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
발행자명 근대 영미소설 학회
학술지명 근대 영미소설
권 3
호 1
출판일 1996.
시대상의 반응, 반향, 굴절로서의『트리스트람 섄디』
(로렌스 스턴 연구)
Laurence Sterne's Tristram Shandy as Cultural Reflection, Refraction, and Echo
김정숙
(Kim, Chung Sook)
홍익대
1-101-9601-02
pp.31-46
이 논문은 1996년도 홍익대학교 교내연구비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
영문요약
Abstract
This study is an intent to analyze Laurence Sterne's Tristram Shandy in terms of its cultural and historical background. Sterne's philosophical outlook was shaped by the idea that the world is a farce and hollowness, an attitude that might have given a hint to John Keats for his "negative capability". It was fostered by the 18th century idea of man being in an isthmus of glory, jest, and riddles. Hence anything monolithic and self-sufficient one-sidedness is a vice, including a monolithic theory making Walter Shandy, and a hobby-horsical Uncle Toby. And this study pinpoints five cultural and historical phenomena which influenced Sterne - ①the civil and religious wars in the 17th century, ② Pope's Essay on Man, ③the 18th Century Sentimentalism ④fragments of the antiquity in the period ⑤acknowledgement of the change in women's status in the 18th Century.
--------------------------------------------------------------------------------
문학작품중에는 출판당대에서 보다는 시간이 흐르면서 독자의 관심을 모으는 작품들이 있다. 이중 대표적인 것으로 1759년에 첫 두권의 출판시작을 했던 『신사 트리스트람 샌디의 생애와 견해』(The Life and Opinions of Tristram Shandy, Gentleman)을 들 수 있다. 일단 표면적인 이유를 들자면 이 작품이 겉으로 보여주는 혁명성이다. 당대의 다른 대표적 소설들, 예컨대 리차드슨(Samuel Richardson)의 『패밀라』(Pamela), 필딩(Henry Fie1ding)의 『톰 죤스』(Tom Jones)등에 구현되는 소설기법의 규범을 작가 스턴(Laurence Sterne)은 무시한다. 부쓰(Wayne C. Booth)는 그의 논문 『트리스트람 섄디 이전 희극소설의 자의식적 화자』("The Self-conscious Narrator in Comic Fiction before Tristram Shandy")에서 스턴이전에 자의식적인 화자를 이용한 작가들 중에 특히 필딩을 예로 들면서 스턴의 기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됐음을 강조한다. 부쓰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고 실제로 스턴의 화자와 필딩의 자의식적인 화자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 지적하는 스턴 소설의 혁명성은 부쓰가 말하는 자의식적 화자 기법과는 무관하다. 18세기에 소설이라는 쟝르가 확립되면서 요구되었던 규범, 예컨대 연대순에 의한 기법, 권선징악적 도덕률 제시 등 획일적인 규범에 의한 소설 쓰기의 무의미함을 스턴은 보여주려고 했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죤슨(Samuel Johnson)이 필딩더러 "시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 하고, 리차드슨 더러는 "시계의 내부구조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의 평가 기준이 당시 소설 쓰기의 규범에 의한 것이었다. 죤슨은 스턴 작품이 "괴이하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할 것("Nothing odd will last long")이라고 했는데 이것 역시 스턴 소설의 혁명성때문이였다. 이 논문은 스턴 소설의 혁명성이 작가가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흐름을 보며 깨달은 철학적 사고의 결과임을 증명하려고 한다. 즉 신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중간위치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성적인 획일주의(소설에서의 "hobby-horse")를 피하는 것, 타자를 수용하는 것 등이 였다.
『트리스트람 섄디』의 이러한 혁명성은 20세기에 오면서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의 일부와 연관되어져서 비평가들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일예로 스턴을 울프(Verginia Woolf)와 죠이스(James Joyce)의 내면 기법에 연관시키는 시도(브라운 153-59)가 있었고 20세기 후반에 오면서는 스턴세계를 부조리적인 것으로 보고 까뮤의 실존철학과 연계시키는 연구(록크리지 652-67)도 있었다. 또한 70년대 이후부터는 해체주의적인 입장(밀러 375-87)에서 라깡의 이론까지 도입(토머스 44-62)시켜 스턴소설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들 학자들의 연구가 스턴소설의 연구의 폭을 확대시키는 공헌을 하는 한편, 각기의 유아론적(스턴이 말하는 hobby-horse)잣대의 틀에 집어넣는 우를 범할 수도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논문에서는 스턴 작품이 18세기 철학, 역사, 문화의 반영, 반향, 굴절의 소산이 였으며 위에서 언급한 혁명성은 I8세기이전 시대의 광적 신앙과 그로 인한 내란, 그리고 그 부작용, 즉 유아론적 자기충만의식, 경직된 자아 및 그를 위한 투쟁(또는 전쟁)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관련이 있었음을 천명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바흐찐의 대화이론과 신역사주의의 기본요소가 기저를 이루는 것은 사실이나 이 논문에서는 연구의 초점이 다르기때문에 직접 거론하지는 않겠다.
이러한 맥락으로 스턴세계를 정의하는데 콜리지(Samuel Coleridge)의 유명한 비평은 필수조건이다. 콜리지는 스헌소설에서 작은 것이 크게, 큰 것이 작게 표현되어 결국 두 가지를 다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왜냐하면 무한대의 세계에 비하면 모든 큰 것이나 작은 것은 다같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허무함과 우스팡스러움이 인간내면에 존재하는 신성함과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과도 무관하지 않다(하우즈 354). 이와 관련해서 리드(Herbert Read)가 지적한대로 키츠(John Keats)의 "Negative Capability"는 스턴-요릭(Yorkck)에게서 전승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스턴은 "불확실함, 미스테리, 그리고 회의심 속에서 존재가능한 사람(A man... capable of being in uncertainties, mysteries, doubts)(리드 330)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스턴의 이와같은 철학적 사고에 영향을 끼쳤을 법한 시대상의 상황부터 점검해 보기로 한다. 『트리스트람 섄디』는 18세기 중엽에 출판되었지만 소설의 내용을 따져보면 1688년의 명예혁명부근에서 부터 관련이 된다. 이 혁명으로 제임스이세 대신 윌림엄왕과 메리여왕이 등극하고 영국은 프로테스탄트시대를 열게된다. 위에서 언급한 바 광적신앙의 타자 불용이 가져온 내란의 소산이 였던 것이다. 이것으로 영국국교(Anglican)는 전세기(17세기)의 종교내란의 부작용에서 벗어나기위해 광적 신앙을 피하고 중용과 타협의 도덕성 추구에 전력했다. 구체적으로 스턴과 관련시켜서 천주교파(Roman Catholicism)와 신교 개혁파 특히 감리교파(Methodism)의 중간적 신앙으로서의 영국국교의 의미가 작가 스턴에게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트리스트람 섄디』의 주인공 트리스트람이 11월 5일에 태어나는데 이날은 1605년의 왕당파 음모 발각사건(Popish P1ot)과 1688년의 월리엄 3세의 즉위를 대대적으로 축하하는 경축일이 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임스 2세가 불란서로 피신하자 양국은 그 동안의 적대관계를 전쟁으고 이끌고 결과적으로 1695년에 영국은 네이머 승리를 거둔다. 『트리스트람 섄디』의 토비아저씨(Uncle Toby)는 이 전쟁에서 성적불구가 되는 부상을 입게 되고 그의 부하 트림(Trim)과 벌이는 정원에서의 전쟁놀이는 윌리엄 및 앤여왕이 관련된 스페인 전쟁을 소설에서 재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내란은 스턴이 테어났던 해인 1713년에 유트레히트 협약으로 끝이 난다. 또한 명예혁명으로 왕위를 빼앗겼던 스튜어트 왕족이 1745년에 스코틀랜드연안에 상륙했다가 패하는 짧은 내란을 벌였는데 침입군대가 영국의 북쪽변경의 요-크셔 지방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곳은 스턴일가가 자리잡았던 곳이 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곳에서는 반천주교 감정이 고조된 것이 였다. 이때에 스튜어트 왕족의 재기를 위해 활약했던 산부인과 의사 버-튼(Dr. John Burton of York)은 『트리스트람 섄디』에서 배불뜨기 엉텅리 의사로서 태어나는 트리스트람의 코를 핀셋트로 잘못 건드려 납작하게 만드는, 그래서 그의 운명을 더욱 슬프게 만든 장본인 슬롭(Dr. S1op)의사로 조롱 받는다(뉴 3-5).
멜빈 뉴는 스턴이 자신을 당대의 디포우(Daniel Defoe), 필딩(Henry Fielding), 리차드슨(Samuel Richardson), 그리고 스몰레트(Tobias Smollett)등과 차별화시키기 위해 『트리스트람 섄디』의 실제 배경을 70년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과 관련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 연구의 관심사는 스턴이 소설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중간 입장"의 도덕률은 바로 전세기의 종교내란을 거을 삼은 것이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만사는 절대적인 틀이나 자기중심적 방식, 또는 유아독존적 이론에 의해서 일직선으로 진행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깨달음의 도덕률인 것이다. 그것은 종교, 철학, 과학등 모든것에 다 적용된다. 트리스트람이 독자에게 전해주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보자.
그러나 이봐요, 사모님. 인간은 수수께끼와 미스테리속에서 살아간답니다. 가장 분명한 것인데도 불확실한 면이 있지요 그쪽은 아무리 민첩한 능력이라도 꿰뚫어 볼 수가 없답니다. 그리고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고양된 깨달음이라도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당황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거기에서도 좋은 점을 우리는 찾지요. 그리고 그것으로 족하구요 (IV.7; 293)
위에서 스턴의 이와같은 깨달음을 키츠의 "부정의 능력"과 비교했거니와 사실은 이것은 18세기의 영국 사회의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리던 것이였다. 수수께끼와 미스테리속에 사는 인간은 또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다 갖추고 있는, 자기모순적이고 이중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18세기의 대표적 문인이였던 포우프(Alexander Pope)는 「인간에 관한 에쎄이」("An Essay on Ma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왕색한 중간적 위치에 놓여있는,
어두우면서도 지혜롭고, 거칠면서도 위대한 존재,
회의론적 입장을 취하기에는 너무 지식이 많고,
금욕론자의 교만한 입장을 취하기에는 너무 약점이 많아,
중간에서 우물쭈물, 자신있게 행동하지도 가만히 있지도 못하며,
자신있게 그 자신을 신으로도 짐승으로도 생각못하며,
자신있게 정신도 육체도 택하지 못하며,
태어나선 죽고,판단하되 그르치나니.
("An Essay on Man", Ⅱ 13-11)
"옹색한 중간적 위치(isthnms of a middle state)"에 놓여진 인간의 이중성과 모순성은 다음 귀절에서도 나타난다.
사상과 감정은 온통 뒤죽박죽의 혼란,
언제나 미망에 속고 깨고
일어났다 주저 앉도록 지어지고,
만물의 영장이면서도, 만물의 제물이라.
진리의 유일한 재판관이면서도 끝없는 오류속으로 내던져지니,
진정 온세상의 영광이요, 조롱거리이며, 수수께끼로다.
("An Essay on Man", Ⅱ 13-18)
이와같이 중간위치에 처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면서 동시에 희생물인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으로 말미암아 인간내면은 희·비극적인 갈등으로 모순을 일으킨다고 했다. 다시말하면, "중간위치의 틈바구니"는 동물적인 것과 천사의 속성사이에 긴 인간의 위치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거기에 따르는 인간고유의 불확실함, 미스테리, 회의심등을 수반하는 것이다. 스턴 나름의 "부정의 능력"의 밑거름이 된 사고체계였다.
18세기적 사고에서는 포우프처럼 스턴 철학의 밑거름을 제공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스턴으로 하여금 신랄한 풍자를 하게 만든 시대적 사상도 있었다. 그 좋은 예로 감상주의(Sentimentalism)을 들 수 있다. 즉 인간은 "중간위치의 틈바구니"라는, 기독교적 신의 은총을 바라며 거듭나기를 갈구하는 절대적 크리스찬 신앙에서 상당히 벗어난 위치에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18세기적 현상이였던 감상주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18세기 영국문화에서 감상주의는 문학, 도덕, 종교등 여러분야에서 그 특색을 발휘하고 있었다. 예컨대 문학에서는 왕정복고시대 희극의 방탕함과 외설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18세기 초부터는 덕망과 정조를 강조하는 희극이 등장했고 이 시대 중엽무렵의 연극무대는 근엄한 남·녀배우들로 가득찼었다. 이와같은 문학적인 면에서의 감상주의는 기존 기독교 체제를 세속화·도덕화 시키는 촉매역할을 했다. 스턴 당대이전까지는 인간은 원죄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신의 은총이 없이는 인간의 양심과 생명은 거듭날 수가 없었고, 인생은 기독교 신을 영화롭게하는 절대적인 목표로 지탱되어야 했다. 다시말하면 교회와 신앙의 개입 없이는 인간은 도덕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8세기에 오면서 이러한 개념은 약화·세속화되는데 애슬리 쿠퍼(Ashley Gooper, the Third Earl of Shaftesbury)가 저술한 『인간, 태도, 의견, 시대의 특성』(Characteristics of Shaftesbury)의 영향이 컸다. 개인은 능력과 타고난 성향에 따라 도덕률을 결정할 수 있다고 쿠퍼는 주장했다. 특히 쿠퍼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선을 택하고 악을 피하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기독교 교리에는 위배되는 것이었다. 아담의 원죄로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는 신의 은총과 구원, 깨달음, 교회등의 도움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먼다는 기독교 교리에 이단적인 것이었다. 섀프츠베리의 감상주의는 18세기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이라기 보다는 기독교에 대한 반역이였다(뉴 70).
니체(Frederick Nietzsche)의 철학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스턴 연구의 배경을 니체에게서 제공받는 뉴는 18세기 감상주의와 스턴 소설과의 관계설명에 앞서 니체의 다음과 같은 귀절을 에피그라프로 내세운다.
본인은 철학자들까지 사로잡았다가 그들을 병들게 만든 저 전염성의 동정의 도덕이 자체로서도 이미 괴이했던 유럽문화의 가장 괴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New 67)
그리고 스턴 소설에서 감상주의의 대표격인 토비아저씨(Uncle Toby)는 뉴 이전에 스턴비평의 선구자 였던 트로거트(John Traugott)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그래서 식탁에서 윙윙거리는 살찐 파리를 살려보내는 착한 인물로 "지정"이 되어있었는데 뉴는 토비야말로 감상주의라는 도그마의 옷을 입힌 한편으로는 파리를 살려 보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광적인 전쟁놀이에 몰입하면서 수천의 군사를 전사·부상하게 만드는 신랄한 스턴 풍자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60년대에 스턴 비평이 아직은 트로거트의 휘하에서 주도될때 호띠이처씨를 이러한 인물로 재평가했다가 "영문학 작품중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중 한 사람에게 먹칠을 했다"는 비난을 사방에서 받은 뉴의 감정섞인 18세기 감상주의 비판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단성적인 도그마를 제공하는 느낌을 주긴한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의 토비아저씨 연구가 논리적인 타당성을 제공하는 것은 스턴 소설전체의 맥락에서 볼때 그의 주장이 일관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뉴는 니체가 스트라우스(David Strauss)의 "안이한" 기독교 사상을 질책한 점을 주목한다. 즉 신의 아들이 피로 물들은 속죄양으로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개선시킨 존재라는 사실에 보다는 예수라는 "인간모델"이 겸손, 부드러움, 친절" 그 따위("nothing more")의 경건함에 관심을 돌렸다는 것이다. 니체의 이런 사고체제의 배경에는 인간의 도덕적 자만에 대한 불신이 기저를 이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이성)주의는 인간적 자만의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고 감상주의는 그 자만심의 도덕적 행위이므로 이 둘은 다 니체의 철학적 질책의 대상이라고 뉴는 단정한다(뉴 69-71).
이런 맥락에서 뉴는 토비아저씨를 이상적인 섀프츠베리적 감상주의 도덕성의 소지자로 지목한다. 그의 도덕성은 본능적이고 타고난 성향일 뿐아니라 신의 섭리에 대한 신앙 또한 타고난 재질이다. 토비는 신을 내면화하고 있는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기만 또는 지독한 도그마로 감싸고 있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면서 수많은 적군이 전사, 부상당하는 광경을 재연하는데에 대단한 신경을 쓰는 인물이라는 것으로 분명히 나타난다. 또한 모든 인류를 감싸 안으면서도 워드먼 과부의 애타는 마음은 전혀 이해를 못하는 토비는 경건함과 자기기만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고, 토비야 말로 스턴이 진정한 종교의 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뉴는 주장한다. 토비의 인간됨의 모순 - 아마도 콜리지가 스턴소설을 칭찬할때 표현했던 "인생의 웃음꺼리이며 허무함(farce and hollowness of the world)"의 표상으로서의 - 은 성(sex)에 대한 무지 내지는 불감증이다. 실제로 스턴 작품의 시종을 일관하는 문제들 중에 성의 무지와 성의 지식의 대비는 이 소설이 출판당시부터 외설이라고 비난받게 만든 요소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성직자 스턴이 인간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토비의 성적 무능력과 여자에 대한 무지는 그의 부하인 트림(Corporal Trim)의 솔직함과 능력에 대비된다.
-각하, 제 말씀 좀 들으세요! 대위가 소리쳤다. -여자의 연민이라는 것이 남자 무릎 뼈에 난 상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요 ....
무릎이라는 곳은 몸체에서 왜 떨어져 있지 않아요 - 거기에 비해 사타구니는요,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곳 바로 뒤에 있습지요.
토비의 덕망인 감상주의와 동정심은 인간적 욕망과 만날 때는 무능하기 짝이 없다. 동정의 도덕률은 그 기본이 다른 사람에 대한 적절한 반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 몰입에 있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토비의 전쟁놀이는 인간 역사의 쟁점의 현실을 상기시켜 준다. 즉, 상대편의 주장이나 반대에 관용을 베풀기보다는 강화된 공격으로 대처해 온 것이 인간역사의 과정이였던 것이다. 우리들 자신이 매일 주위사람들에게 어떤 의견이나 느낌에 대해 동조해 달라고 설득을 할때 (특히 관용은 도덕성의 기본이라고 우리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면서), 토비의 전쟁몰입은 그의 감상주의와는 모순되는 것일 뿐아니라 감상주의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토비는 이런 면에서 보면 매사에 이론을 내세우는 월터의 바보스러움이나 그 해악에 못지않은 악한의 요소를 갖고 있다(뉴 76).
뉴는 토비의 자기모순에 비해서 그의 부하 트림을 오히려 객관적이고 믿음직한 인물로 천거한다. 트림은 토비의 몸종이나 다름없지만, 실질적인 면에서, 특히 성(sex)의 관계에서는 토비의 위에 있다. 그는 『트리스트람 샌디』의 여성 인물들과 함께 여자의 끝이 어느 쪽인지("right end,wrong end") 아는 유일한 남자이다(Ⅱ, 7). 토비의 단성적 몰입(Hobby-horse), 거기에 따르는 자만등은 이론 속에 빠져 허우적대며 항상 불안한 월터 보다도 도덕률에 있어서는 위협적인 존재라고 뉴는 못 박으면서 짜라투스트라의 한 귀절을 인용한다
인류전체의 장래에 가장 큰 위험은 누구에게 있는가? 선하고 정당한 사람들에게 있지 않은가?-처음과 같이 말하면서 마음속으로 느끼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이미 선함과 정달함이 무엇인지 알 뿐아니라 갖추고 있다; 아직도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가 있도다."(짜라투스트라, 229)
그리고 『트리스트람 샌디』의 이해도 이와 같은 맥락에 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뉴 7).
인생만사에 절대적인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트리스트람 섄디』를 통해 역설하게 된 스턴 당대의 역사적 상황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해리즈(Elizabeth Harries)는 흥미있는 자료를 제공해 준다. 그녀의 논문 「스턴의 소설들: 파편들 모으기」 ("Sterne's Novels: Gathering up the Fragments")에서 해리즈는 스턴의 소설이 여러 작은 이야기들의 파편이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개 나열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소설 전체 구성이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파편들의 모음이라는 것, 그리고 스턴자신이 『트리스트람 샌디』 1, 2권의 두번째 인쇄때 핏(William Fit)에게 바친 헌사에서 인생을 "한 조각 인생(this Fmagmemt of Life)"이라고 한점등에 착안하고 그것을 18세기의 역사적 상황과 연관시켜 고찰한다. 해리즈에 의하면 18세기는 고대의 유물(원래는 완전했지만 일부만 남은)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행해졌던 폼페이 유적 같은 고대유물 발굴작업은 스턴의 표현대로 "녹슬고 조각난 고대유물(Frusts, and Crusts, and Rusts of Antiquity)"에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월터 샌디가 매사에 아주 사소한 것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든지, 트리스트람이 두연인의 유적을 찾는 것 등은 이러한 관심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턴 소설에 활용되는 댓쉬, 별표, 손가락표, 이야기의 곁가지 등은 스턴 나름대로의 의도된 또는 고안된 미완성품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들 장치들을 희극적, 논리적 효과를 극대화하는데 응용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스턴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치 중에 가장 극대화된 효과를 이룩한 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빈 페이지를 남겨놓고 독자더러 거기에 과부 워드먼(Wadman)의 초상화를 독자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라고 하는 대목이다.
과부 워드먼의 호색적인 유혹을 제대로 인식합시다. 펜과 잉크를 가져오라고 해요 여기 지면은 마련되었으니까요 자, 앉으시지요 마음가는 대로 그녀를 그려보세요 가능한 한 댁의 애첩과 닮게,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댁의 마누라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Ⅵ.38; 470)
위와 같은 장면은 독자를 이야기 흐름에 끌어들이기도 하거니와 독자의 상상력을 부추기는 역할까지 해서 미완성 또는 불완전함의 완전한 효과를 얻는다는 것이다(해리즈 96-98).
해리즈의 논문이 지적하는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성직자 스턴이 날마다 생활하는데 읽었음에 틀림없는 성경의 영향에 대한 고찰이다. 그녀는 논문 머리에 에피그라프로 성경귀절 둘을 인용한다. 신약 요한복음 6:12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Gather up the fragments that remain, that nothing be lost)"와 누가복음 11: 23의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he who does not gather with me scatters)"이다. 그리고 해리즈는 정통교회의 광범위기독교파(Latitudinarian) 교구목사인 스턴이 성경에 나오는 물고기 두마리와 빵다섯조각으로 오천명을 먹인 이야기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빵 "조각"은 그래서 겉보기에는 부족하지만 풍성하고, 겉보기에 무의미하지만 대단한 의미가 있는 신의 은총을 반향시킨다는 것이다. "남은조각"(the fragments that remain)은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은 음식이라는 의미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넘침, 풍요로움을 상징한다고 한다. 해리즈는 이점을 "지하상징(subterranean metaphor)"이라고 명명하고 이 상징은 스턴의 소설전반에 상품 가치가 없는 천에 이리저리 꼬여져 섞여있는 실오라기처럼 퍼져있다고 하는 트리스트람의 말을 인용한다. 즉 "상품가치가 없는 천 조각에서 흔히 눈에 뜨이는, 굵게 이리저리 얽힌 실줄기, 천 전체에 사방으로 얽혀 있어서 그것을 잘라내거나 할 수 는 없지만 그것의 존재가 보이고 느껴지는(a large uneven thread, as you sometimes see in an unsaleable piece of cambrick running along the whole length of the web, and so untowardly, you cannot so much as cut out a **... but it is seen or felt)(Ⅵ.33; 463)" 실줄기 같다는 것이다. 스턴의 소설은 회의주의나 유아독존적 사고의 결과물이 아니며 한갖 미학적 놀이는 더더구나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작가의 파편 모음과 같은 소설구성은 인간경험이 미완성적이고 파편적이지만 거기에는 중심점이 있다는 작가의 철학을 대변한다고 한다.
해리즈는 이와같은 해석을 "high lannguage"로 귀속시킨다. 그도 그럴것이 소설안에는 실제로 해리즈가 바라는 작가의 의도가 쓰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턴이 매주 썼던 설교문의 대부분에서 이용되는 도덕률의 문제는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우화와는 직접적 관끼가 없음을 볼때 성직자로서의 스턴의 신앙과 신념의 깊이가 어느 정도의 것이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 볼 수는 있다.
18세기 영국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트리스트람 샌디』를 고찰하고 있는 본 연구에서 여성문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18세기 후반인 이시점에 오면 울스튼 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에 의해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공인되었었고, 밀(John Stuart Mill)같은 지식인의 동의도 공개되었던 때였다. 또한 1762년에 출판된 『밀레니엄 홀 이야기』(A Description of Millenium Hall)에 보면 여성들만이 자급자족하며 남자들에게서 독립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소설의 작가 스코트(Sarah Scott)도 실제 생활에서 이혼을 하고 독립된 사생활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말하면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의 루커스(Charlotte Lucas)처럼 마음에 들지 않은 남자지만 생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게 시집을 가야 했던 시절은 지났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18세기 후반에 소설을 썼던 스턴이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간과할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즉 절대적인 남자중심의 사회에서 여자라는 "타자"가 전혀 수용되지 못하는 문화의 경직성은 하나의 허구에서도 절대적인 일직선상의 이야기진행을 거부한 스턴의 사고체계에 위배되는 것이였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의 남성인물을 능가하는 실질적 능력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지적한 바대로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은 유아독존적 무능의 표상들이다. 거기에 비해 트리스트람의 어머니 샌디부인(Mrs. Shandy)을 보자. 창문의 도르래가 토비아저씨 전쟁놀이에 동원되는 바람에 그 창문이 떨어지고 거기에서 소변을 보던 어린 트리스트람의 성기가 잘려나가는 사고가 생겼다. 이에 아버지 월터는 할례에 관한 스펜서의 저서를 들여다보고만 있는데 반해 어머니 샌디여사는 재빨리 치료를 한다. 엘러스(Leigh Ehlers)는 논문 "Mrs. Shandy's 'Lint and Basilicon': The Importance of Women in Tristram Shandy"에서 샌디집안의 남자들은 남·녀가 결합해서 꾸려나가야 할 결혼생활에서 여자를 제외시키려고 함으로써 스스로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또 비슷한 맥락에서 오스토비크(Helen Ostovich)도 "Reader as Hobby-horse in Tristram Shandy"에서 스턴의 여성들은 뒤죽박죽된 세계에서 정상적인 사고력을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샌디집안의 상황에서 여자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집안을 이끌어가야 할 아버지 월터와 토비아저씨의 비현실적인 태도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들은 각기의 자기충만 hobby-horse에 빠져서 실제 생활인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트리스트라포에디아(Tristrapoedia)에 의해서 아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월터지만 아들의 성장이 그것을 앞지르기 때문에 무용하게 된다든지 잔디밭에 전쟁모형을 만드는 것을 "위대한 목적"으로 삼고 있는 토비아저씨는 유아독존적 자기충만에서만 삶을 유지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이러한 샌디남성들에 비해 이 집안의 여자인물들은 인간개인의 사회적 또는 도덕적 개성에 의해서 각기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주위와 관계를 유지해가는 사람들이다. 다시말하면 자기충만져 자아를 주장하기보다는 타자와의 관계를 유지·창조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sex)의 문제가 중심이 된다. 실제로 샌디 여성들이 공유하는 것은 성적인 적극성이다. 샌디부인, 워드먼 과부, 다이너 고모(Aunt Dinah), 하녀들, 그리고 제니(Jenny)와 나네트(Nannette)까지, 그리고 수녀들도 직접적인 행사는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언어에서 충분한 관심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 여성들은 상당한 재치까지 보인다. 이 소설의 첫장면에서 샌디부인이 부부관계 도중에 "참, 여보 시계 감는 것 잊지 않았어요?"라고 엉뚱한 듯한 질문을 던지고 남편 월터는 "이 세상이 생긴 이래로 여자치고 그런 어리석은 질문으로 남자를 방해해 봤을까? (Did ever woman,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interrupt a man with such a silly question?)(I,1.5)"라고 한다. 워크(James A. Work)를 위시한 1950년대 스턴 비평가들은 샌디부인을 두고 스턴인물중 가장 개성없고 무능하며 할 말이 없는 여자로 치부를 했었다(Work I vi- I vii). 그러나 최근 페미니스트들을 위시한 학자들이 월터의 생각과 스턴의 생각을 구분하고 샌디부인은 월터의 자기중심적 무능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는 지적을 한다. 월터는 아내를 매력없고 피동적이고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산파선택에 대한 상식이 있는 반면 남편이 "과학적"이라고 데리고 온 슬로프 의사(Dr. S1op)의 어이없는 실수로 트리스트람의 코가 납작하게 되고, 그녀가 육아에 있어서 엄마 역할을 해내는데 비해 월터의 육아용 저서 『트리스트라포에디아』는 완성을 못 보는 등, 스턴은 월터를 끊임없이 아내와 비교시키면서 남편으로서의 무능함을 드러낸다. 그녀는 요릭과 함께 작가가 스턴집안 남자들의 어리석음을 재는 기준이요 가치체계이다(뉴 47-48).
샌디부인을 위시한 이 소설의 여성인물들이 성욕에 대해 솔직하다고 위에서 지적한 바, 그것은 그들의 포용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들은 샌디남자득이 부리는 여자에 대한 허세, 소유욕, 권리, 정절의 강요등을 천연덕스럽게 받아드린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의 성무능을 감싸주기도 한다. 다음의 예를 보자.
-사랑하는 제니, 세상사람들에게 내대신 말해줘. 내가 어느 고난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말이야. 그것은 남성에 대한 자긍심을 느껴야 할 남자로서 내가 겪은 고난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였지-
'그것으로 족해요, 그대는 말했지, 내가 성공하끼 못한것을 반영하듯, 손에 가터를 들고 서있는데, 내게 가까이 오며, - '그것으로 줄해요, 트리스트람, 난 만족해요, 이 말을 내귀에 속삭이며, 그대는 말했지,**** ** **** *** ******; _ **** ** **** _다른 남자였으면 가운데로 주저앉았을 것이다(Ⅶ.29.517-18)
별표속에서 제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관계없이 성적으로 무능력한 트리스트람의 "고난"을 포용해주는 제니임에는 틀림없다.
지금까지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람 샌디』가 18세기 문학·철학 그리고 역사의 반응, 반향, 굴절의 소산이였음을 포우프의 『인간에 관한 에세이』, 감상주의의 문제, 파편으로 남은 고대유물과 의도적인 미완성의 관계, 그리고 여성위치의 변화등의 관점에서 고찰했다. 분명한 사실은 스턴은 말년에 병들고 외로운 상태에 있었다. 작가 지망생 트리스트람이 인간됨의 허무함과 고독을 자신의 성적무능력을 만족으로 감싸준 제니에게 호소했듯이 작가 성직자 스턴도 결국은 인간적인 호소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러가는 구려: 내가 추적해보는 편지하나하나가 인생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의 펜을 따라오는지 말해주는 구료; 내사랑하는 제니여, 그대 목에 걸려있는 루비보다 귀한 인생의 매일매일과 시간시간들이 바람많은 날에 가벼이 흘러가는 구름처럼 우리 머리위로 날아가고 있오.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모든것이 재촉을 하오. 그대는 그 머릿단을 꼬고 있는데. 아! 회색빛으로 변하는 구료. 안녕을 고하기위해 그대 손에 키스하는 매순간과 다음에 오는 작별들은 우리에게 금방 다가올 저 영원한 고별의 전주곡이라오.
-하늘이 우리 두사람에게 은총을 베풀기를!(Ⅸ, 8, 610-11)
--------------------------------------------------------------------------------
참고문헌
강대건 송락헌 공역 18세기 영시 서울. 탐구당 1976.
Booth Wayne C . In Self-conscious Narration in Comic Fiction before tributry Shand-PMLA 67 1952 : 163-85.
Brown R. C. Laursnce Steme and Virginia Woolfe Univ of Kansas Review 26 1959: 153-59.
Ehlers, Leigh. Mrs . Shandy's list & Basilicon South Atlantic Review 46 1981: 61-75
Howes, Alan B . Sterne The Critical Heritage London Routledge 1974.
Lockridge, Ernest H . " A Vision of the Sentimental Absurd: Sterne and Camus" Sewanee Review 72 1964: 652-67.
Miller, Hillis . " Narrative Middles A Preliminary Outline " Genre 11, 1978:375-87
New, Melvyn . Tristram Shandy A Book for Free Spirits. New York Twayne 1994,
Ostovich, Helen. Reader as Hobby Horse in Tristram Shandy Philological Quarterly 68 1989: 325-42.
Pope, Alexander . " An Essay on Man " Alexander Pope: Selected Poetry and Prose, ed. Wayne Booth. New York Holt, Reinhart and Winston 1951.
Reed, Herbert. The Contrary Experience. London Faber & Faber 1963.
Scott, Sarah . A Description of Mllenium Hall. New York Bookman Associates 1955.
Steme, Laurence . The Life and Opinions of Tristram Shandy Gentleman, ed. James Work. New York Odyssey 1940.
Thomas, Calvin. Tristram Shandy's consent to Incompleteness Discourse, Disavowal, Disruption Literature and Psychology 36 1990. 44-62.
Work, James A. " ntroduction " to Tristram Shandy New York Odyssey 1940.
'퍼온~사유..! > 사유와 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 인문학의 현실과 가능성 (0) | 2008.05.26 |
---|---|
[=] 사무엘 베케트의 『놀이의 끝Fin de partie』의 극작법 전략 (0) | 2008.05.12 |
[ㅍ] K. Mannheim의 思惟의 存在拘束性 (0) | 2008.05.09 |
[ㅍ] 상생과 순환의 시적 공간-서정주 (0) | 2008.05.08 |
[ㅍ] 창의성에 대한 다원적 접근 (0) | 2008.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