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의식에 관하여
(2)사실에 대한 비판
(3)역량에 관하여
(4)'참'에 대한 의미론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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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새한철학회
학술지명 철학논총
ISSN 1226-9379
권 15
호 1
출판일 1998.
"실존 단계"에 대한 일 고찰
(홀머의 키에르케고어 해석을 중심으로)
On Understanding "Kierkegaard's Stages"
임규정
(Lim, Kyu-jung)
군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1-066-9801-08
pp.203-229
국문요약
<국문 요약>
홀머는 키에르케고어의 저작에 대한 종전의 해석들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중요한 점, 즉 키에르케고어가 독자들에게 설정했던 한계와, 개인이 이해를 얻는 방식들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의 통찰이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어떻게 사람들이 뚜렷하게 정연한 여러 방식들로 이해하고 생각하고 인지하고 행동하고 선택하고 트끼게 되는가 하는 것, 즉 자신이 단계들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키에르케고어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설정했던 제한, 즉 이런 단계들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전통적으로 논리학은 사고와 실재 간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오해, 즉 단어들은 사태를 적절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학문적 편견으로 말미암아 단일하며 모든 것에 상응하는 것으로 오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홀머는 논리의 이러한 전통적, 현학적 개념들을 술어적, 범논리적, 존재론적이라고 거부한다.
자신의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홀머는 의식의 유형들, 사실로서의 사실이라는 주요개념, 역량으로서의 개념, 참의 의미론을 차례로 고찰한다. 이런 탐구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이 단일한 논리에 포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홀머는 우리가 형식 논리, 즉 주제중립적 표현에 관한 논리 이외에도 특수한 역역, 특수한 맥락, 비형식적 개념들의 특수한 논리를 고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형식 논리가 주제중립적 표현의 논리인 반면에, 비형식논리는 논리라는 말의 맥락개방적, 파생적 용법이다. 비형식 논리는 담론의 모은 영역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 아니라 분야의존적인 단어들의 활력과 범위에 대한 연구이다.
홀머는 키에르케고어가 다양한 인생관들 사이의 논리의 분기와 인생관들과 과학적 노력의 논리 사이의 논리의 분기를 예시함으로써 사고와 실재 간의 상응관계라는 오해를 거부했다고 생각한다. 헤겔과 다른 관념론자들과는 반대로 키에르케고어는 논리가 실재와 인간 실존의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키에르케고어는 헤겔의 이성론이 논리적, 경험적 반성에 의해 허용되는 것을 위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고는 스스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에 의해서 사고된다. 간단히 말해서 키에르케고어의 단계들은 홀머 자신이 주장한 그와 간은 비형식 논리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홀머의 입장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변증법적, 개념적 차이와 파토스와 주체성의 구별된 질들을 투영한다는 키에르케고어의 테제를 지지한다. 종교적 표현은 세계에 관한 것인 동시에 개인적이며, 그 기원은 주체적이고 그 외연과 범위는 객관적이다. 키에르케고어는 그리스도교도의 관심의 대상의 독특함을 지키기 위해 역설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교의 역설을 신앙의 일상적 삶의 맥락에서 무력화된다. "세계", "나" 등의 개념은 한 시대, 한 장소, 또는 한 민족에게만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의사형이상학적이다. 홀머는 "신"과 같은 기독교의 개념도 의사형이상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립스와 디스톨스웨이트와 같은 학자들은 홀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개념들은 특수한 역사의 시기에 우연적이라고 생각한다. 논자는 이들의 비판에 동의한다. 문제는 홀머가 범한 오류를 다시 범하지 않는 것이다.
영문요약
Abstract
Holmer maintains that various interpretations of Kierkegaard's works are wrong, because two very important points, that is, the limitations Kierkegaard set for his readers and Kierkegaard's insights into the ways in which any individual acquires understanding has been ignored. Kierkegaard sought to show how people indeed do come to understand, to think, to perceive, to choose, and to feel in several distinctly ordered ways, what Kierkegaard called stages, But many scholars fail to recognize the restrictions Kierkegaard placed upon his readers, namely what the logic of these stages is.
According to Holmer, logic is traditionally misconceived as singular and relavent to everything due to the perennial misconceptions of a relationship between thought and reality, the academic prejudice that words must adequately reflect what is the case. Holmer rejects traditional pedagogical conceptions of logic as predicative, panlogical, and ontological.
In order to show his position, Holmer considers types of consciousness, a master concept of fact qua fact, concept as capacity, and the semantic theory of truth in turn. Through this investigation, it is shown to be wrong that everything could be embraced in a single logic. Holmer asserts that besides the formal logic, the logic concerning topic-neutral expressions, one can also examine the peculiar logic of specific domains, particular contexts, and informal concepts. Whereas formal logic is the logic of topic-neutral expressions, informal logic is an open-textured extended use of the word "logic". Informal logic is the study of the power and extent of words that are field dependent rather than words that are used in every domain of discourse.
Holmer thinks that Kierrkegaard, by illustrating the breaches of logic between various life-views and between the live-views and the logic of scientific endeavors, rejected a misconception of a corresponding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reality. Against Hegel and the other idealists, Kierkegaard saw that logic is not a description of reality and human existence. Kierkegaard showed that Hegel's view of intellectuality violates what is permitted by logical and emperical reflection. Thughts do not think themselves but whatever is thought is thought by people. In short, Kierkegaard's stages are based on such a principle of informal logic as Holmer himself avows.
Holmer's position bears out Kierkegaard's thesis that the Christian teachings project both dialectical and conceptual differences, on the one side, and equally differentiated qualities of pathos and subjectivity, on the other. A religious expression is both about the world and of the person, objective in reference and scope as well as subjective in genesis. Kierkegaard used the word paradox in order to safeguard the uniqueness of the Christian's object of interest. In the end, however, the paradox of Christianity turns out to be impotent in the context of the ordinary life of faith. The concepts "world" and "I" don't belong to only one time, place, or people. Thus they are quasi-metaphysical. Holmer thinks that the Christian concept like "God" is quasi-metaphysical, too.
But some scholars disagree with Holmer. They think that all concepts are contingent on particular periods of history. I think that their criticism against Holmer is right. At this point, what shall we do? It would be undesirable for me to imply or give a certain way out. Thus I only wish to cite a poetic metaphor as following. "Look at that empty room. It is full of sunlight, isn't it?" Kierkegaard tried to communicate what this metaphor means to his readers very indirectly, didn't he?
한글키워드
주제어 : 키에르케고어, 실존철학, 홀머, 단계. 간접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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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어는 일찍이 자신의 소망은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를 밝히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썼으며, 평생 동안 이 문제와 씨름했다. 그 결과 1842-51년 사이에 35권의 책과 20권 분량의 기록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봇물처럼 쏟아낸다. 1) 1848년의 『저술가로서의 나의 작품에 대한 관점 』에서 그는 자신의 문제가 "어떻게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있는가"라고 말하고 있다(『관점』, 9-10쪽; SVXIII, 551-552쪽). 그러나 이것은 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익명과 본명이라는 두 가지 저술 방식이외에도 산파술적 전달방법,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개념들의 사용, 신학적,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동시적이고 이중적인 고찰 등 그의 독특한 저술 방식들로 말미암아 문제 자체가 짙은 안개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졸고, "키에르케고어의 자기의 변증법", 7-8쪽).
특히 독자가 직면하는 가장 심각한 어려움은 "단계" 및 단계들 사이에서의 주체의 "비약"이다. 실존의 가능성 내지 단계들은 서로 배타적인가, 아니면 하나의 통일된 구조로 인식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크게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불합리성"이나 "역설"은 그의 사상의 근간이므로 단계들의 수직적 계층구조는 성립할 수 없으며, 점진적 상승운동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계들의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실존운동의 객관적 방향의 상실 내지 혼란을 피하는 길은 점진적 상승운동밖에는 없으므로 그의 철학에서 수직적 계층구조는 이미 선취되어 있으며, 점진적 상승운동 또한 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키에르케고어 연구의 역사에 관해서는 졸고, 「자기의 변증법」,3쪽, 각주 참조), 그렇지만 이것들은 모두 문제를 안고 있다. 전자는 실존 주체가 종교성 B의 단계인 그리스도교의 단계로 이행하는 운동의 이론적 불확실성 내지 논리적 비약의 개념을 보전할 수 있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적 단계의 절대적 정당화가 어려워지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며 2) 후자는 그리스도교적 단계의 절대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키에르케고어를 헤겔학도로 변질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 3)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홀머의 견해에 따르면 연구자들이 키에르케고어가 독자에게 설정한 장애와 한계를 올바로 통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홀머, "키에르케고어 이해",93-94쪽). 홀머는 키에르케고어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자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자기 저작에 감지하기 매우 어려운 장애물과 한계를 설정했다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이런 장애가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걸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가 설정했다는 장애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단계"의 논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논자는 본고에서 키에르케고어의 "단계"의 개념에서 비롯된 논리적 문제와 이에 기인하는 철학적 딜레마의 해소책을 그의 "단계"의 논리에 대한 홀머의 해석에서 찾고자 한다.
1. 개념은 항상 실재와 상응한다는 존재론적 원리에 근거해 있는 전통적 논리학에서(홀머,"홀머와의 대화 참조) 논리는 실재를 기술하는 존재론적인 것으로 즉 내용과 구조의 모든 면에서 실재 전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요컨대 전통적 논리학은 술어적, 존재론적, 범논리적이다. 명제와 논리적 추론의 규칙의 형식성이 확장되어 실재의 내용의 보편적 형식성으로 전환된 이런 술어적, 존재론적, 범논리적 의미론의 원리가 언어의 모든 개념에 적용될 때 형식 논리가 성립한다. 따라서 형식 논리는 본질적인 표준 용법을 지닌 단어나 용어에 대한 기술적(記述的) 탐구라고 할 수 있다.
형식논리가 적용되는 단어들은 형식적으로 맥락독립적이다. 즉 그 용법은 어떤 특별한 맥락이나 주제에 의존하지 않는다. 예건대 이런 형식적 용어들에는 "그러므로" "그러나" "만일...이면" "왜냐하면" 등이 있으며, 특히 사물의 관계를 나타내는"...의 위에" "...의 왼쪽에" "...의 오른 쪽에"등이 있다. 이것들은 다양한 분야와 맥락의 담론에서 빈번히 사용된다. 이것들이 빈번하게 사용된다는 것은 그것들이 거의 모든 맥락의 담론에서 언어의 골격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만일 이런 용어들이 없다면 어떤 맥락의 담론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용어들의 보편적 형식성을 잘 보여 준다.
이것들 외에도 형식 논리가 적용되는 말에는 특성상 지칭적인 형식적 개념들, 예컨대 "숫자" "사물" "그것" "저것" "여기에" "저기에" 등이 있다. 이것들은 많은 맥락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그 외연이 거의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다. 이 사실은 그것들이 어떤 특정한 분야나 맥락에 의존하지 않는 논리적 상항들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맥락중립적 단어들은 숫자로 비유될 수 있다. 예컨대"5"의 의미는 다섯 개의 책상에 관해 이야기하든, 다섯 개의 의자에 관해 이야기하든 동일하다. "5"는 우리가 세는 사물이 책상이든, 의자이든, 또는 다른 것이든 간에 동일한 형식적 의미를 지닌다. 이렇듯 "5"의 의미는 단일하며, 최소한의 의미만을 지닌다. 전통적으로 논리학자들은 이런 간단한 몇 가지 사례의 유추를 모든 단어나 용어에 확장시켜 적용하려는 의미론의 전문가들로서 단어나 용어를 일종의 숫자로 보려는 경향이 아주 강했다.
이런 형식 논리의 대표적 사례는 플라톤의 변증법이다. 플라톤의 변증법은 사물의 본질을 추론하고 지식의 전 분야의 상호 관계를 발견하는 힘이며(슈텀프,『철학과 문제들』, 62쪽), 사물의 존재론적 개념을 추상하는 사고의 존재론이고, 그런 점에서 사고의 형식만을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구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논리는 실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지식이 형성되고 표현되는 형식이며 논리학은 실재의 내용을 파악하는 학문의 분야가 아니다. 예컨대 ("모든 M은 P이다."그리고 "S는 M이다." 따라서 "S는 P이다.")라는 삼단논법에서 S가 반드시 실존해야 하는 것도, 또 M이 존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논법의 추론은 사고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순전히 형식적 사고에 의존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실재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의 범주론에서 술어의 범주와 실재의 법주는 정확히 일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변증법을 어느 정도 거부하기는 했지만, 그의 범주론은 추론의 보편적 형식과 대상의 내용이 종합을 이루는 술어적, 존재론적 논리학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홀머에 따르면 넓은 의미에서 이런 존재론적 형식논리야말로 많은 철학자들의 정신을 혼란에 빠뜨리는 달콤한 유혹이자 대단히 강력한 마법이다. 철학자들은 보편적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형이상학적 충동에 아주 쉽게 이끌린다. 4) 홀머는 이런 충동을 이겨 낼 수 있는 올바른 길은 언어가 사용되는 다양한 맥락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 언어가 사용되는 다양한 맥락이 확인된다면, 모든 맥락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형식 논리는 분야의존적 내지 맥락의존적 언어에서는 아무런 정보나 의미 내용도 첨가할 수 없는 형식적 뼈대로서의 의의만을 지니게 될 것이다. 홀머는 이런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의식", "사실로서의 사실에 대한 비판", "역량", "'참'에 대한 의미론적 고찰" 등 몇 몇 전술적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분석은 종교적 삶의 방식에 적용되는 고유한 논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진행된다.
(1)의식에 관하여
홀머는 의식이 삶의 방식의 맥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의식의 여러 유형의 차이를 구별한다(「종교적 의식에 관하여」, 138-149쪽).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종교적 깨달음과 관련된 고도로 자기의식적인 개인의 의식을 심층적으로 내면화된 반성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식은 비교적(秘敎的) 자각에 대한 심층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자신들이 이러저러한 것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일 뿐이다(같은 글, 142쪽). 이런 능력은 사람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서 해석한다는 말은 주로 어떤 현상학자들에 의해 수집된 불행한 철학적 함축을 지닌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그런 용법을 알고 싶지 않다. "세계를 해석한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아주 많은 것을 묶는 용어이다. 그것은 특정의 익숙한 활동들을 한 묶음으로 묶는다. 우리는 그냥 미소짓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해, 그 무엇에 대해 미소짓는 것과 같은 행위를 세계를 해석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람들은 누군가와 더불어 웃거나 그 무엇에 대해서 웃지 그냥 웃지 않는다(같은 글, 142-143쪽).
웃음, 봄, 울음은 전형적인 무의식적 행동이다(홀머, 「신앙과 학습」, 22쪽). 우리는 멍한 시선과 어떤 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구별할 수 있다. 이 간단한 사례에서 우리는 한 개인의 행동이 자동사적일 때에는 그가 의식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의식은 다른 타동사적 활동을 그 대상으로 삼는 초-타동사적 활동이 아니며, 따라서 의식에 대한 탈맥락적인 일반적 반성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 의식적이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지고 있다'라는 말은 행동의 맥락을 의미하는 '어떻게'와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홀머, 「종교적 의식에 관하여」, 145쪽). 사람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미소짓고, 바라보며, 운다.
이처럼 의식의 내용인 '무엇'은 항상 '어떻게'의 의식과 병행한다. 즉 '어떻게'가 학습되어야 '무엇'도 학습된다. 홀머에 따르면, 이런 분석은 우리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배울 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이름의 의미를 얻는 것은 언어의 부분의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물의 이름을 배울 때 의식이 일깨워진다... 한 이름의 의미는 이런 "...임"을 수반하므로 언어에 총체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신앙과 학습」, 16-17쪽).
배운다는 것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그 무엇을 주입시키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이름을 다양한 사물이나 상황에 능동적으로 적용할 수있는가를 학습하는 문제이다. 이런 능동적인 학습을 통해서 학생들은 특정 이름을 적용하는 방식에 대한 의식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어떻게'를 학습하는 문제에 교육심리학에서 권장하는 보편적인 교육기법을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 이 문제는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것이며, 따라서 '어떻게'와 무관한 액면 그대로의 '이름'은 없다. 홀머에 의하면 "미의 언어와 도덕의 언어는...원래 체계적이고 기술적(技術的)인 것이 아니며, 확실히 그것들은 미적, 도덕적 이론을 통해서 학습되지 않는다. 종종 '...의'라는 이런 언어들은 실제로 미적이며 도덕적 행동의 다른 측면을 지닌 말이다. 종교의 언어와 다른 종교적 행동에 대한 그 관계에 대해서도 사정은 같다"(「실존적 관점에서 본 종교」, 151-152쪽). 여타의 의식과 뚜렷이 구별되는 종교적 의식은 종교의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의식이다. 그것은 내적으로 종교의 '어떻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2)사실에 대한 비판
사실은 액면 그대로의 사실로, 또한 어떤 것에 대한 합리적 설명에 대한 최소한의 필수조건으로 생각됨으로써 관념적 상상이나 인위적 계약과 구별되는 경향이 있다(홀머, 『신앙의 문법』, 96-97쪽). 이처럼 사실은 어떤 견해나 주장의 견실한 토대의 구실을 한다(같은 책, 94쪽). 그러나 토대로서의 사실이란 개념이 합리적 인간을 오도할 때가 있다(같은 책, 82쪽). 예컨대 기독교 신앙을 확증할 수 있는 액면 그대로의 사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앙의 문제를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는 역사학자의 문제로 간주한다(홀머, 「철학적 신학 강좌」 참조). 그러나 역사학자의 실증주의적 연구는 절대로 신앙에 근본적인 사실을 밝혀낼 수 없다. "근본적"이라는 말은 어떤 사실을 근본적이라고 보는 어떤 역사학자의 상대적 해석에 근거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신학을 유사경험과학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예수의 관한 사실들에서 신학의 기초를 발견하려는 대담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어떤 것도 성취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최근의 서적들은 매우 세련되고 상세한 모든 종류의 연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토대, 의심할 수 없는 보증된 출발점, 확실하고 단순하고 비신학적인 것으로 기여할 수 있을 사실을 밝혀주는 어떤 것도 없다. 참으로 이 사실들은 이와 같은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어떤 과학도 그런 결정적 요점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대한 결정적, 최종적 기술은 없다. 심지어 나자렛 예수에 대해서도 말이다(『신앙의 문법』, 100쪽).
얼핏 보기에 중립적이고 비신학적이며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사실이 실은 체계적으로 모호하다. 사실은 전혀 틀릴 여지가 없으며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떤 사실이 있으면, 그 사실의 의미나 개념, 즉 그에 대한 해석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실의 의미나 개념은 지적 맥락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여러 맥락에서 사실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이 사용된다.
이렇듯 사실은 절대적이며 영원한 불변자가 아니다. 즉, 사실로서의 사실, 액면 그대로의 사실은 없으며, 특정의 맥락에서 상대적인 사실만이 존재한다. 특정 사실이 우리에게 아무리 궁극적인 사실로 보이더라도 그것의 궁극성은 특정 맥락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맥락을 떠나면 그 사실은 더 이상 궁극적인 사실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은 맥락에, 또는 담론이나 토론의 상황에 의존한다.
사실이라는 것은 이런 저런 맥락에서 그렇다. 보통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고 우리가 당연시할 수 있는 것, 합의되는 것, (이런 맥락에서, 장소에서, 주어진 목적을 위하여) 우리가 싸울 필요도 또 싸울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제한된 의미에서 사실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우리가 적절한 문제를 제기하고 때때로 다른 맥락에서 제기하는 방법을 배우는 순간 논쟁 거리가 될 수 있다...모든 탐구자를 위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출발점은 없는 것이다(앞의 책, 105-106쪽).
사실들은 인간의 활동의 결과이지, 순수한 의미에서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물리적 대상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사실도 인간의 활동보다 우선하지 않으며 중립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저마다 진리가 다르다는 프로타고라스적 상대주의가 옳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이란 말에는 어떤 식으로든 모종의 합의가 이미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실에는 담론의 참여자들이 어떤 관행을 암묵적으로 승인한다는 간주관적 합의가 함축되어 있다(홀머, 「철학적 신학 강좌」참조). 이것은 사실이 어느 정도 일정 시간과 공간의 종속변수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시공의 종속변수인 여타의 해석들과는 달리 종교는 변함없는 신학적 사실에 근거한다. 이것이 바로 홀머가 의사형이상학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종교의 사실은 담론의 참여자들 사이의 간주관적 합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로고스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사실과 종교의 사실은 구별 될 수 있으며 또 구별되어야 한다. 종교는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오직 신학적 사실로 환원될 수 있을 뿐이다(홀머, 『신앙의 문법』, 101-102쪽). 그러나 결국 종교도 역시 하나의 해석이다. 왜냐하면 "종교의 사실은 절대적이다"라는 언명에서 '절대적'이란 말은 신앙 공동체의 절대적 해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실들에 대한 간주관적 해석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항상 신학적 사실을 동반하는 독특한 세계관이자 하나의 해석이다.
(3)역량에 관하여
한 단어와 그것의 의미의 차이는 단어와 개념의 차이이다. 의미가 뜻하는 것이 한 단어나 구에 서린 일종의 덧없는 후광이라면 개념은 사태도 정신적 실체도 의미도 아닌, 개인적 역량, 잠재력, 기량이나 능력 같은 것이다(같은책, 140쪽). 단어와는 달리 사람들은 암기만으로는 개념을 얻지 못한다. 한 개념이 성취된다는 것은 한 역량이 성취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단어에 대응하는 것이 형식적 용어라면 개념에 대응하는 것은 비형식적 용어이다 거의 모든 맥락에서 쓰이는 형식적 용어들은 언어사용자의 역량과 별로 상관이 없지만 특정의 맥락에서만 사용되는 비형식적 용어들은 언어사용자의 역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비형식적 용어의 경우에 언어사용자는 특정의 맥락에 적절한 역량을 성취하는 그 만큼 특정 개념에 익숙해진다. 곧 맥락에 의존하는 특정의 개념을 배우는 것은 그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다(홀머, 「두 종류의 학습」, 참조). 그렇기에 역량을 기르는 것은 잡지에서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은 직접적 학습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하고, 참고하고, 평가하는 적절한 방식들에 익숙해지는 간접적 문제이다. 예술이나 취미 또는 양심의 언어처럼 신앙의 언어는 메타 사고나 평가가 아니라 이런 역량의 실례이다(홀머, 『신앙의 문법』, 193쪽). 신앙의 언어는 독실한 신자의 윤리적 종교적 정열에 의해 통일된 삶을 증거한다(같은 책, 67쪽).
종교적 역량은 간접적으로 성취되는 정서적, 정열적 능력이지만(홀머, 「태도에 관한 강의」3쪽 참조), 한편으로는 비형식적, 일상적 표현을 사용하는 능력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의깊은 형식화를 수행하고 표현하는 능력이기도 하다(홀머, 『신학, 그리고 종교에 대한 과학적 연구』, 9쪽). 그것은 정서적, 정열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 논리적인 문제이다. 6) "신학은 신의 개념을 포함하는 개념들이 어떻게 조리가 서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가볍게 조작되어서는 안 되는 사태의 정향(定向)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언어 능력 때문에 문법을 아는 것은 별개의 심오하게 다른 성취이다"(같은 책, 194-195쪽).
이처럼 발생적으로는 주체적이지만 종교의 독특한 논리에 입각해서 판단하고 의미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지적이며 객관적인 종교적 역량은(홀머, 『신학, 그리고 종교에 대한 과학적 연구』, 89쪽) 신앙의 개념과 신앙적 삶에 외적인 개념을 구별하는 능력이다. 신앙의 이런 개념적 역량의 성취는 지적 의미에서의 표층역량의 성취이다. 이에 반해 엄청난 고통이나 절망 속에서도 신앙의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은 발생적 의미에서 심층역량을 성취하는 것이다. 표층역량을 뜻하는 신앙에 관한 언어능력과 심층역량을 뜻하는 신앙의 언어능력의 종합인 종교적 역량에서 근본적인 것은 후자이다.
(4)'참'에 대한 의미론적 고찰
의미론자들은 대부분 "참"을 명제의 술어로 생각한다. 예컨대 "그것(어떤 명제)은 참이다"는 이를 테면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다"에 어떤 것을 첨가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참"은 의미론적 술어이며, 명제에 관한 어떤 것을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 메타 언어적 속성으로서 명제에 외적이며 명제에 대한 명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의 의미론은 "이다'의 표준 용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컨대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다'는 참이다"는 "이다"의 술어적 용법의 한 사례이다. 이 처럼 "참"은 "이다"와 함께 속성적으로 사용된다. 7)
그러나 진리를 문장의 속성으로 다룸으로써 종 적 교의와 신앙의 본성이 오해된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교의를 일종의 명제로 간주하는 탓에 성경에 대한 메타 언어적 설명으로, 또는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명제로 오해하는 것이다(같은 글 참조). 그러나 "참이다"라는 말은 단 하나의 표준적, 규범적 용법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홀머에 의하면 윤리적 종교적 "참"은 본질적으로 인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홀머, 「키에르케고어와 진리」, 123쪽) 윤리적 종교적 가능성은 자연과학적, 역사적 또는 수학적 인식 가능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지금까지 "의식", "사실로서의 사실에 대한 비판", "역량", "'참'의 의미론"에 대한 홀머의 논의를 살펴보았거니와,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이런 개념들에 대한 분석이 모두 "다양한 맥락"을 토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개념들은 결국 다양한 맥락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의 개념으로 집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여기에서 홀머는 단 하나의 필연적 논리만을 주장하는 술어적, 존재론적, 범논리적 형식논리를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논리의 범주와 실재의 범주의 동일성은 논리적, 인식론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며(키에르케고어와 논리」, 40-41쪽)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속에 있는 존재론적 형식논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앞서 살펴 본 몇몇 전술적 개념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존재론적 형식논리를 거부하고 분야의존적, 맥락의존적인 비형식논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홀머는 주제중립적 논리인 형식 논리 외에도 특정 분야나 맥락에 의존하는 비형식적 개념의 특수 논리, 즉 분야의존적, 맥락의존적인 단어의 기능과 외연에 대한 연구가 있다고 생각한다(「홀머와의 대화」 참조). 이 두 논리의 차이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도나 등급의 문제이다. 고도로 표준화되어 있어서 임의로 그 용법을 변경하거나 확장할 수 없는 형식적 개념들과는 달리 비형식적 개념의 경우에는 개인이 그 용법을 변경하거나 확장하는 데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홀머,「언어성과 언어 능력에 관하여」, 12쪽). 즉 비형식 논리는 담론에 참여하는 개인들에 의해 의미가 확장되고 풍부해질 수 있다.
형식 논리는 담론의 최소한의 조건들을 기술하며 형식 논리의 규칙은 특정 학문의 분야나 일상적 담론에 새로운 정보나 내용을 첨가하지 않는다(홀머,「키에르케고어와 논리」, 32-33쪽). 우리는 윤리적이거나 종교적 삶을 영위하지 않더라도 윤리적 종교적 담론을 하는 경우에 얼마든지 형식적으로 논리적일 수 있다. 이처럼 형식 논리는 중립적이며, 무관심적이며, 윤리적 종교적 인생관과는 무관하다(홀머,「키에르케고어와 철학」, 31쪽). 예컨대 "만일 당신이 신의 사랑을 믿는다면, 당신은 절망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을 때만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 "만일...이면"이란 형식 개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런 형식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문장의 형식 구조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은 신자들의 삶에 위안을 주고 기쁨을 안겨주는 비형식적, 맥락의존적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역할도 못한다. 이처럼 신앙의 개념은 형식적 개념이 아니며 주제중립적이지도 않다. 비신자들이 신이나 세계 또는 자아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들의 개념망은 신자가 사용하는 특수한 개념망과는 다르다. 따라서 신앙의 개념망에는 형식 논리가 아니라 종교적 삶의 맥락의 비형식 논리가 적용된다.
홀머는 비형식논리의 분석에 활용되었던 자신의 몇몇 전술적 개념을 키에르케고어의 단계에 적용시킨다. 키에르케고어의 헤겔 비판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밝혀지겠지만, 홀머는 키에르케고어의 단계를 고유한 논리를 지닌 삶의 맥락 내지 삶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8)
2. 헤겔철학에서 절대이념은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법칙에 따라 운동하며 절대이념의 현실화 과정은 외적 힘에 의해 저지되거나 방해 받을 수 없다. 그것의 합리성은 개인의 우연한 선택이 아니며 개인의 승인 여부와도 무관하다. 또 모든 운동과정은 필연적이며 그 어떤 것도 임의적이거나 우연적이지 않다. 헤겔의 결정론적 체계는 조화와 완결을 추구하는 그리스의 범논리적 개념으로 관철되어 있다.
결정론적인 헤겔의 체계에서 논리학의 원리는 역사, 정치, 법, 윤리, 예술, 종교 등을 망라하는 모든 분야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 결과 특히 헤겔의 닫혀진 체계에서 개념화될 수 없는 종교는 절대자 인식의 중간적인 이행의 양태로 변질되어 예술 작품에서처럼 구체적 구현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사변적 사고의 개념적 순수성을 결여한 표상으로 남는다. 또한 세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비세계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며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경험적 세계가 아니라 영원한 신에 대한 지식이라는 점에서 철학은 본질적으로 종교와 다를 바 없다. 종교와 철학은 하나이며 차이가 있다면 단순히 표현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철학은 종교를 폐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철학은 종교를 수용하고 종교는 마지막 종합에서 철학으로 이행한다. 이런 이행을 통해서 종교적 표상은 종교적 진리를 정확히 표현하는 논리의 순수한 개념으로 대치된다. 이 단계를 거치면서 그리스도교는 유한과 무한의 화합 속에서 범신론으로 변질된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신비적 이야기가 아니라 교리의 증명을 통해서 절대자의 완전한 표현이 되며 계시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 사이에는 아무런 마찰도 없게 된다. 양자는 표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헤겔은 존재론적 상호관계의 관점에서 계시와 이성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이성의 진리로 동화시킨다. 헤겔의 체계에서 한 분야에 타당한 논리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타당하다(「홀머와의 대화」참조). 왜냐하면 모든 것은 발전하는 종합의 형태에서 실재의 전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것에 모조리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필연 논리에 힘입어 사고의 범주와 실존의 범주는 동일해진다. 그래서 헤겔은 지식의 문제를 풀면 실존의 문제도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9)
그러나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지식의 문제와 실존의 문제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실존적 결단은 필연적 논리가 아닌 정열에 의해 수행된다. 10) 모든 것이 만일 부정적인 것에 의존하는 헤겔 논리학의 주장대로 바뀐다면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SV IV, 317쪽). 변화는 주체적, 정열적 결단의 의미에서의 원인을 가리키는 초월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생성에 수반되는 변화는 현실성이며 이행은 자유를 통해 일어난다(『철학적 단편』, 113-116쪽; SV IV, 265-268쪽). 키에르케고어에게 필연성은 논리적, 실존적 의미를 함께 지닌다. 철학의 고유 영역인 논리학, 자연, 역사 등에서는 당연히 필연성이 지배한다(『이것이냐 저것이냐』 제2부 하, 32쪽; SV II, 188쪽). 그러나 헤겔의 절대적 방법은 논리학에서도 의심스러우며, 헤겔은 논리학에 운동을 도입하여 아프리오리한 사유원리를 실존을 설명하는 존재론적 원리로 왜곡시키고 모든 종류의 속임수와 요술로 학문적 편견을 살려 주었다. 그러나 운동은 추상적 사유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생성된 것은 필연적이 아니다. 필연적인 것은 다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철학적 단편』, 111-135쪽; SV IV, 264-280쪽). 결단에 의한 선택은 질적으로 다양한 인생관과 삶의 방식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키에르케고어의 저술에서 변증법적 구조는, 중첩되는 많은 경계선으로 느슨하기는 하지만, 심미적 개념에서 반어적 초연함에 적절한 개념인 윤리적 개념, 종교적 윤리적 삶,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이르는 개념들의 영역의 이름이다. 이밖에도 물론 엄밀한 종류의 개념들, 형식 논리적 체계의 개념들, 역사과학과 자연과학의 개념들이 있다. 키에르케고어의 비판은 합리주의 철학자들이 단일한 체계의 이 모든 부분들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는 다원적 체계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저술을 통해서 모든 경우가 고려될 때, 단일한 체계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키에르케고어와 철학」, 24쪽).
홀머에 따르면, 첫째, 키에르케고어는 다양한 인생관의 논리를 예시하고 이런 인생관과 체계적으로 통일된 논리를 구별함으로써 사고와 실재의 상응하는 관계라는 주장을 부정한다. 둘째, 사고는 스스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며 사고되는 것은 무엇이든 사람에 의해 사고된다고 생각한다. 단어들과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들은 스스로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들이 단어로 의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분석에 입각해서 키에르케고어의 단계에 대한 홀머의 해석은 크게 두 각도에서 수행된다. 하나는 키에르케고어가 단계들의 논리적 차이를 구별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키에르케고어가 단계들을 특수한 관념과 파토스의 함수관계로 보았다는 것이다. 먼저 전자의 각도에서 수행되는 홀머의 해석을 살펴 보자.
키에르케고어는 삶의 다양한 방식을 구별했다. 사람들의 삶이 어떤 방식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이 정연하게 범주화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의 저술에 대한 초기 연구에서 홀머는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정연하게 범주화하는 방식들의 차이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의 날카로운 통찰에 주목한다. 키에르케고어는 "단계"의 개념을 인간의 주체성이 명료화될 수 있는 철학적 범주로 활용하면서 삶의 여러 단계들, 즉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단계를 구별한다. 11) 요컨대 개인들이 자신의 주변세계를 평가하고 표현하는 맥락이나 삶의 방식을 전형화하는 것이다. 12) 헤겔에 따르면 개념들은 풍부하고 대립자를 포함하며 실제로 종합인데다 키에르케고어가 재주넘기라고 부른 것을 할 수 있는 반면, 키에르케고어의 의도는 개념들이 한 영역, 단계 또는 담론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단계에서 단계로의 이행은 그가 비약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한다(「키에르케고어와 철학」, 23쪽). 단계는 개인들의 태도와 정열과 의도의 전형화된 질(質)이므로 단계들 사이의 이행 양태는 비약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약"이란 개념은 단계가 관념과 파토스의 함수관계라는 것을 함축한다. 두 번째 각도에서 수행되는 홀머의 해석은 이런 함축에 대한 설명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지적 능력이 정서적 능력보다 중요하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견해는 인간 실존을 단순한 지적 관념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같은 책, 24쪽). 객관성을 유일한 질서와 정합성으로 간주하면서 주체성을 객관성의 그림자처럼 보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키에르케고어는 주체성을 기술(記述)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홀머는 이 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키에르케고어는 주체적이며 미친 것으로, 엉터리이며 무규칙적인 것으로 경멸을 받아온 정서, 정열과 같은 이런 요소들이 규칙의 지배를 받을 수 있고, 또 받고 있으며,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개념들에서 요소라는 점을 보여 죽 위해서(익명의) 저자들과 글들의 저술을 배열한다." 단계론을 통해 키에르케고어는 상상적이며 정서적이기조차 한 표현을 덧붙여 쌍방의 대수학적 형식들을 사용했다. 플라톤이래로 철학사에서 시와 변증법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융합된 적은 없었다. 키에르케고어의 철학함은 플라톤의 그것마냥 이성과 정열은 서로 파괴한다는 통속적 개념을 거부한다. 그는 일종의 정서적 질서의 지도, 논리적 지도를 제시했다.(같은 곳).
홀머는 키에르케고어가 여러 가지 형식적 규칙적 특징들을 제시하면서도 일반 이론은 내세우지 않았으며 지도의 개념에도 만족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같은 책, 142쪽). 키에르케고어에서 개인은 사고의 어떤 일반적 이론이나 체계로도 포용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저술은 다른 인생관에 반대해서 어떤 특징의 인생관을 옹호하지 않는다. 홀머는 키에르케고어가 자신이 승인하는 인생관에 철학적 승리를 안겨 주지는 않았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실존자의 결단은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필연적이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정열과 관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도 역시 선택되어야 한다...애당초 문제는 인생관의 참, 거짓이 아니다...우리가 무관심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사실에 근거하는 개개의 상대적인 것들과 대안들만을 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증거, 개연성에 의해서도, 또 권위와 같은 것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 없다. 이런 무관심한 태도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실존의 논리와 삶의 근본 문법을 잊는 것이다"(「키에르케고어를 넘어서」, 20-21쪽) 키에르케고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고의 변증법과는 다른 주체성의 실존 변증법이 개인의 동기를 심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인임과 변증법론자임을 대비시켰지만, 그의 시적 저술은 실존 변증법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손쉽게 저술했으며, 새가 노래하고 꽃이 향기를 피우는 직접성으로 저술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가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그는 정말 자신의 풍부한 내면성으로,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계산된 스타일이 아니라, 자신의 통찰에 알맞는 스타일로 저술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의 파토스를 저술을 하는 데, 그리고 또 다른 개인, 즉 자신의 독자의 파토스로 자신의 방식들 이끌어들이는 저술을 하는 데 성공한다(홀머 「키에르케고어와 신학」, 27쪽).
키에르케고어는 인간 실존이 사고의 종합으로, 또는 헤겔이 제시한 것과 같은 세계사의 종합으로 완전히 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를 사용했다. 홀머는 사고의 체계 속에서 실존은 극적 성격을 상실하며, 하나의 이론적 범주에서 다른 이론적 범주로의 단순한 진보는 인생을 예측하는 방식이 된다고 지적한다(홀머, 「쇠렌 키에르케고어: 비극적 세계의 신앙」, 180쪽). 키에르케고어에서 이런 단순한 진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담론의 서로 다른 영역들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의 논의는 주체적 요인들의 동시성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인간은 정열의, 성향의 정서의 느슨하고 불안한 종합이다. 그가 독자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심미적, 도덕적 판단들, 종교적 신조, 그리고 경건한 말들이 느끼는 것, 의도하는 것, 소망하는 것, 또는 주체적 삶의 나머지의 맥락에서 분리될 때, 객관적 형태로 다루어지는 것의 대부분은 변조된 것이라는 사실, 심미적, 종교적, 도덕적 언어는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종류의 담론의 의미는 정열과 주체적 삶이 포함될 때만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홀머, 「키에르케고어와 철학」, 23쪽).
키에르케고어는 올바른 '무엇'(성경의 이야기, 교리)뿐만 아니라, 올바른 '어떻게'(관심)의 질(質)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실존의 정합성은 관념과 파토스가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달려있다. 누구에게나 '무엇'은 동일하지만, '무엇'에 대한 파토스는 다르거나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실존의 정합성은 일반적으로 진술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정합성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키에르케고어는 기독교가 참이라거나 무신론이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다(홀머,「비판자 키에르케고어」, 5쪽). 단계들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인생관을 권유하는 논증도 아니며, 지적 체계나 객관적 평가를 제시하기 위한 제안도 아니다.(홀머, 「키에르케고어를 넘어서」, 18쪽). 그것들은 현실화될 수 있는 실존가능성들의 전시이다. "키에르케고어의 저술은 가능성들의 종류, 심리적, 윤리적, 종교적 이상들의 제시이다. 그런데 그런 이상들은 인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참도 거짓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가능성에서) 사실 누구든지 될 수 있는 것을 묘사하기 때문에 유의미하다"(홀머, 「키에르케고어와 진리, 124쪽).
한편, 키에르케고어의 단계에 대한 홀머의 이와 같은 해석은 그리스도교의 논리는 역설이라는 견해를 무력화시키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가 비형식논리의 일종이라면, 거기에도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교의 역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홀머에 의한면 "역설성은 기독교와 기독교도의 관계와 대상을 기술한다.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는 역설이다. 왜냐하면 반성에 제시되는 어떤 전제도 그에 대한 충성과 신앙을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결론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신도 아니며, 귀납적으로 말해서 이제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사람도 아니다. 그가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절대적 내어맡김은 근사하며 필연적으로 가설적인 결론과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키에르케고어와 신학」, 29쪽). 이런 까닭에 나자렛 예수의 역사적 동시대인들에게는 아무런 커다란 이점도 없다. 신의 역사적 실존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은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라는 신의 실존을 어쩌다가 의심하는 일도 없다. 신의 역사적 실존을 의심하는 자는 진정한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다. 키에르케고어의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진리는 시간 속에서 생성되었다. 이것은 역설이다...지금 무엇이 불합리한 것인가? 불합리한 것은...영원한 진리가 시간 속에서 생성되었다는 것, 신이 다른 개인처럼 생성되고 태어나 자랐다는 것 등등이다. 다른 개인들과 전혀 차이가 없이 말이다"(SV VII, 195-196쪽).『두려움과 떨림』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역설적인 것 위에 서 있다. 우리가 신자로 그것을 받아들이든 혹은 역설적이기 때문에 거부하든지 간에 말이다(SV VII, 93쪽). 역설이 본래 역설적일 때, 그것은 자신의 역설성의 힘으로 개인을 밀쳐낸다. 이에 상응하는 내면성의 정열이 신앙이다(SV VII, 195쪽).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절대적 역설과 관련하여 가능한 유일한 이해는 그것이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SV VII, 203쪽).
그리스도교의 역설에 대한 이런 두드러진 강조로 말미암아 키에르케고어를 합리성에 대한 반대자로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에 의하면 키에르케고어의 주장은 신학이 객관적 정당화의 논증 수단일 수 없다는 것, 신에 대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인 신의 계시만이 종교의 토대라는 것, 계시를 비평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키에르케고어를 반(反)합리주의자, 주관적사상가, 논리와 증거를 희생하는 신앙의 옹호자로 오해하고 있다(홀머, 『신앙의 문법』, 184쪽). 특히 합리주의자들은 단일하고 필연적인 포괄적 논리에 대한 키에르케고의 통렬한 비난을 기독교에는 전혀 논리가 없다는 주장으로 오해한다. 13)
그러나 키에르케고어는 종교적 믿음의 지리(地理)를 다시 작성하고 신앙과 논리 등을 새롭게 설명하고 있다(『신앙의 문법』, 183-184쪽). 14) 그리스도교의 논리적 역설을 무력화하는 방편으로 헤겔은 필연적 논리의 체계를 주장하는 반면 키에르케고어는 단계들, 실존 가능성들, 삶의 방식들의 다양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철학적 냉철함이 돋보이는 『비학문적 후서』에서 신앙을 극도로 고조된 내면성의 정열에 의해 고수되는 불합리한 것의 반발에 기인하는 객관적 불확실성으로 기술하는 바, 내면성은 이 경우에 최고도로 강화된다(SV VII, 602쪽). 역설과 객관적 불확실성은 논리적 의미가 다르다. 역설은 논리적 모순을 뜻하지만, 객관적 불확실성은 인식적 정당화가 불가능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3. 홀머는 신앙의 언어를 공유하는 신자의 공동체는 삶의 방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죽더라도, 단어들의 형태나 발음이 변하더라도, 신앙의 개념은 소멸되지 않으며 그 근본 의미도 달라지지 않는다. 철학은 정보의 추구가 아니라 지혜의 추구이며 철학이 추구하는 지혜는 인생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윤리적, 종교적이다. 단순히 용법을 배우는 것은 철학이 아니다. 논리와 문법의 규칙은 윤리적, 종교적 역량을 키워주는 수단으로 기여하는 경우에만 철학이 될 뿐이다.
철학은 단어들의 용법을 탐구하는 거라는 주장에 15) 반대하는 홀머는 특정의 문화 공동체 구성원들은 단어를 그 특정의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단어의 의미가 반드시 역사학자나 사회학자의 박식에 의존하는 것 아니며 역사적 설명이 필요없는 단어들도 있다고 주장한다(홀머, 「역사의 이해」, 115쪽). 이처럼 역사적 맥락에 대한 학습이 필요 없는 단어들에는 양심, 회개 등의 종교적 개념이 포함된다.
특수한 학습만으로는 의미 파악이 불가능한, 포괄적 관심의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일상적이더라도 어떤 개인의 삶의 맥락으로 아주 충분하다.. 누군가가 구약의 한구절을 읽는데 그것이 단지 단어들뿐이라면 그에게 무엇이 더 필요할 것인가? 때때로 그는 양심의 고통, 회개의 느낌, 그리고 심지어 경이감조차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 문제들을 무시하고 오해를 저자의 삶과 시대에 대한 무지의 결과라거나 이해를 항상 학문적 수단의 기능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역사의 이해」, 117-118쪽).
『구약』과 『신약』이 언어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이유는 도덕적 확신과 믿음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홀머, 『신앙의 문법』, 113-114쪽). "언어는 어휘나 문법 또는 발음에서 변화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몇 세기에 걸쳐 똑같은 것들을 말할 수 있다"( 『신앙의 문법』, 115쪽). 홀머가 개념들이 비시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어떤 개념들의 현실성이 단지 우연적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논지에서 신앙의 개념들은 일상적이면서도 일상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단어들의 수많은 무조건적인 자기위탁적 용법들을 배운다. 이런 상식적, 무조건적인 자기위탁적 언어에는 확립된 담론의 방식이 있다. 홀머는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 어떤 개념들의 비역사적 성격을 논의한다. 그는 모든 개념이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컨대, "나"와 같은 말이 이런 걔념들에 속한다. 이런 개념들은 그 용법이 매우 일반적이다.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개념을 사용한다. 확실히 이런 종류의 개념은, 일반적 사실과 일치하기 때문에, 비역사적이며 지속적으로 사용된다(『신앙의 문법』, 151쪽).
"나" 또는 "세계"와 같은 개념은 초맥락적이며, 어떤 특정의 기술적(技術的)맥락으로부터 독립적이다. 이러한 비역사적이거나 초역사적인 개념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없다면, 모든 담론이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개념들은 담론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식의 보증인과 같으며(같은 책, 102쪽), 어떤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논지에서 "나"라는 비현학적 개념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의사형이상학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같은 책, 153쪽).
홀머에 따르면, 신은 특정 시대나 장소, 혹은 특정 사람에게만 의미있는 것도 아니고 임의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의사형이상학적 개념에 속한다(「철학적 신학」 참고). 홀머는 종교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적 세계관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앙의 개념들의 어떤 것들은 일반적 사실들과 상응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코 앞에서 올바른 것에 몰두하게 될 때 솟아나기 때문이다. 저 낯선 개념인 신도 역시 그렇다. 그것은 인간사가 지속되어 오는 동안 인류와 함께 있었으며...발명된 것도 아니고 마지 못해 따르는 사람들에게 명령이나 관행에 의해서 부과된 것도 아니었다"(『신앙의 문법』, 151-152쪽).
이처럼 종교적 개념들은 역사적 동시에 영속적이다. 그것들이 끊임없는 회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통시적이며, 타인의 신앙의 언어가 자신의 신앙의 언어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신학적 가르침, 신앙의 언어는 고통받고 세상에 의해 상처받으면서 예수의 요구를 실행하는데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홀머, 『젊음은 의심과 좌절을 중히 여긴다』, 85쪽).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언어를 통해서 그런 언어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성경에서 그것을 읽을 때에는 그런 언어는 분명히 복음의 저자들 시편의 저자, 바울, 나머지 성경의 저자들의 언어이다.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신앙의 언어라는 걸 확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그것은 3인칭 언어이며 1인칭 단수의 언어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교적 방식에 길들여질 때 그것은 1인칭적 표현 방식이 된다(같은 책, 80-81쪽).
예전에 충족되었던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신앙은 통시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이나 찬송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신앙의 문법이나 논리는 시대를 불문하고 확고한 진리가 될 수 있다. 학문적 초연함과 정열의 양립 내지 동시적 성취는 어렵기는 하지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홀머, 「그리스도교와 정열에 관하여」, 16쪽)
4. 필립스는 종교의 논리와 문법의 언급은 어떤 주어진 시간에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에 (필립스, 『근본주의 이후의 신앙』, 244쪽) 신을 독립적 실재라고 말하는 것과 신에 관한 진리 주장을 하는 것은 종교적 담론의 문법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같은 책, 211쪽).』 16) 이런 논지에서 필립스는 홀머의 행복론을 비판한다. 홀머는 행복이라는 말을 맥락에 상관없이 다룬다는 것이다. "홀머에 따르면, 사람들의 삶이 신자로서 전개되는 방식은 비신자로서 전개되는 방식과 다르며... 이런 차이는 신앙의 서약의 성실함과 다른 대안들보다 그 서약의 우월함에 대한 외적 검증으로 기여할 수 있다. 홀머는 신학이 진실로 성공적이고 아주 만족스럽고 축복받고 행복한 인생에 이르는 가르침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세계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이며, 신은 누구인가 하는 개념은, 종교적 믿음이 공통의 잣대에 따라서 그 대안들보다 우얼하다는 것이 입증되 수 있는 방식으로, 종교적 믿음과 상관없이 주어지는가?"(같은 책, 241-242쪽)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필립스의 비판에 따르면, 홀머의 입장은 신앙이 언제나 행복을 결정한다는 선취된 전제에 입각해 있다(같은 곳).
디스틀스웨이트 역시 홀머가 "맥락"을 비역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오늘날 우리가 초대교인이 되는 것과 길고 복잡한 역사적 맥락에서 히브리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디스틀스웨이트, 「포괄적 언어: 신학적, 철학적 단편들」, 557쪽). 그녀는 언어나 삶의 방식은 한 역사적 맥락에서 다른 역사적 맥락으로 이행될 수 있으며, 씌여질 당시와 그 이래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한다(같은 곳). 많은 학자들처럼 그녀는 어떤 개념의 의미는 그것이 사회역사적 맥락에 의존하며 또 그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필립스처럼 그녀는 삶의 방식을 사회역사적 현상으로, 어떤 특정한 시대의 관찰이나 연구 또는 평가에 이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녀는 의미는 단어와 단어들이 사용되는 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단어의 의미는 어떤 추상적, 비역사적 차원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같은 책, 569쪽).
논자는 홀머의 의사형이상학에 대한 필립스와 디스틀스웨이트의 비판이 옳다고 생각한다. 홀머는 "의사"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자신이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보는 기독교의 절대적 객관성을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하지만 경험론적 개념인 삶의 방식과 범논리주의에 근거하는 형이상학은 양립할 수 없다. 아무리 의사라는 말을 형이상학 앞에 붙여 보아도 이 형용사가 둘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줄 수는 없다. 이 두 개념이 이질적이며 불가공약적이라는 것은 홀머 자신이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도 의사형이상학이란 애매모호한 개념을 통해서 이 두 개념의 공통분모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홀머가 그토록 비판해마지 않았던 범논리주의의 유혹에 자신도 모르게 굴복하는 것이다. 홀머와는 달리 필립스와 디스틀스웨이트의 입장은 논리적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논자는 필립스와 디스틀스웨이트의 입장이 지적 의미에서 건전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17) 홀머는 기독교의 절대적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유혹을 철저하게 떨쳐버렸어야 옳았다. 느슨하게 논리적 일관성을 유보하면서 홀머의 의사형이상학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의사형이상학적 개념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성이 허용된다면, 어떻게 기독교의 절대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이제 본 논문의 서두에서 제기된 단계와 비약에 관련된 문제로 돌아가 보자.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두 가지 대답의 유형 중에 후자가 훨씬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은 이미 언급된 바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홀머가 떨쳐버리지 못한 유혹을 과감히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에게 어떤 길이 남아 있는가? 이 문제는 이론적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떤 이론적 해결책을 말하거나 시사하면서 본 논문을 끝맺는 것은 홀머가 범했던 논리적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논자는 다음과 같은 시적 비유를 인용하고 싶을 뿐이다. "저 텅 빈 방 안을 보라. 햇빛이 가득하지 않은가." 키에르케고어는 이 비유가 암시하고 있는 바와 같은 것을 "단계"를 통해서 지극히 간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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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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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몇몇 저작들은 익명으로 발표된 반면 종교적 교화를 위한 강화집들은 본명으로 출판 되었다.
2) 현실성은 필연성과 가능성의 종합이다. 필연성은 자기의 구체적이고 현실적 한계인 까닭에 마치 자음부호만 있는 것과 같아서 그것들이 발음되려면 반성과 가능성이라는 모음부호가 보태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가능성과 분리된 필연성은 특정 형태의 비본래적 실존의 원칙으로서 필연성의 구체화이다. 예컨대 운명론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운명론은 필연성에 잠겨서 가능성과 결별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261-268쪽: SV XI, 167-174쪽. 필연성과 가능성의 이런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대립계기들의 관계로서의 자기를 실현하는 과제는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필연성과 가능성의 범주는 자기의 가장 강력한 표현이다. 그것들은 자기를 관념적인 동시에 실재적인 것으로 의식하는 수준까지 반성에 의해 고양되는 유한과 무한의 존재를 수반하며, 자기는 자유의 가능성으로 정립되고 자유를 통해 실존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어가 이처럼 가능성, 필연성, 현실성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자유를 해석하는 것은 자유가 헤겔학파의 매개라는 논리적 범주와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자유와 운동은 철학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이며, 논리학과 존재론의 관계의 조망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의 연구이다. JP I 199.
3) 헤겔철학에서 사변에 의해 종합되는 대립자 중 하나가 사변 자체일 때 매개는 환상에 불과하다. 변증법적 과정의 전제 조건인 대립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철학은 내재성의 영역에서만 매개할 수 있을 뿐이며 상대적 대립을 종합할 뿐이다. 그러나 대립이 대립자들의 절대적인 질적 차이에서 일어나는 경우에는 매개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으며, 결국 논리학의 밖에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상대적 대립들은 매개될 수 있다.... 인간성은 모든 영원성을 위하여 절대적 대립자들이 매개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항의한다. 그리고 이런 항의는 매개의 주장과 공통점이 없다. 모든 영원성을 위하여 이것은 불멸의 딜레마를 반복할 것이다." JP I, 196. 이처럼 매개는 절대적 요소와 상대적 요소를 화합시킬 수 없는 탓에 실존 운동에서는 아무런 구실도 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필연성은 현실성과 가능성의 종합이라는 절대적 관념론의 운동 원리는 키에르케고어에서 현실성은 필연성과 가능성의 종합이라는 실존 운동의 원리로 뒤바뀐다.
4) 홀머는 보편적 체계를 구축하는 대표적인 범논리주의자로 헤겔을 들고 있다. 「키에르케고어와 논리」, 28-29쪽.
5) 물론, 홀머가 언어 사용의 다양한 맥락을 확인하려는 것은 종교적 삶의 방식과 그 고유한 논리의 발견을 통해서 기독교의 언어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철학적 문제에 접근해 보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
6) 홀머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변증법적이며 개념적인 차이를 투영하며, 다른 한편으로 파토스와 주체성의 다른 질(質)들을 투영한다는 키에르케고어의 테제에 동의한다.『신앙의 문법』, 71-72쪽 참조.
7) 홀머는 이런 의미론에 대한 스트로슨의 비판에 동의한다. 스트로슨은 언어와 메타언어, 즉 1차 언어에 관한 언어, 일상적 담론의 문법에 관한 언어를 구별한다. 스트로슨에서 "그것(어떤 명제)은 참이다"는 "옳아" 또는 "맞아"의 우회적 표현이며, "나는 동의한다"와 같은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언명은 수행적 기능을 지닌다. 그렇다면 "이다"는 체계적으로 모호하며, "참이다"는 1차 언명에 어떤 새로운 정보도 첨가하지 못한다. 이 경우에 "그것(어떤 명제)은 참이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이렇게 "참이다"라는 말의 용법은 다양한 맥락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참이다"에서 "참이다"가 수행적으로 쓰이는 경우에 그것은 한 언명에 대한 속성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신학 강좌」참조.
8) 키에르케고어의 변증법적, 개념적 차이는 홀머의 비형식 논리의 차이에 상응하며, 키에르케고어의 파토스와 주체성의 질(質)은 홀머의 단어의 사용 역량에 상응한다.
9) 홀머는 헤겔처럼 모든 것을 체계 속에 포섭해 질서지우려는 현대의 대표적 존재론자로 틸리히를 꼽는다. 틸리히는 성서의 언어, 교외 또는 간증을 표현하는 친숙한 언어들을 "존재" "비존재" "소외"와 같은 존재론적 개념들로 변형시켜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홀머, 「폴 틸리히: 언어와 의미」, 89쪽. 그러나 일상언어의 근본의미를 찾아 합리적 의미론을 구축하려는 메타 연구의 결과는 시인이나 성자들이 사용하는 일상언어의 용법에 명백히 위배된다.
10) "(논리학에서는)모든 운동은, 만일 지금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를 원하다면, 일종의 내재적 운동인 바, 이러한 내재적 운동은 심오한 의미에서는 전혀 운동이 아니다. 운동의 개념 그 자체가 논리학에서는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하고 있지 않은 일종의 초월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쉽게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SV Ⅳ. 317쪽. 번역은 논자의 것임.
11) 「쇠렌 키에르케고어」참조. 심미주의자의 삶은 우연적인 것, 외적인 것에 대한 욕구에 의해 지배된다. 이는 심미적 단계가 욕구의 무형식성에 지배당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는 달리 윤리적 단계는 기본적으로 의무와 책임의 범주이다. 윤리적인 것에서 개인적 차이들은 극복되며, 개인은 보편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윤리적 단계의 의무는 가족, 또는 사회에 대한 상대적 의무이지 신에 대한 절대적 의무가 아니며, 원죄의식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12) 홀머, 「키에르케고어와 철학」, 19쪽
13) 예컨대 천문학이나 지질학처럼 신에 관한 체계적 신학을 주장하는 뉴맨 등이 이런 합리주의자의 부류에 속한다. 뉴맨에게 신학은 지식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다. 홀머, 『신앙의 문법』, 190-119쪽 참조.
14) 키에르케고어는 합리성 등에 관한 전통을 비판하고 객관성과 주체성의 경계를 새롭게 그었다.
15) 쉐리(Patrick Sherry), 웨스트(Cornell West), 필립스(D. Z. Phillips), 디스틀스웨이트(Susan Brookes Thistlethwaite)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홀머가 종교 언어를 비역사적으로 다룬다고 비난한다.
16) 필립스와 의견을 같이 하는 학자 가운데는 신앙의 논리를 오해하는 학자들이 있다. 예컨대 린드벡은 내적 체계적 진리는 존재론적으로 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린드벡, 『교의의 본질』, 65쪽. 그러나 문법은 실재를 기술할 수 있는 사고의 상대적 틀이 아니다.
17) 이것은 그들이 입장이 논리적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말이지, 키에르케고어의 단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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