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현대철학과 반휴머니즘
2. 철학의 종말과 과학기술
3. 휴머니즘 또는 형이상학의 극복과 회상적 사유
4. 하이데거의 탈윤리적 사유
5. 전체성의 이념과 자기의식에 토대한 휴머니즘
6. 무한성의 이념과 타자와의 관계
7. 존재론과 형이상학
8. 개방성과 주체성 : 상처받을 가능성과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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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西江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학술지명 人文硏究論集
ISSN
권 27
호
출판일 1999. . .
철학의 종말과 주체의 미래
강영안
5-815-9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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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철학과 반휴머니즘
"휴머니즘의 종언, 형이상학의 종말-인간의 죽음, 신의 죽음···이것들은 지성인들의 묵시론적 이념 또는 구호이다."1) 레비나스는 현대 철학, 그것도 특히 프랑스 철학의 흐름을 이렇게 '종말', '종언' 또는 '죽음'에 관한 묵시론적, 종말론적 담론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지적 분위기는 앞선 세대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유럽의 지적 전통은 대체로 휴머니즘을 옹호해왔고 휴머니즘의 실현을 문화 이상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휴머니즘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휴머니즘과 휴머니즘을 통해 옹호되던 인간의 '인간성' 자체에 의문을 품게되고 이러한 의문은 일반인에게조차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휴머니즘은 어떤 무엇으로 환원할 수 없는 본질이 인간에게 있다고 보는 세계관을 말한다.2) 인간에게는 어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고 존엄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위대한 종교 전통은 이러한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휴머니즘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유럽 근대에 이르자 휴머니즘의 의미는 축소된다. 인간의 인간성은 그 자체 자신에게 목적이 될 때, 즉 '자기'와 관련을 맺을 때 확보될 수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보듯이 인간의 본질은 사유에 있고, 사유 가운데에서도 자기 사유, 즉 자기의식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모든 사물과 구별해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특징이다. 인간은 각자가 이러한 자기의식의 내면성을 갖는 한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다. 근대적 이성과 자유의 본질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성과 자유란 어떤 다른 무엇에 의존함이 없이 오직 자기의식을 바탕으로 자기와 사물을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투명한 존재요,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를 규정하는 자율적 존재이다.이것이 근대 휴머니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의 반휴머니즘은 이러한 휴머니즘을 문제삼는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현대의 반휴머니즘은 이른바 '방법론적 반휴머니즘'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3) 방법론적 반휴머니즘은 정신분석학, 심리학, 구조언어학, 인류학 등 이른바 '인간과학'(sciences humain)이 전통적 휴머니즘에 대해서 가한 공격을 말한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자기 의식이다. 나의 사유 속에서 나와 내 자신의 일치가 발생한다는 생각은 정신분석학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된다.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현존이 아니라 수많은 충동과 영향, 그리고 언어에 의해 생산되고 만들어진, 부차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른바 '인격'이란 것이 생기는 데 이것은 기껏해야 자신을 감추는 '가면'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의 코기토 위에 세운 세계는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이다. 따라서 인간과학자들은 과학적 엄밀성의 이름으로 인간의 내면성 자체를 부인한다. 인간에게는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내면 세계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모든 것은 밖으로 열려있고, 밖과의 관계 그물 속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해서는 한 개인의 내면성의 고백이나 내성적 성찰보다 실증과학적인 방법에 따른 객관적, 수량적 연구가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따라서 현대의 인간과학은 '주체성'을 과학의 영역에서 완전히 제거한다.4) 인간과 관련된 것은 모두 '바깥에' 있다.5) 이런 의미에서 방법론적 반휴머니즘은 본질적으로 반형이상학적이고 반철학적이다 인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는 어떠한 철학도, 형이상학도 요구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철학도 인간과학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반휴머니즘적 철학의 다른 한 갈래로 본다. 어떤 의미에서 하이데거를 인간과학자들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인간의 내면성, 내면세계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점에서 하이데거를 반휴머니즘주의자로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존재의 소리를 전하는 존재의 전령으로서 자신 속에는 아무런 '내적 공간'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인간은 존재 사건에 이미 열려 있는 존재자이고, 존재에 열려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존재에 말을 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영혼'과 같은 어떤 내적 공간이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은 형이상학의 산물로서, 이제는 그러한 형이상학은 끝나고 오직 사유의 길만 인간에게 열려 있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인간의 내면성 또는 주체성을 부인하는 점에서, 그리고 형이상학(철학)은 끝났다고 본 점에서 인간과학자들과 같은 선상에 서 있다고 본다.6)
현대 프랑스철학은 인간과학적, 또는 레비나스의 용어로 '방법론적 반휴머니즘'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의 '반휴머니즘'적 사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조차도 여전히 휴머니즘적 논리, 즉 휴머니즘을 떠받쳐준 전통 철학(형이상학)의 논리의 틀 안에 갇혀 있다고 보지만 레비나스가 지적한 대로 인간을 어떤 고유의 내면성을 통해 규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사건의 빛 아래 섬으로서, 즉 '바깥에 섬'(Ek-sistenz)으로서 인간의 인간성을 비로소 확보할 수 있다고 본 점에서 하이데거는 주체성의 사유를 거부하고 있다는 레비나스의 진단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7) 하지만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 특히 '철학의 종말'에 관한 그의 논의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물어보지 않을 수 없고, 레비나스는 어떻게 하이데거와 다른 방식의 대안을 제안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여전히 철학이 의미있다면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고, 또한 '인간의 인간성'또는 '주체의 주체성'에 대한 옹호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옹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 아닐 수 없다.
2. 철학의 종말과 과학기술
『철학의 종말과 사유의 과제』(1964) 라는 글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의 종말을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전통적인 형식의 철학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철학은 이제 그 존재를 잃어버렸다. 여기서 철학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이데거는 간단히 "철학은 형이상학"이라고 말한다.8) 형이상학이란 존재자 전체, 즉 세계와 인간과 신을 존재와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이 이제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끝났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제는 그 존재의의를 잃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형이상학이 이제는 그것이 목표했던 종점에 도달했다는 말인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한 시대의 형이상학의 완전성을 다른 시대의 형이상학과 비교해서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우리에게 전혀 없다. 그리고 더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 플라톤의 사유가 파르메니데스보다 더 완전하다, 또는 헤겔 철학이 칸트 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각 시대의 철학은 그 자신의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철학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단순하게 인정해야 한다.9)
철학의 종말은 따라서 '완성'을 뜻하지 않는다. 철학의 종말은 철학이 갈 수 있는 '극단적 가능성'에까지 철학이 다 갔다는 것을 뜻한다. 철학이 갈 수 있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끝은 완전한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끝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종말은 철학의 완성 또는 철학의 폐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철학이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일 수 있음을 하이데거는 감지한다.
그러면 어디서 철학의 종말을 볼 수 있는가? 하이데거는 현대 과학기술에서 철학의 종말을 가장 분명한 형태로 볼 수 있다고 본다.
철학의 종말은 조종 가능한, 과학 기술적 세계와 이 세계에 적합한 사회질서 수립의 승리로 나타난다. 철학의 종말은 서양 사상에 근거한 세계 문명의 시작이다.10)
철학의 종말은 철학이 기술 과학으로 해체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한다. 철학이 다른 과학으로 해체된 것은 여러 학문들이 차례로 철학으로부터 분리돼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11) 철학이 이렇게 여러분과 학문으로 독립된 것은 '사유'를 과학적, 기술적 절차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탐구하기보다 학적 관심을 가지고 사물의 배후를 탐구하게 되었고, 이러한 태도로 인해 사물을 탐구하는 학문이 여러 갈래로 분화하게 되었다. 사유가 '철학'이란 학문으로 모습을 바꾸게 되자 이미 그 가운데 철학의 종말이 예고되었다.
사유가 '철학'이란 이름으로 학, 또는 학문으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사상은 로마 사상으로 번역되고 이것이 다시 기독교적 언어로 번역되면서 존재자의 존재를 '피조물'(ens creatum), 즉 기술의 산물로 보는 관점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된 것은 라이프니츠의 '근거율'(충족이유율)이다. 모든 존재에는 근거 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모든 것은 원칙적으로 계산될 수 있고, 계획될 수 있고, 통제될 수 있다는 기술적 사유를 가능케 하였다. 이제 기술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존재자의 존재를 기술적으로 통제 가능한 사물로 보게 되었다. 기술의 본질은 사물을 다그치고 닦달(Gestell)하는 데 있다.12) 여기서 진리는 효용성으로 이해되고 사물과의 근본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정보'가 등장하였다. 따라서 지식의 의미도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의 말에 잘 담겨 있다.
지식은 정보량으로 번역될 수 있을 때에만 새로운 회로로 들어갈 수 있고 활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지식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번역될 수 없는 것은 모두 방치될 것이며 새로운 연구의 방향은 가능한 결과들이 기계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는 조건에 따르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지식의 사용자와 마찬가지로 '생산자' 역시 창조하고 배우려는 것을 이런 언어로 번역하는 수단을 지녀야 한다. 이런 해독 기계에 대한 연구는 이미 상당히 진척되고있다. 이것은 정보학의 주도권과 더불어 발생되는 하나의 논리이자 지식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진술에 관한 일련의 규정이다. (중략) 지식의 공급자 및 사용자가 지식에 대해 갖는 관계는 상품의 생산자 및 소비자가 상품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은 형태, 즉 가치 형태를 가질 것이다. 지식은 팔리기 위해 생산되며 또한 새로운 생산에서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기 위해 소비된다. 이 두 경우에서 지식은 교환되기 위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이다. 지식은 자기 고유의 목적을 포기하고 '사용 가치'를 상실한다.13)
교환 가치로서 평가되는 '정보'는 플라톤의 에이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같은 것이 아니다. 정보과학의 출현과 함께 전통적인 철학적 범주는 그 의미를 모두 상실해 버렸다고 하이데거는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모든 철학적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극단적 가능성'이 실현된 것을 뜻하고, 이 가능성은 종말에 이른 철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과학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평가는 결코 부정적이 아니다. 그에게는 과학 기술과 기술의 발전을 정죄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동일성과 차이』란 글에서 그는 "오늘의 기술화된 세계는 악마의 작품으로 거부할 수도 없고, 만일 그 자체가 스스로 파괴하지 않는 한, 그것을 우리가 파괴할 필요도 없다"고 쓰고 있다.14) 과학 기술에는 악마적 요소가 전혀 없으며, 다만 그 본질에 비밀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과학 기술을 없애거나 극복할 수 없다. 과학 기술은, 예컨대 핵전쟁이나 환경 오염을 통해 지구를 완전히 파괴할 때 스스로 자신을 없앨 수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는 이른바 '기술 세계의 윤리'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기술 세계의 윤리'를 요청하는 것은 과학 기술이 마치 사람의 일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15)
철학이 기술화된 분과 학문으로 해체된 것을 하이데거는 '정당한' 일이었다고 본다.16) 왜냐하면 철학의 종말은 '학'으로서의 철학의 시작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역사는 곧 존재 자체의 역사이고, 철학이 학으로 등장한 것도, 학으로서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도 모두 존재 자체의 역사(Seinsgeschick)이다. 철학이 종말을 고하는 마당에, 이제 사유의 과제가 등장한다. 사유의 과제 중의 하나는 철학의 끝, 철학의 종말 속에 무엇이 함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일이다. 철학의 종말을 사유하는 것, 그것이 곧 사유를 통해 사유되어야 할 문제(die Sache des Denkens)라는 것이다.
3. 휴머니즘 또는 형이상학의 극복과 회상적 사유
하이데거는 '철학'(Philosophie)과 '사유'(Denken)를 대립시킨다.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든 사유의 요소를 담고 있고, 사유는 결코 철학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철학과 사유의 대립은 절대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철학과 사유의 대립을 통하여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구별되는 존재 사유를 요청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철학은 결국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이었고 형이상학은 인식과 존재를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사유로 사유해왔다. 설명과 근거를 추구하는 사유는 주어진 사실 자체에 머물지 않고 사실 배후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을 하이데거는 '표상적 사유' 또는 '계산적 사유'라고 부른다. 현전하는 대상을 표상된 대상으로 미리 앞서 설정한 뒤 사실에 접근하기 때문에 사실 자체는 여기서 항상 무시당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계산되고, 기획되고, 지배된다.17) 여기에 바로 근대 휴머니즘, 즉 근대적 인간의 주체성의 특징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근대 휴머니즘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사유의 결과이다. 표상하고, 계산하고, 지배하는 인간을 근대 형이상학은 만들어 놓았다. 근대 형이상학의 특징을 하이데거는 한마디로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는 말로 표현한다.18)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모든 존재자를 자기 자신의 존재와 자기 자신의 진리에 근거지우는 존재자가 되었음을 뜻한다. 여기서 인간 존재의 최상의 형태는 세계를 관조하고 명상하는 관조적 삶이 아니라 현실을 가공하고 노동하는 실천적 삶이고, 현실 지배와 이용이 현대 합리성의 본질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현대의 이성은 현실을 관조하는, 현실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수용적 이성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고 자기의 욕구에 따라 마음껏 이용하는 능동적 이성 혹은 권력의 이성이고, '주체'는 다름 아닌 권력 이성의 형이상학적인 표현이다.19) 권력 이성의 출현, 혹은 인간의 주체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하이데거의 해석에 따르면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인간은 스스로 주체로 이해하게 되었고 인간을 주체로 해석한 것은 근대적 휴머니즘을 형성해 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휴머니즘의 인간은 역으로 이 표상적, 기술적 사유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고 조종된다. 기술과 정보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개인적 의지나 판단에 의해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지배와 통제를 초월한 더 큰 힘을 의식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계산적 · 기술적 · 표상적 사유 속에, 계산과 표상으로 포착할 수 없는, 그 자신을 감추고 있는 어떤 낯선 것이 남아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 사유에 '다른 사유'를 대립시키고 이것을 '회상적 사유'(das andenkende Denken)라고 이름 붙인다.20) '회상적 사유'는 머무름 · 참고 견딤 · 기다림 · 물러남 · 침잠 · 은인자중의 사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다른 사유가 어떻게 가능한가하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현상학적 환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후설의 '환원'과는 엄밀히 구별된다. 후설의 경우 현상학적환원은 세계와 인간을 '그냥 저렇게 존재하는' 것처럼 자명하게 보는'자연적 태도'에서 대상을 의식의 상관자로 구성하는 초월론적 의식과 노에마-노에시적인 의식의 체험으로 시선을 되돌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존재자를 이미 어떤 규정된 틀 속에 파악하는 태도에서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한걸음 뒤로 물러섬'(Schritt zur?ck)으로 표현한다.21)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은 형이상학에서 형이상학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과학 기술에서 기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전향'하는 것이다.22) 형이상학과, 형이상학의 종말과 함께 등장한 과학 기술은 존재하는 것, 즉 세계와 인간을 일정하게 파악하고 관계하는 방식이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과 과학 기술의 '본질'을 존재 자체로 보고 있다. 존재 자체는 아르케(arche)로서 형이상학과 과학 기술을 지배한다. 존재 자체는 형이상학과 과학 기술을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경계를 설정해 준다. 형이상학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서 형이상학의 '본질'로의 전향은 형이상학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철학을 하나의 사실로, 하나의 작품으로, 하나의 언어적 작품으로 본다는 뜻이다. 형이상학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는 일은 텍스트로 전승된 형이상학을 분석하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 이 분석은 무한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물음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그것을 해체하고, 그 가운데서 '사유되지 않은 것'을 끊임없이 들추어내어야 하기 때문이고, '사유되지 않은 것'은 사유가 더욱 근원적이 될수록 더욱 더 많아진다.23)
지나간 철학을 해체하는 가운데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을 줄곧 이끌어간 것은 "철학의 역사 가운데 도대체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이것은 철학이 철학으로 구성될 때 도대체 그곳에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는 물음이다. 하이데거의 해답은 존재 자체가 감춤과 드러냄으로써 그곳에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쉘링 철학을 해석하든 또는 헤겔이나 라이프니츠 철학을 해석하든, 그의 일관된 관심은 존재 자체가 철학자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 가운데서 존재는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동시에 감추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존재 자체를 사유하는 것, 존재의 감춤과 드러냄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철학의 종말에 직면해서 그리고 철학의 종말과 더불어 비로소 이제 다시 사유의 과제로 등장했다고 하이데거는 보고 있다. 철학의 종말은 그에게는 사유의 시작이다. '회상적 사유', '자각적 사유' 또는 '침잠하는 사유'는 표상적 · 계산적 형이상학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하이데거의 탈윤리적 사유
근대의 '주체성의 형이상학'에 근거한 휴머니즘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의 '인간성'(humanitas)을 충분히 사유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을 '주체'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로부터 다시 사유할 때 인간의 인간성, 즉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곧 그의 '바깥에 섬'(Eksistenz)이다.24) 즉 자기를 벗어나 자신 밖에, 존재의 진리가 발생하는 가운데, 그곳에 서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존재로부터, 존재의 진리에로 던져진 자'이며, 자기 '바깥에 서 있는 자'로서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 자이다.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이러한 인간을 통해 존재의 빛 안에서 나타난다.25)
문제는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로 과연 철학의 종말을 극복하고 인간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학 기술과 경제적 효율성의 시대에 기술의 유용성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은인자중 할 수 있는 사유를 하이데거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물음을 던지는 것을 경건한 사유의 태도로 보는 입장에서 드러나듯이 현실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동시에 현실로부터 한걸음 물러서서 현실의 본질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태도를 요구한다.26) 그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현대가 당면한 핵전쟁의 위협이나 환경 문제에 관해서 어떠한 윤리적 태도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의 철학에는 윤리적 사유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그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에는 실천과 윤리 문제에 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거의 고의적으로 이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심지어 『존재와 시간』에 거듭 출현하는 타락 · 근심 · 죽음으로의 자유 · 일상인 등에 관한 도덕철학적 해석을 그는 거부한다. 니체에 관한 연구는 존재 망각과 존재 역사의 관점에서 니체 철학을 서양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지닌 윤리적 함축에 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칸트에 관한 저작인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존재에 관한 칸트의 논제』(Kants These ?ber das Sein), 『사물에 관한 물음』(Die Frage nach dem Ding) 등에서도 칸트의 도덕철학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도덕철학에 관한 그의 침묵은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에 따르면 윤리학은 형이상학적 사유에 속한다
'윤리학'은 '논리학'과 '자연학'과 더불어 플라톤 학파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 분야들은 사유가 '철학'으로 변하고 철학이 다시 학으로 변한 그 시대에 출현하였다. 그와 같이 이해된 철학이 학으로 등장했을 때 사유는 사라졌다.27)
하이데거는 회상적·시원적 사유는 윤리학도, 존재론도 아니라고 본다. 회상적 사유는 존재 사유이며 이것은 윤리학 보다 더 근원적이다. 더구나 '에토스'의 근원적인 의미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행위와 무관하다. 에토스는 거주지, 즉 머무는 곳을 뜻한다. 인간의 에토스는 존재 사건이 발생하는 곳, 즉 존재의 비침이 있는 곳에 자신을 내어놓고 존재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인격 · 도덕 주체 · 책임 · 의무 · 정의 · 평화 등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철학의 이와 같은 약점을 예리하게 꼬집는다. 그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중립성의 철학'(la philosophie du neutre) 또는 심지어 '유물론'이라고 비판한다.28)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존재는 퓌지스(physis)이고, 그것은 전혀 어떤 얼굴을 가지지 않은 익명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익명적 존재에 자신을 내어놓는 하이데거의 사유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악, 현실적인 불평등과 불의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존재 저쪽의'(epekeina tes ousias)(플라톤) 선의 이념에 대한 갈망을 우리는 하이데거 철학에서 찾아볼 수 없다.
5. 전체성의 이념과 자기의식에 토대한 휴머니즘
레비나스 철학의 궁극적 지향점은 현대의 반휴머니즘과 존재 사유에 대항해 주체성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전체성과 무한』 서두에서 그는 자신의 철학이 겨냥하는 것은 "무한자의 이념에 바탕을 둔 주체성의 변호"이며 무한자의 이념에 근거한 주체성이란 타자를 받아들이는 주체성임을 밝힌다.29)
이 책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환대(hospitalit?)로서의 주체성을 드러낼 것이다. 이 가운데서 무한의 이념이 그것의 완성에 도달한다. 지향성, 즉 사유가 대상에 일치하는 데 존재함은 의식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정의하지 않는다. 모든 앎은 지향성으로서 이미 무한의 이념, 불일치 자체를 전제한다.30)
레비나스는 주체성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기 위해서 전체성의 이념을 무한의 이념과 엄격하게 구별하고 무한의 이념이 전체성의 이념보다 철학적 우위를 지닌다고 주장한다.31) 그가 두 이념을 구별하면서 무한의 이념에 우위성을 부여한 것은 서양 철학 전통과의 결별, 특히 존재를 의식 내재성으로 보는 자아론적 존재론과의 결별을 뜻한다.
전체성의 이념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유한한 인간 의식이 완전한 내재성, 즉 자기 자신과의 완전한 일치를 바라는 욕구에서 나왔다. 의식은 자기 밖에 어떤 다른 것의 존재를 남겨두지 않으며 다른 것을 의식 안에서 포괄하려고 한다. 의식은 자기 충족적인 내재성이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설정하는 전체성이다. 동시에 의식의 내재성은 끝없이 무한한것이다. 전체성의 개념은 주체가 무한한 자기성의 이상(완전한 자기성, 자기 소유의 이상)을 개념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전체성이란 따라서 동일자 곧 자아의 존재 영역에 속하는 범주이다. 이 때 자아는 고전적인 지성주의의 사유 주체이거나 현대 실존 철학의 행위 주체이다. 이 두 경우 지배적인 이념은 자아의 본질을 자기 실현 혹은 자기 확립으로 보는 자아론이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는 나의 인식 대상이거나 내가 내 자신을 기획하고 서기 위해 어느 정도는 필요한 삶의 공간 혹은 세계이며 결국 모두 내 자신의 실현이나 확립에 기여할 뿐이다. 요컨대 타자는 자아로 환원되어 버린다.32)
존재를 의식 내재성으로 환원하는 철학, 즉 자아론적 존재론은 이론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유아론에 빠질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있다. 타인, 즉 타자는 그것의 유일성이나 독특성에서 그 고유의 권리를 완전히 누리지 못하고 기껏해야 나의 경험으로부터 유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자아이고 그것의 다름(alter)보다 나와 동일한 자라는 성격이 강조될 뿐이다. 다른 자아는 내 자신의 반영(Spiegelung)을 볼 수 있는 거울이고 내가 내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계기이다.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후설도 철저히 자아론에서 출발한다. 후설에 의하면 타자에 대한 인식은 타인의 신체에 대한 지각과 내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한 유추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타인은 나와 구별되는 신체 속에 거주하는 자아이며 내 자신의 복사판이다.33) 하이데거는 후설처럼 '유추하는 통각'을 말하지는 않지만 타인을 '함께 존재하는 현존재'로 볼 뿐 자아의 자기화 과정에 구성적인 요인으로 보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눈에는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타자 존재론은 타자를 내 자신을 가능하게 하며 동시에 나로 환원할 수 없는 동반자로 보지 못하고 결국 "자기 자신으로 돌아감"34) 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전체성의 철학일 뿐이다.
전체성의 철학, 곧 사물 존재와 타자의 존재를 자아 실현의 계기로 보는 철학은 철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론적인 철학에 앞서 작용하는 무한한 자기 긍정 혹은 자기성에 대한 충동의 표현이다. 전체성은 이렇게 볼 때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자아의 무한한 자기 충족과 자기 소유로 이해될 수 있는 무한성과 같은 말이 된다. 전체성과 무한성은 자아론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동일한 상태를 표시하는 말이다. 전체성의 철학은 '존재와 다른 것', '존재를 넘어서는' 무한성의 이념을 따로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체성의 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무한성의 이념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전체성의 철학은 결국 이해하고 파악하고 손에 집어넣는 권력 주체로서의 자아에 우위성을 두는 자아론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것은 타자의 다양성을 동일자, 곧 자기의 동일성에 종속시키는 지배의 한 방식이다.35) 이 점에서 전체성에 대한 비판은 하이데거의 비판과 사실상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하이데거와 다른 것은 전체성을 존재론에 둔다면 전체성을 벗어나 타자로의 초월이 가능한 초월을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이라 부르고 "형이상학은 존재론에 선행한다"는 명제를 내세운다.36)
6. 무한성의 이념과 타자와의 관계
참된 무한성의 이념은 전체성의 사고와는 다른 근원에서 유래하며 전체성과는 다르게 인간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무한성의 이념은 자아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변증법적 순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건을 통해 전체성의 깨어짐을 전제한다.37) 이러한 사건을 레비나스는 '절대경험'이라 부른다.38) 절대 경험이란 타자가 단적인 타자로서 타자의 타자성이 인정되고 수용되는 가운데 타자의 얼굴이 현현하는 사건을 말한다. '얼굴의 현현'은 윤리의 근원적 현상이며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사건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얼굴의 현현은 우리가 형이상학적 세계(참된 초월과 참된 무한성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물음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얼굴의 현현은 어떻게 발생하며 얼굴의 현현을 통해 전체성이 깨어지고 열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타자가 나에게 나타남을 뜻하는 얼굴의 현현은 어떻게 절대 타자를 지시하는가?
얼굴로 나타나는 타자의 현현은 세계 안에 주어진 대상의 현상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상은 그것이 나타나는 맥락과 지평을 통해 이해되고 파악될 수 있지만 타자의 현현은 맥락과 지평을 떠나 스스로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39) 얼굴의 현현에는 현상학적 '벗겨냄'(d?-voilment, Ent-bergung)이 적용되지 않는다. 얼굴의 현현에 직면하는 "절대 경험은(인식 주체의 활동으로) 드러냄이 아니라(얼굴 자체가 스스로) 나타남이다. "40) 타자의 얼굴은 따라서 현상학적환원이나 기술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힘을 통해 나타날 뿐이다. 자연 현상이나 문화의 산물은 하나의 일정한 관점에서 접근하여 그것이 처한 맥락에 따라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비추는 빛이라는 것이다.41) 따라서 레비나스는 타자를 형이상학적 · 윤리적 관계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타자는 그가 어디서 왔든지, 젊었든지 늙었든지, 가난하든지 부자이든지, 동족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가 지닌 사회적 · 경제적 · 문화적 · 민족적 특수성을 뛰어넘어 "벌거벗음 가운데 나타나는 얼굴"이다.42) 벌거벗음은 얼굴 현상의 본질적인 특징이며 "자기 자신에 의한 현현", "맥락없는 의미화"요, "전체성의 깨뜨림"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타자가 누구이든 간에 타자는 단적으로 나에게 '낮선 이'이다. 따라서 타자는 나의 전체성의 한 부분에 속하지 않을 뿐더러 벌거숭이 몸과 아무도 돌보지 않는 눈빛으로 내 집에 들여주도록 호소한다. 벌거벗음 가운데 얼굴이 나에게 나타나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열어 주는 윤리적 사건이다.43)
윤리적 사건으로서의 얼굴의 현현 속에서 서로 맺는 관계는 비대칭적이라는 것을 레비나스는 매우 강조한다.44) 얼굴의 현현 가운데서 타자는 나와는 전적으로 다른 자아로서 나타난다. 타자는 후설이 보는 것처럼 지향적 대상으로 주제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인사하고 말 걸어오며 호소하는 존재이다. 부버의 나-너의 관계도 결국에 타자를 사랑의 관계 속에 용해하여 버림으로써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못한다. 후설이나 부버는 다 같이 얼굴 현현이 지닌 윤리적 차원을 충분히 열어주지 못했다.45) 나-너의 관계는 레비나스에 의하면 서로를 용해하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정의와 선의 관계, 즉 사회적 관계요 책임의 관계라는 것이다. 타자가 벌거벗은 얼굴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내가 그를 환대하고 그에게 관용하며 그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얼굴의 현현은 타인을 지각하고 "그가 어떠어떠하다"는 술어를 붙이는, 순전히 객관적인 인식 행위
이상이라는 것이다. 타자의 현현은 한마디로 지극히 높은 분으로부터 나에게 책임을 호소하는 목소리이다.46) 타자의 현현은 나의 자유를 문제시하고 나의 "고삐풀린 쾌락의 힘"에 제동을 걸며 나의 이기적인 불의를 심판한다. "얼굴은 나의 책임을 상기시키고 나를 심판한다. 얼굴가운데서 나타나는 존재는 높음의 차원, 초월의 차원에서 온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47)
자아와 타자 사이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라는 것은 내가 타인을 위해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나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48) 이와 같은 도덕적 체험은 결국 타자를 내 속에 모두 집어 넣을 수 없다는 사실, 즉 전체화의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얼굴의 현현으로 타자에 의해서 "내 자신이 문제시되고" 그 가운데서 존재가 계시된다. 나-너의 비대칭적 관계나 나를 문제시하는 '얼굴의 현현'은 개념이나 이념을 통해서 도무지 파악될 수 없는 존재를 알려 준다. 표상하고 객관화하는 사유 저편에(au-del?) 있는 존재, 우리의 자연적 경험의 잉여로서 출현하는 존재를 레비나스는 데카르트가 신존재 증명을 할 때 쓴 표현을 빌어 '무한자'라고 부른다.49)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의 이념을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타자의 얼굴은 내 속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데카르트의 무한자처럼 문자 그대로 '위에서부터 나타남'(?piphanie)이요, 타자는 마치 신이 현현 하듯이 나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한의 이념은 높음과 고귀함이요, 저 너머로의 상승을 표시한다. "50) 레비나스가 무한의 이념을 통해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것은 타자를 자아(동일자) 속으로 끄집어들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오직 타자와의 사회적 ·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만 신이 우리에게 현현하며 타자와의 관계가 신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타자와의 분리는 동시에 자아가 그 무엇으로부터 소외될 수 없는 독립적인 존재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타자의 타자성 뿐만 아니라 자아의 자기성과 독립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 즉 진정한 초월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7. 존재론과 형이상학
전체성과 무한을 구별하고 무한의 이념에 우위성을 부여함으로써 '전체성의 이념에 근거한 주체성' 대신 '무한의 이념에 근거한 주체성'을 변호하는 것이 레비나스 철학이 겨냥하는 목표였다. 레비나스의 독창성은 무한의 이념,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형이상학)에 우위를 둠으로써 전체성 혹은 내재성으로 이해되는 존재론을 그 안에 포섭한 데 있다.51) 자아의 내재성을 유지한 가운데 타자의 타자성이 인정되는 형이상학적관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내면성'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는 '인간과학자'들과 하이데거와 구별된다.
신체성과 언어, 생활 세계 등이 강조된 후기 현상학에서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메를로-퐁티도 '세계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 표상적인 지향성보다 더 선행된 지향성임을 보여주지만 '세계'라는 개념만으로는 인간의 참된 초월을 보여줄 수 없다. 하지만 '세계 안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 또는 자기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길게 논의한다. 자기성은 세계 안에 주어진것들(물, 공기, 햇빛, 음식물)을 즐기고, 소유하고, 그 가운데서 거주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쾌락을 통해서 나는 타인과 분리되어 내 자신으로 돌아가 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만든다. 그러나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나는 집을 짓고 거주하며 타인과 함께 노동한다. 이 과정을 통해 타인과 구별되는 내 자신의 자신성 혹은 주체성이 성립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쾌락을 내 마음대로 홀로 즐기는 가운데 주체성이 유래한다"고 말한다.52) 나의 욕구와 가능성의 실현이 생존의 최고 이상인 이런 내재성 속에서 타자의 타자성은 고려되지 않는다. 타자는 나와 같이 일하고 같이 세계를 일구는 자에 불과할 뿐이다. 레비나스가 여기서 말하는 자아, 즉 초월해 나가야 할 자아는 본체나 영혼 흑은 의식 주체가 아니라 '소유와 쾌락의 자아',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자아이다. 여기서는 윤리보다 노동이 중요하며 타자에 대한 고려보다 나의 욕구가 선행한다.53)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러한 이기주의적 주체, 자기 집에서 편히 거주하고 있는 주체가 타자의 타자성을 탈취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타자와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54) 타자는 내 속에서 구성된 대상이나 내 밖에서 나를 한계짓는 어떤 사물이 아니라 완전히 '낯선 이', '절대적으로 분리된 자'이기 때문에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타자성과 외재성을 무시하지 않고서 어떻게 이 관계가 가능한가? 레비나스는 그 가능성을 말과 대화에서 찾는다.55) 나와 타자는 말을 나누는 가운데서 하나의 덩어리(전체)로 용해되지 않고 서로의 독립성을 유지한다. 대화는 나와 대화 상대자를 서로 연결시키지만 동시에 거리(분리)를 전제하고 둘을 서로 분리해 둔다. 이 관계를 레비나스는 더욱 구체적으로 얼굴의 현현으로 표현한다.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불의에 찌들린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와 나그네가 얼굴로 출현하여 나의 불의와 이기심을 꾸짖을 때, 그 때 타자와 관계가 열린다. 나는 타자가 얼굴로 나타나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그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다. 얼굴의 출현에 따라 자기성, 내재성의 주체(좀더 구체적으로 '쾌락의 주체')는 자기를 벗어나 (동시에 자기를 유지하면서)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56)
쾌락의 주체성은 레비나스에게 전혀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즐기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습이다. 사람은 자기 집을 짓고 그 안에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신론적'이다. '무신론적'이란 내가 나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어느 것에도 참여하지 않고 오직 나로서, 내면성으로, 내 집에 머물러 편안하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57) 그러나 타자가 나타날 때 타자와 아무런 관계없이 그냥 내 집 문을 걸어 두고 살 수는 없다. 내 집 문을 더 꽁꽁 걸어 잠그거나 아니면 내 집의 빗장을 열어 그를 맞아들여야 한다. 타자의 얼굴은 단지 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위에서', 저 높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위에서' 오는 타자는 나의 자유를 문제 삼고 나의 소유권을 문제삼는다. 내가 타자를 내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그를 내 손님으로 환대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윤리성이 시작되며58) 내 자신은 내면성, 내재성의 세계를 벗어나 진정한 초월적 주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다.59) 얼굴의 현현과 더불어 타자를 나의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세계 밖으로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동일자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인간의 관계는 경제를 떠나 이루어질 수 없다. 얼굴의 출현으로 얼굴과 얼굴이 서로 마주할 때, 나는 빈손으로 빗장을 건 채 그를 맞아들일 수 없다. 나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나의 행복을, 나에게 질책하고 호소하는 타자의 저항('윤리적 저항')을 대할 때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이며 나의 의무이기 때문이다.60)
8. 개방성과 주체성 : 상처받을 가능성과 고통
레비나스의 철학이 전개될수록 그의 철학이 자아에 근거한 것과는 전혀 다른 휴머니즘, 즉 타인을 존중하고 수용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대신 짐을 짊어지는 데서 진정한 '인간의 인간성' 또는 '주체의 주체성'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 휴머니즘('다른 인간의 휴머니즘')을 내세우는 철학임이 밝혀진다. 그는 서두에서 논의했듯이 현대의 반휴머니즘을 두 갈래로 잡고 이들 반휴머니즘은 인간에게는 내면적 공간이란 없고 다만 '바깥' 또는 '바깥으로 향한 개방성'만이 있을 뿐이며, 형이상학 또는 철학은 이제는 끝났다고 보는 점에서 공통적임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과 관련해서 레비나스는 휴머니즘의 문제를 거론하고, 자기의식(내적 자기동일성)에 근거한 주체성의 이념이 거부당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타자에 대한 책임적 주체의 의미는 유효하고 이러한 의미의 주체성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레비나스가 볼 때 하이데거는 비록 존재의 빛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러한 사유 자체가 곧 반휴머니즘적이다. '바깥에 섬'으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해 열려 있는 존재(개방성)로서의 인간은 존재의 진리로 이르는 하나의 우회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순전히 수단적이고 임시적인 역할'만이 있을 뿐이다.61)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해야 할 과제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가 인간을 키우고 지탱한다. 여기서 주체성은, 설사 그것이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존재의 구조를 드러낸 뒤, 스스로 물러가기 위해 등장할 뿐이다. 그래서 그 결과, 인간의 신화가 깨어진 자리에, 이제 인간적인 것도, 비인간적인 것도 아닌, 익명적 존재 질서가 자리 잡는다고 레비나스는 본다. "만일 인간이 한번이라도 존재의 가까움에 있으려면 익명적인 것 안에 머무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권고처럼 우리는 익명적인 것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인가?62) 주체가 '바깥에 서 있음'으로 인해서, 그의 주체성이 과연 사물들의 세계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리는가, 주체성이란 진정한 의미에서 '안으로부터 자기를 닫을 능력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가 하고 묻는다. 그는 이와 같은 물음과 함께 '밖으로 열려 있음' 또는 '개방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봄으로써 주체성의 의미를 새겨 보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개방성'이 전혀 다른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개방성이란 상처(傷處)나 상해(傷害)에 대해서 아무런 방비없이 노출된 살갗의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 개방성은 노출된 살갗이 상처받을 수 있음(lavuln?rabilit? d'une peau)을 말한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마치 아무런 방비없이 적의 침입에 노출된 도시처럼 감성이 열려있음을 뜻한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하지만 단지 외적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충격을 수용할 수 있는 수동성과 구별된다. 오히려 이것은 '매맞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예레미아 애가 3장 30절을 인용한다.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대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어라." 이것은,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고난을 받거나 낮아지라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경우 그와 같은 자리에 처할 수 있으라는 뜻이라고 레비나스는 해석한다.63)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타인에 의해 사로잡히고, 타인을 위해 고통받고, 타인을 위해대신 설 수 있다는 뜻이다. 타인을 위해 고통받는다는 것은 타인의 짐을 짊어지고, 그를 관용하고, 그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 타인을 위해 책임질 수 있다는 것, 타인을 대신해서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주체성의 '의미'라고 레비나스는 강조한다.64)
그는 진정한 휴머니즘이야말로 타인을 위해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성립될 때 그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유를 근거로 도덕적 책임을 근거지운 칸트와 정반대로 '자유에 앞 선', 다시 말해 나의 자율과 능동적 행위에 앞서 나에게 부과된 책임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책임을 그는 '볼모', '대리'라는 말로 표현한다. 대리는 타인을 대신해서 자율적으로 짐을 짊어지는 능동성을 가리키기 보다 '타인의 자리에 놓이는' 수동성을 가리킨다. 타인을 위해, 타인 아래서, 타인의 짊을 짊어지는 수동적, 윤리적 주체는 타인 아래 종속되어 타인을 아래서 떠받쳐줌(sub-jectum)으로써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의 모습을 레비나스는 유대교에 관한 그의 책에서 '메시아'로 비유하면서 "메시아, 그것은 나이다. 내가 되는 것, 그것은 메시아가 되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레비나스는 이론적, 관조적 철학보다는 도덕적 양심에서 우러나온 철학이야말로 '철학의 종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철학은 지혜의 사랑일 뿐 아니라 '사랑의 지혜'(la sagesse de l'amour)여야 함을 강조한다.65) 사랑의 지혜로서 철학은 자기 의식이나 존재 물음보다 타자와의 관계, 즉 타자에 대한 책임을 철학적 물음의 시원으로 삼는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자기 중심적 사유와 탈인격적 사유에서 벗어나 타자를 생각할 수 있을 때, 타자와의 인격적 관계가 우리의 사물 인식이나 존재 이해에 선행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인간에게 미래가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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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Emmanuel Levinas, Humanisme de l`autre homme(Montpellier : Fatamorgana, 1972), p.85.
2 Levinas, "The Contemporary Criticism of the Idea of Value and the Prospects of the Humanism", in : E. A. Maziarz (ed.), Value and Values in Evolution (New York : Cordon and Beach, 1979), pp.179-188. 특히 p.179참조.
3 같은 글, p. 182 참조.
4 Levinas, Humanisme de l`autre homme, p. 68 참조.
5 같은 책, p. 88 참조.
6 같은 책, pp.89-90 참조.
7 Martin Heidegger, "Brief ?ber den Humanismus", in : Wegmarken (Frankfurt a. M.: Vittorio Klostermann, 1967), p.158 ; 하이데거의 '휴머니즘'에 관한 데리다의 논의는 Jacques Derrida, Margo de la philosophie (Paris : Les editions do Minuit, 1972), pp.129-164 참조.
8 Heidegger, "Das Ende der Philosophie und die Aufgabe des Denkens", in : Zur Sache des Denkens (Tuebingen : Max Niemeyr, 1969), p.61.
9 같은 글, p.62.
10 같은 글, p. 65 : "Das Ende der Philosophie zeigt sich als der Triumph der steuerbaren Einrichtung einer wissenschaftlich- technischen Welt und der dieser Welt gem?ssen Gesellschafts- ordnung. Ende der Philosophie heisst : Beginn der im abendl?ndisch- europ?ischen Denken gegr?ndeten Weltzivilisation."
11 같은 글, p. 63.
12 '닦달'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Heidegger, "Die Frage nach der Technik",in : Vortr?ge und Aufs?tze (Neske, 19784), pp. 9-40 참조.
13 Jean-Fran?ois Lyotard, La Condition Postmoderne (Paris : Minuit, 1979), pp.13-14(이현복 옮김, 『포스트모던적 조건』 (서울. 서광사, 1992), pp. 20-21.
14 Heidegger, Identit?t und Differenz (Neske, 1957), p. 29.
15 같은 책, p. 22.
16 Heidegger, "Das Ende der Philosophie und die Aufgabe des Denkens",p. 64.
17 Heidegger, Gelassenheit (Pfulling, 1960), p. 14. "Dieses Rechnen kennzeichnet alles planende und forschende Denken"
18 Heidegger, "Die Zeit des Weltbildes", in : Holzwege (Frankfurt a.M.: Klostermann, 1972), pp. 98-103 (각주 10) ; M. Heidegger, Nietzsche : Der europ?ische Nihilismus, GA 48 (Frnkfurt a. M. : Klostermann, 1986), p. 181 : "Durch Descartes und seit Descartes wird aber in der Metaphysik der Mensch, genauer das menschliche 'Ich', in vorwaltender Weise zum 'Subjekt"'.
19 Heidegger, "Wissenschaft und Besinnung", in : Vortr?ge und Aufs?tze(Neske, 19784), pp. 41-66 참조.
20 Heidegger, "Das Ding", in : Vortr?ge und Aufs?tze (Neske, 19784), p.174.
21 Heidegger, Grundprobleme der Ph?nomenologie (GA 24), p. 29 ; Heidegger, "Das Ding", p. 174 참조.
22 Heidegger, Identit?t und Differenz, p.48. '전향'의 의미에 관해서는 하이데거, 『기술과 전향』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3), p. 137 이하 옮긴이의 해설 참조.
23 하이데거의 '회상적 사유'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Samuel Ijsseling, Heidegger : Denken en Danken, Geven en Zijn (Antwerpen : De Nederlandse Boekhandel, 1964), pp. 33-51 참조.
24 Heidegger, "Brief ?ber den Humanismus", pp. 155-160.
25 같은 글, pp. 161-162.
26 Heidegger, "Die Frage nach der Technik", p. 40.
27 Heidegger, 같은 책, p. 184.
28 Emmanuel Levinas, Totalit? et Infini (La Haye : Martinus Nijhoff, 1963,19805), pp. 274-275.
29 같은 책, p. iv
30 같은 책, p. xv.
31 같은 책, p. xiv.
32 같은 책, pp.12-18.
33 타자 경험에 대한 Husserl의 유추론적 이해는 『데카르트적 성찰』의 다섯 번째 성찰 참조. Edmund Husserl, Cartesiansche Meidtationen und Pariser Vortraege (HUA, I) (Den Haag : Martinus Nijhoff, 1973²), pp. 121-77, 특히p. 125 참조
34 Levinas, De l`existence ? l`existant (Paris, 1947), p. 145.
35 A. Dondeyne, "Inleiding tot het denken van Emmanuel Levinas", in : Tijdschrift voor Filosofie, 25 (1963), p. 562 참조.
36 Levinas, Totalit? et Infini, p. 12.
37 같은 책, p. 5.
38 같은 책, p. 37
39 같은 책, 같은 면
40 같은 책, 같은 면
41 같은 책,p. 39
42 같은 책, pp. 46-49.
43 "L’?piphanie du visage comme visege, ouvre 1'humanite." 같은 책, p. 188.
44 같은 책, p. 190, 그리고 p. 24, 74, 201 등 참조.
45 Buber에 대한 Levinas의 비판은 같은 책, pp. 40-41 참조. 신을 Buber처럼 '당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라고 부르는 근거에 대해서는(즉 Levinas의 illeit?개념에 관해서) S. Strasser, Jenseits von Sein und Zeit. Eine Einf?hrung in Emmanuel Levinas’ Philosophie (Den Haag : M. Nijhoff, 1978), p. 212 이하 참조.
46 Levinas, Totalit? et Infini, p. 3.
47 같은 책, p. 190.
48 같은 책, p. 24.
49 같은 책, p. xiv, 19, 186.
50 "L'id?e de 1'infini d?signe une hauteur et une noblesse, one transascendance", 같은 책, p. 12.
51 Theo de Boer, Tussen Filosofie en Profetie. De Wijsbegeerte van Emmanuel Levinas (Baarn: Ambo, 1976), p. 27, 자아와 타자의 분리를 통해 자아의 독립성과 타자성이 다같이 보장되어야 진정한 초월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Buber의 신비주의적 대화 철학과 구별되는 점이다. Buber에 대한 Levinas의 견해는 Levinas, "Martin Buber et la th?orie de la connaissance", in : Noms propres (Paris : Fata Morgana, 1976), pp. 29-55 참조.
52 "La subjectivit? prend son origine dans 1'ind?pendence et dans la souverainet? de la jouissance". Levinas, Totalit? et Infini, p.86.
53 이 부분에서 다루는 문제는 같은 책, 제 2부 "Int?riorite et ?conomie"에서 상세히 논의되고 있다. 큰 줄거리에 대한 요약은 Strasser, Jenseits von Sein und Zeit, pp. 67-101 참조.
54 Strasser, "Emmanuel Levinas : Ethik als erste Philosophie", in : Paenomenologie in Frankreich, B. Waldenfels (hrsg)(Frankfurt a. M. : Suhrkamp, 1983), p. 228 참조.
55 Levinas, Totalit? et Infini, pp. 44-49, pp. 179-190.
56 쾌락의 주체가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내면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Levinas, Totalit? et Infini, p. 122 참조.
57 같은 책, pp. 29-30, p. 31, 50, 88, 276 등 참조.
58 같은 책, p. 131, pp. 194-195.
59 Levinas에서, '초월적 주체'는 존재론적 주체가 아니라 도덕적 · 형이상학적 주체이며, 이 주체가 인식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주체의 초월성은 내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재성에 의해 창조되는 초월성이다.
60 Strasser. "Emmanuel Levinas : Ethik als erste philosophie" p. 230 참조.
61 Levinas, Humanisme de l`autre homme, p. 70
62 Heidegger, "Brief ?ber den Humanismus", p. 150.
63 Levinas, Humanisme de l`autre homme, p. 93.
64 같은 책, p. 94 각주 8번(p. 110).
65 Levinas, "Philosophie, justice, et amour", dans : Emmanuel Levinas, Entre nous : Essais sur le penser-?-l`autre (Paris : Bernard Grasset,1991), 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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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강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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