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억압받아 왔던 몸과 생명의 귀환
Ⅱ. 생명 탐구의 공간적 무대로서의 자연
Ⅲ. 분리와 통합의 일원론적 세계와 모성적 이미지로서의 자연
Ⅳ. 상생의 원리와 몸의 기호학
Ⅴ. 순환의 시공간적 세계와 천지 역전의 상승 공간
Ⅵ.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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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中央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학술지명 人文學硏究
ISSN
권 34
호
출판일 2002.
상생과 순환의 시적 공간 : 서정주론
Poetics of Life in Seo Jung Joo's Poetry
정유화
(Jeong, Yu-Hwa)
2-046-0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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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억압받아 왔던 몸과 생명의 귀환
근대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은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기보다는 유용성만을 지향하는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의 주된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존재의 세계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나누어 고찰하려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이항대립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모든 존재와 사물의 의미는 '주체/객체, 중심/주변, 문화/자연, 지배자/피지배자, 남성/여성, 이성/감성, 정신/육체'라는 대립적 구조 속에서만 파악될 수가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대립 구조 속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주체가 절대적 의미를 생산해 내는 권력의 자리를 점유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주체의 자리는 권력을 나타내는 기표가 된다. 따라서 주체를 둘러싼 모든 객체들은 권력적 기표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수동적, 주변적, 타자적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이원론적 사유는 주체적 자아 중심으로 구조화하여 이 세계의 질서와 의미를 파악하기 때문에, 객체적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내재적 가치는 왜곡·억압될 수밖에 없다.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자기 내부에 삶의 가치와 자기실현의 목적을 담고 있다. 자연 속에 있는 생명이나 인간의 생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생명 현상들은 따로 분리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유기체적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이원론을 바탕으로 하는 도구적 이성은 그러한 유기체적 세계관을 쉽게 무너뜨리고만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의 생명조차 경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유기체적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자연도 생명이 없는 물질적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통제·정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포구적 이성이 모든 생명체를 주종의 관계나 물질적 관계로 대상화 하게 되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에 내재된 생명체들은 존재에 대한 위기와 억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생명에 대한 위기와 억압은 주체와 객체간의 대립과 갈등의 골을 깊게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더욱 악화되면 우주공동체로서의 삶의 기반인 자연공간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다. 생명 현상이란 점에서 볼 때, 근대의 합리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자기 실현의 목적을 담고 있는 고유한 생명을 그 자체로 보고자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성적 주체에 의해 그 동안 억압받아 오고 지배당해 왔던 것들, 가령, 자연, 신체(몸), 여성, 감성 등을 복원하여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데 있다. 따라서 그러한 복원이야말로 생명의 복귀요 생명의 귀환인 셈이다.
도구적 이성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타자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자연이다. 인간 은 자신만의 풍요로운 삶을 설계하기 위해 자연을 지배와 정복, 착취의 대상으로 여겨왔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 대신에 물질화된 대상으로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로 인해 파괴된 자연은 거꾸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탈중심주의, 탈식민주의 등을 주장해온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와 더불어 생태학1)이 빠른 속도로 학문과 문학의 영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부각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자연은 바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자연과 상호관계를 맺는 가운데 생명을 극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자연은 생존의 모태인 동시에 생명의 저장소이기도 하다. 자연이 문학적 주제의 보고(寶庫)가 된 것도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다. 전통적으로 문학이 인간과 자연을 주제로 하여 그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시적 감수성과 우주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탐색해 온 것도 이를 반증하는 일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 속에서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미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이 사회적 삶의 경험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여 정신적 삶의 풍향계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그 중에서도 생명의식을 불러일으켜 인간과 자연의 파멸을 막을 수 있는 일을 떠맡는 문학, 다시 말하면 생명문학도 중요한 위치를 점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근래에 사용되고 있는 문학생태학의 기반도 다름 아닌 생명문학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촉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억압받은 자연을 귀환시키는 것은 자연을 우대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의 생명체의 차원에서 새롭게 살펴보자는 뜻이다. 인간이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자연의 위기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이 사라져도 그 자체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 도구적 이성으로 구축된 삶의 패러다임을 구조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물질적 존재로 억압해 왔던 자연을 생명주의의 관점에서 다시 귀환시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서정주의 시작품에 나타난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를 생명의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탐색해서 인간과 자연의 존재적 의의 및 생명의 의미를 조망하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문학에서 생명시의 발전 가능성과 그 한계를 간략하게 짚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서정주의 시작품을 연구 대상으로 한 것은 먼저 그의 시적 세계가 '생명의식'이라는 큰 주제 속에서 창작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알다시피 서정주의 시적 출발은 '생명의식'에서 시작하고 있다. 30년대 후반기에 한국시사에 출현한 《詩人部落》2)은 그의 시적 첫 무대였는데, 그는 이 무대를 통하여 동시대의 시류와 확연히 변별되는 '생명의식'을 뜨거운 격정으로 표출했다. 가령 이 동인지에 실린 「문둥이」, 「獄夜」, 「대낮」, 「花蛇」 등의 작품만 보아도 그러한 사실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명의식'은 단순한 호기에 멎지 않고 그의 시적 역정을 통해 변주되면서 '생명의식'을 정제하는 주제로 모아진다. 다시 말하면 『화사집』의 육성이 신라정신과 불교사상을 거쳐 『질마재 신화』 에 이르면서 '생명의식'이 절정에 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서정주의 시적 발전 단계는 생명신앙의 고열한 고백에서 시작하여 생명신앙의 가장 높은 구극의 단계까지 상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3)
다른 하나는 생명의식을 노래한 서정주 시인이 한국시문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그 어느 시인보다도 클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의 질적 발전을 가져올 정도로 그의 시적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점이다. 이는 곧 그의 시적 사유가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으로 거듭날 수 있는 하나의 좌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생명의식'에 투영된 시적 사유를 탐색해 본다는 것은 곧 그의 생명시4)가 얼마나 보편적 정서를 지니고 있는지 그 가능성을 짚어보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텍스트를 분석하는 연구방법의 가장 기본적인 틀은 기호론적 방법이다. 역설적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자연의 대상은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기보다는 전체구조의 의미체계 속에서 그 존재의 역할과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이 세계는 나와 대립시켜 파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호론적 방법은 텍스트의 미적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미학적으로 생명의식을 탐구할 수 있게 한다.
Ⅱ. 생명 탐구의 공간적 무대로서의 자연
인간은 몸을 가진 생명체이다. 인간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극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파악하고자 하는 문학과 철학의 언어적 사유도 기실 다름 아닌 인간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귀착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인간만을 대상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인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다른 항, 즉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인간 생명의 의미와 본질이 드러날 수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적 유기체이면서 자연의 일부분에 속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이 극대화차고자 하는 생명도 자연 생명과의 존재적 연결망(network)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인간의 생명과 자연의 생명과의 상호 의존성이 모든 생태적 관계의 본질이며, 그 개체의 특성 또한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획득되기 때문이다.5) 물론 이때의 자연도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은 인간의 몸처럼 존재적 자연과 물질적 자연이 결합된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구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대면 '나의 몸'은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서 고찰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작해야 몸은 정신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의 살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양적 전통에서는 '나의 몸'이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몸 자체이다. 의식(정신)은 몸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다. 마치 '기표' 없이 '기의'를 생각할 수 없듯이 몸을 경유하지 않는 마음은 영원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유가에서의 '몸'은 자아와 세계와의 교통방식이 된다.6) 이와 같은 인간의 몸처럼 자연도 하나의 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탐구한다는 것은 곧 그 몸이 드러내는 의식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 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인간에 대한 자연의 반응은 타자를 통해서 드러내는 의식과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에 대한 서정주의 시적 몸짓은 어떤 것일까. 그의 초기시를 보면, 자연에 대한 그의 시적 몸짓은 거의 성욕(性慾)에 대한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욕은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다. 생명의식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이 다름 아닌 성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연공간의 무대는 성의식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장소이다. 따라서 그에게 자연이라는 대상은 생명 그 자체를 표현하는 육체적 자연, 성적 자연으로 인식된다. 구체적인 작품 인용을 통해서 성과 자연에 대한 생명의식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뜨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사랑 사랑의 石榴꽃 낭기 낭기/ 하누바람 이랑 별이 모다 웃습네요/
풋풋한 山노루때 언덕마다 한마릿식/ 개고리는 개고리와 머구리는 머구리와//
구비 江물은 西天으로 흘러 나려…// 땅에 긴 긴 입마춤은 오오 몸서리친/
쑥니풀 지근지근 니빨이 히허여케/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 달드라 우름가치/
달드라.
一 「입마춤」7)전문
먼저 이 텍스트의 시적 무대는 인위적인 질서가 배제된 자연적 공간이다. 이 시에서 인위적 기호로서 '울타리'가 등장하지만, 이것도 '가시내'에 의해서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거의 인위적인 기호는 모두 제거된 셈이다. 이 자연적 공간으로 '나'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은 '가시내'이다. 자연(콩밭)이 생산성을 지니고 있듯이 여성도 생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가시내'는 대지의 자연과 등가에 놓인다. 다시 말하면 시적 무대인 자연공간은 예의 여성적 이미지8)와 성적 이미지로써 생명의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는 뜻이다.
이 텍스트에서 '입마춤'이라는 성적 교합은 이성과 대립되는 육체성의 표출이다. 그것은 곧 생명의 충일한 고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몸서리친/쑥니풀 지근지근 니빨이 히허여케"라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동안 이성중심주의에 의해 억압받아온 육체성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체성의 해방은 다름 아닌 몸의 복원이고 생명의 귀환이다. 텍스트에서 그 귀환의 희열을, 즉 성욕의 쾌락적 희열을 본능적이고 공격적인 동물에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근엄한 정신주의에 반항하는 육체성의 도전이다. 이 육체성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니라,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자연적 공간은 타자에 대한 억압이 없는 공간이다. 모든 개체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고유한 가치를 가지며 생존하고 있다. 석류꽃, 산노루떼, 개구리, 머구리 등은 어느 것에 종속되지 않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개고리는 개고리와 머구리는 머구리"끼리 자유롭게 성적으로 결합하여 생명의 자기 완성을 실현하고 있을 뿐이다. 우주적이고 천상적 기호인 '바람'과 '별'이 동물적 세계인 지상을 향해 웃고 있는 것은 '이성'에서 해방된 '육체성', 곧 생명의 본능적 가치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시적 무대는 지상과 천상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생명의 상승적 공간이 되고 있다. 즉 이성과 감성이 분리된 죽음의 세계(하강적 의미)에서 이것이 하나로 결합된 생명의 세계(상승적 의미)로 나가고 있다.
서정주에게 자연은 근대의 합리성에 의해 억압된 인간의 몸, 그 중에서도 본능적이고 관능적인 성욕을 복원시켜주는 생명의 공간이다. 자연은 생명의 본능적인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커다란 저장고이다. 생명의 본능적인 에너지를 충전 받은 인간 역시, 자연을 하나의 몸의 세계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이용 가능한 물질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정주가 근대의 합리적 세계, 즉 이성중심주의를 전적으로 폐기처분 하고 육체성의 세계를 완전하게 복원시킨 것은 아니다. 그의 텍스트를 구조화하고 있는 육체성의 기호 이면에는, 즉 무의식 속에는 도덕적 이성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래서 그가 서구에서 버렸던 악마의 육체적 기표들 가령, 피와 뱀을 시의 무대로 등장시키고, 또한 개, 능구렁이, 노루, 사슴 등 동물들을 시의 무대로 등장시켜 성욕을 나타내는 기호로 구조화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 공간 속에서 자아는 주체성의 분열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麝香 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達辯의 혓바닥이/
소리잃은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 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麝香 芳草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石油 먹은듯…石油 먹은듯…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투라의 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우리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베암.
- 「花蛇」 전문
서정주의 반항적이고 악마적인 육체성 추구 이면에는 이성의 그림자가 짙게 혼효되어 있다. 이는 그의 육체성 추구가 근대의 합리적 세계에서 전적으로 용인될 수 없음을 무의식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말하자면 근대적 사회문화의 상징적 텍스트가 큰 타자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그의 생명의식도 전일적으로 충만해 있지는 못하다. 이 텍스트에서 花蛇, 즉 꽃뱀에 대한 '나'의 감정은 서로 상반되는 양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령 그 감정을 보면 '아름답다/징그럽다, 입술(고귀)/아가리(비천), 쏘다(쫓다)/따르다, (몸에) 두르다/(땅에) 스미다' 등의 상반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육체성을 추구하는 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에 못지 않게 로고스 중심의 기독교 사상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체성의 분열은 바로 이와 같은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과 갈등에 기인한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性으로 상징되는 뱀과 피를 금기의 대상, 비천한 것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래서 성욕은 생명의식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정신을 타락시키는 하나의 물질적 현상으로 간주하게 된다. 시인이 뱀을 '꽃대님'으로 비유하여 인간적 차원(문화)으로 귀환시키는 동시에 지하의 차원(자연)으로 추방시킬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러한 인식에 근거한다. 생명의식에 대한 이러한 모순을 안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몸이 양의적인 모순의 기표로 작용할 때, 인간과 관계하는 자연 역시 대립적 세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대지와 천상의 대립이 그것이다. 대지는 붉은 '피'가 지배하는 육체적인 숙명의 세계, '사향 박하'가 유혹하는 성적, 관능적, 여성적 세계인 반면, 천상공간인 '푸른 하늘'은 이와 대립하는 기독교의 로고스 중심주의의가 지배하는 정신의 세계, 이성적 세계, 남근을 상징하는 권력의 세계가 된다.9) 문제는 푸른 하늘의 세계가 붉은 땅의 세계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시인은 하늘을 부정할 도리밖에 없다. 진정한 생명의 원리는 인간과 자연, 땅과 하늘의 원리가 그 경계영역을 해체하고 함께 생명에 참여할 때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서정주는 인간과 자연, 땅과 하늘의 대립을 해체하지 못하고 그 모순의 경계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자연공간을 무대로 하여 인간의 생명과 자연의 생명에 대한 본질을 사유하고 있다.
그러한 경계의 모순 공간에 서 있는 것이 예의 서정주의 모습이고 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방울의 피가 연제나 서꺼있어/?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自畵像」 일부) 이러한 시인의 주체 분열은 '이슬과 피'가 혼합되어 있는 그 모순성에 기인한다. 시인은 시로써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그 경계의 모순을 해체·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자기 완성은 '시의 이슬에 섞여 있는 피'에서 이것을 분리하고 해체해야 하는 일이다.10) 피는 인간이나 동물에게 있어서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그 맹목성 때문에 또한 죽음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능구렝이같은 등어리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强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대낮」 일부)에서 볼 수 있듯이, '피'는 생명의 극치인 동시에 죽음을 동반하고 있다.이에 비해 자연의 생명인 '이슬'은 우주적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순수하고 영원한 의미를 내포한다. '피'가 '인간, 지상, 유한'의 의미를 나타낸다면 '이슬'은 '자연, 천상, 무한'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시공간의 대립적 차이를 보인다. 물론 억압받고 있는 몸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몸을 도구화하는 서구 근대성에서 벗어나기도 해야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몸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생명인 '이슬'의 우주적 원리를 체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와의 유기체적인 교감을 가져야 한다.11) 서정주의 시적 역정이 멈추지 않고 지속되는 이유도 이러한 당위적 요청 때문이다.
Ⅲ. 분리와 통합의 일원론적 세계와 모성적 이미지로서의 자연
근대적 이성이 억압했던 피의 원리의 귀환은 몸과 생명의 귀환인 동시에 자연의 귀환이기도 하다. 문화적 제약을 받는 계는 억압과 금기의 대상이었지만, 자연의 한 부분인 피가 되었을 때는 생명 그 자체를 세계로 확대하는 몸의 구가(謳歌)가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연 속으로 귀환한 피, 즉 인간의 육체도 자연을 거울로 할 때 유한자로서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피란 결국은 느글거리어 못견딜 노릇"(「無題」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피를 부정한다고 단언해서는 곤란하다. 피의 부정은 다름 아닌 근대적 이성이 규정한 물질(몸)로서의 환원이 되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한다면 피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피의 부정이 아니라 피의 질적 비약을 뜻한다고 하겠다. '피의 질적 비약'이란 성욕 자체만 추구하는 육체성의 피가 아니라, 유한한 성욕의 세계를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피를 의미한다. 따라서 피의 질적 비약은 몸을 억압하지 않는 가운데 생명의식을 더욱 고양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그러나 피의 질적 비약은 인간의 주체성만으로 가능해지지 않는다. 생태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생명이란 자연 속에 있는 모든 유기적 생명체와 비유기적 물질이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분화 발전해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의 주체성'을 인정할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12)을 가지고, 그 바탕 위에서 피의 속성을 조망할 때 육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며, 나아가 생명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을 주체로 인식하고 그러한 주체적 원리를 인간에 적용할 때, 인간은 생명에 대한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정주에게 자연의 주체성 발견은 그로 하여금 맹목적이고 관능적인 피를 정서적이고 우주적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먼저 시를 인용하고 나서 그 변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무엇하러 내려왔던고?/ 무엇하러 물舞童 서서/
무엇하러 瀑布질 쳐서/ 푸줏간의 쇠고깃더미처럼 내던져지는/
저 낭떠러질 굴러 내려왔던고? 내려왔던고?/
차라리 新房들을 꾸미었는가./ 피가 아니라/
피의 全集團의 究竟의 정화인 물로서,/ 조용하디 조용한 물로서,/
이제는 자리잡은 新房들을 꾸미었는가./ 가마솥에 軟鷄닭이/
사랑김으로 날아오르는/ 구름더미 구름더미가 되도록까지는/
오, 바다여!
- 「바다」에서
이 시는 시집 『신라초』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이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서정주에게 자연적 공간인 '바다'는 자기 내면화된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 이 내면화된 '바다'는 스스로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이 구절은 『화사집』에 실려 있는 「바다」라는 작품에서 인용한 것임)로서 주체적으로 운동을 하는 생명의 바다이다.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생명이 없는 바다가 아닌 것이다. 이 텍스트를 구조화하고 있는 것은 '내려오다/날아오르다'의 서술어 층위이다. '내려오다'의 주체는 인간의 '피'이다. 그것도 낭떠러지를 통해 내려왔으므로 인간의 공간적인 위치는 상방공간이 되고, 바다는 그 피를 내려받는 하방공간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 생명인 피와 바다 생명인 물로 대립되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겸허하게 인간의 참여적 삶을 허용하고 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신방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바다 속에는 바다의 생명과는 다른 피의 신방이 존재할 수 있다.
바다의 주체적 생명 원리는 하방공간의 물을 상방공간인 하늘로 퍼올리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순환시키고 정화해 나간다. 바다는 이러한 생명 율동을 통해 인간의 피까지도 상방공간인 하늘로 퍼올리고 있다. 인간과의 대립이 아니라 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피를 공중으로 퍼올리기 위해서는 피와 물을 분리해야 한다. 바다는 그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 가마솥의 닭을 끓이듯이 자신의 몸을 끓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피와 물의 분리는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생명의 확산, 생명 공간의 확대가 된다. 물은 상방공간의 '구름더미'가 되고, 피의 응결체는 '차돌'이나 '루비'가 되어 하방공간인 바다 속에 깊이 가라앉게 된다. 이와 같이 피의 생명체는 '상/하'로 분리되어 공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물론 '구름더미'와 '차돌'은 분리된 개체로 '고정된 것'(죽음)이 아니라 우주적 생명운동에 따라 '순환적인 결합(삶)'을 이룰 수 있다. 이 점은 뒤에서 더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서정주 시인이 바다의 주체성을 이렇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생태적 감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는 이러한 바다의 생명 율동으로 유한한 피의 충동을 분리·정화하게 되고 육체성을 극복하는 사랑을 성취하게 된다. 또한 바다는 그러한 생명율동을 통해 다음 시(詩)처럼 해와 달과 별이 되기도 한다.
별아, 별아, 해, 달아, 별아, 별들아,/ 바다들이 많아서 하늘 가며는/
차돌같이 많아서 하늘 가며는/ 해와 달이 되는가, 별이 되는가.
- 「旅愁」 에서
그렇다면 피의 분리를 통해서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서정주는 바다와 인간의 상호 생명적 관계를 통하여 생명에 대한 '철학적 내지 인생론적 진실'13)을 사유하게 되는데, 그것은 생명에 대한 단순한 초월을 뜻하기보다는 생명을 나눔으로써 모든 사물을 통합하려는 유기체적 일원론의 사유가 된다. 물론 이 사유의 근원에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 '마음'도 육체와 절연된 채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육체를 향한 결합을 꿈꾸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텍스트가 추구하는 것은 상호 모순되는 두 존재를 통합하는데 있다. 모순의 통합 과정이 곧 시를 건축하는 과정인 셈이다.
피여/紅疫같은 이 붉은 빛갈과/ 물의 연합에서도 헤여지자.//
붉은 핏빛은 장독대옆 맨드래미 새끼에게나/
아니면 바윗속 굳은 어느 루비 새끼한테,/ 물氣는 할수없이 그렇지/
하늘에 날아올라 둥둥 뜨는 구름에…// 그러고 마지막 남을 마음이여/
너는 하여간 무슨 電話 같은걸 하기는 하리라./
인제는 아주 永遠뿐인 하늘에서/ 지정된 受信者도/
소리도 이미 없이/ 하여간 무슨 電話 같은걸 하기는 하리라.
- 「無題」 에서
시인은 생명의 에너지인 '피'를 '맨드래미 새끼'나 '루비 새끼'에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물기는 하늘의 '구름'에게도 나누어주고 있다. 이 나눔이 '나'를 그들과 함께 살게 한다. 거꾸로 말하면 그들 생명 하나 하나가 통합되면 곧 '나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를 나눔으로서 육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원한 하늘'에 존재하고 있는 마음이 '전화 같은 것'을 통해 늘 육체성과 통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서정주는 인간의 생명을 정신(마음)과 육체의 분리·통합의 역설적 과정이라고 보는 셈이다. 이 역설적 과정 자체가 다름 아닌 우주적 원리이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그러한 인식의 단초가 시인으로 하여금 인간과 자연이 서로 주체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상생하는 타자성의 원리를 실현하게 되고, 나아가 생명의 무한성을 구가할 수 있는 순환의 세계와 시간의 영원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 항목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다.
서정주에게 바다가 생명의 분리·통합의 원리로 작용했다면, '산'이라는 주체적 자연은 대모지신의 우주적 원리로 작용한다. 사실 자연에 대한 그의 인식을 포괄적으로 단순하게 요약한다면, '산'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동일시되는 '여성'들, 우주적 현상의 하나인 '눈' 등 자연물과 여성적 세계는 거의 모성적 이미지를 지닌 대지모신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靑山이 그 무릎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르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여드는/ 午後의때가 오거든/
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어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럼히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풀 쑥굴헝에 뇌일지라도/
우리는 늘 玉돌같이 호젓이 무쳤다고 생각할일이요/
靑苔라도 자욱이 끼일일인 것이다.
- 「無等을 보며」 에서
이 텍스트에서 '청산'은 모성적 원리를 구현하는 대지모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청산이 자기 무릎아래에서 지란(芝蘭)을 기른다는 것은 모성애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시인은 모성을 가진 청산의 삶 속으로 인간의 삶을 이끌어 들이고 있다. 그래서 청산은 인간을 기르는 모습으로 현현한다. 이러한 시적 상상력은 자연적 삶의 원리와 인간적 삶의 원리가 대립이나 갈등의 관계가 아니고 생명이라는 차원에서 동일함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인간 세계에는 남성과 여성이 내외로 분별되는 위계적 질서가 있지만, 자연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질서조차 무너지고 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생명의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안정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될 뿐이다. 이 텍스트에서 '지어미'와 '지애비'는 유교적 남근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인물들이다. 지어미와 지애비는 평등한 관계로서, 아니 지애비인 남성이 오히려 모성적 이미지를 지닌 인물로 기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애비가 지어미를 안고 기르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텍스트에서 서로 우러러보고 이마를 짚어보는 행위는 '상/하'의 권력적 기표가 아니라, 상호 결핍된 생의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생명의 합일을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자연적 원리를 수용할 때 인간의 삶은 "가시덤풀 쑥굴헝"같은 고난의 현실을 극복하고 생명의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다. 산 속에 玉돌이 묻혀 있다고 해서 그 玉돌이 무의미하고 생명 없는 존재가 아닌 것처럼, 인간이 자연에 속하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유기적 관계를 가질 때에 억압된 현실을 극복하고 비상하는 삶을 살 수 있다.14) 또한 모성적 원리는 인간의 생명을 상승시키기도 하지만 인간의 병을 치료해 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서정주 시에 등장하는 섭섭이와 서운니와 푸접이와 순녜라는 인물은 상제(上帝)님의 고동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매한 여성들인데, 이들은 자연적 세계와 동일시되면서 '나'의 병을 치료해 주는 모성적 세계를 드러낸다. "손까락 끝에 나의 어린 피ㅅ방울을 적시우며 한名의 少女가 걱정을하면 세名의少女도 걱정을허며,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연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앍안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든 나의像처기는 어쩌면 그리도 잘 낫는것이였든가."(「무슨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일부)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소녀와 자연적 존재인 꽃은 다름 아닌 모성적 이미지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현상 중의 하나인 '눈'도 모성적 원리로 기능하고 있다. 천상적 기호인 '눈'은 지상적 삶에 관여하여 모든 생명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속에 서는/ 까투리 매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찮타, ……괜찮타, ……괜찮타, ……괜찮타, ……/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속에 서는/ 낮이 붉은 處女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運命들이 모두다 안끼어 드는 소리.……" (- 「내리는 눈발속에서는」 일부) 이 텍스트에서 '눈'은 양의적 의미를 생산하고 있다. 포근한 눈발로서 생명에 따스한 기운을 주는 동시에 새파랗게 얼게 하여 생명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괜, 찮, 타,'15)라는 언술이 시사하듯이, 눈은 지상의 모든 생명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생명의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눈의 모성적 공간 속에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경계적 구분이 없다. 모든 존재가 그 고유한 가치를 지닌 채 생명을 유지해 가고 있다. 가령, '까투리, 매추래기'의 동물적 층위와 '처녀 아이들'의 인간적 층위, '청산'의 자연적 층위가 주종의 관계를 벗어나 평등하게 '눈발'속으로 깃들이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Ⅳ. 상생의 원리와 몸의 기호학
상생이란 생명체들이 유기체적 관계 속에서 상호보족과 공존공영의 세계를 구축하여 서로의 생명을 극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이 서로 대립 갈등할 때에는 상생의 미학적 정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다만 인간과 자연이 주·종의 권력적 기표를 벗어나 유기체적 생명세계로 조응할 때만 그러한 상생의 충만한 세계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상생의 원리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타자의 타자성이 미리 전제되어야 한다. 흔히 상생을 '나'와 '타자'가 하나가 되는 융합 또는 동일성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진정한 상생의 원리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주체가 동일자가 된다는 것은 한 주체가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다른 주체에게 종족 혹은 흡수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성은 타자가 본질로서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본성이다. 그래서 타자의 타자성은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이 된다. 말하자면 타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 따라서 그것은 신비와의 관계일 뿐이다.16)내가 타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와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타자성을 인정할 때 가능하며, 그 받아들임은 윤리 도덕적인 측면에서 '환대(歡待)로서의 주체성'을 인정한 것이 된다. 서로가 환대로서 받아들일 때, 상생의 삶을 영위할 수가 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서정주는 이러한 타자성을 인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뜨리는 몸둥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네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팩이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ㅅ굼치에까지도 이뿐 꽃숭어리들을 달었다. 맵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새끼들이 朝夕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數十萬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구치고 마짓굿 올리는 소리를허고, 그래도 모자라는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當然한 일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할려면 어떻게했으면 좋겠는가. ……(중략)……
하여간 이 한나도 서러울것이 없는것들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하는 微物하나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서뿔리 우리 어린 것들에게 서름같은걸 가르치지말일이다. 저것들을 祝福 하는 때까치의 어느것, 비비새의 어느 것, 벌나비의 어느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우리와 꽃 숭어리의 어느 것에 대체 우리가 행용 나즉히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란것이 깃들이어 있단 말인가.
- 「上里果園」 에서
이 텍스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들이 자기의 고유한 가치를 억압당하지 않는 가운데 조화로운 상생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상생의 삶은 '슬픔'과 대립하는 '기쁨'을 만들어 낸다. 슬픔이 생의 하강이라면 기쁨은 생의 상승이 되는 것이다. 타자의 타자성 속에는 대립과 갈등, 배척과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와 다른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라고 해서 배척하지도 않고, 자는 동물과 노래하는 동물이 대립하지 않고, 참새와 때까치가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꽃과 생물들이 서로를 소유하지 않는 공간이 바로 '상리과원'이다. 이 자연적 공간에는 모든 사물들이 생명의 신비적 활동에 유기체적 존재로서 참여하고 있지만, 그 어느 한 존재에 의해서 다른 생명체들이 조종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들이 자율적으로 그러한 상생의 삶에 참가할 뿐이다. 이 상생의 즐거움이 텍스트 공간을 상승지향적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상리과원'의 내부공간이 외부공간과 변별되는 것은 상생의 삶이 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하여 지상의 세계인 '상리과원'이 지상을 초월하는 상승의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그러한 모습을 보며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할려면 어떻게했으면 좋겠는가"라고 묻고 있는데, 사실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타자의 타자성을 억압할 때, '서러움'과 '슬픔'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시인이 "서뿔리 우리 어린 것들에게 서름같은걸 가르치지말일"이라고 독자들에게 권유하고 있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실현하는 우주 자연의 이법(理法)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어른들은 물질적인 가치에 쉽게 현혹되는 이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정주는 이 작품을 통하여 자연은 그 자체로서 타자의 타자성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세계로 본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자기 실현과 완성을 욕망한다. 그러나 이 욕망은 타자와의 상생의 관계를 가질 때 가능해질 수 있다.
이러한 타자의 타자성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인간과 자연은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이 될 수 없고 자연 또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자연이 만나 상생의 삶을 이를 수 있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 때문이다. 서정주 시에서 근대적 이성이 억압하고 비천하게 여겼던 육체적 기호들, 가령 똥, 똥구멍, 오줌, 손때 등은 '정신'(이성)에 대한 '타자적 기표'(육체성)로서 인간과 자연의 삶을 상생으로 이끄는 몸의 기호학적 바탕이 되고 있다.
질마재 上歌手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喪輿면 喪輿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上歌手는 뒤깐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 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明鏡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 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좋게 밀어넣어 올리는 쇠뿔 염발질을 점잔하게 하고 있었어요
明鏡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
- 「上歌手」 전문
이 텍스트에서 상가수의 '노랫소리'는 이승과 저승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의미한다.17) 그 노랫소리는 이승과 저승의 공간적 대립을 해체하고 상호 연결된 세계로 이어주게 된다. 부연하면 상가수의 노랫소리에 의해 지상의 인간적 삶이 초월적 세계인 저승의 삶까지 참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상가수의 노래가 그러한 영성(靈性)18)을 지니게 되었을까. 알고 보면 상가수의 노랫소리의 원천은 '똥오줌 항아리'이다. 근대의 합리적 이성에 의하면 똥과 오줌은 정신에 대립되는 하나의 생명 없는 물질로서 비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인간의 배설물을 담는 '똥오줌 항아리'도 예외는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이성적 담론에는 지배문화의 담론이 함의되어 있다. 상하의 신분적 계급과 귀한 직업과 천한 직업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담론은 하나의 비가시적인 하나의 고정된 사회적 틀로서 낮은 신분의 계급과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지배하거나 억압하는 수단이 되어 왔다. '똥오줌 거름'을 옮겨내는 상가수도 이런 면에서 보면 아주 비천한 신분과 직업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배문화의 담론은 오히려 비천하기 때문에 버려진 것들에 의해 역전되거나 해체된다. 그것은 바로 상가수의 카니발적 육체적 행위19)에 의해서 실현된다.
똥오줌은 육체의 배설물로 저급한 이미지, 몸의 하부적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상가수에 의하면 이 배설물은 단지 더러운 무기물이 아니고 대지를 비옥하게 하는 생명력, 창조력으로 인식된다. 육체에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했던 똥오줌이 다시 대지를 비옥하게 한다는 점에서 똥오줌은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상생케 하는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창조력을 가진 똥오줌을 '기름지다'라고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이 점에서 '똥오줌'은 인간의 생명을 우주적으로 화산하고 팽창시키는 기능을 하는 신성한 사물이 된다. 상가수가 '똥오줌 항아리'를 명경으로 삼아 염발질을 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도 더러운 것을 신성한 것으로 역전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육체의 하부적 특성을 억압하고 비천하게 여기고 있는 근엄한 정신주의에 대한 상가수의 저항이다. 육체적 원리의 귀환은 나와 타자의 생명을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육체적 원리의 하나인 '똥과오줌'은 육체의 타자성이다. 그래서 내가 더럽게 생각하거나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생명체를 발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생명체이다. 따라서 육체의 하부구조인 똥구멍은 생명의 똥구멍, 신성한 똥구멍, 우주와 연결된 똥구멍이며, 그리고 그것을 담는 '똥오줌 항아리'는 생명체를 담고 있는 우주적 항아리20)가 된다.
결국 상가수와 똥오줌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생명체이다. 따지고 보면 신성하다고 여기는 노래(藝)와 얼굴을 단정하게 꾸미는 염발질도 역설적으로 비천하게 여겼던 배설물(생명체)에서 산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똥오줌 항아리'는 '성/속, 미/추, 인간/자연, 정신/육체' 등의 대립적 경계를 해체한 상생의 타자성의 공간이다 "小者 李 생원네 무밭은요. 질마재 마을에서도 제일로 무성하고 밑둥거리가 굵다고 소문이 났었는데요. 그것이 이 小者 생원네 집 식구들 가운데서도 이 집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이 아주 센 때문이라고 모두 말했습니다"(「小者 李생원네의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 일부) 이 텍스트 역시 예의 상생의 순환론적 생명관을 보여주고 있다. 생원 마누라21)의 '오줌'은 육체의 타자성으로서 '나'와 '무우'를 매개해 주는 우주적 혈액이다. '오줌'에 의해 인간의 생명과 자연의 생명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상생의 관계로 발전되고 있다.
Ⅴ. 순환의 시공간적 세계와 천지 역전의 상승 공간
'피'의 세계를 거쳐온 서정주는 타자성의 인식을 통하여 상생의 삶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한한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영원한 삶을 발견하기 위해 시적 상상력을 대우주로 향하게 한다. 먼저 그의 시적 상상력이 가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신화적 세계이다. 그에게 있어 신화는 지상을 초월한 거창한 세계이기보다는 지상적 삶과 연관된 원초적 세계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원초적 고향인 '질마재' 공간이 된다. 그래서 그에게 신화적 세계란 생활 속에 감추어진 삶의 지혜일 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흔히 그가 '인연'이라고 부르는 생명과 영혼의 윤회에 대한 시적 상상력이다. 물론 이러한 시적 상상력의 근원에는 육체적인 생명에 대한 사유가 짙게 깔려 있다. 작품을 통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탐색해 보도록 하자.
알뫼라는 마을에서 시집 와서 아무것도 없는 홀어미가 되어 버린 알묏댁은 보름사리 그뜩한 바닷물 우에 보름달이 뜰 무렵이면 행실이 궂어져서 서방질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 마을 사람들은 그네에게서 외면을 하고 지냈읍니다만, 하늘에 달이 없는 그믐께에는 사정은 그와 아주 딴판이 되었읍니다.
陰 스무날 무렵부터 다음 달 열흘까지 그네가 만든 개피떡 광주리를 안고 마을을 돌며 팔러 다닐 때에는 「떡맛하고 떡 맵시사 역시 알묏집네를 당할 사람이 없지」 모두 흡족해서, 기름기로 번즈레한 그네 눈망울과 머리털과 손 끝을 보며 찬양하였습니다.」 손가락을 식칼로 잘라 흐르는 피로 죽어가는 남편의 목을 추기었다는 이 마을 제일의 烈女 할머니도 그건 그랬었읍니다.
달 좋은 보름 동안은 外面당했다가도 달 안 좋은 보름 동안은 또 그렇게 理解되는 것이었지요.
- 「알묏집 개피떡」 에서
이 텍스트에서 '알묏댁'이 신비체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여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을 일찍 여윈 것과 관련이 있다. 알묏댁에게 남편의 부재는 성에 대한 욕망의 결핍을 의미한다. 이 욕망의 결핍은 육체적 원리인 원초적 생명활동을 억압하는 무의식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것이 남근중심의 유교적 사회문화에서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알묏댁이 생명을 팽창시키고 완성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 저 너머에 있는 우주적 공간으로 눈을 돌리는 일이다. 이 텍스트에 나타난 '바다-달'은 바로 알묏댁이 발견한 우주공간이다. 알묏댁이 '바다-달'을 선택한 이유는 태양이 남성과 은유적 관계에 있듯이, '바다-달'은 여성과 은유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22) 부연하자면 '바다-달'의 우주적 리듬을 가장 잘 따르는 것이 바로 여성의 인체적 리듬이라는 사실이다.
알묏댁은 '바다-달'의 우주적 리듬과 합일을 통해서 그 동안 억압받았던 생명력을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다. '보름달=보름사리(바다)'는 생명의 팽창을 나타내는 상승의 공간이듯이, 알묏댁 역시 이 원리와 결합되어 '서방질'23)을 하게 된다. 이것은 곧 생명력의 팽창이며, 이로써 알묏댁은 억압적인 인간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반대로 시간의 변화에 따라 '그믐달=조금(바다)'인 하강공간이 되면 그녀의 생명력도 응축되면서 그녀 역시 억압이 존재하는 현실적인 마을 공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주적 리듬과 인체적 리듬이 합일된 그녀이기 때문에 생명의 억압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맵시 있고 맛있는 '개피떡'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풍요를 선사하며 생명을 확장시키는 인물로 탈바꿈한다. 서정주는 이와 같은 알묏댁을 통해서 인체 리듬과 우주 리듬이 합일된 순환론적 시공간만이 지상의 인간적 삶을 조화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정주에게 순환론적 세계는 다른 것이 아니다. 우주 순환의 원리인 우주적 리듬(보름달이 그믐달이 되는 것처럼)을 인체적(몸) 리듬으로 수용하여 몸의 우주화를 만드는 것이다. 근대의 합리적 세계에서는 오직 생명의 팽창(연장)만을 욕망한다. 문제는 그 인위적인 욕망 때문에 오히려 생명 자체를 죽이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순환론적 세계에서는 생명의 팽창과 응축이 순환·반복되는 리듬을 따르기 때문에 생명의 세계가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서정주의 이러한 순환론적 시공간(인간과 우주의 합일)에 대한 인식은 윤회의 생명사상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 「내가 돌이 되면」 전문
이 텍스트의 구조는 지극히 단순하다. '나'로부터 시작한 우주의 생명 과정은 '나(인간)-돌(무기물)-연꽃(식물)-호수(유기물)'로 이어지고, 또 반대로 '나-호수-연꽃-돌'의 윤회적인 순환의 과정을 거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구조에 의하면 '인간/무기물/식물/유기물'로 대표되는 각 대립적 존재들이 하나의 주체적인 생명체로 통합되고 있다. 또한 생명의 진행과정에 있어서 존재의 우열과 위계적 질서 없이 평등한 관계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생명의 순환적인 윤회의 형식에 있기보다는 그 조건과 마음에 있다 '내가 무엇이 된다'는 조건은 타자의 존재성을 인정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의 순환적 시간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타자의 타자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더불어 그 마음에 있어서 타자를 '환대(歡待)로서의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를 환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호수가 될 수 있다. 호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순환의 윤회를 거치게 되면 종국에는 본래의 '나'로 돌아오게 된다. '나→호수→연꽃→돌→나'로 말이다. 시인이 '나'로의 순환 과정을 생략한 것은 이러한 상상력을 독자들에게 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서정주는 순환적인 생명의 시공간을 지상적 공간(호수, 연꽃, 돌은 지상적 존재들임)에 머물지 않고 천상의 공간 즉, 하늘까지 비상시키고 있다. 「冬天」 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썹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冬天」 전문
이 작품의 주제는 "생명의 투명화를 지향하는 노력"24)인 동시에 "한국인의 정신적 생명의 표면장력을 유지해 주는 지고한 사랑"25)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명의식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먼저 시인의 공간적 상상력을 보도록 하자. 시인은 지상과 천상을 절연된 대립적 공간으로 보지 않고 있다. 또한 지상적 가치와 천상적 가치가 상호 교환될 수 없는 고정적 실체로도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시인의 행위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인이 지상적 가치를 지닌 '고운 눈섭'을 하늘에 옮겨 심는 행위는 상상적으로 '하늘'을 정신적인 공간이 아니라, 물질적인 공간, 즉 대지의 공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대지의 공간이지만, 그 공간에는 세속적 가치가 없다는 점이 따를 뿐이다. 시인이 물의 이미지를 지닌 '즈문밤의 꿈'으로 눈썹을 '맑게 씻어서 심는다'는 것은 곧 지상의 세속적 가치를 정화하는 제의(祭儀)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에 의해서 지상과 천상이 역전되는 기호적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늘은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무한한 초월의 공간이 아니다.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때묻지 않는 공간이다.26) 그래서 하늘에 심어진 눈썹은 지상적 삶을 완전히 초월한 눈썹이 아니라, 지상의 세속적 가치를 정제한 육체성의 눈썹, 생명의 눈썹이다. 그 눈썹은 하늘에 의해서 갈등 없는 육체적 삶을 영원하게 살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바로 하늘에 대한 타자성이다. 주지하다시피 타자성은 타자에 대한 예의와 환대로부터 시작된다. 이 텍스트에서 그러한 타자성이 다름 아닌 '맑게 씻는 행위'이다. 세속적 가치를 지닌 눈썹을 무조건 심는다는 것은 타자(하늘)를 배려하지 않고 소유하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눈썹의 생명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비껴가던 새가 날아와 쪼아버릴 테니까.
이와 같이 서정주는 생명의 영원성을 시·공간의 순환에서 찾고 있다. 이 순환에 의해서 인간의 생명은 유한성을 초월해 영원성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순환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뿐만 아니라, 지상과 대립하는 하늘까지 인간과 상호 연관된 생명의 세계로 보는 데에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서정주는 우주공간 전체가 보이지 않는 생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보이지 않는 생명의 끈에 인간의 생명을 위치시킬 때 인간의 생명도 그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 것이다.
Ⅵ. 마무리
서정주는 인간의 생명을 정신과 육체의 분리, 통합의 역설적인 과정으로 이해한다. 정신적인 삶도 육체적인 삶도 그 자체로는 생명을 생명답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자연과의 분리, 통합의 과정 없이는 생명 그 자체를 극대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닌 유한한 생명의 한계도 극복할 수 없게 된다. 반생명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현대문명 속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생명의 자기 실현과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신과 육체의 통합, 인간과 자연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서정주는 그 모순의 통합적 원리로 타자의 타자성을 들고 있다.
타자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타자를 '환대(歡待)로서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를 환대의 존재로 받아들일 때 '나'와 '타자'의 고유한 본성이 배제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에 대한 본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타자와의 유기체적인 생명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서정주의 시에서 타자성을 잘 실현하고 있는 존재들은 '신화적인 여성들과 배설의 원리를 지닌 비천한 육체, 바다, 산, 하늘' 등이다. 서정주는 이러한 타자성을 통해 상생과 순환의 우주적 시·공간, 즉 '땅-바다-하늘'의 유기적인 공간 속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생명에 대한 윤회사상도 다름 아닌 타자성의 실현에 지나지 않는다. 타자성을 전제로 하여 인간의 신체 리듬과 우주의 리듬이 일치할 때, 인간과 자연의 생명은 상생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은 현실적인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우주공간의 차원으로 그 생명을 확대할 수도 있다. 서정주 시에서 자연이 모성적 원리로 나타나는 것도 그러한 리듬이 일치할 때임은 물론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생명시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상생과 순환의 우주적 원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은 죽임의 세계를 그 속성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서정주의 생명시 정신과 창작 방법은 현대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한국시문학의 가능성을 마련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연하자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생명을 탐구하기 위해, 그가 동원한 신화나 불교적 상상력이 바로 그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시적 상상력은 삶을 신비화하거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성중심의 합리적 세계가 파악해 낼 수 없는 생명의 비밀과 가치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서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상생의 공간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남은 과제는 그의 시정신과 시적 방법을 어떻게 한국시문학에 확장하고 전개할 수 있는가를 탐색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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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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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ryll Glotfelty & Harold Fromm ed, The Ecocriticism Reader, Athens and London:Georgia Univ.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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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생태학이란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1869년 독일의 생물학자이며 철학자인 에른스트 헤켈이다. 그가 말한 생태학을 쉬게 풀이하면 식물이나 동물 같은 유기체가 물리적 환경과 맺고 있는 총체적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문학생태학'이라는 용어를 맨 처음으로 쓴 사람은 미국의 문학이론가인 조셉 미커이다. 그에 의하면, 문학이 자연과 환경을 지킬 수 있는 일을 떠맡아야 인간의 생존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한다. 김욱동, 「문학생태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생태학을 위하여」, 민음사, 1998, pp.24~30. 참조.
2 동인지 체제인 《시인부락》 은 1936년 11월에 첫호를 발간하면서 한국시단에 얼굴을 내밀게 되는데, 이 동인지의 발행자는 당시 혜화전문에 다니고 있던 학생 서정주였다. 당시의 시단 정황으로 보면 이미 《金星》, 《詩苑》, 《時文學》 등 쟁쟁한 잡지가 있었고, 거기에 저명 시인(정지용, 김영랑, 신석정, 박용철, 김기림)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인부락의 출현은 큰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이 동인지는 문학사의 변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부락》 의 존재 자체가 한국 시단에 충격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김영랑의 언어 조탁의 미, 김기림의 현대적 감각의 모더니즘, 李箱의 초현실주의적인 실험시와 달리 그 당시의 시대적 민족적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 인간과 생에 대한 절박한 인식을 시적 상상력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김용직에 의하면 이 잡지의 동인들 작품은 세 갈래 의식으로 포착된다. 그 하나는 함형수, 김세진 등에 나타나는 모더니즘계의 단면이고, 다른 하나는 오장환, 여상현, 이성범 등에 나타나는 사회의식, 현실비판 의식이 그것이고, 마지막으로 서정주 시에 나타나는 생존방식에 대한 뜨거운 열기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원초적 생에 대한 열기를 '純裸'로 노래한 서정주이다. 김용직, 「시인부락 시대」, 『한국현대시사2』, 한국문연, 1996, pp.42~48. 참조.
3 류근조, 「미당(未堂)시에 있어서 ethos적 영원성에 관한 연구」 , 「한국현대시의 은유구조」, 보고사, 1999, p.210.
4 여기서 생명시란 생명 자체를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시이며,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가치와 위상, 생명 고양의 조건을 살피어 그 중요성을 시적 상상력 속에 구체화하는 시를 말한다. 신덕룡, 「생명시의 성격과 시적 상상력」, 《시와사람》, 1999년 겨울호, p.104 참조.
5 프리초프 카프라, 『생명의 그물』(김용정?김동광 옮김), 범양사, 1998, pp.389~391. 참조.
6 이승환, 「'몸'의 기호학적 고찰」, 『삶과 기호』(한국기호학회 엮음), 문학과지성사, 1997, p.52.
7 이 글에서 인용하는 모든 작물은 『미당 서정주 시전집1』(민음사, 1991)에서 하기로 한다. 이하 각주는 생략하기로 함.
8 초기시에서 서정주는 자연을 남성과 대립하는 여성적 이미지로 보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점을 시사해 주고 있는데, 근대적 이성에 의하면 남성은 여성에 비해 이성, 능동, 공격, 정신, 문화 등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에 비해 여성은 감성, 수동, 방어, 육체, 자연 등의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이러한 사유에 의하면 근대의 합리적 세계에서의 '자연'은 '여성'과 함께 남근적 권력에 종속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서정주가 표현하고 있는 여성(자연)적 이미지는 바로 남근의 권력적 기표에 저항하는 하나의 시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9 붉은색과 푸른색은 공간적 기호로도 의미작용을 산출한다. 붉은색은 생기에 차 있고 활동적이며 동요하는 색으로 사탄 레드를 연상시키며, 격렬한 감정과 육체성을 상기시킨다. 반면에 푸른색은 인간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는 냉담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을 일깨워 주게 된다. 그리고 그 냉담함으로 정신성을 상기시킨다.(칸딘스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權寧弼 譯), 열화방, 1979, pp.75~85. 참조.) 이런 점에서 붉은색은 하방공간적 의미를, 푸른색은 상방공간적 의미를 산출한다고 볼 수 있다.
10 서정주의 생애를 지배해 온 것이 그 숙명적인 바람이라면, 그러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은 '피'이다. 그의 생애는 단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피를 어떻게 다스려 나가는가 하는 고된 싸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천이두, 「지옥과 열반」, 『미당 연구』, 민음사, 1994, p.51. 참조.
11 인간은 피의 원리로 순환한다면 우주(자연)는 물의 원리로 순환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과 우주는 상동적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주적 원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12 북친에 의하면 자연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조직하는 하나의 유기체이다. 그래서 자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주체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인간이 그러한 자연의 주체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생태적 감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태적 감성'이야말로 자연에 내재하고 있는 자유의 논리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진우, 「자연의 자유, 인간의 필연」, 「녹색 사유와 에코토피아」,문예출판사, 1998. pp.191~200. 참조.
13 오세영에 의하면, 자연적 공간을 구성하는 두 요소인 '산'과 '바다'가 문학적 공간으로 제시될 때에는 대체로 외적 공간, 내적 공간, 관념적 공간 등 세 가지 유형으로 형상화 된다. 여기서 내면적 공간은 자연을 내면적으로 사유하여 어떤 철학적 혹은 인생론적 진실을 추구하는 작품을 말하는데, 서정주의 '바다'는 신화적 상상력을 원용한 내적 공간으로서 우리 시대의 비극적 삶을 초월하려는 하나의 방식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세영, 「현대시와 자연 그리고 문화」, 「현대 한국문학100년」, 민음사, 1999, pp.317~9. 참조.
14 산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푸른색의 하늘과 달리 인간과 친화적이다. 더욱이 이 텍스트에서 산은 옥색에 생명을 부여하는 靑苔를 끼게 할 뿐만 아니라, 지상의 전율하는 관능적인 피를 玉색(옥돌)으로 정제시키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자연 속에서는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구분이 없기도 하지만, 그 옥색은 인간으로 하여금 차츰 하늘을 닮아가게 한다. 김화영은 그러한 상태를 '완만한 상승의 속도', 혹은 '태연한 관조의 거리감'이라고 표현한다. 김화영, 「玉빛의 상승」,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 민음사, 1984, pp.43~5. 참조.
15 시적 화자의 어조로 볼 때 '괜,찮,타'라는 말은 아주 느리고 완만하면서 애정이 담겨있는 목소리로 나타난다. '괜찮타'라는 말에 쉼표를 삽입해서 하나하나 끊어서 읽도록 한 것도 그러한 어조를 만들기 위한 장치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어조가 시적 의미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괜찮타'라고 말하는 주체는 시적 화자이지만, 그것은 진정한 주체가 아니다. 사실은 '눈'이 인간과 사물에게 건네고 있는 말을 시적 화자가 시적 형식을 빌어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시적 화자가 '눈'을 단순한 물질적 현상으로 보지 않고 '눈'을 자기보다 큰 타자, 즉 우주적 존재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는 인간과 우주가 조화롭고 상생적인 관계임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6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 1998, pp.105~111. 참조
17 김윤식에 의하면 이 텍스트에서의 '노래'는 예(藝)를 의미한다. (김윤식, 「서정주의 "질마재신화"攷-거울化의 두 양상」, 《현대문학》, 1976, 3. p.255. 참조.) 그렇다면 그 예는 무엇일까. 그 예는 다른 것이 아니라 물질적 삶의 실상을 정신적 삶의 실상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상가수가 노래를 통해서 똥오줌 항아리라는 물질적 삶의 실상을 정신적 삶의 실상인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18 심층생태학자들에 의하면, 심층생태학적 인식은 영적 또는 종교적인 인식이 된다. 영적 또는 종교적인 인식이라는 것은, 인간 정신이라는 개념이 각 개인들이 전체로서의 우주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학적 의식을 가지고 이를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서정주의 생명시는 심층생태학의 원리를 실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프리초프 카프라, 앞의 책, p.23. 참조.
19 바흐친에 의하면 문학의 카니발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육체성'을 기본 원칙으로 하여 그것을 그로테스크 한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이 표현을 통해 공식적인 제도나 관습, 그리고 권위로부터 생겨난 정신적이고 이상적인 것, 성스럽고 고상한 것들을 물질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려 해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카니밭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억압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는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김욱동, 「카니발 웃음 민중」, 『대화적 상상력』, 문학과지성사, 1991, pp.241~9. 참조.) 이러한 카니발을 생태학과 관련시키면 근대적 합리성에 의해 억압된 모든 생명체들을 자유와 평등의 세계로 복원하는 생명문학이 된다고 하겠다.
20 '똥오즘 항아리'가 '우주적 항아리'로 변신하는 데에는 천상적 기호인 '눈'과 '비'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눈과 비와 배설물이 하나가 되면서 '똥오줌 항아리'는 명경의 기능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상생의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똥오줌 항아리'는 인간과 자연의 주체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상생의 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이 명경화에 의해 하늘과 인간의 기호가 역전되는 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가령 하늘의 별과 달이 명경 속이라는 하방공간에 위치하게 되고, 그 때문에 인간이 상방공간에 위치하게 된다. 이러한 공간의 역전 현상은 바로 자연적 삶에는 주종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심리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21 서정주 시에서 상생의 삶을 만들어 내고 있는 대상은 거의 전적으로 여성들이다. 그리고 이 여성들은 성적으로 남성보다 매우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시인이 이렇게 성적 에너지가 강한 여성들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그러한 여성들이야말로 대지의 원리와 같이 다산의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신화적 공간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가령, 여성들은 대지와 달이라는 우주적 풍요의 중심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풍요에 영향을 지대하게 미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그것을 분배할 수 있는 권위를 획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경사회에서는 여성이 지배적인 역할을 해왔다.(미르치아 엘리아데, 「대지, 여성, 풍요」, 「종교사 개론」(이재실 옮김), 까치, 1994, pp.245~7. 참조.) 물론 이러한 여성적 이미지를 생명시로 환원한다면, 남근 중심주의에서 억압받아온 자연적 생명들을 복원시키는 기표로서의 여성이 된다.
22 보편적으로 '달-바다-여성'은 주기적 재생이라는 원형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인 여성과 우주인 자연이 가장 잘 합일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 앞의 책, pp.153~4. pp.167~8. 참조.
23 이 텍스트의 구조로 볼 때, '서방질'의 대상은 '달'이 된다. '달'은 거의 여성과 동일한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아주 드물게 많은 민족 사이에서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을 의인화하여 '여자들의 주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르치아 엘리아데, 앞의 책, p.163. 참조.
24 김재흥, 「하늘과 땅의 변증법」, 《월간문학》, 1971년 5월호, p.273.
25 류근조, 앞의 책, p.226.
26 지상과 천상의 기호역전 현상은 서정주 시의 궁극적인 도달점이기도 하다. 인간과 하늘이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유한성을 극복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에서는 눈썹이 상승하여 하늘의 대지에 가서 생을 확장하고 있지만, 작품「光化門」 에서는 하늘이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과 함께 살기도 한다. 가령 "지붕과 지붕사이에는 新房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層엣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마련이다.// 玉같이 고으신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려 함이렸다."에서 볼 수 있듯이, 광화문의 신방같은 다락에는 고운 사람과 천상적 존재인 푸른 하늘이 내려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다락방)은 지상의 하늘화라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광화문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지상적 삶을 정화시키면서 하늘로 비상하는 새의 존재('광화문'을 새의 이미지인 "날개쭉지에" 비유하고 있으니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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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정유화
(Jeong, Yu-Hwa)
중앙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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