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인문학의 위기, 그 담론성의 유행성
2. 인문학의 위기, 그 원인이 무엇인가?
3. 왜 인문학이 필요하단 말인가?
4. 우리 인문학의 서구추수주의와 새로운 글쓰기
5. 조동일의 우리 학문하기와 창조적 주체성
6. 표현인문학과 영상적 상상력
7. 우리 인문학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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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서강대학교 비교사상연구원
학술지명 신학과 철학
ISSN
권
호 4
출판일 2002. . .
한국 인문학의 현실과 가능성*이 연구는 2000년도 서강대학교 교내 연구비 지윈에 의해서 이루어졌음.
강영안
김 영 건
3-567-0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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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문학의 위기, 그 담론성의 유행성
우리 인문학의 위기와 그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들이 마치 유행처럼 나타났다가 또 사라지고 있다. 이 현상에 대해서 문성학은 다음처럼 그 유행의 한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
"학술행사를 하나 개최해야 하긴 하겠고 사람들을 끌어 모를 수 있는 시의성 있는 주제는 퍼뜩 생각나지는 않고 이래저래 전전긍긍하다가 옳거니하고 정해진 주제가 '인문학의 위기'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애당초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제의 학술 행사를 하게 된 이유는 그야말로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해서라기보다 여러 대학의 인문과학연구소의 학술행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학술 발표 이후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인문학 학자들의 후속 되는 노력이 없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구소의 존재 이유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학술 행사의 위기'를 넘긴다는 본래 목적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논의거리를 통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1)
문성학의 비판과 비아냥처럼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그 나름의 진단과 처방을 제시하지만 그 소리만 요란한 형편이다. 문성학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후속적인 체계적인 노력이 부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아주 중요하게도 문성학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그 위기와 문제에 진지하게 직면하지 않고 단지 형식적인 학술 행사로 끝나버리는 우리의 우울한 인문학적 현실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의 유행 속에서도 인문학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모색과 구체적인 실천은 여전히 필요한 일이고 또 언제나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한국적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인문학의 위기에 어떤 고유성을 있을 것이고, 이것을 진단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구체적 노력은 이제는 그 담론의 유행이 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2. 인문학의 위기,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이러한 인문학의 위기의 원인, 혹은 인문학에 대한 자기 반성을 강요하게 된 그 원인들이 도대체 무엇인가? 아마도 그 원인들을 인문학 내부와 외부로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황 속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 일으킨 직접적인 외부적 원인의 하나는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국제화 세계화로 상징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학부제라는 제도적 변화이다. 즉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에서의 문학, 역사, 철학 과목이 아주폐강이 되며 전공학생수가 줄어들고 교육부의 '학부제' 강요로 학과의 존립은 물론 전공교수들의 교수직이 위협을 받는 심자한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문학은 자유경쟁이라는 시장경제의 원리만으로 우리의 생활세계가 지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학문의 기본 영역이다. 이러한 인문학이 학문의 세계에까지도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거하여 모든 것을 평가하고자 하는 정책 때문에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다.2)
만약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 외부의 이러한 사회적 제도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그 처방 또한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학부제를 폐지하면 된다. 그러나 그 나름의 정당한 장점들을 지니고 있는 학부제를 폐지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가?
"학부제는 과거 지나치게 세분되었던 전공 학문간의 벽을 허물고, 보다 큰 단위의 학문 영역을 대학을 재편성하여 학생들을 모집하고 교과를 운영하는 것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통합적 학문 영역 안에서 기초와 공통과목을 이수하게 하고 상급 학년에서 세부 전공을 익히게 하는 것이 이제도의 취지이다. 기왕의 학과 단위 편성이 학문의 분야별 갈래별로 분화된 세부 교과목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면 학부제는 이를 보다 큰 범주로 묶는 것이다. 이것은 동일 학부 안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세분된 여러분야를 탐색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능력과 적성에 맞고 장래성이 있는 세부 전공을 희망하는 대로 이수하게 하는 제도이다.3)
이러한 학부제는 학생들에게 전공과 관련된 다양한 연계 과목들을 제시함으로써 더욱 폭넓고 풍부한 학문을 맛보게 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가령 소홍렬은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병은 문학, 역사. 철학의 상호의존관계를 무시한 배타적 단절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학부제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된다는 것에 있다.4) 다양한 과목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학생들은 소위 쉬운 과목, 비인문적 과목, 취업에 도움이 되는 과목들을 선택한다. 그들에게 인문학적 과목은 어렵고 지겨운 과목이며, 따라서 쓸모가 없는 과목에 지나지 않는다. 필수라는 이름의 강제가 아니라면 도저히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과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러한 과목에서 배운 결과물들을 사회에서 요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된다.5)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피부에 느낄 정도로 분명하게 만든 공헌은 '학부제'라는 변화된 제도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시장경제의 원리, 실용주의적 사유, 신자유주의적 사유가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6)
바로 이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오히려 진정한 인문학을 위한 기회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시장경제의 원리, 실용주의적 사유, 신자유주의적 사유에 대한 비판적이며 대안적인 사유이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만 되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남경희는 이 점을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인문학이 처한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도약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문학, 나아가 모든 종류의 학문의 위기는 제기해야 할 문제, 논의해야 할 주제가 사회로부터 주어지지 않을 때이다. 그런 문제의 부재상태는 학문하는 자의 이상이 아니라 불행이요. 존재이유의 소멸을 의미한다. 인문학의 위기'로 여겨지는 사태는 인간성이나 인간적 삶의 위기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가 인간과 인간적인 삶을 포기할 수 없는 한, 이 위기의 사태는 이 시대와 사회가 인문학에 새로운 소임과 과제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 위기 의식은 어쩌면 새로운 과제에 눈 돌리지 않는 고정된 시각이나 정신의 타성에서 연유한 것일 수 있다. 분명 현대 한국의 사회적 상황은 인문학과와 학자들의 존립을 위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문학의 일거리는 군단을 이루어 몰려들며 인문학자들에게 도처에서 도전을 해오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7)
그러나 이러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사회에서조차 이러한 사유의 필요성이나 효용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관심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당위성이나 필요성이 바로 인문학자들의 이익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따라서 인문학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서 제 아무리 강조해도 단지 인문학자들의 공허한 외침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인문학자의 노력과 시도는 아마도 이 점을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왜 인문학이 필요하단 말인가?
어떤 의미에서 인문학은 언제나 위기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따라서 그 위기 극복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적 노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문학의 본질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다음과 같은 근원적 질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희망하는 것,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과 기쁘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어떤 일정한 의비 체계 속에 넣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에게 있다......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보다 앞서 있었던 사람들, 우리를 에워싼 사물과 우리 주변에서 또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들 가운데서 나와 우리들의 존재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자고자 애쓴다. 내가 왜 살고 있는가. 내가 왜 고통을 겪고 있는가. 이런 것들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런 물음은 의미에 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인문학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 욕구, 관심 동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욕구를 과연 충족해 주고 있는가?"8)
과연 우리의 인문학들은 이러한 근본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는가? 비록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온 외부적 원인들의 강력한 영향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온 이러한 외부적 요인들의 중요성과 함께 인문학 내부의 요인들 또한 인문학의 위기를 가속화한 것도 사실이다. 도정일이 지적하는 것처럼 시장전체주의가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가장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외부적 요인이며, 그런 시장전체주의의 극복과 대안이 인문학적 사유로부터 마련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통해서 더욱 시급하게 묻고 철저하게 검토해 보아야 문제는 과연 우리의 인문학이 그런 능력과 가능성을 지녔는가 하는 것이다. 인문학적 사유가 시장경제의 원리에 근거한 실용주의적 사유와 신자유주의적 사유에 비판적이며 대안적 사유라고 할지라도, 그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과 귀를 닫고 있다면, 이것은 저 근원적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의 인문학이 인문학적 욕구와 관심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9)
4. 우리 인문학의 서구추수주의와 새로운 글쓰기
김영민은 현재의 우리 인문학이 위기를 극복할 만한 자격과 가능성을 지녔는지에 대해 몹시 회의적이다. 그는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우리 인문학이 고심해야 할 이 시대의 식민성 문제란 과거의 중국이나 일본, 혹은 현재의 구라파나 미국이라는 나라들과의 종속적 대외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논의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오히려 이미 그 종속성이 우리자신의 삶과 앎을 서로 소외시키고, 속으로부터 우리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내면의 문재로 체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힘있는 나라의 운 좋은 학인들은 도구적 이성과 체계의 논리가 자신들의 생활 세계를 식민화하고 있다고 떠들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식민화될 만한 기초적인 생활 세계조차 없다. 이미 우리는 남의 생각과 남의 집 속에서 너무나 편하게 살고 있다. 눈을 씻고찾아보라. 책의 안팎에서 교실의 안팎에서, 대체 우리의 것, 우리 역사의 터를 거쳐서 법고창신(法固暢新)과 온고지신(溫故之新))의 바람을 맞으면서 키워온 것이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남아 있는가."10)
김영민에 의하면 우리 인문학을 뒤덮고 있는 아주 우려할 만한 것이 바로 "우리 학문의 식민성"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의 학문, 우리의 인문학은 "앎과 삶 사이의 통풍"을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다. 김영민은 앎과 삶의 통풍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 인문학의 식민성이 바로 "논문 중심주의"와 "원전 중심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여전히 이러한 생각과 태도에 빠져 있는 우리들의 인문학자들은 "기지촌 지식인"이라고 부른다.11) 적어도 우리의 인문학에 기지촌 지식인들이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우리의 인문학은 앎과 삶의 통풍은 커녕 인문학의 위기조차 제대로 다룰 여력도 없고 그런 태도조차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의 우리 인문학도들이 담당해야 하는 과제는 이중적이며 그 어느 것도 만만치 않다. 간단히, 그것은 대외 종속성을 줄이고, 열린 주체성을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의 자생력을 높이는 일이다. 다시, 그것은 우리 인문학을 포함해서 우리의 정신문화사에 부과된 여러 질곡의 역사성을 깨닫는 일이며, 동시에 그 깨침을 발판으로 삼아 지금의 학문 조건을 책임 있게 다듬어가는일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현실을 아직도 틀어쥐고 있는 봉건성과 섣부른 외제 탈근대성을 동시에 극복하는 일이며, 우리의 터와 역사에 알맞은 근대성을 내면화시키는 일이다. 이 과제는 지난지사(至難之事)이지만, 우리 정신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 반드시 성취해야 할 숙업이다."12)
결국 김영민에 의하면 우리 인문학의 가능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식민성 비주체성, 비자생성을 극복하고 우리 삶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비식민적, 주체적, 자생적 모색으로부터 비롯될 수밖에 없다. 김영민은 이러한 기본적 태도 속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 대안으로서 '새로운 글쓰기'를 주장하고 있다.
"현란한 무리(無理)의 비산(砒酸)도 우리 일상인의 삶의 자리가 아니고, 단순한 진리 속의 좌정도 더 이상 우리를 위로하거나 보호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인문학과 철학이 열어야 할 제 3의 지평으로서 나는 복잡성의 철학과 잡된 글쓰기를 제의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삶과 세상이 필연성도 우연성도 아닌제 3의 지평, 즉 단순성도 혼란도 아닌 복잡성에서 엮어지고 있으며, 또한 이는 진리도 무리도 아닌 구체성의 일리(一理)로써 해석학적으로 매개되어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현실 속에서 순간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일리 잡기)를 주체화하는 해석학 그리고 이를 종이 위에 옮기는 글쓰기는, 진리와 무리 사이, 필연성과 우연성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는 덧없는 (머뭇거림의 몸짓)을 중단시키고 (우리들의 진리) (일리)에 보다 진솔해 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발판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눈감은 절대성이 아니고, 눈만 달린 상대성도 아닌 제 3의 지평은 일리라는 보편성 속에서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 삶의 다양한 일리들은 잡된 글쓰기를 통해서 제 모습에 보다 근접한 질감을 선사해 줄 수 있을 것이다."13)
김영민은 자신이 제안하는 새로운 글쓰기를 "잡된 글쓰기"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복잡성의 철학과 일리(一理)의 해석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복잡성의 철학과 일리(一理)의 해석학에 근거하고 있는 "잡된 글쓰기"가 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는 물론이고 이러한 위기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 우리 인문학의 식민성을 극복하는데 어느 정도 공헌을 해줄 수 있는가? 혹시 이러한 제안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위험성은 없겠는가? 문성학은 김영민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다음처럼 비판하고 있다.
"김영민은 우리 인문학의 논문중심주의나 원전중심주의 그리고 학설수입주의에 대해 강도 높고 밀도 있게 비판하고 있다. 필자는 김영민의 논문중심주의나 원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물론 귀담아 들어야 할 측면이 있지만, 과격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주장대로 논문의 외양만을 가진 말이 안 되는 논문들이 있다. 그렇다고 논문형식의 글쓰기를 비난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물론 그는 논문형식의 글쓰기에도 나름의 의의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한다. .. .. 그러나 그가 비난해야 할 것은 그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논문의 바깥을 속되고 잡된 것, 따라서 비학문적 질료의 덩어리쯤 전제하고, 논문의 안을 순전무잡한 지식의 알갱이로 채우려는 형식적 발상인 논문중심주의인데, 철학하는 사람들이 시나 소설에 삶의 지혜가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논문만 쓰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은 시나 소설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논문만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논문의 형식을 통해서만 삶의 지혜를 만들 수 있고 깨우칠 수 있고, 논문을 통해서만 그것을 전달할 수 있다고 누군가가 믿고 있다면 그는 명백히 논문중심주의자이겠지만,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14)
문성학은 김영민이 기지촌 지식인의 전형적인 한 특성으로 간직하고 논문중심주의에 대해서 그것은 "과격한" 측면을 지닌, 따라서 "허수아비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우리 인문학의 발전과 성숙에 있어서 비판받아야 할 것은 "논문중심주의"가 아니라, "삶과 유리된 논문을 위한 논문.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죽은 논문을 만들어내는 글쓰기나 논문 편수를 중시하는 논문편수 중심주의 같은 것"이다. 문성학에 의하면 "더욱 기괴한 것은 김영민은 논문중심주의를 공격하면서 논문형식의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김영민의 주장과 그 실제적 모습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비일관성은 도대체 무엇을 함축하는가?
"내가 논문형식으로 쓰면 제대로 된 글쓰기이고, 남이 논문형식으로 쓰면, 논문중심주의의 피해자가 된다는 독단이 아닌가? 이런 독단의 냄새는 인용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느껴진다. 내가 서구 학자의 글을 인용하면 창조적인 글쓰기가 되고 남이 그렇게 하면 멩목적인 서구 추수가 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내가 하면 차선변경이고 남이 하면 끼어들기'라고 생각하는 '미성숙'을 생각나게 한다. 원전중심주의에 대한 김영민의 비판 역시부분적으로는 조금 '일리' 있는 말이나 부분적으로는 많이 '무리'한 말로서'진리'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15)
문성학의 이러한 지적이 참이라면, 결국 논문중심주의와 원전중심주의를 발판으로 기지촌 지식인을 공박하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주장하는 김영민의 제안은 우리 인문학의 가능성과 성숙을 위해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인문학의 지적 엄정성을 희생시키는 위험을 갖고 있기고 하다.16)
"김영민의 글에서 수사가 내용을 압도해 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물론 수사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수사가 내용을 왜곡시키고 모순되게 만들 때 수사는 절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나친 수사는 차라리없는 것만 못하다. 그의 수사중심주의가 어쩌면 황폐한 우리 인문학을 더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생각해 보라 그가 말하고 있듯이 '일년에 한 두 편 짜깁기조차 엉성한 논문을' 만들어 내는 우리 인문학도들이 그의 글쓰기를 흉내낸다면, 그러면서 '참된 글쓰기도, 참된 책도, 참된 독서도 없다고 하면서 아집에 사로잡힌 글을 쓴다면 우리 인문학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불난 집의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그래서 이웃집에 불이 번지게 하는 꼴이 될 것이다."17)
분명히 문성학도 지적하듯이 "김영민의 학설수입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 나름의 정당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인문학의 성숙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은 논문중심주의나 원전중심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토론 혹은 비평문화의 부재, 국내 학자의 글을 경시하는 사대주의적 학문풍토, 그리고 자생적 고민의 부재들이다." 이 점을 도외시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 학문의 주체성, 자생성, 비식민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동기의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비현실적이거나 몽환적인 결과를 가져온다.18)
5. 조동일의 우리 학문하기와 창조적 주체성
김영민과 마찬가지로 조동일은 한국적 인문학의 주체성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주장한다. 조동일에 의하면 우리의 학문은, 인문학은 "정통성을 상실한 떳떳치 못한 권력이 복종이 아닌 비판 모방이 아닌 창조를 무엇보다도 두렵게 여기고, 외세 추종이 선진화를 위한 최상의 방안이라는 착각을 주입시키면서, 대학을 무리하게 지배하고, 학문을 억지로 다스려온 탓에 위기가 심각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 책동에 호응하는 대가로 안일을 보장받으려는 무리가 대학 안에도 적지 않아 학문을 황폐하게 했다. 그 결과 조상 전래의 창조력이 퇴색되고, 현실 인식의 절박한 문제의식이 학문의 영역 밖으로 밀려났으며, 우리 스스로 세계학문의 발전을 선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19) 조동일이 지적하듯이 '외세 추종'이 우리의 인문학, 학문을 황폐하게 죽인 원인이라면, 그 대안적 처방은 바로 우리의 것을 기반으로 하는 창조학, 혹은 자립학이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의 인문과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한국 고유의 전통과 근대화와 더불어 들어온 서양의 전통의 병존 문제입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비서양 세계의 문제이고, 또 서양의 학문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학문의 학문으로서의 정당성은 보편성의 주장에 근거해 있는 만큼, 타자로서 존재하는 비서양의 전통들은 서양에 대해서도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20)라는 김우창의 지적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동시에 우리의 인문학이 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동일이 주장하는 창조학, 자립학이란 무엇인가? 그는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오늘날 민족자존론은 잊혀지고 민족개조론이 극성하다. 선진국을 따르고 배워 세계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하기 위해서 수입학을 학문의 기본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경제성장, 국민 소득 등의 지표에 따라 서열화한 단일한 세계 질서 속에서 좀 더 윗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한다. 그것은 명백한 진리이므로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나타나는 민족개조론을 바로 잡으려면 민족자존론을 되살려야 한다. 어떤 후진국이나 낙후한 민족이라 허더라도 누구나 자기 삶을 자기 방식대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지구 전체의 범위 안에서 실현하는 것이 세계인의 과제임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학문은 자기 능력을 스스로 찾아서 발현해 인류 공유의 자산으로 제공하는 창조학이어야 한다. 인류의 문화유산은 근대인이 잘못 알고 있는 것보다 다양하고 풍부하며, 지금의 단일한 세계질서와는 다른 길이 있어 근대를 극복하고 다음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창조학의 과제이다. 한용운 연구는 창조학의 필수적 과제이다. 전통사상이 근대 사회와 어떤 관계를 가졌던가 살피는 일을 광범위하게 수행하면서 철학과 문학,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국학과 세계학문이 하나가 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데 한용운의 전례는 노중한 지침이 되고 벅찬 연구과제를 제공한다."21)
조동일에 이러한 언급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그는 김영민처럼 새로운 글쓰기를 제안하는 대신에 우리의 전통적 사상이나 우리 삶의 고유한방식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학술적으로 발견하고 그것을 입증하려는 체계적 노력을 주장하고 있다. 비식민성, 비주체성, 자생성을 주장하는 김영민에게서 그 주체성과 자생성의 구체적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반면에 조동일에게서는 이러한 모습이 아주 당당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음, 양은 생하는 관계를 가질 수 있고 극하는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 생하는 관계에서는 음, 양이 서로 도와 양쪽의 요소를 합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극하는 관계에서는 음, 양 어느 한쪽이 승리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생에서는 음, 양이 서로 대등한 자격에서 평화스럽게 상호보완의 헙조를 하고, 극에서는 음, 양이 서로 싸워 승패를 나누는 혁명을 성취한다. 두 가지 경우는 둘이기도 하고, 하나이기도 하다. 생에도 극이 있고, 극에도 생이 있다. 생이 극이고 극이 생이기도 하다. 생과 극이 하나로 될 때 가장 바람직한 창조가 일어난다. 생, 극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를 해명하면 사상 창조나 역사 창조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천고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런 논의를 더욱 명확하게 하고 구체화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사물의 근본 이치가 이렇다는 것을 알면 조화론과 갈등론의 다툼을 넘어설 수 있다. 서양에서 전래된 사상이 조화론과 갈등론으로 양극화되어 더욱 격심해진 이념 대립을 해결하는 방안이 그 가운데 어느 하나가 승리하는 것일 수 없고, 그 둘을 포괄하면서 넘어서는데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 .. 서양에서 전래된 이론은 음영의 관계인식이 한쪽에 치우쳐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동이나 극에, 구조주의는 정이나 생에 치우처 있는데, 여기서 재확립하고자 하는 우리 이론에서는 동, 정과 생, 극이 각기 하나이면서 둘임을 분명하게 한다. 그래서 그 두 가지 극단론을 다 받아들여 다툼을 해결하면서, 각기 그것대로 하는 구실을 방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이론을 만들어 실천에 적용하고, 실천의 경험을 근거로 이론을 다듬는 것이 우리 학문에 뜻을 둔 모든 사람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반드시 성취해야 할 핵심 과업이다. 그 과업을 성취하면 우리 학문이 세계학문으로 확대되고 우리가 세계학문의 발전을 선도할 수 있다."22)
우리 전통적 사상 속에서 발견되는 음양론은 서양과 동양의 갈등,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분쟁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학문적 원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학문적 비주체성, 서구추수주의, 비자생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우리 학문,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전통적 사상 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원리에 따라 심도 깊은 학문적 연구를 진착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조동일에 의하면 이러한 태도는 한 쪽으로 치우쳐 극단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서양사상들이 지니지 못한 장점까지도 갖고 있다. 또한 "누구나 철학의 일반원리를 따지면서 개별적인 학문을 실제로 연구하고, 양쪽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학문학을 하자는 것이 구체적 방안이다. 대학의 편제와 전공 영역 구분을 그런 원리에 따라 재조정하고,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게 해야 한다."23)라는 조동일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이러한 원리에 따라 우리의 학적 제도까지도 구성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조동일의 주장과 제안은 "다시 말해서 동양학은 여전히 자발적인 문제의식으로 인해 진술하지 않는다. 언제나 서구의 필요에 의해 동양학이 존재한다는 것, 이 현상을 다시 확인하는 심사는 착잡하기 그지없다."24) 라는 정재서의 한탄을 잠재울 정도로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있다.
우리 인문학의 현실과 위기를 걱정하고 있는 대부분의 분석과 진단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우리 인문학의 위기 원인의 하나가 서구추수적이며 비자립적이고 비주체적이라면, 우리의 문학은 조동일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학과 자립학을 지향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듯이 단지 우리의 것, 과거의 것만을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서양학의 장점을 두루 사용하면서도 우리의 과거 전통과 연속적인 주체적학문을 하자는 것이다. 그는 「우리 학문의 길」에서 우리 '이론재창조 작업의 본보기'를 하나 들고 있는데, 그것은 신라 불교 저작에 나타난 기본적 철학적 생각들의 문학의 존재와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고찰하고 있는 논문이다. 그는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를 고찰한 후에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기세간(氣世間)은 물질의 영역이라면, 중생세간(重生世間)은 생명의 영역이고 지정각세간(知正覺世間)은 정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세간에는 물질의 법칙이 존재할 따름이나, 중생세간의 생명체는 자기 보존과 확장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어느 정도 예기치 않은 활동을 하는 점이다르며, 지정각세간(知正覺世間)의 정신은 물질의 법칙은 물론 생명의 의지에서도 벗어난 자유로움을 깨달아 실행하는 경지에 이른다. .. .. 지정각세간은 「제망매가」에서처럼 반드시 불교신앙을 통해서 추구해야 하는것은 아니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서도 세 가지 세간의 상관관계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냇가 조약돌이라는 기세간의 자연물에서 '낭(郎)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찾아. 진정으로 숭앙해 마지않는 분의 지극히 높은 뜻과 합치되어 지정각세간에 이르고자 하는 중생세간 서술자의 간절한 소망이 종교적인 발상에 의거하지 않고 제시되어 있다. 부처나 보살의 경지가 아니라도 반드시 추구해야 할 숭고한 이상은 무엇이든지 지정각세간에 해당한다고 일반화할 수 있다."25)
그런데 여기에서 조동일이 의상에게서 발견한 세 가지 세계의 구분은 과연 철학적으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가 이러한 주장의 설득력을 전제한다면, 이에 따라 우리 문학 작품의 특성을 분류할 수 있고, 거기에 나타난 사유를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주장 자체가 정당화되기 어렵다면, 그것에 의존하여 전개된 우리의 문학이론은 그만큼 독단적이고 피상적이다. 과학적 세계관에 고무받은 현대 철학자들은 정신과 생명의 세계를 물질의 세계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만약 여기에서 우리의 자립학과 창조학을 하기 위해서, 우리의 전통적 사유 양식이나 그 가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이러한 과학적 세계관을 거부한다면, 우리의 자립학과 창조학은 그만큼 폐쇄적으로 될 것이다. 서양이론의 장점을 채택하는 경우에도 이런 과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나오는 주장들이 우리의 사유와 맞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거부될 가능성이 크다.26) 서양의 탈근대성에 고무받은 한편 우리 학문의 주체성과 자생성을 주장하는 입장들은 아마 다음과 같은 최종덕의 지적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서구 탈근대는 근대에 대한 포기가 결코 아니며 동양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빨리 눈치채야 한다. 그러한 서구의 학문을 갖고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서구의 학문은 그들의 사상사적 맥락 속에서 동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양의 문을 두들길 뿐이다. 우리 인문학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체험사에 맞는 인간학을 창출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의 방법론이었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기본 정신을 제대로 수용하는 일이 우선한다. 카리스마회된 계몽주의와 도구로 전락된 이성주의가 아니라 방법의 수단이었던 원형의 이성주의를 말한다. 이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탈근대는 커녕 반성의 기회도 없이 신비주의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다고 본다. 반성적 계몽주의는 인문학 방법론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본다."27)
아마도 이와 유사하게 창조학과 자립학을 강조하는 조동일의 주장은 그 창조와 자립을 강조할수록 주체성을 강조하는 효과는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결국 의도하지 않은 독단과 폐쇄성을 함축할 가능성이 크다.28)
6. 표현인문학과 영상적 상상력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여러 곳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변모의 과정에 있다. 그것은 바로 3차 산업혁명 또는 정보혁명의 과정을 거치면서 드러나고 있는 현실이다. 심광현은 이 현실을 다음처럼 묘사하고 있다 "지구방화(globalization)의 가속화는 국경을 초월한 자본 운동의 가속화와 이에 수반되는 무한경쟁의 지구화를 의미한다. 이 무한경쟁의 과정에서 살아남기위해 모든 측면에서 생산성 제고를 위한 치열한 노력이 가속화되며, 생산성의 비약적 제고를 위한 노력은 '정보화 과정'이라는 새로운 기제로 집약되면서 역으로 지구방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경제, 정치 사회문화적인 체제와 제도 전반에 대규모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갈등이 초래되면서 체제 전체의 불안전성을 강화시킴으로써 21세기의 초엽에는 어떤 대대적인 분기점을 맞게될 것이라는 예측을 낳게 하고 있다."29) 이러한 변동과 이행의 시대에서 "문화는 과거와 달리 소수의 개별 주체들에게 귀속되었던 고도화된 정신적, 육체적 능력의 차원보다는 집합적 기술에 의한 능력의 형성 자체가 포괄적으로 관리, 복제, 조작되는 차원에서 이해되고 수용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에 따라 문화의 개념과 제도, 생산과 소비의 양식 전반이 대대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표현 인문학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문학적 대응처럼 보인다. 표현 인문학은 과거의 인문학, 즉 "인문학이란 일차적으로 문자 그리고 이차적으로 비문자를 포함한 문화 활동을 통해 자연적 사회적 질서의 제약으로부터 자유인 또는 군자의 가능 경험을 모색하려는 노력"이라고 특성지을 수 있는 이해 인문학을 비판하면서 "인문학이란 일차적으로 문자 그리고 이차적으로 비문자를 포함한 문화 활동을 통해 사람다움의 표현을 모색하는 노력"이라고 특성짓고 있다. 고전적 인문학 이해 인문학의 전형적 특성이 글읽기, 글이해와 재현성 수동성과 관념성이라면, 표철 인문학은 이와 대조적으로 글쓰기 표현성, 능동성과 실천성을 특성으로 갖는다.30) 표현 인문학은 이러한 인문학의 새로운 이념을 과거와는 달라진 새로운 사회 환경, 즉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적극적 자유'에서 찾고 있다. 현대인들은 일과 여가, 환경, 신체와 정보사회 그리고 구체적 인간관계로서 성 등의 네 측면에서 소극적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과거 사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체적 변화에 따라 표현 인문학은 적극적 자유를 옹호하면서 모든 표현 방식과 내용에 대해서 관용성을 지니고 있다.
"글이나 만화가 모두 표현의 수단이고 내용이 되는 것이다. 컴퓨터에 의해 전달될 수 있는 어떠한 장르나 내용도 표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교현은 이루어질 때 표현자의 착장이 일어나고 이 확장의 경험은 새로움의 경험이다. 표현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에 의하면 표현은 변화의 양식인 것이다. 성취되는 어떠한 표현도 변화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표현은 가히 적극적 자유의 형식이요.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표현은 인격완성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소극적 자유가 인격의 전제조건이라면, 적극적 자유는 인격의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다."31)
과거의 인문학, 고전적 인문학 혹은 이해 인문학이 일차적으로 문자적 텍스트의 글읽기와 이해에 주목했다면 표현 인문학은 글뿐만 아니라, 만화, 영상 영화 등의 비문자적 텍스트까지도 인문학이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대상으로 포함시키면서 현대 사회에서 이것들이 지닌 적극적 의미와 가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 인문학의 주장은 변모된 현대 사회에 걸맞는 인문학적 모색들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가령 심광현은 위기에 직면한 인문학의 과제에 대해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21세기 문화의 특징을 예상하고 그에 걸맞는 문화적 능력의 준비와 형성에 있어서 문자언어 이외의 기호화 과정에 대한 새로운 교육프로그래밍의 전격적인 재구조화가 갖는 중요성은 따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는 소위 상징적 기호화에 의존한 고급문화와 도상적, 지표적 기호화가 더욱 활성화되고 중추기능을 하는 대중문화와의 상관 관계와 지형변화를 인문학의 교육 과정의 재구조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32)
심광현의 이리한 지적처럼 분명히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비문자적 텍스트의 중요성이 커져 가고 있고, 문자적 텍스트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에는 무관심하거나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이 오히려 영상 등의 비문자적 텍스트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에는 매우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창환은 이러한 경향이 가령 국어국문학과의 경우 다음과 같은 교과목의 개설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중문학, 대중매체, 영상예술등을 전공 교과에 수용한 경우를 볼 수 있다. '대중매체와 국어', '문학과영상예술', '대중문학의 이해', '영상문학기행'들은 이러한 예이다. 순수문학과 고급예술만을 다루던 아카데미즘의 고고한 영역은 이제 변화하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33) 이러한 조창환의 지적처럼 표현 인문학은 "인문학 공동체는 영상언어에 대한 더욱 심각하고 체계적인 연구와 실천의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실제적 의의를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의 만화를 그리기로 했다. 교양 과목의 숙제였다.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학생은 전자우편으로 제출했다. 300명 넘는 학생들의 숙제들은 하나도 낮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것이었다. 몇 년전에 같은 주제의 논술식 숙제와는 크게 대조되었다.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논술 숙제는 추상적이었다.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 상황에서 출발하면서도 결론을 명제로 표상하는 동안 구체성을 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나 만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상황을 총체적 문맥에 담을 수 있었다. 만화에서 사물성 표상의 구체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개념이 요구하는 추상성도 나타낼 수 있었다. 만화는 보편적 추상성도 '보일수 있었기' 때문에 논술 숙제 보다 강력한 설득력을 가졌던 것 같다."34)
표현 인문학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의 고전적 인문학이 현대인의 사회적 조건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그것이 지니고 있는 추상성과 비총체성 때문에 그것이 의도하고 있는 목적을 실현할 수 없다면, 구체성과 총체성을 담지한 영상을 통한 인문학적 표현과 그 탐구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표현 인문학은 다음처럼 주장한다.
"모두가 표현하는 시대라는 것은 얼마나 새로운가? 우리는 이 물음을 물을 때 과거의 문화는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가를 묻게 된다. 과거에도 문화가 있었지만 모두가 표현하는 시대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얼마나 일방적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문화는 높은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높은 계층은 그 사회의 성원들의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문맥에서 소위 '즐긴다'는 경험의 질도 우리의 분석의 빛에 의해 본다면 표현의 소비자일 뿐 '표현생산의 즐거움'으로부터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표현하는 시대'는 인간 역사에서 비로소 '문화의 시대'를 여는 열쇠가 아닐까?"35)
과연 표현 인문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대 사회의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적 표현 속에서 비로소 '문화의 시대'를 열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표현 인문학이 강조하고 있는 인문적 표현과 실천의 주체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인문학, 이해 인문학이 변모된 사회적, 시대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인가?
심광현이 지적하듯이 "사이버네틱스의 발달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상상과 이미지의 세계까지도 철저하게 도구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36) 표현 인문학은 지나친 표현 개념의 관용성 때문에37) 영상적 텍스트가 문자적 텍스트를 부정하게 되는 심각한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학부제, 시장 자본주의, 실용주의, 신자유주의적 경향 속에서 인문학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의 한 원인은 문자적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가 부정되고 영상적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표현력과 상상력만이 지나치게 강조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소흥렬은 다음처럼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이 없는 영상화는 '기만'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중 매체의 프로그램들이 벌써 문제가 되고 있다. 인간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언어문화이다. 문학, 역사, 철학이며 종교, 예술, 과학에서까지 우리는 언어적으로 생각하고 언어적으로 창조한다. 정보내용은 일단 언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개념화나 문장화가 되어야 한다. 영상화는 그 내용을 더 효과적으로 더 강하게 표현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영상문학' '영상역사' '영상철학'이 필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언어적 사유로 정리되고 심화되고 창조되는 문학이며 역사며 철학이다."38)
소흥렬의 이러한 비판과 비슷하게 김우창은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가 중요해 지는 현상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인문학적 위험성에 대해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범람하는 슬로건과 대중언어와 광고언어는 언어의 의미를 사물에서 분리하여 스스로의 회로 속에 갇히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사물의 세계에 대한생각하는 도구가 아니게 됩니다. 물론 그와 더불어 그것은 공적 광장에 이성적 담론의 질서를 부여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진리와 논리가 포기된 상태에서 이성적 토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상 매체의 발달은 이러한 사해를 더욱 강화해 줍니다. 그것은 생각과 토의의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영상의 정서적 효과로서 의사 소통의 주된 수단이 되게 합니다. 환상과 꿈의 창조 또는 더 일반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은 전통적으로 인문적사고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또 인간의 욕망이 인간의 현실에 조화되는 세계는 인문적 사고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기였습니다. 영상의 시뮬레이션과 그 성적 유혹이 인문 과학의 관심이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 중심에 놓이게 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인문과학을 폐기하는 일이 된 가능성이 있습니다."39)
김우창이 지적하고 있듯이 영상적 텍스트나 영상적 상상력에 대한 관용은 그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인문학 자체를 폐기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 표현 인문학이 이해 인문학에 대안적 기능을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위험성을 대처하고 극복할수 있는 방안을 만련해야만 할 것이다.40)
7. 우리 인문학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
인문학에 대한 김영민, 조동일, 그리고 표현 인문학 등의 견해들 고찰하면서 우리는 그러한 주장들이 지니고 있는 의의와 문제점을 지적했다. 일방적인 서구추구주의와 현실적 생명력을 잃은 인문학에 대한 김영민의 비판은 우리의 인문학이 강의실이나 골방에 갇혀 서구의 인문학적 유산에 대한 소개와 주석 작업으로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특히 김영민은 이런 현실이 가능할 수 있는 원인으로 인문학의 글쓰기 문제를 분석하고 있는데, 그 글쓰기가 진중한 인문학적 사유의 전달이라는 관점에서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논문으로 표현되는 치밀하고 진중한 인문적 사유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인문학적 위기에 대한 바람직한 처방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인문학이 글쓰기의 문제를 통찰하지 못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단지 글쓰기의 문제로서 현재 우리의 인문학이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글쓰기에 앞서 요구되는 것이 우리 현실에 살아 있는 주체적 인문학을 위해서 치밀하고 엄격한 인문학적 사유이다.
김영민과 다르게 조동일은 이 점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문성학이 비판하듯이 그 위기 극복을 말로 떠드는 것보다는 오히려 무게를 지닌 실제적인 인문학적 작업을 나타나야만 비로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실제로 조동일은 우리의 전통적 사유 속에 나타난 철학적 산유를 통해 그것을 문학사 연구에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더 나아가 그것이 지니는 세계사적 의미까지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주체적이고 독특한 사유의 전통을 해명해 주는 성과를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주체적인 우리 사유가 지니고 있는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까지 함축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조동일이 주장하는 우리의 주체적 사유는 여전히 그것과는 다른 사유들과 치밀하게 대면하면서 그 의미와 한계를 해명해야만 하는 과제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특히 조동일이 주장하는 초극론이나 이기철학 등은 서양의 과학적 세계관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충돌이 서로 극복되어 조화될 수 있는지, 아니면 한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을 누르고 진정한 자리매김을 할수 있는 지는 여전히 열려진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치밀하고 진지한 사색이 바로 우리 인문학의 시급한 과제의 하나가 될 것이며, 철학과 문학, 역사 철학과 과학 등의 상호협제적 작업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작업은 꾸준히 나름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구체적인 실감으로 다가오지않는 것은 아마도 상호협제적인 대화를 가로막고 있는 철저하게 분과된 비학문적인 대학 제도나 풍토 때문일 것이다.
표현 인문학은 변화된 새로운 사회적 환경 속에서도 영향력을 지닐 수있는 인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표현 인문학을 이해 인문학과 차별하면서 변화된 현대적 사회 분위기에 맞는 자유스러운 표현을 통한 인문학적 이해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표현 인문학이 사이버 공간이나 영상을 강조하는 우리 시대의 변화된 분위기에 맞는 특성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특성이 과거 인문학이 지녔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표현의 관대함에 제한을 가해야만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표현 인문학은 과학 기술을 통해 발전된 사회적 변모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도 그 표현 인문학의 이념을 성기성물(成己成物)이라는 우리에게 친숙한 개념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있다.
김영민이 주장하고 있는 인문학의 현실적이고 실천적 생명성, 조동일이 주장하는 주체적 모색을 통한 자립학과 창조학, 그리고 표현 인문학에서보여주는 개방성과 자유 등은 그 구체적 양상은 서로 다를지라도 최종덕이 다음처럼 지적하는 '우리의 자아찾기'라는 공통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인문학의 위기의식과 그에 따른 반성작업, 그리고 동아시아 담론의 실천적 대안 찾기에 분주했던 때라고 보여진다. 전통과 근대, 근대와 탈근대, 종속과 탈식민 정체성 찾기와 민족주의의 해석론, 과학비판과 큰 기세를얻고 일어나는 문화담론들 문명의 위기와 관련된 환경과 생명사상의 논의들, 우리 글쓰기와 오늘 속의 고전읽기, 그리고 정보화 사회론까지를 다양성 있게 그 반성과 비판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이 다양한 논의 속에서 우리는 자아찾기의 과제가 모두 엮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현채, 이영희, 조동일, 백낙청으로부터 최근 강내희, 김영민, 정재서, 조혜정, 김교빈 등의 젊은 세대에 이르는 자아찾기의 모습은 자아 폐쇄와 동시에 종속을 함께 거부하면서 당장의 대안이라기 보다는 올바른 질문과 제대로된 답을 찾아나서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41)
비록 지금의 우리 인문학의 양상들이 불충분하다고 하더라도 바로 이러한 자아찾기의 노력으로부터 우리 인문학이 가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발단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42) 이것을 통하여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과 삶을 반성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의미와 가치를 진중하게 모색하는 상호협제적인 인문학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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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문성학, 「인문학의 위기인과 인간의 위기인가?」,「어느 철학자의 한국사회 읽기」, 세종출판사, 1999., pp.3-4
2 소홍렬, 「고르기아스의 세 단계 의문과 인문교육」, 「인문과학」 (서울시립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Vol. 8., p.104.
3 조창환, 「새 시대 문학교육의 과제와 방향」, 「인문과학」, Vol. 8., p.128.
4 조창환은 이 학부제의 부정적 결과들을 다음처럼 요약해 주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학생들이 특정한 전공에로 지나치게 편중되는 현상, 둘째 기포 및 공통과목의 편성이나 탐색이 가능한 학부의 그렇지 못한 학부의 학문적 차이, 셋째 전공 분야의 길이 있는 연구와 교육이 소홀해지고 넓고 개괄적인 학습에 치중하는 경향 등이다."(Ibld., pp 128-129.)
5 조창환은 이러한 현실 다음처럼 묘사하고 있다. "학생들로서는 졸업 후 취럽에 도움이 되고 사회 활동에 당장 쓸모가 있는 전공을 택하려 하고 학부모를 포함하여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이를 은연중 환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문학부 안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어영문학 전공을 택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극단적 실용주의적 가치관은 대학을 순수한 학문 연구의 도장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직업 교육을 위한 연수 기관으로 생각하는 태도에 가깝다. 인문학은 문학과 역사, 철학 등을 통하여 거기 표현된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인간다움의 성취와 관련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자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인문학부 학생들이 영어영문학에 몰리는 것은 셰익스피어나 예이츠의희곡이나 시에 심취해서도 아니고 영어의 언어학적 탐구에 흥미가 있어서도 아니다. 다만 졸업 후 취업에 필요한 회화나 독해 둥의 영어 구사 능력을 향상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오늘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며 또한 권장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학의 전공 교육이 어학 수련원처럼 되어서는 안될 일이며, 이 점에서 보면 영어영문학과도 외화내빈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Ibid., p.129.)
6 "고도의 정보화, 세계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실은 학문적 환경뿐만 아니라 그 내용까지 바꾸어 놓았고, 자본주의와 실용주의적 사고의 도도한 물결은 가치관의 변화는 물론, 삶의 자세와 방향까지 변화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과거부터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고 전통적으로 인간의 가치관 형성에 중심 역할을 하였던 문학, 역사, 철학의 인문 과학은 갑자기설자리가 좁아지고 그 존립기반마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Ibid., p.129)
7 남경희, 「인문학의 '위기'와 새로운 인문학」, 전국대학 인문학연구소협의회, 「현대사회 인문학의 위기와 전망」, 민속원, 1998., p 30 남경희의 이러한 주장과 유사하게 박거용은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대학이 변해야 하고, 정부와 대학이 지식을 전수하고 확산시키는 교육정책을 개정하기보다는 지식을 생산하고 혁신하는 학문정책을 수립하는 일이 더욱 시급하며, 대학의구성원인 교수, 학생, 직원이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변화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학문정책과 근본철학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학문 총괄적이며 기초 학문적인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개입이 오히려 더욱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박거용, 「한국 인문학 정책 - 연구지원과 그 평가를 중심으로」, 「현대사회 인문학의 위기와 전망」 p.70.)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인문학과 자체가 급속한 사회적저 변동과 그로 인한 가치관과 문적 혼란, 그리고 인간성 상실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다루는 과목들을 적극적으로 개설"(p.76.)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심광현은 이러한 주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다음처럼 표현하고 있다. "근대적 지식에서 시작된 '지식의 기술화' 경향에 내재한 탈신비화의 동력과 그와 상반되게 지식의 자기 성찰적 단계에 와서 깨닫게 된 지식 내부에 내장된 지식의 불확정성이라는 특성을 양자택일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동북아 전통 사상을 매개로 이를 역동적으로 연계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매개의 가능성을 일정하게 현실성으로 이끌어 줄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야 할 장은 바로 정보화와 멀티미디어의 확산과 그에 따른 통합학문적 성격의 확장 과정 그 자체 속에 있다고 보며, 이런 전제를 수용할 경우 인문학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매우 능동적이고 중요하고도 생산적인 역할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인문학의 '위기'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이를 위험이라는 관점에서만 수동적, 보수적으로 보지 말고 새로운 창조적 비약의 기회로 보는 적극적인 해석의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심광현, 「21세기 인문학의 발전 방향」, 「현대 사회 인문학의 위기와 전망」, pp.150-151.)
8 강영안, 「방황하는 철학 : 과학인가, 인문학인가」, 「서강인문논총」 Vol.11.,p77. 강영안의 이러한 주장과 유사하게 도정일은 인문학의 가치와 교육 목표를 "적극적으로 사회에 연결시키고 문명의 딜레마(예컨대 시장 전체수의의 문제, 세계화의 딜레마)와 교육을 연결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회적 용도, 단명성, 일시성 둥을 특징으로 하는 실용 정보나 지식의 경우와는 달리 인문학적 통찰은 인간에게 항구하게 따라 다니는 대면의 요청들, 예컨대 타자와의 대면, 인간 존재의 윤리성에 대한 대면, 과거와의 대면, 준음과의 대면, 미래 시간과의 대면 등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지속적이며 이 지속적 통찰은 모든 문화가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도정일, 「시장 전체주의와 한국 인문학」, 「비평」, Vol. 2., p.141.)
9 이 점에 대해서 문성학은 "다수의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지만, 나는 그 위기의 진원지가 인문학자들의 위기, 더 나아가서 인간의 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인문학의 위기를 진단, 처방하고 있는 다수의 글들에는 자기반성의 명수여야 할 - 왜냐하면 인문학은 자기반성의 학이니까 - 인문학자들의 자기 반성이 빠져 있더라는 것이다."(문성학,op. cit., p.3.) 비슷하게 김우창은 그의 글 「오늘의 인문 과학과 코기토」(『비평』, Vol. 1)에서 "오늘의 위기를 우리는 지나치게 학문의 물질적 제도적 토대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 활동의 내적 근거에 관계됩니다."(p.194.)라고 말하고 있다.
10 김영민,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민음사, 1996., p.6.
11 김영민이 지적하는 우리 인문학의 현실에 대해서 비슷하게 최종덕은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일본 취향의 학문을 배운 사람들과 60년대 이후 서구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반성없는 학문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문제보다는 그들의 정신적 고향에 기여했을 뿐이다. 서구의 학문이 동양의 학문을 연구하고 액기스를 뽑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인문학을 버리고 오로지 서구의 학문을 여과없이 설명하고 혹은 가위질 편집에 여념 없었다."(최종덕, 「우리 인문학은 무엇을 질문하는가」, 「현대사회 인문학의 위기와 전망」, p.118.)
12 김영민, op. cit., pp.7-8.
13 Ibid., p.35. 김영민의 이러한 주장은 "문학을 공부하는 일이 문학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서 출발하여야 함에도 오히려 작품의 이해와 괴리된 이론적 연구에 치우친 느낌이 있다. 문학 교수들은 최신의 문예이론에 의한 엄밀한 인문학져 논리를 전개하거나 역사주의적방식으로 문학의 주변 환경을 탐색하여 왔다. ..... 지나치게 이론에 치우쳐 작품의 감상과 이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 대학이 표방하는 아카데미즘의 오만과 독선일 수도 있다. " (조창환, op. cit., p.132.)는 조창환의 지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 문성학, op. ctt., pp16-17.
15 Ibid., p.18.
16 김영건, 「경박한 글쓰기와 게으른 철학」, 「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 책세상, 2000., pp,121-140. 참조.
17 Ibid., p.19.
18 이진우는 그의 책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 (민음사, 1999.)에서 김영민의 이러한 주장과 제안이 "우리의 것을 단순히 심미화하는 관념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19 조동일, 「우리 학문의 길」, 지식산업사, 1993, p.5. 유사하게 유초하도 다음처럼 주장하고 있다. "경제적 생산에서 문화족 창조, 향유에 이르기까지 현재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세계화의 물결은 동시에 지방화, 지역화라 병행한다는 점에서, 발전과 진보를 서양적 기준으로만 제어온 관행을 반성하고 한국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18세기 이후 서양의 첨단적 지성들이 학문적, 현실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동양의 고중세 전통사상을 진지하게 탐구해 온 데 비해 한국의 선진저 지식인들이 우리 역사에 나타난 선행업적들에 대한탐구를 방기하고 남의 것만을 돌아본다면 21세기적져 인문주의 내지 통합학문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유초하, 「동양 인문학 전통의 핵심으로서의 경학(經學)적 유학」, 「현대사회인문학의 위기와 전망」, p59)
20 김우창, op cit, p193
21 조동일, op. cit., pp.99-100
22 Ibid., p.234.
23 Ibid., pp234-235. 아마 조동일의 이러한 주장을 다음과 같은 유초하의 주장이 뒷받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낱의 과학은 영역별 전공분야의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유학의 통합 지향은 의미있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특히 인식과 실천의 통합지향은 사실과 가치의 연관짓기를 범주오류로 몰아붙이는 앵글로 색슨 계통의 관점에 대한 반성, 비판의 자료가 된다."(유초하, op. cit., p.59.)
24 정재서, 「'현대사회의 인문학 - 위기와 전망:유초하 교수의 발표'에 대한 논평」, 「현대사회 인문차의 위기와 전망」, p.65. 마찬가지로 "국어국문학과를 재외하면 국사학과와 한국철학과가 극히 적으며, 지역학과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인문학과가 다수의 외국어 문학과와 일반적인 사학과와 철학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인문학이 서양 중심이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가치관과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한국 인문학 정책이 부재한다는 점은 한국 인문학의 대상 자체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비룻된다고 할 수 있다. "(박거용, op. cit., p.74.)는 박거용이 지적하는 우리의 학문적 현실 속에서 조동일의 주장과 제안이 차지하는 의미는 아주 중요할 수 있다.
25 조동일, op.cit., pp 302-303.
26 가령 심광현은 다음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 동안 사실 인문학은 정신과정을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 정도로 가정하고 그 내재적 메커니즘을 충분히 규명하지 못하거나 또는 정신과정 자체를19세기 근대과학의 모델, 유클리드-뉴튼적인 시공간 개념과 실증주의적이고 요소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이고 전형적인 인과론 등을 잘못 전제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 결과 인문학은 전체론적인 성격을 지닌 생명과정, 정신과정의 특수성에 깊이 천착하지 못하고 요소론적인 분과학문주의로 매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런 잘못된 근대과학의 가정들이 오늘날의 우리의 인문학 전체에 만연해 있다고 보는데, 그와 같은 요소론적이고 환원주의적 가정들이 앞서 언급한 지식생산과정과 주체화 양식의 문제 설정조차 수용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하겠다"(심광현, 「21세기 인문학의 발전방향」, 「현대사회 인문학의 위기와 전망」, p.145) 마찬가지로 김영민도 논문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서양적 개념에 대한 논문중심수의의 배경에 이러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비판한다. (김영민, op. cit., pp 18-25 참조)
27 최종덕, op cit., pp.110-111
28 우리 말로 철학하기를 강조하는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 위험성이 발견된다. 정대현은 「몸과 마음으로 생각한다」(「철학」, 64., 2000. 가을)에서 "한국인은 한국어로 생각할 때 마음으로 쟁각하고 몸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면서, "마음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생각하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가정한 다음, 일상언어 분석을 통하여 그 가정의 근거를 살피고" 있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그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으로부터 벗어나 논리적 음양론으로서 마음과 몸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러한 관계가 모든 사물에로 확장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언어 속에 몸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언어나 개념적 표현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곧 논리적 음양론이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 음양론이 우리 언어와 사유 표현에서 정당화될수록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논증 없이 이미 그릇된 이론으로 간주하게 되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29 심광현, op. cit, p132
30 정대현 외, 「표현인문학」, 생각의 나무, 2000., pp.275-277
31 Ibid., pp.391-392.
32 심광현, op cit., p.140.
33 조창환, op cit., pp.133-134. 또 박거용은 이 점을 다음처럼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교양과목은 지식습득능력이 아니라 지식생산능력을 키우는데 필수적 능력이며 인문학의 본령인 상상력, 창의력 그리고 학제간 연구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합력을 가르치고 연구하는데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부분에도 인문학을 기초과목을 개설하고, 인문학 관련교양과목들은 우리의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재편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 역사, 철학은 자체 학문의 하드웨어만을 정언처럼 고집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것에 바탕한 다양한 소프트웨어와 콘텐트웨어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 근대사회의정치, 경제, 사상, 문화에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토픽과 쟁점 중심의 과목을 개설하고 정보사회에서 더욱 필요해질 윤리학과 그리고 대중매체와 영상매체의 이해와 분석을 하는 과목들을 다양하게 개발하여 개설해야 할 것이다."(박거용, op. cit., p.76.)
34 정대현 외, op cit., p.369.
35 Ibid., pp.392-393.
36 심광현, op cit, p.158,
37 김영건, 「표현 인문학의 빛과 그늘」, 「신학과 철학」, 2001, Vol 3, pp215-216.
38 소홍렬, op. cit , p.120.
39 김우창, op. cit, p.210
40 정대현은 「표현인문학 비판의 구조」(「비평」, 2001., Vol.5.)에서 그 동안 제기되었던 표현 인문학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나름대로 응답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응답을 하고 있지 않다.
41 최종덕, op. cit., p.116
42 최종덕은 우리 인문학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다음처럼 요약하고 있다. "첫째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왜곡된 인문학, 둘째 군사정권 이후 이데울로기가 권력의 도구로 전락된 현상과 그로부터 발생되는 인문과학의 편협성, 셋째 위의 두 문제를 정당화시키려는 상황조작의 권위가 학문 사회에도 만연되어 있다는 점과 그 권위구조가 인문학의 질을 막고 있다는 사실, 넷째 서구문화가 여과없이 인문학에 직수입되면서 생긴 학문의 시녀현상, 다섯째 서구문화에 대한 무조건적 반발 내지는 국수주의로 인하여 고전문헌에안 매달려 훈고학만 하면서 발전적 비교해석과 전통의 창조를 거부하는 일, 여섯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실천의 문제를 등한시하면서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울 아래서 잘못된 선비의식을 정당화시키는 편의주의적 상아탑의 가면, 일곱째 물질우선주의가 야기했고 또한 우리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병폐적 교육 구조 때문에 생긴 현상들, 즉 경제논리에만 맞추어서 인문학을 비하하는 사회적 풍토를 조작하는 관료행정 등이다."(Ibid., p.102) 우리의 '자아찾기' 노력이 이 모든 것들을 다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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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강영안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 영 건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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