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머리말
2.1930년대 시문학의 계몽주의와 모더니즘
3.방언주의와 미적 형식주의의 중층 구조
3.1.『사슴』에 나타난 유년 체험의 형상화
3.2.신화와 ‘방언주의’ 미학
3.3.방법으로서의 미적 형식주의
4.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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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겨레어문학회
학술지명 겨레어문학
ISSN 1226-2420
권 25
호 1
출판일 2000. 8. 31.
신화, 방언주의, 미적 형식주의
(백 석論)
박성현
건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4-155-0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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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머리말
신문학이 보여준 계몽주의적 충격의 실체가 점차로 가시화 될 무렵, 우리 문학의 미학적 가치를 재구하고, 반성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모더니즘이 등장한다. 주지하듯 모더니즘은 1930년대 문학의 내적, 외적 파토스를 이루며 문단의 한 계보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미 20년대 후반 정지용에 의해 그 가능성이 보여진 모더니즘은 최서해, 김기림 등에 의해 정교한 이론적 색채를 띠며 발전하게 된다. 백석의 시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배음(背音)이 짙게 깔린 30년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결국 그가 30년대 모더니즘의 한 계보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30년대 모더니즘 사유의 한 방법적인 측면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백석에 대한 연구는 주로 평안북도 정주라는 지방성과 관련하여 논의가 되어왔다. ‘地方的인 民俗的인 것에 執着하여’, ‘特殊한 一境地를 開拓하였고 그것으로 成功한 사람1)’ 이라는 백철의 평은 백석의 특유한 개성을 일찍부터 잘 짚어낸 것이다. 그러나 일견 백석의 지방성에 대한 집착을 백석 고유의 꼬리표로 삼는 것은 백석 시에 대한 지나친 과소평가일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백석시의 지방성은 그 지방성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민족적 형식과 내용으로 승화된, 보편화된 지방성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민족적 형식과 내용으로 승화된, 보편화된 지방성이기 때문이고 둘째 백석의 후기시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 없이 『사슴』에 대해서만 한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백석 시에 과도한 지방성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 극단화될 경우 그것은 백석 시를 민족시이나 민중시의 원형으로 평가절상 하게 된다2). 백석 시에서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발견해내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그것이 민족시의 원형으로까지 승화되기에는 많은 연구 작업이 수행되고 더불어 백석의 삶의 궤적이 온전히 복원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백석 시에 대한 오장환류의 비난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오장환은 백석시의 과거지향적이고 풍물주의적인 서사와 방언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 白石은 詩人이……詩를 作亂하는 한 모던청년”에 불과하며, 그의 시가 앞날을 얘기한 것이 없고, 자기의 감정이나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가진 사투리와 예니야기 年中行事의 묵은 記憶等을 그것도 질서도없이 그저 곡간에볏섬?듯이 그져 구겨넣은데에 지나지 않는다 3)”고 평가하고 있다. 『사슴』이후의 작품들이 이후 거론되지 않았음에 비추어 볼 때, 오장환의 시각의 편협한 점을 감출 수는 없다. 물론 ‘정치적 무의식’에 침윤된 백석은 당시 일제와의 대적을 감내할 줄 몰랐던 그런 의미에서 ‘모던청년’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그 기저음에서 터지는 고향에 대한 집착은 당대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반사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으로 1930년대 문학사적 조류와 관계하여 백석 시의 모더니티를 이미지중의 정수로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백석이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일본의 청산학원 영문과를 나왔고,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장해 활동한4) 1930년대 중반의 문단 상황으로 볼 때, 그가 당시 일급 이미지스트였던 정지용이나 김광균, 김기림으로부터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백석 시를 ‘이미지즘’의 지반에 고정시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백석의 시에서 ‘과격한 모더니스트’인 이상의 시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기호의 배열을 통해 시를 비(非)시에까지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면, 백석은 유년 시절의 체험을 파편화 된 서사로 배열함으로써 극단화시키고 있다. 요컨대, 이상과 백석은 계몽주의적 시문학을 거부하고 미적 형식주의를 추구함으로써 철저한 모더니즘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2.1930년대 시문학의 계몽주의와 모더니즘
한국 신문학에 있어서 ‘근대’는 이중적이다?다소 냉소적이고 허무적인 풍경과 현란하고 외경스러운 풍경.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로 인한 타설적인 측면이 강했던 개항 이후 점점 제국주의적 팽창과 침략 정책으로 국권상실의 기미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시대였고, 한편 개화로 인해 신문물이 빠르게 유입되고, 민족의 생활 전반에 걸쳐 개혁과 변화가 감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신문학 태동기에 무거운 배음(背音)이 되었던 ‘근대’의 복잡한 풍경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과 중국보다 뒤늦은 ‘근대’에 대한 자각과 관심은 정치적, 문화적 흐름에 따라 두 가지 이질적인 풍경을 형성해 나가면서 근대적 사유의 핵심을 점유하기에 이른다5). 그러나 이 두 풍경은 ‘지양 없는 모순의 대립’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데, 전자는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적 계몽주의로, 후자는 이인직과 같은 서구화(혹은 일제화)계몽주의로 그 이데올로기적 양상을 좁혔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문학의 풍경은 여러 문학 장르가 혼재했던 시기로 가히 문학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시간적 흐름은 공간의 중력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전통 시간과 근대적 시간 사이의 ‘지속’은 자신의 힘을 보존하는 ‘계보’로 발전하지 못하고 단명한 문학 장르를 양산하고 만다. 물론 신문학에 가해진 계몽주의 충격은 후대의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발휘하는 에너지원이 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문학 하는 일’이 곧 계몽과 연결되었던 근대에서, ‘독자가 곧 작가가 되었던’자체 충족적 문학은 두 가지의 방향에서 신문학의 풍경을 점유한다. 첫째는 백가쟁명식의 문학 장르들이 혼재햇으며, 둘째, 전문 작가의 부재와 문학의 제도적 미분화로 신문학의 지속성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대 초기 문단의 대표주자엿던 이광수와 김동인, 그리고 최남선과 김억 등의 근대 문학에 대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이들 각각의 전망들이 보다 정교한 이론적 색채를 띠게 되면서부터 계몽주의적인 근대의 ‘인식소’는 기하급수적으로 문단 곳곳에 삽입되었다.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30년대의 문학적 담론공간 양상은 이러한 근대의 인식소가 스스로 추진력을 갖고, 자신의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요컨대, 30년대 문학은 자체 반성을 통해 문학적 지형도를 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모더니즘 문학이 사회와 유리된 작가들이 쏟아내는 영감의 소산이 아니라 작가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동시대의 독특한 사회적 분위기와 구조와 맞물려 만들어지는 생생한 문학이기 때문에6),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기지에는 모더니티, 즉 근대성의 실현이라는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작가의 자의식이나 작품에 투영되고 있다. 이 시기의 문학에서만큼 ‘근대’에 대한 반성과 모색, 그리고 성찰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이루어졌던 시기도 드물 것이다. 따라서 신문학과 1920년대 문학의 계몽주의적 파토스는 30년대에 들어서 내면화되면서 “계몽주의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인가?”라는 문제 의식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7).
요컨대, 30년대는 20년대부터 문단의 주류를 이루어왔던 카프가 해산되고 그 구심점을 대신할 만한 어떤 문단적, 정신적 정점도 성립되지 않은 채 숱한 반성과 논쟁이 오가던 시기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인회’로 대표되는 문단의 조직성과 중심성 자체를 반서의 대상으로 삼는 낯설고도 세련된 문학태도를 보이는 일군의 문인들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어느 때보다도 많은 잡지들이 창간되어 문학에 관한 관심과 기대를 모으기도 햇던 시기라 할 수 있다8). 이는 곧 신문학에서부터 이어져 온 ‘계몽주의’라는 역사적 초자아에 억압되었던 다양한 무의식적 욕망들이 역사의 표면위로 부상하는 현상이다. 이는 곧 앞서 말했던 ‘국권회복’이나 ‘서구화(일제화)’가 ‘근대성’의 화두로 더 이상 기능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시문학의 경우에 있어 언어적 반성을 통한 ‘시어의 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동양적 애상과 낡은 운율을 버리고 ‘새로운’ 시를 향해 질주하자는 김기림의 주장을 통해 드러나는 ‘시어의 혁신’은 당대 시단에 하나의 부호처럼 찍혀 파장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30년대 시인들은 김기림이 세운 ‘현대시’의 축에 반발하거나 혹은 유인되면서 그의 작업과 어떤 방식으로든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9).
30년대의 모더니즘은 이렇듯 ‘시어의 혁신’을 통한 현대시의 창출이라는 과제를 떠맡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근대’의 자체적 반성은 작용하고 있었다. 김기림이 주창하는 모더니즘이 철저하게 자방성 곧, ‘토속성’을 배제한 ‘도시성’에 있다고 할 때, 우리의 근대는 참으로 외래적인 것에만 의존하게 되는 것이며, 외래의 자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도시성이란 또 다른 서구화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의 언어의식은 김기림의 그것과 유사한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모국어에 대한 자각이 없는 글쓰기와 시적 형식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형식의 파괴를 통한 표출되는 미적 자의식의 매개가 되고 있는데, 때문에 이상에게서는 근대의 정신만 살아 움직이는 양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10).
이들과 달리 백석의 시 의식의 출발은 본질적으로 토속성에 있다. 그러나 그는 김기림이나 이상이 배제한 토속의 원시성에서 모더니티를 찾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존재이다. ‘시어의 혁신’이라는 문제를 우리 시사에서 정면으로 제기했던 김기림이나 이상이 오류와 함정에 빠지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수정하며 길을 모색해 나간 데 비해. 백석은 선배 시인들의 작업이 지닌 빛과 그늘의 양면을 동시에 인지하며 좀더 수월한 위치에서 같은 과제를 추구해나갈 수 있었다. 곧 백석이 섬세하게 골라내고 다듬은 시어는 자기 존재를 깊이 반영하고 또한 자기 반성을 가능하게 하는11) 언어가 되었던 것이다.
3.방언주의와 미적 형식주의의 중층 구조
백석(본명 白노行)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호에서 수원 백씨의 17대 손인 부친 백시박과 모친 이봉우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석이 태어난 지역인 평안북도 정주는 역사적으로 서양의 신문화가 일찍 유입된 곳이요, 동시에 문단사적으로 보면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의 대가들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평안북도 정주의 지방성은 문학사적으로 보면 이미 지방성을 뛰어넘어 민족의 보편적 정서의 한 축으로까지 확대된 곳이기도 하다. 소월 시의 영원한 매력이 정주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확대된 것이라면12), 백석 시 또한 1930년대 시문학사적 맥락에서 소월 시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백석 시의 골격인 정주방언과 평북지방의 민속을 시속에 보존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백석 시는 ‘土俗’과 모더니티가 결합된 당시로 보면 매우 특이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13). 이상, 서정주 류의 인생에 대한 대결 혹은 초극의 의지가 없고, 카프 시인들처럼 현실과 역사의 수용노력도 미약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다양한 유파적 색채가 난무한 당시의 시단 상황에서 백석은 예외적 존재에 속한다. 토속적 방언주의 미학과 이미지즘을 바탕으로 한 모더니즘 미학이 결합되어 독특한 예술정신을 구현해 낸 것은 당시로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다. 우리는 백석 시의 구조를 방언주의와 모더니즘의 이중적 구조로 파악하고자 한다.
3.1.『사슴』에 나타난 유년 체험의 형상화
유년 체험은 한 인간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그 체험에 의하여 획득한 심리구조는 일생을 통하여 지속되며 때로는 여러 양상으로 변용되어 작품에 나타나기도 한다14). 이러한 문학적 변용은 특히 시에 있어서는 원초적 이미지를 제공하고15), 개인적으로는 어떤 추억의 외상적 성격을 부드럽게 하고 지워 없애며, 때로는 현실 극복의 모티프를 주기도 한다. 유년 체험은 불행한 개인사의 단순한 도피처로서가 아닌 ‘지나간 존재를 다시 사는16)’ 창조적 체험이다. 유년 체험의 시적 형상화는 추억과 현재가 동시에 공존하는 이중적 공간을 가지며 빛과 어둠의 두 세계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슴』의 경우 유년체험에 대한 회상은 자체로 충족되고 갈등이 없는 화해의 세계이며, 친밀하고 공동체적 연대가 긴밀한 세계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백석 시는 대부분 빛의 세계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투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하나의 개념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것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상처가 단순한 도피처로서가 아닌 문학적 상징으로서 형상화되는 중요한 매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인간 심리의 중심에 남아 있는 ‘유년기의 핵’으로 보고자 한다17). 바로 그 개념 속에서 유년시절의 존재는 현재와 과거를 결합해 온갖 가능성과, 역사와 전설의 경계를 꿈꾸기도 하며,18) 또한 ‘이미지가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크게 보고, 아름답게 보는 시기이다19). 백석의 경우 유년기의 핵은 우선 ‘민속체험’ 에 있는데, 이는 매우 다양한 각도로 분산이 되어 갖가지의 사건, 명절날의 즐거운 인상, 기형물, 음식, 놀이 등으로 복원되고 있다.
봄철날 한종일내 노곤하니 벌불 작난을 한날 밤이면 으레히 싸개동당을 지나는데 잘망하니 누어싸는 오줌이 넓적다리를 흐르는 따끈따끈한 맛 자리에 펑하니 괴이는 척척한 맛
첫여름 일은 저녁을 해치우고 인간들이 모두 터앞에 나가서 물외포기에 당콩포기에 오줌을 누는때 터앞에 밭마당에 샛길에 떠도는 오줌의 매캐한 재릿한 내음새
긴긴 겨울밤 인간들이 모두 한잠이 들은 재밤중에 나혼자 일어나서 머리맡 쥐발 같은 쌔끼오강에 한없이 누는 잘매럽던 오줌의 사르릉 찌르릉 하는 소리
그리고 또 엄마의 말엔 내가 아직 굳은 밥을 모르던 때 살갗퍼런 막내 고무가 잘도 받아 세수하였다는 내 오줌빛은 이슬같이 샛말갛기도 샛맑았다는 것이다.
- 童尿賦 전문 ?
이 시는 유년시절의 오줌에 얽힌 경험을 매우 진솔하고 감각적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이 시는 유년시절의 체험들을 낱낱이 재생시키면서 그러한 경험세계를 매우 감각적으로 표출시켜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동심의 티 없이 맑은 세계를 반추하게 만든다. 특히 이 시에서는 ‘오줌’에 얽힌 감각적 체험이 계절에 맞게 생생히 표출되고 있다.
유년으로의 회귀는 모순과 갈등으로 둘러싸인 현실 속에서 현실과 화해하고자 하는 자아의 모습을 찾으려는 ‘욕망’인 것이다. 요컨대, 백석의 유년세계는 일체의 현실적 갈등이 배제된 맑고 투명한 공간으로만 존재하며, 시인은 그러한 세계를 감각적으로 재생시키는데 몰두하고 있다. 즉 백석 시의 서정적 자아는 대상과의 미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상에 대한 관조적 시각과 대상과 자아와의 거리가 무화되는 일체감을 드러낸다. 이른바 ‘묘사와 서사의 결합’이라는 백석 고유의 서사적 구조가 구축되는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3.2.신화와 ‘방언주의’ 미학
정주방언을 시어로 사용한 시인은 백석 이외에도 백석과 동향의 시인인 소월과 안서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에서 표출되는 방언들은 백석과는 그 형태상에 있어서 다른 색채를 띠고 있다. 소월은 그 기층에 정주방언이 있고, 그 표층에 문학어가 덮였다20). 즉 자신의 고향마을인 정주지방의 방언을 선험적으로 체득하여, 이를 바탕으로 시를 썼으며, 그 위에 문학어를 윤색하였다. 따라서 이들 시에는 “-외다”, “-그려”, “-읍데 다려” 등 평북지방의 어투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21). 그러나 백석 시의 종결어미는 표준어로 일관되며 그가 구사한 방언은 주로 평북지방의 고유한 명사나 또는 그 지방 특유의 감각어들이다. 백석 시의 방언들은 우리의 토속적인 풍물과 정취를 환기시키는 데 적절히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사의 후원으로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 영문과를 수학한 지식인으로서, 조선일보사, 함흥 영생고보, 잡지 『여성』등의 다양한 이력을 가진 백석의 편력으로서는 이러한 노골적 방언주의와 민속의 채집은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백석이 표준어에 대해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1993년에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공표 되었고, 조선일보사에서 그는 교열부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에 한글에 대한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석의 방언주의는 매우 의식적인 차원에서 개진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백석 시에는 민속 체험이라 부를 만한 독특하면서도 전형적인 사건들에 대한 기억들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원체험 속에서 백석 시의 영역은 민족적 넓이와 깊이를 얻어내면서, 동시대를 넘어 보편적인 시적 울림을 마련한다.
날기멍석을저간다는 닭보는할미를차굴린다는 땅아래 고래같은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그득하다는 외발가진조마구 뒷山어늬메도 조마구네나라가있어서 오줌누러깨는재밤 머리맡의문살에대인유리창으로 조마구군병의 새깜안대가리 새깜안눈알이들여다보는때 나는 이불속에서자즐어붙어 숨도쉬지못한다
또이러한밤같은때 시잡갈처녀망내고무가 고개넘어큰집으로 치장감을가지고와서 엄매와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불을밝히고 밤이들도록 바느질을하는밤같은때 나는 아릇목의샅귀를들고 쇠든밤을내여 다람쥐처럼밝어먹고 은행여름을 인두불에구어도먹고 그러다는 이불읗에서 광대넘이를뒤이고또 ?어굴면서
(중략)
섯달에 내빌날이드러서 내빌날밤에눈이오면 이밤에 쌔하얀할미귀신의눈귀신도 내빌눈을 받노라못난다는말을 든든히녁이며 엄매와나는 앙궁읗에 떡돌읗에 곱새 담읗에 함지를 버치며 대냥푼을놓고 치성이나들이듯이 정한마음으로 내빌눈약눈을받는다
- 「古夜」일부 ?
위 작품은 여러 민속 체험을 두루 담고 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난장이 ‘조마구네나라’에서 암시되는 옛이야기 체험, ‘광대넘이’ 구르기나 ‘뫼추라기’사냥과 같은 놀이 체험, 명절과 음식 체험 그리고 ‘눈세기물’ 풍속과 같은 사실체험이 그것이다22). 또한 서정적 주체인 어린 ‘너’가 캄캄한 밤 산비탈 외딴 집에서 겪었던 여러 민속 체험들을 두루 되새기고 있다. 나아가 무속 체험과 기물 상상력이 덧붙여져서 백석 시의 민속적 요소를 더욱 다양하게 살려내고 있다. 민속세계는 나와 이웃, 과거와 현재를 이어줄 뿐 아니라, 민족이 한결같이 이어오고 있는 삶의 양식 가운데서 가장 굳건한 가치의 영역이다. 백석 시가 지닌 아름다움은 바로 그러한 토착 현실과 정서를 속속들이 되살려낸 데 있다.
조셉 프랑크는 「현대 문학에서의 공간적인 형식」에서 엘리어트가 보여주는 시적 감수성의 현저한 특징을 ‘신화적 상상력을 통한 공간적 질서화’로 요약하고 있다.23)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첫째 새로운 전체를 만들어 내는 능력과 외관상 이질적인 경험을 유기적인 통합체로 합금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둘째 이런 유형의 공간 형식은 ‘현대문학’의 뚜렷한 특징인 언어의 내적 일관성ㆍ통일성을 주조하기 때문에, 셋째 현대문학은 무시간적 통일성 속에 과거와 현재를 감금시키고, 역사적 상상력을 신화로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백석이 엮어내는 상상력은 이미 지적한대로 방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이 현대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 엘리어트의 시적 감수성과 맞닿아 있음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즉 이 방언주의가 구현해 내는 것은 새롭게 배열된 고향의 풍경이다.
명절날나는 엄매아배따라 우리집개는 나를따라 지ㄴ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비으로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난 말수와 같이눈도껌벅걸이는 하로에베한필짠다는 벌하나 건너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고무 고무의 李女 작은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홀아비의 후처가된 포족족하니 성이잘나는 살빛이매감탕 같은 입술과젖꼭지는더깜안 예수쟁이마을가까이사는 土山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넘어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된 코끝입밝안 언제나 흰옷이정하든 말끝에설게 눈물을짤때가많은 큰곬고무 고무의달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洪동이
이그득히들 할머니할아버지가있는 인간에들?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내음새가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내음새도나고 끼때의두부와 콩나물과 ?운잔다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께는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저녁술을놓은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하고 숨굴막질을하고 꼬리잡이를하고 가마타고시집가는노름 말타고장가가는노름을하고 이렇게 밤이어둡도록 북적하니논다
밤이깊어가는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라 읗간한방을잡고 조아질을하고 쌈방이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개화디의사기방등에 심지를?번이나독구고 홍게닭이 ?번이나울어서 조름이오면 아릇목싸움 자리목싸움을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그림자가치는아츰 시누이동세들이 욱적하니 홍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끄리는 맛있는내음새가 올라오도록잔다.
-「여우난곬(族) 」전문 ?
이 시의 화자는 유년으로서 유년의 화자가 명절날 엄마와 아빠를 따라 할머니집에 가서 지낸 경험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명절날에 장만한 음식물들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그에 남다른 감각을 보인다는가, 이 시의 화자가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놀다가 잠이드는 모습 등과 같은 대목에서 명절날의 풍속을 형상화하는 유년의 태도가 드러나고 있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유년의 시각과 목소리로 방언을 구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방언으로 이루어진 사물이나 풍속에 진정성이 부여되고 토속적인 고향의 풍물과 정취가 흠뻑 배어나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방언의 구사가 비록 낯설기는 하지만 거부감을 일으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친밀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여우날곬 (族) 」이외에도 백석 시에서 평북방언이 표출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유년의 화자와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듯 백석에게 있어 정주지방은 원초적 체험의 근원이었다.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과거 지향적인 공간과 시간은 유ㆍ소년기에 고향인 정주지방에서 보낸 시간들로 채워진 것이며, 그곳에 대한 친밀감으로 가득 차 있다. 즉 그의 유일한 시집인 『사슴』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들이 이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보다 내밀화되거나 밖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주’라는 공간 밖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결코 정주지방이 지닌 토속성을 벗어나는 경우는 없고 고향에 대한 부재의식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정주지방의 체험은 백석 시의 공간에 대한 집착24)에 대한 무의식의 구조를 이루며, 백석 시의 원형이 된다.
3.3.방법으로서의 미적 형식주의
백석이 작품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 중반은 국문학사에서 모더니즘 문학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가 시집 『사슴』을 간행한 것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할 때로 당시 같은 직장의 선배 중에는 모더니즘 문학 운동의 기수인 김기림이 있었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1936)의 출간은 김기림, 박용철, 오장환 등 당대 일급 비평가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김기림은 백석의 토속적 언어에서 모더니티를 발견했고25), 박용철은 토속어의 유난스러운 구사를 언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백석의 의식적인 작용이라고26) 호평하고 있는 반면 오장환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白石’은 詩人이 안아리 詩를 作亂하는 한 모던청년‘ 에 불과하며, 그의 시가 앞날을 얘기한 것이 없고, 자기의 감정이나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사투리와 옛날 이야기, 명절에 대한 기억 등을 질서 없이 나열했다고 비난한다27).
이중 백석 시의 모더니티를 지적한 사람은 단연 김기림인데 그가 백석 시에서 받은 인상은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 문학 운동의 중요한 과제를 지적 통제에 의한 감정 절제인데, 김기림은 백석이 그것에 성공했다고 판단했다. 모더니즘 문학은 「백조」류의 감정의 범람에 대한 극복과 함께 카프의 정치 우선주의 혹은 편내용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는데, 백석 시는 정제된 미학적 형식주의 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뽕닢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들기가 닌다
나무등걸에서 자별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들기켠을 본다
- 「山비」 전문 ?
이 시는 시각적 이미지 묘사로 일관된 한 폭의 풍경화이다. 싼뽕잎과 자벌레와 멧비둘기가 한데 어울린 풍경의 묘사에 무절제한 감정의 범람은 없고, 이데올로기적 선전-선동의 내용도 볼 수 없다. 산뽕닢과 빗방울, 벳비둘기와 자벌레가 이루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가 구현해 내는 즉물적 풍경에 대한 시인의 섬세하고 경이적인 시선의 흔적만이 느껴질 뿐이다. 이미지는 묘사적 방법에 의해서 태어나기도 하고 비유적 방법에 의해서 태어나기도 한다28). 이 시에서의 이미지의 탄생은 전적으로 묘사적 방법에 의지하고 있는데, 물론 이러한 특징이 「山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미」, 「통영」, 「흰밤」, 「初冬日」 등의 시에서 이미지 표출 방법은 묘사적 방법에 의지해 있는데, 이를 통해 백석은 미적 모더니즘29)의 세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승냥이가새끼를치는 전에는 쇠메들ㄴ도적이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밑의
山넘어마을서 도야지를 잃는밤 즘생을쫓는 깽제미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 집
닭개즘생을 못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춘을 지나는집
예순이넘은 아들없는가즈랑집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지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대라도 ?이라고하며
간밤에 섬돌아레 숭냥이가왔었다는이야기
어느메山곬에선간 곰이 아이를본다는 이야기
(중략)
뒤우란 살구나무아레서 광살구를찾다가
살구벼락을맞고 울다가웃는나를보고
미꾸멍에 털이 ?자나났나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할머니다
찰복숭아를먹다가 씨를삼키고는 죽는것만같어 하로종일 놀지도못하고 밥도안먹은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가서
당세먹은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가즈랑집」 부분 ?
유년의 화자가 가즈랑집 할머니집에 가서 즐겁게 놀던 경험세계를 진술하고 있는 이 시는, 전설과 俗信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교차시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사랑이 듬뿍 배어 있는 아이와 할머니의 정겨운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출시키고 있다. 1,2연에서는 가즈랑 고개 밑에 위치한 가즈랑집과 그 주위의 배경을 진술하고 있는데, 유년의 감각으로 체득되는 산골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가즈랑집의 분위기가 실감나게 표출되고 있다. 이어 3, 4연에서는 그곳에 사는 가즈랑집 할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 할머니는 ‘아들도 없고’, 또 ‘긴 담뱃대에독하는막써래기를 ?대라도 ?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세월의 굴곡 속에서 역사적 앙금이 강인하게 스며있는 상으로 나타난다. 이어 ‘간밤엔 셤돌아래 승냥이가 왔다는 이야기/ 으느메손골에선간 공이아이를 본다는이야기 ’등의 전설을 삽입하여, 이 가즈랑집 할머니의 삶의 세계를 현실을 떠난 속신과 전설의 세계로 채색시키고 있다30). 바로 이점이 백석 시에 나타나는 신화적 세계의 원근법이 작용하는 지점이다. 신화적 시간과 공간을 근원으로 하는 백석시는 철저하게 주관적 시간의식에 근거하는 것이다. 방언주의 미학에서 보여지는 토속적 신화성은 물론이고, 즉물적 풍경을 그린 시에서조차 우리는 시간의 주관화를 통한 미적 모더니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백석이 그려내는 고향은 조화로운 근원세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세계는 현실의 시ㆍ공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유년의 시절을 기억하는 백석의 방식은 독특하다. 현재의 성인 화자가 개입하지 않으므로 그 세계에 대한 향수의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며 현재형을 사용함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추억한다기보다는 흡사 현재 일어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미 붕괴되는 전통적 사회, 과거 저편의 세계를 백석은 기억의 방식으로 현재화하고 있는 것이다31). 기억이 현재적 시간에 작용하는 양상이 매우 크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백석 시에서 나타나는 유년의 시ㆍ공간은 비애미가 가득한 세계이다.
4.맺음말
본고는 1930년대 모더니즘의 한 양상을 고찰함에 있어 당대 모더니즘과 비교해서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해 나간 백석의 시를 살펴보았다. 백석은 1930년대 시문학사의 주된 흐름이었던 모더니즘 중 이미지즘의 영향 하에서 초기 詩作활동을 했으나, 신화를 바탕으로 한 토속성과 모더니즘의 결합을 시도하며 1930년대 모더니즘을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백석은 신문학 초기의 계몽주의적 파토스를 거부하면서, 문학의 미학적 측면과 민족성을 동시에 추구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사슴』의 세계는 토속적 세계와 모더니즘이 융화된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백석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의 방언과 민속이 유년기의 서정적 자아의 눈을 통해서 표출되고 있으며, 파편화된 서사로 구축된 백석의 시 세계는 미적 형식주의의 장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백석 시를 평가할 대 사용하는 이미지즘은 신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미적 형식주의의 한 계보가운데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살펴본대로 신화, 방언주의, 미적 형식주의는 30년대 백석 시가 구축되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이는 30년대를 살아 간 백석의 시 세계가 독창적이고 치열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백석의 시 세계는 시집 『사슴』을 출간한 이후부터 조금씩 변하다가 마침내 만주로 간 이후에 쓰여진 작품들에서 상당한 변화의 폭을 보이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백석의 신변에 나타난 변화 중 가장 근 컷은 그가 애인과 가족과 고향과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거처를 옮겼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거기서 일제 말의 어두운 시대를 맞이하며 측량원이나 소작인 등의 일을 하면서 고독하고 쓸쓸하며 우울하게 보냈는데,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그의 문학세계에는 애인과 가족과 고향과 조국을 떠나 이국의 낯선 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의 심정과 모습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유년기의 눈을 통해 대상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묘사하고 자신을 뒤로 물러서는 대신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격정을 가지고 직접 작품의 문면에 나서면서 자신의 속마음이나 내적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백석의 작품은 대상을 즉물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백석 자신의 속사정과 속마음과 현재의 감정적인 정황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던 ‘나’가 화자로 문면에 주로 등장하며, 또한 이 시기에 백석은 유랑인 즉 뿌리를 내릴 수 없거나 뿌리를 상실한 사람의 감정과 정신상태를 표출하고 있다. 『사슴』이후의 백석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며, 만주 등지를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백석의 후기시 특유의 페이소스가 형성되는 것 또한 이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점은 백석이 북한에서 활동한 시기의 시들과 연관시켜 고찰해야 할 부분이므로 추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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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백철, 『신문학사조사』, 백양당, 1949, 292쪽.
2) 김재홍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그는 백석 시의 지방성을 민족시, 민중시로서의 전형으로 간주한다(김재홍, 「민족적 삶의 원형성과 運命愛의 眞實美, 白石」(고형진 편, 『백석))참조). 이에 대해 김용직은 백석 시에 나타난 지방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피는 한 그 말씨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主情的이다… 백석 시에는 종족이나 민족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양 생각되는 폭이 존재하지 않는다. 좋게 보아도 거기에는 평안도 어느 지방에 국한된 과거의 이야기가 심사와되어 있을 뿐이다.”(김용직, 「토속성과 모더니티), (고형진 편, 앞의 책) 252쪽)
3) 오장환 「白石論」『風林』 1937.4. 대체로 김기림과 박용철이 인상주의 비평에 가까운데 반해 오장환은 좀더 세밀하게 시를 관찰한 흔적이 보인다.
4) 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 母와 아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몇 편의 산문적 소설을 발표했으나 작품성이나 편수를 따져봐도 백석의 문학은 시에 그 본령이 있다. 백석은 1935년에 「정주성」이라는 이미지즘 계열의 시로 다시 등장하며 본격적인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창기 문단에 데뷰한 것이 시가 아닌 소설부분이라는 사실은 그의 시가 가진 서사지향성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별도의 다른 논문을 요구하므로 여기서는 단순히 그 사실만을 지적하도록 한다.
5) 국권쇠퇴와 일제의 강점으로 기울어지는 시대적 상황이 문학적 담론 생산을 규정짓는 초 자아로 등장하면서 당시 문학적 담론의 표현 매체인 저널리즘을 만들어 낸다. 이와 관련해 김영철은 이 무렵의 저널리즘과 문학의 관계를 통해 당시 문학적 담론공간의 상황을 유추해 내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지적이라 하겠다.
6) 서준섭, 『한국 모더니즘 문학 연구』, 일지사, 1986. 10쪽 참조.
7) 이러한 ‘근대’에 대한 논의는 ‘근대성’의 담론을 생산해내는 데, 이는 근대세계의 자기 인식에 대한 요구에서 기인하는 것이어서 결국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조건이 된다. 1930년대 모더니즘은 자기와 자기 시대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질문, 곧 ‘우리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으로 함축되는데, 여기서 ‘나’의 정체성 즉 주체에 대한 질문은 또한 타자에 대한 질문으로도 바궈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이고 또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타자와의 경계짓기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서영채, 「한국 소설과 근대성의 세 가지 파토스), 『문학동네』1999 봄호, 336~337쪽 참조).
따라서 위의 질문은 이상의 경우에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타자는 왜 내가 될 수 없는가’라는 부정 서술어의 문제의식으로 다시 환원할 수 있다.
8) 차혜영, 「1930년대 한국 소설의 근대성과 모더니즘적 전망」, 『1930년대 후반문학의 근대성과 자기성찰』, 상허문학회, 깊은샘, 1998. 99쪽 참조
9) 김신정, 「‘시어의 혁신’과 ‘현대시’의 새로움」, 『1930년대 후반문학의 근대성과 자기 성찰』, 57쪽 참조
10) 우리는 초현실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이미지즘), 순수시, 복고주의 등 수많은 유파가 존재해 왔지만 그것들이 가진 각각의 고유한 이념적 동질성을 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가령 모더니즘의 경우 비교적 온건한 모더니즘에 속하는 이미지즘과 과격한 모더니즘에 속하는 초현실주의가 공존해 있었으며, 이들의 기수인 정지용과 김기림. 이상의 모더니즘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이념적 동질성을 찾기에는 더더욱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11) 김신정, 앞의 글, 90쪽 참조
12) 김윤식, 「백석론-허무의 늪 건너기」(고형진 편 『백석), 새미, 1996), 203~204쪽 참조.
13) 김용직, 앞의 글, 242~247쪽 참조
14) J. P. Weber, 「주제비평의 원리」, 『현대비평의 원리』, 김현 편역, 기린원, 1989. 53쪽.
15) 바슐라드, 몽상의 시학, 김현 역, 기린원, 1978. 114쪽.
16) Ibid, 119쪽
17) Ibid, 123쪽 바로 ‘유년기의 핵’이라는 개념에서 바슐라르는 상상력과 기억이 가장 가깝게 결합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바로 거기(유년기의 핵)에서 유년시절의 존재가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결합하며, 완전한 상상력 속에서 현실의 이미지를 사는 것이다…… 우리의 유년시절의 몽상을 향한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존재에 앞서는 존재, 〈존재의 선행 ant?c?dence d’ ?tre〉에 대한 전망을 알게 한다.”(ibid., 123쪽. 강조는 필자.)
18) 바슐라르, 앞의 책, 115쪽
19) Ibid, 116쪽
20) 이기문, 「소월시의 언어에 대하여」, 「심상」통권 112호, 24쪽.
21) 고형진, 「백석시연구」, (고형렬 편, 앞의 글) 19쪽.
22) “정주 지방에서는 섣달에 내빌날이 들어서 그날 밤에 눈이 오면 눈을 받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이 눈세기물 즉 눈이 그날 밤에 눈이 오면 누늘 받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이 눈세기물 즉 눈이 속으로 녹아서 된 물을 내빌물이라 하여 병이나 항아리에 넣어두고 고뿔이나 배앓이나 기피기(이질)를 앓을 때 먹는다” (이기문, 앞의 글, 26쪽)
23) A. 아이스테인손, 『모더니즘 문학론』, 임옥희(譯), 현대미학사, 1996. 17~18쪽 참조.
24) 박태일은 백석이 정주지방에 대해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것을 바슐라르식의 ‘장소사랑’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백석은 고향에 대해 남다른 사랑과 뜻을 부여할 뿐 아니라, 특정장소에 기울이는 한결같고도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박태일, 「백석 시의 공간현상학), (고형진 편, 앞의 글) 221쪽.)
25) “시집 『사슴』의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잇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실로 속임없는 향토의 얼굴이 표정한다. 그렇건마는 우리는 거기서 아무러한 회상적인 감상주의에도, 불어온은 복고주의에도 만나지 않아서 더없이 유쾌하다. 백석은 우리를 哀想的이게 말들 수 있는 세계를 주므르면서 그것 속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얼마나 추태라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시인이다. 차라리 거의 鐵의 냉담에 필적하는 불발한 정신을 가지고 대상과 마주선다. 그 점에 『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믄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 (김기림, 「사슴)을 안고, 조선일보 1936.1.29)”
26) “白石氏의 詩集『사슴』 一卷을 처음 대할때에 作品全體의 姿態를 우리의 눈에서 가리어 버리도록 크게 앞에서는 것은 그 修정없는 平安道方言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作品의 주는바를 받아들이려는 好意를 가지고 이것을 熱讀한 結果는 解得하기 어려운 若干의 語彙를 그냥 包含한채로 그 全體를 鑑味하는데 아무 支障이없다는 母語의 偉大한 힘을 깨닫게 된다.”(박용철, 白石詩集「사슴)評, 『조광』1936.4)
27) 오장환 「白石論」, 『風林』1937.4.
28) 김춘수, 『시론』, 송원문화사, 1974, 29~39쪽 참조.
29) 캘리니스쿠는 시간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성modernity을 크게 en 가지로 나눈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시간은 객관화되고 사회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시간이다. 이런 시간은 상품적 가치를 소유하며, 따라서 시장에서 팔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속에는 이와는 달리, 이런 시간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예술가들의 꿈꾸는 시간이 존재한다. 이런 시간은 개인적이며 주관적이며 상상적인 시간으로 예술가의 자아가 전개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전자를 객관적 시간, 후자를 주관적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결국 현대는 이 두 가지 시간 개념이 암시하는 삶의 양식이나 가치들로 나눌 수 있다. 객관적 시간 개념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를 사회적 현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와는 달리 주관적 시간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를 미적 현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미적 현대성은 그런 점에서 사회적 현대성에 대한 미적 부정, 혹은 미적 저항이라는 양상을 드러낸다.(M. 칼리니쿠스,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이영옥 외 譯, 시각과 언어, 1993, 59~84쪽 참조)
30) 고형진, 「백석시 연구」, 앞의 책, 48~49쪽 참조
31) 류경동, 「잃어버린 시간의 복원과 허무의 시의식」, 『1930년대 후반문학의 근대성과 자기 성찰』, 36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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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박성현
건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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