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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의 학문화에 승부 건 팔방미인

온울에 2008. 5. 29. 23:31

세계 유일의 바둑학 교수 정수현 9단

정수현 9단의 바둑은 정통파 스타일로 변칙적인 수를 잘 두지 않는다. 모양 좋고 경쾌한 쾌속 행마가 그의 주특기. 그런 탓에 속기에 능하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진 못했으나 프로기사로서 내실있는 삶을 살아가던 그는 어느날 갑자기 프로기사에서 교수님으로 변신했다. 정 9단은 요즘 불모지나 다름없는 바둑학을 정립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조헌주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프 로기사 생활을 해오면서 온갖 일을 다 해봤습니다. 다만 한 가지 못 해 본 것이 있는데 바로 우승입니다』

96년 세계 최초로 한국 대학에 만들어진 바둑학과. 역시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프로기사 신분의 정식 바둑학과 교수. 다름 아닌 정수현 9단이다.

2월 초 한국기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을 꺼냈다. 하긴 그렇다. 그에게 붙여진 화려한 수식어를 감안하면 진작에 타이틀 한두 개쯤 땄음직하다. 바둑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우승 한 번 못했다는 사실은 학생들한테 영 체면이 안 서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가 우승권에서 한참 멀어진 퇴락한 프로기사라는 뜻은 아니다.

56년 2월1일 전북 남원에서 출생했으니 이제 마흔셋. 그렇게 나이 들었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프로기사 세계는 다르다. 갓 입단한 10대들의 기세가 비온 뒤 죽순 솟아오르듯 무서운 요즘 프로기사 세계에서는 이쯤만 돼도 벌써 중견소리를 듣기 힘들다. 40대면 원로대접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

그가 입단한 것이 73년. 97년 9단에 오른 그는 올해로 프로기사 생활 26년째를 맞는다. 어떤 조직에서 이만한 세월을 진득하게 지켜왔다면 원로요, 장인(匠人)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이가 무슨 대수인가.

프로기사를 평범한 일상의 사람과 비교하면 한마디로 게으르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프로의 일정은 세상사와 달리 정해져 있으니 저잣거리의 일들과 무관한 것은 자명하다. 그러니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늦잠을 잔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86년 신인왕전에서 우승

그러나 프로기사 정수현은 교수 직함을 달기 전부터 유난히 부지런했던 사람이다. 프로기사회장으로, 20여권의 바둑 저서를 펴낸 필자로, 기업체의 지도사범으로, 그리고 이제는 대학교수로, 그리고 현역 프로기사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건 그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대학에서 정식교수로 대접을 받고, 책 인세도 받고, 지도사범도 하고, 해설료도 받고, 기전 참가료도 받고 하니 말이다. IMF 한파로 기전 규모가 줄어들어 다들 걱정을 하는 마당이라 그의 처지가 더욱 부러움을 살 만하다.

『작년 한해 동안 자동차 주행거리가 3만5000km가 되더라구요. 정신없이 뛴 셈이지요』

그런 와중에도 그가 올해 1월16일 KBS바둑왕전 결승에서 이창호 9단을 상대로 필생의 꿈인 프로기전 우승을 겨루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의 기재가 만만치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여태껏 우승을 해보지 못했다고 했지만 우승한 적이 있긴 하다. 86년 5단 시절에 최초로 만들어진 신예 프로기사들만의 무대인 신인왕전에서 우승했던 것. 이는 고단진이 참여하지 않은 반쪽 기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승은 우승이다. 신인왕 타이틀을 아무나 딸 수 있는가.

어찌됐든 그는 끝없는 패싸움을 이어가듯 본선무대를 오르락 내리락하면서도 좀처럼 결승무대에는 얼굴을 비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70년대 중후반과 80년대는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에겐 「고통」의 세월이었다. 바둑 팬들마저도 조훈현·서봉수의 끈질긴 맞수 대결에 지겨워했을 정도니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프로기사들은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언제까지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조훈현 9단의 전성기였으니 말이다.

이른바 「도전 5강」으로 불렸던 패기만만한 기사들을 기억해보라. 날렵한 「조제비」의 날갯짓 한 번이면 그걸로 끝이었다. 날갯짓 한 번이 만들어낸 거대한 회오리 바람과 세찬 빗줄기에 여타 프로기사들은 지친 한 마리 어린 참새처럼 처마 밑에 쪼그려 지냈던 것이다. 정수현 9단 역시 강대한 제국의 황제 조훈현의 그늘 밑에서 그렇게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제비」가 되지 못한 「나비」

그러던 조훈현 9단이 제 손으로 키워낸 호랑이 같은 소년 이창호 9단에 밀려 기세가 꺾이고 있던 93년 정수현 9단은 평생 처음으로 결승 무대에 올랐다. SBS 제2기 연승바둑최강전이었다. 상대는 욱일승천의 이창호 9단이었고 결과는 2 대 0으로 져 준우승에 그쳤다. 그리고 6년 만인 올해 그는 KBS바둑왕전에서 다시 이창호 9단과 3번기를 겨루게 됐다.

『창호가 후반이 강하잖아요. 그래서 작전상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나갔지요. 창호가 후반에 상대방의 엷은 곳을 뚫고 들어오는 능력이 탁월하니까 두텁게 둔 것이지요』

30초 기회가 다섯 번 있을 뿐, 모든 수를 30초 안에 두어야 하는 초속기대국에서 그는 세계최강의 이창호 9단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결과는 1집반을 져 제1국을 내줘야 했다. 2월23일 제2국을 앞두고 정 9단은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있는데 과연 그가 이창호를 뛰어넘어 필생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보통 학생들과 똑같은 경쟁을 거쳐 대학에 진학하고 제때 대학을 마친 프로기사가 거의 없는 프로기사 세계에서 한양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교수가 되기 훨씬 전부터 「교수」라고 불렸다. 어느 바둑칼럼니스트가 붙여주었다는데 훗날 정 9단이 상아탑으로 들어갈 것을 예견한 것은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 「교수」란 별명이 붙은 것은 우선 정규대학 출신이 적은 프로기사 세계에서 대학을 제대로 나왔을 뿐 아니라 바둑책을 부지런히 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그의 기풍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그는 자신을 「정수파(正手派)」라고 말한다. 주위에서 그의 바둑을 「정통적인 바둑」 「모양감각이 좋아 잘 무너지지 않는 바둑」 「경묘한 바둑」으로 평가하는 대목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천변만화가 일어나는 19로의 승부바둑에서 경묘하게 반상을 운영한다는 것은 재주가 많다는 뜻이다. 발빠르게 두어나간다는 것은 계가나 형세판단에 밝지 않으면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정수현은 나름대로 세운 원칙에 어긋나는 수는 두지 않는다. 학자가 논리체계의 틀을 떠날 수 없듯 그는 독자적인 바둑학 테두리 안에서 바둑을 두어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교수」란 별명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드러내놓고 싫다는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별명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나비」다. 서봉수 9단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가까운 사이인 서 9단이 붙여주었다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수현은 『내 바둑이 빠른 스타일이지만 독기가 없다는 뜻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빠르다 하면 조훈현 9단을 연상한다. 실제로 조훈현 9단은 세 살 아래인 정수현에게 『내 별명을 물려줄까』 하는 농담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천재성을 번득이며 속력행마로 한국 기계를 평정한 조훈현은 문득 정수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전 5강의 말로처럼 그는 조훈현의 별명을 이어받지 못해 「제비」가 되지는 못했고 아직도 「나비」로 남아 있다.

된장바둑 서봉수 9단은 조훈현 9단과 10년 세월을 대결하면서도 기죽지 않았기에 실제 성격과는 관계없이 「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정수현 9단으로서는 그가 붙여준 나비란 별명이 서봉수류의 독기가 없어서는 곤란하다는 비판 같아 다소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저한테 바둑을 진 상대가 「어떻게 졌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게 제 바둑 스타일과 관련이 있겠지요』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 이름을 날린 무하마드 알리는 경쾌한 푸트워크로 상대를 제압하다 기회가 생기면 해머처럼 강렬한 펀치를 날리곤 했다. 오죽했으면 떠버리란 별명을 얻었을까. 진정 프로복서중의 프로복서였던 그는 대결을 앞두고 상대방을 향해 「나비처럼 날다 벌처럼 쏘아 버리겠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정수현의 행마는 나비처럼 날기는 했지만 벌이 독침을 쏘듯 그렇게 폭력적이지는 못했다.

『흔히 누구 기풍이 어떻다 하지만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더러 전투력이 약하다는 평을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저 이기는 바둑이 어디 있습니까. 한 판의 바둑이 끝나기까지 싸움이 안 생길 리 없지요. 싸움에서 이기지 않으면 어떻게 바둑을 이깁니까』

「나비」란 별명을 그는 영 서운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싸움에 약한 바둑, 그래서 정상에 설 수 없는 약한 바둑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경묘한 기풍의 속기파

그는 96년 한해 동안 『한겨레신문』에 바둑에 관한 에세이를 매주 연재한 적이 있다. 그것을 묶어 책으로 펴낸 것이 『반상의 파노라마』였다. 바둑팬들은 프로기사를 만나면 그들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안달한다.

무슨 이야기든 귀가 솔깃해지도록 말을 술술 잘하는데 글로 써서 정리해보라고 하면 질색을 하는 풍토는 프로기사 사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만 정수현 9단은 이 책을 비롯해 『해프닝 극장』 등 20여권의 저서를 펴냈다. 바둑교재까지 포함한 것이지만 여간한 노력이 없으면 안 된다. 또 말을 조리있게 잘하는 기사 축에 들어 텔레비전 해설도 곧잘 했다. 12년간의 프로기사회 대의원을 거쳐 기사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금호그룹 지도사범도 했다. 남들보다 일찍 바둑교실을 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다방면의 활동이 있었기에 96년 초 명지대 예체능대학 체육학부에 바둑지도 전공 과정이 개설될 때 교수로 초빙됐던 것이다.

『초청을 받고는 상당히 고민했지요. 나이 마흔을 넘기게 되니 갑자기 이게 아니다 싶더라구요. 이제부터 한 5년간 만사 제쳐 두고 바둑공부에 전념하자, 그렇게 결심을 하던 차에 갑작스럽게 초빙 이야기가 있었지요』

결국 그는 상아탑을 선택했다. 대학교수 생활을 하고부터 하루 생활이 180도 바뀌더라고 말했다. 이제껏 대학교수는 편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란다. 행정업무에 교재개발, 시험과 평가, 상담 등으로 엄청나게 바쁘다고 했다. 바둑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프로기사라 할 수 없으니 시합에도 참가해야 한다. 강의 때문에 때로는 「이기는 것이 두려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이기면 다음 대국 일정 때문에 강의시간을 조절해야 하는데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이는 속기파로 알려진 그를 더욱 속기파로 몰아붙이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가 초속기에 능한 기사라는 점은 평생 두 번의 결승진출 기록이 모두 텔레비전 속기전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아무래도 프로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속기가 몸에 밴 것 같습니다. 빨리 대국 끝내고 강의받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절로 손이 나갔지요』


중학교 2학년 때 바둑 배워

코흘리개 시절부터 장난감 대신 흑백의 돌을 들고 자란 요즘 10대 프로기사들과는 달리 그의 바둑입문과정은 구시대적인 패러다임대로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바둑이란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갖게 됐다. 집안에 바둑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외할아버지가 조금 두는 정도였다. 그에게 바둑 세상을 알려준 것은 남원시내 동호회인 기우회였다.

『강1급짜리들한테 아홉점을 놓고 배우기도 했어요. 김현철씨라는 남원지청장이 잘 봐주었지요』

그때가 중학교 3학년. 여느 동네 기원과 달리 연구분위기가 상당했던 기원이었기에 그는 바둑실력을 부쩍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닥친 고교입시 때문에 바둑공부에만 전념할 수는 없었다.

고교에 진학했지만 다리를 다쳐 휴학을 했다. 그러다 내친 김에 바둑을 두겠다며 서울로 올라와 한국기원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당시의 연구생 제도는 후일 이창호 소년이 1기생 과정을 마치고 입단했던 「바둑사관학교」 연구생 제도와는 달리 그저 말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구생이라고 해서 특별히 관심을 쏟아주는 기사도 많지 않았고 잔심부름을 하거나 기록을 도와주는 일이 전부였다. 그래도 기재는 있었던지 한 1년 반쯤 그렇게 하다가 73년 입단했다. 입단동기는 김학수 6단이었다.

입단 후 충암고에 다시 진학했다. 특기생이라 「적당히」 2학년에 넣어 주었다. 오전은 학교공부, 오후에는 한국기원에 나와 바둑공부를 하였다. 그러다 3학년이 되자 이번에는 대학입시 준비를 해야 했다. 지금의 수능시험 전신이라고 할 예비고사 공부를 했고 한양대 영문학과에 입학, 졸업을 했다. 군대생활도 다른 대학생들과 같은 조건으로 마쳤다.

86년 신인왕전 타이틀이 만들어지고 그가 우승했다. 결승상대는 강훈 9단. 74년에 입단한 한 살 아래 기사로 마기회(磨棋會)를 함께 만든 멤버이기도 하다. 마기회는 강훈 김동면 서능욱 김수장 강철민 임선근 이홍렬 백성호 등 이른바 조훈현-서봉수시대에 기세를 올리다 주저앉고만 「도전 5강」 그룹이 주축이 된 바둑연구모임이자 친목회다. 하지만 그는 요즘 기사들처럼 별도의 연구공간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그만큼 어려운 여건에서 바둑을 두었던 것이다.

『군대 3년을 마치고 돌아와도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한국기원은 그처럼 보수적인 곳입니다』

바둑세계에만 몰두해온 다른 기사들보다는 견문이 넓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개혁성향이 돋보이는 그를 동료들은 94년 기사회장으로 뽑았다. 정수현은 한국기원에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바둑강좌를 만들었다. 처음으로 한국기원 강당에 모인 일반 바둑팬 79명을 모아놓고 마이크를 잡았을 때의 흥분을 생생히 기억한다.


비흡연파의 구세주

그가 기사회장으로 있을 때 한 일 중에 매우 잘한 일로 꼽히는 일이 금연파 기사들을 위한 대국실 분리. 한때 담배 연기 자욱한 가운데 수읽기에 골몰한 프로기사의 모습에서 낭만 같은 것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체력이 곧 기력인 시절이 오면서 이는 아득한 향수 속으로 사라졌다.

자연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 기사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담배를 손에 대지 않았던 정수현 9단이 그런 찬스를 놓칠 리 없었다. 당시 기사를 대표해 한국기원 이사를 맡고 있던 장수영 9단과 함께 대국중 금연을 추진했다. 하지만 흡연파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흡연파의 거두가 조훈현 9단이었다. 현재 조 9단은 흡연파를 이탈, 금연파에 투항해 금연초 광고에 출연할 정도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장미 줄담배로 유명하던 시절이었다.

『담배를 피워 물지 않으면 수가 안 보여. 어떡하란 말이야』

조 9단을 필두로 담배를 끊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 지긋한 기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다. 결국 타협책으로 대국실을 흡연이 가능한 방과 비흡연실로 나누었다. 그렇게 해놓으니 상당 부분 문제가 해결됐다. 하지만 대국자 중 한 명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 경우 입단 선후배를 따져 선배가 방을 고르도록 했다.

정수현 9단의 취미라면 테니스 볼링 탁구 등이다.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 많이 마셔서 좋을 게 없잖습니까』

그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프로기사 가운데는 술로 망했다는 소리를 듣는 이가 상당수 있다. 한때 잘 나가던 시절 상금을 받으면 돈이 떨어질 때까지 술집을 전전하고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가곤 하던 기사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역시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이 한국기원 총재를 맡으면서 추진한 기업체 지도사범의 혜택을 받았다.

『80년대 중반에 월급으로 60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과장급 월급보다 많았지요. 한편으로는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사들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지요』

지금은 100만원 수준으로 올랐다. 한달에 두세 차례 나가 지도대국을 해주는 일의 대가치고는 상당한 액수다. 그러나 IMF체제에 들어서면서 많은 기사들이 기업체 지도사범 자리를 잃기도 했다.


상아탑에 들어간 바둑

정수현의 바둑인생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해준 사람은 아마추어 고수인 고건 서울시장이었다. 고건 시장이 명지대 총장으로 있던 어느날 교수회의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바둑학과를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즉각 어이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총장님, 과연 바둑이 학과가 될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카지노학과도 만들어야겠네요』

한 교수가 정면으로 반박했으나 고총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각계 사람을 만나 의향을 들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던데요』

총장의 고집을 파악한 대부분의 교수회의 참석자들은 결국 체육학부에 바둑지도전공을 신설하는 데 동의했고 창설 이듬해부터는 독립학과로 분리됐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과연 바둑학이 가능한가. 바둑학 교수 정수현은 바둑의 학문성에 관해 다섯 가지를 이야기한다.

우선 바둑의 문화사적 가치다. 동양 전래의 문화유산인 바둑은 충분히 학술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대저 학문이란 무엇인가.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한국인의 문화생활에 일익을 담당해온 바둑이 왜 연구 대상이 안 되느냐는 말이다. 바둑의 기원 용도 발전과정 등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정교수의 지론이다.

둘째, 바둑은 미지의 영역인 「정신체육에 관한 학문」으로 정립시킬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체육학이 신체의 발달과 운동에 관한 학문이라면 바둑은 장기 체스 등과 함께 인간 신체의 한 부분인 두뇌 활동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두뇌개발과 정서교육을 위해 바둑을 배우는 어린이가 많은 실정을 고려할 때 바둑이 인간의 사고활동과 정서적 현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당연히 학술적으로 구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바둑의 예술성이다. 바둑 수는 미술과 음악 등 예술세계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 쾌감을 수반한다. 그 내용에는 어떤 예술 못지않은 심오함이 들어 있어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바둑수의 기술을 담당하는 예능인이 바로 프로기사다. 그들은 음악가나 화가처럼 전문적 예능인이다. 바둑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1천만 바둑인구의 존재다. 국민 다수의 건전한 여가선용 차원에서 학문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바둑이 국민정서에 끼치는 영향, 직장생활에 끼치는 영향, 효과적인 바둑문화창달을 위한 제도개선 등 대중문화의 정립이라는 면에서 연구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또한 여가가 늘어남에 따라 놀이문화에 대한 연구차원에서도 가능하다.


뼈대 세우는 일에 매진할 터

마지막으로 바둑의 세계성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50여개국에서 두뇌 스포츠로 자리잡은 바둑은 한국 바둑의 성장에 따라 한국의 국기(國技)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 시점에 체계적으로 바둑을 공부한 바둑지도자가 필요하다. 태권도 사범이 해외에 나가 도장을 차리면서 태권도가 널리 보급되고 한국의 이미지가 향상되었듯이 바둑사범의 양성이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철학과 문학 등 순수인문과학의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특정 기술분야의 학문은 갈래갈래 많은 학과를 이루고 있는데 굳이 바둑이라고 안 된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둑이 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느냐에 대한 그의 결론적인 대답이었다.

『처음엔 체육학부에 들어 있었는데 사실 체육과 연관성은 많지 않더군요. 두뇌스포츠가 신체적인 스포츠와 다른 것은 당연합니다』

97년 바둑이 체육학부 바둑지도전공에서 독립학과로 분리된 배경이다.

바둑학과 강좌 내용을 보면 포석 정석 행마 등 실기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학 교육심리 교육공학 등 부수적인 공부말고도 음악 미술 등 다른 실기의 지도방법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또 인문학적인 내용도 많다. 역사와 철학 등이 교양과목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원로 조남철 9단이나 정치학박사학위를 가진 문용직 4단, 바둑칼럼니스트 이광구씨 등을 초청해 특강을 실시하기도 한다.

최근 신입생 가운데 절반쯤은 졸업 후 국내외에서 아동을 지도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대학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올해부터 아동바둑지도학 강좌를 만들었다.

『저는 뼈대를 만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얻은 생각을 하나의 이론으로 만들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동아문화센터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가르친 경험도 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바둑학 강좌들이 하나 둘 검증을 거쳐 이론체계를 갖추기까지는 중반의 싸움과 미세한 끝내기 수순이 남아 있는 것이다.


과연 바둑은 좋은 것인가

그가 걱정하는 것은 요즘 남발되다시피 하는 바둑지도사 자격증이다. 인성교육이랄까 하는 측면을 여러 사정으로 측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97년과 98년에는 입학 정원이 20명이었는데 올해 30명으로 늘었다. 재학중 휴학을 하고 군대에 입대한 학생들도 많아 편입생도 뽑았다. 벌써 3학년에 진학한 학생이 생겨남에 따라 졸업생 진로 문제도 부쩍 신경쓰인다.

바둑교수의 일 중 가장 힘든 대목은 학생들의 기력 차이라고 한다. 학생들의 기력은 프로기사에서부터 아마추어 10급까지 폭이 넓다. 사활의 기본을 가르치면서 연관되는 실전기보를 함께 보여줘 각자 수준에 맞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한국에는 줄잡아 1000개의 바둑교실이 있다. 50명씩 치더라도 5만명의 어린이들이 취미건 프로지망이건 열심히 바둑을 둔다. 두뇌개발과 정서안정 효과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바둑은 어린이 교육에 좋은 것일까.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바둑은 상대방이 둔 수의 의미를 파악하고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합리적으로 추리하는 수읽기 기술이 매우 중요합니다. 수읽기 습관은 사물을 즉흥적이나 충동적으로 대하지 않고 분석하는 태도를 길러줍니다. 일단 상대방의 의도를 깨닫게 되면 수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추리해 응수를 하게 되지요. 이 추리가 높은 단계로 올라서면 사건에 대한 판단력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바둑을 두면 끊임없이 사고력을 활용해야 하고 그것이 두뇌를 발달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설명이다. 덜렁대는 아이들이 바둑을 배우고 나서 차분해지는 것은 사고력이 마음속에 자리잡기 때문일 것이다.

정수현 9단에게는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유치원 다니는 다섯 살짜리 딸이 있다. 프로기사의 아들이 바둑을 모른대서야 이상한 일. 그는 아들을 2년 동안 바둑학원에 보내 보았지만 영 관심이 없더란다. 만날 축구다 뭐다 운동만 좋아해 그저 취미정도로나 둘 정도로 가끔 가르친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딸은 본격적으로 가르쳐 볼까 하는 눈치였다.

바둑학 교수도 자식만큼은 맘대로 안 되는 것, 그것이 또한 세상이치의 오묘함이 아닌가 싶다.


[=]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3/nd990303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