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정치담론과 정치적 삶의 연관성
Ⅱ.행위 변화를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
Ⅲ.실증주의 ‘정치’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
1.권력중심의 도구주의적 성격
2.묘사-규범 이분법에서 비롯되는 탈규범성
3.객관주의의 억압성
Ⅳ.결론: 하나의 정치적 행위로서 담론적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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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중앙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지명 社會科學硏究Chung Ang Journal of Social Sciences
권 14
호 1
출판일 2002. 2. 25.
개념과 행동
(정치개혁의 인식론적 전제에 관하여)
Concepts and Behavior
(On the Epistemological presupposition of Political Reform)
최영진
중앙대학교 교수
2-098-0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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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담론과 정치적 삶의 연관성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와 주장이 범람하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성과는 발견하기 어렵다. 변화에 대한 기대와 요구는 높지만, 현실적으로 변화와 개혁의 발걸음이 더디기만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많은 경우, 우리는 정치인들의 반개혁적 행태를 비판하지만, 유권자들인 시민 역시 정치인의 변화를 유도할 만큼 개혁적이지 못하다는 점 또한 문제가 된다. 우리가 봉착해 있는 정치적 문제는 정치인과 시민들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책임만 탓한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방적 문책은 문제인식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한국 지역주의 문제가 대표적 사례이다. 유권자들의 지역적 결집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의 지역편향적 행태만 탓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행위자 모두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일에서 개혁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행위자들의 정치적 사유와 행위의 변화를 정치담론에 내장되어 있는 ‘인식론적 전제’(epistemological presupposition)에 대한 해명을 통해 그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1). 이러한 담론의 인식론적 전제를 분석한다는 것은 여기에 사용되는 언어에 내장된 암묵적인 규범과 가치판단을 들춰내어, 행위자의 사유방식과 행태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언어는 사람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중립적인 매개체가 아니라, 특정 방향으로 정치적 사유와 행동을 중재하는, 일종의 ‘제도화된 의미구조’(institutionalized structure of meanings)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Connolly 1983, 1). “정치에 대한 관념은 현실정치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샤어(J. H. Schaar)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언어는 관념을 구축하고, 관념은 현실을 구성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언어와 담론의 힘을 인식한다면, 정치개혁에 대한 논의도 거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러한 작업의 제일 순서는 기존의 담론과 언어구조가 내장하고 있는 인식론적 수구성과 반개혁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 정치담론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특정한 인식과 행위양식만을 허용하고 유인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개념적 제약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경우, 변화와 개혁의 담론이 안착할 수 있는 인식론적 기반을 구축할 수 없을 것이다. 기존 사회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을 아무런 수정 없이 사용한다는 것은 기존 정치행태에 대해 우호적인 방식으로 설정된 인식론적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치적 개념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의 속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기존 정치적 사유와 행위의 심층적 기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2).
본 논의에서는 특히 정치담론의 개념들과 그 인식론적 전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 개념들이 정치담론과 정치적 삶에 관계하는 방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치담론에 있어 개념들은 우선, 단어의 의미와, 지시하는 사건이나 행동에 부합하는 지를 말하기 전에 해당 단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만족되어야 할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지시대상에 대한 규정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아니라, 개념의 의미에 체현된(embodied) 가치판단을 그 자체로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치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들, 즉 반역, 독재정치, 부정부패 등의 개념들은 그러한 행위나 실천에 대한 어떤 도덕적 개입을 수반하게 되고, 그 개념들이 내포하고 있는 가치판단을 인정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 언어에 체현된 일련의 가치판단과 정서적 개입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해당 개념을 지배하고 있는 의미구조와 관습을 밝혀내는 작업이고, 더 나아가 특정한 사유방식과 행위를 유인 혹은 배제하는 일이기 때문에 일종의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적 삶과 개념과의 연관성과 그에 관련된 쟁점을 탐색하기 위해, 기존 사회과학의 주요한 인식론적 전제를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본 논의는 바로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실증주의적 ‘정치’개념의 인식론적 전제와 그것이 행위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Ⅱ.행위 변화를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
세상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행위방식이 ‘나아져야’ 할 것이다. 행위방식이 나아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기 위해서는 많은 대화와 논쟁, 그리고 사회적 수용절차를 거쳐야 하겠지만, 사람들의 행위방식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어 있다. 하나는 사람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보상과 처벌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즉 행위의 물질적 조건 혹은 결과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입장으로, 행태주의적 시각(behavioral perspective)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달라진다는 통념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학적 관점(interpretative perspective)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행태주의적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1950년대 사회심리학자 스키너(S. F. Skinner)의 행태주의 심리학이다(Skinner 1971; 1974). 그에 의하면 사람들의 행위를 유인하거나 제약하는데, 보상과 처벌에 의한 강화(reinforcement)만큼 효과적인 방식은 없다는 것이다. 유아교육에서부터 범죄예방에 이르기까지 범법(outlaw)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보상과 처벌은 다음에 그러한 행동을 반복하는데 있어 유인과 제한요소로 작용하게 된다3).
특정 행위에 대한 보상과 처벌이 철저히 이루어지는 사회일수록, 질서 있는 사회, 좋은 음식과 서비스, 그리고 훌륭한 정치를 만끽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정치에 대한 도덕적이며 규범적인 분석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정치인을 정치적 이해에 민감한 정치적 동물로 전제하고, 이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유권자의 기대와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정치발전이 가능하다는 논리적 가정을 담고 있다4).
이러한 관점에 기반한 정치개혁은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행위방향으로 이루어져야 가능할 것이다. 좋은 정치, 깨끗하고 생산적인 정치를 희망한다면, 그렇지 못한 정치인 혹은 정치세력을 거부하는 선택을 하면 된다. 시장에서 그렇듯이 정치에서도 정책과 지지의 거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학에서 말하는 책임정치는, 국회의원의 경우, 의정활동을 비롯한 평가를 기초로 한 지지(충성)와 지지철회(저항)의 반복된 행위에서 가능하다. 의정활동을 충실히 수행할수록 재선될 가능성이 높을수록 의정활동을 열심히 할 것이다. 만약 의정활동을 대충하더라도 다른 요인에 의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면 그 ‘다른 요인’에 치중할 것은 분명하다5). 의회활동을 활성화 하자는 것이, 유권자들의 염원이라면 의정활동을 열심히 한 의원에게 몰표를 던져주면 될 것이다. 유권자가 그렇게 투표할 것이라는 것이 명확할 경우 대한민국 국회는 활기를 되찾을 것이며, 의정활동의 수준이 당선가능성으로 등식화될 경우 정당에서의 공천도 의정활동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책임정치의 구현은 정치인에게 책임을 지라는 의미에서보다 정치활동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유권자의 결의가 더 중요한 정치행태라 할 수 있다. 뽑아만 놓고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의정활동이 제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책임을 묻는 분위기에서 보상/처벌의 원칙이 구현되는 것이고, 정치인들의 행동양식도 유권자들이 기대하는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질 것이다6).
행태주의적 관점이 매우 명쾌해 보이지만, 처벌과 보상의 논리가 전사회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문책(問責)의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실책(失策)의 정치는 줄어들 것이지만, 무엇이 실책이고 어느 정도까지 문책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누가, 어떻게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합의는 존재한다는 전제조건이 성립되어야 가능한 주장이다. 교통규칙과 같이 실책을 가늠하는 명확한 기준과 그에 대한 벌칙이 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상이한 기준과 평가, 그리고 판단이 난무하는 정치현실에서 문책의 정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다소 거칠지만 해당 사회가 추구하는 정치에 대한 어떤 ‘바람직한 상(像)’이 부분합의의 조건에서나마 존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하다면, 즉 사회 각 분파의 이해에 따라 추구하는 정치세계가 상이할 경우, 우리의 정치적 삶은 기껏해야 해당 분파들간의 머릿수 싸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행태주의 행위이론은 어떤 행위의 기준과 평가에 대한 모종의 합의가 비록 부분적일지라도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되어야 한다는 인식론적 문제를 던져 준다. 사람들이 보상과 처벌의 동기부여구조(incentive structure)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고 있지만, 이런 일이 예상했던 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행위자들에 의해 그러한 유인구조의 정당성이 어느 정도 인정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행태주의 행위이론이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해당 사회의 담론구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이는 결국 해석학적 관점으로 소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행위가 현실적 이해관계에 의해 유인되고 통제될 수 있지만, 그러한 유인과 통제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론적 전환(epistemological turn)이 없다면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행위를 설명하는데 있어 행태주의적 접근의 위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여전히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행위이론이란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변화와 개혁을 기대한다면 사람의 생각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행태주의 접근이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해석학적 접근은 행위자들의 관념, 인식, 신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해석학적 입장에서 정치개혁은 정치인이나 유권자들의 정치인식과 관념이 바뀌어야 하고, 그 결과 그들의 태도와 행동이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과 과정을 고려한다면 적지 않은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사람들의 정치인식과 관념이 변화하기 위한 요인과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생각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에게 구체적인 불이익을 가져다 줄 때이다. 여성을 차별하는 일이 형사적 처벌과 민사상 불이익(피해보상)의 대상이 된다면, 그러한 행위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행태주의적 관점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해석학적 입장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상에 대한 태도 혹은 행위방식의 변화가 해당 대상에 대한 관념을 의도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회 공학적 관점에서 보면, ‘관념의 변화’가 ‘행위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예로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근절하기 위해 일체의 차별 관행에 대해 처벌과 보상조치를 취한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혐오감과 거부감을 변화시키기는 힘들지만,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결과 흑인에 대한 거부감과 차별의식이 약화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태도가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는 말은 이것을 의미한다. 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예의의 실천을 강조한 것은 바른 몸가짐을 통해 바른 마음가짐을 양육(養育)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성’(誠)과 ‘경’(敬)의 실천을 통해 ‘인의’(仁義)를 깨우치려 했던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행위론도 이와 유사했을 것이다7).
생각이 바뀌는 다른 경우는, 체험과 사고행위를 통해 세상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판단, 그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었을 때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나 언론매체의 영향이 지대할 것이고 사실상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와 만남 속에서 간주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겠지만, 어떤 물질적 이해관계와 강박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 외부로부터의 경험과 내부에서의 반성적 사유를 통해 생각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 있어 해석학적 입장의 본령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극적인 사건의 체험을 통해 극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고, 대단히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알게 모르게 일어날 수도 있다. 지난 해 9ㆍ11 테러를 경험한 이후 미국인들 사이에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인식과 행위관념의 변화가 전자의 대표적 사례라 한다면,8) 1970년대 이후 서구 전후세대에게 발견되는 ‘탈물질주의적 가치관’(post-material values)은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다(Inglehart 1990).
해석학적 관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의 변화’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가 현실적으로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기존의 정치적 사유방식과 관행이 현실세계의 이해관계 속에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견고한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 특정한 사유방식과 관행이 20, 30년간 유지되어왔다는 관성(慣性) 그 자체가 힘으로 작용하고, 행위자들이 형성해온 다양한 관계 속에 깊이 응결되어 있기 때문에 변화의 비용 또한 적지 않다. 예컨대 학연을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경우, 동창회나 동창들과의 관계를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각의 변화를 불러오는 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새로운 사유방식이 수용될 수 있는 인식론적 준거틀이 형성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는 마치 새로운 기차가 다니기 위해서는 새로운 궤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유사한 이치다. 새로운 사유방식과 관행은 아무런 인식론적 준거 없이 갑자기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고, 사랑은 남자와 여자간에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오랫동안 믿어온 사람들이 동성애나 성전환 문제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갑작스레 동성애와 성전환에 대한 인정문제가 등장하자,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두 가지 반응이 목격되었다. 하나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식의 노골적인 거부반응이다. 경험적인 조사연구는 찾지 못했지만 40대 이후 연령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는 식의 반응으로 주로 20, 30대 젊은층에서 곧잘 발견된다. 보다 관대해 보이는 젊은 층의 반응도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들이 그렇게 살겠다는 데 다른 사람이 가타부타할 이유가 없다’는 다분히 개인주의적 사유방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현상을 현실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러한 현상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그럴 수 있는 일이겠다’고 말하지만, 내심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장년층의 거부감이나 청년층의 애매함이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동성애나 성전환 문제를 받아들일 만한 인식론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본질에 관련된 가장 본질적인 인식은 남자와 여자의 구분과 차이에 기반한 ‘범주론적 사고’이다9). 범주론적 사고는 사물들간의 구분과 차이, 그리고 위계가 존재한다는 대단히 질서있는 인식체계이다. 예컨대,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며, 그러한 차이로 말미암은 위계질서가 설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주론적 사고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범주(남/여, 지역, 학교, 성씨, 국가, 인종, 직업 등)에 대한 구획과 평가, 그리고 그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한 범주간의 관계설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범주론적 사고는 탈경계적인 사고, 즉 경계를 가로지르는 ‘탈주의 사유’를 제약하는 본질적 한계를 내장하고 있다10). 따라서 단일범주 내 동질성을 거부하고 범주간 경계 그 자체를 의문시하는 사유방식, 예컨대 동성애나 성전환의 관념을 수용할 수 있는 인식론적 근거 자체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주론적 사고가 해체 혹은 대체되지 않고서, 우리 사회가 동성애나 성전환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1).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러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인식론적 기반이 선행하거나 병렬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판단이 정확하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정치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인식론적 기반과 새로운 사유방식, 그리고 그로 인해 결과되는 태도와 행위의 변화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존의 사유방식과 행태가 강력한 관성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지금 여기’ 우리의 정치적 사유를 구성하는 인식론적 기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Ⅲ.실증주의 ‘정치’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
정치학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용어는 두말할 것 없이 ‘정치’(政治, Politics) 개념이다. ‘정치’란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고, 그러한 이해가 우리의 정치적 삶과 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파악할 수 있다면, 정치세계에 있어 말과 행위의 상관성을 읽어내려는 우리의 의도는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정치’란 말이 실증주의 정치학에서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고 있는 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다음은 대표적인 실증주의 학자들의 정치에 대한 개념 정의를 열거한 것이다.
- Lasswell : who gets what, when, and how / the shaping and sharing of power, a political act as one performed in power perspective (Lasswell 1936)
- Dahl : persistent pattern of human relationships that involves, to a significant extent, control, influence, power, or authority (Dahl 1984)
- Easton : 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 for a society (Easton 1971)
- Deutsch : the making of decisions by public means (Deutsch 1963)
우선 발견할 수 있는 ‘권력’ 중심의 정치개념이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라스웰(H. Lasswell)의 정의에서 그 극적인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서구학계를 대표하는 이스턴(D. Easton)의 정의에서 시작하는 ‘권위적’(authoritative)이란 용어도 권력의지를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것이다. 도이치(K, Deutsch) 등의 정의에는 ‘의사결정’(decision-making)의 절차적 측면이 부각되고 있지만, 그 과정이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이 지배하는 공간이며, 권력의 욕망이 발현되는 순간이기도 하다12). 사실 정치에 대한 비난은 권력에의 욕망 그 자체를 향한 것이라기 보다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정략적 행위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정의에는 어떤 규범적 지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탈규범적이다. 탈규범적 정의는 정치적 이상과 현실,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묘사(description)와 규범(norm)을 대립적으로 나누는 이분법에서 비롯된다13). 마키아벨리가 근대정치의 원조로 칭송(?)받고 있는 것도 정치를 윤리 세계로부터 분리시켰던 공로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근대정치 개념의 탈규범적 성격과 근대정치의 비윤리적 야만성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개념의 탈규범적 성격이 강조된 것은 가치중립성은 실증주의 사회과학의 인식론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정치학 연구의 과학적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정치학의 영어표현이 “the Study of Politics”가 아니라 “Political Science”가 된 것은 과학적 엄밀성과 객관성을 구현하고자 하는 미국 정치학자들의 갸륵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14). 개념정의에 사용되는 하위개념들은 가능한 경험적으로 조작(operation) 가능한 것이어야 했고, 따라서 주관이 개입되는 ‘가치지향적’ 개념들은 배제되었다. 그리하여 경험적 조작이 가능한 객관주의의 술어만 남아있는 형국이다15).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정치개념이 가지고 있는 권력중심적, 탈규범적, 그리고 가치배제적 경험주의가 우리의 정치인식과 행위에 어떤 영향을 가져다줄 것인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1.권력중심의 도구주의적 성격
권력의 관점에서 정치를 보아야 한다는 라스웰의 정치관은 사실상 근대정치의 통념과 가장 부합하는 것이다. 달(R. Dahl)이 통제력이나 영향력, 권위 등의 개념으로 순치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권력의지의 효과로 이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실증주의 정치학자들은 권력중심의 정치관을 가지고 인간적 색채를 엷게 하기 위해 권위적 분배와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듯 하지만, 그러한 결정이 무엇을 위한다는 구체적 목표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특정한 결정을 이루어 내는 권력의 의지만 부각될 뿐이다. 의사결정과정이 얼마나 합리적, 개방적이냐가 문제될 수 있지만, 이것은 권력의 민주성에 관련된 것이지 정치 자체를 권력현상으로 이해하는 도구주의적 관점(instrumental perspective)임에 분명하다16).
권력중심의 도구주의적 정치관이 가져오는 가장 일반적인 문제는 ‘도구’ 그 자체가 ‘목표’로 치환, 역전되면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 그 자체가 정치적인 것, 그리고 이성적인 것으로 정당화되는 혜겔식의 역전이 일으나는데 있다. 이는 마치 돈이 인생의 목표가 아님에도 돈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린 우리의 삶과 유사하다17). 사회에 따라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과 방법이 다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정치극장의 수준이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양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 얼마나 합당하느냐에 따라 권력 그 자체에 대한 정당화 수준은 다르겠지만, 획득된 권력은 그 자체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권력관계는 현실성과 객관성을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권력은 사람들의 일상적 삶과 결부된 주요한 정책결정에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그러한 영향력으로 인해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권력은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구체적 이해관계를 투사하게 되고, 욕망과 외경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현실주의적 사고의 경험적 기반으로 존재하게 된다. 현실주의 정치인식은 현재의 권력, 현재의 이해, 현재의 실현 가능성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의 이상과 규범적 요구와는 모순되더라도 현재의 지저분한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주의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실현가능성 없어 보이는 정치적 이상을 좇는 행위는 비현실적이며, 개인 혹은 집단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선택만이 현실적인 판단으로 평가된다.
현실주의적 경향이 강할수록 심각한 권력추수적 행태를 보이게 된다. 우리 사회에 널리 쓰이는 ‘실세(實勢)’나 ‘대세론(大勢論)’이란 용어는 권력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쏠리는 현상을 함축하고 있다. 선거 때만 되면 ‘누가, 왜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보다 ‘현실적으로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는 것도 권력추수적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가능성이 없는 후보나 정당은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강자들만의 잔치가 되는 것이다. 패권의 논리가 논리적 규범적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배적일 수 있는 것도 현실주의 사고와 행위양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8).
현실주의 정치인식의 아마도 가장 큰 폐해는 ‘정치적 이상(理想)의 상실’일 것이다. 바람직하지만 현실적 기반을 갖지 않은 정치적 사유는, 그것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자신의 목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과 변화의 목소리는 대다수 현실주의자들에 의해 냉대 받고 그 현실적 가능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향할 어떤 ‘바람직한 상(像)’에 대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19).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바람직한 상을 지향하는 개혁의 목소리 또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개혁의 방향과 목표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보유하고 있는 산회에서 개혁은 그 자체로 권력투쟁의 양상을 떨 수밖에 없다. 권력투쟁에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할 경우 밀려난 세력의 정치적 배제를 가져오지만,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하고 지리한 권력투쟁이 계속될 경우 소위 ‘개혁의 피로현상’, 혹은 ‘개혁의 실종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두 번의 문민정부가 추진한 개혁은 이러한 양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요약한다면 권력중심적 도구주의 정치관은 현실주의 정치인식으로 연결되고, 이상과 목표가치를 중시하지 않는 현실주의적 사고와 행위로 인해 개혁의 가능성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구주의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상적 목적이 아니라 과정적 합리성과 효율성인 것이다. ‘정치의 생산성’이란 말만큼 이러한 도구주의적 정치인식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다. 생산성은 말 그대로 투입된 자원에 대용한 산출을 계산하는 극히 도구적 발상이다20). 도구적 발상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장기적인 비용지불을 감수해야 하는 개혁이나 정치적 이상에 대한 관심은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묘사-규범 이분법에서 비롯되는 탈규범성
우리 사회의 지배적 정치관이 권력중심적이고 도구주의적이라는 것은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인식론적 기반 위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증주의 정치학방법론에서 가장 중시하는 기준이 객관성이라면, 이러한 기준은 정치 개념에서 규범적 속성을 배제함으로 구현될 수 있다. 따라서 종교세계에 있어 영(靈)과 육(肉)의 구별이 엄연하듯이, 정치세계에서는 이상과 현실을 분별하고, 방법론의 세계에서는 묘사와 규범이 구분하는 것이다. 여기서 묘사와 규범의 이분법(descriptive-normative dichotomy)이 탄생하게 되는데, 문제는 규범적 판단을 현실세계에서 추방하여 영혼의 이상세계로 유폐시켰다는 점이다.
규범적 진술이 배척된 것은 진위(true-false)를 판정할 수 없는 가치개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정치는 정의로와야 한다.”는 문장의 진위를 판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있는’(meaningful) 진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미있는 진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문장이건 분석적(analytic)이나 종합적(synthetic)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실증주의 논리학이다21). 따라서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진술을 포함하는 규범적 주장은 과학적 정치학 탐구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묘사-규범 이분법에 근거한 이러한 주장은 실재와 부합하지 않을 뿐이니라 규범적으로 온당하지도 않다. 정치학에게 논쟁거리가 되는 주요 용어들은 갈리(Gallie)의 언명처럼 ‘본질적으로 경쟁적인 개념들’(essentially contested concepts)이기 때문에, 특정 정치현상을 ‘민주주의’ 혹은 ‘혁명’이라고 묘사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모종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에 관련된 모종의 개입(commitment)을 표현한다는 점에 있어 평가적(appraisive)이라 할 수 있다.(Gallie 1962, 121-46; Connolly 1983, 10-13)
어떤 상황을 ‘묘사한다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뿐만 아니라,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가능한 ‘관점’으로부터 그것을 ‘특성화’(to characterize it) 하는 것이다.(Connolly 1983, 22-24) 이때 사용되는 개념들은 우선 평가적 관점을 내장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이 요구하는 관점에 따라 그들이 특성화하려는 현상의 윤곽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혁명’을 묘사할 때, 가령 “정치권력의 억압에 저항하여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진술을 할 수 있는데, ‘정치권력’은 ‘억압’과 ‘저항’이란 개념이 사용될 수 있는 평가적 관점, 즉 ‘정치권력의 정당한 행사’라는 관점을 내장하고 있으며, ‘억압’이나 ‘저항’은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이 묘사하려는 현상의 윤곽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2). 누군가가 거짓말하고 있다거나, 약속하거나, 위협하거나, 살인하거나, 혹은 그가 폭력적으로, 용기 있게, 비겁하게, 난폭하게 행동한다거나, 또는 그가 무죄이거나 게으르다거나, 부패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도덕적 관점에서 다양한 행위, 관행, 성향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들은. 각기 각 상황에 적용하기 전에 어떤 특정 조건들이 만족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묘사에 사용되며, 이러한 용어들은 그러한 조건의 맥락에서 묘사된 행동이나 습관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개념의 이름으로 특정한 행위들을 묶을 수 있다23).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묘사/특성화할 때 사용하는 많은 개념들에서 규범적 관점을 추방하는 것은 그러한 개념 사용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정치학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개념들이 평가적 이라는 주장은 개념 적용을 만족시키는 기준과 개념의 의미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평가는 상황과 입장에 따라 다르게 내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논쟁거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개념적 논쟁은 정치적 개념의 타당성 논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유와 행위를 유인하는 ‘정치적 실천’ 그 자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평가적 개념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것은, 자신이 몰입해 있는 가치판단 안으로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며, 그러한 몰입에 일치되는 행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개념에서 평가적 측면을 외면하는 것은 행위개념 그 자체에 깊이 내장되어 있는 규범적 요청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다. 이는 “어떤 행위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행위의 책임윤리을 은폐함으로써 탈규범적 행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24). 책임윤리가 논리적으로 배제된 상태에서 행위의 책임은 법률적 처벌기제를 통해서만 부분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 뿐, 그러한 처벌의 기준을 벗어난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무책임의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물론 특정 사회의 처벌기제의 효율성과 긴박성에 따라 탈규범적 무책임의 영역은 차별적이겠지만, 규범이 배제된 행위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사회에서 보편적 책임윤리를 기대하기란 난망한 일이다25).
묘사-규범의 이분법에 입각한 실증주의적 정치인식은 주요 정치학 개념이 가지고 있는 평가적 측면을 배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행위의 탈규범화를 심화시킴으로써 도덕과 책임이 명징하게 서야할 정치개혁의 가능성을 인식론적 차원에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3.객관주의의 억압성
객관주의의 강조는 설명하고자 하는 정치현상과의 객관적 거리를 강조함으로써 감정적 규범적 개입을 차단하고 조작적 방식을 통해 연구자들의 정치적 선호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진술을 획득하기 위한 실증주의 인식론의 핵심적 사항이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주의와 보편주의는 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파탄하였음을 많은 학자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근본적 문제의식은 칸트(Kant)의 보편적 도덕률에 대한 헤겔(Hegel)의 비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칸트의 정언명법는 언제 어디서나 성립될 수 있는 행위규칙으로 강조되었다. 예컨대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원리에 타당하도록 행동하라”는 명제는 “남이 너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행동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행위규칙으로 구현되는 것이며, 이러한 명제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그러나 헤겔을 비롯해서 정언명법의 보편성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러한 정언명법의 보편성이 타당성을 인정받으려면, ‘자신이 도덕적으로 온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와 ‘타인이 도덕적으로 온당하다’고 생각하는 바가 동일해야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역사와 문화, 사회체제가 다를 경우 그러한 규범적 토대는 동일할 수 없고, 따라서 정언명법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홍영두 2000, 142-174).
객관주의의 공허함은 언어의 맥락적 이해를 강조하는 언어행위이론(speech act theory)의 주장을 통해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화용론(話用論, pragmatics)의 일반적 틀로부터 오스틴(Austin), 설(Searle) 등이 정식화된 언어행위이론에서는, 말의 의미는 화자의 역사적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해될 뿐이라고 주장한다(Burkhardt 1990). 즉 주어진 맥락(context) 속에서 그 진정한 의미(meaning)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에게 “차가 온다”는 말은 ‘주의하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차가 오니 탈 준비하라는 알림의 의미를 전해준다. 동일한 단어나 문장이라 할지라도 구조와 맥락에 따라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고, 역으로 설명하면 말의 의미는 구조와 맥락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26). 그렇기 때문에 언어생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구조와 맥락에 대한 인식과 관념의 공유가 필요하고, 공유된 인식과 관념에 대한 언급이 없더라도 암묵적 전제 위에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가 어려운 이유도 공유의 기반이 부재하거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우리의 언어 그 자체의 맥락제약성으로 인해 행위규범에 있어 어떤 보편적 객관성을 주장하기 어렵다는 뜻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주의에 입각한 객관성과 보편성의 원칙이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이미 실패한 것이지만, 사회현상에 대한 객관적 합리성이 내장하고 있는 장점 자체를 외면할 필요는 없다. 즉 특정 문제에 대한 역사적ㆍ문화적 규범적 토대를 공유하고 있다면, 혹은 어떤 목표나 가치에 대한 합의를 성취했다면,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그리하여 객관적이라는 용어에 걸맞는 행위규칙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법도 ‘맥락의 공유’라는 조건을 전제로 해야,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도 이런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객관주의는 사고의 전제가 아니라, 결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객관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의 사유와 행위에 객관적 본질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떤 맥락의 공유, 혹은 ‘상호인정’(mutual recognition)을 통해 합의에 도달할 수 있고, 그렇게 성취한 합의에 대해, ‘객관성’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객관주의의 사유의 특징은 정치현상에는 어떤 본질적인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객관적 보편적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본질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는데, 이런 경우 상층되는 의견들의 관계는 서로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타협적이기 보다 상호간의 객관성을 경쟁을 벌이게 됨으로써 배타적 경향을 노정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그 부정적 한계를 배태시켰던 철학적 원리주의에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너의 생각보다 더 타당하다는 발상’, 그 자체가 상이한 입장을 소유한 사람들간의 타협과 협력을 어렵게 만드는 인식론적 한계로 작용하게 된다27).
객관주의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적 앎’과 ‘삶’의 분리하는 것이다. 객관주의적 인식에서 관찰대상은 관찰자의 삶과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어떤 객관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관찰자의 구체적 삶의 조건과는 구분되는 주장만이 우리가 온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관찰자의 일상적 조건으로 탈구된 앎이 객관적이라면, 사실상 객관적 앎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그런 앎일 것이다 노동자에게, 농민에게 그들 삶과 무관한 입장을 가지는 것이 객관적인 태도라 할지라도, 그러한 것이 결국 지배계층의 이해를 암묵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허위의식’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28). 사회 전체의 이익에 대한 합의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각자의 입장은 자신의 구체적 삶에 기반한 것일 수밖에 없고, 이는 타인의 주장만큼이나 정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받아드려져야 한다. 그러나 객관주의 인식틀은 이러한 다원주의(multilateralism)와 ‘차이의 정치’(politics of difference)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다. 정치적 현안에 대한 대화가 상호간의 정당성 경쟁으로 치달아 버리고, 집단간의 차이가 곧장 도덕적 우열경쟁으로 격화되는 것도 객관주의적 사유에 의해 부분적으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객관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보편성과 객관성을 내세워 사회 내 존재하는 경쟁적 목소리를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객관성은 누가 보아도 합의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은 합의기반으로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이해 당사자들의 입장에 따라 여러 개의 ‘객관들’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성은 간주관적(intersubjective) 대화와 합의를 통해 형성되는 일종 합의구조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정치개혁이 객관적 합의와 도덕적 우월성에 기반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물질적 대립속에 합의의 기반이 붕괴될 때 개혁의 도덕적 우월성도 근거를 상실하게 되고 개혁의 효과도 소멸되고 만다. 본질론적 객관주의는 세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뿐아니라 정치개혁에도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점에 있어 심각한 해악인 것이다.
Ⅳ.결론: 하나의 정치적 행위로서 담론적 실천
‘정치’란 개념에 대한 분석에 보았듯이, 정치(학)의 개념들은 정치과정을 관찰하는데 필요한 렌즈일 뿐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삶의 일부분으로 존재한다. 필자가 분석했던 ‘정치’ 개념의 경우와 같이 ‘권력중심적 도구주의적 탈규범적 객관주의적 관점’을 전제로 ‘정치’ 현상을 이해할 때, 정치적 행위는 권력지향적이고 탈규범적이며 억압적 성격을 노정할 것이며, 정치 현실 또한 그러한 행위원리에 의해 체현된다. 따라서 ‘정치’ 개념은 ‘정치’ 현상 그 자체를 이해하는 색안경일 뿐 아니라, 그러한 원리에 따라 현실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정치’ 그 자체인 것이다. 만약 정치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적 준거틀이 변화가 상당한 수의 구성원들에 의해 일단 수용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사유와 행위의 변화를 통해 정치적 삶 그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는데 공헌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정치담론의 인식론적 전제에 대한 분석을 정치개혁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도, 정치개념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현실 구성적 힘’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행위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법과 동일한 이론적 전제를 갖고 있다. 해석학적 접근의 장점은 언어와 현실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언어는 세상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구성하다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받아드리고 있다 이는 카알 마르크스(Marx)의 언명했던 ‘해석’과 ‘실천’의 차이를 극복하고, 해석 그 자체가 실천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데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29).
개념적 경쟁과 정치적 변화 사이의 연관성을 고려한다면, 개념에 대한 논의에 있어 “이러한 개념 정의가 해당 개념의 지배적인 사용을 올바르게 지시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개념적 변화가 정치인식과 행위양식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할 수 있는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다수의 사회과학자와 언론인들이 장기간에 걸쳐 이러한 개념의 틀 내에서 우리의 정치적 삶을 해석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특권엘리트, 일반시민, 그리고 하층민들의 정치인식과 행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새롭게 제안된 개념적 변화를 사실상 보장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회 분파들이 궁극적으로 그러한 개념적 수정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의 질문들이 던져질 수 있을 것이며(Connolly 1993, 205), 이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개념적 수정가 정치적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개념의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삶을 ‘재구축’(reconstruction)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연관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면, 각 학문분과를 따라 혹은 분과학문 내에서 일어나게 되는 개념적 논쟁의 정치적 의미와 중요성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논지가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사회과학자들은 자신이 생각하기로 ‘책임감의 정치’를 재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이념을 인정하고 지지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요 정치개념이 ‘본질적으로 논쟁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념적 수정을 둘러싼 논쟁 그 자체가 다분히 경쟁적이며, 담론경쟁의 민주적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새로운 개념 정의가 지배력을 발휘하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에도 또 다른 견해가 도전하면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확장해가는 것이 본질적으로 경쟁적인 상황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자가 개념적 경쟁에 특정 입장에 대한 지지를 표하면서 개입한다는 것이, 어떤 하나의 합의를 이끌어 내어 경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개념적 논쟁 과정에서 특정 입장을 천명하고 나섬으로써 우리의 정치가 ‘책임성’과 ‘인간에 대한 존중’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적 논쟁에 사회과학들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주요 정치적 개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사회과학적 연구가 문제수립 단계에서부터 심각한 곤란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이 문제’라고 언급한다는 것은, 어떤 바람직한 상태와의 거리감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러한 바람직한 상태에 대한 언명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설정할 수 없다. ‘정상’(正常)과 ‘비정상’의 구분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정상인지’에 대한 기준이 존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개념적 논쟁을 둘러싼 일련의 지적 노력 또한 정치적 행위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사유방식과 행위양식을 인식론적 심층에서 규율하는 또 다른 권력행위로서 개념적 수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누군가 공자(孔子)에서 “정치를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물었을 때, 그는 “이름을 올바르게 붙이는 일이다”(正名)라고 했다는데, 올바른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은 동서양을 떠나 그만큼 실천적인 일이었음 선현들은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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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여기서 ‘인식론적 전제’란, 특정 개념에 내장되어 있는 암묵적인 규범이나 가치판단을 의미한다. 약간 극단적인 비유를 한다면 정치담론은 철도 위를 오가는 기차(콘텐츠)와 같은 것이라면 인식론적 전제는 그러한 기차의 방향을 규정하는 철도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차는 궤도 위에서만 달릴 수 있듯이, 정치담론 또한 인식론적 전제 위에서 이동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퓨코(M. Foucault)가 사고의 준거틀 개념로서 사용했던 에피스테메(episteme)나 쿤(T. Kuhn)의 패러다임(paradigm)과 유사한 의미로, 사유나 언술행위를 일정한 방향으로 규율하는 일종의 준거들(referential framework)로서 사용하고 있다. 본 논의에서도 인식론적 전제와 ‘인식론적 준거틀’을 특별한 의미상의 차이 없이 함께 사용하고 있다.
2) 사유와 행위의 관계는 아렌트(H. Arendt)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 아렌트에게 사고는, 행위와 함께 세계로 개입해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범주로 이해되고 있다. 아렌트에게 사고하지 않음(thoughtlessness)은 우리 시대 가장 현저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무한한 악’(infinite evil)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행위의 근거를 규정하는 영역으로 사고를 이해한다(Arendt 1958, 5).
3) 버스전용차선을 무시해도 아무런 제재가 없다면 이 바쁜 시대에 누가 전용차선제를 지키겠는가! 전용차선제가 철저히 지켜지기 위한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철저한 적발과 엄격한 처벌이다. 만약 전용차선제를 위반할 경우 10중 8, 9가 걸릴 뿐 아니라, 그렇게 걸렸을 경우 엄청난 벌금을 감수해야 한다면, 전용차선제는 꽤 철저히 준수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식당과 손님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식당은 음식맛과 서비스로 승부한다. 만약, 손님들이 음식 맛이 좋고 서비스가 괜찮은 식당을 선호한다면, 음식맛이 없으면서 괜히 실내치장에만 신경을 쓴 식당들은 머지않아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식당주인들은 좋은 음식과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손님들은 그만큼 높은 수준의 음식과 서비스를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4) 이러한 논리는, 우리의 정치인들이 사적 이해에 급급하여 몰려다니는 정치모리배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자가 강조하는 ‘정치적 이해관계’는, 개별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원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현실적 요구라 할 수 있다.
5) 어느 정당의 공천을 받느냐가 선거당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의정활동 보다 중요한 것은, 공천결정자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리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무소속 보다 정당 후보의 당선율이 훨씬 높은 상황에서 소속정당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당원으로서 정당의 요구에 부합하는 행위방식을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다.
6) 합리적 선택이론이나 게임이론에 의해 행위론 역시 행태주의적 설명에 포함된다.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한국사회의 개혁문제를 다룬 연구물로는 김재한의 『합리와 비합리의 한국 정치사회: 맑은 물에도 정치가 산다』(서울: 소화, 1998) 참조.
7) 대표적인 것이 퇴계의 수양론이리라. 퇴계에 있어 수양론의 기본과제는 경(敬)의 실현(持敬 내지 居敬)으로 집약된다. 경(敬)은 마음을 주재(主宰)하여 안으로 심성(心性)의 도덕적 바탕을 배양하며(存養 내지 涵養), 밖으로 행동 속에서 악(惡)이 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반성하고 억제하는(省察) 수양론적 원리이다(금장태 1998, 10).
8) 필자의 지역주의 연구 이러한 관점에서 호남 지역주의의 강력함을 설명했다. 즉 1980년 광주사태라는 극적인 체험을 공유한 전라도 사람들은, 운명공동체적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신분적ㆍ계층적 차이를 넘어서는 수준의 강력한 지역집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최영진 1999).
9) 범주론(category theory)의 장점은 복잡한 사물들간의 관계를 명쾌하게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복잡한 세상을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범주론의 출발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이지만, 범주론의 구획과 경계의 정신이 정치세계에 구현된 것은 확정된 영토와 경계를 지니는 근대국민국가의 탄생에 의해서다. 사실상 근대학문은 이러한 범주론에 입각하여 동일성과 차이를 탐구하는 일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획과 일반화의 힘이야말로 범주론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범주내 이질성과 차이를 은폐하거나 억압한다는 점에서나 근대적 사유의 억압성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10) 탈경제적 사유를 강조하는 탈근대적 사유는 이런 맥락에서 범주론적 사고의 대척점에 서있는 탈범주론적 인식론이라 할 수 있다. 정치현실에서 탈범주론을 적용한다면, 기존 지역이나 국가와 같은 전통적 범주에서 벗어나려는 사유와 행위방식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지역주의는 범주론적 사고가 보여주는 한 극단이라 할 수 있다.
11) ‘태도가 달라지면 생각도 바뀐다’는 형태주의의 격언을 생각한다면, 인식론적 기반의 형성과 새로운 사유방식의 구축이 선후(先後)의 문제라기보다 상호작용하면서 강화되는 것이 아니냐 생각도 가능할 것 같다. 즉 어떤 새로운 인식론적 준거가 마련되는 과정은, 토마스 쿤(T. Kuhn)이 지적했던 ‘과학혁명’의 과정과 유사할 것이다. 기존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설명할 수 있는 반대사례와 증거들이 집적되면서, 어느 순간 새로운 패러다임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혁명적 과정이 연출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특정 패러다임이 지배력을 발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학문적 노력은 기존 패러다임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공리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존 패러다임과 전제를 벗어나는 논의나 주장을 이끌어 내기는 어렵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Kuhn 1970).
12) 물론 지배적 가치나, 관행, 제도를 통해 특정한 의제 설정(agenda setting) 자체를 어렵게 만듦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편견의 동원’(mobilization of bisa)으로서 ‘비결정’(non-decision)의 결정이 존재할 수 있으며, 비결정 그 자체가 권력의 또 다른 모습임을 몇몇 학자들이 지적하기도 하였다(Bachrach & Baratz 1970).
13) 정치현실과 이상의 구분(ideal vs. reality)과 묘사와 규범의 이분법(descriptive-normative dichotomy)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현실-묘사 vs. 이상-규범의 대응이 만들어질 수 있으나, 항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한스 모겐소(H. Morgenthou)의 고전적 현실주의(classic realism)의 경우 다분히 윤리적 판단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상기의 대응관계에 적용되지 않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Ashley 1984 참조).
14) 사실 이러한 의도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는지에 대해 확인하기 어렵다. 성공을 주장하는 쪽이 실증주의 학자들이라면, 실패를 강조하는 쪽은 정치학의 규범적 성격을 인정하는 반실증주의 정치이론가들이다. 실증주의자들은 정치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증대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규범론자들은 실증주의 정치학으로 인해 우리의 정치적 삶이 더욱 척박해졌다는 점을 들곤 있다. 이렇게 의견이 맞서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처럼 학문성취에 대해 상이한 잣대를 갖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미국정치학의 발전을 일종의 비극적 현상을 간주하는 연구로는 David Ricci의 The Tragedy of Political Science : Politics, Scholarship, and Democracy (1987)가 있다.
15) 개념을 조작적(operational)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정가능한 척도를 내장한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민주주의’ 개념을 ‘의사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공공결정에 참여할 권리보장’ 등으로 정의하고, 각 하위개념에 대한 계량적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 ‘의사표현의 자유’를 ‘인구수 대비 신문 혹은 잡지의 수’로 계량화하듯이 - 계량화할 수 있는 것이다. 개념의 본질과 조작화에 대해서는 Sartori(1984)참조.
16) ‘정치’에 대한 도구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은 아렌트(H. Arendt)나 스트라우스(L. Strauss), 울린(S. Wolin) 등 정치의 목적론적 성격을 인정하는 정치학자들에 의해 지속으로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17) 이런 점에서 근대사회의 도구주의적 정치관은 자본주의 사회인식에 발생하는 자본에 의한 인간소외 현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이 자본주의 경제원리에 의해 정치세계가 장악되어 있다고 비판했던 마르크스(K. Marx)의 유물론적 정치학(materialism)의 토대를 이룬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8) 패권에 기반한 억지가 얼마나 위력적일 수 있는지는 지난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이 보여준 일련의 행태에서 잘 드러난다.
19) 사실 어떤 사회건 해당 사회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경쟁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모종의 합의를 이루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주의 정치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목표와 지향가치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개혁목표와 가치에 대한 합의과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과정은 개혁담론의 재생산과 그러한 개혁담론을 주창하는 개혁세력의 재구성 문제로 연결될 것이다.
20) 『국회 생산성 높이기』란 제목의 책이 있다(임동욱ㆍ함성득 2000). 국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생산성 된다면, 권위주의체제의 의회가 휠씬 생산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목표/지향가치가 설정되지 않을 경우, 무엇을 말하는지를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21) 개념적 명료화의 실증주의 모델에 따르면, 모든 의미 있는 진술은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임. 어떤 개념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진술들은, 규정적(defining) 기준의 어느 하나가 결핍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개념을 적용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 개념과 관련하여 ‘분석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이 사용되는 모든 다른 진술들은 그 개념이 적용되는 조건들이 이러한 다른 요건의 발생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개념과 관련하여 ‘종합적’이다. “모든 총각은 미혼”이라는 진술은 그에 대한 부정이 우리가 말하는 “총각”이라는 의미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분석적’이며, “모든 총각은 상심해 있다”는 진술은 경험적 탐구를 통해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종합적’이다(Connolly 1983, 17-18).
22) 다른 영역에서 사용되는 경우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주전자’나 ‘약’이라는 개념을 묘사에 도입할 때, 우리는 어떤 용도나 목적의 관점으로부터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무섭거나, 위험하거나, 공포를 느낀다고 묘사하는 것은, 잠재적인 위협을 고지한다는 관점에서 그러한 용어가 선택되고, 그러한 용어는 묘사할 상황의 특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3) 이러한 경우 ‘실수’라는 용어에서 쉽게 확인된다. 우리가 ‘실수’라고 말하는 수도 없이 많은 경우에, 우리는 광범위한 규범적 관점으로부터 행동을 특성화한다. 실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행위자를 용서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조건이 만족된다는 점에서 그러한 행위는 어떤 기준과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행위의 특성과 의미는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용서할만한 그런 종류의 행위라는 관점에서 ‘실수’라는 용어가 형성되고, 또한 어떤 행위가 이러한 세부사항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실수란 말을 ‘행위자를 용서할 이유가 있는 어떤 잘못된 행동’을 묘사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약속을 어겼다고 말하는 것이 규범적이라는 것은, 약속을 어긴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 결론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묘사하는데 있어 어떤 초점이나 관점이 없다면, 즉 그런 개념들을 구체화하고 반영하는 어떤 도덕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개념 자체가 형성될 수 없고, 실수란 이름이래 동일한 특성을 가진 행동들을 묶을 수도 없을 것이다(Connolly 1983, 24).
24) 인과성에 입각한 책임윤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윤리적 사고의 근간을 이룬다.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이러한 인과성에 입각한 책임 마저 방기하도록 하는 실증주의적 정치인식의 문제이다. 이러한 책임을 미래의 존재로까지 확장시켜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한스 요나스(Hans Jonas)이다. 요나스에게 책임이란 ‘살아남아야 하는 당위로서의 의무’이며, 미래에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만큼이나 분명한 것으로 미래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Jonas 1993).
25) 행위에 대한 책임윤리(action-responsibility)는 지위와 신분에 따른 의무(status- obligation)의 대용관계와 짝을 이룬다. 행위에 대한 책임윤리가 준수되지 않은 사회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신분과 지위에 따른 의무윤리도 방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구호가 공헌한 까닭도 그러한 의식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26) 언어행위이론에 있어 맥락을 중시하는 발상은 이미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구조 속에서 언어가 부여된다는 사고에서 그 전형을 보여주었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단어는 문장구조 속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한다. ‘눈’이란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눈 내리는 겨울저녁”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雪)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얼굴에 박혀 있는 눈(目)이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어문법을 깨우치지 못했거나, 다른 경험세계를 가지고 있는 외계인이 틀림없다.
27) 이러한 본질주의와 그로부터 결과하는 배타적 성향은, 왜 우리나라에서의 개혁이 지나치게 ‘배제적’ 경향을 띠고 있는지를 인식론적 차원에서 설명해 준다. 정치개혁이 ‘개선’을 통해 ‘진보’를 꿈꾸는 것이라며, ‘배제’의 규칙으로 작용할 것이니라 ‘포용’과 ‘협력’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어야 함에도 우리의 개혁이 지나치게 배제적으로 구현된 것도 개혁주도세력이 암묵적으로 전제한 도덕적 우위성 때문이라 생각된다.
28) 물론 이런 경우에도,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나 농민이 양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탈계급적 주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사회 전체의 이익’인지 ‘요구되는 양보를 통해 그러한 사회 전체의 이익이 구현될 수 있는지’ 그리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다른 계층과 계급이 자신의 지분에 상응하는 양보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 전체가 동의할 수 있는 국가이익이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도 집단간 차이를 억압할 수 있는 다분히 본질론적 사고이다.
29) 사회현상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거리로 박차고 나을 수 없었던 책상물림 학자들에게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르게 ‘해석해’ 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일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언명은 지독한 독설이었다(Marx 1963, 83). 그러나 ‘해석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담화이론(discoures theory)은 이들의 도덕적 부담감을 어느 정도 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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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최영진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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