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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종교들을 비교한다는 것

온울에 2008. 5. 7. 03:25

목 차

Ⅰ. 비교의 정의와 태도
Ⅱ. 비교 대상과 비교 주체
Ⅲ.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구조적 유사성
Ⅳ. 이해의 제한성과 비교의 한계
Ⅴ. 깊이의 비교
Ⅵ. 비교의 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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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韓國宗敎敎育學會 
학술지명 宗敎敎育學硏究 
ISSN  
권 15 
호  
출판일 2002.  




종교들을 비교한다는 것


A Comparative Method : between Buddhism and Christianity


李贊洙
(Yi, Chan-Su)
3-398-0202-14

국문요약
비교는 비교되는 두 사물 내지는 현상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 및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비교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과정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비교는 비교 주체의 이러한 제한성, 그의 ‘선입견’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객관적인 비교는 없다. 그러면서도 비교 주체의 주관성이 지나치게 개입해 독단적이고 편파적인 비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종교 분야에서는 어떻게 해야 적절한 비교가 될 수 있을까?

외적 다양성을 살리면서 각 전통이 지니는 깊이의 비교, 구조적 유사성을 비교하는 것이 한 가지 예이다. 이 유사성은 온갖 차별적 언어들로 포장되어 있다. 이 포장은 양파와도 같아서, 포장을 뜯어 대번에 확인할 수 있는 내용물이 따로 있지 않다. 계속 껍질뿐이다. 그럼에도 그 껍질들이 모여 양파라는 실체를 이루듯이, 종교라는 알맹이는 일정한 의미를 지닌 다양한 표현들의 체계, 즉 구조로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이 구조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이 구조 안에 각 전통의 바닥 모를 깊이가 들어있다.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이 깊이 위에서 이 깊이에 맞게 저마다 세계를 해석하면서 저마다의 전통을 이루어간다. 깊이가 역사로 표현되면서 역사 안에 갇히지 않는다. 두 종교는 이러한 깊이에서 서로 만난다. 이러한 깊이의 비교를 통해 내용적 차별성이 단순한 차별로만 남지 않고,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보적(相補的)이고 상관적(相關的)인 이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영문요약
Comparison is to work in order to clarify and disclos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the meaning of them, between two or more objects, ideas etc. The process and result of this works might be changed by the preconception of whom clarifies and discloses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the meaning of them. Paradoxically speaking, however, a true comparison is possible only through the preconceptions, limitations of whom compares one with another. But the preconceptions of him must not be connected to arbitrary and unfair comparison. How could a fair comparison in religious tradition be possible?

An alternative is the comparison in the dimension of the depth, structural similarity of each tradition, putting life into a diversity and distinctness of them. This similarity is contained in the different languages of each tradition. This languages, outer expressions is like an onion. Just as an onion consists of the multi coats, so a religion consists of a system of various expressions i.e. a structure. Buddhism and Christianity have a similarity in this structure. This structure has a depth which has no bottom. Both religions interpret the world on this depth which expresses itself as a history, and yet it cannot be restricted in the history. Both religions meet in the dimension of depth. Understanding of the characteristics and differences of both religions attained by this comparison of the depth becomes an complementary and correlative understanding of the Ultimate reality.


한글키워드
비교, 유사성, 차별성, 구조, 깊이
영문키워드
comparison, similarity, difference, structure, dep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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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비교의 정의와 태도
비교(比較)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 "비교"란 "두 개 이상의 사물을 견주어 서로간의 유사점, 차이점 따위를 고찰하는 일"이다. 1) 이 때 비교되는 둘 이상의 사물은 서로 다른 것들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것들을 한 자리에 가져와 견준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전적으로 다른 것이기만 하지 않고, 공통되는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당초 서로 다르기만 했다면,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을 터이다. 가령 "코끼리와 돌멩이의 비교", 문학적인 접근이 아닌 다음에야 비교 대상들 간 거리가 워낙 멀어 애당초 한 자리에 놓일 일이 거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처음부터 확연히 같은 것이라고 간주되더라도 비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돌멩이와 돌덩이의 비교", 그게 그놈이라 비교의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다. 무언가를 비교하고자 하는 행위는 대상들 간에 차별성과 상통성이 공존하고 있으되, 아직 그 관계가 모호할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견상 뚜렷한 차별성 속에서 느껴지던, 아직은 모호한 상통성 내지는 유사성이 대립과 갈등으로 아파하고 있는 우리의 삶에 조화와 일치라는 유용한 의미를 던져줄 수 있겠다고 판단되었을 때 비교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일지라도 서로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 처해 있으면서 이들 시대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가 불분명하게 느껴질 때도 비교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다. 굳은 선입견 속에 갇혀서 동일성만 볼 뿐 끝없이 변화하는 사물의 다양한 측면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을 때, 이들 간의 차별성을 밝히는 일도 중요한 비교 행위인 것이다. 한 예로 역사적인 예수와 21세기 일반 한국인이 느끼는 막연한 그리스도 도그마는 결코 똑같지 않다. 역사적 예수와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상제’(上帝)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예수를 비교함으로써 동일존재인 듯한 이들 간에도 차별성이 있음을 밝히는 작업 역시 적절한 종교간 비교 행위이며, 원시 인도 불교와 한국 혹은 일본적으로 토착화한 민간 불교 사이의 비교 역시 긴요한 일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비교는 무엇보다 비교되는 두 사물 내지는 현상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제대로 보고서, 차별적인 것은 차별적인 그대로, 유사한 것은 유사한 그대로 드러내고 정리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 무엇이 공통적이고 무엇이 개별적인지, 그 개별성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공통성을 찾아 정리하는 작업, 더 나아가 그 공통성과 개별성에 담긴 중요한 의미까지 드러내고 정리하는 작업이 비교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공통점을 드러낸다며 비교 대상들이 지닌 기존의 독특성과 차별성을 상실시켜버린다면 그것은 적절한 비교가 아니다. 공통점을 드러내면서도 개개의 독자성을 끝없이 유지해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아니 비교라는 작업 자체가 비교 대상들의 본래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가장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전제를 지니는 행위이다. 비교철학자 라쥬(P.T.Raju)가 비교 연구의 의미를 주로 인간의 공통적인 본성, 공통분모, 동질성 등을 밝히는 데서 찾고 있지만, 2) 이것은 자칫 비교 대상들의 개별적 독특성을 희석시켜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 공통되고 유사한 그 무엇이 있을 때 비교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해도, 반드시 비교되는 사물을 그 사물되게 해주는 독특성과 차별성을 견지하는 가운데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을 미리 의도한 짜맞추기식 비교 작업은 비교 대상을 기만하고, 그 개체성을 파괴시키는 행위이다. 비교 대상은 사라지고 독단적 비교 주체의 오만한 의도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들의 비교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자세인, 배타적 호교론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자기 우월적 비교는 이미 비교가 아닌 것이다. 3)

Ⅱ. 비교 대상과 비교 주체
물론 비교 대상이 하는 말은 비교 주체 안에서 들린다. 그런 점에서 비교 행위에는 이미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을 그 유사점과 차이점으로 진단하는 비교 주체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유사하고 저런 점에서 상이하다고 판단한 비교 주체의 시각이 있음으로써만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행위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비교 행위는,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표현을 따르건대, 비교하는 주체의 ‘선입견’이 이미 개입된 사건이라는 뜻이다. 비교하는 행위에는 언제나 비교 대상들은 물론 비교 주체까지 포함되고, 따라서 비교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비교의 과정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비교 주체 역시 홀로 순수하게 있지 않고 기존의 지평 안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비교는 비교 주체의 이러한 제한성, 그의 ‘선입견’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기존의 사회-문화적 지평에 제한되어 있는 곳에서만 바로 그 제한성을 통해 비교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가 독자 혹은 청자는 물론 비교 주체 자신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변화하면서 비교 주체와 그가 속한 사회의 정체성도 유지되어 나간다. 이것이 비교되는 대상들로부터 나오는 목소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현장이다. 인도의 불교가 ‘격의적’(格義的)으로 중국화하면서, 다시 말해 인도 불교의 ‘공’(空)이 노장(老莊) 사상의 ‘무’(無)와 같은 것으로 ‘오역’되면서, 불교가 중국 안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역설이 그 한 예이다. 노장 사상식 지평에 익숙한 중국인 번역자가 인도의 공과 노장의 무를 비교하면서 오해된 도교적 불교로 인해 인도의 불교는 비로소 중국 안에 이해되고 소개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4)

사회-문화적 진공 속에서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자기동일적 본질이란 없다. 순수 중립적인 비교의 주체, 공평무사하고 순수 객관적인 비교란 것도 있을 수 없다. 보편성을 주장하려 해도 특수성 안에서만 할 수밖에 없고, 공평하고자 하지만 이미 공평할 수 없는 자리에 서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히 비교하는 작업의 한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작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특정 입장에서 비교되지 않고서는 영원히 비교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사유가 바로 나와 다른 것,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비교하고 나의 것으로 동화시키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단적이고 편파적인 비교가 되어서도 물론 안된다. 중립적이고 순수한 비교가 없다 하여 모든 결론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가다머가 타자에 개방적이지 못한 독단적 권위를 경계했듯이, 비교 주체의 지평을 절대시하는 데서 오는 결론은 정당화될 수 없다. 특정 입장에서 비교되더라도 내려진 결론이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을 지켜져야 한다.

첫째, 비교 주체의 유한하고 제한된 지평을 남에게 강요해서 인위적이고 예정된 결론을 이끌어내려 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말한대로 배타적 호교론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비교는 이미 비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비교의 결과 앞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그 결과 앞에서 비교 주체의 선입견도 달라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비교 대상 자체를 존중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비교 대상 앞에서 진지할 때에만 그 대상의 차별성과 유사성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텍스트가 하고자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그것이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비교 대상들 간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새로운 의미도 발생하고, 그로 인해 비교 주체도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주체는 변화하지 않고 대상의 변화만 바라고 고집하는 것은 독단이다. 저마다의 독자성, 드러난 차이를 그 차이로서 긍정하고, 자신 안에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변화할 때 이러한 변화가 자신이 속한 전통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전통으로부터 다시 영향을 받으면서 그 전통의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전체 역사가 되는 것이다 - 이 점에서는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의 종교 전통 이론과 다르지 않다. 5) 비교 주체의 선입견이 전제되어 있다고 해서 비교 대상이 왜곡되고 마는 것은 아니다. 비교 주체가 참으로 열린 자세를 견지할 때 그 선입견은 편견이 아니라 창조적 전이해로 작용한다. 그 때 그 대상을 가장 잘 보고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Ⅲ.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구조적 유사성
가령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비교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적인 말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불교는 불교적인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와 불교 간에 유사점을 밝히기 위한 작업도 각각의 차별적인 언어를 중시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유사성은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적인 말을 하고 불교가 불교적인 말을 하는 곳,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로 불교는 불교로 유지되어 가는 곳에서 드러난다. 이렇게 드러나는 유사성은 차별성을 담지한 유사성이다. 차별성을 담지한 유사성이기에 그 차별성과 유사성은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가령 모든 인간은 미세한 지문조차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 불리는 그 무엇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거나 한편 동일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가에 대해 철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규정해볼 수 있겠으나, 그것이 이번 글의 관심사는 아니다. 다만 인간을 인간되게 해주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대번에 인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듯, ‘인간 현상’에는 공통점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더 좁혀 세포학적으로 인간과 원숭이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인간 중에는 간혹 원숭이만 못한 사람도 있고, 또 유전적 이유로 인해 원숭이처럼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적어도 생물학적으로 인간만의 고유한 본질을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공유하는 그 무엇은 어떤 특정 차원에서 획일적으로 규정될 수 있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욱이 체세포 복제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모호해질 경우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 글은 이러한 경계를 분석하거나 명확히 하자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종교들의 비교 문제를 다루는 이 글의 언어는 일단 일반적인 언어 습관을 중시한다. 한 가족의 구성원이라면 다른 가족 구성원에 비해 가족끼리의 유사성을 공유할 가능성이 크면서도 구성원 개인별로 차별성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구성원 간 ‘가족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구체적인 성격이나 생김새에서는 차별성도 있다. 확대해 보자면, 인종과 종족은 다를 수 있겠으나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의 공통성도 있다는 것이다. 모두 다 차별성 속에 유사성 내지는 공통성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전술한대로 이 때의 유사성과 차별성은 대립적이지 않다. 너와 나가 서로 다르면서도 늘 붙들고 싸우기만 하는 것은 아니듯이, 나와 너는 서로 다르면서도 대화를 통해 서로의 내면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듯이, 차별성 속에 담겨있는 공감의 세계가 인간 사회를 유지해가게 하는 기초인 것이다. 종교 현상도 다르지 않다. 종교들 역시 다양하면서도 이와 같은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립적이지만은 않은 유사성을 지닌다. 이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아직 서로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면서도 대립과 갈등으로만 치닫지 않게 되는 것이다. 종교들의 비교는 저마다의 고유성을 중시하는 가운데 서로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이런 근거를 찾아 정리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과연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겉보기에는 그리스도교적 언어와 불교적 언어가 상이하고, 지향하는 세계관이 현저하게 달라서, 이들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으리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불교(동양)는 직관적이고 그리스도교(서양)는 지성적인 경향이 있다는 일반적인 주장 외에도 6)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교는 이 세계의 기원과 근거를 인격적 유일신에게서 보는 반면 불교는 존재하는 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하면서 일체의 기원적 존재, 인격적 신을 거부한다. 그리스도교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신의 주도권을 보고 신과 인간 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을 주로 말한다면, 불교는 주도권을 쥔 어떤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일적이고 우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극적 실재와 인간 사이에서 주로 가역성(可逆性)을 본다. 인간이 아무리 신을 깊게 체험한다고 해도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 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는 반면, 불교에서는 원천적으로 인간과 부처의 동일성에 대해 말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분명히 갈라진다." 7)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여 이러한 차별성을 밝히고 정리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본적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상사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 세상을 세상 되게 해주는 근본 원리 내지는 가르침을 선포하면서, 그 근본 원리를 체현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큰 테두리에서 서로 만난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이들은 각박하고 이기적인 세상사에 찌들려 있는 인간들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이타적 삶의 전형을 제시하고 그 근거에 대해 말한다. 한 마디로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구원의 길을 제시한 구원의 종교라는 점에서 이들은 근본적인 형식적 일치를 보인다." 8) 구원 자체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모두 세상으로부터의 초월과 자유를 추구"하며, "눈에 보이는 현실에 종속되어 이기적 탐욕에 몰두하는 비본래적 삶을 거부하고 하나의 새로운 존재, 본래적 인간상을 되찾으려는 동일한 관심을 소유하는" 종교들이다. 9)

이타적 인간상, 세속 안에 살면서도 그로부터 초월해 살아가는 삶을 이상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구조적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앞 표현에서처럼, 큰 틀에서 ‘형식상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고도 하겠다. 그리스도교와 불교 만이던가? 유대교, 이슬람은 물론, 유교, 도교 등 동·서양 대표적 종교들, 천도교, 원불교 등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들도 원칙적으로는 대부분 그곳에서 만난다. 이들 모두 현재 드러나 있는 일상적 현실은 그 일상을 일상되게 해주는 원천적 진리와 사실에 근거해 있음을 선포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원천적 진리와 사실을 주체적으로 수납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데서 ‘구조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10)

예를 들어 보자. 선불교적 입각점에서 동·서양의 창조적 융합을 모색하는 철학자 니시타니(西谷啓治)는 원래 깨달아 있고 일체의 대립과 차별을 초월해있는 인간의 "본래 진면목"(本來 眞面目)을 중시한다. 대승불교의 기본 입장에 따라 그도 신분이나 종파에 관계없이 본래 깨달아 있는 인간의 기본 처지를 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다. 만물은 모두 "공(空)의 장(場)" 안에서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따라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다양하고 차별적인 모습들에 집착하지 않고서 일체 사물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새로운 인간상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이 공의 입장에서 만물의 근원적 자기동일성을 본다. 그러면서 그 근원적 동일성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청한다. 불교적 전통에 어울리는 니시타니적 인간 규정이라 할 것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마찬가지이다. 20세기 최대의 가톨릭 신학자인 라너(Karl Rahner)는 은총의 보편성에 대해 말하면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들어 높여져 있음을 신학의 출발점이자 결론으로 삼는다. 인간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천적인 측면, 신의 은총으로 고양된 인간의 본래적 양심에 대해 말한다. 그러면서 그 양심의 빛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며 창의적으로 규정한다. 누구든 하느님으로부터 울려나오는 이 깊은 양심의 세계를 현실의 삶 안에서도 구체화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선불교식으로 말하면, 부처로서의 자신의 본 모습을 깨닫고(頓悟), 구체적으로 그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漸修)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 보건대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인간에게 원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진리와 그 진리의 구체화라고 하는, 구원론적 구조에서 유사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조상의 유사성, 형식상의 공통성이지, 진리 자체의 동일성은 아니다. 진리 자체 혹은 내용상의 동일성이라고까지 말하기는 힘들다. 여전히 ‘유사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을 인간되게 해주는 그 무엇이 있고, 가족을 가족으로 보게 만드는 유사성도 있지만, 온 식구가 다 똑같은 사람은 아닌 것처럼.... 세계의 대 종교 전통들 역시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굳이 내용이라는 말을 쓴다면, 진리를 표현하는 형식상의 유사성 안에서 내용적 유사성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 내용적 유사성이라 함은 저마다 개인적으로 공감된 유사성(similarity)이지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확인된 동일성(sameness)이 아니다. 이 유사성은 온갖 차별적 언어들로 포장되어 있다. 이 포장은 양파 껍질과 같다. 포장을 뜯어 대번에 확인할 수 있는 내용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계속 껍질뿐이다. 그럼에도 그 껍질들이 모여 양파라는 실체를 이루듯이, 종교라는 알맹이는 일정한 의미를 지닌 다양한 표현들의 체계, 즉 구조로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다양한 표현들의 일정 체계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할 때는 이런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이 불교를 보는 관점은 물론 불자가 그리스도교를 관점도 충실해진다. 이들 사이의 차이는 바로 그 차이로 충분히 살려야 한다. 차이에 우열을 두거나 어느 한 쪽을 무시 또는 배타해서는 안된다. 차이를 차이로 볼 수 있어야 서로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Ⅳ. 이해의 제한성과 비교의 한계
다시 말하건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해서 내용적으로 동일하다는 결론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내용적 동일성을 판단해줄 제3의 근거는 없다. 내용은 외적 표현 내지는 그 표현들의 일정한 의미 체계를 통해서만 전달되는데, 많은 경우 그 표현들이 차별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깊이의 세계에 동시에 들어가 탐구한 뒤 이 두 종교는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해도, 그 말을 알아듣는 이 역시 저마다 다양하게 제한된 지평 안에 있으며, 그 지평을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알아듣기 때문에, 내용의 동일성이란 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당에 내용이 유사하는 주장들은 동일 수준에서 보편적인 공감대를 가지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령 아무리 니시타니가 모든 인간은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상관없이 이미 깨달을 것도 없이 완성되어 있다고 하는, 인간의 본래적인 측면, 본래적 자기에 대해 강조한다 해도 공, 깨달음 등의 표현을 써서 하는 한, 그것 역시 불교적 깊이에 어울리고 불교 안에 적용되는 인간 규정일 수밖에 없다. 흔히 이런 입장을 두고서 대승불교 전통에 입각하고 서양사상에 개방함으로써 동양과 서양 간에 "차이를 넘어선 일치"(a unity beyond differences)를 추구한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11) 이 때의 "일치"란 여전히 니시타니적 시각에서의 일치, 더 나아가 불교 철학적 시각에서의 일치일 수밖에 없다. 그의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는 있겠으나, 동·서양 사상가 모두, 더욱이 대다수 그리스도인까지 동의하는 일치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니시타니가 동·서양 사상 간의 일치, 한 걸음 물러서서 동·서양 사상의 융합 및 조화를 도모한다고 해도 그것은 역시 불교철학적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니시타니는 역시 불교 철학을 강하게 대변하며, 불교 안에서 더욱 설득력을 얻는 입장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라너가 본래 들어 높여져 있는 모든 인간의 은총적 현실에 대해 말하고, 양심의 빛에 따라 사는 신실한 이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며 창의적으로 규정한다고 해도, 그가 하느님, 은총 등의 표현을 써서 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교 안에서만 적용되는 그리도교적 인간 규정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그리스도교인에게 적용되는 타종교인 규정이다. 라너나 니시타니의 언어는 결국 각각 그리스도교와 불교적 깊이 안에서 주로 적용되는 언어, 주로 그리스도교와 불교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체험을 발생시킬 수 있는 언어이지, 양쪽 모두에 보편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언어가 아니다. 그 누군가 이러한 깊이를 탐구하고서 이들은 결국 동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더라도 그러한 결론이 참으로 정당하다고 판단되는 지평은 그리스도교적이든 불교적이든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는 지평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라는 당면한 지평을 떠나, 라너와 니시타니가 말하는 종교적인 내용이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제 3의 지평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과연 종교들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며 의심하는 이들의 뜻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가령 오다가키(小田垣雅也) 같은 이는 기본적으로 종교들간 비교란 불가능한 과제라는 입장을 천명한다. 비교란 기본적으로 주관-객관 도식 하에서만 가능한 반면, 종교의 세계는 주-객 도식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다가키가 보는 비교란 그리스도교와 불교라는 지평을 떠난 제3의 입장에 설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이 제3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대상화해서 보는 까닭에 정작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신앙 자체는 사라지고 이들의 신앙을 대상논리적으로 판단하는 비교 주체의 입장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

이러한 입장은 한편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내용 비교와 같은 것을 전제할 때 그렇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종교적 내용을 대상화시키려 의도하다 보면, 오다가키가 걱정하는 대로 신앙 주체의 모습은 사라지고 비교자가 이들의 주인으로 등장할 위험성이 커진다. 내용(內容)은 어떻든 ‘안에 담긴 것’이며, 따라서 어떤 이의 어떤 그릇 안에 담겼느냐에 따라 사실상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내용으로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이의 주관적 입장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것이 내용이다. 니시다(西田幾多郞)가 말하는 ‘순수경험’의 세계처럼 13) ‘내용’이라는 것은 개인의 내적 체험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공표되는 순간 본 모습은 어느 정도 위축되고 희석된다. 그 마당에 종교들의 비교에서는 자칫 비교 주체의 의도만이 수면 위에 떠다니고 정작 종교들 자체는 사라져버릴 위험성도 크다는 오다가키의 우려는 한편 옳다.

동시에 모든 비교에 이러한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위험성을 읽지 못한 채 주관적 이해만을 판단의 잣대로 들이대는 것은 당연히 옳은 비교의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위험성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결코 비교라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적나라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그 위험을 통과하되, 그 위험이 줄 수 있는 왜곡을 최소화하면서 창조적 이해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비교 대상 앞에 진지해야 한다. 다양한 표현들이 지시하는 너머의 세계에 대한 성급한 속단을 피하고 표현 자체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훗설(E. Husserl)이 제시하듯, 현상(phenomena)이 말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상이 하는 말을 듣는 귀 역시 이미 제한적 지평 위에 있다. 그런 점에서 ‘순수 현상’이란 가능하기는 하지만 공허한 개념이다. 제한적 지평 안에 단순히 제한되도록 하지 않고, 그 현상이 제대로 더 분명하게 말하도록 다양한 표현들의 체계를 잡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현상의 구조를 살피는 일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그곳에 이미 비교 주체의 선입견이 개입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외적 표현들의 체계, 즉 구조(構造)에 초점을 두면 비교적 그러한 위험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가령 니시타니의 철학과 라너의 신학은 모두 표피적인 일상으로부터의 초월과 다시 진정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이상적 인간상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사상은 동·서양 종교의 대표 주자인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상이한 전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구조적 유사성을 지닌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비교 주체가 지닌 주객도식적 선입견의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진 비교 행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Ⅴ. 깊이의 비교
이러한 구조적 비교가 적절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불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를 적절히 드러내려면,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적 삶의 ‘깊이’와 불교적 삶의 ‘깊이’를 조명하고, 저마다의 삶의 깊이가 현실 안에서 구체화하는 모습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는 심판자로서의 기능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거의 예외적으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양쪽 모두에 동의를 얻을 수 없을 제 3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모두의 고유한 종교적 깊이를 충실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깊이’는 이른바 종교 전통이 지닌 횡(橫)적이고 종(縱)적인 측면 가운데 주로 종적인 측면에 대응하는 말이다. 전통의 횡적인 측면이 상이한 언어들 및 종교적 내용의 외적인 표현들을 포괄하는 현상적이고 수평적인 넓이의 차원을 말한다면, 종적인 측면은 그 상이한 언어들을 통해서만 드러나면서도 그 언어들에 가치와 생명력을 주면서 그 언어들을 언어되게 해주는 원천적이고 실존론적인(existential) 근거이다. 이 근거는 구체적인 역사의 주인이다. 일체의 역사적 다양성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깊다. 그것은 일체의 상이한 언어들조차 수용하고서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원천적인 능력인 것이다.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원천적으로 이러한 깊이의 종교이다. 극단적인 고행자든 신비가든 자신의 세계 해석의 기초 내지는 수행의 근거를 이렇게 바닥 모를 만큼 깊은 진리의 세계에서 찾는다. 자신을 받쳐주는 진리는 세상 모든 것을 포괄하고도 남을 만큼 깊다는 믿음에 따라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구체적인 역사의 주인이면서도 말 그대로 ‘주인’이기에 그 구체적인 역사에 매이지 않는다고 믿는다. 역사로 표현되면서 그 역사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역사적 차원과 불연속적이면서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연속되는, 역사적인 차원의 실존론적인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은 역사 안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열반경>의 표현대로 모든 중생에는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한다면, 그리고 바로 그 불성이 고타마 싯달타에게서 전적으로 구체화되었다고 한다면, 그 때 모든 중생에 부여되어 있는 불성의 세계, 그것이 불교적 깊이의 차원이다. 그 불성이야말로 역사를 불교적으로 보게 하는 근거이다. 일체중생을 일체중생되게 해준 실존론적인 근거인 것이다. 14)

그리스도교적으로 하면 하느님께서 원천적으로 인간과 함께 하신다(Immanuel)는 근원적인 사실의 세계이다. 타키자와(瀧擇克己)의 표현대로 하면, 신과 인간의 "제일의 접촉"(第一義の接觸)이의 세계이다. 15) 다른 이에 의해 긍정되든 부정되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할 때의 그 근원적인 세계, 이미 마련되어 있는 선행적인 사실이다. 인간이 인간을 존중해야 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이며, 따라서 어떤 인간에게도 다른 인간을 억압할 권리가 원칙적으로 없다. 그 반대로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소아적 자기중심주의를 넘어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고자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근거도 이러한 원천적 사실에서 비롯된다. 무한하고 영원한 하느님이 인간과 늘 같이 한다는 사실이 인간 본연의 모습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은 그러한 본연의 모습에 어울리게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이미 주어져 있는 본래의 세계가 은총의 세계이다. 이 은총의 세계는 그리스도교를 세계의 보편적인 종교가 되게 해주는, 깊이의 차원이다. 이 은총이야말로 일체 역사의 그리스도교적 근거이다.

이러한 깊이는 불교나 그리스도교라고 이름 붙여진 세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나 있다. 가령 한국의 종교적 현실을 보자.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고 할 정도의 종교백화점 국가이다. 전 세계의 대 종교전통이 거의 다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의외로 그 종교들로 인한 충돌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다. 왜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변에는 다양한 종교들을 수렴시키면서 한 언어를 사용하며 살게 하는 통일적이고 심층적인 근거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6) 그 근거가 앞의 표현대로 하면 한국적 정신의 깊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겉으로는 상충되는 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깊이 위에 서 있기에 서로 조화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세계는 워낙 깊다. 그것은 저마다 세상을 해석하게 해주는 근거이다. 한국인이라면 이 깊이 위에서 세상을 진단한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이 깊이는 불교를 보면서 불교 역시 인간 구원의 종교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교적 근거로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불자에게는 그리스도교를 보고서 그리스도교 역시 인간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구제의 종교일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해주는 불교적 근거로 작용한다. 이 깊이가 단순히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인지 묻는 것은 본 논문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이러한 근거 위에서 저마다의 생명력을 유지해나간다는 사실, 그 구조적 유사성에 초점을 두고 있을 뿐이다. 상이한 언어들을 비교 고찰하면서도 그 다른 언어 안에서 탈은폐되는 인간의 구원론적 구조는 비슷한 깊이의 것이 아니겠는가 하며 느끼게 해주는 이런 식의 작업을 ‘깊이의 비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Ⅵ. 비교의 예들
깊이의 비교에서는 비슷한 깊이를 드러낸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서로 다른 언어들도 비교의 주제로 삼을 수 있다. 가령 그리스도교의 ‘신’과 불교의 ‘공’을 비교할 수도 있고, 17) ‘하느님 나라’와 ‘열반’을 비교할 수도 있으며, 18) ‘예수’와 ‘보살’을 비교할 수도 있고, 19) ‘그리스도의 몸’과 ‘보신불’(報身佛)을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인호칭기도와 불보살들에게 대한 기도를 비교할 수도 있다. 미사 중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는 가톨릭 성인호칭 기도의 일차적인 기도 대상은 여러 성인들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기도와 그 깊이에서는 다르지 않다. 하느님께는 간절히 기도하고 성인들에게는 대충대충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향해 어떻게 하든 진지해야 기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인호칭 기도와 여러 불보살들에게 드리는 기도는 그 대상은 다른 듯 하지만, 바라는 마음의 깊이는 그다지 차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불보살들과 가톨릭 성인들의 이름은 다르지만, 염원의 마음, 자세에서야 뭐 그리 다르겠는가. 이렇게 그다지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상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어떻든 이들을 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종교인의 신앙적 깊이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하느님의 세계로, 불자는 불성의 세계로 받아들이면서 세계 해석의 기초로 삼는다. 표현에서는 문화적 다양성과 차별성이 드러나고, 교의적 표현 내지는 세계관에서는 상반되는 듯한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인간 구원의 차원에서는 저마다 비슷한 깊이를 지닌, 동·서양의 대표적 종교 전통임을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 깊이의 비교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에게서 각각 보이는 내용적 차이성을 단순한 차이로만 남겨놓지 않고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보적(相補的)이고 상관적(相關的)인 이해로 이끌어준다. 이 깊이에서 종교들은 만난다. 그래서 하나의 깊이에 제대로 들어가면 다른 깊이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깊이의 비교의 결과가 비교 주체는 물론 그가 속한 전통까지 변화시켜준다.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풍요롭게 해준다. 저마다 고유성이 유지되면서도 그리스도교에게 불교는 더 이상 ‘타’종교로서 대립하지 않고, 불교에게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타’종교로서 대립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태의 본질을 꿰뚫은 것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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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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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타니 케이지, 정병조 옮김, 『종교란 무엇인가』, 서울: 대원정사, 1994.
P.T.라쥬, 최흥순 옮김,『비교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광사, 1989.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길희성 옮김, 『종교의 의미와 목적』, 왜관: 분도출판사, 1991.
폴 틸리히, 정진홍 옮김, 『기독교와 세계종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7.
瀧澤克己, 『佛敎とキリスト敎』, 東京: 法藏館, 昭和 46.
小田垣雅也, 『哲學的 神學』, 東京: 創文社, 昭和 58.
Donald S. Lopez, Jr. ed., Buddhist Hermeneutic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8.
Frederick Franck ed., The Buddha Eye: An Anthology of the Kyoto School, New York: Crossroad, 1982.
Hans-Georg Gadamer, Wahrheit und Methode, Tubungen: J.C.B.Mohr, Paul Siebeck,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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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이희승 감수, 『에센스 국어사전』(서울: 민중서림, 1990).
2 P.T.라쥬, 『비교철학이란 무엇인가』, 최흥순 옮김(서울: 서광사, 1989), 48, 104쪽 등 참조.
3 배타적 호교론으로 인한 타종교 몰이해의 실질적인 예들에 대해서는 이찬수, 『생각나야 생각하지: 사유, 주체, 관계 그리고 종교』 (서울: 다산글방, 2002), 제13장(262-290쪽)을 참조할 것.
4 Donald S. Lopez, Jr. ed., Buddhist Hermeneutic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8), pp.177-178 참조.
5 윌프레드 켄트웰 스미스, 『종교의 의미와 목적』, 길희성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1991).
6 김하태, 『동서철학의 만남』 (서울: 종로서적, 1993), 9-18쪽 참조
7 이찬수, 「불자는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한불교진흥원,『불교와 문화』제5호,1998년봄호, 211-212쪽.
8 길희성, 『포스트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 (서울: 민음사, 1994), 157쪽.
9 위의 책, 같은 쪽.
10 이런 시각으로 쓴 글에는 위의 책, 121-180쪽, 292-404쪽; 이찬수, 『인간은 신의 암호』(왜관: 분도출판사, 1999), 185-233쪽; 이찬수, 앞의 글, 210-224쪽 등을 참조할 것.
11 Frederick Franck ed., The Buddha Eye: An Anthology of the Kyoto School (New York: Crossroad, 1982), p.2.
12 小田垣雅也, 『哲學的 神學』 (東京: 創文社, 昭和, 58) 96, 89-90頁.
13 이찬수,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적 논리 소고」, 서강종교연구회편, 『종교의 이해』(제2집, 1997), 121-135쪽 참조.
14 이찬수, 앞의 책, 167-171쪽.
15 瀧澤克己의 다음 책들, 『佛敎とキリスト敎』(東京: 法藏館, 昭和 46), 79-87頁; 『日本人の精神構造』(東京: 三一書房, 1982), 192頁; 『自由の原点: インマヌエル』(東京: 新敎出版社, 1970) 12-34頁 등 참조.
16 이찬수, 『생각나야 생각하지』, 237쪽.
17 길희성, 앞의 책, 121-180쪽; 이찬수, 앞의 책, 205-233쪽.
18 폴 틸리히, 정진홍 옮김, 『기독교와 세계종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7).
19 길희성, 앞의 책, 291-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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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李贊洙
(Yi, Chan-Su)
강남대학교 (Kangnam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