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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현대 과학철학의 윤리적 재평가

온울에 2008. 5. 6. 22:43

목 차

1. 과학 발달과 윤리적 반성
2. 논리경험주의적 과학철학은 과학적 휴머니즘이다
3. 과학적 휴머니즘은 인식에 의한 인간 해방을 함축한다
4. 과학적 휴머니즘은 주체적 결단의 과학성을 요구한다
5. 과학학과 세계 시민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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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중앙대학교 부설 중앙철학연구소 
학술지명 철학탐구 
권 11 
호 1 
출판일 1999.  




현대 과학철학의 윤리적 재평가
(세계 시민 윤리의 확립을 위하여)


이초식
고려대 철학과
2-210-9901-02
pp.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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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학 발달과 윤리적 반성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발달된 과학기술과 풍요로운 물질 생활을 가졌으나 정신적으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빈곤한 상태에 있다. 영혼적으로는 사실상 허무 상태에 있으며 그래서 인간의 이기주의, 허영심, 지배욕, 오만으로 인간성은 파괴되어 간다 우리는 개인과 공공생활을 지탱해 줄 새 윤리 도덕이 요구되는 상황에 있다. 오늘의 산업사회의 현존하는 가치관이나 생활 스타일이 존속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1)

이것은 어느 미래 학자의 강연 요지의 한 대목이며, 오늘날 이와 같은 것 미래 전망은 반복 진술되어 오기 때문에 일종의 통념으로 된 듯하다. 실상 현대의 과학기술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발달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풍요의 혜택을 누리는 것도 분명하지만, 동시에 과학기술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었을 많은 재난과 위협이 현대인을 괴롭히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온 지구적 차원에서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구의 온난화 현상과 같은 기후의 변화를 초래할 정도의 대기 오염, 수질 오염, 토양 오염 등 환경의 오염과 파괴는 현대의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없었을 일들이다. 이 순간도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교통사고와 산업재해로 인한 인명 상해, 그리고 여전히 그치지 않는 핵무기와 화학무기의 위협도 현대 과학 문명의 반갑지 않은 부산물로 꼽히고 있다.

현대 과학기술에 수반되는 이 어두운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때 미래가 염려되므로 우리는 “정신적으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빈곤한 상태에 있다”고 단정하고 싶은 기분이다. 그리고 이와 흡사한 과학 문명 비판과 경고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제시되어 왔기 때문에, 그 주장들을 마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현대인 특유의 ‘정신적 빈곤’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과학 발달의 귀결이라고 입증할 만한 근거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현대가 “정신적으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빈곤한 상태에 있다”는 주장을 아무런 주석 없이 수락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새 윤리가 요구되는 상황임에는 동의하지만, 도대체 과거 어느 시대가 현대보다 정신적으로 풍요했던 시대이며, 그 때의 그 ‘정신’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그 시대의 그러한 의미의 정신 상태가 과연 오늘의 난제를 타개하기에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이기심, 허영심, 지배욕과 오만을 인간의 정신적 빈곤의 사례로 들고 있는데, 과연 그런 것이 없었던 시대가 있는가?

역사를 되돌아보면 중세적 억압에서 풀려난 근대적 자아는 생동하는 자연을 경험하는 자아였으며, 각기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자아였다. 근대적 개성의 발휘에는 개인들의 이기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특히 상대방의 이기심을 존중하며 서로가 이기심을 정당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충족시킬 것을 권장하는 도덕원리에서 출발했다. 이것이 근대적 민주정치나 자유 경제의 근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이기심을 정당하게 추구하는 일이 어렵고 이기심의 합리적 조절이 실패할 경우 혼란이 야기되므로 이기심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득세할 수 있으나, 우리는 이러한 와중에서 이중인격의 대량산출을 경계해야 한다. 즉 한편에서는 ‘이기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체제의 구조 안에서 이기적인 자아를 내면적으로 발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는 도덕이 대의명분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음성적으로 이기심이 추구되므로 이중인격의 세상을 만들기 쉽다.

우리가 배격해야 할 것은 이기주의 자체가 아니라 ‘불합리한 이기주의’이며 ‘합리적인 이기주의’라고 할 때는 언제나 ‘불합리한 것’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포함한다고 하겠으나 이 묵시적인 것이 문제될 때가 있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것을 비인간적인 것처럼 배격하고 불합리한 것이 인간미 있는 것으로 찬미되는 지적 풍토에서, 이기주의의 배격은 오히려 불합리한 이기주의가 인간미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는 각종 불합리한 요소들이며, 우리가 숙고하고 추구하여 익혀야 할 것은 합리적인 삶이라고 하겠다.

무엇이 합리적이며 무엇이 불합리한 것인가?

우선 과학적인 합리성을 합리성의 기준으로 삼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상생활이나 학문 연구에 있어서 비합리적인 것을 배격하고 과학적인 합리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런데 도대체 현대에 있어서 과학적 합리성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수락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를 다시금 묻는 것이 현대 과학철학의 주요 과제이다. 예컨대 경험적 검사 가능성, 논리적 정합성, 의사 결정의 원리와 각종 원칙, 토론과 연구의 개방성 등의 간주관적 규범들이 문제된다. 우리는 현대 과학 정신을 상징하는 과학적 합리성의 원리들을 윤리 문제와 연관하여 논하기 위해 현대 과학 철학의 표준적인 기반을 마련한 논리경험주의의 과학적 휴머니즘을 중심으 살펴보고, 21세기를 위한 과학학의 정립과 세계 시민(Global Citizenship)의 윤리가 필요함을 논하고자 한다.

2. 논리경험주의적 과학철학은 과학적 휴머니즘이다
근대 천문학으로부터 출발하여 뉴턴 물리학으로 체계화된 근대 과학은 목적론적 형이상학을 배격하고 기계론적 자연관을 선호하였으며 절대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필연적 지식을 모델로 하였다. 특히 근대 과학은 자연 개발의 기술들에 적용되어 세계를 바꾸는 막강한 힘으로 전환됨에 따라 일반인들에게도 과학은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되게 되었다. 그러나 인과필연의 과학 법칙에 대한 흄의 회의는 과학증거 인식의 치명타가 되었으며, 이 회의를 극복하고 근대 과학의 인식론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던 철학자 칸트였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현대 과학철학의 기틀을 마련한 논리경험주의에서 근대 칸트가 직면했던 것과 흡사한 과제들을 찾아볼 수 있다. 절대적 확실성의 모델이었던 유클리트 기하학과 기계론적 결정론을 강력해 지원했던 뉴턴 물리학이 19세기 후반 이후 비유클리트 기하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양자역학의 대두로 자연 인식의 혼란에 직면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인식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과학적 인식의 유의미성을 판별하는 과학철학을 전개한 것이 논리경험주의자들이었다. 칸트가 인식 가능한 현상의 세계와 인식 불가능한 물자체의 세계를 구분하고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물자체의 세계에서 논의하였듯이,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인식적으로 유의미한 세계와 무의미한 세계를 구분하고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본질은 인식적으로 유의미한 세계와 구별되는 정의(情義)의 세계에서 논의하려고 하였다.

칸트는 경험 없이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나, 논리경험주의자들에 의하면 경험적으로 검사될 수 없는 것은 논리적인 것에서 제외시켜 인식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보았다. 칸트가 선험적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보편타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듯이,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선험적인 논리의 형식에 의해 과학적 지식 일반적 구조를 파악하려고 하였다. 물론 칸트가 가능하다고 본 선천적 종합판단은 논리경험주의자들에 의해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되기는 하지만, 순수 구문론(pure syntax), 순수 의미론(pure semantics), 순수 화용론(pure pragmatics) 등의 형식적 구조를 강조하는 그들의 철학적 기반은 선험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2)

주지하는 바와 같이 논리경험주의의 인식적 의미 기준은 지난 반 세기 동안 여러 가지로 비판되었고 많은 자체 수정을 거치면서 과학철학의 새로운 국면들을 밝혀 왔다. 예컨대 그 의미 기준을 독단으로 선포한 콰인은 자연화된 인식론을 주장함으로써 심리학을 인식론에로 복귀시키려 했고, 3) 과학의 역동적 변화에 착안한 쿤은 과학사 연구를 통해 인식적 의미 기준이 패러다임에 의존하므로 과학철학적 논의는 패러다임들의 혁명적 전환 문제에 치중하였다. 4) 과학철학의 이와 같은 논의들이 과학적 인식의 문제들만을 주제로 하여 왔기 때문에 윤리 문제를 무시해 왔다고 판단하기 쉽다. 특히 논리경험주의의 윤리 인식 부정론은 때로는 반윤리적 학파로 낙인찍히기도 하였다. 5)

그러나 칸트가 윤리학을 과학적 인식의 영역으로부터 배격하였다고 해서 윤리를 무시했다고 단정할 수 없듯이, 논리경험주의자들이 윤리 인식 부정론을 취한다고 해서 윤리적 논의를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논리경험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카르납의 경우만 보아도 그런 단정이 오해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확인은 결국 현대 과학의 기본 정신을 인간 소외의 주범으로 단정하거나 과학만능주의적 오만으로 보는 오해를 피하게 할 것이다.

카르납이 대표하는 논리경험주의는 휴머니즘을 지향한다. 6) 휴머니즘의 기본 윤리적 테제들 자체는 과학적으로 검증되거나 반증되니 않지만, 그는 사람들이 마땅히 그렇게 살기를 권하며 스스로 휴머니즘적인 삶을 실천했다고 한다. 그들이 형이상학과 신학을 배격한 것은 형이상학이나 신학을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종류의 학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형이상학과 신학이 불필요하고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카르납에 의하면 “우리의 문화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종교적 상징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들이 종교에서 어떤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을 막으려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라고 하여 분명히 종교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7) 뿐만 아니라 카르납의 생애의 여러 측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표현되었다. 종교의 본질은 특정한 종파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고 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어머니가 다른 종파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해하려고 했던 관용의 태도는 카르납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8)

카르납은 한때 철학적 활동을 과학의 논리로 보았으며 이론철학의 문제들을 철저히 규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실천 문제를 등한히 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쉬우나, 이 점도 칸트의 철학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다. 이론이성에 대한 실천인성의 우위를 선포하고 보편타당성을 지닌 형식주의 윤리설을 주장한 칸트처럼, 카르납도 이론적 문제에 대한 실천 문제의 우위를 강조하며 실천 문제를 합리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의사결정론의 형식적 구조를 논구하였기 때문에 그의 실천 문제 해결에는 언제나 사회정의와 인도주의적 관심이 우선권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종교 문제를 도덕성을 근거로 하여 이해하려고 한 점도 칸트와 카르납은 흡사하다. 칸트의 영향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마리아 라이헨바하의 다음과 같은 글이다. 9) “카르납은 칸트의 정언멍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생활을 하였다. ‘너 자신에 있어서나 다른 사람에 있어서 인격을 한낱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서 취급하도록 행동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법은 카르납의 휴머니즘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카르납의 휴머니즘은 사변적 휴머니즘을 배격하고 과학적 휴머니즘(Scientific Humanism))을 지향한다.

카르납은 자신이 제시한 과학적 휴머니즘은 다음의 몇 가지 언명으로 간추려진다. 10) 우선‘인간은 초자연적 보호자나 적대자를 갖고 있지 않다’고 전제한다. 물론 이것은 자연의 객관적 사실을 기술하고 보고하는 과학적 인식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며 행동 지도의 태도를 형성하는 실천적 도덕적 의미로 풀이해야 한다. 즉‘인간의 생활을 개선하고 변혁하는 일은 오직 인간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는 태도와‘인간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국가, 자연환경 등 인간의 외부적 여건들과 자신의 내부적 상황을 보다 좋게 변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신념을 형성하기 위한 전제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태도와 신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은 과학이라는 언명이 첨부된다. 즉 ‘자기 변혁과 생활 조건의 개선에는 자신과 세계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며 그러한 지식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과학적 방법이다.’ 이 언명은 카르납 철학의 이론적 연구 활동 전반을 지원해주는 기본 전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종래의 형이상학적 사변적 휴머니즘(Speculative Humanism)과 구별되는 과학적 휴머니즘의 특색이기도 하다.

휴머니즘은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하자는 주장으로 널리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휴머니트스들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여러 가지 생활 가운데서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 고발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못하게 하는 인간 소외 현상을 파헤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성을 찾아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하고 적극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설계하게 된다. 그러면 과학적 휴머니즘이 지향하는 인간 해방과 인간성 확보는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가? 근대 이후 전개되어 온 휴머니즘의 철학적 전통과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현대의 다른 휴머니즘과는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가?

과학적 휴머니즘의 특성은 이미 사변적 휴머니즘과 구별시키는 데서도 나타나듯이 그 ‘과학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변적 휴머니스트들은 과학성과 인간성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데 반해, 과학적 휴머니스트들은 과학도 인간이 하는 것이며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종합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과학주의와 인간주의와의 인위적 분리를 거부하고 인간을 위한 과학을 지향하는 것이 과학적 휴머니즘이다. 분리주의자들은 과학주의를 과학만능주의나 편협한 독단주의로 혹평하기도 한다. 예컨대 중세철학이 만능적인 신학을 시중들어 온 시녀였듯이, 현대의 과학주의를 대변하는 과학철학은 근대 이후 신학의 만능적 권위를 계승한 과학의 기반을 마련하려고 시중을 들게 되므로 과학의 시녀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라나 과학적 휴머니즘은 현대의 과학철학을 결코 그러한 천박한 과학주의와 동일시하려 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이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과 투쟁을 해 온 까닭을 알아본다면 그러한 인간의 과학적 활동의 목표에서 우리는 인간 자신의 문제가 결코 제외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3. 과학적 휴머니즘은 인식에 의한 인간 해방을 함축한다
과학자들이 강한 지적 호기심을 갖고 진리를 인식하고자 탐구하는 것은 언뜻 보면 순수한 학문 연구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낄는지 모른다. 그러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인간의 순수한 이론이성을 발휘시켜 왔고 인간성 발휘에 필수 불가결의 계기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를 통해 인간의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음미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과학적 휴머니스트들은 과학의 이론 문제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고 그 연구 성과의 사용과 관련된 실천 문제를 염두에 두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식에 의한 인간 해방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어떤 외부적인 것을 지적하기에 앞서 인간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맹신과 미신, 무지와 독단에 주목한다. 이러한 자신을 속박하는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식에 의한 인간 해방이다. 맹신과 미신, 무지와 독단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인간 해방 없이 세계를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무지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파멸시킨 비극적인 사례들을 우리의 주변에서 무척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반 세기 전만해도 맹장 수술은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다. 링거주사가 없던 당시 환자들은 수술 후 갈증을 심하게 느껴 물을 마시고 죽는 사례가 많았다. 특히 사랑하는 자녀를 간호하던 어머니들이 수술한 자식이 애타게 목말라 하는 것을 보다 못해 물을 주어 결과적으로 자식을 죽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늘날도 과학적 검사를 거치지 않은 풍문만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약 저 약을 마구 복용케 하여 부작용을 일으키고 치명상을 입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대가 과학이 가장 발달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현대인 모두가 과학적으로 사고한다는 뜻은 아니다. 과학 발달의 그늘진 측면에 착안한 반과학주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난무하는 사이비 과학들의 유혹에 현대인들은 무방비상태로 노출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11) 예컨대 ‘조상의 묘지를 잘 써야 그 자손들이 잘된다’는 전래 사상이‘조상을 잘 섬기라’는 교훈적인 차원을 넘어 과학적인 증거를 가진 듯이 위장되기도 한다. 혹자는 과학과 사이비 과학의 구획 기준이 인간의 결단이나 합의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구실 삼아 지관이나 점성가의 일까지도 과학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지질학자와 지관을 구별하지 못하고 천문학자와 점성가를 구별하지 못하였던 중세적 무지에로 되돌아가 역사에 역행하는 과오를 다시금 범하게 될 것이다.

‘인식에 의한 인간 해방’의 문제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망되는 까닭은 사회가 크게 변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농경사회나 수공업 수준의 사회에 있어서는 인간관계가 비교적 단순하고 생존방식이 일정하여 전통적인 관습과 기술에 의해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으므로 인식의 문제가 심각한 생존의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해 가는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인간관계도 복잡하게 얽혀지고 개개인의 행위들이 연쇄반응 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폭넓은 과학적 인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행위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하는 맹목적인 행위가 내면적인 선의라는 이유라는 만으로 정당화되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또한 전체주의 사회로부터 민주주의 사회로 변모됨에 따라 인식에 의한 인간 해방의 문제가 더욱 요망되고 있다. 언론의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사회들에서는 양질의 정보뿐만 아니라 허위와 기만의 성질을 지닌 나쁜 정보들도 크게 유포되기 마련이다. 폐쇄적인 일원화 사회에 있어서는 정보의 오염도를 사회가 판정하므로 단색적인 편견의 위험은 있었으나 나름대로 세척의 기능을 가졌다. 그러나 개방적인 다원화 민주 사회에서는 정보의 오염도를 판별하는 많은 기능이 개인들에게 맡겨진다. 그러므로 시민 자신들이 직접 정보 오염을 판별할 수 있는 과학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실천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과학적 비판의 사고 능력을 갖지 못하여 정보 오염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제대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유 민주사회의 성패는 그 성원들이 과학적 사고 능력과 합리적 실천 능력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심각한 시대적 난제로 등장한 환경 오염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그 오염의 심각성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데어서 비롯되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정보 오염은 환경 오염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므로,‘인식에 의한 인간 해방’은 현대인들에게 요구되는 기본 윤리라 하겠다.

현대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무지를 깨닫도록 하고 있으며 인간을 자유롭게 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구속에의 길을 선택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유롭게 유럽과 북미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몸을 비행기 안의 의자에 묶어야 한다. 우리가 많은 물건을 멀리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서는 규격화된 상자 속에 넣어야 한다. 이렇듯 큰 자유를 위해 우리는 작은 자유의 구속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모든 종류의 자유를 다 누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환상이다. 현실적으로는 어떤 자유를 누리려면 어떤 자유는 포기해야 한다. 자유의 포기 없이 자유의 쟁취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누려야 할 자유를 합리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무엇이 큰 자유이며 무엇이 작은 자유인지를 이치에 따라 판정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이 초래한 구속의 측면만을 보고 비관하거나 자유 확장의 측면만을 보고 과학기술을 찬양하는 것은 모두 한쪽으로 치우치고 전체를 조망하지 못한 것이다. 이리하여 자유를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자유의 주체가 되는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도 인식은 불가결의 요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인식의 확보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과학과 기술은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특정한 영역의 지식을 일반인들이 쉽게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는 개방 사회이지만, 실제로 일반인들은 전문 지식인들이나 특수 기술자들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인식에 의한 인간 해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대는 오히려 인간을 전문가에게 다시금 얽매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상황에서 인식은 무엇을 의미하며 과학적 인식은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풀이되어야 하는가? 인식의 현실적인 여건과 인식 능력의 한계에 부딪침에 따라 우리들은 어차피 전문가나 기술자를 믿을 수밖에 없다면 어떤 전문가와 기술자를 믿어야 하는가? 전문가의 의견 차이나 기술자들의 행동 방식의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만약 전문 과학 과 기술자 집단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단합하여 국민을 기만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윤리적 책임을 외면한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4. 과학적 휴머니즘은 주체적 결단의 과학성을 요구한다
휴머니즘의 적극적 테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다움을 발휘하도록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 회복’이라는 표현에 특정한 형이상학적 인간관들이 내재하였음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회복’은 회복되어야 할 ‘본래적인간’과 같은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이데아를 상정하고 이성적인 것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하는 형이상학일 수 도 있고, 개개인의 일회적인 고유성을 인간의 현실 존재로 파악하는 실존철학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죄에 물들지 않은 에덴동산의 순수한 인간과 같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일 수도 있다. 대체로 이렇게 상정되는 본래적 인간은 같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일 수도 있다. 대체로 이렇게 상정되는 본래적 인간은 시간적으로 현재의 인간보다 앞서 있었다는 의미로만 풀이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인간보다 가치 있는 인간이며 인간들이 그 실현을 목포로 삼을 만하다는 가치관의 표현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인간성 확보라는 휴머니즘의 테제는 어떠한 형이상학이나 종교적 신앙을 전제하지 않고 경험 가능한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초월적 존재의 도움이나 방해를 상정하지 않는 카르납 등의 과학적 휴머니즘이 바로 그러한 유형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누구나 그 어떤 존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가야 하는 주체라는 자각이 인간성 확보의 기초이다.

특히 실존철학적 휴머니즘의 경우에는 주체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나의 행동과 나의 삶의 주체가‘나’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좌우된다면 그것은 진정한‘나의 행동’과‘나의 삶’일 수 없다. 그리하여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행동하는 인습적 행위나 유행이나 군중심리에 따라 움직이는 익명적인 대중과 구별되는 나의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 목표이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법칙에 부합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주체일 수 없는 생활은 결코 나의 생활 일 수 없다. 더욱이 나는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고유한‘나’이기에 진정으로 인간적인 관계는 바로 이러한 고유성을 지닌 주체들간의 관계이어야 하며, 그 관계는 서로서로의 인격체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취급하는 관계이다. 나의 행동과 나의 삶의 주체가‘나’라는 의식에는 책임 의식이 수반된다고 상정한다. 주체 의식이 분명하면 책임 소재도 분명하다. 책임질 수 없는 주체는 결코 진정한 의미의 주체라고 할 수 없다. 주체 의식은 지·정·의(知·情·意)로 분화된 의식이 아니라 통합된 총체적인 의식이며 대상화된 이런 점에서 주체 의식 자체는 과학적으로 밝혀질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주체 의식이 책임 의식을 수반해야 된다는 점에 착안하면, 주체 의식과 과학적 사고는 긴밀히 연관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주체적 결단의 결과가 자신과 많은 사람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경우에는 그 결과들에 대한 과학적인 예측과 전망을 포기하는 것은 책임 있는 주체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주체성이 드러나는 것은 책임 있는 주체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주체성이 드러나는 행동은 내가 주체적 결단에 의해 선택한 행동이며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나 스스로 결행한 행동이므로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의 주체도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행동의 주체가 책임의 주체'라는 점에서는 사변적 휴머니즘과 과학적 휴머니즘이 일치하지만 주체적 결단의 정당서 문제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한다. 사변적 휴머니즘에 의하면 주체적 결단은 본래적 자아로부터 결행된 것이고 본래적 자아는 절대적으로 바르고 선하다는 성선설적인 것을 근거로 하여 본래적 자아를 주체로 하는 결단은 잘못될 수 없다고 보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체적 결단의 무오류성을 논증하는 근거로 존재의 음성에 대한 필연적 응답이나 절대자에의 호소 등을 채용하기도 한다. 사변적 휴머니스트들은 주체적 결단이 잘못될 경우를 상정하여 하지 않고 오직 어떤 행동이 주체적이냐 아니냐에만 관심을 두는 것 같다. 12)

그런데 주체적 행동이 내면 세계에만 머물고 그것이 밖으로 아무런 변화도 초래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그것이 외부 세계로 나타나 세계 변화의 어떤 몫을 담당한다면 그것은 결코 허공 속에서 이루어 질 수 없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적 결단도 결국 가능한 행동들 가운데서 선택을 하게 된다. 따라서 주체적 결단도 결국 가능한 행동들 가운데서 선택을 하게 된다. 13)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들 가운데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며 결행하게 되므로, 가능한 행동들의 집합, 가능한 상황들의 집합, 이 가능한 상황들에 대한 주체의 확률 배정, 특정한 행동을 특정한 상황에서 하였을 경우 예상되는 결과들의 집합, 그리고 예상 결과들에 대한 주체의 가치 배정 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요인들을 고려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무시하고 안일하게 직관적인 느낌에만 호소하여 한 행위가 '주체적 결단'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직관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직관은 어떤 문제의식을 제기하기도 하고 전문가의 직관은 전체적인 것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기능을 하며 신속하게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파악된 것들 중에는 입증이나 검사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많고 특히 영향력이 크고 중대한 문제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직관이 편리하다고 해서 직관적으로만 문제를 해결하고 논리적 추리나 조사 실험의 검사가 고통을 주고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든다고 해서 이를 기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과학적 휴머니스트들의 도덕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직관적으로 일처리를 해도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전문가의 직관이 탐나지만, 전문가의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된 노력과 검사를 반복하여 일을 익혀야 한다.

인간성 확보를 위해서는 주체성의 직관적인 확보가 필수적임에 틀림이 없으나, 주체적인 행동이 모두 정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인간다운 행동이 주체적이어야 하지만 그 행동을 책임지는 주체이기 위해서는 그 행동에 관련된 요인들에 대한 과학적인 이식을 필요로 한다. 즉 행동이 수행되는 자연적 환경과 사회적 여건들에 관한 과학적 인식은 대체로 확률적으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행동은 특정한 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반해, 행위 주체의 인식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주체적 결단에 활용되는 확률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행위 결과들에 배정하는 가치판단은 행위 주체의 개인적 취향이나 그가 살아온 사회적 패러다임에 크게 좌우되기 쉽다.

이제 우리는 주체적 행위와 합리적 행위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도표를 통해 검토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주체적 행위를 실존철학적 의미로 본다면 주체적이지 못한 행위와 확연히 구별되겠으나 이를 인식하는 수준에서는 불분명한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보아 구분선을 두 개로 하였다. 합리적 행위도 다의적이나 여기서는 주로 의사결정론적 합리성을 기준으로 한다. 즉 결단의 주체가 논리적 사고와 과학적 지식 그리고 가치 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주어진 시공 안에서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합리성을 말한다. 이 경우도 합리적인 것과 아닌 것을 판별하기 어려운 경계 지역이 있을 수 있으므로 두 개의 선으로 표시하였다. 주체적이며 합리적인 행위가 바람직하고 주체적이지 못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행위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데에는 별 이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주체적지 못하지만 합리적인 행위와 합리적이 못하지만 주체적 행위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호할 것인지는 개인과 학파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여간 과학적 휴머니즘은 의사결정론적 합리성을 강조하므로 주체적 결단에도 과학성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5. 과학학과 세계 시민의 윤리
우리가‘과학’이라고 할 때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과학적 활동들의 체계, 즉 순수 이론적 활동과 그 이론을 활용하여 생산을 하는 기술적 활동과 그 이론을 활용하여 생산을 하는 기술적 활동의 체계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그 과학적 활동들의 결과로 산출된 것들의 체계, 즉 명제들의 이론 체계와 기술적 활동의 산물들과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의 과학적 활동들은 가설을 발견하고 검사하는 실험을 하여 법칙을 확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설명과 예측을 해 가면서 이론을 형성하는 등의 과학 내적 활동(internal activities)주로 의미하여 왔다. 그러나 거대 과학(Big Science)을 지향하며 각종 프로젝트의 수행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과학 내적 활동들의 전체적 목표는 사회적으로 수립되어 추진되고 관리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학의 외적 활동(external activities)들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과학 내적 활동에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4)

과학의 내적 활동이든 외적 활동이든 간에 인간의 과학적 활동은 특정한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적 활동이므로 규범적 질서를 요구하며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과학의 윤리란 바로 이처럼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과학의 윤리란 바로 이처럼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과학의 내적 활동과 외적 활동 전체에 관여하게 된다. 따라서 과학의 윤리는 특정 분야의 과학자로서의 과학자의 윤리, 기술자로서의 기술자의 윤리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과학과 기술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 관리, 평가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과학기술을 교육하고 홍보하며 전파하는 등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직업 윤리를 포함하게 된다. 과학과 기술의 활동의 영향이 이처럼 광범위해짐에 따라 현대인들은 이를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연구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Science of Science, Science Studies, Philosophy of Science, Wissenschaftstheorie 등의 이름으로 지칭되어 온 ‘과학학’이다. 과학학이 우리 나라에서도 내년부터 일부 대학과 대학원에서 독립된 학과로서 또는 협동 과정으로 정식으로 출발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15)

개별 과학들처럼 특정한 현상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연구하는 과학학은 20세기 전반부에는 주로 논리경험주의적 과학철학자들의 중심이 되어 ‘과학의 논리’를 확립하는 데 치중했다. 16) 다시 말하면 과학 내적 활동 전반에 작용되어야 할 논리적 사고의 기틀을 마련하고 그 활동의 결과로서의 과학 개념과 이론들의 논리적 기반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부터 과학학으로서의 과학철학은 여러 가지로 수정, 보완, 대치 등의 비판과 재구성의 과정을 거듭해 가면서 여러 갈래로 전개되었다. 자연화된 인식론에서는 ‘과학의 심리학’, 그리고 과학혁명론에서는 ‘과학사’를 과학학의 근본 과제로 삼으려고 했으며, 최근 10여 년 간은 컴퓨터를 활용하여 인식문제를 논구하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 과학학의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하면서 ‘전산적 과학철학’(Computational Philosophy of Science)이 과학학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르게 되었다. 17)

이러한 변천 과정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날로 심각해짐에 따라 과학학은 과학철학의 차원에서 한 층 더 구체화되어 과학의 심리학, 사회학, 역사학 등의 경험과학을 포함하였고 과학기술의 정책학, 경영학, 언론학, 교육학, 등의 행동과학과 법학과 윤리학 등의 규범 과학을 요망하기에 이르렀다. 현대 과학철학에서 출발한 과학학의 주제와 접근 방식들이 여러 모로 바뀌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들에게 공통되는 규범 윤리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결국 ‘과학적 휴머니즘’으로 집약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논리경험주의가 윤리 인식부정론을 취한 것이 윤리학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윤리적 기반이 과학적 휴머니즘임을 논하였다. 여기서 윤리 인식부정론은 윤리적 언표를 분석하는 메타윤리학(Meta-Ethics)의 수준에서 논의된 것으로서 윤리적 당위판단은 다른 당위판단에서는 도출될 수 있으나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사실판단만을 근거로 해서는 도출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따라서 당위판단을 기반으로 하는 규범 윤리학(Normative Ethics)은 자연과학들과 같은 수준의 과학일 수 없고 정서나 의지를 표현하는 의미(emotive meaning)로 풀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정의주의(情義主義, Emotivism)는 이미 지적되었듯이 윤리나 도덕이 불필요하거나 우리 생활에서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의 윤리적 정서나 의지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와 연결되므로 오히려 이와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윤리적 가치규범과 연관된 활동에 대한 심리학, 사회학 등의 경험과학적 연구를 하는 기술 윤리학(Descriptive Ethics)을 요망한다. 그리고 윤리의 기본 규범은 비록 정의(情義)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기본 규범들로부터 타당성 있게 도출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 규범간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있는지 그리고 나아가 해당되는 윤리적 체계 전체는 정합성을 지니는지를 검토하게 될 규범 윤리학을 필요로 하며, 끝으로 이러한 윤리적 논의에서 기본 개념들을 분석하고 기본 언명들을 명석화하는 메타윤리가 필수적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과학적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과학의 기술 윤리’,‘과학의 규범윤리’,‘과학의 메타윤리’들을 식별하고 이들을 통합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과학의 윤리학(Ethics of Science)이 현시점에서 절실히 요망된다고 하겠다. 18)

요컨대 오늘날 과학학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는 현대 과학철학은 ‘과학의 논리학’에서 출발하여 ‘과학의 인식론’ 문제를 주로 다루어 왔으며 앞으로는 ‘과학의 윤리학’의 문제들이 절박한 과제로 등장할 전망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윤리 분야로는 이미 생명 윤리(BioEthics), 의료윤리(Medical Ethics), 기술 윤리(Techneethics), 경영 윤리(business Ethics), 환경 윤리(environmental Ethics)들이 새로운 학문으로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환경 윤리는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장녀 개발의 필요성과 자연 파괴의 불가피성의 심각한 갈등을 넘어서 자연의 동식물을 비롯한 지구 자체의 보존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의 사유는 인간이라는 종에만 국한되었던 인간중심주의적 휴머니즘을 재고하고 지구 안에 살고 있는 다른 종의 동물과 식물의 보존도 배려해야 하는 자연관과 우주론이 논의됨에 따라 ‘과학의존재론’과 ‘종교적 신앙’도 새롭게 재평가되어야 했다. 19) 따라서 현대 과학철학의 휴머니즘도 환경 윤리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는 재해석되어야 하겠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21세기의 삶을 슬기롭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지역적 편견과 인종적 독단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과학의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 시민’(Global Citizenship)의 윤리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20)

불합리한 지역 이기주의가 진정으로 그 지역을 위한 일이 아니듯이, 세계성을 무시하고 무분별하게 외쳐대는 애국주의가 결코 나라의 장래에 득이 될 리 없다. 국제화, 세계화를 지향한다고 하며 국제사회에서 지도적인 나라로 부상하고자 하면서도 의식적으로는 편협한 국수주의에 머무른다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기 어려울 것이다. 세계 무대에서 무역을 잘해야 하고 외국 회사들에 고용되는 한국인이나 외국인을 고용하는 한국 회사들이 증대됨에 따라 우리가 외국인을 대해 온 태도에도 큰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한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사귀면 이득이 된다’는 외국인들의 의식과, ‘한국사람들은 자기네 이익만을 챙기기 때문에 그들과 사귀면 언젠가는 손해보기 마련이다’라는 외국인들의 인상을 비교해 보아도 우리가 세계시민 의식을 확립해야 하는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구상의 다른 나라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고 우리의 지구 환경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자연과 사이 좋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세계 시민의 윤리(Global Ethics)를 조속히 마련하여 이를 널리 수출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종적인 윤리로부터 횡적인 윤리의 확립이 요망되었듯이, 근대 시민사회로부터 21세기 자유무역 세계로 이행됨에 따라 세계 시민 윤리의 확립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렇다고 해서 종래의 윤리는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근대사회에서도 종적 윤리는 여전히 필요했듯이, 21세기에도 가족 중심의 종적 윤리는 시민사회 중심의 횡적 윤리가 필요하겠으나, 그들은 모두 ‘보조 윤리’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고 전체적 사회 구조의 ‘기본 윤리’는 세계 시민의 윤리로 바뀌어야 함을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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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民族知性, 특집/21세기 한국의 모습, 로마 클럽이 보는 21세기의 세계 전망, 127쪽, 1989. 1월호.
2) R. Carnap, Introduction to semantics, Harvard University Press, 1948. 「A. Semiotics and its parts」참조
3) W.V. Quine, “Epistemology Naturalized” in Ontological Relativity and Other Essay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9. 참조.
4) T.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ce Revolution, 2nd, Toward an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 VolumeⅡNumber 2,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참조.
5) 필자가 1970년대 초 오스트리아에서 Paul Weingartner 교수로부터 듣게 되었던 한 가지 사실만을 보아도 그런 오해가 있어 온 것은 분명하다. 오스트리아 잘즈부르크 천주교 성직자들은 논리실증주의를 반종교적, 반윤리적 집단으로 오해하여 배격해 왔으나,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하여 자연의 이성적 인식을 중시하는 그들의 교리와 논리실증주의의 과학의 논리가 상충되지 않고 오히려 부합되는 측면이 있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것이 오늘의‘국제 과학 기초 연구 센터, 과학철학 연구소’,‘Institut fur Wissenschaftstheorie, Internationales Forschungszentrum fur Grundfragen der Wissenschaften, Salzburg’
6) 논리경험주의를 과학적 휴머니즘으로 보는 논의는 필자의 다음 글에서 보다 상세하게 논한 바 있다. “루돌프 카르납의 과학적 휴머니즘과 그 비판에 관한 고찰”, 『현상과 인식』제2권 제3호, 1978 가을, 173 ∼198쪽.
7) P. A. Schilpp, ed. The Philosophy of Rudolf Carnap, Open Court, 1963, 8쪽.
8) J. Hintikka, ed. Rudolf Carnap, Logical Empiricist -Materials and Perspective-D.Reidel 1975, Homage to Rudolf Carnap 참조.
9) 같은 책, LIV. Maria Reichenbach는 Hans Reichenbach의 부인임.
10) Schilpp, 앞의 책, 83쪽,
11) 최근 지관의 이야기가 저명한 신문 잡지에 오르내리며 각종 광고에서도 사이비 과학 선전물이 적지 않게 실리고 있는 것이 그러한 유혹들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12)‘본래적 자아도 잘못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성선설(性善說)로 규정한 실존 철학 평가는 필자가 그 동안 받아온 주관적 인상에 기인한다.
13) R. C. Jeffrey, The Logic of Decision, 2nd e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참조.
14) 이러한 과학의 분류는 필자가 다음의 논문에서 밝힌 바 있다. “科學의 倫理, 學으로서의 科學 倫理의 確立을 위한 하나의 試圖”, 現代 社會와 傳統 倫理,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6
15) 동아일보, 1994년 11월 3일 20면 참조.
16) R. Carnap, The Logic Syntax of Language, Littlefield, Adams & Co, 1959. Part Ⅴ. Philosophy and Syntax 참조.
17) 앞의 주 3)과 4), 그리고 다음 책을 참조.; P. Thagard, Computional Philosophy of Science, The MIT Press, 1988.
18) 잎의 주 14)를 참조.
19) I. G. Barbour, Ethics in an Age of Technology: The Gifford Lectures Volume 2. Harper SanFrancisco, 1993. 참조. 그리고 논리경험주의와 비엔나 학단에 대해 여러 가지로 재평가하기 위한 저서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참고하기 바람. ·T. E. Uebel(ed.), Rediscovering the Forgotten Vienna Circle, Boston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Vol. 133, 1991. ·K. Menger, Reminiscences of the Vienna Circle and the Mathematical Collogquium(ed. by L. Golland, B. F. McGuinness, A. Sklar), Viena Circle Collection 20, Kluwer 1994. ·F. Waismann, J. Schachter, M. Schlick, Ethics and the Will(ed. by B. F. McGuinness, J. Schulte), Vienna Circle Collection 21, Kluwer 1994.
20) 필자의 ‘Global Citizenship’에 관한 생각은 최근 Ann Margaret Sharp(Director of IAPC Graduate Programs, ontclair State University)에게 보낸 개인적 서신에서 밝힌 바 있는 데, 그가 주관하는 1995년도 박사 과정에서 ‘Global itizenship’을 주제로 하는 강의가 개설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있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생각은 현재 우리들에게는 좀 어색하게 여겨질는지 모르나 앞으로 세계적으로 절박한 과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