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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종교현상학

온울에 2008. 5. 7. 10:26

목 차

1.들어가기
2.초대 기독교에서 현사실적 삶의 경험
3.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
4.맺음말: 철학적 탈-신론자 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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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지명 인문학연구 
권 5 
호 1 
출판일 2000. 12. 31.  




하이데거의 종교 현상학


김재철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2-397-0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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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어가기
젊은 하이데거는 초기 그의 강의에서 "삶의 현사실성"1)을 자신의 철학적 근본주제로 삼고 이를 현상학적-해석학적으로 고찰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의 유명한 주저 "존재와 시간"은 본래 이 현사실성에 대한 개념을 존재론적 토대에서 삶의 근본 범주, 즉 실존범주를 통해 구체화하여 발전된 것이다. 이 작업은 1923년 여름학기 강의, "현사실성의 해석학"이라는 부제를 단 "존재론"이란 제목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2). 그러나 이것으로 넘어가기 앞서 1920/21년 겨울학기 강의, "종교 현상학 입문"에서 그는 "현사실성"의 개념 형성에서 최종적인 모습으로 초대 기독교에서의 현사실적 삶의 경험을 그 원형적인 예로서 제시하고, 당시 철학들에 대한 비판적인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3).

이 글에서는 하이데거가 초대 기독교의 삶의 경험을 객관화된 역사와 신학화-교리화의 이론에서 탈-역사화, 탈-체험화되지 않은 현사실적-역사적 삶의 경험에로 어떻게 현상학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삶의 자기존재 (Selbstsein)에 대한 집중적인 물음이 그의 철학을 위해 어떤 존재론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찾아본다.

2.초대 기독교에서 현사실적 삶의 경험
하이데거는 1919년 종전 직후 학기 이후 계속된 초기 프라이부르그 강의들(1919-1923)을 현상학의 제목 아래 현상학적 철학의 근본 특징들 - 그것의 사태, 방법 그리고 개념형성 - 을 삶의 현실성이란 관점에서 다루었다. 여기에서 현상학은 삶을 객관화하는 학문의 경향에 편승해서 삶의 세계의 이러 저러한 현사실적 단면을 다루어 삶을 탈-체험화하는 것과 달리, "삶 그 자체에로" 파고들어 다루는 삶의 근원학문으로서 자리 매김 된다. 현상학은 삶이 그 자체에서 자기세계를 벗어나 객관성에로 몰락할 (verfallen) 경향을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의 방법적 사유의 특별한 엄밀함(Anstrengung)을 통해 이 현사실적인 삶의 전체성이 표현되는 "근본상황들"과 "근본경험들"을 찾아내는 과제를 가진다. (GA58 231) 이를 위해 하이데거는 삶의 자기존재가 가지는 뛰어난 근본특징을 1920년 여름학기, "직관과 표현의 현상학"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 자기존재에서 근원적인 삶이 역사를 가지며, 나아가 어떻게 그 현사실적인 삶이 탈-역사화되지 않고 접근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구체화한다. 이를 통해 현사실적인 삶은 역사적인 것으로 이해됨으로써, 비로소 그 자신이 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아가 철학 자체도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한에서만, 철학은 비로소 현사실적인 삶의 경험이 된다. 이러한 한에서 현사실적-역사적 삶의 경험의 단초는 이제 철학의 철저하고도 긴급한(not-wendig) 전환을 요구한다. 이 "역사적인 것"으로의 현상학적 전환은 한층 더 종교적-신학적 주제에서의 역사적인 것에 대한 문제와 연관되어 "근원학문"으로서 드러난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이 현사실적인 삶의 경험에서 생겨나오며, "현사실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의 개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 전환은 곧 다음 학기, "종교 현상학 입문"-강의에서 시간성의 물음으로 제기된다. "현사실적 경험에서 근원적으로 시간성은 무엇인가? 현사실적 경험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GA60 65)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초대 기독교의 종교성의 사실에서 시간성을 현사실적 삶의 경험의 철학을 위한 단적인 전형으로 제시하게 된다. 이를 그는 바울의 편지와 관련4)해서 구체적인 종교적 현상을 현상학적 해석, 즉 그 내용-, 연관-, 그리고 이행의미에 따른 이해를 통해 보여준다5). 초대교회의 경험 속에 살았던 초대교인들의 고달픈 상황(염려, 불안, 박해, 비참함)은 시간성 자체에서 파악된다. 즉 시간은 여기에서 역사적이며, 이는 객관적 역사가 아닌, 이행 역사적 의미에서 현실적이다. 그 날(그리스도 재림)의 "때", 즉 기독교인이 그의 삶의 압박에서 견디면 살았던 시간은 "카이로스"[질적인 순간]의 종말론적 시간으로서, 이는 계산할 수 있는 천년 왕국설의 시간이 아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시간성에서 현사실적 삶은 그 근본특징을 경험한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에서 현사실성의 엄밀하고도 최종적인 의미는 곧 자기 세계적인 실존에서 개인적 역사의 이행의미(Vollzugssinn)에 있다. 이 근원적인 현사실성은 삶의 전체성이 표현되고, 삶 자체가 전체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한 신뢰성을 획득하는 그러한 한계상황에서 시간화된다. 이러한 시간화됨의 첫 예로서 바로 초기 기독교의 근본적인 자기경험을 하이데거는 서양 정신사에서 "역사의식"의 첫 번째 발견으로 간주한다. 현사실성의 개념은 순수한 보편성에서 접근될 수 없고, 그때마다의 규정된 삶의 형식의 구체성에서 주어진다. 하이데거는 초기 기독교의 삶의 경험에서 그러한 삶의 형식에 대한 원형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에서 당시 기독교인들이 구원의 역사를 그들의 이행 역사적 (객관적 역사가 아닌) 상황을 어떻게 경험했는지, 즉 어떻게 자신의 삶에 대한 신뢰를 구원으로서 획득하게 되는지를 알게된다6). 종교적-신학적 숙고에서 현사실성의 이행에서 일어나는 시간화의 문제는 이미 "존재와 시간"의 주제를 이루는 기초 존재론적인 방법을 위한 선행적 과제가 된다.

앞서 언급한 이 강의에서 "초기 기독교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은 당시 철학적인 문제상황과 연관되어 철학적-신학적 전통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시작한다. 특히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현사실적인 것은 객관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유의미성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주장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결해보려는 당시 지배적인 트뢸치(E. Troeltsch)의 종교 철학과 대결하고 이를 해체한다7).

하이데거에 따르면 트뢸치는 종교의 본질을 대상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철학의 분과 - 심리학적으로, 인식 이론적으로, 역사적이며 형이상학적으로 -에 연관시킨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역사에 대해 불안의 현상(Beunruhigung)을 제거하려는 학문적인 확실성의 경향에서 본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인 것의 힘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며, 그것은 동시에 삶을 자극하고, 방해하고, 풍부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 삶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다시 역사적인 것을 확실하게 하려고 시도한다8)." 하이데거는 이러한 경향이 자신의 확실성에 대한 걱정(Bek?mmerung)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고, 이런 식으로 역사적인 것에 저항해온 전통적인 세 가지 길 - 1) 역사적인 것 자체에 대한 플라톤적인 거부함 2) 그 반대로, 역사적인 것에로 근본적인 내어놓음 3) 이 둘의 양극단의 타협 -을 비판한다. (참조, GA60 38-45)

역사학문은 "삶의 현실성"에서 불안하지 않은 확실성을 찾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인간 현존재"에서 끄집어 내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학문은 그것을 객관으로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성 안으로 내세운다. (GA60 51) 이에 직면해서 하이데거는 현사실적인 현존재의 해명을 통해, 사람들이 객관적 현실로 내세우던 "전체적으로 전통적인 범주체계"를 깨뜨리고, 나아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현사실적인 현존재의 범주"를 발전시키려고 한다. (GA60 54)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현사실적 현존재와 역사적인 것 사이의 연관성을 "형식적 제시"(formale Anzeige)로서 현상학적 해명을 통해 열어 밝히는 것이다9). 형식적으로-제시된 것으로서 역사적인 것은 "시간적-생성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서 지나간 것이다". (GA60 55, 64) 그러나 이 형식적으로 제시되는 역사적인 것에 대한 의미 규정은 그 역사적인 구조성격에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또한 역사적인 것 자체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를 앞서 특징짓는 것도 아니다. "'시간적'이라는 것은 아직 선행적으로 전혀 규정되지 않은 의미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 여기에서 하이데거의 시간문제가 등장하고, 다음과 같은 그의 비판이 나온다. "모든 대상성이 의식에서 구성되는 한, 그것은 시간적이며, 그와 함께 사람들은 시간적인 것에 대한 근본도식을 얻게된다. 그러나 이 '일반적-형식적' 시간규정은 시간문제의 정초가 아니라, 오히려 위조(F?lschung)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시간 현상을 위한 하나의 틀이 이론적인 것에서부터 앞서 특징지워지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며, 우리는 "무엇보다 순수한 의식과 모든 순수한 시간을 아주 제외한" 현사실적 경험에서 "시간성"을 근원적으로 경험한다. (GA60 64 이하)

적어도 근대에 이르는 서양 전통 전체에서 초기 기독교의 현사실적 삶의 경험은 형이상학적 사유의 방향에서 해석되어왔다. 따라서 종교철학의 지배적인 앞선 개념은 이성적이고 비이성적인 요소의 독특한 연결에 놓여있다. (참조, GA60 79) 이것에 대해 하이데거는 이미 1920년 여름학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여기 놓인 복잡한 문제를 위해서 현대 개신교 신학은 유익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범형(Paradigma)을 제시한다. 이는 기독교의 절대성, 초대교회의 믿음에 대한 절대성의 주장에 대한 타당성, 인간 예수의 절대적인 의미에 대한 물음이 관계하고 있다. 이 문제는 역사 의식의 형성 - 보다 정확히 말해서 종교 역사적이고 비교종교학적인 탐구의 형태화 -을 위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예전에 기독교는 하나의 규정된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단순히 참인 종교로서 주장되고, 그 밖의 모든 종교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계몽주의에서 모든 역사적 개별화에 대립해서 종교의 본래적인 진리형태를 파악해야 하는 자연적 이성종교의 이념이 획득되었다. 슐라이에허마허는 처음으로 생생한 역사의식에서 종교의 '절대적 요소'가 유일하고 특별한 역사적 종교에서 현실화될 수 없으며, 순전히 추상적인 이성형태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내다보았다. 기독교적 신학의 의미, 구조, 방법에 대한 물음과 밀접히 연관된 문제는 19세기에 중심적으로 다루어졌고 오늘날에는 특히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광범위한 종교 역사적 비교를 통해 모든 세계종교에 대해 기독교의 내적가치의 우월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하는 다양한 대표적인 해결안에 대립해서 왜곡된 이론화를 통해 문제가 본질적으로 등한시되고 있다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초대 기독교는 어떤 종교역사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는 믿음의 확신을 종교 역사적 비교를 통해서 얻지 않았으며, 또한 기독교가 아직 역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질 수도 없었다. "(GA59 21 이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종교철학은 비이성적인 것의 범주에, 즉 "비이성적 선험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GA59 28) 이를 통해 종교철학은 종교성에로의 통로를 확실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성적"이란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한, "이성적" 그리고 "비이성적"이라는 두 가지 개념들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비이성적인 것의 개념은 그 악명 높은 무규정성에 처해있는 이성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반대에서 분명 규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0). 하이데거는 이 개념 쌍을 완전히 배제할 것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초기 기독교의 고유한 것이 위조되고 그 본질적인 것에 있어서 지나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11). 이러한 전통에 때묻지 않은 기독교의 삶의 경험에로 되돌아가서 하이데거는 우선 이해의 "선행적 개념"(Vorgriff)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이 개념은 현상학적 이해에 놓여있다. 현상학적 이해의 독특함은 종교성의 이해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종교역사의 자료가 그렇지만 현상학을 위해 필요할 수는 있지만, 이는 현상학적 해체아래 놓여질 때만 필요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역사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주도적인 선행적 개념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문제제기를 이미 동기 유발하는 경향을 말한다. (참조, GA60 78) "모든 앞서 놓인 역사적 자료는 그러므로 선행적인 고찰 아래 놓여져야 한다. " 현상학적 이해는 객관 역사적인 것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객관적 역사 이해는 연관의 관점에서, 즉 연관으로부터의 규정이다. 그에 반해서 현상학적 이해는 고찰자의 이행으로부터 규정된다. " (GA60 82) "이 '어떻게'에 대한 물음설정이 그러므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GA60 83) 하이데거는 그와 함께 그의 본래적인 "선행적 개념"을 이행의미에서 나오는 역사적인 것의 우선함에서 도출해낸다. 그 선행적 개념은 초대 기독교가 처해 있던 이행 역사적 상황의 현상학적 체득(Aneignung)에 놓여 있다. 이 선행적 개념 규정과 함께 그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두개의 현상학적인 이해의 관점에서 수행한다. "1. 초대 기독교적 종교성은 현사실적인 삶의 경험에 있다." 여기에 그는 이 경험은 "본래적으로 그것 자체이다"라는 것을 덧붙인다. 2. "현사실적 삶의 경험은 역사적이다." 계속해서 근본적인 후속 명제가 이어진다. "초대 기독교의 경험은 시간 자체를 살았다." 다른 말로 한다면, 초대 기독교의 경험은 객관적 역사의 의미에서가 아닌, 이행 역사적인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GA60 80)

이에 대한 바울-서신 해석의 중심에는 가장 초기 신약성서인 데살로니가 전서가 놓여지고, 거기에 데살로니가 후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고린도 후서가 보충적으로 놓여진다. 하이데거는 초대 기독교의 삶의 경험 분석과 관련해서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 빈번하게 나오는 몇가지 동사형 - "되어지다", "기억하다", 알다 - 을 제시한다. 이 동사형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바울과 당시 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을 이해시킨다.(참조, GA60 93 이하) "되어짐"의 강조를 통해서 시간적(temporal) 측면이 제시된다. 즉 되어진 것 (믿음 그리고 세계에서 이행된 복음을 받아들임)은 현재하는 존재를 규정한다. 이 존재는 앞서 현사실적 삶의 경험의 "되어짐"이 "그때마다 이미 앞서" 있는 형식으로 있다12). 현재는 마찬가지로 과거에서부터 오고 있는 미래에 의해 실현된다. 이것에는 "알다", "기억하다"의 동사에서 표현되는 시간적 계기들이 상응한다. 이 표현들은 바울의 서신에서 "되어짐"에서 개방되는 존재가능성(Seinsk?nnen), 즉 현사실적 삶의 시간적 구조를 통해서 마련된 가능성의 영역을 지시하고 있다13). 이 시간지평에서 하이데거는 그리스도 재림의 가까움에 대한 고대, 즉 그가 살아 있는 세대에서 기다리는 예수의 재림, 임재(Parusie)에 대한 희망 속에 역동하는 바울의 신학을 해석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일종의 중간단계에 살고 있다. 그의 실존은 인간이 되심, 공생애, 그리스도 부활의 구원사건, 그리고 이것과 이어질 미래의 완성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놓여있고, 바로 그렇게 현재를 규정하는 과거의 사건에 의해 각인되어 있다.

종말론적 관점을 통해 하이데거는 초대 기독교에서 현사실적 삶의 경험에 대한 현상의 핵심을 임재의 "기다림"(Harren)의 형식에서 본다. 다양한 측면들을 통일적인 경험으로 통합하는 임재의 근본구조는 근원적인 시간성에 있다. 임재의 기다림에서 바울이 경험하는 것은 통속적인 시간의 개념을 변화시킨다. 그의 해명은 다음의 성구(데살로니가 전서 5장 1절 이하)에서 엿볼 수 있다. "교우 여러분,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여기에서 그 날이 예기치 않게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것에서 임재의 고대는 계산가능한 사건의 기다림과 비견할 수 없고, 오히려 무규정성과 예기치 못함의 특징으로 부각된다. 임재의 미래적인 사건에 대한 유일하고도 적합한 태도방식은 계산, 따져봄이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다리는 것, 즉 본질적인 임재의 계산 불가능에서 취해야 될 현사실적 삶에로 몰두하는 태도이다14). 바울은 이와 관련해서 "태평함"과 "확실함" (데살로니가 전서 5장 3절)을 대비시켜 놓고 있다. 임재는 확실하게 되고, 장악 가능한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는 바로 현사실적 삶에로 되돌아가야 할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태도로 특징지어지는 깨어있음과 고대함의 동사는 지속하며 본질적인 삶의 불확실성을 함축하고 있다. 임재를 고대한다는 것은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이행연관성"(Vollzugszusammenhang mit Gott)에로 이끌림, 하나님 안으로, 현상학적으로 말하면, 시간의 양태에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한다15).

임재의 기다림에서 드러나는 시간성의 현상과 관련해서 하이데거는 연대기적(chronologisch) 시간과 순간 질적(kairologischen) 시간의 성격을 구분한다. 연대기적 시간의 성격에서 시간은 측정 가능한 것, 객관화될 수 있는 것으로서 파악된다. 예컨대 바울은 예수의 재림의 시간을 천년설의 방식을 통해서 확정하려는 시도를 지적하고 단호히 거부한다. 순간 질적 시간의 성격의 가능성은 임재의 순간의 장악 불가능함과 갑작스러움에서 비로소 제시된다. 푀겔러에 따르면, "순간 질적 성격들은 시간을 계산하고 다루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미래에 의한 위협에 놓여있다. 객관화될 수 없는 삶의 이행 역사(Vollzugsgeschichte des Lebens)에 속하는 것이다16)." 카이로스(Kairos, 순간 - 본래적 현재)에 의해 규정되는 초기 기독교적 삶의 경험에서의 이행의미(Vollzugssinn)는 삶의 사실성에 관여하고 있다.

종말론적인 질적 순간에서 이행의 우선함은 객관적 형태가 아니라, 장악 처리 불가능한 삶의 현사실성에서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다른 바울 서신(고린도 후서 12장 1-10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비로운 체험에 대해 보고한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자랑할 수 있지만, 내용적으로 접근될 수 있는 특권적인 개시를 강조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에 대해 말한다17). 이를 통해 바울은 내용적으로 접근되어 고착된 신앙적 지식으로 전달되어 온 의미에서의 사도직분 - 그리스도를 본 자만이 사도직을 받을 수 있다는 당시의 전통 -에 대한 이해와 "약함에서의 권능"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강하게 대조시킨다18). 하이데거에 따르면 객관적 내용을 통한 신앙의 규정을 포기함으로써 바울의 신학에는 이 이행의미가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바울 자신이 그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하이데거는 불확실성과 현사실성에 놓여있는 삶으로의 방향전환을 통찰한다19).

이렇게 종교적으로 주제화된 내용에서 우리는 이미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초기 기독교적 삶의 경험을 현상학적으로 체득(Aneignung)하는 과정에서 하이데거는 신학적 형이상학과 대결하고 있다. 여기에는 선-신학적 이고 선-형이상학적 근원영역에로 되돌아가서, 철학의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의도가 일어나고 있다. 현사실성의 경험에 대한 해석은 전통적인 철학의 비판적 자기화를 통한 개념적 준비와 그 속에 함축된(impliziert) 존재론을 드러내는(explizieren)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3.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
이어지는 1921년 여름학기 강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에서 하이데거는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 철학이 만나게 되는 상황을 문제삼는다. 이와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서양 역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역할을 다룬 트뢸치, 하르낙, 딜타이의 연구를 비판한다. 하이데거 비판의 주요점은 이 연구들이 아우구스티누스를 "객관 역사적 태도"(objektgeschichtliche Einstellung)에서 보고 있으며(GA60 167), 단지 이론화 자체만을 문제삼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가 움직였던 역사적 -동기를 이행 역사적으로(vollzugsgeschlchtlich) 이해하려고 한다. (GA60 173)

하이데거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본래적인 삶에 대한 염려 - "삶을 찾아나섬"(Leben kuchen) -를 주제화하고 있다. (GA60 193) "고백론"(Confessiones)의 10권에서 행복한 삶은 현사실적이며 역사적인 이행연관에서 드러나고 있다. (GA60 198) 기독교적 현사실적 삶의 이행에 대한 "uti"(사용함, 교섭함, 사업)와 "frui"(향유함)의 염려함(Bek?mmertsein, curare)의 방식이 고찰된다. "uti"는 우리가 어떤 것을 다른 것 때문에 노력할 때, 마음에 드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frui"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과의 관계를 말한다. 우리가 진정한 "frui"에 도달하게 될 때, 그 외에 다른 것과의 관계는 "uti"가 된다. (GA60 271)

"frui"는 삶 자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근본태도, "최고선"(summum bonum)의 경험방식이다. (GA60 272) 이런 관점에서, 축복된 삶에는 진리에 대한 기쁨이 있다20). 그러나 삶 자체는 항상 이미 위협적인 측면 - 유혹(tentatio) -을 내포하고 있다. 삶은 경향을 쫓고 불순한 것에로 떨어질 위험에 놓여 있다. 하이데거는 이 "유혹"의 문제를 "구체적이고 현사실적이며, 역사적인 자기경험"의 의미에서 이해한다. (GA60 274) 이 유혹은 바울에서 임재를 기다리는 태도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본질적인 불확실성으로 인간을 이끌어 간다. 삶의 불확실성과 무거운 짐은 "내가 누구인지", "나를 짓누르는 짐"에 대해 물음을 묻게 한다. "quaestio mihi factus sum"; "oneri mihi sum" (GA60 249). 이 물음은 "객관적인 눈앞에 있음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본래적인 자기성에 대한 실존함의 물음"이다 (GA60 281) 이 유혹과 연관되어 현사실적 삶의 유의미성이 다양하게 나누어지게 된다(deflexus in multum). (참조, GA60 206 이하, 244) 여기에는 현사실성의 개념을 위한 구성요소로서 질고(molestia)가 문제로 된다. (참조, GA60 230 이하, 241 이하)

근원적인 초기 기독교적 믿음의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불안"(Angst) 개념을 분석한다21). 불안, 진정한 불안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통속적인 공포와 뚜렷이 구별된다. 불안은 주위세계와 공동세계에서 나오는 "세상의 공포"(Weltfurcht)가 아니라, 자체적 불안(selbstliche Furcht)이다. (GA60 297) 이 불안은 다시 말해서 어떤 구체적인 것, 어떤 개별적인 존재자 앞에서의 공포가 아닌, 전체에 횝싸인 불안이다. 그 자체로서 불안은 본질적으로 죽음과 신에 관련 맺고 있다. 죽음의 불안은 인간을 죽음의 가능성에서 사라져 버리는 개별적인 존재자에로 더 이상 향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에 대한 공포, 하나님의 심판에서 인간 존재의 전체에 대한 결정으로 이끄는 것이다. (참조, GA60 294)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삶의 실존론적인 성격을 통찰한다. (참조, GA60 268) 불안을 통한 현사실적 삶의 위협에서 양심의 부름을 받아들이는 민감함(Sensibilit?t)이 나온다. 불안에서 내용의미(Gehaltssinn)는 그 장악가능성과 안정성을 잃어버린다. 이행의미(Vollzugsinn)에서 불안은 삶을 "그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실존론적 성격으로 전환시킨다. 불안 개념은 초기 기독교적 삶의 경험에 대한 통찰이 "존재와 시간"과 얼마나 직접적으로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예에 속한다.

위에서 본대로, 하이데거는 바울의 신학이 그리스 사유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삶을 근본적인 시간성에서 드러내 보임으로써, 현사실적 삶의 경험을 드러냈다고 믿는다. 이러한 해석에서 하이데거는 기독교적 삶의 경험에서 감추어져 전제되고 있는 존재이해와 그에 상관하는 실존론적 규정에 대한 완결 작업을 진행한다.

동시에 하이데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라는 제목이 보여주는 대로 초기 기독교와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전통간의 접목과 혼합에 대해 비판한다. 하이데거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놓여있는 독특한 양면성(Ambivalenz)을 본다. 그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근원적인 기독교의 신앙을 현사실적 삶의 경험에서 보았던 신뢰할 만한 해석자이지만, 또한 동시에 무의식중에 신플라톤적 사유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컨대 신플라톤적인 "fruitio Dei"(신의 향유)의 개념을 사용한다. (GA60 271) 신플라톤주의에서 선함(Gutsein)과 아름다움(Sch?nsein)은 그러한 존재(Sein)에 속하고, 그것은 "향유"될 수 있다. "fruitio Dei"에서 신은 "최고선"으로서 향유되며, 유일하게 그 것만이 향유될 수 있다22). 이러한 사유에서 앞서 말한 "uti"와 "frui"의 구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사용함(uti)은 보여지는 사물과 관계하고, 향유함(frui)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계한다. 이 구별은 존재론적 층 구조에서 기능하며, 보이는 사물에 대한 어떤 차별화와 연결되어 있다. 신플라톤적 적용에서 신은 최고의 선으로서 이해된다. 그것에 의해 세상적인 존재자와 현사실적인 삶은 구별된다. 이렇게 신에 대한 믿음이 앞서 주어진 가치질서,존재질서에서 뛰어난 위치를 가진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러나 이 같은 형이상학적 사유는 앞서 논의한 근원적인 믿음의 경험에는 낯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fruitio Dei"에서 하이데거는 계속해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이끌어 낸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신의 존재는 항상적인 눈-앞에-존재(Vor-Augen-Sein), 현재(Pr?senz)로 이해된다23). 물론 여기에서는 개별적인 사물을 보는 감각적인 눈에 대립해서 내적인 눈을 의미한다. 그러나 "fruitio Dei"는 봄에 대한 감각적 지각의 모델에 따라 나온 것이다. 그 때문에 푀겔러는 "봄에 향하는 사유는 표상될 수 있는 내용에 향하기 때문에 환원될 수 없는 시간적-역사적 ... 이행을 등한시한다"고 말한다24). 다시 말해서 보일 수 있는 것은 지속하는 것, 실체적인 것이다. 이것에는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으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이해가 뿌리박고 있다. 이러한 존재이해와 현사실적 이행성격은 일치할 수 없다25).

하이데거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루터와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증인들이 그의 뒤를 잇는 첫출발로 여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본 것처럼, 이들 모두 부적합한 형이상학적 개념형성에 대항해서 근원적인 기독교 믿음의 경험을 관철하려고 노력해지만, 여전히 고대철학의 "지배 아래" 놓여 현사실적 경험을 "이론적" 틀 속에서 위조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26). (SuZ 235 주6) 물론 하이데거는 루터에게 특별한 위치를 부여한다. 그에 따르면 루터는 그 같은 부적합한 개념들 들추어내고, 그것이 신플라톤적 사유에 의해 교부들과 스콜라 철학적 전통에 유입되었음을 비판한다. 루터는 전통적인 신학에서의 신 인식이 말씀의 개시에 대한 믿음에 독립해서 이미 신의 창조인 세계의 성격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이를 신약을 통해, 즉 사도 바울(R?m 1, 20)을 통해 정당화하고 있음을 문제 삼는다27). 그에 대한 반대입장을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그 논쟁 21번 테제에서 감각적으로 세상의 기묘함에 빠진 영광의 신학이 하나님을 감각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세상으로 향하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자만이 신학자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하이데거는 젊은 루터가 다시 초기 기독교의 새로운 이해를 열어놓았다고 인정 한다28).

4.맺음말: 철학적 탈-신론자 하이데거
기독교적 삶의 경험에 대한 분석과 함께 하이데거에게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계기인 존재론적 전향(ontologische Wende)이 마련된다. 이는 삶의 철학적 단초를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을 통해 근거 짓는 작업을 의미하며, 이를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현상학"이라고 부른다29). 그 개념적 형성에서 삶의 개념은 존재개념과 접합되어 "삶=현존재, 삶에서 그리고 삶을 통한 '존재'" (GA6l 85), 또는 "'존재'의 한 방식으로서 '삶'"으로 정식화된다. (GA63 7)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비판은 자가 당착이 아닌가? 그 역시 전통적인 철학과의 매개를 통해서 현사실적 삶의 의미를 근거지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서 "우리가 그 대상으로 있는 삶의 존재의미 해명"은 동시에 "지금까지의 존재론을 그리스 철학에 (이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놓여있는 그 뿌리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비판"을 통해 "낡은 존재론"을 근본에서부터 새롭게 하는 작업을 포함하고 있다30). 그러므로 전통적 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보여준 대로 참된 존재의미를 망각한 존재론의 토대 위에서 기독교적 삶의 현사실성을 깨뜨리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아가 또한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해석을 통한 삶의 경험의 철학적 근본화를 신학으로부터 분리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 같은 하이데거의 입장은 1924년 마르부르그 신학부에서 강연한 "시간 개념"의 초두에 분명하게 나타난다31). "하나님에로의 통로가 믿음이고, 영원성에로의 참여가 이 믿음이라 한다면, 철학은 그 영원성을 가질 수도 없고 나아가 이 영원성을 시간의 논의를 위한 가능한 관점으로서 방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받아들일 수도 없다. ... 그러므로 신학자가 시간에 대한 진정한 전문가"일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ZV 5), 하이데거는 "신학이 신 앞에 선 존재로서 인간 현존재, 즉 영원성과의 관계에 있는 시간적 존재를 다루며, 신 자신은 어떤 신학을 필요하지 않고, 그의 존재는 믿음을 통해 근거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ZV 5 이하) 그는 "하나님 자체에 대한 기독교의 믿음은 시간에서 일어난 것과의 연관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성경을 인용하며 말한다. "시간은 '때가 찾을 때 ...' 시간이었다32)," 결국 하이데거는 "철학자는 믿지 않는다. 철학자가 시간에 대해 묻는다면, 시간을 시간에서 이해하려고 결단한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ZV 6) 위에서 본 것같이 현사실성의 삶의 경험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내용적으로 풍부하였지만, 거기에서는 현존재의 철학적 심문을 통해서 접근되지 않았고, 오히려 현존재에 대한 완전히 다른 근본태도, 즉 믿음에서 접근되어진다. 철학적 물음으로서 존재론은, 비록 신학적인 물음설정에서 불안과 염려의 현상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지만, 죄에 대해서 "알지"못한다. (SuZ 306 주2; 참조, 190 주4) 여기에서도 하이데거는 신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알 수 있다. 그는 철학자로서 그의 눈에 결국 "종교 작가"로 비쳤던 키에르케고르의 길을 갈 수 없었다. 종교적-신학적 문제로부터 간격을 취하고,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 접목되어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정초를 시도함으로써 하이데거는 자신의 입장을 "탈-신론적"(a-theistisch)으로 이해한다. "철학은 근본적이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묻는 의심에서 원리적으로 탈-신론적이어야 한다. " "철학이 자신을 근본적으로 이해한다면, 철학 자체는 무신론적이다33)." 이러한 그의 태도를 우리는 하이데거가 1923년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위해 비판적으로 거리를 가지면서 받았던 영향에 대한 간략한 언급에서 간파할 수 있다. "찾아 나설 때의 동반자는 젊은 루터였고, 모범은 그가 미워했던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동기는 키에르케고르가 주었고, 눈은 후설이 나에게 넣어주었다. " (GA6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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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사전적 의미에서 "현사실성"(Faktizit?t)은 "필연적이지 않고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서의 사실성(Tats?chlichkeit)"을 일컫는다. 이 개념은 신칸트주의의 문맥에서 논리성(Logizit?t)에 상반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현사실성은 일회적, 우연적, 상대적, 시간적, 개인적, 반복할 수 없는 역사적인 것인 반면, 논리적인 것은 항상적, 필연적, 일반적, 보편적, 초시간적인 것에 관련한다. 고대부터의 철학전통은 이 현사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절대적이고 규범적인 선험성에서 근거 지우거나, 또는 그것을 비이성적인 것으로서 여겨 이론적 이성의 하위 개념에 두어왔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철학의 전통에 뿌리박혀있는 이 대립상들 - 이성과 비이성의 분리에서 나오는 철학들 - 이 "비철학적"임을 지적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철학의 경향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물음을 제기한다. 참고, Heidegger 전집 (=GA) 59권, 175. "현실성은 그 자체에서 하나의 영역으로 있다. 이 사실은 선천적으로, 연역적 방법으로 증명될 수 없다. 사실성들 (Tats?chlichkeiten)은 증시(aufweisen)될 수 있을 뿐이다.… 증시되는 것은 우리에게 앞서서 자기(Selbst) 자신에게 있는 것이며, 다시 말하면 직접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다른 것을 통한 우회의 길이 필요하지 않다. " (GA1 213) 이는 하이데거에게 곧 현상학적인 "해체"(GA59 29)를 통한 "참인 현실과 현실적인 참에로 돌파"(GA1 406)하는 철학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 의해 "현사실성"이란 말은 가장 처음 1920년 여름학기에 사용되었지만, 그의 초기 둔스 스코투스-논문에서 나오는 이 "본래적인 현실성의 영역 자체"는 이미 "현사실성"의 철학적 개념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어떤 규정되지 않은 비이성적인 X로서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관계된 삶의 염려하는 수행과정에서 항상 새롭게 경험되어야 하는 근본 현실을 의미한다. 참조, Historisches W?rterbuch der Philosophie. Hrsg.Von Joachim Ritter. Basel/Stuttgart. 886.
2) GA63, Ontologie. Hermeneutik der Faktizit?t (SS 1923) Hrsg. Von K. Br?cker-Oltmanns. Frankfurt a. M. 1988
3) GA60, Ph?nomenologie des religi?sen Lebens. 1. Einleitung in die Ph?nomenologie der Religiion (WS 1920/21) Hrsg. Von Matthias Jung und Thomas Regehly. 2. Augustinus und der Neuplationismus(SS 1921) 3. Die philosophischen Grundlagen der mittelalterlichen Mystik (Ausarbeitung und Einleitung zu einer nicht gehaltenen Vorlesung 1918/1919) Hrsg. Von Claudius Strube. Frankfurt a. M. 이 책이 출판되기 이전에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O. 푀겔러의 책을 통해서 주로 이루어졌다. 참조,O. P?ggeler : Der Denkweg Martin Heideggers. Pfullingen 1963, 36-45.
4) 가다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강의에서 바울 서신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은 갑작스런 방향전환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Th. 키지엘은 바울의 문제를 진지하게 하이데거가 받아들이게 된 것은 생 철학자 딜타이의 기독교에 대한 철학사적 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에 대해 그는 하이데거가 자신의 통찰을 정신사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이 딜타이의 "정신과학입문"(딜타이 전집 1권, 250-267)에 나오는 내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참조, Th. Kisiel: Das Entstehen des Begriffsfeldes 'Faktizitat' im Fruhwerk Heideggers. In: Dilthey-Jahrbuch 4 (1986/87) 91-120. 여기에서는 104 이하, 주 28.
5) 하이데거는 자기세계에 놓여있는 상황의 성격 (Situationscharakter)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상황의 성격에는 기초 의미 이론적인 세 가지의미요소들 - 내용의미, 연관의미 그리고 이행의미 -이 내포되어 있다. (참조, GA6l 52 이하) 삶의 세계는 자기세계가 처한 그때마다의 상황에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알린다. 그 자기는 항상 상황에 들어서 있는 것으로서(als in einer Situation stehend) 경험된다. (참조, GA58 59-63) 삶의 "이행"에서 항상 변화되는 상황에 처해 있음(Situiertsein)의 "어떻게"(das Wie)에 그때마다 만나는 것의 무엇에 대한 "내용"(Wasgehalt)이 의존하고 있다. 현사실적 세계는 따라서 유의미성 연관들(Bedeutsmakeitszusammenh?nge)로 나뉘어진다. 이 유의미성 "연관"에 있는 것만을 삶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als wirklich existierend) 경험한다. 이렇게 "상황의 근본구조"(Urstruktur der Situation)에서 이행-, 연관- 그리고 내용의미(Vollzug-, Bezugs- und Gehaltsinn)가 제시된다. 유의미성은 이 세가지 "의미요소들"(Sinnelemente)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유의미성 (즉, 그 내용의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삶은 자신의 본래의 언어로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즉, 삶의 자기만족성). 삶은 구체적인 살의 상황들에 처한 경향들의 형태화에서, 동기에서 경향에로의 관련에서, 즉 그 연관의미에서 표현된다. 이 연관의미는 삶이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형식이다. 삶은 자기의 경향적으로 구조지어진 흐름과 함께 감(das Mitgehen mit seiner tendenzi?ssturkturierten Str?mung)을 통해서 이해되고, 경험된다. 이 살아진 삶을 더불어 하는 체험함(Miterleben), 즉 그의 이행의미는, 삶이 생생한 삶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삶의 친숙함으로서 충만함 속에서 함께 가는 것처럼, 역사를 뜻한다. "(GA58 261)
6) 참조, Th. Kisiel: Das Entstehen …, 118.
7) GA60 67 참조, K. Lehmann: Christliche Geschichtserfahrung und ontologische Frage beim jungen Heidegger. In: Philosophisches Jahrbuch(1966/67) 126-153; M. Jung: Das Denken des Seins und der Glaube an Gott. Zum Verh?ltnis von Philosophie und Theologie bei Martin Heidegger. W?rzburg 1990.
8) Th. Kisiel: Das Entstehen …, 109.
9) GA60 64. 역사적인 것의 문제에 대한 방법적 해명에서 하이데거는 형식화와 일반화의 구별과 연관해서 "형식적 제시"에 대해 자세히 논의한다. (GA60 55-65)
10) 참조, GA63 45. 이러한 맥락에서 M. Jung은 하이 데거가 여기에서 R. Otto의 책에 주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Das Heilige. ?ber das Irrationale in der Idee des G?ttlichen und sein Verh?ltnis zum Rationalen. Breslau 1917. 참조, M. Jung: Das Denken …, 47,
11) 후에 하이데거는 "동일성과 차이"에서 서양 사유 전체을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망각하는 "존재-신론적" 형이상학으로 파악한다. 참조, W. Weischedel: Der Gott der Philosnphen. Grundlegung einer philosophischen Theologie im Zeitalter des Nihilismus. Bd. 1. Darmstadt 1983.
12) 참조, Th. Seehan : Heidegger's "Introduction to the Phenomenology of Religion" 1920-21. In: The Personalist 60 (1979). 312-324, 여기에서는 320.
13) 참조, Seehan, 321. 여기에 "존재와 시간"(=SuZ)에서 나오는 통일적인 시간의 양상들이 제시되고 있다.
14) 참조, 데살로니가 전서 5장 4-7절, 여기에서는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습시다. "
15) 참조, Seehan, 320.
16) O. P?ggeler: Der Denkweg …, 36. 참조, GA63 101: "현존재의 질적 순간의 계기들"(kairologische Momento des Daseins).
17) 고린도 후서 12장 7절.
18) 고린도 후서 12장 9절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9) 참조, O. P?ggeler: Der Denkweg …, 36.
20) 참조, GA60 198: '보편성'은 그리스 철학을 통해서 왜곡되었지만 하나의 참된 의미이며, 실존적-역사적 동일성에로 소급되어져야 한다. " "타락의 방향에서 진리" - 그의 "고백록"의 용어와 일치해서 -와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실존적 이행의미에서 빛 (lumen)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사물적-형이상학적 표상에서 이해될 수 없다. (GA60 199)
21) timor castus에 관하여, GA60 268, 293이하; SuZ 190 주 3. 하이데거는 이 개념을 주석과 서신에서 발견한다.
22) 참조, O. P?ggeler: Der Denkweg ..., 39.
23) 참조, Holzwege. 5. Aufl. Frankfurt a. M. 1972. 338.
24) P?ggeler, 42.
25) 눈앞에 있음은 "봄"의 주요모형이다. 여기에서 그리스 사유가 본래적 시간성을 제거하는 근거가 해명된다. 참조, SuZ 171.
26) 참조, Kierkegaard (SuZ 235 주6, 338 주2), Luther (SuZ 190 주3)
27) 참조, SuZ 10. 그러나 루터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의 강점은 그 문제에 대한 "개념적이고, 교화적이며, 이론적인" 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SuZ 190 주3), 실존적으로(existenziell) 타당한 증시를 하려고 했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는 적합한 실존론적이며 존재론적인(existenzialontologischen) 해명에 이르지 못했다.
28) Martin Luther: Kritische Gesamtausgabe (Weimarer Ausgabe), 1883. 1권, 350-374. 하이데거는 초기 루터에 자신을 연관시킨다. 가다머는 "존경할 만큼 젊은 학자 하이데거가 가진 교리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아울러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소급하면서 고유한 본래적인 삶에 대한 물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를 넘어 바울과 요한-복음에 도달하는 루터의 길로 이끄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말하고 있다. H-G. Gadamer: Heideggers "theologische" Jugendschrift. In: D-J 6 (1989) 228-234, 여기에서는 230. 그러나 푀겔러가 보고하고 있듯이, 후기 종교개혈가들을 하이데거는 "다시 전통에 희생되고, 멜랑흐톤과 함께 신스롤라화의 경향"에 빠진 것으로 본다. O. P?ggeler: Der Denkweg …, 41
29) GA6l 60; SuZ 38: "철학은 보편적이고 현상학적 존재론이다."
30) Martin Heidegger/karl Jaspers Briefwechsel 1920-1963. Hrsg. Von Walter Biemel und Hans Saner, Frankfurt a. M./Munchen 1992, 27. 참조, O. P?ggeler: Der Denkweg …, 29.
31) Der Begriff der Zeit. (=ZV) 1924년 7월 강연, Hrsg. von Hartmut Tietjen. T?bingen 1989.
32) 갈라디아서 4장 4절. 참조, 마가복음 1장 15절, 에베소서 1장 9절 이하.
33) GA6l 197, 199.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자 R. 불트만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철학의 '무신론'은 불신이라는 신학적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R. Bultmann: Die Geschichtlichkeit des Daseins und der Glaube. In; Heidegger und die Theologie. Hrsg. von G. Neller. M?nchen 1967. 72-94, 여기에서는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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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김재철
한국외국어대학교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