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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순자의 자연관

온울에 2008. 5. 8. 13:17

목 차

머리말
1.하늘과 땅은 만물의 근원이다
2.만물이 공유하는 氣
3.자연의 항상성
4.자연의 일과 사람의 일
5.하늘을 알려고 하지 마라
6.자연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7.자연이 주는 것은 넉넉하다.
8.자연의 보호
9.음악은 자연을 본떴다.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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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인제대학교 
학술지명 인제논총 
권 13 
호 1 
출판일 1997. 12. 31.  




荀子의 自然觀


안종수
인제대학교 전임강사
4-127-9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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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자연 파괴와 환경 오염의 문제가 현대에 와서 더욱 심각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을 비판하고 또 서양인의 자연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관에 대해서 새롭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기독교의 자연관과 서양 근세의 자연관을 자연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1),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것과 자연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2).

동양의 자연관을 바람직한 대안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동양의 자연관을 단순화시켜서 자연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자연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만을 강조하게 되면 동양에는 자연에 순종하는 원시적인 사유와 생활 방식만이 존재했을 뿐이라는 오해를 낳을 위험이 있다. 이미 혜겔이 동양의 정신을 아직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하는 미숙한 단계로 봄으로써 이후 많은 유럽인들에게 잘못된 동양관을 심은 적이 있지만 그것이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동양인의 자연관에도 다양함이 있었고, 서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철학자들도 있었다. 荀子(B.C.289-239)의 자연관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중국인의 자연관과는 전혀 다르다. 그가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바로 자연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개발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연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자연을 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는 것과 자연과 인간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하늘이 의지를 가지고서 인간을 도울 수도 있고 방해를 하고 벌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의 생활이 적극적일 수 없다 번개가 치거나 천둥소리만 나도 사람들은 하늘이 노여워한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을 하늘이 벌주려 한다고 겁을 내게 된다. 그리고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있어도 사람들은 하늘이 인간에게 벌을 주는 것으로 여기고 두려워 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순자는 역설한다. 그러므로 비가 오지 않을 때 하늘에 를 빈다고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는 않는다. 비가 오기를 하늘에 기원하지 말고 가뭄에 대비해서 저수지를 만든다든지 강물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옳다. 마찬가지로 풍년을 하늘에 빌 생각만 하지 말고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을 모색해야만 풍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순자는 자연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것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자연을 보호해야만 사람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 그가 말한 철저한 자연의 보호는 요즘에 와서도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면 물고기를 산란기에는 잡지 말아야 하는데 아직도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는 순자가 말한 자연의 이용과 보호 그리고 자연에 대한 그의 여러 가지 견해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살폈다.

1.하늘과 땅은 만물의 근원이다
「하늘과 땅이란 생물의 근원이며, 禮義란 다스림의 근원이고, 군자란 禮義의 근원이다3).」

「禮에는 세가지 근본이 있으니, 하늘과 땅이란 생명의 근본이고, 조상이란 종족의 근본이며, 임금이란 다스림의 근본이다4).」

「그러기에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합하여서 만물이 생기고, 陰과 陽이 접촉하여 변화가 일어나고, 본성과 인위가 합하여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했다5).」

『莊子』 達生篇에 이미 「하늘과 땅은 만물의 부모이다6)」라는 말이 나오고, 『書經』 태서 상(泰誓 上)에도 「하늘과 땅은 만물의 부모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周易』 계사전 상(繫辭傳 上)에도 「하늘과 땅의 큰 德을 일러서 生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만물을 생성하는 능력을 하늘과 땅이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겨나는 생명체들을 보고서 매우 신기하게 여겼고 이것을 설명하려고 노력도 하였다.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암컷과 수컷이 만나서 새끼를 낳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자식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하늘과 땅을 그들은 다시 陰陽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순자도 이러한 기존하는 생각을 이어 받아서 하늘과 땅이 모든 생명체들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을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두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하늘과 땅이 적극적으로 생명체를 생산했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하늘과 땅에서 생명체가 저절로 생겨났다는 의미이다 하늘과 땅이 적극적으로 생명체를 생산했다고 해석하면, 순자가 하늘과 땅을 의지를 지닌 존재로 생각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순자의 사상 전체를 보면, 그는 하늘과 땅을 의지를 가진 어떤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7). 오히려 하늘과 땅은 의지가 없는 자연일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과 땅이 생명의 근원이란 말을 하늘과 땅이 적극적으로 생명체를 생 산 했다고 해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순자는 하늘과 땅을 생명을 생산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생명체로 보지도 않았다. 그는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8).

순자의 생각에 접근하는 해석은 그래서 하늘과 땅에서 생명체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이다. 생명체가 저절로 생겨났다거나, 하늘과 땅이 적극적으로 생산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명체와 하늘과 땅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 둘 사이에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생산되지 않고 저절로 생겨날 수는 있다. 저절로 생명체가 생겨 난다는 생각은 조금 특이하지만 당시의 생물학적 지식에 의할 것 같으면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순자도 고기가 적으면 벌레가 생기고 생선이 마르면 좀이 생긴다고 말하기도 했다9).

그러나 하늘과 땅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과 마른 생선에서 좀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셋째 번 인용문에서 「하늘과 땅이 합하여서 만물이 생긴다」라고 한 것을 보면 하늘과 땅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물이 생긴다고 생각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말하면서 또 저절로 만물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인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면 찬 구름과 더운 구름이 만나면 비가 생기는데, 이 경우에 찬 구름과 더운 구름이 비를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나는 것은 아니다.

하늘과 땅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는 순자의 생각은 자연 이외의 초월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노자나 장자의 생각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순자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잇는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노자와 장자의 사상까지도 흡수하여 종합한 철학자라는 것이 그의 자연관에 잘 나타난다.

2.만물이 공유하는 氣
「물과 불은 氣가 있으나 생명이 없고, 풀과 나무는 생명은 있으나 지각이 없고, 금수는 지각은 있으나 의리가 없다. 사람은 氣가 있고, 생명이 있으며, 지각이 있고 또한 의리가 있다. 그런 까닭에 천하에서 귀중한 것이 되었다10).」

「하늘과 땅이 합하여 만물이 생기고, 陰과 陽이 교접하여 변화가 일어난다11).」

「별들이 따라서 돌고, 해와 달이 번갈아 비추며, 사계절이 차례로 바뀌고, 陰과 陽이 크게 변화하며, 바람과 비가 널리 운행한다. 만물은 각기 그 조화를 얻어서 생겨나고, 각기 길러 줌을 얻어서 이루어 진다12).」

「별이 떨어지거나 수목이 소리를 내거나 하는 일이 있다. 나라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이것이 도대체 무슨 전조일 것인가?"라고 말한다. 이에 대답하건대, 아무 전조도 아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움직임이고 陰과 陽의 바뀜인데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다13).」

중국에서 氣字는 이미 갑골문에서도 나타나는데, 대체로 구름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許愼의 『설문해자』에서도 요즘의 氣字에 해당하는 기를 雲氣라고 하고, 상형 문자라고 설명하였다. 『논어』에는 「血氣」라는 말이 나오고, 「屛氣(병기)」라는 단어도 보인다. 혈기란 요즘도 우리가 쓰는 말로 그 의미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고, 병기란 숨을 죽인다는 의미이다. 『맹자』에는 「浩然之氣」란 말이 나오는데, 그 의미는 도덕적인 큰 용기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노자』에도 「충氣」ㆍ「氣」라는 단어들이 보인다. 충기란 천지 사이의 조화된 氣를 말한다. 임계유같은 학자는 텅빈 氣라고 설명하기도 한다14). 『장자』에는 氣字가 특히 많이 보이는데, 눈에 띄는 것은 「지북유편(知北遊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사람의 삶은 氣가 모이는 것이니 氣가 모이면 삶이 되고, 氣가 흩어지면 죽음이 되는 것이네. 만약에 죽음과 삶이 같은 종류라면 내가 또 어찌 근심하겠는가?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인 것이네. 그런데 사람들은 만물의 아름다운 것을 신기하다 하고, 추한 것을 썩어서 냄새가 난다고 하네, 적어서 냄새가 나는 것이 다시 변화해서 신기한 것이 되고, 신기한 것이 다시 변해서 썩어서 냄새가 나게 되네. 그러므로 천하는 하나의 氣로 통한다고 하는 것이네. 성인은 그러기에 하나를 귀하게 여기네15).」

이 인용문에는 氣가 모이면 만물이 생성되고 氣가 흩어지면 만물이 소멸한다는 장자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동일한 氣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장자의 영향을 받아서 순자도 氣를 만물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소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순자가 앞의 첫째 번 인용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과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그런데 순자의 말은 장자의 말만큼 명확하지 않다. 氣가 모든 것을 이루는 근본요소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외의 것으로 물과 불도 가지고 있는 어떤 힘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니덤 (Needham)과 같은 학자는 순자가 말한 氣를 영어로 subtle spirits(정령 혹은 영혼)로 옮기면서 그리스어로 pneuma(정신 혹은 靈)과 같다고 했다16). 니덤은 순자의 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이론과 비교하면서 상당히 유사하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세가지 종류로 나누었는데 식물적인 영혼과 감각적인 영혼 그리고 이성적인 영혼이 그것들이다. 식물이 가지고 있는 영혼이 식물적인 영혼이고,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식물적인 영혼과 동물적인 영혼 두가지이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세가지 종류의 영혼들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순자는 물과 불은 氣만 가지고 있고, 식물은 氣와 생명을 가지고 있고, 동물들은 氣와 생명 그리고 지각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氣ㆍ생명ㆍ지각 의리를 모두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경우에 氣를 영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 아니면 물질적인 근본요소로 보아야 할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17). 그러나 氣를 정신적인 것이냐 물질적인 것이냐 라고 묻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氣는 그 두가지를 이미 겸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의 개념으로 氣를 나타내거나 분류하려고 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순자』에 氣와 함께 나오는 개념으로 陰과 陽이 있다. 陰과 陽이 氣이므로 陰陽은 결국 氣를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앞의 첫째 번 인용문에서 물과 불이 氣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물은 陰의 氣를 가지고 있고, 불은 陽의 氣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봐야한다. 『주역』에서 물을 상징하는 괘는 坎卦(감괘)이고 불을 상징하는 것은 離卦(리괘)인데, 이 괘들이 실제로 陰과 陽을 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周濂溪(주렴계)의 「太極圖」를 보면 태극 다음에 음양이 나오는데 거기에 坎卦와 離卦를 그려놓았다. 둘째 번 인용문과 넷째 번 인용문에서는 天地와 陰陽이 함께 나오고 있는데 여기서도 天地를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으로, 다시 말해서 陰과 陽으로 볼 수 있다.

순자는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자연의 모든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자연현상이란 결국 다른 것이 아니라 음양의 상호작용일 뿐이고 또 다른 인격자의 간섭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음양의 변화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원리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지 그것을 조정하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3.자연의 항상성
「하늘의 운행은 항상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堯임금을 위해서 존재하거나 桀임금을 위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안정된 다스림으로 그것을 대하면 吉하고, 혼람함으로 대하면 凶하다18).」

「하늘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고, 땅에는 일정한 이치가 있으며, 군자에게는 일정한 실행이 있다19).」

옛날 사람들도 자연에는 일정한 길이 있음을 알았고 그것을 이용했으며 또 그 정확함에 감탄했다. 「天行有常」을 여기서는 「하늘의 운행은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로 번역했는데, 「常」을 常道 혹은 법칙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常이란 변함없이 늘 그러함을 말한다. 예를 들면 태양의 운동, 달의 변화 그리고 별들의 운동이 항상 일정하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에도 항상성 혹은 일정함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의 항상성을 두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똑같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하나의 의미는 규칙성이다. 후자의 경우는 불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정한 규칙 또는 법칙을 자연의 변화는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변하지만 그 변화는 규칙적이라는 점에서 일정하다. 변화가 규칙적이라는 것은 결국 변화가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반복됨을 말한다. 해가 뜨는 장소는 매일 조금씩 변하지만 일년을 주기로 반복 되고,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도 매일 조금씩 변해서 일년을 주기로 반복된다. 이러한 것을 옛날 사람들도 경험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하늘의 항상성을 말하였다.

만일에 자연의 운행에 이러한 일정함이나 항상성이 없었다면 살기가 아주 불편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루가 길었다가 짧아졌다가 한다든가, 일년이 길었다가 짧아졌다가 한다면 사는 데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항상성이라는 관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자연에서 보이는 규칙성이 없었다면 인간은 또한 규칙성이라는 것도 모를 수 있다. 이러한 자연의 불변성과 규칙성을 보고서 옛날 사람들은 매우 경탄했다. 나아가서 사람들은 자연의 정확함과 성실함을 따르고자 했다. 그래서 둘째 번 인용문에서 나오듯이 「군자에게는 일정한 실행이 있다」라고 순자는 말했다.

그리고 순자가 자연의 항상성을 말하면서 덧붙여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첫째 번 인용문에서 언급이 되고 있듯이, 그 항상성은 인간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점이다. 자연의 운행은 항상성을 가지고서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지 인간이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인간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인간이 원한다고 하루가 길어지거나 짧아질 수도 없고 해가 서쪽에서 뜨거나 남쪽에서 뜰 수도 없다. 또 반대로 자연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순자의 생각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특별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인간을 자연에 철저히 종속시키려는 생각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4.자연의 일과 사람의 일
「높은 땅에 가뭄이 없게 하고, 낮은 땅에 홍수가 없게 하며, 추위와 더위가 적당해서 오곡이 때에 맞게 잘 익도록 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다. 그러나 백성을 널리 보호하고 어루만지고 통제해서 흉년이 들고 한해와 수해가 있어도 굶고 얼지 않게 하는 것은 어진 임금과 어진 재상의 일이다20).」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우는 것은 천지의 변화와 음양의 조화로 사물들 사이에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좋지만 무서워하는 것은 잘못이다. 빈번히 일어나는 것으로 사람이 일으키는 재앙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것이다. 함부로 논과 밭을 갈아서 농작물을 잘 심지 못하고, 김매기를 함부로 해서 수확을 망치고, 정치가 험악해서 민심을 잃고, 밭은 황폐해져 버려 농사는 안되고, 곡물의 간은 비싸서 백성은 기근에 빠지고, 거리에 시체가 흩어져 있으면 이것을 사람이 일으키는 재앙이라고 하는 것이다21).」

순자는 자연을 의인화하거나 의지를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을 비판했다 자연은 자연이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철저하였다.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견해를 부정하고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예를 들면 자연의 현상을 하늘이 인간에게 어떤 뜻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그는 비판하였다. 마찬가지로 자연 현상을 인간사회에서 장차 일어날 일의 전조(前兆)로 해석하는 것도 반대했다. 그가 둘째 번 인용문에서 예를 들고 있는 별이 떨어지는 것과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이나 궁전에 있는 신목(神木)이 소리를 내는 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전란이 일어나는 전조로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연은 의지가 없기 때문에 자연의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운행될 뿐이고 인간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연의 현상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면 비가 많이 오는 것은 하늘이 사람들을 미워해서 혼을 내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비가 올 수밖에 없어서 온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미워서 비가 많이 오거나 가무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좋아서 날씨가 좋은 것도 아니다. 날씨가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것은 자연이 그냥 그런 것일 뿐이다. 날씨가 나쁘다고 하늘이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니 힘써 그러한 날씨에 대처해서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하늘은 인간을 가난하게 할 수도 없고 부유하게 할 수도 없으며 병들게 할 수도 없고 병이 낳게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열심히 일하고 낭비하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있고 일하지 않고 낭비하면 가난하게 될 것이고, 건강에 유념해서 운동도 하고 몸을 돌보면 병이 나지 않을 것이고, 몸을 돌보지 않고 위생에 유념하지 않으면 병이 쉽게 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비가 많이 오는 해도 있고 비가 적게 오는 해도 있겠지만 비가 많이 올 것에 대비해서 배수로를 잘 관리하고 강에는 둑을 만들어서 홍수를 예방하고 비가 적게 올 것에 대비해서 저수지를 만들고 보를 막아두면 수해와 한해를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비상시를 생각해서 식량을 비축해둔다든지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해와 한해에 대처해서 굶주림이 없도록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해야하는 일이다. 자연의 변덕스러움을 탓하기만 하고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 할 일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의 재앙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바로 통치자들이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잘 다스리지 못해서 생기는 재앙이라고 순자는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백성들의 굶주림을 하늘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들은 조금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당시의 통치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5.하늘을 알려고 하지 마라
「하늘에 죽 늘어선 별들은 일주운동을 되풀이 하고, 해와 달은 교대로 지상을 비추고, 네 계절은 순차로 지상을 통치하며, 陰과 陽은 만물을 크게 변화시키고, 바람과 비는 널리 혜택을 주고 있다. 만물은 저마다. 그 조화를 얻어 생기며, 저마다. 그 양육을 받고 성장한다. 그 일은 보이지 않아도 그 功은 보이니 이것을 일러 神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그 완성된 바를 알지만 그 무형의 작용은 알지 못하니 이것을 일러 하늘(天)이라고 한다. 오직 성인만이 이러한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22).」

「聖人은 그 天君을 깨끗하게 하고, 天官을 올바르게 가지며, 天養을 고루 갖추고, 天政에 순응하며, 天情을 기르므로써 天功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니, 이같이 되면 자기가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게 된다. 그리하면 곧 天地를 주재할 수 있고 만물을 부릴 수 있다. 그 소행이 두루 잘 다스려지고 양생하는 바가 두루 적당하며 그 삶이 상처입는 일이 없다면, 이것을 가리켜 하늘을 안다고 한다23).」

둘째 번 인용문에서 天君은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天官은 다섯가지 감각기관이고,天養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자연의 산물을 말하며, 天政은 자연의 명령을 의미하고, 天情은 사람의 감정이고, 天功은 자연계의 공적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天이란 대체로 자연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성인이란 그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것을 잘 이용하고,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것이 순자의 견해이다.

그런데 앞의 인용문에서 순자는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 성인을 말하고, 뒤의 인용문에서 다시 하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했다. 그러면 그는 하늘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하늘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가 한번은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 성인을 옹호하고, 한번은 하늘을 아는 것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 앎의 대상을 보면 각기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순자의 이러한 주장을 陳大齊 같은 학자는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은 과학적인 지식이고, 알 필요가 없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지식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24). 이 설명은 곧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天은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만 하고,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대상으로서의 天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어느 정도 순자의 뜻을 엿보이기는 했지만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과 형이상학이 확실하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과학의 분야이고 어디부터 형이상학인지가 그렇게 명확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구분으로는 순자가 말한 바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周群振은 그의 저서 『荀子思想硏究』에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연현상」과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자연현상 배후의 「所以然之理」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25). 순자가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고, 그 현상배후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리」나 「법칙」 나아가서 「인격적인 존재의 의도」 같은 것은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는 견해이다. 순자가 하늘을 이렇게 두가지로 나누어서 하나는 알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이유는 현실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것은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연현상에서 얻는 지식이지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므로 군자는...천지만물에 대해서는 그 所以然(까닭)을 말하는데 힘쓰지 않고, 그 산물을 잘 사용한다26).」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결국 하늘의 일과 인간의 일을 엄격히 구분하여서 인간의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강조하는 그의 생각과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가 오는 자연현상에 대해서 비를 잘 이용해서 농사를 짓거나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제방을 튼튼히 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왜 지금 비가 오는지를 묻거나 비가 오지 않아야 할 지금 비가 온다고 하늘을 원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산에서 자라는 나무를 우리가 잘 이용해서 집을 짓거나 땔감으로 이용하면 그만이지 어떻게 해서 나무가 산에서 자라나는지 또는 누가 나무를 생기게 하였는지를 묻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6.자연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제방과 다리를 건설하거나 보수하고, 전답 사이의 용수로를 깊이 쳐내서, 빗물이 잘 빠지게 하고, 저수의 안전을 기하고 적당한 때에 수문을 열고 닫아서 비록 기후가 괴이하여 홍수나 한발이 있더라도 농민의 경작지를 보호하는 것은 사공(司空)의 일이다27).」

「하늘을 위대하게 여기고 사모만 하는 것이 어찌 만물을 축적하여 그것을 제재하는 것과 같으랴. 하늘에 순종하여 찬양하는 것이 어찌 천명을 제어하여 이용하는 것과 같으랴. 때를 바라보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어찌 때에 적응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것과 같으랴28).」

이 두개의 인용문에는 자연에 대한 순자의 적극적인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어떤 학자들은 농업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자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주장한다29). 농업이라는 것이 자연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농사를 짓는 데도 자연에 도전하고 자연을 이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우선 자연을 변형시키지 않고서 농업은 가능하지 않다. 자연 그대로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풀과 나무를 제거하고 돌들을 치우고 땅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곡식을 심을 수 있고 적당하게 땅이 수분을 품도록 배수로를 만들거나 물을 대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잡초를 제거해야 하고 햇볕이 잘 들도록 논과 밭의 주변에 있는 큰 나무들을 없애야 한다.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해충을 막아야 하고 날짐승과 길짐승들을 없애거나 쫓아야만 한다. 비가 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만들어야 하며, 비가 많이 올 때를 생각해서 강이나 물이 흘러가는 주위에는 높은 둑을 쌓아야 하다.

그리고 농업은 자연현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 필요하다.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모르고는 농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태양의 움직임과 달의 움직임 그리고 별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계산해야만 한다. 기상의 변화에 농사가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기상의 변화를 관찰해야 하고 또한 예상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식물의 특성을 알아야 하고 해충들을 막기 위해서는 해충의 성질도 파악해야 한다. 이 밖에도 농업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과 지식은 수없이 많다.

나아가서 엄청난 자연의 파괴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농업이 불가능하다. 높은 곳은 낮게 만들어야 하고 낮은 곳은 높게 해야 하며, 나쁜 땅은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하고 늪지대는 흙으로 메워야 한다. 오늘날의 세계적인 농경지도 옛날에는 아프리카의 초원이나 늪지대와 같았다. 그런 자연 그대로의 땅을 변화시켜서 비옥한 땅으로 만드는 것은 자연을 엄청나게 변화시키는 일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다. 인간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변형과 파괴를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변형과 파괴도 아무런 도전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시골의 어른들은 산을 깎아서 도로를 건설하는 것을 지맥을 끊는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었다. 이 어른들의 생각을 긍정적인 면에서도 볼 수 있고 부정적인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 무리한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조금이나마 방지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주장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에 빠져서 적극적인 개발을 하지 못하는 것도 발전을 위축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도로의 건설이나 철도의 건설은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될 기본 전제 조건인데 자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순자가 인간과 자연을 엄격히 분리한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굉장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킴으로서 자연에 의존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용하고 제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자연은 의지를 가지지 못한 비 인격적인 존재임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연에 가질 수 있는 두려움을 감소시켜 주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히 자연을 거스르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는 천둥과 번개를 겁내고 깊은 물을 두려워하며 높은 산을 경외하고 큰 나무만 보아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정도로 이러한 것은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발전에 지장이 되어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성취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순자는 바로 이러한 점을 알았기 때문에 자연의 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7.자연이 주는 것은 넉넉하다.
「오늘날 이 땅에서 오곡이 생산되는 것은, 사람들이 잘 가꾸기만 하면 한 무(畝)에서 몇 분(盆)의 곡식이 나오고 한 해에 두 번 수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오이ㆍ복숭아 대추ㆍ오얏 등도 한 나무에 분(盆)으로 헤아릴 정도요, 파나 마늘 등 백가지 채소도 연못으로 헤아릴 정도며, 소ㆍ양ㆍ말ㆍ개ㆍ돼지ㆍ닭 등의 가축과 날짐승 및 길짐승은 한 마리가 수레에 가득차고, 큰자라와 악어 등의 물고기도 때에 따라 번식하여 종류마다 떼를 이루고, 오리ㆍ기러기 등도 바다를 뒤덮은 연기와 같이 많고, 또한 곤충이나 만물들이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데 식용으로 양식할 수 있는 것이 수도 없이 많다. 대개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낼 때는 본래 사람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고, 삼ㆍ칡ㆍ명주실ㆍ새털ㆍ짐승의 털ㆍ상아ㆍ가죽 따위도 본래 여유가 있어서 사람을 입히고도 남는다30).」

무(畝)란 땅의 넓이를 계산하는 단위로 百步에 해당하는데, 一步는 사방 여섯 자(尺)를 말한다. 그러니까 一步는 대략 요즘의 한 평에 해당하고, 一畝란 100평의 땅에 해당한다. 그리고 분(盆)은 열두말 여덟 되의 양이라고 한다. 이 인용문은 묵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순자의 말이다. 묵자는 물자가 적은 것을 걱정해서 검소함과 절약을 주장했는데 순자는 그것을 비판하고 지나친 검소함과 절약은 모든 백성들을 오히려 가난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 근거로 먼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것이 아주 넉넉하다는 것을 여기서 설명하고 있다. 자연의 풍요로움을 아주 기분좋게 잘 서술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순자는 아주 낙천적인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순자는 그 자연의 풍요로움을 직접 경험했고 어려운 경험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순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의 풍요로움도 중요하지만 그 풍요로움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자연이 사람을 먹이고 입히는 것을 넉넉하게 준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먹을 것은 먹고 입을 것은 입을 때 백성들의 생활은 풍요롭게 된다고 생각했다. 묵자처럼 음악을 사치라고 못하게 한다든가, 통치자가 지나치게 절약하는 것은 오히려 나라 전체를 가난하게 만들게 된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이다. 예를 들면 통치자는 먼저 백성들의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줄 의무가 있고, 그렇게 하여야만 백성들은 기뻐하고 또 따르고 열심히 일한다. 그렇지 않고 절약과 검소만을 강조하게 되면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할 수 없게 되어 힘써 일하지 않고 통치자를 따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업적이 있는 신하나 백성은 후한 상을 주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엄한 처벌을 하여야 하는데 절검(節儉)을 핑계로 후한 상을 내리지 못하면 누가 공을 세우려 할 것이며 누가 좋은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통치자가 풍부한 재력을 가지고서 신하들에게 베풀지 못한다면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잘 따르지 않을 것이고, 통치자가 화려하고 웅장한 의식과 장식으로 꾸미지 않는다면 백성들이나 신하들을 위엄으로 통치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묵자의 절용설은 잘못이라고 순자는 주장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도 집안의 일꾼들을 다스리듯이 넉넉히 베풀어서 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만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러한 순자의 묵자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 공산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를 비교하게 만든다. 묵자의 생각은 공산주의 이론에 가깝고 순자의 생각은 자본주의 이론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리 이론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면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눈과 귀와 입과 배의 기본적인 욕망이 있고 그것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인간에게는 무용지물이 된다 聖人들만 사는 나라는 결코 보통사람들이 원하는 나라가 아니다. 순자는 사람들의 기분적인 욕망을 알았고 또 그것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묵자의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순자의 견해는 탁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8.자연의 보호
「풀과 나무의 개화기와 성장기에 도끼를 가지고 산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풀과 나무를 일찍 죽게 하거나 성장을 멈추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자라ㆍ악어ㆍ미꾸라지ㆍ상어 등 모든 물고기가 알을 가졌을 때나 어린 물고기가 다 자라기 전에는 어망이나 독약을 가지고 못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고기를 일찍 죽게 하거나 그 성장을 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31).」

「산과 늪지대를 태우는 법령문을 바로잡고, 산림과 늪에 있는 초목ㆍ물고기ㆍ여러가지 채소들을 기르고, 때에 따라 금지하고 개방하여서 국가의 재용을 넉넉히 하여 재물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우사(處師)의 일이다32).」

첫째 번 인용문은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 가운데서 풀이나 나무 그리고 물고기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순자의 말이고, 둘째 번 인용문은 국가의 관직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를 논한 순자의 말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첫째 번 인용문에는 풀이나 나무 그리고 물고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시기를 정해서 풀과 나무를 베게하고 물고기를 잡게해야 한다는 대용이 나오고, 둘째 번 인용문에는 산과 늪지대를 태우는 법령에 대한 문제가 하나 더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순자의 자연의 보호와 이용에 대한 관심이다. 그리고 자연을 보호하는 것의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순차의 이러한 생각은 물론 순전히 독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이미 당시에 시행되고 있는 제도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33).

순자는 자연이 주는 것은 사람들이 먹고 입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두가지 인용문에서 볼 수 있다. 자연이 아무리 좋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이용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풍족하게 생활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냥 자연 그대로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세심한 보호와 관리가 있어야만 자연은 그 풍부한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고 사람들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자연에 인간이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말 것을 道家들이 주장했다면, 순자는 자연 그대로 가만히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적극적으로 간섭해야만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자연의 보호도 이러한 적극적인 간섭과 관계가 있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보다 더 풍족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다.

자연보호에 대한 이러한 순자의 생각은 현대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 우리들은 자연을 일방적으로 착취하기만 하지 그것을 제대로 보호하고 관리하지 못한다. 자연의 모든 것을 주인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 될 수 있으면 서로가 많이 차지하려고 경쟁만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방적인 착취와 이용은 결국 자연의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이용하기만 했기 때문에 자원은 고갈되고 자연의 회복력은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것은 농민의 생존이 걸려있는 논과 밭을 돌보지 않고 황폐화시켜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의 논과 밭은 정성들여 가꾸지만 자연 전체를 이와 같이 돌보지는 않는다. 모두들 나와는 상관이 없는 남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순자가 역설한 자연보호는 오늘날 정말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자연보호와 환경문제 같은 것의 역사를 서양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자연과 환경의 파괴는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의 소산이고 동양은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순자의 말을 보면 자연의 파괴와 보호 그리고 환경문제 같은 것은 서양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미 동양에도 고대시대부터 중요하게 생각했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설령 동양에서는 자연이 비교적 덜 파괴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원인이 근본적으로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를 막았기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9.음악은 자연을 본떴다.
「그러므로 그 노랫소리의 청명함은 하늘을 본뜬 것이요, 종소리, 북소리의 광대함은 땅을 본뜬 것이요, 몸을 구부렸다 펴고, 빙글빙글 도는 춤의 모양은 네 계절과 유사하다34).」

「그러므로 북은 하늘을 닮고, 종은 땅을 닮고, 경쇠는 물을 닮았고, 생황ㆍ쌍피리ㆍ피리는 별ㆍ해ㆍ달을 닮았으며, 작은북ㆍ부격ㆍ축어는 만물을 닮았다35).」

묵자는 음악을 천하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하였다. 음악이 사람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국 백성의 재물을 축내는 것이기 때문에 어진 사람은 음악을 즐기지 않는다고 했다. 임금이나 대신들이 음악을 즐긴다면 우선 그 악기는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요, 물이나 흙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서 만든다. 그런데 그렇게 세금을 거두어 만든 악기가 백성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묵자의 주장이다. 백성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편하게 사는 것인데, 음악을 연주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큰 종을 두드리고, 북을 치며, 도끼를 들고 춤을 춘다고 해서 천하의 혼란이 해결되지도 않는다36).

그리고 인간은 동물과는 달라서 노동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임금이나 관리 그리고 백성들은 한가하게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그런데 만일에 임금과 관리 그리고 백성들이 자기의 직책을 다하지 않고 음악을 즐긴다면 국가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생산은 줄어들어서 모두가 가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음악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묵자는 주장한다37).

이러한 묵자의 견해에 대해서 순자는 찬성하지 않는다. 순자는 인간이 음악을 좋아하는 감정은 자연적인 것이므로 그것을 막으면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러한 자연적인 감정을 좋은 방향으로 잘 유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막아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음악은 묵자가 생각한 것처럼 부작용만 가진 것이 아니라 분명히 좋은 점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이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사람은 모두 즐거운 감정을 가졌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노래와 춤이다. 그래서 이것을 잘 인도할 필요가 있는데 옛날의 성인은 그것을 잘 인도했다. 그렇게 하면 음악은 사람들의 착한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고 악한 마음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음악을 들으면 아랫사람과 윗사람은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화합시킬 수 있다. 순자는 이외에도 음악의 좋은 점을 많이 열거하고 있으며 음악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물론 모든 음악이 다 좋은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글은 모두 『순자』 樂論篇에 나오는 것인데 첫째 번 인용문은 『禮記』의 樂記篇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은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청명한데 그것은 하늘의 청명함을 본떴고, 종소리와 북소리는 광대한데 그것은 땅의 광대함을 본떴으며 , 춤을 추는 모양은 네 계절이 순환하는 것을 본떴다는 것이다. 음악과 자연을 서로 연관지어서 생각한 점이 독특하다. 그리고 하늘을 청명하다고 하거나 땅을 장대하다고 표현한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늘과 땅에 대한 일상적인 경험이고,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과 땅을 의지를 가진 특별한 존재로 보려고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춤을 표현하면서 俯仰周旋(부앙주선)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俯는 고개를 숙이는 것이고, 仰은 고개를 드는 것이며, 周와 旋은 빙빙 도는 것이다. 이 네가지를 네 계절과 연결시켜서 춤이 네 계절을 본떴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예술활동을 자연과 대응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예술활동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연을 모방했다는 생각이다.

둘째 번 나오는 인용문은 모두 악기들의 소리가 자연과 닮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순자는 먼저 여러 가지 악기들의 소리가 어떠한가를 서술하고 그것이 자연과 닮았다고 하였다. 「먼저 북소리는 크고 떠들썩하고, 종소리는 충실하고, 경쇠는 딱딱 끊어져 소리 마디가 분명하고, 생황소리는 엄숙하고 부드럽고, 쌍피리와 피리소리는 세차고38)」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것들이 바로 자연을 닮았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악기들이 닮은 것은 자연 전체임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ㆍ물ㆍ별ㆍ해ㆍ달 나아가서 만물까지 모두 거론되었다. 이것은 음악이라는 것은 축소된 자연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자의 견해는 결국 음악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음악은 막아서는 안되고 잘 다스리기만 한다면 인간의 생활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맺음말
자연에 순종할 것을 강조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본 많은 중국의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순자는 자연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먼저 자연을 의인화하거나 신비화하지 말고 자연 그대로 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의지를 가지고 있지 못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을 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해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자연에 무엇을 기원할 필요도 없다. 자연은 스스로의 원리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고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자연의 일에 간섭할 수 없고 또 자연도 인간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 드디어 인간은 자연을 의식하지 않고서 마음놓고서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연을 죄의식 없이 개발하고 이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

자연과 인간을 나누어서 생각해야 한다는 순자의 이러한 생각은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미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자연을 엄청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에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아님을 의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으로 아직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무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저수지를 만들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엄청난 농지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어서 자연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다. 인간의 능력이 엄청나게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힘을 믿지 못하고 자연을 의인화하거나 신비화시키려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했다. 순자의 주장은 진보를 방해하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고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순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漢代에는 동중서(董仲舒, B.C. 179-104) 같은 사람이 나와서 시대에 역행하는 주장을 함으로써 진보를 막기도 했다.

이제 시대는 바뀌어서 인간의 힘은 더욱 엄청나게 늘어나 자연을 제압하고 파괴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생존마저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살리자는 목소리가 높은 시대가 되었다. 지나친 발전이 오히려 인류에게 해를 끼치는 이런 시대에 순자의 자연에 대한 견해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는 자연을 합리적으로 이용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이용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보호도 주장했다. 자연의 철저한 보호가 바로 합리적인 자연의 이용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 사람이 순자다. 자연보호에 대한 그의 주장은 자연은 키우고 보살핀 만큼만 되돌려 준다는 사실을 그가 잘 알았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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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구니야 쥰이치로, 「환경과 자연인식의 흐름」, 심귀득외 역, (고려원, 1992): 구승회, 『에코필로소피』 (새길, 1995); 이윤재, 「환경 휴머니즘과 새로운 사회」 (소나무, 1994): 데이비드 페퍼, 『현대환경론』, 이명우외 역, (한길사, 1995), 참조.
2) 송상용, 「환경 위기의 뿌리」, 『철학과 현실』(1990, 여름호), pp. 28-35; 심재룡, 「동양 철학의 관점에서 본 환경 문제」, 『철학과 현실』(1990, 여름호), pp.55-64: 린 화이트,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 이유선 역, 『과학 사상』(1992, 봄호), pp. 283-295; White, Lynn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in: Science, vol. 155. 1967, pp. 1203-1207, 참조.
3) 「天地者, 生之始也; 禮義者, 治之始也 ; 君子者, 禮義之始也.」(『荀子』 王制篇)
4) 「禮有三本 : 天地者, 生之本也 ; 先祖者, 類之本也 ; 君師者, 治之本也.」 (『荀子』禮論篇)
5) 「故曰 : 天地合而萬物生, 陰陽接而變化起, 性僞合而天下治.」 (『荀子』 禮論篇)
6) 「天地者, 萬物之父母也.」(『莊子』 達生篇)
7)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도 물론 있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는 廖名春, 『荀子新探』, 臺北, 文律出版社, 民國 83, pp.182-186에 잘 나온다.
8) 『荀子』 王制篇, 參照.
9) 『荀子』 勸學篇.
10) 「水火有氣而無生, 草木有生而無知, 禽獸有知而無義 ; 人有氣有生有知亦且有義, 故最爲天下貴也.」(『荀子』, 王制篇)
11) 「天地合而萬物生, 陰陽接而變化起.」 (『荀子』 禮論篇)
12) 「列星隨旋 日月遞炤 四時代御, 陰陽大化, 風雨博施, 萬物各得其和以生, 各得其養以成, 不見其事而見 其功, 夫是之謂神.」 (『荀子』 天論篇)
13) 「星隊木鳴, 國人皆恐, 曰, 是何也. 曰, 無何也. 是天地之變, 陰陽之化, 物之罕至者也.」(『荀子』 天論篇)
14) 任繼愈, 『老子新譯』, 香港, 中華書局, 1987, p. 152.
15) 「人之生, 氣之聚也 ; 聚則爲生, 散則爲死, 若死生爲徒, 吾又何患? 故萬物一也. 是其所美者爲神奇, 其所惡者爲臭腐. 臭腐復化爲神奇, 神奇復化爲臭腐. 故曰, 通天下-氣耳. 聖人故貴一.」 (『莊子』 知北遊篇)
16) Needham. Joseph.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6), vol. 2, p. 23.
17) 廖名春, 『荀子新探』, 臺北, 文津出版社, 民國 83(1994), p. 179, 參照.
18) 「天行有常, 不爲堯存, 不爲桀亡. 應之以治則吉, 應之以亂則凶.」 (『荀子』 天論篇)
19) 「天有常道矣, 地有常數矣, 君子有常體矣.」 (『荀子』 天論篇)
20) 「高者不旱, 下者不水, 寒署和節, 而五穀以時孰, 是天下之事也, 若夫兼而覆之, 兼而愛之, 兼而制之, 歲雖凶敗水旱, 使百姓無凍?之患, 則是聖君賢相之事也.」 (『荀子』 富國篇)
21) 「夫星之隊, 木之鳴, 是天地之變, 陰陽之化, 物之罕至者也, 怪之可也, 而畏之非也, 物之已至者, 人?則可畏也, 고耕傷稼, 耘?失藏, 政險失民, 田歲稼惡, ?貴民飢, 道路有死人, 夫是謂之人?.」 (『荀子』 天論篇)
22) 「列星隨旋, 日月遞炤, 四時代御, 陰陽大化, 風雨博施, 萬物各得其和以生, 各得其養以成, 不見其事而見其功, 夫是之謂神, 皆知其所成以成, 莫知其無形, 夫是之謂天, 唯聖人爲不求知天.」 (『荀子』 天論篇)
23) 「聖人淸其天君, 正其天官, 備其天養, 順其天政, 養其天情, 以全其天功: 如是則知其所爲, 知其所不爲矣; 則天地官而萬物役矣, 其行曲治, 其養曲適, 其生不傷, 夫是之謂知天.」 (『荀子』 天論篇)
24) 周群振, 『荀子思想硏究』, 臺北, 文津出版社, 民國 76(1987), p. 149, 參照.
25) 같은 곳.
26) 「故, 君子...其於天地萬物也, 不務說其所以然, 而致善用其材.」 (『荀子』 君道篇)
27) 修?梁, 通溝澮, 行水?, 安水臧, 以時決塞, 歲雖凶敗水旱, 使民有所耘艾, 司空之事也.」 (『荀子』 王制篇)
28) 「大天而思之, 孰與物畜而制之? 從天而頌之, 孰與制天命而用之? 望時而待之, 孰與應時而使之?』 (『荀子』 天論篇)
29) Fung, Yu-Lan, 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ed. by Derk Bodde, (New York: The Free Press, 1966), p. 26.
30) 「今是土之生五穀也, 人善治之, 則畝數益, 一歲而再獲之. 然後瓜桃棗李一本數以益鼓, 然後?菜百疏以澤量, 然後六畜禽獸一以전車, ??魚鼈??以時別一而成群, 然後飛烏鳧雁若煙海, 然後昆蟲萬物生其間, 可以相食養者不可勝數也. 夫天地之生物也, 固有餘足以食人矣: 麻葛繭絲鳥獸之羽毛齒革也. 固有餘足以衣人矣.」 (『荀子』 富國篇」)
31) 「草木榮華滋碩之時, 則斧斤不入山林, 不夭其生, 不絶其長也; ??魚鼈??孕別之時, 罔?毒藥不入澤, 不夭其生, 不絶其長也.」 (『荀子』 王制篇)
32) 「修火憲, 養山林藪澤草木魚鼈百索, 以時禁發, 使國家足用而財物不屈, 虞師之事也.」 (『荀子』 王制篇)
33) 『禮記』 月令篇, 參照.
34) 「故其淸明象天, 其廣大象地, 其俯仰周旋有似於四時.」 (『荀子』 樂論篇)
35) 「故鼓似天, 鐘似地, 磬似水, 芋笙簫和??似星辰日月, 도축?膈?似萬物.」 (『荀子』 樂論篇)
36) 『墨子』 非樂篇, 參照.
37) 같은 곳.
38) 『荀子』樂論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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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안종수
인제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철학과전임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