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序論
2.철학으로부터의 윤리학으로의 전환
3.他者倫理學의 倫理學的 爭點
1)同一者와 他者
2)타자적 이성과 감성적 수용성
4.타자윤리와 탈현대윤리학의 방향
1)타자윤리와 전통윤리의 접목
2)他者倫理와 平和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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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새한철학회
학술지명 철학논총CHULHAK-RONCHONG
ISSN 1226-9379
권 23
호 1
출판일 2001. 1. 31.
레비나스 타자윤리학과 탈현대윤리학
김연숙
전주교대
1-066-0101-02
국문요약
본 논문은 레비나스 타자윤리의 탈현대적 윤리학에의 반성과 함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윤리학에 관한 레비나스의 입장을 정리한다면, 제일철학은 존재론적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적 형이상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철학에서 존재론적 형이상학은 존재자와 관계맺기 보다는 ‘존재자를 중화’하고 희석해왔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타자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레비나스는 이 같은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윤리학이야말로 존재론을 넘어서 제일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주장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그동안 망각되어 왔던 타자의 문제가 있다. 자기밖의 외재성 즉 타자를 자기화하고 통합하는 행위를 전체성이라 비판하면서, 레비나스는 여타의 외계성과 구분되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의 의미, 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무한성의 개념을 통해서 자아중심성을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자기를 중심으로 그려지는 자기내재적 초월의 운동으로부터 절대적 타자성, 절대적 다름의 타자를 향한 움직임과 운동을 특징짓는 것은 타자에로의 초월과 열망이다. 타자에로의 초월이야말로 윤리적 관계형성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더욱이 레비나스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인간의 감성적 수용성의 차원이다. 인간의 감성은 타자로부터 오는 윤리적 호소와 요청을 감수하는 작용을 설명해준다. 이는 타자윤리가 기존의 이성중심의 주체윤리학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레비나스 타자윤리는 탈현대사회에서 윤리학의 위상 및 한국윤리학의 방향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첫째, 주체와 추상적 도덕법칙을 중시하던 이론지향적 윤리학으로부터 타자의 얼굴로 향한 실천윤리학에로의 전환, 둘째, 고립되고 분리된 타자중심의 자아관으로부터 타자와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인간관의 전환, 이같은 측면에서의 동양전통윤리와의 접목가능성, 셋째, 아는 사람뿐만 아니라 제3자 및 이방인에 대한 윤리로의 확충 및 평화의 철학의 정립가능성이다.
영문요약
Levinas' ethics of the Other and Orientation of post-modern ethics
This thesis purposes to discuss ‘ethics of the Other’ of Emmanuel Levinas and task of moral education. Therefore I will argue the main issue of ethics of the other in post-modern trends ; Ethics as first philosophy, reason and sensibility, the same and the other. Furthermore I will study that connection ‘ethics of the other’ with the oriental traditional ethics and philosophy of peace in Levinas with global ethics.
In the ethics of the other, Emmanuel Levinas criticizes the ontological tradition of the western philosophy as the philosophy of neutrality or the philosophy of totality, and devotes himself to founding the philosophy of peace based on the idea of the infinity. The philosophy of totality means the philosophy of the same, which objectifies the exteriority of the other outside the subject, and assimilates it to the subject. In the identification of the same in the I, the object of consciousness subjects to the consciousness of the I. Then, If the object of consciousness is an other man, hostile human relations is formed in the relation between me and the other. In this terrible situation, we need to establish a new relationship which recognizes the other person not as object of an I but as a being as it is. The right relationship between me and the other which recognizes the other person is ethical, metaphysical relationship. This ethical relationship does not mean a refusal to of self-identity but is desiring and transcending to the other.
In Levinas, the right relationship between me and the other is not the absorption into the unity of the system, but the maintenance of the distance which secures the difference between me and the other this distance between me and the other is the prerequisite of the exteriority of the other, the absolute otherness, difference and alterity. And it can be possible retained through separation between individual egos, which is possible through the inferiority of the ego of enjoyment. In other words, the human being as a body appears in separation from the others.
In the relationship with the others, the start line of the ethical relation is to accept the epiphany which appears at the face of the other. While phenomenon is the act of cognition which recognizes objects based on our own purpose, epiphany is what appears to us. The other as a naked face reveals a pre-original language i.e. a context-free ethical language. The face of the oter is nut only a command which orders us to follow the ethical calling, but also an appeal which calls us for help.
Levinas criticizes that the traditional ethics has a critical problem involving anonymity, an impersonality and abstract universality. He proposes countenance with face to face. In the dialogue, which is an address and an addresse between me and the other, the face-to-face countenance shows the pre-mordial ethical characteristics. What is more, the ethics of the other extends countenance of me and you to the relation between me and an unfamiliar person. Because everyone who essentially possesses the absolute otherness, alterity can displace the other as you in the relation to me. That is to say, the place of the other can be posited with the third, stranger, orphan, the weak, the hunger, the persecuted, the seffering, foreigners, laborers, begger, women …….
In this context, Levinas explains an egoistic subjects as an ego or an Norminative I but an ethical subject and an ethical subject as self or Accusative me. Besides, the main characteristic of the ethics of the other is that it describes the relation beyond the human finitude in terms of alterity of the other. A concrete example is the fecundity of eros. Through the fecundity which is fruit of eros, in other words through the son who in\s me and simultaneously who is not me, the finite ego contacts with the infinity of the future.
Through the ethics of the other, we can overcome the crisis of deconstruction of the ethics. Also, we can find the new alternative of the ethics which is required by global society in 21st century. Because the ethics of the other provides the basis of the new ethics as a learning, and it also defines the human subject, the ipseity of the human as the ethical subject. Furthermore, this new form of ethics implies the plurality and the solidarity which enables coexistence with the absolutely different oter. From the relevance of the ethics of the other as a post-modern ethical theory, we can conclude that the ethics of the other provides the new paradigm of the ethics for moral education department.
한글키워드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동일자, 타자, 초월, 열망, 타자성, 감성 이방인
영문키워드
Levinas, moral education, other and orientation Post-modern eth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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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序論
오늘날 첨단과학은 인간 삶의 모든 비밀스런 것들을 윤리적 반성이나 고찰 없이 들추고 현대인들은 합리적ㆍ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을 거부하기 이르렀다. 윤리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근대학문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 같이 자기반성적 제어력을 상실하고 있다. 생태학적 위기ㆍ핵절멸의 위협ㆍ유전공학과 인류의 종변화, 침략적 자본주의의 세계시장화, 극단적 원자화 등 이 모든 사태는 인류의 위기를 가중시키면서 미래를 예측불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현대의 위기가 가속화될수록 윤리적 요청은 커진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류의 위기는 전인류에 관계된 것이고 어느 누구도 이 같은 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은 역설적으로 광범위한 영역에서 윤리를 요청하도록 만든다. 혹자는 21세기의 시대정신(Zeitgeist)은 윤리하고 외친다.1) 近代의 시대정신이 科學이었고 인문ㆍ사회과학의 광범위한 영역으로까지 과학적 방법론이 확대되었다면, 21세기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에 倫理的 方法論이 요청되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은 윤리학의 학적 위상을 되묻게 한다. 일반적으로 동양 철학은 원래부터 윤리학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어 왔지만 서구 근대철학은 윤리학과 무관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말해진다. 근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실증주의는 철학에서 논리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고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경험적 검증가능성과 논리적 일관성이란 양날의 칼 앞에서 윤리학은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에 관한 규범적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고, 이는 경험적 세계에서의 검증가능성과는 다른 지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의 고유한 학적 특성을 망각한 논리실증주의들은 부단히 윤리학의 근간이 되는 형이상학을 학적 연구의 영역에서 배제시켰고, 형이상학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는 윤리학까지도 학으로서의 성립가능성을 의심받게 된 것이다.
인류의 위기상황에서 윤리학에 거는 기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절실하다. 왜냐하면 현대과학에 대한 반성 및 방향제시, 현대인의 윤리적 지체로부터 오는 가치판단의 부재의 극복은 윤리학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시대적 요청은 과거 그 어느 때 보다도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발한 윤리학적 연구활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컨대 실천윤리의 측면에서는 생태학적 환경윤리, 생명ㆍ의료윤리, 기업윤리, 전쟁윤리, 유전윤리 등의 응용윤리학의 대두, 이론적 측면에서는 개인윤리와 공동체윤리의 논쟁, 하버마스와 아펠에 의해 주도되는 담론윤리학, 푸코의 존재론적 주체윤리학, 로티의 신실용주의, 가다머의 해석학적 윤리학,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 헤어의 보편적 규정주의 윤리학, 카의 덕윤리, 길리건의 보살핌의 윤리, 페미니즘 윤리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불교나 유교 등 종교철학의 현대윤리학적 재해석 등 과거 그 어느 때 보다도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이 다양한 윤리학적 연구중에서 논자는 특히 레비나스 타자윤리를 통하여 현대윤리학에 대한 반성적 고찰과 현대윤리학적 함의를 논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본 논문은 윤리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타자윤리의 분명한 입장을 밝혀주는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서구전통의 철학적 윤리학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는 동일자와 타자의 개념 및 윤리학적 의미, 타자윤리학의 윤리학적 핵심원리라 할 수 있는 타자적 이성과 감성적 수용성의 원리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타자윤리의 윤리교육에의 시사점이라 할 수 있는 타자윤리와 동양전통윤리의 접목가능성과 평화철학의 정립에 대한 시사점을 논할 것이다.
2.철학으로부터의 윤리학으로의 전환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철학(proto philosophia)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혹은 ‘존재자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존재자 자체는 실체(ousia)라고 개념 짓는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제일철학은 실체의 근본구조를 그의 원인이나 원리에 따라 탐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을 먼저 배운 후에 모든 존재전반에 걸친 근본원리 즉 존재하는 것으로 하여금 존재하도록 하는 원리를 연구하는 제일철학 또는 신학을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이 제일철학은 후에 Metaphysika라 불린다. Metaphysika는 주역 繫辭傳의 ‘形而上者를 道라하고, 形而下者를 器라 한다’는 말을 빌어 形而上學으로 옮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전통적으로 서구철학은 존재론을 형이상학안에 위치시켰으며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존재에 관한 학’으로 분류하였다. 존재론의 어원인 ontologia는 그리이스어 onta(einai의 분사로서 ‘존재하는 것’의 뜻)와 logos(법칙, 논리 혹은 학문이라는 뜻)를 결합하여 만든 용어이다. 제일철학 혹은 형이상학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자 자체 또는 실체를 탐구하는 존재론은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중심주제가 되었다. 특히 존재론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전반부터 커졌는데 보통 존재자의 일반적인 근본구조와 그 마지막 근거를 문제 삼는다. 그러므로 서구철학의 역사는 존재론의 역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제반 흐름에서 초래된 문제를 손봉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인간에게 그렇게 심각하고 절실한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철학이 비교적 무관심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 철학을 위시한 모든 근대학문들은 그 동안 두 가지 기분적인 관심사이에서 고민해 왔다. 하나는 철학자가 연구하려는 구체적인 경험의 대상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밝혀보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밝히고 표현해 보려는 것이다. ‘있는 것’ 일반에 대한 논리적 접근은 존재론이다. ‥‥‥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논리란 그물에 걸리지 않는 존재의 고기는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2).
이론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고기가 쓸데없는 것들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삶의 현실에서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라면 심각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고통받는 이라든지, 기아 난민 등과 같은 현실적 문제들이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접근할 수 없기에 논의의 영역에서 배제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이 문제는 바로 레비나스 타자윤리학의 이론적 출발점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존재론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존재론적으로 탐구되는 존재와의 관계는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존재자를 중화하는데 있다. 그것은 타자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것이다3).
인용문에서 말하는 ‘존재자의 중화’는 존재자를 대상화하는 작업에서 즉 의식의 표상작업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다. 의식의 개념화 작업에서 대상으로 전환되는 존재자들은 희석되고 중화되면서 그 실질적 내용이 변색된다. 비트겐규타인(L. Wittgenstein)은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문제들이 다 해답을 얻더라도 인생의 문제는 전혀 건드려지지 않는다.”4) 라는 말로 현대철학의 문제를 지적한다. 이 같은 일련의 논의들은 존재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삶의 구체적이고 중요한 문제들과는 무관하게 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세계구성에 앞서 다른 존재 자와의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개념들은 이미 의식에 의해 주제화되고 규정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타자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문제는 단순히 존재론적이거나, 존재사건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은 윤리학의 근본문제를 존재론적 문제로 다룬다. 그러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접근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윤리학은 존재론을 가로지르는 존재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윤리학은 존재과정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존재보다 더 선한 것(better than being)에 관한 것을 문제 삼는다.5) 이 같이 본질적인 문제의 인식에서 레비나스는 존재자와 관계 맺는 궁극적 방법은 존재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분리를 의미한다.
타자를 자기 안으로 통합시키지 않고 타인의 존재, 다름, 타자성과 만나려는 사람은 존재론을 초월해 갈 수밖에 없다. 존재 저편의 것, 존재를 넘어서 가는 것, 나의 자아 밖에서 절대적 다름을 드러내는 타자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타자로 향한 운동, 타자에로 향함, 초월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의식의 자기내재적 초월이 아닌 타자에로의 초월성이기에 존재론과 인식론의 영역을 벗어난다. 레비나스는 존재를 넘어서 가는 초월적 운동이야말로 형이상학적 운동으로 본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관계는 윤리적 관계와 다르지 않다. 이는 존재론적 윤리학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윤리학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동시에, 존재론으로부터 형이상학으로의 전환이자, 철학으로부터 윤리학으로의 전환이며, 제일철학은 윤리학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3.他者倫理學의 倫理學的 爭點
1)同一者와 他者
서구 전통철학에서 윤리학은 ‘철학의 한 가지’로서 분류되어 왔지만, 존재론적 전통에서 윤리학은 언제나 논의 밖에 있었다. 특히 자아ㆍ주체ㆍ존재가 철학의 중심적 주제로 자리한 이후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타자윤리학을 정초한 레비나스는 이 같은 전통은 윤리학의 부재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타자가 존재사실로서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자아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자아에 의해 장악되어질 때 초래되는 불균형은 이미 많은 윤리학자 및 철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 레비나스는 동일자(tauten, le m?me)dml 운동을 자기 바깥의 것 즉 타자(heteros, l'autre)를 자기안으로 흡수하는 자기동일시(l'identification du moi)로 특징 짓는다. 이것은 바로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환원(la r?duction de l'autre au m?me) 즉 동일화 과정이다. 자아의 의식활동은 자기 밖에 외재적 존재를 남겨두지 않고 자기안으로 포괄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사유를 경청하면서 자기안에 머무는 자아는 ‘나르시시즘’(le narcissisme)으로 비판된다. 이는 외부세계의 모든 다양성과 변화를 사유의 대상으로 변화시키면서 자기화하는 작업으로 이질적인 것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억압적이다. 이같은 사유과정의 필연적 귀결은 자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전체성이고, 현실적으로는 폭력과 전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자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인간의 자기 보존성(conatus essendi)은 타인의 내면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가?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레비나스는 자아중심으로 형성되는 인간의 내면성을 내적으로는 향유적 자아의 감성적 특징으로 나타내며, 외적으로는 세계 안에 자기의 자리를 꾸미는 ‘주거’로 나타낸다. 주체의 내면성은 자아와 타자를 분리시키는 동시에 인간존재의 독립을 가능하게 한다. 자아와 자아들간의 분리, 나와 너와 분리, 자아와 타자의 분리는 윤리적 관계형성의 근본이다. 내면성에 의해 형성되는 자아와 자아들 사이의 관계는 일자에 의한 타자의 침해나 자기화, 섣부른 동화나 통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자아와 자아들 사이의 분리가 이처럼 확고하다면, 이들 사이의 상호소통의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만일 자아와 자아들 사이에 즉 자아와 타자, 동일자와 타자, 나와 너 사이의 소통이 가능하다면, 더욱이 윤리적 소통이 가능하다면 어떤 계기를 통하여 가능해 지는가?
이를 알기 위하여 먼저 타자의 개념을 살펴본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의 일차적 의미는 자아에 대하여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외재성(l'ext?riorit?)을 의미한다. 즉 자아 밖에 있는 것을 지칭한다. 윤리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레비나스의 타자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타인으로서의 타자라는 개념으로 압축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시종일관 타인으로서의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로 통합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다름(absolument autre), 절대적인 타자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타인은 어떤 이유에서 나에게로 환원시킬 수 없는가? 그 이유는 타자는 유한한 자아의 사유 대상이나 자아의 인식과 능력의 테두리 안으로 가두고 통합하여 나에게로 동화시킬 수 없는 외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한한 자아의 사유작용을 벗어나 있는 것들, 죽음의 예측불가능성, 죽음이후의 자아의 주도성 상실, 시간의 지속적 흐름 속에서 늙어 가는 것, 忍苦, 무한한 미래의 예측불가능성, 이 모든 무한의 흔적들이 타인의 얼굴에 있다. 이들은 유한한 자아를 넘어서 가는 타자의 무한성의 흔적들이다. 무한의 흔적을 보여주는 타자는 주체의 사유구조를 넘어서는 충만성을 지닌다. 요컨대 타자는 의식의 개념화를 통해 모두 담아낼 수 없다. 자아와 타자의 레비나스적 개념구분은 이제까지 서구철학이 얼마나 자아중심적으로 그리고 일면적으로 수행되어왔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타자를 끊임없이 자아 안으로 동화시키고 통합시키는 구조에서,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는 형성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타자의 절대적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상호간의 진정한 관계형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고유한 내면성을 통해 서로 절대적으로 분리된 자아들 사이에서 동화나 통합, 침투나 폭력의 방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상호소통이 가능한가? 어떻게 분리되어진 자아들 사이에서 고립이 아닌 사회적 관계가 형성가능한가? 어떻게 자아와 타자 사이에 분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연결시키는 윤리적 관계 형성이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한 레비나스의 답은 타자에로의 초월성과 타자를 향한 열망이다. 열망(de´sir)의 개념은 욕구(besoin)의 개념과 비교하면 그 뜻이 더 분명해진다. 욕구는 자신에게 결핍된 것, 불완전한 것을 얻으려는 인간의 지향을 나타낸다. 레비나스는 이같이 욕구의 만족에 뿌리를 둔 것이 자본주의적 경제학이라고 본다. 이에 반하여 열망은 자아의 바깥을 향해 있는 것으로 외재성, 타자의 다름, 낯섦을 향한 것이다. 열망은 열망하는 것에 도달할수록 커진다. 타자에 대한 열망은 타자를 타자로서 열망할 뿐이지 타자를 나에게로 통합시키거나 동화시키는 구조가 아니다. 요컨대 자아는 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타자에게로 향한다. 레비나스는 인간을 안으로 향하여 자기중심적 내면성을 유지하는 존재인 동시에 밖으로 향하여 타자를 향한 존재로 설명한다. 즉 자기중심적 내면성을 지녔지만 타자를 향한 정향성이 타자로의 초월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 같은 초월성, 자아로부터 타자에로의 초월성, 나로부터 타인에로의 초월성이야말로 윤리적 관계형성의 올바른 계기라 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열망과 타자에로의 초월성이야말로 자아가 타자를 대상화하여 자아 안으로 포섭하고 자기화하고 동일시하는 표상의 방법과 구분된다.
2)타자적 이성과 감성적 수용성
근대 윤리학의 토대가 이성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성의 빛에 의하여 인간의 무지몽매함을 깨우치겠다는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야심찬 기획은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합리적 이성’의 개념은 근대의 산물로 볼 수 있다. 확실성을 추구하던 근대인은 합리성 개념을 합당함(reasonableness)에서 이성적 합리성(rationality)으로 바꾸어 버렸다. 즉 맥락에 따라서 합당한 것에서 기하학적 확실성과 필연성, 형식적 이성 등으로 합리성의 범위를 제한시켰다.6) 그러나 오늘날 이성의 왜곡과 변질은 많은 윤리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며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성중심 윤리학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성을 극단적으로 사용한 인지주의적ㆍ주지주의적 도덕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촉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도덕ㆍ윤리교육에서 이성적 합리성에 근거하여 윤리교육을 전개한 이로는 삐아제, 콜버그, 헤어 등이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는 구체성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객관성과 보편성의 확보가 가능하다”는 입장에 서 있다. 이 같은 입장은 윤리학 이론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윤리학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은 이미 다양한 측면에서 비판을 받아 왔다. 먼저 덕 윤리학자인 카는 도덕교육에 있어서 교육의 목표는 타당한 추론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이의를 제기한다. 이는 윤리의 핵심이 이론이 아니라 실천에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길리건은 합리적 추론 방식에 입각한 도덕발달 단계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는 도덕적 성향에 있어 남ㆍ녀가 성차를 보이는 점에 착안하여, 법칙지향적이고 정의지향적인 남성에 비하여 여성들은 관계성ㆍ타인에 대한 배려, 타인에 대한 도덕적 책임 등의 도덕성에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차이는 결국 ‘정서’를 도덕성의 중요한 요소로서 고려하도록 촉구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정의적 도덕교육의 강화를 가져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인식 안에 는 사회성의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인식 안에서 자아를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회성은 인식과 동일한 구조를 가질 수 없다. 인식은 항상 동화로서 해석되어져 왔다 가장 놀라운 발견일지라도 존재에 의해 흡수되어져 왔으며, 이해되어져 왔다. ‥‥‥인식은 우리가 타자와 교제하도록 하지를 못한다. 그것은 사회성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항상 獨居的이다7).
위의 인용문이 말해주듯이, 인식아래서는 모든 것이 자기소유로 전환된다. 이성의 추론작용에는 타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성작용의 특징은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사물에 대한 분석과 추론의 기능을 발휘해 가는 것이다. 그 같은 과정은 사물을 자신의 의식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면서, 자신의 분석 대상으로 삼고, 대상화, 객관화, 주제화한다.
윤리학이 인간의 이성적 측면과는 다른 부분과 관련된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상 서구에서도 아주 오랜 전통을 형성하고 있으며, 특히 동양에서 윤리는 인간적 心의 작용으로 설명되어 왔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데카르트의 이성적 방법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수학적 방법은 우리가 진리를 터득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 뿐만 아니라,수학적 및 과학적 진리는 인간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 같은 진리를 추구하는데 필요한 방법은 수학적ㆍ과학적 방법이 아닌 ‘섬세한 마음’이다. ‘섬세한 마음의 원리’(ordre du coeur)라기 보다는 느끼는 것으로, 이를 느끼려면 아주 섬세하고 정확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이같이 섬세한 마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직관이다. 섬세한 마음이란 영혼의 가장 내부에 자리잡은 일종의 지적직감이다.8) 라고 지적한다. 파스칼 이후 보다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정교화한 사람은 철학적 윤리학자이자 현상학적 가치 윤리학자인 셀러(Max Scheler)이다. 셀러는 윤리적 가치판단은 이성의 작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질서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가치감(Wertgefu¨hl)의 작용이라고 말한다. 셀러의 윤리학은 가치직관의 원리로서의 가치감, 타자에 대한 공감의 원리를 중시한다. “오성은 가치에 대해서 맹목적이다. 가치인식의 기관은 오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근원적인 지향적 느낌이 존재한다. 이것은 감정들과 느낌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에서, 가장 잘 나타날 것이다.”9) 이 세상의 가치내용은 우리의 지향적ㆍ정서적 삶의 회고단계를 형성하는 사랑과 미움의 작용과 마찬가지로 먼저 취하는 것과 뒤로 미루는 것의 작용이 정립하는 지향적 느낌의 작용에서 우리에게 밝혀진다. 하르트만은 셀러의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가치의식이란 일차적으로 가치감이며, 가치가 충만한 우선적이며 직접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모든 가치파악은 가치감에 기인한다. 가치를 파악하는 작용은 결코 순수한 인식작용이 아니라 감정작용이며, 지성적이 아니라 정서적이다. 가치는 느껴질 수밖에 없으며, 느낌의 기초를 구체적으로 직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10) 가치를 느끼는 것은 가치를 직관하는 것을 의미한다.11) 요컨대 이들은 서구의 철학적 윤리학의 전통에서 윤리가 이성외적 차원과 관련된 것임을 일찍이 주목하였고 그것을 價値直觀의 능력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치직관의 작용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여전히 모호함을 남긴다.
타자윤리에서 인간의 감성적 측면은 인간을 선험적 자아, 합리적 자아로만 이해할 때 초래하는 문제상황의 인식에서 분명해진다. 고립된 이성적 사유작용이 가져오는 에고의 작용이 함축하는 윤리적 문제는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전체성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분석적ㆍ개념적 추론으로 향한 이성적 사유는 배고픔, 고통, 기쁨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존재방식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감성적 자아위에 정초되는 윤리적 주체는 다른 사람이 나의 소유, 동일성의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여주는 얼굴의 顯現에 응답해야할 책임성과 관련된다. 현현은 현상학적 現象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그 스스로 드러나는 타자의 나타남을 의미한다.
타인의 얼굴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얼굴로서 현현하는 타인은 더 이상 자아의 인식의 대상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한다. 얼굴은 어떤 맥락에 의존함 없이 얼굴 그 자체로 윤리적 호소와 요청을 말하고 있다. 현현하는 타자는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낸다. 타자의 얼굴의 현현은 그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행위할 것을 요구하는 요청이자 명령과 같은 것이다. 윤리적 타자에 대하여 응답하도록 작용하는 요소는 더 이상 자안 안의 이성적 추론에 의한 자율적 판단이 아니다. 여기에서 윤리적 문제의 초점은 주체의 자기입법적 자율성이 아니라 윤리적 주체가 타자의 윤리적 현현ㆍ호소를 어떻게 감수하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 관련된 도덕성의 근원적 요소는 외부로부터 어떤 강제나 부담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주체의 자기 결정성 즉 자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윤리적 요청과 호소를 보내는 타자에 관한 문제이다. 오랫동안 자율적 주체의 전통에 머물고 있는 서구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사유한다면 주체의 자유는 신성한 불가침의 권리이다. 그러나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상황으로부터 윤리현상을 재조명한다면, 도덕성에서 보다 근원적인 것은 나의 자유가 아니라 타자의 곤경에 마음이 찔리고 불편한 것, 타자의 곤경에 대해 느끼게 되는 도덕적 책임감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윤리의 핵심은 의지적 자아의 자율성이 아니라 타자의 호소를 감수하고 영향받는 문제이다. 즉 자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중심성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타자의 호소에 대한 응답은 어떻게 가능한가12)?
레비나스는 인간이 지닌 수용성으로서의 감성적 존재방식이 인간으로 하여금 타자의 윤리적 호소를 수용할 수 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감성은 삶에 가까운 것으로 본능을 넘어서 있지만 이성 아래 있는 자아의 직접성이다. 감성은 이성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타자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타자와 맞닿아 있기에 감성적 자아는 타자에게로 드러나고 타자에 의해 흔들리고 영향받고 상처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이 타자수용의 가능성으로 주목된다. 몸ㆍ감성ㆍ감관은 인간이 지닌 ‘어떤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 ‘타자에게 노출되어진 자아’, 타자에게 드러내어진 자아를 보여준다. 우리의 감성은 타인의 고통과 호소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져 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불리움을 받는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물에 빠진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나의 윤리적 행위를 요청하고 있다. 나를 부르고 지명하고 지목하고 있다. 이미 윤리적 상황에서 나는 능동적 자아로서의 ego, 주격으로서의 I에 앞서 윤리적 호소에 맞닥뜨려 타자에 의해 불러지고 지칭되는 목적격 자아(me)로 떠오른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는 그 누구로도 대신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논거에서 자아의 고유성은 타자로부터 불리어지는 존재, 타자의 지명에 의해 형성되는 대체불가능한 존재, 책임을 짊어지는 존재, 타자의 윤리적 호소에 응답하는 존재에서 찾아진다.13) 그러므로 자아의 주체성은 이제 나를 위한 주체성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주체성으로 전환한다. 타인의 윤리적 호소와 요청을 내 안으로 감수하면 할수록 내 안에 타자의 자리는 커지며, 그에 비례하여 나의 윤리적 자아의 크기도 커지고 대체불가능한 나의 고유성과 유일회성의 의미도 커진다.
그렇다면 타자윤리에서 이성은 완전히 쓸모 없는 것으로 폐기되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타자윤리에서 이성은 타자와 자아의 관계에서 재정의 된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성은 인지론적 관점이나 인간의 의식작용에 준하여 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열어주는 대화에서, 타자의 타자성과 외재성의 의미를 충분히 받아들이는 진리와의 관계에서, 정의와 선의 관계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새롭게 조명되는 이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참된 인식의 본질이란 비판이라고 본다.14) 참된 인식의 본질이 비판이라는 것은 객관적 인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비판적 인식은 타자에로 다가가는 것, 타자를 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비판적 인식의 본질을 코기토를 넘어서는 것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비판적 인식이란 타자를 타자로서 나타내는 데 있다. 레비나스는 “이성의 본질은 주체에게 토대와 힘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문제 삼고, 그를 정의로 인도하는데 있다”15)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선험적 자아를 인식의 궁극적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타자의 존재사실을 돌아보는 것이다. 타자적 이성은 윤리적 행위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 안에 자리한다.16) 대면적 관계에서 자아와 타자는 비폭력으로 다원성을 유지하면서 평화를 형성한다.17) 그러므로 진정한 경험은 타자를 발견한다. 타자적 이 성에로의 이행은 비인칭적 객관성과 보편성의 구조로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존인 타자에게 말을 걸고 그의 부름에 응답하는 윤리적 책임성으로 나타난다.
4.타자윤리와 탈현대윤리학의 방향
1)타자윤리와 전통윤리의 접목
레비나스 타자윤리를 서양윤리학사에서 본다면 윤리학의 문제설정을 ① 주체와 추상적 도덕법칙의 문제로 접근하는 방식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접근하는 방식으로의 전환 ② 인간의 개체성을 강조하는 원자론적ㆍ고립적 자아관으로부터 자아와 타자를 분리된 동시에 연결되어진 관계적 자아로 보는 인간관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의 문제는 앞에서 길게 논의하였다. 이제 두 번째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향유적 자아의 측면에서 인간들은 서로 동화ㆍ통합될 수 없는 분리된 존재이지만, 분리가 곧 각각의 자아들을 고립시키는 원자화하는 패쇄적 자아관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존재는 내면적 자아이자 밖으로 향한 자아인 것으로 본질적으로 관계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관계적 자아로서 대면적 인간관계는 남녀관계, 부자관계, 형제관계, 이웃과의 관계, 사제관계, 이방인과의 관계 등으로 정교화될 수 있다. 특히 자아와 타자의 소통에서 형성되는 윤리적 관계는 효ㆍ부성ㆍ자애ㆍ우애적 공동체ㆍ연대성ㆍ평화ㆍ관계적 자아ㆍ모성애ㆍ가족애 등이다. 그런데 이들 덕목은 동양의 至善이나 達道와 다르지 않다. 이 같은 점에서도 타자윤리와 유가윤리는 윤리학의 접근방법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의 윤리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가 상대방의 절대적 타자성을 유지ㆍ보존하면서 형성하게 되는 대면적 관계를 남ㆍ녀간의 에로스의 측면이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형제간의 관계, 이방인과의 관계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논하고 있다. 타자윤리에서 에로스의 의미는 향유적 자아의 욕망의 에로스, 출산의 에로스, 출산을 통해 형성되는 타자와의 관계로 구체화된다. 향유적 측면에서 연인들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하듯이 타자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지닌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향유적 에로스를 인정할지라도 에로스의 이원성은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연인관계는 하나로 중화되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방의 다름, 완벽하게 상반되는 타자성을 통해 유지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타자는 동일자에게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랑은 타자와 욕망관계를 유지하지만 초월적 타자의 외재성, 애인의 외재성을 전제하는 이원적 관계이다.
타자윤리적 에로스는 또한 욕망의 에로스이자 초월의 에로스이다. 에로스가 가져오는 출산은 유한한 자아를 무한한 미래의 시간으로 연결시킨다. 어린 아이는 부모에게 닫혀져 있는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어린 타자는 나를 미래로 영속시킨다. 유한한 자아가 출산을 통해 얻은 어린 타자는 그러나 동일자의 연속성이 아니다. 미래의 타자와 자아의 관계는 ‘불연속적 연속성’의 관계인 것으로 이는 終則有始, 再開라 할 수 있다. 아이는 ‘타자 안의 나’이자 절대적 타자이다. 이와 같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不一而不二의 관계로서 나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닌 존재이다. 아이를 통해서 아버지는 유한한 자아가 무한한 미래로 재개되는 生生不息의 道를 볼 수 있다. 출산을 통해 형성되는 미래와의 관계,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나의 아이와의 관계에서 고유한 父性(parternit?)이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도 형성된다. 출산을 통해 형성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자아의 고유성은 아버지의 에로스에 의존한다. 아버지의 아들임은 내가 이미 그 안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나의 자아의 고유성은 얻어진다. 요컨대 아버지건 아들이건 자아의 고유성은 고립된 개별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있기에 아들이 있고, 아들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있는 상호의존적으로 상감되어 있는 관계이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선택받은 존재로서의 아들의 고유성은 동시에 이 세계에서 다른 형제들중의 하나임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 우애이다. 우애적 공동체는 생물학적 가족관계로 제한되지 않는다. 형제애적 우애관계에서 연대성에 기반한 사회질서의 형성이 가능해진다.
이같이 유일성, 고유성, 우애적 평등, 연대성을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에서 인류는 타자에 대해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사회적 집합체의 익명적 구성원도 아니다. 타자윤리적 연대감속에서 각각의 구성원들은 개체적 고유성을 지니되 원자론적 개인주의로 가지 않으며, 상호의존적 사회연대를 형성하되 익명적 군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각자는 각자의 고유성을 지닌 채, 서로 상감되어 있으며 상호연대를 맺고 있다. 논자는 레비나스 타자윤리에서 밝혀지는 구체적인 대면적 인간관계의 윤리가 우리의 전통윤리와 연결된다면 타자윤리의 측면에서는 이론적 정교화와 측면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전통윤리의 측면에서는 溫故知新을 가져오는 상승효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2)他者倫理와 平和의 윤리학
삶의 세계에서 인간관계는 크게 아는 사람과의 관계와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로 구분된다. 한국인의 경우 가족애적 가치관이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비판받는 이유는 가족애적 윤리가 주로 아는 사람과의 관계범위로 확장될 뿐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로는 화장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성향은 가족중심주의ㆍ혈연중심주의ㆍ연고주의ㆍ지역주의 등으로 과잉도덕현상을 초래하는 부정적 요소고 나타나며, 모르는 사람에 대한 윤리적 배려가 지극히 결여된 상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같은 정서는 삶의 범위가 제한되어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이 아는 사람인 농업중심의 사회에서는 크게 문제화되지 않지만,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고, 대부분의 사람과 익명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정보화, 국제화시대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우리 나라에도 다양하게 외국인이 들어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남아 등에서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그들의 대다수의 불평은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공적으로건 사적으로건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자본적 인권도 보호받지 못한다. 이 같은 심각한 문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도덕 윤리과는 모르는 사람에 대한 기본소양교육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타자윤리는 타자의 도덕적 호소를 수용하는 윤리적 자아에 관한 이론이다. 이때 ‘타자’란 특별히 우리가 아는 사람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나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청하고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가 나의 이기적 자아를 침투하는 무한성을 계시하는 존재이기에 타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다. 그가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흑인이건 백인이건, 미국사람이건 소말리아 사람이건, 여성이건 남성이건, 부자건 가난하건, 귀하건 천하건,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타자성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명령하는 타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타자윤리는 타자의 다름, 차이의 인정과 존중, 이들을 수용하는 감성, 타자중심성을 강조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동일성의 철학은 자의식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전체성에 그 특징이 있다. 자기중심적 전체성이란 타자의 입장에서 보면 침해이자 폭력이다. 이 같은 전체성의 철학은 이기주의와 소유의 경제로부터 파시즘, 나치즘, 제국주의, 자민족중심주의, 자국중심주의, 인종중심주의, 혈통중심주의, 종교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등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이같은 사유형태의 특징은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외부의 것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침략을 자행하고, 자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으며, 자기 민족의 종교를 위해서 다른 민족의 종교를 억압하고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는 인류의 미래나 국제관계에서 어떤 희망적 요소를 발견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지만 현재 인류에게는 평화냐 전쟁이냐의 선택권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핵무기를 안고 사는 인류에게 전쟁은 곧 절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평화의 철학’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서도 타자윤리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레비나스는 2차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부모ㆍ형제가 희생되는 고통을 체험하였다. 이 같은 삶의 체험은 그에게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절실한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삼게 하였다. 그는 서구철학의 일원론적 사유전통은 필연적으로 타자를 자기화 하는 동일성의 철학으로 자아의 외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의 철학, 전쟁의 철학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평화의 철학’으로 지칭한다. 평화의 철학은 타자의 존재사실을 인정하면서 타자의 다름, 타자성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타자에 대한 태도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타자를 자기 화하고 자기에게로 동화ㆍ통합하는 일원적 사유방식의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평화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정치 그 자체로는 윤리도, 타인에 대한 고려도 없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인간과 세계, 나와 타인, 진리와 정의 등의 관계를 바로 설정해야 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윤리학적 과제이다.18) 철학적 사유의 근본 틀을 재고하여 수정하고 사유방식을 전환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평화는 확립하기 어렵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와 평화롭게 지내는 유일한 방법은 타자의 절대적 다름 즉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의 타자성, 다른 인종과 민족과 국가의 절대적 차이와 다름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관용을 베풀게 되고, 그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게 되면,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서 타자가 자아에게 무한의 이념을 계시하듯이, 우리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다름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무한의 의미를 계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이 기본적인 사유와 반성과 전환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의미의 적극적 평화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자아와 타자사이의 적대적 관계가 윤리적이고 형이상학적 관계로 전환되는 단서를 우리는 이와 같이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에도 적용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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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글
본 논문은 제8회 한ㆍ중 윤리학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포되었던 논문을 수정ㆍ보완한 것임. 논평해 주신 구승회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논평의 내용은 레비나스에게서 인식론적 주체가 해체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논자의 답변은 이성중심의 인간관이 극복되면서 이성에 앞서 보다 근원적 차원인 감성의 윤리적 의미가 밝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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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David M. Rasmussen, ed. With Introduction. Universalism vs. Communitarianism : Contemporary Debates in Ethics. Special Issue in Philosophy & Social Criticism, vol. 14(1988), p. 238.
2) 손봉호, 『고통받는 인간』(서울: 서울대 출판부 1996), 15-16쪽.
3) Emmanuel Levinas E., Totality and Infinity, trans. Lingis, A., Netherlands :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1. pp. 45-6 이하 TI로 약칭.
4) L.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 - Philosophicus.
5) Emmanuel Levinas, Ethics and Infinity, trans. R.A.Cohen, ittsberg : Duquesne University, 1985. Richard A. Cohen의 Translater's Introduction, pp. 5-8. 참조 이하 EI로 약칭.
6) Stephen Toulmin, Cosmopolis: The hidden agenda of modern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0, 이종흡 옮김, 『코스모폴리스 : 근대의 숨은 이야깃거리들』(마산 : 경남대학교출판부 1997), 27쪽.
7) EI. 60.
8) B. Pascal, 『팡세』, 홍순민 역, 삼성세계사상전집, 12. 삼성출판사 1985. 「정신과 문체에 대한 사고」 참조.
9) Max. Schler, Ber Formalismus in der Ethik und die materiale Wertethik, Halle, 1916, s. 262.
10) Nicolai. Hartmann, Ethik, Berlin unto Leibzig,1926, s. 42. 104. 528.
11) 레비나스는 셀러와 하르트만의 ‘가치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지만, 셀러의 공감의 원리도 타자의 근본적인 다름의 의미를 밝혀주지는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12) 졸고, “타자윤리에 근거한 정의적 도덕교육”, 도덕윤리과교육,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 1999. 12. 62쪽.
13) Emmanuel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trans. by Alphonso Lingis, Dordrecht : Kluwer Academic press, 1974. pp.105-6. 이하 OB로 약칭.
14) TI. 85.
15) TI. 88.
16) TI. 218.
17) TI. 203.
18) 강영안, “레비나스의 평화의 철학”, 『평화의 철학』, 서강대철학연구소 편(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5).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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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김연숙
전주교대
관심분야 : 윤리학, 타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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