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배경
1)개념
2)개념의 전개
2.의미의 결정
1)계산 모델
2)의미 결정의 애매성
3.부분적 대안 해석
1)형식적 개념
2)심리적 개념
4.삶와 국면
1)삶의 형식
2)최소주의 해석
3)가족유사성의 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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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새한철학회
학술지명 철학논총CHULHAK-RONCHONG
ISSN 1226-9379
권 23
호 1
출판일 2001. 1. 31.
‘가족유사성’의 의미와 그 배경
신상형
안동대
1-066-0101-06
국문요약
본 논문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 탐구』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가족유사성’을 그 개념이 성립한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 이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씌어졌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가족유사정의 출발 배경을 살피고, 잘못된 접근들을 제시하고, 또 이 개념의 올바른 이해와 방식을 제공하는 순서를 밟아,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고자 했던 이 개념의 의미를 보여 주려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은 아우구스티누스, 프레게, 러셀 및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의미의 ‘계산 모델’을 배척한다. 즉 한 단어의 의미는 늘 동일하고도 공통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이들의 계산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계산이다. 다시 말해서 단어란 쓰임새의 맥락이나 화자의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으며, 한 단어의 다른 맥락상의 의미들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유사한 것이다. 이 유사도 공통적이거나 보편적인 유사가 아니라, 서로 엇갈리는 〈가족 유사〉인 특징을 갖는다.
둘째, 이런 이유에서, 한 단어의 의미는 엄격한 고정적 계산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자연히 나올 수 있는데, 의미에 대한 것으로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단어의 개념이란 형식적이라는 주장이다. 개념의 의미란 한 단어라는 기호가 가리키는 형식적인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그 담지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담지자와 그 기호의 관계는, 『탐구』에서 보듯이, 우유적 관계로서 그 의미의 올바른 설명에는 미흡하다. 또 하나는 그것을 심리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입장인데, 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기술을 1, 3인칭으로 분석하면서 한 주체와 의미 이해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과 기술은 불일치하는데, 이것은 ‘의도’, ‘믿음’, ‘의미’ 등의 개념은 이해의 과정이 아니라, 정신적 동반물이기 때문이다.
셋째,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은 바로 삶의 형식이자 그것을 보여주는 ‘의미에 대한 기술’이다. 우리의 삶은 분석 불가능하고, 한정 불가능하며, 다만 주어지는 것으로 언어사용은 바로 역사적 실천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단어의 의미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무엇으로, 단어의 다양한 사용의 용례들 사이에는 최소의 유사의 법칙만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불명료하더라도 이것만이 ‘사실로서’ 우리가 〈보고 알게 되는〉 전부이다.
영문요약
“Family Resemblance”: Meaning and Background
The essay is to review the background of ‘family resemblance’ which Wittgenstein puts forward in hi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In this essay, the writer attempts to say what a concept/word means by reviewing the background of giving the idea of family resemblance, showing misguided approaches, and providing us with a valid method to understand it properly.
First, Wittgenstein does, says the writer, reject ‘the model of calculus’ suggested by Augustine, Frege, Russell and earlier Wittgenstein, according to which a word always has its same and common meaning. But this is not found to be true in, and does not applies to, our ordinary life. In other words, the meanings of a word depend upon in what context it is used, and are not the same or identical with, but the common as each other. Therefore, Wittgenstein calls it family resemblance.
Second, for this reason, it is claimed that the meanings of a word are not able to be calculated, but what are different and should be treated with as something else. This claim goes in two different directions: one is the claim that the concept of a word is formal. According to the claim, a word is formal, and asks for a certain bearer, without which a word, therefore, does no longer exist. However, we have seen in the Investigations, this claim could not go for Wittgenstein's valid interpretation. Another is to regard it as psychological, and attempts to analysis descriptions into those with first or third person. But in this analysis, human behaviors do not agree with their descriptions, for ‘intend’, ‘believe’, or ‘mean’ aren't the process of, but superveniences to, those actions.
Third, thus, we come to a conclusion that the concept or meaning of a word is not something as said above, but something else, which, according to Wittgenstein, is ‘form of life.’ For our life, though thoroughly scrutinized, is not divisible, definite, but given in a certain way. The use of a language is a result of historical practice of words; and the meanings of a word is something understood in that context, which is shown minimally in application of it to diverse uses of its examples. This is, though unclear, all we ‘look and see’ as realities.
한글키워드
비트겐슈타인, 가족유사성, 의미의 결정, 삶의 형식, 계산 모델
영문키워드
Wittgenstein, family resemblance, form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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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철학적 탐구』1)의 ‘가족유사성’ 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가족유사성 개념의 함의는 긍정적 면과 부정적 면을 갖고 있다. 가족유사성을 풀어 말하면, 그것은 언어의 의미란 언어의 쓰임새에 따라 다양하게, 그러면서도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유사’(resemblance)는 한 단어가 무엇을 중심으로 그것에서 보다 가깝게 혹은 보다 멀리 있는 유사가 아니라, 특정한 중심이 없이 각 단어들의 유사가 서로 다른 부분이어서 유사성을 어떤 공통된 기준에 비추어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2) 이런 의미의 해석과는 별도로, 그것은 본질주의에 대한 공격을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본질주의란 ‘한 개념이 적용되는 모든 예들에는 그것들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된 무엇이 틀림없이 있고 이것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무엇이다 라는 견해’3)이다. 이것은 또한 한 단어의 적절하고도 합법적인 설명이란 그것의 적용에 필요 충분한 조건을 말하는 분석적 정의이므로, 예증에 의한 설명은 부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린다.4)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특별한 경우를 향한 경멸적인 태도가 그 주창자들의 오도된 ‘일반성의 갈구’에 근거해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5) 이런 ‘일반명제 형식’의 독단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6)에서 보이지만, 그는 대신에 『탐구』, 특히 1-64에서는 언어와 명제의 개념을 일련의 말놀이의 도움을 받아 해명하고 있다. 바로 이 말놀이의 설명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이란 따로 없다는 기초 위에서 밑바닥에 깔린 그런 요구를 격퇴하면서,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된 다른 현상들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개념의 배경, 그리고 의미의 결정문제를 다루면서, 잘못된 접근으로서의 두 가지 입장을 밝히고, 마지막으로 삶의 형식적 측면에서 그것의 구조를 해명하면서 여러 비판들을 음미해 보기로 하겠다. 그렇다면 이 가족유사성은 본질철학의 어떤 문제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는가?
1.배경
1)개념
가족유사라는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을 접근하는 한 개념인데다가 현대 철학자들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도구 중 하나이다. 그것은 그것의 제작자인 비트겐슈타인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여러 방법으로, 또 아마도 그가 비판받게 되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그것을 『탐구』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단어들의 의미는 공통된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겹치는 유사성들을 바탕으로 적용된다는 생각은 이미 비트겐슈타인 이전의 통상적인 철학자들7)의 저술에 나타나 있었다.8) 비트겐슈타인 이전의 논의들은 사물들을 구분하고 그리하여 일반 단어를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에 대한 일반화를 위해 단어를 쓰는 통상적 맥락에서 나타난다. 반면에, 비트겐슈타인의 논의의 외견상의 목적은 부정적이다. 즉 그것은 로든 일반 용어는 그 아래에 속하는 모든 것에 공통된 속성들을 바탕으로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독단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9) 비록 이 독단이 『논고』에 있는 분석 개념의 기초이고 그래서 그의 초기의 기본적인 오류를 갖고 있기는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비판은 아주 일반적인 매력을 발휘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대답은 개념들에 적용된 가족유사성의 은유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 그림의 주요한 요점 중 하나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할 수 있고, 많은 개념에 대한 이해가 무의식적으로 이 원형(Urbild)에로 구속되는데 대한 하나의 조처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을 아우구스티누스 그림의 비판이라는 백작에서 분리하면, 이전의 〈기호-정의〉의 장엄한 우상을 〈패러다임 내의 유사성들의 중첩에 대한 설명〉이라는 새 우상으로 대치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10)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기에 ‘새로운 보편자 이론’을 건설하기 위한 토대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개념의 전개
정의를 분석으로 파악하는 오랜 전통을 우리는 갖고 있다. 사람들은 개념을 그 성분으로 분해하며, 분석은 개념의 화학에서 솔벤트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너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어서 정의의 전통적 혹은 권위적인 개념이라 불린다.11) ‘정의는 복잡한 관념의 구성요소로 분해된다, 즉 부분들을 합친 관념들은 바로 피정의의 관념을 만든다.’ 라는 표현은 전통이 드러내는 가장 함축적인 기술 같아 보인다.
이 개념에 따르면, 정의들은 발견적 역할만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관념의 분석과 종합, 아마도 말을 가르치고, 숨은 함의들을 들추어내거나, 혹은 복잡한 사고를 요약하는데 유용한, 언어적 대응물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는 논리적으로 불필요한 것이다. 그것들은 복잡한 관념을 위해 약호들을 도입한다. 원리상, 이것들은 늘 제거될 수 있다. 어떤 문장이라도 피정의체를 정의체로 환치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이끌어낸 몇몇 문장과 논리상 동치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 그림과 꼭 들어맞는다. 어떤 물리적 대상도 화학 물질로 합성되듯이, 어떤 사고도 더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의 분석에서 가시적으로 되며, 그것의 보통 언어적 표현에서는 숨겨져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을 분석된 문장으로 적용하는데 제한을 두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의와 화학적 분석 사이에 유비가 있을 수 있으나, 논의가 여러 방향으로 확산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분석 개념에 고착되어 이 개념적 화학을 철학의 일차적 과업이라고 간주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이 개념을 주목하여 비판하고 있다. 정의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정의에 대한 정의를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해서, 개념을 그 본질적 부분으로 나누는 한편, 설명의 다른 형식은 무가치한 것으로 배척되었다.12) 그러나 프레게, 러셀,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모두가 개념의 설명은 분석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의 본질적 배경이다13).
첫째, 프레게는 한 개념단어의 올바른 적용을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열거하는 개념 단어의 정의를 요구했다. 그는 이 요구를 충족시키는 다른 방법을 알았지만, 표지 정의에 초점을 맞추었다.14) 어떤 것도 현행 목적을 위해 이 구분을 수행치 않으므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하듯이, 이 혼동을 무시한다. 정의란 논리적 성분인 표지들로서 개념의 내적 논리적 분석이며15), 이 모두가 합쳐져서 피정의 개념을 만든다.
둘째, 러셀은 논리적 분석을 철학의 본질로 인식했다.16) 그는 관념을 구성 관념들로 최대한 가능한 분석을 제공하고,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의 논리적 재구성을 하는데 필요한 단순하고, 분석 불가능한 ‘원시’ 관념들의 수를 최소로 줄이려고 의도했다.17) 분석은 정의의 형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분석은 원시적 관념들로 구성된 복합 관념들에 기호적 약호를 주므로, 이론적으로는 불필요한 것이었다.18) 분석이 끝나는 곳에 그것의 잉여물인 ‘비규정자들’ 이거나 논리적 원자들이 있다19).
셋째, 『논고』에는 표지 분석을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명백히 이것을 명제를 이름들만을 포함한 요소 명제들의 진리함수로 한 명제로 완벽하게 분석하는 것을 수행하는 기초 수단으로 간주했다. 이름들과 그것의 형이상학적 대응물인 단순 대상들은 러셀의 논리적 원자들과 같이 분석의 필수 잔여물이다. 이름들은 정의될 수 없으나, 해명을 통해 설명될 수는 있다20).
프레게, 러셀 및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모두 정의를 분석으로 파악해서 비규정자들에 대한 여러 이론들과 정의와 설명의 구분에 일치했다 하더라도, 어떤 특별한 개념들에 속하는 모든 것은 공통된 속성들을 나눈다는 이론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는 어떤 애매성이 있다. 그 논지는 어떤 단일한 개념 단어가 적용가능한 모든 것에 공통된 성질들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오히려 모든 것이 가진다는 것인가?
한 개념 단어가 적용되는 모든 것은 공통된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논지는 아주 소박해 보인다.21) 그 이유는 첫째, 그것은 단순 애매성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다. 이것은 상이한 개념 단어의 의미들 사이를 구분하고 그들에 대한 논지를 상대화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 둘째, 한 개념 단어를 이해하는 것은 그것의 표지 정의를 제공하는데 필수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개념의 의미를 알려면 그것의 외연에서 사물들의 공통된 속성들을 아는 것은 불필요한 것 같다. 세 번째, 왜 공통된 속성들이 꼭 있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 단어는 무용한가? 그것이 표지정의에 의하지 알고 달리 설명된다면 무용할까? 이 논지는 아마도 플라톤에게로 돌려질 수 있을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러했다.22) 또, 더 현학적인 해석이 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나중에 분석의 개념을 『논고』로 한정했다.23) 이것은 한 표현을 통하여 무엇을 이해하고 의미한다는 것은 하나의 한정적인 규칙을 통해 그것을 사용하는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의 표현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내가 그 규칙을 사용함으로써 특정한 무엇을 말하려고 의도한다는 사실은 내가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기준인 어떤 일반적인 규칙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이것은 바꾸어 말해서 한 개념 단어가 내가 그것을 의도한 것처럼 사용될 때 적용 가능한 그 대상들의 일반적 특성이 있다는 것, 즉 이 대상들에 공통적인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한 개념 단어에 대한 설명들은 그런 공통적 성질들을 언급할 필요는 없으나 이것은 단지 우리와 이해가 우리의 설명 능력을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표현들로서 의미하고 이해하는 것에 대해 깊은 수준에서, 내가 그것을 어떤 기회에 이해할 때 한 개념 단어에 속하는 모든 것은 공통된 성질을 틀림없이 갖고 있어야 한다24).
우리는 한 개념 단어에 속하는 것이 공통된 성질들을 보여줄 필요도 없고, 보여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런 입장에서 물러설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낱말들은 사실 한정된 고정적 의미 없이도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에 대한 한 표지 정의에 대한 추구는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런 언어가 엄밀한 사고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한 주어진 개념 단어가 적용되는 대상들은 공통된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이 대상들이 그것들을 갖고 있지 않으면, 이 대상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의 남용이다. 이러한 생각은 영국 경험론자들과 프레게에 있어서 특징적이다.25) 이런 중에서도, 앞에서 보았듯이, 예외적으로 William James와 같이 한 개념의 공통적 성질 소유에 대한 거부적 태도를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종교나 정부에 대한 일련의 연구가 그 현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정의를 탐구하는 초기 탐구에 의해 도움을 받기보다는 방해를 받고 왜곡되기가 훨씬 쉽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이런 탐구는 과도한 단순화와 독단론을 증진한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정의의 합법적 사용은 단순히 한 특정한 탐색의 영역을 구획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Whewell에 따르면,26) 자연사에서의 분류는 우리의 의도, 특히 생산적인 일반화의 정형화 의도에 좌우된다. 과학적 의도가 자연적인 위계에 대해 본질적 특징에 의해 규정되라고 명령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자연의 발전사의 분파를 점검해 보면, 패러다임(유형)의 유사성에 의한 위계의 체계화가 성공했음이 드러난다고 한다. 이것은 일반화에 도움이 되고, 또 정의하는 성질들을 조종함으로써 개량된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들과 맞서서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이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는 과학적 의도에 맞는 한 언어에서 전개된, 개념어의 표지 정의를 위한 요구를 비판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설명의 한 요소일 뿐, 지배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27) 보다 더 분명한 것은 그가 한 개념 단어가 적용되는 것마다 공통된 성질이 틀림없이 있다는 사고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소박한 플라톤 식의 개념이든, 좀 더 발전된 형태이든 간에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28)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이와는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놀이에 공통적인 무엇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고 알기’(look and see)를 권한다. 그리고는 바로 모든 것에 공통된 어떤 것은 보지 못하며, 다만 거기에는 유사성과 관계들과 전체 시리즈만을 볼 것이라고 말한다.29) 그렇다면 놀이에서 낱말의 의미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2.의미의 결정
1)계산 모델
그런데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말하는 것을 하나의 논리 내지는 수학적 계산을 조작하는 것에 비유했다.30) 이 비유는 크게 네 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31):
첫째, 언어를 말하면서 우리는 사고에 있어서 정확한 규칙의 복합 체계를 조작한다. 일상 언어의 명제들은 명백히 그런 계산의 부분으로 분석될 수 있다32).
둘째, 한 단어의 의미는 기호론에서는 그것의 대신이고, 그것의 바른 사용을 설명하는 규칙에 의해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한 문장의 이해는 그것을 그것이 없다면 문장이 죽을 체계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계산에서 한 문장의 역할은 그것의 의미이다.33) 셋째, 문법은 인과적 기계론이 아니다. 계산 규칙은 한 단어를 쓰는 가능한 결과가 무엇이 될 것인가는 상술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조작이 수행될 것인가를 상술한다.34) 넷째, 한 언어를 말하는 것은 하나의 활동인데35), 이는 마치 한 계산이 우리가 조작하는 무엇인 것과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계산 모델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36) 바른 것은 그의 후기 단평들이 계속해서 요점을 끌어내기 위해 언어와 계산을 비교하는 초기 30년대부터 자료를 반복한다는 것이다.37) 그러나 이 요점들은 또한 언어와 놀이, 특히 장기 놀이와의 비교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말놀이’라는 용어가 우선 계산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사용되기는 했어도38) 그것이 『청갈색책』의 시기까지 후자를 대치했다는 사실은 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의 변동을 나타낸다. 남은 것은 언어가 규칙에 통제를 받는 활동이라는 생각이다. 바뀌는 것은 이 규칙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이다. 문법의 규칙들은 그들이 형식적 계산의 규칙보다는 숨바꼭질과 같은 놀이의 그것과 닮아 있다. 마지막으로 『탐구』에서는 계산 모델이 ‘어떤 사람이 문장을 발화하고 그것을 의미하고 이해한다면, 그는 분명한 규칙들을 따라 하나의 계산을 조작하고 있다.’39)라는 견해라고 설명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견해에 대해 두 가지,즉 그 자신이 이전에 그것을 주장했고, 그렇지만 그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때때로 계산 모델은 비트겐슈타인이 논리 구문론의 관념과 문법의 관념 사이에 주장했던 언어의 개념으로 제공되었다. 그 비유는 이행기에서만 떠오르나, 정확한 규칙을 갖는 언어의 관념은 라이프니츠에게까지 소급된다. 공식화와 변형의 한정된 목록에 의해 통제되는 논리적 계산의 발전은 프레게와 러셀을 통해 고양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델은 ‘이상 언어’에만 적용된다고 주장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와 『탐구』 등에서 여러 용어로 바꾸어가면서 계산 모델을 유지하였다. 그는 명제 체계라는 관념이 좁은 범위의 적용, 즉 결정 가능한 것(길이, 색깔)의 한정들(5m 길이, 붉은 색)에만 있고, 심지어 거기에서는 하나의 한정 가능한 것의 한정들 모두가 동일한 순열 가능성들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점차적으로 그는 또한 정확하고도 엄격한 규칙 체계로서 말의 그림을 공격하게 되었다. 예컨대, 언어 규칙들은 프레게와 『논고』의 의미에서 한정사가 아니다. 규칙들은 경계가 되는 경우를 위해 사용되나 기호 결합이 허튼 소리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인식 가능한 환경을 지시해 주지는 않는다. 놀이에서도 동일한 것이 성립되며, 예컨대 서브를 넣기 전에 공을 얼마나 높이 던지는가에 대한 규칙이란 전혀 없다. 그러나 이것은 테니스를 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40) 실상, 모든 면에서 냉혹한 규칙들로 묶인 활동이라는 관념은 불합리한데,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그런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놀이에 있어서든, 미리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 무수히 이상한 가능성들이 있다. 테니스 규칙들은 만일 공이 날아가는 펠리컨에게 잡힌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상술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41).
비트겐슈타인은 계속해서 일상언어가 논리적으로 형식적 논리 언어들보다 더 열등하다는 생각을 배척한다. 그 대신, 그것은 우리는 공식적 계산의 ‘수정 같은 순수성’을 완벽한 질서가 무질서한 표면아래 숨겨져 있다는 것을 독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명료성을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42) 형식적 계산은 언어의 심층 문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의 유일한 합법적 철학적 역할은 비교의 대상으로서 이다.43) 그것들은 우리가 유사성과 비교를 통해 우리 문법의 개관을 성취하는데 도움을 준다.
계산 모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진리의 요소는 셋째와 넷째의 요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규칙이란 행동하는 것과 멀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적용을 통해서만 활용된다.44) 그러나 점차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계산 모델을 버리면서, 원숙기 저술에서 다양한 긴장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왜 우리는 이런 일방적인 목록 중심의 문법적 규칙들을 채택해야 하는가? 몇몇 이론에 의하면, 철학이 때때로 아무 것도 아닌, 다만 관련된 언어개념들의 특정한 왜곡을 대적하려는 목적을 위해, 명백한 규칙들을 만들고 이를 말한다.45)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규칙이란 우리가 우리의 실천에 있어서 규칙에 접근하는 것이 부인되고 어떤 규칙을 넘어서고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숨겨질 수 없다고 주장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발견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실패한다. 대신 그는 이것이 논리적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상 언어 철학에서 강조한 다양하고 복합적인 패턴과 애매한 의도에 의해서란 것을 보여준다.
2)의미 결정의 애매성
의미 결정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어떤 사례 문장의 의미가 완전히 결정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추정상 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보여줄 수가 없다. 우리는 어떤 언어의 한 문장을 어떻게 분석할 지, 그것을 어떻게 요소문장의 진리함수로 드러낼지를 모른다. 우리는 한 요소 문장 내지는 논리적으로 고유한 이름의 용례를 제공할 수조차 없다. 실제 언어는 논리적으로 투명한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 언어가 가져야 할 구조는 알지만, 이 구조는 일반적인 구조를 제외하면 아직 깊이 묻혀 있다. 언젠가는 분석을 통해 한 언어가 의미의 결정 요건들을 만족시키는 방법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의 만족은 선험적 연역의 결과로만 알려져 있다.
『탐구』가 애매성에 관해 『논고』와 완전히 반대가 된다는 접근 가능한 예측이 있다. 『탐구』에서 비결정적 의미 같은 것이 있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없다 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주장했다.46) 『논고』에서는 완벽하게 결정적인 것이 있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전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우리는 명백히 그의 단평들로부터 모든 언어는 다소 애매하다는 주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 ‘단군’과 같은 보통의 고유명의 의미는 전형적으로 약간 비결정적이다. 그래서 원리상으로조차도 이 비결정성을 제거할 방법이 없다.47)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 이름의 용법을 한 사람의 단일한 기술에다가 결부시킴으로써 ‘단군’을 정의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단군’은 ‘고조선을 창건한 우리 민족의 시조’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문시된 ‘단군’에 대한 적용의 여지를 남겨 놓는데, 왜냐하면 이 설명의 낱말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단어들을 정의해 나간다 해도, ‘붉다’, ‘어둡다’, ‘달다’와 같은 분리 불가능한 표현들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48) 따라서 하나의 이름에 대한 어떤 설명도 그 용법을 완벽하게 결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런 추정은 다른 종류의 표현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어떤 낱말이라도 아주 철저하게 설명되어질 수 없으므로 그 적용가능성에 대한 어떤 가능한 의문이라도 단 한번에 해결될 수는 없다. 설명에 대한 이런 면은 언어의 철학적 설명에서 애매성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퇴출시킨다.49) 비트겐슈타인의 저술에서, 모든 기호는 어느 정도의 애매성에 감염되어 있다는 러셀의 논지에 동조하는 논증을 찾아낼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가 있다. 물론, 양자는 의미의 언어적 설명들은 ‘붉다’, ‘어둡다’, ‘달다’와 같은 그런 비규정자들에서 끝난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다. 이것들은 아마도 예시적으로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명백히 예시적으로 정의된 어떤 표현도, 예시적 정의가 매 경우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50) 애매하다고 명백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한 명백히 모든 설명들을 예시적 정의들로 끝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표현은 어느 정도의 애매성을 분석 불가능한 표현들로부터 물려받고 있다는 관념에 의존해 있는 듯하다51).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정밀한 과학 언어는 애매성과 거리가 멀다는 희망을 뒤집어엎으려 하는 것 같다. 이 희망은 그에게는 근본적으로 개념적 오류에 근거해 있다. 그것들을 ‘정밀하다’고 부르는 것의 정당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정밀한 과학들은 그 기초적 용어들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모든 논쟁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것들은 가능한 논쟁의 비상식적으로 거대한 영역을 허락하는데, 이것은 이 용어들의 적용에 대한 실제적 논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언급 없이 지나가기는 하나, 기준과 증상들 사이의 동요는 과학적 개념들의 전형적 모습이다.52) 따라서 과학의 목적에 적합한 언어의 구성은 만연된 애매성에서 구원될 방법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이런 예측이 주어지자, 비트겐슈타인은 상당히 개혁적 성향을 띠게 된다. 그는 모든 언어란 애매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는 이 사실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매성이란 것이 반드시 언어의 결점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최소한의 주장은 그것이 늘 소통에 장애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 “대충 거기 서 있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알게 하기 때문이다.53) 그러므로 애매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는 명령이 늘 효용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정된 의미’를 전혀 갖지 않는 고유명의 용법을 통해 혹은 모든 가능한 적용을 해명하는 설명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부류의 용법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이해하는데 성공한다.54) 가족유사성을 전개시키는 우리의 역량은 애매성으로 인해 개념이 무용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구체적 증거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직 더 애매한 논지를 진척시킨다.55) 첫째, 정확함과 엄정함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의미의 설명을 통제하는 엄정함의 단일 기준, 정확함의 단일 이상이란 없다. 기준으로서 적절한 것은 환경과 우리의 의도에 의해 좌우된다.56) 둘째, 애매성은 전염성을 갖고 있다. 의미가 부분적으로 비결정적인 단어는 그것이 나타날 매 문장의 의미를 애매성으로 감염시킬 필요는 없다. ‘산은 나무로 뒤덮여 있다.’라는 기술은 우리가 ‘나무’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줄 수 없어도 아주 정확하다.57) 유비를 통해 볼 때 감염의 논지는 불합리함이 드러난다. 한 나라의 경계가 부분적으로 논쟁거리가 되면, 그것으로부터 아무도 분명하게 이 나라의 시민이 된다고 말해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가?58) 이 점에서 애매성을 두려워하며 대응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셋째, 설명에 대해 더 실용적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설명들이 규정된 표현들의 용법으로 일치된 관습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지, 실질적인 상황들과는 다른, 파악 가능한 상황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59) 한 설명이 실제로 신호등처럼 작동된다면 체계적인 것이다.60) 신호등에다 아무도 하지 않을 오해를 첨가했다가 제거하는 일은 아무런 진보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설명의 적정함은 일상의 관습적 기준에 의하여 판단되어야지, 어떤 비밀스런 이론적인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다. 언어의 결점은 실제에서의 일치의 부재이지, 실제로는 결코 일어나지도 않는 불가해한 불일치가 아니다61).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애매성은 원리상 제거 불가능하며, 의사소통을 위해 효과적인 용법에 필수 불가결하다.62) 이런 주장에 대해 우리는 그가 애매성이 언어의 결핍성이라는 직관적 확신에 공장하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혁명적 발전에 대해 다 기술한 것이 아니다. 애매성에 대한 그의 논평들은 그 의미가 다소 애매한 표현들에 대한 의미론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현대철학자들의 관심을 촉발시켜 애매성의 논리학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게 했다63).
우리는 이런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대한 거부에 나타나는 애매성의 중심적 지위에 주목하게 될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의미의 결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세웠던 이론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분해한다. 그에 의하면 논리적 고유명과 같은 것은 없다. 모든 문장이 유일한 분석을 갖는다고 상정하는 것은 미신이다. 언어, 사고 및 세계 사이의 조화는 『논고』의 형이상학과 심리학이 단순히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구성되었으므로 미미한 것이다.64) 『논고』에 대한 후기의 비판의 핵심은 의미의 결정성을 지지하는 기둥들의 붕괴인 것 같다. 따라서 『탐구』의 흡인력은 언어에서 애매성의 정당화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의미에 대한 우리 전체의 탐구를 실제 필요의 축을 돌림으로써 회전시킨 셈이다.65) 어떤 것을 말할 가능성은 의미의 결정성을 전제한다는 것을, 그래서 언어가 어쨌든 이 요구를 맞춘다는 사실이 그것을 통한 우리의 의사소통을 설명하는 것임을 비트겐슈타인은 주장했다. 우리가 언어를 의사소통을 위해 성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언어는 잘 되어 가는 것이고, 그리하여 결정성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않는 표현들이 유용하다는 사실은 이런 요구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언어든지 그 나름대로 사용 가능함을 보증해 주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가족유사성의 해석에 오해는 도대체 없는 것인가?
3.부분적 대안 해석
1)형식적 개념
『탐구』에서 가족 유사 개념의 일차적인 적용은 비트겐슈타인이 일찍이 형식적 개념이라고 특징지은 것이다.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언어’, ‘수’, ‘문장’, ‘명제’의 설명에서다.66) 다른 곳에서 그것은 러셀의 기호에 나타난 다양한 논리적 형식에 대한 그의 설명에 드러난다. 수학이 개념을 형성하는 방식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67) 그 이전의 텍스트에서는 가족 유사의 개념은 비록 그런 적용의 관념이 비트겐슈타인의 사고와 아주 가까운 것 같이 보여도 형식적 개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문장’, ‘수’, ‘규칙’, ‘단어’와 같은 그런 표현들은 예로써 설명되고, 그런 개념들은 그런 예들이 가진 유사성만큼 나아가며, 그것들은 흐릿한 경계들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사물들을 ‘규칙들’이라 부르는데,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 사이에 많은 유비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68)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아직은 가족 유사를 불러오지 않는다.
‘언어’, ‘명제’, ‘수’ 따위의 설명에서 가족 유사의 명백한 적용은 형식적 개념들의 이 초기 개념에서부터의 진보를 나타낸다. 그것은 이 단어들이 적어도 이해할 수 있게 사용되려면 그것의 일상 의미를 가져야 하며, 이것은 비록 철학 문법에서 드러나도 그것들에 대해 참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명제’나 ‘언어’라는 것들은 복잡한 방법으로 서로 관련된 구조의 가족들이다. 그것들은 비트겐슈타인이 한때 상상했던 형식적 통일성도 형식적 동등함도 갖고 있지 않다.69) 그런 낱말들은 그것들의 철학적 용법에서 일상적 용법으로 회귀해야 한다(116). 그런데 형식적 개념을 가족 유사 개념으로 취급하는 몇 가지 국면이 있다.
첫째, 우리는 ‘단어’, ‘명제’, ‘이름’, ‘개념’, ‘대상’, ‘수’, ‘말’, ‘설명’, ‘규칙’을 표지 정의를 제공함으로써 설명하지 않고, 그것들이 적용되는 예를 제공함으로써 설명한다. 따라서 명제들의 본질 즉 명제의 일반 형식 말하자면 명제라는 개념의 분석으로 드러나는 그런 것은 전혀 없다. 언어의 수의 본질과 같은 것도 없다.
둘째, 표지 정의의 부재는 형식적 개념들의 본질적 특성이 신비스럽고, 초월적이며,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70) 그것들이 진술되지는 않고 다만 이런 개념들에 속하는 것의 용법에서 보여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단어’, ‘명제’, 및 ‘수’와 같은 표현은 일상 언어의 일부로서 결정적 용법을 갖고 있다. 이런 개념들은 철학자가 명료화하여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실질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어떤 다른 가공의 개념이 아니다.71) 위험은 이런 개념들이 너무 조야하고 물질적이다 라고, 즉 우리가 더 애매하고,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것을 탐구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셋째, 패러다임의 유사는 정도의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예로 설명된 개념을 특별한 경우에 적용하는가의 여부를 마음대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둔다. 우리의 형식적 개념의 이해는 미리 어떻게 그것들이 새로운 예에 적용시켜야 하는가를 결정할 수 없다. 이 점은 형식적 개념들에 관해 강조되었다. 우리는 명제와 같은 그런 개념들을 마음대로 넓히거나 좁힐 수 있다.72) 우리의 자유는 말하자면 어떤 주어진 논리적 공간 안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 공간 자체를 확대시키거나 변경시킬 자유이다.73) 이런 형식적 개념의 예리한 경계선의 결핍은 문법의 자율성을 지지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것이 메타 철학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다는 이유 중 하나이다74).
넷째, 모범적 사례들을 통해 설명된 형식적 개념들은 통일성을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런 개념 단어의 합법적 적용 일부와 다른 표지 정의들의 그물망은 그 개념이 애매하다고 선언하는 이유가 아니다. 이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고는 발전된 과학적 철학에 거역한다. 우리는 범주 용어가 설명적 의미이론의 구성을 위해 요구되는 추상적 실재를 대표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정확한 동일성 기준을 말함으로써 명료할 필요가 있다. 상이한 동일성 기준은 상이한 개념들을 결정한다. 그래서 영어를 구사하는 철학자들은 형식 및 부호 문장들, 영구적 문장들, 진술, 상기, 명제, 짐작, 기술적 내용 및 일군의 현상내의 진술을 구분한다. 그래서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중요하고 필요한 일군의 구별을 하지 못했다고 고발한다. 명제라 불리는 상이한 것들과 많은 차이들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이것이 해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유사성과 차별성이 인정받으면, 어느 발화는 명제로 분류되고 어느 것은 되지 않는가를 분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명제 즉, ‘명제’, ‘문장’, ‘진술’, ‘언급’으로 달리 강조된 명제(Saetze)의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 이해에 결함일 것이다. 이런 점들을 다른 기술적 표현을 써서 표시해 보는 것은 합리적인 절차이다. 그러나 다른 개념들에게 들어가는 것 사이에서는 많은 유사 관점을 흐리는 모험을 감행시킨다. 불명료함의 지속이 중단되면,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진리치와 의미의 장치의 담지자를 파악할 입장에 처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진술은 진정 참, 거짓이 되는 것으로 선포된다.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로는, 이런 전개는 우스꽝스럽고도 치명적이다. 그것은 수학적 현학성이 합리적 수들만이 대상의 측정을 기록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주장만큼이나 우습다. 우리는 철학의 어려움이 극도의 미묘성을 기술하는데 있다는 환상 속에 있다.75) 반면에 실질적 어려움은 익숙하고도 세속적인 것들을 예리하게 부각시킨다는데 있다.
2)심리적 개념
한 동안 가족 유사 개념이 비트겐슈타인의 심리적 개념에 대한 토론에서 부각되었다. 즉 어떤 정신 활동, 상태, 과정을 대표하는 것 같은 표현들, 혹은 그런 심리 현상들과 관련된 표현들 등이 있었다. 그것은 ‘생각하다’, ‘기대하다’, ‘알다’, ‘의도하다’, ‘바라다’, ‘의미하다’, ‘이해하다’, ‘읽다’, ‘계산하다’ 등등과 같은 그런 동사의 설명에서, 그리고 ‘내가 말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과 같은 표현의 분석에서도 성과를 거둔다.76)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표현들의 각각이 서로 복합적인 인척관계를 갖는 집합 가족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여러 경우 그의 의도는 대단히 부정적이다. 즉 우리를 언어의 너무나 원시적인 개념으로부터 해방시킨다77).
그런 심리적 개념의 사용에는 특징적 일인칭 및 삼인칭 비대정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선 제일, 제삼 인칭 적용을 명료화하려고 가족 유사 개념을 불러왔다. ‘나는 …을 뜻한다.’, ‘나는 …할 의도이다.’, ‘나는 …를 믿는다.’ 등으로 시작되는 발화를 내적 상태 내지 과정으로,즉 화자의 직접 경험에 대한 기술, 이를테면 ‘나는 이가 아프다.’ 등과 같은 것과 평행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잘못이다. 만일 의도, 믿음, 의미 등등이 심적 상태로 특징지어진다면 그것은 가언적 심리 상태이지 우리에게 우리가 경험한 것의 일부분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다.78) 왜냐하면 내가 책을 읽거나 대화를 듣는 중에 내 경험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이해의 과정인 그 모든 것에 공통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대신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전체 집합 체험이며,상이한 이해의 경우들에 특징적이고 서로가 다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 체험들은 이해의 정신적 동반물이고, 잠정적인 이해의 과정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을 이해한다.’는 정신 상태, 과정 및 활동 가족에 대한 기술이지, 모든 이해의 경우에 공통되는 요소인 어떤 단일한 경험의 기술이 아니다79).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이, 삼 인칭 발화들은 명백히 화자의 직접 경험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시되는 사람의 행동의 기술에 대한 지시에 의해서만 지지나 비판을 받는다. 진술을 다소 그럴듯한 가설들로 해석하고 싶어지나, 결단코 결정적인 검증은 행동 기술을 통해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그후 이런 생각을 『청색책』에서 거부했다. 그런 다음, 계속 내적 상태를 타인에게 돌리는 행동적 기준이 틀림없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거기에 가족 유사 개념을 적용했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심적 활동, 과정 및 상태가 말하자면, 행동 특성 밑에 숨어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이 행동에서 명시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특별한 상태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어떤 사람을 기대하고 있다’는 문장은 한 상태를 지시한다.80)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기대라고 부르는 광범하고 다양한 행동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기대하는 모든 경우에 공통된 특별한 행동이란 전혀 없고, ‘그가 어떤 이를 기대하고 있다.’는 문장은 의미상 그것을 진술하는 기준인 그 사람의 행동의 어떤 기술과도 동일하지 않다81).
가족 유사의 심리적 개념의 용법은 사실상 『탐구』에서는 없어진다. 그것은 제 일 인칭 발화의 분석에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알겠다.’와 같은 그런 발화는 기술이 전혀 아니며, 심리 상태, 과정, 활동이라는 유형의 기술은 더더욱 아니다. 반면에, 초기의 설명은 하나의 유산을 갖고 있는데, 말하자면 어떤 것을 의미하고, 이해하고, 기대하고, 의도하고, 믿고, 생각하는 것 등은 행위를 수반하는 심적 과정, 상태 흑은 활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무엇을 읽고, 의미하고, 기억하는 동안 일어나는 것은 읽기, 의미하기, 기억하기 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82) 2, 3 인칭 발화의 경우, 가족 유사 개념은 꼭 한 번만 적용된다.83) 가족 유사를 도입한 의도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이기 때문에, 『탐구』에서 이 개념의 상실은 거의 놀랄 일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기준의 개념에 토대를 둔 1, 3 인칭에 관한 발화의 의미에 대한 긍정적 설명을 고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간의 걱정은 남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때때로 제3 인칭 발화에 설명을 주려는 것 같다. 가족 유사 개념과 내적 상태를 위한 행동 기준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84) 이 두 설명은 양립 가능한가? 기준들은 파기될 수 있고,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듯이, 심리학적 개념들을 행동 기준에 따라 적용하는 것은 행동주의 형식은 아니다.85) 그러나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믿는다.’를 한 가족 유사 형식의 적용으로 취급하는 것은 이 문장을 그 사람의 행동의 기술과 똑같은 수준에 올려놓는 것 같다. 그것은 적당한 환경 하에서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어떤 음색으로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는 논평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행동주의 형식과 같아 보인다. 즉, 마치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사람의 행동의 기술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논증은 문제가 된다. 가족 유사 개념이 떠오르고 나서는 언제나 비트겐슈타인은 행동주의에 찬동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저런 문장을 가설로 취급했지만, 그렇게 하면 행동을 지시함으로써 그런 진술의 정당화는 파기될 수 있었다. 파기 가능성은 기준의 검증일 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그가 가족 유사 개념을 심리적 개념에 적용하는 것의 강조이기도 했다.86) 이것은 그의 사고에 있어서 갈등의 출현은 오해의 산물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가족 유사에 대한 설명을 자기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많이 연구한 결과이다. 중요한 요점은 부정적인데, 우리가 이런 개념들(예컨대, 믿다, 이해하다, 의도하다, 기대하다, 의미하다… 등등)의 표지 정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것은 분명 그것들을 행동주의 기준에서 설명하는 것과는 모순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에서 또 다른 하나의 분명한 요점은, 가족 유사 개념들이 예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예를 통한 설명들을 그런 표현들의 바른 설명들로 주고 받는다. 가족 유사 개념들의 더 이상 확대된 설명은 사변적이다. 만일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의 기준 지시를 통한 표현 분석과 어긋날 때, 이것은 이런 생각들을 그에게 돌리는데 대한 반대 이유이지, 일관성이 없다고 그를 비난할 이유는 아니다. 이런 개념에 따르면, ‘믿는다’, ‘의도한다’, ‘이해한다’, ‘사고한다’ 등은 가족 유사 개념들을 대표하며, 그것은 지혜의 시작일 뿐이다. 내적 상태가 외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언어 전체를 조망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성취 단계로 보인다.
4.삶와 국면
1)삶의 형식
‘삶의 형식’(Lebensform)은 슈펭글러에 의해 처음 사용된 개념으로,87) 그가 개인 성격의 유형을 가리킨 것인데 비해, 비트겐슈타인은 문화, 세계관 및 언어의 연관을 강조하고 있다. 그 용어가 비트겐슈타인의 출간된 저술 중에 열 번 남짓 나오지만, 부분적으로 그 용어를 냉담하게 썼으므로 수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말놀이’라는 용어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활동이나 삶의 형식의 일부이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의도된 것이다.88) 그는 말하는 것이 규칙에 의해 인도되는 활동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우리의 말놀이는 비언어적 활동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 맥락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의 실질적 말의 패턴에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비언어적 맥락이 언어적 활동을 이해하는데 본질적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옹호하는 최선의 논증은 가공의 말놀이는 우리가 얼마나 그 가공의 이야기들이 가공의 사회의 총체적 실천에 맞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이 바르게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한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다.’89) 또 한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한 문화를 상상하는 것과 동등하다.90) 따라서, 한 삶의 형식은 하나의 문화 혹은 사회의 구조이며, 말놀이가 묻혀 있는 공공 활동의 총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와 동시에 삶의 형식에 대해서도 논한다. ‘분석할 수 없는, 특정한, 한정 불가능한 것 대신에, 우리가 이러이러한 방식들, 예컨대 어떤 행동을 벌하고, 이리하여 저런 사태들을 설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보고하고, 색깔을 기술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 수용되어야 하는 것, 주어진 것 ― 누군가가 말하겠지만 ― 은 삶의 사실들 즉 삶의 형식들이다.’91) 이 구절은 한 삶의 형식이 말놀이라는 것과 말놀이들이 있듯이 무수한 삶의 형식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동원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경우를 제외시킨 때도 삶의 사실들은 통일적인 말놀이가 아니다. 삶의 사실들은 도리어 한 삶의 형식을 구성하는 특정한 행동 패턴이다.
삶의 형식들이 언어의 기반을 제공한다는 생각은 두 가지 상반된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형이상학적 연구’를 통해서, 말놀이와 삶의 형식이라는 개념은 『논고』에 나오는 기호 재현의 초월적 전제 조건을 대치한다. 그러나, 우리의 공적 실천이 우리의 말놀이의 전제조건이라 하다라도, 이것이 그 실천의 정당화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더욱이, 문법으로 표현된 감각 조건들이 실재에 의해 결정되는 사실의 문제를 앞지른다 해도, 삶의 형식이라는 개념의 핵심은 문법이란 인간 실천의 중요 부분이고 그래서 변화된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그 대조를 탈초월화 시키는 것이다.
이에 반대되는 해석은 자연주의적 해석이다. 우리의 삶의 형식은 엄격하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는가를 결정케 하는, 불변적인 우리의 생물학적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보면 이해가 된다 그는 ‘인간의 자연사에 대한 논평’을 제공한다.92)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자연주의는 생물학적이기보다는 인류학적이다.93) 주문, 질문, 계산 및 일화는 걷고, 먹고, 마시고, 노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연사의 일부이다.94) 이런 활동들은 이미 인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활동이자 사회적 상호작용의 형식들이다. 또 측정과 심지어 수학 및 논리학까지도 우리의 자연사의 일부인 ‘인류학적 환경들’이다.95) 이 자연사는 문화적인, 언어사용적 생물의 역사이다. 우리는 삶의 형식들을 그것들이 융합되는 공통적 인간 본성과는 구별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고정된 생물학적 외양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실천을 강조한다.
언어적 실천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은 자연주의적 결정론을 수용하지 않고 문화적 상대주의를 수용하는데, 이것은 언어의 자율성 이라는 개념적 상대주의이다.96) 개념적 상대주의는 우리의 재현 형식들이 형이상학적 표준, 실재의 잠정적 본질에 종속됨을 부인하지만, 그것이 실용적 기준에 종속될 수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각 재현 형식은 자체의 고유한 합리성 기준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실용주의적 정당화조차도 특별한 말놀이에 내재적임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므로 외부에서 말놀이를 비판하는 것은 결코 합리적 논증의 문제가 되지 않고 설득의 문제일 뿐이다.97) 그러나 말놀이 상대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최후진술이 아니다. 삶의 형식의 틀 안에서, 특별한 말놀이를 정당화하거나 고치는 것은 가능하나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와 같은 문법적 명제는 우리의 예측의 비실재성에 의해 정당화될 지 모른다.98) 그렇게 비판받을 수 없는 것이 총체로서의 언어적 실천(삶의 형식)이다.
정당화와 의심의 내재에 대한 그의 지적은 관련된 실천이 제한한 방법을 통해 인식론적 용어들을 적용하지 못한다. 그 요점들은 문법적 논평이자, 이런 낱말들이 이 실천에서 사용되는 방법에 대한 상기물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다른 실천들을 넘어서는 방법에서 옳은 것이 되기를 갈구한다. 그것들은 다른 실천에 가담하는 철학자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한 말놀이에 가담하는데 대해 필연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병립될 성질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개념적 상대론자 일는지 몰라도 철학적인 상대론자는 아니다99).
비트겐슈타인은 예를 들어 신탁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사회에 반대하는 과학적 세계 그림을 정당화함으로써100) 우리가 보편적 가치들, 이를테면 경험과 성공적 예측에 대한 존중 등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기상학이 일기 예보에 있어서 더 낫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신탁을 고수하는 사회는 도구적 비 합리성을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들은 자기의 실천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하는 또 다른 가능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세계관이 그들의 것을 포섭하므로 더 풍성하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101) 그러나 다른 점에서 우리의 과학적 기술적 세계관은 실제로 더 빈곤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삶의 형식은 각기 다른 삶의 형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각각이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규칙의 다양성을 그 기반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또 문제인가?
가족유사성 개념의 전거는 『탐구』 65-71까지이다. 이 개념이 도입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놀이 개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언어와 놀이의 유비의 도움으로 이 전략은 언어 개념이 가족유사성 개념이라는 주장의 직접적인 지지를 제공한다.102) 비트겐슈타인의 탁월한 점은 몇 가지로 드러난다. 우선, ‘놀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은 우리가 똑같은 말을 그 모두에 적용하게 될 아무런 공통적 속성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다양한 놀이를 주의 깊게 보면, 그것들은 틀림없이 어떤 공통성을 갖고 있다라는 독단이 거짓임을 알게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놀이’의 아무런 바른 〈표지 정의〉도 없다. 어떤 정의도 부분적으로만 실질적인 ‘놀이’의 용법에 일치할 뿐이다103).
그래서 한 낱말에 표지적 정의를 제공하는 능력은 그것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조건이다.104) 놀이가 아무런 공통된 속성들도 갖고 있지 않다면, ‘놀이’라고 정의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고, 그래서 어느 누구도 ‘놀이’를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거기서 어느 누구도 ‘놀이’를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105) ‘놀이’를 놀이로 부르는 다양한 활동들을 만드는 것은 유사성의 복잡한 그물 구조, 즉 이런 다양한 활동들 사이에 있는 많은 관계들이다. ‘놀이’ 개념은 여러 가닥의 짧은 섬유로 서로 꼬아 놓은 긴 줄과 닮아있다.106) 그것은 많은 유사성들, '크고 작은' 유사성들이 겹친 채 한데 얽혀있다107).
‘가족유사성’이라는 표현은 그런 개념에 적용될 때 하나의 은유를 일으킨다. 한 놀이 개념을 구성하는 유사성들이 포개진 그물은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다양한 유사성들과 비교된다. 이것들은 아주 다른 종류이다: 체형, 얼굴표정, 눈이나 머리털의 색깔, 걸음걸이, 기질, 말하는 태도, 어법 및 교양에서의 유사성. 인식적으로 동일한 가족인 사람들 사이에 있는 유사점들을 헤아리면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러셀 가(家)나 합스부르크 친족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런 유사점들을 정확히 할 수 있으나, 친척 가족의 구성원들을 분류하는 것은 모두가 어떤 공통된 성질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성질도 그 집단의 구성원 조건으로 충분치 않으며, 또한 반면에 어느 것도 필요치 않다. 이것은 놀이와 같은 그런 개념들에 적용할 때 가족유사성의 은유가 그렇게 일깨워주는 바로 그런 무엇이다.
놀이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기본적으로 예시, 즉 놀이를 기술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108) 이런 예에 대한 유사성 구절은 늘어날 수 있다: ‘이것과 유사한 것들은 “놀이들”이라 불린다.’109) 다른 종류의 놀이가 어떻게 이와 같은 유비 위에서 건축될 수 있는가에 대한 토의, 혹은 다른 놀이에 들지 않을 어떤 활동의 세부화 등이 있다.110) 중요한 요점은 ‘놀이’를 설명하려고 사용된 예들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채택되어 사용되도록 의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다양성의 중심지’이다.111) 그것을 귀찮은 놀이 목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설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예들의 다양성은 그런 개념을 설명하는 중요한 측면이다. 따라서 ‘놀이’는 그것이 〈표지 정의〉가 주어질 수 없어도 설명 가능하다. 따라서 정의가 안된 표현은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관련된 유사성들을 끌어다 대면 ‘놀이’와 활용이 정당화되는데, 우리가 바르게 놀이를 ‘놀이’라 부르는 것은 놀이들 사이의 관계, 특히 활동과 놀이들의 모범적 사례들 간의 관계들로 말미암기 때문이다.112) 유사성이 있으면 이와 같은 모든 활동에도 동일한 단어를 쓰는 것이 정당화된다. 우리는 어떤 것이 ‘놀이’라고 정당하게 불리는 다른 활동들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놀이’라고 부르는 데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113) 놀이들은 단 하나의 가족에서도 나온다. 그것들을 한데 묶고 거기에 통일성을 주는 것은 놀이들 사이의 많은 유사성들이 중첩하기 때문인데 이런 통일성의 견해에서는 한 놀이의 개념, 즉 수의 개념 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114) 놀이라는 개념은 예리한 경계선을 가지 않는다.115) 그것은 〈표지 정의〉에 의해 설명되지 않으므로, 그 외연의 엄격하고 정확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설명은 패러다임에 의해 이뤄진다. 설명이 유사성 구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사성들의 범위나 정도를 한 행동이 놀이 개념에 속하기 위해 요구되는 패러다임으로 진술하지도 않는다.116) 예시를 통한 설명은 손가락으로 한 장소를 지적하는 것과 비길 수 있으나,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그것을 구획하는 것과는 비길 수 없다.117) 특별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한 놀이의 개념 주위에 경계를 그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여기 그을 것인가 저기 그을 것인가 하는 것은 무슨 장치가 이 목적을 성취하는가에 의해 좌우된다.118)
이런 진술들을 통해 볼 때 이 전체 논의의 주요 취지는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는 개념 단어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형성하는 광범위한 그림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의 출처는 어떤 개념이든 적용 가능한 것에는 무엇이건 공통된 어떤 것이 틀림없이 있다는 독단이다. 이런 독단에 너무 많이 함몰되어 있어서 우리는 끝임 없이 몸소 그것이 우리가 개념 단어들의 용법과 설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바르게 기술하고 있는지를 보고 알도록 촉구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념 언어의 효용성은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그렇게 정의할 가능성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족유사성이 내포하는 문제점은 없는가?
2)최소주의 해석
가족유사성 개념의 해명의 전거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독특한 설명의 요점은 잘 알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놀이’의 올바른 표지 정의란 없다.119) 어떤 제안된 정의도 부분적으로만 ‘놀이’의 실제적 용법에 부응한다. 따라서 한 단어에 표지 정의를 제공하는 능력은 그것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다.120) 놀이들이 공통된 성질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 ‘놀이’라고 그것들을 정의하는 능력은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라도 어느 누구도 ‘놀이’를 이해할 수 없다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은 거기서 이끌어 낼 수가 없다121).
비록 현저하게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유사성에 대한 논평은 그것이 순수 부정이나 반독단적이 아니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낡은 것 대신에 어떤 새로운 독단을 제안하고 있는가가 궁금하다. 첫째로, 비트겐슈타인은 놀이는 아무런 공통된 속성들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우리가 그런 사실을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122)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증거할 수 있는가?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불필요하게도 강력한 진술을 계속한다. 틀림없이 공통적 성질들이 있다는 진술을 반증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확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이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보다 더 약한 주장이다. 대부분의 대조되는 단락들은 더 신중하며, 이 약한 논지를 옹호하고 있다.123) 비트겐슈타인은 놀이들 사이의 유사성들은 놀이들을 ‘놀이들’이라 부르는 것을 정당화한다는 것과, 관련된 유사성들의 부재는 한 활동을 ‘한 놀이’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정당화하리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놀이’라는 용어를 적용하거나 보류할 근거가 늘 있어야 하는가?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늘 유사성들이 있어야 하는가? 상이한 푸른 물건들은 서로가 공통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푸른 것들의 범위는 유사성으로 연결된다. 이런 입장들은 한 대상을 ‘푸르다’라고 부를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족유사성의 은유 그 자체는 가족유사성 개념을 보류하는 근거들이 유사성의 부재가 아닌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124) 비록 어떤 가족의 특징적 면의 대부분이 어떤 한 사람에게 제시된 기준 안에 나타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가족의 일원이 아닐 수도 있고, 그리하여 한 사람이 어떤 한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판단은 단순히 자기 혈통에만 좌우된다. 이런 문제는 더 완전한 탐구를 요청한다. 만일 비트겐슈타인이 단순히 놀이들, 언어들, 혹은 수들이 우리가 모든 것에 동일한 단어를 쓰는 공통된 하나의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부정적 논지로 퇴각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125).
가족유사성 개념의 추정상의 통일성은 확실히 믿을 수 없는 것 같다. 한 가족의 동일성 기준은 무엇인가? 한 가족을 구성한다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이 단순하게 ‘놀이’가 패러다임에 의해 설명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한 놀이의 단일 개념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려고 했다면, 그의 의도들은 동일하게 잘 받아들여져서 이 곤란한 질문은 피했을 것이다. 그는 가족유사성 개념에는 아무런 선명한 경계가 없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 적용 가능성에 대한 한계적 경우나 논쟁들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가? 예를 들어, 수를 적용하는데 대한 수학자간의 일치는 수들이 한 가족을 이룬다는 것을 반증하는가? 그러나 이런 결론은 타당치 않을 것이다. 가족유사성 개념들은 어쨌건 표지 정의에 의해 도입된 개념들보다는 덜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특히 그 개념을 애매하다거나 ‘본질적으로 의문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126) 최소한의 해석이 주어질 때조차도 가족유사성에 대한 논평들은 분석으로서의 정의의 정통적 개념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다. 덧붙여 그 논평들은 개념 단어들을 설명하는 것, 그것들의 적용들을 정당화하거나 비판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서로 연관된 생각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3)가족유사성의 난점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 개념을 통해 어쨌건 낱말의 의미를 분석해 낸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철학적 분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유사성 개념의 적용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많은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이에 대한 대답이 없거나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개념이 순전히 부정적 의도로 도입되었으므로, 또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그 개념의 사용이 일반적인 비판적 논증의 일반화이므로, 그가 어떻게 그 개념을 사용하는지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줄 필요가 없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잘못도 아니다. 그의 설명에 대해 전통적으로 제기된 질문은 그 개념이 자기와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만 하면 등장한다. 우리는 왜 이런 문제가 그의 관점에서는 일어나지 않는지를 명료히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첫째, 범위의 문제가 있다. 가족유사성 개념들과 다른 종류의 것들 사이에는 어떻게 구획선이 그어질 수 있는가? 어떤 면이 한 개념을 가족 유사 개념으로 만드는가? 가족 유사 개념은 의미 설명의 특징적 형식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일군의 패러다임의 상술이다. 그러나 이런 형식의 설명은 그 한계조차 불분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의 ‘놀이’와 ‘수’의 설명은 패러다임으로서의 실재의 유형들, 예컨대 ‘장기’, ‘바둑’, ‘농구’ 등의 유형 활동이나 유리수나 실수와 같은 수의 유형들을 상술한다. 그런데, 패러다임이 특수하거나 구체적이면 어떤가? 우리는 ‘놀이’를 수많은 개별적 행위(token-activity)127)를 지시함으로써 설명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수를 2, 19, 1/4, 2 + j 등과 같은 패러다임을 인용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이것들은 동일한 형식의 설명으로 간주될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설명 형식은 표본과 예시적 정의에 의해 설명이 중첩된다. 다시, 설명된 종의 이름 가운데 박물관의 단일 종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설명된 유의 이름이 전형적인 단일 종을 가리킴은 아닌가? 패러다임의 다양성은 우리의 설명이 가족유사성 개념들의 설명에 의해 예증된 형식을 갖는 그 필요조건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충분조건인가? ‘붉다’는 하나의 설명이 다양한 표본을 통해 또는 ‘0, 1, 2, 3 등을 말하면서 자연수에 대한 설명을 다양한 패러다임으로 하는 설명과 동일성을 갖는가? 패러다임을 통한 설명을 그 자체 하나의 가족으로 취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떤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예리한 경계를 긋는다는 것은 아무 요점도 없는 것이 되고, 비트겐슈타인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비록 이런 불명료함이 없다 하더라도, 가족 유사 개념들의 경계에 대한 불분명함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개념들의 범주화가 어떻게 설명의 분류와 연관이 되는가? 하나의 가능성은 우리가 그 설명이 패러다임을 통한 설명의 형식을 취할 지 모를 가족유사성 개념으로 특징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등급을 아주 포괄적으로 만들 것이다. 또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의 부정적 사용을 막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일련의 예시를 통해 ‘원’을 바르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원들은 공통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즉 우리는 ‘원’의 〈표지 정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막을 것이다. 안티테제의 가능성은 가족유사성 개념으로 완벽한 설명은 우리의 설명의 관습에 맞추기 위해 패러다임을 통한 설명의 공식을 취해야 하는 어떤 표현을 특성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 등급을 매우 한정적으로 만들 것이고, 사실 관습상 보편적인 것에로 그 범위를 한정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비록 많은 종류의 것들이 패러다임과 유사로 설명되더라도, 그것 또한 종차의 정의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개념을 예시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가족 유사 개념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양립한다. 이 분류 기준은 가족 유사 개념들의 집합에서 단순 지각적 성질 개념들을 배제시키려면 더 세련될 필요가 있다. 개념들을 설명의 범주화를 기초로 해서 분류하기에는 상당한 가용치가 있다. 이것이 어떻게 발전되어야 하는가는 분류를 시행하는 목적에 따라 좌우된다.
둘째로, 일관성의 문제가 있다. 어떤 가족 개념이 일관성이 있는가? 그 개념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진 직접적인 연관 고리를 통해 유사성들이 중첩된다는 지시에 의해 설명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무제한적이어야 한다.128) 이런 설명을 따르면 모든 것이 그 개념에 포섭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어떤 면에서 그 밖의 것과 닮아있고, 어떤 것이든 두 개가 주어지면, 우리는 이웃하는 각 쌍이 많은 유사성들로 째어지는 일련의 중간 경우들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무 것도 그렇게 설명된 어떤 개념 하에 속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어느 가족 유사 개념도 공허하다. 이런 논증은 다양하게 잘못된 방법으로 진행된다. 그 각각은 일군의 패러다임이 주어지면 그것은 가족 유사 개념의 올바른 설명이 될 수 없고 단지 올바른 설명의 단편일 뿐이다 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필연적인 결과를 설명하는데는 여러 전략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우리는 어떤 것이 그 개념에 속하는가를 결정하는데 관련된 유사한 점의 정확한 목록을 요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 대신에 일련의 직접적 경우를 통한 유사보다는 한 패러다임을 갖는 직접적인 유사를 요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패러다임의 부정적 지시 즉 그 개념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한 예시를 통한 설명을 요구할 수 있다.
도전에 대한 이런 형식적 대응은 혼란스럽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표지 정의를 제공함으로써 ‘놀이’를 정의하지 않고, 우리는 그 단어를 쓰는 분명한 실천을 갖고 있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아무 것에건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양한 놀이의 예들을 매거하는 설명을 받아들인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설명을 구성하는 것이 바른 철학의 임무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엇이 잘못인가를,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철학적 논증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실례를 통한 ‘놀이’의 설명 형식에서 이런 설명이 이루어지는 실제적 용법에로 우리 관심을 돌리는 문제이다. ‘실천에서 적용될 수 있는 규칙은 늘 정상적인 것이다.129)’
세 번째는, 적용의 문제이다. 가족 유사 개념들의 적용을 정당화하고 비판할 가능성이 반드시 있는가? 그리고 만일 있다면 관련된 기초가 유사성과 비유사성 뿐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면서, 우리가 그것들을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라고 불리는 현상들 사이의 관계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130) 우리가 가족 유사 개념들의 적용을 늘 정당화하거나 비판 할 수 있다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예들에 대한 직관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일반화인 것 같다. 사격이 스포츠인가, 검객의 무술이 놀이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논의해야 할 점이 있는 것 같다. ‘왜 그것을 스포츠라고 불러?’는 합법적 질문이겠으나, ‘넌 못 보니?’ 등의 응수는 모욕이 될 겉이다.
또, 정당화와 비판이 패러다임과 유사한 또는 유사하지 않은 정도에 의해 제한되는가의 문제도 있고, 그것만이 열정적인 스포츠만이 정말 놀이인가 하는데 대한 논의에서 관련이 있나의 문제도 등장한다. 놀이와 의식 사이, 놀이와 극장의 연기 사이, 놀이와 전쟁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활동 및 모범적 놀이들 사이의 유사점들을 합치는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크게 봐서 유사성들’이라는 비트겐슈타인 개념의 불명료함으로 인해 도달되기 어렵다.131) 이를테면, 크게 봐서의 유사성들과 작게 봐서의 유사성들은 그것들이 현상을 자세히 뚫어지게 보느냐 대충 둘러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 크게 본 유사성들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만든 다음에야 비로소 놀이의 로든 정당화와 비판들이 유사성인가 이질성인가를 결정하게 할 것이다. 가족 유사란 개념이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로만 쓰인다면 이것은 전혀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통일성의 문제가 있다. 가족 유사 개념의 통일성은 불안정하다. ‘놀이’를 사용하는 복잡한 패턴을 단일한 가족으로 묶어 넣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놀이라는 그 개념을 말할 자격은 어디에서 확보될 수 있는 가도 중대한 문제일 수 있다. ‘놀이’를 활동에 적용하기 위한 정당화는 경우마다 다양하다. 다른 패턴들에 대한 다른 유사의 관점들이 인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개념의 통일성은 무엇이 거기에 포섭되는가를 결정하는 수단의 단일성에 있을 텐데, 그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상이한 ‘놀이’의 올바른 설명들이 있을 것이다. 상이한 패러다임의 목록이 사용될 수 있겠으나, 어떤 두 개와 바른 설명이든 서로 중첩되는 목록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다. 어떤 설명은 유사성 구를 포함하겠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놀이’에 똑같은 단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떻게 그 용어를 설명하는 데 있는 가변성과 양립할 수 있을까? 개념의 동일성의 기준은 무엇이 될까? 우리는 어떤 종류의 동일 관계를 ‘놀이’의 설명에 도입시켜, 잘 정의된 동일 등급에서 선택된 설명이 바른 ‘놀이’의 설명을 구성하게 할 것인가도 문제시된다. 이 동일성 관계는 어떻게 정의될까? 그 용법은 어떻게 정당화될까? 이런 질문들은 의미에 대한 설명들이 밀접하게 관련될 때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그 다음으로, 가족 유사 개념들의 범위의 문제가 있다. 어떤 개념들이 이 집합에 드는지, 더 중요하게는, 그 안에 드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개념 전부인지 아니면 전무인지 하는 문제이다. 만일 있다면, 이 사실의 함의는 또 무엇이 되는지도 궁금하다. 어떤 사람은 한 개념 단어가 거기에 표지 정의를 제공할 수 없는 경우에만 가족 유사 개념을 도입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가족 유사 개념은 분석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한 개념의 중대한 속성이 바로 분석 불가능성이라고 간주해 왔다. 문법의 자율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중대한 의미를 개념 단어의 분석가능성에 두는 이런 이유를 거부한다. 정의 불가능성도 주어진 재현 형식내의 개념 언어의 모습이어서 그것의 설명 규범에 상대적이다.132) 우리가 아주 교묘하게 개념 언어의 표지 정의를 날조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우리의 이전 믿음과는 반대로 그것이 실제로는 분석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분석 가능성은 폭로되지도, 은폐되지도 않고, 다만 규정될 뿐이다. 한 개념 언어의 분석 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런 규정이 오늘날 그 단어를 이해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가, 즉 그것을 설명하는 실천이 표지 정의의 제공을 포함하는가 여부이다.
그렇지만, 어떤 종류의 개념은 다른 개념들로 된 어떤 체계들과는 상대적으로 분석 불가능하고, 그래서 그런 어떤 분석 불가능한 개념들을 전적으로 가족 유사 개념들로 구성된 것으로 특징 지우는 것이 우리 언어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정적 관찰의 중요성은 어떤 종류의 개념을 표지정의가 가능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향에 좌우된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 우리는 쉽게 분석 불가능성의 외관을 설명해버리는 신화를 쌓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두 가지 경우에 주목한다.
지금까지 의미의 발생 근거로서의 가족유사성이라는 사태를 살펴보았다. 이미 알고 있듯이, ‘가족-유사성’이라는 표현은 부정적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즉, 비트겐슈타인이 ‘가족유사성’을 말할 때, 이것은 〈가족유사〉라는 어떤 새로운 사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어를 다른 두 사태에서 사용하는 경우, 그것은 ‘일치한다’ 거나 ‘유사하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일치하지 않다’거나 ‘가족(안: not) 유사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치한다’(be identical)와 ‘유사하다’(be similar)는 풍기는 어감이 비슷해 보일 지 몰라도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치하다’는 질적인 표현이라면, ‘유사하다’는 정도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이다.133)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둘을 일상의 언어사용에서는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손잡이〉라는 단어를 같이 쓰기 때문에 브레이크, 주유기, 문손잡이, 따위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손잡이를 동일한(일치하는) 것으로 동일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의 이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손잡이〉를 통해서 이름으로 붙여지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비트겐슈타인이 말놀이의 지시작용의 인위성을 거부하면서 그 이전의 언어철학자들을 비판한 이유는 그들이 의미의 유사성을 동일성과 혼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록 모든 손잡이들을 하나의 〈손잡이〉로 환원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과 같이 잘못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몸통’이나 ‘아무 것도 아닌 것’과는 분명히 다른 ‘손잡이’라는 한 단어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때 ‘공통적인 사용’은 인위적인 작용도 아니고, 각 단어의 용법이 서로 다른 부분도 아니고, 유사한 부분과도 다른, 어떤 부분이다. 이것은 또한 형이상학적인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런데 이 공통적 언어의 용법은 삶의 형식으로부터 확보된다고 볼 수 있다. 원초적으로 삶의 형식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즉 사소한 단어의 선별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 관련된 문제라면, 낱말의 용법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들어보자:
수용되어야 하는 것, 주어진 것은 ― 그렇게 말할 수 있듯이 ― 삶의 형식들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색깔 판단에서 일치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붉다” “파랗다”라는 단어들을 우리의 ‘색깔 단어’라고 부르기 위해 무슨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
그들은 이 단어들을 사용하기를 어떻게 배우는가? 그리고 그들이 배우는 말놀이는 여전히 우리가 ‘색깔 이름’의 용법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인가? 분명히 여기에는 차원의 차이가 있다134).
여기서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단어 사용의 다른 차원, 즉 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으로서 구체적 색깔이 말해지는 차원과 언어 자체가 문제되는 차원을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족유사성이 부정적으로가 아니라 긍정적으로 공통된 차원의 의미 결정의 단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란 불가능할까? 이런 의구심은 우리로 새로운 의미론 설명의 도전을 시도하자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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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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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tgenstein, Ludwig, Notebooks 1914-16, ed. G. H. von Wright and G. E. M. Anscombe, tr. G. E. M. Anscombe(Blackwell, Oxford, 1961)
Wittgenstein, Ludwig, On Certainty, ed. G. E. M. Anscombe and G. H. von Wright, tr. D. Paul and G. E. M. Anscombe(Blackwell, Oxford, 1969)
Wittgenstein, Ludwig, Philosophical Grammar, ed. R. Rhees, tr. A. J. P. Kenny(Blackwell, Oxford, 1974)
Wittgenstein, Ludwig,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ed. G. E. M. Anscombe and R. Rhees, tr. G. E. M. Anscombe, 2nd edition(Blackwell, Oxford, 1958)
Wittgenstein, Ludwig, Philosophical Remarks, ed. R. Rhees, tr. R. Hargreaves and R. white(Blackwell, Oxford, 1975)
Wittgenstein, Ludwig, Remarks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ed. G. H. von Wright, R. Rhees, G. E. M. Anscombe, revised edition(Blackwell, Oxford, 1978)
Wittgenstein, Ludwig, Remarks on the Philosophy of Psychology, Volume I, ed. G. E. M. Anscombe and G. H. von Wright, tr. G. E. M. Anscombe(Blackwell, Oxford, 1980)
Wittgenstein, Ludwig, Remarks on the Philosophy of Psychology, Volume II, ed. G. E. M. Anscombe and G. H. von Wright, tr. G. E. M. Anscombe(Blackwell, Oxford, 1980)
Wittgenstein, Ludwig, Remarks on Colour, ed. G. E. M. Anscombe, tr. L. L. McAlister and Margarete Scha¨ttle(Blackwell, Oxford, 1980)
Wittgenstein, Ludwig,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 D. F. Pears and B. F. McGuinness(Routledge and Kegan Paul, London, 1961)
Wittgenstein, Ludwig, Zettel, ed. G. E. M. Anscombe and G. H. von Wright, tr. G. E. M. Anscombe(Blackwell, Oxford, 1967)
Russell, Bertrand, Logic and Knowledge, Essays 1901-1950, ed. R. C. Marsh(Allen and Unwin, London, 1956)
Waismann, Friedrich, The Principles of Linguistic Philiosophy, F. Waismann, ed. R. Harre´(Macmillan and St Martin's Press, London and New York, 1965)
Waismann, Friedrich, Luwig Wittgenstein und der Wiener Kreis, shorthand notes recorded, ed. B. F. McGuinness(Blackwell, Oxford, 1967). The English translation, Wittgenstein and the Vienna Circle(Blackwell, Oxford, 1979), matches the pagination of the original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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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ed. G. E. M. Anscombe and R. Rhees, tr. G. E. M. Anscombe, 2nd edn(Blackwell, Oxford,1958). 이하 본문에서는 『탐구』, 각주에서는 PI라고 줄여 쓰며, 제1부는 절의 번호를, 제2부는 책의 쪽수를 표시한다.
2) 여기에서 ‘중심’이란 ‘본질’이라는 함의를 갖고 있다. 즉 전체를 투과하는 본질적 모습을 상정할 때 본질의 중심부에 얼마나 근접해 닮아 있는가가 비로소 문제삼아진다. 그러나 중심부와 주변부의 구별이 없을 때 이런 논의는 각각의 경우 다르게 말해진다. 가족유사성은 바로 후자의 경우를 전제로 사용된다.
3)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Grammar, ed. Rush Rhees, tr. Anthony Kenny (Blackwell, Oxford, 1974), 74-5. 이하에서는 PG로 줄여서 씀.
4) Hanjo Glock, A Wittgenstein Dictionary (Blackwell, Oxford, 199), 120쪽.
5) Ludwig Wittgenstein, The Blue and Brown Books (Blackwell, Oxford, 1958) 17-8.
6)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 D. F. Pears and B. F. McGuinness(Routledge and Kegan Paul, London, 1961). 이하에서는 이것을 본문에서는 『논고』, 각주에서는 TLP로 줄여서 씀.
7) Mill, Nietzsche, Whewell, James 등.
8) William James는 자신의 저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제2강의 첫면에서, ‘종교’, ‘정부’ 따위의 낱말을 단일한 원리나 본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거기서 그는 그런 것들을 ‘하나의 집합 이름’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9) G. P. Baker and P. M. S. Hacker, Wittgenstein: Meaning and Understanding ?Essays on the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lackwell, Oxford,1980), 185쪽. 이하에서는 MU로 줄여서 씀.
10) 같은 곳. Hacker는 여기서 가리키기만 하면 정의된다는 뜻으로 표지 정의(Merkmal-definition)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초기 비트겐슈타인 내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암시했다.
11) Frege, ‘On Concept and Object’, Translations from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Gottlob Frege, 42쪽.
12) PG 120 이하; BB 20쪽.
13) PI, 65 이하.
14) Frege, The Foundations of Arithmetic, tr. J. L. Austin, 2nd ed. (Blackwell, Oxford, 1959), 53, 49.
15) Frege, ‘Function and Concept,’ Translations from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Gottlob Frege, 35쪽.
16) Russell, ‘Theory of Knowledge’, p. 188. MU, 188에서 재인용. 그의 개념은 Moore의 것과 가깝다.
17) B. Russell, The Principle of Mathematics, 2nd ed. (George Allen and Unwin, London, 1937), 27쪽.
18) 같은 책, 429쪽.
19) 같은 책, xv 및 Logic and Knowledge, Essays 1901-1950, ed. R. C. Marsh(Allen and Unwin, London, 1956), 179쪽.
20) TLP, 3.263.
21) MU, 188-189쪽.
22) L. Wittgensbein, On Certainty, ed. G. E. M. Anscombe and G. H. von Weight, tr D. Paul and G. E. M. Anscombe(Blackwell, Oxford, 1969), 8, 75. 이하에서는 OC로 줄여쓴다.
23) PI, 81.
24) 이런 전략은 PI, 75-88 사이에서 발전, 비판되어졌다.
25) 이것은 밀과 러셀의 저작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밀은 언어가 구조적으로 자란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특히 한 용어의 외연이 점차 확장될 때 유사성의 중요성을 주목하고, 일상적 개념들에 대해 Dugald Stewart의 분석을 인용한다. 일상적 개념들의 외연은 일련의 매개 고리들에 의해 상이한 중첩 유사성들로 연결된다는 것이다(J.S. Mill, A System of Logic, I, I, 5.).
26) W. Whewell, 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vol. I, 2nd ed. (Parker, London, 1847), 466-499쪽, MU, 190쪽 재인용.
27) 같은 곳.
28) PI. 66. 81.
29) PI, 66.
30) L. Wittgenstein, Philosophical Remarks, ed. R. Rhees, tr. R. Hargreaves and R. White(Blackwell, Oxford, 1975), ch. XX; PG. 57, 63.
31) Glock, 앞의 책, 67쪽.
32) L. Wittgenstein, ‘Some Remarks on Logical Form’,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suppl. vol. 9(1929), 162-171쪽. 또 Wittgenstein's Lectures, Cambridge 1930-32, from the Notes of John King and Desmond Lee, ed. Desmond Lee(Blackwell, Oxford, 1980), 117쪽.
33) PG, 130, 59, 172; BB, 5, 42쪽.
34) PG, 70.
35) PG, 193; F. Waismann, Ludwig Wittgenstein und Wiener Kreis, ed. B. F. McGuinness(Blackwell, Oxford, 1967): 171-2쪽.
36) Glock, 앞의 책, 67쪽.
37) 예컨대 PI 14n, 559, 565 등등.
38) PG, 67.
39) PI, 81.
40) PI, 68, 83; OC, 139.
41) PI, 80, 84-7.
42) PI, 98-108.
43) PI, 131.
44) BB, 13-14; PG, 80-1
45) Z, 467; Remarks on the Philosophy of Psychology, Volume I, ed. G. E. M. Anscombe and G. H. von Wright, tr. G. E. M. Anscombe(Blackwell, Oxford, 1980), 51-2. 이하에서는 RPP I으로 줄여서 씀.
46) 결국 언어는 일상적 삶에서 그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도로 표지판의 경우에 명백하게 드러난다. PI, 87 참조.
47) PI, 79.
48) PI, 87.
49) F. Waismann, The Principles of Linguistic Philosophy (Macmillan & Company Ltd., 1965), 72쪽. 이하에서는 PLP라고 줄여서 씀.
50) PI, 28.
51) MU, 215쪽.
52) PI, 79; Zettel, ed. G. E. M. Anscombe and G. H. von Wright, tr. G. E. M. Anscombe(Blackwell, Oxford, 1967), 438. 이하에서는 Z로 줄여서 씀.
53) PI, 71.
54) PI, 69, 79, 80.
55) MU, 215-7쪽.
56) PI, 88 참조.
57) PI, 70 참조.
58) Z, 556.
59) Z, 114.
60) PI, 87.
61) Mu, 216쪽.
62) 같은 곳.
63) 예를 들어, M. Black, ‘Vaguenss: an Exercise in Logical Analysis,’ S. Koemer, Conceptual Thinking 및 Experience and Theory 등이 있다.
64) MU, 같은 곳.
65) PI, 108.
66) PI, 65, 67, 108, 135, 179.
67) L. Wittgenstein, Wittgenstein's Lectures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Cambridge 1939, ed. C. Diamond(Harvester Press, Sussex, 1976), 270쪽; RFM 138, 155, 180, 186.
68) PG, 117.
69) PI, 96, 108.
70) PLP, 165.
71) PLP, 32.
72) PG, 117.
73) PG, 115.
74) PI, 121.
75) PI, 106.
76) PG, 74, 141; BB, 19, 32, 86, 115, 119, 124, 144, 152쪽; PI, 236; Z, 26.
77) PG, 74; BB 17쪽.
78) MU, 203쪽
79) BB, 20, 32쪽 이하, 86쪽 이하 참조.
80) BB, 115쪽.
81) 같은 곳.
82) PI, 33, 152; 321, 217쪽.
83) PI, 164.
84) PI, 164; BB, 144.
85) PI, 307.
86) BB. 145쪽 이하; PLP, 141.
87) 『서구의 몰락』, I, 55쪽.
88) PG, 23; RFM, 335 및 MS, 119, 148 참조.
89) PI, 7, 19.
90) BB, 134쪽.
91) RPP I, 630; MS, 133, 54.
92) PI, 415.
93) Glock, 앞의 책, 126쪽.
94) PI, 25.
95) RFM, 352-3, 356, 199.
96) MS, 109 58 참조.
97) OC 92, 262, 608 등.
98) L. Wittgenstein, Last Writings on the Philosophy of Psychology, Vol. I, ed. G. H. von Wright and H. Nyman, tr. C. G. Luckhardt and M. A. E. Aue(Blackwell, Oxford. 1982). 188.
99) Glock, 앞의 책, 127쪽.
100) OC, 609.
101) OC, 286.
102) PI, 65 참조.
103) PLP, 180.
104) PG, 70; PG, 67.
105) PI, 69, 75 참조.
106) PI, 67.
107) G. P. Baker and P. M. S. Hacker, An Analytical Commentary on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lackwell, Oxford, 1988), Exg 66 참조.
108) PI, 71, 69.
109) PI, 69.
110) PI, 75.
111) L. Wittgenstein, Eine Philosophische Betrachtung, ed. R. Rhees, in Ludwig Wittgenstein: Schriften 5 (Suhrkamp, Frankfurt, 1970), 190.
112) PI, 65.
113) PI, 67.
114) PI, 68, 70.
115) PI, 69, 71, 68.
116) PG, 117.
117) PG, 71, 118.
118) PG, 118.
119) PG, 68-69.
120) PG, 67.
121) PG, 75.
122) PG, 65.
123) BB 86쪽; PG, 75 등.
124) MU, 193쪽.
125) PG, 65.
126) PG, 87.
127) ‘개별적’(token) 이라는 말은 ‘유형적’(type)이라는 말과 대비되는 구체적인 사례를 일컫는 것으로 심리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128) PG, 76.
129) PG, 282.
130) PI, 65 참조.
131) Baker and Hacker, An Analytical Commentary on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Exg. 66 참조.
132) Exg. 78.
133) 이를테면, ‘일치한다’는 ‘……한다’ 혹은 ‘…하지 않는다’로 정언판단이 가능한데 비해, ‘유사하다’는 그렇게 할 수 없고, ‘많이(혹은 적게) 유사하다’와 같은 판단만이 가능해 보인다.
134) PI,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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