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철학논의
20030234 박지상
<차례>
A. 서론
B. 본론
1. 바둑판을 이루는 것 -왜 이것들은 필수적인가?
1.1 결론 및 요약
2. 이미지
3. 치환가능성
3.1 좌표개념에서의 역선개념
3.11 역선개념의 확장
3.12 역선 개념의 예시
3.2 Zero Sum
3.3 과학철학에서의 시도
3.31 exampler
3.32 Paradigm
3.33 패러다임의 재생산 방법
3.4 우주론
3.5 무극과 태극
3.6 정보이론
4. 바둑의 기원
5. 훈수꾼
6. 바둑 '경기'에서의 시간
7. 시간의 흐름과 바둑의 규칙에 대한 이해
C. 결론 및 후기
D. 참고문헌
A. 서론
바둑은 여러 가지 구성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한 그에 상응하는 부차적인 조건들이 존재하여,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 '한판의 바둑'을 이룸에는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면, 한 개인의 '신체적 상황'은 '정신적 판단'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며, 이는 굳이 실례를 찾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쉽게 수긍하거나, 언어적 사례 - 신체 상태 조절 - 를 통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자는 '바둑에서 필수적인 조건들' - 어떠한 매체를 통해서든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 만을 통해 바둑을 논의하고자 하며, 때문에 다소 사변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거라 여겨진다. 하지만 바둑을 조금만 아는 사람들이 증언한 바 있듯이, 바둑판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때문에 사변적으로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필자의 사유가 사변적인 특성을 가져서이지, 바둑을 이루는 몇몇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결과'이지는 않을 것이다.
B. 본론
1. 바둑판을 이루는 것 -왜 이것들은 필수적인가?
바둑의 구성원 : 바둑알, 바둑판, 규칙
바둑알의 존재의의 : 바둑알에 의한 아, 피아, 공란의 표시
바둑판의 구성 : 19*19
바둑의 그 어떤 구성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로 바둑 전체를 포괄하는 이론을 구성할 수 없다. 규칙은 반드시 바둑알의 특징을 포괄해야 하며, 바둑판의 구성에 종속된다.
우리는 각기 다른 바둑알을 하나의 돌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색깔이 같은 것들로 인해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위치'를 부여하여 다른 물건으로 여긴다. 실제로 그것은 다른 것이다.
기수법에서는 필연적으로 0과 1의 존재를 가정한다. 0은 0과 다른 것이며, 1은 1과 같은 것이다. 같고 다른 것의 존재로 모든 수가 나온다. 하지만 바둑은 그러한가? 하나의 바둑알이 다른 바둑알을 창조하는가? 0개의 바둑알과 1개의 바둑알이 다른 모든 바둑알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거기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지시체를 표상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시체를 표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둑을 통해 바둑판에서의 지시체를 표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바둑알을 바둑판 위에 놓고 그것을 표상으로서 여긴다. 우리가 여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최소한의 공간과 최소한의 물체를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안에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위를 통해 우리는 바둑은 필연적으로 공간을 요구함을 알게 되었다.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는 바둑은 바둑일 수 없다. 왜냐하면 바둑알은 다른 바둑알에 의해 포함이 될 경우 그것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혹은 공간에 상응하는 어떤 개념을 창조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사로잡힘의 구분이 애매모호할 경우, 사로잡히는 것이 사로잡히는 것이 되지 않고, 아와 피아의 구분이 모호해지게 되면서 바둑판은 혼란스러워진다.
우리는 여기서 '바둑이 진정 공간을 가정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봐야 한다. 바둑판은 2차원 공간 안에 있으나, 그것이 논리로서만 존재할 수는 없는가? 바둑이 이성적 판단으로서의 위치를 점하지 않고, 필연적으로 공간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종합 판단일 수밖에 없는가?
질문을 바꿔보자. 바둑은 선천적이며 종합적일 수 있는가? 바둑이 선천적이면서 종합적이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우리에게 선천적인 바둑은 어떤 부분인가? 우리에게 모든 구성원이 선천적이지는 않다. 우리에게 선천적인 것은 오직 무엇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좌표개념이 없는 바둑은 있을 수 없다. 좌표개념은 선험적인가? 좌표개념을 우리가 선험적으로 경험했다는 이야기는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 가운데 어떤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기본적인 상황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선험으로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들의 선험은 '어떤 식으로든 지의 상황'을 가정한다. 때문에 그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선험은 제거적 유물론자의 입장에서의 인간적 경험이다. 그것은 유전에 의해 '증가'될 수 있다. 그것은 유전자의 영향이다.
존재하지 않던 뇌세포의 영향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경험한 것인가, 아니면 진화한 것인가, 아니면 어떤 것인가? 그들의 감관의 확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 확장은 이성적인 것인가? 어떠한 상태를 지나면 그들은 '이성적'이 되는가? 혹은 '다른 차원'과의 교류가 가능한가? 선험적 세계는 그 이전에는 지각할 수 없는 개념인가?
어찌되었든 바둑이 후천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바둑의 구성원들이 후천적으로만 인식된다는 보장이 없다. 여기서 색깔은 '지각'될 수 있는 다른 두 가지가 아니라, '다른 두 가지'이다. 우리가 다름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선천적이다.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직관에 의한 분석인가? - 차이는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혹은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았을 경우 생기는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관'에 의해 차이를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직관에 의해서만 이룩되어지는 것인가? 언어철학의 모든 것들은 경험에서 오는 것인가? 경험하지 않은 것들은 철학할 수 없는가? 자, 그렇다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구분법을 배우지 않는 이상, 그것은 선험적이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경험을 구분하지 않는다. 구분법은 항시 우리에게 존재한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확정하는가? 직관에 의해서 구분되어진 것들이 '이성적 판단'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정하는가? 자, 우리는 여기서 '어떤 것이 구분'이고, '어떤 것이 차이'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우선 형태적으로 다른 것을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각능력을 가정하며, 이것은 선험이나 후천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다. 때문에 위와 같은 관점에서 이것은 선험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법칙을 찾아내는 과정을 포퍼의 관점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고 한다면, 오직 수학과 철학만이 형식적, 혹은 내용적으로 이성적이라면, 삼각형과 사각형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그것의 형태를 떠올리기 때문인가? 우리는 아직까지 삼각형과 사각형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삼각형과 사각형이 가지는 특성을 알고 있다. 아니, 이러한 것들은 이미 선험적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러한가? 우리는 '점'을 지각할 수 있는가? 우리가 집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느 한 공간에 '점'을 지각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점이라는 것을 무한히 작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우리는 점을 보지는 못했다. 때문에 지각하지 않은 것을 '상상'한 후에 생겨난 개념이다. 하지만 이 상상은 선험적인가? 우리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는가? 우리는 '속성'을 제거하는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그래야만 점을 떠올릴 수 있다. 공간 안에서 어떠한 물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알아서 조합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이 선험적이지 않다고 할 근거는 없다. 때문에 좌표는 선험적이며 종합적이다. 우리는 선을 그을 수 있고, 그어진 선을 조합할 수 있다. 조합은 선험의 산물이다. 때문에 선험적이고 종합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바둑의 창시 과정을 다시 한번 복기할 필요가 있다. 바둑의 창시가 판단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할 필요가 있다. 바둑의 성질이 위와 같다고 할 수는 있으나, 그 존재 자체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삼각형의 내각이 180도인 것을 선험적으로 알게 되었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계기가 선험적이거나 경험적인 것을 따질 이유는 없다. 확실한 것은 그것의 창안 과정에 선험적 요인들이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것이 '의도'되고,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1.1 우리는 1번에서 바둑의 존재가 '공간'을 필연적으로 가정해야 한다는데 도달하였다. 여기서의 선험성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가정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존재가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즉, 우리는 그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으나' 즉각적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발견'은 항시 '사건'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사건이 없기 때문에, '선험성'은 '교육'에 의해서 개발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둑판의 공간'은 교육에 의해서 선험성이 개발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둑판'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이미지
우리는 앞서 바둑판에서 좌표개념을 없앨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만약 좌표개념을 완전히 제거해버릴 수 있다면, '바둑'을 좌표로 인식하지 않고 다른 차원에서 인식할 수 있겠으나, 아직까지 그런 방법은 가능한 것 같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바둑판을 바라본다. 이 바둑판은 눈에 보이든, 머리 속에 떠오르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존재하는 바둑판이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가 된다. '바둑판'이 존재하고, '좌표'가 존재한다고 해서, '바둑알의 분포'는 '이해'된다거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현상을 받아들이는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것은 생득적인 것과, 이론이나 실습을 통해 얻은 것이 있을 것이다.
이론이나 실습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생득적인 것에 대해 논해보려 한다.
우리가 바둑을 시각정보에 의존하여 받아들인다고 가정해보자. 이 가정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필요하게 되는 요소들'을 가정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 왜냐하면, 눈이 없다면 쌍방이 '바둑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혹은 누군가가 '좌표'를 통해 알려줘야 하는데, 대체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순간적으로 놓여진 돌'과 '지금까지 놓여진 돌'이 전부다. 정보를 n차까지 쌓아올려진 것에, 하나의 수를 놓음으로써 n+1차의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인간은 '이미지를 주어진 정보를 쌓아가면서 만들어간다' - 결과적으로 중요한 것은 'n차'에서 상대방의 '돌의 위치'이고, 이것이 '주변의 돌들'과 결부되어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가게 된다. 때문에 '돌의 위치'가 '절대적 조건'이 됨은 두말할 것도 없다 - 이전과 지금을 구분하는 것은 'n+1번째 놓여진 돌'인 것이다. 즉, 바둑판에 놓여진 무수한 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 그리 함으로써 재구성해야 하며, 이는 이론적 배경, 혹은 경험적 배경을 필요로 한다 ― 시간적으로 순차적으로 진행한다면 '그럴 위험'은 없어진다. 다만 순서를 '기억'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습관에 의해 좌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중요해지는 것은 '놓여진 돌'이 어떻게 다른 돌들과 연결이 되느냐는 것이고, 아무런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vision brain cells'에 의하여 '다음에 쳐다볼 지점'이 결정 나게 된다 ― 그리고 아마도 쳐다봄을 통해 '재구성된 바둑판'을 통해 '판단'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단자들이나, 심지어 바둑 격언만이라도 들은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그들이 비록 'cortex'의 영향을 받는다 할지라도 - cortex는 뇌와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나간다 - 그들의 판단은 '이미지'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격언을 들은 사람들은 격언들을 통해 '분석'을 하게 될 것이고, 교육을 통해 바둑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거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초심자들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생득적으로, 혹은 다른 경험들을 통해 습득한 것들로 바둑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프로 바둑기사들처럼 되기 위해서는 '정석을 통한 인식의 확장 및 고정'을 겪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3. 치환가능성
여기서부터 우리는 '바둑을 치환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바둑판은 '바둑판 자체로 이해하기'에는 '알고리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우리는 바둑판의 모든 가짓수를 '분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양자컴퓨터에 의한 분석이 어떤 해법을 제공할지는 불분명한 상황이다 - 양자컴퓨터는 아직 개발조차 되지 않았으므로, 개발되지 않은 기술을 '가정'하고, 그것을 통해 '해결 가능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지적 오만이며, 사기'이다. 그 이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꾸준히 노력해야 하며, 그것이 지식인의 '의무'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양한 개념들을 통하여 바둑을 '설명해보고자' 할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바둑'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 노력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isomorphism'이 적용될 수 있는 경우들을 '분석해보고자'한다. 비슷하게 사용되는 개념들을 통해, 즉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카드들을 통해 '바둑'을 분석해보려는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선험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지속해보려고 한다. 선험적이지 않은 것들은 '바둑'과 치환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 결과적으로 모든 치환 가능한 것들은 '선험적이기 때문에' 치환 가능한 것이다.
3.1 좌표개념에서의 역선개념
좌표는 '집중'이다. 선과 선이 만나는, 사실상의 역선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바둑판을 힘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장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바둑판'의 '19줄'은 역선이라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역선의 강도가 서로가 어느 위치에서나 같고, 어떤 바둑알에서도 동등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이 역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우습지 않겠는가? 이때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점은 '역선 개념'을 바둑판에서 적용함에 있어서, '역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점이다. 이미 집이 난 경우에, 역선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스럽지 않은가? 이런 경우, 우리는 '집'을 도체라고 여길 수 있다. '착수된 돌 하나'를 charge라고 할 경우, 집을 도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집'의 둘레에서 나오는 선들은 모두 '어떤 집'에서 나온 역선이다. 그 역선들은 상대방의 '집'에 의해서 가로막힐 수 있고, 뚫려진 공간을 점령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양성자든, 음전하든, 혹은 양전하든 음전하든, 물리적으로 '중성'이 되게 하는 것이 '정석'이며, 중성에서 어긋나면서 '이기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점, 역선 개념을 통해 '확장'이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3.11 역선개념의 확장
앞서 이야기한 '역선 개념의 적용'은 다소 의문을 자아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당한 구실을 맞추어 이야기하는 듯 하고, 부분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몇몇 언어들을 일치시킴으로써 구색을 맞춰가는 듯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역선 개념'이 좀 더 현실적인 개념들, 그러니까 띄엄띄엄 있는 바둑알을 설명한다거나, 확장가능성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면 충분한 개연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3.12 역선 개념의 예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돌들의 역선이 많을수록' 그 돌들은 살 가능성이 크다. 이것을 수치적으로 나타내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많고, 경향성 정도로 받아들여야 하는 수준이라 여겨진다. 또한 '역선'이 막히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경우에는 '역선이 약해진다.'고 봐야 마땅하다. 그러함으로 인해 '바둑판은 분화되고, 두개의 세력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 '바둑판 자체'를 '세계'로 보고, '바둑알'에 의해 역선이 휘어지거나 '중화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돌의 위치'에 '상대방'의 역선이 모이게 되는 지점에 놓아서는 안 되며, 부득이하게 놔야 할 경우는 '상대방이 집을 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이다.
3.2 Zero Sum
바둑판은 zero sum을 충분히 이행하고 있는 듯 하다. 이것은 천문현상의 기술이 한정적이거나, 세계 자체를 유한한 것으로 보았거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을 때 - 이 중에서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 zero sum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 중국의 땅덩어리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 - 만리장성에 의해 닫힌 국경 - 등을 거론하는 것이 더 현실성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바둑판이 zero sum임을 뒷받침할 수 없다. 2차원에서 많은 것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홀로그램 우주론과 더불어, 바둑판이 '2차원'만을 담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를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맑스가 '이윤을 추구하지 못하는 부르주아는 사멸한다.'고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 바둑판에서 '집을 더 내지 못하는 경우'는 '종국'이며, 이윤을 '집'이라 생각한다면 의미상 일치하게 된다. 즉, 불변자본과 노동자의 시간, 그리고 이윤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고 할 때, 바둑에서는 돌의 위치와 불변자본(지금까지 놓여진 돌), 그리고 '집'으로 '한 수'가 결정된다.
3.3 과학철학에서의 시도
3.31 exampler
과학철학에서 과학자들이 문제들을 경험함으로써 '통약 가능하지 않는 언어를 통약하려고 노력하듯이, 바둑도 자연을 거의 비슷하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라도, 정석이나 수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지는 않은가? 실례를 들어보면, 대다수의 과학도들은 '문제'를 풀어야만 한다. 문제를 많이 풀고 적게 풀고의 문제를 떠나서, 문제를 풀지 않는 과학도란 없다. (우리들이 아무리 문제를 풀지 않아도, '시험'에서 문제를 풀게 되며, 시험을 치지 않더라도,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을 더 이해하게 되므로 - 즉 벽을 만났을 때, 벽을 뛰어넘으면 '자연'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므로, 과학자들에게 '문제풀이'란 하나의 전통이다. 이것이 수수께끼이든, 문제이든, 논의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므로, 의미를 한정하지는 않겠다) 또한 바둑교실에서는 '정석'을 가르쳐주고, 사활'문제'를 알려주며, 그것에 대해 서로 토론을 하고, 실전에 응용해보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과학'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지 않은가? 바둑에서도 '문제'란 존재하며, 그 문제를 풀어야 '바둑'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경향성이다. n문제 푼 사람과 n+1문제 푼 사람을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은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연습문제를 많이 풀었다고 해서 자연을 더 많이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떻게 풀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필자는 이 상황에서 - '역사'를 들먹거리며 - 도리어 '고대사에서 한국에서는 이런 역사적 전통이 부재했는가?'라고 묻고 싶은 정도이다. 아니라면, '바둑 교육'의 형태가 '지금의 형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요인이 있는지 묻고 싶은 정도이다.
3.32 Paradigm
우리는 바둑에서도 패러다임을 논할 수 있는데, 쿤이 과학에서의 '패러다임'을 논할 때 사용한 세 가지 부류의 패러다임 - masterman에게 비판적 옹호를 받게 되어, 그녀가 줄이기로는 사회학적 패러다임, 구조적 패러다임,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적 패러다임이 있는 - 을 통해, '바둑에서의 패러다임'을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하려 하며, 어떤 방향이 합리적인지 결론지어보려 한다. - Masterman이 명명한 바 있는 메타적 패러다임은 바둑에서는 어떠한 양상을 지니고 있을까? 혹은 사회학적 패러다임은? 아니면 구조적 패러다임은? - 하지만 Masterman이 제시한 바 있듯이, 쿤의 메타 패러다임은 결과적으로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바둑에서 철학이 존재한다고 하여서, 패러다임에 대한 철학적 면모가 '보여야만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사회학적, 혹은 구조적 패러다임은 어떠한가? 하지만 바둑에서는 사회학적 패러다임이 구조적 패러다임에 뒤따르는 것 같이 보인다. 바둑에서는 '승률'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때문인데, 높은 승률이나 의외로 높은 승률은 '방법론적 아노말리의 증대'를 꾀하게 된다. 이것은 과학자 집단에서도 그러지 않은가? 반증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해보이고, 그것을 따르면 많은 이득이 있다면, 누가 그 패러다임을 버리려 들겠는가?
때문에 '바둑 연구자' 역시 그러한 '입장'에 서서 바둑을 연구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란, 구조물을 만들고 그것을 실제와 비교하며, 그것을 통해 실험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바둑에서는 실험이 곧 승부이며, 때문에 우리는 경기를 통해 그것을 확인한다. 즉, 바둑 연구자들의 패러다임과 기자들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다를 수는 없으며, 그들 사이에 교류가 존재해야지 상승효과를 낼 수 있고, 바둑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끌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3.33 패러다임의 재생산 방법
그렇다면 우리는 패러다임을 재생산하는 방법에 유의해야 한다. 바둑계는 어떤 방식으로 패러다임을 확대 재생산하는가? 라카토슈의 방법대로라면, 코어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주변부를 어떻게 확장해나가고 있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바둑학원에서 가르치는 방법을 통해 '기자'를 생산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겠다. 바둑학원에서는 포석이나 수읽기와 같은 바둑이론과, 격언, 그리고 실기를 통한 학습을 병행한다. 이론의 학습과 실습은 과학자 집단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 바 있으므로 - 사실상 이것이 패러다임 재생산의 중추일 것이다,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뤄야 할 부분은 격언이다.
우선 격언은 대체적으로 '유형에 대한 조언'과 '기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논하고 있는 듯 하다. '유형에 대한 조언'으로는 '마늘모 붙임에는 세우라'라든가, '세 칸에 침입 있다'와 같은 것들이 있겠고, '기자로서의 자세'로는 '수순의 주의하라'나, '묘수와 기수와 속임수는 다르다'와 같은 것들이 있겠다 ― (필자가 바둑에 대해 무지하니, 이런데서 실수가 있을 터이니, 잘못된 점이 있다면 즉각 비판해주길 바란다) 즉, 바둑에서의 격언은 '집의 삶'에 대한 것과 '기자의 자세'에 대한 것이다. '삶'은 바둑에서 중요한 것이고, 어쩌면 목적일지도 모르므로, 이에 대해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필자가 아는 한도 내에서, 정상과학에서 어느 이론을 살펴보더라도 '과학자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과학자들의 술회나, 전기이거나, 과학철학자들의 이야기들인 것이다. 즉, 바둑은 과학자들이 다루지 않는 '주체의 태도'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바둑이라도 두는 것이 낫다'고 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것이지 않겠는가?
3.4 우주론
홀로그램 우주는 낮은 차원이 고차원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바둑 또한 그러할 수 있는가? 바둑이 2차원 정보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 논해야 하며, 그것이 오직 2차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논의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바둑이 진정으로 2차원적인지 논해야 한다. 바둑이 돌을 따먹는 행위가 오직 2차원적으로 기술되는 개념인지 물어봐야 한다. 혹은 바둑에서의 차원이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물어봐야 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차원은 '자유도'이며, 자유도는 '돌이 착수될 수 있는 공간의 자유도'로 정의될 것이다. '돌'은 공간 안에 주어진 것이며, 때문에 '대체적으로' 바둑은 2차원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바둑판이 담고 있는 내용은 오직 2차원적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인가?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바둑판을 2차원 계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 정보는 2차원에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집을 자신의 집과 상대방의 집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으며 - 이는 바둑판이 흑백으로 번갈아가면서 두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한번 오가는 것을 주기로 생각한다면, 한 주기 내에서 돌은 쌍생성하게 된다 ― 어느 입장에서는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어느 입장에서는 타인의 집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집 개념은 state가 변화함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다. 확정된 집은 오직 '타인이 어떻게 하더라도 상태가 변화할 수 없는 집'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공 상태가 어떻게 한 상태로 '확정'되는지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물리 이론은 여러 가지 상태의 '진공 상태'를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데, 바둑도 그러하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것은 이와 기, 혹은 흑과 백 등의 이원론적 구분에서 '어느 상태'로 확정되어간다. 확정된 집은 확정된 상태와 유사하다. 그리고 진공은 착수되지 않은 '지점'으로 여겨도 무방해 보인다.
때문에 바둑판의 계는 2차원이지만, 바둑판은 2차원 정보만을 담고 있지 않다. 마치 홀로그램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3.5 무극과 태극
우리가 음양이기론으로 바둑을 이해하고자 할 때, 한 가지 중점적으로 다뤄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우주 창조에 대한 이야기'인데, 현대과학의 상당 부분은 '음양, 그리고 무극과 태극'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 정확한 기술은 배제하더라도, 그것이 담고자 하는 형태적 특성은 동일하다.
우리는 우주가 '진짜 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짜 진공'에서 온다는 사실을 안다. 그 '진공'은 에너지를 가져야 하며, 에너지가 입자를 만든다. 양자적 섭동은 항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때문에 호킹은 '유클리드 기하학'은 항시 존재하며, 그 존재 하에서 '에너지가 존재'하고 - 어쩌면 이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끈이라거나, 인스탄톤인것 - 거기서 만물이 나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나? 그럼 진짜 '진공'은 무엇이고, '무'는 무엇이며, '에너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그러한 것이 존재하는가? 그러한 것들은 분명 물리학의 영역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철학적 사유라는, 특이점을 넘어버린 영역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것들로 바둑을 논할 수 있겠는가? 바둑알 하나가 인스탄톤이라고 가정하고, 서로가 우주와 우주라고 가정하면, 문제는 오히려 증폭된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 능력을 넘어선 것이고, 그것을 '비유'라고 한정지어버리면, 논리적이지 않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우리 우주'안의 어떤 것에 치환시켜야 한다.(이는 바둑이 우리의 지각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았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바둑알 하나하나가 '에너지'를 갖고, '정보'를 갖는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논의가 지속될 수 없다. 바둑판은 세계이고, 세계는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면서 창조된다. 창조된 세계에서 대칭은 깨지게 된다. 깨진 대칭은 에너지가 남고, 입자가 생성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동양철학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들을 '무극과 태극'으로 받아넘길 것이다. 무극과 태극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무극은 세계의 시초이며, 모든 것이 정지해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변화하게 되면 극이 생기게 되는데, 무극에 극이 생긴 것을 태극이라 하며, 태극은 무극이 '변화'한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운동'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세계관은 '우주'가 정태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서양적 세계관에 비교했을 때, 다소 다른 양상임을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우주는 항상 '움직이는 것'이며, 모든 것은 기의 움직임일 뿐이다 -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다른 표현'일지라도 옳은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우리의 몸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모든 물질이 바뀌게 된다 ― 이러한 논의는 '최한기의 기론'에서도 논하고 있는 것으로, 동양철학이 '사상적으로 뒤떨어진 것'이라는 우리네들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바둑알의 착수는 '중심'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바둑판의 중심'이 천원점이고, 평균적으로 '바둑판의 중심'은 천원점이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바둑판의 실제 중심은 천원'인가? 필자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한 판의 바둑에서, '착수'함으로써 바둑알들의 평균적 배치가 천원이 아니도록 움직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지며, 이러한 '변화'는 실상 '무극에서 태극'으로 이동해가는 과정과 흡사하다고 여겨진다.
3.6 정보이론
첫째로, 바둑에서 돌을 따먹는 행위는 블랙홀이 정보를 흡수하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바둑알'은 동일한 정보를 가진 것들이고, 때문에 정보의 재생과 같은 여러 가지 법칙들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이는 블랙홀에 대한 이해 - '돌을 따내는 것은 정보의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의 정보의 변화' - 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좌표에 착수된 어느 색깔의 돌'이 아니라, '누구에게 잡아먹힌 돌'의 식이다. 이러한 이해는 바둑판을 퍼텐셜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바둑판의 기하학을 고려하고, 그것들에 의한 '필연적 결과물'이라 보는 것이 옳다는데 일조한다.
둘째로, 착수된 바둑알은 좌표를 점하기 때문에 동일한 정보가 동일한 좌표에 대응될 수 없다. 즉, 동일한 정보가 중첩될 수 없다. 유일하게 위치가 중첩될 수 있는 경우는 '시간선 상에서 중첩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는 유일하게 패싸움 등에서 가능하다.
4. 바둑의 기원
바둑의 기원은 크게 두 가지 이론 - 천체관측설과 요순창시설이 있다. 바둑 기원의 설명에 따르면, 요순창시설은 ''요순이교우자야(堯舜以敎愚子也)'라고 하며, 무엇을 가르치고자 했는지는 뚜렷치 않으나 - 그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 음양과 팔괘는 복희씨가 창제하였다고 전해지며, 복희씨는 요순보다 앞선다고 서술되고 있는 만큼, 요순 역시 음양과 팔괘에 관련이 없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요순창시설이 '허구'일지라도, 오히려 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는 '천체관측설'이 있으므로, 바둑의 기원에 대하여 '음양'의 영향력이 있을 거라는 추측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5. 훈수꾼
훈수꾼이 비록 '역학적 평형상태'에 악영향을 끼치더라도, 그 존재는 게임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특이한 존재이다. 훈수꾼은 '바둑판'이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모든 공개된 게임은 '훈수꾼'이 존재한다. 즉, 바둑의 '공개성'에서 훈수꾼의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한다 ― 공개는 필연적으로 '참여자'와 '참관자' 사이의 '역할'을 획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에서의 훈수꾼과 '지도바둑' 등과 같은 '사적 목적을 지니지 않은 경우'에는 훈수꾼의 존재가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많은 이들 앞에서 '지도바둑'을 두는 경우, 참관자 모두가 '훈수꾼'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많은 훈수꾼은 사람 수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을 꺼낼 것이고, 그들 사이의 상관관계 때문에 혼자서는 이야기해줄 수 없는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다. 즉, 21세기의 훈수꾼은 '지도'적 관점에서 긍정적이다 - 훈수꾼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6. 바둑 '경기'에서의 시간
우리는 시간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데 - 때문에 바둑이 2차원이더라도 바둑 경기는 3차원이여야 한다. 고로 N차원이라면 경기는 N+1차원이여야 한다 ― 그렇다면 장고는 영향력이 큰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우리는 '이 상황이 가장 중요한 상황이라고 가정'하지는 않는가? 결국 시간에 대한 '논의'는 경기에 대한 논의보다 선행한다. 여기서 우리는 '신입사원 고르기'와 같은 형태의 수학적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는데, 만약 그와 비슷하다고 가정한다면, 바둑에서는 어떤 '조건'들을 다루어야 하겠고, 그 조건들은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료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수많은 데이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데이터는 시간분배 또한 가져야 한다 ― 하지만 이에 대한 데이터는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있어온 바둑 경기에 비해서,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도' 적은 것이다 - 대략적으로 바둑TV에서 방송된 기보들 정도만이 '실질적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오직 기보만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의 논의를 더 진행할 수는 없다고 본다. 물론 여기서는 결정적 '실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을 알아본 순간' 끝이 나기 때문이다.
7. 시간의 흐름과 바둑의 규칙에 대한 이해
바둑은 기본적으로 순차적이다. 순차적이라 보는 이유는 '연속적으로' 시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우리가 바둑을 순차적으로 보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종국으로 갈수록 '수'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혹은 기보만 보면 복기할 수 있어서? - 시간상으로 '앞에 행한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시간적으로 일률적이다. 우리가 바둑의 RULE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바둑의 법칙들은 바둑을 재구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 이는 마치 고고학자들이 '지식을 동원하여 발굴된 것들을 새로운 지식으로 만드는 과정과 동일하다'.
C. 결론 및 후기
필자는 이 논의를 마치면서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바둑을 철학적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했으며, 바둑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번학기에 바둑철학을 수강하면서, 바둑에 대해 이해하려고 한 것은 '몇 판의 바둑'과 '바둑 개론서 서너 권'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의 고집 덕분에 철학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고, 자기 자신을 돌이켜볼 수 있게 되었지만, 명색이 바둑철학인데, 철학만 개진하고 바둑 그 자체로서는 진일보하지 못하여 참으로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필자는 이 논의에서 바둑판을 이루는 것들과 그것들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 논의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은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 가능한 한 최대히 자세하게 쓰려고 노력했으나, 그 근거들이 명확하지 않아 '제시하고자 한 바'를 뚜렷하게 전달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논의가 이후에 있을 여러 논의들 - 그것이 본인이든 다른 사람이든 - 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며,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D. 참고문헌
http://web.mit.edu/newsoffice/2002/eyes.html
http://web.mit.edu/newsoffice/2002/eyes-1002.html
http://web.mit.edu/newsoffice/2003/vision.html
현대과학철학논쟁, 쿤의 패러다임이론에 대한 옹호와 비판, 토마스 쿤 이외 다수.
wikipedia, eye.
마르크스의 복수, 매그나드 데사이.
우주의 구멍, A.C. 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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