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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 패러다임의 변화와 고찰

온울에 2008. 7. 1. 23:54

바둑 패러다임의 변화와 고찰

20020558 최혜봉

목차

- 서문

- 고대의 바둑

바둑의 종주국 중국의 바둑

한국의 바둑

일본의 바둑

- 바둑 패러다임의 변화

도우사쿠(道策) 구조주의

우칭위엔(吳淸源)과 기타니(木谷 實), 신포석 혁명 - 중앙으로의 발전

- 고찰

서문

초등학교 시절 클럽활동으로 바둑돌을 처음 잡아 상대의 돌을 처음 따내고 두 집을 내면서 처음 돌의 사활이란 것을 안 것이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바둑 실력은 매년 제자리 걸음이었던 기억이다. 사실 초등학교때 오목수준의 돌따내기 게임정도에 불과하던 실력으로 치열한 입시의 중 고등학교에서 반 십년을 지내오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바둑을 잘 못한다고, 바둑 두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고 해서 바둑의 재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감각적인 바둑황제 조훈현이라던가 그의 라이벌 서봉수, 휠체어 대국으로 유명한 조치훈, 스승에게 천하를 이어받은 두터움의 이창호, 풍운아 이세돌등 혁혁한 프로기사들의 영웅담과도 같은 기담들은 삼국지, 수호지를 읽는 것과 진배없는 감동과 환희를 준다. 또 바둑 채널을 틀어 그들의 대국을 보면, 비록 바로 바로 그 한수에 감탄 할 수는 없지만 해설자들의 명쾌한 해설에 그들 한 수 한 수의 숨은 대화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바둑 철학 수업에 대한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갔을 때, 기본적인 포석이나 행마, 사활에 대한 기력 향상의 책보다는 ‘요순에서 이창호까지’ 같은 바둑의 잡학에 관한 책에 자연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내가 바둑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필연적인 일이었으리라.

일전에 바둑을 즐겨 하는 친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목의 발견은 인류의 대발견 중 하나라고, 그 말의 의미를 아직은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 나지만 흥미로 시작한 바둑 역사 공부를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 이론 등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도구로 고찰해 나가보고자 한다.

고대의 바둑

1. 바둑 종주국 중국의 바둑

위 기보는 현존하는 사료 중 최고 오래된 기보로 알려진 손책과 여범의 바둑이다. 백 3의 한 칸은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악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완착임에는 분명하다 . 백 3의 의도는 세력의 추구나 집모양의 확대가 아닌 단지 좌하귀 흑을 노린 수인데 이는 다시 말해 전투를 위한 수이다. 또 흑 4로 다가섬에 백 5로 받았는데, 백 은 중복의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시각은 확립되어있지 않아 태연히 두어지고 있었다.

이 외에도 여러 고대 중국 바둑의 기보를 보면 바둑을 둘때 발빠름이나 유연한 착상 보다는 힘을 중시한 전투 관념이 한 수 한 수의 착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것은 현대 일본 바둑이 중국에 전파될 때 까지 2000년간 별다른 발전이 없었던 거 같다. 아래 바둑은 1910년 일본의 전문기사와 중국의 국수급 기사가 2점으로 둔 바둑이다.

흑이 중국 기사이고 백이 일본 기사인데 흑 8의 단순한 일립이전이나, 좌변 모양의 편중으로 보아 고대 바둑과 그 착상의 전환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반면, 백은 상대를 중복시키거나 편중, 사석 처리 작전을 구사하는 등, 전투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의 능률을 중요시 하는 것이 보인다. 이런 중국 바둑의 패러다임의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선, 하나의 통일 왕조가 100년을 넘기기가 힘들었던 중국, 그 중국의 고대 바둑은 전쟁에서 그 모토를 찾는 다고 할 수 있다. 바둑의 룰 또한 지금과는 다른 데, 중국 바둑의 계가 방식은 돌과 공배가 모두 집이며 반상에 남은 돌의 개수로 바둑의 승부를 결정하는 형식이었다. 즉 반상의 집을 남은 돌로 메울 때 자기 돌이 자기 집을 메우고도 남는다는 것은 그 만큼 군사가 적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바둑은 집의 크기 보다는 돌의 사활이 승패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기에 이런 전투 중심 바둑 패러다임이 전 착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전에 진영을 대각선으로 갖추고 있는 모형 역시 전쟁이란 단어를 함축하고 있다 이런 사전배석의 단점은 자유로운 사고를 막는다는 것, 이런 미리 놓여진 4점의 돌이 중국 바둑의 패러다임을 결정하는데 일가견을 한 것이다.

2. 한국의 바둑

바둑이 한반도에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국에서 문물이 유입되면서 함께 들어왔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기자(箕子)전래설'과 '한사군(漢四郡)전래설'이 대두되고 있다. '기자전래설'은 중국 은나라 말기의 현인 기자가 난을 피해 5천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올 때 학술 기예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따라왔는데, 그 가운데 바둑두는 사람도 함께 와 한반도에 바둑을 전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한편, 기원전 108년경 중국의 한무제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 중부이북에 낙랑,임둔,현도,진번 등 4군을 설치했는데, 이때 중국의 관리와 상인들이 내왕하면서 바둑을 전했을 것이라는 설이 '한사군전래설'이다.

이중 '기자전래설'은 '기자'자체에 대한 사실성이 의문시되는 상황이므로 '한사군전래설'이 보다 유력시되고 있다. 또한 '한사군전래설'은 기존의 '삼국시대전래설'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설득력이 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현재 남아 있는 순장바둑의 내용을 볼 때 중국의 경우와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며 오히려 중국보다 더 많은 사전배석으로 사고의 더 많은 제약이 따랐다.(아래 기보 참조)

순장 방식으로 바둑을 두려면, 흑과 백이 똑같은 형태로 16개의 돌을 서로 끼워서 배치하고, 바둑판 한복판의 천원점에는 흑돌을 놓은 뒤 백의 선수로 바둑을 시작하면 된다. 포석의 개념은 없고 즉시 전투에 돌입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독특한 계가 방식에 있다. 각자의 집 안에 돌은 단수되는 자리만 피하고 서로간의 돌 구별 없이 꺼내어, 남은 집만을 계산하여 집이 많은 쪽이 이기는 방식을 사용했다. 돌은 아무리 많이 죽어도 되며, 상대 진영에서 되는 수 안 되는 수 다 동원하여도 손해가 없는 것이다.

매우 독특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 자유성과 효율성에 대한 극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3. 일본의 바둑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기보인 1253년 니치렌(日蓮) 上人과 요시죠 마루(吉祥丸)의 대국을 보면 사전배석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1582년 니치가이(日海, 뒷날 초대 本因坊 算砂)와 카기오 리겐(鹿鹽利賢)과 의 대국에서는 사전배석 없이 자유롭게 대국하는 것이 나온다.

이처럼 약 300년간의 변화 동안 일본의 바둑은 사전 배석이라는 것이 없어졌다. 그 300년 사이의 사료는 현재 찾아볼 수 없어 그 변화과정은 알수 없지만 이런 미묘한 차이가 훗 날 도우사쿠의 수나누기 이론에 따른 구조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바탕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바둑 패러다임의 변화

1. 도우사쿠(道策) 구조주의

고대 일본 바둑에 사전배석이 없어졌다하더라도 그에 따른 이론적인 기반이 부족하여 19x19 바둑판의 전체적인 유기성을 꾀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도우사쿠의 수나누기 이론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며 일본 바둑은 대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수나누기 이론: 수나누기란, 착점의 효율을 모양의 비교를 통하여 검증하되, 수순의 전후를 무시하여 비교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이론은 특정의 형태가 결정되었을 때 그 형태의 유불리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론이다.

도우사쿠가 수나누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아래 기보를 살펴 보자

17세기에 도우사쿠가 보여준 예이다. 우하귀의 정석은 도우사쿠 이전에도 사용되고 있었다.

중용한 것은 우하귀 정석과 좌하귀 모양의 이해였다. 이러 한 이해는 수나누기에서 도출되었고 이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한 상대는 바둑을 두고도 왜 졌는지 분석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이 없다면 이와 같은 실수는 계속 되는 것이다.

도우사쿠는 이러한 돌과 돌의 관계에서는 이러이러한 돌은 필요하지만 저러저러한 돌은 불필요하다. 혹은 이런 돌은 위치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위치해야 한다는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체를 바라보게 됐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도우사쿠 이후에는 바둑을 구조주의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이 점이야말로 바로 도우사쿠 이전의 바둑과 도우사쿠 이후의 바둑을 구별하는 요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 구조주의란 부분과 전체는 연결되어 있으며 부분은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전체는 논리적으로 부분에 앞선다는 것. 바로 이것이 구조주의의 안목이라고 하겠다(Levi-Strauss 1962).

도우사쿠의 바둑을 보면, 중앙 지향의 외목과 그 외목에 상대가 날일자로 걸쳤을 때 날일자로 씌우는 수법을 많이 쓰고 있다. 이는 집만으로 볼 때는 손해이나 전국적인 효율을 고려하여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도우사쿠에 이르러서 부분의 판단이 전국적인 판단에 우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전국적인 판단이 부분적인 판단에 우선한 다는 것이 이해되었던 것이다. 부분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나쁘지 않다면 과감히 손해보는 수를 채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도우사쿠는 구조주의와 수나누기 이론을 접목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 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도우사쿠 이후의 기사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 속속 이론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구조주의 패러다임의 혁명 이후 발전된 대표적인 이론을 들어보면

ⅰ) 정석: 평가의 근거 제시, 발전의 유도

이제 기사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모양을 살피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정석의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둑판이 19줄이라는 것을 새삼스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정석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정착되었다.

정석의 정의: 주변의 조건에 대한 고려 없음을 전제한 상태에서 얻어진 귀에서의 최선의 응접의 集合

ⅱ) 포석이론의 발전

도우사쿠 이전의 포석은 전투를 위한 단순한 것이었다. 도우사쿠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포석을 돌의 효용을 최대한도로 활용하기 위한 前提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부분의 전투는 주변의 환경이 성숙되기를 기다려서야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포석은 부분적으로 유리한 전투를 하기 위한 조건으로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포석의 정의: 초반 단계에서 시도되는 조건의 整理(돌의 효용을 최대한도로 높이기 위한 초반 前提의 집합)

ⅲ) 돌의 방향 개념 발전

도우사쿠 이후 돌의 방향이 중요해졌다. 중반의 전투에서도 돌의 방향이 왜 중요한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수나누기를 초중반에 시도하면, 돌의 방향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ⅳ) 맞보기 이론

천원을 중심으로 대칭이라는 바둑판의 특성과 현재의 한 수는 다음 수를 규정한다는 구조주의적 사고에서 맞보기 이론이 도출되었다.

맞보기: (착수를 한 후) 비슷한 가치를 지닌 자리를 두 개 남겨두어 상대에게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위

2. 신포석 혁명 - 중앙의 발견

도우사쿠의 구조주의는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 후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신포석혁명으로 불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도우사쿠는 포석 단계에서 4선을 거의 두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외목과 고목을 즐겨 썼지만, 그것을 4선의 착수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변에서의 4선 착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우칭위엔과 기타니가 발견한 중앙을 지향하는 사고방식의 전제 하에서 두어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신포석혁명 이전에는 구포석의 사고방식 하에서 외목과 고목은 운용되고 또 그 의미가 제한 되었던 것이다.

돌의 효율성의 문제는 어느 정도 풀었지만, 두터움과 세력에 대한 이해는 도우사쿠 이후 약 200여 년 동안 실전에서의 검토 기간으로 생각된다.

아래 토혈지국을 보자.

당시 우변에 백29로 뛰어들어간 상태에서 백이 우세하다고 하는 것이 현대 이전의 대체적인 이해였다. 그런데 이 바둑을 검토한 후지사와 슈우코(藤澤秀行) 구단은 하변을 흑a, 백b 이하 흑g 와 같이 처리함으로써 흑이 불리하지 않다고 하였다. 왜 다양한 평가가 있으며 또 다를까?

부분적으로는 두터움의 이해, 세력의 평가 등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다른 때문에 오늘날 이러한 평가가 가능하다. 두터움이나 세력은 궁극적으로는 실리로 환원되는 것을 알게 되려면 많은 시간이 흘러야 되었던 것이다. 4선 활용의 기초가 되는 두터움과 세력 등의 값어치가 알려지는 데 시간이 적어도 200년은 걸렸다는 것이다.

신포석혁명 이전에도 도우사쿠의 패럼다임의 한계를 인식하고 거기에 도전한 시도도 있었다. 도우사쿠 이후 150년이 흐른 시기에 포석 단계에서 4선의 착수가 나타나기도 했으며(야스이 家의 8세 치토쿠(知得)와 11세 혼인보였던 겐죠우(元丈)의 대국에서) 19세기 중엽 혼인보 슈우와의 화점 포석이 나타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칭위엔과 기타니가 발견한 중앙을 중시한다든가 하는 그런 착상이 이론적으로 정착된 것은 아니며, 당시의 바둑을 볼 때 아직 엿보이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한적인 효과를 가졌을 뿐이다.

우칭위엔과 기타니의 신포석법은 기존의 패러다임 하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이해하기도 힘든 그러한 내용으로 가득찬 놀라운 것이었다. 모든 것은 뒤집어졌다.

1933년 지고꾸타니 온천 지대에서 기타니는 포석과 정석의 통합이라는 책을 구술하고 있었던 중, 세력을 중시하는 신포석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생각하게됐고, 야스나가 하지메(安永一)와 우칭위엔이 합작해 [신포석법]을 발간하게 되었다.

[신포석법]의 저자들은 3선의 효용에 대하여 먼저 의문을 제기 했고, 중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 수의 가치가 다른 돌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면, 중앙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돌은 다른 방향에 더 크게 영향을 줄것이라는 아이디어로 기존 3선을 기초로 하는 포석도 하나의 관념일 뿐임을 우칭위엔과 기타니는 간파하였던 것이다. 4선의 발견, 중앙의 발견이 신포석혁명의 핵심이었다. 도우사쿠의 구조주의적 사고와 수나누기 이론은 더욱 확대되었다.

신포석법의 유산을 살표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중앙과 4선의 가치 발견.

② 속도 개념: 전국적인 의미에서의 돌의 효율, 화점과 3三의 가치.

③ 실리와 세력의 상대적 가치를 재평가

④ 정석과 포석의 통합: 정석의 확장. 정석의 개발, 정석의 포석에의 통합

- 고찰

바둑에서 패러다임이란 착상을 지배하는 전반적인 생각의 틀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변화시키는 힘의 원천 anomaly는 대체 무엇일까. 상수의 한 수 이건 하수의 한 수이건 기존의 틀을 깨는 신수 한 수가 바로 그 재료일 것이다.

그러나 식재료가 있다고 해서 요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 서양에는 요(재료)는 없고 리(조리)만 있고 일본 요리에는 요는 있는데 리가 없다는 요리계의 유명한 격언이 있듯이 - 유연한 발상을 가지고 바둑 패러다임의 전반적인 이해를 기초로한 일인의 선구자가 필요할 것이다.

두 번의 패러다임 혁명을 지나온지 60년을 겨우 넘긴 현재, 새로운 패러다임의 혁명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마도 무리일 것이다. 그만큼 기존에 이루어지고 있는 큰 발상에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바둑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항해를 위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실제로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국제 바둑시합을 거의 석권하고 있고 인구비례 상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바둑이 세계적으로 그렇게 경쟁력이 있는 것은 아님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은 바둑을 두는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 밖의 문화적인 면에서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실정이다. 바둑대회가 무수히 많고, 바둑을 둘 수 있는 기원이나 PC통신 사이트는 많으나, 바둑의 역사나 한국바둑의 전통, 바둑의 효용 등 에 관해서는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다.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것 은 오로지 '플레이 문화'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바둑인구의 노령화로 인해 퇴조의 빛을 보이고 있는 일본바둑은 국제바둑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서양의 대다수 바둑팬들은 일본의 바둑문화에 익숙해 있고 한국바둑에 대해서는 바둑이 센 나라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중국에서 발생한 바둑이 이론에서 꽃을 피웠는데, 그 중간에 낀 한국이 갑자기 바둑이 세졌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세계의 바둑팬들이 갖고 있는 바둑에 대한 관념은 '기력은 한국, 문화는 일본'으로 도식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둑에 대한 문화적 이해가 일본 위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영문으로 된 바둑책의 거의 대부분이 일본바둑의 번역서라는 점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도사쿠, 슈사쿠, 토혈국 등 전통적인 일본 고수들의 명국과 에피소드가 서양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인상지어져 있다. 한국에 관해서는 조훈현, 이창호 등 몇몇 천재들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는 정도의 정보를 갖고 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한국이 오직 '플레이 문화'만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 바둑만의 차별화되고 체계화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전문가는 시합에서 이기는 길만 찾으려 하지 말고 한국에서 개발된 포석이나 정석을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이론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업들도 바둑대회만 후원하려 하지말고 바둑계의 문화적 확립을 위해 투자를 할때라고 본다.

또한 바둑문화를 사회 전반적으로 넓혀나갈 필요가 있다. 바둑은 대개 알면 꽤 잘 알고 모르는 거의 아예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흥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스포츠나 놀이와는 달리 비교적 고차원적인 이해를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적 재생산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도 바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도한 국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참고 자료

이승우 바둑이야기 - 이승우.

요순에서 이창호까지 - 박치문.

바둑의 발견 - 문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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