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서론: 역사적 관점과 문제제기
Ⅱ. 정신/의식, 상태적/행위자 의식 그리고 지향성/현상성
Ⅲ. 고전적 의식 이론: HOT 이론
Ⅳ. 전망과 결론: 의식의 표상주의적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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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지명 인문학 연구
권 4
호 1
출판일 1999.
의식과 인지과학
임일환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2-397-9901-03
pp.71-107
이 논문은 1998년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내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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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역사적 관점과 문제제기
지난 십여 년 간 심리철학과 심리학 인지과학 등 인간의 정신현상에 대한 철학적 과학적 탐구를 시도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등장한 것은 무엇보다 '의식'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되돌아 볼 때 이처럼 인간의 '의식'의 문제가 특히 심리학과 인지과학 전반에 걸쳐 세기말의 마지막 10여 년 간 핵심적인 주제로 등장한 사실에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있다. 모든 정신현상의 본성을 의식 혹은 의식적인 사유라고 보았던 데카르트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깨어있는 일상적인 삶의 매 순간은 의식적인 순간이고, 따라서 정신현상에 대한 철학적 과학적 탐구는 동시에 의식에 대한 탐구가 아니었는가? 실로 의식의 현상은 일상적인 삶의 너무도 분명하고 친숙한 현상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인간 (나아가 개 원숭이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고등 동물)의 존재 방식의 진부한 일면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20세기의 거의 모든 기간동안 의식 현상은 심리학 인지과학 같은 정신현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주제로 소외되고 있다가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폭발적 관심과 연구를 촉발하게되었는가?
물론 20세기 전반부를 지배한 이른바 '행태주의' 심리학의 시대에 의식을 포함한 모든 '내적'인 심리 상태는 일종의 과학적 탐구의 금단지역이었다. 하지만 60년대 출발한 새로운 과학적 심리학 즉 기능주의적 심리학과 인지과학에서 조차 인간 정신현상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보이는 의식현상에 대한 관심이 아주 최근에야 폭발하게되었을까? 아마도 내 생각으로 얼마 전 1989년 <심리학 국제 사전>이라는 심리학에서 권위 있는 사전에 포함된 다음과 같은 '의식'에 대한 정의는 왜 지난 세기에 의식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장기간의 불황을 겪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의식: 지각, 사유, 느낌을 갖는 것; 즉 깨어있음(awareness). 이 말은 정의가 불가능하고 단지 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미 전제하고 있는 개념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많은 이들은 의식과 자의식 (self-consciousness)을 혼동하는 함정에 쉽게 빠진다--의식적이기 위해서 우리는 단지 외부 세계만을 자각하면 될 뿐이다. 의식은 매혹적이지만 매우 포착하기 힘든 현상이다: 의식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또 왜 그것이 진화되었는지 해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까지 의식에 대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출판되지 않았다. 1) (Sutherland)
이 짧은 글은 정확히 지난 세기의 80년대 말까지의 의식현상에 대한 과학적 철학적 탐구가 얼마나 빈곤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서더랜드가 이 글에서 강조하듯, 적어도 80년대 말까지는, '의식'이라는 현상이 정확히 인간 정신현상의 어떤 부분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데카르트가 말하듯 그것이 정신현상의 본질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나아가 도대체 물리적인 자연 세계에 왜 의식이라는 현상 자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그 어떤 철학적 과학적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지난 10년 간 상황은 급변했다. 지난 90년간의 침묵을 비웃기라도 하듯 실로 다종 다양한 형태의 의식에 대한 철학적 과학적 이론이 쏟아져 나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데넷 (D. Dennett)의 이른바 의식의 'multiple draft' 이론, 바아스의 (B. Baars) 'Global Workplace'이론, 로젠탈 (D. Rosenthal), 암스트롱, 라이칸 (Lycan)의 '메타 사유'이론, 처치랜드 (P. Churchland)의 이른바, 벡터코딩(vector coding) 이론, 그리고 드레츠케, 마이클 타이 등의 이른바 '표상론적 의식 이론' 등등 수많은 이론들이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심리학자 두뇌 생리학자 등에 의해 제시되고 발전되고 있다. 나아가 의식 현상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양한 철학적 제거주의 이론들이나 최근 매긴 (C. McGinn)처럼 의식 현상은 궁극적으로 인간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신비주의 이론들까지 포함된다면 우리는 실로 의식현상에 대한 이론의 홍수 시대를 맞고있다고 말하는 것도 과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러한 이론의 홍수 현상이 기본적으로 지난 30 여년 간의 인지과학의 급속한 발달에 주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듯 인지과학이란 기능주의 심리학에서 파생된 비교적 역사가 짧은 학문이다. 인지과학은 물론 문자그대로 인지(cognition)현상에 대한 과학을 의미하지만 통상은 심리학 언어학 인공지능 철학 두뇌생리학 등 다양한 학문들을 통한 인지현상에 대한 학제간의 연구를 통칭하는 말이다. 인지 과학은 모든 인지과정을 일종의 정보처리과정으로 해명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 인지과학은 인간 정신의 적어도 인지적인 부분은 일종의 컴퓨터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컴퓨터공학자나 인공지능학자들도 인지과학자에 속한다.) 고전적 인지과학은 포도어의 유명한 이른바 '두뇌의 언어' 가설이 제시하듯 인지과정을 본질적으로 통사적 기호를 조작하는 물리적 과정으로 파악해왔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연결주의적' 인지모델에 따르면 두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은 단순한 기호조작의 과정이라기 보다는 극단적으로 복잡하고 동시 다중처리적인 현상이라는 견해가 강력히 대두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두뇌의 정보처리과정을 고전적인 폰노이만식 정보처리로 보던 아니면, 연결주의가 주장하듯 분산병렬처리 과정으로 보던 중요한 것은 인지과학은 인지과정을 기본적으로 정보처리과정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가정하고 있으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정신 현상에 대한 '컴퓨터 모델 이론'이라고 궁극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정신현상을 본질적으로 정보처리과정으로 파악하는 인지과학의 눈부신 발달 그리고 특히 최근 10여 년간 연결주의 신경망이론의 혁명적인 발전이 시사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모든 정신현상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널리 간주되어 왔던 두뇌와 신경망 조직에 대해 우리는 과거 어느 때 보다 더 체계적이고 풍부한 과학적인 지식을 갖기 시작하였고 앞으로도 이런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과학적 진전의 배경에서 철학자나 심리학자가 아닌 생물학자와 두뇌신경과학자, 즉 크릭과 코흐에 의해 인간의 의식현상의 정체를 해명하려는 최초의 경험적인 가설이 1990년 제안되었다. 2) 주지하듯 90년대 이전 정신현상에 대한 심리철학의 주도적 이론은 반환원주의적 심리철학이었다. 다시 말해 적어도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정신현상 그 중에서도 특히 '감각질'(qualia) 이라 불리는 '현상적 의식'은 대체로 환원주의적 설명 즉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크릭과 코흐는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 '현상적 의식'의 영역을 해명하려는 놀라운 과학적 가설을 제기했고 바로 이 점이 많은 철학자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런 맥락에서 의식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연구가 촉발되어진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짧은 글에서 최근에 쏟아진 의식에 대한 다양한 과학적 철학적 이론을 개괄할 생각은 없다. 단지 이 글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의식현상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이론들 중에서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에 가장 부합되는 이론 혹은 이론들은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나는 우리의 상식적인 '의식'의 개념이 '내적 자각'이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의식에 관한 고전적 이론에 기초를 두고있는 이론이라는 것을 일단 밝힐 것이다. 나는 이 전통적인 이론의 공과를 따져보고 이 이론이 담고 있는 통찰을 극대화한 이론이 최근에 마이클 타이와 드레츠케에 의해 제안된 의식의 표상주의적이론 (representational theory)임을 밝히고자 한다. 나는 결론적으로 표상주의적 이론이 왜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이론이며 이런 사실이 어떤 철학적 함축을 갖는지를 고려해 보고자한다. 물론 여기서 나는 이 이론이 단지 자연주의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인지과학적 입장이나 철학적 입장에서 최상의 선택 가능한 이론이라는 것을 논증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형이상학적 이유만으로 판단하자면 우리 모두가 실패한 이론으로 간주하는 심신 동일론이 가장 '자연주의적 이론'일 것이다.) 이론의 성패는 일차적으로 설명력의 문제다. 따라서 의식에 대한 모든 철학적 이론은 최소한 의식의 본성과 기능 그리고 존재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야 한다. '자연주의적 입장'은 여기서 설명 전체가 최소한으로 전제해야 할 형이상학적 제약일 뿐이다.
이 목표를 위해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Ⅱ절에서 나는 의식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배경이 되는 기본적 개념들을 구분한다. 먼저 나는 정신적 현상 일반과 '의식적' 정신 현상의 관계를 논한다. 예컨대 모든 정신현상은, 데카르트가 주장하듯 또한 의식적인 현상인가? 무의식적이지만 여전히 정신적인 현상도 존재하는가? 이런 물음은 궁극적으로 '의식적' 또는 '의식'이란 말이 적용될 수 있는 외연 결정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 혹은 '의식적'이란 개념이 가질 수 있는 애매성 살펴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이른바 '상태의식'과 '행위자의식'의 구분을 살펴볼 것이다. Ⅲ 절에서는 Ⅱ 절에서 제시된 기본적인 개념 구분을 근거로 이론 이전의 '의식'에 대한 상식적인 개념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가를 점검하고자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상식적인 '의식'의 개념이 기본적으로 17세기의 죤 록크로부터 출발하는 의식의 '내성'(inner sense)이론에 기초하고있음을 보일 것이다. "의식이란 인간이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지각(perception)"이라는 록크의 유명한 정의는 우리의 상식적이고 대중적인 의식에 대한 견해를 반영한다. 나는 이 절에서 기본적으로 이 록크의 이론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형태가 암스트롱과 로젠탈 등에 의해 제안된 의식의 "고차적 사유'이론-HOT이론 (Higher Thought Theory)- 임을 밝히고 이 이론에 대한 여러 가지 반론들을 검토할 것이다. 나는 여러 철학자들의 반론과는 달리 이 이론이 놀랍게도 쉽게 논파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며 이 이론이 표상주의적이론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 제공하는 이론이라는 사실을 논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드레츠케를 중심으로 제기된 의식의 표상주의적 이론을 아주 간략히만 소개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표상주의 이론 자체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의식의 문제에 대한 인지과학적 철학적 입장에 어떤 의의가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론이 애초에는 상식에 기초한 록크 류의 의식에 대한 고차적 사유이론에 대한 반동으로 제시되었지만 실은 기본적으로 같은 철학적 노선에 선 이론임을 밝힌다. 나는 이론이 어떤 의미에서 자연주의적인가 그리고 의식의 문제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자연주의적 이론이 가능하다는 것이 어떤 철학적 함축을 가질 수 있는가를 음미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의식 현상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부터 시작해보자.
Ⅱ. 정신/의식, 상태적/행위자 의식 그리고 지향성/현상성
모든 정신적인 상태는 의식적인 상태이고 또한 역으로 모든 의식적인 상태는 정신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데카르트가 말하듯 정신현상의 본성은 의식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마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믿는 사람들은 이 물음의 답이 부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심층심리학에 따르면 명백히 정신적인 현상 즉 믿음과 욕구들 중에서 '무의식적' 이고 그런 의미에서 '억압된' 정신상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우리가 굳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모든 정신 상태가 의식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답해야 한다. 예컨대 당신에게 "노원구 상계동의 면적은 알래스카 주보다 적은가?"하고 묻는다면 물론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이 물음이 제기되기 전까지 당신은 한 번도 의식적으로 정확히 이런 내용의 믿음 가져본 적이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이 믿음을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물음이 던져지기 전의 당신의 믿음체계를 고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신의 믿음 체계는 이미 이 믿음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인식론에서 우리는 이런 믿음들은 흔히 '성향적' 믿음이라고 부른다. 성향적 믿음들이란 인식 주체가 한 번도 '의식의 전면'에 떠올려 본적이 없더라도, 그 인식주체의 믿음 체계에 내포된 것이라고 간주해야하는 방대한 량의 믿음들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정신적인 상태가 의식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는 모든 의식적인 상태는 또한 정신적인 상태인가를 물을 수 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의식적인 상태'라는 말에 내포된 애매성에 주의해야 한다. 예컨대 지금 나는 내 앞의 모니터의 상태를 의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의식하고 있는' 상태는 모니터의 상태이고 그것은 물론 정신적 상태도 의식적 상태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모니터를 의식하고있을 때 내 마음에서 발생하는 의식적인 상태가 있다. 그것은 "모니터가 지금 깜박이고 있다"는 명제 내용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지각적 믿음의 상태이다. 3) 물론 이 경우 이 지각적인 믿음이나 지각 자체는 물론 의식적일 수 있다. 이 애매성을 구분하기 위해 철학자들은 상태의식과 행위주체의식을 구분한다. 나는 지금 모니터 화면을 의식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행위주체의 의식을 말하는 것이고 나의 지각 혹은 감각 상태 자체가 의식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상태의식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의식적인 상태는 정신적인 상태인가'하는 원래의 물음은 이제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 물음이 나라는 행위주체가 의식하고 있는 상태는 모두 또한 정신적인가 하는 물음이라면, 그 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모니터의 상태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나라는 행위자가 모니터를 의식하게끔 해주는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 즉 지각 혹은 지각적 믿음 자체는 물론 정신적 상태이다. 즉 행위주체 의식은 상태 의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보다 흥미로운 관점은 행위자의 의식의 대상을 정신적인 상태, 즉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만 국한할 때 이 두 의식의 어떤 상호관계를 갖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주어진 임의 정신적인 상태가 의식적인 상태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그 정신적인 상태의 소유주인 행위자 자체가 그것을 의식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고 답한다면 우리는 한가지 전통적인 의식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론에 도달한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 모든 정신적인 상태나 사건이 의식적인 상태나 사건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신적 상태중에서 의식적인 상태를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단순한 정신상태를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직관적으로 가장 단순한 답은 그 정신 상태를 당신이 의식할 때라는 답이다. 우리는 앞에서 상계동의 크기에 관련된 '무의식적' 성향적 믿음이 의식적인 믿음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 경우 무엇이 그 무의식적 믿음을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르게 하였는가? 직관적으로 답하자면 당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또 주목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멀리 록크나 칸트에게서 비롯된 이른바 의식의 '고차사유' 이론이란 바로 이런 직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론이다. 따라서 얼핏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행위 주체의식과 상태의식의 구별은 의식의 이론에 중대한 함축을 갖는 구별이다.
이왕 '의식' 혹은 '의식적'이라는 말이 갖는 애매성을 지적한 이상, 이 낱말들이 갖는 또다른 애매성을 지적해보자. 옥스퍼드사전에 따르면 이 두 단어는 각기 12개와 8개의 상의한 의미를 갖는 매우 다의적인 용어이다. 이 다양한 의미들 중에서 우리는 '의식' 혹은 '의식적'이란 말이 개인의 심리적인 상태나 능력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특정 공동체나 집단에게 적용되는 의미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국민 감정', '국민 정서' '문화 의식'과 같은 말들은 특정 개인의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의 개인들의 집합들에 의해 공유되어진 믿음이나 욕구 혹은 견해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의식의 개념은 이런 의미의 의식이 아니다. 한편 '의식적'이란 말은 목적어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동적'(intransitive)인 용법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목적어가 반드시 필요한 '타동적' (transitive) 용법도 있다. 4) 예컨대 우리는 단순히 '그는 의식이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는 자신의 용모를 의식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앞의 구분에 따르면 전자는 자동적 행위자의식이고 후자는 타동적 행위자의식이다. 나아가 우리는 '의식' 혹은 '의식적'이란 개념이 다양한 애매성을 가질 뿐만 '대머리'라는 말처럼 본질적으로 모호한 개념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는 직관적으로 개나 원숭이 같은 고등동물이 의식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들도 분명 고통과 배고픔을 아는 존재인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살이나 파리는 의식적인가? 아니면 밟으면 꿈틀한다는 지렁이는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계통발생적 동물들의 나열 중 정확히 어디에서 의식이 시작하는 것인가?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제까지 나의 논의가 옳다면, 모든 정신현상의 본성은 의식이라는 데카르트 식의 논제는 거짓이다. 이 말은 정신 현상 일반이 '의식성'이란 단일 개념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현대철학에는 정신현상 일반을 규정하는 두 개의 개념이 존재한다. 하나는 프란츠 브랜타노로부터 유래하는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현상적' (phenomenal)의식 혹은 감각질(qualia)이라는 개념이다. 예컨대 김재권 교수가 정신현상 일반을 이 두 개념을 사용해서 어떻게 파악하고있는지 살펴보자.
통상 정신적인 현상은 크게 두 가지 기본적인 범주로 나누인다. 한 부류는 고통이나 촉감이나 색감각과 같은 감각적 질적인 상태 (감각질)이며 다른 한 부류는 믿음 욕구 의도와 같은 지향적 상태들이다. 전자는 직접적 접근과 사밀성(privacy)과 같은 정신 현상의 인식적 기준을 만족시키는 전형적인 사례들이고, 후자는 지향성 기준을 만족시키는 정신적인 상태의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의문이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어떤 공통적 속성 때문에 감각적 상태와 의식적 상태 모두가 "정신적"인 상태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의 통증과 믿음이 "정신현상"이라는 하나의 범주 하에 포괄될 수 있도록 해주는 공통적인 속성은 무엇인가? 이들은 물론 "질적이거나 지향적"이라는 선접속성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이런 답은 빨간 대상과 둥근 대상들이 모두 "붉거나 둥근"이라는 속성을 만족시킨다고 말함으로써 붉음과 둥근의 공통성을 찾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 물음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정신현상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단일한 개념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5)
여기서 김재권은 정신 현상 일반을 이처럼 지향성과 비지향적인 감각질 혹은 '현상적'의식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으로 상이한 범주로 구분하는 현대 철학의 표준적인 구분을 소개하고 이 구분을 근거로 한 가지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를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정신현상을 이처럼 지향성과 감각질이라는 두 개의 속성으로 파악하는 철학의 전통적이고 표준적인 구분에 따르면 정신현상 일반에 대한 구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지도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독도는 아름답다"는 나의 믿음이 대표적인 지향적 상태라는 말은, 내 믿음이 독도에 관한, 즉 독도라는 대상을 지향, 지칭하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믿음은 '지칭'(referential) 지향성을 갖는다. 한편 믿음은 그 믿음의 내용이 항상 예컨대 독도는 아름답다'와 같은 명제의 내용으로 표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내용 지향성을 (content intentionality) 갖는다고 말해지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명제적 태도라고 불린다. "독도는 아름답다"는 명제는 나의 믿음의 대상일 수도 있고 나의 바램, 혹은 일본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믿음, 지식, 욕구, 바램, 기대, 희망 등 인간의 인지적 삶에 결정적인 부분을 이루는 방대한 정신현상의 영역이 처럼 명제적 내용과 그에 대한 태도로 체계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고, 주지하듯 바로 이런 맥락에서 브렌타노는 정신 현상의 본성을 지향성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6)
하지만 김 교수가 지적하듯 고통이나 간지럼, 향기로운 커피냄새에 대한 느낌과 같이 우리가 단순한 감각이라고 부르는 인간 정신 현상들 일반은 전혀 다른 특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한마디로 이런 현상은 "비지향적"이다. 김재권이 말하듯, "고통이나 간지럼 같은 감각들은 두 종류의 지향성 중 어느 것도 나타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고통의 감각은 어떤 것을 가리키거나 어떤 것에 "관한" 것 같지 않다. 또한 그것은 믿음이나 의도가 내용을 갖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내용을 갖지도 않는다. 내 무릎의 통증은 내가 또다시 무릎의 인대를 다쳤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인과적 표식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7) 따라서 적어도 고통 같은 정신 현상은 지향성이 아니라 통상 그것들이 주체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이나 느낌에 그 특성이 있다고 간주되었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통의 느낌을 지칭하는 특성으로 '감각질' 혹은 '현상적 의식'이란 속성을 사용한다. 한편 우리가 "독도는 아름답다" 혹은 "1+1=2"라는 것을 믿을 때 거기에는 믿음에만 고유한 통증이나 간지럼 같은 어떤 고유한 느낌이 수반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나 의도와 같은 지향적 태도는 '비현상적'이다. 결국 이 정신현상에 대한 표준적인 개념 지도에 따르면, 정신 현상 일반은 믿음처럼 지향적이지만 비현상적인 상태 (영역 2) 와 고통 감각처럼 현상적이지만 비지향적인 상태 (영역 3)로 대별되고 바로 이런 이유로 김재권은 우리는 아직 정신현상에 대한 단일한 개념을 갖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지향성과 현상성이 정신현상을 대별하는 상반되는 기준이기는 하지만 이 두 기준을 만족시키는 정신 현상의 존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는 철수가 영희의 무례함에 분노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철수의 분노라는 정서(emotion)는 영희에 "관한" 것이고, "쟤는 아주 건방져"라는 명제로 기술될 수 있는 분노의 내용이 있다는 점에서 지향적 태도이다. 하지만 철수의 분노에는 또한 통상 우리가 '분노감'이라고 표현하는 특수한 느낌과 감정의 요소가 있다. 이것이 물론 정서의 현상적 의식의 부분이다. 정서 일반이 이처럼 지향성과 현상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이것이 지향성/현상성의 구분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분노는 통상 믿음과 욕구와 같은 지향적 태도와 그에 의해 초래되는 감정 즉 현상적 의식의 일종의 아말감 같은 (혹은 인과관계) 복합적 상태이고 각 부분이 양 특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은 아닌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8)
위의 정신 영역의 지도에서 우리가 "의식적"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히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이미 앞에서 우리는 "성향적" 믿음 그리고 행위주체가 묵시적으로 믿고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 많은 량의 "비발생적" 믿음들은 무의식적 정신 현상들이다. 즉 영역 (2)는 무의식적 정신 상태를 포함한다. 물론 (2)에는 내가 반성을 통해 명시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많은 믿음들- 예컨대 나는 지금 "빨리 이 논문을 마쳐야 한다"는 의식적인 바램을 갖고있다-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현상적 의식의 영역 (즉 (3)과 (1) 영역)에도 무의식적 정신현상이 있는지는 매우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컨대 느껴지지 않은 통증도 있는가? 무의식적, 경험되지 않는 가려움이 존재하는가? 고통의 고통스러움은 고통의 본질이 아닌가? 9) 하지만 우리는 흔히 절박한 상황에서 심한 상처를 입은 군인이 상처의 고통도 의식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 그렇다면 무의식적인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가?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현상적 의식과 지향적 태도의 차이점은 이것이다. 적어도 느낌의 요소가 내포되지 않는 믿음과 욕구는 그것이 의식적이건 아니건 통상 동일한 인과적 효과를 갖는다. 밥을 먹고, 운전을 하고, 운동을 하는 등 우리의 대부분의 일상적 행동은 물론 믿음과 욕구의 결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상적인 활동은 "의식적"이고 "발생적인" 믿음과 욕구 없이도 진행된다. 역설적으로 "의식적인" 믿음과 욕구는 일상적 행동을 방해한다. 당신이 "나는 배가 고프고 배부르기를 원한다. 고로 나는 숟가락을 입에 넣어야한다"는 의식적 행위 삼단 추론의 결과로 밥을 먹던 그냥 "무의식적으로" 수저를 들던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내 발가락의 가려움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 가려움이 "의식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즉 가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나의 발가락 긁기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상적 의식에 내포된 감각질은 그 의식 자체의 존재이유처럼 보인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 통증"이라는 말에 반감을 느낀다. 다시 말해 믿음과 같은 지향적 태도는 그것이 의식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특수한 인과적 효력을 갖지는 않지만 감각과 같은 비지향적 상태는 그것이 의식적이라는 바로 이유로 인과적 효력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차이점은 인지과학에서 왜 '의식'의 문제가 핵심적인 쟁점으로 등장하는가 하는 이유로 설명한다. 우리의 지도에 따르면 인지과학이 분석하는 '인지 과정'이란 본질적으로 명제적 태도로 분석될 수 있는 믿음 욕구와 같은 지향적 태도의 영역 (2)를 의미한다. 인지과학이 인간의 인지과정을 컴퓨터가 정보를 처리하는 정보처리 과정으로 가정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일상적인 문장과 같은 구조를 갖는 명제적 태도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이런 가정 하에서 두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독특한 기호구조가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것은 자연스런 가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고전적 인지과학의 가정이다.) 나아가 만일 우리가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이 인간의 그것과는 달리 '의식적인' 정신 활동이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인지과학자들은 적어도 믿음, 욕구, 의도 등 방대한 인간의 지향적 태도들 일반에 있어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는 아무런 인과적 차이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지적했듯 지향적 태도의 인과적 효력은 그 내용의 의미론/표상적 속성의 문제이지 현상적 속성의 문제는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10) 하지만 우리가 적어도 지향적 태도의 영역에서 그럴 듯 해 보이는 이런 주장을 현상적 의식과 감각의 영역 (3)에 적용하면 그 결과는 지극히 반직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컴퓨터는 어떤 면에서 인간보다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인지'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책상 위의 PC가 그 어떤 고통이나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지극히 분명한 우리의 상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금의 기능주의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이 인간 정신현상의 일부 즉 지향적 태도 부분만을 해명하는 이론이라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이론일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해 과학적 심리학과 인지과학이 정신현상 일반에 대한 완전한 과학적 이론이기를 지향한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현상적 의식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쏟아져 나온 '의식'에 대한 과학적 철학적 이론들 대부분은 적어도 "현상적 의식"을 해명하려는 시도들로 보인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미 우리가 보았듯 의식적인 현상은 내가 "문제 영역"이라고 불렀던 영역 (2) 즉 현상적 비지향적 의식의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향적 태도의 경우도 일부는 '의식적' 현상이며 일부는 그렇지 않고, 만일 '무의식적 고통'과 같은 것이 있다면 현상적 상태의 일부도 마찬가지로 무의식적 상태일 수 있다. 한마디로 의식은 정신 현상 영역 전체에 고루 나타나지만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같지는 않은 현상이다. 이 사실을 굳이 지적하는 것은 의식에 대한 철학적 이론은 모든 영역의 의식 현상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네드 블락이 지적하듯 11) 때로 특정 이론은 단지 특정 영역에서만 설득력을 갖는 이론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제 그러면 적어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혹은 통속 심리학적으로 어떤 심리현상을 '의식적'인 것으로 간주하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Ⅲ. 고전적 의식 이론: HOT 이론
암스트롱의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 '의식' 개념의 구분을 살펴보자. 마음속에서 어떤 정신 활동이 일어난다면, 즉 정신적인 어떤 것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 정신 상태는 전적으로 무의식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다. 단 하나의 아주 미약한 감각이라도 발생한다면 그만큼 그 사람은 의식적인 것이다. 즉 전적으로 무의식적인 것은 아니고, 나는 이런 의미의 의식을 "최소한의" 의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과 지각간에 특별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지각에는 자신의 환경과 자신의 몸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이 있다. 만일 어떤 이가 지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의식적인 것이 아니며, 지각을 하면 의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의식적'이라는 의미가 있다. 예컨대 어떤 이가 꿈을 꾼다고 하자. 정신활동이 발생하므로 그는 전혀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그는 최소한의 의식이 있다. 하지만 그는 어떤 명백한 의미에서 무의식적이지 않은가? 자 그 사람이 주변환경과 몸의 상태를 지각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하자. 나는 이 사람이 단순히 꿈을 꿀 때와는 다른 의미에서 의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경우 그는 "지각적" 인지(awareness)를 갖게 되었다고 말하자. 이것이 두 번째의 "의식"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지각적 의식은 최소한의 의식을 함축하지만 후자가 전자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의식과 지각적 의식 모두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의식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세 번째 의미의 '의식'이 있다. 여러 가지 사례들이 제시될 수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장거리 운전사의 사례이다.
..야간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운전을 한 후에, 우리는 우리가 한동안 무엇을 하고있는지 의식하지 않고도 운전을 하고있었다는 것을 "깨닫게"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퍼뜩 정신이 드는 경험은 놀라운 경험이다. 이 경우 우리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우리 상태는 무의식적이었다고 기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장거리 운전자는 우리가 앞서 말한 두 가지 의미의 '의식'이란 의미에서는 의식적인 상태에 있었다. 즉 정신활동이 있었고, 그 중의 일부는 지각활동이었다. 즉 최소한의 의식과 지각적 의식은 존재하고 있었다...하지만 이 경우 여전히 다른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의식이 결핍되어있고 그것은 가장 흥미로운 의미에서의 '의식'이 여전히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세 번째 의미의 의식을 "내성적" (introspective)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내성적 의식이란 우리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상태와 활동에 대한 지각과 같은 인지(awareness)이다. 12)
장거리 운전자의 사례에서 보듯, 우리 일상의 대부분을 이루는 과정들은 어떤 의미에서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눈을 떠서 잠들기까지 수없이 많은 감각 지각, 사유 등 엄청나게 많은 정신활동이 연속적으로 때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이 수많은 정신활동 전부를 모두다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의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의식'이라고 간주하는 정신 상태는 이 수많은 정신활동 중에서 우리가 선택적으로 주목을 기울이는 정신적 현상이 아닐까? 물론 이것이 록크가 말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지각(perception)' 13) 으로서의 의식이고, 칸트가 말하는 '내감' (inner sense) 이나, 보다 일반적으로 수많은 철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내성' (introspection) 이라고 부르는 인식 능력은 바로 이처럼 어떤 의미에서 무의식적인 정신활동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실로 이처럼 의식이란 우리의 수많은 정신상태 중 우리의 "마음의 눈" (inner eye)에 비추어진 현상이라는 견해는 적어도 서양의 경우 아주 전통적이며 고전적인 견해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식의 근간을 이루는 견해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김재권도 "그것이 일정한 설득력을 가지며, 우리가 의식적인 경우로 인정하는 전형적인 정신상태에 잘 부합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14) 흔히 "자기 감시" (self-monitoring)기능 이론이라고 불리는 이 고전적이고 또 그런 의미에서 상식적인 견해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간결한 의식에 대한 정의로 주어질 수 있다.
(HOT) 임의의 정신적 상태 m은 의식적이다 =df. m은 주체 S의 상태이고, 인식주체 S는 m에 대한 고차적 표상(higher order representation)을 갖는다.
이 정의에서 내적 상태에 대한 "지각"이나 "인지" (awareness)라는 통상적인 표현 대신 "표상"이란 용어를 사용한 까닭은 철학자에 따라 m에 접근하는 방식의 다양성을 포괄하기 위해서이다. 즉 때로 그것은 m에 대한 메타 '지각'일 수도 메타 '믿음'일 수도 혹은 메타 사유일 수도 있고 메타 '자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1차적 상태에 대한 메타적 표상이 있고 그것이 주어진 내적 상태를 의식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이 이론의 공과를 따지기 전에 일단 나는 이 이론의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이미 보았듯 이 이론은 전통적인 이론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통속 심리학적 가정의 근거를 이룬다는 점에서 상식적 이론이다. 그런데 내생각으로 놀라운 점은 이 고전적 이론의 아이디어가 예컨대 암스트롱의 경우 물리주의적인 입장에서 의식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고안되고 발전된 이론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의 상식의 연장에 물리주의적 의식론이 주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이론의 어디가 물리주의적인가? 이 견해는 의식을 본질적으로 임의 시스템의 일차적인 감각과 지각의 정보내용을 감시하는 내부적 감시장치의 기능하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의식에 대한 기능주의적 설명의 문을 여는 셈이다. 일단 이처럼 의식이 본질적으로 시스템 내부의 다양한 정보의 조정통합을 하는 자기감시 장치라는 해석이 일단 성립하면, 이 장치가 구체적으로 어떤 물리적 체계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탁상용 컴퓨터나 전자로봇, 단순한 승강기에도 시스템 자체의 내부를 자가진단하는 장치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의식의 본질적 기능과 실현을 해명할 수 있다면, 의식은 더 이상 물리주의자에게 신비로운 현상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이거 (W. Seager)가 이 이론을 "정신주의적(mentalistic) 환원" 이라고 부른 것은 매우 흥미롭다. 15) 여기서 환원은 두 단계 환원이다. 첫단계로 의식적 정신 현상을 무의식적 정신현상으로 환원한다. 두 번째로 이 무의식적 정신현상이 물리적으로 실현되는 메카니즘을 설명한다.
둘째로 이 이론을 우리가 핵심적인 문제영역이라고 불렀던 현상적 의식 혹은 감각질의 영역에 적용시키면 이 이론은 우리가 순수하게 현상적이고 비지향적인 것으로 보았던 정신영역을 표상적인 것, 다시 말해 지향적인 것으로 정의하려는 이론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앞에서 의식의 문제 자체가 특히 최근의 인지과학의 핵심적 잇슈 자체로 등장한 까닭이 그것이 지향적이고 표상적인 명제태도적 분석의 영역이 아닌 비지향적 현상적 정신영역인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하지만 HOT이론에 따르면 현상적 의식은 특수한 표상적 상태로 정의될 수 있다. '왜 정신적 현상은 지향성과 현상성이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범주로만 파악되는가' 하는 김재권의 "해결되지 않은 난제"를 기억하라. HOT가 옳다면 모든 정신현상은 본질적으로 지향적 표상적이다. 이것은 물론 인지과학의 완전성에 대한 결정적 스텝이다. 내게 놀라운 것은 이 결정적인 단서가 아주 고전적인 이론에 파묻혀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의식의 고차적 표상이론은 옳은 이론인가? 먼저 드레츠케의 반론을 살펴보자. 16) 그는 앞서 우리가 상태 의식과 행위자 의식이라고 부른 구별을 도입하고 이 구분을 근거로 고차적 표상이론의 핵심 논제 (HOT)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정신상태 m이 상태적 의식일 수 있는 필요충분 조건은 m에 대한 행위자 의식이다. 이렇게 보면 드레츠케 반론의 핵심은 상태 의식은 행위주체 의식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반론이다. 즉 행위자 의식은 상태의식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Ⅱ절에서 우리는 행위주체 의식은 또한 대상의식과 사실의식으로 나눌 수 있음을 보았다: 즉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앞에서 놀고 있는 고양이는 오븐이라는 대상을 지각할 수 있고 그 지각은 의식적 상태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양이가 "이것은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이다"라는 사실을 의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드레츠케에 따르면 사실의식은 '마이크로 웨이브오븐'과 같은 최소한 개념적 이해를 필요로 하고 고양이나 갓난아기는 이런 개념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분을 근거로 그는 "자신이 그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식함이 없이도 우리는 의식적인 경험을 가질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의식적인 상태가 발생하는 사람이 그 상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메타적으로] 인지함이 없이도 의식적인 상태는 발생할 수 있는가?" 17) 하고 묻는다. 물론 고양이 사례는 행위자의 메타적 의식이 없는 대상 의식이 가능한 사례이므로 고차적 표상이론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드레츠케의 이 반론은 고차적 표상이론의 미묘한 특정을 간과한 반론이다. 드레츠케의 반론과는 달리 이 이론은 주어진 경험이 의식적이기 위해 행위자가 그 경험의 내용에 대한 사실적 메타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이론은 1차적 정신 상태 m이 의식적인 것이 위해 m에 대한 메타 표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m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메타 의식을 R(m)이라 하면, 이론은 이 메타 의식 R(m) 자체가 의식적일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m이 의식적이 위해 R(m)이 발생하기만 하면 되지 그것이 의식적으로 발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메타 의식 R(m)자체가 의식적이기 위해 (HOT)에 따르면, 우리는 메타메타 의식 즉 RR(m)이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드레츠케 라인의 반론은 실패한다.
그러나 김재권의 다음과 같은 반론은 똑같은 우려에서 출발하지만 옳은 방향의 반론인 듯 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그런 [고차적] 사고들을 가질 수 있는 생명체들만이 의식적일 수 있다는 것과, 이것은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동물들을 의식의 영역에서 배제하게된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주목해야 한다. 의식이 함축하는 고차적 사고들은 "나는 내가 M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라는 형식을 갖는다...이러한 사고를 갖는 것은 최소한 자신을 지칭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며, 이것은 자아의 개념 및 다른 사물들과 다른 주체들로부터 구분되는 자신에 대한 개념을 갖는다는 것을 요구한다...
적어도 직관적으로 특정 하등 동물들도 (아마도 물고기나 파충류라도) 감각과 지각을 갖는 듯하며, 이들의 감각과 지각은 그들에게 현상적으로 표상될 것이다. 그러나 이 동물들에게 의식의 고차적 사유이론이 요구하는 자신에 대한 사고를 가질 인지적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사실 우리가 이런 생명체들에게 믿음과 사고 지향적 상태들을 귀속하기를 원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 하등동물들의 의식을 갖는다는 것을 부정할 것인가? 의식적 감각을 갖는 것과 그런 감각들에 대한 사고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인지적 능력을 요구한다. 18)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드레츠케와 달리 여기서 김재권은 로젠탈의 19) 의식의 고차적 사유 이론을 비판하고 있지만, 드레츠케와 마찬가지로 현상적 지각이나 감각과는 달리 메타 사유는 개념화를 필요로 하고, 따라서 로젠탈의 이론이 금붕어나 바닷가재 같은 하등동물이 고통 같은 단순한 감각조차 가질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불합리한 이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김재권이 m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고차 사유자체가 의식적이라고 가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자. 이것이 드레츠케와의 차별성이다. 둘째 우리는 바닷가재가 "나는 내가 고통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awareness)"는 것처럼 매우 복잡한 사유를 하지 않는다고 직관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김재권이 지적하듯 만일 고차적 사유이론이 하등동물에게 감각 경험을 부여하기 위해 이처럼 복잡한 사유과정을 요구한다면 분명 그 이론은 불합리한 이론이고 폐기해야 한다. 그러나 고차적 사유이론이 의식적 감각을 위해 이처럼 복잡한 메타 사유를 요구하는가?
김재권 이외에도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20) 이 반론을 회피하는 한 가지 방식이 있다. 그것은 먼저, 주어진 정신 상태 m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고차적 표상을 로젠탈처럼 고차적 사유나 믿음과 같은 지향적 태도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 '모니터링', 혹은 단순한 감지나, '스캐닝'같은 비지향적 접근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록크가 의식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지각'이라고 규정했던 것을 상기하자!) 귀즐디레 (G. Guzeldere)를 따라 이 이론을 로젠탈 식의 HOT (Higher-Order Thought Theory)와 구별하기 위해 HOP (Higher-Order Perception Theory) 이론이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HOP 이론가들에 21) 따르면 김재권의 반론에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답변이 가능하다: 바닷가재처럼 하등한 동물들에게 고통과 같은 의식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복잡한 메타적 사유나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내부 상태를 지각하거나 스캐닝 할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정신 상태를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은 고차적 사유나 믿음이 아니라 메타지각 혹은 메타스캐닝이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그 어떤 복잡한 개념화의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김재권 식의 반론에 응답하는 보다 좋은 방법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먼저 로젠탈 식의 고차적 사유이론 조차, 고통이 의식적인 고통이 되기 위해 적어도 김이 말하는 것과 같은 고차적이고 복잡한 사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이 논증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살펴보자. 당신의 무릎에 가벼운 통증이 발생한다고 가정하자. HOT에 따르면 이 통증은 아직 당신에게 아픈 것으로 느껴질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의식적 고통이 되자면 그것은 메타 사유를 요구한다. 자 이제 이처럼 무의식적 통증이 언제 의식적 통증으로 변하는가? 그것은 '아 무릎이 아프구나!' 하는 번개같이 짧은 믿음이 발생하는 그 순간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이 믿음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될 필요도 없고 소위 '내적언어'로 인지될 필요도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내 무릎이 아프네'라는 명제적 내용을 갖는 믿음은 무릎의 고통에 관한 것이고 따라서 메타 믿음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 무릎이 아프네"라는 믿음은 "고차적이고 복잡한" 것인가? 김재권은 위에서 감각이 의식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의식이 함축하는 고차적 사고들은 '나는 내가 M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라는 형식을 갖는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자. 다시 말해 김에 따르면 당신이 무릎의 통증을 의식하기 위해 당신이 가져야 하는 믿음의 내용은 단순히 "내 무릎이 아프다"라는 내용이 아니라 "나는 내 무릎이 아프다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라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김재권의 말에는 "차원의 혼동"이 있다. '내 무릎이 아프다'라는 믿음을 귀속시키는 것과 '나는 내 무릎이 아프다는 것을 인지하고있다'라는 믿음을 귀속시키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22) 후자는 김의 말대로 "고차적이고 복잡한 인지능력'을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HOT이론이 요구하는 것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이다. 이제 문제는 보다 단순한 전자의 믿음도 고차적이고 복잡한 인지능력을 요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이것은 김이 자그마한 실수다. 그러나 믿음의 고차성과 복잡성이 문제의 핵심인 상황에서는 중요한 함축을 가질 수 있는 논점이 될 수도 있다. 방금 우리는 고통이 의식적인 고통이 되기 위해 HOT가 필요로 하는 메타 믿음의 정확한 내용을 기술하기 위해 경험이 발생하는 주체 자신의 일인칭적 관점을 취했다. 그러나 무릎의 고통이야기가 전혀 모르는 제3차 예컨대 영희의 이야기라고 간주하고 우리가 그것을 전적으로 3인칭 즉 제 3자적 관점에서 기술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영희 자신이 '내 무릎이 아프다'라고 --일인칭적 관점에서--기술할 메타 믿음의 발생을 우리는 제 3자적 관점에서 "영희는 영희의 무릎이 아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간접화법으로 기술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김의 "나는 내가 M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과 같은 형식임에 주목하라.
무릎의 통증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 HOT이론이 "나는 내무릎이 아프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내용의 고차적 메타 믿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김의 주장처럼 "자아의 개념과 및 다른 사물들과 다른 주체들로부터 구분되는 자신에 대한 개념"을 요구하고 그것은 바닷가재는 고통을 느낄 수없다는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HOT이론은 이미 보았듯이 보다는 훨씬 단순한 "내 무릎이 아프다" 메타 믿음만을 요구한다. 우리의 문제는 이제 이 믿음이 김이 말하듯 '자아'의 개념을 요구하는가 하는 문제로 환원된다. 그것이 자아의 개념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야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 믿음의 내용에 "내 무릎" 이라는 소유격 형용사가 붙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김재권의 논점은 여전히 옳아 보인다. 즉 나는 고통이 의식적 경험이 되기 위해 자아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김의 논점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컨대 우리 모두가 하등 동물로 간주하는 바닷가재와 같은 동물에도 김재권이 요구하는 자아의 개념 및 다른 주체들로부터 구분되는 자신에 대한 개념과 같은 개념화가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자 바닷가재의 집게 발에 통증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HOT가 옳다면 이 통증이 아픈 것으로 느껴지자면 바닷가재에게 "내 발이 아프네"라는 내용의 믿음(?)과 같은 것이 발생해야 하고 그것은 '나' 즉 '자아'의 개념화를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먼저 HOT가 요구하는 '개념화'가 반드시 인간의 경우처럼 본질적으로 '언어적'인 것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먼저 주목하자. 만일 그것이 언어적인 것을 요구했다면 '자아'개념을 내포하는 복잡한 논증없이도,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에 의식을 박탈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닷가재가 집게 발에 통증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비언어적 자아의 개념화는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자신의 집게 발과 그것이 아닌 것들, 자신과 자신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한 구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의미의 자아 개념화는 바닷가재를 비롯한 수많은 하등동물에서도 발견된다고 생각할 약간의 경험적 증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한 마리 매우 배가 고픈 바닷가재가 있다고 가정하자. 주지하듯 바닷가재나 꽃게 같은 육식동물들은 배가 고프면 자신의 동족을 잡아먹고 심지어는 자신의 새끼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흥미로운 경험적인 질문이 있다. 주변에 아무런 먹을 것이 없는 바닷가재가 아사 직전의 상태에 있을 때 왜 자신의 맛있는(?) 몸통을 뜯어먹어서 굶주린 배를 채우지 않는 것인가? 통 속에 갇힌 바닷가재가 굶어 죽는다는 것은 알려진 경험적 사실이다. 만일 바닷가재가 자신의 집게 발과 먹이의 집게발을 구별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몸통과 먹이의 몸통을 구별하지 못했다면 바닷가재라는 종은 이미 멸종했을 것이다. 이런 진화론적 사고는 조개나 말미잘 같은 모든 하등 육식동물에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내 생각으로 이들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우리는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자신의 집게발과 먹이의 집게 발의 구분에 대한 구별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의 '자아' 개념을 편의상 '최소한'의 자아 개념화라고 부르자. 이 최소한의 자아 개념화가 바닷가재를 비롯한 수많은 하등 동물에게도 가능하다면 HOT이론이 어떻게 바닷가재가 고통을 경험하는가를 설명하는데에는 아무런 원리적인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이제까지 우리는 정신적 사건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메타표상이 필요조건일 수 없다는 내용의 반론들을 살펴보았다. 만일 이제까지의 나의 논증이 옳은 방향이라면, 우리는 아직 HOT이론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메타 표상이 의식의 충분조건일 수 있는가 하는 김 재권 교수의 또다른 반론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정신과 의사와 몇 번 만난 후 당신의 친구에 대한 숨겨진 적대감을 인지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적대감을 의식적인 상태로 만들 필요는 없다. 당신은 그를 향한 적대감을 마음에 품고있다는 것을 이제 믿으며 아마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신의 감정을 의식적인 감정들로 바꿀 필요는 없다. 23)
이 글의 논점은 (프로이트 식의) 무의식적 정신 상태의 존재에 대한 메타믿음을 단순히 갖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모두 마술처럼 의식적인 것이될 필요는 없다는 논점이다. 고로 메타 믿음은 의식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내 생각으로 우리가 위에서 (HOT) 라고 표시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이론에 대해 이런 반론이 성립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컨대 우리의 마음의 심층에는 무수한 많은 무의식적 욕구와 믿음이 있다는 프로이트 이론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분명 이 무의식적 믿음들에 대해 메타적 믿음을 갖고 있지만 그 사실이 가정상 무의식적인 믿음들을 모두 의식적인 믿음들로 전환시켜 주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HOT이론은 이런 방식의 명백한 반론을 봉쇄하는 장치를 마련해야한다. 흥미로운 것은 로젠탈은 바로 이런 방식의 반론을 봉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부가 조항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24)
(R) 주체 S가 a [라는 1차적 상태]에 있음이 추론이나 감각적 정보 같은 부가적 정보를 통해 a에 대한 S의 메타 믿음을 인과적으로 야기하면 안된다.
이 부가 조항이 위와 같은 반론을 봉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정신 분석의사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숨겨진 무의식적 적대감을 발견한 사례의 경우 무의식적 정신 상태의 존재는 단지 추론을 통해 도달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신 상태를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적절한" 종류의 메타 믿음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HOT이론이 올바른 이론이자면 그것은 아무 종류의 메타의식이나 모두 다 대상 상태를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즉 이론의 성패는 정신 상태를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적절한" 종류의 메타의식과 그렇지 않은 메타의식을 원리적으로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다. 로젠탈의 경우에서 우리는 단지 그 한 가지 방식을 본 것 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HOT이론은 이처럼 적절한 메타의식과 그렇지 않은 메타의식을 구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는가? 여기에 원리적인 어려움은 없는가? 불행히도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현재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적절한" 메타의식은 주어진 m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메타 의식이고 아닌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설명은 아무런 설명력이 없는 이론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의식의 메타 표상이론은 의식에 대한 최근의 수많은 논의에서 빠짐없이 거론되는 이론이다. 그것은 이 이론이 얼마나 전통적이고 또 상식적으로 뿌리깊은 이론인가 하는 사실을 반영한다. 최근의 많은 의식이론들은 통상 이 고전적 이론의 문제점을 쉽게 논파하고 그 근거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나의 논의가 옳은 것이라면 약간은 놀랍게도 이 고전적 견해는 그다지 쉽게 논파될 수 있는 성질의 이론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방금 그것이 충분조건일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이론에 심각한 문제점을 제기한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반론은 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을 제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이론이 해결해야 할 과제만을 제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다음 절에서 이 이론의 본질적인 통찰 즉 의식을 표상적인 것으로 보는 이론을 검토함으로써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Ⅳ. 전망과 결론: 의식의 표상주의적 이론.
앞 절의 논의에서 나는 "의식은 내적인 인지"라는 고전적인 이론이 그다지 쉽게 논파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이론이 의식현상에 대한 인지과학적 접근 방식에 핵심적인 단서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해명하고자 노력했다. 이제 우리는 감각이나 지각같은 현상적 의식의 본질을 명시적으로 표상적 상태로 파악하고자 하는 의식의 "표상주의적 이론"을 다루고 그것이 인지 과학 일반에 어떤 함축이 있는가를 간략히 살펴 보고자한다.
아주 최근 마이클 타이와 드레츠케에 의해 제안된 이 이론의 핵심과 매력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의식에 대한 이론은 최소한 의식의 본성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또 왜 존재하는지를 해명해야 한다. 만일 인간의 의식적 현상이 전적으로 명제적 태도로 분석될 수 있는 지향적 표상적 태도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답은 간단히 주어질 수 있다. 의식의 본성은 표상적인 것이고, 표상적 상태의 본질적인 기능은 정보처리에 있다. 나아가 의식의 본질이 정보처리 기능이라면 왜 진화론적 입장에서 생명체의 생존을 위해 의식현상이 실현될 수 밖에 없는가를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주지하듯 인지 과학이나 기존의 철학에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세계에서 어떻게 표상적, 의미론적 현상이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이론이 존재한다. "보스톤은 아름답다"는 물리적인 글자도 보스톤의 상태라는 객관적 사실을 표상한다. 고로 당신의 두뇌의 어떤 전기 신호가 똑같은 도시의 상태를 표상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해명될 수 없이 신비한 현상은 아니다. 나는 앞에서 이미 적어도 명제적 태도로 분석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영역 즉 우리가 "지향적 표상적 영역 (2)"라고 부른 영역에서 의식은 특수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했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비지향적이고 현상적 의식의 영역이라고 불렀던 정신의 영역의 본성이 지향적이고 표상적인 것이라는 사실만 밝힐 수 있다면, 최소한 인지과학에서 의식의 문제라고 부르는 문제는 원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따라서 현상적 의식에 대한 표상주의적 이론의 성패는 표상일반이 어떤 기능을 하는가 또 어떻게 표상 자체가 가능한가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비표상적인 대표적 정신 현상으로 간주되어왔던 현상적 의식, 감각질의 영역이 어떻게 본질적으로 표상적인 상태인가를 해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표상주의적 이론은 정신현상 일반을 지향성과 현상성이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하는 철학의 아마도 가장 오래된 전통 하나를 근본적으로 파기하는 이론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표상주의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 뿌리 깊은 가정을 부정하는가 하는 이 이론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시함으로써 이 글은 마감해 보려고 한다. 그러면 왜 고통과 간지럼 같은 감각적 의식 현상적 의식이 비지향적 비표상적인 것으로 파악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특히 고통이나 간지럼 같은 일부의 정신현상들은 두 종류의 지향성 중 어느 것도 나타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고통의 감각은 어떤 것을 가리키거나 어떤 것에 "관한" 것 같지 않다. 또한 그것은 믿음이나 의도가 내용을 갖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내용을 갖지도 않는다. 내 무릎의 통증은 내가 또다시 무릎의 인대를 다쳤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인과적 표식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당신의 무릎의 통증이 당신의 인대가 다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당신의 멋있게 그을은 피부가 당신이 해변에서 주말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5)
고통, 간지럼 같은 대표적인 현상적 의식이 그 어떤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고통이 지칭적 지향성이 없다는 말이다. 철수에 대한 나의 생각이 철수에 관한 것이고 또 철수를 표상하지만, 고통이나 간지럼이 그 어떤 것도 지칭하거나 표상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물음에, 예컨대 마이클 타이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26) 만일 고통이나 간지럼이, 책상이나 의자처럼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대상같은 것이라면 고통자체는 어떤 것에 "관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유기체 의해 나타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고통이란 허구에 불과하다. 고통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고통이고 어떤 대상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은 고통이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철수의 두통, 영희의 치통처럼 고통이란 필연적으로 특정 주체에 특정 시점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아가 대부분의 모든 고통이나 간지럼은 인체의 특정 부위에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철수는 머리가 아프고 영희는 이빨에 통증을 느끼며, 갑수는 발가락이 간지럽다. 따라서 고통의 지향성을 논의할 때 우리가 물어야 하는 물음은 '고통이나 간지럼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하는 물음이 아니라 '철수의 두통과 영희의 발가락의 간지럼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하는 물음이어야 한다. 이 올바른 형식의 물음에 대해서는 아주 손쉬운 대답이 존재한다. 영희의 발가락의 간지러움은 영희의 발가락에 관한 것이고 영희의 발가락의 상태를 표상한다. 더구나 의학계에서 흔히 "phantom pain"이라 불리는 병리적 현상은 감각의 지향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주지하듯 발가락에 심한 무좀을 앓고있는 환자는 무좀이 있던 발 전체를 사고로 절단한 이후에도 발가락에 심한 가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이 환자의 가려움증은 발가락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지향적 대상의 경우처럼 가려움증의 지향적인 대상인 발가락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감각의 지향성을 해명하는 타이의 설명에는 뜨거움 차가움에 대한 감각, 고통과 간지럼같은 감각현상 일반의 인지주의적 기능에 대한 중요한 통찰이 담겨있다. 그것은 감각질 혹은 현상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감각현상의 본질적 기능이 우리 자신의 신체와 그 상태에 대한 정보를 표상하는 기능에 있다는 통찰이다. 주지하듯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지각현상은 우리가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직접적 창문이다. 한편 표상주의 따르면 고통, 간지럼 같은 단순 감각은 외부 세계의 일부이면서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대상 즉 우리의 몸과 그 상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물론 혹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현상적 의식의 지향성이 아직은 확립된 논제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다. 예컨대 철수가 느끼는 실연의 고통, 어린아이가 느끼는 어둠 속에서의 막연한 공포심, 혹은 멜랑콜릭한 무드와 같은 현상적 의식들을 살펴보라. 이처럼 다양한 정서 혹은 감정적 태도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특징은 이들 정서가 "지향"하는 그 어떤 특정 대상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무대상적" (objectless)이고 또 그런 의미에서 비지향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정신현상에는 강렬한 현상적 요소가 있다. 따라서 현상적 의식의 지향성은 확립된 논제가 아니다.
어둠 속의 막연한 공포, 멜랑콜릭한 무드, 심한 우울감이 특정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정서적 태도나 느낌이 그것이 비지향적인 것, 즉 아무런 지향적 대상도 갖지 못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우리가 '막연한 불안'이라고 부르는 정서는 불안의 대항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불안의 대상이 수시로 또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비지향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사태에 대한 보다 적절한 기술인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사람의 세계는 우울하다. 우울한 사람에게는 모든 대상이 우울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우리는 정보의 내용과 그 내용이 우리에게 현시되는 방식을 (mode of presentation)구별해야 한다. 이른바 무대상적 정서는 역설적으로 세계에 모든 대상에 대한 정보내용이 주관에게 현시되는 방식에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현상적 의식 일반이 적어도 '지칭적' 지향성을 갖는다는 것은 설득력 있는 논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내용 혹은 표상적 지향성도 또한 갖는 것인가?
김재권의 반론을 상기해보자: "내 무릎의 통증은 내가 또다시 무릎의 인대를 다쳤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인과적 표식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왜 내 무릎의 통증이 내 무릎의 상태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의미" 할 수 없는가? 숲 속의 연기가 숲 속의 화재가 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무의 나이테가 나무의 연령을 "의미"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김이 말하듯 여기에 내포된 것은 전자가 후자의 인과적 표지라는 의미의 "의미"일 것이다. 즉 그것은 드레츠케가 말하는 "자연적 의미"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 지식과 욕구와 같은 내용적 정신상태가 갖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이처럼 자연현상에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자연적 의미에 수반하고, 이 후자를 근거로 전자를 궁극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면, 무릎의 통증이 무릎의 이상 상태에 대한 인과적 표식이라는 김의 지적은 표상주의자들에게는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다. 다시 말해 고통과 같은 감각이 원초적 지향성 즉 자연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확인된 이상, 현상성과 지향성이란 양립할 수 없는 구분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는 가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눈치 빠른 독자는 드레츠케가 <지식과 정보의 흐름>이래로 인상적으로 수행해 온 "의미의 자연화"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왜 현상적 의식의 내용 지향성을 해명하는 안성맞춤의 도구라는 사실을 쉽게 간파하였을 것이다. 27) 따라서 나는 현상적 의식이 내용 지향성을 가질 수 있고 또 그것이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에 원리적인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처럼 전통적으로 비지향적인 것으로 간주되왔던 현상적 의식 혹은 감각질의 영역의 본성이 표상적인 것으로 확인될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현상적 의식"의 문제와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철학적 난제들이 일시에 해결될 수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아가 나는 타이와 드레츠케에 의해 제기된 이론 자체가 그 나름의 수 많은 문제와 퍼즐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표상주의적 의식이론이 형이상학과 인지과학의 난제로 여겨져왔던 의식의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자연주의적인 이론이 어떤 방향에서 제시될 수 있고 시도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는 중요한 철학적 함축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 그 함축을 음미하는 것으로 이제 논문을 마감하자.
의식, 특히 현상적 의식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은 궁극적으로 가능하거나 아니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일 그것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희로애락, 만족감등 우리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인간의 모든 경험은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형이상학적 제거주의를 택하거나, 인간의 경험은 궁극적으로 해명할 수 없다는 신비주의를 택하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는 없는 것 같다. 한편 의식현상에 대한 궁극적으로 자연주의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마찬가지로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매긴처럼 그런 설명이 원리적으로 존재하나 그 설명은 인간의 이해 영역을 초월해 있다는 새로운 형태의 신비주의를 택하거나, 아니면 표상주의자들처럼 용감하게 자연주의적 해명을 시도하는 것, 만일 어떤 이유에서든 의식에 대한 허무주의나 제거주의 신비주의의 선택이 우리의 맘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표상주의 이론을 진지하게 취급할 한 가지 좋은 이유를 발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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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N. S. Sutherland., ed, The International Dictionary of Psychology (Continuum, 1989) 참조
2) F. Crick and C. Koch, "Toward a neurobiological theory of consciousness", Seminars in the Neurosicences 2: 263-75. 현대생물학과 유전학의 혁명이 DNA발견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른바 유전자의 '이중나선' 구조를 해명한 유명한 크릭이란 학자를 기억할 것이다. 그 학자와 이 논문의 저자는 동일인물이다.
3) 내가 모니터의 상태를 지각할 때, 혹은 보다 간단히 모니터에 대한 지각이 발생할 때, 항상 나는 "모니터가 지금 깜박인다"와 같은 명제적 내용을 가지는 자각적 믿음을 가져야만 하는가? 개나 고양이도 이 모니터라는 대상을 지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지각 상태가 반드시 "모니터가 지금 깜박인다"는 명제적 내용을 지닌 믿음의 상태로 기술되어야 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믿음의 내용을 위해서는 최소한 '모니터'의 개념이 필요하고 개와 고양이는 '모니터'가 무엇인지 하는 개념을 갖고있지 않은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는 대상 지각과 사실지각을 구분하고 전자가 후자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구분은 드레츠케의 구분이다.
4) G. Guzeldere, "The Many Faces of Consciousness: A Field Guide," in The Nature of Consciousness, ed. by N. Block et al. (The MIT Press, 1997) :1-68
5) Philosophy of Mind, (Westtview Press, 1996), p.23. 강조 원문. <심리철학>, 하종호, 이선희 역, 철학과 현실사, 1997. 나는 가능하면 우리말 번역본을 따르나 필요한 부분을 수정하였다.
6) F. Brentano, Psychology From on Empirical Standpoint, A. Rancurello et al., 역 (Humanities Press, 1973).
7) Ibid., p.22.
8) 임일환, "감정과 정서의 이해", <감성의 철학> (민음사, 1996): 21-68 참조. 이 논문에서 나는 정서를 현상적 의식으로 파악하려는 이론의 전통과 그것을 지향적 태도로 파악하려는 이론의 갈등을 분석했다.
9) 나아가 정신 현상의 각 영역에 어떤 개별적 정신현상을 포함하는가 하는 것은 철학자마다 상이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예컨대 잔상과 같은 심적 이미지는 어느 영역에 속하는가? 하지만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지향성과 비지향성의 대비뿐이다.
10) 보다 극단적인 인지과학적 입장은 충분히 복잡한 정보처리 시스템은 이미 의식적인 현상을 나타낸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어디에선가 유명한 인공지능학자인 마빈 민스키가 초대형 수퍼 컴퓨터들은 이미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한다는 주장을 읽은 적이 있다.
11) N. Block, "On a Confusion about a Function of Consciousness,"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18 (1995): 227-87.
12) D. Armstrong, The Nature of Mind, (Cornell Univ. Press, 1981), in N. Block et al ed., The Nature of Consciousness, 722-24.
13) J.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Dover, 1959), p.138.
14) Op. cite, p165. 한편 한 철학자는 이 내적 지각으로서의 의식이론이 멀리는 아리스토틀의 De Anima까지 소급된다고 지적한다. G. Guzeldere 전게 논문 참조.
15) W. Seager, Theories of Consciosness, (R.K.P., 1999) 3장 참조.
16) F. Dretske, "Conscious Experience", Mind 102 (1993): 263-283. HOT이론은 많은 형태를 가질 수 있다. 드레츠케의 이 논문은 주로 암스트롱의 HOT이론을 목표로 한다.
17) Ibid. p272.
18) Kim, op.cit., p166.
19) D. Rosenthal, "Two Concepts of Consciousness," Philosophical Studies, 49 (1986): 329-59.
20) 예컨대 다음을 보라. F. Dretske, Naturalizing the Mind, (MIT Press, 1995), D. Chalmers, The Conscious Min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W. Seager, op.cit.
21) HOP 이론가로 분류될 수 있는 이론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D. Armstrong, op.cit, W. Lycan, Consciouness, (MIT, 1987), P. Churchland, "Reduction, Qualia, and the Direct Introspection of Brain States," Journal of Philosophy 82 (1985).
22) 적어도 영어와는 달리 우리는 신체의 부분에 '나의'라는 소유격을 붙이지 않는다. 우리는 "내 머리가 깨지는 듯이 아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머리가 깨지는 듯이 아프다"고 말한다.
23) Ibid., p.167.
24) Rosenthal, op.cit 및 "State Consciousness and Transitive Consciouness," Consciousness and Cognition 2 (1993): 355-63.
25) Kim, op.cit., p.22.
26) M. Tye, Ten Problems of Consciousness, (MIT, 1995), chapter 4.
27) 드레츠케의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임 일환, "정보, 지식, 인지 개념", 철학 연구 43집 특집 1권 (1999):3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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