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논문 자료들.

[ㅍ] 침묵

온울에 2008. 5. 7. 10:18

목 차

예비진술
본론
1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2니체(Nietzsche)
3하이데거(Heidegger)
4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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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지명 인문학연구 
권 1 
호 1 
출판일 1996. 10.  




침묵(Das Schweigen)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그리고 비트겜슈타인에서의 침묵 개념에 대한 철학적 진술 1))


Das Schweigen


볼파르트(G.Wohlfart),부퍼탈
구연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반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2-397-9601-05
pp.176-198

본 논문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초청 강연회(1996. 5. 9)에서 발표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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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진술
침묵에 관해 말하는 자는, 쿠오-안의 잘 알려진 황소 그림들 에 대한 치-위안의 머리말에서 말해지고 있는 현명한 거북처 럼, 즉 자신의 흔적을 자신의 꼬리로 지워 버리려 하지만, 그러 나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된다.2)

철학자나 책속의 스승 또는 대화의 스승은 지혜로운 거북과 닮았고, 선의 스승은,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이리 저리 헤엄쳐 다니는 물새와 같다.

이미 석가모니 - 모니는 중국어로 야쿠 모쿠를 뜻하며, 야쿠 는 조용함을, 모쿠는 침묵을 뜻한다.3) - 가 고요한 침묵 가운데 '꽃을 통해' 말했던 것처럼4) , 선사는 입으로써 설법하지 않는다.5) 코도 사와키는 "쇼도카"에 대한 주석에서, "우리는 침묵함으로써 말한다"고 말하고 있다.6) 일본 문화에 그토록 깊은 영향을 끼쳤던 선 문화는 침묵의 문화이다.7) "...선의 수업을 받는 자는 말을 아껴야만 한다... 침묵이 금이라고 한다면, 요즘 은 단지 너무 많은 은조각들만이 유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8)

그러나 나는 방금 언급된 선의 침묵에는 문외한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여기 한국에서는 그것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기로 하겠다. 선을 한국에로 가져 가는 것은 흡사 [지혜의 상징인] '올빼미를 아테네로 가져 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대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즉 유럽 철학, 특히 독일 철 학에서의 침묵에서의 침묵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독일 철학은 이미 잘 알 려진 바대로 - 이미 독일 '철학'이라는 그 이름이 말해 주는 것처럼 - 옛날부터 그리스 사유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아 왔 고, 또 독일 철학이 이른바 신플라톤주의 아래로 그리스도교적 사유와 합쳐졌던 곳에서조차도 그 영향은 지속돼 왔다. 그런데 철학의 위대한 첫걸음 이래로, 언어에 대한 최초의 사유와 헤 라클레이토스에게서 고요한 침묵이 우세를 떨치지 않았던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처음부터 침묵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현명한 것이라는 통찰이 거기에 있었 던가?9) 테미스토클레스는,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진 에베소서 사람들이 언젠가 한번, 페르시아 사람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던 도시에서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조언을 받았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그들 모두가 그리로 모여 들었을 때,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보 릿가루를 들고 와 그것을 물에 섞어 그들 한가운데 앉아 먹었 는데, 이것이 바로 고요한 침묵으로써 대중을 가르친 것이었 다."10) 시의 언어에서처럼, 로고스에 대한 위대한 사유가 헤라 클레이토스에게서 또한, 그가 '말하지 않은'을 통해 말하는 바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단편들에는 부분적 으로 시적 요소들이 들어 있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헤 라클레이토스 단편 B93은, 언어 철학의 근본-명제로서는 아닐 지라도 의미론이나 어의학의 근본-명제로서는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편은 - 비록 언어로써 명시적으로 명명하고 있진 않지만 - 아폴로 신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신은 말하지도,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고, 오히려 뜻한다. 즉 기호를 준다. 신의 알림은 단순히 언어적인 것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지 숨겨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의미론적이다. 아폴로는 - 이야기하지 않 음으로 이야기함으로써 - 기호, 즉 눈짓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까지 이르는 유럽 철학의 역사에서 언제나 거듭 부딪혀 온 [서양] 사유의 길의 시작 부 분에 서 있을지라도, 그와 같은 점[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의 침 묵]은 아쉽게도 시간 관계상 더 자세히 파고들 수가 없다. 물 론 방금 언급된 사유의 길은 그렇게 잘 알려진 길도, 또 계산 하는 사유라는 다른 길처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도 아니 다. 사람들은 흔히 이러한 계산적 사유, 로곤 디도나이란 의미 의 로고스, 계산함 등을 전적으로 유럽적 사유의 길로 간주하 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제 오늘날 사유와 침묵이 서로 만나는, 다른 철학자 들에게는 아마도 접근하기 어려운 사유의 길을 가리켜 주었던 네 명의 철학자에만 한정하여 서술할 것이다.

먼저 두 명의 이른바 실존 사유가, 키에르케고르와 니체가 있다. 이 둘의 사유는 , 만일 내가 옳게 복 있다면, 단지 기독 교상의 문제에서만 대립될 뿐, 좀더 깊게 살펴보면, 이제껏 거 의 간과되어 버린 접촉점, 즉 침묵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만나고 있다.

다음에 금세기 유럽 사유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두 명의 철학자,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이들 역시 그들 사상의 전체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되지만, 그러나 그 둘 또한, 그들이 침묵에 대해 사유한다는 점에서 결 정적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본 논문의 목표는 - 주의깊게 말한다면 - (키에르케 고르와 니체 사이의 또는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화 해 시도가 아니다. 이러한 시도는 어떤 관점에서는 아마도 가 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는 거듭해서 실패하 고 만다. 여기서 나는 차라리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한 구 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마"를 취하도록 하겠다.

본 논문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언어적 전회' 이래 철학의 오랜 임무로서의 사유에 대한 사유가 광범위하게 언어에 대한 사유로 바뀌었다면, 그리고 이러한 언어 사유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두 사유가가 동시에 우리시대의 가장 위대한 언어 사유가라는 사실에서 알려질 수 있다면, 바로 언어에 대한 하 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그들이 걸어갔던 그 길의 정 점에서 침묵에 대한 사유로서 드러난다.

나는 이제 이러한 점들을 분명히 하고자 할 것이다. 우선 종 교적 저술가 키에르케고르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본론
1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근대 철학에서 침묵에 대해 사유했던 사상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의 하나는 키에르케고르(S.Kierkegaard)이다. [그의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낱말은 1849년의 글에 나오는 '고요함'(Stillesein)이다.11) 마태복음 6장에서부터 출발하여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스승 백합 과 새에게서 고요히 있는 법과 침묵하는 법을 배우자. 왜냐하면 동물에 비해, 따라서 백합에 비해서는 훨씬 더 인간의 탁월 함을 보여 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할 수 있음이 어떤 우우러함이라는 사실로부터 침묵할 수 있는 기술이 없을 것 이라거나 또는 이 기술이 하찮은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이다. 인간이 말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 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침묵할 수 있음은 위대한 기술인 것이다."12) 자연의 침묵 속에서 신성의 소리를 알아 들으려 하는 시인은 다음과 같이, 즉 "말은 인간이 동물에 비해 우월한 점 이다. 그러난 물론 인간이 침묵할 수 있는 한에서이다."고 말한다.13) 키에르케고르에 따르자면, 고요함은 "신에 대한 경외의 시작"14) 이다. "그리하여 어떤 점에서는, 우리가 행하여야만 하는 무가 있는가? 확실히 그렇다. 어떤 점에서는 무가 있다. 너 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너 자신을 무로 만들어야 하고, 신 앞에서 무가 되어야 하며, 침묵을 배워야만 한다. 고요함에서 최 초로 신의 왕국에 뜻을 두는 일이 시작된다."15) "침묵할 줄 아는 모든 인간은 신의 아들딸이 된다..."16) 기도 또한, 그것이 정당한 것인 한, 말함에서 침묵함과 들음으로 바뀐다.17) 모든 인간이 실제로 내면적으로 기도했다면, 그들은 무슨 일을 겪게 되었는가? 그들은 경이로운 어떤 것을 겪게 되었다. 인간이 점점 더 내면적으로 기도하게 되었다면, 그는 점점 더 적게 말해야만 했고, 결국 완전히 말문이 막히게 되었다. 인간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 그는 침묵보다도 더 높은 강도로 말과 대리되어 있다. 그는 듣는 이가 되었다. 인간은, '기도하는 것은 말하는 것이다.'를 의미했다. 인간은,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침묵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듣는 것임을 배웠다."18) '인간이 벙어리로 있을' 때19)그는 신의 요구에 응답한다. 인간이 침묵할 때 신자신은 말한다.20)신의 요구는 단지 순간 동안에만 알아 들을 수 있게 된다. '영원이 찍혀지는' 이러한 순간은 침묵 속에 있 다. "오, 사려깊은 스승은 얼마나 단순하던가! 사람들이 말을하고 있다면, 순간과 마 치는 일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침묵으로써만 "순간"과 마주친다. 사람들이 말을 하고있다면, 그것이 비록 단지 한 마디 말에 그친다할지라도, 그들 은 순간을 놓치고 말 것이다. 순간은 고요 속에서만 거기에 있다."21) 온전히 채워진 시간의 순간은 "떠들고 외침으로는" 오지 않고, "순간은 나지막하게, 어떤 피조물의 가장 빠른 걸음보 다 더 빠른 걸음걸이로 온다. 왜냐하면 순간은 갑작스러운 것의 빠른 걸음으로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의 삶에서, 인간이 순간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인간의 삶에서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이 언제나 단지 분리되어 있었을 뿐이라 는 것은 분명 불행이다. 왜 불행인가? 왜냐하면 인간들은 고요히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22)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처럼, 침묵에 대해 단지 얘기하는 대신, 침묵에 대해 진지해지는 것이다.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자는 침묵 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너는 백합과 새와 같이 신 앞에서고요해져야 한다." 너는, "새와 백합은 기꺼이 침묵해도 좋지 만, 그것들은 결코 말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만 한다. 너는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너는 결코 어떠한 것도 말해선 안 되며, 너는 추호도 침묵의 수업을 방해하려 해선 안 된다. 따라서 너는 침묵에 대해 진지해져야 하고, 너는 어리석고 무의미 하게도 침묵을 말 속으로, 그것도 아마 말의 대상으로서, 밀어넣어선 안 되며, 그렇게 하여 고요함에 대한 말이 튀어나오는 대산 고요함에 의해 무가 되어야만 한다. 너는 신 앞에서 결단코 한 송이 백합이나 한 마리의 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서 는 안 된다. 이 모든 일들은, 만일 신 앞에 있다는 것이 너에게진지함이 되고 진리가 된다면, 전적으로 저절로 되어질 것이 다.23)후기인 1851년도에 쓰여졌지만, 그러나 나에겐 1992년 현재에도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현대의 자기 반성을 위해 명령받은" 이란 글에서, 침묵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사유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너를 내버려 두어라!'를 연상케 하는 명령법으로 첨예화된다. "오, 사람들이현재의 세계 상활, 즉 전체적 삶을 고찰할 때 (사람들이 기독 교적으로 확실하게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 바를) 기독교적으로 말해야만 하는 한", 즉 "병이 놓여 있는" 한, 그리고 내 자 신의 의사라고 가정해서 누군가 내게 "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라고 물었다면,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번째 것, 즉 사람들이 어떤 것을 할 수 있기 위한 단적인 조건, 따라서 사람들이 행해야만 하는 첫 번째는 '침묵을 창조하라'는 이것이다..."24) 이러한 침묵은 이제 단순히 말의 끝인가? 아니면 말의 내부에서는 만날 수없고, 마치 말 밖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말의 타자인가? 침묵은 말의 '단순한 부정'일 뿐인가? 아니면 그것은 실제로 말속에'지양되어' 있을 수 있는가?25) 참된 침묵은 침묵하지 않은 채 침묵함이 아닌가? 키에르케고르의 말년의 일기 한 곳에서 그가 침묵의 깊숙한 비밀을 캐내고 있음이 보여진다. "침묵함(Schweigsamkeit) 속에 숨겨진 침묵하려 함은 의심스운 것이다. 즉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마치 무엇인가를 누설하는 것과도 같다. 적어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침묵하려 한다는 사실을 누설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수다 기질 속에는 침 묵의 성향이 숨겨져 있다. 이 기질은 맹세코 침묵함이다."26) 말에서 침묵할 때 - 정원에서 수다를 떤다.

2니체(Nietzsche)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2권 머리말을 다음과 같은 강령조의 말로 시작하고 있다. "사람들은, 침묵해선 안 될 때만 얘기해야 한다. 그리고 얘기할 때에도 단지 극복한 것에 관해서만 얘기해야 한다. - 다른 모든 것은 잡담이고, "참고 문 헌"이며, "예의 없음"이다.27) 니체를 따르자면, 우리들의 본래적 체험들은 결코 수다스럽지 않다. "우리는 이미 언어의 대상 들 밖으로 나가 있다. 얘기함에는 약간의 경멸이 놓여 있다."28) "가장 위대한 사건들, 그것들은 결코 우리들의 가장 시끄러운 시간들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고요한 시간들이다."29) 이와 상응하여 '자라투스트라' 제2부 "가장 고요한 시간" 부분에서는, "까치발로 찾아오는30) 가장 고요한 말들"이 세계를 조종한다는 점이 언급되고 있다. "의지의 주인"인 자의 말은, "그가 비록 ...말을 하긴 하지만, 침묵적"이다.31) 반면 시장의 장사꾼들에게서는, "모든 것이 얘기된다."32) 철학자들의 이러한 근거없는 잡담에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침묵을 배우는 것이고,33) "올바로 침묵하기" 위해 말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34)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질병이자 비결은, 나의 침묵이, 침묵함을 통해서는 자신을 알리지 않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35) 니체가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간주하는,36) 그리고 '침묵'이라는 우리들의 주제와 관련하여 핵심적 의의를 갖는 '짜라투스트라'의 "근본 개념" 내지 주요 사상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니체 후기 철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동일자의 영원 희귀(die ewige Widerkunft des Gleichen)에 관한 이론이다.37) 좁은 의미에서 보았을 때 이 이른이 처음으로 주제가 되는 곳은 '짜라투스트라' 제3부 "시각과 수수께끼에 관하여" 이다. 되돌아옴의 순간이 최초로 경험되는 때는 "가장 고요한 한밤중"이다.38) '치유된 자'의 결말 부분에서 영원 희귀라는 주요 사상이 다시 받아들여져 더욱 발전되며, 그때 짜라투스트라는 다시 '위대한 고요'에 휩싸이게 된다.39) 되돌아옴의 사상의 발전이 그 극에 달하는 곳이라 말할 수 있는40) '짜라투스트라' 제4부 '한낮'에서, '갑작스런 영원'의,41) 또는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42) '갑작스런 광휘'의 한낮의-순간 - 이 속에서 세계가 완성된다 - 은 고요의 순간 으로서 파아된다. '고요함'이라는 핵심 낱말이 '한낮'에서는 열세 번 나온다. 한낮의-고요는, 후기의 니체에 따르자면, "모 든 철학함의 본래적 목적"43) 이 존립하는 "신비적 직관"의 침묵이다. 내 자신 니체 사유의 근본 경험으로 생각하는 '갑작스런 광휘'의 순간이 '한낮'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서술되고 있 다. "오 행복! 오 행복! 내 영혼아, 너는 노래부르고 싶으냐? 너는 풀밭을 노니는 구나. 비밀스럽고 엄숙한 시간, 거기엔 피리 를 부는 어더한 양치기도 없구나. 두려워하라! 뜨거운 한낮은 들판 위에 잠잔다. 노래하지 마라! 조용! 세상은 완전무결하다. 노래하지 마라, 너 풀밭과 새, 오 나의 영혼아! 속삭이지도 말 아라! 보아라 - 고요히! 옛날의 한낮이 잠잔다. 한낮이 입을 움 직인다. 뜨거운 한낮은 한방울의 행복도 마시지 않는가? 오래 되어 갈색으로 퇴색된 황금빛 행복 한붕울도, 황금빛 포도주 한방울조차도. 황금빛 행복은 한낮을 그냥 스쳐 지날 뿐이다. 한낮의 행복이 웃는다. 그렇게 - 한 신이 웃는다. 조용!--."44) "행복을 위해선, 행복해지기 위해선 얼마나 불충분한가! 나는 옛날에 그렇게 말했고, 그리고 나를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그러 나 이제 나는 그것이 신성 모독이었음을 배웠다. 똑똑한 바보 들은 쉽게 말한다. 가장 적은 것, 가장 나즈막한 것, 가장 가벼 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단 한 번의 입김, 쏜살같음, 순간. 가장 좋은 행복은 말하지 않는다. 조용! 내게 무엇이 일어났는 지에 귀기울여라! 시간이 아마도 거기서부터 날아올랐던 것은 아닌가? 나는 떨어지지 않았는가?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귀기 울여라! 흑 영원의 샘물속으로 떨어진 것은 아닌가? 내게 무엇 이 일어나는가? 조용! 그것이 나의 심장을 - 아프게 - 찌르는 가? 나의 심장을! 오 부수어라, 부수어라, 심장을, 저 행복이 지 난 후에, 저 찌름이 지난 후에! 어떻게? 세계는 완전무결하게 되지 아낳았던가? 완전하고 다 익지 않았던가? 오 황금빛의 완전 한 바퀴를 가진 세상, 이 바퀴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그 바퀴 를 쫓아 뛰어라! 재빨리! - 조용 - - ."45)

3하이데거(Heidegger)
현대 철학에서 침묵에 대해 사유한 철학자 가운데 가장 중요 한 사상가는 하이데거이다. 침묵에  나 사상이 거의 그의 저 술 전체를 꿰뚫고 있다. 나는 짧게나마, 그것도 개략적으로 연 대기적 서술 방식을 통해 여러분들게 내게 중요했던 몇몇 구절 들을 알려줄 것이며, 그런 뒤 우리들의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언어에의 도상에'를 고찰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미 '존재와 시간'(1927) 34절에서 들음과 침묵 을 자세히 고찰하고 있다.46) 침묵은 "말의 본질적 가능성"으로서 제시된다.47) "그러나 침묵은 벙어리를 뜻하지 않는다... 결코 어떠한 것도 말하지 것도 말하지 않는 사람은 또한 주어진 순간에 침묵할 수도 없다. 침묵은 본디 참된 말 속에서만 가능하다."48) 하이데거에서 성스러운 침묵, 특히 종교에서의 신비적 침묵은 - 적어 도 이러한 제목하에서는 - 주제화되지 않으며, 예술에서의 침 묵도 '존재와 시간'에서는 아직 주제화되지 않고 있다. 하이데 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침묵하는 말의 예로서 가장 의미심장 하게 선택한 것은 양심이다. "양심은 오직 그리고 끊임없이 침 묵의 양태로만 말한다."49)

1929년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취임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 따 르자면, 사유는 "오랜 동안 보호된 언어 상실"(Sprachlosigkeit) 에서부터 말한다.50)

휘럴린의 송가 '라인강'에 대한 1934/35년의 강의에서는 간 결하게, "연어 그 자체의 근원은 침묵이다."51) 라고 말해진다.

이것은 1937년으 lslcp 강의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반복되고 있다. "최고의 말함, 즉 사유의 말함은, 본래적으로 말해야만 하는 것은 말함 속에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그것 이 말하지 않음 속에서 명명될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즉 사유의 말함은 침묵함이다. 이러한 말함은, 침묵을 자신의 근원으로 갖는 언어의 가장 깊은 본질에 상응한다. 침묵하는 자로서의 사유가는 자신의 양식과 방식으로 시인의 지위에 서 게 되지만, 그러나 그는 영원히, 시인이 사유가와 구분되듯이, 그렇게 시인과 구분된 채로 있다."52)

1936-38년 사이에 씌어졌지만 1989년에야 출간된 '철학에의 기여'는 하이데거의 대표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53) 이 책은, 한번쯤 사유해 볼 구절인 "언어는 침묵에 근거한다."54) 끝맺고있다. '존재 사건으로부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철학에의 기여'에서 하이데거는 다양한 방식으로 "침묵/고요함"이란 주 제를 다루고 있다. 내게 특히 의미있게 여겨지는 귀절은, "(존 재 사건으로서의) 존재(Seyn)"는 고요에서부터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는 귀절이다.55) "위대한 고요" 속에서 "사건은 진리"가 된다.56) "순간의 장소는, 사건이 진리가 되는 위대한 고 요의 고독함에서 발원한다."57) "현-존재의 모든 언어는 자신의 근원을" 위대한 고요로부터 "받으며,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것은 본질에 있어 침묵이다."58) 하이데거는 "사건으로서의 존재 그 자체를" 숙고하는 "시원적 사유"를 많이 인용되는 곳에 서, "암묵적이라고, 즉 그 가장 명시적 의미에서 침묵적이라고" 명명한다.59) "침묵함은 언어의 근원에서부터 발원한다."60) "침묵함은 철학의 '논리학'이다..."61) 이것에 뒤이어 다음의 널리 알려진 명제가 나온다. 즉 "따라서 논리학의 본질은 (...) 침묵 학(Sigetik)이다. 침묵학에서야 비로소 언어의 본질이 개념적으 로 파악된다."62)

하이데거가 언어의 사유 - 여기서의 소유격은 주격과 목저격 모두로 이해된다 -를 가장 광범위하게 개진시킨 곳은 1959년 '언어에의 도상에'라는 제목의 논문 및 강연 모음집이다. 하이 데거는 1959년의 강연 '언어'에서 언어의 본질을 "고요함의 울 림"63) 또는 "고요함의 외침"64) 으로 규정한다. 이에 상응하여 보다 이후에는 "고요함의 사건"65) 또는 "고요함의 강물"66) 등으로 말해진다. 하이데거의 언어 사유의 총체로서 간주될 수 있는67) 1959년의 논문 '언어에로의 길'에서 하이데거는 언어의 본질 전체를 한갓딘 발언과 구분하여 얘기(Sage)로서 규정한 다.68) "예기함과 말함은 같은 것이 아니다. 누구나 말할 수 있 고, 누구나 끝없이 말하지만, 그럼으로써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 반면 누군가는 침묵하고,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말하지 않 음으로써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다."69) "얘기는 가리킴이다",70) "말의 본질은 가리킴으로서의 얘기이다."71) "얘기는 발언으로 표현될 수 없다. 얘기는 우리로 하여금, 침묵에 관해 말하 게 한다."(같은 곳, 266) 그러나 "언어에 관한 일본인과 묻는 자 사이의 대화로부터"에는 다음과 같은 적절한 구절, 즉 "누 가 단순히 침묵에 관해 침묵할 수 있겠는가?"는 말이 나온다.72)

4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니체에 의해 존중된,73) 스탕달(Stendhals)의 "좋은 철학자이기 위해서는 무미건조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비트겐슈인의 철학에서는 좋은 의미를 갖는다.애매하게 사유하는, 즉 분명하지 않게 사유하는 많은 사람들도, 약간의 주의만 기울인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사진에서처럼, 초첨 부위의 뚜렷한 부분과 그 주변의 흐릿한 부분을 갖음을, 그리고 특정 신호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신기처럼, 뚜렷한 분리를 갖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때때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마"를 '철학적 탐구'의 구호로 간주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사유를 표현한 언어는 매우 인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마치 끊임없이 침묵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다. 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1921년에 출간된 그의 초기 저술 '논리 철학 논구' - 이 책은 '논리 형식에 관한 몇몇 언급' 외에 비트겐슈타인이 유일하게 출간한 것이다. - 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 같다. 우리는 1918년 6월에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친구 엥겔만(Engelmann)에게 보낸 편지의 한 문장, 즉 "모든 것이 뺨을 때리는 것과 같이 그렇게 분명하다면, 초월론적 잡담은 필요없다"는 말을 그의 구호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74)

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많은 언어 사유가 비트겜슈타인에 대해 약간의 언급만을 하고자 한다. 그의 언어 사유가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논고' 마지막에서의 침묵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이 책의 전체 의미는,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논고'에는 "철학은 논란이 될 수 있는, 자연 과학의 영역을 한계지워 준다."는 말이 나온다.75) "철학은 사유할 수 있는 것을 한정해야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유할 수 없는 것을 한정해야만 한다. 철학은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내부에서부터 한계지워야만 한다."76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서술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뜻하려 한다."77) "물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러한 것은 스스로를 내보이고 있다.그것은 신비적인 것이다."78) '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는 유명한 말과 더불어 끝난다. 이 마지막 구절의 의미를 "말할 수 없는 것에게 허리를 구부려 인사하는 것"79) 으로는 보지 않는 슈테니우스(E.Stenius)와는 반말로 주석하고 있다. 즉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우리들의 그것에 대해 침묵해야만 하는 바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80)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말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81) 1919년 픽커(L.v.Ficker)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논고'의 머리말에다 본디 써 넣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작품이 "여기에 쓰여진 것과 쓰여지지 못해던 모든 것"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 두 번째 부분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나의 책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 헛소리를 그것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확정했다."82)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경탄해 마지 않았던 울란트(Uhland)의 시에 대해 1919년 4월 9일자 엥겔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비록 아무것도 잃어 버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은 있다. - 말해질 수 없는 채 - 말해진 것속에 포함된 채!"83)

맺음말
이제껏 나는 키에르케로르, 니체, 하이데거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진술해 왔다. 이때 내가 보이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언어 사유에서 침묵이 결코 부록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 아니 오히려 언어에 대한 그들의 사유는 가장 내면에서 침묵에 대한 사유라는 사실이었다. 침묵은, 그것이 언어 '뒤에' 온다거나 아니면 언어를 '넘어' 간다는 의미에서의 '메타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침묵은 - '메타'라는 말의 근원적 의미에서 - ,바퀴통이 바퀴살의 한가운데 위치하듯, 언어의 한가운데 자리한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만일 누군가 침묵에서 단순히 말의 종말만을 볼 뿐 말의 완성은 더 이상 보지 않는다면, 그는 침묵을 철학적으로 축소시키는 자임을 보이는 것이었다. 말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근거에로 가라앉고 만다. 그러나 이때의 근거는 또한 말이 생겨나온 곳이기도 하다. 만일 사람들이 '침묵'에서 단지 침묵되어 버린 것만을 생각할 뿐 '침묵함을 통해 말하는 것'을 사유하지 못한다면, 하이데거 말대로, 사람들은 침묵을 올바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우리가 이미 위에서 언급된 사유가들에게서 본 바와 같이, 결코 말의 단순한 부정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 '지양된' 말이다. 이때 '지양된'이란 말은 이중의 의미, 즉 '부정되었지만 그러나 보존되어 있다'는 뜻을 갖는다. 그런 한에서 침묵은 말하는 침묵이다. 요점을 말한다면, 말하는 것으로서의 침묵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말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해지지 않은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말의 중지라는 부정적 의미에서 이해된 침묵이 아니라 고요에 대한 말을 듣는다거나 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어떤 탁월한 의미에서의 침묵은 시에서와 같이 말하는 침묵이다. 시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을 연상시키듯 말한다면, 말로 표현된 것 속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말할 수 없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가? 이 말할 수 없는 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은 채 말해져 있다. 위대한 시가 던지는 말은 지양된 고요이고, 이중적 의미를 갖는 소유격의 형태를 빌어 말하자면, 고요의 규정 내지 고요의 관통이다. 이때의 소유격이 주격일 경우, 그것은 고요가 관통한다는 것을 뜻하게 되고, 목적격일 경우, 고요를 관통한다는 뜻이 된다.

고요는 시적 언어의 기본음(Grundton)이다. 시적 언어는 고요에 응답하는 것이고, 고요를 통해 울려진 것이며, 서양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명인 휠던린이 말한 바와 같이, "고요히 울리는 것"84) 이다. 시에서의 낱말의 울림의 바탕에는 고요의 울림이 깔려 있다. 시는 고요로부터 말하고, 고요는 시로부터 말한다. 시의 언어는 맑은 울림이고, 시에로 굳어진 고요이다 시적인 표현에는 고요가 기억되어 있고, 시 속에서 우리는 고요를 깨닫게 된다. 시인은 침묵을 낱말에로 번역하고, 침 묵의 마디를 나누어 잇는다. 시인은 고요한 침묵의 친밀함을 낱말로 풀어낸다. 시의 낱말은 침묵을 밭잡는 손가락이며, 고요 를 담아 두는 그릇이다. 시인은 낱말 속에, 고요함 속에 머무른 다. 고요는 시인 속에서 떠오른다. 시인이 고요에 관해 무엇인 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는 말로 표현된 것 속에서 말로 표현 된 것을 단념해야만 한다. 시인이 노력해야 할 점은, 고요를 말 을 통해 붙잡는 것이고, 침묵을 낱말 속에 보전하는 것이며, 고 요의 친밀함을 낱말로 져나르는 것이다. 지극한 친밀함에 의해 붙잡혀진 침묵에서부터, 고요의 한가운데서, 말이 발원한다. 시 인은 말의 한가운데서 침묵을 견디어내며 정돈하려 노력한다. 시인의 노력은 사유가의 그것과 구별되지 않는가? 숙고함으로 서의 사유함은 그에게 문제되는 바 그것을 언제나 이미 넘어서 있지 않은가? 시인은 어떤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떤 것을 위해 말한다. 시인은, 이 어떤 것 자체가 말하게 되는 방식으 로, [시인 자신이] 고요히 침묵함으로써 이 어떤 것이 그 자신 을 위해 말하도록, 즉 자기 자신을 얘기하도록 말한다. 시인이 말한다면, 그는 언제나 낱말 속에, 침묵 속에 머무른다. 침묵이 시인의 말문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은 봄의 태양이 밝게 빛나는 것처럼 분명하다.

시인이 침묵한다면 그는 말해지지 않은 것 속에서 말해질 수 없는 것을 a라하려 하기 때문이다. 시지음에서는 - 우에다스 (S.Uedas)의 말로 표현하자면 - 다음의 이중적 분열이 일어난 다. 즉 "언어는 침묵으로 부서지고, 이 침묵은 다시 언어에로 가져와 진다."85) 선의 - 오랜 고전 '쇼도카'의 한 귀절, 즉 "네가 고요하면, 너는 말하고, 네가 말한다면, 너는 고요하다." 는 말이 시인에게도 타당할 것이다.

처음에 나는, 사유에 대한 사유로서의 철학이 언어에 대한 사유가 되었다고 말할 바 있다. 그러나 언어는 - 언어에 대한 위대한 사유가 빌헬름 폰 홈볼트가 말했던 것처럼 - , "그 절 차가 가장 심오하고 가장 설명불가능한 부분에서 예술을"86) 상기시키거나 또는 하만(Hamann)이 인간 생성의 모국어라 명명 했던 시를 상기시킨다.87)

결론적으로 나는 다음의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언어에 대한 사유로서의 철학은 근본에 있어 또한 우리를 침묵 속에서 언어 의 근원에로 이끌고 간 시의 언어에 대한 사유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그리고 비트겐슈타인 등에 대 한 본 논문이 이 물음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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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본 논문에서는, 최근의 '철학자 사전'에서 보이는, '침묵'이라는 표제어에 딸린 항목의 마지막 부분을 보다 확장해서 파악하는 것이 문제이다.
2)<황소와 목동>, 추지무라(K.Tsujimura)와 부흐너(H.Buchner)옮김, Pfullingen, 1988, 9쪽 참고.
3)카타기리(D.Katagiri), <고요에로의 회귀>, Zurich, 1988, 119쪽 참고
4)<무몬칸>의 6 코안 참고. "세상의 존경을 받는 자가 설법하기 위해 그르드라쿠타 산에 있었던 것보다 더 오래 전에 그는 청중 앞에서 꽃을 들어 보였다. 그 뜻을 아는 이가 없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단지 가섭 존자만이 웃기 시작했다." 쉬바야마(Z.Schibajama), <선의 근원에로>, M??nchen, 1986, 77쪽 재인용.
5)<수묵의 흔적>(Tuschspuren), 테트수오 로쉬 나가야 키이치, Zurich, 1989, 90쪽 참고.
6)사와키(K.Sawaki),<쇼도카에 대한 주석>, 선-합일, 스위스, Zurich, 1989, 21쪽, 참고.
7)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호버(Th.Hoover), <선의문화>, Koln, 1986. 그라프 폰 뒤르크하임(K.Graf v.Durkheim), <일본과 고요의 문화>, Bern, Munchen, Wien, 1986. 서양에 거주했던 최초의 린자이(Rinzai)-선사인 사사키(Sh.sasaki)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적 삶에서 추상적 예술에서부터 인간적 도덕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은 그 뿌리를 선에 두고 있다. 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일본사람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시게추 사사키 소케이만 로시, 소케안의 <선의 전승>, Zurich, 19??, 17.
8)니오겐 센자키 - 멕켄들레스(Ruth Strout McCandless), <물에서의 흔적없음>, Zurich, Munchen, 1992.74.
9)핀다르, Nem. Od. V, 18 참고.
10)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단편들, 딜스(H.Diels)옮김, 제1권, Berlin, 1924, 144쪽 참고.
11)키에르케고르(S.Kierkegaard), 전집 21.22.23. 소품 1948/49, Dusseldorf, Koln, 1960. 들에 핀 백합과 하늘을 나는 세 이야기, 이야기 1, 고요함, 전집 22.32-47절.
12)같은 책, 36.
13)같은 책, 39.
14)같은 책, 37과 45.
15)같은 책, 36.
16)키에르케고르, 전집, <일기> 제1권, Dusseldorf, Koln, 1962,289. 전집 1, '취사 선택' 절, 제1부 33과 4. '두려움과 떨림' 절, 98쪽 이하.
17)전집, 22. 37쪽 이하 참고.
18)같은 책, 37쪽 이하.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34절에서 어느 정도로 키에르케고르의 도움을 받고 있는지를 여기서 논구할 수는 없다.
19)같은 책, 40.
20)전집, <일기>, 제2권, 102.
21)같은 책, 40.
22)같은 책, 41.
23)같은 책, 43쪽 이하.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어떤 점에서는 '자체에서 전적으로 저절로 하게' 되는 것에 관해 말한다 이러한 점은 내게는, 신에 관한 얘기라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상이하긴 하다 해도, 선불교적 사유에 매우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24)전집, 27.28.29. 절, 84.
25)나는 키에르케고르에게, 내가 그의 용어를 그의 적대자 헤겔의 입으로 말하게 하는 것에 대해 관용을 구하고자 한다.
26)전집, <일기>, 제5권, 246.
27)니체(F.Nietsche), 전집, <비판적 연구서>(KSA), 제2권, 369.
28)KSA 6, 128. 이것은 플라톤의 제7서한에서의 개요를 상기시키지는 않는다. "한 낱말로써 인식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누군가의 글이 놓여있는 것을 본다면, 그에게 그것은 진지한 것이 아니다..." 344c. 먼저 플라톤은 널리 알려지게 된 문장들로, 그 노력하는 바 그것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배움의 대상들처럼 결코 낱말들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사태 자체에 대한 공동의 거듭된 노력에서부터 그리고 공동의 삶에서부터 - 튀어오르는 불꽃에 의해 불붙게 되는 불처럼 - 갑작스럽게 영혼 속에서 발생하여 그런 다음에는 저절로 계속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 342c/d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옮김.
29)KSA 4. 169.
30)같은 책, 189.
31)같은 책, 203.
32)같은 책, 233. KSA 10. 575(18[34]) 참고.
33)같은 책, 233. KSA 1, 663. 3쪽 이하, KSA 8, 224, 21쪽 이하.(11[34]). 또 KSA 9, 371 (7[258]) 참고.
34)KSA 11. 498. (34[232]). 또 KSA 7, 693. (29[142]) 그리고 707(29[186]) 참고.
35)KSA 4, 220.
36)KSA 6, 335.
37)1883년 2월 1일자 오버벡(Overbeck)에게 보낸 편지, KSA 6, 324.
38)KSA 4, 201.6. 같은 책, 9책 이하.
39)같은 책, 277.
40)여기서 나의 해석은 하이데거의 해석과 구별된다. 하이데거는 '한낮'을 니체의 가장 본질적 사상인 회귀 사상에 대한 해석에서 숙고하지 않는다. 하이데거 니체 I,Pfullingen, 1961, 265쪽 이하 참고. 나는 하이데거가 니체의 회귀 사상을 해설할 때 '짜라투스트라' 제3부 - '시각과 수수께끼에 관하여'와 '치유된 자' - 에서부터 출발하면서 왜 4부를 소홀히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41)KSA 14, 338.
42)KSA 1, 775.
43)KSA 11, 232(26[308]).
44)여기서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교의 신이 아니라 그리스의 신, 즉 아폴론적인 디오니소스(Dionysos)가 의미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45)KSA 4, 343이하.
46)하이데거(M.Heidegger), 존재와 시간, Tubingen, 1960, 161쪽 이하 참고.
47)같은 책, 164. 296.
48)같은 책, 164쪽 이하.
49)같은 책, 273. 같은 책, 277, 296 참고.
50)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Frankfurt, 1960 161쪽 이하참고.
51)하이데거 전집 39, Frankfurt, 1980, 218.
52)하이데거, <니체 I>, Pfullingen, 1961, 471쪽 이하.
53)하이데거, 전집 65, 511쪽 참고.
54)같은 책, 510.
55)같은 책, 23. 존재 사건으로서의 존재에 관해서는, 같은 책, 27, 30, 256, 258, 260, 318, 344, 470참고.
56)같은 책, 96.
57)같은 책, 323.
58)같은 책, 408.
59)같은 책, 58.
60)같은 책, 79.
61)같은 책, 78.
62)같은 책, 79. 여기서 하이데거가 어느 정도까지 프로클로스(Proklos)의 'De philo. chald. IV' - 여기에는 로고스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침묵이 로고스에 앞서야만 한다는 말이 나온다 - 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자세히 탐구할 수는 없다. 멘슁(G.Mensching), <성스러운 침묵>, Gieben,1926. '말과 침묵', '예언과 신비', 154 이하 참고. 나는 1922 - 1928년 마르부르그 대학 재임 당시의 하이데거가 자신의 동료 교수가 쓴 이 책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 아직껏 확신있게 확정할 수 없다. 또한 나는 여기서 "마지막 신의 스쳐 지나감의 고요"(같은 책, 294, 309 참고)에 관한 하이데거의 애매하고 예언적인 말에 대해 깊이 들어갈 수 없다.
63)하이데거, <언어에의 동상에>, Pfullingen, 1969,30.
64)같은 책, 32.
65)같은 책, 214.
66)같은 책, 255.
67)하이데거가 이 논문에서 가한 (특히 같은 책, 246이하 참고), 훔볼트에 대한 비판은, 나의 견해로는, 홈볼트를 부당하게 취급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느 정도까지 부당한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주제로 한 본논문의 한계상, 더 이상 논구할 수 없다. 사실상 위대한 언어 사유가인 홈볼트는 침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 졸고 <칸트 그리고 하이데거에서의 언어 문제>, 철학에 대한 조망(Perspektiven der philosophie), Neues Jahrbuch, 제9권, 1983, 81-93 참고. 그러나 우리는 -훔볼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말을 그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 - 하이데거의 "경악할 만한, 거의 통찰이 불가능한, 그 근본 개념들에서 어둡게 흔들리는, 그러나 어디서나 도전을 주는 논문"을 취해야만 하며, 그러나 - 다시 한번 훔볼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말을 그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 - 비록('언어에로의 길'의 첫부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하이데거 사유의 '경건성'의 신앙적 성격이 전회 후에도 하이데거의 예언적 파토스를 때때로 고통스럽게 건드리고 있긴 할지라도, 그가 훔볼트의 "언어의 본질에 대한 심원한 통찰에 경탄하고 있음"(같은 책268)도 놓쳐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가끔 가장 근본주의적인 튜튼의 철학(독일 철학)이 갖는 보다 많은 재치 (칸트의 언어에서 보이는, 감성적으로 반성된 판단력),보다 많은 멋, 가장 깊은 것을 피상적인 것에 숨기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심연에 빠져드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68)같은 책, 253. 이 점에 대해서는, 볼파르트의 <순간>, 철학 일반잡지, 2(1982), '로고스, 얘기 그리고 발언. 침묵,' 49-53 참고.
69)같은 책, 252.
70)같은 책,257.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B93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에 대해서는 전집 55권, 177쪽 이하 참고, 만일 내가 옳게 보고 있다면, 이 단편은 얘기(Sage)를 가리킴으로서 해석하는 하이데거 후기의 해석에 별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다.
71)같은 책, 254. 같은 책, 262 참고. "침묵은 고요의 소리없는 울림, 즉 생각하며-가리키는 얘기에 사응한다."
72)같은 책, 152. 일본어 '이키'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 "번쩍이는 활홀의 고요가 불어옴"(같은 책, 141) 내지 "부르는 고요의 순수한 황홀"등이 시각적 전이 해석(Uberinterpretation)인지 아닌지에 대해 나는 결정할 수 없다. 마이(R.May)의 비판 참고.<동방의 빛으로부터, 동 아시아의 영향하에서의 하이데거 작품>, Stuttgart, 1989, 34쪽. 마이는 오쿠슈(H.Okutsu)의 신 일본어-독일어 사전(도쿄, 1959, 1982) 461쪽에서 출발하면서, '이키'(Iki)가 오히려 단지 "세련"(Schick), "우아함" 또는 형용사로서 "우아하다, 세련되다, 섬세하다, 맵시있다, 깔끔하다, 깨긋하다, 멋지다" 등을 뜻한다고 말한다. 쿠키(Kukki)의 글 '이키 노 코조'(이키의 구조, 1930)에서의 (술책과 교만 그리고 단념의 결합인) '이키' 개념의 의미 내용에 대해서는 하마다(J.Hamada)의 논문 <윤리학과 미학>, 하미츠(H.Hammitzsch) 편, 일본-문고, Stuttgart, 1990, 12 63쪽 이하 참고.
73)니체, KAS 11, 255 (26[396]) 참고, 같은 책, 254 (26[394]) 참고.
74)비트겐슈타인, <서신 교환>, B.F. Mc Guiness와 G.H. von Wright편, Frankfurt, 1980, 81쪽 참고.
75) 4.113
76) 4.114
77) 4.115
78) 6.552. 비트겐슈타인의 '대낮처럼 밝은 신비'가 나로 하여금 폰 발레리의 다음말을 생각하게 한다. "신비보다 더 명백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79)슈테니우스(E.Stenius),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Frankfurt, 1969.294.
80)바스무트(E.Wasmuth),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침묵>, In:낱말과 진리 7, (1952) 2 반년,821.또한 같은 책, 817 참고.
81)디트리히(R.A.Dietrich), <비트겐슈나인의 '논고'에서의 신비적인것의 개념에 대한 탐구>(학위 논문), 1970, 231. 또 프로인틀리히(R.Freundlich), <논리학과 신비>, In:철학 연구 잡지 제7권 (1953), 569쪽 참고.
82)비트겐슈타인, <서신 교환>, 96쪽 이하. 바움(W.Baum), <루드비히비트겐슈타인>, Berlin, 1985, 38쪽 이하 참고, 그리고 슐테(J.schlte),<비트겐슈타인>, Stuttgart, 1989, 85-93 참고.
83)같은 책, 102. 졸고, <언어 분석과 시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측면에 대한 진술>, In:잘쯔부르거 철학연보, XXXII-1987, 79-92 참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척학에 대해서는,지금의 짧은 진술 내에서는, 탐구해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주제에 대해 특히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 이유는, 비록 몇몇 영어 논문이 발표되긴 했지만, 이제껏 주목받지 못한 비트겐슈타인과 선의 친화성이 그의 초기 철학인 '논고'에서보다 그의 후기 철학에서 보다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것은, 우리가 그의 저술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이미 열어 밝혀져 있는 어떤 것을 이해하고자 합니다."(철학적 탐구,89) "철학은 단지 모든 것을 거기에 놓을 뿐, 아무것도 설명하거나 추론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열어 밝혀져 있으므로 설명할 어떠한 것도 없다. 왜냐하면, 숨겨져 있는 것은 우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126) 그러나 "사물들의 측면들 가운데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 단순성과 일상성에 의해 숨겨져 있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간은 책,129) 바이스만(F.Waismann)과의 대화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도 현재에.우리는 아무것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바이스만, <비트겐슈타인과 빈학파>, 182쪽 이하. 여기서는 슐테(J.Schulte), <비트겐슈타인>, Stuttgart, 1989, 95. 재인용.)
84)여기에 대해서는 졸고, <고요의 소리, 휠덜린의 축제일 송가에 대한 사념>,In: 휠덜린 학회 투름 논문집(Yrurm-Vortrage), 31쪽 이하.
85)여기서는 부리(F.Buri), <부처-그리스도: 참된 자기의 주인>, Stuttgart, 1982, 311.
86)홈볼트(W.v.Humboldt), 다섯권짜리 전집, 플리트너(v.A.Flitner)와 길(K.Giel) 편, Darmstadt, 1963, 제3권, 474.
87)하만(F.G.hamann), <언어에 대한 저술들>, 시몬(J.Simon) 편, Frankfurt, 1967, Aesthetica in nuce,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