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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시대와 자연학적 인식-최한기

온울에 2008. 5. 7. 10:13

목 차

1. 최한기 철학의 문제 의식
2. 소통[通]과 인식
3. 인식의 세 가지 요소
4. 본유 관념의 부정
5. 지식의 기원
6. 감각과 사유의 종합
7. 증험
8.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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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漢陽大學校 韓國學硏究所 
학술지명 韓國學論集 
ISSN 1229-196X 
권 36 
호  
출판일 2002. . .  




최한기의 시대 인식과 자연학적 인식론


김용헌
2-058-0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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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한기 철학의 문제 의식
최한기는 자신이 살던 19세기 전반기를 동서 문명이 교류하는 시대로 파악하고, 서구의 제도와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 선진적인 사상가이다. 최한기의 현실 인식은 기본적으로 현실은 변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파악한 변화란 각 나라의 생산물이 유통되고 여러 가르침이 천하에 뒤섞였으며, 육지의 시장이 변하여 바다의 시장이 되고 육지의 전쟁이 변하여 바다의 전쟁이 된 현실이었다. 최한기 철학의 문제 의식은 그러한 변화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제대로 대처하자는 것에서 출발한다. 변화된 현실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변한 것을 가지고 변한 것에 대처해야 한다는 이변어변(以變禦變)의 방법이다.1) 변화된 세계 정세 속에서는 옛것에 대한 고집이 아니라 무엇인가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식의 전환, 그것은 곧 우리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서양의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최한기가 본 그 시대는 바다로 배가 두루 오가고 책이 서로 번역되며 보고들은 것이 전달되고 있는 시대였다. 더욱이 그의 눈에 비친 서구의 법제(法制), 기계, 그리고 여러 생산물은 조선의 것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길이라는 것이 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2) 최한기의 서구 문물 수용론은 서구의 법제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북학파 학자들의 북학론보다 한 단계 더 진전된 인식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진전은 일련의 실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실용 의식이 심화되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용 의식은 최한기에 이르러 예교(禮敎)와 대비 속에서 한층 명료해졌는데, 다음이 그것이다.

필경 이기고 지는 것은 풍속이나 예교에 있지 않다. 오직 실용에 힘쓰는 사람은 이기고 헛된 글을 숭상하는 사람은 지며, 남에게 취하여 이익을 얻는 사람은 이기고 남을 그르다 하여 고루한 것을 지키는 사람은 진다. 서방의 나라들은 기계의 정교함과 무역의 이득 매문에 비로소 전 세계를 두루 다니게 되었다. … 측량하고 계산하는 학문 그리고 방직기(화력과 수력으로 바귀를 돌려 천을 짬), 풍차(목화씨를 제거하는 기구), 배와 대포 등의 기계는 더더욱 실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천하에 만연함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것을 다 받아들이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3)

최한기의 시대 인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위 인용문은 반세기 뒤에 등장하는 개화사상가들의 문제 의식을 선취하고 있다. 실로 그의 문제 의식은 주자학적 풍속과 예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았고 서구의 실용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있었다. 물론 그가 그 시대 서구 열강들의 동양진출이 지닌 자본주의적 본질, 나아가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진행되는 세계사의 전개 과정에서 민족의 생존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 기술과 그에 기반을 둔 경제력 및 군사력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의 시대 인식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이기고 지는 것은 풍속이나 예교에 있지 않고 실용적인 과학기술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풍속이나 예교에 있지 않다는 최한기의 선언은 그 당시 조선 사상계의 주류였던 주자학과 일정한 선을 긋는 단절의 의미를 지닌다. 윤리에서 실용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최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존의 학문이 지닌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그 학문이 인간의 마음에만 매몰된 학문이라는 데 있다. 최한기에게 특히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공격을 받았던 것은 주자학이다. 주자학은 도덕적 실천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음의 공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양명학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두 철학 체계는 도덕적 본체인 성 또는 도덕적 인식 능력인 양지를 마음속에 설정했던 관계로 인식과 실천 모두에서 마음이 강조되었고, 그만큼 물질적 객관 세계는 소흘히 될 수밖에 없었다.4)

주자학에서 학문 방법론으로 제시한 궁리설이 객관주의적이고 주지주의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양명학의 치양지설과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심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은 주자학의 기본적인 문제 설정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다. 주자학에서는 인(의예지)을 내용으로 하는 도덕적 본체(리 : 천리, 천명, 태극)와 그 본체를 실현하는 도구(기)를 이론의 기본 축으로 설정하고, 그 도구가 그 본체를 완벽하게 실현해 내는 것을 선으로 규정하였다. 인이라는 도덕적 본체는 그 자체로 순선한 도덕적 가치이기 때문에, 주자학의 존재 분류표에서는 그 가치를 얼마나 실현해내느냐에 따라서 현실 존재들의 가치 서열이 매겨진다. 이를테면 그것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인간이며, 그 중에서도 그 가능성을 언제나 실현시키는 존재가 성인이다. 반면에 사물은 그 가치 가운데 일부만을 실현시키거나 전혀 실현시킬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차이는 바로 기(질)의 편전통색(偏全通塞), 청탁수박(淸濁粹駁)의 차이가 그 원인이다. 치우치고 막힌 기, 탁하고 잡된 기(질)는 도덕적 본체를 제대로 실현시킬 수 없는 기이다. 이렇게 되면 기는 리를 실현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리의 실현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정리를 하자면 도덕적 본체인 리의 보편성과 리 실현의 장애물인 기의 제한성, 그리고 장애물(리의 실현을 방해하는 기)의 도구(리를 실현하는 도구로서의 기)로의 전환과 이를 통한 도덕적 본체의 완전한 실현, 이것이 바로 도덕적 삶을 지향하는 주자학의 기본적인 문제 설정이다.5) 천명,태극, 본연지성, 기질지성, 이일분수(理一分殊), 이동기이(理同氣異), 이통기국(理通氣局) 등 주자학의 기본 개념이나 원리들은 위와 같은 문제 설정 속에서 등장한 것들이다. 그리고 존심, 양성, 성의, 정심, 거경, 궁리 등의 심학적 공부는 바로 이와 같은 주자학의 문제 설정 속에서 의미를 갖는 공부 방법이다.6)

이와 같은 심학적 학문 방법에 대해 최한기는 "만약에 이기적인 욕망에 가리웠기 때문에 내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리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평생동안 힘을 써서 이기적인 욕망을 없애 하루아침에 환하게 관통하기를 바란다면 선가(禪家)의 돈오설에 가까울 것이다"7) 라고 비판하였다. 주자학의 학문이 불교의 돈오설에 가깝다고 한 비판은 지나친 감이 있긴 하지만,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용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 의식을 지녔던 최한기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최한기가 위 인용문에서 실용적인 것이라고 하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 것이 측량하고 계산하는 학문, 방직기, 목화씨를 제거하는 기구, 배와 대포 등은 곧 과학 기술 내지 그 산물이다.

최한기가 접한 서양 근대의 과학 기술은 마음만 들여다보는 공부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바깥의 세계를 탐구해서 그 세계가 지닌 물리적 성질과 그 법칙, 즉 수학적 인과 법칙을 알아낼 때 가능한 지식 체계이다. 과학 기술의 지식은 마음 어느 곳에도 있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학문, 즉 심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자연학, 즉 객관존재학이었다.8) 최한기가 주자학의 공부론인 궁리설을 비판하고, 그것의 대전제, 즉 마음속에 모든 리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원리를 부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가 인식해야 할 대상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인간, 사회였다. 최한기 철학에서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마음속에 있는 도덕적 본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및 인간의 성질 및 그 법칙을 정확하게 인식할 것인가에 있었다. 마음에는 도덕적 본체는 물론 그 어떤 선험적인 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참다운 리는 객관 세계의 리라는 것, 따라서 참다운 인식은 객관 세계를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주관적 인식이 아니라객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인식하는 객관적 인식이라는 것이 최한기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 설정이다.

2. 소통[通]과 인식
서양 철학에서 인식론이란 참다운 지식이 무엇이며 그러한 지식은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분과로서 지식의 본성, 기원, 확실성, 범위 등을 따지는 지식에 대한 이론이다. 결국 인식론이란 인간의 앎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앎이란 그것의 기원이 무엇이든 인간의 마음(mind) 속에 형성된 관념의 형태를 띤다.9) 그러나 이러한 기준으로 최한기의 인식 이론을 분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관념이나 인식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말을 그의 이론에서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은 인식에 관한 문제들이 최한기와 서양 철학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이라는 말과 비교적 근접해 있는 지(知)만 하더라도 인식의 능력(아는 능력)과 인식의 결과(지식)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지식이라는 것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갖는가 하는, 즉 서양 인식론에서 말하는 지식에 얼마나 근접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서양 철학에서 통용되는 인식론의 기준으로 최한기의 인식론을 제대로 그려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하기만 한다면, 최한기의 철학 이론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향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서양인식론의 틀로써 최한기의 인식론을 분석하는 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최한기 철학에서 인식에 근접한 말을 찾자면 통(通)이라는 말이 있다 ‘통했다’는 말이 ‘막혔다’[塞]는 말과 상대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통의 일차적인 의미는 ‘둘 사이에 막힘이 없다’는 의미이다. 동양철학사에서 자주 거론되어 왔던 통의 용례로는『주역』의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느끼어 드디어 통한다(寂然不動 感而遂通)"는 언급이 있다. 주자학자들의 일반적인 해석에 의하면, ‘적연부동’은 마음이 작용하지 않는 상태[未發]를 지칭하며, ‘감이수통’은 마음이 어떤 대상과 일정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작용을 하는 상태[已發]를 지칭한다. 느낀다[感]는 것은 마음과 대상의 일정한 접촉을 뜻하고 통한다[通]는 것은 마음과 대상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塞]이 사라진 상태를 뜻하므로, ‘감이수통’은 "마음이 대상과 접촉하여 드디어 그 대상과 소통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최한기의 통은 그 저변에 기학적 세계관을 깔고 있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의 통이 서양 철학 일반에서 말하는 인식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요 저술 중의 하나인『신기통(神氣通)』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말하는 통은 일차적으로 신기(神氣)의 통(通)이다. 최한기는 통의 근본에 대해서 "나의 신기가 상대의 신기에 통(通)하고 상대의 신기가 나의 신기에 도달[達]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0) 최한기의 통은 나와 상대 사이에 이루어지는 (신)기의 상호 소통이다. 그러므로 통이라는 것은 단순히 감각 기관과 뇌의 작용을 통해 뇌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상, 관념, 그리고 지식의 형성과는 맥락을 달리한다.

최한기가 말하는 신기는 기의 다른 표현이다. 신이라는 것은 기의 다양한 능력과 작용을 의미할 뿐이다.11) 그는 천지에 가득 차 있는 기를 천지의 기 또는 천지의 신기라고 하였다.12) 이 기가 모여 구체적인 물질, 즉 형질을 이룸으로써 만물이 생겨나는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단순히 형질만이 아니라 (신)기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갖가지 다른 만물은 형질과 신기의 합인 것이다.13) 최한기가 말하는 통이라는 것은 결국 천지의 신기, 인간과 사물 속에 있는 신기(형체의 신기)들의 소통인 셈이다.

인간의 신기는 정신 작용의 주체이다. 최한기는 "옛날의 이른바 심체라고 한 것은 곧 신기이다"14) 라고 하였다. 전통적으로 정신 활동의 주체를 의미했던 심을 신기로 이해했던 것이다. 전통적인 심과 최한기의 신기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지만, 최한기 철학 체계 안에서 인간의 신기가 정신 작용의 주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신기는 밝음[明]의 능력과 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밝음의 능력은 신(神)에서 생기고 힘은 기에서 생긴다.15) 이 밝음의 능력인 신에서 인식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최한기가 말하는 통이란 일차적으로 신기와 신기의 소통을 의미하며, 이차적으로는 인식을 의미한다. 인간의 신기는 밝음의 능력, 즉 인식의 능력을 지닌 존재이므로 인간의 신기가 그 무엇과 통했다는 것은 "내가 그 무엇을 인식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나의 신기가 상대의 신기에 통(通)하고 상대의 신기가 나의 신기에 도달[達]하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매우 복합적이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상대를 인식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대상을 인식하지 못했는데, 그 대상과 통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 나와 그 대상은 막혀있는 것이지 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통은 인식의 개념을 포괄하는 소통, 즉 넓은 의미의 인식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할수 있다.16)

3. 인식의 세 가지 요소
통했다는 것은 그 어떤 것들이 서로 통했다는 의미이므로 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둘 이상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통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통이므로 하나의 존재만으로는 통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앞에서 본 것처럼 최한기는 통의 근본에 대해서 "나의 신기가 상대의 신기에 통(通)하고 상대의 신기가 나의 신기에 달(達)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의 신기가 주어일 때는 ‘통’이라는 서술어가 사용되었고, 상대의 신기가 주어일 때는 ‘달’

이라는 서술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존재 A의 신기와 존재 B의 신기가 서로 통한다고 하더라도 그 통은 양자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어느 한쪽이 주체가 되고 다른 한쪽은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그 주체는 나의 신기이다. 그래서 최한기는 통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논할 때는 통의 주체를 나의 신기라고 한 반면에, 인식 대상에 대해서는 신기라는 용어를 생략한 채 그냥 물(物)이나 사(事)라고 하였다.

사물도 없고 일도 없는데 신기만 부질없이 작용하면 통하는 것이 없으며, 일과 사물은 있는데 신기가 작용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없다. 일과 사물이 있고 신기가 따라서 작용해야만 바야흐로 통하는 것이 있게 된다.17)

위 인용문에서 최한기는 신기와 사물 · 일을 통의 전제로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 신기는 마음[心]을 가리킨다면 사물과 일은 마음 바깥에 있는 존재와 마음 바깥에서 발생하는 일을 의미한다. 사물과 일은 마음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시 말해 마음 바깥에(서) 존재하거나 발생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객관적인 존재이다. 어째든 통, 즉 인식이라는 것은 인식

하는 마음과 인식되는 대상 어느 하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반드시 마음이 있고 객관 대상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대상에 따라 작용해야 비로소 그 둘은 통할 수 있다. 마음과 사물이 접하지 않으면, 마음은 마음이고 사물은 사물이어서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 둘이 접해야 마침내 통이 이루어지고 인식이 이루어진다.1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한기가 설정한 인식의 대상이 마음 안의 세계가 아니라 마음 바깥의 세계라는 점이다. 마음 안에서 바깥으로의 전환, 그것은 곧 심학에서 객관존재학으로의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9)최한기의 인식은 주체인 나의 신기와 대상인 사물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기와 대상이 만나면 인식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그 만남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를 매개해 주는 매개체, 즉 감각 기관이 필요하다. 최한기 인식론에서 제규(諸竅)와 제촉(諸觸)을 통하지 않는 대상의 인식은 불가능한데,20) 제규와 제촉이 곧 감각기관에 해당한다.21) 이에 대해 최한기는 "한 사람의 몸에는 이미 통하는 신기가 있고 또 통할 수 있는 제규가 있으며, 몸 밖에는 통을 경험하는 만물이 있어 각기 신기를 드러내고 있다"22)라고 하였다. 나의 신기와 사물의 신기가 통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몸에 있는 감각 기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 있는 신기와 감각 기관, 그리고 몸바깥에 있는 만물이 인식에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인 셈이다.

하늘이 낸 사람의 몸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으니, 신기를 통하는 기계이다. 눈은 색을 드러내는 거울이고, 귀는 소리를 듣는 관이고, 코는 냄새를 맡는 통이고, 입은 드나드는 문이고, 손은 잡는 도구이고, 발은 움직이는 바퀴이다. 모두 한 몸에 실려 있고, 신기가 이들을 주재한다. 제규와 제촉으로 인정과 물리를 거두어 모아 신기에 물들이고, 발용할 때 안에 쌓인 인정과 물리를 제규와 제촉을 거쳐 시행하니, 이것이 곧 타고난 몸을 극진히 하는 대도이다.23)

최한기에게 인간의 몸이란 신기를 통하는 기계이다. 몸에는 눈 귀 코 입과 같은 감각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감각 기관에 의거하지 않고는 인정(인간의 실정)과 물리(사물의 이치)를 인식할 수 없다. 그만큼 감각 기관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눈 귀 코 입과 같은 감각 기관은 단순히 외부의 대상을 안으로 받아들이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음 안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을 바깥에 시행할 때도 역시 반드시 거처야하는 관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몸 및 감각 기관은 감각 기관인 동시에 시행 기관인 것이다. 그만큼 최한기의 통이라는 것은 매우 복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뿐만 아니라 손으로 잡고 발로 걷는 것까지도 통의 범주에 포함된다. 아울러 이 인용문에서는 기억의 기능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물들임, 즉 습염이 그것이다. 감각기관을 매개로 바깥 사물에 통한다는 것은 그 사물의 리를 통달하는 것이고 그 사물의 리를 마음(신기) 안으로 거두어 모아 마음에 새겨 넣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통의 과정이 어느 정도 분명해진다. 통의 과정은 외부 대상과 감각 기관의 만남, 외부 대상의 이치에 대한 신기의 인식, 신기의 기억이라는 인식의 단계와 그 기억을 감각 기관을 거쳐 외부 세계에 적용하는 시행의 단계로 구분된다. 아무튼 이목구비를 비롯한 감각 기관은 바깥 세계의 인정과 물리를 받아들이는 문호로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감각 기관의 감각 작용이 없다면 인식이 불가능하다.24) 인식해야 할 대상이 마음 안에 내재하는 리가 아니라 밖의 세계에 있는 객관 사물이기 때문에 감각 기관의 작용으로부터 인식이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상으로 보자면 통의 주체인 인간의 신기, 통의 대상인 외부의 사물, 그리고 양자를 매개하는 감각 기관이 최한기 인식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식의 요소인 것이다.

4. 본유 관념의 부정
최한기가 인식 주체로 설정한 인간의 신기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최한기가 "옛날의 이른바 심체라고 하는 것은 곧 신기이다"25)라고 말했다는 것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최한기가 말하는 신기와 주자학의 심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자학의 학문 방법론인 궁리설의 기본 전제는 "인간의 마음속에 온갖 리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최한기는 "궁리의 학문은 모든 일과 모든 존재에는 리가 있고 사람의 마음도 모든 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리가 없다고 여긴다"26)라고 하였다. 심성론의 영역에서 이른바 ‘구중리’(具衆理)나 ‘성즉리’(性卽理)와 같은 말로 정식화되는 이러한 기본 전제가 무너진다면, 궁리설은 그 기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한기는 궁리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그 기본 전제를 공격하는 데 주력하였다.

최한기가 본 마음은 그 본체가 순수하고 맑아서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다.27) 그것은 마치 맑은 우물물과 같아서 그 어떤 색도 띠지 않는다. 우물물이 색을 띠는 것은 색이 첨가되었기 때문인데, 색이 첨가된 것은 우물 물의 경험이다.28) 한편 그는 마음을 거울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거울이 만물을 비춘다고 해서 만물의 상이 거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거울이 대상을 비추듯이 마음도 대상을 인식할 뿐 만물의 리가 본래부터 마음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거울이 물건을 비추는 것은 티끌과 때에 가리우지 않았다면 천하의 사물을 다 비추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것이 어찌 만물의 상(像)이 거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인가? 그 응고된 형질이 기에 가까워 밝게 비추니, 사물이 이르면 스스로 나타낼 따름이다. 마음이 사물을 대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다만 일에 따라 헤아릴 수 있는 것이지 만물의 리가 본래부터 마음에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29)

최한기가 우물과 거울의 비유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본유 관념의 부정이었다. 마음의 본체는 본래 텅 비어 있어서 그 어떤 이치도 갖추고 있지 않다. 다만 거울이 사물을 비추고 우물이 색깔에 물들듯이 마음도 인식을 하고 지식을 쌓아 갈 수 있을 뿐이다. 최한기에 의하면,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는 맹자의 언급이나 "온갖 리를 갖추고 만사에 응한다"고 한 주희의 언급은 온갖 사물의 리가 본래부터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지닌 추리하고 판단하는 추측(推測)의 작용, 즉 사유의 작용을 찬미한 것일 뿐이다.30)

이렇게 되면 경험이나 학습과 관계없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능력인 양지 및 양능은 자연스럽게 부정된다. 맹자의 양지설을 발전시킨 왕양명의 치양지설에 의하면,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은 도덕적 실천에서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객관적인 공부는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부모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일일이 공부하지 않아도 양지의 자연스러운 발현만으로 부모에 대한 섬김이 충분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양지는 배우지 않고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의 도덕적 본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명학에서 중요한 것은 양지의 실천, 즉 치양지이다.

최한기에 의하면 양지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거나 경험 없이 생겨나는 능력이 아니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는 것은 실제로 여러 해 동안 보고들은 것, 그리고 이에 기초한 추리와 판단에서 나온다. ‘사랑과 공경이 양지와 양능에서 나온다’고 한 것은 단지 그 ‘습염(習染, 물들고 익힘, 기억)’ 이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지, 습염 이전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31) 이처럼 최한기는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인식의 대상인 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리를 자각할 수 있는 선험적 인식 능력, 즉 양지도 없다고 보았다. 그만큼 그의 철학에서 경험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다

5. 지식의 기원
최한기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 안에 본래부터 만물의 리가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리를 자각할 수 있는 양지와 같은 능력도 없다면, 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제 3의 길이어야 한다. 마음만으로 지식의 형성이 불가능하다면 지식의 일차적인 원천은 일단 외부 대상일 수밖에 없고,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감각 기관과 외부 대상과의 만남, 즉 감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32) 최한기는 경험을 통해 객관 존재의 리를 인식한다는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일관되게 주장하는데, 다음의 인용문이 지식과 경험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신기는 지각의 바탕이며 지각은 신기의 경험이다. 그러므로 신기를 지각이라고 여겨서도 안 되며 또 지각을 신기라고 해도 안 된다. 경험이 없으면 한갖 신기만 있을 따름이니 경험이 있어야만 신기가 지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경험이 적은 사람은 지각 또한 적고 경험이 많은 사람은 지각 또한 많다.33)

지각(知覺)은 글자그대로 앎과 깨달음이라는 말인데, 어떤 대상을 알고 깨닫는, 즉 인식하는 작용과 그 결과를 아울러 지칭한다. 다만 위 인용문의 맥락에서는 지각이 인식의 결과에 무게 중심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인식이나 지식이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다. 최한기가 신기와 지각의 구분을 애써 강조한 것은 바로 인식의 과정에 경험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 있어야만 신기가 지각을 갖게 된다"는 말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최한기 인식론에서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시작되며, 따라서 지식의 기원은 경험인 셈이다.

최한기는 ‘기의 경험’[氣經驗]과 ‘마음의 경험’[心經驗]을 알아야만 학문과 가르치는 법의 대소와 허실을 변별할 수 있다고 하여 양자의 구분을 강조하였다.

기의 경험은 처음에는 천지와 사람과 사물의 기로부터 경험을 얻어서 신기에 간직했다가, 천하의 사람과 사물의 기에 경험을 적용하여 앞뒤의 맞고 안 맞음으로 경험을 삼는다. 마음의 경험은 역상(曆象) 수학 지지(地志)를 멀고 급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물류(物類)와 기계를 비천하고 자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소홀히 한다. 그럼으로써 다만 마음을 주로 하여 사물을 경험하니 방문 안의 견해를 천하의 넓음이라 생각하고, 한 구석에 맞는 것을 모든 일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34)

이와 같이 최한기는 인간의 경험을 기의 경험과 마음의 경험으로 나누는데, 최한기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것은 물론 기의 경험이다. 마음의 경험은 마음의 생각, 즉 주관적인 편견을 외부 세계에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경험이지, 외부 세계에서 비롯되는 경험, 즉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경험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의 경험은 역상(曆象), 수학, 지지(地志), 물류(物類), 기계와 같이 인간의 마음 바깥의 존재 및 그 존재에 대한 지식을 소홀히 한다. 반면에 기의 경험은 글자그대로 기에 대한 경험, 즉 기로 이루어진 외부 대상에 대한 경험이다. 외부 대상과의 만남, 즉 감각에 의한 경험이 곧 기의 경험이다. 최한기가 지식의 기원으로 제시한 경험은 기의 경험, 즉 감각 경험이었다. 이런 점에서 최한기의 인식론을 경험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하다.35)

최한기에 있어서 참다운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감각 경험이 없다면 인식은 성립할 수가 없다.36) 경험을 떠나서 얻어지는 지식은 공허할 뿐이다. 최한기의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주된 관심사는 도덕 실천을 위한 도덕성의 자각이나 심성의 수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객관 존재의 리를 습득하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최한기는 위 인용문에서 마음의 경험이 역상, 수학, 지지(地志), 물류(物類) 기계를 소흘히 하고 있다고 비판을 했던 것이다.

최한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추리하고 판단하는 능력도 날 때부터 지닌 능력이 아니라 경험이 쌓여감에 따라 생겨나는 것으로 보았다.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때 마음이란 그 안에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만이 있을 뿐이다.37) 보고 듣는 견문이 쌓이고 경험이 축적되면, 비로소 추리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생긴다.38)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얻은 지식과 사용한 추측은 모두 내가 스스로 얻은 것이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 아니다"39) 라고 말한다.

또한 최한기는 인간의 측은지심과 같은 도덕적인 마음, 희노애락과 같은 일반적인 감정, 그리고 성적 욕구까지도 경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측은지심에 대해서 최한기는 "과거에 사람이 무거운 것에 깔리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들어서 알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깔리거나 빠지는 재난에 대하여 듣지 못한 사람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아도 측은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40) 이는 측은지심을 인(仁)의 발현이라고 이해하는 주자학의 심성론과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최한기에게 있어 인은 더 이상 인간이기만 하면 누구나 타고나는 도덕적 본성이 아닌 것이다.

최한기는 희노애락에 대해서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갖게 되는 것이지 인간이면 누구나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41) 이뿐만 아니라 그는 이성에 대한 욕구까지도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이성에 대한 욕구는 어릴 때부터 예쁜 여자를 보거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신기에 습염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배우지 않아도 될 수 있고 힘쓰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42) 이처럼 최한기는 측은지심과 같은 도덕적인 마음, 회노애락과 같은 일반적인 감정, 이성에 대한 욕망, 그리고 추측과 같은 사유 작용까지도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인식론에서 경험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6. 감각과 사유의 종합
최한기가 아무리 감각 경험을 중시했다고 하더라도 감각 기관에 의한 감각 경험만으로는 완전한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감각 경험만 있다면 내용은 있으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감각 내용을 분별하고 헤아리는 사유 작용이 가해져야만 감각 내용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인식 주체인 신기의 판단 작용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최한기는 "하늘이 낳은 사물은 각기 형질을 갖추었으니, 빛은 눈에 통하고 소리는 귀에 통하고 맛과 냄새는 입과 코에 통하니, 이것이 곧 형질의 통이다. 그리고 이 형질의 통을 따라 추측의 통이 생긴다"43)라고 하였다. 제규와 제촉에서 통하는 것을 따라 인정과 물리를 거두어 모으되, 하나하나 우열을 비교하고 두 번 세 번 성패를 시험해야 신기의 밝은 지각이 점점 열리게 되는 것 이다.44)

최한기는 인식의 과정을 제규 제촉이 외물을 감각하는 단계와 인간의 신기가 감각 내용에 대해 사유하는 단계로 나누었다. 감각의 단계는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단계이며, 사유의 단계는 받아들인 감각내용을 비교, 종합, 판단하는 단계이다. 받아들여진 감각 자료들은 우열을 비교하고 옳고 그름을 시험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올바른 지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최한기는 감각의 단계를 형질의 통이라 하고 사유의 단계를 추측의 통이라고 하였다. 형질의 통은 감관의 감각 작용이고 추측의 통은 마음의 판단 작용인데,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는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하다. 형질의 통을 통해 얻은 감각 자료는 추측의 통을 거쳐야만 의미를 지니게 되며, 추측의 통을 통해 얻은 판단 결과는 형질의 통을 전제해야만 공허하지 않다.

형질의 통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부 대상이 지닌 감각적 성질에 대한 감각(sensation) 내지 지각(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외부 대상이 지닌 물질적 성질을 감각 기관이 포착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형질의 통이다. 그러나 형질의 통이 반드시 감각 기관의 작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감각 기관의 작용은 반드시 신기가 주재한다. 이에 대해 최한기는 "대저 듣는 것은 귀에서이지만 듣는 주체는 신기요, 보는 것은 눈에서이지만 보는 주체는 신기이니 듣는 것과 보는 것이 비록 경로는 다르다 하여도 그 주체가 신기임은 같다"45)라고 하였다. 제규와 제촉이라는 감각 기관은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 즉 형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신기가 침투해 있는 존재이다. 최한기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단순히 형질(물질)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몸 전체에는 신기가 관통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말하자면 몸의 부분마다 그 부분의 신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눈에는 눈의 신기가 있고, 코에는 코의 신기가 있다는 것이다.46) 그러므로 신기와 단절된 체 육체적인 제규와 제촉만으로는 감각이 불가능하다. 형질의 통이 감각 기관의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틀림없지만 이 감각 기관을 주재하는 것은 신기인 것이다. 제규와 제촉이라는 감각 기관이 있어야만 빛을 볼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 제규와 제촉의 이면에는 신기가 있어서 그 신기가 보고 듣는 것이다.

최한기는 수동적으로 외계의 사물을 받아들이는 감각 작용만을 인식능력의 전부로 보지 않았다. 인간의 신기는 감각된 대상을 능동적으로 분별하고 헤아리는 추리 작용과 판단 작용을 한다.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그들의 우열과 득실을 헤아리는 사유 작용, 이것이 추측의 통이다. 추측의 작용이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유 작용이지만, 감각 경험과 관계없이독단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추측의 작용을 세분해 보면 미룸[추]과 헤아림[측]으로 나누어진다. 추측 작용의 마지막 단계는 헤아림, 즉 판단인데, 그러한 판단에는 그러한 판단이 도출되도록 한 미룸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떠한 판단을 할 때는 그 판단의 경험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룸은 바로 경험적인 근거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미룸의 구체적인 모습은 다양하지만 모두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47) 그리고 그 경험이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감각 경험은 물론이고 기억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을 포괄한다. 전에 본 것을 미루어 보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 전에 들은 것을 미루어서 듣지 못한 것을 헤아리는 것이 곧 추측이다.48) 그리고 반드시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일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거나 책을 통해 배운 것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하나의 경험이다. 모든 것을 내가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실제로도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판단의 최종적인 원천은 감각 경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측의 통은 반드시 형질의 통을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있는 형질의 통을 따라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이있다. 그것이 만일 전일에 보고 듣고 겪은 것을 미루는 것이 아니면 바로 현재에 있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비교하거나 저것을 가지고 이것을 비교하여 그들의 우열과 득실을 헤아려 통달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추측의 통이니 자연히 사람마다 같지 않음이 있다.49)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 완전한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소리를 듣는 감각 작용과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헤아리는 판단 작용이 동시에 요구된다. 아울러서 그 판단 작용은 반드시 어떤 소리를 듣는 지금 이 순간의 감각뿐만 아니라 과거에 들었던 무수한 소리와 그 소리에 대해 내렸던 판단들을 비교 분석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래서 기억이 중요하다. "만약 신기가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없다면 평생동안 여러 번 듣고 보는 사물이라도 매번 처음 듣고 보는 사물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50)

추측이란 온갖 경험들을 비교 분석하여 판단을 내리는 사유 작용이다. 추측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 자체에 충실해야지 주관적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소리가 났을 때 어떤 사람은 대포소리라 하고 어떤 사람은 천둥소리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최한기에 의하면 이러한 판단의 차이는 감각 때문이 아니라 추측 때문이다. 똑같은 소리가 고막을 울렸음에도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추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판단의 오류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나의 편견을 줄이는 것이다. 최한기는 이에 대해 "나를 주로 하는 것을 가볍게 하고 사물을 주로 하는 것이 깊어야 거의 하늘과 사람을 통할 수 있게 되어 잘못이 적다"51)라고 하였다. 나를 중심으로 사물을 보지 말고 사물을 중심으로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최한기의 ‘아경물심(我輕物深)의 방법’은 하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홍대용의 이천시물(以天視物)의 방법과 일정한 문제 의식을 공유한다. 인간의 주관적인 편견을 배제하고 사물을 사물 자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그래야 만이 올바르고 참된 인식이 가능하다는 객관주의적 자연 인식이 그것이다.

7. 증험
궁극적으로 헤아림의 결과가 객관 존재의 법칙과 일치할 때, 그 추측은 올바른 추측이다. 추측의 기본 원칙은 내가 보고 듣고 겪은 것을 미루어서 객관 존재의 법칙을 정확하게 헤아리는 것이다.52) 그러나 추측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내리는 판단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그 판단의 결과가 객관 존재와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속단할 수 없다. 추측에 의한 인식은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안고 있으므로 경험에 의한 입증, 즉 증험의 절차가 필요하다. 최한기가 말하는 인식은 객관 존재의 리를 추측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추측의 결과를 검증하는 과정까지 거쳐야 완전한 인식이 될 수 있다. 추측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닐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누군가의 직접적인 경험에 근거해야만 추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의 경험이 되었든 그 경험 자체가 잘못일 수 있고 추측의 과정 또한 잘못일 수 있기 때문에 추측은 항상 가설적 성격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 최한기는 "먼저 추측을 통해 객관 존재의 법칙을 탐구하고, 그 다음에는 객관 존재의 법칙을 기준으로 추측의 옳고 그름을 검증한다"고 하였다.53)

앞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헤아림은 반드시 미룸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떤 대상을 헤아릴 때 반드시 헤아림의 근거가 있어야만 그 헤아림은 유효한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경험 내용을 근거로 미지의 것을 헤아릴 때 그 헤아림의 결과가 올바른 지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지 미룸이 없이 헤아리기만 한다면 이것은 공허할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전제가 있는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판단이 완전할 수는 없다. 최한기의 추측은 단순히 논리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추리와 판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실에 관한 추리와 판단이다. 그 결과 명제들의 논리적인 관계만으로 추리의 타당성이 확보되는 형식 논리와는 달리, 추측의 결과가 온전한 지식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추측의 결과가 사실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조사하는 검증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최한기는 "미룸이 없는 헤아림은 지식으로 여길 수 없고 증험이 없는 헤아림도 지식으로 여길 수 없다"54)고 하여 증험에 대해서 강조를 하였다. 최한기가 기존의 학문을 비판하는 것도 증험할 수 없다는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증험할 수 없는 것을 주장하는 학문은 허황된 것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외도(外道), 이단, 방술(方術), 잡학에서 거론하고 있는 ‘선천지가 있고 후천지가 있다’, ‘산하 대지가 공허하다’, ‘천주가 천지와 만물을 만들었다’는 등의 주장은 마음대로 어림짐작한 데서 나온 것이지 몸소 관찰하거나 실제의 자취를 증험한 것은 아니다.55)

최한기는 증험의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의 추측의 결과와 비교하는 방법이다. 한 사람의 추측은 지극히 주관적일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독단에 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과 추측의 일치성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추측의 결과가 다른 사람들과 일치했을 때 그만큼 추측의 결과는 개연성 내지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석연치 않을 때의 방법인데, 이럴 경우에는 사물에서 직접 증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최한기의 증험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여러 번 반복해서 할수록 확증의 정도가 높아진다는 것과 증험하여 추측이 잘못된 것임이 확인될 경우에 그 추측을 포기하고 새로운 추측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여러 번 증험하여 옳은 추측으로 인정될 때는 그것을 근거로 해서 인식의 지평을 더욱 넓히는것이 바람직한 증험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 부분이 부합한다거나 일시적으로 맞아떨어진다고 해서 그 증험을 확신해서는 안되고 여러 번에 걸쳐 시험하여 틀린 것은 고치고, 옳은 것은 더욱 확대해야 한다.56) 이러한 증험의 방법론은 자연 법칙으로 통용될 자격이 있는 전칭명제의 외연은 열려져 있어야 한다는 과학 철학의 한 명제를 연상시킨다. 또한 객관 존재의 정확한 인식에로 부단히 접근해 가는 과학적 탐구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아울러 경험이 추측의 출발점이자 추측의 옳고 그름의 궁극적 판단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관찰과 실험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적 탐구의 방법른에 근접해 있다.

8. 맺음말
17세기 이래로 서구의 과학 기술이 조선조 유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는 것은 과학 기술이 중요한 학문 분과로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 주자학에서 경전 공부,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공부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던 자연학의 가치 회복이었다. 이렇게 심학으로부터 자연학으로 학문적 관심이 이동한 것은 단순한 학문관의 변화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문제틀과 그것을 설명하는 이론틀이 변화했음을 뜻한다.

새로운 학문의 대두는 일차적으로 새로운 문제 의식의 등장과 맞물려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문제 의식과 학문 방법론을 충족시켜 줄 새로운 이론 체계가 요구됨을 뜻하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홍대용의 인물균등론과 이천시물론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이천시물론이 제기하고 있는 객관주의적 자연 인식은 근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서 필수적이다. 인물균등론은 주자학의 인간중심주의를 깨트리고 있다는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이천시물론의 존재론적 근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인을 구현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에는 주자학의 이론적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주자학의 도학주의 내지 심학주의를 완전히 탈피하여 자연학적 인식론과 존재론을 갖춘 이론 체계가 마련된 것은 최 한기에 와서이다.

최한기는 자신이 살던 19세기 전반기를 동서 문명이 교류하는 시대로 파악하고, 서구의 제도와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역설하였다. 한 마디로 현실은 변했다는 것인데, 변화된 현실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변한 것을 가지고 변한 것에 대처해야 한다는 이변어변(以變禦變)의 방법이었다. 변화된 세계 정세 속에서는 옛것에 대한 고집이 아니라 무엇인가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식의 전환, 그것은 곧 우리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서양의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최한기가 본 그 시대는 바다로 배가 두루 오가고 책이 서로 번역되며 보고들은 것이 전달되고 있는 시대였다. 더욱이 그의 눈에 비친 서구의 법제(法制), 기계, 그리고 여러 생산물은 조선의 것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실로 그의 문제 의식은 주자학적 풍속과 예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았고 서구의 실용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있었다. 이기고 지는 것이 풍속이나 예교에 있지 않다는 최한기의 선언은 그 당시 조선 사상계의 주류였던 주자학과 일정한 선을 긋는 단절의 의미를 지닌다. 윤리에서 실용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최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존의 학문이 지닌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그 학문이 인간의 마음에만 매몰된 학문이라는 데 있었다. 그에게 특히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공격을 받았던 것은 주자학이다. 주자학은 도덕적 실천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음의 공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양명학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두 철학 체계는 도덕적 본체인 성 또는 도덕적 인식 능력인 양지를 마음속에 설정했던 관계로 인식과 실천 모두에서 마음이 강조되었고, 그만큼 물질적 객관 세계는 소홀히 될 수밖에 없었다.

최한기가 접한 서양 근대의 과학 기술은 마음만 들여다보는 공부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바깥의 세계를 탐구해서 그 세계가 지닌 물리적 성질과 그 법칙, 즉 수학적 인과 법칙을 알아낼 때 가능한 지식 체계이다. 과학 기술의 지식은 마음 어느 곳에도 있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학문, 즉 심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자연학, 즉 객관존재학이었다. 최한기가 주자학의 공부론인 (거경)궁리설을 비판하고, 그것의 대전제, 즉 마음속에 모든 리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원리를 부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가 인식해야 할 대상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인간, 사회였다. 최한기 철학에서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마음속에 있는 도덕적 본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및 인간의 성질 및 그 법칙을 정확하게 인식할 것인가에 있었다.

최한기는 이러한 문제 의식에 따라 물질적 객관 세계를 중심에 두는 이론 체계를 구상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주자학의 대전제였던 도덕적 본체가 마음 안에 있다는 구중리설을 부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아무런 색이 없는 우물물과 같아서 본래 그 어떤 관념이나 선험적인 리가 내재해 있지 않다. 색을 첨가함에 따라 그 물이 물들여지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경험이 쌓여감에 따라 지식이 축적되는 것이다. 그의 인식론에서 인식은 감각 기관과 물리적 대상의 만남, 즉 감각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추리하고 판단하는 사유 작용, 측은지심과 같은 도덕적인 마음, 희노애락과 같은 일반적인 감정, 심지어는 성적인 욕구까지도 보고 듣고 겪는 경험 속에서 터득된다. 그만큼 그의 철학에서 경험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인식론에서 인식의 목적은 인정과 물리라고 하는 객관 대상의 성질과 법칙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식의 옳고 그름은 인식의 결과와 객관 대상과의 일치 여부에 의해서 판단되는데, 그 일치 여부 역시 경험을 통해 확인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인식된 것의 일치 여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 역시 인간에게 인식되기 전에는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최한기의 인식론에는 이러한 문제가 간과되고 단지 다른 사람들의 인식과 비교하고 실제 사물에 시험해본다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그러한 만큼 그의 인식론은 단순하고 소박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 하지만, 경험을 인식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보는 그의 경험주의적 인식론이 지향하고 있는 바는 매우 뚜렷하다. 그것은 곧 과학 기술의 학문, 더 넓게는 자연학을 밑받침하기 위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최한기는 도덕학의 시대에 살면서 도래하고 있는 자연학의 시대를 사유했던 사상가이며, 그의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자연학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철학적 사색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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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崔漢綺, 1990,『明南樓全集』, 麗江出版社 1,『推測錄』, 권6,「海舶周通」,189쪽. "處變之道, 固宜將其變, 以禦其變, 不宜以不變者, 禦其變."
2 『推測錄』, 권6, 「東西取捨」, 188쪽 위. "海舶周遊, 書籍互譯, 耳目傳達. 法制之善, 器用之利, 土産之良, 苟有勝我者, 爲邦之道, 固宜取用."
3 『推測錄』, 권6,『東西取捨』, 188쪽 위. "畢竟勝黜, 不在於風俗禮敎. 惟在於務實用者勝, 尙虛文者黜. 取於人而爲利者勝, 非諸人而守陋者黜. 西方諸國, 以器械之精利, 貿遷之羸羨, 始得周行天下. … 學之測量計算, 器之輪機(以水力火力轉輪機, 而織布)風車(所以去棉核)船制 式, 乃實用之尤善也. … 是以西敎之蔓延天下, 不須憂也, 實用之不盡取用, 乃可憂也."
4 최한기는 이에 대하서 안을 지키고 밖을 버린다고 비판하였다.『神氣通』, 권1, 「通有得失」, 9쪽 위. "心學之人, 守內而遺外."
5 주자학의 문제 설정에 대해서는 김용헌, 2000,「조선조 유학의 기론 연구 - 성리학적 기론에서 실학적 기론으로의 전환-」,『동양철학연구』, 제22집, 참조
6 주자학적 학문관과 이에 대한 최한기의 비판에 대해서는 김용헌, 1998, 「주자학적 학문관의 해체와 실학 -최한기의 탈주자학적 학문관을 중심으로-」, 홍원식 외,『실학사상과 근대성』, 예문서원, 참조.
7 『推測錄』, 권1, 「開發蔽塞」, 80쪽 아래. "若謂以利欲所蔽, 未顯我心素具之理, 平生用力, 要除利欲, 冀得一朝豁然貫通, 殆近於禪家頓悟之說也."
8 최한기는 자연의 법칙[物理]뿐만 아니라 개인, 사회, 역사를 포괄하는 인간의 실정[人情]을 인식의 대상, 나아가 학문의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객관 존재 전체가 학문의 대상이 되는 셈인데, 그는 객관 존재를 대기운화(자연의 운동 변화), 통민운화(인간 사회의 운동 변화), 일신운화(개인의 운동 변화)로 나누어 보기도 하였다. 즉 개인, 사회, 자연이 객관 존재이고 학문의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최한기가 설정한 학문은 자연학과 인문사회과학을 포괄하는 객관존재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자연이라는 말을 인간의 마음과 대비하여 인간의 마음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객관존재학을 자연학이라는 말로 바꾸어 부를 수 있을 것이다.
9 물론 그것의 이차적인 형태는 명제라는 언어의 형식을 취하겠지만.
10 『明南樓全集』. 1,『神氣通』, 권1, 「十七條可通」. 25쪽 아래. "天下可通之事. 雖云多端, 語其本, 則我神氣通於彼神氣, 彼神氣達於我神氣也."
11 『神氣通』, 권1, 「氣之功用」, 7쪽 위. "擧其全體, 無限功用之德, 總括之曰神."
12 『神氣通』, 권1, 「天人之氣」, 1쪽 위. "充塞天地, 漬洽物體, 而聚而散者, 不聚不散者, 莫非氣也. 我生之前, 惟有天地之氣, 我生之始, 方有形體之氣, 我沒之後, 還是天地之氣." ;『神氣通』, 권1.『通有得失』, 9쪽 위. "氣者天地用事之質野, 神者氣之德也. 犬器所涵, 謂之天地之神氣. 人身所貯, 謂之形體之神氣."
13 『神氣通』, 권1, 「氣質各異」, 10쪽, "天下萬殊, 在氣與質相合. 始則質有氣生, 次則氣由質而自成其物, 各呈其能."
14 『明南樓全集』2,『人政』, 권9,「善惡虛實生於交接」, 160쪽 위, "古所謂心體, 卽神氣也."
15 『神氣通』, 권1, 「明生於神 力生於氣」."神氣無他能, 而明生於神, 力生於氣. 惟明與力, 乃無限妙用所由出也."
16 이 글에서는 통의 포괄적인 의미 가운데 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17 『神氣通』,권1, 「通虛」. 27쪽 위. "無物無事, 而神氣徒發, 無所通也. 有事有物, 而神氣不發, 無所通也. 有事有物, 而神氣隨發, 方有所通也."
18 『推測錄』,권1, 「推物理明己德」, 80쪽 아래. "心未與物接, 心自是心, 物自是物. 及具與物交接, 是乃推心在物, 而物之理可驗."
19 최한기는 객관 존재를 모두 기 또는 기의 효과로 보았기 때문에 객관존재학은 결국 기학이 된다.
20 『神氣通』,권1, 「收得發用有源委」, 23쪽 위. "有能不由諸竅諸觸, 而通達人情物理者乎? 又有能不由諸竅諸觸, 而收聚人情物理, 習染於神氣者乎?"
21 諸竅는 눈, 귀, 코, 입과 같이 내외를 소통하는 기관을 뜻하며, 諸觸은 촉각 또는 피부의 촉각 기능을 뜻한다. 인식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제규와 제촉을 포괄하여 감각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22 『神氣通』,권1, 「通有源委」, 10쪽 위. "一身之上, 旣有所通之神氣, 又有可通之諸竅. 一身之外, 又有驗通之萬物, 各以其神氣呈露."
23 『神氣』「序」, 5쪽 위. "天民形體, 乃備諸用, 通神氣之器械也. 目爲顯色之鏡, 耳爲聽音之管, 鼻爲嗅香之筒, 口爲出納之門, 手爲執持之器, 足爲推運之輪, 總載於一身, 而神氣爲主宰. 從諸竅諸觸, 而收聚人情物理, 習染於神氣, 及其發用. 積中之人情物理, 從諸竅諸觸而施行, 卽踐形之大道也."
24 『神氣通』, 「序」, 5쪽 아래. "捨此耳目口鼻手足諸觸, 有何一毫可得之理, 可驗之事乎?"
25 『人政』, 권9, 「善惡虛實生於交接」, 160쪽 위. "古所謂心體, 卽神氣也"
26 『推測錄』, 권1, 「雖用而不知推」, 85쪽 위. "窮格之學, 以爲萬事萬物, 莫不有理, 而人之一心, 具衆理, 故無不可窮之理也."
27 『推測錄』, 권1, 「萬里推測」, 83쪽 아래 "心者, 推測事物之鏡也. 語其本體, 純澹虛明, 無一物在中."
28 『推測錄』, 권1, 「本體純澹」, 81~82쪽. "心之本體, 譬如純澹之井泉. 就井泉而先添靑色, 次添紅色, 次添黃色, 稍俟而觀之, 靑色泯滅, 紅色漸迷, 黃色尙存, 所存黃色, 亦非久泯滅… 純澹者, 井泉之本色也. 添色者, 井泉之經驗也. 添色雖泯, 純澹之中, 經驗自在, 至于積累, 推測自生."
29 『推測錄』, 권1, 「如鏡如水」, 75~76쪽. "鏡之照物, 不爲塵垢所蔽, 則照盡天下物, 未見其不足也, 是豈萬物之像, 具在鏡中耶? 但其形質之凝, 近乎氣而明光映澈, 隨物過而自顯而已. 心之於物, 亦猶乎是, 但能引事類而測度, 非萬物之理素具于心也."
30 『推測錄』, 권1, 「萬里推測」, 83~84쪽. "心者, 推測事物之鏡也. 語其本體, 純澹虛明, 無 一物在中. 但見聞閱歷, 積具成習, 推測生焉. … 孟子曰, 萬物皆備於我矣. 朱子曰, 具衆理, 應萬事. 此皆贊美推測之大用也, 決非萬物之理, 素具於心也."
31 『推測錄』, 권1, 「愛敬出於推測」, 88쪽 위. "是以愛親敬兄, 實出於積年染習之見聞推測矣. 所謂愛敬出於良知良能者, 特擧其染習以後而言也, 非謂染習以前之事也."
32 『推測錄』, 권1, 「推物理明己德」, 80쪽 아래. "心未與物接, 心自是心, 物自是物. 及其與物交接, 是乃推心在物, 而物之理可驗." ;『神氣通』, 권1,『收得發用有源委』, 24쪽 위. "有能不由諸竅諸觸, 而通達人情物理者乎? 又有能不由諸竅諸觸, 而收聚人情物理, 習染於神氣者乎?"
33 『神氣通』, 권1, 「經驗乃知覺」, 27쪽 아래. "神氣者, 知覺之根基也. 知覺者, 神氣之經驗也. 不可以神氣爲知覺也, 又不可以知覺謂神氣也. 無經驗, 則徒有神氣而已. 有經驗, 則神氣自有知覺耳. 經驗少者, 知覺亦少. 經驗多者, 知覺亦多."
34 『人政』, 권13, 「心經驗氣經驗」, 244쪽 아래. "論學問敎法者, 當知心經驗氣經驗, 可以辨別學問敎法大小虛實. 氣經驗, 始從天地人物之氣, 得經驗而貯神氣, 用經驗於天下人物之氣, 前後之合不合爲經驗. 心經驗, 以曆象數學地志, 爲迂遠不急之務, 以物類器械, 爲卑言 屑之事, 總歸忽略, 只主於心而經驗事物, 以房 之見, 爲四海之廣, 以一隅之合, 爲萬事之則."
35 최한기의 인식론을 영국의 경험론과 유사한 것으로 파악한 것은 박종홍이다. 그 이후 경험론의 틀로 최한기의 인식론을 바로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대한 비판의 글이 몇 편있으나 설득력은 떨어진다.
36 『神氣通』, 「序」, 5쪽 아래, "捨此耳目口鼻手足諸觸, 有何一毫可得之理, 可驗之事乎?"
37 『推測錄』,권1, 「不可以知自許」, 88쪽 위. "人生之初, 惟有靈明之心, 而能見聞事物, 見聞積漸, 而推測生焉, 推測生, 而能知覺事物."
38 『推測錄』,권1, 「萬里推測」, 83쪽 아래. "心者, 推測事物之鏡也. 語其本體, 純澹虛明, 無一物在中, 但見聞閱歷, 積久成習, 推測生焉. 若無積久之閱歷, 推測從何以生?"
39 『神氣通』,권1, 「知覺推測皆自得」, 8쪽 아래. "自孩?至壯盛, 新得之知覺, 所用之推測, 皆自我得之, 非天之授我也."
40 『人政』,권9, 「善惡虛實生於交接」, 160쪽 위. "前日聞知壓溺之多死, 故乍見孺子入井, 有 ?惻隱之心. 曾未聞壓溺之患者, 見孺子入井, 未有惻隱之心."
41 『人政』,권11, 「知覺之源」, 193쪽 아래. "蓋一身神氣, 從諸竅而通達大氣運化, 聲色臭味, 自襁褓漸漬習染於神氣, 則神氣本以瀅明無碍之體, 習染見聞臭味, 而好順惡逆, 又能記繹經驗, 至有喜怒哀樂, 及其七八歲, 在傍人不念其從前習染, 但見面前酬應, 以爲人具天賦之知, 是有未達之一障."
42 『神氣通』,권3, 「色情聞見」, 53-54쪽. "自幼至壯, 目見美色之女, 耳聞好色之談, 習染於神氣, 深感於精液, 或俟靜而情動, 或目寓耳接而興感. 不思前日漸漬之聞見, 只知當今而情發, 則人之好好色, 雖若不學而能, 不勉而得, 其實有不然者."
43 『神氣通』,권1, 「通之所止及形質通推測通」, 19쪽 아래. "天之生物, 各具形質, 色通于目, 聲通于耳, 味臭通于口鼻, 是乃形質之通也. 從其形質之通, 而推測之通生焉."
44 『神氣通』권1, 「知覺優劣從神氣而生」, 25쪽 아래. "從神氣之通於諸竅諸觸, 而收聚人情物理, 一事二事, 比較優劣, 再度三度, 試驗成敗, 神氣之明知漸開, 而習染于內."
45 『神氣通』,권1, 「諸竅互通神氣益明」, 15쪽 아래. "夫聽之在耳, 而所聽者神氣也. 視之在目, 而所視者神氣也. 聽視雖異路, 神氣則一也."
46 『神氣通』,권1, 「自形質通神氣」, 23쪽 위. "以通體言之, 人有形質之全體, 則必有神氣之全體. 以分體言之, 有形質之目, 則必有神氣之目, 有形質之耳, 則必有神氣之耳."
47 『推測錄』,권1, 「事物攸當」, 91쪽 아래. "推我之見聞閱歷, 以測無違於流行之理者, 推測之準的也. 推之用雖多端, 總不離於見聞閱歷矣."
48 『推測錄』,권1, 「捨其不可」, 76쪽 아래. "推目之所嘗見, 測其未及見者, 推耳之所嘗聞, 測其未及聞者, … 莫不皆然."
49 『神氣通』,권1, 「形質推測異通」, 19쪽 아래. "旣因形質之通, 而有所分開商量者. 如非推前日之見聞閱歷, 卽因現在之物, 以此較彼, 以彼較此, 測度其憂劣得失, 有得通達者, 是乃推測之通, 人人有不同也."
50 『神氣通』, 「序」, 5쪽 아래. "捨此耳目口鼻手足諸觸, 有何一毫可得之理, 可驗之事乎? 雖有此諸竅諸觸, 若無神氣之記繹經驗, 平生屢聞數見之事物, 皆是每初聞見之事物也."
51 『神氣通』,권1, 「形質推測異通」, 19쪽 아래. "如使諸入, 聞雷與砲, 其通於耳則皆同. 其分別商度, 自有不同. 一切聲聞, 莫不皆然. 至於諸色, 及臭味之通, 皆有同有異矣. 然則因形質之通, 而達之于推測之通, 主我者輕, 主物者深, 庶幾通天人而少差謬."
52 『推測錄』,권1, 「事物攸當」, 91쪽 아래. "推我之見聞閱歷, 以測無違於流行之理者, 推測之準的也."
53 『推測錄』,권2, 「流行理推測理」, 107쪽 위. "人心自有推測之能, 而測量其已然, 又能測量其未然, 是及人心推測之理也. 流行之理, 天地之道也. 推測之理, 人心之功也. 先以功求道, 次以道驗功."
54 『推測錄』,권1, 「所知無幾」, 97쪽 아래. "無推之測, 不以爲知, 無驗之測, 亦不以爲知."
55 『人政』,권8, 「敎學虛實」, 142쪽 위. "凡外道異端方術雜學, 皆以宏闊勝大之言, 微妙神通之術, 必擧天地造化之始, 丁寧說到登諸紙墨. 有曰先天地, 後天地, 曰山河大地虛空, 曰神天乃造天造地造萬物. 是皆出於意思?度, 非躬覩始終, 訂驗實跡."
56 『神氣通』,권1, 「物我證驗」, 16쪽 위. "通與不通, 豈可自斷自足? 必須驗之於人, 以通其所不通. 猶末釋然, 又須驗之於物, 要無違於天人之神氣相通也. …善者得者, 赤不可自信其通, 必也驗之于人與物之神氣, 不可以一隅之合, 一時之應, 自信具驗. 須以氣質相通, 終始無違者, 屢試屢驗, 惡者失者, 變改其通, 善者得者, 益廣其通, 方可謂證驗也. 若證之驗之, 而未有變改, 未有益廣, 烏得謂證驗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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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김용헌
한양대철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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