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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성-경-신의 근원적 이해

온울에 2008. 5. 7. 03:21

목 차

Ⅰ. 문제의 범위
Ⅱ.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험난한 길
1. 안셀무스의 존재론적인 논증
2. 우주론적인 논증과 목적론적인 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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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대진대학교 부설 대순사상학술원 
학술지명 대순사상논총 
ISSN 1598-3439 
권 12 
호  
출판일 2001.  




성ㆍ경ㆍ신(誠敬信)의 근원적인 이해(Ⅰ)


崔東熙
9-360-0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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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문제의 범위
성ㆍ경ㆍ신(誠敬信)이란 우리 쉬운 말로는 정성과 공경 그리고 믿음이다 여기서는 이 셋을 한데 묶어서, 깊이 이해하여 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따져 물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정성을 다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공경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으로서 살다 보면 정성을 다할 것도 많고 공경할 것도 믿어야 할 것도 많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가장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은 하나일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가장 공경해야 할 것도 가장 믿어야 할 것도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다시 다시 생각하면 이렇게 가장 정성을 다해야 할 것도 하나고 가장 공경할 것도 하나고 가장 믿는 것도 하나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으로서 더욱 깊이 생각한다면 '어떤 가장 놀라운 것'만이 가장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고 또 가장 공경하고 믿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이 가장 놀라운 것이 바로 절대적인 것 곧 하느님(上帝, 天)이다. 이렇게 사람으로서 더욱 깊이 생각하면 어떤 절대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사람은 본래 종교적이다.

이와 같이 정성ㆍ공경ㆍ믿음을 한데 묶어서 종합적으로 깊이 생각해 들어가면 종교의 근본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으로서 가장 정성을 다할 수 있고 가장 공경할 수 있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종교에서 믿는 대상일 수 밖에 없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종교란 본래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절대적인 것을 믿는다'는 종교의 근본현상을 좀 더 깊이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크게 두 요소가 미묘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믿는 대상과 믿는 마음이다. 여기서는 종교에서 믿는 대상을 "궁극적인 존재"(Ultimate Being)라 부르기로 한다. 이에 대하여 이 궁극적인 존재를 믿는 마음을 "궁극적인 믿음"(Ultimate belief)이라 부르기로 한다. 여기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인 존재(하느님)1)가 현실적으로 있고 이것을 사람이 알고 믿게 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누구나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알고 보면 여기에 어려운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사람이 하느님의 「존재」 (existence, 현실적으로 있는 것)를 과연 알 수 있을까? 저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이어져 왔다. 유럽 이외에도 잠재적인 형식으로는 동양이나 그 밖에도 이 노력이 있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 증명의 방법은 대체로 이론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어느 방법도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정될 수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존재」가 증명될 수 없다면 "하느님의 믿음"은 어떻게 될까? 그런데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갖가지 증명도 일반적으로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종교의 독자적인 영역이 더욱 깊이 인식됨에 따라 "하느님의 믿음'이라는 근본 현상이 더욱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실은.종교가 있는 곳에 반드시 "하느님의 믿음"이 있고 "하느님의 믿음"이 있는 곳에 반드시 종교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바로 이 "하느님의 믿음" 자체를 무엇보다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이 "하느님의 믿음"을 하느님과 믿음으로 나누어 본다면 하느님은 궁극적인 존재고 믿음은 이 존재에 대한 사람의 믿음이다. 그런데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어느 믿음과는 다르므로 궁극적인 믿음이라고 불러야 한다. 사실 이 믿음은 저 '정성ㆍ공경ㆍ믿음"(誠敬信)이라 할 때의 믿음과는 그 단계가 다르다. 이렇게 정성이나 공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믿음(信, belief)과 차원을 달리하는 궁극적인 믿음을 여기서는 '신앙"(信仰, faith)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위에서 말해온 "하느님의 믿음"은 이제 엄밀히 말한다면 "하느님의 신앙"이다. 이렇게 되면 이 '신앙'이 맨 처음으로 나타난 근원적인 종교적심정이 바로 "정성ㆍ공경ㆍ믿음"으로 된다. 이를테면 참된 종교적인 경지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신앙은 현실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정성ㆍ하느님에 대한 공경ㆍ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하나의 종교신앙은 반드시 세가지 종교심정으로 나타나고 세 가지 종교심정은 반드시 하나의 종교신앙으로 통일된다.

그런데 궁극적인 존재인 하느님과 궁극적인 믿음인 신앙 사이에 미묘하고도 어려운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종래 흔히 하느님과 신앙의 관계를 객관적인 하느님과 주관적인 신앙으로 양분하여 이원론적으로 생각해 왔다. 여기에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사람이 어떻게 알고 믿을 수 있느냐를 밝히는 어려운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이 문제가 시원스럽게 풀릴 수 없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자 현대에 와서는 마침내 "하느님의 신앙"이라는 근본적인 종교체험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신앙작용의 대상인 긍극적인 것과 신앙작용을 의미하는 궁극적인 것은 똑같은 하나다.2)" 신앙을 사람의 종교활동의 기본 능력이라 보고 이것을 "신앙작용"(the act of faith)이라 하는데 이 작용의 대상은 "궁극적인 것"(the ultimate)이다. 이때의 궁극적인 것은 궁극적인 존재 곧 하느님을 뜻한다. 그런데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의 기본능력인 신앙작용도 궁극적인 존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것'이다. 이렇게 객관 쪽에 있는 궁극적인 것이 있고 주관(마음) 쪽에 있는 궁극적인 것이 있는데 이 두 궁극적인 것은 마침내 같은 하나라는 것이다. 곧 하느님과 신앙은 본래 하나일 뿐 둘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사람에 있어서의 "신앙"을 여는 심적인 작용 곧 마음 움직임과는 아주 차원이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신앙을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궁극적인 관심은 모든 조건을 벗어나 있다. 사람의 성격이니 욕망이니 혹은 환경이니 하는 어떠한 조건도 넘어서 있다. 이 조건없는 관심은 모든 것을 감싼다. 우리 자신의 혹은 우리 세계의 어느 구석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 없다. 이것으로부터 달아나 갈 곳이란 없다.3)" 이렇게 틸리히에 따르면 궁극적인 관심인 '신앙"은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를 초월해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신앙은 사람 영역의 "궁극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 하느님도 아니 하느님이야말로 정말 "궁극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궁극적인 것"과 사람의 "궁극적인 것"은 본래 하나일 뿐 둘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틸리히는 하느님과 신앙은 본래 하나일 뿐 둘이 아니라고 외쳤다.

과연 하느님과 신앙은 본래 하나일까?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깊이 밝혀야 한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은 신앙의 대상이고 신앙은 또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과 신앙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앙"으로서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신앙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잘 증언해준다. 그리고 하느님과 신앙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한데 붙어서 "하느님의 신앙"으로서 잘 통하는 영역은 바로 종교다. 인류 역사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종교는 본래 하느님의 신앙이 자리잡고 있는 영역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현상속에 보편적으로 있는 이 "하느님의 신앙" 자체를 하나의 종교체험으로 보고 바로 이 체험을 통해 사람이 직접 하느님과 통할 수 있다고 보는 방향이 쉘러(Max Schele, 1874-1928)의 종교현상에 나타나 있다. 위에서 본 릴리히의 "궁극적인 관심"도 쉘러의 종교 체험고 k대소 관련이 있다. 이 문제도 앞으로 다시 밝히기로 한다.

"하느님의 신앙"을 하나의 종교체험으로 다룬다고 할 때 종교체험이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세계의 모든 종교는 다같이 "하느님의 신앙"을 그 근원으로 삼고 있다고 할 때 현실적으로는 그 하느님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어느 누구의 혹은 어느 집단의 종교체험으로 나타난다. 흔히 어떤 종교를 세운 사람(敎祖)의 결정적인 종교체험이 그 종교의 "하느님의 신앙"을 결정한다. 이렇게 모든 크고 작은 종교에는 저마다의 갖가지 종교체험이 깔려 있어서 저마다의 종교적인 특성을 갖추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종교 안에서도 그 신도들의 종교체험이 그 종교 안에서 신도들의 위치를 가늠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온 종교의 세계에는 높고 낮은 혹은 깊고 얕은 혹은 넓고 좁은 갖가지 종교체험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정이므로 종교의 세계에서 가치의 기준은 바로 종교체험의 기준일 수 밖에 없다. 바흐(Joachim Bach, 1898-1955)가 종교체험의 네 기준을 제시한 것도 그가 바로 종교체험을 그만큼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끝으로 그렇다면 갖가지 종교체험들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그 기준을 적용해 평가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신앙 자체를 평가 또는 측정할 수는 없다. 틸리히에 따르면 신앙이란 그 자체는 "궁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궁극적인 것이 그 밖의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일 뿐이다. 본래 종교체험은 하느님의 신앙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생생한 경험이다. 여기에는 하느님에 대한 정성과 하느님에 대한 공경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갖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다. 하느님의 신앙은 본래 이렇게 하느님의 정성과 하느님의 공경과 하느님의 믿음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종교체험의 기준 자체가 바로 정성ㆍ공경ㆍ믿음(誠敬信)이라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또 종교에 있어서 차지하고 있는 정성ㆍ공경ㆍ믿음의 중요한 위치이며 의미이기도 하다.

Ⅱ.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험난한 길
사람이 궁극적으로 믿는 무한한 존재는 유한한 존재인 사람으로서는 본래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람은 무한한 존재를 믿을 수는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종교가 있어 왔고 지금도 현실적으로 많은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궁극적인 존재와 사람의 종교적인 믿음의 미묘한 관계일 것이다. 이를테면 궁극적인 존재가 먼저라는 쪽과 사람의 믿음이 먼저라는 쪽으로 갈라질 수 있고 그 어느 쪽도 꼭 이길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쪽에서는 하느님(궁극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우리 표준 말)이 있길래 사람이 믿음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밝혀 내려고 가진 노력을 다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주로 종교가 신학자 및 철학자인데 그들 가운데 종교가와 철학자를 겸한 사람이 많았다. 여기서는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만 간단히 살펴본다.

1. 안셀무스의 존재론적인 논증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태어나 뒷날 켄터베리(Canterbury, 잉글랜드)의 대주교가 된 사람이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종교가로서 하느님이 이 세상 무엇보다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애썼다. 마침내 그는 하느님이야말로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a being than which nothing greater can be conceived)라는 점에 관심이 쏠렸다. 이 세상에 하느님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바로 여기에서 안셀무스는 매우 새로운 결론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정말 "그보다 훌륭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면 하느님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결론이다.

이 결론이 과연 정당할까? 안셀무스의 이 논증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대목이다. 이제 이것을 간추려 "무한히 훌륭한 존재"라고 표현한다. 안셀무스는 이 "존재"도 사람 마음속에 있을 때 '개념'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쪽으로는 대상이라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속에 존재하는데 그치는 존재도 많다. 그러한 존재는 사람 마음 속에만 있는 관념적인 존재일 뿐이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을 한갓 개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논증하는데 힘썼다. 마침내 그는 하느님은 "무한히 훌륭한 존재"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논증하였다. 하느님은 본래 "무한히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무한히 훌륭한 존재가 정말 존재지 않는다면 스스로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느님이 무한히 훌륭하다는 개념(생각)으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이끌어내는 것을 "존재론적인 논증"(ontological argument)이라고 한다. 이것은 뒤에 학자들4)에 의해 다시 정리되어 세상에 널리 알리져 왔다.

이리하여 이 논증은 하느님이 무한히 훌륭하기 때문에 정말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더욱 강조되어 왔다. 이것은 "무한히 훌륭한 하느님"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이끌어내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동안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온 이 논증에 대해 칸트(I.Kant, 1724-1804)가 비로소 결점적인 비판에 나섰다. 그는 날카롭게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현실적인 100탈러는 가능적인 100탈러보다 조금도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지 않다.5)" 여기서 "현실적인 100탈러6)"란 말하자면 지갑 속에 있는 현실적인 100탈러를 말한다. 그리고 "가능적인 100탈러"란 마음 속으로 "이런 돈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저 생각하는 100탈러를 말한다. 여기서 칸트는 객관적으로 있는 '대상'과 사람 마음속에 있는 '개념'은 본래 그 품고 있는 내용이 똑같다는 것을 실례를 통해 생생하게 밝히고 있다.

이것으로 칸트는 어떤 개념으로부터 그 대상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딱 잘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개념과 대상은 뚜렷이 다르다. 내 밥상에 있는 떡(대상)과 그림의 떡(개념)이 다르듯이.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그 내용은 똑같다. 그림의 떡도 떡이라는 잠에서 떡의 내용을 똑같이 품고 있어야 하기때문이다. 이렇게 개념과 대상은 아주 다르기도 하고 똑같기도 하기에 예로부터 동서양에서 흔히 헷갈려 왔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안셀무스는 하느님의 개념으로부터 하느님의 대상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하느님은 무한히 훌륭한 존재기때문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논증하였다. 이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곧 개념으로부터 대상을 이끌어낸 잘못된 논증이라는 것이다.

칸트의 비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은 무한히 훌륭한 존재'라는 개념으로부터 '존재하는 하느님'이라는 대상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잘못된 논증을 했다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은 무한히 훌륭한 존재'라는 것이 하느님의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그는 마침내 "무한히 훌륭한 존재"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하느님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하느님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은 곧 하느님은 대상이라는 말이다. 이래서 안셀무스는 개념(하느님의)으로부터 대상(하느님이라는)을 이끌어낸(논증한)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논증이라고 비판한다. 이 논증을 칸트에 따라 다시 정리하면 개념에서 대상을 이끌어낸 것이 아니고 개념에서 똑같은 개념을 이끌어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실은 '하느님은 무한히 훌륭한 존재기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개념이다. 여기서 이끌어낸 것도 사실은 '무한히 훌륭한 존재인 하느님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하느님의 개념을 되풀이한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칸트가 밝힌 것처럼 개념과 그 대상은 품고 있는 내용(개념의 내포와 그 대상의 속성)이 똑같기 때문에 개념으로부터 그 대상을 이끌어낼 수 없다. 대상은 본래 개념에는 없는 결정적인 조건을 지녀서 개념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인 조건이란 무엇일까? 칸트는 그것을 「존재」(Existenz, existence, 현실적으로 있음)라고 한다. 이것은 '최고의 존재"라고 할 때의 "존재"Wesen, being)와 뜻이 다르다.7) 본래 개념은 마음으로 생각되는 것이고 대상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상의 「존재」는 참된 의미로는 개념의 내용(내포)이나 대상의 속성이 될 수 없음을 칸트는 애써 밝혔다. 그는 「존재」의 다른 또 하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어떤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아무리 무엇을 얼마나 품고 있어도 그 대상의 존재」 (Existenz)를 인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개념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이것은 감각의 대상일 경우에는 가능하다. 이 대상과 나의 어떤 지각이 경험의 법칙에 따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한 사고의 대상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인식할 수단이 조금도 없다. 그러한 존재는 오로지 선천적으로(a prion)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존재의 우리 의식은(그 의식이 직접 지각에 의존하건. 무엇을 지각과 결합하는 추리에 의존하건) 오로지 경험의 통일에 속해 있다. 이 경험적 영역밖의 존재는 물론 결코 불가능하다고 선언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존재는 우리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어떤 전제일 뿐이다.8)

이와 같이 어떤 개념(소금의 개념)과 그 대상(소금이라는 대상)은 본래 똑같은 내용을 품고 있다. 소금의 개념은 희다ㆍ짜다ㆍ묵직하다 등의 내포를 지니는데 소금이라는 대상도 똑같이 희다ㆍ짜다ㆍ묵직하다 등의 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개념과는 달리 그 대상은 「존재」 가 인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대상은 존재해야 한다는 점에서 개념과 아주 다르다.그런데 "그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 우리는 그 개념 밖으로 나가야 한다. 소금이 대상이라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데 그 「존재」를 인정하려면 우리는 소금의 개념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를테면 소금을 마음속에서 생각하는데 그치지 말고 부엌으로 나가서 소금의 「존재」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확인은 소금과 같이 "감각의 대상"일 때만 가능하다. 이에 대한 "순수한 사고의 대상"및 때 그 「존재」, 를 인식할 방법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오로지 "경험의 통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경험의 통일이란 '제대로 된 체계적인 경험'(객관적인 경험)을 말한다. 이 경험 밖에 있는 「존재」(하느님의 존재 따위)는 그저 하나의 전제에 그칠 뿐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소금의 존재와는 달리 하느님의 존재는 인식할 방도가 아주 없다는 것이다.

다시 요약한다면 개념과 그 대상은 한 쪽(그 내용)으로는 똑같고 다른 쪽(존재)으로는 아주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사이에서 헷갈려 왔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은 본래 무한히 훌륭한 존재기 때문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논증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존재는 사람으로서 인식할 길이 없다.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어떤 전제(가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안셀무스보다 21년 뒤에 난 주자(朱子, 1130-1200)도 하느님(天)의 존재를 그 개념으로부터 논증하려고 했다. '명덕은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얻었는데 허령하고 환히 밝으며 온갖 이치를 갖추어서 만사를 다 아는 것이다."9) 주자의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무한히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여기에는 주자의 '하느님의 존재론적인 논증'이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10) 그것은 곧 '하느님이 사람에게 그렇게 놀라운 능력을 부여하는 존재라면 하느님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논증이다. 그러나 안셀무스의 논증처럼 이 논증도 개념으로부터 그 대상의 「존재」를 이끌어낼 수 없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이 "무한히 훌륭한 존재"라는 그의 개념(생각)으로부터 그런 대상의 현실적인 「존재」를 확인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주자도 하느님이 사람에게 주었다는 "무한히 알 수 있는 능력"(明德)이라는 개념으로부터 그러한 대상의 「존재」를 확인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무한히 훌륭한 존재"(하느님)나 "무한히 알 수 있는 능력"(明德)은 소금과 같은 감각적인 대상이 아니고 "순수한 사고의 대상"(Objkte des reinen Denkens)이기 때문에 그 「존재」를 인정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주자의 "명덕"에 대해서 다산(茶山, 丁若鏞, 1762-1836)이 굳이 비판하였다. "이른바 명덕은 효ㆍ제ㆍ자(孝弟慈)고, 이른바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도 효ㆍ제ㆍ자다."11) 이렇게 다산은 『대학』(大學)의 첫머리에서 말하는 "명덕"(明德)을 주자와는 달리 효ㆍ제ㆍ자라고 해석한다. "신민"(新民)도 효ㆍ제ㆍ자를 그 내용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산이 "명덕"을 현실적인 덕목(德目)으로 보고 "허령하여 밝고 밝은 본체"(虛靈不味之體)12) 곧 순수한 사고의 대상이라고는 보지 않음을 뜻한다.

2. 우주론적인 논증과 목적론적인 논증
매우 까다로운 하느님 개념으로부터 하느님의 현실적인 「존재」를 증명하려는 논증을 살펴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우주론적인 논증'(cosmological argument)은 "무엇이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면 어떤 아주 필연적인 존재도 현실적으로 존재한다"13)고 따져 나간다. 이렇게 사람이 알기 쉬운 현실적인 사물로부터 시작해 "어떤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ein absolut notwendiges Wesen) 곧 하느님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증명한다. 모든 현실적인 사물은 "우주"(세계)에 속해 있으므로 이렇게 현실적인 사물로부터 시작하는 논증을 '우주론적인 논증'이라고 한다.

이 논증에 몇 가지 형식이 있지만 여기서는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의 유명한 항목인 「하느님으로의 다섯 갈래의 길」14)(f nf Wegen zu Gott)속에 있는 두 번째 논증 형식을 살펴보는 데 그친다. 여기서는 어떤 무엇의 원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원인의 원인을 죽 찾아 올라가 마침내 "어떤 제일원인"(a First-Cause)에 이르게 된다. 이 세상에는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내 자신이 있다. 그런데 이 무엇은 반드시 그 원인을 갖추고 있다. 이 원인도 어떤 무엇이므로 반드시 그 원인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서로 종속하는 원인들의 계열이 길게 이어진다. 이를테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원인들의 긴 계열이 이어진다. 모든 우연적인 것은 그의 원인을 가지며, 이 원인이 또 우연적일 때 마찬가지로 그의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곧 자연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퀴나스는 "하나의 무한한 원인계열이 죽 끝없이 진행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 어떤 무엇의 원인으로부터 시작한 원인들의 계열이 반드시 "어떤 제일원인"에 도달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아퀴나스는 「하느님으로의 다섯 갈래길」 에서 첫 번째 논증으로서 운동(motion)이라는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시작해 마침내 "제일 운동하는 존재"(a Prime Mover)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세 번째 논증에서 우연적인 존재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서 "필연적인 하나의 존재"(ein Seiendes, das notwendig ist)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아퀴나스의 이 세 가지 논증이 근본적으로 보면 하나의 논증을 형성한다. 이 논증 속에 있는 두 가지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인과법칙"과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음"(die Unm glichkeit des Regressus in infinitum)이라는 두 근본전제다.15) 따라서 우주론적인 논증에 대한 비판도 이 두 근본전제를 중심으로 여 두 방향으로 갈리게 된다.

칸트는 이 논증이 인과법칙을 엉뚱하게 적용하였다는 쪽으로 비판하였다. 지금 이렇게 있는 내 자신과 같은 '우연적인 존재'들은 스스로 있을 수 없고 반드시 어떤 원인에 의존한다. 그 원인이 되는 것도 또 그의 원인에 의존함으로 서로 의존하는 인과관계가 죽 길게 이어진다. 사람은 이 인과관계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관계는 경험적인 세계 안에서만 적용된다. "그런데 우주론적인 논증에서는 인과성의 원칙이 바로 감성계를 넘어서기 위해 적용되야 한다고 내세운다."16) 여기서 말하는 '인과성의 원칙"(der Grundsatz der Kausali t)이란 칸트 입장에서 표현된 인과법칙이다. 인과법칙은 본래 "감성계"(경험적인 세계)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론적인 증명에서는 이러한 인과법칙을 "바로 감성계를 넘어서기 위해" 이용했다. 칸트는 여기에 속임수가 있다고 파헤친다. 또 이 논증은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 반드시 '어떤 제일원인'에 다다른다고 하는데 여기에도 속임수가 있다고 한다. 이 제일원인은 어떠한 빠른 원인에도 의존하지 않는 "필연적인 존재"(ein notwendiges Wesen)이므로 인과법칙이 결코 여기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과법칙을 이용해 감성계를 뛰어넘어 제일원인(여기서는 하느님)에 도달하려는 것이 잘못이다. 칸트는 이것을 이 논증의 첫 단계의 잘못이라 생각한다.

칸트는 이 논증의 둘째 단계의 잘못도 날카롭게 파헤친다. 이 논증은 둘째 단계에서 첫 단계에서 증명된 "제일원인"을 "최고의 존재"(h hstes wesen) 곧 하느님이라고 증명하였다. 첫 단계에서 도달하였다고 증명된 "제일원인"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원인이 되며 그 자체는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필연적인 존재"(notwendiges wesen)다. 이러한 존재가 정말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되어도 이러한 존재가 바로 "최고의 존재"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칸트가는 이 증명은 바로 '최고의 존재는 필연적인 존재다'라는 증명과 똑같다고 분석한다. 그 이유는 '필연적인 존재는 최고의 존재다'라는 판단과 '최고의 존재는 필연적인 존재다'라는 판단과 서로 통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최고의 존재는 필연적인 존재다"(그보다 더 훌륭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라는 증명이 저 존재론적인 논증이다. 이와 같이 칸트에 따르면 우주론적인 논증은 존재론적인 논증을 부정하려고 했지만 "그것을 남몰래 자기 추리의 근거로 삼았다.17)" 마침내 칸트는 우주론적인 논증은 존재론적인 논증의 기초 위에서만 성립하고 이 논증보다 더 많은 잘못을 가졌다고 평가하였다.

아퀴나스의 우주론적인 논증에서 인과법칙과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명제"가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여기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음이란 내 자신과 같은 어떤 주어진 존재로부터 서로 의존적인 인과관계를 따라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하는 본 뜻이 두 가지로 갈릴 수 있다 첫째는 시간상으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간상으로 제일원인이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원리상으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뜻이고 따라서 만물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스스로 설명하는 실재"(a self-explanatory reality)로서의 제일원인이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아퀴나스를 따르는 "현대의 토마스학파"(Contempoparay Thomists)의 일부에서 둘째의 뜻으로 해석한다. 이리하여 우주론적인 논증은 첫째 세상 만물은 시간적으로 그 시초가 있어야 한다고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밤 이 전제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우주에 대한 오늘날의 과학적인 지식을 바람으로 하고 있지만 아직 단정할 수는 없다.18)

이에 대해 둘째 세상 만물은 설명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의 토마스학파 주장이다. 물론 이 학파의 일부의 주장인데 이에 따르면 이 세상에 제일원인이 없다면 모든 것이 "한갓 이해할 수 없는 맹목적인 사실"에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원인 곧 하느님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론의 여지가 남아 있다. 이를테면 회의론 쪽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세상을 "한갓 이해할 수 없는 맹목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토마스학파에 의해 아퀴나스의 우주론적인 논증이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실은 주목된다.

아퀴나스는 그의 「하느님으로의 다섯 갈래길」에서 위 우주론적인 논증과 아울러 이른바 "목적론적인 논증"도 진지한 신앙의 방향에서 밝히고 있다. 자연속에 있는 만물은 본래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일정한 목적은 향해 움직인다. 이렇게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이 어떤 목적을 향해 규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인식능력과 이성을 갖춘 어떤 놀라운 존재"가 그들을 일정한 목적으로 인도하여 준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만물의 질서와 목적은 위해 어떤 놀라운 지성적인 존재 곧 하느님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증명을 "목적론적 논증"(the teleological argument)이라고 한다. 이 세계의 "목적성" 곧 이 세계에 나타나 있는 '일정한 목적을 보여주는 특성'을 근거로 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 논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이 세계는 다양성ㆍ질서ㆍ목적성ㆍ아름다움 따위의 무한한 무대를 우리에 보여준다. "19) 사람들은 이러한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 '이 세계 만물에 관한 최고의 원인"을 자연스럽게 증명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칸트는 이러한 증명을 "자연신학적인 논증"(der physikotheologische Beweis)라고 불렀다. 칸트는 이 논증에 대해 의외로 크나 큰 호감을 보였다. '이 논증은 언제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무게를 지녔다. 이 논증은 가장 오래된 가장 명료한ㆍ가장 상식에 적합한 논증이다. 이 논증은 자연을 연구하도록 활기를 준다. 그리고 이 논증 자신도 자연의 연구로부터 그 존재의 의미를 얻게 되며 자연의 연구에 의해 늘 새로운 힘을 얻는다"20)

그러나 이 논증도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논증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과연 논증으로서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칸트는 역시 의외로 냉철하고 냉정했다 그는 이 논증이 성공할 수 없음을 이렇게 뚜렷이 밝히고 있다.

여기서는 위에서처럼 추리하는 자연적인 이성에 대해 조금도 트집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위 추리에서 자연적인 이성은 몇몇의 자연산물과 사람의 기술이 만들어 낸 산물이 유사하다는 추리(자연산물들과 집들ㆍ배들ㆍ시계들의 유사한 특성)로부터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럴 경우에 자연적인 이성은 자연에 폭력을 써서 자연을 그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게 하지 않고 우리들의 목적에 순종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이성은 바로 (우리들의 목적으로서 전제되는) 어떤 인과성 곧 '오성과 의지'가 자연의 근저에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또 이럴 경우에 자연적인 이성은 자유롭게 작용하는 자연(모든 자연적인 기술과 아마 이성까지도 비로서 가능케 하는 이 자연)의 내적인 가능성을 비록 초인간적인 것이기는 하나 어떤 다른 기술로부터 다시 이끌어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양식은 아주 날카로운 선험적인 비판에 아마도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이다.21)

이와 같이 칸트에 따르면 목적론적인 논증은 매우 소박하여 새삼스럽게 따지고 트집잡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논증은 "자연산물들과 집들ㆍ배들ㆍ시계들의 유사한 특성"을 보고 그만 감격해 우주라는 거대한 집을 짓고 관리하는 초인간적인 목수가 있어야 한다고 지레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칸트는 여기서 두 단계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첫째로 자연적인 우주는 무한히 큰 집이기는 하나 사람이 지은 집과 유사하고, 네 계절에 따라 만물이 소생하고ㆍ자라고ㆍ여물고ㆍ시드는 것 같은 자연의 운행은 바람과 물결이는 바다를 사고없이 누비는 배와 비슷하다는 추리는 자연을 제나름으로 있게 하지 않고 사람들의 목적에 따르게 하는 '인간 지성의 자연에 대한 폭력'이다 이 폭력은 마침내 자연의 등뒤에 자연을 조종하고 명령하는 '오성과 의지'를 전제하기 마련이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의 이성(지성)에 스스로 움직이는 자연을 존중하지 않고 자연을 억지로 사람들의 목적에 복종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론적인 논증속에 있는 한 속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인간의 지성은 "(모든 자연적인 기술과 아마 이성까지도 비로소 가능케하는)자유롭게 작용하는 자연"으로부터 그 "내적인 가능성"을 빼앗으려고 작정한다. 다시 말하면 각가지 놀라운 자연의 솜씨(기술, 造化)를 자연 스스로 갖추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폭력을 쓴다. 그래서 자연의 놀라운 기술들의 기원을 "어떤 다른 기술"에서 찾아내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기술은 어떤 초인간적인 기술일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목적론적인 논증에서는 둘째 단계에서 자연의 각가지 기술의 기원으로서 어떤 초인간적인 기술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런 양식으로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면 "아주 날카로운 선험적인 비판"에 그만 발목잡히고 말 것이다. 먼저 자연의 근저에 어떤 '오성과 의지'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연의 경험적인 솜씨(기술)을 어떤 초인간적인 기술로부터 이끌어낸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비록 자연의 근저에 있는 '오성과 의지' 또는 어떤 초인간적인 기술이 있다고 인정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는데 그치는 건축사일 뿐이다. '세계건축사"(Weltbaumeister)는 본래 그가 가공하는 재료의 적합성에 의해 언제나 큰 제한을 받는다.22) 이것은 세계의 질료(재료)까지도 창조한 하느님 곧 "세계창조주"(Weltsch pfer)가 아니다. 그러나 목적론적인 논증이 정말 바라는 것은 바로 이 '세계창조주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이 창조주(하느님)의 존재를 주장하려면 몰래 이 세계의 질서ㆍ조화의 제일원인 뿐만 아니라 재료(질료)의 제일원인의 존재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계의 질서ㆍ조화ㆍ질료ㆍ소재는 바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세계 모든 것의 원인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제일원인"(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 곧 우주론적인 논증이다. 이렇게 목적론적인 논증은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새로운 길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자 몰래 우주론적인 논증으로 옮아간 셈이다. 그런데 우주론적인 논증도 마침내 존재론적인 논증을 근거로 삼고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세 논증 가운데서 그 근원을 이루는 것이 곧 존재론적인 논증이다. 이 논증이 성립할 수 없다면 다른 두 논증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뜻이다. 칸트는 이성적인 논증이라는 측면에서 이론적으로 철저히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목적론적인 논증에 상담한 호감을 가졌다. 이것은 역시 시대적인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 방향에서 목적론적인 논증의 새로운 측면을 살펴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이 논증이 근대적인 자연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유럽에서 다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사실 이 논증이 근대 자연과학과 가까운 측면이 있다. 이것이 다른 두 논증보다 경험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절차가 자연 속에서 경험되는 질서에 주목하고 이 질서의 실증적인 근거를 끝까지 추구함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논증이 실증적인 근거에 그칠 수 없다는데 자연과학의 친근에 어떤 한계가 있다. 이 논증은 종교적인 하느님의 실재에 도달해야 하는데 자연과학은 어떤 비약없이는 여기까지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증이 상대적으로 어느 시기의 자연과학과 친근할 수는 있다. 현실적으로 이 논증이 근대과학의 발전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칸트는 이 역사적민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이 논증은 자연을 탐구하도록 활기를 준다. 그리고 이 논증 자신도 자연의 연구로부터 그 존재의 의미를 얻게 되며 자연의 연구에 의해 늘 새로운 힘을 얻는다"23)

근대과학을 개척한 저 코페루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온갖 만물의 한복판에 해님이 자리를 잡고 위엄을 떨친다"24)고 외쳤다. 종교가(목사)이면서 천문학자인 그의 이 외침 속에 목적론적이 논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주의 중심의 180도로 자리바꿈25)(轉回)을 하게 된 유럽에서는 코페루니쿠스 이후 17세기 끝까지 과학자들 혹은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즉 목적론적인 논증을 힘차게 주장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보기로서 뉴튼(Isaac Newton, 1643-1727)을 언급하는데 그친다. 뉴튼은 그가 처음으로 주장한 "만유인력의 법칙'이 잘 보여주는 만물의 놀라운 규칙적인 운동들이 "한갓 기계적인 원인'에 의해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태양ㆍ유성ㆍ혜성의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체계는 지적이고 힘있는 유일한 존재의 깊은 뜻과 꼼꼼한 지배가 없다면 생길 수 없을 것이다.26) 이렇게 뉴튼은 본격적으로 목적론적인 논증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18세기에는 흄(David Hume, 1711-1776)과 칸트에 의해 목적론적인 논증이 날카롭고도 철저하게 비판을 받게 되었다. 철학쪽에서의 이러한 비판도 18세기로부터 19세기 초에 걸친 목적론적인 논증에 대한 신봉의 열기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폐일리(William Paley, 1743-1805)가 1802년에 유명한 『자연신학』27)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이 논증에 근대적인 논증형식을 갖추게 하여 널리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하였다는 것이 이것을 잘 말해 준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보수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흔히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페일리는 근대과학이 보여주는 미묘한 자연질서를 정교한 시계의 구조에 비유하면서 자연에도 어떤 놀라운 지성적인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몸시계(watch)속에 현실적으로 있는 그 의도의 모든 숨결과 그 설계의 모든 자국이 빠짐없이 자연의 세계 속에도 있다. 다만 자연 쪽이 이루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고 그 내용이 많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28) 그는 자연속에 있는 의도의 숨결과 설계의 자국을 보여주는 실례를 많이 들었는데 그는 여기서 사실상 그 무렵의 모든 과학을 활용하였다. 이를테면 태양계의 유성들의 회전ㆍ인간의 눈ㆍ식물ㆍ인간이나 동물의 생리학적인 구조ㆍ본능의 구성ㆍ곤충류ㆍ조류 따위의 실례를 두루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들 "자연 현상"의 배후에는 어떤 놀라운 지성적인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18세기에 그리스도교를 종교적으로 힘껏 변호하려는 이론을 대표하는 폐일리도 목적론적인 논증이 유일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유일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논증 전체가 계획의 유일성을 증명하는데 까지만 도달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온 자연을 발상하고 계획한 하나의 근원이 있다는 것까지만 증명될 뿐이고 그 근원이 바로 그리스도교 하느님이라는 것까지는 증명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는 역시 과학자인 뉴튼보다 폐일리가 철학적으로는 좀 더 신중하였다. 물론 폐일리도 종교적으로는 목적론적인 논증이 그리스도교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굳게 믿었다. 끝으로 폐일리의 목적론적인 논증을 다음과 같은 현대 신학자의 논증형식으로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오존의 대기층은 창조주의 깊은 의도가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어느 누구도 이 장치를 어떤 우연적ㆍ진화론적인 과정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없다. 모든 생물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는 방벽(오존층), 그 꼭 알맞은 두께 그리고 아주 어김없는 정확한 보호가 바로 창조주의 설계가 있다는 모든 증거를 제공해 준다."29)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세 가지 논증 가운데서 목적론적인 논증은 유달리 자연과학의 권위에 힘입어 17세기부터 큰 지지를 받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흄과 칸트에 의해 철학적으로 철저히 비판을 받았으나 뜻밖으로 그 지지의 열기는 식지 않은 채 19세기를 맞이했다. 이것은 이 당시의 유럽에서 자연과학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나 19세기 중기에 다윈(Charls Robert Darwin, 1809-1882)이 지은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 1859)이 출판되자 사정이 매우 달라졌다. "지성적인 존재의 의도"대신에 "환경에 대한 적응"이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적인 사고는 생물학의 테두리를 넘어서 다른 영역으로 널리 뻗어 나갔다. 우주의 진화에 대한 학설들이 저 태양계나 은하계의 체계속에 지성적인 존재의 의도를 인정하는 뉴튼의 주장을 밀어냈다. 앞에서 폐일리의 현대적인 실례라고 본 오존층도 하느님이 지상 생물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련한 것이 아니라 오존층을 통과하는 자외선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생물만이 지상에 살아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진화의 법칙까지 포함하는 자연법칙을 통해 종래의 목적론적인 논증을 현대적으로 수정하려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철학쪽에서는 거의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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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우리나라에서 신앙의 대상을 나타내는데 쓰는 표준말, 다른 나라에서 신앙의 대상을 나타내는데 쓰는 말들을 우리말로 옮길 때 원칙적으로 쓰는 말이기도 하다. 중국의 天ㆍ上帝나 영어의 God, 도이치말 Gott, 라틴말 Deus 같은 모든 다른 나라말들은 원칙적으로 하느님으로 옮겨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표준말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2 Paul Tillich, Dynamics of Faith, 11쪽
3 Tillich, Systematic Theology, Ⅰ, 11-12
4 철학 쪽으로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와 라이프니츠(G.W.Leibniz, 1646-1716)에 의해 다시 정리된 것이 주목되어 왔다. 칸트가 주로 이것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5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 627쪽.
6 탈러는 도이치에서 쓰던 옛날 은화다. 이것은 약 3마르크 쯤이라고 한다.
7 여기서 말하는 "존재"(being)는 대상 쪽을 강조하는 말이다. 사람이나 우주 그리고 하느님 같은 대상을 강조하여 "존재"라 한다. 이에 대하여 「존재」 (existence)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상태 쪽을 가리키는 말이다. 「없다는 것」 이 아니라 「있다는 것」 곧 「있음」 을 뜻한다.
8 위 같은 책, B629쪽.
9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味 以具衆理, 而應萬事者也.(四書集注, 大學經一章).
10 사실상 주자는 성인들이 하느님(天)은 있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도 '성인이 하느님은 존재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하느님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이것도 이론적으로는 개념일 뿐이다. 성인의 말씀도 말이라는 점에서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있다는 말과 하느님이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11 所謂明德, 孝弟慈也. 所謂新民, 孝弟慈也.(與牆堂全書, 第二集, 大學公議 卷一七)
12 위와 같은 책, 大學公議, 卷一九. 다산은 주자가 말하는 명덕은 주자 자신의 개념인데 그러한 명덕의 존재를 경서에서 찾아낼 수 없다고 애써 고증하였다. 그러나 경서에 있다는 것 만으로 그 존재를 인정한다면 다산도 존재론적인 논증에 의존하는 셈이다.
13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 632쪽.
14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1 , 2, 3.(『神準大全), 제1부, 제2물음, 제3항목) 여기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다섯가지 논증을 말했다. 아퀴나스는 존재론적인 논증은 부정하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이 없다.
15 Johannes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c I, 502쪽.
16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 637쪽.
17 위 같은 책, B 637쪽.
18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I, 2,13 (『神學大全) 제1부, 2물음,제13항목)
19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 650쪽.
20 위 같은 책, B 651쪽.
21 위 같은 책, B 654쪽.
22 위 같은 책, B 655쪽.
23 이미 앞에서 인용했다.
24 코페르니쿠스, 『천구(天球)의 회전에 대하여』, 제1권 제10부(1543).
25 칸트는 이 결정적인 자리바꿈을 "코페루니쿠스 자리바꿈"(kopernikunische Wendung)이라고 불러 바로 자기 철학의 기본방향을 나타내는 말로 썼다.
26 뉴튼, 「프링키피아』, 일반적인 주해(1713).
27 William Paley, Natural Theology : or Evidence of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the Deity Collected from the Appearances of nature, 1802 (『자연신학 : 혹은 자연현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존재와 속성에 관한 증거), 1802.
28 William Paley, Natural Theology(Charlouesville, VA : Ibis Pub, 1986), 제1장과 제3장 (『자연신학), 제1장과 제3장).
29 Arthur 1. Brown, Footprints of God (Findlay, Ohio Fundamental Truth Publishers, 1943), 102쪽(브라운, 『하느님의 자취), 1943,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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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崔東熙
고려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