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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존재물음의 확증(하이데거)

온울에 2008. 5. 7. 10:18

목 차

1.형이상학의 존재물음과 하이데거의 존재물음
2.칸트의 존재 설명
1)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
2)존재는 절대적 정립, 지각이다.
3.지각의 구조인 지향성과 존재
4.존재는 지향적 향해 있음에 열어밝혀져 있다.
5.존재는 인간 현존재에게 열어밝혀져 있다.
6.맺는말-형이상학의 존재물음과 칸트의 존재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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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지명 인문학연구 
권 1 
호 1 
출판일 1996. 10.  




칸트의 '존재 테제' 해석을 통한 하이데거 존재물음의 구체적 확증


황경선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반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2-397-9601-03
pp.10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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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형이상학의 존재물음과 하이데거의 존재물음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물음을 구별지으면서, '왜 오히려 무가 아니고 도대체 존재자인가(Warum ist uberhaupt Seiendes und nicht vielmehr Nichts?)'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 물음은, 무엇보다도 "왜(Warum)"란 의문사를 실마리로, 우선은 존재자 전체로서의 그 자체(das Seiende im Ganzen als Solches)를 걸어 그것의 존재 근거를 구하는 물음인 것처럼 들린다. 그 물음이 그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형이상학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형이상학을 주도해온 물음이다. 형이상학 또한 존재자 그 자체를 존재에서 묻는, 존재자란 무엇인가(Warum ist das Seiende?)란 자신의 주도적 물음(die Leitfrage)에서, 그 존재자의 존재를,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존재근거를 구하는 표상방식으로, 존재자너머 형이상학적 초월속에서 존재로서의 존재자로서 설명하고 있다.1)

그러나 하이데거의 '왜(Warum)'의 물음은 근거지움의 표상함에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로 초월하는 존재물음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방향에로 향하고 있는 물음이다. 하이데거는 무(혹은 없을 수도 있는 무의 가능성)의 극단적인 타자로서(무가 아닌 것으로서) 존재하는 존재자에서 자신을 내보여 주는, 열어 밝혀주는 존재의 진리, 존재의 비은폐2)에 대해 묻고 있다.3)그의 그의 존재물음은 존재가 열어밝혀지는 존재의 진리에서 존재를 묻는 물음이다. 나아가 하이데거에겐 존재자가 아닌 존재는 존재자처럼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는 진리안에(만) '있으며', 오히려 존재의 진리가 존재의 '본성(das Wesende)'이며 그래서 존재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참조 Wm 17) 그의 존재물음은 그와 같은 존재 자신인, 존재가 비은폐되는 존재의 진리를, 그 비은폐의 지평(장소)과 방식과 관련해, 묻는 것으로서의 근거로서의 존재를 구하는 형이상학적 물음과는 같은 평면에서의 물음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존재자를 존재에서 물으면서, 존재를 떠올리면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구하는 형이상학이 정작 존재 자신을 사유하지 못한 것은 바로 존재를 진리에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4)

존재 진리의 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우선은 우리들 자신인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해, 또는 존재를 사유하는 존재 사유, 그렇게 존재를 사유하는 인간에게 열어밝혀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5) 그러나 존재가 그리에로 열어밝혀지는 우리들 자신인 인간은 누구인가? 하이데거에겐 인간(현존재)은 존재의 진리에 나가 서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그의 존재방식, '본질', '구성틀' 그의 인간성(Humaitas)이 존재사유, 존재에로의 '탈자(Ek-sistenz)'이다.6) 이렇게 본다면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은 존재의 진리를 묻는 물음이며, 그것은 곧 (열어밝혀진, 진리의) 존재와 (존재가 열어밝혀진 장소로서의) 존재이해(존재사유), 인간의 관련을 묻는 물음이다.

이 관련은 하이데거에겐 단순한 병렬적 결합이 아니라 "존재의 (존재를 사유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련"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열려져 있음(진리)에 대한 인간 본질의 관련"(참조 WM 13/14)으로서 존재가 열어밝혀진 진리의 존재와 존재사유, 존재이해의 중심에서 그곳에서 열어밝혀진 진리의 존재와 존재사유, 존재사유를 본질로 하는 인간의 관련이다. 7)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물음으로써 그 관련에로 소급하고 있다. 형이상학의 존재물음이 존재를 구하며 존재자로서 존재자에로 초월하는 것이라면,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은 오히려, 그와는 대조적으로, 존재와 사유, 존재와 인간의 관련에로, (존재에 대한 관련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존재방식이란 점에서) "가장 가까운 것의 가까움"(Uh, 37)에로 소급하는, "뛰어내리는 "8) 것이다. 여기서는 칸트의 '존재테제'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을 -특히 'Sein und Zeit'가 출간된 같은 해 강의된 'Die Grundprobleme der Phainomenologie'(이하 GP로 약함) - 통해 그와 같은 존재물음의 방향과 성격의 구체적 확증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법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유리한다. 이른바 그의 전기 사유에서 사유된 것에서 출발함으로써 하이데거의 동일한 사유의 사실이 사유의 흐름속에 어떻게 다름에서부터 동일성을 견뎌내고 있는가를 숙고하도록 해주며,9) 또한 칸트의 '존재 테제'란 역사적 전승과의 비교에서, 그리고 전승된 용어를 통해 그의 고유한 사유에로의 접근이 용이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존재 설명에서 존재를 그 진리에서, 진리의 존재와 인식주체와의 관련에서 묻는, '존재자란 무엇인가'를 묻는 존재물음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환"(KT, 449)을 본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며 인간 주체의 행위로서의 정립일 뿐'이라는 칸트의 '존재테제'에 대한 해석을 통해 그 설명의 궁극적 의미, 그 존재토의가 토의하는 장소로서 존재와 사유, 존재와 인간의 관련을 끄집어낸다.10) 곧 하이데거가 그같은 해석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증을 시도하는 것은 우선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며(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그렇게 존재자가 아님으로서의 존재는 인간 주체와 관련에서 열어밝혀진다는 점이다. 그 관련은 곧 존재의 열어밝혀짐(진리)이 그 열어밝혀짐의 장소로서의 인간 주체의 존재이해에, 존재이해가 자신의 존재방식인 인간 주체에 속한다는 관련이다.

그처럼 칸트 테제 해석을 통해 확인되듯,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이 존재를 진리에서, 진리의 장소로서의 인간과의 관련에서 묻는 존재 진리에 대한 물음이라면,11) 하이데거의 '사유의 사실(Sache)'을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고 단순히 규정할 때에나, 이른바 '전회'를 중심으로 한 그의 사유의 앞과 뒤를 '실존론적 분석'과 '존재 사유'로 각각 성격 규정할 때, 존재 진리에 대한 물음이 그의 동일한 사유의 사실이란 점이 함께 간직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미 'Sein und Zeit'의 서문(1)에서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의 구체적 탐구가 그 책의 의도임을 밝히고 있다. 이때 의미란 "자신의 가능성에서부터 파악될 수 있는 이해 지평"(참조 Sein und Zeit 151 이하 SZ로 약함)으로서 존재이해(근원적인 시각성인 탈자적-지평적 시간이 그 가능성을 이루는)이고, 그 존재이해는 다시금 인간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방식이고 보면, 이미 하이데거는 존재가 그 진리에서,12) 그 진리의 장소로서의 인간과의 관련에서 물어져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13) 하이데거는 또 'Die Grundprobleme der Phanomenologie'의 서론에서(19)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철학이 존재에 대한 학문이라면, 다음의 물음이 철학의 시원의, 궁극의, 근본물음이란 것이 밝혀진다.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존재와 같은 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가? 도대체 존재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존재를 그것의 의미에서, 진리에서 그 지평(어디로부터)과 방식(어떻게)을 묻는 물음이 가장 앞서는 존재물음이란 것이다. 서론에 이어지는 그 책의 칸트 테제 해석은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확증하는 시도인 셈이다.

그러나 칸트가 하이데거가 주제화된 이른바 '존재 테제'를 따로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존재 테제는 '순수이성비판'(초월론적 변증론의 2장 4절 존재론적 신 증명의 불가능성)과 비판이전기의 저술인 '신의 현존 증명의 유일하게 가능한 입증근거'에서 존재론적 신 증명 문제와 관련하여 등장하고 있다. 이밖에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그밖의 다른 여러 곳에서 존재 테제와 관련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역시 체계적인 설명을 전개해가는 대신, 삽입절, 부록, 주의 형식을 빌어, "삽화적으로(Episodisch)(KT447)"다루고 있을 뿐이다.

칸트의 존재 테제의 궁극적 의미를 열어밝히려는 하이데거의 해명은 이와 상응하여 '해석'의 성격을 띈다. 하이데거는 존재 테제와 관련된 칸트 모든 설명들과 그의 철학적 근본 입장을 통해 그의 테제를 꿰뚫고 있는 의미를 캐낸다. 그렇게 밝혀진 의미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 자신에 의해서는 뚜렷하게 사유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명시적으로 사유된 그의 존재 테제 성명의 '의미'와 '본질유래'를 이루는 것으로서 비로소 '사유돼야 할 사유거리'이다. 곧 하이데거의 해명 방식은 그 자신의 고유한, 그래서 칸트에겐 낯선 관점으로부터 칸트의 존재 설명을 해명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설명 자체의 의미, 그 설명이 설명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이해지평으로부터, 다시 말해 설명 그 스스로를 통해 근원화하는 것이다.14) 이와 같은 '사유되지는 않았지만 사유돼야 할 것"에로 물어들어가는 분석을 통해 하이데거는 칸트의 존재 토의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게서 존재자의 근거를 구하는 형이상학의 존재물음과는 상이한 방향에서, 곧 존재의 진리에서, 그 진리의 장소로서 주체와의 관련에로의 소급에서 이끌려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2.칸트의 존재 설명
1)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
하이데거가 칸트의 존재 테제로 주제화한 것은 '순수이성비판'에 나오는, 두 개의 문장으로 이뤄진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순수이성비판' B 625, 이하 Kritik이라 약함) "존재는 명백히 어떤 실제적 술어, 곧 어떤 사물의 개념에 덧붙여질 수 있는 어떤 것의 개념이 아니다. 존재는 순전히 한 사물 또는 일정한 규정들의 정립 자체일 뿐이다."15) 앞의 발언이 존재의 본질 성격을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면, 뒤의 것은 부정적 규정 이후 칸트가 내세우는 존재에 대한 적극적 설명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먼저 부정적 발언의 의미를 밝힌다. 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라는 칸트의 부정적 발언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실제적 real', '실제성 Realitat'의 의미 해명을 통해 좀더 자세히 밝혀진다.

칸트에게서 실제적, 실제성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다. 실제적, 실제성은 통상 현실적으로 눈앞에 존재하는 것의 존재 성격인 현실성(Wirklichkeit),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한 사물이 이념존재로서 단순히 가능하게 있지 않고 현실적으로 있다는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게선 실제성은 오히려 한 존재자의 무엇인 바, 무엇임, 본질내용(Washeit), 사실내용(Sachgehalt)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 존재자의 현실적으로 있음, 눈앞에 있음, 실존16)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실제성에 관한 규정들이, 곧 주어인 해당 존재자를 무엇인 바, 실제성에 관해 규정하는 술어들이 실제적인 술어들이다. 실제적 술어들은 해당 존재자의 실제성에 속하면서 그 실제성, 사실내용, 무엇임에 있어 일정 내용을 덧붙이는 또는 늘리는 술어들이다. 예컨대 백묵은 연장을 가지고 있고, 비교적 단단하고, 이러저러한 모양과 흰색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연장을 가지고 있고...등은 백묵이란 존재자의 무엇임, 실제성에 관해 규정하는 실제적 술어들이다.

실제적, 실제성의 의미가 이와 같다면, 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란 칸트의 부정적 테제는 존재는 한 존재자에 덧붙여지므로써("백묵이 여기 있다, 혹은 실존한다"), 그것의 사실내용, 본질내용을 규정하는 또는 늘리는 실제적 술어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있지 않은 가능존재로서의 내 마음 속의 백묵이나 내 눈앞에 현실적으로 있는 백묵은 실제성에 있어서는 한치도 다르지 않다.17)

백묵이 현실적으로 있게 됨으로써, 곧 '현실적으로 있음'이란 존재가 덧붙여지므로써 그 백묵은, 마음속의 백묵에 비해, 현실적으로 있음, 실존이란 규정이 하나 더 덧붙여지는 식으로 실제성이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속의 백묵과 여기 눈앞에 있는 백묵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밖의 다른 모든 규정성에서는 꼭같은 두 백묵은 눈앞의 백묵이 실존이란 규정을 더 가짐으로써 서로 차이가 나게 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사물을 어떠한 술어나 아무리 많은 술어들을 통해서이든 (심지어 그것의 가능한 모든 규정들을 고려해서) 사유할 때, 내가 이 사물은 존재한다(실존한다, 괄호 하이데거)는 규정을 덧붙이므로써 그 사물(res, 괄호 하이데거)을 한치도 늘리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내가 개념으로 사유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 실존할 것이며 나는 내가 사유한 바로 그 개념의 대상이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Kritik B 628)"(GP 52).

존재(실존)에 대한 부정적 발언과 그에 대한 설명에서 결국 칸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존재(실존)는 한 사물의 실제성, 곧 본질내용에 관해 '아무 것'도 보태지 않는다는 점이다. 존재는 실제성에 관한 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이것은 칸트가 존재는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곧 존재가 아니란 것을 설명하고 잇는 것이다. 칸트는 존재는 결코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란 부정적 테제로써 "근본적으로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란 것을 말할려고 한다."(GP 77) 그의 부정적 테제의 의미는 "현실성(현실적으로 있음), 실존은 현실적인 어떤 것, 실존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GP 58)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부정적 발언을 통해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란 것이 확인됐다면, 그렇다면 칸트에게서 그 존재자가 아님으로서의 존재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더욱이 '실존한다'는, 물론 실제적 술어가 아니기에, 존재자의 무엇인 바(Was)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여기 이 돌이 실존한다'의 경우처럼, 그것의 존재의 사실(Da )과 단순히 가능한 것에 비하면 현실적으로 있다는 존재의 방식, 양상에 관해 말하는 한, 하나의 '일정한 규정(gewisse Bestimmung)'임에 분명하다.18) 이때 '실존한다'로써 무엇이 의미되는가? "존재는 순전히 한 사물 혹은 일정한 규정들의 정립일 뿐"이라는 칸트의 긍정적 발언은 이와 관련해 존재에 대해 무엇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것인가?19)

2)존재는 절대적 정립, 지각이다.
존재 테제가 등장하는 또 다른 저술인 비판이전기의 '신 현존증명의 유일하게 가능한 입증근거'에서는 칸트는 그밖의 다른 실제적 술어들의 정립과 구별하여 존재(현존)를 '절대적 정립'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존은 한 사물의 절대적 정립이며, 또한 그점에서 술어로서 언제나 단순하게 연관의 방식으로 다른 사물에 정립되는 다른 모든 술어들과 구별된다."(GP 43) 여기서는 주어인 해당 사물과 술어(해당 사물의 규정)의 연관(술어적 종합)인 A ist B란 형식의 '단순한 정립'과 현존, 실존의 절대적 정립이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순전한 정립'으로 혹은 '절대적인 정립'으로 표현되든, 어쨌든 칸트는 존재(현존, 실존)는 정립, 곧 사물을 대상적으로 맞세우는(대상화하는) 인식 주체의 행위라고, 그것도 순전히 그 주체의 행위로서의 정립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 존재 그것은 곧 주체의 행위와 같은 것이다고 말하는게 아니라면, 그것은 존재와 인간 주체사이의 어떤 '연관'위에서 이끌려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본다면 칸트는 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규정한 다음 곧장 존재와 인식 주체사이의 '어떤 연관'에로, 하이데거의 표현으로 말하면, '뛰어내리고' 있는 셈이다. 하이데거가 칸트로부터 얻어내고자 하는 것은 그 존재테제를 하나의 설명으로서 파악가능하게 하는 그 연관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은 칸트가 존재(현존)라고 말한 절대적 정립의 의미를 해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실존으로서의 절대적 정립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우선 단순한 정립과의 구별속에서 두드러진다.

단순한 정립은 A ist B란 명제(예컨대 백묵은 희다)의 형태로, 술어 B(희다)가 주어 A(백묵이란 대상, 사물)에 덧붙여지는 정립을 말한다. 이때 술어 B는 주어 A의 사실내용에 관한 실제적 술어(규정)이며, 그리고 술어 B를 연관의 방식으로 주어 A에 정립시키는 것은 연계사 ist이다. 이와 같이 연계사 ist에 의한 주어와 실제적 술어의 연관의 정립이 단순한 정립이다.

단순한 정립이 주어인 해당 사물의 무엇임(사실내용)에 관해 규정하는 것이라면, 'A가 여기 있다(A ist da), A가 실존한다(A existiert)'란 실존의 정립에서는 사실내용에 관한 한, 주어 A에 덧붙여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A를 실존하는 것으로 정립하는 절대적 정립에서는 실제적 술어의 단순한 정립과는 달리, A에 다른 어떤 것, 다른 어떤 규정이 덧붙여지는 일 없이, 다시 말해 그것들과 관련없이 순전히 혹은 절대적으로 A 자신이 그 자체로 정립된다. 이것이 절대적 정립에서 '절대적'이 의미하는 바다. 그래서 A의 실존정립에서 정리되는 것이 말해져야 한다면 우선은 동어반복적으로 A 자신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20)

그렇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절대적 정립의 경우에서도 하나의 연관이, 물론 이 경우 연계사 ist의 정립에서 보여지는 연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놓여 있다. 연계사 ist에 의한 단순한 정립에서는 주어(Subjekt)와 술어사이의 연관이 정립되는 것에 비해 현존의 절대적 정립에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대상 자신과 그것의 개념, 곧 대상과 사유, 대상과 주체(Subjekt)사이의 연관이 정립된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다음과 같은 말로 절대적 정립의 그같은 성격에 대해 설명한다. "이제 주어(신)에 속하는 모든 술어들을 (여기에는 전능하다도 포함된다) 다 모은 다음, '신이 있다', 혹은 '그것은 신이다'고 말할 때, 나는 결코 신의 개념에 어떤 새로운 실제적 술어를 덧붙이는 게 아니고 다만 모든 술어들을 지닌 주어 그 자신을, (이제 여기서 절대적 정립이 보다 정확하게 토의된다. 괄호 하이데거) 내 개념과의 관련 속에서 대상 자신을 (칸트가 대상으로 의미하는 것은 현실적인 존재자이다, 괄호 하이데거) 정립할 뿐이다.(Kritik B 627)"(GP 54) 실존의 정립, 절대적 정립에서는, 예컨대 'A가 실존한다(A existiert)'란 실존 정립에서는 '실존한다'가 주어 A에 덧붙여지는 연관이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실존한다'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기에 그와 같은 연관의 정립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A란 대상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나 주체의 개념과의 관련 속에서 A 자신이 정립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로서의 해당 존재자에 어떤 사실내용(실제적 술어)을 덧붙이는 종합(술어적 종합)의 연관이 아닌 대상 자신과 나 주체 사이의 절대적인 연관이 정립되는 절대적 정립에서는 결국 현실적인 존재자(칸트에겐 대상)와 나 자신의 대면이 문제이다. 'A ist B, C, D..."란 단순한 정립의 경우, B, C, D...는 주어 A의 사실내용에 관한 실제적 술어들로서, 이때의 정립은 A가 현실적으로 있는지, 실존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다. 실제적 술어가 덧붙여지는 연관의 정립인 이 단순한 정립은 주어 A의 개념, 무엇임, 사실내용, 곧 가능존재에 관한 정립으로서, 주어 A의 현실적으로 있음 여부에 관계없이(예컨대 백묵은 희다처럼), "순수한 표상"(GP 53), "단순한 사유"(GP 61)에서의 연관의 정립이다. 그러나 'A exietiert'란 실존의 절대적 정립에서는 B, C, D...등의 실제적 술어들을 모두 지닌 현실적 존재자로서의 A 자신이 그것의 개념, 곧 나 인식 주체와의 관련에서 정립된다. 이 점에서 "실존의 정립에서 우리는 '개념 밖으로 나와야' 한다"(GP 55)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개념에서 사유되지 않았던 또 다른 실제적 술어에로 이른다는 말이 아니라(이길은 존재가 실제적 술어가 아니기에 애초부터 막혀 있기도 하지만), 내 순수한 사유 속에 가능한 것으로서의 가능존재에 비해 더 많지도 더 적지도 않은 꼭같은 술어를 지닌 '사물 자체'에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어떤 것과의 연관없이 오직 현실적인 존재자를 현실적인 존재자로서 정립하는 실존의 정립, 절대적 정립에서는 현실적인 존재자를 대면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 결정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칸트에게서 실존, 현존, 현실적으로 있음은 현실적인 존재자와 그것을 대면하게 하는 인식능력에 대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확정할 수 있다. 나아가 칸트에게서 실존, 현존은 순전히 절대적 정립이고 또 절대적 정립에서 정립되는 것은 그 관계일 뿐이기에 실존, 현존은 바로 그 대상의 인식능력에 대한 관계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그 실존의 관계는 분명 가능존재의 정립, 단순한 정립에서의 '순수한 표상', '단순한 사유'와 관련과는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순수이성비판'의 '경험사유일반의 요청'에 나오는 칸트의 존재 설명을 끌어들여 이를 밝힌다. "칸트는 '경험 사유 일반의 요청'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양상(가능성, 현실성, 필연성, 괄호 하이데거)이란 범주는 대상의 규정으로서 그것이 술어로서 덧붙여지는 개념을 최소한의 만큼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인식능력과 (대상의, 괄호 하이데거)관계를 표현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GP 61)21)

뒤이어 나오는 '경험 사유 일반의 요청'의 내용에 따르면, 칸트는 가능성이 모든 실제적 술어들을 지닌 대상의 오성, 단순한 사유에 대한 관계를 그리고 필연성이 대상의 (경험에 대한 그 적용에 있어서) 이성에 대한 관계를 표현하는 반면, 현실성(실존, 현존)은 현실적인 존재자로서의 대상과 경험적 판단력,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각과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설명하고 있다(참조, Kritik B 266)(참조 GP 61/62). 그는 곧 존재(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의 유형, 양상을 가진)는 대상의 무엇임, 실제내용에 대해 덧붙여지는 '어떤 것', 곧 존재자가 아니라 대상의 인식능력, 주체에 대한 관계의 어떻게(양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실존의 경우라면, 특별히 대상과 (지각으로부터 규정된) 경험적 판단력, 구체적으로는 대상과 지각과의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가능성(가능존재)는 단순히 오성과의 관련에서의 사물의 정립이었기에..., 동시에 현실성(실존, 현존)은 사물과 지각의 연관이다."(Kritik B 287)(GP 53)22)

이렇게 해서 인식능력에 대한 관계로 밝혀졌던 주체의 행위로서의 정립인 존재는 이제 여기서, 칸트 자신의 설명을 통해, 다시금 사물과 지각의 연관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하이데거에겐 칸트의 다음과 같은 물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칸트에겐 현존, 현실성, 실존은 "오직 다음의 물음과 (관계있다, 우리가 그 가능성에 따라 단순히 사유할 수 있는, 괄호 하이데거) 그러한 사물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느냐, 그래서 그것의 지각이 어쨌든 개념에 앞서 일어날 수 있느냐"(Kritik B 272/273)(GP 62)는 물음이다. "개념에 질료를 제공하는 지각이 현실성의 유일한 성격이다."(Kritik B 273)(GP 62) 칸트는 곧 지각을 현실적으로 눈앞에 있는 것들의 존재의 성격으로, 그것도 유일한 성격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칸트에게서 실존의 절대적 정립에서 더해지는 게 있다면 오직 대상 자신과 인식능력과의 관계일 뿐이었고, 그리고 이제 드러난 바처럼, 그 관계가 지각과의 연관인 한, 칸트의 현실성, 실존의 정립에서는 지각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일어날 수도 없다고 말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칸트에겐 지각이 일어나는 곳에, 지각이 충족되는 곳에, 실존의 정립이 일어난다. 지각이 미치는 그 만큼, "사물의 현존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이른다"(Kritik B 273)(GP 62). 실존, 정립, 지각의 이같은 관련은 다음과 같이 하나의 문장앞에 파악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있는 사물의 '실존(현존)'은 그 사물의 '지각'과 함께 '정립'된다. 이렇게 본다면 실존은 절대적 정립, 대상 자신과 인식능력의 연관이라는 자신의 존재 설명에서 칸트는 궁극적으로는 실존, 현존을 지각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하이데거는 이제 다음과 같이 확정짓는다. 칸트에게서 "현실성, 실존, 현존은 절대적 정립과 같고 절대적 정립은 지각과 같다."(62쪽)

이렇게 해서 존재와 인식 주체(인간)사이의 연관을 앞서 보면서, 존재는 절대적 정립이라는 칸트의 존재 테제를 해명하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칸트 자신의 설명들을 통해 그 테제의 의미로 사물과 지각의 관련, 존재와 지각의 동일성을 밝히는 것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물과 인식능력의 연관, 혹은 이제 분명히 밝혀진 것처럼, 사물과 지각의 연관, 나아가 존재는 지각과 동일하다는 동일성의 관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특히 존재와 인식주체와의 연관과 관련해, 존재와 지각의 동일성은 어떻게 설명돼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무엇보다도 칸트가 존재와 동일시한 지각이 그 의미에 있어 애매하다는데서 비롯된다. 하이데거는 지각의 의미로 지각함(Warnehmen), 지각된 것을(Wargenommenes), 또한 지각된 것의 지각돼 있음(지각됨, Wahrgenommensein, Wahrgenommenheit)이란 또 다른 의미를 끌어들여, 제시해보지만, 그 어느 것도 실존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우선 현존, 실존은 인식주체의 한 행위인 지각함으로서의 지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존은 지각된 것이란 의미에서의 지각일 수도 없다. 실존이 지각된 것, 지각된 어떤 것으로 동일시된다면, 이 경우 실존이 곧 존재자라고 하는 것이 될텐데, 이는 칸트 존재 테제의 부정적 발언(존재는 결코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에 의해 애초부터 거부돼 있다. 존재는 도대체 존재하는 어떤 것일 수 없다는 것이 그 부정적 발언의 의미였었다. 지각의 또 다른 의미인 지각돼 있음의 경우, 지각된 눈앞에 있는 것이 특별히 지각(지각함)을 통해 눈앞에 있는 것으로, 곧 그것의 존재인 눈앞에 있음(현존, 실존)에서 발견돼 있다(지각돼 있다)는 양상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엔 그렇게 눈앞에 있는 것의 존재, 눈앞에 있음이 어떻게든 이미 함께 열어밝혀져있고 그래서 그 존재를 확인해줄 수는 있겠지만,23) 눈앞에 있는 것의 진리(발견됨)의 양상으로서의 그것이 곧 그 눈앞에 있는 것의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존재(현존, 실존)로서의 지각은 의미의 모호함에 떨어진다. 그러나 칸트는 모호함을 해소해줄 수 있는 뚜렷한 정보를 더 이상 주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칸트의 존재 설명이 남긴 불명료함을 뚜렷하게 열어 밝혀내는 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해석의 과제가 된다. 그 해석을 이끄는 것은 곧 이런 물음일 것이다. 실존(현존)으로서의 존재가 지각함, 지각된 것, 나아가 지각돼 있음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면, 칸트는 존재를 지각과 동일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존재와 인식주체사이의 어떤 연관위에서 그같은 동일시가 성립되는가?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를 지각과 동일시하는데서 멈춘 그 곳에서 출발해야 하는 그같은 해석이 그럼에도 그 자신의 고유한 그래서 칸트에겐 낯선 관점에 맞춰서 해명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칸트의 존재 설명을 칸트 자신의 시야방향에서 추적해나가는 것임을 강조한다. "궁극적으로보면 칸트는 현존과 실존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정당한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기"(GP 67) 때문이다. 다만 칸트가 충분히 뚜렷하게 보지 못한 것은 "그가 자신의 설명을 끌고 가는 지평(GP 67),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각의 구조, 지각의 본질유래일 뿐이란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해석이 어디에로, 어떻게 향해야 할지도 분명해지고 있다. 칸트의 존재와 지각의 동일시가 남긴 애매함을 해명하려는, 그럼으로써 칸트에게서 '사유돼야 할' 존재와 인식 주체사이의 관련을 이끌어내려는 하이데거의 해석은 바로 그 지각을 "가능케 하는 것", "지각의 근거에 놓인 것"(GP 69), 지각의 본질유래, 말하자면 지각의 배후에로 물어들어 가는 소급, '뒷걸음질'속에 이뤄진다.

3.지각의 구조인 지향성과 존재
하이데거에겐 지각의 애매성을 낳은 세가지 의미들이 지각의 구조를 내보여 줄 수 있는 현상적 기반이다. 그에겐 곧 그같은 지각의 다의성은 우연한 것,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지각이란 현상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지각의 단일한 구조에 속하는 구조계기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24) 하이데거는, 지각의 구조와 구조계기들을 함께 파악하면서, 지각의 구조로서 지향성을 제시한다. 지각이란 "지각된 것으로서의 지각된 것을 지각돼 있음에서 이해하면서, 지각된 것에 지각하며 향해 음(Sichausrichten auf)"(GP 79)이다. 지각의 세 구조 계기들은 지각함과(주체의 행위)과 지각돼 있음에 지각된 것(존재자)이 서로 속하는 방식으로 '지향적 향해 있음'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각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 구조가 지향성을 통해 규정되는 현상이다."(GP 445) 하이데거는 지각의 구조로서 지향적인 향해 있음의 지향성에 대한 이같은 형식적 기술과 함께 지향성에 속한 두 구조 계기 intentio(지향적 향해 있음의 한 구조계기로서, 좁은 의미의 향해 있음)와 intentum(그 향해 있음이 향해 있는, 관계맺는 것)(지각의 경우라면, 지각함과 지각된 것)과 관련된 두가지 오해를 배제하는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지향성을 그 사실내용에 있어 보다 명료하게 제시한다.

우선 먼저 지향적 연관은 객체가 눈 앞에 나타나면서 비로소 두 눈 앞에 있는 주체와 객체간에 맺게 되는 부가적인 연관이란 오해이다. 지향적 연관은 눈앞에 있는 존재자들의 연관항들이 결합돼, 눈앞에 있는 방식으로 성립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지향성은 그처럼 '저기' 눈앞에 있는 객체와 '여기' 눈앞에 있는 주체 사이의 눈앞에 있는 연관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심리적 주체가 우선은 지향성없이 그 자체로 고립된 채 눈앞에 있고, 그러다 눈앞에 있는 물리적 객체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심리적 주체에게 지향성의 연관이 생겨나는 (그래서 눈앞에 있는 주체와 객체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지행성의 연관은 성립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주체 자신이 이미 지향적으로 구조지워져 있다. 주체 자신이 이미 '-에로 지향적으로 향해 있음'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관계맺음의 구조인 지향성"은 오히려 "관계맺는 주체의 구조"로서, 그 주체의 "존재방식"(GP 85)이다. 주체가 그렇게 이미 지향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기에, 지향성은 관계맺음과 함께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관계맺음들의 '본질'을 이룬다. 주체 자신이 지향적인 한, 그 주체의 관계맺음들은 애당초부터 -에로 지향적으로 향해 있음이라는 것이다. 그점에서 지향적으로 향해 있음의 지향성은 모든 지향적 관계맺음들에 이미 앞서서 전제돼 있는 "선험적 관계 성격"(GP 85)이며, "그래서 지향적 관계맺음이란 말은 마치 공간적인 삼각형이란 말처럼 불필요한 중복어이다."(GP 85) 이를 지각에 적용시켜 말하면, 주체의 한 관계맺음인 지각은 우선은 지향성없이 주체안에 갖혀 있다가, 눈앞에 있는 객체의 등장으로 비로소 그리에로 지향적인 연관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지향적인 향해 있음의 연관이란 것이다.25)

앞서의 오해가 지향성의 intentio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 오해는 intentum에 관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주체의 관계맺음들(흔히 체험이라고 말하는)은 이른바 주체내재적인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어져 있는 주체내재적인 감각, 표상 등이 아닌 주관 밖의 대상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가. 단순하게 말해서 어떻게해서 우리는 주체내의 지향적 관계맺음으로부터 밖으로 나와 의식 또는 주체초월적인 대상인 사물들에 이르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일견 견고하게 보이는 이같은 문제제기는 지향성이란 현상 자신이 내주는 바대로 보지 않고 일정한 관점에서 현상 자신에 제약을 가하는 이론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오히려 이론적 편견없이 지향적 관계맺음, 주체의 체험을 바라볼 때, 그 현상 자신이 내주는 바는 지각의 관계맺음은 주체내재적인 감각들에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적으로 있는 존재자 자체에 나가 있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우리가 우선 듣는 것은 오토바이, 자동차의 소리이지 조야한 '순수한 소음(잡음)'이 아니다. 우리가 '순수한 소음'을 듣기 위해 기교적이고 복잡한 입장을 고의적으로 취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참조, SZ 164). 우리가 무엇인가를 들을 때, 우선 직접적으로 듣는 것은 현실적인 존재자의 소리이지 순수한 소음이 아니다. 우리들은 그 단순한 소음을 그 자체로서 그리고 우선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곧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우선 듣는 것을 떼내고 추상화한, '매개된' 결과물이다. 주체가 이렇듯 자신의 지향적 관계맺음들에서 우선적으로 잡다한 감각들이 아니라 자기 밖의 현실적인 존재자에로 언제나 이미 나가 머물러 있다면 그같은 지향성을 두고, 다시금 지향적 연관의 가능성을 따져 묻는다는 것은 하이데거에겐, 마치 소음을 듣기 위해 일부러 노력해야 되는 것처럼, 현상 자체를 왜곡한 이후에야 가능한 2차적인 물음일 따름이다.

하이데거는 지향성과 관련된 두가지 오해를 배제하면서 지향성은 단순히 주체의 관계맺음(체험)의 지향성이 아니라 주체 자신의 존재방식이며, 지향성의 intentum은 순수한 질료로서 감각들, 표상들이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자 자체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지각의 구조로서 지향성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명료화됨에 따라 현존, 실존으로서의 존재는 사물과 지각의 연관이고, 나아가 지각과 동일하다는 칸트의 존재 설명은 일단 이렇게 해명된다. 우선 사물과 지각의 연관은 사물이 주체내 인식능력, 지각과 부가적으로 맺게 되는 눈앞에 있는 연관이 아니다. 지각은 주체와 사물, 내부와 외부사이의 그러한 부가적인 연관의 한 연관항이 아니라 이미 '-에로향해 있음'이며, 주체 자신이 그 지각의 지향적 관계맺음에서 이미 직접적으로 대상 자체에로 향해 나가 머물러 있다. 이러한 해명으로 물론 존재와 지각의 동일성, 그 동일성이 성립되는 존재와 인식주체의 연관이 아직 충분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쨌든, 지각의 연관은 두 눈앞에 있는 주체와 객체사이의 부가적인 연관이란 오래와 대조하여 말한다면, 지각의 주체와 객체사이의, 그러면서 양자가 초월론적으로 속해 있는, 밖을 향해 지향적으로 향해 있음이란 새로운 '잉여적인' 지평이 일단 확보됐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지각과 동일한 한편, 지각함도 지각된 것도 아닌(곧 주체의 행위도, 주체 밖의 존재자도 아닌) 존재는 그 지각의 구조로서의 지향적 행해 있음과 동일하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4.존재는 지향적 향해 있음에 열어밝혀져 있다.
지각의 구조로서 밝혀진, 통상적인 의미에서 주관적이도 객관적이지도 않지만 동시에 주체와 객체가(곧 intentio와 intentum) 거기에서 서로 속해 있다는 의미로 주관적이며 객관적이기도 한, 주체와 객체사이의 지향적 향해있음의 영역은, 하이데거에겐, 존재를 지각과 동일시하면서 칸트가 끌어들이고 있는 존재와 지각, 존재와 인식주체의 관련의 궁극적 의미가 해명될 수 있는 지평이다. 앞서 지각함, 지각된 것외에 또 하나의 지각의 의미로 제시된 지각돼 있음이 그같은 궁극적 해석을 이끄는 단서가 된다. 하이데거는 우선 지각돼 있음의 수수께끼에 주목한다.

지각된 것의 지각돼 있음으로서 지각돼 있음은 지각이 향해 있는 지각된 것, intentum에 속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 지각의 inrentum은, 이미 밝혀진 대로, 눈앞에 있는 현실적인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지각돼 있음은 의당 눈앞에 있는 존재자에 속한다는 것인데, 하지만 눈앞에 있는 존재자의 규정들(실제적 술어들) 가운데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지각돼 있음은 그런 규정들과 같은 방식으로는 존재자에 속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것이 지각돼 있다.' 혹은 '그것은 지각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지각돼 있음이 눈앞에 있는 존재자의 규정들 가운데 어느 한 규정이 결코 아니면서 그럼에도 그 존재자에 속한다면 그 속함의 방식을 무엇을 가리키는가? 다시 말하면, 어느 것의 지각돼 있음은 그것의 가능한 모든 규정들 가운데서는 도대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음에도, '어떤 것이 지각돼 있다.'고 말할 때, 지각돼 있음은 그 존재자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주체내재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앞서 한 지향적 관계맺음인 지각의 구조,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지향적 향해 있음에 대해 말하기를,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주체와 객체가, 곧 기각함과 지각된 것이 함께 속해 있다는 의미로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영역이라고 했다.26) 지각된 것, 눈앞에 있는 존재자에 속하면서도 그 존재자의 규정들과 같은 방식으로 속해있지는 않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주체에 속하면서도 주관적인 어떤 것이 아닌 지각돼 있음은 바로 이 주체와 객체사이의 '지향적으로 향해 나가 있음'이란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각된 것의 존재(눈앞에 있음)에 대해서도 똑같이 물을 수 있다. 지각된 존재자의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예컨대 눈앞의 백묵의 존재는 백묵이란 존재자의 존재로서 당연히 백묵이란 눈앞에 있는 존재자에 속하지만, 이 백묵을 아무리 여러 방향에서 샅샅이 뒤져봐도 그 존재는 발견되지 않는다. 발견될 수 잇는 것은 연장을 가지고 있고, 비교적 단단하고, 이러저러한 모양과 흰색을 가지고 있고...등 백묵이란 존재자의 규정들뿐이다.27) 그럼에도 눈앞에 있음으로서의 존재는 언제나 다만 눈앞에 있는 존재자의 존재라면 그 존재는, 존재자에, 아니면 존재자속에, 아니면 존재자뒤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지각돼 있음과 마찬가지로 지각의 구조인 지향적 향해 있음에 속하는가?

하이데거는 여기서 지각된 것의 지각돼 있음을 발판으로 삼아 그것의 존재, 눈앞에 있음에로 이른다. 지각돼 있음은 눈앞의 존재자가 특별히 지각의 방식으로 눈앞의 존재자로서, 곧 그것의 존재인 눈앞에 있음에서, 발견돼 있다는 그 지각된 존재자의 진리(발견됨) 양상을 말한다. 따라서 지각돼 있음에 어떻게든 눈앞에 있는 것의 존재, 눈앞에 있음이 함께 열어 밝혀져 있고, 그래서 그 존재에로 이르는 "통로"(GP 95)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지각돼 있음이 이처럼 지각된 것의 존재를 지기하고, 확인해주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렇게 열어 밝혀진 존재(존재의 진리) 덕분이다. 나아가 그 존재의 열어밝혀짐이 지각돼 있음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 존재의 진리, 열어밝혀짐의 편에서 보면, 이번에는 존재의 진리가 지각돼 있음의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지각함의 방식으로 발견되기 위해선 그것의 지각될 수 있음을 전제하고, 그것은 다시금 그것의 존재, 눈앞의 있음의 열어밝혀짐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곧 지각이란 발견함은 그 지향적 향해 있음에서 "애초부터 이미 눈앞에 있음과 같은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GP 99)한다는 말이다. "지각돼 있음은 그 가능성과 관련해 존재(눈앞에 있음) 이해에 근거한다." "눈앞에 있는 것의 발견될 수 있음, 곧 지각될 수 있음은 눈앞의 있음의 열어밝혀져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GP 101) 한 존재자가 지각의 방식으로 발견됨에는, 곧 지각됨에는 "눈앞에 있음에 대한 이해가 이미 앞서 놓여 있어야 한다(GP 99)"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존재자는 그것의 존재가 이미 열어밝혀져 있을 때만, 지각의 방식으로든 아니면 그밖의 다른 접근방식으로든 발견될 수(GP 102)" 있기에 그렇다. 바꿔 말하면 눈앞에 있는 존재자의 발견됨(존재자의 진리)의 양상으로서의 지각돼 있음은 그 존재자의 눈앞에 있음의 열어밝혀짐(존재의 존리), 존재이해가 자신의 전제로서 지각의 지향적 향해 있음안에 속해 있어야 함을 지시해주고 있다.28)

하이데거는 지각돼 있음을 현상적 실마리로 지향적 향해 있음안에 열어밝혀진 존재에로 이르는 이같은 해석에서 지각돼 있음과 존재의 열어밝혀짐을, 지각돼 있음은 열어밝혀진 존재를 지시하는 한편, 존재의 열어밝혀짐은 지각돼 있음의 성립을 위한 전제가 되는 방식으로 서로 관련돼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각돼 있음은 그 안에 함께 열어밝혀진 존재를 가리키는 혹은 확인해주는 통로이고, 그것을 통해 이르게 된 존재의 편에서는 지각돼 있음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지각돼 있음과 존재의 열어밝혀짐사이의 관련에 대한 설명은, 일견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순환의 논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때 지각돼 있음은 열어밝혀진 존재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을 보여주는 인식의 근거(ratio cognoscendi) 그리고 열어밝혀진 존재는 지각돼 있음에 대해 그것의 존재의 근거(ratio essendi)와 같은 것으로서, 두 근거지움은(근거지움으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평면에서의 순환적인 근거지움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앞서 유의해야 할 것은 지각돼 있음과 존재의 열어밝혀짐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근거지움에 의해 그 결과로서 '추후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지각이란 현상 자신의 구조에 똑같이 근원적으로 속한다는 점이다. 29)

하이데거엔 그와 같이 지각의 지향적 향해 있음안에 지각돼 있음과 그것의 '전제','근거'로서의 존재의 열어밝혀짐이 속한다는 것은 입증돼야 할 하나의 '요구'나 독단적 주장이 아니라, 현상학적 바라봄의 도움으로 한 지각의 현상에 관한 기술이다. 특정한 이론적 입장에서 현상 자신을 일부러 왜곡하지 않고 바라본다면, 지각이란 현상이 스스로 내주는 바는 존재자와 지향적인 연관을 맺는다는 사실이다. 지각은 눈앞에 있음으로 있는 그 현실적인 존재자에 지향적으로 향해 나가 머무는 관련이며, 그 '-에로 향해있음의 영역'에는 언제나 이미 지각된 것의 존재, 눈앞에 있음이 함께 열어밝혀져 있다는 것이다. 곧 지각의 지향적 향해 있음안에 이미 눈앞에 있음에 대한 이해, 존재이해가 놓여 있다는 것은 지각 자신의 구조, 본질에 속한다는 말이다.30) "지각의 지향성엔 intentio와 intentum만이 아니라 지향된 것안에 지향되어진 것(곧 눈앞의 존재자, 괄호 필자)의 존재유형에 대한 이해가 함께 속해있다.(GP 100/101)

지각을 '가능케 하는 것', '근거에 놓인 것'에로의 소급속에서 그러한 것으로서 지향적 향해 있음의 영역이, 그리고 다시금 그 향해있음에 지각돼 있음과 그것의 가능조건 혹은 '전제'로서의 지각된 것의 존재이해(이러한 것들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가 현존, 실존은 지각과 같다는 자신의 존재 설명을 끌고 갈 때 궁극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다.)가 속하고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 이제 존재는 지각과 같다는 칸트의 존재설명은 하이데거에겐 다음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칸트가 존재로 동일사한 지각은 그 본질상 지각함과 지각된 것, 다시 말해 주체와 객체사이의 동시에 양자가 속해 있는 자기 밖을 향해 지향적으로, '탈자적으로' 향해 있음의 구조로 이뤄져 있으며, 그 지향적 향해 있음의 영역에 존재자의 규정들(실제적 술어들)의 극단적인 타자로서 그 규정들처럼 '객관적으로' 지각된 존재자에 속하지 않는, 동시에 주체내재적인 행위로서의 지각함도 아닌, 존재자의 존재가 이해돼 있다. 곧 하이데거는 칸트가 지각과 동일시한 존재, 지각인 한편 지각함 또는 지각된 것의 의미로서든 지각일 수 없었던 존재를 지각의 지향적 향해 있음의 영역에 속한, 열어밝혀진 진리의 존재로 해석하는 것이다. 동시에 지각의 지향적 향해 있음에 속하는 그같은 존재이해가 바로 칸트가 존재는 지각과 동일하다고 설명할 때, 비록 명시적으로 밝히고는 있지 않지만, 그 설명의 의미, 곧 그 설명이 '그 가능성에서부터 파악될 수 있는 이해지평'이다. "칸트가, 비록 분명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현존, 현실성은 지각과 같다고 말할 때 그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분명 그같은 존재이해(곧 지각의 지향적 향해있음안에 이미 앞서 속해있는 눈앞에 있음, 존재에 대한 이해, 괄호 필자)이다."(GP 101)

5.존재는 인간 현존재에게 열어밝혀져 있다.
하이데거는 앞서 지각의 지향적 성격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지향성과 관련한 두가지 오해를 배제했다. 지각의 연관을 우선은 지향성없이 그 자체로 고립된 주체가 객체의 등장과 더불어 그것과 연관을 맺게 되는 부가적인 관련으로 여기는 첫 번째 오해에 대해서는 지향성은 객체의 등장과 함께 비로서 주체에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자신이 애초부터 '-에로 향해 있음'으로 존재하면서 자신의 모든 지향적 관계맺음들에 앞서 임 자기 밖의 대상에 향해 나가 머물러 있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또한, 지향적인 관계맺음이 어쨌든 주체의 행위로서 주체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자신의 주체내재적인 영역을 벗어나 그 영역밖의 대상들과 초월적으로 관계맺는가라고 묻는 두 번째 오해에 대해선 주체의 관계맺음들은 그 본질상 이미 자기 밖을 향해 나가 머무는, '에로 향해있음의 구조로 이뤄져 있기에, 곧 초월적으로 있는 것이기에, 거기에 다시금 초월의 가능성을 따져 묻는 것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반론을 통해 배제된다.

두가지 오해를 배제하는 가운데 뚜렷히 남는 것은, 곧 그 오해들을 물리치는 반론의 핵심이기도 한 그것은 주체 자신이 이미 -에로 향해있음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지각함을 포함한 모든 주체의 지향적 관계맺음들은 그에 앞서 '아프리오리하게' 놓여 있는 주체의 그같은 지향적인 존재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주체의 모든 관계맺음들은 자체의 "구조", "아프리오리한 관계성격"(GP 85)인 지향적인 향해 있음은 "관계맺으며 존재하는 주체의 구조"(GP 85), "존재구성틀"(GP 93)이다. 하이데거는 주체의 존재방식, 구성틀로서의 지향적인 향해 있음을 "초월"이라고 부른다.(참조, GP 91) 그래서 지향적인 향해있음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는 다른 말로 초월로서 초월안에 존재하는 존재자이다. 또한 존재가 열어밝혀진, 존재가 이해된 그 지형적 향해 있음은 탈자적인 존재이해 자체이기도 하다. 지향적 향해 있음, 초월 또는 존재이해는 장소에 있어서 동일하다. 곧 지향적 향해 있음, 초월 또는 존재이해들은 지향적이며 탈자적인 주체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동일하게 존재가 열어밝혀지는 장소, '개방된 여지(das offene)'를 의미하는 것이다. 존재가 존재자로서 존재자, 곧 존재자가 아니라 열어밝혀짐, 진리로서 물어지는 곳에서는 주체의 편에서도 탈자적인 존재방식의 주체가 응대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근거(곧 존재의 진리, 괄호 필자)에로 소급해 들어가면 인간본성의 변화가 수반된다."(참조, WM 9)31)

주체의 관계맺음들의 구조를 이루며 주체 자신의 존재방식에 속하는 지향적 향해(나가 머물러) 있음(곧 초월 또는 존재이해)은 통상적인 주체, 객체 개념으로 보면 눈앞에 있는 어떤 것처럼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주체내에서 생겨나는 어떤 것이란 의미에서의 주관적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지향적 향해있음은 주체의 구조로서 주체에 속한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며 동시에 이미 주체의 영역을 이미 넘어 자기 밖을 향해, '탈자적으로' 초월해 있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체, 객체의 개념틀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지향적인 향해있음은 양자 사이의, 그러면서 양자가 서로 속해있는, 그래서 양자가 그위에서 성립하는 "사이"(참조, UH 35/36)의 영역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그러한 지향적 향해 있음의 방식으로, 초월로서 초월안에 존재하는 주체의 존재 성격에 대해선 아마도 주체 객체 그 '사이의 존재'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여기서 통상적인 주체 개체 개념으로는 지형적 주체의 존재빙식인 지향적 향해 있음은 충분하게 파악될 수 없으며, 그 지향성의 주체 역시 그러한 개념틀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제 지향성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주체를 위해서, '주체', '주관적 영역' 등의 개념을 버리는 대신 현존재(Dasein)이란 새로운 용어를 제시한다. 그의 '현존재'는 그 구조상 언제나 이미 자기 밖을 향해 지향적으로 향해 나가 머무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주체, 우리 자신을 e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으로 등장한다. 그는 또한 그처럼 초월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 유형을 가리켜서 실존(Exitstenz)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지향적인 향해있음이 주체, 현존재의 존재방식으로 한 발자국 더 근원화되면, 앞서 하이데거가 칸트의 존재설명의 의미로 밝혀낸, 눈앞에 있음의 존재는 지각의 구조로서 지향적인 나가 있음의 영역에서 열어밝혀진다는 것은, 똑같은 의미로 존재(눈앞에 있음)는 그 지향성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에게 열어밝혀진다고 말할 수 있다. "눈앞에 있음의 열어밝혀짐은 현존재의 관계맺음들, 곧 그의 실존에 속한다."(GP 101) 곧 지각인 한편, 지각함, 지각된 것이란 의미에서의 지각일 수 없었던 칸트의 존재는 지각의 지향적 향해 있음에 그래서 더 근원적으로는 지향적 향해 있음의 주체, 현존재에게 열어밝혀진 존재, '진리의' 존재로 궁극적으로 해석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존재 설명의 궁극적 의미는 동시에 "다만 현존재가 있는 한 존재가 '있다'(es gibt Sein)"32)(SZ 212), "존재는 열어밝혀져 있음, 진리가 있는 한, 곧 현존재가 있는 한 있다."(참조 GP 25)는 하이데거 자신의 존재이해의 확증이다. 존재자가 아닌 존재는 열어밝혀짐으로서, 진리가 '있고', 그 진리의 존재에겐 그 열어밝혀짐을 위한 '개방된 여지', '장소'(지향적 향해 있음, 초월 또는 존재이해가 가리키는)가, 그 존재진리의 장소를 자신의 존재방식, 본질로 하고 있는 인간 현존재가 응대하는 것이다.(또는 필요한 것이다, 사용되는 것이다.33) 그래서 하이데거에겐 존재에 대한 물음은 존재진리에 대한 물음이고, 그것은 곧 진리의 존재와 진리의 장소로서 응대하고 있는 인간과의 관련에 대한 물음이다. 현존재란 명칭 자체가 이같은 존재진리의 장소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성격을 가리키고 있다. 현존재(Dasein)는 거기에-존재 Da-Sein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명명한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존재의 인간 본질에 관련과 그의 마찬가지로 존재의 열려져 있음('Da')에 대한 인간의 본질 관련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위해서,....그 관련에 대해 현존재(Dasein)란 명칭이 선택됐다."(참조, WM 13/14) 또한 인간의 본질, 존재방식인 지향적 향해있음(초월)의 장소에서 존재가 열어밝혀진다는, 다시 말해 지향적 향해 있음, 초월이 인간의 본질의 장소이자 동시에 존재 진리의 장소라는 이같은 존재이해에서는, 여기선 아직 뚜렷이 제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향적인 향해 있음, 초월의 중심에서 존재와 인간이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 속한다는 그리고 그런 의미로 동일하다는 양자의 동일성이 이미 사유 바깥으로 떠오르고 있다.

6.맺는말-형이상학의 존재물음과 칸트의 존재물음
하이데거는 존재의 실제적 술어가 아니며 순전히 정립 그 자체 혹은 절대적 정립, 나아가 지각 그것일 뿐이라는 칸트의 존재 설명에 대해, 그 설명을 떠받치고 있는 지평에로 물어들어가면서, '뒷걸음질'을 하면서, 해명을 시도했다. 그 해명은 우선 지각을 지각의 구조, 본질인 지향성의 향해 있음에로 되돌리고, 가기에서 또 그 향해 있음에 속하는 지각돼 있음에로, 그리고 다시금 그것의 근거, 전제인 존재의 열어밝혀짐에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존재가 열어밝혀져 있는 지향적인 향해 있음을 주체의 존재방식에로 근원화하는 일련의 소급속에서 이뤄졌다. 이러한 근원화의 소급에서 하이데거는 칸트의 존재 설명의 궁극적 의미로 다음과 같은 존재이해에 이르렀다. 존재자가 아닌 존재는 존재자처럼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발견되는 지향적 관계에서 그 관계의 주체, 현존재의 지향적 향해 있음, 초월의 영역에서 열어밝혀져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곧 자신의 해석을 통해 칸트가 자신의 존재 설명에서, 비록 뚜렷이 사유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존재와 존재자를 원칙적으로 구별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보다 결정적으로는, 존재자가 아님으로서의 존재를 존재의 진리, 열어밝혀짐의 차원에서 곧 그 열어밝혀짐의 장소로서의 인간과의 관련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존재이해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칸트는 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라는 부정적 발언에서 존재는 실제적 술어(규정)들처럼 대상에 속하는 방식으로 있는(-안에 있는) 존재하는 어떤 것, 곧 존재자가 아니라고 하므로써 존재와 존재자를 명백히 구별하고 있다. 이것은 존재(현존, 실존)를 절대적 정립으로 규정하는 긍정적 발언에서도 다시금 확인된다. 사물의 사실내용에 규정이 덧붙여지는(확장되는) A ist B의 단순한 정립과는 달리 절대적 정립에서는, 실존이 B와 같은 실제적 술어가 아니기에, 사물과 인식능력(지각), 사물과 나 자신의 관련외에는 아무 것도 덧붙여지지 않는다고, 곧 실존의 정립에서는 사실내용(무엇임)에 관한 한 대상이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설명된다. 이것은 (실존으로서의) 존재는 존재하는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점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를 절대적 정립으로 규정하는 긍정적 발언에서 칸트는 존재를 절대적 정립, 결국은 지각과 동일시하고 있다. 존재를 지각과 동일시한 칸트의 설명이, 무엇보다도 지각이란 용어의 의미의 다의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불명료함으로부터, 설명으로서 파악되게 하는 의미, 이해지평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지각과 동일하지만, 지각함 또는 지각된 것이란 의미에서의 지각일 수 없는 존재는 지각의 지향적 향해 있음에, 그 지향적 향해 있음의 현존재에게 열어밝혀져 있다. 곧 그 존재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인 지향적 향해 있음에 열어 밝혀진 존재, 진리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칸트의 존재 설명에 대한 궁극적 해명은 동시에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며, 존재자가 아님으로서의 존재는 열어밝혀짐, 진리로서 '있으며', 그 진리의 장소로서 지향적으로 향해 있는, 초월로서 있는 인간 현존재에게 속한다는 하이데거 자신의 존재이해의 확증이다. 곧 하이데거에겐, 그의 현상학적 분석에겐 전승된 칸트의 존재 설명이 존재의 진리와 그 진리의 장소로서의 인간과의 관련을 소급 지시하는 현상학적 실마리인 셈이다. 달리 존재물음과 관련지어 말하면, 하이데거는 존재를 실제적 술어가 아니고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는 절대적 정립(지각)과 동일하다는 존재 테제를 통해 존재토의의 고유한 장소로서 존재와 인간의 관련을 제시하는 칸트의 존재 설명에서, 존재자의 근거를 구하면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로 초월하는 형이상학의 존재물음으로부터 존재의 진리를 묻는 방향에로, 곧 존재와 인간의 관련에로 소급해 들어가는 존재물음의 선회, '뛰어내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칸트의 존재 설명의 해명을 통해 칸트와 더불어 분명하게 '뛰어내리는' 존재와 인간의 관련은 존재자가 아님(Differenz)으로서의 존재는 지향적 향해 있음(초월)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에게 열어밝혀져 있다는, 다시 말해 존재는 진리로서 그 진리의 장소인 현존재에게 속한다는 관련이다. 그러나 이 명시적으로 '사유된' 관련은 존재의 열어밝혀짐(진리), 진리의 장소인 지향적 향해 있음, 초월의 중심에서 지향적인 향해 있음으로, 탈자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현존재와 그곳에서 열어밝혀지는 존재가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 속한다는 함께 속함의 관련을, 그리고 그렇게 함께 속함의 의미에서 둘은 동일하다는 동일성(Identitat)의 관련을 이미 숨가쁘게 지시하고 있다. 곧 칸트의 존재 설명의 궁극적 의미로 확증된, 존재자가 아님으로서의 존재는 인간 현존재에게 열어밝혀져 있다는 존재이해는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Differenz)와 존재와 인간의 동일성(Identitat)으로서의 존재진리에 대한 사유를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이미 사유된 것은 끊임없이 새롭게 충만에로 들어오는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준비하고 있다."(ID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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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존재를 설명하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존재로 여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형이상학이 존재로 연긴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존재-신-론(Onto-Theo-Logie)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이중적이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개별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곧 존재자로서 근거짓는(grunden), 모든 존재자의 "공통적인 근거(Identitaty und Differenz 63, 이하 ID로 약함)", "일반적인 특성(Was ist Metaphysik? 19 이하 WM으로 약함)", 존재자의 무엇임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존재자로, 또한 동시에 모든 존재자를 통털어 전체에 있어 정초하는(begrunden) 통일자, 최고 존재자로 이해한다.(하이데거는 전자의 근거지움에 대해선 grunden, 또는 ergrunden, 후자의 그것에 대해선 begrunden이라고 구별해 말하고 있다. 참조 ID 49,63. 전자가 좁은 의미의 존재론을 이끄는 주도적 문제라면, 후자는 신학의 문제이다. 그래서 "형이상학은 자신의 본성상 좁은 의미의 존재론이자 신학이다."WM 19)
형이상학의 이같은 이해는 형이상학이 존재자의 존재를, 가장 일반적인 존재자로서이든, 최고 존재자로서이든, 근거지우는 근거로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형이상학은 근거지움의 표상의 방식으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사유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으로서) 철학에겐 그 시작에서부터 존재자의 존재는 근거로서 보여졌다."(Das ende der Philosophie und die Aufgabe in Zur des Sache des Denkens, 62)
아울러 존재를 존재근거로 이해하고, 존재근거를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로 설명하는 형이상학은, 그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설사 초월적으로 존재하더라도 존재하는 어떤 것인 한, 존재자의 존재를 또 다른 존재자로부터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곧 존재와 존재자를 혼동하는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를 그 자체로서 묻고 있지도 않다. 적어도 이 존재자 전체엔 존재자의 일반적 특성으로서이든, 최고 존재자로서이든,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빠져 있다.
2) 하이데거의 비은폐(알레테이아), 진리는 무엇보다도 은폐와 어둠으로부터 비은폐와 밝음에로의 열어밝혀지는 일어남, 사건, 말하자면 동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3)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이란 무엇인가'에서 불안속에서 출현하는 이 '왜'의 물음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불안속에서 존재라 전체는 지금까지의 친숙함으로부터 무차별함에로 밀려나간다(물러난다, 미끄러져 나간다)(무화, Nichts). 그 밀려나감에서, 밀려나가는 존재자 전체와 "함께 동시에(in eins mit)"(WM 34) "아무 것도 아님(Keim)", "무(Das Nichts)"(WM 32)가 우리에게 머물며 닥친다. "불안이 무를 드러낸다."(같은 곳) 이러한 무화에서, 무의 드러남에서 존재자는 "이제까지 가려져 있던 완전한 낯설음에서 - 무에 대한 -단적인 타자로서."(WM 34) 무가 아니고 오히려 존재하는 존재자로서 드러난다." "모든 경이 가운데 경이인 존재자가 존재한다(Dass Seiendes ist)"(WM 46/47)가, 존재자의 존재가, (불안의 근거위에서) 무안에 들어서서 무를 견디는(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초월해 있는) 우리들 자신에게로 비은폐되는 것이다(열어밝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가 아님으로서 "무는 존재로서 본재하며"(WM 45) "존재의 면사포(WM 51)이다. ) 이와함께 "왜"의 물음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왜 오히려 무가 아니고 도대체 존재자인가?'
4) 그러나 형이상학이 존재를 떠올리며 존재자를 존재에서 물으면서(달리 말하면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에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구하는 한, 다시 말해 존재의 열어밝혀짐에서(때문에)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표상하는 한, 존재자가 아님으로서의 존재, 존재 자신인 열어밝혀짐, 진리로서의 존재는 형이상학의 본질유래를 이룬다. 그러기에 형이상학이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표상하면서 존재의 진리를 잊고 있는 것은 자신의 본질유래를 등지는 것이다.
형이상학이 그렇게 존재의 진리(열어밝혀짐) 덕분에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표상할 수 있음에도 정작 존재 자신은 사유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를 비은폐, 진리에서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표상하는 가운데 이미 존재를 떠올리고 있다. 그렇지만 존재 자신은 말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존재를 그 진리에서 사유하지 못했고, 그 진리를 비은폐로서 그리고 이 은폐를 본질에 있어 사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WM10)"
5) 여기서 존재와 사유, 존재와 인간의 관련에 대한 언급들은, 그 관련이 어떤 관점에서(예컨대 실존분석의 관점에서 또는 존재사유의 관점에서), 어떻게 사실부합적으로 더 자세하게 기술되든 그에 상관없이 타당하게 될 수 있기를 의도하며 표현된 것들이다.
6) 그래서 하이데거에겐 존재 사유는, 그 안에서, 그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본질, 인간성에로 이르게 되는 것이며, 휴머니즘이 인간의 본질을 본질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휴머니즘이다(참조, Uber den Humanismus 10,31 이하 UH로 약함)
7) 존재와 사유, 존재와 인간에서 '와(und)'는 두 연관항을 단순히 부가적으로 접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에겐 "이 '와'에 이제까지의 철학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사유의 사유거리가 간직돼 있다."(참조 Kants These uber das Sein 477 이하 KT로 약함). 하이데거는 니체의 '동일자의 영원한 반복' 사상과 '초인' 사상을 존재자의 존재와 인간 본질의 연관으로 해석하는 'Was heisst Denken?'의 1부(74)에서는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유의 길도, 형이상학적 사유의 길도, 인간 본질로부터 출발해 존재에로 넘어가지 못하며 그 반대로 존재에서 인간에로 되돌아오지도 못한다. 오히려 사유의 모든 길은 언제나 이미 존재와 인간 본질의 관련 전체안으로 나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유가 아니다."
8) 하이데거는 ID(20)에서 "뛰어내림"에 대해 얘기한다. 이때 뛰어내림의 '어디로부터'는 모든 존재를 존재자를 존재자로 근거짓는 근거로 여기는 표상함과 그렇게 표상된 근거로서의 존재이며 '어디에로'는 존재와 인간의 관련이다. 이때의 존재와 인간의 관련은 존재가 인간의 본질이 깃든 존재사유에서 자신을 열어밝히므로써 그 존재사유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함의 관련으로, 나아가 함께 속함의 의미에서 둘은 동일하다는 관련으로 보다 사실부합적으로 사유되고 있다.
9) 이와 관련하여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볼만하다. "머물며, 그 머뭄에서 인간을 기다리는 존재의 도래를 끊임없이 언어에로 가져가는 것이 유일한 사유의 사실이다. 그 때문에 본질적인 사상가는 언제나 동일한 것(das Selbe)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꼭같은 것(das Gleiche)을 가리키지 않는다... 사유는, 역사적으로 사유하면서(andenkend), 존재의 역운(das Geschick)에 유의함으로써 그 자신 이미 역운에 따르는 역운적인 것에 매어있다. 꼭같은 것에로 달아나는 것은 전혀 위험한 일이 아니다. 동일한 것을 말하기 위해 불화를 감행하는 것이 위험하다."(UH 47)
10) 하이데거는 'Die Grundprobleme der Phanomenologie'(이하 GP로 약함)와 'Kants These das uber Sein'(in Holzwege)에서 칸트의 존재테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Kants These das uber Sein'를 참조하면서, 'Sein und Zeit'이 발표되던 1927년 마부르크 대학에서 행해진 같은 제목의 강의의 강의록인 'Die Grundprobleme der Phanomenologie'를 주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11) 하인리히 오트는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이 존재가 자신을 열어밝히는 존재 사유를 사유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사유'라고 특징짓는다(참조 Heinrich Ott Denken und Sein, der Weg Martin Heideggers und der Weg der Theologie 김광식 옮김(서울: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그런데 하이데거는 또 칸트의 존재 설명을 그 '사유의 사유'란 말로 성격 규정한다 (참조 KT 475). 참조 뒤의 주 20)
12) 여기서 존재이해, 존재진리, 존재의미는, 존재이해와 존재의미(이해지평)가 존재가 열어 밝혀지는 존재진리의 장소라는 점에서, 장소에서 동일하다. 하이데거는 Was ist Metaphysik?(18)에서 존재의미와 존재진리는 동일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13) 그러나 하이데거에겐 먼저 존재자 가운데 왜 유독 인간 현존재가 존재이해를 존재방식으로 하는 존재자(실존)인가, 다시 말하면 존재진리의 장소인가가 밝혀져야 한다. 실존론적 분석을 통해 그것이 밝혀진다면 그에겐 존재물음을 위한 '기초(Fundament)'가 확보된 것이다. 그래서 실존론적 분석을 통해 "현존재의 존재규정들을 끌어내는"'기초존재론'은 "존재물 음의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길로 남는다."(SZ 436)
그러나 존재물음의 '기초'를 구하는 기초존재론이, 무엇보다도 그 명칭을 단서로 해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로써 존재자의 존재를 근거짓는 형이상학과,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자리에 이번에는 인간 현존재가 들어서게 됐다는 식으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미 밝힌대로, 인간 현존재를 존재 진리의 장소로서 밝히는 존재물음과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로서 존재자의 존재를 근거짓는 형이상학의 존재물음은 같은 영역에서의 물음이 아니다. 오히려 두 물음 사이에는 (물론 형이상학의 물음으로부터 존재 진리에 대한 물음에로 뛰어내려야 하는) '가파름'이 놓여 있다. "형이상학의 근거에로 소급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진리에 대한 사유는 그 첫 발자국에서부터 이미 모든 존재론의 영역을 떠나는 것이다."(WM 21)
뿐만 아니라 현상학적 바라봄의 도움으로 존재물음과 관련한 존재 진리의 장소로서의 인간 현존재의 특출함으로 제시하는 것은 근거정립의 입증과는 구별된다.
14) 이같은 방식이 현상학적 분석의 '현상학적'이 의미하는 바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분 석'은, 그의 현상 개념에 부합되게 말하면, 일상적으로 내보여진 것, 전승된 것들을, 우선은 그리고 대개는 자신을 내보이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들의 '지평', '근거', '의미'를 이루고 있는 것에로 자유롭게 내주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이데거는 'Sein und Zeit'에서 현상학이 제시해야 할 '특출한 의미의 현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분명 "우선은 그리고 대개는 자신을 내보이고 있지 않지만, 우선 대개 자신을 내보이는 것에 비하면 감춰져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우선 대개는 자신을 내보이는 것에 본질적으로 속하면서 그것들의 의미와 근거를 이루는 것이다".(SZ 35)
15)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비판이전기에 속하는 '신 존재 증명의 유일 하게 가능한 입증근거'에서도 동일한 의미의 존재테제를 제시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한결같이 존재론적 신 증명을 다루면서,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을 반박하면서 존재 테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존재 테제 중 '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는 부정적 문장은 직접적으로 존재론적 신 증명의 핵심을 겨누고 있다. 신은 완전한 존재자라는 개념으로부터 신의 실존을 끌어내는 존재론적 증명에서 그 타당함의 관건은 실존이 '지선하다', '전능하다' 등과 함께 신의 개념에 속하는 술어(규정)라는데 있다.
16) 칸트에게서 현존(Dasein), 현실성(현실적으로 있음, Wirklichkeit), 실존(Existenz)은 한결같이 가장 폭넓은 의미에서의 자연사물의 존재방식을 가리킨다. 반면 하이데거는 그러한 존재방식을 눈앞에 있음(Vorhandensein)이라고 부르는 한편, Dasein(현존재)은 우리들 인간을, Existenz(실존)는 그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데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칸트의 Dasein은, 이러한 용어상의 차이를 고려해, 현존으로 구별해 옮겼지만, Existenz에 대해서는 구별없이 실존이라고 했다.
17) 그러나 실존의 관점에서 보면 두 백묵에겐 가장 심각한 차이가 있다. 한쪽의 백묵은 눈앞에 실존하는 반면, 다른 한쪽의 가능존재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둘의 차이는 한쪽은 있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없다(곧 무이다)는, 존재와 무의 차이다.
18) 하이데거는 실제적 술어를 존재적 술어라고 부르는 한편, 현실적으로 있음은, 대상, 해당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밖의 다른 존재방식(양상)들인 가능성(가능적으로 있음), 필연성(필연적으로 있음)과 함께 존재론적, 혹은 초월론적 술어라고 부른다.(참조 KT 467)
19) 여기서는 존재 일반과 존재의 한 방식 혹은 양상으로서의 현존, 실존이 구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의 현존 증명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존재 테제와 그 설명에서는 현존, 실존으로서의 존재가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있다.
인용문 중 사물(Ding)은 그 자체의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대상, 객관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참조. KT 452)
20) 하이데거는 연계사 ist의 정립에 대해 칸트가 존재의 논리적 사용이라고 부른 것과 대조적으로 대상 자신을 정립하는, 절대적 정립으로서의 현존에 대해서는 존재의 '존재적 사용', '대상적 사용'이라고 칭한다.(참조, KT 454) 이 글이 주도적으로 다루는 것은 절대적 정립으로서의 존재, 곧 현존, 눈앞에 있음, 현실성, 실존으로서의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대상적 사용이 문제이다.
21) 칸트는 실존, 실존으로서의 존재는 사물의 실제성(Realitat), 본질에 속하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라고 하므로써 실존과 본질을 구별하고 있으며, 그와 같이 본질로부터 구별되는 실존을 적극적으로는 사물과 인식 주체와의 연관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칸트의 존재 설명의 존재론적 성격은 본질과 실존에 대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입장과의 대비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파악된다. 본질과 실존과 관련한 스콜라 철학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견해가 대표적이다.
먼저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학파는 한 현실적인(곧 실존하게 된) 존재자에서 본질과 실존은 실제적으로 구별된다고 말한다(한 사물은 두 실제적인 것, 본질과 실존의 복합이란 주장이다). 여기서는 실존이 한 존재자의 무엇임, 실제성,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에 따라 말하면, 실제성에 속하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라, 본질에 덧붙여지는 실제적인 어떤 것, res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 따르면, 실제성, 본질에 속하지 않는 어떤 것, 곧 본질과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실존은 본질로부터이든 아니면 그 밖의 다른 것으로부터 원인지워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 유한한(본질과 실존의 합인) 사물들에 있어서는 본질의 어떤 규정도 무가 아닌 자기의 실존을 충족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무엇보다도 본질은 가능 존재이고 그래서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무이다. 그리고 무에서 나올 수 있는 있는 것은 무밖에 없다. 따라서 피조된 사물의 있음(실존)의 원인은 본질의 질서 밖에서 구해져야 한다. 그러나 신의 경우는 그의 본질이 실존이다). 실존은 곧 본질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원인지워지는, 본질과는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이같은 토미스트들의 본질과 실존의 실제적 구별은 나중에, 본질과 실존이 구별됨으로써 실존의 원인인 신과 그의 창조가, 또한 사멸해야 하는 피조물,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성이 설명될 수 있다는 데서, 옹호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같은 토미스트의 입장은 실존이 실제적 술어가 아니라고, 곧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부정적으로는 칸트의 존재 설명과 동일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실 존을 본질에 덧붙여지는 어떤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실존을 사물의 인식능력(이제 밝혀지겠지만, 지각)과의 연관으로 해석하는 칸트와 구별되고 있다.
본질과 실존의 구별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스코투스(Duns Scotus)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스코투스는 한 피조물의 현실성, 실존은 본질과 구별되지만, 실제적인 어떤 것으로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라고(곧 둘의 구별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실존하는 것은 그 본질, 본성의 양상으로서 본질과 실존의 차이는 양상의 차이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때 본질의 양상으로서 실존은 오성의 활동, 칸트식으로 말하면, 사물과 개념, 인식능력과의 연관의 근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물에 속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아레즈는 한 피조된 존재자에 있어서 본질과 실존의 차이는 단지 개념의 차이, 이성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현실적인(실존하게 된) 존재자에서 그것의 본질과 실존은 구별되지 않으며, 다만 추상적인 방식으로 이미 현실화된 본질을 떼내 가능존재로 사유하고, 그 가능존재로서의 본질과 실존의 차이를 사유할 수 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실존은 본질의 현실화에 있어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는다(곧 실존은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존이 본질에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고 그래서 가능존재로서의 본질과 현실화된 본질, 곧 현실적인 존재자 사이엔 어떤 실제적 차이도 없다고 함으로써 수아레즈는 칸트와 부정적인 규정에서는 일치하고 있지만, 그 역시 적극적인 규정에서는 실존을, 물론 본질과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것으로서는 아니지만, 실존하는 사물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실존을 사물의 인식능력과의 연관으로 해석하는 칸트의 존재 설명과 구별된다.
본질과 실존의 구별에 대한 스콜라 철학의 세 입장과 칸트의 그것과의 비교에서 그 규정들의 같고 다름보다 결정적인 것은 스콜라 철학의 본질과 실존에 대한 물음이 현실화, 창조라는 현상에, 존재(실존)의 원인을 묻는 '왜'의 물음에 방향잡혀 있는 것에 비해 칸트의 존재 (실존으로서의 존재) 설명은 그와 같은 인과적인 물음에서 풀려나, 혹은 '뛰어내려' 인식주체, \인간과의 관련에서, 그 관련의 장소(Ort)에서 실존으로서의 존재를 토의(Erorterung)한다는 존재 물음의 방향에서의 선회이다.(참조 GP 128-139)
22) 이처럼 존재를 인식능력(경험적 판단력, 그러한 것으로서의 사유)의 관계를 표현하는 정립으로 보는 칸트의 존재토의를 하이데거는 하인리히 오트가 자신의 존재물음을 규정한 바 있는 '사유의 사유'란 말로 성격 규정한다(참조, KT 475). 이 명칭은 무엇보다도 존재를 그것의 알려짐(진리)에서, 곧 인간과의 관련에서 토의한다는 존재물음의 성격과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23) 그래서 하이데거는 지각돼 있음은 지각된 것의 존재(눈앞에 있음)에로 이르는 "접근통로"의 구실을 해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참조, GP 95). 실제로 지각돼 있음은 칸트의 존재 설명을 궁극적으로 해석하는 단계에서 그같은 해석을 푸는 실마리가 돼 준다.
24)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방법의 준칙'을 이렇게 설명한다. "현상의 모호함에 지레 물러서 거나 현상에 낯선 거친 이론의 폭력적 행사를 통해 모호함을 제거해버리지 않고 오히려 모호함 자체를 고조시킬 때 모호한 사실 자체로부터 그것의 해결을 위한 지침이 솟아나온다."(참조 GP 97)
25) 하이데거는 칸트 자신이 현존을 지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와같은 지각의 본질, 곧 -에로 향해 있음의 지향적 구조를, 비록 고유하게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때 하이데거는 칸트가 지각을 설명하면서 'hinreichen(미치다)'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칸트는) 한번은 지각은 어디에로 미치고 있으며(hinreichen), 지각이 미치는 곳에서 현실적인 것, 눈앞에 있는 것과 만나게 된다(Kritik B 273)고 말한다."하이데거는 여기서의 hinreichen(미치다, 이르다)란 표현에서 -에로 향해있음이란 지향적 성격을 보고 있다. "지각은 본성상 어떤 식으로든지 미치고(reicht), -에로 내뻗치고(ausgreift nach), 곧 향해 있을(sich richter auf) 때, 일정한 유효범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참조 GP 94)
26) 어떻게 주체의 지향성이 자기 바깥으로 나가 현실적인 존재자와 관계맺는가, 달리 말해 주체와 객체사이의, 그러면서 양자가 속해 있는 지향적 향해 있음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시간의 본질, 탈자적-지평적 시간과 관련돼 있다. 하이데거에겐 근워적인 시간성으로서의 탈자적-지평적 시간이 지향적 관계맺음의 구조인 지향적 향해 있음의 가능성을 이룬다. 'Die Grundprobleme der Phanomenilogie'의 1부에서 칸트의 존재 테제를 해명하면서 주체의 한 관계맺음인 지각의 본질, 가능근거를 지향적인 향해 있음으로 제시한 하이데거는 같은 책 2부에서는 다시금 지향적인 향해 있음의 가능근거를 탈자적이며 지평적인 시간에서 구하고 있다(철저한 근원으로의 소급). "지각은 지각함 지각된 것, 지각돼 있음의 지향적 구조 전체에서 시간성이란 탈자적-지평적 구성틀에 근거한다. 이는 다른 지향적 관계맺음들도 마찬가지다."(GP 447) 하지만 여기서는 지향적 나가 있음에서 다시금 그것의 근거에로 소급하는 '근거구하기'는 논의에서 제외된다. 이것은 더 이상 시간성을 존재 진리에서 다시 소급해 들어가야 할 '근거'와 같은 것으로는 사유하지 않는 하이데거 사상의 흐름과도 부합되는 일이다.
27) 백묵의 예는 'Einleitung in die Metaphysik"(34)에서 따온 것이다. 같은 곳에서 하이데거는 백묵의 예에 이어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존재자를 도처에서 만난다. 그것들은 우리들을 에워싸고, 지탱하고, 억누르고, 매혹하고 충족시키고, 고무시키고, 실망시킨다. 그 모든 것들에서 그것의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28) 여기서 하이데거는 지각된 존재자의 존재의 열어밝혀짐이 그 존재자의 지각돼 있음의 '근거'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자의 발견됨 (Enecktheit, 존재자의 진리)이 가능하기 위해선 존재의 열어밝혀짐(Erschlossenheit, 존재의 진리)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존재자의 발견됨으로서의 존재자의 진리엔 그것의 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인 존재의 진리가 그에 앞서 놓여 있다는 존재이해를 확증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여기서 충분히 드러나는 것은 존재자를 발견하는(존재자와 관계맺는) 지향적 관계맺음은 그 존재자의 존재가 열어밝혀지는 지향적 향해 있음에서 가능한 것이기에, 존재자의 진리와 존재의 진리 나아가 두 진리가 각각 적중하는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가 연관이 어떤 식으로든 지향적 향해 있음과 관련돼 있으리라는 점이다.
29) 이와 같이 우선 대개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현상적 실마리는 자신의 구조, 본질을 소급 지시하는 통로 또는 기반이 되는 한편, 그 우선 대개는 자신을 내보이지 않고 있는 그 구조, 본질은 언제나 이미 그 현상적 기반에 앞서 높여 그것을 가능케 하고 있다는 것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방법에서 특징적이다. 참조 앞의 주13). 이렇게 우선 자신을 내보이는 것, '사유된 것'에서 그것의 '사유돼야 할' 의미, 구조에 이르는 현상학적 방법은 이밖에도 지각의 다의적 의미에서 지각의 구조에로 이르는 곳에서도 발견되며, 무엇보다도 명시적으로 사유된, 전승된 칸트의 존재 테제와 그 설명에서 그것의 의미를 밖으로 끌어내는 하이데거의 해석 자체가 그같은 현상학적 방법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30) 또한 여기서 '이미', '앞서', '미리' 등의 표현 역시 시간상의 우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눈앞에 있음, 현존)의 열어밝혀짐, 존재이해는 지각하는 관계맺음의 구조, 본질, 자체에 속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각은 지각인 한에 있어서 언제나 이미 지향적인 향해 있음이며, 그 지향적 향해 있음안에 눈앞에 있는 것의 존재가 이해돼 있다는 것이다.
31) 'Sein und Zeit'이후 하이데거의 존재진리에 대한 사유속에서 등장하는 존재의 진리에 '나가 서있고(ausstehen)', '머물고(verweilen)', '귀기울이고 따르고(gehoren)', '간수하고 지키 고(bergen, ver_ ; wahren, auf-, be_, ver_; huten, be_), '놓지 않고 견디는(aushalten)'...등은 눈앞에서 일어나는(생기하는) 존재의 진리를 그 사실에 부합되게 언어에로 옮긴 표현들로서 어쨌든 여기엔 존재 진리에 대한 인간의 탈자적인 응대가 동일한 의미로 꿰뚫고 있다.
32) 하이데거가 'Es gibt Sein'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우선은 존재자처럼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진리로서 '있는' 존재에 대해 통상 존재자에 대해 말해지는 'ist'란 표현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중에 'Es gibt Sein'은 존재 진리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얘기한다.
33) '다만 현존재가 있는 한 존재가 '있다''는 존재는 인간의 산물이다는 식으로 현존재를 존 재의 근거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Uber den Humanismus'에서 자신의 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말이 의하는 것은 존재의 밝게 비침이 일어나는 한, 존재는 인간에게 자신을 내맡긴다는 뜻이다."(UH 24) 곧 존재 자신이 인간의 의지와 결단에 상관없이 자신을 사유하도록 존재 사유를 불러세우고, 자신의 진리를 지키도록 지시하고, 인간의 탈자적인 본질의 응대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존재가 자신의 진리를 위해 그 진리의 장소로서 탈자적 존재자, 현존재의 응대를 사용하는 한(혹은 필요로 하는 한), 여전히 '다만 현존재가 있는 한 존재는 있다'는 타당하다. 이같은 존재 진리와 인간 본질의 관련에 관해서는 보다 사실부합적인 논의가 따라야겠지만, 여기서의 언급으로도 존재와 인간이, 존재 자신은 자신을 열어밝히기 위해 인간의 탈자적 본질을, 인간의 편에서는 존재를 사유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 서로를 절박하게 필요로 함, 서로에게 함께 속함이 어느 정도 감지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