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논문 자료들.

[ㅍ] 자아동일성-칸트

온울에 2008. 5. 8. 13:11

목 차

Ⅰ.서론
Ⅱ.본론
1.자아의 근원적 본성
2.경험과 관련된 자아의 본성
3.〈나는 생각한다〉와 자아의 동일성
Ⅲ.결론
--------------------------------------------------------------------------------
발행자명 龍仁大學校 人文社會科學硏究所 
학술지명 人文社會論叢 
권 2000 
호 5 
출판일 2000. 8. 30.  




칸트에 있어서 자아동일성의 문제
(-〈나는 생각한다〉를 중심으로-)


엄주정
용인대학교 교수
2-400-0002-05

국문요약
칸트의 자아의식은 모든 경험에 수반되면서도 그 경험적 내용에 선행하는 것이다.

경험에 선행하는 것으로서의 자아의식은 경험적 내용과 무관한 것이며, 현상의 형식, 즉 시간 공간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시간 공간적 규정으로부터 독립돼 있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각적 사실들에 대하여 〈나는 생각한다〉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 감각적 경험적 사실들은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자아는 〈나는 생각한다〉의 자발적 활동성에 의해서 감각적 직관을 나에 관계된 diEJs 것으로, 즉 나의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감각적 경험 내용들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그런 변화 속에서도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며, 동일한 존재로 생각되는 것이다.

영문요약
What is the self or self-consciousness? We ask fundamentally this problem in our

life. Kant said that the self is simple. I am I. I am not you or him or that.

We called it logical simple in Kantian theory. But the self can be seperated, and we

can see our selves objectively. We can see ourselves on the point of view objectively. Therefore, the self is subjective being and objective being at the same time. This is a moment of self reflection in personal being.

And then, the self-consciousness has a function of 〈I think〉. In kantian view, the teanscendental self is purely theoretical being. It has no moment of experience.

It has only theoretical function. But the function of 〈I think〉 get all the perceptual data revert to the self-consciousness. Because of the function of it, we can think of the objection that it is given in our perception. Therefore, in kantian view, the proposition that 〈I think〉 can be accompany to the all perceptual experience, is very important. It is meaning that the self receive various representation of perception in itself, and the self-consciousness has various consiousness of experence.

Then, the function of 〈I think〉 act consistently to thd all empirical representation. The all empirical representation is given variously to our selves, and such representation is change and change continuously. But the function of 〈I think〉 that is faced with all thd changeable empirical representation is consistant.

These statement is a basis of self-identity.


한글키워드
칸트의 자아의식, 자아의 동일성
--------------------------------------------------------------------------------

Ⅰ.서론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사유하는 대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우리의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의 주관 자체이다. 객관적 대상은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것이어서 그야말로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것이나, 우리의 주관 자체는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규명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우리는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논자는 이러한 자아의 본질에 관한 논의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근거하여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칸트의 관점에 있어서 자아는 본질상 단일한 것이다. 〈나는 나〉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칸트는 이것을 논리적 단순(logical einfach) 이라 부른다. 그러나 또한 자아는 그저 단일한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는 그 자신을 타자로서 정립한다. 그 자신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아의 자기객관화는 어떻게 가능하며, 그런 자기객관화의 본질이 무엇인 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둘째로, 이와같이 그 스스로를 대상화시켜 볼 수 있는 자아는 단일한 것이며 또한 순수한 것이다. 칸트의 개념에 따르면 그것은 선험적 자아다. 그것은 감각경험과 무관한 것이며, 경험적 사실들을 내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수자아가 어떻게 경험적, 감각적 사실들과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로서 제기된다. 이린 논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칸트의 중요한 명제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나는 생각한다〉가 모든 표상에 수반될 수 있다라는 명제가 그것이다.

셋째로, 자아가 다양한 경험적 내용들과 마주칠 때에, 그 감각적 경험 내용들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그런 변화 속에서도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며, 동일한 존재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런 감각 경험의 변화 속에서 자아의 동일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Ⅱ.본론
1.자아의 근원적 본성
칸트는 본래 선험적 자아의 근본적 특성을 어떤 감각적 내용도 갖지 않는 순수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논리적 단순(logisch einfach)으로 규정한다. 이 논리적 단순으로서의 자아는 근본적으로 그것과 다른 어떤 사고 내용과도 구별된다. 그런 자아는 순수한 것 그자체이며, 거기에는 어떤 감각적 내용도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공허하고 무내용적인 어떤 것이다1). 그것은 감각적 소여의 상이한 상태와는 무관한 것이며, 그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러한 칸트의 입장은 우선 흄의 입장과 확연하게 구별된다.

흄의 입장에 있어서 자아는 크게 두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로, 자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는 감각적 인상들과, 그 인상들에 대한 자각들을 동일하게 지탱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의 지각들 자체가 독립성과 실재성을 갖는 것이다. 흄에 있어서는 개개의 지각들을 초월한 다른 어떤 것을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없다. 둘째로, 앞의 흄의 관점에 근거하여 볼 때, 우리는 결코 어떤 시점에 있어서도 감각적 지각과 분리된 자아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는 지각을 초월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즉 흄에 있어서 자아는 서로 다른 감각적 지각 내용들의 묶음이거나 집합에 불과한 것이다.

흄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어떤 단일한, 또는 독립적이거나 초월적인 정신적 힘이나 정신적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갖는 자아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감각적 인상이나 지각에 근거한다. 자아의 관념이 감각적 지각에 근거한다면, 그런 자아는 끊임없는 흐름속에 존재할 것이며, 한 순간도 변화하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즉, 흄의 지적대로 "우리의 심성은 여러 가지 지각들이 연속적으로 출현하는 무대와 같다2)." 우리에게 연속적으로 수용되는 감각 지각들만이 우리의 심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감각적 지각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운데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불변하고 통일된 자아의 모습은 발견하기 어렵다. 따라서 흄의 견해는 자아에 대한 회의주의적인 관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칸트의 입장에 있어서 사고하는 것으로서의 자아의식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존재와도 다른 어떤 것이다. 데카르트는 자아가 생각하는 존재로서, 곧 실체로서 받아들이지만 칸트에 있어서 선험적 자아는 실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보편 필연적인 논리적 원리로서 이해된다. 칸트에 있어서 자아의식은 통각의 형식적 원리다. 즉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의 형식은 전혀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경험에 수반되면서도, 그 경험에 선행하는 통각의 형식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식은 언제나 모든 가능한 인식 일반에 관계하는 단순한 주관적 조건이다. 그것은 대상인식의 가능조건일 뿐이지 결코 생각하는 존재(Wesen)로서 표상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의 형식을 우리와 다른 예지적 존재자의 자리에 놓지 않고서는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를 표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에 있어서는, 예지적 존재로서의 신적 존재만이 생각하는 존재 또는 실체로서 표상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 있어서의 생각함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대상인식의 주관적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칸트의 자아의식은 모든 경험에 수반되면서도 그 경험적 내용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와같이 경험에 선행하는 것으로서의 자아의식은 경험적 내용과 무관한 것이며, 현상의 형식, 즉 시간 공간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시간, 공간적 규정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는 장소가 없는 신비한 존재3)"라고 하는 라이프니츠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의식은 "순수하고 근원적이며 불변하는 것, 모든 변화에 대하여 고정된 것, 지속적인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한 주관은 "의식내용의 변화 속에서 단일하면서도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으며, 그것이 의식될 때 주관은 동일한 자아의식을 갖는다4)." 이것은 "나를 하나의 고정된 객관으로서 발견하려 한다면 우리는 어디서도 그와 같은 나를 발견할 수 없다5)."고 하는 흄의 회의주의와는 반대되는 입장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칸트는 자아를 '생각하는 활동'으로서 규정한다. . 그런 활동 안에서 자아는 그 자신과 다른 모든 대상을 안다. 그러나 "그런 활동은 다시 자아 자신에게로 되돌려 향하게 되고, 그런 활동속에서 자아는 그 자신과의 한결같은 통일성을 간파한다6)." 그런데 위와 같은 논의는 순환론적인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런 순환론적 상황에서 볼 때 자아의식 그 자체에는 실제로 어떤 인식의 확장(Erweiterung)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비확장적 인식이란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감을 안다는 것만을 내포한다. 이러한 자기 복귀는 자아의 고유한 행위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은 자아의식 그 자체의 구조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생각하는 활동으로서의 자아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로 표현된다. 〈나는 생각한다〉는 자아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활동성을 갖는 어떤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또한 "자아는 생각하는 작용 그 자체를 의식한다7)." 따라서 자아의 생각하는 활동성에 있어서 자아 그 자신은 다시 그 자신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 즉 자아는 주관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에 대한 객관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는 자기자신과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의 순환적 활동이며 동시에 반성 작용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나'(Ich zu sich selbst Ich)이라는 의미만을 갖는 것이다8)." 여기에서 자아는 다른 인식 즉 어떤 사태와 마주치는 인식과는 구별된다.

이것은 나의 나 자신에 관한 의식이며. 그것은 바로 생각하는 주체 그 자체다. 거기에서 나는 감성적 객관의 표상도 아니고 오직 생각하는 주체의 표상이다. 여기에서 "나는 생각하는 주체이지 직관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아직 인식하지 않는다9)." 나는 직관의 대상도 아니며 또한 순수한 자아의식 속에서 나 자신을 인식하지도 않는다. 칸트에 있어서 인식이란 직관에 주어지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아의식은 어떤 특정한 직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생각하는 주체로서만 표상된다. 여기에서 나는 언제나 일인칭의 주체이며, 이것 또는 저것이라는 3인칭의 대상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자아의식 속에서 단적으로 나로서만 표상될 뿐이며 결코 어떤 타자가 아니다. 칸트에 있어서 이것은 경험적 통각이 아니라 순수한 선험적 통각으로서 파악된 나의 참모습이다. 여기에서 나는 나 이상의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나일 뿐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의식은 단지 논리적이다. 그것은 어떤 외적인 술어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통해서 이해되고 규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동일한 것이며 오직 동일성의 규칙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나의 자기동일성은 어떤 고정된 사태에 있어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생각하는 활동으로서 실현된다. 따라서 나는 사물화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생각하는 주체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의 의식 속에서만 실현된다. 나의 자기동일성은 어떤 수동적인 지각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지각의 내용들은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사고 활동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의 의식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 주체의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발성은 내가 나 자신을 동일한 나로서 의식하게 하는 것이며, 이때 의식되는 나는 다시 의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식된 나란 결코 이것, 저것으로 고착된 대상이나 사태가 아니다. 자아의식 속에서 의식되는 동일한 나는 3인칭적 대상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1인칭의 순수한 주관성을 표현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 자신의 의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즉 나는 나 자신을 대상화시켜 볼 수 있다. 또는 나는 나 자신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주관이 곧 자기 객관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생각하는 나로서 자기 스스로를 언제나 1인칭으로 표현하지만 나는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의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으며, 나 자신이 곧 나 자신에 대한 타자로서 정립된다. 즉 나의 자아의식 속에서 생각하는 나는 동시에 타자이다. 다시 말해서 주관으로서의 자아는 곧 자기자신에 대해 객관이다. 그것은 곧 자아의 자기 부정이자 자기 대상화이며 자기 객관화다.

이것은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있어서 플레스너가 지적한 것과 같이 탈중심으로서의 인간 존재와 비교될 수 있다. "인간은 자아인 한 자기로서 자기를 분화하지 않으면 안된다10)." 인간은 〈나는 나다〉라는 단순성을 갖는 존재이지만 또한 자기 분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존재이다. 플레스너에 의하면 동물은 폐쇄적인 유기적 조직이다. "유기체가 그의 삶을 발현하는 모든 경우에 그의 유기체를 직접 그의 주의에 편입시키고 그 유기체를 거기에 적응하는 생명권의 자립적인 한 단면으로 하는 형식은 폐쇄적이다11)." 그러나 인간은 그런 폐쇄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중심으로서의 존재를 넘어서 있지 않으면 안되며, 중심에서 나와 있지 않으면 안된다12)." 그렇게 해서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그이 여러 가지 영역에 대한 관계 속에서 대상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여러 가지 영역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별하면서 동시에 자기와 관계지을 수 있다. 그런 한에서만 인간은 〈자기를 안다〉라는 의미 를 지닌다.

이런 논의와 관련하여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하나의 대상이다. 주관은 자기 자신에게 객관이다...... 도리어 그것은 직관에 대립되는 바 동일성의 규칙에 따른 인격성의 행위다13)." 그것은 헨리히가 지적하는 바대로 자기회귀이며. 나 자신에 대한 의식이다. 나는 나 자신을 의식하면서도 다시 말해서 내가 나 자신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나를 대상으로서 정립하는 것이다.

이런 한에 있어서만 인간은 자기 반성의 계기를 얻는다. 즉 자아가 자기부정을 통하여 자신을 대상화시킴으로써 자기반성이 가능하게 된다. 그것은 동일한 자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주관과 객관의 자아 속에서의 통일이요 자기주관이자 동시에 자기객관이다.

이것은 주체로서의 자아(Ich-Subjekt)가 객체로서의 자아(Ich-Objeckt) 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일성의 인식을 알려줄 제3의 법정은 없다. 자아의식의 현상은 그 자신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알며, 자가반성은 자아가 그 자기에게로 복귀함으로써만 그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한 반성작용을 헨리히는 자기관계(Selbstbeziehung)라 부른다14). 그것은 제3의 어떤 것과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자아는 그 자신을 어떤 매개도 없이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요, 자아의식의 인식 행위에 의해서 생기는 다른 규정은 그런 반성의 결과다.

이것은 피히테가 "자아의 자기정립(Sich-Setzen)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자아는 직접성이요 그 자체로서 근원적이며 그 자신을 어떤 매개도 없이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다15)." 즉, "자아는 어떤 매개가 없이도 그 자신을 정립한다. 그것은 주관인 동시에 객관이다. 그 스스로를 정립함에 의해서 자아는 정립된 것으로서의 자기정립과 하나이면서 동일하다. 결국 자아는 그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의식한다16)."

2.경험과 관련된 자아의 본성
그러나 다른 한편에 있어서 자아의식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고유한 활동성에 근거하여 모든 표상에 귀속될 수 있으며, 여러 표상들과의 관계로부터 독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아의식은 일정한 대상에 관한 의식일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자기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표상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의 반성작용이 또 다른 측면에 있어서 어떤 사태에 관한 인식과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17). 그런 사태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 자아는 그 자신의 특유한 인식방법으로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활동한다. 다시 말해서 그런 사태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도 자아는 그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각하는 존재다. 여기에서 반성작용은 알게 된 것과 의식된 것을 그 반성 과정에로 가져와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자아는 어떤 이질적인 것과 만난다. 그러면서도 "그 반성적 자아는 '나는 나(Ich bin Ich)라는 전적인 동일화를 이를 수 있다18)."

만약 이와 같이 자아의식의 양면적 성질이 인정된다면 "자아의식은 사고된 다양한 표상들에 관계하여 그것의 통일을 형성하는 관계체계의 중심점19)"이라 할 수 있다. 자아의식이 그 자신에 의해 사고된 다양한 표상들의 관계체계의 중심점이라면, 거기에는 다양한 표상들이 존재하며 그 다양한 표상들을 그러한 관계에 있어서 통일시킬 수 있는 중심점이다. 그러므로 자아의식은 상이한 표상들의 통일원리(Einheitsprinzip)20)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통일적 양상은 필연적으로 자아의식의 사고에 귀속되며, 여기에서 자아는 그 자아가 갖는 표상들과 관계하면서도 또한 그 스스로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는 본래 단순성을 갖는 것이면서도 그 표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표상들의 통일을 형성하는 근거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자아의식의 통일적 양상은 모든 가능한 표상들에 적용될 수 있다. 또한 모든 표상들의 총체는 오직 자아의식 속에서만 그 규정이 가능하다21).

이러한 자아의식의 통일적 양상은 칸트에 있어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자아의식이 경험적 통각, 즉 내감에 있어서 나타나는 시간성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에 있어서 경험적 내용들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형식적 측면에서 볼 때 불변하는 것이며 자아가 감각적 내용을 수용하는 기체다. 그러나 그 시간의 형식에 들어 온 모든 감각적 내용들은 변화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경험적 통각에서 볼 때 그것은 변화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자아는 한 시점에 있어서 감각적 경험과 관계한다. 그런 경험적 사실들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한 시점에서의 자아와 다른 시점에서의 자아가 동일화되고 통시적 통일 이 가능한 근거는 무엇인가? 시간 속에서 자아가 변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으로 존속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시간과 관련하여 자아동일성의 문제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문제는 칸트의 시간양상의 규정과 관련하여 고찰해 볼 수 있다. 칸트는 시간을 세가지 양상으로 규정한다. 즉 계기, 지속, 동시존재가 그것이다. 그런데 동시존재는 계기적 시간 양상으로부터 잘 구별된다. 그리고 "칸트는 동시존재가 계기적 존재의 부정일 뿐 아니라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22)." 동시존재는 경험적 실재성의 흐름과 변역에 있어서 공동존재(communio entium)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 일시적 작용에 있어서의 변역을 존재적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런 공동존재의 형성과 연결방식은 논리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설명에 있어서 "동시존재는 연속적 시간관계 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원리로서의 공존으로 설명될 수 있다23)."

변화하는 세계의 상이한 상태들의 연속적 관계와 그것이 구성하는 실체는 일시적인 변화작용 속에서도 서로 결합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일관된 연관적 체계로 나타난다. 그런데 변화하는 세계의 그런 공존적 구성원리는 곧 계기적 존재자의 존재적 관계이며, 또한 실재적 존재의 연관에 근거하는 공존관계이다.

또한 시간에 있어서의 공존성과 선험적 자아의 논리적인 원리가 없다면, 객관 세계의 공존관계를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아의 동일성도 설명되기 어렵다. 어떤 한 시점에 있어서의 자아와 다른 시점에 있어서의 자아가 경험적 측면에서 변화하는 가운데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 속에서도 나를 동일한 나로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규정된 시간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존재의 가능성에 의해서만 자아 동일성은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시간 속에서 자아의식의 동일성을 가능케하는 논리적 규정의 근거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 본질적 특성과 관계된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가능한 표상들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고작용에 수반될 수 있어야 한다. 이와같은 사고작용에 가능한 표상만이 자아 의식의 동일성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가 모든 표상에 수반될 수 있다는 공통된 관계 속에서 자아는 상이한 표상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 자신의 것으로 의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표상에 관한 의식은 자아의 표상 관계적 사고가 없이는 나타날 수 없다. 여기에서 "표상은 전혀 자아에 귀속될 수 없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들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24)" 자아의 의식상태로서 규정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표상들은 자아에 귀속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즉 모든 표상들은 사고하는 자아의 의식내용으로 귀속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자아의식이 표상들의 가능한 통일을 위해 전제되어야 한다면 자아의식은 모든 표상들의 총체를 규정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그런 조건에 의해서 표상들이 사고될 수 있으며, 그것은 또한 자아의 자기귀속성(Selbstzuschreibung)의 조건에 상응한다25). 이러한 표상들의 통일과 자아에의 자기귀속적 가능성의 관계는 칸트가 말하는 바, 〈나는 생각한다〉가 모든 표상에 수반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즉 나의 모든 표상들에 〈나는 생각한다〉가 수반될 수 있다는 것은 곧 표상들이 자아에 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아의 표상들에 대한 자기귀속성이 없이는 주어진 표상이 사고될 수 없으며 표상들은 자아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soviel wie nichts)과 같은 것이다26). 자아의 자기귀속적 가능성의 조건은 곧 그에 상응하는 표상들이 사고될 수 있는 필연적 조건이다. 그러므로 사고하는 자아의 자기귀속적 가능성이 없이는 어떤 표상도 사고될 수 없다.

이제 이러한 자기 귀속적 가능성에 근거해 볼 때 자아의 동일성은 상이한 조건 아래에서 나타나는 소여들과 관계하여 설명될 수 있겠다. 우리에게 수시로 주어지는 소여들은 순간순간 마다 주어지며, 서로 다르고 다양한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그러한 다양한 소여들과 관계하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한다. 또한 자아는 그러한 소여들의 다양성 안에서도 단순할 수 있는 특성이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적 단순으로서의 자아는 소여의 무규정적 집합에대한 "관계체계의 중심"(Zentrumeines Relationssystems)27)으로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단순성은 그런 관계체계에 있어서의 통일원리이며, 그것은 곧 자아가 사고내용의 다양한 상태와 관계하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다. 결국 칸트는 자아의식에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즉 자아의식은 감각적 다양의 상태들의 계열에 관계하면서도 그 동일성이 유지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이 동일성의 근본문제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자아의식의 단순성이 사고내용들의 관계체계의 원리로서 동일성을 이루는 근거라는 것만을 밝혔을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칸트는 자아의식의 동일성의 특성을 나의 사고의 각 상태에 있어서 〈나는 생각한다〉의 동일성으로 특징지운다.

3.〈나는 생각한다〉와 자아의 동일성
칸트는 선험적 통각 즉 자아의식을 두 가지 측면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경험적 대상에 대하여 법칙을 부여하는 작용으로서 〈나는 생각한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법칙 자체로서 범주라는 것이다. 대개 선험적 통각의 본질은 범주에 있다고 보기가 쉽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을 그 범주, 즉 지성적 작용의 형식적 법칙성에 근거해서만 해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칸트의 연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범주의 정당성만을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칸트에 있어서 범주란 고정불변의 법칙성 또는 형식 그 자체라고만 생각된다.

물론 범주가 경험적 의식을 또는 경험적 지각을 통일하여 우리에게 객관적 인식을 가져다주는 형식이요 법칙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 자아는 경험적 의식들을 그런 법칙에로 가져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오성은 그 법칙을 어떻게 경험적 의식에 적용시킬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이것이 선험적 연역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연역의 문제에서 이 핵심적 문제를 소홀히 하기가 쉽다.

근본적으로 칸트는 범주의 타당성을 해명하고자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칸트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 선험적 활동성이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선험적 작용이 없고서는 경험적 지각에 범주가 적용될 수도 없으며 그것이 범주에 의해서 규정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선험적 자아를 고찰함에 있어서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 선험적 활동성을 오히려 중요시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 있어서 "〈나는 생각한다〉가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칸트의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만약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 선험적 활동성이 없다면, 전혀 생각될 수 없는 것이 나에게 표상될 것이다. 그러므로 직관의 모든 다양은 그것이 발견되는 바 동일한 주관 안에서 〈나는 생각한다〉와 반드시 만나야 한다.

자아는 분명히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기 활동적 작용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감각적 소여에 혹은 감각적 직관에 관계한다. 자아는 그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그 어떤 것, 즉 〈나는 생각한다〉에 수반될 수 있는 대상적 표상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자아와 사고작용의 '지향적 활동(intentionalen Akt)'이라 할 수 있다28). 그리고 모든 직관의 다양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지향적 활동과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 작용을 통해 하나의 직관을 나의 직관으로 동일시 할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나의 의식 안에 있는 직관으로 간주된다. 그 직관이 나의 의식 안에서 규정됨으로써, 나는 그 직관이 나의 직관으로 인식됨을 알며, 거기에서 이러한 직관을 나에게 관계된 것으로, 또 '나의 것'으로 규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는 그 직관을 그의 의식 내용으로써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경험적 직관은 의식과의 규정된 연관성 속으로 들어오며, 이것을 통해 직관적 소여가 자아의식과 관련을 맺는다.

더 나아가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의 이러한 활동성이 의식 안에서 상이한 표상들을 통일한다고 본다. 즉 자아가〈나는 생각한다〉라는 작용에 의해서 상이한 표상들을 하나의 의식으로 통일시킨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 활동성은 경험적 사태의 계기와 관계한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작용이 있기 전에는 경험적 의식 내용은 상호 고립되어 흩어져 있으며 무규정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의 작용은 그러한 고립을 지양하여 다양한 표상들에 대해 어떤 필연적 연관성을 갖게 만든다29).

경험적 소여가 다른 소여와 함께 일정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표상들 사이에 어떤 결합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나는 생각한다〉라는 작용은 그런 결합의 보편적 근거이다. 즉 경험적 소여로서의 오든 의식 내용들 사이의 결합의 필연성은 자아가 〈나는 생각한다〉라는 작용을 통해서 주어진 의식 내용들을 일정한 법칙과 형식에 따라 서로 연관지우는 것 속에 존립한다30).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의 작용은 의식 내용으로서의 소여의 다양성에로 환원되거나 그것에 실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자발성의 작용이며 선험적인 작용이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은 자아가 자발적으로 산출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때때로 주어진 표상에 수반되는 그때마다의 표상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또 표상의 단순한 소여와는 별개의 것이다. 그것은 감각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며, 자아의 특수한 작용이요 활동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아에 주어진 표상들에 대하여 선천적으로 인식하는 작용이며 자아의 지성적 행위(intelligente Handlung)이다. 또한 그것은 상호 독립적인 표상들을 필연적으로 연결하고 결합하는 작용이다31).

〈나는 생각한다〉는 자아가 나에게 주어진 표상을 규정하는 작용(즉 칸트가 말하는 바대로 현존을 규정하는 작용)이면서 동시에 어떤 주어진 표상을 다른 표상과 필연적으로 관련지우는 작용이다. 또는 현재의 표상을 과거의 표상과 필연적인 의미에서 관련지우는 자아의 선험적 활동성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간은 내감의 형식으로서 자아의 수용성이요, 우리에게 경험적 표상을 갖게 하는 근거였으며 그것에 의해서 의식내용이 우리의 자아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칸트는 이것을 규정되는 자(das Bestimmbare)의 수용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제 시간이 규정되는 자를 주는 것과 같이 자아는 또 다른 측면에 있어서 규정하는 자(das Bestimmende)로서 〈나는 생각한다〉라는 규정의 자발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자아의 이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발적 작용은 우리의 모든 사고내용과 관계하여 그것을 규정하는 작용이라 할 수 있다.

내감에 있어서 의식상태 혹은 표상상태들의 흐름은 시간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칸트의 말대로 아직 규정되지 않은 것이며 자아는 그러한 흐름을 〈나는 생각한다〉의 작용에 의하여 규정한다. 또한 〈나는 생각한다〉는 과거의 표상상태의 규정과 현재의 표상상태의 규정을 연관지움으로써 자아의식의 동일성을 근거지우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자아의 모든 사고내용에 〈나는 생각한다〉의 의식이 수반된다면, 어떻든 그런 방식으로 하나의 사고는 다른 사고와의 관계에로 들어간다32)." 이런 의미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하나의 의식 내용으로부터 다른 의식 내용에로 넘어가게 하는 선험적 근거이며, 또한 자아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근거이다.

결국 칸트는 자아의식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즉 그것은 시간에 있어서 의식 상태들의 흐름과 계열에 관계하면서 동시에 의식의 근원적 동일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현상적 자아 속에는 분명히 시간 내에서 의식 상태들의 흐름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자아가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또한 동일한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식의 동일성 때문이다. 즉 자아의식의 동일성은 자아의 각각의 의식상태에 있어서 〈나는 생각한다〉의 동일성으로 특징지워진다.

Ⅲ.결론
〈나는 생각한다.〉가 모든 표상에 수반될 수 있다고 하는 칸트의 명제는 자아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 근원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성은 순수 지성적인 것이며 논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 순수한 활동성은 감각경험과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각적 사실들에 대하여 〈나는 생각한다〉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 감각적 경험적 사실들은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자아는 〈나는 생각한다〉의 자발적 활동성에 의해서 감각적 직관을 나에 관계된 어떤 것으로, 즉 나의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감각적 내용들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런 감각적 내용들에 근거해서 자아를 고찰해 본다면, 자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운데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변화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런 변화 속에서도 나는 나의 자아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칸트에 있어서, 그러한 변화 속에서 동일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근거는 〈나는 생각한다〉의 동일성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감각 경험의 내용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것은 부단하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흄에 있어서와 같이 자아를 단지 감각 경험의 내용에 근거해서만 고찰해 본다면 자아동일성의 토대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관점에 있어서 이러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물론 칸트의 관점에 있어서도 감각적 자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은 부인할수 없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 선험적 작용이 모든 감각 표상에 수반될 수 있으며, 모든 감각 표상들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한다〉가 동일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자아동일성의 문제는 해명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

참고문헌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 Felix Meiner Verlag Hamburg, 1971.
Kant, I., Kants gesammelte Schriften (Walter de Gruyter, Berlin, 1926), XVII. Reflexion zur Metaphysik.
Kant, I., Kants gesammelte Schriften XXII Opus postumum.
Henrich, D., Fichtes urspr?nglisch Einsicht, Vittorio Klostermann, Frankfurt am Main, 1967
Henrich, D., Identitat und Objektivi?it. Carl Winter Universit?t, Heidelberg, 1976.
Becker. W., Selbstbewußtsein und Erfahrung, Verlag Karl Alber Freiburg M?nchen, 1984.
Benett, j., Kant's Analytic. Cambridge University Press, London, 1977.
D?sing, K., "Objektive und Subjektive Zeit", in Kant-Studien 71, Jahrgang, 1980
Eitel. F., "Kants Transzendentale Deduktion als Theorie des Selbstbewußtsein", in Zeitschrift f?r Philosophische Forschung, 32, 1978.
Hinsch. W., Erfahrung und Selbstbewßtsein, Felix Meiner Verlag, Hamburg. 1986.
Hume, D., A Treatise of Human Nature, vol. I, II. London J.M. Dent & Sons LTD., 1956
Malcher. M., "Der Logos und die Zeit", in Karat-Studien 73, 1982.
Pleßner. H.. Die Stufen des Organischen und. der Mensch, Berlin, 1965.
Tugendhat. E Selbstbewßtsein und Selbstbestimmung, Suhrkamp taschenbuch wissenschaft, Framkfurt am Main. 1979.
슐츠, W., 송기득 옮김, 달라진 세계와 철학, 현대사상사, 서울, 1984.

--------------------------------------------------------------------------------

각 주
1) Henrich, Identit?t und Objektivit?t 56면 참조(이하 Identit?t로 표기함)
2) Hume, A Treatise of Human Nature, Vol. I, 239면.
3) Henrich, Fichtes urspr?nglich Einsicht, 10면 참조(이하 Einsicht로 표기함) 이러한 자아의식을 철학의 근본원리로 삼았던 사람은 원래 데카르트였다. 그는 자아의식에서 모든 가능한 인식의 자명성의 근거를 발견하였다. 또 로크는 자아의식을 자아 자신과 동일화되는 작용으로 보았다. 루소는 로크의 입장에 따라, 자아의식은 우리가 판단할 때 결합을 산출하는 전제라고 보았다. 루소에 의해서 자아는 논리적 이론의 원리가 된다. 그리고 칸트는 루소의 이론에 자극을 받아 자아를 선험철학의 최고지점(hochster Punkt)으로 삼았다. 이런 관계 속에서 자아에 그의 모든 논리학과 대상인식에 관한 이론이 자리잡게 된다.
4) Hinsch, Erfahrung und selbstbewußtsein(이하 Erfahrung으로 표기함), 36-37면
5) Hume, Treatise, Part Ⅳ의 Ⅵ of Personal Identity 참조
6) Henrich, Einsicht, 10-11면. "in sich selbst zuruckwendet und so die stetige Einheit seiner mit sich gewahrt"
7) I. Kant : Kants gesammelte Schriflen (Walter de Grunter, Berlin. 1926), XVII, Reflexionen zur Metaphysik, 4220.
8) Henrich, Einsicht, 12면.
9) I. Kant : Kants gesammelte Schriflen (Walter de Gruyter Berlin, 1926) XXII. Opus postumum, 91면.
10) W. 슐츠, 송기득 옮김, 달라진 세계와 철학, 현대사상사, 서울, 1984, 191면.
11) 위의 책, 118면
12) H. Pleßner. Die Stufen des Organischen und der Mensch,Berlin,1965, 288면
13) Kant, Opus postumum, 115면
14) Henrich, Einsicht, 18면 참조
15) Henrich, Einsicht, 18면
16) E.Tugendhat, Selbetbewußtsein und Selbstbestimmung, Suhrkamp taschenbuch wissenschaft, Frankfurt am Main, 1979, 62면
17) Henrich, Einsicht, 18면 참조
18) Henrich, Einsicht, 13면
19) W.Becker, Selbstbewußtsein und Erfahrung, Verlag Karl Alber Freiburg/Munchen, 1984, 97면
20) Henrich, Identit?t 57면 참조
21) Becker, Selbetbewu ßtsein, 98면 참조
22) Malcher, Der Logos und die Zeit in Kant-Studien 67, 1976, 212면
23) Malcher, 앞의 책, 212면
24) J. Bennett, Kants Analytic, Cambrigde University Press, London, 1977, 103면
25) Becker, Selbstbewußtsein, 97면 참조
26) Ibid.
27) Henrich, Identit?t, 57면
28) F. Eitel, "Kants Transzendental Deduktion der Kategorien", in Zeitschrift fur philosophische Forschung 32, 1978, 227면 참조
29) Henrich, Identit?t, 61면 참조
30) Eitel, 앞의 책, 231면 참조
31) Eitel, 앞의 책, 231면 참조
32) Henrich, Identit?t, 74면

--------------------------------------------------------------------------------

이력사항

엄주정
용인대학교 교양 과정부 교육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