심층에 있는 실제적 지식과 구체적 총체로서의 실제의 의미에 비추어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표현 이전의 구체적 총체로서의 실제 또는 ‘활동의 형식’은 그 자체로서는 경험이나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즉, 인간 활동의 궁극적 원천이요, 지식과 마음의 묵시적, 심층적 기반으로서의 ‘실제’는 아무런 내용도 형태도 없는 무차별적 총체인 만큼, 그것에 비추어 행위를 돌아본다던가 그것을 행위의 적극적 지표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우크쇼트가 올바른 행위의 원천 또는 기준으로서 전통의 의의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전통적 행위방식은 구체적 총체로서의 실제 그 자체는 아닌 만큼, 거기에는 모순과 불 완전성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전통을 따른다고 하여 무오류의 완벽한 행동, 완전무결한 올바른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통’이라는 경험적 대응물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활동 그 자체를 수행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인간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 또한 전통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전통은 우리가 올바른 삶을 추구하려면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기반이다. 다만, 여기서 전통을 삶의 원천이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할 때 ‘기준’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통이라는 것은 비록 ‘실제’ 그 자체에 비하면 가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것 역시 ‘실제’와 마찬가지로 명시적 규범이나 지침의 형태로 명문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의 의미는 결코 표면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 이론이 마음과 세계의 기준으로서의 실재와 그 양상을 중층구조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오우크쇼트의 정치철학 이론 또한 그 핵심은 지식의 획득과 마음의 형성을 지식의 표층과 심층이라는 두 개의 층(重層) 사이의 차이와 관련에 비추어 설명한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지식의 두 층이라는 것은 시간 계열을 따라 일어나는 구체적 활동의 사태에서 각각 지식의 표층과 심층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지식 또는 마음의 이 중층구조에서 표층과 심층은 사실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개념상으로는 구분되며, 그 두 개의 층은 각각 중층의 아래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식의 표층은 언어나 문자에 의한 표현과 전달이 가능하지만, 지시의 심층은 그 자체로서는 언어적 표현이나 전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다만 구체적 활동의 사태에서 지식의 표현과 획득을 가능하게 하는 묵시적 기반으로 작용한다. 즉, 지식과 마음의 가장 깊은 심층부(위층)를 이루는 ‘實際’는 특정한 지식이나 활동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총체적 능력으로서,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과 발언과 행동의 궁극적 원천이 되며, 지식의 표층(아래층)에 가장 두드러져 나타나는 기법이나 이념, 원리 등은 인간 활동의 전통적 방식을 명시적 형태로 표현하는 추상적 지식이라고 발할 수 있다.

Ⅳ.결론: 지식의 중층구조와 그 교육적 함의
이상의 고찰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 이론과 정치철학 이론은 구체적 총체의 의미를 상이한 관점에서 파악한다. 양자 사이에 심각한 단절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오우크쇼트의 형이상학이 구체적 총체의 ‘無時間的 次元’을 드러내어 준다면, 그의 정치철학은 구체적 총체의 ‘시간적 차원’을 드러내는 데에 관심이 있으며, ‘實在’와 ‘實際’는 총체의 그 두 가지 상이한 차원을 지칭한다. 구체적 경험과 그 양상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인식론적 주장, 그리고 기법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에 관한 정치철학적 주장이 각각 고정된 시점에서 파악되는 ‘지식의 성격’과 시간 계열에 따라 일어나는 ‘지식의 획득’이라는 상이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이 점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잇다.

그러나 오우크쇼트의 인식론과 정치철학은 지식(세계 또는 마음)의 중층구조를 핵심적인 아이디어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며, 다만 그것을 각각 무시간적 차원과 시간적 차원, 도는 고정된 시점과 시간 계열이라는 상이한 측면에서 드러낼 뿐이다. 지식의 성격과 획득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이론이 교육의 의미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또는 ‘총체적인’ 이론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이론에 의하면, 교육은 지식을 통한 實在의 추구를 목적으로 삼으며, 그와 같은 의미에서의 지식의 획득은 實際에 기반을 둘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 점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의 성격과 그 의의를 이해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시사를 준다. 특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주장 가운데, 오늘날 학교교육의 문제는 교과의 주된 내용이 ‘이론적 지식'으로 되어 잇다는 데에 있으며 그 대안은 ‘실제적 지식’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견해는 오우크쇼트의 이론에 비추어 면밀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우선, 위의 견해의 주된 의도는 이론적 지식이 실재의 추구와 관련하여 가지는 의의를 부정하고 오로지 ‘실제적 유용성’이 있는 지식만이 교육적 가치를 가진다는 점을 주장하는 데에 있는지 모른다. 이 주장은 오우크쇼트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결코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위의 그 견해는 학교의 교육이 책에 적혀 있는 명문화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마음과 활동의 원천으로서의 실제적 지식의 획득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오우크쇼트의 관점에서 보면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실제적 지식이 가지는 가치는 바로 이 후자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우크쇼트의 이론에서 실제적 지식의 의의를 강조하는 것은 책에 적혀 있는 이론적 지식의 가치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단 목적 관계와 실제적 유용성을 핵심으로 삼는 기법적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며, 활동과 마음의 심층부에 있는 실제적 지식이 지식의 획득과 관련하여 가지는 의의를 인정한다고 하여 이론적 지식이 실재의 추구와 관련하여 가지는 의의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제적 지식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논의는 다른 어떤 것에 관한 설명이기 이전에 바로 이론적 지식의 전달과 획득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그 설명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학습자의 바깥에 잇는 교과가 학습자의 몸과 내면화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결국, 오우크쇼트의 이론에서 지식의 중층구조는 이론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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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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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오우크쇼트의 사상을 이와 같은 교육이론의 관점에 비추어 해석한 연구로는 硏究, 오우크쇼트의 敎育理諭 拙稿”(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000) 참조.
2) 이 점에서 구체적 총체로서의 경험은 불교에서 말하는 ‘眞如’(참으로 그러한 것)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大乘起信論」에 의하면, ‘참으로 그러한 것’이라는 말조차도 무엇인가 양상을 기술하는 것이며 ‘참으로 그러한 것’에는 그와 같이 기술될 수 있는 양상이 없다. 그리하여 ‘참으로 그러한 것’이라는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말로써 말을 없애려는 것’과 같다(言眞如者 亦無有相 謂言說之極 因言遺言). 馬鳴, 李ㅁ雨(譯註), 「大乘起信諭」(경서원, 1991), pp. 73-74.
3) 지식의 성격을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로서의 ‘認識論’은 고정된 시점에서 파악되는 지식의 성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관심을 둔다. 그러나 과연 고정된 시점에서 지식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이 지식의 성격을 규정하는 유일 타당한 관점인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최근에 철학적 인식론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敎育 認識論’의 관점에 의하면, 인식론적 문제는 지식의 전달과 획득이 일어나는 구체적인 맥락인 교육의 사태에서 비로소 그 구체적 의미를 가지게 되며, 지식의 성격에 관한 설명이 인식론적 설명으로서 타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지식이 획득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교육의 사태에 비추어 자세히 규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우크쇼트의 ‘實際的 知識’의 개념에 관한 이하의 논의 는 그 개념이 교육인식론의 관점과 면밀하게 부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육인식론에 관한 자세한 해설과 본격적 고찰을 柳漢九, 「敎育 認識論 序 說」(교육과정철학 총서 2, 교육과학사, 19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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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차미란
서울대학교 교육학과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