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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노자 25장

온울에 2008. 5. 7. 10:08

목 차

1.존재와 깨침의 문 사이에서
2.본원존재로서의 도
3.존재와 언어의 긴장관계
4.존재의 자연성에 기대어
5.영속적 존재의 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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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새한철학회 
학술지명 철학논총JOURNAL OF THE NEW KOREAN PHILOSOPHICAL ASSOCIATION 
ISSN 1226-9379 
권 26 
호 1 
출판일 2001. 10. 30.  




『노자』 제25장의 존재론적 검토


이종성
(Lee, Jong-Sung)
충남대학교 ( Chungnam National Univ. )
1-066-0104-09

국문요약
『노자』제 25장은 노자철학의 핵심주제라고 할 수 있는 ‘도’에 관한 존재론적 관심이 존재와 언어 및 자연의 문제와 결부되어 매우 간결하면서도 심도 있게 기술된 장이다. 이 장에서 노자는 ‘도’가 어떠한 타자와도 관련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면서, 일상적 언어로 마비되기 쉬운 본원존재의 근원적 토대를 ‘자연’의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전통적으로 『노자』의 주석가들은 노자의 ‘도’에 관하여 생성론적 관점과 존재론적 관점의 두 가지 방식으로 해명해 왔다. 본고는 이들 두 가지 관점 중에서 노자의 ‘도’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해석해 본 하나의 결과물이다. 노자의 ‘도’는 존재차원에서보다는 의미차원으로부터 검토되어야만 노자적 세계의 질서가 논리적 정합성을 확보하게 된다. 즉 노자의 ‘도’는 우주 생성론적 의미보다는 인간의 의식에 표상됨으로써 균열되어버린 정유적(定有的) 존재를 부정해나가는 방식을 통하여 본원존재의 근원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존재론적 맥락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 위에서 설명되는 노자의 ‘도’는 부정과 긍정의 논리적 이중성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은 언어와 지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세계의 자연성을 자명하게 드러낸다는 노자 특유의 역설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설에 기초한 노자의 ‘도’는 본원존재와 의식화된 존재의 균열을 해체하는 자기 부정성과 함께 존재와 의식 사이의 원초적 상호 공속성으로부터 드러나는 자기 긍정성의 영역을 자연적 존재의 영역으로 환원하게 된다.

결국 노자에게서 ‘도’는 ‘자연’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게 된다. 노자의 ‘자연’은 결코 타자적 성격을 갖는다거나 주체적 존재로 상정되는 성질의 것과는 무관하다. 노자는 이러한 자연을 자연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분별지라고 파악하고, 분별지의 중심에 놓여진 개별적 자아의 주체화된 관념을 부정한다. 그리고 노자는 이러한 개별적 자아의 주체화된 관념이 무화됨과 동시에 그 동안 양립했던 주객대립의 관계는 사라지고 인간은 땅과 하늘, 그리고 ‘도’와 더불어 존재론적 형평을 이루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노자철학에 있어서 인간존재의 의의는 사회적 존재라는 특징으로부터 그 위대함이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존재로의 환원으로부터 그 위대함을 보장받게 된다.

영문요약
Ontological Study on the Chapter 25 of The Tao Te Ching (Lao-tze)
In the Chapter 25 of The Tao Te Ching (Lao-tze), the Tao which is the key subject of Lao-tze’s philosophy is connected with the matter of being, language, and nature and is described very tersely and deeply. In this chapter, Lau-tze indicates that the ‘Tao’ is not related to any objective things, and he tries to explain the original basis of being which is easy to be contaminated by language as ‘nature’.

Traditionally, the commentators of The Tao Te Ching have explained the Tao of Lau-tze as a generative viewpoint and a ontological one. Of these two viewpoints, this study tries to explain the Tao of Lao-tze from a ontological view-point. The order of Lao-tze’s world can have a logical structure by studying the Tao of Lao-tze in terms of meaning rather than being. In other words, the Tao of Lao-tze stands for the ontological context to reveal the original nature of being through the way of negating being which is broken by the representation of human consciousness rather than the meaning of generation. In this context, the Tao of Lao-tze is based on the logical duality of negation and affirmation. And this logical duality shows the paradox specific to Lao-tze which reveals the limit of language and knowledge and the nature of the world clearly. The Tao of Lao-tze based on this paradox returns the self-negativity which dissolves the gap between the original being and being of consciousness and the self affirmativity revealed the original mutuality of consciousness.

In conclusion, Lao-tze’s Tao is nothing but ‘nature’. Lao-tze’s ‘nature’ has nothing to do with objectivity or subjectivity. Lao-tze considers the barrier against nature to be discriminating knowledge, and negates the subjective idea of individual self in the center of that discriminating knowledge. And Lao-tze thinks that as soon as this subjective idea of individual self become nothing, the opposite relationship between subject and object disappears, and humans can be harmonious with theearth, the heaven, and the ‘Tao’ ontologically. Thus, in Lao-tze’s philosophy human beings can be great from the return to natural beings and not from the characteristic that humans are social beings.


한글키워드
노자, 도(道), 자연, 존재, 언어
영문키워드
Lau-tze, Tao, Nature, Being, 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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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존재와 깨침의 문 사이에서
『노자』제25장은 노자의 많은 철학적 관심 사항들, 이를테면 존재론이나 인간론 내지는 사회철학과 같은 문제들 중에서 특히 그의 철학적 중심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론적 관심 영역이 매우 사변적이면서도 심도 있게 기술된 장이다. 무엇보다도 이 장의 중심 문제는 도에 관한 존재론적 설명에 있으며, 이러한 맥락 위에서 도의 근원적 성격이 타자와 관련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참고로 『노자』 제25장의 원문을 먼저 인용하여 보자.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廖兮 ,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人亦大. 城中有四大, 而人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1).

언제나 그렇듯이 이 장에 나타난 노자의 언어 역시 상징적 앎을 통해 세계를 보는 우리들에게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또한 친절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적 특징에 실려 나타나는 노자의 불친절은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역설적으로 친절한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야말로 노자는 우리에게 ‘불친절의 친절’을 베푸는 셈이다. 왜냐 하면 노자의 불친절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전해져, 이것이 우리의 자아 내적인 심층으로부터 일순간에 깨지는 순간 우리의 이전에 지니고 있던 지적 포화상태의 정신적 우환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연스러운 치유 효과를 스스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 노자는 어려운 말을 통해 쉬운 말을 전한다2).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노자의 그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관문(關門)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 관문(關門)은 하나의 관문(觀門)이다. 우리가 『노자』로부터 곧바로 마주하는 하나의 거대한 관문은 바로 ‘도’의 ‘도 아님’이라는 역설적 난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 난관으로부터 우리의 혼란은 비롯된다. 이 모순된 한 마디 말을 던져놓고 노자는 도를 말하기 때문이다. 『노자』를 펼치자마자 나타나는 이 도 개념이야말로 도가철학의 지도리이며, 특히 노자철학의 출발점이자 핵심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할, 그러한 ‘비개념적 개념’이다. 노자의 도는 언어로 그 개념이 규정될 수 없는 비규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노자』에 표현된 도를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상황이 이와 같다 보니, 노자의 도에 관한 풀이도 각양각색이다. 혹자는 도가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할 길이라고 하는가 하면, 혹자는 삼라만상의 현상세계를 생성하는 근본인이 바로 도라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현상계의 배후에 있는 초월적 실체가 도라고 하기도 하며, 또 혹자는 우주만물로 하여금 그렇게 있게 하는 법칙이 곧 도라고 하는 등 논자에 따라 각기 다른 견해가 제시된다3). 이러한 여러 견해들을 크게 둘로 대별하면 우주 생성론적 관점과 명상론적(名相論的) 관점으로 나뉜다. 그런데 노자철학의 전반에 분포된 도의 실질적 내용은 전자의 관점보다는 후자의 관점을 통하여 존재론적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왜냐 하면 필자는 일차적으로 노자의 관문이 존재차원에 있다기보다는 의미차원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자가 제1장에서 말하는 ‘중묘지문(衆妙之門)’ 역시 우주 생성의 문이 열리는 자리라기보다는 인간 의식의 참다운 깨침이 열리는 자리로서의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진리가 구체적 현실을 떠나 있지 않다는 존재와 의식의 공속적 동거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본고에서 『노자』제25장을 중심으로 노자의 이른바 도의 의의를 구명해 보고, 『노자』 안에서는 도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나 개념적 규정이 어떤 시각에서 다루어지고 잇는지를 알아보고, 도와 자연은 서로 어떠한 관계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노자의 ‘자연’ 개념을 해명함으로써 살펴보고자 한다.필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노자 철학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도를 존재론적 측면에서 조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2.본원존재로서의 도
『노자』는 개권 벽두로부터 “도를 도라고 말하면 참다운 도가 아니다4)” 라는 역설의 논리와 함께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도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노자철학은 도에서 시작해서 도에서 끝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도에 관한 집중적 관심을 보여준다. 그래서 노자철학의 알파와 오메가는 도라는 말 한 마디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도에 관한 노자의 진술은 우리에게 결코 평이한 심리적 안정감을 주면서 다가오지는 않는다. 노자의 진술방법이 긍정적으로 연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자가 말하는 도는 그 첫 마디부터가 우리를 혼란과 당혹감에 빠뜨리는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상식을 난파하는 노자 특유의 부정진술을 타고 신선한 충격과 함께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점에서 일상의 상식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노자의 도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노자가 말하는 이른바 도란 우리에게 탐구되고 알려지는 순서에 있어서는 ‘맨 나중’의 것이지만, 존재의 면에서는 ‘맨 처음’의 것으로서 현상 만유의 근원적 시원이 되는 존재론적 함의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는 존재라고만 한정지어 말할 수 없는 존재의 원리적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말은 곧 존재로서의 도와 존재 원리로서의 도리적 측면이 서로 균일되어 각각 별도의 체계로 존립하는 이원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노자철학에 있어서 도는 도라고 말할 수 없는 자기 부정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를 통해 도를 설명해야만 하는 후대의 노자 연구가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자가 이처럼 자신의 철학에서 부정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도가 인간의 의식적 모형에 의하여 제약될 수 없는 무규정적인 근원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이 도에 투영되는 순간 도는 인간에 의하여 임의로 제약받고 만다.그런데 인간의 의식이 투영된 세계의 성격은 항상 상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5). 노자는 이러한 세계의 상대성이 존재의 전일성을 파괴한다고 보아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상대적 세계란 인간의 의식이 투영된 세계로서 인간의 의식의 모형에 의하여 특정하게 틀지어진 세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 의하여 분열된 상대적 세계란 것도 서로가 독립되어 고립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그 근원적 측면에서 본다면 주객이 미분화된 통일체로서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존재하는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주객미분화의 통일체로서 현상적으로 분리된 사물들이 각자 타자와의 연관적 측면에서 그 관련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면, 이들은 존재의 근원을 상실 당하고 만다. 현상적 사물은 서로 상대적이면서도 그 존재의 기반을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철학에 있어서 도는 천지ㆍ만물이 펼쳐지기 이전의 ‘처음 세상’으로서 현상세계가 드러나기 이전의 세계이며, 현상세계를 떠올리는 바탕으로서 시원적 세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노자는 도의 시원적 성격을 존재론적 맥락에서 “유물혼성, 선천지생(有物混成, 先天地生)6)” 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상당히 복잡한 해석상의 난점을 안고 있다.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노자철학에 대한 접근의 통로는 크게 생성론적 입장과 존재론적 입장의 두 방향으로 갈라선다. 한국에서 출간된 몇 가지 『노자』 주석서를 통하여 이 문장의 해석을 참고해 보자.

① 혼돈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7).

② 혼돈되어 이루어진 것이 있으니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생겼다8).

③ 분화되지 않은 완전한 무엇,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습니)다9).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몇 가지 해석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대별된다. 첫째는 “혼성이 물이 있어서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①②의 경우)는 것과, 둘째는 “혼성의 물이 천지보다 먼저 있었다”(③의 경우)는 해석이 그것이다. 이때 전자와 같은 해석이 생성론적으로 ‘혼성의 물’과 천지의 선후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존재론적 맥락에서 ‘혼성의 물’과 천지의 선후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자철학에 있어서 전자와 같은 생성론적 해석의 방식은 온당하지 못하다. 왜냐 하면 ‘혼성의 물’은 도를 지칭한 것인데10), 여기에서 노자는 ‘물’ 과 ‘혼성된 물’을 논리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성의 물’이란 혼연히 이루어진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이란 마치 대수학의 미지수 X와같이 값이 정해지지 않은 존재의 근원성을 의미하는 말이다11). 혹자는 노자의 ‘그 무엇’ 으로서의 도를 ‘거시기’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12), ‘거시기’의 의미는 노자의 도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적합한 개념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거시기’라는 표현의 사전적 정의를 볼 때, ‘거시기’는 ‘말하는 중에 하려는 말이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않거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할 때 그 대신에 쓰는 군말. 또는 그 소리13)’ 이기 때문에 그것은 특정한 그 어떤 것을 지칭하는 특수 개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그 어떤 것으로서의 ‘거시기’란 우리의 의식에 표상된 정유적(定有的) 존재와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한 그것은 자연히 불특정한 ‘그 무엇’으로서의 도와는 거리를 갖게 될 수밖에 없다. 노자의 도는 특정한 방식의 설명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다. 따라서 이 때의 ‘물’은 개별적 사물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존재 일반을 통칭한 본원존재로서의 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분명 노자철학에 있어서 도(혼성의 물)와 개별적 사물은 서로 다른 차원으로 존재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들의 관계를 능산자(能産者)와 소산자(所産者)의 차원으로 이해하여 ‘유물혼성, 선천지생’의 해석조차 ‘도가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는 식으로 본다면, 이것은 도가 천지보다 앞서는 존재라는 측면에서는 무리가 없으나14), 도가 자기 이외의 어떠한 다른 타자로부터 생겨났다는 의미가 되므로 논리적으로 정합하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김항배는 이 점을 분명히 하여 ‘의미 내용상으로 볼 때, 천지보다 앞서 생하였다고 보면 그것을 생하게 하는 보다 근원적인 존재를 전제해야만 하므로, 가장 근원적 존재가 있음을 지시하고자 하는 문장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15) 고 한 것이다. 즉 도가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도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그 이전의 이전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소급해가다 보면 도를 생겨나게 한 이전이란 끝이 없이 논의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결국 무한소급의 오류를 발생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면, 도는 만물의 근본으로서16) 만물의 가장 오묘한 것17) 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상적 사물이 근원적 존재로 환원(복귀)18) 할 수 있는 존재론적 근거도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혼성의 물이 있어서 천지보다 먼저 있었다”고 보아야 만이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근원적 존재에는 어떠한 것도 현상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니 그것은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는 그 이후에 나타날 모든 것들을 지지하여 준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모든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다양한 현상적인 것들을 드러나게 한다19). 따라서 논리적 순서로 보아 혼성의 물은 현상세계보다 먼저 ‘있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로부터 현상의 분화가 가능하며, 비로소 존재의 속성이 운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의 속성을 설명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 존재는 속성에 앞서기 때문이다20). 따라서 혼성적 존재는 논리적으로 속성적 존재에 앞선다.속성적 존재는 항상 ‘어떠어떠한 것’으로서 특정한 방식으로 존립한다. 특성한 색깔과 특정한 소리와 특정한 냄새와 특정한 맛과 특정한 느낌의 체계로 속성적 존재는 존재한다. 그래서 속성적 존재의 존재방식은 항상 상대적이다. 그러나 혼성적 존재의 존재성은 그러한 속성적 존재의 상대성을 포월한다. 그렇다고 혼성적 존재의 존재성이 서로 다른 속성적 존재의 무분별한 집합체라는 말로써 설명될 수 없다. 혼성적 존재는 인간의 상대적인 분석과 판단을 넘어선 근원적 미분화의 통일자를 형용한 말이기 때문이다. 혼성적 존재는 현상세계의 근원자로서 존재하는 본원존재라는 말이 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총체적 사물로서의 혼성적 존재는 바로 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사물의 근원일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적 근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혼성적 존재와 관련하여 말하여진 물의 차원은 존재론적 맥락에 있어서 현상적 사물과 다르다. 그것은 쪼갤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는 무연장성으로서의 유와 무가 혼일되어 있는 근원적 존재를 의미한다.그것은 우리의 의식의 모형에 의하여 분열되는 것과 같은 방식의 존재적 균열의 틈을 결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소자유(蘇子由)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도는 맑은 것도 아니고 탁한 것도 아니며, 높은 것도 아니고 낮은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며,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 것으로서 혼연하게 그 몸체를 이루고 있다. 그것이 인간에 있어서는 본성이 된다. 이렇기 때문에 노자는 혼성적 존재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하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은 담연하게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서 천지가 그 가운데서 생한다21).” 따라서 혼성적 존재로서의 도와 연관된 ‘그 무엇’으로서의 물(물)이란 마음의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물ㆍ심의 이원적 분별이 생기기 전의 아직은 그 형상과 작용이 분화되지 않은 가장 근원적 의미로서의 물임을 알 수 있다22). 여기에서 ‘유물혼성’ 의 물은 곧 도와 동의어이며, 그것은 물질과 비물질적인 것을 포괄하는 ‘심ㆍ물일원’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23). 그것은 천차만별한 개별적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그 무엇’으로서 전일하게 존재한다. 그러므로 감산(?山)도 “본래 무명인 존재이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존재만이 존재한다고 말했을 따름이다”24) 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논의와 관련된 ‘하나의 존재만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실제로는 도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감산의 지적처럼 무명의 논리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노자의 존재론에서 근본적으로 물ㆍ심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물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존재가 의미화되어 정립된 세계는 비록 그것이 하나의 존재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타자적 존재를 배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것은 무의미하다. 본원존재는 그 어떠한 존재정립의 모형 안으로도 수용될 수 없는 본래 무일물(無一物)의 존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도는 천지ㆍ만물의 능산적 창조자도 아니요, 또한 그 자신이 절대자에 의해서 창조되지도 않는 것으로서 자신과 전혀 다른 그 무엇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법이 없는 자존적 존재이다. 그래서 자존적 존재로서의 도는 스스로 독립해 있으며, 자기원인에 의하여 그 스스로가 유동 변화할 뿐 어떠한 타자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도 이외에 또 다른 타자가 정립된다면, 이 때의 도는 도일 수 없다. 타자의 정립이란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에서만 성립한다. 따라서 도는 어떠한 형상이나 운동으로서 규정되지 않는다. 도는 그 스스로 존재하는 실재로서 무형상의 형상이며 무동작의 동작이다25). 그러면서도 도는 천지ㆍ만물의 무한한 활동을 가능케 하고, 모든 형상을 이루게 하는 현상적 사물의 실질적인 존재근거이다. 그래서 노자는 “혼성된 그 무엇이 천지보다 먼저 있었다”는 문장에 뒤이어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 고요하고, 형태가 없어 쓸쓸하여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가 없다. 오직 독립하여 자존하면서도 변함이 없으며(獨立而不改), 모든 것에 두루 미치면서도 다함이 없어서(周行而不殆) 천하의 어머니가 될만하다(可以爲天下母)26).”

여기에서 노자는 도가 소리가 없어 고요하며(寂), 또한 형태가 없어 쓸쓸하여(廖) 우리의 감각지각에 포찰될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노자는 도가 오직 독립하여 자존하면서도 변함이 없다(獨立而不改)고 함으로써 도의 절대성과 영존성에 관하여 주목하고 있다.27) 도는 자기 스스로가 근본이 된다. 그러므로 도는 시간적인 비롯됨과 종말을 통해 자신의 형상을 바꾸는 일이 없다. 이 말은 도가 물리적 시간의 계열을 벗어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또한 노자는 도가 모든 것에 두루 미치면서도 다함이 없다(周行而不殆)고 한다. 이 말은 존재의 운행이 끊임없는 역동성을 보여준다는 의미이며, 그 운행의 과정이 일면적이거나 부분적이지 않고 전면적으로 순환적으로 진행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노자는 겨론적으로 도가 천지의 시원으로서,28) ‘천하의 어머니가 될만하다(可以爲天下母)’고 한것이다.29) 그런데 이 때 우리는 노자가 자신이 말하는 도가 곧바로 천하의 어머니라고 못박아 직접적으로 언표하지 않고, 문제를 살짝 비껴가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자는 자기 특유의 언어적 기술방식의 유연성을 보여주면서 의식적으로 이 문제의 핵심을 다른 것에 놓아둔다. 노자는 여기에서 그 가능성만을 인정했을 뿐, 도가 곧바로 천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듯한 여운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능히 자식을 낳는 능산적 존재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 행위는 객관적인 구체적 시간의 선상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어머니의 성격은 어느 정도 도와 연결될 수 있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도는 특정한 시간적 계기를 지니고 천지ㆍ만물을 산출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간적 계기를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도는 존재론적 맥락에서 비롯됨의 시초이며, 그 비롯됨 이전의 비롯됨이 있을 수 없는 스스로의 존재원리를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도는 어머니가 자식을 출생하는 것과 같은 존재방식과 서로 유비될 수 잇는 측면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과의 유비일 뿐 도 자신은 그 유비를 넘어서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도와 관련하여 유비된 어머니로부터 우리는 시간적 계기라든가, 또는 소멸이 전제된 것과 같은 방식의 생성의 상대성을 소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도는 노자철학의 중심개념으로서 모든 존재하는 것의 존재론적 근원이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본원적 존재이며, 우주가 생겨나는 힘이고, 만물이 운동 변화하는 법칙이며, 인간 행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30). 이와 같이 볼 때 본원존재와 그 자신의 도리성은 상호 독립적인 별개의 존재로 분리되어 각각의 사태로 진술될 수 없다. 존재 없는 존재원리도, 존재원리 없는 존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노자철학에 있어서 본원존재의 도리성은 그 어떠한 타자에 의해서도 강요받거나 영향받지 않는다는 자연성의 원리로 대변될 뿐이다. 그래서 본원존재의 존재적 도리는 자존성으로 드러나며, 동시에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시간적 영원성과 무소부재(無所不在)한 공간적 보편성 및 운동의 항상성 등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3.존재와 언어의 긴장관계
노자철학에 있어서 도라는 개념은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가명일 뿐,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은 실재적 개념이 아니다. 노자는 항상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경계심을 갖고 조심스럽게 도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제 아무리 조심스럽게 말해진 것일지라도 그것은 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노자철학에서 도와 도라고 규정된 도 사이에는 항상 피할 수 없는 긴장감이 개입됨으로써 일정한 거리감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도와 도라고 말해진 도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가 하나의 언어로 남는 한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도가 아니게 된다.

노자는 도를 말할 때면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본다’는 식의 전제 아래 도를 말한다. 그래서 『노자』는 제25장에서도 “나는 그 이름(名)을 알지 못하여 별명(字)을 붙여서 도라고 부를까 한다”31)고 하였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또한 무어라고 말을 해야만 했던 노자의 고충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노자는 말을 부정하면서 말을 하고, 또한 말을 하면서 말을 부정한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철학적 아이러니라고 한다. 만일 노자가 철학자가 아니고 종교인이었다면, 그는 온종일 침묵만을 지키고 ‘면벽좌선’과 같은 행위에만 몰두한 채 어떠한 언어도 우리에게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자는 분명 언어를 부정했으면서도 자신이 부정한 언어를 통하여 오히려 『노자』 오천여 언을 남김으로써 우리를 당혹시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역설적 언어에 우리를 깊이 침잠시켜 매료되게 만드는 철학의 길잡이 역할을 담지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이색적이다.철학을 한다는 것은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진리관이 서로 양립되는 상황 속에서도 어느 특정한 주장을 취사선택하여 이를 만고불변의 이치로 신봉하는 것과 같은 류의 믿음의 행위가 동반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철학은 오히려 그것이 왜 진리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가를 명확히 밝히는 추론적 사유의 행위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왜 말할 수 없는 것인가를 논리적으로 말해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와는 거리를 갖는다는 점에서 일단 철학적인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필연적으로 철학은 회의와 부정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특히 회의와 부정의 방법을 통하여 철학을 한 노자는 이 점에 있어서 선진시대 제자백가의 철학자들 중 그 어떤 철학자보다도 참으로 철학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회의적 부정의 정신을 안고 철학을 한 노자였기에 그는 도를 언표할 때마다 긍정진술보다는 부정진술을 선택하여 말한다. 노자는 언어가 인간의 자의성에 근거하여 말해진다는 점을 경계한 것이다. 사실상 언어는 존재 자신과 근원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32) 언어는 존재와 단절되어 있으면서도 오히려 존재에 대하여 자의적인 해석을 내리는 관념의 폭력과 연대하기도 한다. 언어는 객관적 이라기보다 주관적이다. 그래서 노자는 언어의 자의성을 부정하는 방안의 하나로써 긍정진술보다는 부정진술을 선택한다. 언어의 언어가 폭력의 담화33) 를 멈출 때까지 노자의 부정진술은 지속될 성질을 자체 내에 안고 있다. 왜냐 하면 언어의 구속은 모든 구속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인데, 그 까닭은 행동이 아니라 사고를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4). 이러한 언어의 역기능적 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노자는 언어가 권력화되는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자는 부정진술을 즐겨 사용한다. 노자의 부정진술 안에는 개념 상호간의 대립과 모순관계가 논리적 역설의 긴장감을 동반하고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 때 부정진술과 함께 하는 노자의 역설적 언어는 우리 의식의 임의적 자의서에 대한 일대반격이며, 이 반격을 통하여 우리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사고를 다른 관점으로 전환시키는 반성적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자는 존재의 ‘유’와 ‘무’, ‘큼’과 ‘작음’, ‘움직임’과 ‘고요함’, ‘가득 참’과 ‘텅 빔’, ‘나아감’과 ‘물러감’, ‘강함’과 ‘약함’, ‘남성성’과 ‘여성성’,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등의 상대적 관계를 자주 거론하는데, 짐짓 노자는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중시하고 강조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후자에 놓여진 것들이 도를 더 잘 설명해 준다는 주장하는 듯도 하다. 이것은 일상의 가치관념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단 파격적이다. 일상의 가치관념은 오히려 후자보다는 전자를 중시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언어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태들과 가치들의 반정립을 시도하면서 기존에 정립된 사태나 가치보다는 반정립의 새로운 사태나 가치의 전도(顚倒)를 위한 전도(傳導)의 임무를 맡은 것 같다는 착각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이다. 노자는 전자의 부정을 위하여 방편적으로 후자와 같은 반정립을 제시할 뿐이다. 물로 이와 같이 노자가 대구의 언어를 통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은 대립적 존재자들이 실재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는 모든 것이 상대적인 실재임을 설명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어버리는 대립적 존재자들의 대립성이나 모순성이 우리의 인식과 무관하게 실재한다는 믿음은 우리들의 착각임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노자철학은 일방적인 가치의 우열을 상정하지 않는다. 노자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정립의 반정립과 같은 방식의 상대적 정립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상대적 정립의 존재양태 자체를 전면적으로 포월하여 지양하고자 한다.

그래서 노자는 순수형상 또는 순수존재인 도는 모든 상대적 차별성, 언어적 규정성을 넘어선 것이므로 이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대립관념, 개념 규정으로부터 벗어나야 됨을 말한다. 노자에게 있어서 궁극적 존재로서의 도는 우리에 의하여 경험되어진 개별적 사물처럼 그렇게 언표될 수 없는 것이며, 만약에 그와 같이 각기 구별되고 지각되고 언표될 수 잇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궁극적 존재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노자에게 있어서 존재와 언어의 긴장감은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려는 존재론적 문제에 있다35). 이 존재론적 맥락에서 드러나는 존재와 언어의 긴장감은 인간의 언어와 지식의 한계를 상대적으로 부각시킨다. 본래 현실의 모순과 불합리함으로부터의 우환의식을 그 철학적 발단으로 삼고 있는 노자철학은 인간의 비본연한 삶의 존재양상이 언어와 그 산출의 근거인 지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라도 존재와 언어 사이의 긴장감을 보다 팽팽하게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자의 존재론적 사유의 전제는 인간의 비본연한 삶의 일상적 무반성에 대한 해방을 선언하는 일종의 전주곡이라고 할 수 잇다.

궁극적 존재로서의 도는 존재론적 맥락에서 본래 ‘무명(無名)’36)이므로 이름을 붙여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형상 속에 있는 모든 사물은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 적어도 이름을 가질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만물은 모두 이름(名)을 가지고 있다. 노자는 이러한 ‘유명’과 대조하여 ‘무명’을 말하였다. 그렇다고 형상을 초월한 모든 것이 다 무명은 아니다. 예를 들면 보편자(Universal)는 형상을 초월해 있지만 이름은 있다. 그러나 무명이 형상을 초월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도는 바로 이런 종류의 개념이다37). 그러므로 노자는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억지로 그것을 도라고 하였다38).” 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라는 말은 억지로 붙여진 가명에 불과하다. 반면 이와는 다르게 이름이 붙여진 것은 전적으로 상대적인 사물의 경우에 해당한다39). 우리는 일상적으로 대상사물의 일정한 속성을 찾아내어 사물을 개념화하고 거기에 명칭을 부여한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대상의 속성을 분석 비교하여 우유적(偶有的)인 속성을 사상하고 반대로 공통적인 속성을 추상하여 종합 통일함으로써 고정된 일반적 관념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일정한 개념이란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40).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우리의 의식대상으로서 개별적인 사물로 고정화되고 차별되며 사념되는 객체로서의 사물과 이것을 표상하고 판단하고 추리하는 의식작용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식현상에 불과하다41). 즉 개념이란 일정한 존재를 지시하는 하나의 의미체로서 그 존재의의를 지닐 뿐, 그것이 존재 자체의 실재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이 명칭이란 것도 실은 알고 보면, 사물 그 자체의 속성으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우리의 임의적인 약정일 뿐이다. 명칭은 사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 쪽에서 나온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대적인 사물의 명칭도 그 사물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데 도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노자는 도에 관하여 “나는 그 이름(名)을 알지 못한다(吾不知其名)”고 한 것이다.

노자는 도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한 말들을 본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를 기술하는데 있어서 ‘억지로 말하자면’이라는 가정을 전제한 뒤 이를 진술한다. 그런데 그 도가 이름(名)으로 불리어진 것이 아니라 자(字)로써 불리어졌다(字之曰道)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것은 도가 이름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개념규정에 대한 부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무규정성으로서의 도는 ‘무명’의 성격을 지니므로 그것은 ‘이름을 붙여 말할 수 없는 이름’이다.42) 곧 도는 어떤 이름도 붙지 아니한, 어떠어떠한 것으로 서술되기 이전의 그냥 있는 존재로서, 우리가 하늘이니 땅이니 하는 것과 같은 형태적 구별이나 명칭 또는 넓다 하는 식의 어떤 서술이 붙기 이전의 근원적 상태이다. 따라서 특정한 구별이나 명칭 또는 어떤 서술은 논리적 선후로 말해서 이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43). 임수무는 이름(名)과 자(字)의 차이점에서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강변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름(名號)과 부름(稱謂)의 구별을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양에서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은 부르지 않았었다. 예컨대 아버지라고 하였다면 그것은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아니다. 선생님하고 불렀다면 그것은 부른 것이지 선생님의 이름은 아니다. 왕필은 이름은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객관적인 것이지만 부른다는 것은 관계에 의해 주관적인 위치에서 불리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아들의 자리에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학생의 자리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고 그 아버지나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같은 이치로 도(道)는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이름(명)은 아니다44).”

노자는 언어의 한계를 안고 코끼리가 살얼음판을 걸어가듯이 주저주저하고 근심스럽다45). 도는 인간의 언어에 노출됨과 동시에 그 생명의 질서를 잃어버리는 민감함을 지니기 때문이다. 도는 인간의 언어가 접근하는 순간 자신의 형상이 은폐되어버리는 예민함을 지닌다. 노자는 누구보다 언어의 한계를 잘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노자는 역설적으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46)”고 한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억지로 형용해 보자면’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억지로 형용된 것’이란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그것은 고집되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는 도를 대상적 존재로 정립한다든가 특정한 사물현상을 개념적으로 고정화하는 자세를 전연 근원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노자는 도를 형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태여 형용하여 그것을 억지로 이름지으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大)라고나 하겠다. 그러므로 두루 유행하여 그치는 바가 없다(逝)고 하겠으며, 그러므로 무한하다(遠)고 하겠으며, 그러므로 되돌아온다(反)고 하겠다47). 여기에서 노자가 도를 설명한 몇 가지 내용들(大ㆍ逝ㆍ遠ㆍ反) 은 모두 ‘억지로 형용된 것’들로서 고정불변한 사태규정이 아니다. 언어는 역동적인 세계를 오히려 정체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노자는 끊임없이 개념규정의 태도를 거부하면서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타난 개념들로 모두 ‘규정 아닌 규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노자는 이러한 ‘규정 아닌 규정’들을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고정화하여 권력화하지 말라고 한다.만일 그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권력화되어 나타난다면 이것보다 더한 존재의 왜곡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자』에서 도를 가장 많이 형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대’이다. 대는 도와 많은 겨우 연용되어, ‘대도’(大道)라고 쓰인다. 이 때 대도는 일개 주의로서의 진리가 아닌 여타의 진리를 모두 포섭하는 진리라는 점에서 메타적인 성격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결코 대ㆍ소의 상대성에 국한되어 있는 대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잇는 대이다. 노자는 상대적으로 대ㆍ소를 말할 때와 상대성을 넘어서 대를 말할 때를 잘 구별하고 있다.48) 이 대 대라는 것은 무한하다는 것, 무한하다는 것은 끝없이 뻗어 간다는 것, 끝없이 뻗어 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기에게 되돌아옴을 뜻한다. 도는 절대적이고, 전일적이고, 무소부재하므로 아무리 뻗어 나가도 결국 그 자체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도의 작용적인 측면을 형용한 말로써, 도의 정적 존재성보다는 역동적 작용성을 강조한 것이다49). 도의 작용은 자신이 지닌 존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확산과 수렴을 반복함으로써 한번은 확산되고 한번은 수렴되는 과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도 자신의 확산과 수렴의 작용력으로 말미암아 현상세계의 천차만별한 분화가 가능한 것이다.이것은 상대적 현상들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에 자신의 존재근거를 두고 유동변화의 과정을 겪으며 수렴과 확산의 작용을 지속한다는 말과 통한다. 이 때 도 자신이 지닌 자기 동일성의 원리는 어떠한 타자적 상대성의 원리에 의해서도 변형되지 않는다. 그래서 도는 ‘대’라고 형용된 것이며, 그것은 타자의 정립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드디어 ‘자연’이라고 말해진다.

4.존재의 자연성에 기대어
노자의 도는 특히 인위을 배제한 ‘자연’50) 의 개념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종래의 제자백가의 철학자들이 지녔던 도의 관념과는 현격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존재의 자연성과 인간의 인격성이 도와 관련하여 서로 어떠한 구도를 지니고 드러나는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다시 말하자면, 도에 관한 관념의 갈림길은 도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인간주의적 전제’의 개입 여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종류의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상 존재에의 ‘인간주의적 전재’의 개입 여부는 도를 자연적인 것으로서 볼 것이냐, 아니면 인격적인 것으로 볼 것이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한다. 인격성을 매개로 도를 파악하는 한 도는 인간과 같은 존재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때의 도는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니고 사유하면서 행위하는 의인적(anthropomorphic) 존재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 있어서의 도라면 그것은 인간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며, 또한 도는 인간에 의해 인격화된 존재로 상징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도는 인간에 의해 인격화된 존재로 상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자의 도는 근본적으로 인격성의 개입 자체를 차단한다.51) 인격이 개입된 도는 이미 도가 아니라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왜냐 하면 자연성에 근거한 도는 개별적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동등한 관계맺음의 방식을 드러내지만, 인격성에 근거한 도는 만물에게 인자로움을 시현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악을 징벌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는 등 ‘절대타자’로서의 지위로 격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의 관계맺음의 방식이란 근원적으로 차별성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도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개별자를 통하여 실현해가지만, 이로부터 노정되는 세계의 존재구도는 사물 상호간의 상대적 우열관계를 면치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하늘은 존귀하지만 땅은 비천하다52)” 는 식의 가치의 서열이 정해지게 되고, 한 번 서열화된 가치의 체계는 불변하는 것인 양 고집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도에 관여한 ‘인간주의적 전제’로서의 인격성이 존재의 자연성을 고정된 정체성으로 전환시키고, 결국 세계를 마비시키는 존재왜곡을 초래한다는 의미이다53). 여기에 이르면 존재의 생명은 사멸화된다. 그래서 노자는 인간의 이러한 존재구속적 집착의태도를 부정하면서54), 오히려 인간에 의하여 인간화의 길을 걷는 도를 자신의 자연성 자체에 돌려놓고자 한다.

그런데 노자의 도는 일상의 언어와 사유의 대상으로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개념규정의 측면에서는 부정될 대상이지만, 자신의 존재력에 바탕함으로써 존재를 존재케 하는 자연성과 연계되는 한 이것은 긍정되어질 종류의 세계이다. 노자의 도는 자연의 근원적이며 무한한 생명으로서 인식될 긍정을 자체 내에 함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어떤 타자에로의 지향을 통하여 성립되는 것과는 무관하며, 자기 자신의 근원적 자연성에로의 복귀 또는 환원과 관련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그 환원의 종점에서 언제나 ‘자연’이 놓여 있다. 이 ‘자연’의 존재이법(存在理法)에 따르게 되면 노자의 부정과 역설은 더 이상으로 자신이 수행할 임무를 갖지 않는다. 부정과 역설은 본래 자신이 드러내고자 했던 긍정적 세계에 자신의 자리를 넘겨줄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 방편은 이전의 모든 상대적 대립물들을 해체할 임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립을 전제로 하는 모든 관념이나 사유의 형식으로부터 벗어날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인식은 분별지를 배제하는 참다운 인식이라는 점에서 ‘자연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노자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적 사물들이 다 같이 귀중하다고 한다. 이러한 노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이 세상에는 우리가 홀대할 만한 대상이라든가 무시할 수 있는 존재라 하나도 없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귀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특정한 종류의 식물을 가리켜 잡초라고 구박할 수 있는 특권은 애초에 우리에게 부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귀중한 존재와 그렇지 못한 존재를 상대적으로 분별한다. 마치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 하여 기조 있는 나무라고 숭앙하는가 하면, ‘길가의 버드나무와 담 밑의 꽃(路柳墻花)’은 지조가 없다고 하여 천시하는 것과 같은 관념의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인가의 관념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관념의 폭력은 ‘인간주의적 전제’ 아래 행사되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노자철학에 있어서 문제의 진원지는 바로 인간이며,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존재 이외의 다른 존재로부터 문제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이러한 한 인간이란 부정되고 극복될 대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노자철학의 전체적인 구도 아래서 가장 반자연적인 성격을 띠고 드러나는 인간존재조차도 노자는 역설적으로 귀중한 존재라고 강변한다. 그래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는 큰 것이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 또한 크다. 이 세상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사람도 그 하나를 차지한다.”55) 그렇다면 노자가 본 인간은 일면적으로 반자연한 문제의 진원지로서만 인식될 대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노자는 그 반자연한 성격을 지닌 인간을 귀중한 존재로 상정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노자에게서 인간존재는 결국 이중적 맥락에서 이해될 성질을 지닌다. 이것은 마치 ‘성인’에 이중적 의미가 개입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철학은 ‘성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현실세계의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성인’의 존재를 긍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56). 노자는 동일한 용어를 놓고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내용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가 개념 자체에 절대적 신뢰성을 부여할 수 없게 한다. 개념이란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때의 귀중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당연히 반자여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 질서에 동참한 긍정적 인간임을 알 수 있다.

노자가 이와 같이 도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크다고 한 것은 현상적 사물들이 모두 도에 그 존재의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호간에 비단절적 연관 관계를 지니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통한다. 그리고 그 소통의 방식은 단계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본받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때 현상적 사물의 단계적 위계는 가치론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사물 상호간에는 우열을 상정할 수 없다. 이들이 연대는 자연적인 질서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들의 상호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57) 이를 통하여 보더라도 사람과 땅과 하늘과 도, 그리고 자연은 서로 단절적 구조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이들의 관계가 단절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차단되어 잇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 다른 것을 본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세계를 결코 이원론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는 명제에 등장하고 있는 도와 자연의 관계설정이다. 도가 자연을 본받는다고 한다면, 도는 도 밖의 다른 타자로서의 자연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의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하여 생각해 볼 때, 도는 결코 또 다른 타자에게서 어떠한 영향도 받을 수 없고, 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이 세계에 큰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그 네 가지를 ‘도’ㆍ‘하늘’ㆍ‘땅’ㆍ‘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를 본받는 방식은 사람이 땅을, 땅이 하늘을, 하늘이 도를, 도가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여 앞서서 네 가지의 귀중한 존재를 제시했던 것과는 서로 모순되게 보이는 다섯 가지의 존재양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노자는 자신의 논리에 스스로 책임을 지지 못하고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우리가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단계에 제시된 ‘자연’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노자철학이 있어서 ‘자연’의 개념이 실체적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 어떠한 존재의 존재양상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인 상태적 서술어이다. 즉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하다’ 내지는 ‘저절로 그러하다’는 정도의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의식하는 종류의 물상적 자연은 아니다. 그러므로 노자가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한 것은 도가 자기 자신 이외에 별도로 존재하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58). 따라서 자연을 도의 상위개념으로 간주하는 해석의 방식은59) 잘못된 것이다.이른바 도가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도는 자기의 상황에 의거하여 자기의 내재원인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운동을 결정할 뿐 그 밖의 어떠한 다른 외재적인 원인에는 절대로 따르지 않음을 말한다60).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자연’을 특정관념으로 성립되기 이전의 의미, 즉 우리가 사물을 다루는데 있어서 사물이 지닌 그 스스로 그러한 변화성에 좇을 뿐 어떠한 인위적 틀을 씌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서술어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사변적 인식기능의 고정화적 성질의 재료로서 대립해 있는 명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사실 자체에 의거해야 한다는 방법적 서술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연’은 존재의 개념이 아니라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가 자존하는 상태, 운동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61). 따라서 노자가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한 것은 도가 자기 자신의 존재원리를 본받을 뿐이라는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62).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노자의 자연은 우주의 절대 유일한 근원적 실체로서 정립되지는 않는다. 만일 자연의 개념이 존재의 실체성을 지닌 개념이라면, 그것은 최상의 존재가 되어 도보다 상위의 존재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노자는 당연히 “이 세상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다”고 하지 않고 “이 세상 안에는 다섯 가지 큰 존재가 있다”고 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위원(魏源)은 자연을 실체개념으로 간주하여 자연이 도ㆍ천ㆍ지ㆍ인과 함께 이 세상의 다섯 가지 큰 존재가 된다고 보기도 한다.63) 그러나 논리적으로도 전후문맥이 서로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코 자연이 실체적 개념으로 사용되어 도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정립될 수 는 없는 일이다. 왜냐 하면 도가 곧 자연이요, 자연이 곧 도이기 때문이다.

5.영속적 존재의 깨침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노자의 자연은 어떠한 경우에도 물상적 자연을 의미한다거나 기계론적 자연을 가리키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목적론적 자연과도 거리가 멀다. 그것은 존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이 존재의 원리는 결코 타자적인 것에 의의를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자연은 주체적인 것도 아니다. 노자의 자연은 오히려 기존의 주체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노자의 자연은 자신의 목적을 개별자를 통하여 실현시키고자 하는 유의지적, 유목적적인 성향을 지니지 않는다.노자의 자연은 도리어 이러한 성향에 대하여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맥없이 물러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적극적인 의지를 구사한든가 욕망을 욕망하는 것과 같은 인간주의적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배적 담론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그러므로 노자의 자연 안에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라든가 중심과 주변의 구분과 같은 이분법은 애초에 설자리가 없다.

노자의 자연은 오히려 이전에 우리에 의하여 객체라고 불렸던 것들, 주변으로 밀려났던 것들의 방치를 방관하지 않는다. 여기에 이르면 또 다른 주체로, 또 다른 중심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배제키 힘든 도가 자신을 스스로 해체한다. 도는 자기 부정성에 기초한 ‘개념 아닌 개념’이기 때문이다. 도는 자기 이외의 또 다른 타자의 세계를 정립할 가능성을 항상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노자철학에 있어서 주체화될 존재는 애당초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의 존재론적 질서는 일반적으로 도ㆍ천지ㆍ만물(인간)의 순서로 정립되며, 이것은 본원존재와 현상적 존재로 대별된다64). 그리고 본원존재와 현상적 존재는 그 존재하는 방식이 각각 ‘항상성(상)’과 변화성(변)’의 측면으로 대변된다. 본원존재 속에 현상적 존재가 있는 것이요, 현상적 존재는 본원존재의 지지를 받고 존재하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천차만별한 현상적 존재 가운데 인간도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존재한다. 이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나 천차만별한 현상적 세계는 시간적 찰라성과 공간적 국한성을 지니고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것은 존재의 개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낸다는 측면에 있어서 현상적 존재 역시 도가 자연을 본받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연을 본받는다. 현상적 존재의 근원적 지지력은 본원존재로서의 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원존재의 지지력을 바탕으로 자연을 위배하지 않고 서있는 존재들은 결코 개별화된 타자성에 의거하여 존재의 ’비연속적 단절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천지ㆍ만물뿐만 아니라 인간존재 역시 도 밖에 별도로 존재하는 타자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개별적 사물들이 모두 온전하게 본원존재의 자연성 자체에 동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본원존재의 자연성과 개별적 사물의 자연성이 하나의 맥락을 관통할 경우에 있어서 개별적 존재는 귀중하다고 말해질 뿐이다. 한 편 여러 가지 개별적 존재들 중에서 유독 인간존재는 본원존재의 자연성과 함께 하기에는 너무나 상반된65) 이중적 존재의 지반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육신과 함께 지혜를 소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66) 인간은 의식과 욕망과 의지의 주체로서 자기를 스스로 규정하는 유일한 존재이다.이러한 인간의 의식과 욕망과 의지는 인간에게 관여한 개별적 기운의 질서를 스스로 무력화시키면서 이것이 본원존재의 전일한 기운의 질서와 연대하는 것을 차단한다. 세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노자의 생각인데, 인간의 주체화된 관념은 이들 상호간의 유기적 연계성을 닫힌 체계로 전환시키고67) 자신의 주체적 관념 아래 주변화시킨다. 그래서 노자는 인간의 이러한 주체화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 주체화된 관념의 한 가운데는 항상 ‘나’라고 하는 개별적 존재의 의식이 관여하고 있다.

노자는 이러한 개별적 존재의 의식을 파탈하고 존재의 근원적 질서와 함께 하라고 한다. 그것은 자연을 본받는 행위와 다르지 않으며, 한 편으로 일체의 인위적 행위를 배제하는 무위와 같은 방식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노자는 자연을 말할 때면 언제나 무위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무위를 담론할 경우에 있어서도 역시 자연을 전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노자는 일체의 인위적 행위를 배제함으로써 본원존재의 현상세계로의 자기 분화와 현상세계의 본원존재로의 본질적인 참여가 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이로부터 인간존재의 개별화의 원리가 그 자체로 보장되며, 결과적으로 인간은 존재의 영속성 자체와 함께 한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가로막고 왜곡시키지 않게 될 때 본원존재의 총체적작용력은 인간의 개별성의 원리를 자신의 찰라적인 순간의 마디에서 자연하게 구현한다.

그러므로 노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들이 각각 분열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일체의 개별적 사물이 지닌 다양한 국면이 본원존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본원존재의 전일성 또한 현상세계의 다양성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노자철학의 ‘심오함’이라고 불리어지는 ‘현동(현동)’의 세계가 그 철학적 의의를 드러낸다. 이 세계는 우리의 감각 지각이나 언어적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한다. 이것은 주객 미분화의 원초적 경계이다. 이 세계는 우리의 일상적 분별지의 요소를 배제하고 드러나는 깨침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 깨침으로부터 새로운 사유의 지평이 열리고 존재의 자명성이 개시된다. 여기에서 존재와 의식의 분별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 이들은 근원적으로 미분화된 혼륜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지평으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중요(衆?)’의 세계로부터 ‘중묘(衆妙)’의 세계를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노자철학의 존재론적 맥락에서 바라본 깨침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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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노자』, 제25장.
2) 노자는 자신의 말이 대단히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것이라고 한다.( 『노자), 제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 그렇다면 결국 노자의 말이 우리에게 어렵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노자의 문법에 익숙하지 못하고, 이러한 연유로 노자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노자의 낯설은 문법에 익숙하게 될 때 노자의 그의 말처럼 쉬운 의미체로 전환된다고 볼 수 있다.
3) 신동호, 「노자사사의 존재론적 검토」『인문과학 논문집』, 제8권 2호,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1980, p. 205 참조.
4) 『노자』, 제1장, “道可道, 非常道”
5) 『노자』,제2장,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참조
6) 『노자』, 제25장.
7) 김경탁 역주, 『노자』, 명지대학교 출판부, 서울, 1988, p. 197.
8) 김용옥, 『노자 ㆍ 길과 얻음』, 통나무, 서울, 2000, p. 63.
9) 오강남 풀이, 『도덕경』, 현암사, 서울, 1995, p. 115.
10) 成玄英, 『道德經義홀』, “有物者道也. ” 참조.
11) 여기에 관해서는 정세근의 다음 논문을 참고할 것. 정세근, 「도와 X : 노자철학의 이론학」, 『도가철학』, 창간호, 한국도가철학회, 1999.
12) 이재권, 「노자철학에서 앎의 문제」, 『철학연구』, 제67집, 대한철학회, 1998, p. 241 참조.
13) 국어국문학회 감수, 『국어대사전』, 민중서관, 서울, 2000, p. 123.
14) 따라서 도와 사물의 관계를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든 아니면 생성론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든 이들의 해석은 모두 도의 선재성을 밝힌다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공통적이다. 그러나 두 가지 해석의 방식으로부터 드러나는 도의 선재성은 각각 시간적인 선재성과 논리적인 선재성으로서 그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다르다.
15) 김항배, 『노자철학의 연구』, 사사연, 서울, 1991, p.50.
16) 『노자』, 제4장, “도 … 萬物之宗.”
17) 『노자』, 제62장, “道者, 萬物之奧.”
18) 『노자』, 제16장, “歸根.”
19) 윤천근, 『새로 보는 노자 도덕경』, 법인문화사, 서울 1996, pp. 79~80 참조.
20) 이재권 「노자철학에 있어서 「無」의 문제」, 충남대 석사학위논문, 1983, p. 4 참조.
21) 『노자』, 제25장, 蘇子由註, “夫道非淸非濁, 非高非下, 非去非來, 非善非惡, 混然而成體, 其千人爲性, 故曰; 有物混成. 非未有知其生者, 蓋湛然常存, 而天地生于其中耳.”
22) 김항배, 앞의 책, p. 51 참조.
23) 南懷瑾, 『老子他設』, 復旦大學出版社, 上海, 1996, p. 346
24) ?山, 『老子道德經?山解』,琉璃經房, 臺北, 1985, p. 82, “本來無名, 故但云有一物耳.”
25) 『노자』, 제14장,
26) 『노자』, 제25장, “寂兮廖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27) 陳鼓應, 앞의 책, p. 164.
28) 『노자』, 제1장, “無名, 天地之始.”
29) 王博은 ‘始’와 ‘母’를 두 가지 측면에서 구별한다. 우선 순서상으로 말할 경우 ‘시’가 먼저라면, ‘모’는 다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태상에서 말할 경우에 있어서는 ‘시’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되는 반면 ‘모’는 다른 사물(자식)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된다(王博『老子恩想的史官特色, 文津出版社, 臺北, 1993, p. 209.)
30) 陳鼓應,
31) 『노자』, 제25장,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32) 김충열은 이러한 특성을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언어 문자는 우리 인간의 규약으로 된 것이미므로 그 언어 문자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실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개’라고 이름지었다면 ‘개’라는 부호 문자가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지, ‘개’나 ‘사람’이라는 문자 부호가 바뀌었다고 해서 인간의 실재에 어떤 영향이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와 같이 ‘도’란 글자를 그 무슨 글자로 대체하더라도 ‘도’가 가리키는 실재는 그것 그 자체로 있을 뿐이다”(김충열, 『김충열 교수의 노장철학강의), 예문서원, 서울, 1995, pp. 86~87).
33) 특히 언어가 정치권력의 시녀로 전락할 때 권력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적 담화는 특유한 힘을 갖는다. 그것은 속박을 설득으로, 폭력을 말로 바꾸어놓는다. 즉 권력의 남용을 악의 적이고 편파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언어로 인하여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고 질식되며, 권력은 남용된다(올리비에 르블, 홍재성ㆍ 권오룡 옮김, 『언어와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서울, 1994, p. 262 참조).
34) 올리비에 르불, 홍재성 ㆍ 권오룡 옮김, 앞의 책, p. 217.
35) 신동호, 앞의 논문, p. 207 참조.
36) 노자가 도를 ‘무명’과 관련지어 이해하고 있는 곳을 살펴보면”道常無名”(제32장)을 비롯하여 “無名, 天地之始”(제1장) 및 “도은무명”(제41장) 등을 찾아볼 수 있다.
37) Fung Yu-Lan, 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The Free Press, New York, 1966, p. 94.
38) 『노자』, 제25장, “吾不知其名, 强字之曰道.”
39) 『노자』, 제1장, “有名, 萬物之母.”
40) 박종홍, 『일반논리학』, 박영사, 서울, 1981, p. 25.
41) 고형곤, 『선의 세계』, 삼영사, 서울, 1981, pp. 17~19 참조.
42) 이러한 측면에서 풍우란은 ‘무명’으로서의 도를 설명하면서 도를 ‘이름 아닌 이름(非名之名)’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Fung Yu-Lan, 앞의 책, p. 95).
43) 신동호, 앞의 논문, pp. 210~211 참조.
44) 임수무 역해, 『도덕경』, 계명대학교, 출판부, 대구, 2001, pp. 66~67.
45) 『노자』, 제15장, “豫兮, 若冬涉川.” 참조.
46) 『노자』, 제56장, “知者不言, 言者不知.”
47) 『노자』, 제25장, “强爲知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48) 정세근, 앞의 논문, pp. 9~10 참조.
49) 오강남 풀이, 앞의 책, p. 117 참조.
50) 노자에 있어서 ‘자연’의 일반적 의미는 ‘천’(天)과 같다. 『노자』에는 ‘천지도’(제9장, 제73장, 제77장, 제81장)와 ‘천도’(제47장, 제79장)라는 표현이 각각 보이는데, 이 때의 ‘천’은 모두 ‘자연’의 의미와 같다. 그러나 ‘천’이 ‘하늘 ㆍ 땅’(천지)의 의미로서 경험적 세계를 가리킬 경우, 이 때의 ‘천’은 노자가 말하는 ‘자연’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즉 노자의 ‘천’은 ‘자연’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경험적으로 인식 가능한 ‘물상적 자연천’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51) 『노자』, 제5장,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및 제79장, “天道無親.” 참조. * 이것은 존재 자신이 어떠한 개별적 사물에게도 애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한 것으로서 노자의 ‘자연’의 의미를 다소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52) 『주역』, 「계사전』, “天尊地卑.”
53) 『노자』, 제29장, “爲者,敗之,執者,失之.”참조
54) 『노자』, 제64장, “聖人無爲, 故無敗, 無執,故無失.”
55) 『노자』, 제25장, “道大, 天大, 地大, 人亦大, 城中有四天, 而人居其一焉.” * 왕필본 『노자』는 이 문장 가운데 ‘인’ 을 ‘왕’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것은 정치철학적 함의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인간의 대표성을 지닌 존재를 ‘왕’으로 보는 한에 있어서 별 문제가 없다. 즉 ‘왕’은 천 ㆍ 지 ㆍ 인 삼재의 원리를 체득한 중도적 존재로서의 ‘성인’의 의미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왕’이 ‘인’을 대신하더라도 이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일 정치적 목적의식을 전제하고 ‘인’의 개념을 ‘왕’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라면, 이것은 그렇게 적절한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들어 특히 奚?은, 여기에 ‘왕’으로 적혀있는 것은 『회남자』「도응훈」을 인용하여 ‘왕’으로 한 것인데 이것은 모두 옛날에 ‘왕을 높이는 자’(尊君者)들이 망령되게 고친 것으로서 『노자』의 본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蔣錫昌), 『老子校?』 成子古籍 書店, 四川, 1988, p. 171에서 재인용)
56) 그러나 『노자』에 표현된 ‘성인’의 개념은 전적으로 이상적 인간을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성인’의 개념에 이중성을 부여하고 있는 장자와는 다른 특색이라고 할 수 잇다. 장자는 ‘거인’과 ‘신인’의 동열에서 ‘성인’을 말하여 이를 긍정적 개념으로 보기도 하지만 (『莊子), 逍遙遊,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오히려 ‘성인’이 나타남으로써 이 세상에 온갖 의혹과 차별이 생기게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장자, 馬 蹄, “及至聖人,별 위인, ??爲義, 而天下始疑矣. ?漫爲樂, 摘僻爲禮, 而天下始分矣.”) 노자는 단지 제19장에서 “絶聖棄智” 라고 하여 성스러움의 가치관념에 관하여 부정하고 있는데, 이것을 인간과 관련하여 ‘성인’의 범주로 좁혀서 이해한다면 노자 역시 ‘성인’을 부정적 견지에서 보기도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57) 『노자』, 제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58) 吳증, 『道德眞經注』, 제 25장주, “故曰法自然 非道之外別有自然□.”
59) 이러한 경우는 蘇子由와 魏源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자유는 “도는 자연만 같지 못하다(道不若自然):”고 하였고, 위원은 “도는 천지의 부모이지만, 자연의 자식이다(道爲天地之父, 自然之子)”라고 함으로써 자연을 도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간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자』의 제일가는 주석가로서 알려져 있는 王弼 역시 은연중 자연을 도보다 고차적 실재임을 암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道不遠自然,乃得其性, 法自然者, 在方而法方, 在圓而法圓, 於自然無所違야. 自然者, 無稱之言, 窮極之辭야. 用智不及無知, 而形혼不及精象, 精象不及無形, 有儀不及無儀, 故轉相法야. 道順自然”), 자신의 자연관이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이 점과 관련하여 김항배의 연구결과는 선구적일 뿐만 아니라 주목할 만하다.(김항배, 앞의 책, p.81 참조)
60) 陳鼓應, 앞의 책, p. 30.
61) 이규상, 「노자의 부정적 사유방법에 대한 모색」『동서철학연구』, 제11호, 한국동서철학회, 1994, p. 114.
62) 이와 같은 도와 자연의 관계 설정, 즉 ‘도는 자기 자신의 저절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명제는 사실상 우리에게 어떠한 정보도 새롭게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노자의 설법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도 자신은 어떠한 규정도 불허하는 무속성적 존재임을 감안할 때 도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것은 도리어 도가 언어적 규정을 통하여 의미화된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노자는 차라리 도가 이러한 존재방식을 벗어나 있음을 역설적으로 경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63) 魏源, 『老子本義』, 世界書局, 臺北, 1973, p. 19, “?王爲城中五大야.” 참조
64) 그렇다고 도와 도ㆍ 천지, 만물(인간)이 각각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도는 자기 자신의 존재원리를 통하여 현상세계를 분화하는데, 이렇게 분화된 천ㆍ 지와 만물(인간)은 근원적으로 도 자신과 전연 다른 것일 수 없게 된다.이렇게 분화된 현상들은 도 이외의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가 자기 자신을 본받는다’는 것은 역으로 자기 자신이 드러낸 세계로서의 천ㆍ 지와 만물(인간)의 원리를 본받는다는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도는 분화되어 나타난 자신, 즉 현상세계에 대하여 간섭하거나 권력의지를 행사하지 않고 그냥 저대로, 즉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만물(인간)은 만물(인간)대로 놓아둔다. 이것이 바로 노자적 의미의 자연이다. 그래서 노자의 자연은 총체적 존재성을 지닌 본원존재의 측면에서는 ‘저절로 그러하다’는 의미성을 보지하지만, 분화된 현상세계의 다양한 국면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를 갖게되는 것이라 하겠다.
65) 『노자』, 제77장, “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不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66) 『노자』, 제13장,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反吾無身, 吾有何患.”
67) 노자철학에 있어서 도와 천 ㆍ 지, 만물(인간)의 상호 관계는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가 필연적이라는 말은 그 관계의 절대성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비단절적 연속성’이라는 존재의 생명적 영속성에 그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와 천 ㆍ 지, 만물이 서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일상적 믿음을 신봉한다. 여기에는 존재와 개념의 이중적 단절이 공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절이란 의미론적인 것일 뿐 존재 자신의 전일한 생명성과는 전연 무관한 종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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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이종성
(Lee, Jong-Sung)
충남대학교
관심분야 : 동양철학, 중국철학, 노장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