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자명 국제기독교언어문화연구원
학술지명 기독교언어문화논집Collected papers on Christian Language Culture
ISSN 1229-196X , 권 5, 호 1, 출판일 2002. 2. 15.
말놀이와 언어의 주체성
이규호, 국제기독교언어문화연구원 명예이사장
1-184-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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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말놀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인문학들에서 사회과학들에서 또는 과학이론들에서도 마치 하나의 중심개념처럼 "말놀이" 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말놀이라는 개념이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는 곳을 찾아 보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놀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문맥을 더듬으면서 그 뜻을 살펴 볼 수밖에 없다.
말놀이의 놀이는 아무래도 장난기를 뽑아버리기가 어려운 표현이다. 그래서 그 의미를 정의하기가 더욱 어려운지 모른다. 장난기를 뽑아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철학의 하나의 개념으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처음부터 장난인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말로 말놀이라고 할 때의 놀이는 영어의 놀이(game)라는 말과는 뜻의 느낌이 다른지 모른다. 영어의 게임(game)과 우리말 "놀이"는 서로 다른 "느낌" 을 품긴다는 것이다.
독일말 수필(spiel)도 우리말 놀이와는 다른 어감을 품긴다.
말놀이의 놀이뿐만 아니라 철학의 하나의 기본개념인 "정신"이라는 말도 영어(mind).로 독일어로 번역하든지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한 나라의 말을 다른 나라의 말로 번역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면 다시 말해서 정신, 마인드, 가이스트와 같은 말들이 서로 번역하기가 어려우면 이것은 우리의 언어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할수가 있다. 언어는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 온 바와 같이 어떤 사실을 표현하는 단순한 기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정한 사실이라는 것은 여러가지로 구별될 수가 있다. 우리말로 사물이라는 것과 우리말로 사실이라는 것은 서로 어감이 다르다. 같은 우리말 사물과 사실 곧 같은 우리말이라도 그 뜻이 같은 것이라고 취급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언어학이 "차이"를 많이 중요시하게 되었다. 말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다른 언어 곧 비슷한 다른 언어와 비교해서 그 언어의 뜻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물론 비슷한 덕목이나 추상적인 개념과 이념 모두 개념들의 차이를 통해서 그들의 뜻을 알아낼 수가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의 차이의 철학은 소슈르의 언어학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서양철학이 희랍시대 부터 계속 동일성의 개념을 소중히 여겼든 사실을 생각하면 서양철학의 혁명적인 전환을 위해서는 "동일성"보다는 "차이"의 개념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의의가 있는지 모른다. 데리다는 그의 차이의 철학을 통해서 서양철학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슈르는 그의 언어학을 통해서 서양철학의 혁명적인 변혁을 돕고 있는 셈이다.
서양철학의 논리학은 "A는 A이다"라는 동일률에 근거해서 지속되었고 발전했기 때문이다. 변혁의 세계에 있어서는 우리의 경험은 "A는 A가 아니다"가 진리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늘 변화하고 상대적인 시 간 안에서는 면밀한 의미에서의 동일한 것은 없다.
물론 내가 여기서 말한 기호라는 것은 요즘 넓은 의미에서 말하는 그리고 언어를 포함한 기호가 아니고 좁은 의미에서의 언어와 대립되는 기호이다. 일정한 사물을 표현하는 인위적이고 임의적인 기호이다. 언어는 그러한 기호와는 매우 다르다.
언어는 꼭 일정한 사물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인위적으로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으므로 반드시 임의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기호 곧 내가 여기서 말하는 기호도 넓은 의미에서의 언어에 속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의 언어가 넓은 의미에서 기호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기호와 언어는 서로 완전히 구별해 버리기가 어려울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정한 사물을 표현하는 기호나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호나 인위적으로 정의 할 수 있는 기호와 언어는 매우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다.
언어는 다의적이어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고 또한 언어는 창의적으로 새로운 사태를 암시할 수도 있고 또한 언어는 늘 새로운 이해를 유도할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이끌어 갈 수도 있다. 기호와 언어는 이렇게 공통적이고 서로 보충하고 서로 도우면서 인간의 삶을 위해서 그 역할을 다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기호가 만약 언어에 의해서 해석되지 않으면 그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 의미를 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언어가 인간적인 혹은 사회적인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어는 늘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는 일정한 사물만을 기호처럼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래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 곧 언어철학자나 언어학자들 중에는 언어를 사물에 혹은 사실의 이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언어는 사물이나 사실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꼭 고정적인 사물 책상이나 걸상이나 어떤 꽃이나 어떤 사물뿐만 아니라 어떤 사건도 그것들을 가르키는 이름이 필요한데 그 이름 역할을 하는 것이 언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명론적인 언어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체나 사물들은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어떤 사실이나 사건들에는 그런 이름을 부치기가 어렵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물체나 개별적인 사물들은 이름을 부칠 수 있겠지만 동작이나 사건이나 성격과 같은 것들은 가정적인 물체들처럼 이름을 부치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아름답다 라든지 걸어간다와 같이 사물의 심미적인 성격이나 인간이나 동물의 동작 같은 것에 물체와 같은 고정적인 이름을 부치기는 어렵지만 일정한 동작에 걸어간다를 부친 다든지 울밑에선 봉선화에 아름답다를 부치는 것도 사물의 성격에 대한 이름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언어라는 것은 역시 이름을 부치는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물체에 행한 이름보다는 성격에 대한 이름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성격은 더욱 주관적이고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가 있고 여러 가지로 부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언어를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이른바 유명론(唯名論)은 널리 펴져 있다. 철학자들도 상식적으로 유명론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말은 사물. 사건. 성격 등에 붙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유명론이나 기호학은 모두 어떤 실체나 물체나 성격이 물체가 언어보다 먼저 가정적인 또는 결정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을 부르고 그것을 전달하고 그것을 부르기 위해서 언어가 필요하게 되는 그런 경우의 언어관을 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놀이의 경우나 언어 철학의 경우나 말은 단순한 기호만은 아니다. 그것은 말이 단순한 사물의 이름만은 아니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모호하고 애매한 관념을 유도해서 분명하고 명백한 관념을 만드는 창조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언어는 인간이 미처 깨닫지 못한 덕성을 깨닫게 하는 빛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언어는 참으로 어둠을 밝혀주는 빛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물론에서는 반드시 경험적인 실체를 앞세우지만 실제로는 실체나 물체가 없는 곳에서 언어와 표상과 관념을 통해서 그런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미지의 세계에서는 마디 말 실체가 무엇인지 찾아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곧 마지막 실체가 운동의"파상"인지 고정적인 "실체"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곤텍스트에 따라서 파상의 운동이마지막 실체일 수도 있고 가정적인 실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실체는 언어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유명론이나 기호론이 유명론이 암시하는 실체론적인 세계관이 그 하나의 근거를 잃은 것이다. 실체이냐 파상이냐의 다툼에서 반드시 실체가 앞선다는 주장이 그 근거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유명론과 기호학이 반드시 과학적이고 언어철학이 반드시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이 강제적인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언어철학을 유명론이나 기호학과는 언어관에서 출발한다. 말은 사물에 붙은 이름도 아니고 사람들이 만들어 낸 기호도 아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기호라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기호를 말한다. 말은 이름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기호로서 이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말은 아무래도 이름만은 아니고 기호만도 아니다. 이름을 만들고 기호를 창출하는 힘을 가진 것이 언어의 힘이다. 언어의 힘은 그것을 표현하는 사물과 인간사이에서 그 주체적인 기능을 강화해가고 있다.
언어철학은 언어의 이러한 주체적인 힘을 밝혀 가고 있다.
언어는 사물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사물을 표현하면서 특수한 특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객관적인 사물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언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유"에서 특수한 "사물"을 창조한다는 의미에 주체적 이라는 것이다.
"말놀이는 말이 개입하는 인간의 역사적인 사회적인 활동의 전체적 움직임을 말한다.
말의 이러한 성격을 우리가 알아야 우리의 삶은 이데오로기에서 해방될 수가 있다.
현대문학과 상대성원리 이래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남의 놀이에 따라서 비쳐지는 황금색 이데오로기가 우리를 유혹할 뿐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내 존재라고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이해를 말놀이라고 했다. 세계내존재와 이해의 세계는 말 놀이 이고 말놀이 세계는 세계 내 존재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원래 영의 세계의 분석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었고 하이데거는 구라파 실천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말놀이라는 개념과 세계 내 존재의 개념도 성격이 서로 다른점이 분명하다.
말놀이의 개념은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쉬울 것이고 세계내적 존재의 개념은 존재론적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개념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라는 개념을 알아야 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을 알아야 이해해야 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념 현대철학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세계내 존재라는 개념은 인간의 자기인식과 이웃과 타자와 사회인식이 입장으로서 함께 작용하게 된다는 것과 말 놀이는 또한 세계 안의 상호작용 상호관계가 존재의 파악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놀이와 세계 내 존재는 그 동의철학 언어학 등의 연구와 그 발전에 힘입은 것이라는 것도 부언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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