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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해석학과 윤리

온울에 2008. 5. 8. 13:04

목 차

1. 칸트의 의무론과 해석학
2. 형식주의 비판
3. 칸트의 변증론과 해석학
4. 근본악과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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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호남신학대학교출판부·한들 
학술지명 해석과 윤리Hermeneutic and Ethic호남신학대학교 해석학연구소 학술발표회 논문 
권 3 
호 1 
출판일 1999.  




해석학과 윤리


양명수
이화여대 기독교윤리학 교수
2-533-9901-03
pp.5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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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과 윤리의 관계를 알기 위해 먼저 윤리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윤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우리 얘기의 구조가 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란 좁게 보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또는 그러한 도리를 찾는 학문이다. 크게 보면 가치 물음 가운데 하나가 윤리다. 사람이 바라는 것이 가치요, 그러한 가치 물음 가운데 하나가 윤리다. 사람이 바라는 것이 가치요, 그러한 가치 물음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도덕 가치다. 가치를 우리는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실용 가치이다. 어디에 써먹을 만한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재화들(goods)은 가치있는 물건들이다. 그것은 기본스런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둘째, 심미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어디에 써먹을 용도와는 무관하다. 그저 아름답고 그저 멋이 있다. 끝으로 도덕 가치를 생각할 수 있다. 도덕 가치 역시 심미 가치처럼 어디에 써먹는 것과 무관하게 보인다. 적어도 그용도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 마르크스같은 사람이 윤리를 이데올로기로 보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어쨌든, 도덕 가치는 남 생각하는 구도에서 생긴 가치다. 자기만 알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도덕 가치에 위반하는 행위를 하면 비난받는다.

그런데 남생각에 몇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자기와 남의 욕망 사이에서 타협하는 차원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정당하게 대우하려는 마음이다. 각자에게 그의 것을(suum cuique)주는 정의론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는 무엇이 정의고 윤리 규범인지를 따지는 규범 윤리가 발전해 있다. 둘째, 남 생각에는 남을 섬기는 차원도 들어 있다. 주체성 문제가 극치에 달하는 지점이다. 주체란, 당당하게 자신이 서고 남을 당당한 존재로 존중하는 차원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남을 사랑할 때 가장 주체롭게 된다. 앞에서 정의가 생기고 뒤에서는 사람이 생긴다. 윤리는 주체의 문제이면서 정의와 사람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사람의 완성에 참자유가 있다. 그렇게 해서 윤리는 의무론을 넘어 자유에 대한 갈망이 된다. 정의론이 성립하는 차원에서는 벗어나는 자유이고 사랑이 성립하는 차원에서는 만남의 자유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철학으로 보면 자유이다. 그렇다면 결국 윤리의 문제는 종교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근본악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윤리에서 말하는 앙심은 자신의 감시자요 비판자이다. 그래서 자유하려면 양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양심에 걸리는 악이 없어야 한다. 자유의 문제는 그처럼 양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양심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악의 문제가 있다. 그것이 근본악인데, 마침내 그 문제를 해결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근본악은 내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자유는 양심에 어긋남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서 생긴다. 이것은 원죄 문제하고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다.

의무론의 문제, 주체와 자유의 문제, 근본악의 문제, 종교 문제, 이런 것들이 모두 윤리 문제이다. 우리는 리꾀르의 해석학이 칸트 윤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도록 하겠다. 그러면서 주체와 자유, 악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1. 칸트의 의무론과 해석학
해석학은 상징과 신화의 넉넉함을 살린다. 생각하되 상징으로부터 생각하고 상징을 따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근대의 코기토가 말하는 반성과 다르다. 근대의 생각 곧 반성은 모든 것을 합리의 잣대로 재단하고 분석한다. 그것은 악의 문제를 모두 의지의 문제로 바꾼다. 악을 윤리 문제로만 본다는 얘기이다. 철저한 주의주의이다. 그같은 주의주의는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인간 실존을 위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것은 비관론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근대의 낙관적 인간론이 허무주의로 가고 말았듯이 말이다. 해석학은 그런 세계관과 인간관을 넘어선다. 그러면서 깊이를 다시 찾으려는 것이다.

칸트의 형식주의 윤리는 범주의 선험 연역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런 선험 세계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삶의 문제는 선험 연역이 아니라, 삶에 대해 한 말을 푸는 해석으로 온전히 접근할 수 있다.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그 말을 품고 있는 말이 있다. 합리로운 개념과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아 상징과 신화로 한 말이다. 그러한 문헌을 해석하면서 삶의 신비와 넉넉함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근대의 윤리 세계관을 넘는 작업은 해석학이 된다. 그러나 넘어서려면 거쳐야 한다. 리꾀르의 해석학은 주의주의를 중요하게 보고 그것을 거쳐야 한다고 본다. 의무문제, 자유의 문제가 모두 그렇다.

그 점에서 리꾀르는 칸트의 의무론을 중요하게 본다. 칸트의 윤리는 먼저 의무론이요, 자유의 문제도 의무 형식에서 풀린다. 적어도 실천 이성의 분석론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칸트가 근대에 이바지한 점도 그것이다. 그런데 그의 의무론 윤리는 곧 형식주의 윤리다. 흔히 말하는 형식주의란 무엇인가? 선과 악의 내용을 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형식주의다. 이렇게 전개된다. 먼저, 칸트 윤리에서는 옳은 것이 좋은 것, 곧 선이다. 그른 것이 나쁜 것, 곧 악이다. 좋고 나쁨이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않고, 옳고 그름이 좋고 나쁨이 결정하나.ㄷ 그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윤리와 다르다. 칸트의 윤리에는 어떤 목적이나 켈로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만큼 윤리는 오리지 의지(Wille)의 문제가 되고 존재 욕망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좋고 나쁨은 옳고 그름보다 더 폭넓고 존재론스런 개념이다. 옳고 그름은 좋고 나쁨보다 더 단하하고 날카로운 개념이다. 윤리는 바람과 욕망의 문제라기보다 욕망을 끊는 문제다. 그대인 칸트는 존재론을 멀리하고 주관의 단호한 의지에 인간의 운명을 맡겼다.

그러면 무엇이 옳은가? 어떻게 해야 옳은 행위인가? 양심의 명령 곧 정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옳은 행위다. 그렇게 하는 의지가 선한 의지요 그것이 선이다. 선이란 선한 의지다. 선과 악이 모두 의지에 달렸다. 그러면 정언 명령은 무엇인가? ≪도덕 형이상학의 근거≫와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가 찾은 정언 명령, 이른바 제 1정언 명령은 이렇다. "제 행위의 준칙이 보편 법칙 수립이 원리가 되도록 그렇게 행하라." 다른 말로 하면 남들이 모두 너처럼 해도 괜찮다 싶으면 그렇게 하라는 얘기다. 여기에는 행위 내용이 정해져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것이 옳다는 신념이 깔려 잇다. 물론 이것은 루소의 일반 의지와 다른점이 있다. 칸트에게서는 일반이라기보다는 보편이다. 그러나 보편은 정치로는 일반으로 갈 수밖에 없다. 사실 루소 역시 일반 의지를 개개인의 의사의 합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칸트의 정언 명령에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다. 적어도 보편 의사에 대한 신뢰이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정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옳다는 것이 옳다는 주장은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된다. 정의의 내용을 정하지 않고 정의가 무엇인지 결정할 주체를 정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절차 민주주의이다. 모든 사람의 얘기를 들어 보는 것이다.

형식주의는 철저하게 근대의 낙관론에 바탕을 둔 윤리다. 그의 윤리에서 욕망의 문제와 감정의 문제를 제거하면서 윤리의 내용을 제거했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의무론은 오로지 법에 대한 존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 행위가 낳을 결과에 대한 바람이나 욕망과는 무관하다. 그런 감감스런 것은 윤리에서 제거되어야 했다. 인간의 체면을 손상하는 것이 때문이다. 그런 감각스런 욕망은 사람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욕망을 칸트가 악으로 본 것은 아니다. 사람의 악은 준칙의 역전에 있다. 개인 나름의 행위 규범인 준칙이 보편법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악이다. 그런 나쁜 준칙에는 동기의 역전이 들어 있다. 선험 이성이 활동해야 할 곳에 감각이 끼어드는 것이다. 감각 그자체가 악이라기보다는 이성보다 감각이 앞서는 것이 악이다.

이런 형식주의 윤리는 사실 기독교 윤리와 상당히 비슷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 점이 해석학에 상당히 필요하다. 먼저, 악을 자연이나 신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람의 문제로 본다는 점이 그렇다. 성서에 나오는 선악과 얘기는 악의 기원을 하나님에게 두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악은 운명이라기보다는 사람 책임이 된다. 사람의 잘못된 결정, 부해한 의지가 문제다. 나중에 어거스틴도 그런 주의주의 각도에서 원죄론을 정립했다. 칸트는 그런 어거스틴 전통을 잇는다. 리꾀르의 해석학 세계관에는 그처럼 인간의 책임을 묻는 인간관이 필요하다. 악이 사람 문제라면 악의 극복도 사람 문제가 된다. 일단 그런 인간관이 필요하다. 악이 사람 문제라면 악의 극복도 사람 문제가 된다. 일단 그런 인간론이 들어 와야 사람이 주체로 선다. 그리고 비관론에 빠지지 않는다. 악이 운명이라면 어떻게 새롭고 좋은 세계를 만들 생각을 하겠는가? 문제가 사람에게 있다면 사람이 바뀌면 되지만, 신에게 문제가 있다면 신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주의주의를 거쳐서 주의주의를 넘어야 한다. 물론 악의 문제, 주체의 문제, 자유의 문제는 개인의 잘못과 책임 문제로 돌려서 해결되는 않는다. 그러나 근대의 칸트는 철저하게 개인의 책임과 결단을 묻는 윤리였고, 자유를 위해 그 과정은 필요하다. 악을 동기의 역전에서 찾는 것도 철저하게 인간의 의지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었지만 기독교 윤리와 비슷하다. 기독교 윤리에서는 세상이나 물질을 악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악으로 본다.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악이 달렸다. 관계를 마련하는 생각과 의지, 악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겉으로 어떻게 속 생각과 동기가 중요하다. 비울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모두 악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칸트가 본 악도 똑같다. 아무리 의무에 합당한 행위(Philichkeit)라 할지라도 의무에서 나온 행위(aus Philicht)가 아니면 윤리가 아니다.

칸트 윤리는 기독교 윤리에서 말하는 신의 자리에 사람을 집어 넣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을 인간학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윤리의 구도를 그대로 품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해석학 세계관을 위해 필요하다. 칸트를 거쳐 칸트를 넘어서면 된다. 자유 문제도 그렇다. 실천 이성의 분석론에서 칸트는 자유를 자율로 풀었다. 내가 나에게 명령하고 그 명령에 내가 복종하는 것이 자율이요, 그 자율이 곧 자유라는 것이다. 양심의 의무 명령에 스스로 따르는 것을 자유로 보았다. 그것은 내안에 있는 자연, 곧 본능을 억누르면서 생긴다. 내 마음을 내가 스스로 억제해서 또 다른 나의 소리에 복종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은 입법자요 준법자가 된다. 그리고 정당화 문제도 내 안에 있다. 이것은 사람 바깥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권위의 근거를 사람에게 옮긴 것이다. 이제 비로소 사람은 당당한 주체로 선다. 해석학에서 바라는 관계는 주체 대 주체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느님, 사람과 자연이 주체 대 주체의 관계로 서는 세상을 내다 본다. 그러기위해 해석학은 근대의 주체철학을 뜯어 고친다. 주체의 한계를 말하고, 존재의 깊이와 은총을 말한다. 그러면서 겸손해지고 깊어진 주체를 찾는다. 그러나 주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주체 대 주체의 관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사람이 주체로 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 주의주의가 필요하고 칸트의 형식주의 윤리는 거기에 공헌한다.

2. 형식주의 비판
그러나 칸트의 형식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욕망의 문제를 끌고 들어와야 한다. 거기서 주체의 한계가 밝혀지고 자유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윤리의 본새는 존재하려는 욕망 그리고 그 노력에 있다.1) 그래서 해석학은 선험 연역에 따른 윤리가 아니라, 의미론에 따른 문헌 해석을 통해 욕망의 윤리를 잦는다. 그 작업을 위해 리꾀르는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을 끌고 온다.

칸트가 볼 때 정언 명령은 자명하고 처음부터 바탕에 있는 것이요 아프리오리이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사람의 여러 가지 도덕 행위에 대한 얘기들을 해석하여 겉 뜻 뒤에 들어 있는 텍스트를 찾아 낸다. 그렇게 보면 도덕 의무는 인간의 욕망에서 파생된 것이다. 도덕에는 계보가 있는 셈이다. 의무가 바탕이 아니라 욕망이 바탕을 이룬다. 칸트가 말하는 양심은 나를 감시하고 준엄하게 정죄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볼 때 양심은 정죄하는 의식이라기보다 정죄된 의식이다. 이미 어떤 상처를 받은 것이다.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 사이에서 받은 상처가 의무에 들어 있다.

칸트는 양심을 대단하게 보았다. 사람을 숭고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욕망이라는 병을 누르고 정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양심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볼 때 양심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산물이다. 거세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를 동일시하여 생긴 것이 초자아다. 초자아는 욕망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고 현실 원칙에 막혀 또 다른 무의식을 만든 것이다. 리비도 에너지가 이드와 초자아에 양분된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은 밑에도 있지만 저 위에도 잇다. 윤리 의식은 내가 아니라 위에서 나를 억압하는 무의식이다. 철저한 도덕주의자일수록 욕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처럼 도덕과 양심과 의무는 숭고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병이다. 칸트는 욕망을 병으로 보았지만 프로이드는 의무감을 병으로 본다. 프로이드가 볼 대 사람은 누구나 윤리라는 병을 앓고 있다.

칸트가 도덕법이라고 한 것이 프로이드에게는 아버지이다. 절대 실험명령이 있는 자리에 부친 살해가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생긴 부친 살해라는 최초 장면, 그것은 환상이지만 사람이 욕망 구조를 지배하는 환상이다. 그런 표상과 상징을 해석하는 프로이드의 해석학에서 볼 때 칸트의 형식 윤리는 나중에 생긴 것이다. 추상스런 대체물인 것이며 바탕에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리비도 욕망이 있다. 윤리 의무가 있기 전에 구체로운 드라마가 있다. 출생, 아버지, 어머니, 남근, 살해같은 몇 가지 핵심 기표들이 그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다.

리꾀르 해석학에서 볼 때,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은 양심과 도덕 의식을 비신화화한다. 비신화화는 중요하다. 우상을 걷어 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상을 걷어내야 사람은 참으로 자유롭게 되고 참 주체가 된다. 프로이드는 근대 의식 철학이 이루어낸 주체의 우상화를 벗겨낸다. 칸트의 형식주의 윤리는 사람의 의지에 기대를 걸었고 결국 정당화의 주체를 사람의 실천 이성에 둠으로써 사람을 우상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적어도 그의 분석론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프로이드이게서 의식은 이미 된 것 Bewusst-sein이 아니라 되어야 할 것 Bewusst-werden이다. 지금 나의 의식은 내가 아니다. 무엇인가 감추고 있는 허위 의식이다. 저 밑에 억압되어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을 끌어 내어 의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리비도 욕망을 직면할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안다. 우리는 의식이라는 말고 양심이라는 말이 서양에서 같은 말임을 안다. 그것은 근대의 양심이 의식 철학에 기대고 있음을 뜻한다.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은 문헌 해석을 통해 주의주의 우상을 파괴했다.

그러나 비신화화가 비신비화로 가면 안 된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을 전부 의식화할 때 자유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결국 비신비화가 된다. 거기에는 진리 물음이나 거룩의 신비는 없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드는 근대인이다. 결국 의식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거기에 프로이드의 공헌과 한계가 있다. 존재 깊이를 찾으려는 해석학은 프로이드를 거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프로이드에게서 제기된 욕망의 문제를 살리면, 윤리는 의무 감정이 첫째가 아니라 존재 욕망이 첫째가 된다. 그러면서 참 자유를 찾으려는 노력이 되어야 한다. 그 자유는 칸트의 분석론에서 말하는 자율로서의 자유는 아니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윤리를 억압이라고만 본 것도 옳지 않다. 윤리에 들어 있는 억압 요소를 벗겨 허위 의식을 벗긴 다음에는, 다시 자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삶의 본능을 자유를 향한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프로이드의 에로스는 플라톤의 에로스와 연결되어 있다.2) 그것이 인간의 존재 욕망이다. 인간의 존재 욕망이란 살아 남으려는 욕망일 뿐 아니라 사람답게 살려는 욕망이요 그것은 자유로 연결된다. 칸트와 달리 리꾀르의 해석학은 윤리의 "근거"3)를 의무감에 두지 않고 욕망에 둔다. 거기에는 프로이드의 도움이 크다. 그러나 프로이드와 달리 리비도를 윤리의 근거로 보지 않는다. 윤리의 근거는 리비도 욕망이 아니라 존재 욕망이다. 저 밑에서 생기는 것일 뿐 아니라 저 앞에서 나를 끄는 것이다. 여기서 헤겔의 텔로스가 역할을 한다.

해석학에서 볼 때 정신 분석의 잘못은 믿음의 본문들을 뛰어 넘어 정신 분석을 통해 곧바로 종교 표상을 찾아냈다는 점이다.4) 정신 분석에서 종교는 부친 살해에서 생기는 두려움, 그리고 위로받고 싶은 욕망에서 생긴다. 결국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이 있다. 윤리와 종교는 모두 부친 살해와 관련된 것이다. 부친 살해라는 최초 장면에 윤리와 종교의 기원이 있고, 그러한 기원은 리비도 욕망과 관련이 있다. 도덕법보다 표상이 먼저다. 그러나 그 표상이 윤리의 근거는 아니다. 의미가 표상보다 앞서고, 종말의 의미 충만이 윤리의 근거이다. 이 점을 설명해 보다. 해석을 통해 의미를 찾고 해석은 말로 한다. 말이 해석의 도구인 셈이다. 그러나 표상을 말로 해석할 수 있으려면 그 표상이 이미 말같아야한다. 무의식의 표상은 이미 말 이전의 말이다. 말로 나오려는 말 이전의 말을 말로 하는 것이 해석이다. 그런데 그 해석은 종말로 있는 약속의 말씀의 빛을 받아 이루어진다. 표상이 말 이전이 말일 수 있는 것도 약속의 말 때문이다. 그래서 표상보다 의미가 문제이다. 존재 욕망은 그런 의미 충만의 종말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렇다. 의식을 가운데 두고 뒤에는 무의식이 있고 앞에는 의미 충만 또는 완성의 종말이 있다. 무의식이 의식의 기원을 이루는 의식의 고고학이라면 종말은 의식을 파에서 이끄는 의식의 예언자다. 리꾀르가 볼 때 바탕 또는 근거는 프로이드가 밝힌 기원(origin)에 있지 않고 종말에 있다. 종말의 빛에서 기원 표상을 재해석해야 한다.

문헌을 해석해 보면, 인간의 윤리 의식은 프로이드가 말하는 복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나온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격 관계를 훼손했다는 것이, 복수가 있건 없건 두려움을 주고 그것은 거세 공포보다 더 중요하다. 사랑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두려움이 있다. 그런 것은 종교와도 관련되면서 인간의 윤리 의식을 형성한다. 완성의 종말에 대한 희망에서 생기는 윤리 의식이 있다. 그런 점을 프로이드는 간과하고 있다. 종말에 비추어 볼 때 근본악 문제도 생긴다. 그리고 참 자유는 그러한 근본악을 극복하는데 있지 않고, 회개하는 데 있다.

이제 리꾀르의 해석은 다시 칸트로 가서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자유  길을 찾는다. 윤리를 넘는 윤리를 찾는다.

3. 칸트의 변증론과 해석학
참자유를 말하려면 한계의 철학에서만 가능하다. 칸트의 변증론과 종교론은 한계의 철학이다. 그는 이성(Vernunft)과 오성(verstand)을 구분하고 생각(Denken)과 앎(Erkennen)을 구 분했는데, 그런 구분은 해석학이 찾는 믿음과 희망의 지성(intellectio fidei et spei)을 연다. 오성, 곧 이론 이성으로 경험 세계를 알지만 나나 자유 또는 하느님같은 절대물은 알 수 없다. 오직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지성은 거기서 멈추는가? 그렇지는 않다. 지성이 멈추는 것은 주체가 무력해지는 것이다. 오성의 한계가 곧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을 뜻해서는 안 된다. 지성은 살아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헤겔의 절대지는 아니다. 모든 걸 주체가 감싸고 손에 쥐는 식이어서는 인간과 문명의 교만만 남을 것이다. 절대지에서 의지의 완성을 보고 자유의 실현을 보는 것은, 세상과 역사를 손에 쥐려는 폐쇄된 구도이다. 지성의 확장은 지성의 개방이 되어야 한다. 신비 앞에서 개방되고 자신을 낮추므로 더욱 깊어지는 지성이 되어야 한다. 깊어지는 것은 한계를 아는 것이다. 완성"하는"것이 아니라 완성"되는"것이다. 온전함과 완성을 바라고 희망하지만 그 자리에 절대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의 지성은 지성의 희생과 절대지 사이를 가야한다. 그런 길을 리꾀르의 해석은 칸트의 변증론에서 보고, 또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본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변증론에서 선험 환상을 말한다. 나나 자유나 하느님같은 무조건스런 것을 이론 이성으로 알았다고 보는 것은 환상이다. 사변 이성의 활동 범위는 오로지 경험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면 이성으로는 내가 누군지, 자유가 뭔지, 하느님이 누군지 알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아는가?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는가? 실천을 통해 안다. 행해야 안다는 것이다. 실천 이성이 앎의 영역을 연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안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사랑해야 안다(amor novit eam). 하느님을 알려면 믿어야 한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알기 위해 먼저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의지가 이루는 지성이다. 의지가 이루는 지성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점에서 오성의 영역이 아니다. 의지가 이루는 지성은 말로 다할 수 없기 때문에 개방되어 있는 지성이다. 알긴 알되 지식이 아니고, 내가 손 안에 넣고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쪽에서 알아 낸 것이라기보다는 알게 된 것이다. 실천에서 생기는 앎은, 은총을 아는 앎이다. 사실 그것은 지성의 한계이면서 깊어짐이다. 그것은 윤리 문제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자유 문제를 보자. 사실 칸트의 실천 이성의 변증론에서 다루는 문제의 핵심은 자유 문제이다. 그는 분석론에서 이미 자유를 말했다. 의무 분석을 통해 자율이 자유라고 했다. 그런데 그 자유에는 명령이 있고 복종이 있다. 그 복종은 나의 자연과 본성을 누르고 또 다른 나에 복종하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대로 대자 관계에서 생기는 자유다. 대자 관계는 나와 내가 떨어져서 생기는 관계다. 내가 나를 감시한다. 양심이 그것이다. 내가 나를 누르고 이겨야 한다. 칸트는 그런 대자 관계를 보았고, 거기서 의지의 승리를 보았으며 그것이 자유라고 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 아니라 내가 알아서 양심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자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그 바람과 희망은 분석론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증론에서 생긴다.

명령과 복종이 없는 자유를 생각할 수 있다. 나와 내가 떨어지지 않은 자유를 생각할 수 있다. 그 생각은 앎이라기보다는 바람이다. 특별한 결단과 억압이 없이 늘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의(Willk?r)와 의지(Wille)가 구분되지 않는 세계, 그래서 내 맘대로 하나(칸트가 말한 자의)언제라도 보편법에 어긋나지 않는 세계이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의 존재다. 완전한 사랑과 전능은 같이 간다. 뜻하는 대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의지의 완성"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이다. 그런 하느님의 존재가 요청된다. 그리스도는 그 표상이요 원형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실천 이성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얘기이다. 조건과 한계 속에 있으면서 양심의 명령에 복종하므로 자유를 넘보는 유한한 인간은, 조건들의 절대 통합을 바라고 요청한다. 그것은 사랑이 일으키는 자유로 여기서도 맛볼 수 있으나, 우리가 완성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다만, 반드시 그런 바람과 희망 속에서만 지금 여기서 도덕 결단이 가능하다. 지금 도덕 결단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런 무조건이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온전하고 완성된 자유, 그 빛에서만 현재의 도덕이 가능하다. 그것을 칸트는 최고선이라는 오래된 이름으로 불렀다. 가장 높은 선이라기보다, 온전하고 완성된 좋음이다. 도덕에서 말하는 좋음과 실용의 좋음이 합해진 개념이다. 원래 칸트는 좋음을 옳음을 거치지 않은 좋음은 불의이다. 좋은 게 좋은 게 되지 못한다는 얘기이다. 실용 가치가 있다고 도덕 가치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옳은 게 좋은 것이다. 옳음은 때로는 실용 가치에서 멀리 떨어진다.. 의무론 윤리는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그러나 결국 가장 최고 개념은 좋음이다. 성서에도 태초에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했다. "참 좋다"는 말은 최고의 가치 개념이다. 그것은 옳음 너머에 있으면서 옳음을 낳는 좋음이다. 하느님은 옳은 분이라기보다는 좋은 분이다. 그러나 그 분은 옳음을 품고 있다. 그래서 정의의 하느님이다. 칸트가 말한 최고선을 우리는 그렇게 풀 수 있다. 옳음을 품고 있는 좋음이다. 최고선은 최고의 도덕 가치이면서 실용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완성된 가치이다. 선에 현실의 힘이 붙는다. 그래서 전능하다. 선의 전능이다. 선은 선한 의지가 아니라 존재다.5) 동시에 그 좋음은 만족과 행복이다. 참 좋다는 말에 들어 있는 뜻 그대로이다. 최고선은 도덕과 행복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이율배반이 있고 그래서 최고선은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랄 뿐이다. 도덕과 행복이 통합된다는 것은 실천 이성의 이율 배반이다. 실천 이성의 분석론에서 칸트는 도덕을 순수 실천이성의 문제로 보았다. 그것은 행위의 결과 어떻게 될 것을 바라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선은 오직 선한 의지일 뿐이라는 말도 그렇다. 좋은 의지만 좋은 것이지, 좋은 결과가 도덕 행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기에 그런 경험스러운 것, 감각스러운 것, 즐거움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들어가면 불순해지고, 그것은 고상한 인간 양심이 할 짓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제 변증론에서 다시 도덕과 행복이 통합된다는 것은 이율 배반 아닌가? "순수"하기 위해 버렸던 것을 "온전"하기 위해 다시 취한다. 그것은 초월스런 종합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직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바람은 지금 여기서 도덕 행위의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과 행복의 일치는 나의 도덕 행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욕망을 누르고 양심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즐김이 아니라 어려운 결단이다. 도덕 결단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맘가는 대로 해도 보편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양심대로 행위하고 살 때 그 열매는 복이 아니라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복을 바라고 옳은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고 옳기 때문에 행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옳기 때문에 한다. 그러므로 도덕과 행복의 일치는 희망 사항이다. 희망 사항이라는 얘기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이다. 바람은 바람이지만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이다.6) 그러므로 그걸 바라고 도덕 행위를 할 수는 없다. 행복은 우리 일이 아니며 은총이고, 나는 내 길을 갈 뿐이다.7)

그래서 참자유는 사람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 사항이다. 칸트의 실천 이성 변증론은 분석론에서 제기한 자율로서의 자유와 달리, 참자유를 말하면서 희망을 제기한다.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물론 지성이다. 그러나 그 지성은 믿음과 희망에서 생기는 지성이다. 헤겔의 절대지라기보다는 개방된 지성이다. 한계 안에서 깊어지는 지성이다. 그래서 리꾀르의 해석학은 칸트의 변증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앞에서 자유에 두 차원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윤리에는 그 두 차원의 자유 문제가 들어 있다고 했다. 칸트 윤리는 그 분석론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말한 셈이다. 그러면서 개인이 주체로 선다. 행위 주체요 책임 주체로 선다. 그러나 변증론에서 말하는 자유는 참자유요 그것은 종합과 만남에서 생기는 자유이다. 윤리를 넘어서 종교와 연결되는 자유이다. 믿음과 희망에서 오는 자유이다.

4. 근본악과 해석학
그러나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해석학은 문헌 해석을 통해 악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이 책임질 허물 차원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들어 있는 죄의 차원을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 문제에서 종교는 윤리를 넘어서고, 참자유와 만난다. 회개하는데서 오는 자유를 찾는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 칸트는 근본악을 말했다. 윤리에서 악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고, 자유의 남용으로 보았지만, 내 안에 들어 있는 악의 문제가 있다. 그것을 칸트는 거의 본성이 악하다고 했다. 물론 그 본성은 자유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나쁜 준칙을 고칠 수 있다.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에 들어 있는 성향 곧 나쁜 준칙으로 기우는 경향을 없앨 수는 없다. 말하자면 본성을 고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 행위 때마다 매번 정신을 차리고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책임이다. 그러나 본성이 악하다고 하면서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여기서 본성이라는 것은 자연이나 필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타고 났다고까지 할 수 있으나, 아주 뿌리깊지만 타고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에 의해 획득된 것이요 초래된 것이다. 그래서 내 책임이다. 사실 칸트는 "본성이 악하다"는 말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떤 성향이나 경향성이라는 말로 바꿔 썼다. 그러나 "악에의 자연적 성향"이기 때문에 거의 본성이 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향은 항상 스스로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므로, 그 성향 자체를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근본적이며 생득적인(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에 의해서 초래된)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8)

칸트는 왜 근본악을 말하면서 그것이 사람이 초래한 것이라고 하는가? 왜 악의 성향이 생득적(angeborene)이라고 하면서도 사람이 초래한것이라고 하는가? 어거스틴이 말한 유전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거스틴의 유전설은 아담이 지은 죄를 후대 사람이 타고난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초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칸트가 유전설로 돌아가는 것은 더욱 아니다. 악은 운명이 아니라 사람 책임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악한 심성ㅇ르 타고났다고 해서 내가 초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9) 근본악, 곧 뿌리깊은 악을 말하는 한, 실천 이성 비판에서 말한 자신만만한 주체는 어느 정도 수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칸트는 계몽주의자요 근대 낙관론의 기둥이다. 근본악을 말하면서도 어거스틴의 non posse non peccare를 이해하려면 아직 멀었다. 칸트는 어디까지나 죄짓지 않을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면 근본악 문제를 어디까지 밀고 가야 되는가? 내가 볼 대는 사회의 구조악까지 가야 한다. 그래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총으로 의롭게 됨(Justification by the Grace)의 지평이 열린다. 다시 말해서 정당화(Justification)의 최종 주체를 사람이 맡지 않고 하느님에게 맡긴다. 리꾀르의 해석학에는 그것이 필요하다. 리꾀르는 신학자가 아니므로 그 문제를 논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그는 칸트의 근본악에서 어느 정도까지 은총과 종말의 지평을 보는가? 어느 정도까지 칸트는 해석학에 기여하는가? 리꾀르는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칸트의 근본악은 변증론과 관련해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변증론에서 사람의 윤리 의식은 종합을 내다본다. 그러나 바로 그 종합을 그야말로 희망 사항으로 놔두지 않으면 교만이 된다. 완전해지고 의지의 완성을 이루려는 욕구, 바로 거기에 근본악이 있다. 희망 안에 욕심이 들어 있을 때, 그것이 근본악이다. 인간의 문화 활동, 완전해지려는 노력 안에 악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함의 진짜 악은 교회와 국가에 있다. 인간의 노력과 업적을 가장 우상화하는 곳이다. 맹목 신앙은 하느님을 교회라는 제도에 사물화하고, 헤겔은 진리를 국가에서 사물화하려고 했다. 칸트는 근본악 문제를 말하면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볼 때 이것은 바울이 반대한 행함으로 의로워짐의 차원이다. 거기에 이르면 칸트는 어거스틴의 "죄짓지 않을 수 없음"에 아주 가까워진다. 무엇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회개함으로 자유로워지는 차원이다.

해석학이 칸트 윤리에서 가져오는 것은 거기까지이다. 칸트 너머에서 칸트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참자유를 얻고, 참주체가 되는 길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느님이 주체 대 주체의 관계에 서는 길이다. 존재의 은총에 감사하는 세계관이 열리는 길이다. 윤리는 단순히 의무 문제가 아니라 참자유를 바라는 존재 욕망의 문제가 된다. "그런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은 논리가 아니라 이야기이며 체계가 아니라 종말론이다."해석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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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P.Ricoeur, Le conflit des interp?tations, Paris, 1969, p.331.
2) 같은 책, p.462.
3) 프로이트의 고고학은 윤리의 근거를 밝힌 것은 아니다.
4) 같은 책, p.334.
5) 분석론에서 선은 선한 의지였다. 그러나 변증론에서 최고선은 존재다. 성서에서 말하는 선은 무엇인가? 선은 하느님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다. 왜 내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한분 뿐이시다(마 19:17). 칸트의 최고선에서 우리는 기독교 윤리를 본다.
6)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의인으로 살고 하늘 나라에서 상받기 바라는 것을 가리켜, 라인홀드 니이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주의와 다르게 보았다.
7) 도덕법은 세상에서 가능한 최고선을 내 행위의 궁극 목표로 만들 것을 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 희망을 가지려면 나이-의지가 거룩하고 선한 세계의 주인의 의지와 일치해야 한다. … 그러므로 정확히 말해서 도덕은 어떻게 우리가 행복해져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행복을 '누릴만하게 되어야 하는가'를 그르친다. 거기에 종교가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을 누릴만하게 되려고 애쓰면서 언젠가는 행복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8)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신옥희 역, 이화여대 출판부, p.42.
9) 같은 책, p.32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