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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의식존재론-후설

온울에 2008. 5. 7. 09:50

목 차

I. 無前提性과 嚴密學의 이념
II.Husserl의 <危機> 인식과 철학적 반성
1. 의식의<自然化> <客觀化> 비판
2. 존재의 <歷史化> 비판
III. 의식이 指向性과 相關者로서의 경험세계
3. 心理學主義와 정신과학 일반
4. 指向性 (Intentionalitat) - 충족된 의식
5.현상학의<對象> 개념 - 事態와 體驗流
6. noesis - noema 구조
7.의식존재의 存在論的 해명
IV.<事象 自體>와 선험적 주관의 통일
8.自然的 態度의 극복과 현상학적 還元
9.순수의식의 地平
10.共同主觀性과 明證性
V.현상학의 科學性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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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中央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학술지명 人文學硏究 
권 25 
호 1 
출판일 1996.  




후설 現象學에 있어서 意識存在論


Die Ontologie des Bewusstseins und der Begriff Intentionalitat in der Phaenomenologie Husseris


權奇哲
(Kwon Gi Cheol)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2-046-9602-04
pp.8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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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無前提性과 嚴密學의 이념
후설 (Husserl, Edmund, 1859-1938)의 간결한 저서 <嚴密學으로서의 철학, Philosophie als strenge Wissenschaft, 1911>은 그의 학문이념을 표제와 함께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다. 엄밀학 또는 明證性 개념이 그의 체계의 주제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학문세계 특히 인문 사회과학계의 일반적 동향 그리고 당대 시대상황의 일반적 분위기에 기인하고 있다. 흔히 世紀末的 현상으로 특징지워지는 사유의 혼란이나 가치의 양극화등 소위 카오스적 상황은 거의 모든 세기의 말과 초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법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가 경험하는 바와 같이, 19C 말과 20C 초 Husserl도 그와 유사한 정황에 서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의 최초의 철학적 大著 <論理硏究, Logische Untersuchungen> 1권은 바로 1900년에 출간 되었다. 이는 그가 수학연구에서 철학연구로, 또 이미 수학교수(사강사)이던 그 지위에서 철학교수에로 변신하게 되는 계기이자 삶의 일대 전화점이 된다. Husserl 자신의 삶과 그의 학문탐구의 변천 과정이 당대의 시대상황 및 학계동향과의 연관에서 조명될 때, 비로소 세기적 전환기의 사상적 맥락 그리고 오늘날 현상학적 운동과 조류의 실재적 의의가 탈루없이 추론될 수 있을 것이다. 현상학에 發出論理를 제공하는 당대의 제반 여건에 대하여는 다음에 올 Ⅱ장에서 두 갈래로 크게 나누어 논의될 것이다.

현상(Phanomen)이란 무엇인가? 현상학에서 '現象'개념은 대상이 인간의 의식에 주어지는 바 '意識現象'을 지칭한다. 이때 의식현상으로서의 '존재'는 의식에 주어진 그리고 의식에 의해 구성된 대상성의 성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사실 '객체적' '외적' 대상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물적 자연의 현존에 스스로 소외되어 있는 우리의 대상지향적 의식의 관행적 태도를 그 原本性(Originalitat)의 영역에 환원 정립시키려 한다. 의식의 원본성에 기초하여 嚴密科學의 이념을 정초하려면 그것이 無前提의 지반에서 시도되어야함은 자명하다. 기존의 철학은 특히 形而上學 체계들은 모두가 學的 前提등을 표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의 전제는 그 철학적 특성을 단적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모든 철학적 사고에 있어 하나의 확신이자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거기서 비로소 체계와 방법론이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전래의 태도들은 그 나름의 전체에 충실한 나머지 실제 세계와 사실의 참모습을 왜곡함으로써, 진리인식의 학적 과제를 온전하게 수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탐구의 성과가 현대실상으로부터 괴리될 수도 있다. 그것들은 마침내 공허한 체계로 남거나, 아니면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정치이데올로기 및 과학이데올로기의 극단화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은 각기 특유한 방식으로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면서 막강한 대중 동원력을 과시할 뿐 아니라, 결국 인류 생존의 가공할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여기에 연루된 모든 주관적 확신이나 철학적 전제들은 대개 선입견(Vorurteil)에 불과하다는 것이 역사적 전환기를 거치면서 이미 입증된 바 있다.

현상학은 의식현상으로서의 대상을 純粹自我의 先驗的 次元에 까지 환원시키므로써, 진리인식의 明證性 (Evidenz)을 정초하는 동시에, 그것을 記述 (beschreiben)하는 것이다. 이때 主·客 관계의 사고구조는 적정한 해명이 가능하다. 현상학이 記述을 유일한 방법으로 채택하는 이유는 바로 無前提性의 원리 (Prinzip der Voraussetzungslosigkeit) 1) 에 있다. 현상학은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어떤 체계의 전제를 배격하고 오로지 환원의 방법에 의해 존재의 원천인 순수의식 내지 순수자아의 先驗性에 반성적으로 귀환해야 한다. 여기서 원본적으로 주어지는 대상의 現象形式을 具身的 (leibhaftig)으로 서술하려 한다. 이 '記述에 의한 解明' 2) 은 事象自體에로 (Zuden Sachen Selbst !) 나아가는데 가장 효과적인 통로가 될 것으로 본다. 전제없음 또는 무전제성이야말로 우선 철학이 '엄밀학'으로 성립할 가능성을 보장하는 철학사 최초의 시도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그리하여 인간의식의 주체적 재량권을 확립하면서도 Kant류의 공허한 형식주의를 극복, 내용충만한 인식의 準據를 共同主觀的 의식세계에서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급속도로 다원화 복잡화되고 있는 현대의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사례 중심의 단순한 검증이나 평가의 태도는 시로 과학적이지 못하다. 그것이 일견 '과학적'일 수도 있으나, 내면의 진실에 근접하기에는 터무니 없는 形式上 科學主義에 불과한 것이다. 의식의 참여없는 공허한 객관적 과학주의나 형식주의적 태도는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거나 왜곡함으로써, 인간의 사고는 날로 단순하게 그리고 사실세계의 문제점은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상학이 기존의 인식이론 또는 방법론의 차원을 넘어 <意識存在論>으로서의 구조와 특성이 충분히 해명될 때, 그것이 목표하는 嚴密學의 의의 및 진정한 科學性 (Wissenschaftlichkeit) 개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II.Husserl의 <危機> 인식과 철학적 반성
1. 의식의<自然化> <客觀化> 비판
근대 인식이론은 원래 경험주의 철학에서 출발했으나 그것은 Kant 비판철학에 이르러 비로서 온전한 체계로 구성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 과학적 계몽주의의 대계를 완성하게 된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조류는 관념론 및 낭만주의에 의해 상당기간 유보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세기의 중반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 또는 유물론의 출현과 함께 인간의 사유세계는 다시금 소박한 과학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의식과 대상 두 영역을 오직 택일의 문제로 양극화 하면서 이데올로기적 현상을 야기하기에 이른다. 특히 세기말적 혼돈기에 유물론은 科學萬能主義 내지 技術至上主義와 합류하면서 진리인식은 물론 존재와 가치의 모든 분야에서 광범한 세력을 얻었으며, 이성의 규범적 기능성이나 도구적 실용성 만이 논의의 초점일 뿐 생활세계적 정서 그리고 사실관계에서의 당위와 그 실천적 전망등은 거의 전적으로 배제되기에 이르렀다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들은 이때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다.

과학기술주의와 자본주의는 이해의 공통지반 위에서 쉽게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창출한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생존현실이 그 만큼 향상되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이데올로기에 편승하면서 민족주의와 결탁하는 특성도 갖고 있다. 이와 유사한 정황을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국이 경쟁적으로 외치고 있는 '살아남기 위한 과학기술개발'이나 '국력신장의 당위성'등의 구호 뒤에는 언제나 정치권력이 작용하고 있으며, 과학과 자본의 힘을 차용하는 그 세력은 항시 '민족'과 '국가'를 전면에 내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反科學性>의 표본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과학과 기술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합리성에 기초해야 하며, 어느 한 민족이나 국가체제에 그리고 특정한 정치세력의 의도에 한정적 봉사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에 있어서 민족주의 및 국가주의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인류의 복지향상이나 생존의 문제에 보편적으로 기여할 때, 비로서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는 정당성을 가지는 동시에 그 필요 충분조건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 과학기술의 정치적 변용에 따른 가공할 위력은 결국 '인간 자신의 생존'을 겨냥한다는 사실이 입증되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의식이 '自然化 (Naturalisierung)'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첫째, 객관성을 표방하는 과학주의가 그것이다. 그것은 이성능력 뿐만 아니라 인간정서의 모든 형태까지도 객체적 대상세계의 物的 原理와 그 法則性에 기초하기를 강요한다. 모든 가치질서가 여기서 비롯된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둘째, 자연에 대한 낭만적 主意主義的 태도는 전자에 대한 반작용의 성격을 띈다. 자연에 대한 법칙적 필연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은 단순한 과학성을 거부한다. 오히려 형이상학적 도덕적 세계관에 근거해 자유로운 思辨과 韻律에 호소하는 것이 특징이다. Schelling의 형이상학적 자연주의가 대표적 사례에 속할 것이다. 이 경향은 觀照的 특성과 박약한 실재적 근거 때문에 쉽사리 과학주의에 영합될 수 있다. Marx가 여기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연주의와 과학주의는 그 배경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객관주의는 "모든 인식지평에 있어 주관적 발생근거를 망각하는 것, 즉 인식의 객관적 측면에만 단적으로 의존한 나머지 진리이해의 편협한 입장" 3) 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생활 세계적 주관의 상대성을 뛰어 넘는 과학의 세계"(세계상)는 알고 보면 인간생활의 터전인 "생활세계로부터 抽出 연유되는 것" 임에 틀림 없다. 과학의 대상은 그 존재가 "고유한 이론적 논리적 실천의 주관적 수행에 기반하는 의미형성체(Sinngebilde)"인 동시에, 그 "실천 자체는 생활세계의 삶" 4) 에 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학의 정밀화, 그 논리적 근거에 까지 접근하려는 현대과학 그리고 그 실천인 기술의 자연지배를 Husserl이 평가절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5) 그 역시 당초에는 數學徒로서의 바탕에서 철학에 진입한 바 있다. 수학과 철학은 사실 根本學의 차원에서 공통지반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말하자면 학문연구에 있어 근대적 조건 (근세 철학의 많은 선구자들이 수학 물리학등 자연과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므로)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대 지배적 학문 경향이나 대중적 의식을 고려할 때, 정신과학 일반이 경험심리학이나 아니면 좀 더 넓게는 실험적 과학주의의 방법론 에 경도된 나머지, 6) 정신과학 고유의 임무와 기능을 포기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심각한 문제상황으로 제기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런 류의 문제제기를 철학 도는 자주 접하게 된다.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가시적 연구성과 그리고 그 사회적 기여도에 심취한 상태에서 철학 및 인문과학 종사자들의 능력과 한계를 對象化 하는 일 - 그것은 그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기에 매우 적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기술관료의 관료주의적 행태가 편승할 여지를 마련한다. 그들의 능률주의 관행은 인간의 사고영역까지도 규격화 체계화하려는 습성을 감추지 못한다.

2. 존재의 <歷史化> 비판
객관주의나 과학적 실증주의가 제시하는 인간의 생존방식은 대체로 획일적 규격화나 그 객관적 타당성에 있다. 여기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조류가 실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Hegel과 Marx의 역사철학적 세계관의 전횡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역사발전의 과정에 대한 법칙적 전망이나 절대주의적 입장을 배격하면서, 상대주의 경향을 표방하는 세력이 등장한다. 이른바 歷史化主義 (Historizismus, Historicism)가 그것이다. 우리가 흔히 역사주의(Historismus, Historism)라고 일 는 큰 흐름에서 극단화된 한 유파에 해당한다. 이는 도도한 시대흐름의 과학기술적 성향으로부터 격리되어 寫實的 感性主義에 치우치면서 정서와 '이해(Verstehen)'에 바탕하여 '현존의 정당화'를 촉구한다. Dilthey가 주도하는 이른바 '세계관 철학 (Weltanschauungsphilo- sophie)'이 이를 대표한다.

철학은 당초 우주관 세계관 인생관의 형태를 취하면서 그 학적 토대를 마련한 바있다. 그것이 中世를 거치면서 宗敎性에 의해 철저히 탈색되었으며, 근대 과학적 계몽주의의 정교한 方法論에 힘입어 비로서 학문적 체계를 획득하기도 하였다. 한편 철학이 자신의 모습을 체계화하면 할수록, 철학적 사고 본래의 기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적 표현양식에 의존하는 철학이란 그 만큼 非人間的으로 되기 십상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생활세계적 토양에 되돌려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세계관적 재건이 Dilthey에 의해 시도된 것은 이미 상당한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소위 세계관 철학은 그 훌륭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 오해의 소지를 제공한 것 또한 사실이다. 전통과의 哲學史的 文脈을 거부하면서 사실세계의 현존에 안주하려는 모든 유파들에게는 이런 입장이 매우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19세기의 세기말적 혼돈으로부터 일정 간격을 유지하려는 狀況倫理的 정서에 부합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과학기술 및 자본의 상승적 위력이 창출하는 국가간 민족간의 분쟁 그리고 대량학살이란 反人倫的 상황전개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아무런 전망이나 처방을 제공할 수 없었다. 다양한 사회발전과 시민사회적 현상형식의 전개에 심취한 나머지, 그 배후에서 진행되는 정치이데올로기의 발호를 미쳐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성인식의 당위와 요청 그리고 그 실천적 명제에 대하여는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상대주의에 편향된 세계관 철학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가치일반의 혼란을 부채질함으로써, 마침내 자본주의의 과학기술적 세력화 및 그 일방통행에 간접적으로 봉사하게 된 것이다.

존재와 현상 모두를 역사적 일회적 사실체계에 한정하려는 역사화주의는 곧 역사적 상대주의인 동시에, Hegel과 Marx로 대표되는 고전적 역사주의 또는 역사적 절대주의에 대한 하나의 변종에 불과하다. 그것은 경험세계의 실재를 소중히 여긴다는 현실적 가치와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세계관 철학'과 연계함으로써 제한된 영역에서 얻어진 탐구의 지적 성과들을 인류 精神史의 전체적 展相에까지 확대 적용하려는 경향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결론은 회의주의나 상대주의에 이르는 길 뿐이다. Husserl에 의하면 "역사화주의는 경험적으로 발견한 구조에서 출발함으로 인류사에서는 한 정신조류가 다른 정신조류를 해체시킨다는 확신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이 상대적인 시각은 어쩔 수 없이 정신적인 것을 오직 사실적으로만 생각하도록 만든다. 역사화주의는 … 정신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경험적 형식을 지니고 나타나는 것이 전부라는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관찰과 그 업적을 절대시" 7) 하는 태도를 취한다.

Husserl과 그의 현상학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시대상황의 통속화 및 가치일반의 일탈현상과 더불어 학문세계의 방법론에까지 만연하는 단순 과학주의적 경험주의의 사유경향에 대한 근본적 성찰에서부터 출발한다. 의식의 自然化 그리고 존재의 歷史化는 각기 객관주의 및 주관주의의 극단적 태도를 대변하며, 그것들은 시대 현실이 직면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올바로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편협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생각은 우선 유럽에 있어서 학문의 방법론적 파행을 지적 경고함으로써, <위기< 저술과 함께 인간의 의식전환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는 원래 數理硏究에 종사하는 수학도로서 대학에서 학문연구의 과정을 거치던 중에, 無限數의 개념정립에 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무한수 개념의 정립 가능성은 수학 자체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봉착한다. 그 돌파구를 당대 수리논리학의 방법적 기초에 호소하는 한편, 무한수의 논리적 근거를 추구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논리학 연구로 전환한다. 이때 저술한 그의 최초의 철학적 대작 '論理學 硏究'는 사실 非數學的 思考에 해당한다는 Frege의 지적과 함께, 양자는 상당기간 심도있는 학문 논쟁을 전개한다. 이때 Wien에서의 스승 Brentano의 소위 '心理學主義 (Psychologismus)'에 경도된 자신의 입지를 반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철학탐구의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당시 정신과학계 일반을 풍미하던 경험심리학 그리고 철학의 心理學化 경향들을 접하게 된다. Husserl 자신도 일시 이러한 경향에 합류했으며, 그것이 그의 철학연구를 가능하게 했음은 사실이다. 세기말의 혼돈된 상황이 여기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이 그의 사유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이제 이성인식의 본래적 영지가 모색된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의식(Bewuβtsein)'내에서 모든 존재와 존재인식의 틀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도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외계로 대상세계로 出他해 있는 우리의 대상적 의식을 그 본원에 환원(Reduktion)하는 방법적 수행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이른다. 대상에 대한 즉흥적 반응과 경박성 지능지수의 남용을 일단 유보하는 선에서 '判斷中止'(εποxη)를 통해 비로소 사유의 환원적 작업이 가능하고, 또한 삶의 현상이 순수의식의 토대위에서 선험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 - 이것이 철학일반의 새로운 가능성을 예시하는 현상학의 태도(Einstellung) 곧 현상학적 근본주의(Radikalismus)라고 할 수 있다.

III. 의식이 指向性과 相關者로서의 경험세계
3. 心理學主義와 정신과학 일반
19세기 말 서구 정신사는 이른바 심리학주의 (Psychologismus)의 대두로 말미암은 큰 동요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영국에서는 이미 17-8세기에 경험론적 인식론이 성립되었고 그 풍토에서 경험주의 심리학이 발전되었으나, 독일에서는 19세기 전반까지는 이성주의와 사변철학 때문에 심리학은 아직도 그 독자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던 터 였다. 경험주의의 보편화 추세에 따라 심리학은 경험적 실재에 근거하여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는 한편, 마침내 허약한 토대의 형이상학에 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그 전조는 Kant의 심리주의적 과학주의적 형식체계에서 이미 예고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심리학주의는 경험과학적 학문성에 더욱 근접한 것이다. 즉 심리학이 형이상학적 체계에 근거하기보다는 오히려 형이상학이 심리학에 기초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 및 정신과학 일반은 과학에 정초한 심리학의 방법론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정신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심리적 과정의 사실관계에 환원될 수 있으며, 물질적 자연과의 관련에서 경험적 과학적 관찰의 방법에 의해 검증될 수 있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Fries, Herbart, Beneke 등이 이러한 입장의 대표 자들이다. 이들의 경험심리학 내지 심리물리학은 감각과 대상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해명하되, 물리적 현상과 심리적 사실관계를 하나의 차원에 통일하려는 것이다. Husserl에 의하면 자연주의 조류의 한 특수한 형태가 곧 심리학주의이다. 그것은 "자연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존재나 이념의 세계까지도 모두 자연화(naturalisieren)하려는 경향" 8) 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주위란 용어는 원래 Hegel학파의 철학사가 J. E. Erdmann이 처음 사용했으며 9), Husserl은 이것을 그의 베를린 시절의 은사 C. Stumpf를 통해 전수 받는다. 10)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당대 지배적 사조인 Hegel철학의 사변적 조류에 반대하는 Fries등의 경험주의 심리학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이들은 내면적 반성의 주관적 요소를 취급하는 심리학은 사실 철학의 기본원리에 해당하며, 따라서 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등은 심리학 또는 응용심리학의 일종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Husserl이 본격적으로 이 심리학주의에 관여하게 된 것은 그가 수학에서 철학연구에로 방향 전환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바 있는 비인 시절의 은사 F. Brentano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그에 의하면 심리학 연구는 오로지 내적 경험이나 내적 지각에 주어지는 모든 所與의 논리적 서술 및 기술적 분석에로 나아가야한다. 그것은 생리심리학이나 실험심리학이 아니라, 심리학의 대상이 곧 심리적 작용과 그 과정이므로 이 과정에 대한 경험적 연구와 관찰의 방식에 의해 수행되는 이른바 '記述心理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에 관한 기술적 학문으로서의 심리학은 의식이 하나의 작용이며, 작용은 그 자체로서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항시 그 작용이 지향하는 대상을 내포적으로 수용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곧 의식존재의 『지향적 내재』라 한다.

이 심리학주의는 Husserl에게서 처음 논리적 심리학주의(logischer Psychologismus) 로 나타난다. 11) 그것은 논리학이 심리학 특히 인식심리학에 의해 기초되어야 한다는, 즉 논리학 분야에 한정적으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그는 후기에 와서 심리학주의의 의미를 확대하여 논리학 뿐 만 아니라 윤리학 인식론 형이상학등 모든 전통 철학의 분과들에 널리 적용함으로써, 마침내 선험적 심리학주의 (transzendentaler Psychologismus)의 입장을 취한다. 12) 그런데 심리 물리적 주관 즉 객관적 세계에 속하는 신체적 조건하의 인격체를 대상으로 하는 경험심리학과 정신적 물체적 주관의 구성 요건으로서의 순수의식의 영역을 다루는 그의 선험적 현상학적 심리학주의를 Husserl은 엄격히 구분한다. 그것은 Kant에서 처럼, 事實根據 (quid facti)가 아닌 權利根據(quid juris)에 주력한다는 점에서 자명해 진다. 그러나 논리적 및 선험적 심리학주의의 용어상 차이는 단지 범위의 문제일 뿐 그 성격에 있어서 그다지 명백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초기의 현상학을 기술적 현상학이라 한다면,『논리 연구』이후의 현상학은 기술 심리학의 심리학주의를 일단 극복하고 논리학주의의 성격을 띄게 된다. 그것은 Husserl이 1880년대에 이룩한 그의 일련의 수리철학 저술들 (학위논문 및 교수자격 취득 논문등)에 대한 G. Frege 의 비판과 충고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3) 뿐 만 아니라 이때 수학은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수학의 기초와 근거에 관한 수리철학적 문제로 하여 논란이 분분하던 참이다. 數 개념에 관련한 G. Cantor의 문제 제기는 超限數의 도입에 따른 논리적 가능성 여부와 함께 수학의 토대인 自然數의 명증성 근거에 집약된다. 수학이 모든 자연수나 正數에 기초한다는 것을 승인할 경우에도, 이 자연수 자체의 명증적 기반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결국 수학적 구성주의 이론과는 다른 방향 즉 非數學的 경로에서 시도되어야 했던 것이다. 학계의 時流에 따라 수 개념의 기원을 일단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Frege의『代數의 기초 (Grundlagen der Arithmetik)』(1884) 출간 이후 그와의 논전을 경험하면서 다시 수 개념의 논리적 정의 방식에 영향을 받게 된다. 양자는 일부 공통점을 가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방법상 서로 다른 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Husserl은 논리학 연구를 거친 다음, 마침내 선험적 현상학의 단계로 나아 간다.

4. 指向性 (Intentionalitat) - 충족된 의식
계몽시대 이래 철학이 추구하는 목표는 진리인식의 확실성 내지 과학성 그것이다. 과거의 형이상학이 天上의 진리를 추구하는 수직적 상하관계를 축으로 한 결과 탐구의 성과가 추상적임은 물론 삶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도 소외되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현상학은 대상세계의 실재성과 의식에 대한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그 현실적 의의와 가치 모두를 뒤늦게 검증받기에 이르렀다.

'주어진 것' (所與)으로서의 자연 및 대상은 인간의 인식활동의 유일한 相關者일뿐 아니라, 실천과 생활의 토대임에 틀림없다. 세계와 자연은 곧 인간의 이론적 실천적 행위의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소여로서의 대상은 바로 인간에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의식세계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 '주어진 것' 또는 '주어지는 것'에 대한 탐구가 근대적 認識論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러한 인식활동의 論理性과 眞理値를 획득하려면 무엇보다도 진리인식의 과학성이 보장되어야 했던 것이다. 과학주의와 실증주의, 자연주의와 경험적 심리학주의등 일련의 사유형식들을 거치는 동안 소여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방법의 첨예화 그리고 대상영역의 局所化 등에는 일단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실험적 실증적 방법의 보편화, 이에 따라 물질세계에 지나치게 한정된 대상개념 등이 그것이다. 반면, 그 인식행위의 주체로서의 인식주관 또는 의식은 극히 단순화된 나머지 행동반사적 감각기능에 국한된 임무 만이 부여되었다. 소여 존재의 현상적 의의는 오직 감각기능에 의존하는 '감각현상'으로서만 정의되는 것이다.

소여로서의 현상은 그것이 비록 '주어진다'라는 語義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단순감각적인 것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현상개념의 存在論的 의의가 거기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상학이 취급하는 '現象'이란, 경험주의 심리학 내지 실험심리학의 대상인 '감각현상'이 아니라, 바로 '의식현상'인 것이다. 의식현상은 바로 '무엇(어떤 것)이 의식에 주어진다'와 동시에 '의식이 어떤 무엇에 관계하고 있다'의 두가지 측면을 내포한다. 이때 의식은 대상에 관계하는 작용 noesis와 어떤 대상이 특정 한 방식에 따라 의식에 주어지는 내용 noema 양자를 상관구조로서 함축해 있다. 특히 의식의 능동적 작용적 측면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경험적 실험적 심리학의 입장과 전혀 다른 형식에서) 현상학은 의식의 특성을 '指向性' (Intentionalitat)으로 규정한다.

지향성의 어원인 라틴어 'intentio'는 '…에 향하여' (sich richten auf …)있다는 하나의 작용방식 또는 존재양식을 뜻한다. "모든 체험이나 정신적 행위는 어떤 무엇 (Etwas)에 향해져 있기 마련이다. 지각 자체는 '무엇에 대한 지각'이다. 표상, 기억, 판단, 추측, 기대, 희망, 사랑 등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가 무엇에로 지향되어 있다 라는 규정된 행동방식을 취하고 있다." 14) 이 말은 지각작용 및 행위와 그 대상을 놓고 격리된 관찰이 가능하다고 믿는 우리의 소박한 고정관념을 전적으로 수정하기를 요구한다. 그 고정관념은 일찌기 Kant적 과학주의 내지 悟性主義 인식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태도가 "비록 심리학에서 이루어진 것이든 생리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든 - 물론 현상학적으로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 이에 종사하는 다수의 연구자들에게 의해 엄밀히 격리된 관찰대상으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지각이란 나의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 모든 곳에 예외 없이 깔려 있다. 지각은 삶의 진행과 함께 또한 언제나 삶의 진행 속에서 만 수행되는 것이다." 15) 의식의 지향적 연관은 그런 의미에서 生哲學과 상응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생철학은 결국 역사적 상대주의에 귀착되는 반면, 현상학이 수행하는 의식의 지향적 구조분석은 지식의 명증성에 기반한 嚴密學의 이념을 추구해 간다.

의식행위로서의 지각이 삶의 과정에서 수행되는 것이긴 하나, 이때 의식이 삶의 경험적 실천적 과정에 예속된 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의식활동과 삶의 진행이「主 -客」및「의식 - 존재」의 불가 분리의「相關性」 16) 에 있음을 뜻한다. 양자의 존재는 오히려 의식의 지향적 체험에 의해서만 비로소 <의미있음>이 되는 것이다. 모든 지각은 곧「종합적인 지시의 연쇄적인 망」(synthetische Kette von Verweisungen) 17) 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의미>가 바로 현상학의 탐구대상이다. 현상학은 감각에 주어진 사실내용을 밝히는 심리학이나 물체세계의 원리에 주목하는 자연과학적 사실과학이 아니라, 여기서 나타나는 의미와 그 의미의 근거를 밝히려는 의미현상의 本質學인 것이다.

5.현상학의<對象> 개념 - 事態와 體驗流
의식의 특성이 '어떤것(무엇)에 대하여(향하여)'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지각은 곧 '무엇에 대한 지각'이라는 언표에서 우리는 의식의 지향작용과 동시에 의식과 대상 양자의 상관적 '관계'에 특히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규정이나 상관성이란 단지 지향성을 설명하기 위한 예비작업에 불과하다. 그것은 계몽주의적 선험철학이나 아니면 경험주의 인식론과 하등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향성을 바로 이해 하기 위하여는 이 '대상' 개념의 성격이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

첫째 대상을 <무엇> 또는 <어떤것(Etwas)>으로 표시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의식의 지향적 작용은 물체나 공간 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활동하고 움직이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적어도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 대상 저 대상으로 끊임없이 또 쉬지않고 이동한다. 의식의 지향작용의 부단한 이동은 동시에 대상의 不定性과 可變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의 작용과 대상은 表層構造로 볼 때 인식론적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深層的 構造에 있어서는 양자의 상관성이나 관계등이 하나의 <흐름>에서 해소되는 존재론적 구조관련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Husserl에 있어서 전자는 기술적 현상학 시기에, 후자는 순수의식을 다루는 선험적 현상학 시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에 있어 체험의 흐름 즉「體驗流 (Erlebnisstrom)」 18) 현상이다. Husserl은 대상세계의「변화 (Veranderung)」와 함께 체험의 「영원한 흐름 (ewiger Fluβ)」 19) 을 그의「내적시간의식의 현상학(Phanomenologie des inneren Zeitbewuβtseins)」에서 심층 분석하고 있다. 둘째 '모든 지각은 그 자체로 무엇에 대한 지각이다'에서 이 무엇 (Etwas)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자연물이 아니다. 계몽주의적 悟性哲學의 대상인 事物(Ding)도 물론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지각활동이 그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事態(Sache)」 내지「事象 (Sachverhalt)」그것이다. 여기서는 內在와 超越 또는 내적 (von innen her) 및 외적 (von auβen her)의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인식론적 근원과 출발점에 관한 문제는 실로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20) '어디에 향하여 있다'는 것은 '어디서 부터 온다'와 같은 고전적 인식이론의 선천성 문제를 이미 넘어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식의 지향성과 그 내용으로서의 사태는 존재론적 통일을 뜻하는 것이다. 지향성은 어떤 '관계'가 아니며, 또한 인식주관 - 대상 사이의 관계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의식의 '존재특성'일 뿐이다. 21)

현상학적 관점에서 主·客의 관계설정은 바로 'ego - cogito - cogitatum'으로 요약될 수 있다. cogitatio의 매개적 통일에 기초한 인식논리에서 출발, 마침내 사고하는 주체(res cogitans)와 사유된 것 (cogitatum) 양자의 존재론적 통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지향적 의식은 본질적으로 '밖으로 나감(Hinausweisen)'인 동시에 늘 자신으로 부터 벗어나 있음 (standig aus sich heraus sein)'을 뜻한다. "의식에 대한 지향적 파악이 비로소 주관 스스로에 대해 선험적 (transzendental)으로 행동하기를 허용한다. 그것이 선험주의 철학의 가능성 조건이다. 그러나 그 반대는 아니다" 22)

그것은 Kant와 전통적 선험철학에 있어 인식주관 개념의 지나친 형식성이 잘못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선험철학의 가능성이 선천성 (Aprioritat)으로 부터 의식작용에로 연역된다는 가설이 모두 허구임을 천명한 것이다. 悟性形式으로서의 범주(Kategorie)란 대상을 규정 (bestimmen)하는 규준(Kanon) 23) 으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범주들이 오로지 사물이라 자연대상물 만을 인식하려 할 때 하나의 '형식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활동 및 탐구의 목표가 참된 실재 즉 현상으로서의 事態(事象)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주관에 있어 범주적 형식과 감성적 직관 양자는 별개의 것들이 아니라 통일된 의식존재를 구성하며, 동시에 의식과 대상은 서로 대립된 상관물이 아닌 통일적 연관의 체계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4) 형식과 내용을 엄격히 구분하고자 하는 태도는 초기 자연과학주의의 전형적 방식에 불과하다. 19세기 말의 세기적 전환기에 이르러 세계현실은 이미 복잡하게 세분화 다양화의 과정에 들어섰고, 이러한 상황을 명증적으로 인식하려면 무엇보다도 사물에 대한 과학적 인식 보다는 사태의 실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Zu den Sachen selbst! (事象 自體에로!)라는 구호가 현상학의 학적 성격을 단적으로 제시한다. 사태라는 표현은 감성적 지각작용이나 과학적 검증에 의해 충족될 수 없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학이 맞이하게 되는 최초의 대상은 사물이 아닌 '사태'라고 할 때, '내재와 초월'의 문제가 비로소 해결되는 것이다. 그것은 Husserl에 있어 아직 형이상학적 물음은 아니다. 내재 - 초월의 문제는 그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인식론적 개념이란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의식의 인식작용 그리고 초월적 외재로서의 대상내용이 '의식안에' 함께 포괄되어 있으며, '동일한 의식체험의 흐름'에 속한다. 의식에 나타난 生起와 所與로서의 현상 전체가 體驗流(Erlebnisstrom)인 동시에 고유한 認識流(Erkenntnisstrom)가 되는 것이다. 의식체험을 체험류 또는 인식류로 규정하는 가운데, "전통철학이 의식이라는 개념을 (문맥상) 문장에서 主語로 이해한데 반하여, Husserl은 정적인것, (고정적으로) 존립하고 있는 것, 명사적 주어로 확정된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25) 의식체험의 영역은 오로지 「흘러가는 실재적 통일」로서 「하나의 방향으로 함께 흘러 들어 오는 것」(Mitherangeschwemmtes), 그리하여「생동하는 흐름」 26) 이 된다. Ideen I 부터는 이 흐름의 두 측면을 Husserl은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 (noema)로 표현한다. 즉 의식 안에서 표상작용과 그 내용에 대한 일반적 구분인 것이다. 27)

6. noesis - noema 구조
의식의 지향작용의 일반적 구조가 ego - cogito - cogitatum의 상관구조임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cogito적 표상작용을 Noesis라 하고 표상된 내용으로서의 cogitatum을 Noema라 한다. 특히 Husserl은 Ideen I. 이후 부터는 의식의 지향적 구조의 先天性 (Aprioritat) 즉 상관의 a priori를 noesis - noema로 표현한다. 양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단순히 noesis도, 또한 noema도 아닌 하나의 意味體이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대상이 事物 (Ding)이 아니고 事態 (Sache, Sachverhalte)인 것은, 그것이 언표를 통해 비록 어떤 사물을 程示할 경우에도, 사물의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그 사물과 연관된 주변세계의 통일된 의미체 및 그 본질인 것이다. 28)

지향성을 구성하는 두 기본요소로서의 noesis 와 noema는 하나의「의식존재」속에 구조적 통일을 이루고는 있으나, 마치 부부가 하나의 단위로서의 가족사회를 형성하면서도 그 가정 안에서는 적어도 양자의 존재와 역활이 분명히 구분되는 현상을 우리는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noesis와 noema 두 측면은 현상학적 의식현상 안에서 분석,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즉 noesis란 의식의 지향성 또는 지향적 표상작용이다. 그 속에서 선천적 범주형식들의 직관작용이 수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noema란 이에 상응하는 사태 (사물들을 포함하는)의 구체적 모습이다. 말하자면 전자는 지향적 의식활동 속에 內實的으로 內在해 있고, 후자는 전자와 구분된 대상영역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초월적 존재의 內在化라 할 수 있다.

Husserl과 현상학은 그것이 意識存在論일 때, 비로서 이원론적 오성주의와 추상적 사변철학의 문제점 모두를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은 Kant의 인식주관 즉 의식일반(Bewuβtsein uberhaupt)이 대상 인식의 주관적 측면 만을 떼어내는 무리를 범한 반면, 현상학적 의식의 <존재>는 양자의 'Kant식 종합 (Synthesis)'이 아니라 오히려 Hegel식 통일 (Einheit)과 전체 (Ganzheit)에 더욱 가까운 경지에 이르렀다 하겠다. 인간의 인식과정에서 보자면, 일차적으로 사물인식에 나아간다. 이것은 원초적 감성적 인식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상황의 변화와 시간적 변이과정을 경험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대상의 본질적 측면에 근접하려는 이성활동의 본성에 호소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Kant는 '경험인식의 선험적 종합'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경험할 수 있었던 시대상황은 역시 자연과학적 계몽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초기 자연과학의 발명, 발전에 크게 매료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연과학의 성숙된 단계에 접어들면서, 다음 단계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돌리기 마련이다. 그것은 고대 희랍의 발생적 철학의 생성과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와 같다. 먼저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의 표출에서 전통적 神話에 의한 세계관을 극복하고, 비로소 철학적 사유의 체계적 궤도 (Platon 과 Aristoteles 이후)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체계화'란 단순한 '綜合 이상의 것, 統一'을 성취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상학적 주관 또는 순수자아의 영역을 '새로운 진리인식의 Archimedes Point로 설정'할 경우, 양자의 차이와 구별은 더욱 명석하게 표출된다. Kant는 '주관적 의식' 개념을 규정함에 있어서 그것을 形式論理의 無矛盾性 또는 合理性에 근거한다. 그러나 '객관적 대상'은 경험세계의 事實性 또는 非合理性에 기초하고 있다. 상반되는 두 측면은 단순한 과학적 합리성에서 실험적으로 접근한 결과 그런 방식이 문제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Fichte, Schelling, Hegel에 이르는) 낭만주의적 관념론에 와서야 비로소 극복되어야 했다. Husserl도 그런 의미에서 反省的 인식론적 통찰을 시도한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인식론적 진리인식의 출발점은 바로 기초지워 진 출발점 (begrundender Anfangsgrund)으로서의 noesis - noema의 통일이며, 이 의식의 '존재 특성'이 곧 의식존재론의 핵심인 것이다.

'의식존재론'의 최종목표는 '明證'에 있다. 명증성은 의식의 목표이자 Telos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Husserl이 그의 후기 저작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의식의 삶 (Bewuβtseinsleben)은 목적론적 법칙 하에 놓여 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적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Husserl의 지향성 개념의 또하나의 특성으로서 '상관의 a priori' (Korrelationsapriori)란 것이 의식의 이러한 성격규정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의식은 경험의 모래사장과도 같이 모든 것이 동일한 가치를 갖는 집합체가 아니다. 행위의 성격들이 대상성에 상응하는 방식에 따라 규정되며, 그 대상에 근사한 소여방식이 배타적으로 의식에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행위들이 존립한다. 이것은 해당하는 대상이 사실적으로 현존하는가 아닌가에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지향적으로 사념된 대상의 사실적 현존에 무관하게 타당성을 갖는 의식 - 이것이 결정적 관건이다. 의식수행의 성격은 우연히 경험적으로 마주치는 소여들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상 또는 사태의 본질에 관계한다. 말하자면 대상성의 소여방식의 일반적 규정성으로서의 본질과 그 성격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영역으로서의 '존재영역들 (Seinsregionen)'이 주어지며, 그것은 결정적 원본적 직관에 제공되는 形相 (Eidos)으로서 본질의 고유성에 따라 결정된다. 형상적인 대상규정성은 그때 그때 상응하는 대상성에 관계하는 지향적 행위의 보편적 형상적 상태에 근거한 상관의 a priori에 부합, 합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에 있어서 '존재영역'의 발굴, 또는 '의식존재론의 기초정립'에서 비로소 참된 진리인식의 가능성을 확립하게 된다. 이것이 현상학적 인식이론에 있어 존재론적 토대가 확인되는 결정적 국면이다.

7.의식존재의 存在論的 해명
의식활동과 그 구조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가 존재론적 체계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가. Descartes 이래 근대적 이성론이 범했던 과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총체적 삶의 현실을 직시하기 이전의 소박한 사유단계이다. 그것이 과학적 계몽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方向定립의 일단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의 진리인식의 최종목표에는 아직도 근접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사태'로서의 대상세계는 변화 또는 발전적 전개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하나의 총체적 과정인 것이다. 여기서는 당연히 '시간'개념이 설정되고 있다. 시간적 계기의 과정이 일체의 변화와 발생의 基底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때 모든 존재자는 단지 한 순간을 제외하고나면, 아니 어떤 경우에도 고정된 '자기동일성'을 견지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 형이상학에 관련한 存在論은 적어도 변화 내지 발전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상정하지 않거나, 그것을 전제할 경우에도 어디 까지나 변화 속의 불변적 존재를 추구한다. 이를 테면 한 사진사가 카메라를 매체로 하여 정지된 대상물을 한 장의 필름에 담는 것이라고나 할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movie-camera와 함께 대상세계의 역동적 변화의 모습을 videotape에서 조망하는 것이 일상화 되고 있다. 우리가 참으로 알고자 하는 대상이란 고정된 한 순간의 존재자이기 보다는, 오히려 살아 움직이는 상황 전개의 과정에 있는 어떤 사태 (Sachverhalt)인 것이다. 어떤 사건의 실재적 사실적 내용은 그사건의 自初之終을 충분히 통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향적 의식의 행위 또는 작용은 사태의 추이로서의 대상적 관련을 그 자신 속에 내포한다. 그것은 세속적 감각 없는 (선천적) 의식이 그 자신의 당면한 (생존과 실천적 행위의 현장인) 외계와의 상관성을 획득함으로써 비로소 실현된다. 29) 이제 '의식존재'의 존재론적 특성이 확립되는 동시에, 근대인식론의 전통적 문제점이 해소될 수 있다. 변화없는 단순지속 (완만한 변화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상황에서 단편적 개별자의 생존양식에서 출발하는 고전적 존재론은 그 의미와 기반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意識存在論' 의 의의는 세계의 흐름과 함께 의식의 흐름을 通時的으로 선험적 의식 (Transzendentales Bewaβtsein) 또는 순수자아 (das reine Ich)의 차원에 환원한다는데 있다. 변화하는 과정 자체가 존재론의 토대인 것이다. 이 토대의 살아 움직임 즉 생동성을 떠나서 어떤 형이상학적 체계나 인식방법론도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식의 지향적 방향정위는 의식의 彼岸에 있는 a priori한 상관자인 30) 대상의 對象性을 말하자면 심리학적으로 31) 이 의식세계 속에 내재화 시킨다. 왜냐하면 의식행위의 성격이 그때 그때의 가변적 대상물에 상응해서만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을 새로이 만나게 된다. 그것은 의식의 본래적 행위의 성격이 지향적으로 정위되어 있는 대상의 사실적 현존으로부터 독립성을 획득한다는 점이다. 일상적 관찰에 따른다면 대상세계는 우리에게 항시 가변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덧없는 세상을 살아 가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의식과 대상의 상관적 체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경험적 대상성들에 예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대상성 (Gegenstandlichkeit)의 방식에 의한 보편적 규정성으로서의 본질 (Wesen)의 세계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현상학적 의식의 존재가 궁국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다름아2닌 본질이며, 적어도 그것을 직관(Wesensanschauen)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리하여 인식론적 과업의 최고 단계에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존재론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현상학이 일차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엄밀성 또는 명증성에 기초한 참된 인식의 가능성 확립과 그 방법론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상학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 방법론의 확고한 근거를 보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의식(인식주체)과 대상의 존재론적 통일이며, 그것은 의식의 선험성 또는 순수자아의 영역에서 확립될 수 있다고 현상학은 보고 있다.

IV.<事象 自體>와 선험적 주관의 통일
8.自然的 態度의 극복과 현상학적 還元
철학적 사고의 전환점에서 Husserl은 그의 현상학을 本質直觀의 한 방식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철학을 전체의 세계상을 인식하는 단초로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Aristoteles가 생각했던 진리인식의 지표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다. 세계내에 현존하는 모든 것은 존재로 규정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세계(Welt)로 정의될 수 있다. 먼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원본적으로 정의되어야 하며 거기에서 비로소 생존의 구체적 실상 그리고 모든 존재의 방향정위가 기술되어질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당시 학계일반의 동향은 자연과학주의 또는 과학지상주의에 의존한 나머지 터무니 없이 단순 담백한 과학적 사고나 적어도 일상성에 의존한 자연주의 태도를 조장함으로써 실재의 진실을 호도하거나, 아니면 역사적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보편적 인식의 가능성을 일회적 역사적 세계의 사실성에 해소하려는 모든 상대주의적 경향들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소수의 극단적 경험주의자와 과학주의자 그리고 거기서 낙후되어야 하는 다수 인간들의 현격한 괴리, 또한 현존의 불투명한 상황세계가 역사의 전부인 것처럼 호도하는 실재론자 모두의 태도는 세기 말적 현실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었다. 그들 모든 극단주의 상대주의 태도는 적어도 사태의 본질인식을 외면하고 있다는데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일상적 생존에 기초한 인간의 일반적 사고방식을 Husserl은 자연적 태도 (naturliche Einstellung) 내지 자연주의적 태도 (naturalistische Einstellung) 라고 지칭한다.

자연적 태도란, 우선 자연에 거역하지 않으며 나아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려는 즉 '자연스러운 태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계몽주의 이전 인간의 단순하고 순박한 생화태도인 동시에, 前科學的 생활세계적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다른 자연주의가 계몽이후에도 상존해 왔는데, 그것은 과학적 실증주의가 보편적으로 지배하는 그리고 그것을 시대의 이데올로기로 고양하려는 일체의 사고방식과도 쉽게 연대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연주의의 극단적 태도로 발전하게 된다. Husserl 자신은 별다른 구별없이 이 두가지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그 자신의 체험에 따라 특히 후자에 중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학이나 과학적 기술의 습득 없이는 인류의 장래가 전적으로 보장될 수 없다는 다급한 상황논리가 도처에서 설득력과 통제력을 함께 가지는 현시점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일상생활에서 가전제품들의 보편화와 함께 전자과학의 혁명적 발전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이제 '의식의 과학화'란 미명아래 그것을 모든 가치의 최우선 항목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 '컴맹'의 처지를 넘어서고자 일로 매진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사실세계는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난 것으로 일단 존재타당성을 획득하며, 그 자료가 <의미>하는 실재성 진리성 여부에 대하여는 별로 무관심하다. 자연적 과학적 태도의 취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감각적 자료(sence data)의 과학성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이 과학주의적 태도는 거의 일상적 현상으로 천착되고 있다.

우리는 일상적 삶에서 누구나 자연적 또는 자연주의적 생존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으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 사회나 국가의 현실적 삶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인간의 인식활동은 가장 일상적인 언어 소통이나 언론매체의 선도에 따라 (그것들이 비록 비합리적일 경우에도) 자연주의적으로 무리없이 수행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여기서 사태의 참모습이 가려지고 있음을 우리는 간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연적인 삶의 태도가 얼마나 맹목적인가는 충분히 반성되지 않고 있다. Husserl에 의하면 현상학적 환원의 교훈적 의의 (das Erzieherische der Phanomenologischen Reduktion)는 그것이 우리에게 '태도 변경의 자각을 일반적으로 가능하게' 하는데 있다고 한다. 32) 그는 자연스런 (natural) 태도와 자연주의적(naturalistisch) 태도를 인격적 정신적 태도와 구별하고 있다. 자연과학은 자연주의적 태도에서 또 정신과학은 인격주의적 정신의 태도에서 작용한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자 하는 자연적 태도 (naturliche Einstellung)는 앞에 지적한 두가지 태도 즉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차원적 감성적 존재방식, 그리고 과학적 사고를 존재의 모든 영역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과학적 실증주의 - 이 양자의 소박한 '存在信仰' 두가지를 함께 지칭 한다. 이것은 先科學的 또는 學問外的 생존현상이다. 33) 그것은 어찌보면 순박한 인간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로 발전할 수 있다. 하나는 사이비 과학주의적 태도에 오염되는 것, 또 하나는 지각없는 자연과학자 및 기술지상주의자들을 선동 고무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성취하려는 소위 정치지도자들의 정략적 기도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것 등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현실세계의 존재양식 즉 외적 현상형식에 대한 그들의 단순한 '존재믿음'을 곧 '존재 타당'으로 혼동하는 것이다.

극단은 또 다른 극단을 낳기 마련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단순 소박한 태도를 속물적 천박성으로 치부하며 인간에게 강한 위기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과학기술에 경도된 인간의 의식을 歷史性 또는 宗敎性에로 끌어 들이는 조류들이 나타난다. 첫째, 역사화주의는 원래 역사주의에 근거하나, 후자가 특정민족의 문화적 역사적 우월성을 배경으로하여 절대주의적 법칙주의적 성격이 강한 반면, 전자는 그 상대주의적 변종으로서 그것의 일반적 경향은 소위 세계관 인생관 국가관 등의 '自家哲學'을 양산 함으로써 그 결과 건전한 가치관이나 도덕의식을 해치는 동시에 회의주의적 풍조를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바로 이러한 어지러운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 세력을 확장하는 또 하나의 조류가 있는데, 그것은 소위 민족종교 내지 사이비 종교세력이다. 그들의 宗敎性이란 단지 위장되거나 오해된 것일 뿐, 세속적이기 그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 봉사하는 것을 명예로 삼기도 하고, 개인상대로 祈福을 대행하는 일에 열중하면서 실은 그들 자신의 세속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도 한다. 또 극단적 유파들의 경우 말세론과 영생을 들고나와 세상을 온통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 곤 한다. 자연주의가 인간성의 획일적 단순화에 매진하는 것이라면, 역사화주의는 상대적 회의주의에로 또한 의사 종교세력들은 세속적 기복주의에 치우치는 것이 보통이다. 이들 모든 극단적 경향들은 불행하게도 거의 동시에 공존하며, 그러나 서로 화해 할 수 없는 배타적 성향을 가지는 것이 공통점이기도 하다.

특히 '後期産業社會'로 일컬어지는 오늘의 지구촌 상황은 그런 점에서 역사상 가장 심각한 단계에 와 있는 것 같다. 자연과학 및 기술에의 신봉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그것을 '제3의 이데올로기'로 이미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Habermas의 저서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과 기술' (Technik und Wissenschaft als Ideologie)은 이 문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있어서 대표적 시도가운데 하나이다. 이성의 비판적 기능과 역량을 총동원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과학문명과 산업사회적 부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스스로 그 주인의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따라서 역사적 발전의 속도나 방향 등의 모든 결정권을 인간의 삶의 척도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간절한 호소는 점차 그 힘이 약화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궁극적 진리인식의 대상인 사태나 事象은 단순한 감각적 경험이나 과학적 검증을 뛰어 넘어 있다. 자연적 물적 대상계의 배후에 있어야 할 이것의 본질적 形相을 찾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선험적 자아와 순수의식의 장에서 시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Husserl의 입장이다. 이런 점에서 프랑크푸르트 비판이론가들과 Husserl은 적어도 취지의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현상학의 목표도 우선 자연적 일상적 삶의 태도나 단순하고도 소박한 과학 주의의 태도를 지적 경고함으로써, 과연 우리가 선택해야할 의식의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또 그것이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9.순수의식의 地平
자연적 태도에서 의식은 소박한 일상성에 머물러 있다. 還界事物은 물론 사태의 전개에 대해서도 단순히 수용적 수동적 태도를 견지한다. 의식이 대상세계에 어떻게 관계하는지 그리고 대상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관한 반성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자연적 및 자연과학주의적 태도는 의식과 대상을 별개의 존재영역으로 또는 별개의 존재방식으로 확연히 구분지우며, 이때 의식은 대상세계의 물리적 질서의 체계에 수동적으로 편입되기를 강요 당한다. 그것이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결정적 요건으로 전제된다.

우리는 전장에서 noesis - noema의 존재론적 상관의 구조를 밝히면서 의식의 지향적 연관을 검토한 바 있다. 의식은 판단중지의 환원이라 반성작업을 수행하는 가운데 그것이 사실은 소박하고도 자명한 존재신앙의 한 징표가 아니라, 의식의 선험적 행위에 따라 의식 내재적으로 대상의 소여방식을 전환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향작용 (intentio)과 지향된 대상 (intentum)이 더욱 적정하게 (adaquater) 통일되는 것은, 의식의 선험적 행위에서 순수의식을 획득할 때 가능하다. 과학적으로 객관화된 경험의 모든 실재적 요소들을 오로지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개별과학의 한정된 영역에서 만 어느 정도 정당성을 갖는다. 현상학적 인식이 획득한 순수자아의 지평에서는 모든 실재적 경험적 요소로서의 사물들을 검토할 경우에도 사물들과의 연관은 물론 그것들이 의식세계에 주어지는 '소여의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다. 34) 여기서 얻어지는 것은 단순한 물체인식이 아닌 '의미'이다. 소여의 방식에 따라 그 '의미'는 다양하게 顯示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식자체의 지향적 행위의 자유로운 변경에 의해서도 '의미변화'의 다양성이 예견될 수 있다.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그러하다. Husserl이 비록 Fichte처럼 Kant적 전통을 준수하려는 기본적 취지에는 변함이 없다 하겠으나, 순수자아의 지평에서 확인되는 '선험적 경험' 그리고 그것의 현상학적 해석이 보여주는 결론은 전혀 다른 것이다.

'화고한 인간적 지식'과 모든 학문의 기초를 정립하려는 의도'가 왜 요청되었던가. 그 의도 자체는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의도가 새로운 시대상황의 전개와 함께 과학주의적 계몽에만 의존할 수 없는 여건의 변화에 기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모든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그 시대상황에 관련해 이와 유사한 철학적 사색을 시도해 오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Husserl은 철학사의이 생산적인 물음들을 새로운 사고의 결단에서 끌어 들이고 있다. 이 물음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의식의 구조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중 가장 철저한 것이 Descartes, Leibniz 그리고 Kant에 있어서 이다. Husserl의 가장 혁명적이고 새로운 점은 그가 의식의 존재구조에 집착하지않고, 의식의 작용과 그 기술되어진 작용의 수행과정을 불필요하게 절제함이 없이 그대로 제시한 점에 있다 하겠다." 35)

우리는 철학의 모든 관심이 순수이성, 오성 또는 그 변양된 모습의 '순수의식'에 집중되는 소위 '순수성'의 획득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순수하다는 것의 참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Descartes 와 Kant가 생각했던 순수한 이성이라는 것은 단지 Archimedes point로서의 판단의 기준 또는 형식적 근거로서의 순수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란 것이 한갓된 표적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순수성이라는 개념 아래 우리의 의식에서 知·情·意를 모조리 제거해 버릴 수도 없다. 의식의 초월적 형상적 영역에로의 환원 나아가 현상학적 환원을 시도하는 경우 전통적 철학이 "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여러가지 자연사물들을 대상화하며 그런 사물들을 문장의 주어로서 파악한데 반해, Husserl은 고정된 것, 단지 존립하는 것, 명사로서 확정된 어떤 것도 그의 사고내용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체험들의 단순한 집합체로서 대상을 전제하지도 않았다." Husserl은 "의식의 실재적이며 흘러가는 통일을, 즉 그 안에서 하나의 방향으로 함께 흘러 오는 것 (Mitherangeschwemmtes)이 오로지 그 흐름을 통하여 서로 연결되어지며,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것을 생각한다. 이 '생동하는 흐름' 속에서 분리된(disjunktiv)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연속적 (konjunktiv)으로 상관하며 하나의 삶의 진행과정에 상보적으로 귀결 (konsequent) 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36)

생존현장에서 행동반사적으로 대응해 있는 의식의 자연적 태도와 그 소박성을 초월하려면 일차적으로 '판단 중지 (Epoche)'가 요구된다. 그것은 의식의 근원성에 환원해가는 반성적 작업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일상적으로는 모든 존재의 영역들이 그리고 학문의 영역에서는 모든 개별과학들의 고유한 본질들이 일단 승인된다. 환원이나 반성이 대상을 파괴하거나 부정하는 사유작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절제되지 않은 모든 정의나 규정들을 일단 '留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상적 또는 현상학적으로 환원하는 사유의 최종단계에서 우리가 만나는 의식이란 그것의 포괄성 및 선험적 기능에서 순수함을 획득한다. '純粹自我'란 것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왜 요청되는가? "순수자아는 세속적 - 경험적 (weltlich - empirisch) 자아들과 선험적 자아와의 통일을 구성하는데", 순수자아의 구성적 능력이 일상적 "세속적 경험과 선험적 경험의 통일을 성취"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얻어지는 것은 첫째 개별적 "자아들의 통일을 형성하는 것 " 둘째 "통일적 세계상을 구성적으로 경험하는 것" 37) 그것이다.

이제 순수자아의 확립에서 지적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환원을 통해 얻어지는 것, 말하자면 "경험적 자아가 초월적 주관에로, 그리고 이 초월적 주관이 순수자아에로 환원된다"는 도식적 사고가 극복되어야 한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경험 가능한 세계가 나에게 고유한 것으로 특히 초월적으로 구성된 세계로 환원된다" 38) 하는 점이다. 이제 Husserl 자신이 수학적 논리학적 사고의 틀을 극복하게 되는 현상학적 철학의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철학적 사고의 본령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대목이 제시된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선험적 자아의 영역을 정립하면서 발견되는, 말하자면 주어진 '경험'과 경험규정적인 '선험' 양자의 통일이 결국은 문제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Szilasi는 명쾌하고도 간결한 그의 '현상학 강의'를 통해 Husserl 자신이 근접하지 못했던 또는 의도적으로 회피했었던 (이미 본 논문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시각에서 「독일 관념론」을 공격하고 있다. 독일 관념론은 그것이 추상적 '나의 존재' 또는 '나는 존재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추상적 가능성 (Fichte와 관련해서)과, '규정된 개체로서의 나' 자신 만이 나에 관하여 완벽한 구체성 속에서 말할 수 있는 '구체적 나의 존재'가 설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의 발단이 시작된다고 그는 지적한다. 39) 그 지적의 정당성 여부에 관하여 우리는 좀 더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10.共同主觀性과 明證性
의식의 지향적 작용은 동시에 대상구성의 작용이다. 따라서 형상학은 의식의 존재 방식을 분석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의식작용의 수행 즉 객관적 실재성으로서의 초월적 세계의 구성을 기술하는 것이다. 우리의 환경세계인 이 삶의 세계는 공동의 생활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아에 대하여 초월적이다. 나 자신의 의식의 존재방식 그리고 의식의 삶 (Bewuβtseinsleben)과 흐름 (Bewuβtseinsstrom)의 계기들은 내재적이다. 그러나 나의 심리 물리적 존재, 신체적 기관 그리고 이것에 연관된 모든 감성적 결과등은 자아의 의식류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다. 생활세계는 이와 같은 일련의 의식 초월적 요소들로 구성된다. 그것들은 또한 나 자신의 의식의 구성적 행위를 통하여 나의 세계로 들어온 것들이며, 내 의식에 대하여 외적인 것들 (Mir - Fremde)이다.

이제 '초월적'이라는 말은 그 전통적 의미 즉 형이상학적 의의를 상실한다. 초월적인 것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을 뿐이다. 매개를 통하지 않은 구신적 지각만이 직접적으로 제시되며, 다른 모든 지식의 획득은 의식의 '기초지움' (Begrundung)의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초를 확립해 주는 이 행위는 순수한 초월적 객체들을 그의 생성과정의 실재적 구조에 상응하는 지식으로 우리의 인식 안에 구성하는 작용이다. 따라서 초월적 대상이란 존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식론적 관계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초월적인 것은 의식 내재적으로 구성되면서, 순수 내재적 의식의 구조관련에서 내재적 초월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의식의 존재방식은 先驗的 (transzendental)으로, 그리고 의식 외적 타자의 존재는 超越的 (transzendent)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Husserl도 이와 관련 자신의 철학을 "초월적 인식의 선험적 이론" 40)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외견상 Kant에 있어서 '경험인식의 선험적 종합'과도 유사하다. 감성능력의 수용성에 기초한 경험세계의 雜多에 선험적 범주형식을 적용하는 후자의 방식은 전자가 "수동적 종합" (passive Synthesis)이라 지칭한 의식의 행위에 매우 근접해 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Knat에 있어 의식일반 (Bewuβtsein uberhaupt)이란 대상과의 대립적 분석의 소산으로서 독자적 선천성 (순수형식으로서의)을 그 특징으로 하는 반면, Husserl이 말하는 의식 즉 '純粹自我'는 단순히 主·客의 구조분석의 산물이 아니다. 따라서 獨我論的 (solus ipse) 주관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성적 (genetisch), 유동적 (fluβig)인 동시에 具身的 (leibhaft)이다. 인간 심성의 본질적 구조관련을 도외시 하면서 까지 형식주의적 인위적 단절이나 분별적 규격화를 용인하지 않음으로써, Husserl은 의식 안에서 主·客 또는 의식과 대상의 통일적 연관을 상관의 a priori로 정립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의식작용의 환원과정을 수행함에 있어서 순수자아의 최종적 방향은 그 자신의 순수의 영역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의식은 마침내 초월적 대상의 세계이자 경험적 환경계로서의 '생활세계 (Lebenswelt)'에 나아간다. 이때 의식은 자신의 대상세계를 구성적으로 정립하게 된다.

만약 우리의 의식이 그 고유한 영역의 세계를 획득하지 못하고 고책화된 자신의 영지에만 안주할 경우, 우리는 서로 타자의 영역에 접근할 수가 없다. 우리가 자신의 독자성이나 특유한 신체적 심적 주관을 초월해 대상세계에 나아가며, 동시에 대상구성의 방식으로 태도를 취할때 타자 및 대상물의 생동하는 현상을 빠짐없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활세계적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共同主觀'이란 진리인식의 객관성 또는 明證性의 場을 우리 모두의 의식류 안에 마련하게 될 것이다. "내재적 초월은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보편적 명증성을 통하여…" 비로소 의식은 "… 보편적으로 객관적이 된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본래적 생활세계는 객관적 초월적 세계의 기반 위에 설정된다. "세계의 객관적이고도 내재적인 초월성은" 그 상관자로서의 "共同主觀性 (Intersubjektivitat)의 기초를 제공한다." 41) 각자의 생활세계는 바로 객관적 세계이며, 이 세계는 인간의 보편적 의사소통 (Kommunikation)에 근거 하는 공동주관의 지평을 정초함으로써, 마침내 명증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 나의 자아가 그 고유성의 내부에서 타인의 他者經驗이란 명목하에 (대상을 과연) 구성할 수 있는가" 42) 하는 문제와 동시에, 의식행위의 구성물인 그무엇 (Etwas)이 어떤방식으로 객관적 명증성을 확보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이제 문제로서 제기된다. 내재적 초월로서의 객관적 대상은 우리 인간존재의 자연적 환경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경험 가능한 대상을 의식작용의 선별적 상관자로서 정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내재적으로 구성된 세계이며 또한 초월적 존재방식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나 자신에 고유한 의식의 존재영역을 환원적으로 수립하는 일은 바로 타자구성을 초월적으로 내포하는 것이다. 타자존재를 위한 순수의식의 수용적 태도는 사실 진리인식의 기본적 형식이 되는 것이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실재적으로 인지하려면 우리는 먼저 대상세계에 지향적으로 나아가는 결단 즉 자기초월의 행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서 공동주관성이란 이해의 지평이 건설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주관의 본질은 과학적 이성이 추구하는 단적인 보편화나 일반적 규격화의 형식성을 배격한다. 그것은 타인의 他者性 (Andersheit)을 구체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모든 개체 인간의 신체적 감성적 조건으로 부터의 초월적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인간들이 각자 이기적 자아로서의 ego를 탈피함으로써 비로소 상호이해의 장인 공동주관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영역이 실로 현상학적 주관 즉 순수의식의 차원인 동시에 생활세계의 차원 그것이다. '순수자아'란 다름아닌 '본래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자아의 본래성은 또한 그의 삶의 현장 생활세계를 떠나서는 결코 상정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생활세계는 객관적 세계이며, …" 43) 그것은 곧 "… 보편적 명증성에 의해 보편적 명증성을 띄게 된다." 44) 고 할 수 있다. 현상학이 주장하는 과학성이란 자연과학적 과학성과는 이런 점에서 다른 것이다.

V.현상학의 科學性 개념
현상학의 실제적 형상은 먼저 소박한 자연대상으로부터 주관에로의 '환원주의', 환원적 주관에 있어서 주·객의 상관성을 a priori하게 수용하는 존재론적 '구성주의' 그리고 나서 객관적 대상세계에로의 內實的 超在의 '직관주의'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동주관성을 확립한다. 여기서 비로소 생활세계에 기초하는 명증성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이 추구하는 과학성 즉 學問性이란 것이다.

근대의 철학사 및 사상사의 맥락을 추론해 볼 때, 그것은 철학적 학문의 학문성 곧 科學性 개념의 변천사라고 말할 수 있다. Descartes의 '확실성'의 원리는 사실 주관의 심적 근거를 信念化한 주관주의적 독단에 불과한 것이다. 오직 선천적 자아의 일면성에만 의존한 결과, 그것은 인식논리적 주·객 통일의 선험적 반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Locke 및 Hume의 경험주의는 무엇보다도 자연대상의 실재성에 주목하는데서 경험인식의 토대 구축과 더불어 과학적 사유발전에 크게 기여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事實性'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아직도 과학성 개념에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Kant에 이르러 마침내 근대 학문 일반의 과학성 개념과 그 체계가 완성된다. 여기서 과학성은 당대 뉴턴 물리학의 바탕에서 논증되고 있다. 자연계의 대상과 인간의 오성적 사고형식 양자의 체계적 동일성 구조를 밝힘으로써, 비로소 통일적 '과학성'을 확립 할 수 있었다. 그런 반면에 자연의 법칙성에 근거, 대상의 대상성 (Gegenstandlichkeit)을 인식주관의 선천성에 형식적으로 통일시킴으로써, 의식과 대상의 二元論的 限界를 극복하고자 하는 근대 철학의 오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Fichte, Hegel, Marx에 이르는 일련의 변증법적 사고는 過程的 史觀에 힘입어 역사 법칙성을 전제함으로써, 관념론 및 유물론의 과학성은 오로지 '歷史性'으로 채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인식론과 존재론의 二元論 문제는 계속해서 미완의 장이 된다.

이제 Husserl 과 그의 현상학이 지향하는 과학성은 기존의 모든 철학 체계들 (근대의 방법론적 철학들 까지 포함하여)이 시도했던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일단 배제함으로써, (형이상학적) 無前提性 위에 嚴密科學을 수립한다. 여기서 明證性이 획득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科學性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적 계몽주의적 과학성이 제시하는 단순 형식주의 (구체적 다양을 도외시 하는)를 넘어서게되며, 분화 발전해 나가는 생활 세계적 생존의 모든 영역을 실질 내용으로 수렴할 수 있는 참된 과학성을 보여 준다. 근래 현상학이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 동양학이나 서양학 그리고 모든 예술 문화과학의 분야에서 새로운 방법론 또는 태도로서 채택되는 이유는 그것이 상당부분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역학문의 제한된 방법론에 치우치지 않으며 또한 동양학 특유의 직관적 사고에도 크게 저촉되지 않음은 물론, 문학 예술세계의 정서적 분위기와도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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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Logische Untersuchungen, Niemayer/Tubingen, 1959, (略 LU) Bd.Ⅱ, 1. Teil, 6. Aufl., Tubingen 1980, S.19
2) ibid., S.21
3) Phanomenologie der Lebenswelt, Ausgewahlte Texte Ⅱ, Reclam/Stuttgart 1986, Einleitung von K. Held, S.53
4) ibid., S.49
5) cf., LU I , S.73, 78, 195 / Die Krisis der europa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anomenologie, Husserliana, Bd VI, S.19 (Husserliana, E.Husserl, Gesammelte Werke, hg.v.H.L.van Breda, Martinus Nijhoff, Den Haag 1950 ff., 이 훗설전집에 수록된 원전은 Hua.의 약호아래 권수 및 면수를 표시하며, 그외의 것은 별도의 약호를 사용함)
6) cf., Philosophie als strenge Wissenschaft, 2.Aufl., Frankfurt/M. 1965, S. 315, 322/ Hua. Bd.Ⅲ, S.2, 9, 105
7) Marx, W., Die Phanomenologie Edmund Husserls, Munchen 1987, S.16 f./이와관련 19C말, 20C초 성행하던 역사화주의 및 심리학주의에 관한 적절한 해설은 Marx의 상기 저서 한국어 번역본 '현상학 (이길우역, 서광사 1989)에서 전자는 27쪽 그리고 후자는 26쪽에서 적절하고도 요약된 번역자 參考註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Marx 原著의 문맥상 역사화주의에 있어 존재일반의 相對化 경향만이 부각되었을뿐, 이러한 시각을 절대화 보편화함에 있어서 유사과학적 체계인 世界觀哲學의 기여도에 관하여는 크게 주목하지 않은 것이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8) Marx, W., ibid. S.17
9) cf. Spiegelberg, H., The Phenomenological Movement, Phaenomenologica 516, The Hague 1969, vol.l., p.93
10) cf., LU I, S.52, Anm.l
11) cf., Hua. XⅦ, Formale und transzeudentale Logik, S.161 ff.
12) cf., a.a.O., S.261 ff., Hua.V, S.148 / IX, S.346 u.a.
13) cf., E. Pivcevic, 이영호 역『훗설에서 사르뜨르에로』, 서울 1975, S.26 f./ 申龜鉉, E.Husserl의 心理學主義에 대한 批判, 哲學會誌(6), 嶺南大 哲學科 1977 (47-85쪽), 51쪽 참조
14) Szilasi, W., Einfuhrung in die Phanomenologie Edmund Husserls, Tubingen 1959, (略; Szilasi) S.15
15) ibid., S.15
16) Hua. VI, S.184 / Ideen I, S.139
17) Szilasi, W., S.15
18) Szilasi, W., S.62,
19) Hua. X, B. erganzende Texte, IV, S.295
20) cf., Sailasi, W., S.17
21) ibid., S.22
22) ibid, S.23
23) cf., Kritik der reinen Vernunft, A 795, B 823 ff.
24) cf., Szilasi, W., ibid., S.30 ff., 44 f.
25) ibid., S.81
26) ibid., S.82
27) cf., Hua.Ⅲ, S.219
28) 참조: 車仁錫, 現象學에 있어서의 指向性과 構成, in; 現象學硏究 I, 한국현상학회, 서울 1983, 37-58, 48쪽이하 / 신귀현, 指向性에 관한 硏究, in; (李英浩編) 후설, 高麗大出版部, 서울 1990, 88-117, 99-102쪽 참조 / cf., Hua. Ⅲ,§85
29) cf., Held, K.,(hg.), Phanomehologische Methode, Ausgewahlte Texte I, Ein-leitung, Stuttgart (Reclam) 1985, S.25 f.
30) 여기서 말하는 a priori의 Aprioritat (先天性)는 Kant에서 처럼 단지 인식논리를 위한 근거 또는 Archimedes Point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일반의 존재론적 기초를 제시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Husserl은 그것을 '상관의 a priori'라고 말한다. cf. Marx, W., Die Phanomenologie Edmund Husserls, Munchen 1987, S.63 ff.
31) Husserl과 그의 현상학이 사변철학과 유물론의 이른바 변증법적 사고를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가 혹은 아닌가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는 Kant철학의 직접적 계승자로서 그의 엄숙주의 (Rigorismus)적 오성철학 (Vertandesphilosophie)의 浪漫化에 기여한 Fichte에게서 괄목할만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vgl., Boehm, R., Kant und Husserl, S.107 ff.) 그 이후의 철학사적 발전에 관하여는 무관심하다. 그는 '자연주의' 및 '역사화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을 찾고 있으나, 19세기 철학사 및 사상사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심대한 영향력을 과시했던 양대 사조 관념론과 유물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지적한 바가 없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사태나 존재(onta)의 본질을 이성(logoi)안에 정초시키려는 Husserl에 있어서 존재는 의식의 경험작용 안에서만 실재적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개념으로서의 '대상' (Gegenstand)의 존재(Sein)란 사실은 '의식에 대응해 있음' '의식되어 있음' 즉 意識存在 (Bewuβt-Sein)인 것이다. 이것이 현상학의 주제가 된다. 현상학적 분석은 의식존재 내에서 의식의 지향작용 noesis와 내재화된 대상 noema의 상관적 a priori를 기술하며, 이 때 사물 또는 사태의 본질에 관계할 뿐 그것들의 存在定立에는 무관하다. 그리하여 전래의 관념론 및 경험 주의적 실재론에 대하여는 '形而上學的 中立'의 태도를 취한다. (참조: Spiegelberg, H., Phenomenological Movement, Vol. I, p.75 ff./Pivcevic, E., Von Husserl zu Sartre, 李英浩역, 지학사 1975, 46쪽 이하, 122쪽)
32) Ideen Ⅱ, S. 179
33) cf., Marx, W., ibid., S.63 ff.
34) Szilasi, W., S.84 f.
35) cf., Szilasi, W., S.72
36) ibid., S.81
37) ibid., S.92
38) ibid., S.97
39) cf., ibid., S.96
40) Formale und transzendentale Logik, Hua. XⅦ., S.223
41) Szilasi, W., ibid., S.100
42) Hua. I , S.126
43) Szilasi, W., ibid., S.99
44) ibid., S.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