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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근대성의 회의와 자기동일성의 부정

온울에 2008. 5. 8. 13:12

목 차

1. 서론
2. 추악한 일상과 물화된 욕망 ? 생활적(生活的)
3. 자아와 세계의 필연성 부재 - 「미해결의 장」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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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崇實語文學會 
학술지명 崇實語文 
ISSN  
권 19 
호  
출판일 2003.  




근대성의 회의와 자기 동일성의 부정
(손창섭 소설론)


The Study on the Sohn, Chang-Sub novel's characteristics


강운석
(Kang, Woon-Seok)
1-108-0301-02

국문요약
본 연구는 손창섭 소설에 나타나는 근대성 거부의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 손창섭은 1950년대 문학의 자화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문학적 주제가 절망과 허무 그 자체라는 사실은 1950년대 문학의 본질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실제로 손창섭 소설의 경우 거의 전 작품에 절망의 고통과 그로 인한 세계에 대한 허무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된 생활과 극도의 가난에서 비롯된 이러한 절망과 허무는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상태로 소설에 그려진다.

손창섭의 소설들의 경우 인물들은 '무력한 관찰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참혹한 전쟁 뒤에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더욱 교활해진 사람들 앞에서 인간성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일상은 근대라 불리기 무색할 정도로 폐허에 가깝다. 손창섭 소설의 일상은 삶이 곧 죽음인 극단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손창섭에게 일상은 무의미성으로 의미된다. 일상은 단지 또 다른 죽어가는 자아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소설 「생활적」의 벌레보다 못한 삶과 소설 「미해결의 장」의 무기력한 생활은 그토록 화려할 것 같았던 근대적 일상이 오히려 참혹한 원시의 일상으로 붕괴되어 버린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더욱 탐욕스럽게 일상을 살아간다. 이러한 모순된 근대성을 손창섭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손창섭은 타자와의 대비를 이미 무의미한 것으로 상정하고 세계와의 대립을 통해 끊임없이 동일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손창섭의 경우는 문학을 사회와 인간과의 부조리한 관계를 드러내주는 기제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하지만 세계 대 인간의 무의미한 대립 속에 '나란 무엇인가'하는 지속적인 동일성의 탐구로 이어진다.

결국 그의 소설들은 비현대성, 비문화성, 비일상성의 특성을 갖는 근대성 거부의 미학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글키워드
근대성, 일상, 동일성, 자아, 부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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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손창섭은 1950년대 문학의 자화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문학적 주제가 절망과 허무 그 자체라는 사실은 1950년대 문학의 본질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실제로 손창섭 소설의 경우 거의 전 작품에 절망의 고통과 그로 인한 세계에 대한 허무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된 생활과 극도의 가난에서 비롯된 절망과 허무는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상태로 소설에 그려진다. 그의 소설의 대부분의 인물들 역시 공통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월남하여 고통받는 「비오는 날」의 원구와 동욱 남매, 극도의 가난으로 피폐해진 「생활적」의 동주와 「혈서」의 달수, 또 전쟁과 이데올로기 투쟁의 상처 때문에 방황하는 「잉여인간」의 봉우와 「사연기」의 동식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여타의 작품들에서도 전쟁과 분단, 극도의 가난은 언제나 절망적 참의 우울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손창섭 문학의 특질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요소는 '인물들의 이상 성격'이다. 그의 인물들은 비정상적인 공상가이거나, 의욕상실자, 무직업자 등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극도의 소외자들이다. 또한 손창섭 소설의 인물들은 극단적인 결핍감에 시달리고 있는데 여기에는 손창섭 자신의 결핍감이 투사되어 있다. 손창섭이 사춘기에 경험한, 어머니에 의한 '존재의 부정'은 이러한 결핍감의 근원이다. 손창섭은 해방된 조국에 사춘기의 성적 경험에서 기인한, 정신과 육체의 고아'라는 부당한 결핍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의 희망은 해방공간의 불안한 시대적 참황과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만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작품에서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으며 타인에 의해서 좌절될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따라서, 손창섭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동일성의 부정'에 있다고 할 수 었다. 그 부정의 원인은 전쟁, 가난, 수용소, 감옥 등 인간의 이성으로는 버틸수 없는 한계 상황들이 주체에게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함으로써 빚어지는 참혹한 일상에 있다. 주체는 자기 분열을 넘어서 자아 혐오로 극단화된 양상을 보인다. 높은 학력의 소지자이면서도 무위도식하고 삶보다 죽음을 찬양하는 이러한 극도의 자기 비하, 자아 혐오는 주체의 철저한 무력화로 소설에 형상화되고 있다. 195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하에서 빚어지는 이러한 인물상은 속물적 인물군과 대비되어 이상적 자아가 철저하게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다.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이 '근대'에의 열망이 좌절되자 무력화되어 세속적 일상으로 퇴행하는 것과 달리 손창섭에게는 애당초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는 거세된 관념이었다. 전쟁이라는 한계 상황이 바로 그러한 인식을 불러일으켰으며 따라서 그에게 있어 '일상'이란 현실이 아닌 마치 관념 속의 다른 세상처럼 낯선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여인이 창녀 노릇을 해도 별 느낌이 없고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자기를 벌레 취급하는 상황에서도 주체는 어떠한 실천적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실천적 의지란 욕망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손창섭은 '박제가 된 천재'인 소설가 '이상과 유사한 현실 인식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에게는 근대라는 변하지 않는 욕망의 고지가 있었다. 그래서 퇴행적 현실속에서

도 '날자, 다시 한번 날자꾸나'라는 의지를 표출하고,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동경행을 선택한다. 그러나 손창섭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절망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세계관인 '비현대성, 비문화성, 비일상성'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손창섭 소설을 일상과 욕망 측면에서 살펴보고 근대성에 대한 의식과 인물의 내면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자아와 세계 사이의 동일성의 양태를 분석하고자 한다.

2. 추악한 일상과 물화된 욕망 ? 생활적(生活的)
소외된 인물의 참혹한 일상이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은 1954년 『현대공론』에 발표된 「생활적(生活的)」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삶의 욕망이 퇴행된 주체의 비참한 일상과 대비되는 세속적 타자의 탐욕, 그리고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현대성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비판이 주체의 동일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아침이 되어도 동주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송장처럼 그는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음은 지칠 대로 지쳐 버린 것이다 몸뿐이 아니다. 마음도 곤비(困憊)할 대로 곤비해 있었다. 심신이 걸레 조각처럼 되는대로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것이다.1)

인물 동주에 비유되는 것은 '송장'과 '걸레 조각'이다. 그것이 은유의 형식이 아닌 직유의 형식이라는 데 의미의 증폭은 커진다. 송장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고 걸레조각이란 존재적 가치의 비하이다. 따라서 그에게 삶에의 의지나 열망은 애당초 기대하기 힘든 것으로 작가는 단정해 놓고 있다.2) 주인공의 삶을 규정하는 '걸레조각'이라는 표현은 주인공이 직면한 삶의 물질적 조건뿐만 아니라, 그 물질적 조건에 위에 있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표상이다. 동주의 이러한 성격은 딱히 외적 요인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전쟁의 비참함을 겪으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주어진 동주의 성격이고, 그것은 그대로 인간의 존재와 행위의 무의미함을 일깨워주는 작가의 시각과 한 치의 거리도 없이 일치 한다.

손참섭 소설의 한 특징인 세부묘사의 치밀함도 그것이 올바른 의미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부정적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삶과 인간에 대한 환멸을 일깨우는 작용을 할 뿐이다. 동주가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반공포로 수용소의 비참한 수형생활 때문이었다. 예외 없이 전쟁에 기인하여 참혹한 지경에 이른 인간의 군상이다.

식구라곤 장기간 병와중인 열네 살 먹은 딸뿐이다. 순이라고 한다. 뒷간 출입도 온전히 못하는 순이는 진종일 누운 채 그 무겁고 단조로운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 일이었다 "으응, 으응, 으응." 그것은 마치 무덤 속에서 송장이 운다면 저러려니 싶은, 듣는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생각게 하는 암담한 소리였다‥‥ 그것은 마치 신음 소리를 내기 위해서 장치한 기계와도 같았다. (62쪽)

물귀신 울음소리 같은 소리만을 반복하는 '순이'는 다 무너져 가는 집의 옆방에 사는 봉수의 딸이다. 그러나 순이의 신음소리는 '머지않아 죽을지도 모르는 순이의 최선을 다한 생활'이다. 아이러니하게 동주가 그나마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생활을 하는 것은 순이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다. 아버지 '봉수'마저 돌보기를 포기한 딸을 돌봄으로써 죽음을 예감하는 순이와의 동류의식과 혼란한 상황을 오히려 최고의 시대로 인식하는 봉수에 대한 경멸과 적개심만이 그나마 동주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자신을 '미스터 고상'이라고 부르는 봉수는 시대에 가장 약삭빠르게 적응하는 인물이다. 그의 논리는 '인간이란 시대의 추세에 민감하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대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잘 보아 가지고, 언제나 그 시대에 맞게 행동해야 된다는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져 허덕이거나, 시대의 중압에 눌려 버둥거리지만 말고, 시대와 병행하며, 그 시대를 최대한으로 이용해야만 된다고 했다. 결국 인간이란 수하를 막론하고, 종국적인 목적은 돈모으는 데 있다는 것이다.’라는 것으로 늘 동주를 훈계하는 식이다. 게다가 자신의 동거녀 '하루코'에 까지 은근한 욕정을 내비친다.

손창섭 소설은 50년대 한국 사회가 제시하는 물화된 욕망의 기표인 '돈과 섹스'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거부는 그러한 가치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인물들에 대한 모순된 시선에서 잘 나타난다. 손창섭은 아이러니를 통해 물화된 가치의 부정성을 폭로함으로써 욕망과 유토피아적 욕망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동주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 하기보다는 체념한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대한 체험이 자아의 욕망을 철저히 억누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동주는 그린 듯이 누워 있었다. 훈기에 섞여 배어드는 지린내와 구린내를 어쩔 수 없듯이, 젖은 옷처럼 전신에 무겁게 감겨드는 우울을 동주는 참고 견디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삼십여년 간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만 오지 않았느냐! 죽음까지 참고 살아오지 않았느냐 말이다. 동지의 감은 눈에는 포로수용소 내에서 적색포로에 맞아 죽은 몇몇 동지의 얼굴이 환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올가미에 목을 걸린 개처럼 버둥거리며 인민재판장으로 끌려 나가던 자기의 환상을 본다 동시에 벼락같이 떨어지는 몽둥이에 어깨가 절반이나 으스러져 나가는 것 같은 기억. 세 번째의 몽둥이가 골통을 내려치자 '윽'하고 쓰러지던 순간까지는 뚜렷하다. 동주는 그만 가위에 눌린 때처럼 ‘어, 어'하고 외마디 신음소리를 지르고 몸을 꿈틀거려 돌아눕는 것이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약간 내배이는 것이었다. 옆방에서는 한결같이 순이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암담한 소리는 순이도 자기도 살아 있다는 유일한 신호였다. 살아 있다는 것은 동주에게 있어서 그냥 견딜 수 없이 뻐근한 상태일 뿐이었다. 무엇이든-하다못해 공기나마 담고 있어야 하는 항아리처럼,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희망을-아니면 절망이나 공허라도 채워져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65~66쪽)

동주의 계속적인 누워있는 행위는 죽음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직립을 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성취해 나간다. 누워 있다는 것은 이러한 모든 욕망의 원초적인 차단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서사를, 좌절된 욕망을 언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해소하려는 노력으로 간주하는데 이와 같은 관점은 손창섭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적 해결 중의 하나가 '죽음death 모티브로, 죽음은 주체가 처해있는 '인간적 조건을 묵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작품 속에 제시된다. 이것은 물화된 감각이 나타내는 유토피아적 사명, 즉 리비도적 만족이 고갈된 세계에서 그러한 만족을 상징적인 경험으로나마 회복하려는 소망을 억압하는 현실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아가 모든 생에 대한 불만과 의욕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포로수용소 내에서 죽어 가는 자기의 환상이 일상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정체되어 있는 일상과 욕망. 그 속에서 순이의 '그 암담한 소리는 순이도 자기도 살아 있다는 유일한 신호'가 된다. 순이는 소리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동주는 그 소리를 들음으로써 생의 유무를 판단한다.

따라서 순이의 신음은 중요한 기호적 의미를 가진다. 순이의 신음은 당대의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고난을 대변해주고 그 신음을 듣는 동주와 같은 인물은 비록 죽어가나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을 대변한다. 이는 봉수와 하루꼬로 대변되는 세속적 인물들의 탐욕적 욕망과 대립되며 소설 전체의 의미망을 구축한다.

손창섭에게 있어서 세계는 욕망하는 주체들이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싸우는 약육강식의 장으로 인식된다. 손창섭은 스스로를 이러한 약육강식의 장에서 패배한 인물이라고 느끼며, 타인들을 '나도 가질 권리가 있는 그런것들을 독점한 채 분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와 위선에 찬 적'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그의 피해 의식은 '복수심'과 연결되어 과격한 언동을 낳는데, 이것들은 '불의와 부정을 응징하는 정의감에서 나온 것으로 합리화된다. 이러한 책략을 통해 욕망을 좌절당한 자아는 자신을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주체로 설정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세계와 대립되는 자아의 동일성은 더 확고해져 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세계관의 형성 원인은 인간을 죽음에 방치하는 몰인간성의 깊은 회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볼 수 있다. 순이의 병은 실상 순이 아버지의 방관에 의해서 더욱 깊어진다는 사실은 상황의 비극성을 확대시키고 있다. '무슨 병이든 날 때 되면 낫고야 만다는 것이며 '저절로 낫지 않는 병이라면 아무리 돈을 써도 소용 없다는 것'이라는 순이 아버지의 말은 동수의 현실에 대한 증오감을 극도로 증폭시킨다.

그러니 병명조차 모르는 채 순이의 몸은 나날이 못해만 갔다 푹 꺼져 들어간 순이의 두 눈에는 빛이 없었다. 피부색도 희다 못해 푸른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순이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주는 벌써부터 그렇게 생각해 오는 것이었다. 동주는 다가앉아 얼굴을 들여다보며 벼르던 말을 물었다. '거 죽고 싶으냐?" 소녀는 금시 얼굴이 긴장해겼다. 퀭한 눈으로 동주의 얼굴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순이는 필시 자기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거나, 오해한 것이라고 동주는 생각했다. 좀더 분명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죽고 싶지?" 소녀는 약하기는 하나 날카롭게 '으악' 소리를 지르고 담요로 얼굴을 쌌다. 순이는 전신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횐자 많은 동주의 눈이 담요 속에 감추인 순이 얼굴을 원망스러이 노려보고 있었다. (66~67쪽)

위 인용문에서 순이는 동주의 또다른 자아임을 확인할 수 있다. '흰자 많은 동주의 눈'은 곧 죽음을 목전에 둔 자신이고 담요 속에 감추어진 순이의 얼굴을 보기 원하는 것은 곧 죽은 뒤의 자신을 보고자 함이다. 현실에 대한 극렬한 증오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자아에 대하여 '원망스러이 노려볼' 뿐인 것이다.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의 세계관이 비극적 근대의식으로 마무리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탈피하고자 하는 일상은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는 않다. 이에 비해 손창섭 소설의 일상은 삶이 곧 죽음이라는 극단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손창섭에게는 일상 자체가 무의미함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또 다른 죽어가는 나를 발견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추악한 일상은 '물 길어오기' 삽화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물을 길러가는 행위 자체가 삶의 고통으로 그려진다. 좁은 산 비탈을 올라가는 길 곳곳에는 '똥 오줌 천지이고 샘물에 가서도 우악스러운 여편네들에 밀려 좀처럼 물을 풀 수 없는 것이다.3)

그렇기 때문에 이 산 전체가 거름더미같이 지린내와 구린내를 쉴 사이 없이 발산하는 것이었다. 밤에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낮이라도 조금만 부주의하면 똥을 밟기가 예사였다. 우물터에 가고 오는 길에서 동주는 여러 번 그 지독하게 독한 인분을 밟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때 동주에게는 이 일대 주민들이 온통 구더기처럼만 보이는 것이었다. 이 방대한 거름더미에서 무수히 꿈틀거리고 있는 구더기, 구더기. (68쪽)

'구린내 나는 산과 밟히는 똥'처럼 일상은 추악한 것이고, 그 일상을 사는 탐욕의 인물들은 '구더기'와 같이 형이하학적이다. 간신히 물을 길어 오고 그 피로 때문에 방에 쓰러져 누우며 동주는 이렇게 생각한다 "주체하기 힘들도록 무거워진 몸을 방안으로 옮겨 간다. 쓰러지듯이 동주는 한구석에 누워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린내와 구린내 속에서 그는 파리와 벼룩의 엄습을 참고,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동주는 옆방에서 들려 오는 순이의 그 무거운 신음 소리를 들으며, 순이보다는 되레 자기가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 상황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원인은 외부의 환경 탓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성격과 의지에서 심한 결함이 있음을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치열한 자기 반성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시간의 해결 앞에 내어 맡겨 버리는' 욕망의 퇴화는 사건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현실에 대한 욕망과 의지는 스러져 가는 육체와 함께 소멸되어 간다. 우연히 만난 춘자와의 동거 역시 그렇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집으로 짐을 옮기고 밤마다 섹스를 원하는 그녀는 마약장수 봉수와 탐욕적이고 세속적인 면에서 다를 바 없는 인물이다. 이렇게 상황은 점점 비참해져가고 여름날 순이가 보여주는 역겨운 행동은 점점 폐허화하는 현실에 대한 혐오적인 비유이다.

수건 하나 가리지 아니한 알몸으로 순이는 누운 채 허리를 굽혀 자기의 사타구니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자연 동주의 시선도 순이의 사타구니로 끌렀다. 그 어느 한 부분에 쌀알보다도 적은 생명체가 여러 마리 꼬무락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동주는 그게 이가 아닌가 생각했다. 순이도 그때야 깜짝 놀라 동주를 흘겨보며 담요로 몸을 가렸다. 곧 자기 방으로 돌아온 동주는 그제야 그 조그만 생물들이 이가 아니라 구더기인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순이는 이제 오래지 않아 죽을 거라고 동주는 생각했다. (72쪽)

소설 가운데 세부묘사의 적절함을 가늠하는 것은 형상화 전반에 걸쳐 관철되는 원근법이다. 모더니즘이나 자연주의 문학에서 사용되는 세부묘사는 참다운 현실반영이라기보다는 주관적 논리에 의해 파악되는 현실의 개별적 단면에 머무르고 만다. 위의 인용문은 동주가 유일한 삶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열다섯 살짜리 결핵환자 순이의 방을 방문하면서 목격한 장면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인간관계로부터 소외되고 죽음을 목전에 둔 한 인간에 대한 묘사지만, 궁극적으로 이러한 세부묘사는 궁핍과 인간소외의 객관적 원인보다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환멸을 일깨우는 데 기여한다.4)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순이의 죽음을 통해 동주가 죽을 수 있는 희망을 품는 모습은 손창섭 소설의 비극적 세계관이 50년대 전체의 일상의 의미로 확대됨을 보여준다. '주검과의 입맞춤'은 죽음의 심연 곁에 있는 실존의 확인방식이다. 말하자면 '허무'와의 동화와 거리두기이다. 거부해야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작가(주인공)의 실존에 대한 각성과 그 실존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연민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만이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일상은 주체와 영원히 단절될 수밖에 없다. 손창섭 소설의 일상은 삶이 곧 죽음인 극단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일상은 단지 또 다른 죽어가는 나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체의 세속적 일상의 거부는 한계적 상황에서 실존하기 위한 '동일성’의 양태로 귀결된다. 때때로 그것은 자의식의 과잉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시대 상황을 견뎌내기 위한 의도적 대응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생활적」은 근대성의 회의를 통해서 세계를 거부하고 주체의 깊은 내면 탐구를 통해 자아의 동일성을 고착시켜나가는 손창섭 작품세계의 전형적인 형상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자아와 세계의 필연성 부재 - 「미해결의 장」
1955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미해결(未解決)의 장(場)」은 일상의 회의가 극한에 이른 주체의 상태를 표현한 작품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적 세계는 6.25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사회 현상에 근거한다. 주인공 지상은 존재의 기반 자체를 잃어버리고 허무의 심연으로 빠지게 된다. 근원이 되었던 전쟁의 상처는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로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질서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고 랄 수 있다. 주인공의 의식에서 전쟁에 대한 의식은 소거되고 그에 따른 가치 전복적 사고만이 남아 있다. 따라서 여전히 현실에서 무력하고 타인들에 의해서 소외되는 상태에서 그나마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은 자아의 동일성이다. 자아의 동일성을 잃지 않는 모습은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

이 작품은 「생활적(生活的)」과 더불어 아이러니의 특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물들은 지상의 식구들로 대표되는 허황된 속물적 인간들과 지상으로 대표되는 극도의 허무주의자로 나뉠 수 있다. 주인공 지상은 극도로 궁핍한 상황에서도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집과 매음녀 광순의 이부자리 속을 왕래하는 비정상적인 인물이다. 그러한 그는 일상의 무의미성에 괴로워하는데, 가족들이 지상명제로 삼는 미국 유학의 꿈과 가장 성실한 인간들의 집합이라는 진성회의 위선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이러한 것은 현실의 궁핍과 비참한 삶을 그럴 듯한 관념으로 치장하여 위안 받으려는 위선적 인간들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또한 「未解決의 章-군소리의 의미」는 제목 자체가 손창섭의 세계와 현실인식을 상징하고 있다. 세계 자체가 미해결, 해결을 볼 수 없는 곳이기에 어떤 일을 성취한다거나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의지는 그 자체가 군소리가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군소리의 의미는 비록 타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자아의 동일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속물적 인간들에게는 군소리이지만 일상의 해악을 직시하는 주인공의 피맺힌 외침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형식상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월 어느 날'이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유월 어느 날'이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소 특이한 장의 소제목(sub-title)은 주인공이 일상적 시간 인식에서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싶어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루가 의미있는 특별한 날이 아닌 그저 '어느 날’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반복되는 무료한 생활에 지친 인물의 무의미한 시간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앞서 「생활적」이 삶과 죽음의 경계의 무의미함을 보여주었다면 「미해결의 장」에서는 자신이 속해있는 공간에 대한 의문점이 주요한 테마가 된다. 우선 주인공 '지상'은 자신과 연관된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이다. 가난하면서도 맹목적으로 미국 유학을 꿈꾸는 식구들, 병에 걸려 동생이 매춘으로 벌어 오는 돈으로 기생하며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진성회'를 조직하여 자신의 진실함을 강조하는 문선생, 매춘을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유일한 지상에 대한 옹호자 '광순', 이러한 사람들 틈에서 무위도식하며 이방인(異邦人) 취급을 당하는 '나'가 있다. 이러한 미해결의 의문투성이인 일상에 대한 '지상'의 유일한 해결책은 가출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적극적인 해결을 위한 의지가 없기에 상황은 변하지 않고 현실에 대한 답답한 인식만이 반복된다.

오월 어느 날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나는 집을 떠나야만 할까 보다. 그것만이 우선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해결일 듯싶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 '해결'이라는 말은 더할 나위 없이 내 맘에 꼭 드는 것이다. 그 말은 충분히 나를 취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나는 언제나 되면 노상 집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하루에 몇번씩 혹은 몇십 번씩 '해결'을 생각하고 거기에 도취하면서도 종시 나는 해결을 짓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도무지 주위와 나를 어떠한 필연성 밑에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 이 방 안에 있어서의 내위치와 식구들과의 관계부터가 그러하다.5) (122쪽)

답보적 현실에 대한 미해결의 근본 원인은 자아와 세계와의 필연성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주체가 실천적 의지를 가지려면 우선 자아와 세계와의 인식이 문제인데 필연성이 부재하다는 것은 심각한 결핍의 양상이다. 우선 가장 밀착된 집단인 가족에서부터 식구들과 나와의 관계가 유리된것은 현실에 대한 가족들의 적극적 의지에 반해 모든 욕망을 상실한 나에 기인한다. 남루한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은 모두 미국 유학만이 해결책임을 강조하고 아버지는 그것을 부추긴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누워만 있는 나에게 자주 '죽어라 죽어라'를 반복하고 따귀를 때린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맞지 않으면 실망할 정도로 습관화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에 가야 할 하등의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그러한 비정상적 관계의 큰 원인이 된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자아의 일상에 대한 중압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고사하고 나는 요즈음 대학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납부금을 제때에 바치지 못해서만도 아닌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동기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나는 주위와 자신의 중압감을 감당해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이 대가리가, 동체가, 팔다리가, 그리고 먼지와 함께 방안에 빼곡 차 있는 무의미가, 나는 무거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125쪽)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은 거세된 욕망에 따른 사물의 무의미성 때문이다. 이 무의미함에 대해서 화자는 일체의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저 회피의 수단으로 문선생 집으로 가서 낮잠을 자는 것처럼 타인의 자신에 대한 학대에 철저히 순응할 뿐이다. 또한 공상으로 현실을 회피할 뿐이다. 공상을 통해 세계의 불안과 종말이 다름 아닌 '인간'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림은 작품 전체를 꿰뚫는 핵심적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주체의 본질적 문제점은 항상 '인간=박테리아라는 등식으로 성립되는 인간에 대한 혐오 의식이다. 세계가 이러한 치유할 수 없는 문제점에 이른 것은 인간 자체에 기인한 것이라는 결론은 그의 극도의 인간 혐오주의의 표출이라 하겠다. 따라서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결코 찾을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어이없는 공상에 취해 보는 것이다. 그 공상에 의하면, 나는 지금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병리학자인 것이다. 난치(難治)의 피부병에 신음하고 있는 지구덩이의 위촉을 받고 병원체의 발견에 착수한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박테리아에 의해서 발생되는 질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직도 그 세균이 어떠한 상태로 발생 번식해 나가는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치료법에 있어서는 더욱 캄캄할 뿐이다. 나는 지구덩이에 대해서 면목이 없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는 것이다. 아직은 활동을 못하지만, 고것들이 완전히 성장하게 되면 지구의 피부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야금야금 갉아 먹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병균에 침범당해, 그 피부가 는적는적 썩어 들어 가는 지구덩이를 상상하며, 나는 구명에서 눈을 떼고 침을 뱉었다. 그것은 단순한 피부병이 아니라 지구에게 있어서는 나병과 같이 불치의 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고 나는 발길을 떼어 놓는 것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공상이 맘에 들어서 나는 얼마든지 취한 채 걷는 것이다. (129~130쪽)

지상의 공상은 주체의 내면화이며 독백은 손창섭 문학의 내면화 경향과 관련해 다양한 시사를 던져준다. 우선 지상은 지구 현실과 멀리 떨어져 관조하는 관찰자이다. 지상이 실제 생활에서 받는 갖은 모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격 즉 동일성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현실과의 연관을 끊고 스스로를 철저한 관찰자로 유폐시킨 덕택이다. 현실을 마음대로 조소하고 내면과의 독백적 대화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상의 독백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인간관이다.

지상의 분석에 따르면, 인간은 '박테리아이다. (물론 그 '인간에서 지상은 제의된대 요컨대 인간이란 존재는 지구에 전혀 보탬이 안되는 일개 병균에 불과한 것이다. 손창섭 문학의 인물들이 어째서 하나같이 비정상적인지가 이로써 분명해진다. 인간은 원래부터 비정상적 존재인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비정상성 혹은 악마성은 워낙 근원적이어서 바뀔 가능성마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이 커서 지구를 갉아먹으리라는 섬뜩한 공상만을 계속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서도 아무런 가능성도 기대할 수 없다면 그 절망과 허무란 바닥없는 늪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우리는 손창섭 문학의 허무주의가 환경이 아니라 '인간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전쟁과 분단과 가난은 손창섭의 허무주의를 더욱 그럴 듯하게 장식해주는 소도구에 불과할 뿐이다.6)

이러한 허무주의의 빠져있는 지상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광순'이다. 광순은 집에서 쫓겨난 나를 미소로 반겨주고, 일터로 찾아오면 돈을 준다. 하지만 지상이 그녀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은 모두 자신을 이방인 취급하지만 그녀만은 자신에게 현실로 복귀할 것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필연성을 느끼지 않는 관계가 가장 편안하기 때문이다. '광순'은 그러한 지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타인이다. 따라서 '지상과 연애하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벌써 연애가 끝나고 위자료를 주는 관계라고 답한다. 시작도 안한 사랑에 대한 위자료란 「생활적」의 순이의 신음소리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동일시'이다. 비록 매춘으로 인하여 윤리는 파탄되었지만 실종되지 않은 이해와 사랑이 이 시대에는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광순의 단 한번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함으로써 지상의 무기력증과 인간 회피 그리고 자아의 동일성에 대한 괴리감은 극에 달한다.

"대체 날 뭣하러 찾아오곤 하세요? 지상은 나한테 뭣을 기대하느냔 말에요." 물론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짜장 광순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그건 확실히 내게는 과중한 질문인 것이다. 너는 왜 사느냐?하는 물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질문의 여독으로 인해서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골치가 아팠다. 광순의 미소에서도 나는 좀 실망한 것이다. 밝은 노트장의 여백에다. 이런 군소리를 끄적거리고 있는 지금도 나는 딱하기만 한 것이다. (141~ 142쪽)

광순은 일상의 복귀를 종용하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의 욕망 마저 잃은 나를 애처롭게 여긴다. 그러나 그러한 최소한의 관심마저 부담스러워하는 나의 타인에 대한 환멸은 인간을 '유령'으로 여기는 부분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인간도 '유령'도 아닌 막연한 자신의 몰골이라 표현한 것은 극도의 자기 혐오이자 자기 부정이다. 이렇게 극한에 이르러서야 주체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어디로든 가야한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출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행동으로 실천한 일이라고는 고작 자신의 집에 얹혀 사는 선옥이를 광순이의 오피스로 데려가 창녀로 취직시켜 주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 타락이라 볼 수 있지만 생존을 위해 그 생존 자체의 고귀함 위에 덧씌워진 사회적 윤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타락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윤리란 이미 실종된 하나의 요식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무력주의자나 속물주의자들보다는 창녀가 오히려 이 시대를 더욱 건강하게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지상의 의식은 극도로 혼돈스러워져 느닷없이 광순에게 큰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빼앗긴 재봉틀 찾을 돈과 동생들의 미국 유학비용, 하지만 어리둥절한 그녀를 보며 곧 잘못임을 깨닫고 후회하며 그곳을 허둥지둥 빠져 나온다.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의 구경(究竟)을 보여주는 이러한 손창섭의 문학적 실존주의는 당대의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주체의 아이러니이다.

"건방진 자식 ‥‥ 광순일 함부루 건드리지 말란 말이다!" 순간 나의 오른켠 귀청이 왕하고 울었다. 눈에서는 불이 튀었다. 그것은 고무장갑 같은 손이 아니었다. 내가 왼쪽으로 비틀거리자 이번엔 왼쪽 따귀에서 짝 소리가 났다. 연달아 주먹과 발길이 무수히 내 몸뚱이에 떨어졌다. 어디를 어떻게 얻어맞는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마침내 나는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턱과 손에 끈적거리는 선혈을 의식하면서, 무의식중에 나는, "광순이, 광순이!"하고 신음 소리처럼 불러 보는 것이었다. (155쪽)

광순이를 불러 보는 것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자아의 절규이다. 이 작품은 전후의 삶의 부조리와 그 부조리에 대한 부정을 동시에 드러낸다. 가난과 진성회의 이상 사이의 거리를 드러내며 비록 현재의 가난 때문에 좌절에 봉착하고 있기는 하나, 추구해야 할 보다 본질적인 을 제시한다. 결국 이 소설의 심층 의미는 '일상'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욕망의 퇴화 그리고 현실과 타인에 대한 거리두기와 자기 부정을 통한 역설적인 '동일성'의 유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4. 결론
1950년대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현실과 인간의 철저한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현실과의 단절은 일상과의 절연을 의미한다. 물론 그 원인은 당대에 벌어진 한국 전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발전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합리성을 지향하던 세계는 정상적 규범과 질서가 파괴되면서 반근대적인 야만과 혼란의 세계로 급격히 빠져들었다. 그 속에서 근대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포기하고 허무적 실존의식에 빠져들게 됨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손창섭의 경우에는 한계상황에서의 처절한 내면세계의 탐구를 추구했다.

손창섭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앞의 분석에 의하면 '무력한 관찰자'에 불과했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서로 다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더욱 교활해진 사람들 앞에서 인간성의 회복이란 요원한 명제였다. 일상은 근대라 불리기 무색할 정도로 폐허에 가까운 것이었다. 주체는 걸레 조각처럼 밝은 방에 널부러져 있고, 집은 안식의 의미를 상설한 채 죽음의 기운에 잠식당해 있고, 삶의 공간은 곳곳에 똥이 널부러져 거대한 변소로 몰락해 있는 것이다. (「생활적」) 소설의 일상은 삶이 곧 죽음인 극단적 형태를 취하고 있기에 손창섭에게 일상은 무의미성으로 병치된다. 일상은 단지 또 다른 죽어가는 자아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미해결의 장」에서도 이러한 일상의 무의미성은 반복된다. 하루 한끼도 연명하기 힘든 생활 속에서도 식구들은 모두 미국유학에 맹목적으로 집착한다. 하지만 대학생인 지상은 학교마저 포기한 채 매일 무위도식으로 연명한다. 그나마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은 창녀인 광순 뿐이다. 지상의 일상이란 집에서 누워 자다가 쫓겨나면 광순의 방으로 잠을 자러 가는 것뿐인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토록 화려할 것 같았던 근대적 일상은 오히려 참혹한 원시의 일상으로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타인들은 그 속에서 여전히 본능적 욕망을 불태우며 일상을 때우고 있다. 그러한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손창섭은 전후의 삶의 부조리와 그 부조리에 대한 부정을 동시에 드러내며 역설적으로 소격의 효과를 지향하고 있다.

손창섭 소설의 욕망은 야수적 본능에 가까운 동물적 욕망들이며, 인간이란 그러한 욕망의 상징이 된다. 현실이란 단지 욕망의 충족을 위한 투쟁의 장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 욕망이란 것도 단지 돈, 섹스, 권력에 대한 욕망일 따름이어서 형이상학적 의미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합리적 의사 소통은 불가능하며, 욕망의 주체와 주체 혹은 욕망의 주체와 객체들간의 대립과 굴종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현실 원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철저한 고립일 뿐이다. 현실이란 단지 속물적 욕망이 과잉된 공간에 불과하다. 요컨대 현실이 현실로서 상대적 자율성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손창섭 소설들은 비정상적 인간들의 욕망이 빚어낸 비극의 세계이다. 그의 소설에 반복적으로 묘사되는 절망감은 그런 점에서 인간의 본원적 악마성에 기인한 존재론적 절망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손창섭은 타자와외 대비를 이미 무의미한 것으로 상정하고 세계와의 대립을 통해 끊임없이 동일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문학 자체를 자기 소외감에서 온 고통의 발산으로 보고, 현대의 혼란과 고통, 사회와 인간과의 부조리한 관계를 드러내주는 기제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세계 대 인간의 무의미한 대립 속에 '나란 무엇인가'라는 지속적인 동일성의 탐구는 손창섭 문학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것이 때때로 자기 비하, 자기 부정의 부정적 측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생활적」에서처럼 순이의 주검에 입을 맞추고 죽을 수 있다는 행복을 떠올리는 아이러니를 통해 세속적 욕망에 탐닉하는 타자와의 대비를 선명히 보여주며 한계상황에서도 순수를 유지하고자하는 동일성의 열망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비록 근대성의 회의를 보이며 자기 동일성을 부정하지만 손창섭 소설의 지향점은 결국 동일성의 회복과 자아와 세계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이상적인 근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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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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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손창섭, 『잉여인간』, 한국소설문학대계 30, 두산동아, 1995, 61쪽 (「생찰적」, 「미해결의 장」 모두 위의 책을 인용함)
2 「작가 여적(餘滴),이란 글에서 모파상의 (목걸이)를 두고 손창섭은," 나 같으면 작품에 나오는 목걸이가, 가짜라는 점을 첫 줄에서 먼저 밝혀 놓겠다. 그리구나서, 목걸이를 털려갔던 그 여인이 가짜 목걸이를 진짜 목걸이로만 알고,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오랜세월을 두고 고심참담하는 이야기를 자질구레하니 전개시켜 나갈 것이다. "라고 쓰고 있다. 손창섭의 개성은 이러한 직선적인 서사 스타일에서 유래된다고 보인다.
3 "손창섭은 장용학이 관념으로 느낀 현대의 인간 조건과의 대결을 체험을 통해서 겪어나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욕되는 것이며 짐승처럼 견디는 것이다. '다리 병신이나 '기피자'(「혈서」), 혹은 신적 편향자들'(「잉여인간」), '과부'와 '고아청년'(「피해자」), '매춘부와 '룸팬'(「유실몽) 등등 보호자없이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이 극한적 생활을 견디며 살아간다. 산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죄욕이다. 버려진 인물들의 모습에서 현실의 황무지를 인식할 수 있으며, 신이 없는 시대에서 욕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아에게는 애정이나 이해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날그날의 생명의 유지만이 중요하다. 이러한 세계는 전쟁으로 버려진 인간의 모습을 통해 현대 인간의 삶의 의미를 그의 내면을 통해 제출해 놓은 삶의 파편들이다. 황무지를 황무지로 드러내 놓고, 의식을 의식 그대로 내보이는 것이란 전후의 현실을 표현하는 한 방식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인간에의 묘사이다. 이러한 무의미의 세계가 그의 인물들이 숨쉬는 공간이다. 황무지와 같은 무의미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인간 또한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적어도 손창섭은 황무지 인식과 소외 감정에서 자신의 문학을 출발시키고 있다. 그것은 시대적 정황으로서의 불안의식의 내재화이다. 불안의식을 자기 동일시하여 그 속에서 소설을 자의식의 산물로 만든다. "(전기철, 『한국 전후 문예비평 연구』, 서울, 1994, 86-88쪽)
4 한수영, 『1950년대 한국문학연구』, 한국문학연구회편, 평민사, 1993, 57쪽
5 「생활적」과 같은 책에서 인용함.
6 하정일, 「전쟁 세대의 자화상」, 『작가연구』1호, 새미, 1996,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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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강운석
(Kang, Woon-Seok)
숭실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