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들어가기
1. 차이(差異, die Differenz)의 뜻매김
2. 존재론(存在論, Ontologie)의 뜻매김
3. '존재론적 갈라-놓기'와 '날라-내기(Austrag)'
끝맺기
--------------------------------------------------------------------------------
발행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지명 인문학 연구
권 4
호 1
출판일 1999.
존재론적 차이 속으로
구연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외대 강사
2-397-9901-04
pp.108-155
--------------------------------------------------------------------------------
들어가기
이 글의 목적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유래"를 밝히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존재론적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론적 차이"란 말은 "생물학적 차이" 또는 "의미론적 차이" 등의 말과 비슷하다. 이 말들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 말들 속에 "차이"라는 낱말이 공통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대한 해명 또는 설명은 그 ' 어떤 것'을, 그것에 속하는 공통성 내지 보편성으로부터 이끌어내거나 또는 그것들에게로 이끌어들이는 방식으로도 주어질 수 있다. 이 글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존재론적 차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차이의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분석(分析)한다는 것은 단순히 작게 쪼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칸트적 의미에서, "어떤 것을 그것의 본질 내지 근원에로 되돌려 주는 것"을 말한다. '차이의 의미를 분석한다는 것'은, "차이"라는 말이 "뜻할 수 있는 바들"을, 그것들이 서로 가름될 수 있는 '갈래들'에 따라 갈래갈래 '나눠 놓는다는 것'을 이른다. 그러나 "차이"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유래를 가리켜 보일 수 있을 만큼만 수행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존재론적 의미"도 나름대로 한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존재론이 "존재에 대한 학문"을 뜻하는 한, 그것은, 서양의 학문적 전통에 따라 보자면, "형이상-학" 1) 을 일컫는 말이 된다. 존재론의 의미에 대한 논구는 서양 형이상학의 '골격' 내지 '뼈대'를 풀어내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풀어냄'은, "존재론적 차이"가 "존재론의 시발 근거"로서 이해될 수 있는 한, 서양 존재론 즉 서양 '형이상-학'의 본질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래' 속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뜻한다. 자연의 너머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메타-피직'이 자연과 그것의 너머 사이의 구별 즉 존재자와 존재의 구별에 터하는 한, '형이상-학'의 본질의 밝혀짐은 동시에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 유래'의 해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으로서의 우리가 서양 형이상학의 문제를 다루는 데는 크게 조심해야 할 바가 있다. 그것은 언어 문제 즉 말의 문제, 특히 번역어의 문제이다. 옮김말의 의무는 옮겨진 말의 본디 뜻을 그대로 넘겨 주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의 '어머니-말(모국어)'을 우리들의 '어머니-말'로써 뜻새김하여 이름붙이고자 하는 한, 그러한 의무는 다름 아닌 바로 각기의 '어머니-말' 그 자체에 의해 가로막혀지고 만다. 서로 다른 두 '나랏말' 사이에 놓인 이러한 '가로-막대'를 완전히 치워 버리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같은 어머니말을 쓰는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의 말나누기(대화)에서도 일어난다. 이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래서 그 말의 뜻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들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우리가 "차이"라는 낱말로 옮기고 있는 독일말 "디페렌츠(Differenz)"의 말뜻에 좀더 귀를 기울임으로써 이 독일말에 대한 보다 적합한 뜻매김을 시도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존재론적 차이"가 어떠한 "차이"인지를 밝히기 위해 선행적으로 플라톤과 헤겔의 존재론을 간략히 분석할 것이다. 앞서의 뜻매김과 이러한 분석에 의해 우리는, 서양에서의 "존재론적 차이"가 "근거"의 관점에서 이해되어 왔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근거"는 독일말 "그룬트(Grund)"에 대한 일반적 번역어이다.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옮김말의 뜻하는 바를 되새겨 볼 것이며, 그것에 대한 새로운 이름짓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낱말 자체와 씨름을 벌임으로써 우리는 그 낱말들이 지시하는 문제 영역 전체를 그려볼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이제 "존재론적 차이"가 뜻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이데거가 이러한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 유래를 독일말 "아우스트락(der Austrag)"으로 제시한 것에 대한 풀이를 하고자 한다. 이때도 우리는 우선 이 독일말에 대한 일반적 번역어로서의 "내어나름"의 문제점을 살펴 본 뒤 그에 대한 새로운 옮김말을 내놓을 것이다. 이러한 '낱말 옮김'과 '뜻 옮김'을 통해 우리는 '아우스트락'이 어떤 의미에서 '디페렌츠'의 '본질 유래'일 수 있는지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 차이(差異, die Differenz)의 뜻매김
"차이"라는 말은 "차(差)가 나서, 다르다"를 뜻한다. "차"란 "값"을 의미한다. "차이"는 "값의 다름" 또는 "다른 값"이다. '값'은 특정의 '단위(單位) 기준'에 따라 재어진 '크기'이다. '크기'란 특정한 단위의 재어진 '만큼' 또는 정도이다. 같은 단위로 재어질 수 있는 것들은 서로 간의 의미 있는 '비교-값'을 가질 수 있지만, 서로 다른 단위로 재어진 것들 사이의 비교는, 그 단위들에 대한 매개가 없는 한, 우스운 것이 되고 만다. 단위들은, 그것들 또한 나름의 '고유 값'을 갖기 때문에, 그것들이 제3의 단위에 의해 매개 또는 환원될 수 있는 한, 서로 비교될 수 있다. "단위"란 잼을 위한 "기본 값" 또는 "기준 값", 달리 말하자면, 셈을 위한 "기초 값", 즉 우리가 어떤 것들을 하나하나 세어갈 때 그 하나하나에게 매겨진 값, 말하자면, "하나-값"을 말한다. 어떤 것들이 차이 즉 '다른 값'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들이 동일한 또는 매개 가능한 '하나-값'에 의해 재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 권의 책값과 한 대의 자동차값이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 즉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 둘에게 매겨진 값이 동일한 척도로 재어진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마도 그것들의 값을 돈으로 계산할 것이다.
'차이' 즉 '값의 다름'은 값이 매겨질 수 있는 것들 또는 그 매겨진 값에 의해 재어질 수 있는 것들 사이에서 성립한다. 100원 짜리 동전과 1000원 짜리 지폐는 값이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1000원을 100원 짜리 동전 10개와 같은 값으로 친다. 그래서 우리는 1000원의 값이 매겨진 물건을 1000원 짜리 지폐 한 장으로 살 수도 있고, 100원 짜리 동전 10개로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것, 즉 특정의 '하나-값'으로 재어나갈 수 없는 것은 결코 어떠한 값도 가질 수 없다. 그러한 것에는 값이 매겨질 수 없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값이 얼마인지를 잴 수 없다. 그 까닭은,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잴 수 있는 '하나-값' 즉 기준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다른 것과의 '차이'도 말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것도, 우리가 그것을 잴 수 있는 어떤 기준 내지 척도를 마련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나름의 고유한 값을 가질 수 있고, 그 척도가 다른 척도들과 비교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도 '차이'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비록 스승님들에게서 받은 은혜의 많고 적음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다 해도, 그 많고 적음의 '크기(양)'를 잴 수는 없다. 우리가 스승의 은혜를 잴 수 있는 방식은 고작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다"라고 노래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이 노래는 사실은 '잼'에 대한 포기 선언이다. 은혜는 어떠한 것으로도 '잴 수 없는 것', 따라서 '값이 매겨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와 같은 것은 결코 다른 것과의 '비교-값'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은혜와 관련해서는 '값의 다름'으로서의 '차이'를 말할 수 없다.물론 우리는 은혜와 같은 것에도 억지로 값을 매겨 넣을 수 있다. 2) 이때의 하나값 즉 단위는 정밀할 수도 있고, 주먹구구로 정해진 것일 수도 있다. 값의 단위가 주어지려면, 그 단위의 기준이 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이 설정되기만 하면, 우리는 어떤 것을 그 기준에 근거해 '얼마의 값을 갖는 것'으로서 잴 수 있다. 돈과 관련해 말하자면, 우리는 흔히,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을 "비싼 것"이라 말하고, 값이 얼마 나가지 않는 것을 "싼 것"이라 말한다. 값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은 그 값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자리매김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은혜와 같이 값을 매길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든 값이 매겨지기 시작하면, 은혜가 값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데 있다. 은혜에 값이 매겨질 수 있다면, 우리는 각각의 은혜에 대해 그 값을 계산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차이"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잘 말해 준다. "차이"는 셀 수 있는 것들 내지 값이 매겨질 수 있는 것들과 관련해서만 의미 있게 말해질 수 있다.
그런데 "존재론적 차이"는 "존재와 존재자의 사이에 놓인 차이"를 말한다. 그렇다면 존재('있음')와 존재자('있는 것') 또한 나름의 '고유 값'을 가져야 만 할 것이다. '있음'의 값은 얼마인가? 예컨대 우리는 공기의 있음의 값을 셈할 수 있는가? 아니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이러한 '셈할 수 있음'을 어느 정도의 값이면 남에게 팔려고 하겠는가? 또는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목숨의 붙어 있음의 값을 얼마나 부를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공기의 값을 계산할 수 있고, 심지어 심장이나 목숨의 값까지 계산한다. 물론 계산하려면 계산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말에 "파리 목숨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다.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듯한 파리 목숨과 인간 목숨을 비교하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의 목숨이 한없이 하잘것없이 되어 버린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옛날 신분제 사회에서는 인간에게도 태어나면서부터 핏줄에 따라 그 값이 매겨져 있었고, 오늘날의 능력 사회에서 인간은 노동력이나 재산, 권력이나 지식 등에 의해 그 값이 매겨져 있다.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와 물 등에도 값이 매겨진 지 오래다. 사실 오늘날에는 모든 것에 그 값이 매겨져 있다. 3)
그러나 우리가 비록 '있는 모든 것'에게 그 값을 매길 수 있다 손치더라도, 그 모든 것의 '있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예컨대 우리가 비록 공기의 값을 경제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계산을 통해 우리가 공기의 '있음'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공기는 비록 어떻게든 재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공기의 '있음'은 결코 재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록 공기 입자의 크기를 잴 수도 있고, 공기를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코 공기의 '있음'의 크기를 잴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공기의 '있음'과 같은 것을 잴 수 있는 단위가 없다. 아니 어쩌면 공기의 '있음'은 그 자체가 바로 유일한 단위인 셈이다. 공기의 '있음'은, 우리가 공기 밀도를 잴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재어질 수 없다. 그 '있음'은 유일무이한 것 즉 오직 하나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기의 '있음'을 셀 수 없다. 공기의 '있음'에는 수(數)가 없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있는 모든 것'의 '있음'을 세거나 재거나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있음'에다 그 어떠한 값도 매길 수 없다. '있음'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공기의 '있음'은 종(種, eidos)도 아니고 유(類, genos)도 아니다. 공기는 차가울 수도, 더울 수도, 깨끗한 수도 있다. 공기의 '차가움'에는 정도가 있다. 우리는 온도계로써 공기의 차가움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 '차가움'과 '더움' 등은 공기의 종(種), 즉 온도와 관련하여 보여진 공기의 '모습' 내지 '꼴'이다. 그러나 공기의 '있음'은, 모든 종과 유로써도 결코 계산되거나 셈해질 수 없는 것이다. '있음'은 모든 종과 유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있음'과 관련해서는 결코 "차이"를 말할 수 없다. '있음'이 "차이"로써 말해 질 수 없다면, 우리는 "있는 것과 있음의 차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있는 것'에 대해서는 "차이"란 말을 쓸 수 있다 손치더라도, 그 말은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분명 "존재론적 차이"란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말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차이"라는 낱말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바로 그 "차이"라는 낱말에 의해, 저 "존재론적 차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사태 속으로 다가갈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차이"라는 낱말은, '값이 매겨질 수 없는 것'으로서의 '있음'을 '값이 나가야만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차이"라는 낱말을 통해서는 결코 '있음'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존재론적 차이"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아니 아무 문제없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인 양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차이"라는 낱말 자체가 말하는 소리뿐만 아니라 '있음'이 뜻하는 바도 전혀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존재론적 차이"라는 말을 그저 "온톨로기쉐 디페렌츠(die ontologische Differenz)"에 대한 일종의 "지시 기호" 내지 "발음 기호" 또는 "편리를 위한 대용품" 정도로 취급한다.
만일 '있음'과 관련해서 "차이"라는 낱말이 부적합하다면, 우리는 그것 대신 "다름"이라는 낱말을 선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값의 다름"으로서의 "차이"라는 낱말이 "다름"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선택은 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다름"을 "같음"의 반대말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음"은? 우리는 "같음"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해방식을 사용한다. 우리는 "다름"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지 않으며, "같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름"의 문제에 직면해서는 "같음"으로 도피해 버림으로써 "다름"을 "같지 않음"으로 해소시켜 버리고, "같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르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만족은, 이때의 "다름과 같음"이 '있는 것'의 "유(類)"로서 여겨지는 한, '있음(존재)'과 관련해서는 자기 기만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있음'은 '있는 것'의 유(類)로서의 '다름과 같음'이라는 관점에서 견주어지거나 재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다름과 같음"은 '있음(존재)의 방식'과 관련해서는 의미 있게 말해 질 수 있다. 4) 만일 우리가 "있음(존재)과 있는 것(존재자)의 다름"을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 사이의 다름에 합당한 말로써 그 둘의 다름을 명명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선 독일말 "디페렌츠(Differenz)"의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의 유래는 그리스말 "디아페레인(diapherein)"에 있다. 이 그리스말은 타동사적으로(transitiv) "저쪽으로 나르다(Hinuebertragen)", "끝까지 나르다(Zu-Ende-bringen und Austragen)", "따로 떼어놓다(Auseinandertragen und Zerstreuen)" 등을 뜻하며, 자동사적으로(intransitiv) "구별되다(Sichunterscheiden von...)"를 의미한다. 이 말의 추상명사 "디아포라(diaphora)"는 "서로 나뉘어져 있음(das Auseinandersein)" 또는 "구별(der Unterschied)"로 새겨질 수 있다. 5)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구별된 것"과 관련하여 그것들이 어떻게든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6) 물론 이때의 동일성은 수(數), 종, 유 그리고 유비(類比, Analogie)에 따른 "동일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디페렌츠"라는 말 속에는 어떤 것들 사이의 본질적(kata physin) "상응함" 내지 함께 속할 수 있음" 또는 "동일성"이 어떻게든 함께 말해지고 있어야 한다. 즉 어떠한 방식으로도 함께 속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어떠한 "디페렌츠"도 말해질 수 없다.
"디페렌츠"는 "숨겨진 동일성으로부터 따로 나뉘어져 있음"을 말한다. 물론 "디페렌츠"라는 낱말 자체는 저 나눠진 것들의 동일성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낱맡은 그저 "따로 나눈다"는 것만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낱말 속에서 말해지지 않는 채 숨겨진 나머지를 함께 들을 수 있다. "디페렌츠"는 "한데 놓인 것들을 따로 갈라놓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있음'을 '있는 것'으로부터 갈라내 그것의 '너머'에 자리매김할 수도 있고, '있음'을 '있는 것'으로부터 갈라놓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있음'을 다시금 '있는 것' '속'에 자리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있음과 있는 것'을 서로 갈라놓을 수 있다는 것은, '메타-피직'이라는 말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그 둘의 관계맺음의 방식을 어떻게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규정함이 생각함(사유)의 능력이라면, 생각할 줄 아는 자는, 그가 생각하는 한, '있음'과 '있는 것'을 갈라놓게 된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즉 우리가 있음과 있는 것을 서로 다른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그 둘이 어떻게든 갈라놓일 수 있기 때문이고, 그 둘이 갈라놓일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생각함을 통해 그 둘을 어떻게 든 갈라놓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있는 것과 있음의 디페렌츠"의 독특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보기를 들고자 한다. 이러한 영역에서 보기를 든다는 것은 -- 보기란 보여질 수 있는 것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에, 즉 보여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보기를 들 수 없기 때문에 -- 매우 위험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존재론적 차이"의 문제 지평을 열어보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삶 속에서 느끼는 '있음의 뜻하는 바(의미)'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 보기는 "우리는 어머니의 있음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물음이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있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있음'은 구별된다. 무엇을 통해? 감각을 통해? 그렇다면 어머니의 '있음'은 감관을 통해 감지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분명 살아계신 어머니를 우리 자신의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손으로 어머니의 '있음'을 만질 수 있는가? 어머니는 밥을 잡수실 수 있지만, 어머니의 '있음'은 입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누군가 어머니의 '있음'을 생각할 때 어머니의 '입'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떠오른 입이 어머니의 '있음'은 아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떠올려 볼 수도, 그림으로 그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머니의 '있음'을 무슨 수로 떠올려 볼 것이며, 또 어머니의 '있음'이 떠올라졌다 해도, 도대체 우리는 그분의 '있음'을 어떻게 그려야 한단 말인가? 더 나아가 어머니의 '살아 계심'이 우리들에게 감사함으로 다가올 때, 아니 우리가 그 감사함을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에야 알게 되었을 때, 도대체 우리는 이러한 가슴 뭉클한 감사함으로 와닿는 어머니의 '있음'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우리는, 우리가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듯 그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저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라는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선물을 사드리거나, 아픈 다리를 주물러 드리거나, 제사를 올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분명 어머니와 어머니의 있음은 다르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있음이 어머니로부터 따로 무관하게 떨어져 놓인 것도 아니다. 그 둘은 다르지만 언제나 함께 놓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그 둘의 구별에 주목하지 못함으로써, 흔히 어머니의 있음의 '뜻하는 바'를 잊고 살수도 있다. 누군가 자신의 어머니의 있음을 완전히 잊고 있다면, 그의 어머니가 비록 고향에 살아 계실지라도, 그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것과 같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잊어버림에 의해 없어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의 어머니의 '있음'은 잊혀지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있음'은, 그 '있음'을 돌이켜 생각하고, 그 뜻을 되새겨 생각하는 이에게만 주어진다.
우리는 이제 "디페렌츠"를 이러한 동일성과 의 숨겨진 연관도 고려에 넣으면서 그리고 낱말 그 자체의 뜻도 살리기 위해 "갈라-놓음"(타동) 또는 "갈라-놓임"(자동)이라 옮기고자 한다. "갈라-놓음"은 "완전히 외따로 되게끔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들 사이에 들어 그 불화를 잠재울 정도의 거리로 서로를 떼어놓는 것을 말한다. 물론 "갈라-놓음"은 "이간질" 즉 "두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다"는 뜻도 갖는다. "갈라-놓음"은 두 개 이상의 것들을 동일한 것으로부터 갈라내어, 그것들 각각을 그것들이 놓여야 할 본디의 자리에 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여기서의 사태의 고유성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용어적으로는 "갈라-놓기"를 선택할 것이다. 7)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론적 차이"란 말을 "존재론적 갈라-놓기"라 바꿔 새길 수 있겠다. "존재론적 갈라-놓기"는 존재(있음)와 존재자(있는 것)를 서로 다른 것으로서 갈라놓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둘은, 위에서 짧게나마 말했던 것처럼, 결코 완전히 따로따로 떨어져 놓이는 것이 아니다. 있음과 있는 것 사이에는 반드시 가름이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둘은 어떻게든 함께 속해야만 한다. 즉 있음은 있음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있음은 언제나 있는 것의 있음이고, 있는 것은 언제나 있음의 있는 것이다.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 또한 '있는 것'과 '있음'을 서로의 연관 하에서 다루어 왔고, "디아포라" 내지 "디페렌츠"는 바로 이러한 연관을 틀지워 놓은 낱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낱말들이 가리켜 보이는 사태연관에 바탕하여 가능케 된 "메타-피직"은, "메타"라는 낱말이 지시하는 영역이 바로 '있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있음의 로고스" 즉 "존재-론"이 되었다. 있음과 있는 것은, 존재론의 역사가 진행되어 오는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갈라놓여 왔다. 서양 철학사는 그 둘의 갈라놓여진 됨됨이에 대한 해석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이 그 역사를 뒤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갈라-놓기"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어 나왔는지를 밝히는 데 있으므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플라톤과 헤겔의 존재론에서 즉 서양의 위대한 두 형이상학에게서 있음과 있는 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갈라놓여지는지를 간략히 살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2. 존재론(存在論, Ontologie)의 뜻매김
우리는 "존재론적 차이"의 문제, 특히 이 차이의 본질 유래를 밝히는 문제를 풀고자 하고 있다. 앞서 우리는 "차이"라는 낱말에 대한 포괄적 뜻매김을 시도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존재론"이라는 낱말에 관한 암묵적 정의들을 사용해 왔다. "존재론"은, 낱말 그대로 보자면, "존재"에 대한 "논"이다. 그러나 "존재론"이라는 낱말 역시,"차이"라는 낱말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온톨로기(Ontologie)"라는 독일말의 번역어 즉 옮김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온톨로기"는 "온(on)"에 대한 "로고스(logos)"라고 할 수 있다. "온"은 보통 "존재"라고 번역되고, "로고스"는, 학문의 분류법과 관련해서는 "-론"이라 번역되고 있다. 그런데 "온"은, 보다 정확히 옮기자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아에이 온(aei on)"은 "언제나 있는 것"으로서 옮겨질 수 있다. 반면 존재 즉 있음을 뜻하는 그리스말은 "우시아(ousia)"이다. 그렇다면 "온톨로기"는 "존재-론"이 아니라 "있는 것에 관한 론"인 셈이다. 물론 "온"이라는 낱말은 문맥에 따라 "있는 것"을 지시할 수도 있고, 또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온톨로기"는 "있는 것과 있음 모두에 관한 론"이라 할 수 있겠다. 8)
우리는 '있는 것과 있음'이 '서양의 온톨로기'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말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둘의 연관이 어떻게 파악되는지, 다시 말해 그 둘이 어떻게 '갈라놓이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플라톤의 존재론을, 다음에 헤겔의 존재론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살펴봄을 통해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유래"에 대한 해명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존재론
플라톤의 『국가』222쪽에는 9) 형상의 사물 안에 "들어 있음(en-einai)" 내지 "나타나 있음(par-ousia)"이 말해지고 있다. 이러한 "나타나 있음"은, 마치 유한한 모음과 자음이 그것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낱말들 속에 "옮겨가며 나타나는 것(peripheromena)"과도 같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서는 사물들의 형상에로의 "관여 또는 함께 속함(methexis)"도 말해지고 있다. 플라톤에게서 사물 즉 '프라그마(pragma)'는 '많은 것(ta polla)'으로서 해석되고 있고, 반면 이데아는 '저마다의 있는 것 그 자체(auto hekaston to on)'을 뜻한다. 하나의 '프라그마' 예컨대 하나의 단지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많은 것'은 '저마다'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다. 만일 단지가 둥근 모습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둥근 모습 그 자체'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물론 이 '둥근 모습 그 자체'가 구체적 단지 속으로 들어와 있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어떤 '이지러짐'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러한 감수는, 그 사물 속에 다른 '이데아'들도 함께 들어와 있기 때문, 즉 함께 나타나 있기 때문, 다시 말해, 하나의 사물 속에 서로 다른 수많은 이데아들이 함께 들어옴으로써 그 이데아들 사이에 어떤 '자리-다툼'이 일어나기 때문, 그 다툼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서로서로 조금씩 자신의 본디 모습을 양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의 이데아에는 오직 '단지 그 자체'만이 속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단지의 이데아 속에서도 어떤 '자리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따라서 단지의 이데아는 어떤 변형 내지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단지의 이데아라 불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단지의 이데아는 단번에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디알렉티케" 즉 '철학적 숙고'를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이데아를 사물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사물들과 분리해서도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사물들 속에 들어 있는 이데아'와 그 사물들이 없어져 버린 뒤에도 결코 변화하지 않고 있는 '언제나 그 자체로서 있는 이데아'로 구분하고 있다.
플라톤에게서 하나의 사물이 그러한 사물 예컨대 단지일 수 있는 것은 그 사물을 그것이게 해 주는 바의 것 즉 그 사물의 이데아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의 이데아가 그러한 이데아 예컨대 단지의 이데아일 수 있는 것은 그 이데아를 나누어 갖고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10) 사물은 '변화 속에 놓인 것', 즉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것', 다시 말해 '생겨나 사라져 버리는 것', '시간 속에 그 있음의 처음과 끝을 갖고 있는 것'이지만, 이데아는 '변화 밖에 놓인 것', 말하자면, '그 자체로서 변화하지 않은 채 있는 것', 다시 말해 '생겨날 수도 사라져 버릴 수도 없는 것', 즉 '시간 속에 그 있음의 처음과 끝을 갖지 않은 채 언제나 있어 온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 즉 '지혜-사랑하미' 11) 의 목적은 '저마다의 있는 것 그 자체'를 "보는(idein)" 데 있다. '이데아'는 '지혜-사랑하미'가 본 것' 또는 '지혜-사랑하미'에게 '보여진 것'의 뜻이다.
이데아는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자 '사물을 사물로서 있게 해 주는 것' 즉 '사물에게 그것의 있음을 주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있는 것'으로서의 이데아는, 그것이 또한 '언제나 있는 것' 즉 '없음으로부터 있음으로 넘어와 생겨날 수도 그리고 다시 있음으로부터 없음 속으로 넘어가 사라질 수도 없는 것'으로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있음을 스스로 마련해 갖는 것이다. 반면 사물들은 변화하는 것들로서 자신들의 있음의 근거를 자신 속에 갖고 있지 못하다. 예컨대 단지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 없이는 '단지로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나름의 쓸모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쓸모 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플라톤은 지혜의 기초가 이러한 '이데아'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지혜-사랑하미'는 마땅히 '이데아'를 향한 긴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여정을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잘 알고 있다. 플라톤에게 '온'은 '바뀌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언제나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고, '사물들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임과 동시에 그러한 들어옴을 통해 사물들에게 그것의 '있음'을 '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온'에 대한 '로고스'로서의 '존재-론' 또는 '지혜-사랑하기'는 '언제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하게 있는 것' '사이'의 연관을 밝힘으로써 우리의 삶의 방향을 '이데아'에로 향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제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론적 갈라-놓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 있다. 플라톤의 '존재-론' 즉 '온에 대한 말하기'는 '온' 즉 '있는 것'을 '프라그마(사물)'로서도 그리고 '이데아'로서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자면, 하나의 사물은, 그것의 '이데아(언제나 있는 것)'가 그 사물 속에 '나타나 있을(파루시아)' 때에만 그것(사물)일 수 있다. 한 사물의 이데아는 그 사물의 있음의 근거이자 그 사물의 본질이다. 이데아는 자신에 의해 근거지워진 사물 속에 함께 나타나는 근거이다. 반면 사물은 이데아에 의해 근거지워진 것으로서 자신을 근거짓는 것에 '속해 있다(메텍시스)'. 만일 사물의 이러한 메텍시스(관여)가 없다면, 이데아는 이 세계 속에 결코 나타날 수 있다. 이데아의 이 세계 속으로의 '나타나 있음'은 사물의 이데아로의 '속해 있음'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플라톤의 존재론은 '온'을 이렇게 '나타나 있음(파루시아)'과 '속해 있음(메텍시스)'의 연관 관계로써 규정하고 말한다. 플라톤의 존재론은 '있는 것'을, '변화할 수 있는 것'과 '불변적으로 언제나 있는 것'으로 '갈라-놓을' 뿐 아니라, 그렇게 갈라져 있는 것들 사이의 연관을, '나타나 있음'과 '속해 있음'으로 '갈라-놓는다'.
우리는 '있는 것과 있음의 갈라-놓기'가 플라톤에서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 일어난 사건이 어떠한 낱말들 속에 새겨졌는지를 살펴보았다. 플라톤에게서 이러한 '갈라-놓기'는 철학 즉 '지혜-사랑하기'에서, 다시 말해 '생각하기(사유)' 속에서 수행된다. '갈라-놓기'로서의 '생각하기'는, 그에게는, '동굴(사물들)의 세계'로부터 '이데아의 세계'를 향해 먼 길을 떠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데아를 본 뒤에는 자신이 떠났던 곳 즉 동굴 속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길을 가야하는 까닭은 길이 그렇게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 길을 가는 가운데 갈라놓인 것들의 갈래를, 그것들의 숨겨진 동일성 때문에, 함께 엮게 된다. 즉 있는 것에게 그 있음을 주는 것 즉 있는 것의 근거로서의 이데아 또한, 그것이 비록 '언제나 있는 것'으로서 규정되긴 하지만, 어쨌든 '있는 것'으로서 규정되며, 이데아에 의해 근거지워진 것으로서의 있는 것은 이데아를 '상기시키는' 근거, 이런 의미에서 '이데아가 우리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근거'로 파악될 수 있다. 이렇게 플라톤은 '있는 것'과, 그것에게 그 있음을 주는 근거로서의 이데아의 사이를 획일적으로 '갈라-놓고' 있지 않다. 그는 갈라놓으면서 이어놓고, 이어주면서 갈라준다.
그러나 프라그마와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갈라-놓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있는 것과 있음 사이의 갈라-놓기'라고 볼 수 없다. 프라그마 즉 사물과 그것의 있음이 갈라놓일 수 있듯이, 이데아 즉 사물을 통해 '보여진 것'과 그것의 있음 또한 갈라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물의 있음을 다양한 이데아들로써 규정하고는 있지만, 사물의 있음 자체에는 크게 주목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에 그는 이데아의 있음을, 사물의 있음에 적용시켰던 규정 즉 '나타나 있음'으로써 이해한다. 물론 그는 이데아의 있음에 대해서 "영원한 지속성" 내지 "불변성" 등의 성격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플라톤이 이데아의 있음과 사물의 있음을 "시간적 특성"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는 것만을 말해줄 뿐이다. '있음'은 플라톤에게서 '지속적으로 나타나 있음'으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있음 개념'이 사물에 적용될 때, 저 '지속성'은 유한성 내지 변화성의 제약을 받는다. 사물의 나타나 있음'은 '시간적이고, 유한하며, 시작과 끝을 갖지만, 그러나 일정기간 동안 지속된다'. 반면 이데아의 '나타나 있음'은 '언제나 있음' 즉 '시간을 초월하며, 무한하고, 시작과 끝을 갖지 않으며, 영원히 지속된다. 플라톤은 '있음의 지속성' 즉 있음의 "언제나-성격"이 많거나 강할수록 참되다고 보았다. 보다 참된 것일수록 '있음'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갖는다. 12) 이데아가 '가장 참되고, 있음을 가장 많이 그리고 영원히 갖는 것'이라는 결론은, 그것이 '있음의 문제'와 관련되는 한, '존재론적 갈라-놓기'의 중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데아가 비록 영원히 '있는 것'일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의 '있음'까지 영원하다고 말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데아의 있음의 영원성은 우리 유한한 인간에게는 결코 증명될 수 없다. 위에서 든 보기를 통해 말해보자면, 어머니가 비록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머니의 '있음'은,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는 결코 '언제나 주어지는 것'도 또 '영원히 주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는 소위 '이성적 추론'을 통해 어떤 것의 있음의 영원성을 증명하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증명 또한 궁극적으로는, 저 '이성'의 완전성 내지 영원성이 앞서 확보되지 않는 한, 그저 가정적 주장에 그칠 뿐이다.
사물과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갈라-놓기'의 밑바탕에는 분명 '있는 것과 있음'에 대한 '갈라-놓기'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갈라-놓기'는 주제적으로 수행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사물과 이데아를 명시적으로 분리시킬 수도, 그 둘을 다시금 연결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존재론적 갈라-놓기'는 결국 사물을 부정적인 것 내지 초월되어야 할 것으로 격하시키고 말았고, 따라서 우리의 삶은 이데아에로 향해 갈 때에만 참되고 올바른 삶일 수 있게 되었다.
헤겔의 존재론
이렇게 변화의 세계로부터 불변의 세계로 초월하기 위해서는 그 '초월의 근거' 즉 저 '불변의 세계'가 앞서 열어 밝혀져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누메나(생각함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의 세계'의 '앞서 열어 밝혀져 있음'은 그 세계가 열어 밝혀질 수 있는, 그리고 그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을 전제한다. 만일 인간에게 이러한 사유 능력이 없다면, 초월은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근세 철학은 인간에게 이러한 사유 능력이 있는지, 만일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있는지를 묻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근세철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음'이란 인간의 사유에 의해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한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있음'이란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을 내린다. 물론 이러한 단정은 철저한, 다시 말해 극단에까지 치닫는 회의의 결과로써 내려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극단적 회의를 통한 단정, 다시 말해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완성에 도달한 헤겔의 사유를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적 구성틀」 13) 을 통해 간략히 파악해 보기로 한다. 이때에도 우리의 관심은 헤겔의 "존재론적인 갈라-놓기"에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헤겔은 '있는 것의 있음(das Sein des Seienden)'을 "사변적-역사적으로(spekulativ-geschichtlich)" 생각한다. 14) '있음'은 헤겔에서 "생각함의 사태(die Sache des Denkens)"이다. 115) 그런데 헤겔에서 이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선 '규정되지 않은, 매개되지 않은 것', 16) 또는 "규정되지 않은 무매개성(매개되지 않음, unbestimmte Unmittelbarkeit)"을 뜻한다. 이러한 '있음'은 '사변적으로 생각하기'를 통해 매개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헤겔에서 '있음'은 이러한 '규정하는 매개함'에서부터, 즉 앞선 '규정되지 않음과 매개되지 않음'을 끝까지 지양하는 '절대적 개념'에서부터, 다시 말해 '절대 이념'의 지평에서부터 이해된다. 만일 '있음'이 역사적으로 전개되어 왔다면, 그것에 대한 '생각하기' 역시 그러한 '있음의 역사'에 따라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있음의 진리 즉 있음의 '참-됨됨이(Wahrheit)'는 있음의 역사가 역사적으로 완전히 전개되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있음의 역사적 전개는, 이 전개가 있음의 자기 전개에 다름 아니므로, 있음 그 자체가 그 자신의 다양한 단계들 내지 형태들을 거쳐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있음의 역사'는 '철학(지혜-사랑하기)의 역사' 즉 '생각하기(사유함)의 역사'에 상응한다. 있음의 역사는, 그것이 '생각하기의 역사'로서 전개될 수 있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있음의 각 단계들을 역사적으로 지양해 가는 것을 우리는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기(변증법적 사유)'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생각하기를 통해, 있음은 그것의 완전한 진리 즉 그것의 본질, 다시 말해, "절대적 반성"에 도달한다. 헤겔은 이러한 "본질의 진리"를 "개념(Begriff)"이라 부른다. 개념은 '있음'에 대한 '무-한한 앎', 즉, 있음이 생각함(사유)에 상응하는 한, '생각함에 대한 절대적 생각하기'인 셈이다. 17)
헤겔의 존재론은 있음의 자기 전개의 과정에 대한 말하기이다. 따라서 그의 존재론의 얼개(구조)는 곧바로 그에게 이해된 '있음'의 얼개인 셈이다. 헤겔에서 있음은 역사적이다. 즉 처음과 끝 또는 시작과 결과를 갖는다. 그렇다면 헤겔의 존재론의 얼개 또한 역사적이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 헤겔이 『논리학의 학문』에서 던졌던 문제인 "학문은 무엇으로써 시작하는가?"를 묻는다. 18) 이때 중요한 것은 시작(Anfang)과 결과(Resultat)가 모두 '사변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 말은, 시작은 결과로부터의 시작이고, 결과는 시작의 결과임을 뜻한다. 시작은, 그것이 '매개된 결과'로써 이루어지므로, "매개되지 않은 어떤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은, 그것이 '매개된 결과'에 대한 부정성 즉 '밖으로-벗어남(외-화, 엔트-오이서룽)'을 통해 만들어지므로, 즉 그것이 이제 비로소 변증법적으로 매개되어야 하므로, "매개된 어떤 것"도 아니다. 이 말은, 학문이 '절대적 앎'으로서 이해되어 있는 한, 학문의 시작은 있음의 자기 전개가 완성된 단계, 즉 있음의 변증법적 운동이 끝마쳐진 상태, 다시 말해, '절대적 이념'으로부터 결과된다는 것, 말하자면, 그 변증법적 운동의 맴돌이를 의미한다. 이 말은, 학문의 얼개가 있음의 얼개에 상응하는 한, 있음은 그 충만 상태로부터, 그 자신의 가장 바깥까지 벗어난 -- (가장 극단적 외화) -- 가장 빈(공허한) 상태로 움직이고, 그것은 다시, 앞서의 움직임에 대한 반대 움직임으로서, 이 가장 빈 상태로부터 그 자신을 완성하는 충만 상태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헤겔에서 이러한 '있음의 움직임(운동)'은, '있음이 그 자신 속에서 맴도는 움직임'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있음의 움직임(운동)의 처음과 끝의 어디에서도 항상 '있음'을 만날 수 있다. 19)
있음이 자체 안에서 '맴돌이-움직임'을 펼친다는 것은, 있음에 대한 '생각하기'가 '있음'을, 그것의 가장 빈 상태로부터 그것의 가장 가득한 상태로 그리고 다시 거꾸로의 방향으로 생각해간다는 것에 상응한다. 만일 있음이 그것의 가장 빈 상태에서 생각된다면, 그것은 그것의 보편성 즉 '모든 것에 두루 통함'에서 생각되는 것이고, 만일 그것이 그것의 가장 충만한 상태에서 생각된다면, 그것은 그것의 '가장 높음' 즉 '총체성의 단일성'에서 생각되는 것이다. 20) '있음'이 두로 통하게 되는 저 '모든 것'은 다름 아닌 '있는 것 전체'이다. '모든 있는 것'은 있음의 이러한 '두루 통함'을 통해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있음'은 '있는 것'의 근거이다. '모든 있는 것'에 두루 통하는 것으로서의 '있음'은, 이렇게 모든 것에 통할 수 있기 위해, '모든 것에 똑같이 타당한 것', 따라서 그 자체로는 어떠한 규정도 갖지 않은 것,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빈(공허한) 것'이다. 반면 있음이 완전히 전개된, 즉 있음이 가장 가득찬 상태, 즉 있음이 가장 높이 완성된 상태는, 이러한 가장 높은 단계의 '있음'이 그 아래 단계의 '있음-들'을 자체 속에 지양해 갖는 한, '모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높이 있는 것 즉 신에게서만 가능하다. 신은 헤겔에서 모든 있는 것과 모든 있음의 근거이다. 따라서 신은 근거의 근거 즉 근원 근거이다. 21) 그렇다면 헤겔의 존재론에서 '있음'은 '모든 있는 것'의 근거이고, '가장 높이 있는 것'으로서의 신은 '모든 있음'의 근거이다.
헤겔에게서 학문이 있는 것의 근거로서의 '있음'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하는 한, 그 학문은 '있음에 대한 학문' 즉 '존재-론'이 되는 셈이고, 학문이 다시금, 시작의 변증법적 성격에 따라, 신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신에 대한 학문' 즉 '신-론'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학문은 '존재-론'임과 동시에 '신-론'인 셈이다. 여기서 말해지는, 헤겔의 의미에서의 학문은 '메타-피직(형이상-학)'의 딴이름이다. '형이상-학'은 '있음에 대한 로고스'로서의 '존재-론'과 '신에 대한 로고스'로서의 '신-론'에 의해 함께 규정되어 있다. 헤겔의 '형이상-학'은 "존재-신-론"이다. 22)
그런데 헤겔에게서 존재 즉 있음은 모든 있는 것의 근거로서 이해되고, 신은 있음의 근거로서 이해된다. 헤겔에서 '존재'와 '신'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그 둘이 모두 근거라는 점에서 그리고 근거가 전통적으로 로고스라 불린다는 점에서, "로고스에 대한 학문" 또는 "로긱(논리학, Logik)의 학문"이라 불린다. 헤겔의 생각함의 사태 즉 문제거리는 '있는 것의 있음'이다. 그의 형이상학이 "존재론" 대신 "논리학"이란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의 형이상학의 주제가 '있는 것의 있음'임이 분명한 한, 이 '있음'이 그에게 이미 '로고스'로서 앞서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헤겔에서 있음은 언제나 로고스 즉 근거(Grund)로서 각인되어 있다. 23) 헤겔은 자신의 생각을 로고스로서의 '있음'에로 집중한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거듭해서 사용되고 있는 "근거"라는 낱말에 대한 새로운 뜻매김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선은 이 글에서의 말놀이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말놀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이, 그 말이 가리키는 곳으로 보다 쉽게 날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근거"는 독일말 "그룬트(Grund)"에 대한 번역어이다. "근거(根據)"라는, 낱말은, 낱말대로 풀자면, "뿌리와 자취"를 뜻한다. 우리는 "근거"라는 낱말을 보통 "어떤 것이 뿌리내리며 살아나가는 터전"이나 "어떤 주장의 이유" 등의 의미로 사용한다. "생활의 근거를 잃다"와 "근거가 빈약하다" 등이 그 보기이다. 물론 오늘날 "근거"는 "사실의 근거", "논리의 근거", "판단의 근거", "설명의 근거" 등과 같이 다양한 문맥 속에서 쓰인다. 그러나 과연 "근거"라는 낱말이 쓰여지는 곳에서 "근거"라는 낱말 자체가 말해지고 있는 곳은 얼마나 될까? "근거"라는 낱말은 아마도 대개는 "라치오(ratio)"나 "리즌(reason)" 또는 "로고스(logos)" 등의 기호로서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낱말이 기호로서 사용되는 곳에서 '철학' 즉 '지혜-사랑하기'는 살아 숨쉴 수 없다. '지혜-사랑하기'는 낱말이 제 뜻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곳에서만 싹틀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룬트"라는 낱말의 의미를 풀어나감으로써 "근거"라는 낱말이 그것에 대한 번역어로서 어느 정도까지 적합한지를 드러내려 할 것이고, 그에 대한 새로운 옮김말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그룬트"는 강이나 건물의 "바닥"을 뜻한다. 바닥은 어떤 것의 밑에 놓여, 그것이 넘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것이다. 예컨대 만일 강에 그 바닥이 없다면 강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강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룬트"는 또한 "밑그림" 즉 "배경"의 뜻도 같는다. 이때 그것은 "힌터-그룬트(Hintergrund)"로서 이해된다. "그룬트"는 어떤 것을 "떠받쳐 주는 것" -- 이러한 의미에서 "그룬트"는 "기체(基體, 밑바탕에 놓인 것)"란 말로서 번역되기도 한다 -- 이자 어떤 것을 바로 그것이게 해 주는 "보이지 않는 원인" 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근거의 본질에 관하여」에서 그리스말 "아르케(arche)"을 "그룬트(Grund)"로서 새기고 있는데, 이 "아르케"는 네 "아이티아(aitia)"를 함께 모으는 "내적 연관"으로서 말해 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룬트"에는 어떤 것의 출발점 내지 첫머리(始原, Anfang)를 이룬다는 의미는 물론 "물질적인 것(히포케이메논)", "형상(토 티 엔 에이나이, to ti en einai)", "운동인(아르케 테스 메타볼레스, arche tes metaboles)" 그리고 "목적인(우 헤네카, ou heneka)" 등의 의미도 함께 속해야 한다.
"그룬트"는 그리스말 "히포케이메논(hypokeimenon)"과 "로고스(logos)" 그리고 라틴말 "라치오(ratio)" 등에 대한 옮김말이다. "그룬트"라는 낱말이 이처럼 다양한 유래를 갖기 때문에 그 말의 뜻하는 바 또한 그토록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말 "근거"는 독일말 "그룬트"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일 수 있는가? 예컨대 단지의 "근거"란 무엇을 뜻하는가? 단지의 "뿌리"를 말하는가? 아니면 단지의 "자취"를 말하는가? 아니면 단지의 "이유"를 말하는가? 만일 우리가 "단지의 그룬트"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단지의 '모습(형상)', 흙(재료, 질료)', '도공(제작인)', '쓸모(목적인)', '밑바닥(밑에 놓인 것)' 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말 "근거"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아무것도 없다. 대신 우리말 "바탕"은 그러한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바탕"은 "밭"에 "앙"이 맺어진 말이다. 이 말은, 예컨대 "바탕-색이 곱다"에서 보이듯이, 어떤 것이 두드러지게 내보여지고 있을 때의 그 "밑-그림" 내지 "배경"을 뜻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의 있음을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어떤 "원소(質)"를 의미하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어떤 물체의 "바닥"을 뜻할 수도, 어떤 물체의 "모습" 또는 "겉-모습" 또는 사람의 "품성", 더 나아가 어떤 것이 그 본디의 본성을 얻게 되는 자리로서의 "마당"을 뜻하기도 한다. "바탕"은 또한 "모탕"의 의미로서 어떤 것을 이러저러하게 다룰 수 있는 "받침"의 의미까지 가질 수 있으며, 심지어 그것은 "마음"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바탕"이라는 말 속에는, 어떤 질료적 의미와 형상적 의미 그리고 본성 내지 목적의 의미는 물론 어떤 것의 있음의 총체적 "자리"로서의 "가능케 함"의 의미까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독일말 "그룬트"를 "바탕"이라 새김하면서, 헤겔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 "존재론적 갈라-놓기" 즉 "있음과 있는 것의 갈라-놓기"의 문제를 논의해 가도록 하겠다.
헤겔의 형이상학은 '존재-신-논리학'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있음)' 와 신이 어떻게 '로고스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논리학의 사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있음(존재)' 은, 그것이 모든 있는 것의 '바탕(그룬트)'으로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만 그리고 그것이 생각함(사유)의 사태(문제거리, Sache)이기 때문에만, 논리학의 주제일 수 있다. 헤겔에서 "논리학"이란 이름은, "어디에서나,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전체에서' '있음에서부터' '바탕-밝히면서 바탕-위에-세우는 생각하기' 24) 를 위한 이름이다. 25)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의 바탕을 캔다는 것은 모든 있는 것에게 두루 통할 수 있는 바탕이 아직 묻혀진 채 즉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을 말한다. 헤겔은, 이러한 '바탕-캐기'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에 두루 통하는 '하나'의 바탕을 밝혀 낸다. 그것은 '있음'이다. 바탕으로서의 '있음'은 모든 있는 것에게 한결같이 똑같은 것일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하나이다. 즉 '있음'은 '하나인 모든 것(헨 판타)'이다. 26) '있음'은 쪼개질 수 없는 것, 하나인 것, 아니 하나뿐인 것이면서 또한 '모든 있는 것'에게 두루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 두루 통함의 성격에서 이해되는 '있음'은 , 앞서 이미 말한 바처럼, 빈 '껍데기-있음'과도 같다. 모든 있는 것 속에서의 '있음의 하나된 됨됨이' 즉 '있음의 하나-됨됨이(단일성, Einheit)'는, 말하자면, 텅 빔'이다. 이러한 '있음의 텅 빔'이 바로 헤겔에서 학문의 시작 즉 첫머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학문 -- 즉 형이상학 -- 이 이러한 '있음의 가장 텅빔'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우선 학문에게는 도달해야 할 끝 즉 결과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시작이 결과의 부정 즉 결과로부터의 반향 내지 되울림이라면, 학문의 시작으로서의 '있음의 가장 텅 빔'은 '있음의 가장 가득함'의 부정 즉 '있음의 가장 가득함'으로부터의 반향인 셈이다. 반면 결과는 시작의 결과 즉 또다른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학문은 또한 '있음의 가장 가득함'으로써도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있음의 가장 가득함'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있음의 방식'의 다양성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갈 수 있다.
'물질적 있음', '심리적 있음', '이념적 있음' 그리고 '정신적 있음' 등은 서로 다르다. 이들 각각의 '있음'은 모두 있음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 각각은, 어떤 의미에서는, 있음의 '조각들'인 셈이다. 이러한 각각의 있음에 바탕을 둔, 즉 각각의 있음에 의해 규정된 '있는 것', 예컨대 '물질적 있음'에 바탕한 것으로서의 '물질적으로 있는 것'은 자신의 '있음'을 '물질적 있음'으로서만 갖을 뿐, 다른 '있음', 말하자면, '심리적 있음'이나 '이념적 있음' 등은 갖지 못한다. 만일 어떤 '있는 것'이 위에서 죽 말해진 '있음들'을 모두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앞서 각각의 있음에 의해서만 규정되어 '있는 것'보다는 '더 많은 있음'을 갖는 셈이다. 만일 '어떤 있는 것'이 가능한 모든 '있음'을 자체 안에 다 갖고 있다면, '있음 그 자체'는 그러한 '있는 것'속에서 '가장 가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있는 것'속에서 '있음'의 '모든 됨됨이(총체성, Allheit)'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7) 이러한 '있는 것'속에서 있음은 그 변증법적 운동(움직임)을 끝마친다. 여기서의 '끝마침'은 '끝까지 다 이룸 즉 완성(Vollendung)'의 의미이다. 헤겔은 그러한 '있는 것'을 신(神, Gott)이라 부른다. 만일 학문이 '있음의 이러한 모든 됨됨이'를 갖고 있는 어떤 것 즉 신과 더불어 시작된다면, 그것은 '신에 관한 학문' 즉 '신학'이 된다. 28)
따라서 헤겔에서 학문 즉 형이상학은, 그것이 '있음'과 더불어 시작되는 한, '있음-논리학' 즉 '존재-학(론)'이고, 그것이 '신'과 더불어 시작되는 한, '신-논리학' 즉 '신-학(론)'이다. 즉 헤겔의 형이상학은 "존재(있음)-신-논리학"이다. 그런데 논리학의 주제는, 서양의 전통에 따르자면, 생각 내지 '생각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논리학"이 어떻게 "형이상학"이라 불릴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어떤 근거에서 '있음과 신'에 대한 학문까지를 포괄할 수 있게 되는가? 그것은, 만일 있음과 신이 모두 '로고스'일 수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논리학"은 "로고스에 대한 학문"이다. 우리가 "로고스"를 또한 "바탕"으로서 옮길 수 있는 한, "논리학"은 "바탕에 대한 학문"이다. "있음"은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의 바탕이고, '있음의 가장 가득함'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의 신은 '모든 있음'의 바탕이라 할 수 있다. 논리학의 주제가 '생각하기'라고 한다면, 이때의 '생각하기'는 한편으로는 '바탕-캐는(밝히는)-생각하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탕-위에-세우는-생각하기'인 셈이다. 헤겔이 자신의 학문 즉 형이상학을 "논리학"이라 부른 까닭은, 그의 형이상학이 '생각하기'를 주제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생각하기의 사태 즉 문제거리가 '있음'이기 때문이며, 그것도 이때의 '있음'이 서양의 형이상학의 시원으로부터 로고스로서 즉 '바탕짓는 바탕' 29) 으로서 드러났기 때문이고, 이러한 바탕으로서의 '있음'이 바탕-위에-세우기'로서의 '생각하기'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30) 그리고 '있음에 대한 생각하기'는, 있음의 이러한 요구에 따라, '바탕-위에-세우기'가 되며, 이제 '바탕-위에-세우기'로서의 '생각하기'는 결국 '모든 있음'의 "첫 번째 바탕"으로서의 '신'에 도달함으로써 저 요구를 완수한다. 31)
헤겔의 형이상학에서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론적 갈라-놓기'는 어떻게 수행되는가? 그것은 이미 그의 형이상학이 "존재학(론)"이자 동시에 "신학(론)이라는, 다시 말해, 그의 형이상학의 얼개가 "존재(있음)-신-논리학"에 의해 짜여져 있다는 사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헤겔의 형이상학은 '있는 것과 있음'을 로고스의 관점에서 즉 바탕의 관점에서 갈라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갈라-놓기'는, 로고스로서 이해된 '있음'의 요구에 의해, 헤겔로 하여금 '있음'의 바탕 즉 바탕의 바탕을 찾게끔 만들었다. 이제 있음은 그것의 바탕의 관점에서 '가장 높이 있는 것'으로서의 신과 갈라놓인다. 이때의 '갈라놓임'은 바탕지음'의 관련을 말한다. 즉 '있음'은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을 바탕지음으로써 '있는 것'과 갈라놓이고, '있는 것'은 '있음의 빔과 가득함'을 바탕지음으로써 '있음'과 갈라놓인다. 헤겔은 이렇게 '있는 것과 있음'을 갈라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둘을, 그것들 사이의 '바탕지음'의 관점에서 매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존재론적 갈라-놓기'와 '날라-내기(Austrag)'
우리는 플라톤과 헤겔의 "존재론"에서 '있는 것과 있음'이 어떠한 방식으로 '갈라-놓이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있는 것'과 있음은 때로는 엄격히 갈라놓이다가도, 그 둘의 위치가 어느 순간 뒤바뀌기도 한다. 그것은 플라톤과 헤겔이 '있음과 있는 것'의 '사이'의 '가름'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있는 것'이 아무리 많은 '있음의 방식들'과 아무리 오랜 '시간적 지속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손치더라도, 그것은 결코 '있음'이 아니다. 반면 있음이 아무리 '모든 있는 것'의 바탕으로서 이해된다 해도, 있음은 결코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한, 엄격히 말하자면, '있음'과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들 각각에게 적합한 낱말들로써 말해야 한다. 예컨대 "겨울은 슬픈 영혼을 가진 자들의 안식처이다"와 같은 말은, 이 말이 비록 글로는 겨울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겨울에 대한 말이 결코 아니다. 그 말은 안식의 의미를 표현할 길이 없어 겨울에? 빗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사정에 처해 있다. 만일 우리가 "있음의 뜻하는 바"를 뜻매김하려 한다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있는 것'에 빗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있는 것'에 빗대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음'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은 오직 "있음"이라는 낱말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있음'을 보여 줄 수도, 만지게 해 줄 수도, 맛보게 해 줄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있음'을 만나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관해 말한다. 이렇게 우리들의 삶의 어디에서나 그리고 언제나 만나지는 '있음'은 그때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뜻한다. 즉 우리에게 가리킴을 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머니의 살아계심의 가리킴에 따라 즉 그 뜻하는 바에 따라 효도를 하거나 잊어 버리거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있음이, 서양의 형이상학의 전통에서처럼, 로고스(바탕)로서 드러났다면, 즉 있음이 로고스에 빗대어져 가리키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또 이때 '있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있음이 자신을 로고스로서 나타내 온 서양의 역사 속에서 '존재론적 갈라-놓기'는 어떻게 수행되었고, 그것의 유래는 어디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앞서 플라톤과 헤겔의 "존재론적 갈라-놓기"를 간략히 분석할 때 이미 어느 정도는 대답된 셈이다. 우리는 이제 '영롱이의 있음'이라는 보기를 통해 이러한 문제 전체를 새롭게, 그러나 이미 하이데거에 의해 철저히 수행된 방식으로 던져나갈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있음의 바탕'을 가져야만 한다. 만일 그것이 자신의 있음의 바탕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있음의 바탕 없이 있는 것'이라는 모순을 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있는 것'은 반드시 그 '있음의 바탕'을 가져야만 한다. 만일 모든 것이 그 자신의 '바탕'을 가져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동일한 근거에 바탕하여, '있음' 또한 그 자신의 바탕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탕"이리는 낱말이 '있는 것'과 '있음' 모두와 관련하여 쓰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그 낱말이 그때마다 어떠한 뜻을 갖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예컨대 저기 풀을 뜯고 있는 복제 송아지로서의 영롱이가 있다면, 그것의 바탕은, 위에서 방금 말해진 도식에 따라 말해보자면, '있음'인 셈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영롱이의 '있음'이 영롱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롱이가 유전공학적 기술에 바탕해 복제된 송아지라면, 영롱이의 바탕은 저 기술이 아닌가? 그런데 "영롱이"는, 한국에서 복제에 성공한 송아지에게 붙여진 이름이며, "영롱이"의 있음을 위해서는 영롱이를 복제할 수 있는 기술, 수많은 실험 기기들, 연구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름으로 불릴 '영롱이 자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영롱이의 탄생 과정에 얽힌 모든 것들을 통틀어 '영롱이의 바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롱이자체의 유전자 구조'와 뼈와 살과 피 등도, 더 나아가 영롱이가 먹는 사료와 물, 영롱이가 딛고 선 그 땅과 마시는 공기, 지구와 그 중력, 그리고 우주 전체 등도 영롱이의 바탕으로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있는 것들'은, '있는 것'으로서의 영롱이의 바탕들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결코 '있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있음'이 영롱이의 바탕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영롱이는 있다. '영롱이'의 있음을 위해서는 수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영롱이는 이 모든 것들과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관계-맺고-있음'의 수많은 다양성을 잊은 채 영롱이를 오직 "복제되어 있음"으로서만 못박으려 한다. 그런데 만일 영롱이가 없다면, 즉 복제되어 있는 송아지가 하나도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송아지의 복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만일 영롱이에게 '복제되어 있음'이라는 것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앞서 열거된 저 모든 바탕들이 어떻게 영롱이의 바탕일 수 있겠는가? '있는 것들'로서의 바탕들은, 그것들이 영롱이의 바탕일 수 있기 위해, 영롱이의 있음을 전제해야만 하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영롱이의 있음은 바탕들의 바탕이라고 말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영롱이의 있음에는 '복제되어 있음'만이 속하는가? 아니면 수많은 다른 '있음들'도 함께 속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리고 이 있음들이 '서로 다른 것들'이라면,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그것들을 모두 한결같이 "있음"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다른 '있음들'은, 말하자면, '있음들'의 유(類)로서 간주될 수 있을 어떤 '보편 있음'의 '종(種)들'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있음'은, 그것이 비록 다양한 '있음들'로 나눠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단일한 것'은 아닌가? 32) 만일 '있음'이 단일하다면, 우리는 그 단일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런데 있음과, 그것이 갖는 다양한 성격들 내지 방식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영롱이가 유전공학의 눈부신 성과물로서 있을 때와 아이들의 귀여운 친구로서 있을 때는 그 '있음의 됨됨이와 방식'에 큰 차이가 난다. 예컨대 영롱이의 있음은, 학문적 대상으로서는, "눈앞에 있음"의 방식을 갖겠지만, 놀이의 친구로서는, "손안에 있음"의 방식을 가질 것이다. 그 각각의 '있음의 방식'은 또한 각각의 '있음의 됨됨이' 즉 "눈앞-됨됨이"와 "손안-됨됨이"에 상응한다. 33) 우리는 영롱이로부터 그 있음의 다양한 됨됨이들과 방식들을 캐낼 수도 있고, 반대로 덧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있음의 됨됨이들과 방식'을 영롱이에게 속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해도, 34) 그렇다고 그로써 영롱이의 '있음 자체'가 여럿으로 나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롱이의 있음은 하나뿐이다. 영롱이의 '있음 자체'는 동일한 것이다. 영롱이의 이러한 하나뿐인, 동일한 그리고 단일한 '있음 그 자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즉 다양한 뜻으로 그리고 다양한 됨됨이에서 즉 다양한 규정성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있음의 다양한 됨됨이들과 방식들을 그것들에 걸맞는 범주들로써 각기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있음 그 자체'는, "규정"이 "주어와 술어의 결합"으로서 이해되는 한, 결코 규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있음에게 결합시킬 술어 즉 '유-개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있음을 경험할 수 있고, 있음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있음 경험하기'와 '있음 말하기'는 '있는 것'에 대한 것으로 전락되기 쉽다.
만일 영롱이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들에게 나타났다면, 그것의 있음은 우리들에게 어떻게든 이미 앞서 열어 밝혀져 있어야만 한다. 반대로 영롱이의 있음이 발견되거나 그것에 대해 말해질 수 있으려면, '있는 것'으로서의 영롱이가 우리들에게 어떻게든 개방되어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있는 것'으로서의 영롱이와 그 단일함에서의 '있음'과, 그 있음의 다양한 '됨됨이와 방식'을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곧 "존재론적 갈라-놓기"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갈라놓기의 수행에 따라, 있는 것과 있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갈라놓이게 된다.
있음과 '있는 것'의 '갈라-놓임'이 뜻하는 바는 우선, 있음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은 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있음과 '있는 것'은 분명 서로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둘은 분명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 둘은 어떻게든 '함께 속해야' 한다. '있음' 없이는 '있는 것'도 가능하지 않고, '있는 것' 없이는 '있음'도 공허하다. '있는 것'과 있음의 '사이'에는 '갈라-놓임'과 '함께-속함'이 일어난다. 이러한 '일어남'의 영역 즉 '사이 그 자체'의 영역은 -- 여기서는 다룰 수 없지만 -- '있음과 생각함의 동일성'의 '근원'으로서의 '에어-아이크니스(Er-eignis)'를 일컫는다. 35) 만일 '있음'과 '있는 것' 이 이 '사이의 영역' 속에서 "각기 저마다의 방식으로 '갈라-놓임'에서부터 나타난다면," 36) 있음이 '있는 것'으로부터 갈라놓이는 방식과 '있는 것'이 있음으로부터 갈라놓이는 방식은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만일 이때 있음과 '있는 것'이 또한 서로의 멂을 멀리하는 방식으로 즉 서로 가까워지는 방식으로도 나타나야만 한다면,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있음과 '있는 것'이 '서로 갈라놓인 것'으로서 나타남과 동시에 '서로 함께 속하는 가까운 것'으로서 나타난다면, 우리는 도대체 이때의 '갈라-놓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있는 것'과 있음의 가까움과 멂을 "있음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있는 것의 있음을 일컫고....있는 것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있음의 있는 것을 일컫는다"고 말한다. 37)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의 소유격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하이데거의 이 말이 뜻하는 바를 풀이해 봄으로써 "존재론적 갈라-놓기"의 "본질 유래"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있음은 있는 것의 있음이다"에서의 '있음'은, '있음'이 '있는 것'없이는 불가능한 한, 그 자신(있음)으로서 있어 오기 위해, '있는 것'에게로 끌리는, 38) 즉 '있는 것'에게로 관여해 가는, 다시 말해, '있는 것'에게로 넘어가는 '있음'을 말한다. 물론 있음은, 그것이 '있는 것'에게로 넘어가기 위해, 넘어가기에 앞서 먼저 '있는 것'으로부터 떠나 있어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있는 것'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미 '있음'이 앞서 도달해 있다. 39) 있음은, 그것이 '있는 것'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에만, '있는 것'으로부터 캐내질 수도 있고, 또 '있는 것'으로부터 빠져 나갈 수도 있다. 있음은, 우리가 이리저리 눈을 돌릴 때,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와 '있는 것들'보다 더 먼저 단일하게 밝혀져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있는 것들'의 있음은, 우리들이 그것들에게로 눈길을 돌리기도 전에 우리들에게 앞서 열려져 있다. 아니 있음은, '있는 것'이 그 자리에 없을 때에도 발견된다. 40) 있음은, 우리가 그리로 향하는 모든 곳에서 순간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그리로 향하기에 앞서서 우리에게 트여 있다. 우리의 그리로 향함은, 이런 의미에서, 있음에 의한 끌림의 결과이다. 물론 있음은 그것의 '빠져 나감'을 통해서도 우리를 끌 수 있다. 이렇게 어떻게든 우리들의 눈길이 닿을 수 있는 '모든 있는 것 그 자체'에는 이미 그리고 앞서 저 '단일한 있음'이 넘어와 있다.
반면 '있는 것'은 '있음'의 이러한 넘어옴을 통해 우리들에게 비로소 나타난다. 물론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에게 나타나기 전부터 존재했을 수 있고, 또 그것은, 그것이 우리들에게서 잊혀진 뒤에도 여전히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있는 것'은, '있음'이 그것(있는 것) 자체에게로 넘어오지 않는 한, 그래서 그것(있는 것)이 '있음' 속에 간직되어 머물지 못하는 한, 우리들에게는 결코 '있는 것'으로서 나타날 수 없다.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은, 있음의 넘어옴을 통해, "그것(있는 것) 자체로부터 비은폐된 것"으로서 다가온 것이다. 41) "비은폐된다"는 것은 "은폐로부터의 드러남"을 말한다. '있는 것'이 비은폐된다는 것은 그것이 '있음'의 비은폐성 속에 도달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있는 것'이, 있음의 비은폐성 속으로 다다른다는 것은 '있는 것'이 있음의 비은폐성 속에 간직된다는 것, 즉 "비은폐성의 열린 영역"속으로 "들어와 그 속에 머무른다는 것" 42) 을 말한다.
'있음'의, '있는 것'에게로의 넘어옴은 '있는 것'의 창조 또는 제작과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있는 것'의, '있음'의 비은폐성 속으로의 다다름은 또한 있음의 창작 내지 산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넘어옴'과 '다다름'은 각기의 "비은폐성(진리)"의 양식을 말한다. 있음의 넘어옴은 있음이 자기 자신을 탈은폐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숨겨진 상태로부터 빼내는 것, 말하자면, 숨겨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때 있음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있음은 자신을 숨긴 채 그 숨김을 벗어버린다. 있음은 심연의 어둠으로부터 솟아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있음은 저 어둠 속에 여전히 자신을 숨긴다. 있음은 그 곳에 간직되어 인간의 어떠한 공격으로부터도 거리를 취하고 있다. 반면 '있는 것'의 다다름은 있는 것이, 그때마다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는 즉 탈은폐하는 있음 속으로 안전하게 피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으로부터의 안전을 말하는가? 저 있음마저도 빨아들이는 무의 심연으로부터, '있는 것'은, 그것이 '있는 것'으로서 계속해서 가능하려면,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는 없음의 손아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쳐야만 한다. 있음의 비은폐성의 열린 영역은 바로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이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피난처인 셈이다.
우리는 "있는 것의 있음"과 "있음의 있는 것"을, 하이데거를 따라, "있음의, '있는 것'에게로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있음의 비은폐성 속으로의 다다름"으로서 풀이하였다. 이러한 풀이를 통해 우리는 "있는 것과 있음"의 "서로-갈라-놓이면서 동시에 서로-함께 -속하는 됨됨이"를 보았다. 그렇다면 "갈라-놓임"과 "함께-속함"의 "단일성" 즉 "사이"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그곳이 바로 "존재론적 갈라-놓기"가 비롯되어 나온 "본질 유래"는 아닌가? 그런데 저 "사이"는, 그것이 "가름과 함께함"을 동시에 가능케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능케 해야 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됨됨이를 가져야만 하는가? 그것은 '넘어옴과 다다름'이 서로 뒤엉켜 서로의 방식으로 관계하는 전체 영역의 얼개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43) 우리는 이 얼개의 '짜임-새'를 어떻게 밝혀 낼 수 있는가? 그것은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있음이 '있는 것'에게로 넘어온다는 것은 '있음'이 "자신을 '있는 것' 속으로 탈은폐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탈은폐(Entbergen)"를, "어떤 것을 그것의 숨김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함" 또는 "숨김의 덮개를 벗음" 즉 "숨김으로부터의 나타남 내지 솟아오름"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있음'의 탈은폐는 결코 '있음의 은폐'의 완전한 제거를 뜻하지 않는다. 그렇기커녕 있음의 탈은폐는 오히려 저 은폐의 손아귀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은폐로부터의 끊임없는 탈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은폐"는 "숨김"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숨음'은, '자기가 자신을 숨기는 것'으로서, '피함' 즉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머무름'을 뜻한다. 그렇다면 "탈-은폐"는 "숨김-벗기기"로서 이해될 수 있다. "벗다"는, "벗-"의 낱말뜻에 따르자면, "불타 오르게 하다" 즉 "불빛을 내다"이다. 이러한 뜻매김에서의 "숨김-벗기기"는 "숨김을 불태우다", "숨김을 태워 빛을내다"로서 뜻새겨질 수 있다. "숨김[의]-벗김"은, '숨김'이 -- 이때 이것은 벗김 즉 불태움의 연료인 셈이다 -- 지속되는 한에서만, 즉 '숨김'이, 땅 속의 나무뿌리처럼, 속속들이 우거지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숨[김]-벗김"을 "탈-은폐"에 대한 갈말로 쓰고자 한다. 있음의 넘어옴은 있음의'자기-숨-벗김'을 뜻한다. 그렇다면 있음의 넘어옴은 동시에 있음의 숨음이다. 즉 있음이 '있는 것'에게로 넘어올 수 있으려면, 그것은 자신의 검질긴 '숨음에로의 경향'을 뿌리쳐야만 한다.
반면 '있는 것'의 다다름은 '있는 것'이 자신을, '있음의 숨겨지지 않음' 속으로 숨긴다는 것을 말한다. '있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넘어온 있음' 속으로 숨어든다. '있는 것'은, 그것이 '있는 것'으로서 지속할 수 있으려면, '있음'의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있는? 것'이 '있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다. 모든 있는 것은 저마다 나름의 '있음의 때'를 갖는다. '있는 것'은 그 때가 지나면, '있음'의 손에서 '없음'에게로 넘겨진다. '있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저마다에게 주어진 '있음의 때의 동안'만을 머무를 수 있다. '있는 것'은, "저마다의 때를 머무르는 것"이다. 44) 다다름으로서의 숨김은 '없음의 지배'로부터 도피하여 '머무름의 때를 이어감'이다.
있음의 '숨-벗기면서 넘어옴'과 '있는 것'의 '숨기면서 다다름'은 이러한 '숨-벗김'과 '숨김'이 일어날 때에만 가능하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일어남'을 독일낱말 "아우스-트락(Austrag)"으로서 일컫는다. 그렇다면 이 낱말이 가리키는 곳이 바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이 낱말에 대한 우리말 옮김말 "내어-나름"의 의미를 되새김해 본 뒤 그것에 대한 새로운 새김말을 제시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 글의 목적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아우스-트락"에 대한, 가장 널리 쓰이는 번역어는 "내어-나름"이다. 그것은, '있음'과 '있는 것'을 서로로부터 서로에게로 내어서 나른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내다"는 아마도 "밖으로 나가게 하다"의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어-나름"은 "밖으로 나름"이 된다. "내어-나름"이라는 낱말이 지시하는 방향성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숨-벗기는 넘어옴과 자신을 숨기는 다다름의 내어-나름"이라는 말은 넘어옴과 다다름을 서로의 "안쪽"으로부터 서로의 "바깥으로" 나른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런데 '넘어옴'이 언제나 '있는 것에게로의 넘어옴'이고, '다다름'은 언제나 '있음에게로의 다다름'이라면, 즉 넘어옴과 다다름이 '동일한 것'의 영역에 함께 속하는 것이라면 , 우리는 저 "안쪽"과 "바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내어-나름"을 이러한 의미로 쓰고자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번역어는 우리들의 이해와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또 "내어-나름"은, 그것이 비록 넘어옴과 다다름의 연관의 관계를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 관계의 지속성 내지 관통성 즉 역사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다. 즉 "밖으로 나름"으로서의 "내어-나름"은 서양 형이상학의 "처음(시원)부터 그 끝(완성)까지 나름"이라는, '있음의 보내져 옴(존재 역운)'의 역사성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밖으로-나름"으로서의 "내어-나름"은, '있음의 탈-은폐하는 넘어옴'에서 일어나는 은폐 즉 숨김의 사건을 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있는 것의 자기를 숨기는 다다름'에서 일어나는 숨김의 사건 또한 놓치기 쉽다.
'있음과 있는 것'의 '사이-나뉨' 즉 '갈라-놓임'은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어느 때는 나타났다가, 어느 때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첫머리부터 그 끝마침까지(vom Anfang bis zur Vollendung)를 두루 꿰뚫고 있는 것, 아니 형이상학 자체 즉 '자연-너머-학(메타-피직)'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자연-학'과, 그것을 넘어서는 '자연-너머-학'이 가능하려면, 그 두 학문이 대상이 서로 달라야 할 것이다. 아니 두 대상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 두 대상 사이에 어떤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은 "자연에 대한 학문"에서 그리고 다른 대상은 "자연-너머에 대한 학문"에서 탐구될 수 있었다. 두 학문 사이의 연관 관계를 말해 주는 말이 바로 "너머"이다. '자연-학'과 '자연-너머-학'의 '사이'는 '이쪽'과 '이쪽-너머'로 갈라놓인다. 서양의 '자연-너머-학(형이상-학)'은 바로 이러한 '갈림' 내지 '갈라-놓임'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갈라-놓임"의 "본질 유래"로서 명명된 "아우스-트릭"을, "내어-나름"을 뒤집어 새긴 말 즉 "날라-냄"으로서 옮기고자 한다. 이러한 낱말의 자리바꿈을 통해 우리는 사태를 보다 정확히 보이게 해 줄 수 있다. 우선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조동사로서의 "-내다"이다. 이것은 "밖으로 가져가다"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져가다"를 뜻한다. 따라서 "날라-냄"은, 그 나름의 방향이 정해져 있는 한, 그 방향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나름"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우리는 "날라-냄"의 뜻하는 바를 밝히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 것이다.
'있음'이 자신을 '있는 것'에게로 숨-벗기면서(탈은폐하면서) 넘어올 때, '있는 것'은 자신을 '있음'의 '숨겨지지 않음' 속으로 숨기면서 다다른다. 서양의 '자연-너머-학(메타-피직)'의 역사 속에서 '있음'은, 하이데거를 따르자면, "피지스, 로고스, 헨, 이데아, 에네르게이아...주체성...힘에의 의지..." 등으로서 넘어왔다. 45) 이 낱말들은 모두 '있음의 낱말'이다. 예컨대 만일 '있음'이 로고스 즉 바탕으로서 넘어왔다면, '있는 것'은, 그것이 '있는 것'으로 자신을 내보일 수 있기 위해, 그 바탕 속으로 자신을 숨겨 다다라야만, 즉 그 바탕에 걸맞는 모습을 갖춰야만 할 것이고, '있는 것'이 이렇게 자신을 바탕으로서의 '있음' 속으로만 숨기며 나타나게 되면, '있는 것'은 다시금 그 자신의 측면에서 '있음'에게 자신(있는 것)의 바탕으로서만 나타나도록 요구하게 된다. 바탕으로서 넘어온 있음은 '바탕지워져 있는 것'만을 '있는 것'으로서 허용하고, 이러한 '있는 것'은 그것의 측면에서 다시금 '바탕지우는 있음'만을 '있음'으로서 받아들인다. 46) 이렇게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은 "서로 교대의 방식으로 서로 안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47) '있음과 있는 것'의 '갈라-놓기'는 넘어옴과 다다름의 '서로 반영됨'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영됨은 넘어옴과 다다름이 서로를 중심으로 맴을 도는 것과 같다.
그런데 위에서 뽑아온 '있음의 낱말들'은, 그것들이 그 당시의 시대에서 일어난 있음의 넘어옴을 규정함으로써, 동시에 '있는 것'의 다다름 또한 앞서 한계지우고 있다. 즉 저 있음의 낱말들은 자체 속에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각각의 낱말들은, 그것들에 상응하는 각 시대 속에서,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의 갈라-놓임의 방식을 건립하는 것들이다. 저 낱말들은 넘어옴과 다다름의 역사, 다시 말해, 있음의 역사를 말해 준다. '있음'의 역사가 가능하려면, 있음의 넘어옴이 시대마다 달라야 하고, 그러한 다름에 대한 시대마다의 다른 '새김-낱말들'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낱말들의 역사적 순서가 '있음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낱말들을 통해 각기 다르게 새김된 '있음'이 사실은 '동일한 있음'이어야한다. '있음'이 비록 시대마다 다르게 넘어오고 또 다르게 새김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있음의 동일성 속에는 다양성 내지 차이성 즉 '갈라-놓임'이 속해야 한다. '동일한 있음 그 자체'는 '자신'을 시대마다 다르게 숨-벗기며(탈은폐하며) '있는 것'에게로 넘어오고, '있는 것'은 그러한 넘어옴에 상응하여 다다른다. 이러한 넘어옴과 다다름은 '자연-너머-학(메타-피직)'의 전 역사 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는, 위에서 말해진, 넘어옴과 다다름의 역사적 맴돌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넘어옴과 다다름의 '날라-냄'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날라-냄'을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론적 갈라-놓기"의 본질 유래라고 말할 수 있다. 48)
넘어옴에서도 '있음과 있는 것'의 "갈라-놓임과 함께-속함"의 사건이 일어나고, 다다름에서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난다. 즉 넘어옴과 다다름은 결코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건으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날라내진다. 누구에 의해? 사태자체에 의해, 그리고 이 사태 자체가 언제나 '생각함(사유)'의 사태인 한, '생각함'에 의해, 생각함은 넘어옴과 다다름을 그 처음으로부터 끝마침까지 날라내는 것이다.
끝맺기
'날라-내기'는 있음이 '있는 것'에게로 넘어올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자, '있는 것'을 있음 속으로 다다르게 해 주는 것이다. '날라-내기'는 넘어옴과 다가옴을, 각기의 방향성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날라-줌'이다. 이때 넘어옴과 다가옴은 마치 번갈아 맴돌듯이 관계맺으므로 '날라-내기'는 넘어옴과 다가옴의 '갈마-날라-냄'이라 할 수 있다. 있음은 '있는 것'에게로의 넘어옴을 통해 소실되거나 줄어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있음의 심연'을 다 길어내지도, 아니 그 속을 다 들여다 볼 수도 없기 때문에도 알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양의 '자연-너머-학(메타-피직)'에서처럼,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을 날라-내는 한, 있음의 역사적 넘어옴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넘어옴과 다다름'의 역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예감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을 날라내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에는 어디에서나 오직 '있는 것'만이 그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넘어온 '있음'은 어떠한 방식으로 또 어떠한 낱말로써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오늘날의 '있음'은, '있는 것'만이 외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세계 한가운데서 침묵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 있음의 부름은 '있는 것'의 외침이 잦아들 때에만 들리지 않겠는가? '있음'이 떠나버리고 침묵하는 그곳에서 '있는 것'은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오늘날 급부상하고 있는 가상의 현실만이, 그것도 인간의 욕망의 극대화를 위해 마음대로 꾸며진 모사품들만이 판을 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서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날라-내기'는 어떠한 사정에 처해 있는가? 이 문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생각하미(생각하는 사람)의 문제거리가 아닐 수 없다.
--------------------------------------------------------------------------------
각 주
1) 여기서 "형이상-학"이란 말은 "메타피직"의 옮김말이다. "옮기다"는 낱말은, 말과 관련해서는, 남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다시 들려 주거나, 아니면 한 나라의 말을 다른 나라의 말로 바꾸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이때 옮겨지는 것은, 비록 그것의 자리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그리고 한 나라의 말에서 다른 나라의 말에로 바뀌었을지라도, 그것 자체로는 바뀌지 않아야 한다."메타피직"이라는 그리스말은 "메타"와 "피직"의 "붙임말"이다. "피직" 또는 "피지카"는 "피지스에 대한 학문" 즉 "자연-학"이라 옮겨질 수 있다. "메타"는, 낱말적으로는, "다음"의 뜻이고, 문맥적 내지 사태적으로는, "너머"의 뜻이다. 따라서 "메타-피직"은, 낱말적으로는, "자연-학의 다음"이라 할 수 있고, 사태적으로는, "자연 너머에 대한 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형이상-학"에서의 "형(形)"이란 말은, 그것이 비록 "형이하(形而下)"라는 낱말과 함께 이해되어야한다 해도, "자연(自然)"이라는 말과 결코 같을 수 없다. "메타-피직"이 피지스 즉 자연과 관련되어 성립되는 학문인 한, 우리는 그것을 "자연"이라는 낱말과 연관지어서도 옮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관에서 "메타-피직"을, 한자를 써서는, "초(超)-자연-학"이라 옮길 수 있을 것이고, 정음(한글)을 써서는, "자연-너머[에 대한]-학"이라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초"나 "너머"는 우선은 그 방향성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낱말들은 이쪽과 저쪽 사이의 "절대적 단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기커녕 저 낱말들에 의해 가름된 두 영역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관계"가 놓여 있다. 즉 "초"나 "너머"는 "자연"으로부터 그것의 근거에로 그리고 그 근거로부터 다시 지연에로 "넘나드는 방향성"을 뜻한다. "자연-너머-학"은 "자연-학"을 무너뜨리기커녕 오히려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자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그것의 근거와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메타-피직"을, "자연"과 "자연 너머"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학문으로서 못박아 자리매김하는 것은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차이"로서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앞으로의 우리들의 이야기에도 매우 중요하다. 서양에서 "존재론"이 역사적으로 "자연-너머-학"으로서 이해되어 왔다는 것은, 서양 사람들에게는 존재의 "자리"가 언제나 "자연의 너머"에 놓여 왔다는 것, 바꿔 말해, "메타-피직"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존재론적 차이"가담겨져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메타-피직"의 역사 속에서 "존재론적 차이"의 문제에 대한 시대적 또는 철학자별 해결책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메타-피직" 즉 "자연-너머-학"은, "만일 존재가 존재자의 "너머"에 놓이는 것이라면,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다시 말해,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에 대한 탐구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을 넘어설 수 없다면, 아니 우리에게 자연을 넘어서도록 손짓하는 것이 없었다면, 그리고 우리가 자연을 넘어선 그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면, 또 우리가 그 너머로부터 다시금 출발점에로 즉 자연에로 되돌아올 수 없다면, "자연-너머-학"은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물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묻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길을, 우리들 자신은 물론 자연과, 그것의 너머까지 아우르는 전체에로 향하는 셈이다. 우리는 "메타-피직"이라는 말 속에서 "존재론적 차이"의 의미를 들을 수 있다.
2)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시도를 "넌센스" 또는 "어처구니없는 잠꼬대"로 간주한다. 『불안의 개념』(이명성 옮김, 홍신문화사) 63 쪽 참고. "만약 누군가가, 누구에게나 3.375 인치의 죄성이 있다드니, 혹은 랑그도크에서는 불과 2.25밖에 없는데, 브르타뉴에서는 3.875나 있다는 등등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잠꼬대일 것이다."
3) 그러나 이러한 '값-매김'은 사람들의 '계산 착오'이다. 그것도 '전혀 아무런 승산이 없는데도 물불 못 가리고 마구 뛰어든다'는 의미에서의 계산 착오이다. 사람들은 오늘날 모든 것을 계산 가능성의 차원에서만 평가하려 한다. 삶의 영역에서 모든 것은 돈으로 뒤바뀌고 만다. 이제는 신마저도 "계산대" 위에 놓이게 될 운명에 처해 있다.
4) 예컨대 공기의 있음과 사람의 있음은 그 '있음의 방식'이 다르다. 공기는 숨쉴 수 있는 것으로서, 바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것 등으로서 있다. 공기는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신을 믿을 수도 없다. 반면 사람은 삶을 살아나간다. 사람은 공기를 숨쉬면서, 바람을 느끼면서, 보이지 않는 공기를 연구하면서 있다. 하이데거를 따라 말해 보자면, 공기의 '있음의 방식'은 '손안에 있음'이거나 '눈앞에 있음' 또는 '사물적으로 있음'이라 말해질 수 있고, 사람의 '있음의 방식'은 '밖으로 나가 서 있음' 즉 '실존(實存, Existenz)'이라 명명된다. 공기와 물은 그 있음의 '방식'이 같지만, 공기와, 사람의 있음을 규정해 주는 것으로서의 역사(歷史)는 그 방식이 다르다. 이처럼, "다름과 같음"은 '있음의 방식'과 관련해서는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만일 "다름과 같음"을 '있는 것의 유(類)'로서가 아니라 '있음'에 대한 규정으로서 뜻매김하려 한다면, 그것은 '있음 자체'의 성격 내지 구조에 바탕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만일 "다툼"이라는 낱말이 유일무이한 것으로서의 '있음'에 대한 규정어로서 쓰일 수 있으려면, 그 낱말은 새로운 뜻매김을 얻어야 할 것이다. 플라은"같음"을 "자기 자신과의 같음"이라는 의미의 "자기 동일성"으로서 그리고 "다름"을 "그 자신이 아닌 것과의 다름"으로서 뜻매김한바 있다(『소피스테스』). 이러한 뜻의 "같음과 다름"은 얼마든지 '있음'에 대한 규정어로서 쓰일 수 있다. '있음'은 그 자신과는 '같은 것'이지만("동일성의 문제"),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서의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차이성의 문제" 또는 "존재론적 차이의 문제"). 이때 우리가 여기서 다루지 못하는 다른 문제 즉 "동일성의 문제"는 '있음'이 '그 자신'일 수 있기 위해 '그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지의 여부이다. 사실 "존재론적 차이"가 이야기되기 위해서는 먼저 '있음'의 '자기 동일성' 즉 '있음'의 '그 자신과의 같음'이 받아들여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있음'의 '그 자신과의 같음(자기 동일성)'은 그 자체로서 또는 저 홀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있음'은, 그것이 언제나 '있는 것의 있음'이라는 사실을 제쳐 놓는다 해도, 그것이 우리들에게 생각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만일 '있음'이 그 누구에 의해서도 생각될 수 없다면,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있음'은, '있는 것'과는 달리, 저 홀로는 있을 수 없다. 있음'은 언제나 사람의 생각함(思惟)을 필요로 한다. 현상학에서의 "지향성"을 생각해 보라! 있음과 생각함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다. '자기 자신'일 수 있기 위해 생각함을 필요로 하는 '있음'은 언제나 또한 '있는 것의 있음'이다. 이 말은, '있는 것과 있음 사이의 다름'으로서의 '존재론적 차이'의 문제에는, '있음의 그 자신과의 같음(존재의 자기 동일성)'의 문제 즉 '있음이 언제나 생각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의 문제가 함께 얽혀 들어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만 "차이의 문제"만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5) A.Rosales, 『초월과 차이(Tranzendenz und Differenz)』, Martinus Nijhoff/Den Haag, 250 쪽 참고. 여기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디페렌츠" 속에 "carry(영어), tragen(독일어), 나르다"는 낱말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디페렌츠"의 이러한 타동사적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자동(自動)"이 "스스로 움직임"을 뜻한다면, "타동(他動)"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짐" 또는 "다른 것을 움직임"을 말한다. "트란시티브(Transitiv, 타동사)"는 "통과하다, 넘어가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디페렌츠"는 "어떤 것을 어디로부터 어디에로 움직이게 하다 또는 나르다"를 말하게 된다. 이 '어디'에 대한 규정에 의해 '디페렌츠'의 다양성이 주어진다. 그것은 초월(넘어섬), 지양(들어올림), 분리(나누어 떼냄), 종합(하나로 모음) 등일 수 있다.
6)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1018 a 12-13 참고.
7) 예컨대 "글씀"과 "글쓰기"는 그 느낌이 다르다. "글쓰기"는 "글씀"에 비해 그 자체의 독립성 내지, 다른 것들, 말하자면, 읽거나 말하기 등과 구별되는 느낌을 준다. "갈라-놓기"는 "갈라-놓음"에 비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태를 좀더 한정해 주는 듯한 감이 있다.
8) "온의 로고스"로서의 "온톨로기"는, 여기서의 '온'의 이중적 의미를 고려해 말한다면, '있는 것'에 대한 '로고스'이자 동시에 '있음'에 대한 '로고스'이다. 그렇다면 로고스(logos)는 '있는 것과 있음 모두'와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로고스"는 무엇보다도 "말"이라고 옮겨질 수 있다. 말에는 '말법(준법)'이 있다. 말과 관계하는 모든 것은 이 말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말을 통해 만나지는 것들 즉 있는 것과 그것의 있음은 말법에 의해 규정되어 주어진다. 말에 의해 규정된 것들은 말의 흐름 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규정된 것들을, 말이 말해 주는 방식대로 만난다. 그렇다면 '온톨로기'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말의 가능성에 의해 한계지워진다. '온톨로기'는, 우리가 어떠한 말로써 '있는 것과 있음'을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있는 것과 있음'의 시대적 역사적 변화가능성에 따라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말하기 나름이다"고 말한다. '있는 것과 있음' 또한 '말하기'에 따라 상이하게 이해될 수도 있고, 반대로 서로 다른 '말하기'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이 말해질 수도 있다. 강조해 두고 싶은 바는, '온톨로기'는 '있는 것과 있음'을 서로 다른 방식 내지 서로 다른 말로써 말하면서 동시에 그 둘의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말' 속에 붙잡아 둔다는 점이다.
9) 여기서의 쪽수는 『국가-政體』(박종현 역주, 서광사 1997)에 따른 것이다.
10) 물론 이때 우리는 "아남네시스(상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론적 바탕 위에서 "잠들어 있는 영혼"에게는 "이데아"와 같은 것은 "없는 것"이 된다.
11) 이 말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줄임말이다. "철학자"는 "필로-소포스"의 옮김말이다. 이 그리스말은, 낱말 그대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흔히 "필로-소피아"에 대한 옮김말로서 쓰고 있는 "철학"이라는 본디의 그리스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무엇보다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우선 '필로-소피아'는 '학(學問)'이 아니라 '사랑하기'라는 것이고, 다음으로 "철(哲, 밝음)"이라는 낱말은 "지혜"라는 낱말을 대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필로-소피아"는 "철학"보다는 "지혜-사랑하기"로 옮겨지는 것이 올바르다 하겠다.
12) '있음'을 이렇게 '많음과 오램'으로써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있음'에게 어떤 값 내지 "등급(위계질서)"을 매기는 것으로 치닫는 한, '있음'에 대한 오해에 바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있는 것과 있음의 갈라-놓기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13) M.Heidegger, 「Die onto-theo-logische Verfassung der Metaphysik」in 『동일성과 차이(Identitaet und Differenz)』, Neske, Sechste Auflage 1978.
14) 같은 책, 35 쪽.
15) 같은 책, 32 쪽.
16) G.W.F.Hegel, 『논리학의 학문 Ⅰ(Wissenschaft der Logik Ⅰ, 흔히 "대논리학"이라 번역됨)』, Suhrkamp 1969. 82 쪽.
17) 하이데거, 앞의 책, 33 쪽 참고.
18) 같은 책, 43 쪽.
19) 같은 책, 43 쪽 참고.
20) 같은 책, 49 쪽 참고.
21) 같은 책, 51 쪽 참고.
22) 같은 책, 45 쪽.
23) 같은 책, 48 쪽 참고.
24) 독일말로는 "에아-그륀덴(ergruenden)"과 "베-그륀덴(begruenden)"이다. 둘 다 "바탕(그룬트)"과 관계된다. 앞의 낱말은 어떤 것에서 그것의 '바탕'을 캐내거나 밝힌다는 것을 뜻하고, 뒤의 낱말은 그러한 바탕과 관련된 것, 전체를 그 바탕 위에 세운다는 뜻이다. 그런데 있음은 '표상된 것' 내지 '밑에 놓인 것', '심리적인 것', '물질적인 것', '상상적인 것' 등으로서의 '있는 것'의 바탕일 뿐만 아니라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 즉 어떠한 방식으로든 있는 한에서의 '있는 것'의 바탕이다. 있음은,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이 가능하기 위한 바탕으로서, '있는 것' 그 자체 속에서 어떻게든 캐내지고 밝혀질 수 있다. 이러한 '바탕-캐기' 내지 '바탕-밝히기' -- 이 둘은 모두 "에아-그륀덴"의 옮김말로서 쓰인 것들이다 -- 가 곧 '형이상-학적 생각하기' 즉 '자연에서 자연의 바탕을 자연 너머로까지 캐고 밝히는 생각하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하기는 '모든 있는 것'에 두루 통할 수 있는 바탕을 찾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모든 있는 것'을 밝혀진 그 바탕 위에 체계적으로 세우려 한다. '모든 있는 것을 그 있음의 바탕 위에 세우는 생각하기'는 '변증법적 움직임'을 통해 가장 낮은 것으로부터 가장 높은 것에로 이르는, 즉 '감각적으로 있는 것'으로부터 '이성적으로 있는 것' 즉 '정신으로서 있는 것'에 까지 도달하는, '있는 것들의 온전한 건물(체계)'을 세우려 한다. 이때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서의 신은 있음 그 자체의 완전히 발전된, 그래서 닫혀진, 다시 말해 완성된 단계이다. 즉 신은, 있음이 '가장 가득한 것(있음의 완전한 충만)'이다. '형이상학적 생각하기'는, 있는 것의 '바탕-캐기'로서,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의 바탕 즉 있음에 대한 밝히기이자, 그것은 또한, '모든 있는 것'의 '바탕 위에 세우기'로서, '모든 있는 것들' 사이의 '연관-세우기'이다. 이때 학문 또는 '형이상-학' 또는 논리학은 이러한 '바탕-위에-세우기의 전체적 연관'을 뜻하게 된다.
25) 같은 책, 50 쪽.
26) 같은 책, 48 쪽.
27) 같은 책, 49 쪽 참고.
28) 같은 책, 63 쪽 참고.
29) 독일말은 "그륀덴데 그룬트(gruendender Grund)"이다. 이 말을 "바탕짓는 바탕"이라 옮기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르는 듯싶다. 왜냐하면 "바탕짓는 바탕"은 그 의미상 "바탕으로서의 있음은 있는 것을 바탕짓는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만, "바탕짓다"는, 그것이 비록 타동사이긴 하지만, 그러나 목적어를 따로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한 경우에는 얼마든지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어머니께서 쌀을 밥지으신다"라고 말해서 안 될 이유는 없다. 이때 그 뜻은 "어머니께서 쌀로써 밥을 지으신다"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헤겔은 정신을 글지었다"와 같이 말할 수도 있다. "바탕짓는 바탕"이란 옮김말은, 사태적으로 보자면,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을 바탕짓는, 즉 있는 것에게 그 바탕을 만들어 주는 바탕"으로서 새겨질 수 있다. 이때의 바탕이 있음인 한, 저 말은 "있는 것을 있게끔 해 주는 있음"이란 뜻이 된다.
30) 같은 책, 49 쪽.
31) 같은 책, 51 쪽 참고.
32) F.W. von Herrmann,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찾아서』(신상희 옮김, 한길사 1997), 100쪽, "존재양식의 다양성 및 이 존재양식의 범주들을 고려해볼 경우에, 하이데거는 존재의 감추어진 단일함(das Einfache, 단순함)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단일함이란 다양한 존재양식과 그 양식들의 범주적 의미에 선행하는 것이다." 헤어만은 여기서의 '있음의 단일함'을 '존재 일반'과 같은 의미로 간주한다.
33) 이기상, 구연상, 『"존재와 시간" 용어 해설』(까치), "손안에 있음" 항목 참고.
34) 영롱이 속에는 , 부챗살들이 하나로 포개져 접힌 '주름 부채'처럼, 있음의 수많은 '됨됨이들과 방식들'이 겹겹이 접혀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은 마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요술 항아리"에 비유될 수 있다. 그것은, 그 속에 넣어 둔 것과 똑같은 것을 끊임없이 내주는 항아리이다. 그러나 '있음의 요술 항아리' 속에는 있음만이 들어 있다. 우리는 거기로부터 있음만을 꺼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 항아리로부터 꺼내는 것은 매번 동일한 있음이지만 , 그 있음은 우리에게 밝혀지자마자 어디론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때 우리의 손에 남는 것은 있음이 지나간 흔적들, 즉 그때마다의 '있는 것들'뿐이다. 물론 '있음 그 자체'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35) 하이데거, 같은 책, 26 쪽 참고.
36) 같은 책, 55 쪽.
37) 같은 책, 53 쪽.
38) 이 점은 『예술작품의 근원』(64 쪽/전집판으로는 65 쪽)에서 "예술은 진리의 '작품-속으로-정립'(das Ins-Werk-Setzen der Wahrheit)이다"라는 말과 통한다. 물론 여기서도 진리 즉 예술과 그것의 작품 사이에는 나름의 '갈라-놓임'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있음'은 '있는 것' 속으로 정립되려는 즉 넘어가려는 성향(끌림, Zug)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39) 이 점을 하이데거는 그림 동화에 나오는 "토끼와 고슴도치(두더지)"에 빗대어 잘 말해 주고 있다. 토끼가 달려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이미 고슴도치가 앞서 발견되어 있다. 즉 '있는 것'이 나타나고 발견되는 곳에는 이미 그것의 '있음'이 앞서 열어 밝혀져 있다.
40) 예컨대 아쉬움과 그리움은 그 대표적 형태이다.
41) 같은 책, 56 쪽 참고.
42) 하이데거, 「아낙시만드로스의 말씀(금언, Der Spruch des Anaximander)」in:『숲길들(Holzwege)』(전집 5) 337 쪽. 같은 글 370쪽에서 하이데거는, 그리스낱말 "에이나이(einai, 있다)"와 "에온타(있는)"가 독일말 "안-베젠(das Anwesen, 現前, 다가와-있어-옴)"과 "안-베젠-데스(das Anwesendes, 현전하는 것, 다가와-있어-오는-것)"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이때 '다가[와]-있어-옴' 그 자체는 언제나 '운-페아-보르겐-하이트(Unverborgenheit, 비-은폐-성, 안-숨겨진-됨됨이)'를 "함께 가져온다(bringt...mit)." 그는 '다가-있어-옴'과 '안-숨겨진-됨됨이'를 그 자신과 같은 것(das Selbe, 同一한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있음의 다가옴 내지 나타남 내지 넘어옴은 '숨겨짐으로부터의 벗어남'인 셈이다. 그렇다면 '다가-와-있어-오는-것'으로서의 '있는 것'은 '있음의 숨겨지지 않은 됨됨이 속으로 다가온 것' 즉 '그 속에 머무르는 것' 즉 '이렇게 머무르면서 이쪽 앞으로 가져와진 것' 즉 '나타난 것'이다.
43) 앞의 책, 33 쪽부터 참고.
44) 같은 책, 350 쪽 참고. 독일말로는 "das Je-weilige"이다.
45) 하이데거, 『동일성과 차이』, 58 쪽.
46) 이러한 방식의 요청의 극단적 형태를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게-슈텔(Ge-stell, 닦달, 몰아-세움)"과 "도발적 요청(내놓으라는 요구, Herausforderung)"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술과 전향』(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3) 참고.
47) 같은 책, 62 쪽.
48) 이러한 낱말들은 동일한 사태 영역을 가리키는 다른 낱말들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있음과 있는 것'의 "갈라-놓임(差異, Differenz)"은, '넘어옴과 다다름'의 "사이-나눔(區別, Unter - Schied)"으로서, 그 둘의 '숨-벗기면서'-'숨기는' "날라-냄(Austrag)"이다." 참고.(같은 책, 57 쪽)
--------------------------------------------------------------------------------
이력사항
구연상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퍼온~바둑..! > 놀이 이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협동학습과 그 이론적 기초 (0) | 2008.05.12 |
---|---|
[=] 유아 놀이의 상황적 관찰 및 분석 체계 개발 연구 (0) | 2008.05.12 |
[펌] 놀이의 원리를 활용한 문학 교육의 방법 (0) | 2008.05.06 |
[=] 말놀이와 언어의 주체성 (0) | 2008.05.06 |
[=] 역할놀이... (0) | 2008.05.06 |