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사회생물학, 사회과학, 윤리학
2. 결정론, 환원주의, 진화론
3. 사회생물학과 진화론적 논증
4. 칸트와 도덕적 논증
5. 맺음말 - 다시 '새로운 종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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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中央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학술지명 人文學硏究
ISSN
권 34
호
출판일 2002.
사회생물학과 도덕적 진보
Moral Progression in the Philosophy of Social Biology
맹주만
(Maeng, Joo-Man)
2-046-0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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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생물학, 사회과학, 윤리학
인간의 행위를 다루는 대표적인 학문 분과로 윤리학, 사회과학 그리고 사회생물학을 들 수 있다. 특히 사회생물학은 다윈 진화론의 적자로 불리는 종합진화설에 바탕을 두고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사회생물학의 이러한 시도는 이미 다윈 이후 진화론에 의거하여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도덕적 원리 및 윤리 규범들을 설명하려고 했던 스펜서(H. Spencer), 사회다윈주의, 헉슬리(J.S. Huxley), 워딩턴(C.H Waddinton) 등의 노력과 동일선상에 서 있다. 시비를 일단 무시한다면,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있다면, 후자의 진화론적 자연주의 윤리설이 자연선택설에 따르고 있는 반면, 사회생물학은 그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강한 노선을 걷고 있는 사회생물학자들은 생물학적 진화과정 자체를 도덕적 가치를 포함하여 모든 가치 발생의 원천으로 간주한다. 이는 곧 단자(monad)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모든 것들에게 진화란 곧 진보임을 뜻한다.1) 열렬한 자연보존론자이기도 한 윌슨은 이 보다는 다소 온건한 노선을 걷고 있다. 하지만 그 또한 다원의 후예임을 자처한다.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기초하여 시도된 진화론적 윤리설에 비하면 사회생물학은 한 손에는 그 동안 발전한 분자유전학의 성과들을, 다른 한 손에는 풍부한 과학적 자료들을 들고서 전보다 훨씬 정교한 설득력을 갖춘 모습으로 등장한다.
윌슨에 따르면, 사회생물학은 "모든 사회행동의 생물학적 기초에 관해서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2) 사회생물학의 이러한 태도에는 지금까지 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이던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다양한 특성들이 생물학적 기초와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 주장에 따르게 되면, 사회과학을 넘어서 자연스럽게 윤리학 또한 독립적인 학문 영역으로 남기 힘들다. 만일 사회생물학의 시도가 성공할 경우 이는 다양한 형태로 제시된 자연주의 윤리설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던 윤리학의 오랜 숙원이라 할 수 있는 사실판단으로부터 가치판단(방위판단)의 연역가능성과 도덕판단의 객관적 기준 및 도덕적 구속력의 정당성 문제를 일거에 해소해버리는 쾌거를 이루게 될 것이다. 아마 윤리학에 대해서 거둔 승리는 당연히 사회과학 또한 무장해제 시키기에 족할 것이다.
이 글이 겨냥하고 있는 일차적 목표는 사회생물학이 과연 그러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평가해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편으로 사회생물학으로부터 윤리학의 독립성을 강변할 수 있는 대표적 인물인 칸트를 내세워 양 진영의 입장 차이를 분명히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를 평가하기 위해서 상호 공유할 수 있는 주제로서 "진보"와 "진화"를 매개로 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갈 것이다.
2. 결정론, 환원주의, 진화론
인간 행위의 사회적 특성을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에 기초하여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결정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거시적인 인간적 특성들과 현상들은 미시적인 요소들과 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 심지어 생물학적 결정론의 한 형태인 유전자 결정론에 의하면, 진화의 바탕을 이주고 있는 유전자만이 사회적 행동을 포함하여 개인의 모든 측면을 결정한다. 미시결정론(microdeterminism)의 한 형태인 생물학적 결정론에 의거하여 사회생물학은 생물학을 기초로 하여 모든 사회과학을 통합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때 이러한 통합의 핵심이 되는 이념이 바로 환원주의라 할 수 있다. 거시 현상의 미시 현상에 의한 결정 및 양자간 환원 관계의 성립은 사회생물학의 주장을 정당화해 줄 것이다.
윌슨을 포함한 일련의 사회생물학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감정을 대뇌연변계에서 이루어지는 전기화학적 작용의 반응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철학적 문제들은 일단 무시하면, 이들 환원주의적 접근은 인간의 의식적 선택, 자유의지, 윤리적 신념이나 문화적 전승과 같은 단어들이 들어설 여지를 별로 남겨 주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유전자-문화의 공진화를 지지하는 자료들은 인간의 윤리적 행동의 복잡성은 유전자와 물리적 반응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3)
그런데 생물학적 환원주의 전략이 의도하고 있듯이 생물학에 생명 활동의 표현체인 거시적 현상들의 환원적 토대요 근본학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달성하게 될 통일 과학이라는 원대한 목표는 전망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 단적인 예가 방금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의지적 특성과 관계하는 행위 영역들이다. 가령 윤리학과 같은 도덕적 행위 및 가치판단과 관계하는 현상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사회생물학의 궤도 수정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생물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비밀을 과학적 연구를 통해 죄다 해명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생명 현상을 지배하는 유전자 차원의 미시적 특성들이 인간의 사회적 특성을 결정하며, 동시에 양자간에는 환원 관계가 성립한다는 환원주의적 태도의 연장선상에 그 구체적 실천으로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위치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자연 선택과 성 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인 인간의 본성은 가변적, 개방적, 일시적, 우연적이다. 즉, 원칙적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은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사회생물학적 관점에서 인류의 도덕적 진보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진화론의 정통 이론인 종합진화설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생물학 역시 도덕적 진보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진화론적 인식론과 더불어 진화론적 윤리학이라는 이름 아래 도덕적 행동의 진화적 근원을 해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어 왔다.4) 그러나 만일 이들 시도가 타당하려면 통상 우리가 직관적으로 수용하고 도덕적 진보를 해명할 수 있는 생물학적 법칙성이 제시되어야 한다. 또한 설사 이런 법칙성이 제시된다 해도 우연과 적응으로 설명되는 진화라는 사건을 감안하면 그러한 법칙성이 곧바로 결정론을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진화의 본질적 성격이 바로 우연의 연속에 뿌리를 두고 있고, 따라서 과거는 물론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 확정적으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진화 사건 자체를 "결정론적 카오스"라 부르는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5) 그런 점에서 결정론 역시 하나의 사태에서 규칙성을 발견해내려는 과학적 가설 이상의 것이 아니다. 결정론자들은 단지 자신들이 발견한 규칙성을 무차별적으로 모든 현상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도덕적 진보는 제쳐 두고라도 사회생물학 진영에서 말하는 소위 진화론적(생물학적) 진보(진화) 역시 의문의 여지가 많다. 다윈 이론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논리적 분석가로 알려진 윌리엄스는 진화론적 진보를 입증할 수 있는 경험적 근거로서 유전 정보의 축적, 형태학적 복잡성, 적응의 효율성이라는 세 가지 후보를 거론하면서 그 정당성에 대한 반대 사례를 들고 있다.6) 가령 적응의 효율성을 따지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사피엔스에로의 진화를 인간에게 치명적인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은 바퀴벌레와 비교할 때, 오히려 바퀴벌레야말로 가장 훌륭하게 진보한 생물로 볼 수 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어떠한 타당한 이유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다윈의 진보관을 고찰한 과이어는 "다윈 역시 덜 완전한 것에서 보다 완전한 것으로의 진보와 같은 법칙의 존재를 부인했다"고 주장한다.7)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다윈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완전성을 향한 내재적인(intrinsic) 충동 같은 개념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8)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펜서나 몇몇 소수의 다원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생물학적 진화를 주도하는 진화론적 법칙을 유포하게 되었는가? 다윈 역시 부분적으로는 절대적 의미의 진보는 아니더라도 상대적 의미의 진보를 주장했다는 유력한 해석들도 적지 많게 제시되고 있다.9) 당시 인간의 행복 추구의 지침으로 자리잡고 있던 영국의 신학적 및 도덕적 원리를 생물학적 원리로 대체하려고 한 다윈주의자 스펜서는 "진보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며,... 인류는 여전히 변이를 겪고 있으며,... 변이는 완전성을 목적으로 하며,... 그러므로 인간은 더 완전해져야 한다."10)고 주장했다. 스펜서의 견해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일단 제쳐두고,11) 진화론적 진보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 진보를 함축하거나 반영하려면, 별도의 독립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3. 사회생물학과 진화론적 논증
하나의 가설로서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로부터 시작하여 생물학적 결정론에 의거하여 인간의 도덕적 진보를 논증하는 방식을 진화론적 논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증법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약한 의미의 증명 방식으로 과학적 사실이나 경험적 증거에 의거한 논증이며, 다른 하나는 강한 의미의 증명 방식으로 진화와 진보 사이의 법칙적 연관성을 통해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증이다.
우선 약한 의미의 진화론적 논증은 일반적으로 진화생물학에서 과학자들에 의해서 통용되는 방식으로서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성공하기 어렵다. 이 방식은 인간의 행위를 설명할 때 의도적 선택이나 지향성과 같은 인간의 의식적 특성을 자의적으로 진화나 유전적 특성에 일치시키려는 경향을 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경험적 자료들이 진화론적 전보와 도덕적 진보 어느 쪽이든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이러한 증거 부족이 참이라면,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견해인 생물학적 결정론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즉, 이런 식의 사회생물학은 미지의 사실로부터 기지의 사실을 추정하는 것이므로 비문화적 존재인 동물 사회생물학을 인간 사회생물학에 적용할 수 없다.12)
이러한 오류의 역사는 이미 오래된 일이다. 이전에도 다윈이나 스펜서 역시 '종 전체의 선', '사회개량론'과 같은 개념의 당위성을 더 이상의 객관적 논증 없이 가정했다. 이런 가정 위에서 그들은 진화가 곧 생물학적 진보, 나아가 도덕적 진보를 의미한다는 수사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실적 접근과 이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결과는 유전자 조작 같은 인위적 선택에 의거하여 불량 인자를 우량 인자로 교체함으로써 '문제의 소지가 적은' 조건을 조성하고 인간의 물리적 능력을 개선하여 '보다 나은 인간과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 될 것이다. 만일 이런 개량에 의한 실제 적용에 의해서 그것이 사실로 나타난다면, 이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을 통해서 입증해야 할 일인데,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며, 성공하더라도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가 다시 문제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강한 의미의 진화론적 논증에 의거할 수도 있다. 스펜서나 다윈이 지지했으리라 추정됨직한 데, 진화론적 진화와 인류의 진보를 하나의 이념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화와 진보간의 법칙적 연관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진화론적 진화는 인류의 도덕적 진보를 의미하며, 그것의 법칙적 연관성을 양자간의 환원 관계를 보임으로써 증명하는 논증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진화 현상이라는 발생적 사실에 대한 기술적(descriptive) 설명에 의도나 목적과 같은 인간의 의식적 특성과 관계하는 가치담지적 내지는 규정적(prescriptive) 개념들을 더 이상의 정당화 없이 끌어들이는 셈이다.13) 다시 말해 이처럼 사실 개념으로서의 진화로부터 가치 개념으로서의 진보를 도출하려는 추론 방식은 소위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를 피하고 환원적 전략이 성공을 거두려면 미시적 현상으로부터 거시적인 가치담지적 행위들의 발생적 필연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이러한 환원의 정당성은 다시 선행적으로 생물학과 사회학(혹은 윤리학)의 관계를 넘어서, 생물학과 물리학, 다시 물리학과 사회학(혹은 윤리학)의 환원 관계가 법칙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처럼 인간 행위 일반이 생물학에로 환원되어 의존적이 된다면 여기에는 인간의 이타심은 생물학적 특성의 표현에 불과하게 되며, 따라서 인간의 자율성에 기초한 도덕적 행위란 독립적인 지위를 상실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기껏해야 인간의 생존도를 높이기 위한 수단적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차원에서는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분포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친족간의 유대는 설명될 수 있으나, 이는 근본적으로 상대적 공유도가 낮은 타인이나 타집단과 공유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더욱이 친족 관계를 벗어난 타인에 대한 희생이나 봉사라는 도덕적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들에게 도덕적 의무란 생물학적 이타심을 기초로 하여 사회 구성원간에 발생하는 갈등과 대립을 사회적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잠정적인 장치에 불과하게 된다. 이는 곧 도덕판단의 객관성의 포기를 의미한다. 물론 더 이상의 고민 없이 이것을 도덕의 본질로 인정하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인적 차원의 도덕적 성숙이나 자각, 사회적 차원의 도덕적 진보와 같은 표현을 더 이상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없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도덕적 교육이란 그저 사회적 적응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생존 수단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하나의 대안은 인간의 의식적 특성 자체에서 친화의 과정에서 출현한 예외적인 한 능력을 상정하고 이로부터 도덕적 진보를 추론하고, 동시에 진화론적 진화와도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방식이다. 진화론 자체를 포기하는 일은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진화론을 수용하면서도 객관적 도덕성을 허용할 수 있는 방안이야말로 사회생물학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을 해결할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이 될 것이다.14) 필자는 이를 도덕적 논증이라 부르려고 한다.
4. 칸트와 도덕적 논증
인류는 도덕적으로 진보하고 있는가? 아마 우리는 진보의 문제를 경험에 직접 자문을 구하는 식으로는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직접적인 증명은 불가능하다. 그 단적인 예로 도덕적 행위를 인류의 진화 과정이나 결과로 보는 사람들, 즉 사실에 관한 서술적 의미의 진화를 도덕적 진보로 간주하는 자들 역시 이를 옹호하기 위해서 결국 비서술적 내지는 가치담지적 용어를 끌어들여 소위 목적론적 진화설에 귀착하고 말았던 전례를 들 수 있다.15) 그렇다면 생물학적 결정론에 토대를 둔 사회생물학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에 기대어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도덕적 진보나 도덕 교육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목적성을 갖는 가치가 발견되어야 한다. 칸트적인 도덕적 논증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도덕적 논증은 먼저 도덕적 의무의 객관적 구속력과 도덕적 진보(혹은 퇴보)를 하나의 경험적 사실로 전제한다. 이 논증은 소극적으로는 표준 이론으로서의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요청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상술한 경험적 사실을 입증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절차를 밟는다. 필자는 그 가능성을 칸트의 도덕적 견해를 매개로 하여 접근해 볼 것이다.
칸트적인 도덕적 논증법의 핵심은 목적(Zweck) 개념에 있다. 진화론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론틀 안에서 목적 개념을 허용할 수 없다. 칸트도 자연 세계에 대해서 목적 개념을 직접 적용하지 않으며, 적용할 수도 없다. 칸트에 따르면 목적이란 "객체의 개념이 동시에 이 객체의 현실성의 근거를 포함하는 것"을 이른다.16) 일반적으로 유럽적 사유 전통의 중심에 서 있는 목적론적 사유와 관계하는 목적(telos) 개념은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고, 다만 자체적으로 정립되는 것이며, 목적의 실현 역시 이에 따라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일정한 대상들을 합목적적인 것으로,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일종의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나타낼 수가 있다.17) 그런데 칸트는 자신의 선험 철학 안에서 전반적으로 이 개념의 권리를 약화시키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칸트에게 있어 자연 대상은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목적이 될 수가 없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만 자연의 합목적성(Zweckm?ßigkeit)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목적 개념에 실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는 유일한 경우는 다름 아닌 도덕적 목적이다. 그 이유는 (실천)이성만이 자기목적성을 산출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며, 그것의 다른 이름이 바로 도덕성(도덕적 이성)이기 때문이다. 즉, 칸트에게 도덕성은 이성의 자기 목적이다. 칸트가 도덕적 진보를 언급할 수 있는 정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칸트의 경우에도 도덕적 진보란 확정적으로 단정을 지을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다만 그는 장기적 안목에서 바라볼 때, 진보의 가능성이 - 따라서 퇴보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 더욱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려고 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자연 소질로 부여되어 있는 도덕적 소질, 즉 인간의 자유에 기초한 도덕성과 주체성, 다시 말해 도덕법칙의 사실성과 도덕적 행위 가능성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러한 도덕적 개념을 이성에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칸트가 계몽을 진보의 한 단계로 보려 했던 것도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이 도덕적 소질의 계발에 있어서 전 보다는 더 나아진 상태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인간의 도덕적 성숙이란 전적으로 자유를 본질로 하는 인간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이러한 본질을 최대한 발현하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거부할 수 없는 책무라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칸트는 때로는 지능, 재능, 기술과 같은 인류의 진보가 도덕성의 발달에 앞서 나가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이런 것들은 결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언젠가는 인간성의 도덕적 소질은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능가할 것이다."18)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칸트는 인간의 자연적, 생물학적 본성은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라 말라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기호와 관계한다. 칸트의 이러한 사고는 사회생물학을 통해서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칸트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적 행복이 아니라 어떤 행복이 가치 있는 것이며,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이다. 칸트에게 "도덕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이 가치 있는 것이 되는지를 가르치는 학문에 대한 입문이다."19) 가치 있는 행복 추구가 만일 유의미한 것이라면 우리는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있는 어떤 척도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생물학적 관점에서는 그것은 유전자의 생존과 증식을 촉진하는 선택으로 귀착될 것이고, 이는 생물학적 이타심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자연선택 이외에 또 다른, 일종의 인위적 선택을 허용하는 것인데, 이것은 다시 무엇으로 정당화할 것인가?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적 소질은 계발되어야 하며, "인간은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20) 자유로운 행위자요, 이성 능력을 갖춘 동물, 도덕적 소질을 소유한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이렇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은 부여받은 자연적 소질에 있어서는 도덕적 존재이지만, 어떤 인위적인 노력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칸트는 "인간에 있어서 자연적 소질의 발전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교육은 하나의 인위적인 기술이다."21)라는 점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칸트가 강조하는 교육 과정을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칸트는 자연적 교육의 소극적 과정으로서 동물과 공유하는 양육(Wartung; Verpflegung; Unterhaltung)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물성을 인간성으로 변화시키는 최초의 단계인 훈육(Disziplin; Zucht), 그리고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한 능력을 도야하는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육성(Kultur), 이를 사회 생활에 적용하는 능력을 키우는 개화(Zivilisierung)를 거쳐 최종적으로 그 자체로서 내면적인 가치를 지닌 인격적 도야로서의 도덕화(Moralisierung)의 단계를 밟는다.22) 그런데 이러한 교육 과정을 통해 실현할 도덕적 성숙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덕적 여건으로 칸트는 사회정치적 즉 문화적 성숙을 들고 있다. 이를 통해 칸트가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인간의 도덕적 성숙이란 순순히 도덕성과 자발성만이 아닌 사회구성원 공동의 문화적 과정 속에서 계발되고 연마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구이다. 즉, 칸트는 인성 발달의 여러 단계를 전제하고, 이러한 과정의 충실한 이행을 통하여 종래에는 도덕적 소질의 완성을 도모할 수 있지만, 그 선행 조건으로서 정치적(넓은 의미에서는 문화적) 자유의 실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러한 외부적 조건은 인간 자신의 인위적 노력으로 그리고 도덕적 성숙을 도모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진화론을 접할 수 없었던 칸트의 생각을 진화론의 문맥에 맞추어서 해석해 볼 경우, 그가 말한 도덕적 소질은 분자생물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유전자적 특성일 수도 있다. 즉, 칸트에게 도덕성은 인간의 선천적 본성에 속한다. 그런데 만일 인간의 도덕성이 유전자적 특성이라면 이는 진화의 압력을 받고 있는 그 무엇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칸트에게도 (생물학적) 진화가 곧 (도덕적) 진보라는 도식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선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성숙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진화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칸트는 도덕성을 모든 자연적 인과성으로부터 독립한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것은 발생적으로는 진화와 관계가 있다고 해도 그 성격에 있어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칸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화란 단지 인간의 도덕적 성숙과 인류의 도덕적 진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가능할 수 있는 가능한 물리적 조건에 불과하다. 칸트에게 도덕적 성숙이란 원칙적으로 진화와는 무관하며, 인류가 이룩해야 할 도덕적 진보와 관계할 뿐이다. 이와 같이 칸트에게 인간의 도덕적 소질은 그저 자연스럽게 발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계발 육성하여 충분히 발휘되도록 해야 할 무엇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칸트는 지상에 인간 스스로가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될 도덕적 문화를 강조하고 있다.
5. 맺음말 - 다시 '새로운 종합'으로
사회생물학자 윌슨은 자신의 저서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 Sociobiology: The New Synthesis』(1975)의 마지막 장을 '인간: 사회생물학에서 사회학까지'라는 제목으로 장식하고 있다. 이는 그가 보편적인 생물학적 원리를 사회과학에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사회과학을 생물학의 하위 분야로, 즉 인간의 사회적 특성과 행위를 설명하는데 별도의 독립적인 사회학적 원리는 필요하지 않으며, 생물학적 원리로 충분하다는 야심찬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저서에 또 다른 한 장이 덧붙여진다면, 그것은 '생물학에서 윤리학까지'가 될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를 『인간 본성에 대하여 On Human Nature』(1978)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생물학이 윤리학의 토대 학문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실패한다면, 이는 동시에 사회과학을 생물학에로 환원하려는 시도 또한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필자가 이해하는 한 인간의 사회적 행위들 증 일부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가치판단의 독립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최소한 그 부분에서는 사회과학과 윤리학은 한가지 동일한 조건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윤리학의 생물학에로의 환원불가능성은 부분적으로 사회과학의 생물학에로의 환원불가능성을 함축하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윌슨은 자신의 야심찬 기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순간에 머뭇거리는 신중함도 보여준다. 그를 주저하게 만든 문제는 바로 인간의 본성, 인간의 이성이다. 그에게 진화의 산물로서의 생물학적 이성, 즉 생존과 번식을 위한 다양한 장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이성은 인간 이해의 마지막 걸림돌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걸림돌은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든 시도를 좌초하게 만들었던 코 앞의 암초였다.
사회행물학자들과 진화생물학자들을 포함한 진화론의 후예들은 진화론(Evolutionslehre)과 진화주의(Evolutionismus) 양자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심연을 냉철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자연 목적론, 인간 본질론 등 굵직한 전통적 이념들을 무장해제 시켰던 진화론을 아무런 대책 없이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 역시 힘들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하여 필자가 도덕적 논증을 제시함으로써 그 일단을 보이고자 했듯이, 인간 행위 일반의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려면, 그것은 칸트적 자유 개념과 진화론의 양립 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는 포괄적 이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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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F.J. Ayala "The Evolutionary Thought of Teilhard de Chardin," in Biology, History, and Natural Philosophy, A.D. Breck and W. Yourgrau (ed.), New York: Plenum, 207-216쪽.; 같은 저자, "The Evolutionary Concept of Progress," in Progress and Its Discontents, G.A. Almond, M.Chodorow and R.H. Pearce (ed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06-124쪽.
2 E.O. Wilson, 『사회생물학 Ⅰ·Ⅱ』, 이병훈·박시룡 옮김, 민음사, 1992, 22쪽. 윌슨은 또 다른 곳에서 사회생물학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들의 사회적 행동 형태에 대한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체계적 연구"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E.O. Wilson, "Introduction: What is Sociobiology," in Sociobiology and Human Nature, M.S. Gregory, A. Silvers & D. Sutch (eds.), San Francisco/Washington/London: Jossey-Bass Publishers, 1979, 2쪽.
3 C.J. Lumsden and A.C. Gushurst, "Gene-Culture Coevolution: Humankind in the Making," in Sociobiology and Epistemology, J.H. Fetzer (ed.), Dordrecht/Boston/Lancaster: D. Reidel Publishing Company, 1985, 17쪽 이하 참조.
4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 Mohr, Natur und Moral. Ethik in der Biologie, Darmstadt, 1987.: R.J. Richard, "A Defense of Evolutionart Ethics," in Biol. & Philos. 1 (1986), 265-293쪽.: M Ruse, Taking Darwin Seriously. A Naturalistic Approach to Philosophy, Oxford/New York, 1986.: N. Tennant, "Evolutionary v. Evolved Ethics," in Philosophy 58 (1983), 289-302쪽.: G. Vollmer, "?ber die M?glichkeiten einer evolution?ren Ethik," in Conceptus 20 (1986), 51-68쪽.: F.M. Wuketits, Darwinism: Still a Challenge to Philosophy, in Zygon 23 (1988), 455-467쪽.
5 P. Sitte, "Strukturen und Funktionen lebender Systeme: Erkennung und Deutung," in Die Struktur lebendiger Systeme, W. Marx (hrsg.),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91, 20쪽.
6 G.C. Williams,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6, 34-55쪽.
7 E. Mayr, The Growth of Biological Though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531쪽.
8 E. Mayr, 같은 글, 532쪽.
9 이 문제를 포함하여 다윈의 진화론적 진보관에 대한 긍정적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RJ. Richards, "The Moral Foundations of the Idea of Evolutionary Progress: Darwin, Spencer, and the Neo-Darwinians," in Evolutionary Progress, M.H Nitecki(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129-148쪽.: M. Ruse, "Evolution and Progress," in Tree, 8/2 (1993), Oxford: Elsevier Science Ltd., 55-59쪽.
10 H. Spencer, Social Statics, London: Chapman, 1851, 65쪽.
11 스펜서 읽기는 다윈 읽기와 맞물려 있다. 다윈 역시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추방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화론적 진보에 대해서 어떤 확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는가 하는 점은 열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12 R.N. Brandon, "Phenotypic Plasticity, Cultural Transmission, and Human Sociobiology," in Sociobiology and Epistemology, J.H. Fetzer (ed.), 57-73쪽 참조.
13 J.F. Hanna, "Sociobiology and The Information Metaphor," in Socioviology and Epistemology, J.H. Fetzer (ed.), 31-55쪽 참조.
14 이에 대한 구체적 논증은 이 논문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이는 다른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현재의 논의의 초점은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인간의 도덕적 진보에 관한 진술이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사회생물학은 역부족이라는 점을 보이려는데 있다.
15 대표적인 인물로 스펜서(H. Spencer)를 들 수 있다.
16 I. Kant, Kritik der Urteilskraft, Einleitung XXVIII, Weischedel판 Ⅹ권, 89쪽.
17 J. Simon, "Subjekt und Natur. Teleologie in der Sicht kritischer Philosophie," in Die Struktur lebendiger Systeme, W. Marx (hrsg.), 105쪽. [ ]는 필자의 것임.
18 I. Kant, Das Ende aller Dinge, Weischedel판 XI권, 181쪽. [ ]는 필자의 것임.
19 I. Kant, ?ber den Gemeinspruch; Das mag in der Theorie richtig sein, taugt aber nicht f?r die Praxis, Weischedel판 XI권, 131쪽.
20 I. Kant, ?ber P?dagogik, Weischedel판 XII권, 697쪽.
21 ?ber P?dagogik, 703쪽.
22 ?ber P?dagogik, 706-7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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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맹주만
(Maeng, Joo-Man)
중앙대 철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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