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실존주의의 아버지'
2.오해의 철학
3.비판적 수용
4.철학적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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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지명 인문학 연구
권 2
호 1
출판일 1997.
오해의 철학과 철학적 오해
(싸르트르와 하이데거)
차건희
한국외국어대학교
2-397-9701-04
pp.7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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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와 싸르트르, 이 두 철학자의 주저서인 『존재와 시간』(1927)과 『존재와 무』(1943) 사이에는 16년의 격차가 있는데, 『존재와 무』는 『존재와 시간』의 아류 저서일 뿐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제자의 계승적 업적이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싸르트르는 하이데거를 충실히 계승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하이데거에 대한 철저한 오해 내지는 곡해로 그의 철학은 시작되었다는 해석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싸르트르가 하이데거를 완전히 이해하려고 노력은 했으나 실패하였다는 뜻을 내포할 수 있다. 싸르트르의 '오해의 철학'이 -- 이 뽈리뜨(Hyppolite)가 말했듯이 -- 하이데거에 대한 '천재적 오해(contresens g?enial)'에 근거했다고 할 때, 우리는 영특하기는 하나 불성실하고 경솔한 제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하이데거를 읽는 방식으로 하이데거주의자들의 독법 밖에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인가? 사실 싸르트르는 하이데거를 읽으면서 자신의 연구 결과 내지는 철학적 도전이 잘 피력될 수 있는 표현들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인이 되거나 외국인처럼 살기 위해 외국여행을 하지는 않듯이 싸르트르의 '철학 여행'은 그가 그릴 '철학 그림'의 재료들을 수집함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존재와 무』라는 제목에서부터 『존재와 시간』에 대한 싸르트르의 철학적 도전이 잘 드러나 있으며, '현상학적 존재론'이라는 표현이 포함된 부제(Essai d'ontologie ph?enom?enologique)는 철학적 결투가 같은 장(場)에서 벌어질 것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실제로 『존재와 무』에서 하이데거가 많이 인용되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 비판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바, 이 때문에 둘 사이의 싸움이 대등한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1)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두 철학자의 독자적인 철학적 사유의 운동 그 자체를 충실히 따라가며 비교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보다는 둘 사이에 존재하여 한 때 그렇게도 유명했던 '오해'의 실상을 중점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1.'실존주의의 아버지'
독일 제 3제국의 항복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의 빠리는 '실존주의'의 시대였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메카하고 할 수 있는 생 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des-Pr?es)에서조차도 이 '실존주의'라는 철학하는 방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아무도 감히 시원스럽게 정의내릴 수 없었고 단지 다시 찾은 자유를 만끽하는 삶의 한 방식 정도로 알고 있었다. 싸르트르도 야스퍼스도 하이데거도 아닌 키에르케고르(Kierkegaad)로부터 사용되었던 이 '실존주의'라는 용어는 싸르트르, 시몬 드 보부와르(Simone de Beavoir), 까뮈(Camus) 등의 작품을 분류하는 기호의 역학을 하고 있었다.
까페 플로르(Caf?e Flore)에서는 생맥주나 커피 한 잔 값으로 싸르트르가 무엇인가 끄적거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고, 지구의 반대편에서 '실존주의'를 관광하기 위해 찾아온 여행객에게 까페 창유리 너머로 잠시 사진 촬영의 포즈를 취해 주는 그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미 1914년 봄 트레브(Tr?eves)의 강제수용소에서 민간인 신분이 입증되어 석방되 돌아온 지 이태 후인 1943년에 앞으로 매우 유명해질, 그러나 정작 읽는 사람은 매우 드문 책 한 권을 내놓고 있었다. 불란서에서 훗설과 하이데거의 이름을 갑자기 유명하게 만들었던 이 『존재와 무』는 『존재와 시간』의 주제들 -- '세계 내 존재', '불안', '자유' 등의 주제들을 불어권에서도 친숙하게 만들었다. 실존주의의 구호처럼 쓰였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ec?ede l'essence)'라는 명제를 보면,2) 극히 소박한 용어인 (물론 불어의 경우에) '실존(existence)'이라는 단어가 중심이 되지만 누구의 '실존' 개념인지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단어에 무게와 의미가 실려 유행되기 시작하자 싸르트르는 과감히 하이데거를 지목하였고 그 후 자연스럽게 생 제르맹데 프레의 까페에서는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당시 불란서에서는 『존재와 시간』 발표 이후 하이데거에 대한 소식을 듣지못하고 있었고, 1933년 하이데거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학 총장 수락과 관련된 무수한 소문만이 나돌고 있었다. 나찌에 가입하여 정권에 동조하고 있으며, 비밀 경찰의 복장을 하고 강의를 했다느니, 그의 연로한 스승인 훗설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대학 도서관에 출입을 금지시켰다느니 하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만 떠돌고 있었다.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리인강을 사이에 둔 철학적 단절은 1945년 9월 드 또바르니키(De Towarnicki)라는 불란서 문화원 소속의 한 군인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독일 슈발츠발트(Schwarzwald)의 하이데거를 방문함으로 극복하기 시작한다. 그는 빠리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실존주의의 아버지'에게 실존주의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하이데거는 매우 당황한 듯이 보였고, 옆에서 듣고 있던 하이데거 부인은 오히려 방문객에게 반문하였다고 한다 -- "도대체 실존주의가 무엇입니까?"3) 18년 동안 거의 아무것도 출판하지 않고 있는 자신이 갑자기 빠리에서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다는 사실에 하이데거는 우선 놀랐으며 분명 오해에 의한 유행일 것으로 추측하였다. 게다가 한 사람이 철학자이며 동시에 훗설 연구가, 극작가, 소설가, 수필가, 기자일 수 있다는 것이 독일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이데거는 또 한번 놀랐으며, 싸르트르라는 철학자에 대하여 의심스런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4) 이로부터 '실존주의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실존주의'를 '오해의 철학'으로 이해 또는 오해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과연 실존주의의 정체는 무엇인가? 싸르트르의 실존주의가 훗설의 현상학 특히 그의 지향성 개념으로 출발하여 한동안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간주되던 하이데거를 거쳐가는 철학적 일주(一週)의 결과라고 말한다면, 이 일주여행에서 간직한 기념 사진들이 실존주의라는 하나의 모자이크(mosa?ique) 안에서 조각들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1931년과 1932년 경에 훗설의 현상학에서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발견하였던 싸르트르는 1938년에느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929)을 앙리 코르뱅(Henry Corbin)의 번역으로 접하게 되었다. 스스로 이 번역을 '역사적 사건'으로 명명할 정도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주로 이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와 『존재와 시간』을 통해서 싸르트르는 하이데거를 읽었다. 싸르트르는 메를로 뽕띠와 마찬가지로 브룅쉬비크(Brunschvicg, L?eon)의 학생 세대에 속하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그가 합리주의적이며 데까르트주의적인 전통적 교육을 받았음과 동시에 대학 강의를 통해서는 하이데거를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걀리마르(Gallinmard) 출판사에서 불역 출간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에는 하이데거는 1929년에 행한 같은 제목의 강의뿐만 아니라 또 다른 1929년의 텍스트인 『근거의 본질에 관하여(Vorn Wesen des Grundes)』와 『존재와 시간』(1927)의 제 2절의 부분들(§46-53, §72-76) 그리고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29)의 결론 부분(§42-45)과 『횔덜린과 시의 본직』(1936)을 포함하고 있다. 바로 이 250쪽 분량의 소책자(12×18cm)를 통해 싸르트르는 하이데거를 이해하였고, 이 하이데거 선집은 그 후 오랫동안 불란서에서 불어로 하이데거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소책자를 중심으로 '오해의 철학'을 둘러싼 논의의 실마리를 풀어갈 것이다.5)
2.오해의 철학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에서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의 공식이 되다시피한 '실존의 본질에 앞선다'는 싸르트르의 제 1원리와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실재(la r?ealit? humaine)'에 대해 자신이 저술한 내용 사이에는 하등의 공통점도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싸르트르와 자신을 함께 묶으려는 모든 시도를 물리쳤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6) 싸르트르와 자기 자신의 거리를 분명히 밝히기 위한 하이데거의 논리 전개를 충실히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싸르트르가 『존재와 시간』의 맥락에 서 있으려고 애는 썼으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충분히 재검토하지 못한 연유로 하이데거를 뒤따르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실존주의 공식('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을 검토하는 하이데거의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가 바로 이러한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만드는 대표적인 텍스트이다. 『존재와 시간』이 '본질'과 '실존'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뒤흔들어 놓은 반면, 싸르트르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과 '본질'의 가장 진부한 규정들에 사로잡혀 있는 공식이라는 것으로, 이와 같은 싸르트르의 탈선은 하이데거의 '인간실재' 즉 현존재를 분석하는 내용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소한 『존재와 시간』에서 실존(Existenz)이 의미하는 바와 싸르트르의 실존(existenxe)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존재와 시간』에서 발견되는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Das Wesen des Daseins liegt in seiner Existenz)'라는 문장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싸르트르의 공식과는 전혀 아무 관계도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과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같은 '싸르트르의 오해'의 신화가 오로지 하이데거의 철학적 우월감과 연관된 철학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닌 것은 『존재와 무』의 첫 부분에서부터 우리는 어렵지 않게 '싸르트르의 오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싸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이 존재자의 '어떻게'(essentia)는, 존재(existentia)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7) 번역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싸르트르는 곧이어 이 문장을 해석하면서 불행하게도 그가 제대로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야 말았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의식은 한 추상적 가능성의 독특한 사례로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고, 존재의 가운데서 솟아나옴으로써 그의 본질을, 다시 말해 그것의 여러 가능성들의 종합적 배열을 창조하고 유지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하이데거의 문장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실존주의 공식을 발견해내는 이 해석은 하이데거의 격렬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존재와 시간』의 바로 같은 면에서 하이데거 스스로가 본질과 실존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 문장은 그 속에서 'essentia'나 'existentia'같은 용어가 전통적인 의미로 쓰여져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고 특히 'existentia'는 현존재(Dasein)의 실존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고 할 때 실존(existence)을 탈존(ek-sistence)으로 이해했어야만 했다.
싸르트르는 베를린 체류 시절인 1933년 12월에 『존재와 시간』을 구입하기는 했으나 본격적으로 읽은 것은 포로수용소 수감 기간(1940-41년) 동안이었다.8) 앞에서 보았듯이 앙리 꼬르뱅의 '하이데거'에는 『존재와 시간』의 전반부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싸르트르의 이해는 독일어본을 통해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이 수감 생활 동안 『존재와 시간』 읽기와 『존재와 무』 쓰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와중에 '싸르트르의 오해'가 끼어들었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이데거 선집의 '번역자 서문'에 이미 지적되어 있는 피해야할 해석상의 오류에 왜 싸르트르가 빠져버렸는지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꼬르뱅은 'Existenz'를 번역함에 있어서 기존의 'existence'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존재자들(existants)에 (존재와 본질 사이의 관계에 관한 고전적인 문제의 의미로) 사용되어야" 하므로 불어 철자법을 변경해서라도 현존재의 특이한 존재 양태를 구별하여 나타내야 함을 밝히고 있다.9)
한편 '휴머니즘에 관한 논쟁'으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면, 싸르트르는 『존재와 무』를 서술하면서 읽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휴머니즘을 발견한 후 1945년 그의 유명한 강연에서 '실존주의가 휴머니즘'임을 주장하였고, 이에 하이데거는 1946년 가을 빠리의 보프레(Jean Beaufret)에게 보낸 편지에서 『존재와 시간』에는 그 어떤 형태의 휴머니즘도 담고 있지 않음을 강조하여 자신과 싸르트르와의 차이를 부각시켜 다시 한번 '싸르트르의 오해'를 확인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이데거가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휴머니즘을 발견하려는 싸르트르의 시도를 오해로 규정하고 스스로 반(反) 휴머니즘적으로 사유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10) 우선 하이데거에 있어서 '인간의 실체는 실존이다(die Substanz des Menschen ist die Existenz)'라는 『존재와 시간』의 명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실체는 탈존(Ek-sistenz)'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때 '실체'를, 'ουσια'로, 즉 현존하는 것의 현존성으로 이해한다면, 이 명제는 "존재에 대한 그의 고유한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현존하는 방식은 존재의 진리 안에 탈자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의미이다.11) 그런데 하이데거의 이와 같은 인간의 본질 규정이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인격으로, 영혼과 육체를 갖는 정신적 존재로 간주하는 휴머니즘적 해석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는 가장 휴머니즘적인 해석일지라도 아직 인간 고유의 존엄성을 모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앞에 열거된 근세적인 인간관은 인간을 주관성으로 규정하는 데 반해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주체가 아니고 '염려(die Sorge)'인 바, 이런 맥락에서 싸르트르의 휴머니즘은 여전히 근세적인 주관성의 형이상학 위에 서있다는 것이다. 결국 싸르트르의 휴머니즘은 불완전한, 사이비(似而非) 휴머니즘이며 하이데거의 반(反) 휴머니즘은 바로 이런 사이버 휴머니즘에 반대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문제를 이중으로 단순화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여러 구체적인 맥락에서 싸르트르의 개념 사용과 설명 방식이 결코 일률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실존주의를 가장 고전적인 의미의 휴머니즘, 즉 의식의 철학 내지 주체철학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싸르트르 철학을 극적으로 단순화하였으며 동시에 오해의 여지을 무릅쓰고 자신의 철학을 반휴머니즘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단정적으로 말해 하이데거는 불란서 실존주의 철학자의 사유 그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것과 자신과의 차별을 극명하게 보이기 위해서 상대를 단순화시키고 그 앞에 단순화한 형태로 자기 자신이 위치하여 휴머니즘과 반 휴머니즘의 대응으로 부각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가 확인한 점은 순수하게 하이데거의 주석가로서의 싸르트르는 명백히 오해의 과오를 범한 경우가 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소의 그릇된 주석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싸르트르 철학을 곧장 오해에 근거한 철학으로 매도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와 무』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의 오해의 실상은 그렇게 극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이데거와 하이데거주의자들의 극단적 평가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싸르트르 철학의 독자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하이데거 철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 보여야 하겠고, 그 중간 단계로 싸르트르가 하이데거를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예들을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다.
3.비판적 수용
싸르트르의 『존재와 시간』 읽기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아낼 길은 없지만, 앞에서 오역의 예를 보았듯이 결코 쉽게 이해되는 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의 독서와 『존재와 무』의 서술이 병행되었다면, 싸르트르는 읽은 바를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작품에 투사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싸르트르는 스스로 하이데거의 영향을 인정하면서 특히 그를 통해 '역사성(historicit?)'을 발견한 것은 신의 섭리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12) 마침 앙리 꼬르뱅의 하이데거 선집에는 '역사성'의 문제가 다루어진 『존재와 시간』의 제 2절 제 5장(§72-76)이 거의 완역되어 있어서, 싸르트르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이렇게 싸르트르가 하이데거의 '역사성'을 다루는 방식을 찬양하고 있지만, 『존재와 무』의 목차만을 보아서는 하이데거의 '역사성'을 직접적으로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싸르트르는 하이데거 -- 또는 '꼬르뱅이 번역한 하이데거'에서 읽고 얻은 바를 분명히 자신의 철학적 성찰에 통합시켰으며 이는 존재자가 시간에 대하여 갖는 특수한 관계를 규명하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존재와 무』의 제 2부의 의식 즉 대자(對自, le pour-soi)의 시간성(la temporalit?)에 관한 장에서 싸르트르가 '인간실재'가 '미래를 갖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벌써 우리는 하이데거를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미래(le Futur)'가 세계 속에 도래하는 것은 바로 '인간실재'에 의해서인데, 왜냐하면 사물 또는 즉자(l'en-soi)는 그것이 현재에 있는 것 그것, 즉 영원한 현재 안에서의 순수한 자기 고착인 반면, '인간실재' 또는 대자는 그것이 현재에 있는 바대로 있지 않고 현재에 있지 않는 바대로 있기 때문이다.13) 요컨대 대자 존재는 "아직-아님(un Pas-encore)의 관점에서만 대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14) 왜냐하면 이 존재는 스스로를 무(無)로, 다시 말해 '무엇으로' 있다고 할 때 이 무엇이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는 그런 존재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리'가 곧 '존재 저 너머에(par del? l'?tre)' 있는 미래와의 거리이며, "대자가 존재 저 너머에 그것으로 있는 모든 것이 미래인 것이다(tout ce que le Pour-soi est par del? l'?tre est le Futur)"15)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는 그것이 순전히 현재에 국한될 때보다 항상 무한히 더 큰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 것은 싸르트르가 보기에 옳았던 것이다.16)
현존재의 시간성을 재정립하려는 하이데거의 노력의 결과를 싸르트르는 자신의 것으로 거의 취하고 있지만 비판의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싸르트르의 비판은 한마디로 '가능(le possible)'이l '현실(l'actuel)'에 대하여 갖는 우의에 대한 비판이며, 다시 말해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의 세 가지 탈자(脫自, ek-stase) 중의 하나인 미래의 탈자가 다른 둘에 대해 갖는 특권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가 과거와 현재에 대해 존재론적 우위를 가짐에 대해 싸르트르는 이의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들 중의 어느 것도 나머지 두 차원들(dimensions), 즉 두 탈자태(脫自態)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굳이 길잡이가 필요하다면 "하이데거 같이 미래의 탈자(l'ek-stase future)에 중점을 둘 것이 아니라 현재적 탈자(l'ek-stase pr?sente)에 중점을 두어야 옳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화하는 초월에 있어서 대자적으로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것으로서 대자가 그의 과거로 있는 것은 바로 스스로에게 드러남으로서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재자가 결여이며 대자가 자신의 미래와, 다시 말해 대자가 저편에 거리를 두고 대자적으로 있는 그것과 붙어 있는 것 역시 스스로에게 드러남으로서이기 때문이다."17)
싸르트르가 하이데거의 시간성의 맥락에 서 있으면서 동시에 비판적 제한을 가한 또 다른 하나의 주제로 '죽음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앙리 꼬르뱅의 하이데거 선집에는 『존재와 시간』의 제 2절 제 1장(§46-53)이 완역되어 있으며 바로 이 대목에서 히아데거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싸르트르 역시 『존재와 무』에서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로서, 그는 자신의 논의를 정리하는 대목에서 하이데거와는 반대되는 결론을 내렸다 : "죽음은 나 자신 고유의 가능성이지 않고 그것은 하나의 우연적인 사실인 바, 이 사실은 그런 것인 한 원칙적으로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근원적으로 나의 사실성(facticit?)에 속하는 것이다".18)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 즉 순수한 사실이며 죽음은 우리에게 외부적인 것이므로 바깥으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와 바깥으로 변화시키는 측면이 있음을 싸르트르는 죽음의 사실성이라 부르고 있다.19) 『존재와 시간』에서는 '죽음에로의 존재(Sein zum Tode)'야말로 '인간실재'의 본질적인, 다시 말해 존재론적인 구조인 반면, 『존재와 무』에서 "나의 존재는 그가 적어도 대자인 한 죽음은 결코 그의 존재론적 구조가 아닌 것이다."20)
이상에서 보았듯이 싸르트르가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받은 적지 않은 영향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그 영향은 항상 비판적 태도로 발전되어 갔음을 쉽사리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싸르트르는 여전히 하이데거의 뒤에서 길을 가고 있었던 셈이 아닌가? 그와는 반대로, 한 여행객이 선행자를 줄곧 뒤 았으며 때론 그의 발자취를 놓쳐 엉뚱한 곳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길을 택하였던 것은 아닌가? 이런 물음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존재와 무』의 곳곳에서 보여지는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의 예들만을 단순히 나열함으로써 충분하지 못할 것이며 두 철학자 간의 근본 원리상의 차이를 지적해야만 할 것이다.
4.철학적 오해
하이데거의 싸르트르 철학에 대한 오해나 또는 이에 기반을 둔 하이데거주의자들의 오해는 무능력과 이해력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스승과는 다른 길로 접어든 한 제자의 표상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바로 이런 오해들을 분명하게 '철학적 오해'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존재와 무』에서 싸르트르 자신이 하이데거와의 관계에 있어서 비판적인 입장을 처음부터 견지하였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겠다.
두 철학자의 사유들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며 본질적인 문제에서의 간극이 맨처음부터 싸르트르에 의해 의도적으로 강조된 것이라면, 습관적으로 철학사에서 출몰하는 '오해의 철학'의 이미지는 또 하나의 '철학적 오해'일 뿐인 것이다. 예를 들어 쟝 로네(Jean Launay)는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서서 싸르트르의 하이데거 읽기가 오해에 근거한 철학을 낳게 하였음을 꼬집으면서 무(無, n?ant)와 부정(否定, n?gation)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그 좋은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21) 그러나 『존재와 무』에서 싸르트르가 하이데거에 대하여 행한 많은 비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 '무의 문제'는 오히려 두 철학 사이의 원리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적절한 예가 되므로 우리는 이것이 오해에 의한 비판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리의 대립임을 주장할 수 있겠다.
사실 무와 부정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매우 고전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소피스트』에서 무를 존재자 내부에서의 이타성(異他性, alt?rit?)으로 환원시키고 결국 인간의 부정하는 능력인 '아포파시스('απσΦαυτ?)'와 동일시한다.22) 또한 베르트손(Bergson)도 그의 『창조적인 진화』 제 4장에서 무 개념은 단지 어떤 것의 없음을 지칭하는 상대적 개념이며 그 자체가 그 어떤 절대적인 실재를 갖지는 못함을 밝히고 그것은 다만 어떤 것을 부정하는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23) 그렇다면 이와 같이 '존재'의 근거뿐만 아니라 '무'의 근거 역시 인간 주체에서 찾는 전통적 입장에 대하여 우리의 두 철학자들은 과연 어떤 근본적인 입장 대립을 보이는가?
싸르트르에 따르면,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ㅣ'?tre)와 비존재(le non-?tre)는 더 이상 공허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며" 그의 '현존재(Dasein)' 는 "무에 직면하여 자기를 발견하고 현상으로서의 무를 발견하는 부단한 가능성" 즉 '(l'angoisse)'을 갖고 있으므로 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24) 그러나 하이데거의 무이론이 무를 구체적으로 얻을 수 있으면서도 무 안으로 존재가 '옮겨 들어가도록(faire passer)'하는 헤겔의 이론보다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비존재의 영역에 비록 추상적 존재일지라도 그 어떤 존재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무는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무화하기(le N?ant n'est pas, il se n?antise)" 때문이다.25) 그러나 싸르트르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무이론이 과거의 이론에 대하여 갖는 결정적인 장점은 '인간실재(la r?alit? humaine)'가 비존재 안에서 드러나는(emerger dans le non-?tre) 능력, 즉 부정하는 인간 능력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문제시하였다는 점에 있다.26)
싸르트르가 이렇게 하이데거가 시도하는 무에 관한 '현상학적' 이론에 대하여 언급할 때는 꼬르뱅이 1938년에 번역한『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한데, 이 텍스트로부터 싸르트르는 "부정은 무로부터 그의 근거를 취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실제로 1929년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무를 부정으로 환원시키는 이론들을 물리치려 하였고, "단지 부정이 있기 때문에만 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가 있기 때문에만 부정이 있는 것"임을 밝히려 노력하였다.27) 한마디로 말해 무는 모든 부정에 앞서서 무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싸르트르에 의하면 이 점이 하이데거가 잘 본 측면이긴 하지만 이를 좀더 철저하게 파헤치지 못한 데 대하여서는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인간실재(Dasein)'의 특성인 무화하는 차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인간실재의 이 부정의 능력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완전히 밝히지 못하였다는 싸르트르의 비판은 결국『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와 『존재와 무』에서 무의 문제에 관한 한 결함이 발견됨을 지적한 셈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언뜻 보기에 적절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부정'하는 인간의 활동으로부터 무를 독립시키려고 노력했던 하이데거에게 무가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부정'하는 인간 활동을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비판은 이미 상이한 출발점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우선 싸르트르가 보기에 논리적인 부정은 무화의 궁극적인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무의 개념을 논리적 부정, 즉 실재하는 영역을 부정하는 언명을 발설할 수 있는 능력으로 환원시키는 전통적인 이론으로부터 무 개념을 떼어 놓으려는 하이데거의 노력에는 근본적으로 찬동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무가 논리적 부정에 앞선다는 점에는 하이데거에 동의하는 반면, '무의 기원(origine du n?ant)'의 문제를 '인간실재'의 외부에서 논의하는 것은 반대한다.
'무의 기원'에 관한 장에서 싸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간은 "그에 의해 무가 세계에 도래하는 그런 존재이며",28) 한편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다음에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l'?tre de l'homme)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인(son ?tre-libre)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므로",29) 결국 간단히 말해서 무화하는 것은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무가 이렇게 인간의 자유에 의해 세상에 도래해야만 한다면 이 때 인간의 자유는 어떤 것이어야 하겠는지를 싸르트르는 묻고, '인간실재'의 존재자체인 자유를 일종의 '이탈(arrachement)'로 볼 것을 제안한다 : "인간실재가 세계로부터 자기를 이탈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실재가 그 본성에 있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만 가능하다".30) 자기 이탈로서의 자유의 본질을 싸르트르는 훗설의 '지향성(intentionnalit?)' 개념에서와 마찬기가로 하이데거의 '초월(transcendance)'의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실제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또는『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초월 즉 자유를 무의 출현으로부터, 존재자의 자기 무화 내지는 존재의 드러남으로부터 사유하지 자유로부터 무를 사유하지는 않는다. 두 철학자들에 있어서 무와 자유의 선후 관계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렇게 무화 내지는 이탈로 파악된 싸르트르의 자유는 특히 윤리적인 맥락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논리 전개를 충실히 따라가는 데에 있지 않고, 두 철학자의 무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른바 '싸르트르의 오해'는 실제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임을 밝히는 데에 있다. 이 차이 또는 대립을 싸르트르는 의도적으로 유지하고 제어할 수 있었으므로 '하이데거를 잘못 읽었다'는 견해는 부당한 것이 될 것이다.
요컨대 무에 관한 논의를 통해 싸르트르가 하이데거에게 행한 비판은 하이데거가 무화를 무 자체로부터 사유하였기 때문에 의식의 한 본질적인 측면을 놓쳐버렸음을 지적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세계로부터 물러서고 세계를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언제든지 다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선택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인간실재에게 "하나의 개별적 존재자를 물러나게 한다(mettre hors de circuit)는 것은 인간실재가 이 존재자에 대하여 스스로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인간실재는 이 존재자를 이탈하여 그의 영향권 밖에(hors d'atteinte) 있고, 이 존재자는 인간실재에게 작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실재는 무의 저쪽으로 물러나간 것이다. 인간실재에게 자기를 고립시키는 무를 분비하게 하는 이 가능성이" 바로 자유인 것이다.31) 한마디로 무의 출현을 조건짓는 것은 인간의 존재이며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이 존재가 곧 자유이며 그 때의 자유는 바로 이탈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탈 또는 물러남이 싸르트르에 있어서 코기토(cogito) 내지 반성(r?flexion)의 순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두 철학자는 분명 상이한 철학적 기획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전통적 의미의 '주체'가 아닌 탈자(脫自, ek-stase, Hinaus-stehen)로 보는 반면,32) 싸르트르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접근은 여전히 그 '주체성(la subjectivit?)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싸르트르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를 구분하고 후자에 하이데거와 자기 자신을 함께 포함시켰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두 갈래의 실존주의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즉 다시 말해 주관성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라고 싸르트르는 보았다.33) 하이데거를 실존주의자, 결과적으로 주체철학자의 한사람으로 보는 이 해석은 '싸르트르의 오해'의 신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싸르트르가 위와 같은 하이데거 해석을 철학사가로서 하지 않은 이상 우리는 싸르트르의 곡해를 부당한 것으로 볼 수 없다.34) 설령 다소의 곡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싸르트르의 철학적기도(企圖)가 '오해의 철학'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싸르트르는 분명 최소한 총괄적으로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후 그 그본적인 입장의 차이를 1943년의『존재와 무』에 담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가 '싸르트르의 오해'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하이데거의 '철학적 오해'를 드러내 주거나 적어도 둘 사이에 '철학적 대결'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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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예를 들어 '타자의 문제'를 다루는 대목이 그러하다. Cf. L'?tre et le n?ant, Paris, Gallimard, 1943(이후 EN으로 약(略)함), p.301.
2) EN, p.513.
3) Fr?d?ric de Towarnicki, A la rencontre de Heidegger, Gallimard, Paris, 1993, p.30.
4) 드 또바르니키는 그가 전해준 가히 1킬로그램에 달하는『존재와 무』를 하이데거가 손 위에 얹어 놓고 그 무게를 가늠해보며 감탄하는 감정가 흉내를 낼 때 일종의 비꼬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위에 인용된 책, 37쪽).
5) 두 철학자의 존재론의 철저한 비교는 사실 그 자체가 한 권의 책이 될 분량을 넘을 것이지만, 그 어떤 사상 자체의 연구도 우선은 텍스트 비판이 선행된 연후에야 가능하므로 이 소책자의 중요성은 대단히 크다. 싸르트르가 하이데거의 어떤 텍스트를 읽었는지를 아는 것은 공허한 추측으로 연구를 끌고 가지 않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참고로 두 철학자의 존재론을 비교한 역작으로는 Joseph P. FELL의 Heidegger and Sartre, An essay on being and place(N.Y., Columbia University Press,1979)를 들 수 있다.
6) 앙리 꼬르뱅은 앞에서 언급한 그의 하이데거 선집에서 'Dasein'을 '인간실재(r?alit? humaine)'라는 용어로 불역하였다. '?tre-l?' 또는 '?tre-le-l?'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Dasein'을 프랑수와 브쟁(Fran?ois Vezin)은 최근『존재와 시간』의 번역(Gallimard, 1986)에서 그냥 'le Dasein'으로 옮겼다. 본 논문에서는 그 번역의 부적합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실재'를 쓸 것인데 이는 싸르트르 자신이 바로 이 번역어를 택하였기 때문이다. 'Dasein'의 불역에 관한 논의는 Etre et Temps, p.519-527 참조.
7) EN, p.21 : "Le 'comment'(essentia) de cet ?tre doit, pour autant qu'il est possible en g?n?ral d'en parler, ?tre con?u ? partir de son ?tre(existentia)". Sein und Zeit, S.42: "Das Was-sein(essentia) dieses Seienden muß, sofern ?berhaupt davon gesprochen werden kann, aus seinem Sein(existentia) begriffen werden".
8) Cohen-Solal, Annie, Sartre, Gallimard, Paris, 1985, p.216.
9)『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14쪽. 당시 꼬르뱅은 'ex-sistance'로 표기했으나 지금은 'ek-sistence'가 통용되고 있다.
10) Heidegger, Lettre sur l'humanisme (독불대역본), Aubier, Paris, 1983, p.74 : "Insofern ist das Denken in Sein und Zeit gegen den Humanismus".
11) Lettre sur l'humanisme, p.75.
12) Sartre, Les Carnets de la dr?le de guerre. Novembrc 1939-mars 1940, Gallimard, 1983, p.224-230.
13) EN, p. 168.
14) EN, p.171.
15) 같은 곳.
16) EN, p.170.
17) EN, p.188.
18) EN, p.630.
19) 싸르트르의 '사실성'은 훗설의 '순수하게 사실로 있음'의 의미에 '우연성(contingence)'을 가미한 개념이다. Cf. Husserl, Id?es directrices pour une ph?nom?nologie(Ideen I, P.Ricoeur 譯), Gallimard, 1950, p.110.
20) EN, p.631.
21) Launay, Jean, 'Sartre lecteur de Heidegger, ou l'Etre et le Non', Les Temps modernes, oct.-d?c. 1990, I, p.412-435.
22)『소피스트』, 257 b 9; 263 c 12.
23) OEuvres(Edition du Centenaire), Puf, Paris, p.728-747.
24) EN, p.52, 53.
25) EN, p.53. (원문대로 강조)
26) EN, p.54.
27)『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꼬르뱅 역), 27쪽, 37쪽.
28) EN, p.58.
29) EN, p.61.
30) EN, p.61, "la r?alit? humaine ne peut s'arracher au monde que si, par nature, elle est arrachement ? elle-m?me".
31) EN, p.61.
32) Heidegger, Lettre sur l'humanisme (독불대역본), p.64,65.
33) Sartre,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p.17.
34) 질 들뢰즈(Gilles Deleuze)도 하이데거와 싸르트르의 철학적 기도가 상이함을 지적하고 싸르트르가 하이데거의 주석가를 자처하지 않은 이상 '싸르트르의 오해'를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Diff?rence et r?p?tition,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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