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사유와 상상.

[=] 은유의 이론과 본질

온울에 2008. 5. 26. 03:58

목 차

1. 轉移(대치)로서의 은유 개념
2. 상호작용(언술)으로서의 은유 개념
3. 은유의 본질과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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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崇實語文學會 
학술지명 崇實語文 
ISSN  
권 19 
호  
출판일 2003.  

 

 

 

은유의 이론과 본질


Theory and essence of methaphor


엄경희
(Eum, Kyoung-Hee)
1-108-0301-09

국문요약
본 논문은 기존의 은유 이론이 전개되어온 과정과 은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장 "轉移(대치)로서의 은유 개념"에서는 아리스토데레스의 전이와 일탈의 개념을 밝히고 그의 맥을 잇고 있는 웨이틀리와 바필드의 은유 이론을 소개하였다. 2장 "상호작용(언술)으로서의 은유 개념"에서는 리차즈의 취의와 매재, 막스블랙의 초점과 틀, 리꾀르의 담화 혹은 언술로서의 은유 개념, 후르쇼프스키의 지시 틀(frame of reference) 이론 등을 소개하였다. 이들은 모두 은유의 작용력을 단어의 차원에서 문장, 담화의 차원으로 확장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보이고 있다.

은유가 창조적 의미 생성의 가장 본질적 방법이라는 점에서 은유는 詩作의 근본 원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적 상상력의 핵심이 되는 은유 분석은 언어 이면에 잠복되어 있는 시인의 지향성이 어떤 방식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연구 방법이라 생각된다. 새로운 의미의 창출이 은유의 본래적 기능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은유를 단순히 수사적 장식으로 여기는 고전적 은유론에서 벗어나 보다 확장된 시각에서의 연구가 요구된다. 따라서 3장 "은유의 본질과 실재"에서는 후르쇼프스키의 지시 틀 이론을 최근의 시에 적용하여 상호작용으로서의 은유 개념이 얼마나 풍부한 의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지 입증하고자 했다.


한글키워드
은유, 언술, 상호작용, 간격 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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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轉移(대치)로서의 은유 개념
20세기 시학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은유는 희랍 시대로부터 기원한다. 은유(metaphor)의 어원인 희랍어 metaphora는 ‘넘어로’라는 의미의 meta와 '가져가다'라는 의미의 pherein에서 연유되었다. 이에 의하면 한 사물의 양상이 다른 하나의 사물로 ‘넘겨 가져가’ 두 번째의 사물이 마치 첫 번째 사물처럼 서술되는 것을 가리킨다.1) 이러한 은유를 언어 예술의 범주 속에서 문제삼기 시작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詩學』21장에서 "은유란 類에서 種으로, 혹은 種에서 類로, 혹은 種에서 種으로, 혹은 類推에 의하여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轉用하는 것이다."2)라고 정의 내림으로써 은유 이해의 기초가 되는 轉移'(transference)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 있다. 22장에서는 "생소한 말을 사용하는 措辭는 고상하고 비범하다. 생소한 말이란 방언과 은유와 연장어, 일상어가 아닌 모든 말을 의미한다."3)그리고 은유는 "남에게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의 표징이다"4)라고 말함으로써 은유란 언어의 일상적인 양상에서 '일탈된 것'이며, 은유적 표현은 특별한 정신 행위라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轉移'와 '일탈'의 개념은 그 후 고전주의 美學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典雅한 형식'(Decorum)5)에 의해 "단순한 장식적 범주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형용사들의 집단의 하나로 축소"6)된다. 이때부터 은유는 수사학의 일부로서 대상을 적합하게 드러내기 위한 부수적 가치로 인식된다. 의미의 명료함을 추구했던 고전적 사유 체계 속에서 은유의 모호함은 오히려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은유의 남용은 보편성을 해치는 악습으로 평가되었다. 즉 은유의 독창성은 의미의 명료함이나 보편적 가치 아래에 놓여 '표준화'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은유에 대한 고전적 개념은 작가의 상상력과 창조성을 중요시하는 19C 낭만파 시인이나 이론가들에 의해 와해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은유를 '장식'이 아니라 상상의 중심 원리로 생각하고 은유의 강렬한 작용력에 주목하기에 이른다. 이는 수사학으로부터 은유를 구원해고 역사적으로 은폐되었던 은유의 본질적 가치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시의 근원적 요소로 은유를 자리매김하게 한 낭만주의의 은유에 대한 인식은 20C에 이르러서 다양한 은유 이론을 낳게 하는 동인이 된다. 쥬네트(Gerard Genette)가 "은유는 수사학의 대난파에서 살아남은 희귀한 용어들 중의 하나"7)라고 말하고 있듯이 수사법은 "그 묘기를 찬양해 주기를 시끄럽게 요구하는 문체, 번쩍이는 장식으로 채워진, 내용 없이 겉만 번지르르 한 문체"8)라는 인식에 의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반면 은유는 수사학의 범주로부터 벗어나 그 자체로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20C은유에 관한 수많은 연구들은 매우 어렵고도 복잡한 물음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은유와 결부된 가장 핵심적 물음은 "은유란 무엇인가?"라는 자체 定義에 있다. "은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접근하기 위하여 기존의 연구가들은 우선적으로 은유적 표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집중해 왔다. 이와 결부되어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되어 왔는데 "은유적 상상력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은유 해독은 가능한가?" "은유적 표현은 문자적 의미와 어떻게 다른가?" "두 가지 사고를 동시에 통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의 단어가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기때문에 그 의도하는 바를 짐작하는 것이라면, 어떤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인식하고 그 의미를 알아내는가?" "은유적 사고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은유의 美學은 무엇인가?" "죽은 은유(dead metaphor)와 시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독창적 은유는 어떤 차이를 갖는가?"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물음들은 전이, 충돌. 투쟁, 전복, 위반, 꼬임, 핵융합, 상호작용 등 은유 해석과 관련하여 다양한 개념들을 낳고 있다.

이와 같은 은유의 다양한 개념은 유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轉移'의 개념을 근거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이' 개념은 해석에 따라 단어와 단어의 대치(substitution) 개념으로 이해9)되기도 하고, 때로는 의미의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는 보다 확대된 개념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웨이틀리(R.Whately)는 은유를 "두 가지 의미 사이의 유사, 또는 유추때문에 한 단어가 다른 단어로 대치된 것"10)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바필드(O.Barfield)는 은유를 "한 사물을 말하면서, 다른 사물을 뜻하는 것"11)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치적 관점은 은유의 작용력을 가장 좁은 범위로 축소한다. 은유가 단순히 단어와 단어의 대치라면 이는 수사학적 개념인 '장식으로서의 언어' 수준으로 은유의 기능을 되돌려 놓는 것이기 때문에 은유에 대한 고전적 개념과 다를 바가 없다. 대치나 비교의 관점은 은유를 상호작용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견해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2. 상호작용(언술)으로서의 은유 개념
리차즈(L.A.Richads)는 은유를 취의(tenor)와 매재(vehicle)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이 둘의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가장 간단한 형식으로 은유를 사용할 때 서로 함께 작용하며, 단 하나의 낱말이나 어구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별개의 사물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은유의 의미는 그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라 할 수 있다."12)고 은유의 의미 생성 작용에 대해 설명한다. 서로 불일치하는 것들의 상호작용은 매재가 취의를 단순히 장식하거나, 혹은 취의가 단순히 매재를 소개하는 것과는 다르다.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교통에의 욕망, 결합에의 욕망을 암시"13)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언어는 본래 지시하고 있는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게 된다. 이는 곧 "새로운 현실의 창조"14)를 뜻한다. 이와 같은 리차즈의 상호작용론은 취의와 매재의 개념을 통해 은유에 대한 실제적 적용방식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15) 그러나 그의 취의와 매재의 개념은 자칫하면 은유의 작용 범위를 단어의 차원에 한정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막스 블랙(Max Black)은 은유에 관한 이론을 대치론, 비교론, 상호작용론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는 대치나 비교의 관점이 은유에 대한 축어적 번역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를 비판하고, 7가지 주장16)을 근거로 은유의 상호작용론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은유적 진술은 뚜렷하게 주주제(principal subject)와 보조주제(subsidiary, subject)를 가지고 있으며, 은유는 주주제에 보조주제의 '연상된 내포의미의’ 체계를 적용함으로써 작용한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블랙의 이론에 핵심이 되는 초점(focus)과 틀(frame)의 상호작용론으로 요약된다. 그에 의하면 은유는 주주제, 즉 초점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보조주제, 즉 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의미를 생성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블랙의 상호작용론은 은유 작용의 범위를 단어에서 문장의 차원으로 넓힌다.

블랙이 은유를 문장의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리꾀르(Paul Ricoeur)는 이를 해석학적 견지에서 언술, 혹은 담화(discourse)의 차원으로 확대한다. 그는 "은유를 사용하는 문학은 일차적 의미보다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미론의 차원에서 취급되어야 한다"17)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은유는 현실을 언어로 새롭게 서술한다. 그것이 바로 은유의 의미론적 혁신의 작업인데, 의미론적 혁신은 의미의 새로운 창조를 말한다. 은유는 담론의 사건"18)이라고 설명한다. 리꾀르는 은유 해석이 텍스트 해석과 동일한 차원이라는 의미에서 은유를 기호의 수준에 한정하는 것은 언어 내적 현실만을 문제삼는 것이기 때문에 발화적 상황이 야기하는 독특한 의미를 간과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창조적 의미를 생성하는 은유는 기호의 차원이 아니라 발화적 상황을 고려한 담화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9) 리꾀르는 은유의 담화 이론을 체계화함으로써 은유의 지평을 최대한 화대하고 있으며 은유 해석에 대한 새로운 방법적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에서 은유 연구사에 큰 공적을 남겼다할 수 있다. 막스 블랙의 초점-틀 이론과 리꾀르의 담화 이론은 후루쇼프스키(Benjamin Hrushovski)에 의해 지시 틀(frame of reference)이론으로 다시 심화된다. 후루쇼프스키의 은유론은 구체적 적용방법과 실제 분석의 모델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은유 해석에 매우 유용한 토대가 된다.

은유를 단어와 단어의 대치(substitution)나 단어와 단어의 비교(comparison)로 정의하는 고전적 은유 개념은 은유의 기능을 수사적 장식으로 한정하여 그 작용력을 극소화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대치나 비교의 관점은 은유를 '기호'로 인식하는 것으로 "기호의 가치는 항상 일반적이고 개념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별하거나 부수적인 기호의미와 아무 관련도 없이, 개인적인 어떤 것은 배제된다. 상황에 의한 요인들은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20) 그러나 시적 은유의 본래적 기능이 언어를 고정된 의미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의미와 인식을 창조하는 것에 있다면 은유 연구에 있어서 대치나 비교의 관점은 보다 확장될 필요성이 있다.

막스 블랙과 리꾀르의 영향을 받은 후르쇼프스키의 은유 이론은 벤베니스트(Emile Benveniste)의 의미론에 근거하고 있다. 밴베니스트는 기초체계로서의 언어와 개인에 의해 발화되는 연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보고 "개인이 랑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 때 랑그는 담화 현실태로 바뀐다"21)고 주장한다. 그가 언어를 담화적 실천 속에 위치시키는 것은 언어는 단순한 보편적 제약이기를 멈추고 구조적, 주관적, 역사적 특수성을 지니기 매문이다. 따라서 언어는 기호들의 폐쇄된 세계 속에서 구성되지만 그것을 초월한다.

이러한 언어관에 입각하여 벤베니스트는 소쉬르(Ssussure)의 입장을 비판하고 '의미론적 의미방식'을 주장한다. 각각의 기호는 자신과 다른 기호들을 구별시켜주는 변별적 요인에 의존해서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를 다루지 않을 뿐 아니라 개념적 가치에 묶여 있기 때문에 개별적 발화 상황에서 야기될 수 있는 우연적인 시니피에를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쉬르의 관점은 "연어를 원자화하고 역사를 기계적으로 보려는 방식"22)이라고 비판한다. 발화행위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벤베니스트는 랑그(langue)를 담화로 전환하는 언어의 운동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담화에 의해 생성되는 특수한 의미작용방식인 의미론적 의미작용방식은 사용중인, 현동적인 언어의 영역과 관련된다."23) 따라서 벤베니스트는 의미의 실현은 계열적(paradigmatique) 관계인 기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syntagmatique) 관계인 문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는 우리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발화하는 순간은 매번 유일한 경우이기 때문에 "문장은 항상 여기-지금의 성질"24) 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의미는 계속적으로 창조되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언어의 사전적 의미와 문법적 규약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담화의 의미 생성을 위한 첫번째 조건을 벤베니스트는 담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적 상황과 문맥으로 보고 있다. 이를 그는 '지시'(reference)개념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의미와는 다론 것이라는 것을 원칙으로 설정합니다. (‥‥‥) 매번 특별한 생각에 입각해서 화자는 단어들을 결합하는데, 이 단어들은 <이> 용법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 단어는 구체적인 상황과 사용에서 이 대상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단어들의 개별적인 의미는 이해하면서도, 상황이 없으면 단어들의 결합에서 유래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시 reference의 개념이 본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상적인 경험입니다. (‥‥‥)문장의 <의미>가 그 문장이 표현하는 생각이라면, 문장의 지시reference는 그 문장을 유발하는 사태, 그 문장이 관계하는 그리고 우리가 결코 예견할 수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는 담화 상황이나 사실의 상황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상황은 유일한 조건인데, 아무것도 이것에 대한 인식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장은 매번 다른 사건입니다.25)

결국 벤베니스트에 의하면 문장의 의미를 생성하고 결정하는 것은 지시(reference)이다. 지시에 따라 단어의 의미는 더 이상 기호로서의 시니피에로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벤베니스트의 이와 같은 지시 개념은 후루쇼프스키의 은유 이론에서

'지시의 틀'(frame of reference) 개념으로 심화된다. 후루쇼프스키는 은유를 단어에 차원으로 고정시키는 기존의 은유 개념에서 벗어나 '담화'로서의 은유를 강조한다. 은유는 언어학적 단위에 의한 고정된 단위가 아니라 텍스트의 연속체 안에서 변화하는 역동적 의미체이다. 따라서 은유의 작용을 단어의 차원에 한정하는 것은 물론, 막스 블랙의 초점(focus)과 틀(frame)의 개념처럼 은유를 문장의 차원에 한정하고 있는 것은 은유를 좁은 범주에 국한시키는 것이라 지적하고,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의 범주를 지시의 틀로 만들어 은유의 단위로 삼을 것을 주장한다.26)

후주쇼프스키는 은유를 지시 틀간의 상호작용으로 보는데, 지시 틀은 문장과는 다르다. 문장이 단어들을 결합하는 선형의 단위(linear unit)라면, 지시 틀은 텍스트 내에 비연속적으로 흩어져 있는 의미들을 맥락화라는 구조물이다. 문장이 고정된 단위라면, 지시 틀은 의미론적 단위들의 자유로운 상호 결합을 가능케 하는 유동적 단위이다.27) 즉 지시 틀은 "의미론적으로 통합된 텍스트의 실재 단위"28)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시 틀을 만들기 위해서는 문장의 어떤 부분을 선택하고 그것을 다른 문장에 첨가시켜 텍스트를 지배하는 의미를 재맥락화해야 한다. 이와 같은 지시 틀은 낱말들과 그 낱말을 초월한 테스트의 내적 의미 사이를 연결해 준다. 은유는 이와 같은 지시 틀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이 그 본래적 기능을 드러낼 수 있다. 지시 틀간의 상호 작용에 의한 의미의 통합은 은유의 역할을 단어에 국한하지 않고 시의 허구적 상황으로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의미와 인식의 창조성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지시 틀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시틀의 설정은 절대적이거나 기계적이지 않다. 후루쇼프스키에 의하면 지시 틀의 설정은 독자의 지식 수준, 텍스트의 시점과 발화 양상, 그리고 독서와 해석이 현실적 문맥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하는 문제에 크게 의존한다.29) 이는 지시 틀의 설정이 텍스트의 맥락에 준함과 동시에 독자의 주관적 개입을 허용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즉 지시 틀 내의 불확정적인 요소들(예를 들어 텍스트에서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간격 채우기(gap - filling)에 의해 결정 되는 것이다.30) 이러한 면에서 후루쇼프스키의 통합적 의미론(Integrational Semantics)에 입각한 은유 이론은 기존의 연구 방법이 텍스트만을 절대적 대상으로 삼았던 태도와는 달리 독자의 상상력을 대폭 허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텍스트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전속에서 계속 새로운 의미로 창조되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방법론은 텍스트의 다양한 해석과 접근을 가능케 하여 '살아있는 의미' 생산에 참다운 기여를 한다고 생각된다.

은유가 창조적 의미 생성의 가장 본질적 방법이라는 점에서 은유는 詩作의 근본 원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적 상상력의 핵심이 되는 은유분석은 언어 이면에 잠복되어 있는 시인의 지향성이 어떤 방식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연구 방법이라 생각된다. 새로운 의미의 창출이 은유의 본래적 기능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은유를 단순히 수사적 장식으로 여기는 고전적 은유론에서 벗어나 보다 확장된 시각에서의 연구가 요구된다.

3. 은유의 본질과 실재
시가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언어라는 질료를 숙명으로 하고 있다면 시 연구의 중심 대상은 언어와 그 언어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될 수밖에 없다. 시의 근원인 상상력은 생각의 편린들이 무질서하게 뒤엉켜있는 상태와는 달리, 생각의 조각들에 질서와 통일성을 부여하여 일정한 주제를 향하도록 하는 힘이다. 그것은 언어와의 긴밀한 관계속에 이루어지는 "언어적 상상력"이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휠더린의 시를 해명하면서 "시는 언어 속에서 언어에 의한 건설이다."31)라고 시의 본질을 밝힌 것처림 시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의 원천이 언어적 상상력이라면 그 언어의 중심은 은유라 할 수 있다. 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서도 은유는 시인이 시적 대상의 본질을 직관해내는 작용력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플로베르외 "一物一言"이나 "一事一言"과 같이 대상과 언어가 일대일의 대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 시적 대상의 진실은 애매성 가운데 밝혀진다. 즉 다의적 속성을 대상 자체가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반면 언어는 본질적으로 불안전한 것이며,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의혹은 인간의 내적 의식을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입각해 있다.32) 그러므로 복잡하고 애매한 대상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은유는 불가피하다. 여러 개의 이질적 차원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이 대상의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상상력을 은유의 방식으로써 표출하는 필연적 이유는 기존의 지시적 언어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기 때문에 이미 규정된 일정한 틀 속에 귀속되기를 거부한다. 지시적 언어는 의미를 확정함과 동시에 언어를 가둔다. 그러나 은유는 언어의 객관적 의미를 개인의 문맥 속에서 새롭게 재규정함으로써 의미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해방시킨다. 이와 같은 은유의 기능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지의 인식을 낳게 한다. 새로운 의미와 인식의 창조는 인간 존재를 고착된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창조적 삶을 가능케 한다. 다음에 인용할 세 편의 시는 은유의 이와 같은 작용력이 시의 미감 형성에 가장 주요한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예이다.

박수소리. 나는 박수소리에 등 떠밀려 조회단 앞에 선다. 운동화 발로 차며 나온 시선, 눈이 많아 어지러운 잠자리 머리 나를 옭아매는 박수의 낙하산 그물, 그 탄력을, 튕, 끓어버리고 싶지만, 아랫배에서 왁식으로 부글거리는 어머니. 오오 전투 같은, 늘 새마을 기와 동향으로 나부끼던 국기마저 미동도 않는, 등 뒤에 아이들의 눈동자가, 검은 교복에 돋보기처럼 열을 가한다. 천여 개의 돋보기 조명 불개미떼가 스물스물 빈혈의 육체를 버리고 피난한다. 물에서 팽그르 파르란 연기가 피어난다. 평이, 내려서고 싶어요. 둥그런 현기증 이, 사람 멀미가, 전교생 대표가, 절도 있게 불우이웃에게로, 다가와, 쌀푸대를 배경으로, 라면 박스를, 나는, 라면 박스를, 그 가난의 징표를, 햇살을 등지고 사진 찍는 선생님에게, 노출된, 나는, 비지처럼, 푸석푸석, 어지러워요 햇볕, 햇볕의 설사, 박수소리가, 늘어지며, 라면 박스를 껴안은 채, 슬로우비디오로, 쓰러진, 오, 나의 유년!! 그 구겨진 정신에 유리 조각으로 박혀 빛나던 박수소리, 박수소리.

함민복, (박수소리 · 1) 전문(『우울氏의 -日』, 세계사: 1990년)

유년시절의 가난과 불우함을 회상하고 있는 이 시는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주제의 진부함을 와해시키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은 수많은 은유의 사슬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이 시의 제목인 '박수소리'는 환호나 축하와 같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긍정적 의미를 배반함으로써 시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것은 '햇볕의 설사와 '유리 조각이라는 투명하고도 날카로운 사물과 결합됨으로써 화자의 내면에 가해진 상처와 고통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박수소리'는 '나'와 타자들을 관계성을 나타내는 매개물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박수를 치고 있는 전교생은 잠자리 머리, 낙하산 그물, 팽이, 천여 개의 돋보기 조명으로, 박수를 받고 있는 화자는 빈혈의 육체, 파르란 연기, 둥그런 현기증, 비지 등과 결합된다. 아울러 전교생과 화자를 각각 드러내고 있는 은유적 결합은 서로 충돌함으로써 이 시의 긴장과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 시의 은유의 구조를 언술화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는 파생된 은유(fr2-2)까지를 포함해서 열 개의 지시의 틀이 상호 충돌하여 화자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드러내고 있다. 단어와 단어의 대치로 이들 은유를 본다면 가해자인 '전교생'을 비유하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와 피해자인 화자의 심리를 나타내는 다양한 동사들의 연관을 이처럼 복합적으로 연결시키기 어렵다. 이 열 개의 지지의 틀은 그물처럼 서로 얽혀 화자의 몸과 마음의 복잡한 반응을 동시적으로 입체화해 준다. 특히 fr8은 이 시에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쉼표를 언술화한 부분으로, 시에 사용된 쉼표들은 불편한 화자의 호흡을 메타포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아울러 fr2-1으로부터 파생된 fr2-2는 잠자리의 시선에 대한 부연으로 보여지는 '운동화 발로 차며 나온 시선'이라는 구절을 간격 채우기로 설명한 것이다.

두 눈에 조개껍질을 박은 사람이 안개 속에서

오래된 철교를 부수는 소리

두 눈에 조개껍질을 박은 사람이 안개 속에서

허리에 돋아난 제 발들을 떼어내는 소리

두 눈에 조개껍질을 박은 사람이 안개 속에서

내 눈동자를 빼가는 소리

박상순, <내가 본 마지막 겨울> 전문(『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세계사, 1996)


 


이 시는 세 개의 지시 틀에 의해 폭력적 상황을 그로테스크하게 연출하고 있다. 지시 틀에 의하면 철교와 발과 눈동자는 서로 결합하여 길의 공간과 가다, 보다 등의 동사가 동일한 의미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즉 길의 파괴는 가다와 보다라는 행위가 억압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길의 파괴는 갈 수도 볼 수도 없었던 '마지막 겨울'의 암울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두 눈에 조개껍질을 박은 사람’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자해하는 자라는 사실이다. 철교와 결합하고 있는 '(그의) 발과 '(나의) 눈동자'가 동일한 차원으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볼 때 안 개 속에서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괴물이며 살인자인 그는 '나'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자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보여지는 부수다, 떼내다, 빼가다 등의 동사군은 자기 파괴를 함의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갈등과 감금을 스스로 겪고 있는 내적 자아의 모습을 이 시는 은유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막 이삭 폐기 시작한 수숫대가

낮달을

마당 바란 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아래쪽이 다 많아진 달을 주워다 어디다 쓰나

생각한 다음날

조금 더 여물어진 달을

이번엔 洞口 개울물 한쪽에 잇대어

깁고 있었다

그러다가 맑디맑은一生이 된

빈 수숫대를 본다

단 두 개의 서까래를 올린

속으로 달이

들락날락한다

장석남, <달과 수숫대 -"貧"> 전문(『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비평사, 2001)


 


장석남의 (달과 수숫대 -"貧") 또한 복잡한 은유 구조에 의해 시적 깊이와 미감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예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시는 수숫대와 달, 그리고 집 등의 이미지가 어우러진 일종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풍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fr1에서 fr6에 이르는 맥락을 서로 결합해 보면 이 시의 의미는 상호 이질적인 의미들을 통합하는 가운데 시적 긴장을 획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수숫대가 여물고 비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달이 차고 기우는 과정은 곧 인간의 일생과 맞물리고, 그것은 먼지를 쓸어내고 많아진 부분을 깁고, 서까래를 올리는 구체적인 삶의 실상과 맞물린다. 수숫대와 달을 아우르는 자연의 층위와 인간의 일상적 층위가 하나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비다, 깁다 등의 동사에서 알 수 있듯이 풍부함이 아니라 '貧'과 연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r1과 fr2의 자연의 층위와 fr3의 '먼지를 쓸어내다'는 일상의 가난함이나 고달픔과 뒤섞임으로써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가난을 '淸貧'함 쪽으로 의미화하도록 유도한다. 이와 같은 은유적 결합으로써 시인은 감정의 절제와 관조의 시선을 마련할 수 있는 시 형상화 방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시가 존재의 의미를 새로운 세계로 전환시키는 예술의 양식이라면 은유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가장 본질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은유는 의미의 생성과 소멸이 순간적으로 성취되는 역동적이고도 진지한 언어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은유는 시인의 독특한 연어 사용법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열쇠이면서 동시에 한 시인의 창조적 역량을 가장 잘 드러내줄 수 있는 詩作의 근본 원리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함민복의 <박수소리 1>, 박상순의 <내가 본 마지막 겨울>, 장석남의 <달과 수숫대 -貧>등은 여러 겹의 은유 결합에 의해 시적 긴장과 미감, 그리고 의미의 깊이를 획득하고 있는 예이다. 특히 이들 시에 대한 은유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은유를 언술로 보는 관점은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시 연구에 유용한 이론적 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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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옥순(1989), 「隱喩 構造論-李籍의 作品을 模型으로」,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 논문.
리꾀르, 은유와 상징, 『호남신학대신학이해』, 정기철(역)(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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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르 쥬네트, 줄어드는 수사학, 『수사학』, 김현(편역)(1987), 문학과지성사.
테렌스 혹스(1970), 『蔭喩』, 심명호(역)(1982), 서울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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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Hrushovski, POETIC METAPHOR AND FRAMES OF AEFRENCE with Examples from Eliot, Rilke, Mayakovsky, Mandelshtam Pound, Creely, Amichai, and the New York Times, Poetics Today, Vol.5,No.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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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lack(1981), Metaphor, Philosphical Perspectives on Metaphor, Mark Johnson(ed), Minneapolis : Univ.of Minnesota Press.
Owen Barfield, Poetic Diction and Legal Fiction Essays Presented to Charles Wil1iams (Oxford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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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Whately, Elements of Rhetoric (7th revised, ed, London,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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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테렌스 혹스(1970), 『隱喩』, 심명호(역)(1982), 서울대학교 출판부, 7쪽 참조
2 아리스토텔레스, 『詩學』, 천병희(역)(1996), 문예출판사, 116쪽.
3 아리스토텔레스, 앞의 책, 121쪽.
4 아리스토텔레스, 앞의 책, 125쪽.
5 데코럼(Decorum)은 질서와 적합성에 의존한 美의 개념을 말한다. 고전주의 시대는 질서와 조화를 美의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으며, 따라서 전체에 합당한 부분의 '적합성'만이 우아하고 고상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여겨졌다. 데코럼은 이러한 고전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용어이다.
Joseph T, Shipley(by edited), Dictionary of World Literary Terms, 76~77쪽 참조.
6 테렌스 혹스, 앞의 책, 23쪽,
7 제라르 쥬네트, 줄어드는 수사학, 『수사학』, 김현(편역)(1987), 문학과지성사, 131쪽.
8 피터 딕슨(1971), 『修辭法』, 강대건(역)(1987), 서울대학교 출판부, 12쪽.
9 한혜원은 「隱喩연구-아리스토텔레스 <詩學>을 중심으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이를 대치나 비교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견해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이 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를 措辭를 이루는 요소인 명사의 하위 항목으로 위치 지운 것에 착안하여 명사의 기능을 집중 분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에 대한 정의가 단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단어의 '전이’를 문맥의 결합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혜원(1990), 「隱喩연구 -아리스토텔레스 (詩學)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미학과 석사학위 논문.
10 Richard Whately, Elements of Rhetoric (7th revised, ed, London, 1846),p.280.
Max Black(1981), Metaphor, Philosphical Perspectives on Metaphor, Mark Johnson(ed), Minneapolis : Univ.of Minnesota Press, 68쪽 재인용.
11 Owen Barfield, Poetic Diction and Legal Fiction, Essays Presented to Charles Williams(Oxford,1947), p.111, Max Black(1981), 앞의 책, 69쪽 재인용.
12 L.A.Richards(1981), The Philosophy of Rhetoric, Philosphical Perspectives on Metaphor, Mark Johnson(ed), Minneapolis . Univ.of Minnesota Press, 51쪽.
13 이승훈(1983), 『詩論』, 고려원, 137쪽.
14 테렌스 혹스(1970), 앞의 책, 81쪽.
15 리챠즈는 인간 모두가 유사성을 찾아내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은유는 모든 언어에 편재하는 원리라고 설명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재의 표징"으로서의 은유 창조 능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은유는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 언어의 정상적인 작용 양식으로부터 일탈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언어 행위임을 말하는 것이다. 리챠즈의 이러한 논리는 은유적 능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능력으로 규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 삶의 보편적 양태와 은유와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가능케 한다.
리챠즈(1981), 앞의 책, 48~51쪽 참조.
리챠즈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G.레이코프와 M.존슨의 공동 저서 『삶으로서의 은유』는 은유적 언어 능력이 한 개인의 독자적 능력이 아님을 논증하고 있는 글이다. 그들은 하나의 개별적 은유는 그 자체로 단일한 존재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통의 개념적 특성과 문화권적 특성에 따른 체계성과 계층적 구조와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서 파악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은유가 언어의 근본 원리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은유적 발화가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능력이라면 그동 안 시인의 창조성의 핵심이 되어 왔던 은유적 능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G.레이코프와 M.존슨의 논리처럼 은유적 발화는 그것이 死隱喩(dead metaphor)든 아니든 간에 일상의 대화 속에 편재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은유를 핵으로 하는 하나의 위대한 예술적 산물로서의 시의 가치는 일상의 발화와 어떻게 다른가? 동일한 은유적 방식을 따른다 하더라도 시적 아름다움을 일상적 담화와 동일한 수준으로 본다면 예술의 가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G.레이코프, M.존슨(1980)의 논의에 대해서는 『삶으로서의 은유』,노양진, 나익주(공역)(1995), 서광사, 참조
16 Max Black(1981),Metaphor, Philosphical Perspectives on Metaphor, Mark Johnson(ed), Minneapolis : Univ.of Minnesota Press, 77~78쪽 참조
17 리꾀르, 은유와 상징, 『호남신학대신학이해』, 정기철(역)(1996), 377쪽.
이 글은 Paul Ricoeur, Interpretation Theory:Discourse and the surplus of meaning,(The Taxas Christian University Press, Fort Worth, Taxas,(1976), 45-69쪽 리꾀르, 은유와 상징, 『호남신학대신학이해』, 정기철(역)(1996), 377쪽.
이 글은 Paul Ricoeur, Interpretation Theory:Discourse and the surplus of meaning,(The Taxas Christian University Press, Fort Worth, Taxas,(1976), 45-69쪽 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18 리꾀르, 앞의 글, 377쪽.
19 Paul Ricoeur(1975), The Rule of Metaphor, trans. Robert Czemy with Kathleen McLaughlin and John Costello, sj, London and Henley:Routedge & Kegan Paul, 1977. 65~100쪽 참조
20 김옥순(1989), 「隱喩 構造論-李箱의 作品을 模型으로」,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 논문. 9쪽
21 에밀 벤베니스트(1966),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I 』, 황경자(역)(1992), 민음사, 511쪽.
22 벤베니스트(1966), 앞의 책, 17쪽.
23 벤베니스트(1966), 앞의 책, 513쪽.
24 밴베니스트(1966), 『일반언어학의 제문제Ⅱ』, 황경자(역)(1992), 민음사, 278쪽.
25 벤베니스트(1966), 앞의 책, 278~279쪽.
26 Benjamin Hrushovski, POETIC METAPHOR AND FRAMES OF AEFERENCE with Examples from Eliot, Rilke, Mayakovsky, Mandelshtam Pound, Creely, Amichai, and the New York Times, Poetics Today, Vol.5,No.1984, 6~7쪽 참조
27 후루쇼프스키(1984), 앞의 글, 11쪽 참조.
28 후루쇼프스키(1984), 앞의 글, 12쪽.
29 후루쇼프스키(1984), 앞의 글, 13쪽 참조.
30 후루쇼프스키(1984), 앞의 글, 13쪽 참조
31 하이데거(1978), 『詩와 철학』, 소광희(역), 박영사, 54쪽.
32 데리다는 언어의 불안정성을 '말소(抹消)하에 둠'(sous rapture)의 개념을 통해 밝히고 있다. 말소 하에 둔다는 것은 낱말은 불충분하기 때문에 어떤 낱말을 쓰고나서 그것에 삭제표시를 해둠으로써 씌어진 부분과 삭제된 부분을 둘 다 판독할 수 있도록 해둔다는 것이다. 언어의 의미를 유보하는 이와 같은 태도는 언어는 본질적으로 부적절한 것이지만 필요하다는 인식을 나타낸다. 데리다의 언어관에 의하면, 기표는 거울이 상(像image)을 비추듯이 직접적으로 기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언어에 있어서 기의들 사이의 똑같은 일 대 일의 대응쌍이란 없다. 기표와 기의는 계속해서 분리될 뿐 아니라 새로운 조합을 형성한다. 또한 각각의 기호에는 그 기호가 그것이 되기 위하여 배척했던 다른 낱말의 흔적이 깃들여 있다. 그리고 낱말은 이전에 사라졌던 것의 흔적을 담지하고 있다. 의미의 연쇄에 있어서 각각의 기호는 다른 모든 기호의 흔적을 담지하고 있어서 끊임없이 복잡한 직물조직을 형성한다. 마단 사럽 外, 『데리다와 푸꼬, 그리고 포스트모더나즘, 임현규(편역)(1995), 인간사랑, 18-2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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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엄경희
(Eum, Kyoung-Hee)
이화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