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열면서
2.타자의 타자성(alt?rit?) : 그 익명성과 복수성
3.상호성으로서의 공동주관성 : 레비나스의 비판
4.세계의 표현성과 타자의 특수성
5.레비나스의 윤리적 관계는 타자와의 원본적인 공동체를 깨트리지 못한다 : 애매성에 대한 표현성의 선차성은 타자와의 원본적인 공동체를 함축한다.
6.닫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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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새한철학회
학술지명 철학논총
ISSN 1226-9379
권 24
호 1
출판일 2001. 4. 30.
레비나스와 메를로-퐁티의 타자문제
신인섭
천안대
1-066-0102-02
국문요약
메를로-퐁티는 타자의 타자성을 데카르트적 이원론 및 사르트르적 이원론에 거술러 이해하고 심지어는 자연적 태도를 무력화시키고, 타자지각을 가지고 다른 의식들 사이에서 의식의 표상행위를 만들어내는 훗설의 노에마-노에시스적 이원론에도 반대하게 되는데 여기서 다른 의식들의 특수성은 유비(analogie)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정당화될 수 없게 된다. 나 자신이 세계의 구성요소를 이루듯 타자도 세계의 일부가 됨을 인정하고 비록 나 자신이 동물 및 사물과 구별되듯 타자도 그들과 구별될지라도 내가 나 자신을 지각하듯 타자를 지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나 동물을 지각하듯 그들 지각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선-지각적(pr?-perceptif) 익명성과 세계의 익명적 살(chair anonyme du monde)그리고 단번에 주어진 지각주체들의 복수성은 이러한 유비에의 호소를 피하게 해준다. 그러나E.레비나스는 M.메를로-퐁티의 이러한 내재주의를 비난하게 되고 메를로-퐁티의 공동주관(intersubjectivit?)을 대자관계(rapport ? moi)와 대타관계(rapport ? autrui) 사이의 절대적 비대칭성(dissym?trie absolue)에 맹목적인 대칭적으로 나란한 공동체(collectivit? du c?te-?-c?te)로 취급해 버리고 만다.
이리하여 레비나스를 따라 우리는 절대적 초월성의 윤리를 두둔하는 '비대칭의 관계'(relation asym?trique)라는 구실로 일종의 전도된 사르트르적 비대칭(asym?trie sartrienne inverse) 위로 다시 떨어지게 되는데, 사르트르의 타자는 나의 자유를 착복하고 나를 사물로 환원시키는 잠재적 적대자(ennemi en puissance)로 드러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표현성(후기사유)의 차원을 위해 실존적 애매성(전기사유)의 차원(registre)을 포기함으로 구체적 세계경험에 타자파악을 복구시킨다. 따라서 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substitut de Dieu)으로 절대화되지 않는다. 그 대신 타자는 세계와 역사의 현전에 참여하고 상호관계적 삶에로 되돌려진다. 그런데 이런 상관적 삶에서는 윤리가 일방통행이 아니고 무상(gratuit?)과 증여(don)라는 비대칭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상호성(r?ciprocit?)의 합리적 기대(attente rationnelle)로도 이해된다.
영문요약
La question d'autrui chez Levinas et Merleau-Ponty
Autrui chez Merleau-Ponty est-il vraiment r?ductible ? 《 l'autre ? c?t? de soi 》? La 《 premi?re philosophie 》 de Merleau-Ponty, plac?e sous le signe de l'ambigu?t?, n'est pas parvenue ? mettre v?ritablement en rapport une perception pr?-rationnelle, irr?fl?chie, avec le langage, le monde de la parole et du logos, de l'?change avec autrui en puissance de r?flexion de raison, de droit et d'histoire. Le Monde perceptif pr?-personnel comporte en fait en lui-meme toute une charge d'expressivit? que la seconde ou derniere pens?e de l'Autour a pris en compte. Le monde perceptif est d?j? langage, expression en puissance. Le sujet percevant s'y trouve dans un bain d'expressivit? qu'il a ? d?terminer, ? dire. D'embl?e il s'y trouve en relation avec d'autres sujets percevants qui sont ?galement en charge du monde, et il n'y a pas de raison pour que l'ethique privil?gi?e ait un don ? sens unique : le monde parle ? tous, meme s'ils ne lui donnent pas des structures identiques (groupes en guerre, agressivit? d'animaux humains qui inventent des mythes charg?s de justifier leurs oppositions comme leur harmonie). Le 《 pirmat de la perception 》 est aussi un primat de la relation sur les individus, un primat de l'expression sur la subjectivit? solipsiste. L'existence subjective est 《 ambiqu? 》 d'abord parce qu'elle saisit toute subjectivit? comme d?j? objective et objectiavale ? l'infini (expressive) et aussi parce que toute objectivit? vient ? elle comme une demande de sens, d'expression. Le monde parle ? qui sait entendre, veut entendre. Larelation a autrui est d'abord cette possibilit? et flottante de langage, cette parole anonyme qui ne devient subjective qu'au sein d'une exp?rience concr?te de relation aux autres et aux chose, ins?parablement.
한글키워드
애매성, 표현성, 상호성, 비대칭관계, 공동신체성
영문키워드
Ambigu?t?, Expressivit?, R?ciprocit?, Relation asym?trique, Intercorpo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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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면서
우리는 '애매성의 철학'을 주관-객관, 자아-세계의 데카르트的 이원론에 그치기를 원하지 않는 '실존의 사유'라고 부른다. 특히 그 이원론이 타자의 특수성을 식별하는데 무능한 독아론(solipsisme)으로 이끌 때 더욱 그러한 것이다. 타자는 주체에 대한 하나의 대상이 아니며, 세계 역시 주관에 대한 객관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주체는 세계의 익명적 살(la chair anonyme du monde)에 속하고 있으며 타자의 타자성 즉 타자본위(alt?rit?)는 내가 속한 익명의 살에 대한 나의 지각을 이미 구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나의 지각에 필수적인 것이다. 타자의 특수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동물과 사물의 지향성과는 다른 성질로써 타자에 변별적으로 호소하는 순수지향성의 특수한 권리를 정신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특수한 주체적 경험을 체득하고 독특한 인간관계의 행동들과 태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각의 현상학』으로 대표되고, 주지주의(intellec-tualisme)와 경험론(empiricisme)을 거부하는 메를로-퐁티의 전기철학이 표방하는 애매성(ambiguit?)의 개념은 이제『세계의 산문』(La prose du monde)에서 특별히 부각되는 표현(expression)의 철학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즉 주체는 그가 현전(pr?sent)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의 표현성(expressivit?) 속에 항상 이미(toujours d?j?) 붙잡혀 있는 것이다. 이 세계-내-존재(?tre-au-monde)안에서 타자는 특수한 행동들(comportements)을 야기하는 동시에 세계의 표현성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타자를 외재성으로(en ext?riorit?)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외재성 속에서 지각함이 불가능함과 같다. 예컨대 우리가 타자의 얼굴과 몸에 근거하여 동물적 특징을 간파하고 또 그는 확실히 응고되어 있지 않고, 세공의 여지가 있는 그러나 그렇다고 객관화의 한 형태를 불허하지는 않는 표현성의 진원지(foyer d'expressivit?)로서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게 된다. 타인은 타자이지 하나의 다른 자 자신(moi-m?me)이 아니다. 요컨대, 애매성으로부터 표현성으로 옮겨가면서 타자는 세계의 사물의 용모로써 나타나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계와 친밀하게 되며, 무생물의 사물에게서 표현적 특징들(traits expressifs)을 찾게 되고 그것들을 의인화한다. 사물은 거의 동반자이다. 우리는 타자를 약간은 세계의 사물처럼 파악하는데 이 사물은 표현적이고 나를 닮은 것이다. 사람과 사물과 동물, 식물 사이의 차이는 보다 덜 뚜렷하다. 모든 것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적일 뿐이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이 타자도 조금은 사물이고(un peu chose) 사물은 조금쯤은 인간적(un peu humaine)이다.
2.타자의 타자성(alt?rit?) : 그 익명성과 복수성
메를로-퐁티에게 있어 타자는 통상적으로 익명의 우리(on)라는 성격 또는 주제화할 수 없고(inth?matisable) 잠재적인(virtuelle) 차원에 위치한 선-개인적(pr?-personnel) 주체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사이에서 비젼(vision)의 상이성은 당연히 부각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의 현상학』(Ph?nom?nologie de la perception)에서 메를로-퐁티는 주인과 노예라는 유명한 헤겔변증법의 후원아래 사르트르의 분석을 차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치와 당당함은 따라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그 내용이 되는 자아와 타자의 변증법 속에 자리를 차지한다. 내가 신체를 지닌 한, 타자의 시선 아래 대상(objet)으로 환원될 수 있고 그에게 나는 더 이상 인격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정반대로 나도 그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이번에는 내가 그를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는 하나의 일방통행인데 왜냐하면 타자의 열망(d?sir)에 의해 내 가치가 인정되는 순간 타자는 더 이상 그에 의해 내가 인정받기를 원했던 그러한 인격이기를 그친다. 그는 사로잡힌(fascin?) 존재요, 자유 없는 존재이다. 그는 이 자격으로는 나에게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다1)."
지배와 예속(ma?trise et servitude)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같은 일방통행적 관계로서의 사르트르적 비젼에 반대하여 메를로-퐁티는 무엇보다 내 신체의 애매성을 강조하는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오브제(objet)이자 나에겐 주체인 내 신체의 형이상학적 구조이다2)." 따라서 내가 신체를 지녔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오브제로서 보일 수 있다는 것과 나 또한 주체로서 보이려고 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타자가 나의 주인이 되거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를로-퐁티의 사유는 비록 그 관계가 일방통행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주체/대상(오브제)의 틀 속에서 전개된다. 사르트르가 오브제냐 주체냐, 또는 주인이냐 노예냐 식으로 의식의 단독성을 돋보이게 한 것이 사실이라면 메를로-퐁티는 주체와 객체, 주인과 노예라는 배열로 의식들의 복수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의식들과의 공존(coexis-tence)이다4)." 즉 사회에서 중요한 타자들과의 공존이다.
한편, 내 신체의 애매성은 예속의 원리(principe de servitude)이자 자유의 원리(principe de libert?)인 언어의 애매성(ambigu?t? du langage)에 정확하게 상응한다. 시선들 사이에 생기는 사르트르的 갈등 속에서 타자에 의해 응시되면서 주체는 오브제가 되고 반대로 타자를 응시하면서 내가 그를 오브제로 만든다. 타자가 오브제가 되면 그는 더 이상 그로서의 그(en tant que tel)가 아닌 셈이다. 타자의 제일차적 위상은 주체-타자 즉 응시하는 주체로서의 타자에 놓여 있다하겠다. 타자는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에게 오브제로서 주어지지 않는다. 타자의 객관화(objectivation)는 그의 응시-존재(?tre-regard)를 붕괴시킬 것이다. "응시 현상 속에서 타자는 원칙적으로 오브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5)." 그것은 메를로-퐁티에게도 마찬가지가 된다. 예컨대 사랑의 모순들(contradictions de 1'amour)같은 대타관계(rapport ? 1'autre)의 핵심은 자아(타자에 대한 오브제)를 위한 주체와 타자(자아에 대한 오브제)를 위한 주체 사이의 갈등 속에 본질적으로 놓여 있다6). 이런 의미에서 메를로-퐁티의 타자의 본질적 위상 역시 응시하는 주관으로서의 주체-타자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타자-주체는 구성하는 의식도 순수 대자존재(pur ?tre-pour-soi)도 아니다 : 가시적 세계와 맞물려 있는(enprise sur)응시7)로서의 비젼(vision)인 타자-주체는 지각적 세계와 밀접한 지각적 의식(conscience perceptive)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사회세계(monde social)에 개방된 이 세계의 수취인(partie prenante ? ce monde)으로서의 세계-내-존재(?tre-au-monde)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각의 익명적 주체(sujets anonymes)라는 자격으로 공존하고 있는데 이 지각이란 사물에 대한 우리의 내속 관계(notre inh?rence)이다8). 아니 익명적이고도 선-개인적인(pr?-personnelle)실존이 내 신체와 타자의 신체에 동시에 거주한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내 신체의 부분들이 함께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듯이, 타자의 신체와 나의 신체는 유일의 전체(un seul tout)이다. 그것은 유일한 현상의 표면과 이면(envers et endroit)이며, 내 신체가 매순간 그것의 흔적이 되는 익명의 실존이 지금부터 이 두 신체에 동시에 거하게 된다9)."
환언하면, 지각주관이 절대적 개체성(individualit? absolue)이라는 의미에서 익명적(anonyme)이고 절대적 보편성(gen'?ralit? absolue)이란 의미에서도 익명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는 이런 이중의 익명성의 구체적 소지자(porteur concret)가 된다. 이중의 익명성이란 유일한 구조의 두 계기로 구성되고 이 구조는 바로 구체적 주체10)가 된다. 그런 식으로 해서 자아와 타자 사이의 긴장은 확실히 자아에 의한 것이다. 부연하자면, 자아 자신 안에 타자(Autrui)와 자기(soi)반성력 사이의 일종의 동등성(?quivalence)11)이 존재하는데 이는 타자와의 어떤 공존으로서 각자에 의해 도래한 것이다. 이 동등은 자아와 타자의 상호성 속에 뿌리내린다. "타자는 더 이상 여기서 나의 선험적 영야(champ transcendantal)속의 단순한 행동이 아니다. 게다가 나 역시 그의 영역에서 그에 대한 단순한 행동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상호성(교호성)속에서 서로를 위한 공동저자(collaborateur)인 것이다. 우리들의 퍼스펙티브는 서로 서로 속으로 미끄러져들고,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세계를 통하여 공존하고 있다12)."
3.상호성으로서의 공동주관성 : 레비나스의 비판
어쨌든 각자가 이 유일한 세계를 기획하는(projeter)것은 그의 주관성의 토대로부터이고, 상호(r?ciprocit?)은 타자아(alter ego)의 구성에 필수적 조건이 된다. "상호성이 없이는 타자아란 있을 수 없다13). 중요한 것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현실적 연루(implication r?elle)인 상호주관적 사건(fait intersubjectif), 그것이다. 그래서 그 둘은 즉자(en-soi)와 대자(pour-soi)사이의 불가능한 변증법 같은 일종의 막다른 골목에로 연결되지 않고 서로를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갈등을 유발시키는 내 신체 자신에 관련하여서 볼 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그 내용으로 하는 자아와 타자의 영원히 극복될 수 없는 변증법과 마찬가지로 주체이자 동시에 오브제로서의 신체의 애매성은 지양(d?passement)이나 화해(r?conciliation)없이 머물러 있다. 우리들의 갈등은 끝이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신체와 인식사이를 공유하는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애매성이란 용어가 주인/노예, 주체/객체와 같은 대립된 두 요소들의 공존에 다름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이 용어는 항상 주체자격의 의식과 객체자격의 신체 사이의 양분(이분법)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신체 점유(possession)는 모든 순간에 그것의 객관화에로 귀착될 위험에 처한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E. 레비나스의 지적14)을 기억하자면 타자에의 관계 혹은 '나-너'관계는 객관화에로 환원될 수 없는 데 말하자면 대상의 인식에로 환원될 수 없고 그 관계는 따라서 주관/객관 관계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메를로-퐁티가 주관/객관이라는 관계용어에 의거하는 한 우리는 자아와 타자의 비분할(indivision)로서의 공동주관성은 주관/객관의 관계의 부정적인 것으로 남는다고 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메를로-퐁티에 있어서의 공동주관적 타자는 진정으로 사르트르的 틀과 데카르트的 독아론을 넘어설 것인가? 그의 타자는 항상 이미(toujours d?j?)이러한 이원론과 독아론을 전제하지는 않는가? 동시성(simultan?it?)과 교환성(va-et-vient)의 장치 곧 예속과 지배관계의 상호성의 설치가 여전히 남아 있지는 않는가? E. 레비나스의 가혹한 비판이 목표로 하는 것이 바로 여기다. 공동주관성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이론은 바로 주관과 객관의 분할에 당연히 선행하고 있는 선-개인(pr?-personnelle)단계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메를로-퐁티에게서도 주체-타자(sujet-autrui)가 문제로 되는 한에서는 이러한 관점은 항상 공동-주관성(inter-subjectivit?)이라 불리는 거대한 독아론에 떨어질 위험에 처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노력들은 끊임없이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영야(champ)의 해명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 영야란 모든 객관화에 선행하고, 우리가 이미 거기에 위치지워진 '사회적 성격' (caract?re social)을 갖춘 지대이다. 그러나 지각적 의미(sens perceptiof)로부터 언어적 의미(sens langagier)에 이르는 통행의 문제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메를로-퐁티가 탈개인화(d?personnalisation)의 과정 즉 개인들의
개체화(타자와 자아로의 분화)의 과정을 명확히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즉 익명의 '우리'가 개인들로 나누어지는 과정을 명백히 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메를로-퐁티의 관심은 주로 선-개인적영야 또는 공동의 영야에 쏠려 있다. 그는 능산적인 (naturant) 동시에 소산적인(natur?) 주체의 애매성, 무한한 동시에 유한한 주체의 애매성을 파악하려고 하는데 이 애매성은 신체와 타자와 세계의 애매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무한한 동시에 유한한 주체의 역설이란 시공간적 공존(coexistence)의 역설인 바 일종의 근본적 편재성(ubiquit?)과 영원성(?ternit?)을 말함이다15). 공동주관적 타자가 결국 레비나스의 비판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를 시험하기 전에 그가 옹호하는 바를 알아보도록 하자.
훗설과 이하데거의 철학에 나란히 맞대고 있던 레비나스는 사르트르식 타자16)를 비판하면서 타자의 타자성 곧 타자 本位를 해석하게 되고 주인/노예 관계뿐만 아니라 자아/타자 사이의 공동주관적 관계 역시 거부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지식으로 구조화되었고(지식적 구조를 지닌 것이고) 달라하자면 순수히 에고 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지향성 즉 타자의 동일자에의 환원이라는 구조를 지닌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17): "지식은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인데 거기서 타자는 동일자에게로 환원되고 자신의 이방성(?tranget?)을 포기하게 된다. 또 이 관계에서 사유는 타자에 관계되지만 그때 타자는(그 자신에 충실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타자로서의 타자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그는 이미 고유한 것(le propre), 자신의 것(le mien) 즉 동일자(le m?me)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배우게 된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지식의 존재에 일치(ad?quation du savoir ? l'?tre)일 것이다. 또 그 어떤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도, 그 어떤 다른 것도, 그 어떤 낯선 것도, 그 어떤 초월적인 것도 모든 것을 관조하도록 약속된 사람을 진정 풍부하게 하고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거라고 말하게 하는 것과 티마이오스(Tim?e)가 그렇게 원했듯이, 동일자의 (원환)순환은 타자의 그것을 둘러싸고 있다고 말하게 하는 것도 인식의 존재에의 부합인 것이다18)."
타자에 대한 레비나스의 입장은 현상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인식에 대한 일관된 비판에서 연원하는데 이 인식의 본질적인 것은 노에마와 노에시스 사이의 부합 내지 일치(correspondance)에 놓여있고 달리 말하자면 그것들의 절대적 동등성(?galit?)과 동시성(simultan?it?)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타자의 말살이다.
부버의 나와 너의 일치(commuion)19)나 사르트르식의 시선(regard)의 갈등이 관건이 된 이상 레비나스는 그러한 타자에의 관계는 상호적(r?ciproque)이고 대칭을 이룬(sym?trique) 관계 즉 분리된 두 자유 사이의 연결(관계)이라고 단언한다. 거기엔 타자의 타자성(alt?rit?)은 존재치 않고, 대신 타자의 동일자에로의 동화(assimilation) 또는 통합(int?gration)만이 있게 된다. 그것은 또한 메를로-퐁티의 공동주관성(intersubjetivit?)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시도에 대해 레비나스는 "거기서도 훗설에게서 표상적으로 남아있는(rester repr?sentative) 타자관계와 윤리문제에 대해 그 자신(훗설)이 언급한 것 이상으로 갈 수 있는 훗설적 가능성이 있다20)"는 것을 잘 확인한다(비록 메를로-퐁티는 다르게 해석하려고 노력했지만). 한편, 이념화(id?alisa-tions)의 노에시스-노에마的 순환구조를 지양하는 선-이론적 구조를 명증화하는 메를로-퐁티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레비나스는 메를로-퐁티의 인식이 여전히 하나의 자신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주목시킨다. 비록 이 지식이 다른 양식으로 되어 있을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선 이론적 구조는 그 구조가 조회하는 것 즉 이론적인 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메를로-퐁티의 시도는 빛과 그림자, 긍정과 부정의 상호적이고 대칭적인 관계 속에 마침내 틀어박히게 된다. "서로를 만지는 두 손의 반상된 만짐에서 묘사된 감각성을 통하여 구성되는 상호주관성은 만짐과 만져짐의 사이공동체(감각함과 감각됨이라는 공동 행위)에 따라 구조화되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사물과 세계로 구성된 '존재' 주변으로의 일치 속에서 명확해진다21)."
레비나스는 감각성(sensibilit?)이 만짐과 봄의 그노시스(gnose)즉 인식에 의하지 않고는 타자에 접근할 수 없는 현상학적 분석의 한계를 알린다. 비록 만짐과 봄이 살과 살의 접촉과 응시일거라도 말이다. 레비나스의 눈에는 공동 주관적 공간은 상호교환 가능한 두 용어의 상호적이고 중립적(indiff?rente)인 관계 자체이기는커녕 비대칭적이어야 한다22).
결국 레비나스의 콘텍스트 속에서 타자는 절대개념에 이르는 타자성의 특색과 초월성의 특징, 그리고 절대적 새로움의 기질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 절대개념에서 비상호적(non r?ciproque), 비대칭적(non sym?trique) 관계가 도출된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사회생활을 특징짓는 타자와의 관계 심장부에서 타자성은 비상호적인 관계 즉 동시성(contemporan?it?)과는 뚜렷이 변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자로서의 타자는 단지 타자아(alter ego)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바의 것(ce que moi, je ne suis pas)이다. 그가 그러한 것은 그의 성격이나 외관 그리고 심리현상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타자성 자체 때문이다23).
타자아(alter ego)를 인정치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레비나스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관계개념' 자체를 의문시한다. 무엇이 '관계'로서 확립되건 또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간에 상호성이 시작될 때는 타자의 타자성은 틀림없이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용어들의 관념적인 절대적 동시성(simultan?it? absulue)을 아직 그 관계가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24).
4.세계의 표현성과 타자의 특수성
고립된 주간성의 필연적 성격을 너무 평가 절하하는 Buber의 '나와 너' 관계로부터 조차 변별되는, 윤리적 요청에의 불균형의 관계(relation sans relation)가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비대칭적 관계이고 이러한 비대칭 관계(relation asm?rtique)의 이름으로 레비나스는 나란히 연결된 대칭공동체(collectivit? du c?te-?-c?te)를 거부하는 것이다. 절대적 타자성으로서의 타자는 바로 이러한 레비나스의 비대칭적 관계로부터 발출되는 것이다. 만약 레비나스가 독아론(solipsisme)를 거부했다면 그것은 이성(raison)이 짜 맞추는 감각들(sensations)의 '주관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인식의 보편성(universalit? de la connaissance) 즉 말하자면 지식의 무제한성(illimit? de la lumi?re)과 어떤 사물의 외부에서의 존재 불가능성 때문이다"(impossibilit? pour aucune chose d'?tre en dehors)25).
매를로-퐁티에 있어서의 타자란 정말 '자기 옆의 타자'(l'autre ? c?t? de soi) 곧 자기에게 덧붙여진 부수적으로 다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애매성이란 간판을 내걸고 등장한 메를로-퐁티의 '제일철학'은 선-합리적(pr?-rationnelle) 지각과 비반성적(irr?fl?chie) 지각을 파롤(Parole)과 로고스(logos)의 세계이자 철학적 반성과 이성, 법률 그리고 역사의 잠재성 속에서의 타자와의 교환의 세계로서의 언어와 진정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선-개인적 지각세계는 메를로-퐁티의 후기사유가 중시했던 표현성(expressi-vit?)이란 모든 하중을 자신 속에 결국 싣게 된다. 지각세계는 이미 언어(langage)요, 잠재적 표현(expression en puissance)이다. 거기서 지각주체는 자신이 규정하여야 할, 그리고 말해주어야 할 표현성의 욕조 속에 담겨져 있음을 알게되고, 단번에 지각주체는 자신과 더불어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다른 지각주체들과 교류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따라서 레비나스에서처럼 일방통행적 재능을 가진 윤리가 특권을 누려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세계는 모든사람에게 말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세계에 동일한 구조들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지각의 선차성(primat de la perception)은 또한 개체들에 대한 관계의 우선성(primat de la relation sur les individus)이요, 독아론적 주관성에 대한 표현성의 우선성(primat de l'expression sur la subjectivit? solipsiste)이기도 한 것이다. 주체의 실존은 먼저 자신이 모든 주관성을 이미 객관적인 것으로 또 무한히 객관화 할 수 있는 것(즉 표현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고, 다음으로 모든 객관성은 주관적 실존에게 하나의 의미요구(demande de sens)로서 또 표현요구로서 다가오기 때문에 애매하다. 세계는 이해할 줄 아는 사람과 이해를 원하는 사람에게 말한다. 타자에의 관계는 우선 이러한 언어의 익명적이고 유동적 가능성이요, 사물과 타자들과 분리할 수 없는 구체적인 관계경험의 한 가운데에서만 주관적일 수 있는 익명의 말(parole)이다. 결국 메를로-퐁티에게 있어 지각을 표현으로 사고함은 세계의 표현성 가운데서 타자에게 그 구체적 특수성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5.레비나스의 윤리적 관계는 타자와의 원본적인 공동체를 깨트리지 못한다 : 애매성에 대한 표현성의 선차성은 타자와의 원본적인 공동체를 함축한다.
우리는 다음을 기억함으로 이 마지막 장을 서술해 보기로 한다.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세계의 연결을 끊는 것으로서의 환원 그리고 관념론적 방식으로 세계의 현존을 복구하는 것으로서의 환원에 대한 훗설적 해석을 비판한다. 이때 세계란 노에시스에 대한 노에마로서 이해되는데 이는 독아론적 의식작용들의 상관자요, 지향성으로서의 의식의 초월론적 상관자이다. 그래서 메를로-퐁티는 생활세계(Lebenswelt : monde de la vie)로 귀환하는 훗설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훗설이 이 생활세계의 구성을 의식 속에 기초짓는 것과 표상의 차원과 의식의 차원을 떠나지 않음을 비판한다. 생활세계로의 귀환은, 훗설이 원했던 것과 같이, 구성적 의식에로의 복귀를 통해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 훗설은 현상성(ph?nom?nalit?)의 체험 즉 연결(relation)과 같은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rapport au monde)인 세계현현(appara?tre du monde)의 체험에 이르기 위해 자연적 태도26)(attitude naturelle)를 괄호친다. 그때 그가 찾은 것은 지향성(vis?e ou intentionalit?)인데 이는 그 상관자로 표상들을 가지 의식의 개방이라 할 수 있다. 훗설에 따른 판단중지(?poch?)는 인식이라는 직접성의 관계로 결과된다. 마치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처럼 또 절대적 명증과 같이 의식은 스스로 드러난다. 이는 현상성에 대한 그러한 개념의 데카르트적 측면인데 데카르트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라는 단단한 명증을 그리고 훗설은 지향성(나는 무엇을 겨냥한다)을 발견한 것이다. 자연적 태도의 괄호 치기를 견뎌내는 것으로 여겨진 이 명증이 훗설에게는 지향적 의식, 노에마적 지향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적 선험의식을 되찾는 것이다; 현상들의 현상성, 세계의 나타남, 세계가 주어지는 차원은 이제 선험의식의 사관자인 의식의 소유물로 환원된다. 훗설의 이러한 관념론적 개념 속에서 나타남(appara?tre)은 해소되어 지향물(vis?es)로 되거나 표상 행위의 부스러기가 되는데 이 표상 속에서 우리는 세계의 본질적인 밀도 즉 지각된 세계의 수수께끼 같은 강도(r?sistance)와 농도(consistance)그리고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그 세계의 두께와 신비 및 표현성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세계의 현상성은 세계 자체에 귀속된 현상잠재력과 자기 계시가능성 그리고 자기 현상화하는 능력 즉 표현성의 능력으로 파악되는 대신, 그 반대로 우리 의식의 관점에 제공된 것으로, 의식의 상관자로, 고등한 선험적 관점(의식)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메를로-퐁티 입장에서 볼 때 사유의 자연적 태도에 속하게 되는 것은 의식의 철학이다. 이 의식철학은 저 자연적 태도를 괄호에 넣음으로 지양하려고 한다. 의식의 활동에 수동성을 주입하는 대신 세계의 활동에 그것을 집어넣는 것은 의식의 구성적 능력에 대한 소박한 믿음으로 하지만 수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세계가 아니며, 정작 수동적인 것은 의식이다. 훗설은 만약 반성(r?flexion)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비반성적 삶이 토양(sol)이라면, 이 비반성적 삶은 사방에서 반성을 넘쳐흐르고(d?border), 또 이 반성은 자신 안에서 세계의 가공되지 않은 잠재성과 불가사의한 현전을 흡수, 제거할 수 없는 것을 잊고 있다. 메를로-퐁티에게 세계는 선구성적이고 나의 의식 밖에서 구성된다.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선구성으로서의 나의 의식 밖에서 구성된다27)."
그런데 이 점은 상호주관성을 위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생황세계에 뿌리내림이란 모든 의식철학과 그것의 타자관계에 관한 함축들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공동신체성의 차원과 나와는 다른 살의 신체로서의 타자지각의 차원에서 해결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타자의 발견은 그가 나의 의식에서 자신을 그의 특수성 속에서 구성해 달라고 요구하는 독특한 상관자일 거라는 의미에서의 특수한 지향에 속하지 않는다.(특히 내 고유한 신체가 가진 의식과의 유비론적 표상에 의해서 구성되는 요구, cf.훗설의 paarung) 오히려 타자는 보편의 특징과 현명한 상호소통의 특징을 띠고 파롤, 로고스, 및 사유 교환의 가능성으로 인간 주체에게 나타나는 세계의 표현성과 더불어 주어진다. 메를로-퐁티가 독특한 애매성이라는 차원으로 사고할 때 그는 신체와 정신, 경험론과 지성주의, 유한성과 보편성, 외재성과 내면성 상이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했다(메를로-퐁티의 미간행, Revue de m?taphysique et de morale, n.4, 1962). 그 자신은 애매성의 불충분함이 문제라고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실존은 여전히 의식과 신체의 혼합, 종합으로 사유된다; 신체는 메를로-퐁티가 자신이 비판한 일방적 독트린들(경험론과 주지주의) 사이를 종합하면서 의식과 세계 사이의 중재자로서 제시되는데 그친다. 그러나 세계의 내재적 표현성(expressivit? immanente)이란 차원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신체를 의식과 세계의 중재자로서가 아니라 '세계-내-존재'로 생각함이다. 따라서 언어는 더 이상 신체주관의 제스트로서만 또 신체적 제스트의 변양체로서만 이해되지 않고 세계의 표현성 자체의 성질을 띠는 것으로 즉 원본적 표현(expression primordiale)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언어는 다른 표현양식들과 비교해 볼 때 특수성을 지니진 않았고 이는 곧 메를로-퐁티에게 간접적 언어로서의 예술에 대한 아름다운 반성과 침묵의 언어로서의 회화(peinture)에 대한 숙고를 허락하게 된다. 만약 언어 본연의(comme tel) 특수성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의 표현능력의 자질이 중재자로서의 자신을 잊게 하고 인간적 사유와 사상들의 보편적 교환을 위해 사라질 수 있다고 믿게 해 주는 데서 기원한다. 즉 언어가 사유와 의미, 그리고 의미탐구를 구성하는 차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유를 번역하기만 한다고 믿는데 그것의 본질적 환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차원' 또는 메를로-퐁티가 이상성 또는 관념성(id?alit?)이라 명명한 것의 차원은 지각된 체험세계에 숨어있는(latent)것으로 이해된다. 의미차원(niveau du sens)은 인간에 대한 세계의 표현성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표현성은 당연히 세계와 인간의 관계 가운데서만 존재하고 이 관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표현성의 개념은 상호소통의 한 형태를 의미하지만 이 형태란 내재성, 내재적 초월성으로 특징지어 진다. 표현된 것(exprim?)은 표현(expression)과 분리되거나 그것에 선행적이지 않다. 우리가 말하고 번역할 수 있는 잠재적 사유로서의 표현된 것은 표현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된 것은 표현추구(qu?te d'expression)에 부속하고 이 추구자체 속에서 구성된다. 표현된 것은 자시의 작업과 그에 따른 거북함과 황당함과 영감(enthousiasme)과 그리고 이 탐구(qu?te)에 동행하는 미지(inconnu)와 기대(attente)의 인상(impression)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분위기를 본질적으로 언어적인 탐구(단어를 선택하고 한 언어 곧 우리에겐 언제나 낯선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말하고, 저술하는 탐구)에서뿐만 아니라 회화적이거나 음악적인 미학탐구(세계를 표현하고 말하기 위한) 속에서도 찾게 된다.
6.닫으면서
말한다는 것, 그것은 항상 타자에게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말함이요, 의사소통의 과정들 속에 등록되는 것이다. 타자 문제는 언어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타자 이해는 따라서 원본적 표현(expression primordiale)에의 관계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파롤(parole)이 파롤 그 훨씬 더 이상의 것인 것과 같이,(사랑 그것은 그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이라고 말한 샤르돈을 개작하면서)타자는 그 자신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떤 세계의 표현성에의 관계인 것이다. 레비나스가 어떻게 생각할 지라도 사람들은 우리들의 실제적이고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세계에의 관계로부터 타자를 전적으로 분리시킬 수 없을 것이다. 타자에의 윤리적 관계는 도덕과 세계 사이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타자의 배고픔과 그의 불행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또 그가 나를 무한히 요구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하나의 세계라는 공통성과 또 세계-내-존재의 공동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배고픔은 나의 배고픔이요, 말하자면, 그의 배고픔은 나의 배고픔이 되어야 할 것이고, 나의 배고픔일 수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등장이 세계와 나의 자연스런 공모(complicit?)와 나의 자연적 이기주의를 깨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결코 나의 것이 아니었고 세계와 나와의 공동체도 결코 본래적이지 않았다. 타자가 나를 위한 세계의 표현성 속에서 확실히 독특한 요소로서 항상 거기 있었다. 우리는 공동의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이 세계 없이 나는 타자의 배고픔이라는 위급한 의미를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고 그의 필요에 대한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의 사활이 걸린(vitale) 긴급사항 즉 경험론적 긴급성보다 우월한, 호소력 있고, 고상한 특징의 긴급사항으로서의 타자를 도와야할 불가피성을 내가 깨달을 수 있기 위하여 타자는 나를 그의 볼모로 삼는 외부적 존재가 아니라 다른 나 자신(un autre moi-m?me)이기도 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공동의 세계는 우리 각자의 자아의 확대 장소로소 지각되어야 한다. 반면에 레비나스는 내재적 세계 속에서의 자아 확장(expansion)의 모든 개념이 타자의 출현으로 제거되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가 레비나스 보다 메를로-퐁티를 따른다면, 타자란 달에서 떨어져 나에게 계시를 가져다주는 ovni(미확인 비행물체 : objet volant non identifi?)가 아니다. 나는 이미 나에 대한 타자이고, 나 역시 나를 볼모(otage)로 삼고 있으며 나 또한 나에 대한 요구 수위가 높다. 결국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하나의 계시이다(une r?v?lation pour moi-m?me). 요컨대, 진리는 세계라는 바탕 위에서의 또 세계의 표현성이라는 토대 위에서의 타자와의 심층적 관계(lien profond)이다. 그러나 이 표현성은 단지 기술적(descriptive)이거나 감성론적(esth?tique)인 것만은 아니고 윤리적이며, 가치론적 요구(exigences axiologiques)도 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예컨대 사람들은 지구를 배려하고 그들의 땅을 보호하는 요구를 하나의 가치로 발견케 된다. 인간은 그들의 세계-내-존재들이라는 공동체 바깥에서 인간에 대한 절대자가 아닌 것이다. 여러 행성들 사이에서 지구에 정박한 것은 이미 그들의 윤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표현적이지 않을 세계는 윤리의 담지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레비나스가 뭐라 얘기하든 윤리적 차원이란 감성적 차원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감성적인 것(esth?tique)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이다.(예컨대 음악과 미술과 모든 시각적, 감각적 즐거움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아랍 에미리트(Emirats Arabes) 그리고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의 위선자들은 인류의 절반(여성)을 억압하는 자들이다.) 감성적인 것의 거부는 윤리적 허약함의 징표이고 인간에 대한 연민 결핍이 표시인데 위의 경우 특별히 여성에 대한 인간적 동정 상실의 증거다. 또 감성적인 것의 경시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세계의 위험들에 대한 불안을 계시하며, 궁핍해진 자아 속으로의 움츠러진 후퇴와 사후세계와 피안으로의 도피를 나타내고 있다. 결국 감성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은 표현성에 대한 공포요, 정확히는, 표현적 실재들과 상징적인 것과 풍부한 은유성을 무서워함이다.
만일 레비나스가 여자를 다른 타자(autre)보다 열등한 타자, 즉 보편성이 결여된 타자, 특별한 위상이 부여된 타자로 만들고, 그녀에게 자연성(naturalit?)과 감성적인 것(esth?tique)이 공모된, 전통적이고 축소된 자리를 할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이 공모란 레비나스 자신으로서는 윤리적으로 열등존재인 것과의 공모이므로 그의 여자에 대한 타자사유는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보다는 더 감각성에 가깝고, 자연에 더 근접해 있다. 열등하고 초월성이 결여된 자연성과 감성론의 본질은 감각적이고 내재적인 비젼인데 레비나스에게서 그것은 자아에 가까운 것이고, 주지하듯 이 자아는 그에게 부정적이다. 그가 보기에, 메를로-퐁티에게는 자아와 존재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 내재적이다. 인간과 존재의 유기적 분절에서 시작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존재론은 이렇게 내재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도입시켜 그들(자아와 존재) 사이의 단절과 동시에 초월성의 가치 즉 윤리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내재적 초월성을 견지하는 메를로-퐁티의 눈에는 그가 선명한 이원론자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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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Merleau-Ponty, M.,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Paris, Gallimard, 1945.
Merleau-Ponty, M., Le visible et l'invisible, Paris, Gallimard, 1964.
Levinas, E., De l'Existence ? l'existant, Paris, Vrin, 1947.
Levinas, E., Le Temps et l'autre, Montpellier, Fata Morgana, 1979.
Levinas, E., En d?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Paris, Vrin, 1974.
Levinas, E., Totalit? et infini, La Haye, Nijhoff, 1974.
Levinas, E., Ethique et infini, Paris, Fayard, 1982.
Levinas, E., Transcendance et Intelligibilit?. Suivi d'un entretien, Gen?ve, Labor et Fides, 1984.
Sartre, J.P., L'?tre et le n?ant, Paris, Gallimard,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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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M.Merleau-Ponty, 『Ph?nom?nologie de la perception』, Paris, Gallimard, 1945, pp. 194-195(이하 P.P)
2) Ibid, 195
3) Ibid.
4) Ibid, 401
5) J.P.Sartre 『L'?tre et le n?ant』, Paris, Gallimard, p. 315(이하 E.N.)
6) P.P, 195 : 신체에 결부된 중요성으로서의 사랑의 모순들은 따라서 타자에 대한 오브제이자 나에 대한 주체인 내 신체의 형이상학적 구조에 기인하는 보다 보편적인 드라마에 연결돼 있다.
7) Ibid, 404.
8) Ibid, 403.
9) Ibid, 406.
10) Ibid, 514.
11) Ibid, 410.
12) Ibid, 407.
13) Ibid, 410.
14) 우리는 『전체와 무한』, P. 40에서 "객관적 인식에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타자와의 관계"라는 표현을 찾을 수 있으며, 게다가 레비나스는 F. 프와리에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사람들은 자주 나의 중심 주제인 상호 주관적 관계에 대한 나의 관심을 M.부버의 철학과 비교하고 있다. 그 철학자는 인격들 사이의 관계인 나-너(Je-Tu)와 사람과 사물관계인 나-그것(Je-Cela)을 구별하는데 타인과의 관계는 대상적 인식에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확실히 부버가 나보다 앞섰던 반성의 지대(terrain de r?flexion)이다. 나는 비교적 늦게 그의 위대한 저서 ‘나와 너’를 읽었는데 이 근본적 저술 속에서 공동인격적 관계(relation interpersonnelle)는 탁월하고, 설득력 있게 그리고 정교하게 주-객 관계로부터 구별된다" (F.Poiri?, Emmanuel Leuinas : Qui ?tes-uols?, La Manufacture, 1987, P. 123).
15) Ibid, 418.
16) 우리는 이미『훗설과 하이데거와 더불어 존재를 발견하면서』(J.Vrin, 1949)라는 레비나스의 저서에서 지향성의 해석에 관계된는 사르트르에 대한 비판을 확인할 수 있다.(DE.50).
"사르트르는 지향성을 자기자신 밖에서 존재하는 의식의 소유물(재산)로 해석한다. 그렇지만 밖으로의 지향의 흐름 속에서는 자기 앞의 어떤 탈주(fuite)도 없으며 밖에 대한 편애(pr?dilection)도 없다. 왜냐하면 자기(soi)가 바로 밖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사유의 의미를 모범으로 삼아 전적으로 이해된다. 자기(soi)는 그가 사유함에 따라 바깥(le dehors)으로 가고 뿐만 아니라 사유 안에서 의미가 포착되고 이해됨에 따라 안(le dedans)으로도 향한다. 지향성(intentionalit?)은 어떻게 객관성의 즉자(l'en-soi)가 의식 내에서 표상되고(repr?sent?) 이해될 수 있으며(appr?hend?) 궁극적으로 다시 주관적으로 될 수 있는가를 이해 하도록 해준다."
다른 한편, 타자에 관련해서는 예컨대 우리는 다음의 대목을 읽을 수 있다.
"근본적 고찰 : 나는 애초에 타자를 ‘자유’로서 제시하지 않는다. 자유란 상호소통의 실패가 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특성이다. 왜냐하면 자유와 더불어서는 굴종과 복종 이외의 관계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는 있어 두 자유중의 하나는 소멸된다. 주인, 노예의 관계는 투쟁의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지만 그때 그 관계는 상호적이 된다" (『시간과 타자』, Fata Morgana, 1979, P. 80).
17) 레비나스저작들의 대문자 약호는 다음과 같다.
EE : De l'Existence ? l'existant
TA : Le Temps et l'autre
DE : En d?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TI : Totalit? et infini
EI : Ethique et infini
TR : Transcendance et Intelligibilit?
18) TR, 12.
19) 『전체성과 무한』(PP. 40-41)에서 레비나스는『나와 너』의 부버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킨다.
"우리는 한편 뛰뚜아망(tutoiement : 너라고 부르며 말 놓고 지내기)이 타자를 상호적관계 속에 위치시키지 않는지를 자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성(r?ciprocit?)이 원초적인지도 말이다. 다른 한편 나-너 관계는 부버에서 형식적 특징을 유지한다. 그 관계는 인간을 인간에게 묶는 만큼이나 사물에게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너의 형식 주의는 어떤 구체적 구조도 규정하지 않는다. 나-너는 사건(Geschehen)이요, 쇼크요, 이해이지만 우정과 다른 삶을 이해하게끔 허락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cf. T.A, 89) :
"이 가지런히 나란한 공동체(collectivit? du c?te-?-c?te)에다가 나는 나-너의 공동체를 대항시키려 했다. 즉 분리된 두 자유사이의 연결에 상호성이 머무는 부버적 의미도 아니 고 고립된 주체성의 필연적 성격(carat?re in?luctable)이 평가절하되는 부버적 의미도 아닌 차원에서 전자(collectivit? du c?te-?-c?te)를 공격하는 나-너의 공동체를 대립시키려 했다. 나는 미래의 신비에로의 현재의 어떤 시간적 초월성을 찾았다. 이 초월성은 그것이 인격이든, 진리든, 작품이든, 직업이든간에 제3의 용어에의 참여가 아니다. 그것은 일치가(communion) 아닌 공동체이다(collectivit?)."
20) E.I, 22-23.
21) H.S, 151.
22) E.E, 62.
23) T.A, 75.
24) T.R, 54.
25) T.A, 48.
26) 마치 우리 스스로는 그것의 요소에 불과한 세계가 절대적 현실(r?alit? absolue)인 것같이 우리가 그 세계를 제시하는 방법.
27) Le visible et l'invisible, Paris, Gallimard, 1964, P.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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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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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 : 현상학, 윤리학, 언어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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