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자명 현대영미어문학회
학술지명 현대영미어문학
권 17
호 2
출판일 2000. 2. 29.
엘리엇 시에 나타난 시간성과 인식론
김진규
경남대
1-187-0001-03
영문요약
T.S.Eliot’s Time and Epistemology
Eliot’s first foremost endeavor of de-sanctioning activity is launched against the traditional Western metaphysics of logocentrism, the recent origin of which may be traced back to the Cartesian concepts of ‘I’, ‘mind’ and ‘consciousness’ According to Eliot’s various philosophical writings, the Cartesian concepts such as those are very fragile and precarious-and even volatile- because these are no more of a stable and immitigable, metaphysical, substance than a shadow is, Eliot presupposes, and argues, that these are nothing but those which are constructed by the communal necessities, ideological doctrines and other prevailing cultural forces. And the major device employed in this construction processes of course is language which is itself nothing but a construction dominated by the above-mentioned elements. In the epistemology of Eliot, therefore, society and culture constructs language and language in turn constructs society and culture and both of these build up and dominate the concept of ‘I’, ‘mind’ and ‘consciousness’. Thus Eliot says that without language there exists no object, adding that the reality of object depends upon ?and only exists in- relational construction. The same is true of the ‘I’, ‘mind’ and ‘consciousness’. These are all relational constructions. Anything dependent upon other that is, anything conditioned has no substance of its own: it simply is not something metaphysical. Here the possibility of metaphysics is radically denied.
This kind of epistemology does not permit the possibility of any stable knowledge that is, and has been, desperately sought after by science and metaphysics. However, why do so many literary critics -and even philosophers- are and have been trying to find such possibility in Eliot? It may not be their fault : it is Eliot himself who invites them to do so especially in his literary discourses. When he compares the poet’s mind to a catalyzing medium, unaffected and unimpressionable, and when he quotes as an epigraph in one of his very important essays a line from Arestotle’s De Anima that reads like ‘something divine, impressionable and unaffected, he surely seems to be inviting such attempts. This kind of mentions and references immediately led so many to hail Eliot as the champion of the cognitive theist, the preserver of the traditional humanist values. However, Eliot is neither so clear nor so simplistic in thinking he has a double-edged sword that sometimes undercuts the branch of a tree on which he is sitting. He is sort of a double talker, consciously and unconsciously. This essay will propose a strategy that is focused on a Nagarjuna and de-constructive re-reading of Eliot's texts, both philosophical and lite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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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엘리엇(Thomas Sterns Eliot 1888-1965)은 젊은 시절부터 동서양의 사상과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얻어진 시간과 영원, 생성과 존재 그리고 변화와 불멸성 같은 관계성에 관한 문제를 작품에 반영했다. 특히 그는 전통적 인식론을 강조하면서 궁극적인 실재에 관한 통찰로 일관하고 있다. 문학은 시간 속의 존재인 인간이 그 유한성을 극복한 수 있는 방편이다.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삶과 본질의 문제에서 엘리엇도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것은 그의 시,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시공을 초월한 성찰과 본질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자신의 삶 속에서 고민하고 문학으로 표현해 내려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엘리엇이 1911년 가을 하버드 대학원에서 철학 연구를 시작했을 때, 대학원 연구 계획의 약 3분의 1은 동양 철학과 언어학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의 노트에서 기원전 2세기경에 나가르주나(Nagarjuna)에 의해 창건된 중관파(中觀派, Philo Sophical School of Madhysmika)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발견할 수 있다. 2년째 되는 해는 초기 불교 경전들의 언어인 팔리(Pali)어를 배우기 위해 산스크리트어 공부를 중단했으며 중국과 일본의 종교와 철학 사상들을 알기 위해 마사하루 아네사끼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엘리엇은 이 인도 철학과 종교 강의를 통해 나가르주나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엘리엇의 인식론도 인도의 불교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엘리엇의 인식론의 토대는 관계성의 인식이므로 그의 문학적 담론들은 사실과 자아 등 일체의 현상이 그 자체의 불변하는 본질이나 자성(own-nature, own-being)을 갖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의 소산이라고 보고 그에게 있어서 관계성의 소산은 상대적인 실재성만을 의미할 뿐이다.
본 논문에서는 엘리엇의 관계성 이론을 바탕으로 박사학위의 주 연구대상이었던 영국의 현대 관념주의 철학자 브래들리(F. H. Bradley)의 상호의존의 이론(Theory of interdependence)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일체 현상의 실재성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엘리엇의 인식론은 일원론적 관념주의자로 설명될 수 없다. 엘리엇의 시간과 언어에 관한 문제는 그의 말기 시인 ‘네개의 사중주’(Fout Quartes)에서 엘리엇 특유의 상대주의적(相對主義的),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물론 이것 역시 그의 박사 논문인 브래들리의 영향이다. 여기서 그는 어떠한 사물도 그 자체로는 실체를 갖지 않으며, 특정한 텍스트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논한다.
‘네개의 사중주’의 첫 부분인 ‘번트노튼(Burnt Norton)에서 시인은 우선 동시적(simultaneous) 시간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결정론적인 시간이다. 번트노튼 1장에서 엘리엇이 번트노튼을 방문하고서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현재는 무엇이고 과거는 무엇이며 미래는 무엇인가하고 시간에 관한 추상적인 생각을 해본다.
현재 시간과 과거시간
아마 둘다 미래 속에 존재하고
미래 시간은 과거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다.
만약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모든 시간은 구원 받을 수 없으리라.
Time present and time past
Are both perhaps present in time future
And time future contained in time past
If all time is unredeemable. (CPP171)
시간을 현실적인 입장에서 보면 거기에 현재, 과거, 미래의 구분이 있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엘리엇은 시간을 초월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그에게서는 시간 구분이 있을 수 없고 다만 영원한 현재가 있을 따름이며, 그 시간은 한 순간으로 또는 한 점으로 환원된다. 엘리엇의 정지점(still point)은 바로 시간의 한 점이다. 모든 시간이 이렇게 영원히 구분 지을 수 없이 한 점에 집중되어 존재한다면 어느 시간을 과거라고, 또는 어느 시간을 현재라고 해서 그 시간만을 따로 떼어낼 수도 없고, 현재라고 또는 미래라고 지칭할 수도 없다. 과거는 실현된 일이 없이 그저 영원한 가능성으로만 남아서 우리의 사색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실현된 일도 결국은 그것이 계속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은 한 꿈처럼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점에선 있을 수 있었던 일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있은 일이나 있을 수 있었던 일은 결국 과거의 시간과는 상관없이 영원한 시간(현재) 속에 그저 우리의 명상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시인은 사실과 환상의 차이를 애써 구분짓지 않는다. 그래서 번트노튼을 방문 했을 때, 그 곳 장미원을 실제의 장미원과 상징으로서의 장미원을 구분하지 않고 그 곳에서 있을 수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엘리엇의 시에서 장미원은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을 상기시키는 순수와 절대 행복의 상징이다. 그래서 그 곳으로 가는 통로는 인간이 한번도 가본 일이 없고, 그 문은 우리가 한번도 열어본 일이 없는 시간이 초월된 세계로 들어가는 곳이다. 그는 이 순수의 동산에서 아이들의 발짝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새 소리를 들으며 아주 행복한 환상에 젓는다. 이 환상 속에서 시간의 동시성-현재, 과거, 미래의 시간성을 부정하고 다만 영원한 시간이 있을 따름이고 그 시간이 한 순간으로 또는 한 점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엘리엇의 정지점은 바로 시간의 지축이다.
번트노튼 2부에서 시인은 정원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우주적인 의미를 내다본다. 즉 상반, 대립, 혼돈의 현상 세계 너머의 조화, 질서 세계의 의미를 생각한다. 시인은 이 세상의 미천한 것과 희귀한 것의 상징으로 마늘과 청옥을 병치하여 그것이 진흙 속에서 파묻힌 차축에 엉겨 붙는다고 한다. 진흙은 혼돈과 무질서의 이 세계를 말하는 것이니 그 속에는 마늘류의 범속한 것과 보석류의 진귀한 것이 잡다하게 공존하지만 우주의 원리에 의하여 통솔되고 대 질서를 이루며 움직여진다. 움직이는 시간의 세계와 무시간의 정지점은 같은 표상이다. 엘리엇의 정지점은 상반, 모순, 갈등의 지양이고 해소이고 합일을 의미할 뿐이지 이탈과 도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나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신비적인 무아경에 해당한다. 그것은 현상의 불완전이 해소된 완전상이고, 자기를 통하여 분열과 아집을 버려야 획득 되어지는 것이다. 이 정지점은 우주 만물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돌연한 광휘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초감각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규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을 엘리엇은 ‘나는 거기에 있었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딘지는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얼마 동안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을 시간안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생사고락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허약한 인간(the weakness of the changing body)은 시간의 세계에 얽매이게 마련이다. 시간의 흐름이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있는 듯이 생각되기 때문에 그 시간을 사슬이라 하였고, 그 시간의 변화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인체이기 때문에, 천국과 타락의 길이 막혀있다. 즉 절대적 황홀도 절대적 공포도 없고, 완전히 산 것도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닌 반생 반사의 상태를 지속한다. 인간은 천국과 지옥에 직면하여 그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겠지만 육체가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까 과거니 현재니 하는 시간의 세계에 있어서는 실재에 대한 의식은 환상이나 꿈처럼 불완전한 상태에서 얻어질 수 있을 뿐이지 충분하지 못하다. 완전한 실재의식이나 영원의식의 순간은 시간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고, 시간의 세계에 있지 않은 것이지만 꿈같고 환상 같은 실재의식(정점의식)의 순간은 시간의 세계 안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져서 그것이 기억으로 남는다고 말한다. 시간의 세계에서 체험하는 사건들은 기억으로 남음으로써 그 단편적이고 순간적이고 무의미한 것이 의미가 생기고 영원성을 획득하여 시간세계를 초월하게 된다. 즉 지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됨으로써 영원성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그는 ‘시간에 의해서만 시간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로써 엘리엇이 환상으로 포착하는 영원의 시간이 결코 현실을 초월하는 가공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체험의 의미이고 기억인 것임을 알 수 있다.
Ⅱ. 엘리엇의 시에 영향을 준 대표적 서양 철학가로는 브래들리(F. H. Bradley)가 있다. 그의 인과론에 의하면 하나의 사실은 그 자체의 본래적인(innate) 의미를 갖지 못하며, 그것의 존재에 기여해 온 이전의 사실들과 관련되어질 때만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실의 의미를 안다고 말한 때, 그것은 우리가 마지막 한 사실의 존재에 기여한 모든 사실들의 의미들을 다 안다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떠한 사실을 존재하게 만든 사실들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실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시점(viewpoint)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떤 한 시점을 가능하게 만든 것의 전(全) 의미들을 알기까지는 우리는 그 시점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 같은 브래들리의 사상의 밑바닥에는 계속성에 대한 관념주의적 신념이 깔려있다. 그것은 분리되는 부분들로부터 통합된 전체로, 파편성으로부터 통일성으로 무관계한 변화들로부터 연속되는 흐름이며, 유전의 현상으로부터 절대로의 움직임에 대한 신앙이다. 이것이 바로 브래들리의 관념주의적 절대주의의 기반이다. 또 브래들리가 서구 관념론의 전통적 형식들을 모두 거부했던 것과 유사하게 나가르주나도 자아, 공간, 시간 등 정신의 모든 범주들에 대해 본질을 부여하기를 거부하고 그의 전통을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한다. ‘모든 사실들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사실들은 하나의 사실이다1). 이것이 브래들리의 사상을 대표하는 상호의존의 이론(Theory of interdependence)이다. 브래들리는 어떤 현상도 상대성(relativity)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상대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오직 현상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다2).’ 이것은 브래들리의 변증법적 원칙인 ‘모든 사물과 상대성과 모순(contradiction)으로 감염’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브래들리는 사고에 있어서 ‘상대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For thought what is not relative is nothing)라고 적고 있다3). 그러나 하나의 사물이 관계지워지기 위해서는 명백히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조건들(terms)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관계를 이루지 못하는 조건들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내가 도달한 결혼은 생각에 대한 관계적 견해는 진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때 우리의 지성은 혼란과 파산에 직면하게 되고 실재는 미완성으로 남겨진다.’ 이같은 생각은 ‘다른것과 동일(identical) 하다거나 다르다(different)고 할 수 없는 두 사물은 어느 것은 실재가 아니다’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중관 변증법과 유사하다. 엘리엇은 브래들리 철학 연구를 통해 도달한 결론은 ‘현상과 실재’가 ‘실질적으로 일치’(subatantial agreement)하지만 ‘실재의 본성에 관한 어떤 추론들은 우리로 하여금 관념론 철학이나 실재론 철학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금한다’고 시사한다4). 이것은 전통적인 형이상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실체의 철학(Philosophy of no-substance)이다. 바로 이점이 브래들리와 엘리엇의 관계성 의식과 함께 두 사람을 불교사상의 나가르주나와 근접시켜주는 핵심인 셈이다.
엘리엇이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영혼의 실체적 통일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공격할 때는 어떤 시인도, 어떤 분야의 예술가도 자기 혼자서는 완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는 이것을 죽은 시인과 예술가에 대한 관계라고 말했다5). 이같이 무실체론적인 인식론적 배경이 충실히 문학에 반영되고 있다. 이것이 엘리엇의 전통론의 핵심적인 관개성의 의식이고, 전통론은 엘리엇 문학의 중심이다.
엘리엇이 1927년 영국으로 귀화하면서 동시에 개종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작품에 나타나는 불교적 관점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의 개종은 전쟁, 불행한 결혼 생활, 신경쇠약 등이 가져온 것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자기구원의 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엘리엇이 가장 매료된 것은 바로 이 불교의 구원 철학이었다. 이것은 그의 시에서도 볼 수 있다.
나의 시작에 나의 끝이 있다 연달아서
집들은 서고, 쓰러지고, 허물어지고, 넓혀지고,
옮겨지고, 파괴되고, 복구되고, 또는 그 자리에
넓은 논밭이나 공장이나 도로가 있다.
낡은 돌이 새 건물에, 낡은 목재는 새 불에,
낡은 불은 재로, 재는 흙으로,
흙은 이미 살이고, 모피이고, 매실물이고,
사람과 짐승의 뼈이고, 곡식대이고 앞이다.
집들은 살다 죽는다. 세우는 시간이 있고,
사는 시간, 생산하는 시간이 있다.
또는 바람이 흔들리는 유리창을 깨뜨리는 시간,
들쥐가 달음질치는 벽 찬장을 흔드는 시간, 그리고
무언의 표어를 짜 넣은 해진 애라스천 벽걸이를 흔드는 시간이 있다.
In my beginning is my end. In succession
Houses rise and fall, crumble, are extended,
Are removed, destroyed, restored or in their place
Is an open field, or a factory or a by-pass.
Old stone to new building, old timber to new fires.
Old fires to ashes, and ashes to the earth
Which is already flesh, fur and faeces,
Bone of man and beast, cornstalk and leaf.
Houses live and dead: there is a time for building
And a time for living, and for generation
And a time for the wind to break the loosened pane
And to shake the wainscot where the field-mouse trots
And to shake the tattered arras woven with a silent motto.
? ? ? ? ? ? ? ? ? ? ? ? ? ? ? ? ? ? ? ? ? ? (East Coker I, 1-13)
현상의 세계가 영속성을 갖는 것 같지만 그것은 시간의 영원한 바퀴 속에서 윤회하는 찰나들의 이어짐에 불과하다. 지상의 ‘모든 집들은 쓰러지고 다시 세워지고하는 반복적 현상은 윤회의 법칙 속에 있다. 현실이란 항상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브래들리가 서구 관념론의 종래 형식들을 모두 거부했던 것과 유사하게 나가로주나 역시도 자아, 공간, 시간 등 정신의 모든 범주들에 대해 본질을 부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전통을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함을 지적했다. 이 점때문에 브래들리의 사상과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은 때로 일종의 절대적 허무주의로 비난받는다.
브래들리의 현상과 실재,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도, 나가르주나가 세속(samsara)과 열반(nirvana)의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는 점에서 브래들리와 유사성을 보인다. ‘현상적 존재의 어떤 것도 열반과 다르지 않으며, 열반의 어떤 것도 현상적 존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6).
엘리엇이 브래들리에게서 발견하는 큰 매력 중의 하나는 논리학의 문제, 도덕철학 그리고 형이상학에 있어서조차 체계의 구축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겸양의 지혜이다7).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이며 강을 건너고 난 다음에는 그것은 버려져야 한다는 것이다8). 이것에 대해 방법론적인 그리고 존재론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미망일 뿐이다. 공(Sunyata)이 궁극 진리인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범주가 아니라, 구원적인 치료법에 속한다. 이 공에 대해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공하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면 공한 것도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공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공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의 견해를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승자(勝子)들께서는 공을 설하셨다. 그런데 아직 공이라는 견해에 사로 잡혀 있는 자는 구제할 길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공(空)이라는 것이 있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는 불공(不空)이라 말해서도 안된다.
공(共, 空인 동시에 不空)이라는 것이나 불공(不共, 空도 아니고 不空도 아니다)이라는 것도 그렇다. 다만 가설로는 말할 수 있다9).
실재에 관한 무슨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언어상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고 진실에서 끄집어 온 것이 아니며 또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진실은 언어로 표시될 수 없고 표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작자들이 즐겨 행하는 분별은 언어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일 뿐이다. 실재의 세계 속에 그러한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진리는 어떠한 징표로써도 표시될 수 없으며 이러한 뜻을 알리기 위하여 만유(萬有)는 공(空)이고 무상(無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를 떠나서 실재와 직접 대결한다면 이것이 공의 세계가 된다. 사려 분별에 의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대하는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본체(木體 : 자성, 실체)는 사실은 언어를 실체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물이 공이라는 것은 본체가 없다는 뜻이 된다. 이리하여 나가르주나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실체나 자성이 부정된다10).
이제까지 브래들리 철학의 특징이 상호의존적 현상의 무실체성에 대한 인식이었음을 보았다. 엘리엇의 인식론에 있어서도 관계성의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비춰진다. 엘리엇은 ‘지식과 경험’에서 앎에 대한 관원적 회의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앎의 주체’와 대상의 실재성 자체를 의문시 한다. 그는 ‘의식 속에 결집되는 것은 무엇이거나 동등하게 존재하며, 관계 속에서만 실재적이거나 비실재적이며 모든 대상(object)들을 대상 그 자체 내에서 발견될 수 있는 어떤 특징에 의해서 내재적(immanent)이거나 ‘초월적(transcendent)인 것이 아니라, 동등하게 내재적이고 동등하게 초월적이다’ 라고 쓰고 있다11). 이같은 언급은 앎의 주체의 실재성과 자율성을 부전하는 동시에 대상의 자존적인(self-subsistent))성질을 부인하고 관계적인 구축물로 환원시킨다.
Ⅲ.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엘리엇은 자아를 포함한 일체의 현상들을 관계적인 구축물(relational construction)로 본다. 이때 나와 세계, 주체와 객체간의 경계는 붕괴되고 우열과 주종의 대립적 위계질서가 소멸된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에 대해 절대적인 우월을 주장할 수 없으며, 이 둘은 적대적이 아니라 상보적(complementa교)인 관계가 된다. 여기에 전통적인 주종관계와 인과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위계질서가 해체되고 관계성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엘리엇의 이같은 생각의 틀 속에서는 자아 의식, 자아 등 일체의 현상에서 고정불변하는 형이상학적 본질이 발견될 수 없다. 엘리엇의 인식론의 테두리 안에서는 그 어느 것도 미리 주어지거나 고정되고 안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항시 유동의 상태에 있으며, 항시 어느 순간 전복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 엘리엇의 인식론의 세계에서는 자아, 실재, 의식 등 일체의 형이상학적 실체들은 허구의 산물로써 해체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허구적인 형이상학은 탈신비화, 탈형이상학화되는 것이다.
작가의 역사적 의식은 그의 뼈 속에 새겨진 그 자신의 세대와 함께 글을 쓰게 할 뿐 아니라, 호머 이래의 유럽 문학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된 그 나라 문학 전체가 하나의 동시적 존재를 가지며, 하나의 동시적 질서를 형성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글을 쓰도록 강요한다12). 엘리엇은 ‘나는 현재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때도 나는 문학을 세계의 문학, 유럽의 문학, 한 나라의 문학을 막론하고 그것을 개인들의 문학작품의 집성으로서가 아니라 유기적 전체’로 보았으며, 개개의 문예 작품이나 각개 예술가의 작품들을 상호 관계 안에서의 체계로서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고, 자기의 독특한 위치를 획득하기 위해서 자신을 굽히고 희생하는 헌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전통은 종교의식에서부터 같은 장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혈족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상의 행동들과 관습을 포함해야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은 문화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엘리엇은 실제로 전통을 현재의 형성에 작용한 과거로부터 계승된 살아 숨쉬는 문화의 일부로 보았다. 또한 영국문화는 다른 나라와 함께 유럽문화의 일부로 유럽문화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으니, 그 공유한 전통을 줄기는 희랍, 로마문화와 기독교문화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서 전통이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원천으로 하는 유럽 문학 작품 속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저절로 상속되는 것은 아니며, 만약 전통을 원하면 반드시 노력으로 그것을 성취해야 한다.
엘리엇은 유럽문화 전체의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호머 이후의 유럽문학이 과거 문학의 모범을 동시적 질서 속에서 추구한다라고 했다. 시인은 자신의 골수 속에 그 자신의 세대를 인식하고 작품을 쓸 뿐만 아니라 유럽문학 전체와 자국문화 전체가 동시에 존재하고 동시적 질서를 형성하는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엘리엇은 개개의 작품, 각국의 문학, 특별한 시대의 예술작품을 개별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고 믿는다. 엘리엇 자신도 후에 유기적 전체로서의 질서의 문제를 강조하나, 그가 말하고 있는 전통은 궁극적으로 질서의 문제이다. 그에게 전통이란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기존 작품들 상호간에 형성된 질서, 즉 이상적이며, 동시적인 질서를 이루고 있는 유기적인 전체를 의미한다. 문학전통을 과거에서 현재까지 개별적인 작품들의 집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문학작품들이 유기적인 전체로서 동시적이고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본 문학은 유기적인 전체(organic wholes)로서 그 상호관계 안에서만 의의를 지닌다고 말한다. 즉 개개의 문학작품이나 예술가 개개인의 작품이 서로 연관되어서 의미있는 체계가 되며, 이것이 작품 비평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엘리엇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개개인의 문학작품의 수집이 아니라, 유기체적 전체이며 작품상호간의 관계 안에서의 체계이다. 그러니까 엘리엇은 전통의 개념을 정적이거나 불연속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이러한 유기적인 문학 전체내에서 항상 변화, 발전하는 동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 유기체론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 진동과 현재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되는 것으로 유기적이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개념은 영국에서 콜리지(William Coleridge)가 유기적 통합체(Organic unity)의 개념을 보편화시킴으로써 시작된다. 콜리지는 ‘유기적 통일체는 전체와 부분이 서로 얽혀서 상호간에 영향을 끼치면서 전체가 부분보다 우선하는 하나의 체계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 우위의 절대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의 관계로서 서로에 의해 변화하면서 통합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엘리엇의 전통론에는 역시 전체가 강조되는데 여기서 전체는 문화적 전통이며 과거이고, 부분은 개인의 재능이며 현재이다. 곧 전통은 시간에 의해 단락지을 수 없는 영속적인 질서 의식이며 이상적인 질서라는 것이다. 전체로서의 전통의 이상적인 질서가 부분으로서의 각 개인의 작품의 역할보다 강조되고 있는데 전체로서의 전통의 이상적인 질서는 계속 형성되어 나가는 것으로 비록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인 것과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서에서 이탈된 예술가와 시인은 홀로 존재할 수가 없으며 과거 시인들과의 상호관계에서만 그 시인의 중요성이 생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문학작품은 하나의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문학질서에 새로운 작품이 도입되면 그 질서가 재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작품 속에 새로운 작품이 들어와서 일어나는 진정한 의미의 정합(整合)은 과거 그대로의 모방만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이 이 질서에 어긋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상적인 질서로서의 전체적인 질서는 항상 유지된다. 새로운 작품이 기존의 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다 할지라도 그 변화란 기존의 질서의 발전,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련화, 복잡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엇이 ‘전통’에서 전체적인 질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비평가들은 비판적이 견해를 보인다. 특히 에드문드 윌슨(Edmund Wilson)이나 스텐리 에드가 히맨(Stanldy Edgar Hyman)의 경우, 각 시대, 각 작가의 특이성을 무시한채 모든 역사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절대적 기준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에게는 엘리엇의 ‘전통’의 전체적인 질서를 유기체적인 질서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전체적 질서 하의 각 부분들은 작품들간의 영향을 무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엘리엇은 그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어느 시인도 독자적으로는 완전한 의미를 갖지 못하며 전체적이며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는 문화의 전통에 비추어 대조 비교되는 관계의 비평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Ⅳ. 엘리엇에게 있어서 시간의 문제는 끊임없이 묻고 대답해 온 관심사였다. 그것은 그 당시의 문화적 이슈이기도 했다. 이 시간성은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의 형태로 문학에 나타났다. 특히 만(Thomas Mann)과 프루스트(Marcel Proust) 그리고 울프(Virginia Woolf)등의 소설 장르에서 두드러진다. 베르그송의 시간철학을 문학으로 풀었다고 평가되는 프루스트에 있어 ‘창조적 기억’은 우리의 의식을 불연속적 단편으로 분리시켜 자아의 동질성을 빼앗는 시간의 파괴력을 극복하는 장치이다. 인간 의식을 통한 시간의 재포착이라는 베르그송의 면모는 엘리엇의 ‘네개의 사중주’에서도 엿보인다. 예를 들어 ‘매 순간은 우리의 모든 과거에 대한 새롭고 충격적인 가치 매김’(every moment is a new and shocking/ Valuation of all we have been : CPP 179)이라든가, 모든 탐험의 끝은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처음으로 알게되는 것이다(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the for the first time CPP 197)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실, 자아 등 일체의 현상은 그 자체의 형이상학적으로 불변하는 본질이나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의 소산이라고 보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 관계성의 소산들은 잠정적이고 상대적인 사실성, 진리성, 실재성만을 가질 뿐이다. 일체 현상의 자아, 자성, 실체성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엘리엇의 인식론은 하나의 사실은 그 자체로서 본래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며 그것의 존재에 기여해 온 이전의 사실들이 알려질 때에만 그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의 사실을 안다고 할 때는 그것은 우리가 마지막 한 사실의 존재에 기여한 모든 사실들을 안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엘리엇은 어떠한 사실이 완벽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실들은 서로 연관이 되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현상도 상대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모든 사실은 오직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형이상학과는 다른 무실체의 철학(philosophy of no-substance)이다. 서구의 형이상학 전통의 마비상태를 깬 혁명적인 절대주의적 관념론자로 알려진 브래들리의 철학인 것이다. 이 관계성은 인간, 사실등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엘리엇이 ‘전통과 재능’에서 ‘영혼의 실체적 통일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공격할 때 ‘어떤 시인도 어떤 분야의 예술가도 자기 혼자서는 완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의 의의, 그의 평가는 죽은 시인과 예술가에 대한 그의 관계의 평가이다’라고 이 같은 무실체론적인 인식론적 배경을 문학에 반영하고 있다. 이것이 엘리엇의 전통론의 핵심적인 관계성의 의식이고 엘리엇 문학의 중심이다. 진통은 종교의식에서 같은 장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혈족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상의 행동들과 관습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즉 전통은 문화이다. 이 전통론은 유럽의 문화뿐 아니라 전 세계의 어느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은 끝없는 유전을 가져 왔고 거기서 여러 전통을 토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전통이 과거로부터 계승된 살아 숨쉬는 문화의 일부로 본 것이다.
엘리엇은 유럽 문화 전체의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유럽문학이 전통과 함께 동시적 질서 속에 있다고 파악한다. 시인은 자신의 골수 속에 그 자신의 세대를 인식하고 작품을 쓸 뿐만 아니라 유럽문학 전체와 자국 문화 전체가 동시에 존재하고 동시적 질서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개개의 작품, 각국의 문학, 특별한 시대의 예술 작품을 개별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문학 작품도 유기체적 전체이며 작품 상호간의 관계 안에서의 체계이다. 이 전통의식은 엘리엇이 평생 동안 끊임없이 염원하였던 질서의 문제와 연결되어 자기 세대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전후의 무질서와 개인의 영혼을 찬양하는 낭만주의나 인본주의로 인해 빚어지는 혼란을 제거하기 위한 질서를 추구하였다. 이에 따른 해결책을 라틴전통을 기본으로 하는 고전주의와 전통의식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한 사물이 주변의 여러 사물과의 특징의 집합체라면 전체적인 주제는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진통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모든 사물은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엘리엇은 자아를 포함한 일체의 현상들을 관계적인 구축물로 본다. 이때 이들은 대립적 위계질서가 소멸된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우월을 주장할 수 없으며 상보적인 관계이다. 전통적인 위계질서가 해체되고 관계성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이같은 생각의 틀 속에서는 의식, 자아, 일체의 현상에서 고정 불변하는 형이상학적 본질이 발견될 수 없다. 그것들은 항시 유동적이다. 엘리엇의 인식론의 세계에서는 자아, 의식, 실재등 일체의 형이상학적 실체들은 허구의 산물로서 해체된다. 앞에서 살펴본 전통론에 의한 관계적 인식론으로 이 동일성의 체계내의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 및 대립의 관계는 더 복잡한 조합들과 기능들로 조직된다. 관계성 의식은 관계들을 지배하는 신적인 센터의 현존을 거부한다. 이 신적인 센터의 부재는 자유놀이가 가능한 열린 세계를 가능케 한다. 이 인식론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그 자체로서 자존하는 존재성을 갖지 못하고 다른 것들과의 관계적 얽힘에 의해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상호의존적인 일시적 성질을 가질 뿐 불변하는 자성을 갖고 있지 못한다. 세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의 결정론적 의미성을 해체시킴으로서 엘리엇은 완벽을 기하기 어려운 언어적 문제와 작품의 전반적인 통일성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연관성과 그로 인한 센터의 부재는 현대 문학에서 많은 작품에 영향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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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liot, T S. Knowledge and Experience in the Philosophy of F.H. Bradley. London Faber & Faber, 1964, 153.
5) Eliot, Sacred, 49.
6) Kearns, Traditions,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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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Inada, Nagarjuna, 22:11.
10) Nagarjuna, 中論, 황산덕 譯, 서울 서문문고, 1996, 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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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김진규
경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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