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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마음과 의식

온울에 2008. 5. 7. 09:56

발행자명 새한철학회 
학술지명 철학논총JOURNAL OF THE NEW KOREAN PHILOSOPHICAL ASSOCIATION 
ISSN 1226-9379 
권 22 
호 1 
출판일 2000. 10. 31.  




마음과 의식


윤보석
서울대
1-066-0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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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많은 철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substance dualism)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나, 마음이 가지는 인식론적인 성질에 대한 그의 관찰은 아직도 마음에 관한 철학적 토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자신이 기존에 가져왔던 어떤 강한 믿음도 의심의 여지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나, 의심 하고 있다는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은 의심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사실이라는 것인데, 이는 마음은 그 주체에게 투명하다(transparent)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내가 어떤 물리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될 가능성이 있으나, 내가 생각하는 존재자라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존재나, 내가 생각하는 존재자라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존재자인지를 고려하는 자체가 이미 생각하는 존재자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인식론적인 고찰로부터 데카르트는 마음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내는데, 많은 철학자들이 의심하는 것은 바로 그 추론의 타당성이었다. 마음이 다른 대상들과 달리 그 것이 의식되는 데 있어 어떤 특이성이 있다 해도, 과연 그 특이성이 존재론적 결론을 정당화시키기에 충분한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투명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마음은 물리적인 세계로부터 완전히 결별된 존재자라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소한 이원론자들과 그에 반대하는 철학자들 사이의 토론에서 마음의 투명성이 핵심적인 요소임을 알 수 있는데, 과연 투명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논문에서는 무어의 역설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투명성의 이해에 접근하고자 한다.

무어(G. E. Moore)의 역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가지는 특이한 성질을 지칭한다1).

? ? ? ? ? ? (a) P 그리고 나는 P를 믿지 않는다.

? ? ? ? ? ? (b) P 그리고 나는 -P를 믿는다.

유한한 존재자로서 우리는 이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알 수는 없으며, 따라서, 우리의 인식능력이 미치지 않는 사실들의 존재를 부인하기 힘들다. 따라서, (a)는 충분히 가능한 사태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내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실의 존재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b)도 충분히 가능한 사태이다. 문장의 진리조건을 고려하더라도, “비가 온다”는 날씨에 관한 문장이고 “나는 비가 오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나에 대한 문장이므로, 전자를 긍정, 또는, 부정하는 것은 후자를 긍정, 또는, 부정하는 것과 마찰이 일어나지 않는다. 두 문장은 전혀 다른 대상에 대한 명제를 표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와 (b)의 특이성은 특정한 문장을 P에 대입하여 주장할 경우 즉시 드러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금 비가 오고 있는데, 나는 비가 온다고 믿지 않는다” 혹은 “비가 오고 있는데, 나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라고 우리에게 얘기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우리는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비가 온다고 믿지 않는다면, 혹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왜 방금 비가 오고 있다고 주장하는가라고 우리는 의아해 할 것이다. 어떤 농담을 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속이려는 의도로 자신이 믿는 바와 다른 주장을 하는가? 그러나, 속이고자 한다면, 자기의 속마음은 감추어야 할 것인데, 자기가 방금 얘기한 말을 바로 자신이 믿지 않고 있다거나 다르게 믿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속이자는 의도에 역행한다. 무어의 문장은 마치도 한 입을 통해 두 사람이 얘기하는 것 같다. P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P를 믿지 않는다고 혹은 ­P를 믿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만일 동일인이 P를 주장하고 또한 자신이 ­P를 믿고 있다고 주장한다면,이는 자신이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는 자신이 따르는 도덕률에 대해 그것이 옳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흡사하다.

무어의 역설을 설명하는 것은, (a)와 (b)가 우리가 인정했듯이 충분히 참일 가능성이 있는 상황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부조리한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무어의 역설은 믿음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심리상태에도 발생한다: “비가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한 주목할 사실은 무어의 역설은 다른 사람의 심리상태에 대한 주장에서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해, “비가 오고 있는데, 그 사람은 그걸 모르고 있다”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 똑 같은 형식임에도 불과하고, 타인에 대한 주장은 전혀 부조리하지 않다. 또한, 일인칭의 경우에도, 과거의 믿음에 대한 주장은 아무 문제가 없다 ─ “비가 계속 오는데, 지금까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무어의 역설은 분명히 심리상태와 그 주체간의 어떤 특별한 관계를 ─ 심리상태와 제 삼자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 시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 우리 의식세계는 감각적 경험, 기억, 사고, 의도 등등의 광범위한 심리적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식이 어떤 기능을 하는 가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한 시발점은 의식이 부분적으로 상실된 경우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일상적인 경험을 고려해 보면, 우리는 어떤 통증 때문에 하루 종일 괴로워 했으나, 다른 일에 관심이 가있는 동안만은 그것이 의식되지 않을 때가 있다. 통증을 의식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통증이 사라졌다고 간주하지는 않는다. 경미한 통증은 완전히 의식되지 않고 지나가 버릴 수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강한 통증도 의식하지 않고 지나가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통증 때문에 초래되는 여러 증세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 자신이 아프다고 진술하거나, 병원에 전화를 거는 행동 등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의식이 언어 진술가능성 자체는 아니더라도, 둘 사이에 어떤 인과적인 연결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몽유병 환자라고 부르는 경우도 의식의 장애라고 볼 수 있다 몽유병자는 장애물을 잘 피해 걸어가기 때문에, 시각적 정보에 의한 행동통제가 어느 정도 진행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심리적인 활동이 어느 정도는 진행되고 있으나 단지 본인이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경우로 간주될 수 있다. 의식이 결여는 다른 일상적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든지, 동일한 자극이 여러 다양한 행동과 연결되지 않는 등의 결과를 초래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 정보는 정상적인데, 그 시각정보가 국한된 작업에만 사용되고, 의식의 결핍으로 어떤 작업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행동의 유연성이 결여된다.

의식연구에서 자주 언급되는 맹시현상(blindsight)의 경우에 있어서, 환자는 분명히 시야 어느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라고 진술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이지 않는 시야에 놓인 물체에 대한 강요된 질문에 대해서는 높은 적중률을 보인다2). 그러나, 한편으로, 목이 마를 때, 그 시야에 놓인 물을 자발적으로 마시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를 지각은 하고 있으나 의식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고 얘기 할 수 있다면, 이런 환자들은 의식의 기능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한 까다로운 문제는 다음과 같다. 방금, 맹시현상은 시각경험은 하고 있는데 단지 그것이 의식되지 않은 상태이라고 기술하였는데,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즉, 시야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환자의 시각경험이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맹시현상은 완전히 시각경험이 없거나, 혹은, 시각경험은 있는데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참인가? 후자의 경우, 시각경험은 정상과 다름없으나, 본인이 의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진술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도, 동일한 행동이 예측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두 경우들을 일인칭 시점에서 구분할 수 없다. 흔히 나이가 드니 음식 맛이 옛날 같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데, 이는 음식 맛은 동일하나 그것을 우리가 다르게 느끼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한 음식 맛 자체가 변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 경험을 가진 사람의 시점에서는 둘 중 어느 것이 참인지 구분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론적인 사실로부터 어떤 결론이 도출되는가 이다. 데? (Daniel Dennett)은 위의 인식론적 관찰에 근거하여, 두 경우는 사실적인 차이가 없다라고 주장한다3). 일인칭 시점으로 구분되지 않는 그런 이상한 사실 ─ “객관적으로 주관적인 사실” ─ 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데?의 결론은 논쟁의 여지가 많다. 일인칭시점에서 구분되지 않더라도, 삼인칭시점에서는 구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왜 배제하는가? 또한, 우리는 우리자신의 감각경험을 기술하고 비교할 수 있으며, 더 정확한 기술이 가능하고, 따라서 우리가 더 배울 수 있는 객관적인 대상임을 인정한다. 우리가 비교하고, 기술하는 대상으로써의 감각경험의 실재를 부정하기 어렵다. 데?도 그러한 의미의 감각경험의 실재는 부인하지 않는 것 같다. 단지, 심리상태가 일인칭시점으로부터 분리된 내적인, 표현할 수 없는, 본질적인(private, ineffable, intrinsic) 성질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데? 견해를 옹호나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상태에 대한 형이상학적 토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일인칭시점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특히, 일인칭 시점에서의 심리상태파악은 내부를 관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주장의 문제점을 드러내기 위해, 무어의 역설을 얘기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해 판단을 할 때,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한 나의 판단을 바꾸는 것과 세계에 대한 나의 믿음을 바꾸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이다.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여러 행동을 통해 그가 어떤 믿음들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가 알더라도, 그 사람이 일반적으로 신뢰할만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즉, 그 사람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믿음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위의 구분이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알면서, 그 믿음이 거짓이거나, 혹은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사실 그렇게 믿지 않거나,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경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지적대로, 우리는 우리자신의 믿음을 감각자료처럼 의심할 수 없다4). 즉, 나의 믿음은 나에게 단지 내부의 관조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이 될 수 없다. 물론, 나의 믿음도 다른 사람의 믿음과 같이 나의 행동을 설명하는 내적인 상태이나, 그 것이 나의 믿음에 대한 나의 태도의 전부일 수 없다. 믿음에 대한 일인칭 시점에서의 이해와 파악은 그 믿음이 참인가에 대한 질문을 본질적으로 포함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믿음이 어떤 그림이고 그 그림이 얼마나 진실한가에 대한 판단에 기초하여 세계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믿음은 이미 세계에 대한 태도가 결정되어 있는, 세계가 어떠하다고 자신을 맡김 (commitment), 그 자체이다. 자주 인용되는 가레쓰 에반스의 지적에 따르면, 믿음을 자신에게 귀속시킬 때 우리는 세계로 눈을 돌린다. “제 삼차대전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합니까?”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 삼차대전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을 고려함으로써 구해진다5). “나는 P를 믿고 있는가?”라는 사실적 질문은 “P가 참인가?”를 답하는 과정에서 그 해답이 구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믿음에 대한 일인칭적 시점은 내적 상태를 관조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무어의 역설은 일인칭시점의 침식 내지는 부재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나는 비가 온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는다.”라고 주장할 때, 이는 마치 내부를 보고 어떤 사실을 주장하고, 외부를 보고 또 다른 사실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일인칭 시점에서는 비가 오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알면서 그 믿음의 진리에 중립적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자신에 대한 질문, “나는 P를 믿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절차가 이미 세계에 대한 질문 “P인가?”에 답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것이 참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는 태도는 일인칭 시점의 침식이나 소멸을 뜻한다. 따라서, 무어의 역설은 “나는 비가 온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혹시 비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주장에서도 생길 수 있고, 이 주장은 믿음에 대한 일인칭 시점의 부재나, 혹은, 결국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경우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자신이 잘못된 믿음이나 잘못될지도 모르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은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러한 상태가 믿음의 소멸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애당초 믿음의 진정한 주체인지조차 의심스러울 것이다. 즉, 삼인칭 시점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믿음의 귀속시켰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믿음의 귀속이 그 믿음의 진리에 대한 맡김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3. 심리상태의 투명성에 대한 올바른 설명은 주체에게 드러나는 현상이 그 본질을 형성하는 그런 “내적 실재” (inner reality)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일인칭 시점에서는 믿음이 세계와의 연결 속에 서 파악되고, 믿음은 세계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과정 자체에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인칭 시점에서의 자기파악이 마치도 내부를 관조하는 것처럼 (즉, 외적인 세계에 대한 고려와는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 못 되었다. 어떤 질문에 대해 마음을 먹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주장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우유부단을 주장함으로써 회피할 수 없다6). P가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왔다갔다하는 자신의 모습을 “나는 P를 믿고 있고, 그리고 나는 ­P도 믿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식적인 확실성성을 가져다 주기 보다는 오히려 인식적 주체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물론, “P 그리고 ­P”와 달리 위의 문장은 논리적 모순이 아님으로 무어의 문장과 같이 충분히 가능한 사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문장을 주장하는 것은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유보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지금까지, 무어의 역설은 일인칭 시점이 단순히 내부를 관조하는 것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해준다는 주장을 하였고, 투명성이 마음과 몸의 극단적인 분리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물리주의자들의 결론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투명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하고 있는가는 확실치 않다. 사실 물리주의자들의 투명성에 대한 어떤 접근은 문제성이 있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 최근 의식에 대한 한 이론으로 제시된 고차이론을 들 수 있겠는데, 지금까지의 토론을 기초로 고차이론의 문제점을 지적 함으로서 이 논문을 마무리하겠다.

고차이론 (Higher Order Theory)은 DEJS 심리상태가 의식상태이냐 아니냐는 적절한 고차 상태 (Higher Order State)의 존재여부에 달려있다는 이론이다. 적절한 고차 상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따라, 라이컨(William Lycan)의 내적지각 이론(Inner Sense Theory)과, 로젠탈(David Rosenthal)의 고차 사고 이론 (Higher Order Thought Theory)으로 구분된다7). 전자에 의하면, 적절한 고차 상태는 지각적 상태와 유사하고, 따라서 지각적 상태가 가지고 있는 감각질과 유사한 성질을 고차상태가 가지고 있으며, 후자에 따르면, 적절한 고차 상태는 단지 어떤 일차상태를 지향하는 사고일 뿐이다. 고차이론들의 공통된 점은 의식은 관계적 성질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에 열쇠를 두고 왔다는 기억이 의식에 떠올랐을 때, 그 기억은 의식상태가 되는데, 그 기억이 의식상태라는 것은, 그 기억에 대한, 그 기억을 향한, 고차 상태가 발생했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의식상태란 결국 그 상태를 향한 고차 상태의 존재에 의존함으로, 의식은 관계적인 성질이 되고, 의식상태의 본질적인 성질과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이 없게 된다. 고차이론들이 참이라면 심리적 성질 (감각질, 지향성)의 본질은 의식과 무관함으로, 심리적 성질이 물리적인 성질로 환원될 수 없는 이유는 심리적 성질은 의식이 드러난 현상이 그 본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라는 종래의 이원론적 논증이 취약하게 된다. 라이컨의 말대로, 고차이론들은 의식을 물리주의/기능주의적 심리이론에 심각한 문제를 제공하는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항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즉, 의식이 물리주의/기능주의적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다. 고차이론을 은유적인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의식은 연극 무대 위에 특정 배우를 비춰 주는 조명등과도 같다. 조명등이 비추어 지는 부분이 의식되는 심리상태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심리상태를 의식할 때, 우리의 생각은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지향하나, 우리의 생각이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의식상태로 전환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그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의식하더라도, 그 방식이 자신의 행동의 관찰에 의해 추론되었을 경우, 그의 믿음은 의식상태라고 보기 힘들다. 행동을 관찰하여 얻은 증거에 의존한 인식은 제 삼자도 가질 수 있고, 심리 상태의 인식에 관한 일인칭/삼인칭 시점의 비 대칭성을 설명해 주기 위해선 일인칭 시점의 특이성을 설명해야 한다 따라서, 라이컨은 의식을 가져오는 고차 상태는 지각적인 경험과 유사하다고 보는 것이다. 지각적 경험에 의해 두 물체의 상대적 크기를 즉각적으로 알 듯이,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한 의식도 그런 즉각 적인 앎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 삼자는 항시 행동관찰을 통해 심리상태를 추론한다는 것을 가정하면, 비 대칭성이 설명되는 것 같다. 로젠탈도 의식을 결정하는 고차 사고는 추론이나 관찰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즉각적으로 도출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그의 이론에 첨가한다.

그러나, 즉각성이 과연 일인칭 시점의 특이성을 충분히 설명하는가? 우리와 친숙한 사람일수록 상대방의 기분이나 생각을 우리가 금방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다. 물론, 우리가 의식할 수 없도록, 그 추론이 빨리 진행되었다고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이해가 추론을 반드시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심리상태에 대한 이해는 따라서 추론을 포함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여기서, 무어의 문장이 고차이론 내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지 고려해보자. 고차이론에 의하면, 무어의 문장은 일차믿음의 결과로 “P”를 주장하고, 이차믿음의 결과로 “나는 P를 믿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되겠다. 결국, 무어의 문장은 자신의 믿음을 잘 못 판단한 경우에 불과하다. 따라서, 무어의 문장이 이상하다면, 이는 우리가 우리자신의 심리 상태에 대해 오류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류 불가능성(infallibility)이 무어의 역설의 원인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오류불가능을 믿고 있지 않더라도, 무어의 역설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이를 보기 위해, “P, 그리고 나는 P를 믿는다” 라는 문장을 고려해보자. 고차이론에 의하면, 이 문장은 P에 대한 믿음을 표현함과 동시에 보고한다. 본인이 의식하지 않는 심리상태여도 여러 행동으로 표현 될 수 있으나, 그 상태가 의식될 때 우리는 그것을 직접 남에게 보고할 수 있다. “P”라는 언명은 믿음의 한 표현이고, “나는 P를 믿는다”는 믿음에 대한 이차믿음의 한 표현이다. 주장을 통해 표현되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참인 이차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므로 고차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위의 문장은 전혀 이상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P, 나는 P를 믿는다”는 역설적인 면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일상적으로 믿음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 시킴으로 서 그것을 설명해준다. 왜 그는 우산을 찾는가? 우리가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대답은 “밖에 비가 오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 아닌, 바로 “밖에 비가 오고 있기 때문에”이다. 전자는 그 사람이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삼인칭적/이론적 시각을 택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즉, 자신을 이성적 행위자라는 종에 속하는 한 개체로 보고, 그 개체의 행동을 명제태도와의 이성적 패턴에 종속 시킴으로 서 그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은 자신의 행동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가설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성적 행위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이와 같은 태도만을 계속 견지 할 수 없다. 즉, 나는 비가 온다고 믿고 있고 (그것이 참이건 거짓이건), 그리고 그런 믿음이 나의 행동을 정당화 시켜 줌으로써 나의 행동을 설명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일인칭 시점에서는 비가 온다고 믿고 있는 사실은 비가 온다는 사실과 동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해주고 인도해주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삼인칭 시점에서는 믿음이 잘못되었더라도, 그 믿음의 설명력에 하등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즉, 믿음이 잘못되었더라도 내가 무엇을 할지(what I will do)를 예측하는데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일인칭 시점에서는, 믿음의 진리에 대한 질문을 유보할 경우 믿음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what I will do)를 결정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 비가 온다고 확신할 경우에도, 자신이 실지로 비가 온다고 믿고 있는지는 두고 봐야 알 수 있다는 태도는 자신의 믿음이 아직 일인칭시점으로부터 불투명한 사실로 남아 있는 것이다. 즉, 삼인칭 시점에서 어떤 믿음이 부여되더라도, 그 믿음이 아직 완전히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한 상태를 나타낸다. 일인칭 시점에서의 지식은 믿음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토론은 일인칭 시점이 결여된 경우 믿음을 귀속할 수 없다는 주장을, 즉, 자신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반드시 그러하다는 인식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하지 않는다.

문제의 관건은, 일단 일인칭 시점을 택했을 때 과연 어떤 논리적 조건이 요구되는 가이다.

일인칭시점에서 볼 때 “P 그리고 나는 P를 믿는다” 라는 주장은 위와 같은 문제의 소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점이 고차이론의 시각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 고차이론은 일인칭 시점이 내적인 재현까지 QR에 다다를 수 없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믿음을 아는 것은 내부를 관조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은 우리의 인식적인 순서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재현에 우선적이다라는 생각으로부터 초래된다. 우리의 마음은 외부세계와 달리 우리에게 인식적으로 근접해있고, 그러한 인식적 근접성을 본질로 하는 마음이라는 형이상학적으로 사적인(private) 영역을 설정한 이원론자들, 또, 그에 대항하여, 그 내적 영역으로부터 의식을 극단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마음을 물리주의적 시점, 혹은, 삼인칭시점에 포섭될 가능성을 열리고 하는 반이원론자들, 두 진영 공히 일인칭시점에서는 마음과 세계가 인식론적인 비대칭 성을 가진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런 가정이 믿음의 주체를 세계 안에 포함시키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재현주의 심리학이 가지는 문제점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은 이 논문의 한계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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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병덕, "무어의 역설과 합리성", 철학 63집, 2000 여름.
Davies, Martin and Humphreys, Glyn (eds), Consciousness, 1993, Basil Black-well.
Evans, Gareth, The Variety of Reference, 1982, Oxford: Clarendon Press.
Levine, Joseph. "Recent Work on Consciousness",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Volume 34/Number 4.
Lycan, William, Consciousness and Experience, 1996, Cambridge, Mass.: MIT Press.
Malcolm, Norman, Wittgensteinian Themes, Essays 1978-1989,1995, Cornell University Press.
Moran, Richard. "Self-Knowledge: Discovery, Resolution, and Undoing", European Journal of Philosophy, 1977, 141-161.
Rosenthal, David, "Thinking that One Thinks", 1993, in Martin Davies and Glyn Humphreys (eds), Consciousness, Basil Blackwell.
Villanueva, E. (ed.), Consciousness, Philosophical Issues, no.1, Atascadero, Calif.:Ridgeview Publishing.
Wittgenstein, Ludwig,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953, G.E.M. Anscombe (trans.), The Macmillan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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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G. E. Moore, “A Reply to My Critics.” 무어 자신은 무어의 문장자체는 자기모순이 아니고, 그 문장의 부조리함은 언명할 경우에만 발생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꼭 언명하지 않고 그 문장을 단지 믿고 있을 경우에도 부조리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지적은 이병덕의 “무어의 역설과 합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병덕의 논문은 무어의 역설에 대한 지금까지의 주된 접근방식들에 대한 간명한 정리도 담고 있다.
2) 맹시 현상과 그 밖의 여러 의식의 결핍현상들에 대한 소개와 분석을 담은 논문 Andrew Young 과 Edward de Hann의 “Impairment of Visual Awareness.”를 참고할 것
3) Daniel Dennett, Consciousness Explained, pp. 131-132.
4)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lated by G.E.M.Anscombe,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IIx, 190e. “One can mistrust. One’s own senses, but not one’s own belief.”
5) Gareth Evans, The Variety of Reference, p. 225.
6) Ludwig Wittgenstein, Ibid., 192e. “Don’t regard a hesitant assertion as an assertion of hesitancy.”
7) William Lycan, Consciousness and Experience, 과 David Rosenthal, “Thinking that One Thinks”, 1992, in Davies, M, and G. Humphreys (eds), Consciousness,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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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윤보석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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