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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사살과 벨드사살, 그리고 렘브란트

온울에 2008. 5. 26. 04:00

목 차

렘브란트
그림속 세상으로 뛰어든 화가/렘드란트가 던지는 경고
상상력의 아름다움
뤼시앵 보이아 '상상력의 세계사'
독서의 괴로움
Ⅰ막
Ⅱ막
Ⅲ막
교만이 일낸다
저질 잔치
공포의 손가락
다니엘
테트의 신비
공간을 채우는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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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국성경연구원 
학술지명 성경연구 
권 6 
호 8 
출판일 2000. 7.  

 

 

 

“벨사살과 벨드사살, 그리고 렘브란트”
(□ 다니엘서 5:1~31 □)


이종록
한일장신대 교수
2-437-0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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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성경을 읽다보면 모두가 하나님 말씀이요 감동적 이지만, 특히 감동적 이어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본문들이 있다. 오늘 우리가 읽으려는 다니엘서 5장도 사람들에게 매우 인상을 깊이 주는 본문인가 보다. 특히 본문은 렘브란트를 강력하게 사로잡고 그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치려는 그 떨리는 순간을 기막힌 상상력을 발휘해서 사진같은 그림으로 그려내기 위해 애썼던 렘브란트는 다니엘서 5장 이야기를 '벨사살 왕의 연회'라는 제목으로 그려냈다. "벨사살 왕 이야기는 16세기 후반부터 네덜란드에서 가장 많이 상영되던 작품이라서, 렘브란트도 전체 줄거리를 손금보듯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림속 세상으로 뛰어든 화가/렘드란트가 던지는 경고

 


17세기 유럽 최고 화가인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반 린(1606∼69). 그에 관한 책은 국내에도 몇 권 나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좀 다르다.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그림 '벨사살 왕의 연회' (1639)를 집중적으로 파고 든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렘브란트의 미술세계로 안내한다. 렘브란트의 다른 명작도 많은데 하필 왜 이그림인가.

고대 바빌로니아 왕이었던 벨사살은 부귀와 사치속에서 오만함을 감추지 못했던 인물.

어느날 저녁, 벨사살은 궁정에서 연회를 열었다. 연회 도중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하나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그리곤 벽에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 '당신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황금빛 글씨는 이글거리며 타올랐고, 다음날 벨사살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렘브란트는 왜 이 비극적 인물의 최후를 그린 것일까. 저자는 이를 추적하면서 렘브란트의 삶과 예술을 읽어나간다.

이 작품이야말로 렘브란트 미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섬광처럼 빛나는 글씨는 주변의 어두운 분위기와 대조를 이루며 비극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렘브란트는 냉혹한 빛과 어둠으로 화폭을 갈라 놓았다. 그 빛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다. 명암 대비는 삶과 죽음의 가파른 교차점이다.” ‘명암 대조’라는 기법을 통해 인간의 번뇌와 갈등을 표현하려 했던 렘브란트 벨사살 최후의 순간은 이같은 의도에 딱 맞아 떨어졌고 그래서 이 작품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미학적 접근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의미도 탐색한다. 17세기 중반은 네덜란드가 전례없는 사치에 빠져 있을 때. 튤립 열풍이 그 한 예다. 가장 인기좋은 튤립 한 뿌리는 말 두필에 마차 마부까지 묶어서 거래될 정도였다. 꽃의 향이 아니라 돈의 냄새였다. 렘브란트는 그 사치와 오만을 경고하기 위해 자신의 그림에 벨사살을 등장시킨 것이다. 눈길도 주지 않았던 작품 ‘벨사살왕의 연회’에 감춰진 렘브란트 미술의 예술정신과 미학. 그 발견의 기쁨이 만만치 않다. (동아일보 2000년 4월 8일).

상상력의 아름다움
렘브란트는 벨사살 왕 연회장면을 어떻게 그릴 수 있었을까? 렘브란트가 벨사살 왕을 보았을 리 없고 또 벨사살 왕 진품 초상화를 보았을 리 없기 때문에, 렘브란트가 그려낸 벨사살 왕 연회장면은 완전히 상상의 산물이었다. 렘브란트는 본문을 읽으면서 이야기를 이미지화시키구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 생생한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캔버스에 그렸을 것이다. 그래서 ‘벨사살 왕의 연회’는 상상화이다. 벨사살 왕을 비롯해서 그 그림에 나오는 모든 것은 렘브란트가 창작해낸 것이다. 렘브란트가 '벨사살 왕의 연회'를 그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렘브란트가 벨사살 왕의 그림을 그리려고 붓을 들었을 때 그가 다스렸던 고대 제국은 이미 뽀얀 흙먼지 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멸망한 지 이천년은 족히 지났으니 먼지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 지도책에도 안나오는 이름뿐의 제국이었다. 세상에 으뜸가는 부귀와 호사를 마음껏 누렸던 벨사살 왕도 죽은지 오래였다. 생전에 애지중지 모았던 산더미같은 황금도 종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왕은 죽어서 비석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의 자손들도 선왕의 추모비를 세우지 않았다. 벨사살 왕에 대한 증거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렘브란트 시대의 사람들은 벨사살 왕이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전설 속의 이야기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어떤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벨사살이 실존인물일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리있는 말이다. 제아무리 이름을 떨쳤던 사람이라도 대개 이천년쯤 세월이 지나면 그가 실존인물이었는지 여부를 딱히 밝혀줄 증거가 거의 소멸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죄다 거짓말이라는 증거도 없으니 딱한 일이다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면 골치 아프게 머리를 싸맬 것 없이 그냥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면 그만이다. 렘브란트도 그렇게 생각했다. 실존인물이야 아니냐 공연히 골머리를 썩일 것이 아니라 그러려니 믿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일단 붓을 들면 벨사살 왕이 바빌로니아를 정말 통치했는지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화가로서 주인공의 생김새를 어떻게 그리느냐가 큰일이었다. 콧대를 세울지, 납작코를 만들지, 귓부리에 사마귀를 그려 넣어야 할지 따위의 세세한 문제들이 고심거리였다. 벨사살 왕의 얼굴에 사마귀가 진짜 붙어 있었는지 화가에게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머리 속에 상상하면서 그리는 그림이니까. 렘브란트는 상상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림 속 세상으로 뛰어든 화가, 10-11쪽.)

성경본문을 인을 때, 그냥 글로 읽는 것과 그것을 그림이나 연극, 영화로 재현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본문을 읽을 때, 은연중에 호기심과 상상력을 갖고 어느 정도 이미지를 만들면서, 즉 장면을 대략적인 심상(心想)으로 읽어내지만, 벨사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문내용을 그림이나 연극, 영화로 표현하려면, 우리가 본문을 그냥 읽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화가가 벨사살을 그리기 위해서는 벨사살의 키, 몸집, 얼굴모양, 복장 등등 여러 가지를 명확하게 그려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증을 위한 기초적인 역사자료들을 확보해야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능가하는 화가의 깊은상상력이다. 특히 본문처럼 인물이나 배경 등에 대한묘사가 거의 없는 글을 읽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상당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화가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들까지 생각해내야 한다. 그래서 빈 공간들을 채워야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처럼 우리도 본문을 그렇게 읽는다면, 엷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갖고 읽을 때보다는 더 풍성하게 성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꼭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지만, 렘브란트가 성경을 읽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시키는 방식은 배울 만하다.

텍스트는 어떤 주체가 발언한 내용을 문자로 고정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주체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발언을 하는 말씀의 주체란 점을 잊지 말 것이다. 한 마디 말로 천냥 빛을 값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설문집을 작성하는 사람은 텍스트의 장면에 등장하는 배우가 어떻게 말하는지 잘 살피고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고 거기서 들려오는 말씀을 잘 경청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는 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저렇게 말씀하시는가? 앞장에서 보았듯이 그분의 느낌, 감정표현, 몸의 자세, 언동 등 그 어떤 것도 소흘히 해서는 안된다. 이런 경청의 자세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도 비슷하다: 회화적 묘사 대상의 선정, 스케치, 그리고 그림의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 전망, 선, 색깔고르기, 계속 고치기, 드디어 3년 후에 전시회에 출품. 예수가 등장하는 장면의 그 어떤것도 놓치지 않고 경청하는 일은 화가의 노고와 비슷하다. (서인석, 예수의 기적과 구마 이야기-오늘날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이해할 것인가? 믿음과 삶 별책부록 3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유스티노 성서모임], 259쪽.)

렘브란트도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림을 그렸지만, 다비트는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자기 나름의 상상력으로 그 그림을 풀어낸다. 렘브란트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내고, 다비트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림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아! 상상력의 아름다움이여.

뤼시앵 보이아 '상상력의 세계사'
···첫째 상상력은 공포와 대결하면서 싹튼다. 공포와 위기야말로 상상력의 으뜸가는 모태다. 특히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죽음의 공포야말로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상상력의 저수지다. 천국과 지옥, 영생과 내세를 향한 상상력은 모두 여기에 기인한다. 둘째 타자와의 관계가 상상력을 부추긴다. 유럽의 상상력은 인도와 중국이라는 타자가 있음으로써 가능했다. 마르코 폴로는 인도양을 둘러싼 세계가 자그마치 1만27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다. 결국 그 상상속의 흩어진 섬들에 대한 몽상과 공상이 합쳐져 중세 유럽의 '동방적 상상력'을 형성했던 것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셋째 상상력은 태초와 종말을 의식한 결과이고 그 가운데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몸부림이다. ‘성서’의 에덴동산을 꿈꾸고,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에서 엿보이는 인간과 신들이 함께 살았던 고대의 황금시대를 꿈꾸듯 ‘근원과 처음’을 향한 짝사랑이 상상력을 키운다. 아울러 ‘요한계시록’처럼 심판을 전제한 종말론적 사고 역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런 위기와 절망의 상상력은 새로운 역사로의 탈주를 꿈꾸며 유토피아적 상상력으로 변형된다. (정진홍,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커뮤니케이션학) (동아일보 2000년 4월 8일)

렘브란트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다니엘서 5장을 읽음으로써 그 유명한 그림을 그려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니엘서 5장이 렘브란트로 하여금 상상력을 발휘해서 읽도록 했다. 그리고 다비트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상상력을 발휘해서 읽어낸다. 이것도 더 정확하게 말하면, 렘브란트의 그림이 다비트로 하여금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 그림을 읽도록 했다. 이렇듯 독서는 상상력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독서를 포함한 우리 삶 자체가 상상력의 산물이다.

독서의 괴로움
렘브란트는 다니엘서 5장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도대체 본문을 기록한 사람은 얼마나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있었길래 렘브란트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을까. 이제 우리도 본문을 읽어보자. 우리 앞에 가상적인 캔버스를 펼쳐놓고, 거기에 한 장면씩 그려보자.

Ⅰ막
1 벨사살왕이 그 귀인 일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2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3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4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쓰는 손가락을본지라 6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7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8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여 그 해석을 왕께 알게하지 못하는지라 9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10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 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11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12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이다

Ⅱ막
A

13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14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15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16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B-1

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B-2

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팍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21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건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B-3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B-4

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Ⅲ막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30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교만이 일낸다
얼마나 흥미롭고 스릴 넘치는 이야기인가. 본문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 이다. 그 까닭은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것을 엮어낸 저자의 글재주가 탁월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렘브란트가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했던 것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다. 렘브란트는 사건도 사건이지만, 본문기자의 재담에 매혹당해서 거기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앞서 나오는 다니엘서 1장에서 4장까지는 느부갓네살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아무리 위대한 느부갓네살이라도 하나님께 교만하면 징계를 당한다는 느부갓네살 자신의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로 이르리로다 35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36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 하였느니라 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다니엘 4장)

이런 주제는 5장으로 이어진다. 앞으로 우리가 읽을 다니엘서 5장은 벨사살의 교만함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저질 잔치
이제 본문을 한구절씩 차근차근하게 읽어보자. 벨사살왕이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궁전으로 불러모으고 잔치를 베풀었다. 본문기자는 다른 것들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천명이라는 사람 수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천명. 다른 것을 언급하지 않아도 이 수에 독자들은 벌써 기가 죽을 것이다.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초청한 연회이니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엄청난 경비가 들고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성대한 잔치였을 것이다. 궁중에서는 여러날 동안 잔치를 준비했을 것이고,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옷을 새로 맞추고 장식품도 새로 구입했을 것이다. 거기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잔치가 열리는 날, 마차를 타고 천명이 넘은 사람들이 궁전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성장을 한 우아한 귀부인들이 남편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사람들이 입장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어쨌든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해진 자리에 앉은 다음, 벨사살이 입장하고, 잔치가 시작되었다.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다비트는 당시 상황을 상상력을 발휘해서 재현한다.

벨사살 왕이 한 번은 크게 마음먹고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초대받은 내외 귀빈이 천 명이 넘는 호사스러운 자리였다. 제국의 만조백관과 지위높은 벼슬아치들이 앞다투어 자리에 모였다. 왕비와 후궁들도 아름다운 옷차림을 뽐내며 여흥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왕실 요리사와 요리 시중꾼들은 열흘이 넘도록 부엌 가마를 떠나지 못했다. 늘어선 아궁이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손님들의 입맛을 돋우어줄 오만 가지 산해진미를 준비하느라 잔허리가 굳을 지경이었지만 연신 땀을 닦아내며 기세 좋게 타오르는 부뚜막의 장작불을 지킬 뿐이었다. 벨사살 왕은 시종관이 대령해둔 축제의복식으로 갈아입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익은 예언자, 마술사, 점쟁이, 점성가들이 만면에 웃음을 품고 차일을 둘러친 잔칫상에 둘러앉았다. 왕궁 전체가 잔치 분위기로 온통 들떴다.

연회장으로 꾸민 궁궐은 툭트인 들판처럼 넓었다. 천명이 둘러앉을 식탁이 차려졌다. 워낙 손님들이 많다보니 아무리 넓은 연회장이라도 빈 자리 하나없이 빼곡하게 메워졌다.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에는 심지어 벨사살 왕이 앉은 자리도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는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왕이 식탁 모서리에 걸리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잔치 광경이 어땠을지 상상해보자. 손님이 천명이니 식탁 위를 분주히 오가는 손이 무려 이천개, 음식을 집어넣고 우물거리는 입이 천 개, 남들이 뭐라고 흉보지 않을까 종긋거리는 귀가 이천 개나 되었을 것이다. 술이 한잔씩 돌아가면 걸진 입담과 함께 터져나오는 왁자한 웃음소리에 돌로 지은 왕궁이라고 들썩이지 말란 법이 없다. (그림속 세상으로 뛰어든 화가, 14-15쪽.)

렘브란트도 렘브란트지만,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거기서 다시 이야기를 엮어내는 다비트도 정말 관찰력과 상상력이 대단하다. 섬세하고 예리한 살핌을 통해서, 렘브란트가 그려놓은 그림에서 이야기를 다시 풀어내는 다비트는 관찰력과 상상력이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가. 성경읽기에도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 성경읽기란 게 결국은 독자가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본문의 표면과 심층을 드러내고 그것을 다시 이야기로 풀어내는 정교하고도 진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갖는다. 벨사살 왕이 왜 잔치를 베풀었을까? 벨사살 왕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대대적인 잔치를 베풀었을 리 없다. 벨사살이 특별히 향략적이었거나 일이 없어 심심해서 이런 거창한 잔치를 수시로 베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문이 아무 암시도 하지 않아서, 그 분명한 이유는 알기 어렵다. 무슨 이유로 잔치를 베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고만 해두자. 잔치를 위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했겠지만, 어느 잔치에서나 빠질 수 없는 게 술이다. 그들도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이 술이 문제다. 앞에서도 말했듯, 잔치가 성대했겠지만, 본문기자는 참석한 인원만 밝혔을 뿐, 그 잔치가 얼마나 화려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본문을 읽는 독자가 연회장 광경을 상상하는 것을 금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말을 아낌으로써, 독자들이 상상하도록 내버려두는 듯한 느낌이다. 본문기자는 그저 술에 관심을 둔다. 천명이 먹을 수많은 술병들. 거기에는 담은지 오랜 고급 술들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하고 술을 마셨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술기운이 돌았던 모양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들은 기왕이면 기분을 더 내서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술을 마시는데 그냥 마시는 것보다, 조금 별나게 마시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전에서 가져온 잔들을 가져다가 거기에 술을 따라 마시기로 했다. 바벨론이 정복한 나라가 한 둘이 아닌데, 그많은 나라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을 떠올리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잔을 떠올렸을까? 여기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그렇게 하자고 제안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에 술을 따라 마시자고 했을까? 이야기를 들었을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간뎅이가 부었군. 그게 어떤 물건인데. 그 사람이 아무래도 죽기로 작정한 모양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누가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라'는 명령은 벨사살왕이 내린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벨사살 왕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여기서도 우리는 아무래도 벨사살왕은 죽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죽을려면 무슨 짓을 못해'라는 말이 벨사살 왕에게 그대로 들어맞는다. 아무튼 여기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벨사살 왕이다. 그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바벨론 제국의 왕인 벨사살외에 누가 감히 명령을 내리겠는가? 당시 세계를 다스리는 벨사살 왕이 내리는 명령은 곧 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벨사살 왕이 명령하면 아무도 거역할 수 없다. 이런 벨사살이었기에 그는 이 세상 모든게 그의 통제 아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이 세상 어느 곳에 그가 다스리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벨사살은 자신의 이런 생각이 엄청난 불행을 일으키는 착각이라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달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최종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하나님 명령을 거역한 수 없다는 사실을 벨사살은 선명하게 깨달을 것이다.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에서 탈취해온 성전집기들을 가져다가 거기에 술을 따라 마시자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 한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바벨론 제국 승전일 이나 건국일을 기념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실제로 그들은 잔치 때마다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그릇들에다 술을 따라 마셨을 수도 있다. 그런데 본문기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들에 시선을 맞춘다.

2a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온 금,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2b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미시려 함이었더라

3a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3b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여기서 보는 대로 2a와 3a,2b와 3b가 대응한다. 본문기자는 그 그릇들이 예루살렘 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먼저 밝힌다. 그런 다음 3절에서는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다시 밝힌다. 2절보다3절에서 더 분명하게 말한다. 본문기자는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그릇들이 보통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그릇들은 결코 바벨론에 있을 물건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잔치에서 술잔으로나 쓰일 그런 물건들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들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그릇들은 인간들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이후에 바벨론 사람들은 그것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목록을 작성해서 그때까지 잘 보관해두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전리품들을 국가별로 잘 구분해두었던 듯하다. 전리품들을 아무렇게나 흩어놓았다면, 그것들 가운데서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물들을 어떻게 가려내서 가져갈 수 있었겠는가? 벨사살 왕이 명령하자, 담당관리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그릇들을 가져오도록 시종들에게 지시했을 것이고, 그들은 전리품을 국가별로 분류해서 보관하는 왕궁보물창고에 가서 그 그릇들을 연회장으로 가져왔을 것이다. 이처럼 전리품을 잘 간수했기 때문에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그 그릇들이 신을 섬길 때 사용했던 종교적인 그릇들이라는 사실을 벨사살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 그릇으로 술을 마신 것은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복한 나라들, 백성들, 그리고 그백성들이 섬기는 신을 경시하고 모욕하는 것이다. 모르고 한 일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한 일이다. 그들은 그 잔들로 술을 마시고는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매우 분격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릇들에 감히 술을 받아서먹다니. 그런 다음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을 찬양하다니. 그들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바벨론 사람들이 잔치를 베푼 것이 무슨 문제겠는가. 자기들 좋아서 제 돈쓰고 즐기는데, 상관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술마시고 즐길 일이지, 왜 하나님을 섬길 때 쓰던 그릇들에 술을 따라 마시는가 말이다. 그 의도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럴 듯하게 시작한 잔치는 이 장면에 이르면, 매우 가증스러운 향락으로 변질된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귀인들이 아니다.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라는 것들이 하는 짓이라는 게 모여서 질펀한 술잔치나 벌리고. 눈꼴시럽더라도 거기까지는 그냥 봐줄 만한데, 거기서 너무 나가서 색다른 재미를 추구하느라, 그들이 점령한 나라에서 가져온 성스런 제사용기들을 속된 술잔으로 쓰는 짓이라니. 이런 막되먹은 무식한 놈들이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겠는가. 이런 심정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편 137편을 떠올리게 한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8 여자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9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팍스 바빌로니아를 이뤘다고 떠들어대는 바벨론 사람들이 고작 하는 짓이라는 게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잔치자리에 불러내서 그들에게는 색다른 이스라엘 노래를 부르게 해서 흥을 돋구게 하는 것이다. 얼마나 모욕적인 일인가. 그런 요청을 받은 시인은 (죽으면 죽었지)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드릴 노래를 질펀한 술자리의 흥이나 돋구는 속된 노래로 변질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에게 바치는 노래를 그냥 유행가도 아니고, 술판에서 젓가락 두들기면서 부르는 정말 듣기 민망한 저질 노래로 바꿔버리는 그 버러지같은 인간들. 시인은 그들에게 분노한다. 그런 모욕을 당했으니 바벨론에 저주를 퍼부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본문은 이런 시인의 격한 분노를 담고 있어서 언어가 매우 과격하다.

8 여자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9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너무 심한 게 아닌가'하는 마음도 들지만, 그들이 모욕당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만하다. 바벨론 사람들은 '술취한 개'같은 사람들이다. 술에 취한 그 흉칙한 모습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제정신을 잃고 온갖 추태를 벌인다. 그들은 인간다움을 모조리 내팽개친 듯 하다. 넓은 연회장에는 올바른 이성을 지닌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추악한 똥파리들이 붕붕거리는 듯하다.

김남주가 짓고 안치환이 곡을 붙인 '똥파리와 인간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똥파린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붕붕거리며 떼지어 산다

그곳이 어디건 시궁창이건 오물더미건

상관없다 상관없다

보라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웅성거리며 무리져 산다

그곳이 어디건 생지옥이건 전쟁터이건

상관없다 상관없다

똥없이 맑고 깨끗한 곳 옹달샘 같은 곳

그곳에 떼지어 사는 똥파리들을 본 적이 있는가

보라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들이란

별개 아냐 그래 별개 아냐

똥파리들과 다를 게 없어 다를 게 없어

똥파리에겐 더 많은 똥을

인간들에겐 더 많은 돈을

그 숱한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기념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서 정성스럽게 화려한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리고 초대받은 사람들도 아주 지체높고 품위있는 사람들인데다 화사하게 차려입고 점잖게 앉아있었는데, 술을 몇잔 마시고 나자, 그 '고귀한 사람들이 저급한 향락에 취해서, 품위를 잃고 허우적대면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요 패션의 발생지였을 그 우아한 궁전을 추악한 똥파리들 본거지로 바꿔놓은 것이다.

바벨론을 저주했던 시편 137편의 시인처럼, 이 구절을 읽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을 저주하며,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기를 원했을 것이다. 제단에 놓인 돼지머리를 보고 격분해서 헬라 관원들을 쳐죽인 모데인의 제사장 맛다디아처럼, 그들도 분노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분노는 5절에서 하나님의 분노로 나타난다. 술기운에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그들은 곧 깨달을 것이다.

공포의 손가락
본문을 읽은 우리들도 눈꼴시러운데, 하나님이 그들을 보고만 계실 리 없다. 그들이 성스러운 그릇에 술을 담아 마시고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을 찬양하고 있을 때였다. 사람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허공에 손가락이 나타났다.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 출처를 알 수 없는 손가락이 연회장에 흘연히 나타난 것이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연회장 밖에서 연회장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그 손가락. 이 손가락은 공간적으로는 벨사살이 다스리는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벨사살의 지배를 받지 않고, 벨사살의 권력영역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연회장에서 술에 만취한 그 사람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전적 타자를 지시한다. 그러면서 연회장이라는 폐쇄된 공간을 초월하는 영역, 즉 벨사살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 초월적인 손가락이 연회장 벽에다 글을 썼다. 이 장면을 벨사살이 보았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그냥 손짓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니고, 벽에다 글을 써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은 사라졌을 것이다. 손가락은 벨사살이 통제하지 못하는 초월적인 공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을 본 벨사살은 기겁을 한다. 술기운이 싹 달아났다. 너무도 놀래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공포에 휩싸인다. 놀래서 일어섰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서 쓰러졌는지 모르겠다. 왕은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손가락 같은 것이 사람을 이토록 공포에 질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바벨론 제국에서 벨사살 왕의 손가락이 가장 공포스러운 손가락이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상을 받기도 하지만,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았을 터이니 말이다. 이처럼 벨사살의 손가락은 바벨론 제국에서 무한한 힘을 지닌 손가락이었다.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손가락이었던 것이다. 그런 벨사살이 허공에 뜬 정체를 알 수 없는 손가락을 보고 기절초풍할 지경이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벨사살은 자신의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손가락을 보면서, 자신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을 만난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벨사살은 도무지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었던 손가락이 이제는 벨사살을 공포스럽게 만든다. 손가락과 공포가 이토록 기묘하게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분노에 찬 자신의 손가락이 누군가를 가리켰을 때, 그 손가락질을 받은 사람이 느꼈을 그 끔찍한 충격을 벨사살이 겪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쓴 것은 벨사살에게는 외적이 쳐들어는 것만큼 이 비상사태로 느껴졌다.

이 장면을 화폭에 담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다비트는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낸다.

연회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궁전 곳간에서 나온 오래 묵힌 포도주는 달콤하고 감미로워서 불안한 입술을 적시기에 적당했다. 술잔을 비우며 바빌로니아의 신들을 큰소리로 불렀다. 영원한 즐거움과 행복을 달라고 소리쳐 기원했다. 나이 든 어떤 노인이 취기를 못 이기고 식탁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순간 그대로 코를 골았다. 잔치 자리에서 잠에 빠진 노인은 그날밤의 무서운 사건을 목격하치 못했다. 천명의 손님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날 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평생 그들이 목격한 두려운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연회가 무르익어서 거의 절정에 도달했을 때였다. 그때 거짓말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어둠 속에서 불쑥 손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벨사살 왕이 앉은 뒤쪽 석회석 벽 위에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 글자는 이글대는 쇳물을 녹인 것처럼 뜨겁게 빛났다.

난데없이 나타나서 글자를 새기는 손을 처음 발견한 것은 벨사살 왕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인이었다. 벨사살 왕은 여인의 공포에 질린 눈빛을 보았다. 앉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황급히 몸을 돌리자 둔중한 뱃살이 출렁이면서 웃옷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붉은 보석이 알알이 박힌 목걸이가 목덜미에서 춤추며 흔들렸다. 왕이 앉았던 의자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왕의 오른손이 황금 술잔을 밀치면서 식탁에 엎어진 포도주가 핏물처럼 흘렀다. 렘브란트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그날 밤의 무서운 광경을 이렇게 그려냈다.

벨사살 왕은 허공을 움켜쥐고 맨주먹을 허우적거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행동이 그렇게 표현되었다. 마지막 글자의 획이 그어지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벨사살 왕의 두 눈은 금붕어처럼 부풀어올랐다. 달아오른 인두로 자신의 허벅지를 지져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오한이 돋았다. 무릎팍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전신이 떨렸다.

이 광경을 목격한 손님들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식탁 머리에서 식탁 끝까지 두려움의 파도가 출렁이면서 밀려갔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왕궁의 벽을 후벼파며 새겨지는 글씨에서 눈을 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벨사살 왕을 시중들던 여인은 어찌나 무서웠던지 술을 옷에 쏟고 말았다. 무릎에 힘이 빠져서 온몸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금방이라고 그림 바깥으로 굴러 떨어질 것같이 보인다. 섣불리 그림 앞에 너무 가까이 다가섰다가는 술이 튀어서 옷이 버릴지 모른다. 연회의 떠들썩한 소요가 일시에 얼어붙고, 한줄기 바람이 스며들어와 어둠을 밝히던 촛불을 모조리 꺼트렸다. (그림 속 세상으로 뛰어든 화가, 16-19쪽.)

이 일을 이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벨사살은 전례를 따르기로 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바벨론 왕들은 술객들과 박사들을 불러오게 한다. 느부갓네살 왕도 꿈을 꾼 다음 그렇게 한다.

1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2 왕이 그 꿈을 자기에게 고하게 하려고 명하여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매 그들이 들어와서 왕에 앞에 선지라 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4 갈대아 술사들이 아람 방언으로 왕에게 말하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은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다니엘서 2장)

4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5 한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였으되 곧 내 침상에서 생각 하는 것과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을 인하여 번민하였었노라 6 이러므로 내가 명을 내려 바벨론 모든 박사를 내 앞으로 불러다가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매(다니엘서 4장)

벨사살 왕이 얼마나 황급했으며, 또 현재 일어나는 일을 얼마나 중대하게 생각했는지는 그가 하는 다음 말에서 알 수 있다. 벨사살 왕은 누구든지 벽에 쓰여진 글자를 읽고 해독을 한다면, 그를 바벨론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말한다. '넘버 쓰리'(Number 3)로 삼겠다는 것이다. 벨사살 이전에, 자신이 꾼 꿈을 알지 못해서 답답해 했던 느부갓네살도 비슷하게 말했다.

5 왕이 갈대아 술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6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다니엘서 2장)

그러나 느부갓네살 때도 그랬던 것처럼, 이 때도 수많은 박사들이 다 왔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손가락이 써놓은 글자를 해석하기는커녕 읽지도 못했다. 2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꿈을 꾸었고 그리고 그 꿈이 심상치 않았다는 사실은 알지만,꿈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머리 속에서 뭔가가 어린거리는 듯한데, 그것이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으니, 성질 급해서 제풀에 죽는 밴댕이같은 느부갓네살은 거의 발광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술사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꿈내용을 알아맞추고 그 꿈을 해석하라고 몰아세운다. 그러나 술사들은 꿈꾼 사람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꿈을 자기들 실력으로는 아무리 해도 밝혀낼 수도없고 해몽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의 위협에 처한다.

10갈대아 술사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크고 권력 있는 왕이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 술사에게 물은 자가 절대로 있지 아니하였나이다‥‥12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다니엘서 2장)

느부갓네살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느부갓네살은 성격이 무척 다혈질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만약 꿈내용을 알아내지 못하고 해몽하지 못한다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라고 느부갓네살이 험악한 말을 하구 또 만약 꿈내용을 알려주고 해몽을 해주면 큰 상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도 바벨론 술사들은 완전히 무용지물이다. 한편으로는 죽음의 위협을 받고 한편으로는 엄청난 보상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최선을 다했겠지만, 결국 손을 들고만 것이다. 이렇듯 바벨론의 술사들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4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가 들어왔기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느니라(다니엘서 4장 7절)

2장에서는 꿈내용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 있지만, 4장에서는 꿈내용을 알려주었는데도 해몽을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니, 다른 것들은 잘 해결해왔다고 해도, 아무리 애를 써봐도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달은 것이다.

11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다니엘서 2장)

천하를 호령하는 느부갓네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들을 잡아죽이고 삼족을 멸한다 해도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결국 답답함이 전염된다. 느부갓네살이 겪는 답답함은 바벨론의 온 박사와 술사 술객들에게로 퍼지고, 그 가족들에게 까지도 퍼져간다. 그래서 결국 온 나라에 답답함이 퍼졌을 것이다. 답답함과 막막함의 전염. 이것이 여기서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2장과 3장, 그리고 4장을 거쳐오면서 확인하는 그 답답함은 5장에서 다시 동일한 주제를 반복함으로써 더 심화된다. 5장에서는 답답함 뿐만 아리고 공포감이 새로 추가된다. 그 공포는 답답함과 더불어서 전염병처럼 확산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포는 더욱 확산되었다. 벨사살 왕만 공포에 횝싸인 것이 아니고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횝싸였다. 6절에서 벨사살 왕이 경험한 그 끔찍한 공포가 9절에서 더 강화되고 확산되는 것이다. 그 공포는 답답함으로 인해서 더 심화한다. 그들에게는 이 사건을 해결할 대책이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그 큰제국을 이끌어가는 그 절대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니. 온 세상을 자기들 마음먹은 대로 주물러대던 그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손가락 하나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니. 그 무력감이 그들을 더 공포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막막함이 그들을 더욱 좌절케 했을 것이다. 꿈내용을 알려주지 못하고 해몽하지 못하는 박사와 술사들을 다 죽이라고, 아니, 바벨론 제국 내에 있는 모든 박사와 술사들을 다 죽이라고 화가 나서 고래고래 외쳐대는 느부갓네살과는 달리, 벨사살 왕은 글자를 읽지도 못하고 해석도 못하는 박사들에게 화도 내지 못한다. 그저 얼이 빠져 있을 뿐이다. 이것은 벨사살이 얼마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한편으로 궁금했을 것이다. 본문을 읽는 독자들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그 손가락은 무엇이란 말인가? 누구의 손가락인가? 그 손가락이 쓴 글씨는 무엇일까? 어느 나라 말일까? 그리고 그 글은 무슨 내용일까?

다니엘
그들이 별 대책없이 막막해하며 깊은 공포에 휩싸여 있는데, 그런 막막함이 태후가 그곳에 들어옴으로써 깨어지기 시작한다. 이런 공간적인 깨뜨림은 벨사살 왕이 연회를 베푸는 그 막힌 공간 안에서는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고, 밖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본문기자는 연회장을 초월하는 다른 공간을 암시한다. 태후가 등장함으로써 답답함과 막막함이 깨뜨려진다. 밖에서 안으로 이것이 본문이 보여주는 문제해결방식이다. 아마 태후는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본문내용을 보면, 태후가 아들인 벨사살 왕과 갈등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태후는 잔치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한 상태였을 수도 있다. 앞으로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지만 4장과 5장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4장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태후가 매우 노쇠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때는 이미 느부갓네살도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이 들어서 출입이 어려운 태후를 몇몇 사람들이 찾아갔던 모양이다. 그들로부터 태후는 연회장에서 일어난 사태를 이야기듣고,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들어온 듯하다. 태후는 벨사살 왕이 어떤 표정인지를 먼저 살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10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 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태후가 보기에도 벨사살 왕이 무척이나 어려운 지경에 처한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던 모앙이다. 벨사살 왕이 오만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차서 얼굴색이 평상시같지 않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태후가 연회장에 들어을 때는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쓴 때로부터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 텐데, 태후가 들어을 때까지도 벨사살 왕은 공포를 떨치지 못하고, 얼굴이 굳은 채였던 듯하다. 연회장은 온통 공포로 충만해 있다. 연회장은 일종의 폐쇄된 공간이어서 그 공포감은 출로를 찾지 못하고 연회장 안을 맴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포감은 더욱 짙어져간다. 그런 숨막히는 시간이 흐르는데, 그 답답함을 뚫고 태후가 들어온 것이다. 이 태후의 들어옴은 매우 의미가 있다. 막힌 공간을 깨뜨리고 연회장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태후는 왕을 안심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다. 역시 어머니는 어머니다. 왕을 안심시키면서 태후는 대안을 제시한다. 노쇠하긴 했지만, 경륜있는 사람은 역시 다르다. 태후가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니엘이다. 태후는 벨사살 왕에게 다니엘을 소개한다. 이 구절은 2장 25절을 떠올리게 한다.

25 이에 아리옥이 다니엘을 데리고 급히 왕의 앞에 들어가서 고하되 내가 사로잡혀온 유다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얻었나이다 그가 그 해석을 왕께 아시게 하리이다

느부갓네살의 그 살기어린 공간의 막힘을 깨뜨린 것은 바로 아리옥과 다니엘이다. 이들이 당시의 막막한 상황을 깨뜨리고 개방된 공간으로 새롭게 나아감을 가능케 해주었다. 그런 역할을 했던 다니엘이 이때도 역시 왕에게 소개된다. 다니엘은 '전천후 해결사'였던 셈이다. 태후는 다니엘을 이렇게 소개한다.

11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12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 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이다

태후는 나이가 많았을텐데, 그때까지도 다니엘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태후는 다니엘서 2장과 4장에 기록된 사건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니엘을 여전히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후가 다니엘과 직접적인 연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막막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은 다니엘 밖에 없다고 그녀가 확신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장면은 독자들로 하여금 바로의 꿈을 풀이해준 요셉을 떠올리게 한다.

8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하여 보내어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 꿈을 고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10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징조가 있는 꿈이라 12 그곳에 시위대장의 종된 히브리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고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 13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하고 그는 매여 달렸나이다(창세기41장)

테트의 신비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본문기자가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기록할 때는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다니엘,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다니엘이 벨드사살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음을 밝히다.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다. 그런데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우리는 이 이름이 벨사살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우리가 얼핏 들어도 벨사살과 벨드사살은 거의 같은 이름이다. 두 이름을 시각적으로 비교해보자.

벨사살

벨드사살

여기서 보는 대로 두 이름은 거의 같다. 한글로 표기했을 때, 벨사살과 벨드사살은 '드'만 차이가 있는데, 다른 글자들은 다 같구 벨드사살에는 ‘드’에 해당하는 테트()가 하나 더 들어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런 유사함을 통해서 본문은 벨사살과 벨드사살을 대조한다. 벨사살과 벨드사살은 비슷하면서도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벨사살 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문제점들이 많지만, 여기서는 전혀 고민거리가 아니다. 본문이 관심을 갖는 것은 벨사살은 벨드사살과 비슷하지만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벨사살은 벨드사살이 갖고 있는 것을 갖지 못했음을 ‘테트’라는 한 글자로 드러내보인다. 태후는 다니엘에게는 '신들의 영’이 있다고 말한다. 1장 17절을 보면, 다니엘은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아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능력은 왕궁에서 제공하는 육식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그들은 단순히 채식만 한 것이 아니고, 채식을 하면서, 영적 수련을 쌓았던 모양이다. 다니엘과 세친구들은 채식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는다. 다니엘은 다른 사람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갖는다. 벨사살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테트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11절과 12절에서 태후는 벨드사살인 다니엘이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그만큼 다니엘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테트가 상징하는 것이며, 벨사살은 이것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태후가 다니엘을 소개하는 모습을 보면, 벨사살을 비롯한 사람들이 다니엘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느부갓네살 시대에 활동했던 다니엘은 벨사살 왕 때는 활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만약 활동했다면, 박수와 술객과 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인 다니엘이 오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박사들이 다 왔는데, 그때 다니엘이 오지 않았다면, 이 때 다니엘은 현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1장을 보면, 다니엘은 고레스왕 원년까지 활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재현하고 해몽까지 해서 권위있는 사람으로 부상하는 2장에서는 다니엘은 거의 '넘버투'(Number 2)다. 그런데 벨사살을 비롯해서 거기에 모인 천여명의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니엘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때는 다니엘이 이미 잊혀질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나이 많은 태후 외에는 아무도 다니엘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유명한 다니엘을 말이다. 다니엘을 느부갓네살에게 처음 소개한 아리옥이라는 사람도 세상을 떠난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은 다니엘만 잊은 것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까마득히 잊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런 역사망각이 과거에 범한 잘못, 즉 교만을 반복케 한다. 어쨌든 다니엘은 박사나 술사 명단에 들어있지 않다. 도대체 이때에 다니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무엇을 했길래 다니엘은 잊혀진 채 살았던 것일까? 다니엘이 잊혀졌다는 사실은 13절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벨사살왕은 왕궁으로 불려온 다니엘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태후가 알려준 정보를 되풀이한다. 이것은 벨사살 왕이 다니엘을 전혀 몰랐음을 증명해준다. 벨사살은 태후가 들려준 것들 외에는 다니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에 대해서(소문을) 들었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한다(14절, 16절). 2장과 4장에 기록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벨사살은 태어나지 않았거나 아주 어렸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부왕시절에 일어난 그 유명한 두가지 사건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다니엘에 대해서도 태후가 들려주는 말을 듣고서야 알게 된다. 벨사살 왕은 태후가 들려준 정보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벨사살은 태후가 하는 말을 조금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따른다. 태후의 말을 들은 왕은 신하들에게 다니엘을 바로 불러들이도록 했다. 일이 급박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이 아니고서는 그 공포스러운 상황을 극복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니엘의 소재를 파악하고 다니엘을 불러온다. 드디어 다니엘이 연회장 문을 열고 들어온다. 넓은 연회장에 모든 사람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다니엘을 바라본다. 다니엘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왕이 앉은 보좌까지 길게 깔려있는 화려한 카페트를 밟고 왕에게로 천천히 걸어간다. 다니엘이 걸어가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도 거기에 따라서 움직인다. 아무런 말도 없다. 그저 침묵이다. 다니엘이 걸어가는 소리만 조용조용하게 들려온다. 다니엘이 드디어 벨사살 앞에 섰다. 다급한 왕은 다니엘이 예를 갖추기도 전에 다니엘 확인작업을 한다. 이것은 2장 26절을 떠올리게 한다.

26왕이 대답하여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얻은 꿈과 그 해석을 네가 능히 내게 알게 하겠느냐

다니엘은 4장에서도 해몽하는 역할을 맡는다.

8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좇아 벨드사살이라 이름한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고하여 가로되 9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아무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을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이상의 해석을 내게 고하라(다니엘서 4장)

이것과 비슷한 장면을 요셉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4 이에 바로가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낸 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 15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세기 41장)

독자는 이런 연상을 통해서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엮는다. 절박한 심정으로 다니엘 신분을 확인한 다음 벨사살 왕은 다니엘에게 상황설명을 해주고, 글자 해석을 부탁한다. 그리고 성공하면 앞에서 약속한 것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본문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살펴보면, 같은 말이 세 번 나온다.

7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16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자주옷과 금사슬, 그리고 셋째 치리자. 본문은 세 번의 반복을 통해서 은연 중에 이것을 강조한다. 다니엘서 5장은 이 세 번의 반복을 골격으로 해서 짜여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니엘서 1장에서 6장까지는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를 부각하려 한다. 이것은 민족적인 자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 장면도 독자들에게 요셉을 떠올리게 한다.

38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창세기 41장)

다니엘도 그렇고 요셉 역시 이국에서 최고위층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부심을 높여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런 자부심고취가 본문기록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을 것은 분명하다. 바벨론의 어떤 박사들도 해내지 못하는 일을 유대인인 다니엘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본문을 읽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얼마나 자부심을 강하게 했을까. 이런 민족적인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다니엘은 그 난해하기 짝이 없는 사건 덕분에 다시 역사 전면에 등장한다.

왕 앞에 선 다니엘은, 글자를 읽고 해석해주기만 하면 영광스럽게 대우하고 넘버쓰리로 만들어주겠다는 왕의 약속을 거부한다. 이 장면도 얼마나 당당한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치 자신이 다니엘인양 그렇게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왕이 약속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다니엘. 그런 것들에는 관계없이 내가 이 글을 읽고 뜻을 해석해주겠다. 나는 그런 것들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니엘은 '나 아니면 아무도 글자를 읽거나 해석하지 못한다'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이런 자부심은 교만함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있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니엘이 아니고서는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른 박사들은 왕이 약속한 것들을 얻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었을텐데, 다니엘은 그런 것들에는 초연한 도사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벌써 다니엘은 수준 차이를 드러낸다.

본문에서 만나는 다니엘을 보면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다니엘이 아주 당당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권세있는 바벨론 왕에게 조금도 눌리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벨사살 왕 앞에서 그리고 천명이 넘은 그 귀인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다니엘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이 공감했을 것이고, 마치 자신들이 다니엘인 양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인사말을 한 다음, 18절부터 다니엘은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다니엘은 바로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장 급한 일인데, 다니엘은 뜸을 들이는 듯하다. 벨사살을 비롯해서 거기 모인 사람들 애를 태우는 것이다. 다니엘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그는 먼저 옛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벨사살 왕을 책망한다. 당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다니엘이 오만불손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다니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지 왕에 대한 책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해한 글자를 읽고 해독할 수 있는 능력있는 학자를 부른 것이지, 왕과 귀인들을 책망하는 그런 사람을 부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엄청나게 다급하다. 글자를 읽고 뜻풀이나 할 일이지, 도대체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지금 왜 하는 것인가?

바벨론 사람들은 조급했겠지만, 성경을 읽는 우리들은 4장까지 이미 읽었기 때문에, 다니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보인다. 다니엘은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단순한 통역역할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인공 다니엘을 그렇게 격하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의 역할은 그 이상이어야 한다. 18절에서 21절까지는 4장을 요약한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행하다가 당한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태후가 말한 과거지사(11,12절)를 다니엘 자신이 상세하게 밝히는 것이다.

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팍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21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이렇게 자신이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한 과거지사를 밝힌 다음 다니엘은 벨사살 왕을 똑바로 쳐다본다. 당신도 그 사건을 알지 않느냐? 그런데 왜 그 일을 망각했느냐? 왜 나를 모르느냐? 벨사살이 어떻게 벨드사살을 모를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 일을 모른다 말인가. 느부갓넬살이 겪은 일을 어떻게 그 아들이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벨사살 왕은 왜 다니엘을 사전에 등용하지 않았을까? 느부갓네살 때 뛰어난 활약을 한 다니엘을 벨사살은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벨사살 왕은 그사건을 알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다니엘은 감히 바벨론 왕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책망한다.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알고도 오히려 마음을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니엘이 아니고는 누구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말들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생사에 초연한 다니엘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더 인상적인 것은 이런 책망을 듣고도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다니엘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방진 놈. 글자나 읽고 해석하라고 너를 부른 것이지 그런 오만불손한 이야기를 하라고 부른 게 아니다. 여봐라. 저 놈을 당장 처형해라. 이런 호통이 들릴 듯한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조용하다. 다니엘은 벨사살을 비롯한 천명이 넘는 그 사람들을 압도한다. 그들은 다니엘이 보여주는 권위를 거스리지 못한다. 그 넓은 바벨론 궁전에 다니엘의 힘차고 분명한 목소리만 들려온다. 다니엘은 참으로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다니엘은 야훼 하나님이 벨사살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바벨론 왕이라고해도 당신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그분이 하시는 일을 당신은 막을 수 없다. 바벨론에서, 그것도 왕궁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쩌면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야훼께서 온 우주의 주인이심을,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어쩌면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을까? 이 얼마나 통쾌한 말인가. 다니엘은 언제나 하나님을 앞세운다. 이런 점에서 그의 겸손함은 바벨론 왕들의 교만함과 대비된다.

이렇게 느부갓네살 이야기를 하고 벨사살 왕을 책망한 다음에야 비로소 다니엘은 글자를 읽고 해석한다. 25절은 글자를 읽는 모습이고, 26절에서 28절까지는 그 글자들을 해석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애를 써도 도저히 알 수 없던 그 글자들이 다니엘에게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바벨론의 천재들이 다 매달려도 풀 수 없는 그 문제가 다니엘에게는 아무런 어려움도 주지 않는다. 조족지혈. 다니엘에게는 새발의 피같은 것이었다. 그저 슬쩍 한번 보기만 해도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글자들은 도대체 무슨 글자들 인가? 벨사살을 비롯한 바벨론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본문을 읽는 독자들도 매우 궁금하다. 다니엘이 읽어내는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 )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다니엘은 그 글을 단숨에 본토발음으로 유창하게 읽고 난 다음, 그 글자들을 하나씩 번역해준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방언같은 말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무슨 뜻이 담겨있는 걸까? 사람들은 다니엘의 입에 시선을 집중한다.

26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끔찍한 심판예고를 들은 벨사살 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벨사살 왕은 매우 의연하게 처신한다. 지금까지 공포에 떨던 벨 사살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신하들에게 명령해서 자신이 약속했던 대로 하게 한다.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한다. 그리고 금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한다. 그리고 다니엘로 넘버 쓰리를 삼는다. 벨사살 왕은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킨다. 다른 사람같았으면 자신이 심판당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기분나빠서 다니엘을 죽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니엘이 말한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거기에 빠져서, 다니엘이 풀어주는 말을 듣고 더 혼비백산해서 자신이 무엇을 약속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정말 훌륭하게 처신한다.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벨사살 왕이 다니엘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을 보면, 다니엘이 말한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니엘이 보여준 그 당당함. 그 신적인 권위. 벨사살은 그것을 감지했기 때문에 다니엘을 신뢰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독자들은 넘버 쓰리가 된 다니엘 모습을 보면서, 에스더서의 모르드개를 떠올릴 것이다.

2 왕의 능력의 모든 행적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케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열왕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존대하여 그 허다한 형제에게 굄을 받고 그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에스더 10장)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셉도 떠올렸을 것이다. 다니엘 5장은 다니엘 뿐만 아니라, 모르드개와 요셉을 이어준다.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창세기와 에스더서, 그리고 다니엘서를 연계하는 좀더 큰 이야기를 엮게 한다.

벨사살은 다니엘을 신뢰했고, 그가 하는 말들을 경청했다. 그리고 다니엘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 약속한 대로 행한다. 벨사살은 다니엘을 측근으로 삼았다. 벨사살은 뒤늦게 나마 이런 조치를 취했다. 벨사살의 행동은 매우 바른 것이었고, 경황 중에도 그렇게 일을 처리하는 자세는 본받을 만하다. 우리는 이런 벨사살 왕의 모습에서 어떤 가능성을 감지한다. 그런데 그날밤에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벨사살 왕이 보인 가능성은 이미 때가 늦었다. 벨사살 왕은 하나님께 대한 교만함을 용서받지 못했다. 아니, 자신의 교만함을 회개하지 않았다. 이것이 벨사살이 보인 한계다. 결국 그날로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 다니엘서 4장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다. 누가 벨사살 왕을 죽였는지는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께 교만히 행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이었다. 다니엘과 본문기자, 그리고 본문을 읽었을 옛 이스라엘 사람들, 렘브란트, 지금 본문을 읽는 우리들. 모두가 그렇게 믿는다.

벨사살이 죽임당한 것을 이야기한 다음에 본문 기자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위를 차지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리오는 당시 나이가 62세였다고 밝힌다. 본문기자가 다른 것들은 다 생략하면서도 다리오의 나이를 밝히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다. 62세. 당시 상황에서 62세라는 나이는 분명 젊은 나이는 아니다. 다리오가 강력한 힘을 소유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같다. 다리오 왕의 무력함은 6장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다리오 왕은 나라를 장악했지만, 총리들과 방백들의 술수에 이리저리 몰렸던 것으로 보인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살리고 싶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리고 사자굴앞에 와서 다니엘을 애타게 부른다. 다리오 왕은 하나님이 다니엘을 살려 주기만을 바란다. 그로서는 요행을 바란 것이다. 이것은 다리오가 총리들과 방백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다니엘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그를 꺼낸 다음, 다니엘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린다. 다리오는 비로소 제 힘을 갖는 것이다. 다니엘이 다리오를 강력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없는 다리오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해서 다리오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경험하고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사실이다.

25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6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 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 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27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다니엘서 6장)

이 고백과 찬양은 4장, 특히 34절에서 37절까지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고백을 연상케 한다. 4장과 5장, 그리고 6장을 보면, 느부갓네살과 벨사살, 그리고 다리오가 등장하는데,4장과 6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과 다리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치는데, 벨사살은 전혀 그런 고백을 하지 않는다. 다니엘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는 했지만,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벨사살은 전혀 과거를 회개하지 않는다. 이것이 느부갓네살, 그리고 다리오와 다른 점이다.

벨사살과 벨드사살. 그 대조는 5장을 넘어서 6장에도 나타난다. 6장을 보면, 다니엘은 벨사살왕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다리오에게 넘어갔는데도 여전히 넘버 쓰리다. 벨사살은 사라져도 벨드사살은 남는 것이다. 본문은 독자들에게 이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결과는 '테트'라는 한글자 차이에서 온다. 벨사살은 테트가 없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테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겸손하게 믿는 것이다. 4장은 느부갓네살 왕이 어떻게 교만함을 버리고 하나님께 겸손해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에게 '네가 해석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다니엘은 하나님이 그렇게 은밀한 것을 드러내주신다고 말한다. 여기서 느부갓네살의 교만함과 다니엘의 겸손함이 대비된다. 그러나 4장은 전체적으로 느부갓네살이 하나님께 겸손한 자세를 보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장면은 6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4장과 6장은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5장은 4장이나 6장처럼 해피엔딩이 아니다. 벨사살 왕이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난다. 이런 차이는 바로 상징적인 글자인 '테트'의 결여에서 비롯한다. 아무리 비슷해도 벨사살은 벨드사살은 아니었던 것이다. 느부갓네살과 다리오 왕은 어느 정도는 벨드사살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벨사살은 제자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벨사살로 삶을 마무리했다.

공간을 채우는 상상
이제 우리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확인할 길이 없는 옛날 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낸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까? 다니엘. 느부갓네살 앞에서나 벨사살 앞에서나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 뜻을 선포했던 그 담대함. 그 용기. 본문기자는 그것이 그리웠나 보다. 본문기자가 살던 시대는 다니엘같은 인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였다. 그래서 그는 다니엘을 과거로부터 이끌어내서 당시 사람들 앞에 생생한 모습으로 세워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다니엘과 동일시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까닭은 바로 상상력이었다. 상상은 힘이다. 매우 강력한 힘이다.

그러나 상상력의 세계가 지닌 목표는 현실 세계를 없애고 자신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전략은 이상적인 모델들을 물질의 무거움과 변화하는 역사 상황에 맞게 적응시킴으로써 구체적인 세계의 통제를 추구하는 것이다.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서 상상력의 세계는 보상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어디서나 끊임없이 작용하지만, 특히 그것이 증폭되어 나타나는 것은 위기의 시대들이다. 이때 그것의 발현들은 환멸을 보상해 주고, 공포에 장막을 쳐주며, 교차적으로 오는 해결책들을 창안하도록 촉구된 것들이다. 거의 영속적인 기조에 속하는 세계의 종말, 천복년설, 유토피아, 이타성의 극단적 고무, 천명을 받은 인물, 밀교적 의례, 기타 다른 많은 형식들은 인간들이 '현실의’ 역사에 절망하는 순간 날카롭게 강세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상상력의 세계는 역사적 변화를 재는 매우 민감한 바로미터로서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뤼시앵 보이아, 상상력의 세계사, 35-36쪽.)

다니엘을 꿈꾸는 사람들. 그들이 상상력으로 엮어내는 세상.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행사하시는 세상. 제 아무리 세계를 정복한 군주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세상.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상상력 속에서 다니엘과 본문기자, 그리고 렘브란트와 다비트, 본문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같은 세상을 꿈꾼다는 사실로 인해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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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이종록
한일장신대 구약학교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