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자명 새한철학회
학술지명 철학논총CHULHAK-RONCHONG
ISSN 1226-9379
권 23
호 1
출판일 2001. 1. 31.
對話形式과 秘義
(-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對話篇 解釋과 關聯하여 -)
Thomas Alexander Szlez?k1)
튀징엔대 교수
1-066-0101-16
국문요약
이 論文은 파이드로스편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난 哲學의 文字化와 口頭化에 관한 플라톤의 입장을 論究하고 있다. 이 논문의 방법론적인 입장은 무엇보다도 古典 言語學의 기본 원칙인 ‘플라톤을 플라톤에 의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데 있다.
文字 批判의 중심 개념으로써 boethein to(i) logo(i)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기반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 개념과 관련하여 빈번하게 인용된 G. Vlastos(Gnomon 35, 1963, 653f.)의 글은 현대적인 개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결국 플라톤의 대화편이 드러내고 있는 문자 비판의 핵심적인 주장을 우리들에게 이해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boethein to(i) logo(i)에 관한 플라톤 대화편 안의 例證들을 발견한다(법률편 890d-891e, 국가론 362d, 368bc). 이러한 예들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로고스를 돕는다”하는 것이 동일한 知的 水準에 관한 동일한 내용들의 반복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Boethein to logo라는 개념은 더 원리적인 개념들과 더 상승된 원리들을 통해 arche(원리)에 기반을 두는 최종적인 논증을 향해 논증의 수준을 의도적으로 高場시키는 데 그 본질을 두고 있는 플라톤 대화편의 구조적인 원리를 표현하는 변증술적 기술이다.
우리는, 진정한 哲學者가 자신의 문자화된 로고스를 자신의 말을 통해 도움을 주게 될 때, 자신의 문자화된 글을 자신의 더 가치 있는 口頭的인 도움과 비교하여(파이드로스 278cd)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것으로 증명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가 언제나 자신의 글을 도울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문자화된 로고스로부터 口頭的인 도움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을 항상 간직하고자 한다. 결국, 플라톤적 철학자는 자신이 발견했던 모든 것들을 문자로 남기려 하지 않는다.
영문요약
Dialogform und Esoterik(- Zur Deutung des platonischen Dialogs ‘Phaidros’ -)
This article offers a new interpretation of Plato's criticism of writing on the last pages of the “Phaedrus”. The method used is the classical philological methods: the task is to explain “Plato out of Plato” (following the principle of Alexandrian philology “Homeron ex Homerou”). In the first place, the central concept of the criticism of writing, i.e, “boethein to(i) logo(i)” (to help one's logos), needs an interpretation based on the dialogues. For it can be shown that the much-quoted interpretation of G. Vlastos (Gnomon 35, 1963, 653f.) is based on modern conceptions only and that it therefore fails to make the central tenets of the criticism of writing understandable.
Fortunately, there is no lack in Plato of instances of “boethein to(i) logo(i)”. Some of them are briefly analysed: Laws 890 d - 891 e, Republic 362 d, 368 bc. These sample cases show that “helping the logos” in Plato never means something like “repeating the same things on the same intellectual level, until they become somewhat clearer”. Boethein to(i) logo(i) always means the dialogical technique of going beyond what was said in the first argument. To help one's logos is to argue for the same thesis by means of more fundamental concepts and more advanced theories. Now we can understand why Plato wrote that the true philosopher, when helping his written logos by his own word (legon autos), will demonstrate the inferior value of his writing as compared to his more valubale oral help (cf. “ta gegrammena phaula apodeixai” vs. “echein timiotera”, Phdr. 278 cd). As the philosopher will always be able to help his writing, he will always keep something out of his written logos, which he will use only when oral help is needed. The Platonic philosopher thus will not write down all the truths he has found.
한글키워드
비의(Esoterik), 티미오테라(Timitera), 쉰그라마(Syngramma), Boethein to logo
영문키워드
Dialogform, Esoterik, Syngramma, M?ndlichkeit, Schriftlichkeit, Timiotera, Boethein to(i) log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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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 안에서 [ ]의 내용은 譯者가 譯者의 이해를 돕기 위해 註釋한 것이며, [1]에서 [7]까지의 단락 구분도 역시 譯者에 의한 것임.
[1]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idros)라는 대화편은 이해하기 어려운 전체 著作들 가운데 가장 難解한 대화편들 중의 하나로 일적이 간주되어 왔다. 우리가 언어학적 해석뿐만 아니라 철학적 해석을 통해 언제나 반복해서 취급해야만 했던 파이드로스 대화편의 著作 시기와 대화편 내용의 一貫性, 그리고 이 대화편 안에서 언급된 다른 대화편들과의 연관된 서술들을 포함한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문제점들은 파이드로스 대화편 안에 전개되어 있는 形而上學的 心理學과의 합일점 같은 아주 근본적인 측면들과 관련을 맺어왔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그토록 중요하고 난해한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파이드로스 대화편이 내포하고 있는 시사적 내용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지 못했다; 플라톤 철학의 연구에 있어서 이 대화편의 해석은 원리적인 중요성을 담고 있는 과제들의 영역으로 발전했다. 파이드로스편에 관한 상세한 해석이 실려 있지 않은 플라톤에 판한 연구 서적의 序文이 없을 정도이다. 플라톤 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우리가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는 데 있어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 입문에 확실히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통해서 출발한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파이드로스편의 결말 부분에 묘사된 글쓰기의 가치와 더불어 철학의 文字化(Schriftlichkeit)와 口頭化(M?ndlichkeit)에 관한 플라톤의 설명에 우리가 갖게 되는 관심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따라서 이미 거의 의무적이 되어버린, 위에서 언급된 플라톤에 관한 연구 서적의 서문은 이러한 파이드로스 결말 부분의 내용과 연관을 갖는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러한 내용에 관한 우리들 자신이 숙고해야 할 출발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 취급하는 내용은 플라톤 대화편 해석이라고 하는 범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파이드로스편의 해석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새로운 관례는 이 대화편의 해석에 관한 과거의 해석 내용을 또한 담고 있다. 플라톤에 대한 현대적이며 精神史的인 논의의 출발점에 서 있는 1804년에 출간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의 플라톤 번역에 관한 ‘序文’(Einleitung)은 우리들에게 플라톤 해석의 본보기를 제공한다. 30페이지 분량의 그의 서문 내용은 플라톤 연구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을 크게 끼친 단일 사항에 관한 논문으로 오늘날까지 머물러 왔다: 對話 形式은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아주 조야한 방식이 갖는 계몽적인 상황보다도 더 혼란스러운 단지 하나의 아주 쓸모 없는 형식《nur eine ziemlich unn?ze mehr verwirrende als aufkl?rende Umgebung der ganz gemeinen Art seine Gedanken darzulegen》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한 形式(Form)과 內容(Inhalt)은 슐라이어마허가 언급한 것처럼, 분리될 수 없고《unzertrennlich》, 형식은 내용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수 불가결《notwendig》하다는 사실의 인식, 즉 對話 形式의 발견을 우리는 이 序文 안에 신세지게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진정한 플라톤의 形式《?cht platonische Form》의 법칙들을 파이드로스편의 결말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이끌어내며, 이러한 법칙들을 철학적 意思 傳達에 관한 플라톤적 사고의 당연한 결과 《eine nat?rliche Folge von Platons Gedanken ?ber die philosophische Mtteilung》로 고찰한다. 특히, 대화 형식의 역할을 고려하는 데에 있어서, 文字化와 口頭化에 관한 숙고와 관련하여 슐라이어마허는 그 당시 Wilhelm Gottlieb Tennemann에 의해서 제시된, 진정한 哲學者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견해를 문자로 남겨 놓지 않으며, 단지 철학적 친구들(Freunde)과 함께 논구할 것이라는 설명에 이의를 제기했다2).
여기에서 우리는 슐라이어마허의 서문과 그것의 현대적인 대조들 사이에 있어서 첫 번째 공통점, 즉 플라톤 연구의 경계를 넘어서 아무런 주목도 이끌어내지 못했던, 소위 秘義的(esoterisch = 아카데미아 內的인, [Esoterik 秘義 (형용사: esoterisch)은 門外漢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반적이며, 外的(exo)이고, 大衆的이며 公開的인 이론이나 사상(exoterikoi logoi)과는 달리, 많은 전제 조건들을 내포하며, 적절한 哲學的 事前 修練과 準備를 통해서만 이해 가능한 非公開的이며, 專門的이고, Akademia 內部的(eso)인(innerakademisch 혹은 innerperipatetisch) 플라톤의 口頭 哲學(m?ndliche Philosophie)의 原理論을 표시한다]) 플라톤 해석을 반대하는 대략 150년 전에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던 전면적인 입장을 발견한다.
슐라이어마허 자신은 테네만과의 이러한 견해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점은 우리가 秘義的인 것과 外的인 것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중요성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점은, 독자가 내면적인 것의 진정한 聽衆이 되도록 자기 자신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단지 讀者의 特性을 나타내는 것이다”《Und so w?re dieses die einzige Bedeutung, in welcher man hier von einem esoterischen und exoterischen reden k?nnte, so n?mlich, dass dieses nur eine Beschaffenheit des Lesers anzeigte, je nachdem er rich zu einem wahren H?rer des Inneren erhebt oder nicht》3). 칸트주의자인 테네만은 역사의 객관적 영역 안에서 秘義(Esoterik)에 머물렀다: 그는 철학에 부적합한 사람들에 반대하며, 특정한 개별적인 사람들을 위한 플라톤의 의도적인 결정을 확신했다. 이것은 浪漫主義的 思想家인 슐라이어마허에게 이른바 너무나 粗雜하고 ‘皮相的인 것’(?usserlich)이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철학에 있어서 古代로부터 秘義的이며 또한 外的인 것을 분명히 얻어내는 아주 광범하게 유포된 傳乘《weit verbreitete ?berlieferung, die sich aus dem Altertum erhalten hat von einem esoterischen und exoterischen in der Philosophie》4)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상세히 논의하거나 분석하지는 않았다. 그는 主觀的 理解의 수행(Verstehensvollzug)의 영역 안에 秘義를 옮겨 놓았으며, 그것을 讀者의 特性《Beschaffenheit des Lesers》으로 만들었다. 그가 요구한 것은 이른바 대화편의 秘義的(esoterisch)인 독서에 있다. 따라서 대화 형식을 이해한 독자는 자기 자신을 진정한 독자, 즉 플라톤의 숨겨진 묘사 방식의 실제적 受講者로 정당화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플라톤은 자신을 따를 수 없는 혹은 따르려하지 않은 사람들을 단지 대화편의 전면만을 넌지시 보이고자 생각했던 평범한 사람들로 폭로한다.
口傳(?berllieferung)의 ‘외적’(?usser)인 내용에 맞서는 대화 형식의 ‘내적’(inner)인 秘義(Esoterik)을 강조하려는 경향은 슐라이어마허 이래로 변함 없이 지속되어 왔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두 번째 공통점으로써 파이드로스편의 결말 부분의 제한(Beschr?nkung)을 생각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序文 마지막 8쪽만이 文字化와 口頭化에 대한 문제를 전적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아주 간단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개별적인 대화편을 전체로써 고찰한다고 하는 것은 특히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암호화된 철학적 의사 전달에 대한 解讀(Dekodierung)의 전제 조건이라는 것이다5). 그의 ‘序文’과 이 서문의 오늘날 일치 점들이 플라톤에 의해 제기되었던 연관성으로부터 대화편들에 대한 플라톤의 본래적 이해와 관련된 서문의 중심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고 하는 사실은 따라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낯설다.
슐라이어마허와 두 번째의 보충적인 요구는, 모든 대화편은 다른 대화편들과 비교에 의해서 동시에 설명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6). 학자들은 이러한 요구에 따라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결코 아무런 노력하지 않았다(필요한 경우에는 플라톤의 第 七書簡을 비교할 것). 역설적으로 슐라이어마허가 기초를 마련한 解釋學的 原則에 입각한 플라톤 해석의 검증은 그것의 목적지에 아직까지도 도달하지 못했다.
플라톤의 문자 비판 가운데 문제점으로 제기된 秘義的 방식이 - ‘內的’이건 ‘外的’ 이건 간에 - 더욱 구체적으로 우리들에게 반대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예상 속에서, 파이드로스 대화편 자체의 결말 부분과 다른 대화편들과의 연관성 안의 융합은 지금까지 시도되어 왔다.
[2] 여기에 파이드로스 대화편에 관한 상세한 내용 분석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입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대화편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대화편의 첫 번째 중심 부분은 세 가지 연설로 구성된다; 리시아스가 著者로 命名된 첫 번째 연설은 파이드로스에 의해서 낭독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명의 잘 생긴 소년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好意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성적이지 못하며 기분내키는 대로이며,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그와 반대로 그 자신의 주인이며 양쪽에 만족함을 주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조정할 수 있다. 즉석에서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연설을 한다. 그의 연설은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연설의 시작 부분에서 에로스를 모든 나머지 것들을 따르는 非理性的 慾望(Begierde)으로 정의한다. 세 번째 연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에로스는 狂氣(Wahnsinn)이기는 하나, 인간적이고 유해한 것이 아닌 神的이며 유익한 광기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自連動(Selbstbewegung)의 개념을 통해서 靈魂의 不滅性을 증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영혼의 形相(Idea)을 분석하는 대신에, 하늘 저 너머의 장소, 즉 이데아세계에로의 상승을 묘사하고 있는 날개 달린 馬車(마부와 두 마리의 말)에 대한 유명한 詩的인 비유를 전개한다. 영혼이 육체 안에 들어왔을 때, 형편이 더 나쁜 조건들 아래에서 영혼은 정신적인 것에로의 이러한 상승을 나중에 반복해야만 한다. 그 결과, 에로스(Eros)는 이러한 상승의 原動力이 되며, 철학은 이러한 상승의 實行이다.
소크라테스가 감격한 상태에서 긴 연설을 하고 난 후, 대화는 냉정함을 되찾는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두 가지 연설들을 물론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서 본질적인 것을 배울 수 있는 본보기들(Paradigmen)로 묘사할 때, 대화 참석자는 로고스들 일반과 어떠한 종류의 저작들이든 간에 그것들의 저술에 관해서처럼 口頭的 토론에 관해서 아우 객관적으로 대화한다. 올바른 말하기와 글쓰기는, 대화안에서 나타나듯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거나 글로 쓰고자 하는 대상들의 本質(Wesen)의 지식에만 오로지 근거한다; 우리는 이러한 지식을 플라톤이 辨證術(Dialektik)로 표현하고 그것의 중심적인 진행이 개념적인 分割(Zergliederung)과 綜合(Zusammenfassung)을 통해서 本質을 規定하는 것(Wesensbestimmung)으로 설명된 철학함의 이러한 형식들만을 통해서 얻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理想的인 연설가는 모든 것을, - 마치 페리클레스가 아낙사고라스와 함께 自然哲學에 몰두했고 누스(Nus)의 본성을 논증하고자 한 까닭에 일찍이 최고의 연설가였듯이; 그리고 히포크라테스가, 醫師는 모든 것들에 관해서 알 때만 단지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 辨證術的(dialektisch [Dialektik(형용사: dialektisch) - 플라톤은 초기 대화편들 안에서 dialegesthai의 含蓄的이며 有機的인 뜻을 내포하는 Dialektik의 의미를 전개한다. 그는 처음부터 단순한 ‘상호간의 대화’를 의미하지 않고 Doxa로부터 Aletheia로 나아가는 진리 추구의 엄격한 問答法으로 Dialektik을 이해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진리 인식이 경험적이지 않고, 순수한 思惟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플라톤의 확신에 따르면, 변증술적 능력, 과정, 그리고 앎(he dialektike dynamis, poreia, episteme)은 우리들을 現象界를 넘어서 이데아들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따라서 변증술은 대화 안에서의 단순한 상호 교제와 진리 인식을 돕는 言語的 意思疏通이 아닌, 구별되지 않은 내용의 객관적 구분이자 다양한 관점들의 과정상의 검토를 의미한다고 할수 있다])으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辨證術家는 영혼의 철학적 인식을 포괄적이며 변증술적인 견해와 연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파이드로스 대화편의 결론 단락의 개별적인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口頭的으로 말해진 혹은 문자로 씌어진 論究가 질문에 의해서 시험을 받거나 공격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논구를 도와야만 한다(boethein to logo). 이러한 도움은 필연적으로 口頭的으로 행해지며, 문자(글)는 자기 자신을 도울 수 없다. 문자는 언제나 동일한 것만을 말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경우에는 침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도움은 辨證術(Dialektik)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변증술은 오로지 철학적 대화 교환 안에서만 충분히 드러난다. 도움을 통해서 글로 씌어진 것은 보잘 것 없는(paula) 것 혹은 가치가 적은(minderwertig) 것으로 밝혀진다. 자신이 저술했던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H?herwertiges)을 소유한 사람(ho echon timiotera hon synetheken)은 자신의 글을 도울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울 수 있는 사람만이 哲學者(Philosophos)이다.
이상이 파이드로스 대화편 내용의 주된 윤곽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 도대체 내용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혹은 달리 표현한다면, 개별적인 경우에 있어서 ‘도움’(Helfen)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 혹은 도움의 진행 과정이 공식화되는 思考 展開의 과정들은 도울 수 있어야만 하는 근원적인(urspr?nglich) 것들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하는 질문을 우리가 제기할 때, 대화편의 마지막 부분이 내포하고 있는 난점들은 드러나게 된다.
[3] 오늘날 슐라이어마허에 와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路線의 지배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더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은 내용적으로 고찰할 때, 근원적으로 묘사된 것이다. 하나의 내용은 文字的 로고스를 위한, 그리고 하나의 다른 내용은 口頭的 표현을 위한 철학적 내용의 두 가지 복합 요소를 철학자가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과, 도움의 경우에 있어서 대화 내용을 변경해야만 했을 것이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내용, 예를 들어 더 고상한 주제들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더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은 주제들이 생동감 넘치는 연설 교환 안에서 도달하는 것들을 통한 도움이다. 왜냐하면 哲學的 對話(Sich-Unterreden)는 책의 저술보다도 더 보람되고 가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질문을 통한 再考, 즉 論駁(Elenchos)은 질문하게 되는 문자의 영역 안에서 전적으로 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G. Vlastos는 영향력을 끼친 자신의 書評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7): 《if a man had been writing about politics, he would be expected to go into an elenchus concernig politics》. 따라서 boethein은 개별적인 경우에 다음과 같이 불린다: 《to vindicate one's statements against stupid or malicious misunderstanding, to refute sophistical objections to them, to reinforce them by showing how they follow from strong promises or have illuminating implications》.
학자들은 이러한 언급을 설득력 있고 분명한 숙고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여기에 단지 하나의 작은 문제점만이 남게 된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로고스에 도움을 줄 때, 그(녀)는 문자화된 것을 보잘 것 없는 (혹은 미약한) 것《das Geschriebene als gering (oder schwach) erweisen》 (ta gegrammena paula apodeiksai 278c6-7)으로 결코 증명하지 않을 것이다. - 반대로, 개략적인 방어가 성공적이라면, 이것은 문자화된 것의 장점을 증명할 것이다(예를 들어, 이것을 희랍어로 표현한다면, ta gegrammena kalos sygkeimena apodeiksai). 더욱이 도움의 이러한 방식이 어느 정도 知的인 작가에 의해서 수행될 수 없는 이유를 파악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신을 哲學者로서의 차이점을 드러내며 다른 유형의 작가들과 구별해 주는 특징으로써 Philosophos(철학자)라는 이름을 우리들에게 소개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철학자로서 누군가 글을 잘 쓰고 소피스트들과 논쟁가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자신이 갖게되는 사고의 중요성을 부여할 만한 재치를 가지고 있지 않을 때, 그는 결과적으로 철학자라는 이름을 상실하는가? 플라톤이 이러한 것을 의도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외에도, 문제시할 가치가 있는 점은 더 가치가 있는 것들(wertvollere Dinge)의 이해가 이러한 의미에 따라 하나의 활동, 즉 哲學的 對話(Sich-Unterreden)라는 것이다. - 이것은 문자화된 것, 즉 하나의 다른 활동과 비교되었다는 점이다(우리가 예를 들어 언급하고자 할 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은 베토벤의 소나타들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다”): 또한 두 번째로 복수인 timiotera(더 가치가 있는 것들)는 우리가 그것을 논구하는 활동과 연관짓는 한 우리들에게 설명되지 않는다: 학자들은 timioteron ti를 예상할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새롭게 숙고해야 할 동기를 여전히 우리들에게 부여한다. 방금 소개한 이러한 해석의 특이함은 한 가지 작품을 변호하는 과정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특유한 이해, 즉 자기 자신의 견해와 경험이 해석의 척도가 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언어학자는 더 가치 있는 것들(wertvollere Dinge)과 로고스를 위한 도움(Hilfe f?r den Logos)의 측면에서 우선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설정하고, 그것들에 관해서 플라톤 자신으로부터 더욱 폭넓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도록 주위를 살펴보는 일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言語學者의 옛 基本 原則에 따라서, 호머는 호머에 의해서 명확하게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Homeron eks Homerou saphenizein). 따라서 여기에서도 역시 우리는 플라톤을 플라톤에 의해서(Platona ek Platons) 이해해야만 한다.
법률편 제10권에서 플라톤은 不敬罪(Asebiegesetz)를 설명한다. 이 내용은 우리들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중요하다; 파이드로스편 안에서 법률 서적은 로고스에 속하고 철학적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하는 사실이 특히 강조된다. 따라서 Nomos에 도움을 준다(to nomo epkouron gignesthai)라고 하는 것이 이제까지 유효하고 그리고 이러한 표현이 더구나 로고스들을 통해서 돕는다(boethein tois logois, 890d/891a)라는 사실을 우리가 읽게 될 때, 이것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敬虔(Fr?mmigkeit)이 더 이상 논의되지 않고 運動의 개념과 방식들, 운동?의 원리로서 靈魂, 우주 안에서 善(das Gute) 혹은 惡(des B?se)의 우월함, 요컨대 있는 그대로의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해 논의될 때 이러한 ‘도움’은 발생한다. 이것은 플라톤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문제가 확정된 상태로, 직접적인 대화 주제를 다른 주제에 의해 대체하면서 法制定(nomothesias ektos bainein 891d)의 근원적인 활동으로부터의 드러남이다8).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내용들은 모든 事物의 첫 번째 원인들(ta prota panton 혹은 to proton aition apanton 891e5, 비교. c2)로 우리들을 이끈다.
근본적인 면에서 고찰할 때, 이러한 예는 이미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사례들로부터9) 분명한 증명을 얻기 위해서 두 번째의 예, 즉 플라톤의 中期 主要 著作인 국가론(Politeia)을 들 수 있다. 국가론 제10권에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와 함께 正義(Gerechtigkeit)가 지배자들에게만 도움이 되며 지배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치는가, 혹은 오히려 일차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관심인가 하는 하나의 두드러진 정치적 질문을 논의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반대자를 결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론 제1권은 正義의 정당성과 함께 언뜻 보기에는 만족할만한 방식으로 끝난다. 그러나 국가론 제2권은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대화 시작과 더불어 이제까지 논의의 결과가 만족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그들은 正義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공격을 반복하고, 새로운 개념적 날카로움을 통해 반대적인 입장을 表明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典型的인 대화 상황이다: 하나의 로고스는 강요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이것은 여러 번 언급되듯이(362d9, 368bc, 427e, 433bc), 正義를 도와주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제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관점을 통해 반박할 것이다 正義(Gerechtigkeit)를 돕는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正義의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形相(Idee)을 보호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전의 해석들과의 관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대화편의 脈絡을 오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국가론 제1권은 계속 이어지는 국가론 책 내용의 序論(Prooimion)으로 증명된다. 트라쉬마코스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화 참석은 여러 번 암시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정의에 대한 변론의 과제를 계획한 대로 떠맡고 있는 부분에서, 그는 자신이 트라쉬마코스에 반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던 내용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명확히 지적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그는 자신이 로고스를 도와야만 하며 이것을 저버릴 수 없다고 언급한다. 正義를 위한 도움과 正義에 대한 첫 번째 로고스를 위한 도움은 본성상 분리될 수 없다: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 대화 안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의 그 자체를 변호할 때, 그는 역시 시작할 때부터 이와 관련된 입장을 변호한다. 그리고 그 반대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나의 論題는 이제 다음과 같다: 국가론의 전체 구성은 로고스를 위한 도움(Hilfe f?r den Logos)이라는 가장 규모가 큰 사례를 보여준다. 우리가 파이드로스 대화편의 내용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점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도움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동일한 대화 수준 위에서 오해를 가라앉히고 풀어주며 제거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문제인가? 우리가 주어진 것의 범위 안에 진정으로 머무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단지 이와 동일한 대화 내용들만을 계속해서 여기 저기에 적용해야 하는가? 정확하게도 그 반대적인 경우가 된다. 正義(Gerechtigkeit)라고 하는 일반적인 주제는 물론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개별적인 사례들 안에서 ‘도움’의 수행은 지배적인 이해가 불가능하며, 물론 철학에 어긋나는 것으로 설명되었던 내용, 즉 사고 방식과 대화 방식들의 전적인 교체를 정확히 가져온다. 우리는 正義를 위해 바로 그 첫 번째, 즉 그 자체로 닫혀진 로고스와 시각을 아주 벗어나 있는 내용들, 즉 敎育, 音樂 그리고 體育, 神話와 神들의 善함, 詩歌(Dichtung)와 模倣, 心理學과 論理學(矛盾 命題), 數學과 認識論, 이데아론과 最高 根源으로서 善의 이데아에 관해서 듣게 된다. 트라쉬마코스(Thrasymachos)라는 小對話篇이 갖는 플라톤적 대가다움에 대한 감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해야만 한다: 그의 뒤를 이어 계속 진행되는 論究는 진정한 timiotera, 즉 더 높은 철학적 단계에 대한 이론들과 논증들인 것이다. 이것들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본래적인 입장은 좋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도움’은 단계적으로 항상 근본적인 문제점들로 우리들을 인도하는 잘 확대된 이론으로써 증명된다.
두 가지 사례들의 간단한 분석을 근거로, 우리는 중간 결과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플라톤적으로 로고스를 돕는다(dem Logos zu Hilfe kommem)라는 것은 原理들(Prinzipien)을 인식하는 과정 위에 한 가지 혹은 여러 가지 부수적인 단계들을 남겨둔다는 사실을 뜻한다.
[4] 우리는 국가론의 이러한 결론들을 파이드로스편에 轉用해도(?bertragen) 되는가? 모든 점들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러한 이질적인(heterogen) 내용들과 관련될 수 없는가? 다행스럽게도, 파이드로스편은 국가론 자체와의 연관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맺는다. 따라서 문학 작가로서 플라톤은 자신의 활동을 正義에 관한 하나의 신비적인 연설(mythisches Sprechen ?ber Gerechtigkeit, mythologein dikaiosyne peri 276e)로써 정의로움(das Gerechte), 아름다움(das Sch?ne) 그리고 좋음(das Gute)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철학적 문학 작품 가운데 이러한 두 가지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단지 한 권의 책만이 확실하게 있게 된다: 첫 번째는 플라톤적 辨證術(혹은 ‘學問’)을 ‘내포하고’, 두 번째는 正義에 대한 ‘mythologein’(이야기를 하는 것)을 묘사하는 작가에게서 유래한다. 이 책은 그 자체로 ‘mythologein’이라는 술어를 덧붙인 국가론이다(376d, 501e)10). 자신의 대화편을 제외하는 대신에, 플라톤의 문자 비판은 그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아주 특별히 지적한다. 이것은 W. Luther가 1961년에 발표한 논문 안에서 이미 확인되었다11). 학자들은 이러한 지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12), 대화편 저작에 대한 플라톤의 文字 批判의 연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서 이러한 연관을 회피하고자 시도했다. 만일 플라톤이 파이드로스편에서 문자화된 저술들(syngrammata)을 언급하고, 자신의 일곱 번째 편지 안에서 누군가에게 진지한 것(341c)에 대한 그 자신의 syngramma는 없다고 덧붙여 말했다면, 그는 여기에서 단지 문자들의 일정한 형식, 즉 예를 들어 修辭學 案內書들(technai)의 형식에 따른 체계적 講義들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러한 논증은 오늘날까지 특별한 호평을 받고 있다. 많은 연구 서적들 가운데, 나는 Cambridge에서 출간된 W. K. C. Guthrie(Ⅳ p. 65)의 대표적인 저서인 “希臘哲學史”(History of Greek Philosophy)에서 우리의 논의와 관련된 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Plato spoke the plain truth which he said that there was not, and would never be, any treatise(syngramma or techne) of his on the things which he took seriously. What he has left us is something much better, the mimesis of dialectical discussion itself》. Syngramma가 대화편을 분명히 제외하는 이러한 표현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때, 이러한 글들이 하나의 의미 있는 언급을 표현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진다. 우리가 이것을 예증들을 통해 검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오직 플라톤을 포함한 희랍인들이 아주 간단하게 여기에서 요구하는 의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결국 확인해야만 한다. 체계적인 講義書들에 대한 한정뿐만 아니라, 특히 Dialogos(대화, 토론)13)에 대한 반대도 역시 缺如된다. 그 반대는 오히려 Poiema, 즉 隱喩를 포함하고 있는 詩歌(Dichtung)이며, Syngramma는 당연히 散文 해석을 포함하는 로든 非時的인 문자적 묘사들을 위한 아주 비 전문적인 집합 명사이다14). 이것은 Syngramma-논증과는 관련이 없다. 한 가지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의 任意的인 확정은 언어학적 해석을 단지 한번이라도 대신할 수는 없다.
이러한 논증에 관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은 다음에 언급하는 두 가지의 측면이다: 첫 번째는, 학자들이 盲目的으로 하나와 분석되지 않은 텍스트 이해를 신뢰하고, 두 번째는, 학자들이 절대적으로 이러한 방향 안에서 무엇인가를 찾아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파이드로스편의 두 번째 부분 전체 안에서, 플라톤은 로고스들의 모든 종류들에 관해서 언급할 작정이며, 文字(graphe) 자체 안에 비난받게 될 결함들이 固着되어 있고, 그리고 철학적 진지함이 로고스들에 대한 하냐의 형식, 즉 구두적으로 주고 받는 연설(Wechselrede)만으로 만족한다는 사실을 지루할 정도까지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은 이러한 개별적인 부분들의 횟수에 抵觸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체 대화편의 사고 진행에도 위반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첫 번째 연설에서 에로스에 관해서 리시아스 보다 훨씬 잘 연설할 수 있고, 두 번째 연설에서 그는 첫 번째보다도 더 낫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개념 형성을 조금 더 포괄적으로 진척해 나가며 狂氣들(Manien)의 전체성 안에서 慾望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두 번째 부분에서 당시의 修辭學과 같은 개별적인 현상들에 관해서 그렇게 확실히 판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모든 로고스들에 대한 아주 일반적인 언급들에 있어서 이미 나았기 때문이다; 모든 문자화된 것들의 전체성 안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결론 부분은 眺望된다15). 우리가 문자화된 로고스(예를 들면, 대화편)의 일정한 형식을 任意的으로 제외하고자 했다면, 명백한 내용 구성의 언급에 대한 능력은 상실되었을 것이다. Syngramma-논증과 文字 批判을 언급하는 대화편을 한 가진 혹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멀리하려고 하는 모든 관련된 시도들을 통해서, 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신화적 연설 가운데 우리들에게 그것의 윤리학적-형이상학적 관련성들 안에서 생겨나는, 그리고 대화편의 두 번째 부분 가운데 인식의 개별적인 지식이 일반적인 것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연설의 논리적인 측면에서 파이드로스편예 나타난 특징적인 상승운동(Aufw?rts-bewegung)을 무시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와 연관된 두 번째로 가능한 이의 제기를 역시 언급해야만 한다- 모든 해석가들의 일치하는 견해에 따라서 문자화된 것을 위한 도움이 단지 口頭的(m?ndlich)으로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위에서 확정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국가론에서 증명하고자 시도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철학적 도움은 단지 변증술적 대화 안에서만 분명히 발생한다. 그러나 생동감 넘치는 철학적 토론은 문자화된 로고스 안에서의 模像(eidolon)이라는 사실을 파이드로스 대화편은 언급하고 있다(276a1-b1). (우리는 模像에 있어서 분명하게 기록된 대로 정화한 재현을 생각할 수 없고, 오히려 플라톤이 原型과 模像 사이의 관계로 항상 표시한 等級差異로써 이것을 생각한다). 만일 도움이 진정한 철학적 대화의 본질에 속한다면, 文字化된 대화편은 자신의 본질적인 특징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도움의 과정에 관한 模像이 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文字的 模像와 측면에서 언급된 내용이, 결국 유효하게 만들게 되는 하나의 그에 상응하는 보충을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이러한 한 가지의 모순은 그렇게 오랜 동안 문제가 되지 않을까? 바로 국가론은 여러 가지로 잘 알려진, 물론 단지 너무 자주 하찮은 것으로 취급된 부분들 안에서 그러한 보충들을 지적한다16).
국가론과 법률편 안에서 관찰된 boethein(도움)의 상황을 드러내는 구조에 관해서 이로부터 해명을 얻어낼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파이드로스편으로 우리들의 관심을 되돌릴 수 있는 길은 이제부터 자유롭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를 자신의 친구로 부르는 뛰어난 연설가인 페리클레스(Perikles)의 事例가 있다. 민중 앞에서 페리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의 自然哲學을 분명히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自然哲學은 말하자면 배후의 관계로부터 그의 공개적인 雄辯術(Beredsamkeit)을 규정한다. 페리클레스가 누스(Nus) 이론으로부터 자신의 웅변술을 위해 도움이 되는 내용을 끄집어 냈다고 하는 것《das f?r seine Redekunst Dienlich gezogen》(270a)이 글자 그대로 무엇을 뜻하는가? 페리클레스와 진정한 연설가 혹은 변증술가로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배후에 머물러 있고 단지 口頭的인 boethein(돕는다)으로써 역사적인 예시(Pr?figuration)는 문맥 안에서 오해의 여지가 없이 암시된다.
아낙사고라스의 페리클레스가 관계했던 것은 쓸데없는 말(Geschw?tz)과 氣象學(Meterologia)이었다(270a1). 이것은 플라톤이 종종 反語的으로 자기 자신의 변증술을 사용하는 표현이다17). 도움의 수행은 형이상학과 같은 하나의 더욱 고상한 주제《a more exalted topic, like metaphysics》로 우리를 분명히 옮겨놓지 않는다고 G. Vlastos는 표현했다18). 이것은 페리클레스에 관한 부분에 대한 고려 없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하며19), 마찬가지로 원래의 말대로 번역하면, 이것은 아마도 바로 adoleschia와 meteorologia(쓸데없는 말과 기상학)가 된다. - 따라서 학자들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희랍에 있어서 과장된 추측, 즉 ‘形而上學’(metaphysics)을 옮겨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비판자들의 빈정대는 이러한 적용이 플라톤에 의해 숙고된 反語에 의해서 사전에 제거되었으며 이미 논박 당했음을 알고 있다.
파이드로스 대화편의 序頭에서, 플라톤은 리시아스의 연설과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동일한 주제로 계속해서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연설에 있어서 파이드로스는 자신의 연설이 무엇을 담고 있으며, 더욱이 무엇인가 다른 것, 즉 더 높은 가치가 있는 것(hetera touton meizo kai pleio 그리고 alla pleio kai pleionos aksia 234e-235b)20)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여기에서 pleionos aksia(더 가치가 있는 것)은 대화편 끝부분의 timiotera를 뜻한다. 우리는 파이드로스편에서 최종적으로 모든 부분들의21) 내용보다도 하나의 묘사의 우세함이 내용적으로 평가(Plus)에 근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첫 페이지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페리클레스의 事例처럼 첫 두 가지의 연설들이 내포하고 있는 문학 작가로서의 意圖이다.
[5] 플라톤의 이러한 준비된 암시들의 지적에 따라서, 우리는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야만 한다: 모든 문자화된 것은 더 나은 것에 의한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는 보충을 필요로 하는가? - 파이드로스편은 도대체 어떠한 광범위한 철학적 이론을 보충하는가?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대화편은 이러한 관점에서 아주 분명하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인식이 다음에 계속되는 질문들에 대답을 해야만 하는 변증술가의 과제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1) 靈魂은 單一한가 혹은 그 자체로 多樣한가? (2) 영혼이 다양하다고 한다면, 영혼은 많은 要素들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3) 그것의 dynamis(능력)는 무엇이며, 요소들의 능력은 각각 개별적으로 고찰될 수 있는가(270d, 271d)?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연설들을 본보기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플라톤의 지시에 따라서, 우리는 에로스에 대한 위대한 연설과 영혼이 이러한 세 가지 내용들을 구체화했는가를 우리들에게 질문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단지 한 가지의 대답이 있다: 그 대답은 그것을 하지 않고, 대답을 할 수 없다고(246a) 강조해서 언급된다. 영혼의 실재적인 형태가 증명되고 묘사되는 대신에, 영혼의 요소의 數를 문제점으로 삼지 않고, 또한 영혼의 묘사된 상태의 방식들이 통일된(einheitlich) 본질의 명백한 표현이 아닐 수 있는 지만을 질문하면서, 플라톤은 우리들에게 馬夫와 두 마리의 동일하지 않은 말들이 이끄는 마차에 대한 詩的인 모습을 제시한다.
파이드로스편 가운데 결여된 논구들에 관한 내용은 아카데미아(Akademia) 내의 私的인 대화를 통한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서 한번은 구체화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행해질 무엇인가 애매한 구상은 아니다. 또한 이 내용은 대화형식을 연구하는 이론가들의 견해에 따라 생기 없는 문자들로부터 덧붙여 빠짐없이 전달된 내용들을 생동감 넘치는 思考 안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適格인 讀者에게 자격 있는 순수한 哲學的 理解, 즉 무엇인가 전달될 수 없는 것을 指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현대 해석가들이 이와 유사한 관련성 안에서 주장한 Ludwig Wittgenstein[1889-1951]의 ‘언급될 수 없는 것’(das Unsagbar)은 아니다22). 이것은 국가론 안의 心理學的 계획일 뿐이다. 이 대화편 안에서는 영혼이 어떻게 여러 가지 요소들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가 질문되고 靈魂 요소의 數가 세 가지로 확정되며, 靈魂의 능력에 따라서 세 가지 靈魂의 부분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질문된다(국가론 4, 435ff.과 9, 580ff., 비교. 10, 611b-612a).
파이드로스편의 질문 목록(Fragenkatalog) 가운데 國家論 안의 心理學에 대한 지시는, 우리가 직접적인 책 인용을 회피하지 않는 한에서, 그것이 단지 가능한 드러나 있으며 분명하다. 따라서 파이드로스편의 강우에 있어서 결여되어 있고 의도적으로 [다른 대화편들이나 口頭的 哲學을 통해 다른 상황에서 적절한 시기에 논의되어야할] 비워 둔 부분들(das Ausgesparte)이 무엇인기를 재검토할 수 있다: 한가지로 구성되고 그 자체로 다양하고 결론에까지 사고된 이론(플라톤이 이러한 이론을 좋다고 여겼다면, 우리는 이것을 제안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물론 제외할 수 없다). 국가론 안에 묘사된 영혼론은 詩的인 想像力에 있어서 파이드로스편의 영혼에 관한 신화에는 못미칠 것이다. - 하지만, 認識 能力과 관련하여 국가론에 나타난 영혼론의 정확한 논증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세하며 더 價値가 있는 것들(timiotera)이다.
플라톤은, 주로 제시된 것이 철학적으로 잘 논증되고 유효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하는 명백히 제외된(246a) 논구들의 형식이 어떠한 방식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고 충분히 인식시켜주는 바로 이 대화편 안에서 作家가 哲學者라는 이름의 가치를 얻을 때, 모든 文字的 표현들은 더 중요한 것을 통해서 口頭的인 논증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언급한다. 따라서 파이드로스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는, 플라톤이 哲學者라는 이름에 가치가 없던가 아니면 그 자신의 대화편의 배후에 여러모로 잘 숙고되고 다듬어진 이론들이 존재하던가 하는 점이다.
[6] 이제 우리는 슐라이어마허로 되돌아가자. 對話 形式이 더 큰 분명성에 대한 무능력과 일치하지 않고, 직접적 가르침의 경우에 있어서 간접적인 의사 전달이 예술적으로 정교하며 철학적으로 의미심장한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그와 올바른 직관은 이러한 은폐된 묘사 형식의 우세함을 인식했던 한 명의 작가가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보여지는 모든 것을 그것의 형식을 사용해 실제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무언의 공리에 비밀리에 그와 그의 현대적 후계자들은 빠지게 된다. 隱蔽(Verh?llen)와 暗示(Andeuten)의 가능성 가운데, 강요는 이전에 은폐된 것의 완벽한 재현이 된다: 단지 이러한 논리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변형은 대화 형식으로부터 口頭的 철학에 대한 가정이 반대하는 논점을 얻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 형식을 통해서 많은 주제를 문자로 표현하는 작가의 결심과 다른 것들 - 예를 들면 출간된 著作들의 계속적인 논증 - 에 대해서 결코 글을 쓰지 못한다는 동시적인 결정 사이에는 절대로 모순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플라톤이 文字의 결점들을 발견하면서 이러한 결점들을 다시 文字에 의해서 제거하려는 욕구를 마땅히 느꼈다는 가정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어와 관련하여 분명해질 것이다. (일정한 의미와 특정한 범위 안에서) 언어적 한계는 단지 言語의 사용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반대로, 파이드로스편의 분명한 증거를 통해서 文字가 수행할 수 없는 내용에 있어서 문자 사용의 특정한 방식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口頭的인 대화만이 제시된다23).
이 밖에도, 슐라이어마허는 對話 形式에 대한 자신의 발견을 통해서 특히, 세가지의 과제, 즉 대화편 (저술시기)의 연대적 순서의 확정, 논란의 여지가 있는 대화편의 眞僞 문제(Echtheitsfrage)에 대한 결정, 그리고 Tennemann의 ‘秘義的’(esoterisch)인 플라톤 해석에 대한 반박을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24). 오늘날, 첫 두 가지의 주장들의 관점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슐라이어마허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없다. 연대순은 - 그것이 적어도 확신하는 데까지 - 언어적 통계에 의해 확인되었다. 眞僞 문제에 대한 대화 형식의 관찰로부터 얻어진 기준들이 다른 측면에 있어서 덜 신뢰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특별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우리는 Paul Friedl?nder의 大알키비아데스편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학자들은 단지 세 번째 주장만을 각 방면에서 적합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측면이 정당하게 파이드로스편에서 근거지워지는 가를 질문하면서, 문제점에 더 가까운 접근을 시도해 왔다. 그리고 양 측면이 - 文字化되지 않은 原理論(ungeschriebene Prinzipientheorie)을 찬성하는 학자들을 주목할 것 - 이 대화편의 결말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고찰했던 한에서, 우리는 전체 대화편 안에 이러한 부분의 혼합을 시도하고 다른 대화편들과25) 그것의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중간적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동안 감정적으로 강하게 우리를 괴롭혀 왔던 논쟁을 침착한 관찰의 영역 안으로 되돌리는 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였다.
[7] 대화 형식이 그것의 세 가지 근원적인 요구들을 실행할 수 있었을 때, 對話 形式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가? 이제, 작센(Sachsen)의 왕을 위해 金을 만들려 했던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Johann Friedrich B?ttger), [J. F. B?ttger(1682-1719)는 鍊金術士로서 金을 만들고자 했으며 도자기의 발명자로 불림]와 슐라이어마허는 어느 정도 연관을 갖는다. B?ttger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자신의 委託者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준 도자기를 발견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플라톤적 문학 형식의 더 나은 이해를 위한 슐라이어마허식 발견의 획득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대화편의 연대순, 眞僞 문제 그리고 다른 면에서 증명된 플라톤적 原理論(Prinzipientheorie)의 呪文을 쫓아버림(Wegzauberung)은 그러한 형식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소위 秘義(Esoterik)라고 하는 것에 관해서 언급해 보자. 슐라이어마허는 그 안에 反啓蒙的인 태도(Obskurantismus)를 가정했으며, 지혜의 가장 난해하고 비밀이 가득찬 것에 관해서(vom《schwierigsten und geheimvollsten Weisheit》) 논쟁적인 언급을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안에서 비워 둔 부분들을 주의 깊게 읽지 않은 사람은 비워 둔 부분들이 애매하고 비밀스러운 내용이라고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플라톤의 반복적인 확신에 따라 특징 지워진 것은 더 가치가 있는 明確性(sapheneia)과 더 가치가 있는 正確性(akribeia)이다. 이것은 대화 내용의 플라톤적 특징 묘사에 관한 것이다.
인간적인 動機(Triebfeder)와 관련하여, 우리는 마찬가지로 秘密耽溺病《Geheimnissucht》을 처음부터 豫想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플라톤적 표현은 責任感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인식하게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조건들 하에서 精神的 作品들의 세 가지 점은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作家는 책의 內容에 책임을 진다. 이에 따라서 그는 아무런 내용도 아닌 것에는 責任을 지지 않는다; 出版業者들은 책을 流布하는 책임을 떠맡는다. 그리고 그는, 플라톤이 언급한 것처럼, 주제를 이해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주제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tois epaiousin hos hautos hois ouden prosekei,《denen, die etwas von der Sache verstehen, ebenso auch denen, die sie auch nichts angeht》(비교. 파이드로스 275e2) 책을 판매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適格인 고객은 현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용을 간직하는가 혹은 歪曲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讀者 자신이 責任을 지게 된다. 플라톤은 한 시대 속에 살았다. 따라서 세 가지의 책임감이 모두 함께 가지고 있던 비교적 책이 없었던 시대에 대한 기억은 그에게 더욱 생생했을 것이다. 한 명의 사상가는 하나의 작품을 저술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자체를 자신의 친구들에게 알려지게 했다. 그 결과, 그는 생동감 있는 반응을 친구들로부터 관찰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편에서 엘레아 출신의 제논(Zenon)은 자신으로부터 이러한 一致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을 묘사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記錄(Aufzeichnung)의 떨어져 나감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기원전 4세기에 아직도 이러한 세 가지 責任의 一致가 있었으면 하고 熱望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時代錯誤的인 생각은 아닐까? 국가론 안의 理想國家 構想이 時代錯誤的(anachronistisch)이며, 동시에 유토피아적(utopisch)인 것처럼 이러한 생각도 역시 時代錯誤的이며 유토피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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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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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leiermacher, Fr., Platons Werke. Ersten Theils erster Band, Berlin 1804(1판).
Schleiermacher, Fr., Platons Werke. Ersten Theils erster Band, Berlin, 1855(3판).
Stenzel, J., Literarische Form und philosophischer Gehalt des platonischen Dialogs(1916), in: J. Stenzel, Kleine Schriften zur griechischen Philosophie, hrsg. von B. Stenzel, Darmstadt 1956, 32-47.
Szleza´k, Th. A., Unsterblichkeit und Trichotomie der Seele im zehnten Buch der Politeia, in: Phronesis 21, 1976, 31-58.
Thurnher, R., Der siebte Platonbrief. Versuch einer umfassenden philosophischen Interpretation, Diss. Innsbruck 1973(Monographien zur philosophischen Forschung Bd. 125, Meisenheim 1975).
Vlastos, G., Rez. zu Kra¨mer, H. J.: Arete bei Platon und Aristoteles, in: Gnomon 35, 1963, 641-655.
White, N. P., Plato on Knowledge and Reality, Indianapolis 1976.
Wieland, W., Platon und der Nutzen der Idee. Zur Funktion der Idee des Guten, in: Allgemeine Zeitschrift fu¨r Philosophie 1, 197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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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Thomas Alexander Szlez?k은 獨逸 뤼빙엔 大學(Eberhard-Karls-Universit?t T?bingen) 古典 言語學科 正敎授이자 哲學科 協同敎授이다. 이 論文은 "Dialogform und Esoterik. Zur Deutung des platonischen Dialogs 'Phaidros'"라는 제목으로 Museum Helveticum(Schweizerische Zeitschrift f?r klassische Altertumswissenschaft) 35, 1978, S. 18-32쪽에 揭載되었다[이 논문은 1976년 12월 20일에 스위스 취리히(Z?rich) 대학에서 행한 슬레작교수의 私講師(Privatdozent) 就任 講義 內容이다].
2) Fr. Schleiermacher의 Platons Werke. Ersten Theils erster Band. Berlin 1804(1판), 1855(3판). 서문: 5-36. 인용 10, 14, 29; 파이드로스편을 예증하는 부분에 관해서 14f;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테네만(Tennemann)에 반대하는 논쟁에 관해서 10ff.
3) 서문 16f.
4) 서문 10.
5) 서문 14.
6) 서문 14.
7) G. Vlastos, Rez, zu Kr?mer, H. J.: Arete bei Platon und Aristoteles, in: Gnomon 35. 1963. 653.
8) 플라톤의 ektos bainein(주제를 변경하기)을 통해 우리는, 정치가 원래적 논의의 주제였을때(G. Vlastos, Rez. zu Kr?mer, H. J.: Arete bei Platon und Aristoteles, in: Gnomon 35, 1963, 653), 논박에 있어서 도움은 정치와 관련되어야만 한다는 Vlastos의 표현을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Vlastos는 《 … to reinforce them by showing how they follow from strong premises》라는 표현을 통해 올바른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이러한 사고가, 결과적으로 계속 관찰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화편들을 통해 입증될지라도, boethein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이해를 반박한다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다.
9) Hilfe f?r den Logos(로고스에 도움을 준다)라는 동기는, 내가 계속 출간될 나의 연구 논문들에 밝히게 되듯이, 플라톤 대화편의 중심적 구성요인이다. 플라톤이 문자적 논구가 갖는 가치의 원리적인 선명들 가운데 이러한 요인을 중심에 두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동기의 중요성과 일치한다. - 오늘날 아마도 대부분의 플라톤 독자들에게 친숙하다고 할 수 있는 로고스를 위한 ‘도움’(Hilfe)은 테아이테토스편에서 발견된다.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의 올바르지 못한 논제를 위한 무익한 도움은, 우리가 성공적인 ‘도움’에 관한 대화편의 여러 부분들로부터 긍정적인 면에서 진정한 플라톤의 확신으로 경험하게 되는 모든 내용들을 부정적인 면 가운데에서 확인해 준다. 테아이테토스편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한 사람의 진지한 철학자인 프로타고라스는 파이드로스편에 나타난 철학자(Philosophos, Dialektiker)로서가 아닌, 플라톤이 내용적으로나 저작 시기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 유사한 대화편인 소피스트편에서 정의하고자 시도하는 소피스트들의 유형을 대표한다.
10) 고르기아스편은 이 대화편 마지막 부분의 神話(523aff.)외에도 mythologein(493d3)인 하나의 寓話의 의미 가운데 소개되고 해석하게 되는 지옥(Hades)에 사는 물을 나르는 사람들에 관한 신화의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나, 이러한 표현은 전체적으로 칼리클레스와의 논쟁으로까지는 전개되지는 않는다.
11) W. Luther, Die Schlvfiche des geschriehenen Logos, in: Gymnasium 68, 1951, 536f.
12) H. J. Kr?mer, Retraktationen zum Problem des esoterischen Platon, in: Museum Helveticum 21, 1964, 148의 언급은 예외.
13) 대화편은 Syngramma가 아니라는 단지 기원전 4세기의 한 작가의 진술(또는 4세기의 언어사용에 관한 더 후대 작가의 그와 일치하는 진술)은 오늘날 상식적인 의미에 있어서 수긍할만하다. 그러나 체계적인 논구가 대화형식(Dialogform)을 통해서는 주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은 한, Syngramma로써 체계적인 저작들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들에 관한 지적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의학적 Syngrammata는 의학의 Nomoi 혹은 기본 규칙을, 농업의 Syngrammata는 농사의 기본 기술을 묘사한다고 플라톤의 가짜 대화편인 Minos 316c-317a에서 언급된다; 그러나 Syngramma로 불리는 모든 것들이 기본 규칙들에 관한 묘사의 유추적인 기능을 내포해야만 한다고 언급될 수 없다 - 그러한 주장은 ‘(산문)저직’이라는 용어의 계속적인 의미를 예증하는 (리시스 204d, 205a, 법률 810b, 858c, 파이드로스 258d; 이소크라테스 2, 7. 42) 부분들과 어차피 논쟁하게 된다 - 예를 들어 플라톤의 대화편인 법률편이 인간 공동 생활의 Nomoi 혹은 기본 규칙들을 확인하며, 그 결과 politikon syngramma(317a)로 등급지워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 저작시기에 있어서 Minos편을 Nomoi보다 앞에 두었던 로마 황제 시대의 4부작 배열(Tetra-logienordnung)은 플라톤의 법에 관한 저작을 politikon syngramma(비교. 각주 14)로써 분명히 간주된다. “Systematic work”라는 의미와 관련하여 LSJ[Liddell -Scott-Jones, A Greek-English Lexicon]에 인용된 유일한 부분은 Galen 16, 532 K?hn 이다; 여기에서 이것의 반대는 hypomnemata(Kammentar)이다. 하나의 대화편이 Syngramma 개념 가운데 둘 수 없다는 내용은 Galen에게서도 역시 실려 있지 않다; 하나의 대화편이 (Kemmentar의 의미에서) Hypmnema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마도 그 자체로 이해된다; 테아이테토스편 143a1-5에서 Hyponmemata (Aufzeichungen, 기록들)는 완성된 문학적인 대화편의 이전 단계(Vorstufe)이다 - 플라톤에 관한 새로운 연구 서적 가운데 Syngramma-논증을 사용하는 두 가지의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R. Thurnher, Der siebte Platonbrief. Versuch einer umfassenden philosophischen Interpredation (1975) 94 (Syngramma = Kompendium); N. P. White, Plato on Knowledge and Reality (1976) 207f. (대조 《dialogue ? treatise》).
14) Werner Jaeger(Studien zur Entstehungsgeschichte der aristotelischen Metaphysik, 1912, 146 A. 3)와 H. J. Kr?mer(Retraktationen zum Problem des esoterischen Platon, in: Museum Helveticum 21, 1964, 144)와 같은 학자들은 당연히 Syngramma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1916년에 Julius Stenzel도 역시 진정한 정치(Staatsmann)를 통한 고유한 문자적 규정들의 변화에 관한 정치가편(295bff.)의 설명들은 의미에 따라서 역시 플라톤의 국가론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과 플라톤이 대화편을 전적으로 정치적 Syngramma로 평가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Literarische Form und philosophischer Gehalt des platonischen Dialogs[1916], in: Kleine Schriften zur griechischen Philosophie, 1956, 46). 국가론은 계속해서 Nomothesia(동사형 nomothetein)로써 最上 國家의 윤곽을 나타낸다고 Stenzel은 添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파이드로스편에서 입법자의 저술 활동에 관해서 언급된 내용은 플라톤의 主著와 연관된다.
15) 리시아스의 시각을 통해 글쓰기의 가치를 분석하고, 그리고 그 외에도 누가 언제 무엇인가, 즉 國家에 관한 著述 혹은 하나와 다른 저술을 한 명의 시인처럼 詩句 안에서 혹은 非時人的으로 韻律없이 쓰고 혹은 앞으로 쓰게 될 것인가 하는 파이드로스편 258d7-11의 요구를 마지막 단락 부분이 이행한다는 사실이 이를 통해서 이미 강조된다.
16) 플라톤의 대화편들 가운데 비워 둔 부분들(Aussparungsstellen)을 축소 왜곡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부분들을 매번 분리한 채 고찰하고 이것들 자체를 볼완전하게 번역하고 해석하는 한에서만 설득력 있게 작용할수 있다. 위의 각주 8번에 언급된 연구는 이러한 부분들을 각각의 대화편들 안에서, 그것들의 연관성과 더불어 그것들의 문맥 안에서 서로 논구한다. 비교. Th. A. Szlez?k, Unsterblichkeit und Trichotomie der Seele im zehnten Buch der Politeia, in: Phronesis 21, 1976, 31-58.
17) 비교. 국가론 488e4, 테아이테토스 195bc, 크라틸로스 401b7, 정치가 299b7, 파르메니데스 135d5.
18) G, Vlastos, Rez. zu Kr?mer, H. J.: Arete bei Platon und Aristoteles, in: Gnomon 35, 1963, 653.
19) Vlastos는 파이드로스 274b-278e를 논구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두분들을 이 대화편의 더 앞선 부분들과 연관지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20) 물론 소크라테스는 (이미 파이드로스편 228a에서처럼) 점잔을 빼면서, 그가 리시아스가 언급한 진리에 관한 것을 벗어나는 내용을 말할 수 없다고 맹세한다(236b7); 그는 리시아스의 연설이 내용적으로 능가할 수 없다는 파이드로스의 견해를 사전에 이미 논박했다(235b6-9).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연설은 두 개의 부분들 중에서 어떤 내용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분명하고 충분하게 보여준다.
21) 우리가 대부분 에로틱(Erotik)과 수사학(Rhetorik) 사이의 유추 안에서 대부분 발견했던 대화편의 동일성을 나는 여기에서 본다. 이러한 유추들은 있기는 하나, 부차적(sekund ?r)이다.
22) (언급되지 않은) Wittgenstein의 사유모델들(Denkmodelle)과 (인용되지 않은) 플라톤의 지적들을 反目시키기 위한 善(das Gute)에 관한 계속적인 논구에 관해서는 W. Wieland의 Platon und der Nutzen der Idee. Zur Funktion der Idee des Guten, in: Allegemeine Zeitschrift fur Philosophie 1(1976), 19-33, 특히 31-33 참조.
23) 슐라이어마허의 세 번째이자,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도 계속 영향을 미치는 예상, 즉 만족할만한 해결책에 대한 합일점을 찾지 못하는(aporetisch) 덕(Tugend)에 관한 대화편들의 형식과 《진정한 플라톤의 형식》을 동일시하는 것은 하나의 더 오랜 분석을 필요할 것이며, 오늘날의 연관성 안에서도 역시 주목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수 있다.
24) 대화편의 연대순과 진위 문제에 관해서는 서문의 29쪽 참조; Tennemann의 견해에 반대하는 논증으로써 대화형식(Dialogform): 서문 10ff.참조.
25) 그러나 한 가지의 다른 관점에 있어서 이미 H. J. Kr?mer는, 그가 플라톤의 모든 완성시기(Schaffenperiode)의 가장 중요한 대화편들 가운데 만나게 되는 비워 둔 부분들(Aussparungsstellen)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이러한 부분들의 기능적이며 부분적으로도 마찬가지로 언어적으로 동일한 종류임을 증명하면서(Arete bei Platon und Arstoteles, Heidelberg 1958, 389ff., 비교. 24, 316f. 484-486; Retraktationen rum Problem des esoterischen Platen, in: Museum Helveticum 21, 1964, 152-155; Epeikeina tes ousias. Zu Platon, Politeia 509b, in: Archiv fo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51, 1969, 23, 각주 67), 파이드로스 274b-278e 부분의 격리된 연구를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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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Thomas Alexander Szlez?k1)
튀빙엔대교수
관심분야 : 고대 희랍철학, 플라톤,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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